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때, 구원의 날 - 오늘에 본 '환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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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31
공회의 설교에는 '신사참배의 고문과 고형' '6.25 전쟁의 인민군 학살'이 늘 설교의 배경이 되고 있다.
모든 설교는 본문 해석으로 시작 되며 본문 내용을 풀어 이해를 시키고 나면 여기까지는 '아는' 것이 된다. 알면 '행하라'는 설교로 ㅗ이어 진다. 알고 행하고, 배우고 실천하고.. 공회 설교처럼 교리적으로 또 설교에 반복적으로 이렇게 철저한 경우는 공회 밖에서 듣기 어렵다. 모든 설교는 항상 이런 좌우의 균형과 전진으로 전개 된다. 그리고 항상 사례를 들 때 최종의 고비는 일제와 공산당의 고문과 고형이 장기간으로 이어 지고 절정의 순간을 펼쳐 놓고 이 말씀으로 계속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알지 못해도 실패하고 안다고 해도 실제 가정과 육체에 가해지는 고문 고형이 극에 이르면 과거 그 위대한 분들이 실패하듯 오늘도 그럴 것이고, 일제 감옥을 이긴 몇몇조차 공산당에게는 거의 실패했다. 고신의 설립자조차 일제는 이기고 공산당에게는 싸움도 하지 않고 피난을 해 버렸다. 그래서 고신의 박해사는 일제 때만 지겹게 반복하고 공산당 이야기는 오랜 세월 묻었다가 최근에 조금 소개하는 듯하다.
이사야 49: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라는 성구는 공회가 오랜 세월 인간이 넘어 갈 수 없는 극한 환난을 평소 기도하고 미리 은혜를 구해야 그 때가 되면 주님이 직접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고 설교해 왔다. 최근 그런 설교를 다시 강단에서 직접 접하며 오늘의 '환난'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졌다. 일제의 고문은 집요했고 잔인했다. 그래도 법과 절차만은 지키는 편이다. 그들의 평소 생활과 성격이 그렇다. 공산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일제보다 공산당이 더 혹독하지만 6.25는 단기간에 점령과 후퇴가 숨가쁘게 이어지면서 빨치산 활동으로 전개가 되는 바람에 일제 때처럼 한 사람을 잡아 놓고 여러 면으로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조여 들어 가지 못했다. 그래서 대개 현장의 처형이 많다. 안정된 공산당 국가에서 시간을 충분히 가진 상태에서 고문하려 든다면 일제보다 더 심할 것이나 6.25의 환경이 그렇지 않았고, 이후 세상은 너무 밝아 지고 세계가 지켜 보는 상황이 되다 보니 평양에 몇 년 붙들린 사람의 회고록을 봐도 일제 때나 6.25 빨치산 식의 고문은 없었다.
그렇다면 공회가 1세대 백영희 시절인 1989년까지 또 이후에도 오랜 세월 2세대 지도자들에 의하여 '장기간 고문과 고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각오로 예시한 과거 역사의 사례는 지금 우리 대부분에게는 해당 되지 않을 상황이다. 2천 년 전의 로마식 화형과 맹수에게 던져 지는 상황은 오늘 박해자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해도 그들의 다른 목적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일제와 공산당 또는 나치의 20세기 초반에 잔인함도 오랜 기간 온 세계가 온갖 기록과 드라마를 통해 잔인하게 그려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도 않을 듯하다. 남미나 몇몇 문제 되는 국가에서 진행 되는 현실적인 박해는 어느 정도 법을 지키면서 소리 없는 심리전과 장기전으로 가는 듯하다. 물론 오늘도 극단적인 경우 특수 의료 체계를 통해 얼마든지 과거보다 더 혹독하게 고문을 할 수는 있지만 이런 것도 속속 밝혀 지면서 그 훗날에 대한 반인륜범죄적 처단이 있어서 일반 교인이 함께 각오해야 할 환난의 유형은 아니다. .
어떤 형태가 오늘, 모든 교인들에게 해당 되는 일반적이면서도 시대적 환난이 될까?
