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포입은 부자의 구원은?

남단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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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홍포입은 부자의 구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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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구실/문의답변/314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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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에 관한 질문


백목사님의 성경해석중에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불택자라는 가르침을 견지하다가 후에 기본구원은 받았으나 성화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기능의 정력이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고 있다는 가르침으로 돌아서신줄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관련해서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자가 기본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부자는 중생되었으니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할것입니다.


그러면
첫째로 부자의 영은 나사로와 함께 아버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으로 보는것이 마땅한지요?

둘째로 기본구원을 받았아도 신앙의 행위가 없었으니, 다시 말하면 심신의 기능이 구원에 이르는 정력에 이르지 못하고 죄에 이르는 기능으로 화하여 나아간많큼 성경에 기록된대로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고 있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부자의 기능의 정력만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고 있는 것이 되는데 제 견해로는 한가지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그 문제는
위와같은 견해를 견지하면 한사람의 인격에 대한 정의에 대하여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네이버백과사전에서 인격의 정의를 찾아보면
"인간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나타나는 성격 및 경향과 그에 따른 독자적인 행동경향 ---요컨대 인격은 의식의 현재의 단면에서의 통일성, 시간상의 변화를 통하여서도 유지되는 통일성을 요건으로 한다."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인격에 수반되는 필수요건중 하나는 의식의 단면이 통일성이 유지되어야 하고 시간상의 변화에도 유지되어야 하는 통일성이라고 볼것 같으면

부자의 인격의 중심은 그의 중생된 영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여 하고 지옥에서 부르는 기능의 정력에 있는 것입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어느면에서는 진실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호랑이는 인격으로 표현할수 없는 흙으로 돌아갈 존재로 흙뿐인 가죽만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이 말에는 이름이 바로 그사람의 인격을 대표하는 하나의 표현기관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어디에나 편재하시고 인격적으로도 여러 사람을 얼마든지 상대하실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주님은 보좌우편에도 계시고 내 마음에도 계시고 저 사람마음에도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하면 그는 지금 현재 중생된 영의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거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바울의 인격이라고 불릴만한 곳은 바로 하나님나라는 곳에 현재 시간적으로 있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바울의 정력이 얼마많큼 구원이 이루어지고 안이루어졌는지는 주님 강림시에 부활한 몸을 받아봐야 알수 있겠지만 상식적으로도 바울의 기능의 정력이라고 하는 심신 그것도 백목사님의 교훈대로라면 심신은 물질인데 여기에 바울의 인격이 거할수 있겠는지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한 사람의 인격에 합치되는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이같은 바울의 경우을 예를 들어 부자의 경우를 본다면 부자가 지옥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하고 부르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인격이라는 통일성이 완전히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중생한 사람이라면 그 중생된 영은 아브라함품에 있을것이고 그 기능의 정력은 지옥에 있는 것이 되는데 부자의 중생된 영이 아브라함품에서도 아버지여 하고, 지옥에서도 심신의 기능이 아버지여 불렀다고 하면 한사람의 인격이 두인격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보는데 그러면 인격의 필수 요소인 통일성이 상실되는 것 아닙니까?

이같은 문제는 영과 혼을 하나로 보고 몸을 다른 하나로 보는 견해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같은 견해에 따르면 나사로는 분명 불신자이며 그 영혼이 지옥에서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그 인격의 중심이 바로 지옥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능구원이라는 말은 순종으로만 표현 하면 아주 쉬운 문제이고 이 순종의 문제만으로 이끌고 가면 얼마든지 성경이 보여지는데서 힘을 얻지만 제자신이 무엇좀 알아보겠다고 이렇게 저럴게 따져보면, 앞 뒤가 잘 맞지 않는,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면들이 제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저의 이와같은 추론이 맞기나 하는 것인지 아니면 목사님 지적대로 아직 기능구원의 개론도 파악 못하고 있는 것인지 도움을 청합니다.



(답변) 안 믿는 세상이 알고 있는 인격의 통일성과 성경의 인격 언급은 아주 다를 것 같습니다.


기능구원론과 관련된 문제는 이곳 홈에서 여러번 소개한 기억이 있습니다만, 이번 질문은 비교적 소상하게 문제점을 지적하셨기 때문에 혹 재론이 되더라도 자세하게 답변해 보겠습니다.


