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설교를 사이버예배로 보고 이를 반대하는 분들이 우선 넘어야 할 선제 조건
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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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7 00:00
재독설교를 사이버예배로 보고 이를 반대하는 분들이 우선 넘어야 할 선제 조건
1.교회의 타락을 판별할 수 있는 선행지표들로 예를 들겠습니다.
재독 설교를 반대하는 교회들마다 왜 한결같이 예배 황폐화가 가속되고 있는가? 교회의 타락과 변질은 그 선행지표가 있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선행지표로 지적을 하겠습니다.
①예배가 그렇게 소중하다는 분들이 예배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1주 11번 예배를 줄여 나가고 있습니다. 금요일나 수요일 예배를 성경공부나 찬양예배 등 각종 이름을 붙여 완전히 예배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새벽예배도 대개 성경공부로 바꾸고 있습니다. 명백한 변질이며 탈선의 선행지료입니다.
②예배 중 설교 비중을 현저하게 줄이고 있습니다. 고사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설교입니다. 대개 50분 안팎으로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정상적인 예배인데 3-40분으로 또는 30분 이하로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배에 설교가 줄어드는 것은 예배에 보조될 순서들이 기형적으로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③설교 내용이 교리 중심에서 세상 도덕과 성경공부로 교체되고 있습니다.
재독 설교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죽은 자의 설교는 새로 주신 현실에 새로운 영감으로 역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들고 있는데, 정작 재독 반대하는 공회와 교역자들은 주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감을 거부하고 그대신 백목사님보다 더 일찍 죽은 이들이 인쇄해 놓은 신학과 성경지식만 순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예배 중에 찬송보다는 복음성가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현재 교계와 재독 반대 교회들이 사용하는 복음성가란 교회 내 유행가로 표현되는 수준입니다. 예배 찬송이 복음성가로 대체되는 것은 감사를 느끼는 것이 얕아지고 있다는 선행지표입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와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라는 찬송의 횟수가 줄어드는 것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준으로 신앙이 세상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⑤예배 찬송에 동원되는 악기의 종류와 연주가 급격히 많아지고 있습니다.
찬송의 필수 구성요건 중 하나는 곡입니다. 음의 높낮이와 속도를 맞추어 찬송을 한 소리로 하도록 하기 위해 최소한의 악기로 보조를 하던 것이 예배 찬송입니다. 기타가 들어오고 드럼이 예배당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해명이 필요 없는 타락입니다.
⑥찬송에 율동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말씀의 전율보다 흥에 겨워 흔들고 있습니다.
무엇 하나 그 자체가 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주일학생에게까지도 그 횟수와 정도를 줄여나온 것이 신앙의 성장이었는데 이 방향을 바꾸어 나이를 올려 가며 그리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생 대학 청년들이 남녀 함께 흔들면 덮어두었고 또 덮어놓고 보관할 이성욕이 예배당 안에 함께 횡행합니다. 연애당으로까지 바뀌고 있습니다. 이미 다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⑦예배와 전도 외에는 모일 일이 없었는데 사교적 다른 모임은 오히려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2.계속해서 한 주제로 살피는 것은 연구목적입니다. 회피하지 말고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교회가 사교모임으로 변질되는 순서가 다 위에서 말한 선행지표를 밟게 되어 있습니다. 재미는 있을 것입니다. 예배와 전도 모임 외에는 만날 일도 시간도 없었는데 예배를 줄이는 대신 사귈 기회가 온 교회를 주도하게 됩니다. 재독을 반대하는 교회일수록 관광 가는 횟수가 많아지고 이전에 하지 않던 세상에서도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에 분주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까지 단체 관광에 광분했던 것은 차라리 입을 닫는 편이 낫겠지요?
이런 일들은 전반적으로 수치로 기준을 세워 정죄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도와 횟수를 보며 발전해 가는지 타락 변질해 가는지는 뚜렷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왜 재독을 반대하는 공회와 교회일수록 그렇게 또렷하게 이 기준으로 구별이 되는 것일까요?
백목사님 생전에도 그렇게 변질 타락하고 싶었던 것이 우리 속에 다 내재되었던 우리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까 바로 믿는 길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체질을 바꾼 이들은 오늘도 그 설명을 다시 들을 때마다 그때 그렇게 믿음으로 체질을 바꾼 것이 옳고 또 새로 닥치는 더 위험한 오늘의 타락 속에서 믿음으로 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목사님 생전에 자기 체질을 바꾸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억눌렀으나 잠재되어 있던 속화체질을 백목사님 사망과 동시에 뚜껑을 열고 내놓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던 것을 원하는 대로 지금까지 10여년 넘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깨 너머로 교계가 재미있게 하던 것을 거진 다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한이 맺히도록 해 보고 싶던 가출을 실컷 해 본 것이 지난 10여년이라고 본다면, 백목사님 사후 이전 교훈으로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자고 재독을 주장했던 이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로는 모든 수단 모든 발언을 다 동원하여 재독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버지 잔소리가 싫어서 있는 힘을 다해 먼 나라로 가 본 생활이 재독 반대하는 분들의 걸음입니다. 아버지 잔소리가 싫어서 나가야겠는데 핑계를 찾은 것이 아버지가 죽었으니 이제는 먼 나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죽은 것이야 우리가 아는 일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진리를 소개한 아버지의 설교까지를 진리까지를 함께 파묻었던 것입니다. 딴 진리를 찾아보겠다는 분, 새 우물을 파겠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앞에 받은 것이 틀림없는 도라면 달리 파고 다른 곳에 파면 틀림없이 틀린 것이 나옵니다.
