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에서 출발한 기독교 보수와 진보의 최 핵심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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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2.11 00:00
1.기독교 '보수'와 '자유주의' 신앙노선의 최핵심부 2곳의 윤곽
①한국의 보수측 대표는 고신입니다. 그러나 진짜 보수는 고신이 아니라 백영희신앙노선입니다.
국내 최고 보수교단을 말할 때는 모두들 고신교단을 말합니다. 고신교단이 보수노선의 대표로 분류되는 것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교회는 진리운동만을 위한 곳으로 견지하고 있으며, 타협없이 옳은 것만을 추구하는 신앙자세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면들은 해방 직후 약 10여년 지켜지다가 그후로는 세월 속에 급격하게 폐기한 원칙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신사참배를 두고 그들의 가장 적이었던 총회파와 교단을 통째로 합했고 또 교권쟁탈에서 밀리게 되자 스스로 탈퇴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교단적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하여 현재 대학교 대학원 대학병원 등을 운영하며 합동교단이나 통합교단과 교세경쟁에 지난 세월들을 다 허비했으며 비록 성경은 금하는 일이었지만 교단의 막대한 재산문제가 있을 때는 소송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고신교단이 보수 최고 정통을 자랑했지만 결국 세월 속에서 그들의 내면이 다 드러나게 되자 결국 합동교단과 교리나 신앙노선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여 지금은 합동과 고신교단의 차이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해방 직후 신사참배 정통성이 있었다는 하나만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고신교단의 최고 보수정통성은 그냥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고신교단이 출발 10여년을 지나면서 급격하게 보수노선에서 떠날 때에 백영희목사님은 이를 반대했고 그 주장을 굽히지 않게 되자 제명을 당했으며 결국 고신이 버린 한국교회의 본래 정통 보수신앙을 그가 평생 유지 발전시키며 그의 사후 여기까지 전승시키고 있습니다.
②한국 자유주의 신앙의 대표는 기장측입니다. 그러나 숨은 자유주의 신앙노선은 따로 있습니다.
기장측은 한국 자유주의 신앙의 대표적 교단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주의 신앙노선은 자유주의 신앙의 순수성을 가졌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비록 자유주의 신앙노선을 위해서 했던 일이라고는 하지만 기장교단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들이 신사참배 적극 동참세력이며 보수교단의 교권 아래에 숨어 지내 온 비겁함과 암약 등을 알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자유주의 신앙을 주장하다가 교권의 탄압이 있으면 타협으로 숨었고 그러나 교권을 분립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서야 1954년 기장측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신대로 표현되는 기장교단은 문익환(목사님)을 대표라고 기억하면 일반인들로서는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은 친일파를 완전히 제거했고 외세를 한반도 밖으로 내몰았으며 끊임없이 통일을 주장하기 때문에 민족의 양심세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자유주의 신앙노선의 주장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반미데모, 친북행태로 해방 후 수십년간 활동하였고 이 때문에 정부로부터 반정부인사로 추격받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들의 노력으로 남북이 좋은 시절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사회 개량을 위해 이렇게 사용하는 것임을 보였다고 할 수 있고 그들의 활동은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가장 대표적 경우로 늘 인식이 되어왔습니다.
그런데 문익환이 대표적으로 활동했던 기장측이 그 전통성을 잇는다고 내세우는 인물은 송창근 김재준이라는 한국내 가장 유명한 신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의 신학은 성경을 부정하기 위한 학문이었지만 그것을 논하기 전에 그들의 일제하 행동은 반드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주류에 있던 신학자와 교회가 비록 신사참배를 이기지는 못했으나 그로 인하여 학교가 폐교되고 주도 인물은 도피하였으며 혹 신사참배에 굴하기는 했지만 양심이 편치 못하여 그 행동이 엉거주춤했었는데, 기장측을 세워 이 나라 자유주의 신앙노선에 앞장 선 이들은 일제 때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주도하였고,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대신하여 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며 신학교를 해방때까지 계속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자유주의 신앙노선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의 현재 구호와는 정반대로 타협주의였고 친일앞잡이들이었으며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유주의 신앙노선에 소속은 되어 있지만 자유주의 신앙노선 내에서는 아주 창피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말아야 할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마치 한국의 양심이며 그 반대측만 이권을 찾아 움직이는 철새라고 비난하는 것은 족보파악도 제대로 못한 연고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자유주의 노선의 선봉에 있는 이들은 그들의 선배와는 달리 양심세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일제말기와 같고 북한공산당 같은 탄압이 가해져 봐야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과제로 두고 연구할 문제이지 오늘 자유세상에서 생명을 걸겠다고 주장하는 젊은이들의 말은 전혀 믿을 바가 되지를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현재 한국교회의 자유노선측을 외부로 대표하는 것은 기장측이지만 실제로는 교권 투쟁의 수단이거나 아니면 말로만 외치는 이들이지 실제로 자유주의 노선의 핵심이거나 무게중심을 가진 이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같이 자유주의 노선에 있으면서도 교권 전면에 나서거나 그 조직원으로 움직이지는 않는 이들 중에 과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렀고 일본 경찰이 끝까지 손을 대지 못하였던 진정한 신사참배 승리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해방 후에도 평생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면서 전혀 정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교권욕에도 초월했던 세력이 있으니 이들은 자유주의 노선 중에서도 진정한 자유주의 노선의 주인일 것입니다.