그렇다. 오늘의 환난은 이미 홍수처럼 지금 쓸고 가고 있다. 결혼할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있으며, 혹 결혼을 한다면 대부분이 해서 안 될 방법으로 결혼을 하고, 또 몇몇 정상적으로 결혼을 하고 산다 해도 가정의 내면은 갈라 섰거나 무늬만 부부처럼 되어 있다. 모든 위협을 다 넘어 서고 정상 부부로 가정을 이어 가는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아 버린다. 그 결과로 인해 전국의 초등학교가 매년 수십 수백 개씩 없어 진다는 뉴스가 어느 일간지의 특별 취재로 연속 나오고 있다. 이 것은 신앙의 환난으로 칠 수 없는 것일까? 고문과 고형으로 한 사람을 핍박하고 처형하는 것도 환난이지만, 아예 살아 볼 수도 없도록 출생을 막아 놓는 환난은 하나의 사회 현상일 뿐이지 환난이라고 할 대상이 아닌가?
지금 50대 안팎이 1년 1백만 명 출산 세대다. 지금은 1년 30만 명 출산일 듯하다. 매년 수만 명씩 줄고 10년에 10만명씩 생명이 줄어 드는 것은 학살이 아닐까,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되고 아이를 늦추고 피하고 낳지 않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된 세상의 환경, 그 환경이 결국 공회의 청년들을 전부 휘감아 버려서 공회 교회들조차 그런 현상을 일상적으로 받아 들인다면 이 것은 환난에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이미 삼켜 버린 상황이다. 1937년에 시작 된 신사참배 문제가 1938년을 거치고 1939년까지 전국에 버티고 싸우던 교인들을 모두 정리해 버리고 나니까 몇은 산 속에 피해 사라졌고 몇은 감옥에 들어 간 상태에서 나머지는 참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날 일상화가 되었고 이후에 믿는 사람은 당연시 해 버렸다. 이 것이 환난의 진행 초기와 본격화가 되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고로 처음 팔다리를 절단할 때는 죽는다 만다며 발버둥을 치지만 1년, 그리고 2년 3년이 지나고 나면 장애인 보호 운동을 한다며 언론 앞에 나와서 애국자처럼 활동을 한다. 적응이 되고 동화가 되면서 그 속에 몰입이 되고 그 환난에게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환난을 자기 활동 무대로 생활의 일부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물에 처음 던져 지면 불과 10 초 정도에 죽는 체험을 하며 극강의 고통을 체험하지만 반복을 시켜 놓으면 물이 편하고 안락하며 좋은 환경으로 활용을 하게 된다.
결혼과 출산을 7계명의 죄로 읽으면서 사49:8을 살핀다면 오늘도 환난은 역사적으로 늘 그러했듯이 우리 주변을 휘감고 우리 위에 넘치고 있다. 그리고 제대로 버티며 이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생각이 된다. 이 연구소의 공회, 우리 기준으로 결혼은 20세가 적기이며 사람에 따라 몇 년 안팎의 차이는 있다고 생각한다. 30세가 될 때 아이를 3-4명을 낳게 된다면 오늘 이 시대를 확실히 장악해 버린 7계명의 범죄와 싸울 정도가 되는 성도라고 생각이 된다. 요즘처럼 이렇게 차고 넘치는 7계명 범죄의 화면에서 이성을 알게 된 청년의 불타는 내면이 결혼을 20대 후반으로 가져 간다면 10여 년은 그 마음이 어떤 상태였을까? 공산당은 무신론이므로 1계명, 일제는 다른 신의 참배를 요구했으니 주로 2계명으로 핍박했다. 오늘은 종교 자유 신앙 자유가 광범위하게 상식이 되어 있다. 4계명의 주일은 노동권이 울타리가 되고 있다. 5계명은 요양원까지 나서서 살펴 주고 6계명은 CCTV와 유전자 감식 수사가 막아 놓고 있다. 7계명은 일곱 번째여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와 주님의 초림,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맞는 오늘의 시대적 환난은 7계명이 주였다. 속으로 모두 내려 앉혀 버렸다.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이 죄를 넘어 선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싸워 볼 것도 없이 이미 삼켰다는 뜻이고, 모두가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를 일찍 많아 낳게 되면 일단 싸워 볼 준비는 된다는 것이다.
