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고통, 버릴 수 없는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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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31 00:00
모태 신앙이어서 믿는 가정에서 자라는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편이며
시골 작은 교회 몇 명 주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썰렁한 예배당 분위기도 익숙한 편이고
초등과 고교를 국내 손꼽을 넓은 기독교계 학교로 다녀 바깥 분위기도 일찍 익혔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장로교 합동측 총회 공과를 배웠고
그 교회 주일학생이 수백 명 될 때 고등학생으로 반사를 했으며
서울 사직동에서 반사를 하고 서부교회에서도 계속 반사를 했기 때문에
시골이나 도심 가운데서나 많은 종류의 많은 학생들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소파에 앉아 집주인 따라주는 차 한 잔을 마신 첫 경험이 주일학교 심방하다 그렇게 되었고
아파트 구경도 심방하다 처음으로 문을 열고 안을 구경했습니다.
공동묘지 묘 한 개를 뭉개고 합판 몇 개로 집을 만든 달동네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집의 앞뜰에 또 뒤뜰에 묘 몇 개씩이 있었습니다.
그런 동네를 보게 된 것도 반사를 하면서 심방 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사생활은 내게 있어
신앙생활하며 거치게 되는 하나의 경력 정도가 아니고
세상면에서까지 많은 것을 배우게 했고 신앙면에서는 신앙의 전부가 되었다 할 정도입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 반사들 중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했다면
누구든 이런 글을 읽으며 남의 말이 아니라 자기 경험으로 읽을 것입니다.
이렇게 반사생활을 하다가
나의 수준에서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부산시립도서관장님이 포니 자가용에 기사를 운전시켜 출퇴근하는 모습을 보던 80년대 초반
나는 신학교 구경을 처음하였고
그곳에서는 반사를 하면서
유치원생 하나 데려오려고 25인승 중형버스만한 승용차로 왕복 1시간 거리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굴비 엮듯 1백명 주일학생을 줄세워 데려왔으니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 때문에 체감온도는 엄청났습니다.
그 순간도 서부교회에 있던 동료 반사들은 여전히 1백명 주일학생을 그렇게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1989년 목회를 나온 이후에도
남들에게는 목회자였으나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서부교회 반사였습니다.
지금도 '중진'반사 정도로 나를 생각하지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나에게 성경을 가르친 분에게 배우며 가지게 된 신앙의 후천적 체질입니다.
주일학교를 다녔고 또 주일학교 반사생활을 통해
나의 모든 신앙생활과 나의 모든 세상생활이 다 형성되었다고 할 만한
이런 주일학과 관련 세월 속에서
나는 늘 마음에 하나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못된 아이
아무리 희망없어 보이는 학생
아무리 교회 신앙과는 도저히 맞지 않을 아이라고 보여도
나보다는 틀림없이 나을 것이라는 남모를 확신이 있었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닐 때
나를 희망있게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주일학생을 겪어보면서 서부교회 8천명 출석 주일학생을 겪어보면서도
나만큼 못되게 행동하는 학생은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그들을 보며 속으로는 적어도 나보다는 나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이렇게 되뇌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나였습니다.
1969년
주일학교를 졸업하는 마지막 해 성탄절 아침
그 날은 눈이 올 듯 날이 흐렸습니다. 추운 시골이어서 더욱 몸을 움츠리게 하던 때입니다.
그래도 그 시절 성탄절은
그렇게 멋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전기가 없고 가난하여 온 들판에 불빛 보기가 어려웠고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은 곳이어서
예배당에 반짝등 몇 개가 온 들판에 성탄절의 정취를 그렇게 강하게 남기고 있었습니다.
불교 유교가 너무 강해서
신앙있는 어른들 주일학교 반사선생님들이 그렇게 노력해도
막 지은 블록 30여 평 될 듯한 예배당에는 평소 주일학생 2-30명 앉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성탄절에는 하얀종이에 고물 떡 2-3조각 나눠주는 그 선물 때문에
일년에 딱 한 번 어지간하면 학생들이 교회를 나오는 때입니다.
그때만큼은 예배당은 비좁게 촘촘해집니다.
성탄절 아침의 교회 모습은 어린 눈에도 아주 다릅니다.
모두가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그리고 다들 즐거운 얼굴 빛이 가림 없이 나타납니다.
특히 반사선생님들은 그날 아침만큼은 그렇게 활발하게 온 동네 동네를 다닙니다.
나는 지난 6년 주일학교와 1년 유치부까지 합하여 7년간
연말 시상까지 겸하는 성탄절에 특별한 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출석한 학생 전부에게 주는 연필 하나 달랑 받는 것이 늘 나의 상 전부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특히 믿는 집 아이들은 저학년 고학년 상관없이 별별 상을 받습니다.
1년 동안 한 짓은 생각하지 않고 연말시상과 성탄절에 상이 없는 것은 늘 불만이어서
주일학교 부장을 하고 계시던 교회 사모님 뒤를 따라 다니며
'자기 아들만 상 주네...'
계속 외고 다녔습니다.
그때 그 사모님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목회하며 누가 어떤 모진 소리를 해도 내가 못박았던 소리보다 못하다 생각하여
내게 오는 못질은 잘 참는 편입니다.
주일학교 마지막 졸업하는 해인데
역시 상이라고는 단 1개도 없었습니다.
한 살 밑에 짝이 되어 늘 다니던 아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은 그날 내가 주일학교 졸업하는 마지막이니
그동안 주일학교에 섭섭했던 것을 다 풀고 나간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 성탄절 아침 예배 1시간 전부터 예배당 대문 양 기둥에 둘이 버티고 섰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교회 오는 아이들 중에 평소 교회를 잘 다니던 학생들 외에는
전부 대문에서 쫓아냈습니다.