거창고등학교를 통하여 기독교 사회활동의 모범사례를 만들기 위해 평생 생명바쳐 한 길을 걸었던 전영창선생님이라는 분이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교권을 초월하면서도 진정한 자유주의 신앙노선에 매진하는 인물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박대통령 정권 20여년 하에서 그들이 당한 고초는 어떤 재야 세력들도 동경할 만했습니다. 수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그들의 필생 노력이 성과로 나타나면서 우리 사회에서 그들의 자유주의 신앙이 각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활동의 성공담이 각광을 받게 됩니다.
풀무원의 생명 존중, 자연 친화는 자연주의 운동의 대표적 성공사례가 되었고
거창고의 자율 자유 개성 교육은 산골의 저능아들에게 일류대 입학성공사례가 되었습니다.
이 사회는 그들의 활동 밑바탕에 깔려 있는 자유주의 신앙노선, 즉 기독교라는 것은 세상 개량에 사용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사상에 주목한 것이 아니고 어느 헌신적인 기독교 운동가가 우리 사회의 가장 관심을 갖는 생명문제와 진학문제에 수고를 했고 모두가 배워야 할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데 주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성공은 물리학에도 있고 예술계에도 있으며 하다못해 다리 밑 거지세계에도 그들대로의 기적같은 성공담은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 신앙노선에서 그들의 성공담을 보는 시각은 그들의 사회활동이 성공한 뒤에는 자유주의 신앙노선의 대성공이라는 덪이 하나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호응을 등에 업고 그들의 사회활동 성공은 기독교의 성공이고 따라서 기독교는 그런 식이 되어야 옳다는 아주 우스운 논리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은 이미 이런 논리는 대단히 큰 힘을 발휘하면서 이곳처럼 순수 신앙노선에 집중하는 보수신앙을 크게 침략했지만 이를 느끼거나 아는 이들은 거의 없고 따라서 그런 면에 대한 손해는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운동은 결국 기독교를 지상낙원화의 수단으로 전락시켜 오늘 서구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즉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거의 없는데 천국을 실제로 믿는 사람 역시 거의 없는 상태를 만들어 버립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중요한 막바지 고비를 향해 치닫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것이 기독교라는 것은 사회개량에 좋은 방편이라고 말하는 이 운동을 보는 이곳의 시각입니다.
2.백영희신앙노선과 거창고의 자유주의 신앙노선의 역사와 비교
①백영희와 전영창의 일반적 이력
백목사님은
1910년 거창에서 출생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호주선교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당시 가장 엄한 보수신앙에서 출발하게 되었고 더구나 주남선목사님의 시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주목사님과 관계가 특별했습니다. 1939년 개명교회를 개척하였고 온 교인을 이끌고 신사참배를 승리하며 교회를 끝까지 지켰고 1949년 거창 내 위천교회에서 국기배례 사건을 통해 국기에 대한 예법은 경례에서 주목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어 발생한 6.25전쟁 중에서는 점령치하 3개월은 부흥회로 신앙과 교회 전체를 지켰고 이후 1952년 7월까지는 밤마다 빨치산의 야간 인민공화국 하에서도 교회와 신앙을 온전히 지켰던 인물입니다.
1952년 부산서부교회로 부임한 후 고신내에서 설교와 경건의 핵심 주목 대상이 되었고 고신과 총회측의 예배당소송, 유엔군철수 반대운동 등을 두고 고신교단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1959년 제명을 당합니다. 이후 한국교회에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개교회주의 신앙운동을 시작하고 교리와 신앙노선으로는 칼빈이후를 요약하면서 새로운 차원을 열었으며, 최고의 보수신앙으로 최대의 부흥기록을 남겨 세계와 한국기독교사의 성공사례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1989년 순교하게 됩니다. 그의 평생은 성경 그대로의 삶이었고 평생 교회는 어떤 것임을 보여준 한국교회 최고 보수신앙인물입니다.
