교회의 소유권, 운영권

남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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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교회의 소유권, 운영권

연구A 0 3
교회사의 내막은 교리와 신앙의 노선 때문에 수 많은 교파가 생겨 나면서 복잡해 졌다.
진리를 고수하고 주장하려는 것은 옳은 일이지 나쁜 일이 아니다. 깨달음이 달라 충돌하는 것은 복음의 열심이며 충성이므로 장려할 일이지 가리거나 막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교리와 신앙의 노선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충돌과 분리를 지켜 보고 있는 악령은 교회의 왼 쪽으로 잠입한다. 옳은 것을 주장하고 서로 비교하되 서로 인간이므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많은데 이럴 때 두고 보면 결과를 통해 주님이 명확하게 길을 보여 주신다. 그런데 악령은 부추긴다. 급하게 몰아 간다. 가장 열심 있는 인물과 그룹을 부추긴다. 그리고 한 쪽이 필요 이상으로 세게 나가면 상대 쪽에 들어 가서 맞장구를 치게 만든다. 성령의 인도가 양 쪽에 다른 사명을 주시고 다르게 인도할 수도 있는데 악령은 덮어 놓고 인간적 자존심 싸움과 이해관계의 이득을 향하게 마음의 눈을 슬쩍 띄워 준다. 그 다음부터는 오늘까지 역사에 나타난 교회의 잘못 된 분쟁들을 통해 악령을 읽을 수 있다.


공회는 이런 모든 면을 읽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다 고려하고 막기 위해 공회 노선을 선택했다. 개인의 신앙은 개인이, 그리고 교회의 신앙은 각 교회의 교인들이 성경으로만 법을 삼고(1칙), 전원이 찬성하지 않으면 연구 과제로만 두고 지켜 본다(2칙). 그리고 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는 아예 두지를 않는다(3칙). 오늘 우리로서는 이 노선에 충실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가 생겼다면 이 3대 원칙에서 벗어 났다는 뜻이다. 양 쪽이 다 벗어 나도 분쟁이 있지만 둘 중 하나가 벗어 나도 분쟁은 피하지 못한다. 공회는 간디의 무저항주의 이단을 배격한다. 그렇다고 십자군 운동에 나서는 천주교식의 혈육전도 배척한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방어주의를 원론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공회의 방어주의는 세밀하다. 가지라고 주신 것은 양식이므로 지켜 낸다. 주지 않은 것은 포기한다. 이 것을 세분화 한 것이 공회의 소송금지론이다.



공회 내에 옳고 좋게 출발한 교회들이 세월 속에 곳곳에서 다시 교회사적 분쟁을 반복한다. 이 것은 피하지 못한다. 다만 바른 길을 고수하다 불가피하게 당하는 것인가? 영광의 길이다. 혈육전에 교권전인가? 망할 짓이다. 서로가 영광의 분쟁이라 하지만 노곡동처럼 생쇼를 다 하고 자진해서 초토화를 시킨 다음에 아차! 이렇게 되었으나 고신처럼 자존심 때문에 버틴다면 자기중심의 악에 이르는 문제가 된다. 몰라서 그럴 수는 있으나 사전에 연구소를 찾아 와서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총공회 내 일부가 교권에 이권을 위해 철거하는 자작극을 하지 마시라는 명확한 이야기를 듣고 가서도 일을 벌였다. 뒷감당이 현재 진행 되고 있다. 연구소가 운영하는 공회에서는 공회를 대표하여 계약을 한 목사가 부동산 업자 앞에서 갑을의 표시에 기입된 이름이 소유주라면서 공회를 상대로 공회의 기도원을 넘기라고 실명 소송에 나서고 있다. 소송금지원칙에 따라 공회는 당연히 맞서고 있다. 결과는 불신 세상이 판정한다. 불신 세상이라도 바른 편에 서면 느부갓네살처럼 하나님께 자연 은혜를 듬뿍 받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형하듯 옳지 않은 편에 서면 저작권 때문에 최종 판결한 누구처럼 대장동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며 불신자가 봐도 이 사람은 판사가 아니라 돈 받고 판결하는 매매업자로 매도를 당한다. 역사를 알면 신중해 진다. 공회적이 된다. 역사를 모르면 별별 소리를 해도 결국 비공회 반공회 무공회적이 된다.



