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동시 예배가 평범하게 진행되는 인터넷 시대를 맞아 가지는 회한 한 가지
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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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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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이동
/초기화면/자료실/남단에서3/에 있던 자료를 게시판 통합으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원래 자료는 ‘2002/11/03 에 올렸졌던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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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터넷 방송이 평범한 수준에서 진행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①조금 일찍 인터넷 시대를 열어보려다가 날벼락이 떨어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인터넷 방송이 복음운동을 위해 필수적인 시대가 되었다고 하여 서울의 공회 소속 교회 한 곳이 예배의 생방중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때가 벌써 3년이 넘은 것같습니다. 인터넷 방송에 필요한 관련 설비 등 기초 투자에 몇 억원이 소요되었고 이후 보다 나은 방송환경 조성을 위해 투자된 예산보다 훨씬 많은 추가 예산이 필요하다고 보고가 되면서 그 교회는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세대가 화면에서 보았을 때 신세대적인 시각효과를 느껴야 한다고 하여 강단 전체를 TV 탈랜트 수준으로 성형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 강단 위에서 전시될 내용물 역시 그 수준에 맞아야 한다고 아주 혁명적인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예배의 TV 밤무대화라고 생각하는데 그곳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열린예배라고 소개하였던 것같습니다. 교회 개혁을 위해 앞장서신 목사님의 충정을 알아주지 못한 교인들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홈 운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②이제는 아무나 가능한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평범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3년 전 당시만 해도 수억원이 들어야 기초 준비를 겨우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설교가 인터넷을 통해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않고 전해질 때는 아직 좀 더 남았는가 했습니다. 당시 국내는 아직 초고속망이 들어가지 않은 곳도 너무 많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평범하게 누구나 가능한 것이 아니면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하나님이 아직 주지 않은 것으로 알고 세월만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편이 대부분입니다. 3년전 간간이 들은 소식으로는, 언젠가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먼 나라 이야기로 듣고 넘어갔었습니다.
오늘, 백목사님을 사적으로 존경하고 지켜보던 서울의 어느 교회가 몇 만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알려진 자기들의 예배를 인터넷으로 내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주일 예배 모습을 보기 위해 잠깐 들렀습니다. 지극히 초보적인 시설 몇 가지만 있으면 아무 교회나 갖출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우리에게 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규까지 발생한 어느 교회처럼 예술적 차원으로 무대까지 전면 교체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제정이 약한 교회라도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2.1984년, 서부교회는 원거리 기도실에 전화로 연결하고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①차량 거리 1시간인 양산동기도실이 거리가 멀어, 전화로 예배를 보았습니다.
1984년 봄, 서부교회는 도시고속도로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부산 반대쪽에 양산동기도실과 기아의 12인승 봉고 3대를 구입하게 됩니다. 당시 교회들마다 차량 구입이 그렇게 일반화되고 대형 대량화 되던 시기에 이 봉고 3대만으로 교회의 모든 업무와 주일학교 장년반 교인 수송 일체를 해결하도록 백목사님은 조처를 했습니다. 매주 주일학교 출석 평균수가 8천명을 유지하던 때였습니다. 행정실 1대, 주일학교 1대, 목회연구소의 전신인 편집실 1대로 배정이 되었고 행정실 차량은 백목사님과 교인들이 양산동기도실을 갈 때 사용되었습니다.
어쨌든 이 업무용 차량들 때문에 서부교회의 산기도는, 1950년대 구덕산 기도와 금정산 기도 그리고 꽃마을 기도실을 이어 1984년부터 백목사님 서부교회 목회의 마지막 기도모임이 되는 '양산동기도실' 시대를 열게 되었고 이 기도실은 목사님 순교하던 1989년까지 계속됩니다.
이 양산동기도실은 도시고속도로로 1시간을 가야하는 거리였고, 기도실에서 밤을 새는 분들을 위해 본 예배당의 새벽예배 설교를 전화로 연결하고 전화기에 스피커를 장치하여 여러 사람이 함께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3.전화로 연결하여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해외 교회에도 가능했었습니다.
①백목사님 설교는 읽기만 해도, 설교 경쟁력에서는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1984년 5월, 세인트루이스 교회는 한 해 전 송종관목사님이 귀국 후 그 후임을 받지 못해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다가 이종옥목사님을 담임으로 모시게 됩니다. 세인트루이스시의 약 23개 되는 한인 교회 중 목회할 목사로 정식 초청비자를 받고 들어온 경우로는 아마 유일했을 것입니다. 유학 등으로 들어온 분이 1-2분 있고 나머지 20여명 목회자들은 차마 입으로 옮기지 못할 루트를 통해 천국으로 이민 온 분들이었습니다.