전선생님은
1917년 전북 무주에서 출생하여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하게 되었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른 출옥성도입니다. 양손으로 철봉을 잡게 하고 대나무로 손가락을 후려치는 고문에서도 오히려 고문하는 고등경찰의 눈을 끝까지 응시하여 그들을 굴복시킨 의지의 인물입니다. 출옥 후에도 해방 때까지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고향에서 감시를 받았는데 이 시절 영어사전 전부를 외우게 되어 해방 후 유학을 가게 됩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여권으로 미국 유학 비자를 제1호로 받고 세인트루이스 콩콜디아 신학교와 펜실베니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졸업을 1주일 앞두고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동포를 돕는다고 자진 귀국하였고 미국내 지원하는 교회를 통해 부산에서 구호와 복음운동을 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전부 부산으로 피난을 와 있었고 이곳에서 그는 자진 귀국한 애국청년의 표상이었으며 미국내 교회 재정지원을 끌어오는 막강한 실력가였음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교단들은 피난 상태였고 고신교단은 부산이 주 본부였기 때문에 교단으로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부산에 근거를 둔 고신교단의 주요 인물로 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신인물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출옥성도였고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혁명적 사고방식에 동감하고 있었습니다. 장기려박사를 데리고 고신대학병원의 모체가 되는 복음병원을 시작했고, 손양원목사님 전기인 사랑의 원자탄을 쓴 안용준목사님과는 미국에서 함께 유학을 했던 사이였고 전국순교자유가족후원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신의 자랑인 전국학생운동인 SFC의 출발모체인 '신앙협조회' 10인의 대표였습니다.
인재가 없어 스스로 늘 탄식하던 고신에 총회파와 맞설 수 있는 활동가 실력가 학문까지 갖춘 열혈 청년을 확보하게 되자 고신지도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적극적인 협조 관계는 곧 끝나게 됩니다. 손양원목사님은 순교하던 1950년 이전에 이미 고신을 떠났고, 주남선목사님도 1951년에 사망하게 되었으며 당시 장로교 총회는 고신을 완전 제거하게 되는데 한국장로교의 1차 대분열을 두고 전선생님은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고신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것만 자기와 같을 뿐이고 나머지 교리나 신앙노선에 있어서는 너무 폐쇄적이어서 도무지 기독교의 참 본질과는 거리가 먼 바리새인 집단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교회를 사회 개량에 사용해야 한다는 전선생님의 주장은 1950년대 초기 고신에게는 아직까지 이해 되지 않는 자유주의 논리였습니다. 당시 전선생님은 대단히 고민하게 됩니다. 목사로 나가서 한국교회를 바로 잡아서 한국을 바로 살려야겠는가, 아니면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을 바로 길러 한국을 바로 살려야겠는가? 이 길이든 저 길이든 그는 민족주의자였고 애국자였으며 사회개량사업가였지 진정한 복음의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고민이었습니다.
이미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선진국의 넓디 넓은 세계관에 감명을 받았고 또 미개하기 그지없는 조국을 기독교적인 선진 민주국가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목회자와 교육가의 길을 놓고 고민하던 그는 한국교회의 고질적 교권투쟁에서는 그 해답이 없겠다고 생각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깨끗하게 길러 그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당시 거창에서 주남선목사님의 장남이 고아원과 거창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학교 운영이 어려워 후임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전쟁이 막 끝나고 이제 복구하고 일어서야 할 시대가 왔다고 판단한 그는 경남 거창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②두 사람의 접촉
출신 배경은 전혀 별개
백목사님과 전선생님의 고향은 덕유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 기슭과 저 기슭입니다. 지금 거창과 무주 사이에는 무조리조트 스키장으로 유명한 덕유산이 있습니다. 백목사님이 예수님을 처음 믿고 활동했던 개명동네는 거창에서 덕유산 정상을 향한 마지막 동네였고 전선생님은 덕유산 정상의 북쪽에 있는 전북 무주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차량으로 불과 몇 분이면 도착할 거리지만 이전에는 수백리를 돌아서 가야 만날 곳이었습니다. 무주와 거창은 선교부도 전혀 달랐기 때문에 신앙성향도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접촉은 고신교단
출신도 신앙출발도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이 접촉하게 된 것은 '고신교단'이었습니다. 6.25기간 중 부산에서 활동하던 전선생님은 고신의 핵심 활동 인물이 되었고 고신 소속으로 있던 백목사님과는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됩니다. 한상동목사님이 장기려박사에게 전선생님을 소개하여 복음병원이 시작되는 정도로 그는 고신의 지도부에 의하여 전폭적으로 신임을 받았으며, 백목사님은 고신의 또 다른 창설자인 주남선목사님에 의하여 고신 지도부에 특별한 신앙인물로 소개되었으며 서부교회가 김창인목사님 후임을 찾지 못해 분란 속에 있을 때 고신 지도부 전체가 나서서 거창에 있는 백영희라야 서부교회를 해결한다고 청빙하게 되는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둘은 당시 고신 내에서 지도부는 아니었지만 최고 지도부가 각각 가장 신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선생님은 행정 활동가로서 그리고 백조사님은 신앙 목회자로서 고신의 앞날을 책임 질 그런 인물들이었습니다. 둘은 같은 고신에서도 걸어가는 길이 정반대였지만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신은 부산이라는 지역을 본부로 하여 움직이든 아주 적은 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인숙권사님을 통한 접촉