1.질문하신 내용은 '홍포입은 부자'의 예화에서 살펴본 '기능구원' 문제입니다.

①'기능구원론'이란?

우선, 질문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관련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1980년대 말, 백목사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기능구원론' '중생의 본질' 등 몇 가지 중요한 교리를 마지막으로 집중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번 질문은 그 중에 하나인 기능구원론에 관련된 것입니다.

기능구원론은,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을 둘로 나눌 때 건설구원에 속하는 분야입니다.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되는 순간 무조건 천국을 가게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받아 가지는 것이므로 이를 기본구원이라 하고, 그 믿는 사람이 각자 평생 노력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길러가는 것은 건설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건설구원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이전처럼 죄를 지어 죄의 실력을 쌓아가느냐 아니면 이제 중생된 이후에는 의의 실력을 건설해 가느냐는 것으로 각자의 실력은 결정됩니다.

의를 행한 만큼 그 사람의 몸과 마음에는 의를 행하는 기능이 생기고 자라가는 것이니 이를 기능구원이라고 다시 세분하여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기능이 얼마나 의를 행할 수 있도록 의의 기능을 많이 가지고 또 강하게 가지고 있느냐는 것에 따라 믿는 각 사람의 신앙건설은 차이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이 천국에 갈 때는, 자기가 만든 의의 기능은 가지고 가게 되는데, 자기가 만들어 둔 죄의 기능은 지옥에 버리고 가야 합니다. 이 지옥에 버려진 죄의 기능이 집에서 갖다 버린 쓰레기처럼 그냥 소각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죄의 기능이 끝없이 계속되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원망하며 애통하게 될런지?

백목사님은 홍포입은 부자의 예화를 통해, 믿는 사람이 비록 천국에 가게 되더라도 자기가 만들어 놓은 죄의 기능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물 한 방울을 찾으며 고통받게 될 것을 생각하여, 오늘 죄와 의를 두고 망설이는 믿는 사람들에게 심은 대로 거두는 훗날을 생각하고 의로 살기를 죽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쳤습니다.


②이 기능구원론에 대한 반론은 공회 내에서부터 크게 일어났었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단일성이기 때문에 기능의 분리도 문제가 있지만 그것보다 분리된 기능이 호소한다는 것은 아주 잘못되었다는 취지로 공회내에서도 강력한 반론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반론은, 1980년대 말 기능구원론을 가르치던 당시 백목사님 소속 교단인 총공회 내부의 신학교수들과 공회의 최 선임 목회자들 그리고 공회 전체 교역자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소장층 주도 인물들이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그분들은, 인격이란 단일성이므로 둘로 나뉘어 희로애락을 표시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백목사님 밑에서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일반 직원이나 교인들은 반론이 왜 나오는지를 모르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③또 한 가지 반론은 기능구원론이 나오기 이전의 삼분론과 건설구원론을 반대한 것입니다.

'기능구원'에 관련된 반론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곳은 공회 내의 반론보다 1996년 교계 월간지 '교회와 신앙' 6월호에서 최삼경목사님이 이곳 신앙노선을 비판한 글을 더 관심있게 대하고 있습니다. 공회 내에서 반론하는 이들은 삼분론과 건설구원론 그리고 중생교리를 다 인정하고 있는데 홍포입은 부자의 기능이 호소한다는 것만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기능의 호소를 부인하려면 삼분론, 건설구원론, 그리고 중생교리를 먼저 부인해야 논리적으로 맞는데, 공회 내부의 반론은 반론하는 자신들의 말만 가지고 듣는다 해도 스스로 모순이어서 별로 비중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삼경목사님의 반론은 지금까지 공회 외부에서 나온 반론들과 달리 따져봐야 할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분도 처음에는 '교회와 신앙'이라는 월간지에서 상담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공회 신앙노선을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정죄를 했었는데 이에 대하여 공회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사과를 했고 이어 신학적으로 보다 냉정하게 이 교리에 대하여 살펴보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후에 그가 강의하는 신학교 학생들에게 삼분론과 중생론 그리고 건설구원론에 대하여 '인격의 단일성'을 중심으로 조목조목 문제를 제시하였고 그 자료를 이곳 홈의 /초기화면/연구실/자료/의 제일 마지막 4개 페이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분의 지적에 대하여 이곳에서 답변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어 총 35개 정도의 자료가 있습니다.