부임했던 이종옥목사님의 설교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필기노트 5-6페이지를 천천히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오전 예배를 마치고 나면 교인들 보는 데에서 시간 때문에 덜 읽고 그만 둔 자리를 접어두었고, 점심 시간 교인들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소식도 주고받다가 예배 5-10분 전이 되면 교인들이 설교시간이 되었다고 말씀드리게 되고, 그러면 목사님은 다시 오후 예배 설교를 오전에 접어 두었던 부분을 펴고 그대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본국에서는 어떻게 설교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만, 당시 교민들과 유학생들의 수준은 대단히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백목사님 설교록을 읽지 않고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쨌든 담임목사님의 설교의 들어보라고 교인들이 자신있게 다른 교회 교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한인 교회 주도 교인들은 한국 내에서 명문대 친구 사이거나 아니면 한인 모임 등을 통해 서로가 아주 가까이 알고 지내고 있었고, 당시 경쟁을 하고 있던 옆 교회 목사님은 총신대학교 총장을 오랫동안 지낼 분이었고, 100여명 교인 중 박사가 60여명, 의학박사가 40여명 되는 한인 교회였습니다. 국내 총공회 소속 교인 수준만 상대하던 목사님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수준의 교인들을 미국에서 만나게 되었으나 백목사님 설교노트 몇 페이지만 읽어주면 설교 문제는 훌륭하게 해결될 수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만일, 백목사님 설교를 직접 접하게 할 수 있었다면
그때 느꼈던 것은, 그 설교 몇 페이지를 읽으만 주어도 세계 제일 선진국인 미국 중심부에서, 나름대로 잘 나가는 교인들에게 말씀 은혜를 훌륭하게 해결할 수 있고 극찬을 받을 수 있는 정도라면, 설교를 가지고는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면, 백목사님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잠실동교회 백광진목사님이 백목사님 설교를 정서한 노트를 그대로 전할 때였는데, 한번씩 그 강단에 서게 되면 모두들 넋을 잃고 폭 빠져버리던 때입니다. 그 분 역시, 이 노트 몇 권이면 이 나라를 감당하고도 남는다고 할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백목사님 설교를 바로 들을 수 있게 한다면, 어떤 결과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서 끓고 있었습니다. 두 분 다 훌륭한 분들이지만 백목사님 설교를 전하는 은혜 면에서는 백목사님 설교 1/100인들 미치겠습니까? 한번 그 설교에 붙들리면 인생과 평생을 날려버린다고 고신에서도 접촉 금지를 그렇게 시키려고 했던 분이었고, 소속 목회자나 교인들은 그 말씀에 붙들려 그 평생과 일생이 남들 볼 때 다 미쳤다고 할 만큼 바꾸고 살게 한 말씀이 아닙니까?
그곳에 와 있던 각 교단의 장래를 맡을 교수 요원이나 지도자 급 목회자들도 1984년쯤 당시에는 5명에 4명정도로는 백목사님의 이름을 한국 교회가 몰라 봤던 신비한 분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자주 백목사님을 접했던 우리보다 오히려 그들의 흠모가 훨씬 도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쌀 가마니를 찌르면 쌀이 나오듯 성경 어느 성구라도 하나를 건들이면 진리가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면서요! 신학대학 시절 제일 경건하고 은혜롭게 배우던 교수님이 한국교회의 설교는 백영희목사님 한 분이라고 극찬을 하던데 과연 그렇습니까!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③전화선을 통해 앰프로 연결하면, 부산의 설교가 미국에서도 울릴 수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를 이들에게 바로 듣게 할 수 있다면!
백목사님을 미국으로 모셔다 한번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려고 했던 분들의 수고는 전부 헛수고가 되었고 목사님 역시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고 단정을 하시니, 그렇다면 양산동으로 전화를 연결하는 것과 세인트루이스로 전화를 연결하는 것은 같은 이치요 같은 수고니 그렇게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부산 서부교회 월요일 새벽예배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오후예배로 함께 드릴 수 있었고, 전화비용은 미국에서 전화를 하게 되면 지금 기억에 1분에 천원 4-50분 예배 전체를 함께 드려도 4-5만원이면 충분했습니다.
당시 이런 소원과 주장을 드리기는 했으나, 그 교회의 모든 면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 발표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결국 애만 태우다가 말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 인터넷 기술이라면, 교회 결정을 기다리고 할 것도 없이 누구든 접하고 싶은 이들에게 바로 그분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 이미 여러 면으로 알려진 그분의 명성은 듣는 이들에게 기대와 집중력을 가지게 할 것이고, 그분의 설교는 오늘 세계 교회를 초대교회로 완전히 돌려놓고 주님 재림을 맞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④주변 교계가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백목사님 설교에 '접선'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비평 전문가들의 말씀처럼 이곳의 '과대망상'일까요? '우상화'의 일환일까요? KIST에서 대표적 재미 한인 과학자로 지목하고 국내 초빙을 위해 KIST부원장이 그 과학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설득했던 분이 1980년대 후반 백목사님의 거창 집회 장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벌린 입을 다물지를 못하고 연신 감탄이었습니다. 이런 산속에 의자도 없이 무릎과 무릎이 전부 맞닿으면서 3시간씩 설교만으로 하루 3번을 그것도 원고도 없이, 그 설교 한 말씀도 버릴 것이 없고 더할 것이 없도록 저렇게 토해내는 것이 과연 사람의 언변으로 가능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미국 과학자협회 주최의 세미나를 많이 참석하고 또 발표를 하는 분입니다. 활동이 남달리 왕성했고 또 신앙이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집회를 잘 파악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잘나고 훌륭한 수많은 설교가들이 미국을 한번씩 몇 번씩 거쳐가지 않은 분들이 없으나 그 설교가 도덕 설교 이상을 넘기 어렵고 잘해 봐야 성경공부 수준이었으나 백목사님의 설교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성령이 친히 증거하는 것같고 이 뜨거운 가슴을 주체하지를 못하겠다고 그렇게 찬사였습니다. 집회 기간 중에 불편했던 것은 재래식 화장실을 전체예배보는 장소 바로 옆에다 설치하여 그 냄새를 견디지 못하였는데, 이런 수준에서 이런 고차원의 말씀이 증거되다니... 라는 감탄이었습니다.