순교자유가족후원회를 전영창 안용준 나인숙 3사람이 시작했지만 나인숙선생님은 막 부산에 부임한 백목사님에게 영향을 받게 되면서 이를 사직하게 됩니다. 후원회는 순교자 유가족을 돕기 위해 경제 운용을 가장 중요한 업무로 취급해야 했는데 경제에 대하여는 관리 실력과 양심에 있어 나선생님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선생님은 교회가 사회적으로 활동을 해야 한다는 면으로 주력했고 백목사님은 말씀으로 사는 신앙만을 강조하던 분이었습니다. 나인숙선생님이 후원회에서 백목사님으로 돌아서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차이와 앞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선생님은 나선생님을 다시 붙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때로는 서부교회로 백목사님을 직접 찾아가서 나선생님을 자기가 추진하는 사업에 보내주도록 요청을 하게 됩니다. 거창고의 초기 운영에서 전선생님이 부딪힌 가장 큰 어려움 중에 하나는 열악한 시골의 사학 재정문제였습니다. 전선생님은 학생들을 직접 가르쳤고 학교 창문 시설 하나를 수리하는 일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몸으로 떼우는 실천가였습니다. 교사들에게 월급을 제때 지출하지 못하는 처지였고 농장을 확보하여 재정 수입 등 여러 면으로 경제타개를 위해 노력할 때였는데 그때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인물로 기억되는 이는 바로 나선생님이었던 것입니다.
나인숙선생님은 이미 예수 믿는 방향은 사회활동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고하게 잡았을 때였기 때문에 전혀 미동도 없었고 학교 농장을 구입한 후 최종적으로 학교 살림을 맡아주도록 부탁하러 갔다가 서로의 연락을 단절하게 됩니다.
1960년대 초반 삼봉산 집회 후 거고의 초빙 설교
1960년대 초반 삼봉산 집회를 하고 내려오던 백목사님을 전선생님은 거창고 예배시간 설교를 부탁하게 됩니다. 전선생님은 자기 교단이나 조직에 속해야 초빙을 하게 되는 일반 인식을 아주 혐오했던 분입니다.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있을 때는 서슴없이 강단에 세웠기 때문에 대단히 열린 마음을 가진 인물로 평을 받고 있지만 그 초빙하는 면면을 보면 자유주의 신앙노선으로 뜻이 통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백목사님을 초빙했다는 것은 신앙노선상으로는 청할 수 없는 이였지만 서로 고신 내부에서 가졌던 특별한 관계였기 대문입니다.
한 사람은 보수신앙이었고 한 사람은 기독교 사회주의자였지만 상대방이 어떤 수준의 어떤 인물인지 알기 때문이었으며 더구나 부산에서 거창으로 옮겨 학교사업을 하던 전선생님에게 거창 출신 목회자로서 삼봉산에서 집회를 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분에 대한 관심은 남다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거창고교를 다니는 학생들 중에는 백목사님을 알고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남은 평생을 두고 서로가 극단적으로 비판하게 됩니다. 자신의 신앙노선에 대한 확신만큼이나 상대방의 신앙노선은 가장 잘못된 것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특별히 상대방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항상 두 사람의 평생 강조하는 설교나 주장 속에서 그들이 가장 잘못된 길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의 주인공은 바로 상대방이 되고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은 전선생님 식으로 복음을 사회 개량에 사용하면 기독교가 아니라고 평생 가르친 분이고, 반면에 전선생님은 민족과 사회를 위해서 교회가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웃사랑이라는 복음의 본질을 버린 일이라고 평생 비판했습니다. 주일로 예를 들면 백목사님은 심신을 정성껏 준비하여 예배와 은혜에 전력해야 하고 어떤 세상일이라도 전부 끊어버려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전선생님은 주일에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이것을 지키라 예배를 봐라 하여 교인으로 하여금 짐을 무겁게 하면 바리새파가 되는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물론 전선생님의 경우 거창지역이 고신교단의 주 본산지이기 때문에 고신을 두고 주로 비판을 했지만 가장 극단적인 경우로 예를 들 때는, 고신이 아니라 고신 계통에서 나온 백영희신앙노선 계통 교회들이라고 예를 들고 있었습니다. 자기 눈 앞에서 자기의 신앙노선과 가장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길을 걷는 학생들은 백영희신앙노선 소속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비판의 강도는 적지 않았습니다. 전선생님의 말년 몇 년 간에는 대구로 나갈 때 자기 집처럼 오가는 신도관장로님 이름을 거론해가며 공회의 신앙노선을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공회 소속 학생들에게는 교장실로 직접 불러 회유 탄압 처벌 등을 서슴치 않게 됩니다. 평 교사들도 공회 소속 학생들에게는 영문도 모를 지적과 주시를 서슴없이 하게 되는데 이는 거창고의 신앙노선에 대한 공회의 비판도 그에 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③두 사람의 공통점
열심으로는 아마 두 사람을 따를 인물이 없었을 것입니다. 많이 잔다 해도 하루 4-5시간이고 혹 일이 많으면 3-4시간씩 자면서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두고는 이들은 타협이나 적당한 흥정이 없었습니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고 철두철미하기에 이를 데 없었던 인물입니다.