60년대까지의 공회 결혼은 당시 세상이 20대 초반의 결혼 추세와 함께 했다.
70년대가 되면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갑자기 터져 나오게 되면서 세상이 요상하게 되자 공회는 10대 후반 결혼으로 맞섰다.
80년대가 되면서 10대 후반의 결혼이 파행으로 끝나는 수가 많고 시행도 어렵게 되자 공회는 20대 중반 결혼이 대세가 된다.
90년대에는 백 목사님 사후 공회가 우선 공회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둘째는 각 공회의 자기 길을 정하기 위해 분주했다.
2000년대가 되면서 목사님 생전과는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라 진 환경을 각 공회는 따로 맞게 되고 현재 분화 과정에 있다.
연구소를 운영하는 본 공회는 2000년대가 되면서 다른 공회처럼 모든 면으로 방향이 잡히고 안정이 되자 20세 결혼을 오늘의 7계명 환난에 대처하는 최소한의 노력과 신앙의 긴장으로 봤다. 그리고 꾸준히 그렇게 이어 오고 있다. 대부분이 그렇게 하던 때도 있었고 그 과정에 최근 파행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어느 정도 하나의 추세를 형성해 가고 있다. 바로 이 과도기에는 세상의 일반 추세에게 끌려 가는 상황이 벌어 진다. 오늘 연구소 공회의 상황을 이렇게 본다면 실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팽팽한 이 줄다리기를 통해 끌려 가면 내나 세상처럼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 곳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7계명의 보자기에 싸여 세상 깊은 곳에 던져 질 것이고, 이 줄다리기가 앞으로 뒤로 움직이다가 대세를 좋게 잡게 되면 총공회의 교회사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 될 듯하다. 가능성은 반반이다. 현재가 고지 점령의 최후 5분처럼 밀고 밀리고 있는 모습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지도자와 부모들의 마음은 거의 다 옳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이 얼마나 큰 복일까?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몇몇은 공회 재산을 어느 개인 것으로 만들자며 난리들이어서 이미 세상도 알 정도로 끝이 나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시무투표처럼 공회의 정체성까지 공동으로 묻어 버렸다. 그래도 공회의 주류는 20세 결혼에 30세 3-4명의 출산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감사하다. 정작 오늘 그렇게 걸어 가야 할 지금의 20세나 20대 초반이 화면에 넘실 대는 인물과 생활을 마음에 몰래 그려 놓고 그 것을 기준으로 공회 안에서 상대를 찾아 달라고 한다. 이런 것을 중국에서는 모순이라고 말해 왔다. 찌르면 다 뚫어 버리는 창, 막으면 다 막아 버리는 방패.. 그 둘은 공존이 되지 않는다. 이 노선을 잡으려면 20세 결혼은 이 시대에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속에 이 노선은 이미 빈 껍데기만 남았다고 보면 된다. 20세 공회 결혼이란 상대방의 수준을 한두 단계 밑으로 맞춰야 한다. 주님은 우리 위해 그렇게 내려 오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위로 올라 가려고 필사적이다. 이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다. 80년대 목사님 생전에 어느 신학자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초대교회 이단을 강조하며 실컷 강의를 했었다. 타 신학교에는 상식이고 교회사 책 어디를 읽어도 뻔히 아는 상식인데 무식한 공회 목회자들은 신학자라는 간판을 걸고 기독론의 초보 상식을 처음 접하다 보니 모두 감읍해서 난리였다. 무식해도 탈은 탈이다.
노아 때 7계명은 물로 씻어 다시 사용할 수가 있는 초기 모습의 범죄였다.
오늘의 7계명은 물로 씻어 재사용을 할 수가 없고 불로 태위 없앨 고차원의 고약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런 시대에 결혼이 미루어 진다면 환난에 대한 사49:8 말씀으로 고민할 것도 없다. 이미 삼켜 진 상태니 회개가 문제이다.
20세 결혼으로 오늘의 박해와 싸워 보려는 마음이라도 주신 것이 감사하고, 이런 분위기가 대세라는 장년반에게도 감사하다. 그러나 승리의 최종 고지는 현재 20세와 20대 초반들의 생각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시대를 깨워 보는 시도로 적어 본다.