⑤하나님이 때를 주지 않았을 뿐이지, 성공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숨어 듣고 지나간 각 교단의 목회자들의 숫자가 적지 않고, 백목사님의 테이프가 돌고 돌아 그 값을 천정부지로 올려가며 먼곳에서는 갈수록 그 우상화가 도를 넘어갈 정도였으니, 그 말씀을 미국 내 한인교인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면, 그 폭발력은 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곳의 표현이 우물 안에서 세계를 논한다고 웃을 분들이 더러 계실 줄 압니다만, 이미 백목사님과 관련한 기록은 객관적 과학적 통계만으로도 세계적 기록을 넘어선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중에 그분의 설교가 가장 쉽게 그리고 확실하게 타 교단과 교회 교인들에게 넘어가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인터넷의 기술이었으면, 백목사님도 반대치 못하고 허락했을 것이고 또한 연구소 관련 부서에서는 이를 전화선 연결로 기도실 교인들에게 말씀을 듣게 하는 수준에서 세계로 내 보내었을 것입니다.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아마 인터넷 최고의 돌풍은, 적어도 기독교계로 말한다면 주일학교 소식을 타고 그 파괴력은 참으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3.1989년, 다시 한번 때를 기다렸으나, 이 시대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①시골교회지만, 백목사님 예배를 전화로 연결하여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89년 3월, 전남 여수 시골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백목사님 가실 때가 불과 6개월 남았을 때입니다. 가실 때가 가깝다고 느끼도록 그분 스스로 설교에서 강조를 많이 하던 때였고 사석에서는 아주 가실 준비를 실무적으로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1980년대 도로망과 경제가 나아지면서 전국 목회자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예배와 토요일 새벽예배를 부산으로 가서 서부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사고 교회였으므로 부임 1개월은 수습에 바빴고 4월부터는 전화로 목사님 설교를 동시 예배로 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미 목사님은 가실 때를 준비하고 비디오로 예배 설교를 재독할 수 있도록 방송장비 수준으로 기계를 마련토록 허락하였고 모든 예배설교를 전부 보관할 수 있도록 허락하던 때였습니다. 한 교회에서 서부교회로 전화 연결하고 전면 예배가 시작되면 전국 교회로 영향을 미칠 것인데 먼저 비디오로 필요할 때마다 재독을 하는 정도로 해보라고 하여 일단 보류가 되었습니다.
②주시지 않는다면 받지 못하는 것이고, 주시는 것 안에서 노력할 뿐입니다.
대신 매주 금요일, 서부교회로 내려가는 교회 차편에 교인들이 함께 동행하여 백목사님 설교를 직접 듣도록 하여 목사님 가시던 8월까지 계속하게 됩니다. 이곳 어느 방문인의 말씀처럼 이곳의 설교가 백목사님 설교 은혜를 대신할 수 있을 때가 된다면 집회 설교도 재독 대신에 직접 할 때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배워가고 자라갈 때는 남에게 증거해야 하는 책임과 자신이 배워야만 가르칠 수 있다는 양면을 동시에 보며 조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곳에서 백목사님의 설교를 문자로 음성으로 전면 공개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는 화면으로까지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 제공하는 말씀보다 은혜로우면 그 말씀을 들으면 될 것이고, 이곳에서 제공하는 말씀을 개인적으로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면 그리 하실 것이고, 이곳에서 제공하는 말씀이 제일 좋은 분들은 가능한 최대한 들으실 줄 압니다. 또 어떤 분들은 신학적으로 연구할 가치로만 알면 그렇게만 할 수 있도록 모든 데이타를 전면적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③현재 우리에게는 그 어떤 시대보다 많은 것이 제공되어 있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으니 그분의 생전 그분의 설교를 바로 접할 수 있는 인터넷 기술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회한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 시대가 복이 없는 것은, 바로 그럴 수 있는 기술과 환경을 찰나의 차이로 비켜 가도록 하여 이곳이 아쉬워하는 그런 좋은 은혜를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조금 복이 있는 것은, 이곳에서 전하는 문자나 음성 등을 통해 역사 이후 가장 많은 말씀이 이 시대로 넘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은혜의 양과 종류를 뽑아 가질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니,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고 또 오늘 우리에게 가능한 범위, 즉 이곳에서 제공하고 노력하는 자료라도 십분 사용하시는 방문인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