1970년 초반 전선생님은 해외 원조로 본관 신축건물 4개 층을 지으면서 그 건물의 문고리 창문유리 전부를 다 외우고 그 건축비용의 소소한 것까지 다 파악하고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 백목사님은 서부교회 본관건축을 하면서 역시 문고리 유리창 갯수는 물론 소요된 모래 자갈 단위까지 다 꿰고 있었습니다.
정부의 탄압, 교권의 압력, 사회의 비판이 어떻게 쏟아진다 해도 옳다고 깨달은 길을 걸어가는 데에는 막힘이 없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을 사랑하는 데에도 자신의 전부를 다 내어주는 이들이고 남에게 명령하기 이전에 자신이 그 방면에서 가장 노력하고 앞서 걸어간 실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누구와도 대화나 토론을 하여 밀리거나 져 본 적이 없는 이들입니다. 타고난 말재주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자기가 걸어가는 길에 대하여는 수없이 따져보고 연구하여 어떤 사람의 어떤 반론에 대하여도 비교 우위의 가치를 미리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걸어가는 길에서 두 사람은 전통의 무조건적 반복을 배척하는데 아주 단호하였으므로 좋게 말하면 개혁가들이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혁명적인 발상과 추진력을 가졌던 이들입니다.
우선 전선생님으로 예를 든다면
각종 정부 주도의 공적 행사에 학생 동원을 요구하면 이를 거부한다든지 전국에서 제일 먼저 머리를 스포츠로 길러주는 조처를 포함하여 남녀합반제도 60명씩 3학급을 신청하여 실제로는 45명씩 반편성을 하고 영어 수학과목은 ABC반으로 우열을 나누며, 상급학교 진학율을 높이는데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정규수업을 해제하거나 3학년 학생 중 우수학생들에게는 1년간 학과목을 대입 본고사에 필요한 과목만 선별해서 듣도록 하는 등 가히 상상도 못할 파격적 결단과 추진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1964년에 설립한 부설 초등학교에 당시 미국초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영어교과서를 입수하고 정일권국무총리 집에서 영어교사를 했던 분을 교사로 초빙하여 영어를 가르치며 그 당시 매월 1회 야외학습을 하는 등 소위 교육자로서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막힘없이 다 해 본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는 매가 주효하다는 소신을 가지고 확신있게 체벌을 가하여 유신 정권의 군대 3년보다 고교 3년에 맞는 매가 더 혹독했다는 정도입니다. 결국 시골 저능아들을 상대로 3년간 교육을 시킨 결과 전국이 주목하고 부러워할 대입결과를 내놓게 되자, 그때부터 일약 교육계의 총아가 된 것입니다.
백목사님으로 예를 든다면
주일학교의 제도 조직 운영 근본 시각을 성경 위주 구원 중심으로 바꾸어 그 얻어진 결과나 과정은 이미 이곳에서 많은 면으로 소개했으므로 더 이상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교단과 교회의 운영, 신학에 대한 깨달음과 양성원으로 운영하는 형태, 장로교라는 수백년 전통의 교권 중심의 교단을 개교회중심의 공회 체제로 전환한 것, 교리적으로 건설구원이나 삼분론의 의미는 기독교계의 수백년 역사를 새로 쓰야 하는 차원입니다.
옳으면 수없는 이단 시비와 별별 오해를 다 받았으나 지금은 결과를 놓고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혹 자유주의 노선에서나 그들과 신앙색채가 맞지 않다고 비판 받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백목사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기독교의 전통 보수 신앙 자체에 대한 비판일 것이므로 개인이 비판 받을 일이 아닙니다. 특히 생애 마지막 10여년 동안에는 교계 언론과 이목이 너무 집중되어 하나의 전설과 같은 사례로 소개되었고 이런 현상은 공회 노선을 잘 알지 못하는 교파일수록 더욱 심했습니다.
보수신앙을 견지하면 교회의 부흥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목회현장의 공식이었는데 보수신앙을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오히려 교회 부흥은 가장 이상적으로 이룬 경우였습니다.