모든 설교는 본문 해석으로 시작 되며 본문 내용을 풀어 이해를 시키고 나면 여기까지는 '아는' 것이 된다. 알면 '행하라'는 설교로 ㅗ이어 진다. 알고 행하고, 배우고 실천하고.. 공회 설교처럼 교리적으로 또 설교에 반복적으로 이렇게 철저한 경우는 공회 밖에서 듣기 어렵다. 모든 설교는 항상 이런 좌우의 균형과 전진으로 전개 된다. 그리고 항상 사례를 들 때 최종의 고비는 일제와 공산당의 고문과 고형이 장기간으로 이어 지고 절정의 순간을 펼쳐 놓고 이 말씀으로 계속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알지 못해도 실패하고 안다고 해도 실제 가정과 육체에 가해지는 고문 고형이 극에 이르면 과거 그 위대한 분들이 실패하듯 오늘도 그럴 것이고, 일제 감옥을 이긴 몇몇조차 공산당에게는 거의 실패했다. 고신의 설립자조차 일제는 이기고 공산당에게는 싸움도 하지 않고 피난을 해 버렸다. 그래서 고신의 박해사는 일제 때만 지겹게 반복하고 공산당 이야기는 오랜 세월 묻었다가 최근에 조금 소개하는 듯하다.
이사야 49: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라는 성구는 공회가 오랜 세월 인간이 넘어 갈 수 없는 극한 환난을 평소 기도하고 미리 은혜를 구해야 그 때가 되면 주님이 직접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고 설교해 왔다. 최근 그런 설교를 다시 강단에서 직접 접하며 오늘의 '환난'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졌다. 일제의 고문은 집요했고 잔인했다. 그래도 법과 절차만은 지키는 편이다. 그들의 평소 생활과 성격이 그렇다. 공산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일제보다 공산당이 더 혹독하지만 6.25는 단기간에 점령과 후퇴가 숨가쁘게 이어지면서 빨치산 활동으로 전개가 되는 바람에 일제 때처럼 한 사람을 잡아 놓고 여러 면으로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조여 들어 가지 못했다. 그래서 대개 현장의 처형이 많다. 안정된 공산당 국가에서 시간을 충분히 가진 상태에서 고문하려 든다면 일제보다 더 심할 것이나 6.25의 환경이 그렇지 않았고, 이후 세상은 너무 밝아 지고 세계가 지켜 보는 상황이 되다 보니 평양에 몇 년 붙들린 사람의 회고록을 봐도 일제 때나 6.25 빨치산 식의 고문은 없었다.
그렇다면 공회가 1세대 백영희 시절인 1989년까지 또 이후에도 오랜 세월 2세대 지도자들에 의하여 '장기간 고문과 고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각오로 예시한 과거 역사의 사례는 지금 우리 대부분에게는 해당 되지 않을 상황이다. 2천 년 전의 로마식 화형과 맹수에게 던져 지는 상황은 오늘 박해자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해도 그들의 다른 목적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일제와 공산당 또는 나치의 20세기 초반에 잔인함도 오랜 기간 온 세계가 온갖 기록과 드라마를 통해 잔인하게 그려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도 않을 듯하다. 남미나 몇몇 문제 되는 국가에서 진행 되는 현실적인 박해는 어느 정도 법을 지키면서 소리 없는 심리전과 장기전으로 가는 듯하다. 물론 오늘도 극단적인 경우 특수 의료 체계를 통해 얼마든지 과거보다 더 혹독하게 고문을 할 수는 있지만 이런 것도 속속 밝혀 지면서 그 훗날에 대한 반인륜범죄적 처단이 있어서 일반 교인이 함께 각오해야 할 환난의 유형은 아니다. .
어떤 형태가 오늘, 모든 교인들에게 해당 되는 일반적이면서도 시대적 환난이 될까?