악을 쓰고 주먹을 내밀고 욕을 해서....
쫓겨난 학생들 중에서는 중학생들이 동생들과 함께 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추운 때고 가난한 때여서 양말도 없이 맨 고무신만 신고 오는 아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어서 텃세가 통하던 때였습니다.
덩치나 주먹이 세어 쫓아낸 것이 아니고 교회 집사 아들들이기 때문에 텃세를 한 것입니다.
반사선생님들은 동네마다 다니며 교회로 아이들을 보내고 있고
대문에서는 두 놈이 오는 아이들을 크고 작고 다 쫓아 보내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맞아 죽어도 싸다 할 행동입니다.
더러 미운 짓을 해도 어찌 보면 웃어 넘길 수 있는 것이 보통 주일학생 중 못된 녀석들인데
해도 해도 너무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에는 예배당에 온 학생들이 평소와 비슷했고
아침 일찍 온 동네를 다니며 교회로 학생들을 보내고 예배시간 다 되어서 예배당으로 땀을 흘리며 뛰어 들어오던 선생님들의 분노, 허탈, 괘씸한 표정을 보며 우리는 시침을 떼고 상을 주지 않았으니 당연하지 하며 히죽거리고 예배당 마당에서 모른 척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6년간
예배시간에 공과 가르치는 선생님을 얼마나 골려놓았든지
설교를 하던 선생님이 성경 찬송가 공과책 필기노트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치켜 올린 다음 그대로 냅다 던지는 일을 종종 만들고, 강단에서 찬송을 인도하다 이 녀석을 잡으려고 쫓아 내려오게 하며 ...
그렇게 7년 주일학교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때 그런 아이가 지금 이 홈에서 문답게시판의 답변을 적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그때를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 참지 못할 말을 하고 행동을 내게 해도
교회 안에서 그 어떤 종류의 몹쓸 행동을 봐도
나는 나를 생각해서 최소한 그에 대하여 소망을 버려 본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때 그런 놈들을 그냥 두고 본 분들이 아쉬워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일반 반사나 목회자가 하는 행동과 비교하지 못할 만큼 진압조처를 해버립니다.
아직까지 나 정도로 못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겉으로는 야단도 치고 눈치도 주고 이런 저런 말도 했지만
속으로는 진정 그들을 희망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신앙 노선에서 진리를 접하고 귀가 열리던 날까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박아놓았던 못들을 잊지 못합니다.
그것이 오늘 나에게 주는 장점은 단 한 가지입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흉칙하고 몹쓸 인간을 만나게 될 때
주님이 그 마음에 빛을 한번만 비추시면
그도 이 복음을 위해 미칠 수 있으니...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할 뿐이고
나 자신에게는 과거 값을 갚는 기회이니
못되게 구는 사람을 만날수록 더욱 과거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갚을 기회가 될 것이므로
그런 기회들을 환영합니다.
그때 착하게 주일학교를 다녔더라면
만일 신앙이 없었으면 차라리 세상 영어공부라도 좀 해 두었더라면
그 뒤에 철이 든 다음 귀하게 사용할 시간을 더 귀하게 사용했을 것입니다.
단번으로 지나가는 그 좋은 시기를 그렇게 허송했으므로
지금도 남들에게 새롭고 강하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데는 늘 나의 목소리에 힘이 빠집니다.
소망을 가지자고 힘없이 위로나 할 따름입니다.
이 홈 운영 7년을 거의 다 채우면서
개인적인 회상은 거의 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의 과거와 경험은 자기에게 앞으로 접할 이를 위해 사용할 재료가 됩니다.
이왕이면 힘있게 바로 믿고 갈 귀한 재료를 준비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필이면 힘없이 소망의 위로나 해야 할 재료 밖에 없으므로
이 홈의 모든 글은 그 글이 해골 골짜기의 말라빠진 뼈들을 여호와의 군대로 일으켜 세우는 능력은 가지지 못하고 겨우 말세 하루하루를 버텨가며 사는 정도라고 자책합니다.
평소 개인사를 거의 적지 않는 것은 더 귀하게 소개할 내용이 많아서입니다.
성경, 교리, 설교 내용의 핵심,
그리고 모든 사람이 긴급하게 판단해야 할 갈랫길의 구별 ...
이런 것이 더 귀하여 달리 사용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개인의 개인사는 간간히 먹는 간식 같은 것인데
교회나 홈이나 이런 것이 섞이기 시작하면 입맛이 달라지고
자칫 예배당이나 홈이 유아들 놀이방이 될 수 있어 또한 조심하는 편입니다.
오늘은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이
대규모 치과 수술을 받는 날이고 달리 맡길 성질이 아니어서
모처럼 2시간 정도 빈공간을 가졌습니다.
치과 한 쪽 모퉁이에 인터넷이 있어 잠깐 과거 참 패 죽이고 싶었던 옛사람이 기억났습니다.
동시에 이 홈 이용 모든 이들이
평소 이 홈에서 너무 강하고 너무 살벌하기까지 표현되는 비판들을 접하며
이 홈을 도살장의 칼잡이로 생각하여 자비없는 성향을 버리라고 충고한 경우가 기억났습니다.
그때마다 아주 간략하게 이해해 달라는 정도로만 설명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기회가 있어
이 홈이 이 홈 이용 모든 분들과 이 시대 교인들을 향해
이 홈의 깊은 중심은 그 누구를 상대해서라도 늘 소망으로 상대했다는 점을 한번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글은 재인용을 금합니다. 경청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홈에 올려진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혹시 교회와 복음을 가로막은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지 미화되어 읽힐까 염려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