두 경우 공통적인 면을 하나 덧붙인다면
언론과 세상의 이목이 너무나도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전선생님의 경우 1950년대에 전북사람이 경남 시골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유교 불교에 찌든 고장에 기독교계통 학교사업을 했으며, 일반 교육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발상과 시도를 했으며, 관리 감독권을 가진 교육당국과 인근 각급 학교와 사사건건 마찰이 되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관내 모든 학교 교사들 교육계통의 인사들이 전선생님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극도로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언론에 유명세를 타게 되자 갑자기 거창고는 하나의 유토피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육에 필요하면 언제든지 매로 다스린다는 원칙에 철저한 학교였는데 사랑과 대화로만 만든 학교라는 식으로 포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또 학교의 학습방향은 일류대학에 사활을 걸고 총력을 기울였고 학생이 자기 적성에 따라 낮은 학교를 선택하면 원서를 써주지 않아서 결국 일류대 낮은 과로 바꾸어야 하는 등 강제와 강행이 적지 않았는데도, 언론에서는 학교의 운영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어 좋게만 선전해 주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대안학교가 아닌데도 대안학교라고 보도되어 학교를 직접 다닌 이들이 질문을 받으면 당황해 할 정도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난의 기간이 대단히 길었고 그 고통이 일반인으로서는 견뎌낼 수 없었던 극단적 어려움이었으나 일단 세상에 알려진 뒤로부터는 성공에 이르기는 과정에 대한 소개는 완전히 땅에서 하늘만큼이나 실제와는 차이가 있도록 미화되어 찬양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백영희신앙노선도 1979년까지는 교계에서 거의 공식적으로 이단이라고 인식이 되어 있었는데 어느날 주일학교 성공사례로 언론에 의하여 취재가 되고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이 보수 중에도 극보수라고 소개가 되고 그동안 있었던 여러 과정 상 일반 교회로서는 문제라고 지적할 수 밖에 없는 모든 문제가 일거에 미화되어 찬양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듣기 괴로운 칭찬은, 어린이를 위한 교회로 운영되고 또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들을 위해 헌신한다고까지 소개하는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백목사님은 사회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히 주어진 형편에서 열심히 전도하자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주변에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존 세력에 의하여 많은 탄압과 고통을 받았고 결국 성공사례로 이 세상에까지 드러났고 한번 알려진 후부터는 실제 이상으로 또는 실제와 다른 모습으로까지 미화되고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을 하나 기억해 볼 만합니다.
④두 사람의 다른 점
기독교의 사회활동
두 사람의 가장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신앙의 근본 방향입니다. 전선생님은 교회를 가지고 사회 개량을 위해 나선 기독교사회주의였고 백목사님은 사회를 교회 건설의 현실로 통과만 했던 보수신앙입니다. 전선생님은 비록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거치며 정통 보수 신학을 공부한 인물이지만 그 보수 신학은 그에게 훗날 평생을 두고 보수신앙을 잡는 일에 사용하게 됩니다. 더구나 보수교단이었던 고신을 거쳤기 때문에 보수신앙과 변론에서 져 본 적이 없다는 기록을 가지게 됩니다.
거창읍교회 제직회에서 남영환목사님과 주일 문제 등으로 격론을 벌였던 일화도 거창 교계에서는 유명합니다. 고신의 실력가로 알려졌던 남목사님이 제직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선생님의 기억력은 특히 좋았고 달변이었으며 호소력이 대단했습니다. 이후로는 고신을 비롯해서 보수신앙에 속한 학생들을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바꾸는 일에 더욱 담대하게 나서게 되었고 수많은 학생들이 그곳을 거치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적 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이에 비하여 백목사님은 보수신앙에 엄격했던 고신이 보수노선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노선으로 융화되면서 기독교 사회주의로 급격하게 기울어지게 되면서 원래 보수노선을 그대로 견지하는 거의 유일한 경우가 됩니다. 염세주의는 아니지만 세상과 교회의 선을 엄격하게 그어 한국내 모든 교회가 거의 기독교 사회주의화 되는 과정에서 엄격한 보수 신앙에 독보적인 걸음을 걷게 됩니다.
그 밑의 교역자나 교인이나 누구든지 기독교 사회활동에 관심이 있거나 의견을 가진 이들은 초기에 발을 붙일 틈조차 없었기 때문에 거의 자유주의 신앙노선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만일 그런 사고방식이 있다면 그의 설교와 지도로 그 사고방식이 고쳐지게 되었습니다. 서부교회의 가장 핵심교인으로 분류되는 이말출 나인숙 권사님의 경우 전형적인 사회봉사가들이었습니다. 처음 신앙은 보수측이었으나 그냥 있었으면 자연스럽게 기독교 사회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다 갖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백목사님의 지도와 설교를 받고 자신들의 근본을 바꾸어 복음유일주의로 바뀌게 됩니다.