그 반론 내용은 이제 질문하신 분과는 정확하게 일치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로 같은 시각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인격은 단일성이므로 인격의 분화 또는 분리를 전제로 제시된 백영희 교리체계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우선 그분의 글 2개를 바로가기로 볼 수 있도록 여기 소개하겠습니다.

(*참고 자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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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공회/교리]"거듭(중생)난 영은 ..."는 주장은 비성경적 구원파식 교리(최삼경) 99/12/28
3번, [교리]백영희의 삼분설, 중생, 건설구원에 대한 문제점 제기(최삼경) 9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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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질문자께서 지적하신 내용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1)인격의 통일성 또는 단일성

①'인격을 단일 또는 통일체'로 보시는 것에 대하여

질문자께서 비록 다른 곳에서 인격의 정의를 인용하셨지만 질문자 자신이 인격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인격이란 통일성 또는 단일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인격은 인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성격 및 경향이며 그러한 일관성의 행동 경향이므로, 현재 시점에서는 단면을 보게 되면 통일성이 있고, 또 세월을 통해서 지켜봐도 통일성이 유지된다는 것'이 인용하신 표현인데, '통일성'과 함께 '단일성'이라는 표현을 같이 사용하는 것이 보다 명료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일반적으로 신학계에서는 통일성보다는 단일성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듯 합니다.


②엡4:22-24을 참고하셨으면, 성경은 인격에 대하여 분명하게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인격은 통일성과 단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것 같습니다. 평상 생활에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느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성경입니다. 엡4:22-24에서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몸은 하나이고 마음도 하나인데 이 몸과 마음의 주체가 되는 인격은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혹 이 성구를 주먹으로 살던 사람이 그 생활을 버리고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면으로만 이해할지 모르겠으나 그 사람 속에는 현재라는 시점에서 단면을 자르고 들어가면 현 상황이 완전 둘입니다. 마치 한반도라는 하나의 장소에 자본주의 정부와 공산주의 정부가 대치하는 것으로 비유하겠습니다. 국토는 몸과 마음 자체라고 볼 수 있고, 서울과 평양의 정권은 인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쪽이 주도권을 쥘 때도 있고 남쪽이 주도권을 쥘 때도 있고 백중세로 팽팽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 외부에서 보는 한반도의 이미지는 하나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부적으로는 분명히 둘이지 하나가 아닙니다. 이는 세상 죽는 순간까지 계속 가게 됩니다. 이유는 중국과 소련처럼 중간에 지원을 철회하지 않는 악령이 옛사람 뒤에 있고 성령이 새사람 뒤에서 이 세상 끝날까지 대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롬7:5-25에서는 두 인격의 치열한 상황을 세밀하게 중계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경험이지만 이는 우리 믿는 사람 전부의 내부 상황입니다. 몸과 마음 자체는 하나이지만 이 국토 안에서는 지금 치열하게 점령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냐 공산주의 체제냐를 두고 지난 50년간 대결한 구도를 생각한다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 로마서 7장은 주로 옛사람에게 밀리는 새사람의 탄식을 적었습니다. 그러나 8장으로 이어지게 되면 새사람이 비록 현실 전투에서는 밀려도 새사람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피와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최후 승리를 할 것이라고 위로하며 힘을 주고 있습니다.


④인격은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주체를 말합니다.