그렇다. 오늘의 환난은 이미 홍수처럼 지금 쓸고 가고 있다. 결혼할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있으며, 혹 결혼을 한다면 대부분이 해서 안 될 방법으로 결혼을 하고, 또 몇몇 정상적으로 결혼을 하고 산다 해도 가정의 내면은 갈라 섰거나 무늬만 부부처럼 되어 있다. 모든 위협을 다 넘어 서고 정상 부부로 가정을 이어 가는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아 버린다. 그 결과로 인해 전국의 초등학교가 매년 수십 수백 개씩 없어 진다는 뉴스가 어느 일간지의 특별 취재로 연속 나오고 있다. 이 것은 신앙의 환난으로 칠 수 없는 것일까? 고문과 고형으로 한 사람을 핍박하고 처형하는 것도 환난이지만, 아예 살아 볼 수도 없도록 출생을 막아 놓는 환난은 하나의 사회 현상일 뿐이지 환난이라고 할 대상이 아닌가?
지금 50대 안팎이 1년 1백만 명 출산 세대다. 지금은 1년 30만 명 출산일 듯하다. 매년 수만 명씩 줄고 10년에 10만명씩 생명이 줄어 드는 것은 학살이 아닐까,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되고 아이를 늦추고 피하고 낳지 않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된 세상의 환경, 그 환경이 결국 공회의 청년들을 전부 휘감아 버려서 공회 교회들조차 그런 현상을 일상적으로 받아 들인다면 이 것은 환난에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이미 삼켜 버린 상황이다. 1937년에 시작 된 신사참배 문제가 1938년을 거치고 1939년까지 전국에 버티고 싸우던 교인들을 모두 정리해 버리고 나니까 몇은 산 속에 피해 사라졌고 몇은 감옥에 들어 간 상태에서 나머지는 참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날 일상화가 되었고 이후에 믿는 사람은 당연시 해 버렸다. 이 것이 환난의 진행 초기와 본격화가 되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고로 처음 팔다리를 절단할 때는 죽는다 만다며 발버둥을 치지만 1년, 그리고 2년 3년이 지나고 나면 장애인 보호 운동을 한다며 언론 앞에 나와서 애국자처럼 활동을 한다. 적응이 되고 동화가 되면서 그 속에 몰입이 되고 그 환난에게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환난을 자기 활동 무대로 생활의 일부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물에 처음 던져 지면 불과 10 초 정도에 죽는 체험을 하며 극강의 고통을 체험하지만 반복을 시켜 놓으면 물이 편하고 안락하며 좋은 환경으로 활용을 하게 된다.
결혼과 출산을 7계명의 죄로 읽으면서 사49:8을 살핀다면 오늘도 환난은 역사적으로 늘 그러했듯이 우리 주변을 휘감고 우리 위에 넘치고 있다. 그리고 제대로 버티며 이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생각이 된다. 이 연구소의 공회, 우리 기준으로 결혼은 20세가 적기이며 사람에 따라 몇 년 안팎의 차이는 있다고 생각한다. 30세가 될 때 아이를 3-4명을 낳게 된다면 오늘 이 시대를 확실히 장악해 버린 7계명의 범죄와 싸울 정도가 되는 성도라고 생각이 된다. 요즘처럼 이렇게 차고 넘치는 7계명 범죄의 화면에서 이성을 알게 된 청년의 불타는 내면이 결혼을 20대 후반으로 가져 간다면 10여 년은 그 마음이 어떤 상태였을까? 공산당은 무신론이므로 1계명, 일제는 다른 신의 참배를 요구했으니 주로 2계명으로 핍박했다. 오늘은 종교 자유 신앙 자유가 광범위하게 상식이 되어 있다. 4계명의 주일은 노동권이 울타리가 되고 있다. 5계명은 요양원까지 나서서 살펴 주고 6계명은 CCTV와 유전자 감식 수사가 막아 놓고 있다. 7계명은 일곱 번째여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와 주님의 초림,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맞는 오늘의 시대적 환난은 7계명이 주였다. 속으로 모두 내려 앉혀 버렸다.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이 죄를 넘어 선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싸워 볼 것도 없이 이미 삼켰다는 뜻이고, 모두가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를 일찍 많아 낳게 되면 일단 싸워 볼 준비는 된다는 것이다.