장례를 친 지 몇 년이 지난 분이 주변에서 개척을 하다 교인들과 충돌이 생겨 교회를 옮기게 되면서 개척 때 연보한 돈을 개인 돈이라고 가져 간 적이 있다. 그 분에게 목적 연보라는 공회의 연보 노선을 적용하면 죄가 되지 않으나 그냥 가져 가면 가룟 유다가 된다고 안내를 드렸다. 개척을 할 때 그 분이 조건 없이 연보를 했다면 교회를 떠날 때 빈손으로 가야 한다. 자기가 연보했다고 자기가 돈을 빼가면 하나님을 상대로 갈취나 사취나 도적하는 것이 된다. 그 교회를 개척할 때 공회 교회를 목적으로 연보한 분이다. 교회에 발생한 분쟁과 교회를 떠나게 된 원인이 교회들의 잘못된 경제관 때문이었다. 교인의 대표는 신도시에 개척한 그 교회가 땅을 구입하고 예배당을 건축한 다음 빚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는 개척 교회가 되고, 그 개척교회는 공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회자는 교회가 이미 자립의 수준을 훨씬 벗어 났으니 더 이상 공회의 지원을 청할 수 없다고 했다. 목회자의 말이 맞았다. 공회의 경제적 자립이란 목회자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정하고, 20평 사무실의 월세와 원룸 사택의 월세와 12인승 차량 유지비가 나오면 자립이다. 교인들은 신도심에 부동산까지 사주고 부채가 없을 때라야 자립이라고 했다. 그렇게 주장한 이들의 훗날은 모르겠으나 공회 밖에 나갔을 것이다. 공회 밖에 나갈 사람이 공회 안에서 주장하는 것은 공회를 자기 입맞대로 만들어 가지는 것이다. 가만히 들어 온 운동이다.

이런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했고 그 때마다 웃어 가면서 그런 목회자도 있다고 했던 분들이 다시 자기 차례가 되자 입장을 돌변하여 같은 식으로 예배당을 점거하고 버틴다. 자기를 돕는 사람은 주일을 지키면 안 된다면서 주일에만 교회를 나오는 사람, 또 교회를 없애는 운동에 핵심이 되어 공회가 흔들리지 않자 대문을 박차고 나간다 해놓고 뒷문으로 툇마루에 앉아 때를 기다리는 사람 등이다.



출발이 옳아도 세월 속에 우리 속에는 가인과 야곱의 두 길이 돋아 난다. 이 것은 교회의 역사가 다하는 날까지 피할 수가 없다. 미리 조심하고 또 일이 생기면 바르게 대처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다. 그 결과 현재까지 가진 것이 지켜 지면 그 것을 가지고 할 일이 있다는 것이고, 지켜 지지 않으면 다시 주시는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 하나님이 결정하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선을 지키게 된다. 꼭 이겨야 한다는 개념이 없고 무조건 넘겨 준다는 망언도 하지 않는다. 현재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만 면밀하게 들여다 본다. 이 곳은 한 때 서부교회와 총공회 전부의 향방을 손에 쥔 적이 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한창 잘 나갈 때 스스로 손을 거두고 연구로 일체 돌아 섰다. 그 것이 죄라고 제명까지 당했다. 제명한 사람들도 그 때를 잊고 싶은 수치스러운 방법까지 동원하며. 제명은 했는데 제명은 아니었다. 제명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그 날 이후 그들은 뒤로는 이 곳을 비판해도 이 곳 앞에만 서면 그 잘 난 사람들이 갑자기 비 맞은 강아지처럼 된다. 이 곳은 환하게 맞아 준다. 그들이 공연히 몸둘 바를 모른다. 가끔 철판을 깐 용맹스러운 사람들은 한 번씩 대문 앞에 사진까지 찍고 간다. 그들의 행색과 지난 날을 거론하면 그 목회마저 문제가 생길까 싶어 그냥 놔 둔다. 이 곳이 활동을 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또 다음 단계를 주셨다. 사명이 다른 것이다. 목사님 생전부터 이 곳은 양성원의 원칙에도 서부교인의 원칙에도 총공회에도 거의 모든 면에서 별도의 사명을 받았다. 그래서 이렇게 진행하고 있다.



전국의 어느 공회든 교회의 재산 문제는 심각하다. 어느 누구라도 쥐고 흔들면 요동치게 되어 있다. 그 것이 공회 노선의 특별한 점이다. 은혜로울 때는 가장 이상적인데 위기가 오면 순간적으로 공중 분해가 될 수 있다. 여기까지 계산을 하고 시작한 것이 공회 노선이다. 한 가지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은 '목적 연보'라는 것으로 우리는 현실 속에 다양한 문제를 최소화 시켜 왔다. 사직동교회의 1988년 2월에 대처할 때 나온 공회의 안내였다.

목적 연보, 언젠가 자세히 살펴 보고 안내할 내용이다. 역시 이 설명도 양면을 가진다. 악인이 이 글을 분석하면 이 글로 가지고 저작권 때처럼 그리고 이 연구소의 직원들을 수백 건씩 고소 고발을 하여 대량으로 전과자를 만들 듯이 할 수 있다. 그 것까지 고려해서 안내를 해야 할 때는 또 하게 된다. 십자가로 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가룟 유다의 입에 떡을 넣어 줄 때가 있다. 가룟 유다는 그 떡을 먹고 은 30을 챙기고, 떡을 먹여 준 주님은 그 떡을 넣어 준 바람에 십자가에서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주님이 그 가신 길을 십자가라 이름 짓고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따라 오라 했다. 그런 길을 보면 대부분은 미쳤나! 욕을 하며 가룟 유다의 길을 걷는다. 선택은 자유이나 먹은 것까지 토쳐 내며 간 것이 유다였다. 그리 되지 말라고 오늘도 안팎의 많은 분들을 향해 애타게 호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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