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희] 장례식 때 사용하는 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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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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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이동
/초기화면/백영희/남단에서2/에 있던 자료를 게시판 통합으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원래 자료는 ‘2001/08/26에 올렸졌던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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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준목사님 돌아가신 1987년 8월 15일, 그날 저녁 밤늦게 청도 현지에서 서부교회 사택으로 목사님을 옮겼고 다음 날이 주일이어서 바로 입관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영준목사님은 서부교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중심 교인들이 백목사님 사후에도 진정으로 모시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에 이 장례식을 총공회 신앙노선에 백목사님 뒤를 이을 사람은 없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치르게 됩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장례식 이면에는 대단히 무거운 분위기가 있었고 이를 모르는 일반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사랑하는 백목사님의 사랑하는 제자를 잃은 슬픔으로만 장례식을 보게 됩니다. 한편으로 이 장례식은 곧 닥칠 백목사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기초자료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과정과 세부사항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바쁜 장례이기도 했습니다.
토요일 밤늦게 입관을 마쳤을 때 너무도 강렬하게 눈에 들어오는 부자연스러움이 있었습니다. 눕혀 놓은 분은 서목사님이 아니었습니다. 서목사님은 유교에 몸담고 있는 분이 아니었고 그분은 한복애용자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분은 비록 작은 체구였으나 단단하기 그지 없었던 검은 양복에 번쩍이는 영감과 진실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습관대로 입관을 진행하였고 마지막 입관을 마쳤을 때 모습은 조선 5백년간 지켜오던 유교식 베옷으로 그분을 감아놓고 마무리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아쉬웠으나 다시 갈아 입힐 사안으로는 생각지 않았고 그대신 그 자리에서 곧 닥칠 백목사님 장례에는 전통 한복식의 베옷을 배제하고, 우리가 늘 강단에서 뵙고 또 집회에서 뵙는 백목사님의 모습, 더 가꿀 것도 없겠으나 그렇다고 평생을 말씀에만 살다갔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분에게 기어코 조선식 염을 하는 일은 없애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장례 후 가족들에게 설명을 하고 다시 목사님에게 이 문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백목사님께 목사님 자신의 장례를 두고는 말할 수 없으나 서목사님의 장례을 참고로 앞으로 수정해야 할 만한 문제로 말씀을 드렸고 그기 대해 목사님의 여러가지 말씀을 들으며 확정하게 됩니다. 그만하면 백목사님의 장례 때 목사님의 모습은 쉽게 그려 볼 수 있었고 또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1989년 8월 27일, 갑자기 닥친 백목사님 순교는 미리 준비하고 기다렸던 사람에게는 수 년에 걸쳐 예고된 일이었고 준비는 너무도 닥친 급박함을 다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1989년 8월 28일, 일반인들에게 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관 속에는 평상시 백목사님의 모습이 모든 사람을 맞고 있었습니다. 한없는 눈물이 5층 목사님 서재 창문 앞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통곡과 애끓는 가슴마다 목사님을 통해 역사했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의 과거가 맺히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역사 이래 이런 은혜 세계가 역사 현실에 있었던 때가 있었을까 라고 회고하는 분들이 지금도 허다합니다.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을 본토와 친척 그리고 아비집을 초월하고 그가 사신 평생의 신앙본질을 외부로 표현했다는 한 가지에서 그 훗날을 이어갈 방향을 잡고 있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의 수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옛 방식을 바꾸어야 할 것 같고 그렇게 하는 것이 비록 서양 문화 유입의 한 예라는 오해를 받더라도 우리 믿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가져야 할 생활의 일부겠다고 느낍니다. 오늘도 그때를 기억하는 몇 사람은 장례식으로 마지막 보내는 성도는 평상에 가장 신앙생활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옷을 입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