60년대까지의 공회 결혼은 당시 세상이 20대 초반의 결혼 추세와 함께 했다.
70년대가 되면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갑자기 터져 나오게 되면서 세상이 요상하게 되자 공회는 10대 후반 결혼으로 맞섰다.
80년대가 되면서 10대 후반의 결혼이 파행으로 끝나는 수가 많고 시행도 어렵게 되자 공회는 20대 중반 결혼이 대세가 된다.
90년대에는 백 목사님 사후 공회가 우선 공회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둘째는 각 공회의 자기 길을 정하기 위해 분주했다.
2000년대가 되면서 목사님 생전과는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라 진 환경을 각 공회는 따로 맞게 되고 현재 분화 과정에 있다.
연구소를 운영하는 본 공회는 2000년대가 되면서 다른 공회처럼 모든 면으로 방향이 잡히고 안정이 되자 20세 결혼을 오늘의 7계명 환난에 대처하는 최소한의 노력과 신앙의 긴장으로 봤다. 그리고 꾸준히 그렇게 이어 오고 있다. 대부분이 그렇게 하던 때도 있었고 그 과정에 최근 파행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어느 정도 하나의 추세를 형성해 가고 있다. 바로 이 과도기에는 세상의 일반 추세에게 끌려 가는 상황이 벌어 진다. 오늘 연구소 공회의 상황을 이렇게 본다면 실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팽팽한 이 줄다리기를 통해 끌려 가면 내나 세상처럼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 곳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7계명의 보자기에 싸여 세상 깊은 곳에 던져 질 것이고, 이 줄다리기가 앞으로 뒤로 움직이다가 대세를 좋게 잡게 되면 총공회의 교회사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 될 듯하다. 가능성은 반반이다. 현재가 고지 점령의 최후 5분처럼 밀고 밀리고 있는 모습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지도자와 부모들의 마음은 거의 다 옳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이 얼마나 큰 복일까?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몇몇은 공회 재산을 어느 개인 것으로 만들자며 난리들이어서 이미 세상도 알 정도로 끝이 나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시무투표처럼 공회의 정체성까지 공동으로 묻어 버렸다. 그래도 공회의 주류는 20세 결혼에 30세 3-4명의 출산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감사하다. 정작 오늘 그렇게 걸어 가야 할 지금의 20세나 20대 초반이 화면에 넘실 대는 인물과 생활을 마음에 몰래 그려 놓고 그 것을 기준으로 공회 안에서 상대를 찾아 달라고 한다. 이런 것을 중국에서는 모순이라고 말해 왔다. 찌르면 다 뚫어 버리는 창, 막으면 다 막아 버리는 방패.. 그 둘은 공존이 되지 않는다. 이 노선을 잡으려면 20세 결혼은 이 시대에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속에 이 노선은 이미 빈 껍데기만 남았다고 보면 된다. 20세 공회 결혼이란 상대방의 수준을 한두 단계 밑으로 맞춰야 한다. 주님은 우리 위해 그렇게 내려 오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위로 올라 가려고 필사적이다. 이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다. 80년대 목사님 생전에 어느 신학자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초대교회 이단을 강조하며 실컷 강의를 했었다. 타 신학교에는 상식이고 교회사 책 어디를 읽어도 뻔히 아는 상식인데 무식한 공회 목회자들은 신학자라는 간판을 걸고 기독론의 초보 상식을 처음 접하다 보니 모두 감읍해서 난리였다. 무식해도 탈은 탈이다.
노아 때 7계명은 물로 씻어 다시 사용할 수가 있는 초기 모습의 범죄였다.
오늘의 7계명은 물로 씻어 재사용을 할 수가 없고 불로 태위 없앨 고차원의 고약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런 시대에 결혼이 미루어 진다면 환난에 대한 사49:8 말씀으로 고민할 것도 없다. 이미 삼켜 진 상태니 회개가 문제이다.
20세 결혼으로 오늘의 박해와 싸워 보려는 마음이라도 주신 것이 감사하고, 이런 분위기가 대세라는 장년반에게도 감사하다. 그러나 승리의 최종 고지는 현재 20세와 20대 초반들의 생각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시대를 깨워 보는 시도로 적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