신앙의 자유화
전선생님은 그 활동이 사회를 향해 넓어질수록 그의 신앙도 점점 넓어지게 됩니다. 고신에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거창고를 통해 사회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면서 그의 성경관도 급격하게 신신학쪽으로 기울어져 예수님의 결혼설, 에덴동산의 신화설을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정도였고 학생들에게는 민주사회의 정의와 성경의 정의는 동의어로 설명되었습니다. 성경은 오류가 많은 것이며 시대 따라 달리 해석하고 개인과 국가를 위해 사용할 교양서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은 성경위주로 교회를 양육하고 신학까지도 배제하는 성경유일주의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신구약성경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관하여는 국내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본인 사후의 형편
전선생님은 1976년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생전은 고생만 했고 거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학진학이라는 결과를 두고 생각해도 부근에 있는 평범한 사립고와 경쟁 관계에 있는 정도였습니다. 소신있게 양심껏 힘껏 하는 곳이라는 정도로 아는 사람 사이에나 알려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 갑작스럽게 언론의 집중 취재를 받게 되면서 예상치도 못할 방향으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언론은 그 보도의 성격상 호의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하면 소설을 쓰게 되는데 언론보도로 학교가 유명해지고 학교가 유명해지면서 유능한 학생들이 몰리게 됩니다. 이제 배고픈 시절과 오해의 시절이 지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학교의 세력이 확대되어 이번 정권에서는 이 학교 계열의 교장 2명이 부총리에 거론되고 이 학교 교사를 거친 교사가 이미 청와대 핵심요직인 인사보좌관에 임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영창의 이름은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고 있습니다.
한편, 백목사님은 그의 생전 마지막에는 한국교회에서 교계 내 제일의 집중을 받으며 성장했으나 그의 사후 급격한 내분으로 인하여 거의 잊어질 정도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거고의 경우는 대한민국의 손꼽는 일류 상품이 되었고 공회의 경우는 전형적으로 몰락하는 교단역사를 밟고 있다고 보입니다.
3.이제 두 신앙노선을 비교하는 이유는
①하필 거창이라는 동일한 지역에서 완전히 그 방향이 다른 두 신앙노선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은 이런 현상에 대하여 따로 알 것도 또 들을 것도 없지만, 이 신앙노선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거창'이라는 지명은 항상 남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곳은 지역연고나 특징을 강조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곳 신앙노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현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보여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신교단에서 함께 한창 때를 통과했는데, 한 사람은 극단적인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한 사람은 극단적인 기독교 신앙유일주의가 되었습니다. 둘 다 노력 실력 순수 열정 사랑 인내 고난 성공 등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각자가 자기 방면에서는 그 이상의 인물을 찾기 어려울 최고 수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시대를 남다르게 살다간 두 인생이 너무도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성경을 부인하고 교회를 해체하며 복음을 세상 위해 사용하고 갔습니다. 또 한 사람은 성경과 교회를 지키며 세상을 복음 위해 사용하고 갔습니다.
세상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평생을 소신과 원칙에서 살았고 또 성공하고 갔으니 각자가 나름대로 성공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의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엄격하게 신앙노선으로 살펴보는 곳입니다. 한 사람은 평생을 투자하고 노력한 것이 전부 천국의 영생으로 바꾸어졌고 또 한 사람은 천국은 갔겠지만 그의 평생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귀한 인생에 귀한 노력이 전부 헛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에게 이렇게 남다른 길을 걸어 천하가 부러워할 성공을 했다 해도 그 길의 방향이 잘못되면 성공을 해도 실은 실패가 되는 것임을 보여 줄 뿐입니다.
만일 전선생님이 백목사님의 길을 뒤 따랐다면? 아마 최고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요건을 두루 갖추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가집니다. 마치 김정일이 남한의 안기부장이 되고 신창원이 경찰청장이 된다면 그 이상 적절한 인물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자유주의 신앙노선에서도 백목사님같은 인재가 전선생님과 같이 기독교 사회주의로 나섰다면 아마 천군 만마를 얻은 것처럼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론은 그의 신앙 노력과 과정과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신앙노선이 어느 길로 가느냐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위 두 분의 신앙노선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소식 만큼이나 서로에게는 먼 소식이고 서툰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거창고 계통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바로 우리 신앙노선과 함께 고신에서 있었던 때가 있었고 또 비슷한 과정을 많이 겪었으며 더구나 거창이라는 지역적 연결이 있고 공회 내에는 그곳을 거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 큰 일 나고 인생이 완전히 끝장난다는 극단적 위험군으로 봐야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항상 눈앞에 보이는 실패사례라는 뜻입니다.