이제 이곳에서 재독 반대하는 분들의 반대 행위를 한번 더 분석하고 살폈습니다. 그리고 재독 반대하는 분들이 해명할 수 없는 숙제를 드렸습니다. 옳은 길은 우선 고성방가로 이긴다고 이겨지는 것이 아니고 세월에 상관없이 차근차근 살펴보면 결국 옳은 것이 이기게 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계속 살피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혹 이곳이 틀린 것도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이곳은 글로 적는 곳이니 했던 말도 하지 않았다고 횡설수설하며 취한 사람으로 발언했던 과거와 다르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도 적지 않습니다.
재독 설교를 반대하는 이들의 교회는 왜 교회적으로 또는 공회적으로 예배가 천주교식으로 형식화되거나 아니면 밤무대의 난잡함이나 청소년의 또래 집단의 놀이마당으로 변질되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또 재독 설교를 반대하는 분들은 자신 소속의 교회나 공회가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을 주도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하도록 지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은 공통점입니다. 과연 재독 설교를 반대하는 분들이 자신들이 말하는 예배관이 옳다 하더라도 그 주장하는 예배관에 정면 배치되는 일을 해 하고 있으며 또 하도록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있는가? 자신들이 진정 목표하는 예배는 천주교식이거나 아니면 밤무대식인데 그런 신앙노선을 반대하는 이들을 꺾기 위한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재독을 싸움거리로 조작한 것이 아닌가?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 대한 답이 없을 것입니다. 진심을 말하자니 그렇다 해야 할 것인데 그럴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런 목적이 없었다고 말하려면 자신들이 주장한 예배관으로 자신들의 예배행태를 정죄해야 할 것입니다.
2. 재독설교를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결같이 ‘예배는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1.예배의 숫자를 줄이는 죄를 짓든지 예배당 근처로 교인을 이주토록 해야 함
①재독반대행위는 예배의 중요성을 아는 표현, 재독 찬반논쟁은 예배의 방법론의 이견
재독을 두고 찬반이 벌어지는 것은 서로가 같은 신앙노선이 하나 있다는 전제로 출발하는 것이다. 예배라는 것은 신앙생활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예배는 모든 신앙생활의 전부의 전부라는 중요성에 대하여는 재독설교 찬반측 누구나 일치하고 있다.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이렇게 예배를 드리나 저렇게 예배를 드리나 그저 그렇게 지나갈 일이지 재독설교만은 안된다고 이렇게 천지를 진동시키면서까지 고성방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독설교를 막아야 한다고 움직인 분들의 발언과 행동은 그 끝이 없는 지경에까지 나아갔으니 그런 행위를 세상 도덕 예절 차원에서만 비난할 것이 아니고 그 극단적인 행동이 바로 예배의 중요성을 알고 예배를 예배로 지키고자 하는 지극히 값진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재독찬반논쟁을 두고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양측 공히 예배는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재독예배를 반대하는 분들이 반드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을 지적한다.
②기독교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1년 3-4차례 예배, 잘 믿는 사람의 경우 1주 한번의 예배는?
예배가 중요하다는 말은 온갖 표현을 다 동원하여 나열하는데 정신도 없는 것이 신학교과서이며 그 참고서들이며 모든 예배 관련 발표문들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된 것은 그렇게 소리 높혀 발표하며 외치는 이들마다 그들이 속한 교회 그들이 맡고 있는 교회, 그들이 속한 교단의 예배는 너무도 가속도로 예배 황폐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외치는 집단치고 내부적으로 민주주의식으로 운영하는 곳은 오히려 없는 세상현상과 같이 예배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는 사람들이 속한 곳일수록 예배는 불교나 천주교식의 의식집행화 하고 있으며 결국은 1년에 수차 또는 1주에 1차 정도로 예배를 천대하고 구박하여 박물관 전시용으로 박제를 해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오늘 예배는 고려장이 되었다고 할 정도이다. 예배의 경건과 정통 예배 의미를 끝까지 지키는 곳은 완전히 천주교식 박제화된 예배를 향하고 있고, 예배가 실제 신앙생활의 중심에 서서 예배에 들어가는 시간, 횟수, 활동의 중심축이 되어있는 교회들은 열린 예배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이는 밤무대나 대학생 청년 남녀들의 광란의 사교장으로 나가고 있다.
현재 재독설교가 문제가 되는 곳을 예로 들 때 순복음교회 등 사이비라는 시비의 대상이 된 교회들과 함께 총공회 재독예배를 묶어 말한다. 녹화를 재생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으로 잡았다면 세상 녹음기와 비디오 영화 촬영으로 재생되는 모든 라디오 TV 영화관 전부를 같은 차원에서 논해야 하는 우스운 논리가 된다. 공회의 신앙노선은 예배 등 이 문제에 관하여 여타 다른 교회들과도 너무나 다른 예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배제하고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제 공회의 재독문제만을 가지고 그 반론하는 측과의 대화이다. 중요한 것은 예배가 그렇게 중요하면 왜 재독하지 않는 교회일수록 예배의 횟수와 예배 시간의 지속 그 내용에 있어 그들이 말하는 예배의 본질에서 극단적으로 멀어져 가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재독을 좋아하는 교회일수록 재독설교를 설교시간에 사용할 수 있느냐는 연구과제 하나를 제외하고는 예배를 아직도 예배로 드리고 있으며 그 예배가 예배로 말세 오늘까지 지켜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편집중 H.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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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요성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점 하나 티 하나도 있으면 안된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예배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며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의 전부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그 목 서로가 다른 방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