②두 신앙노선을 특별히 한번 살피는 두번째 이유는, 앞으로 닥칠 우리 현실의 변화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노선은 원래 세상이 이리 가든 저리 가든 상관치 않는 곳입니다. 세상에 어떤 도둑이 어느 땅을 어떻게 먹는다 해도 이곳은 주어진 현실로 볼 뿐입니다. 세상에서 공인을 받는 세력이 세상을 움직이든 세상이 전부 지탄하는 세력이 세상을 움직이든 이곳은 이곳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하더라도 그 현실 자체의 변화를 위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닥친 세상을 우리는 우리의 현실로 맞을 뿐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과 전영창신앙노선은 보수와 자유주의 신앙에서 각각 끝과 끝을 향해 달렸기 때문에 서로가 볼 것도 들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에 접어들면서 백영희신앙노선은 과거 몇 가지 중요한 기억을 되살리며 앞으로 5년간 이 사회를 주도할 집권층 중에서 이곳과 가장 신앙노선을 멀리했던 그들이 여러 형태로 개입되는 소식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쪽 신앙노선이 정권에 직간접으로 관계를 하게 되면 어떤 기본 인식을 가지고 어떤 근본적 변화를 꾀하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혀 모르던 이들이 전혀 모르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꿀 때는 전혀 모르고 그 세상을 우리 현실로 받아들였으나 이번처럼 그 앞날이 훤하게 보이는 파악 가능한 신앙노선이 세상을 그들 생각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면 이번에는 아는 가운데 변화될 현실을 맞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이곳은 세상을 움직이는 일에 상관치 않고 있으나 만일 가정을 해서 이곳이 세상을 움직이는 주도 세력이 된다면 자유주의 신앙노선은 가장 최악의 현실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양심의 결과일 것이고 그것이 필연적일 것입니다. 이 가정을 반대로 가정하면, 자유주의 신앙노선의 의식에 투철한 이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집권세력에 포함이 된다면 다른 신앙노선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으나 이곳 백영희신앙노선만큼은 분명히 혹독한 겨울추위로 현실을 맞게 될 것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1953년 6.25 종전 이후 오늘까지 약 50여년간 큰 추위를 맞아 본 적이 없습니다. 자유주의 신앙노선에서는 1960-1992년까지 30여년간 군사정권 때문에 혹독하게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정권과 타협을 하거나 비호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들과는 신앙적으로 부딪힐 사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따뜻한 봄날이나 여름 정도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신앙노선에서는 1992-2002년의 10년 기간도 타협적이고 청산되지 않은 세상의 보수 잔재들이 있어 대단히 쌀쌀했던 때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세상 보수와 신앙 보수와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지만 결과적으로 20세기의 세상 보수와는 마찰 될 일이 본질적으로 없었기 때문에 큰 불편을 느껴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불쾌한 일들은 항상 보고 들어야 했습니다.
이제 2003년부터는 세상에 아주 진보적이고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집권세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그들과도 역시 마주칠 사안이 없고 좋고 싫고를 따져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곳은 세상 정권과 변화를 하나의 현실로만 상대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권세력 속에 이곳과 신앙노선을 가장 멀리하고 있는 이들이 포함되어 만일 이 사회의 교회 형편에 변화를 그들 입맛에 따라 변경시키려고 보이지 않게 색채를 넣게 된다면, 이곳은 이유도 없이 기침을 하고 폐병앓는 사람같은 얼굴색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그것까지도 현실로 받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백영희신앙노선입니다만 앞으로 변화될 수많은 사회 변화가 지금 숨가쁘게 쏟아지고 있고 우리는 어느 면을 더 조심하고 어느 면을 더 경계해야 할런지는 분명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다리를 치는 적에게 가슴을 보호하거나 가슴을 치는 적에게 다리를 감싸는 행위는 지혜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면, 거창이라는 지역과 관련있는 자유주의 신앙인사들이 앞으로 우리 사회를 운영할 사회적 유명인사로 언론에 등장할 때 안면 있다는 생각만으로 반갑게 대하기에 앞서 그들과 우리는 그 신앙노선이 극과 극으로 다르다는 더 중요한 면을 보셨으면 합니다. 비록 그 인사들이 직접 국정을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이미 그들 중 일부는 중용되고 있고 또 다른 이들은 중용될 가능성이 밝혀진 이상 현 집권세력은 최소한 신앙노선의 순수한 면에서만 본다면 자유주의 신앙노선과 뜻이 통할 것입니다. 그 속의 내용이 그러하다면 밖으로 나타날 행동은 필연이라는 점을 봐야 할 것입니다.
과거 모든 정권도 이런 시각으로 분석을 하면 한국교회사가 해부되어 눈앞에 보일 것이나 이곳은 세상을 쳐다 보는 것조차도 될 수 있으면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어 이번 글 하나로 과거와 앞날의 많은 세상 형편의 단면을 한번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