앞에서 인격을 통일된 성향이나 성격이라고 하셨는데, 이곳은 인격을 그렇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인격이란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체입니다. 사람에게는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체가 영과 마음 둘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그 영이 죽기 전에는 마음은 자기의 판단과 결정권을 영에게 맡겨 순종만 했고, 영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했습니다. 타락한 다음에는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은 기능이 완전 정지가 되었고 마음이 스스로 판단하고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중생이 되고 나면 우리에게는 영의 판단과 마음의 판단, 영의 결정과 마음의 결정, 이 두 판단 주체 때문에 모든 신앙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중생 후 우리의 마음이 과거 에덴동산에서처럼 영에게 판단과 결정을 맡기고 순종만 하면 신앙의 사람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만일 영의 판단과 결정에 대하여 마음이 독자적으로 다른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해버리면 이때는 영과 마음이 맞서서 서로 대치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속에 두 인격이 존재하여 어떤 때는 순종을 하고 어떤 때는 대립을 하며 평생을 살아가는데, 이 두 인격을 두고 만일 통일성이나 단일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대단히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꼭 인격을 통일성과 단일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면 믿는 사람은 마음이 아니라 영을 기준으로 그렇게 말을 해야 하고, 안 믿는 사람은 영이 죽었으므로 마음 단독을 기준으로 통일성과 단일성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믿는 사람의 인격은 중생 이후 영이 인격이므로 믿는 사람의 인격은 항상 성령에 붙들려 영생의 존재로 살고, 안 믿는 사람은 악령에게 그 마음이 붙들려 오로지 죄만 짓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성결교의 완전교리로 빠져나가버리게 됩니다. 만일 믿는 사람에게 불신자적 행동이 발견된다면 그는 아직도 중생이 되지 않았다고 보는 교리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영이 중생되었고, 영이 중생되면 그 영은 그 영이 중생되기 이전 마귀에게 붙들려 살던 자기의 마음을 마귀로부터 찾아내기 위해 마귀와 치열하게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영의 투쟁 가운데에서 우리 마음은 어느족에 설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마음의 결정을 두고 만일 인격적 존재에서 배제를 한다면, 교리체계 전체가 현재 성결교의 완전교리처럼 파행이 되든지 아니면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로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영이 다시 죽고 회개하면 다시 영이 살아나는 반복을 죽는 순간까지 하다가 최후 순간에 죄를 회개하면 천국을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는 논리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⑤인격이란, 안 믿는 사람들이 계산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습니다.

인격 문제를 두고 모든 논란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안 믿는 사람도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을 결정하던 주체가 있었으니 그 주체가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생된 사람에게는 과거 그렇게 죄짓고 살던 그 마음 안에 영이 중생되어 이 영이 마음을 타이르고 설득해야 하고 때로는 싸워야 하는 등 온갖 인격적 접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 속에 중생된 영과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을 생각하고, 또 안 믿는 사람은 오직 마음만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확정지은 다음,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을 바로 비교해 버리면 사람의 인격이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생길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혹 서로 표현은 착오가 있을 수 있고, 서로의 표현이 포함하는 범위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이 마음만 가지고 생각과 판단과 결정을 하고 있으니 이런 안 믿는 사람과 중생된 믿는 사람의 다른 점은 무엇이며 같은 점은 무엇인가를 자꾸 따져본다면 질문 내용은 논란이 될 필요조차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씀을 가지고, 어느 한 사람의 최후 평가는 그 사람의 인격이 하나이므로 그 평가도 하나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표현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을 신앙에 100점짜리로 평가하고 자기 교회 목사님을 60점으로 평가하고 그리고 그 교인을 10점으로 평가한다면, 그 점수는 그 사람에게 대한 단 하나의 표현이며 단 하나의 평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점수가 그렇게 나오게 된 이면을 살펴보면,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옛사람을 완전히 눌러서 제압을 했기 때문에 100점으로 평가된 것이지 바울 속에 지옥 보낼 옛사람의 요소 자체가 없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60점으로 평가된 분은 그 사람 속에 지옥 보낼 요소와 행위와 생각과 성질과 기능이 중생된 영과 백중세로 밀고 당기며 평생을 살았다는 평가이지 그 평가가 그 사람 속에 지옥보낼 요소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오로지 천국갈 사람의 실력만 바울의 절반쯤 된다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10점짜리 인생을 산 사람은 그 사람의 최종 점수가 그렇게 나온 것이지 그 사람 속에 인격이 하나기 때문에 점수가 단일 점수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하나기 때문에 인격이 하나라고 주장한다면, 60점짜리로 평가 받은 사람은, 새사람이 60점이고 그 사람의 옛사람 인격은 40점입니다. 점수를 둘로 적어서 매겨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을 예로 드시면서 바울의 심신을 물질로 본다면 그 물질 속에는 인격이 거할 수 없다고 하셨지만, 불신자에게는 사람을 구성하는 두 재로 중 영적 존재는 범죄로 완전히 죽었고 오로지 물질로 된 존재로만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 속에는 인격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 무엇이냐는 교리를 새로 만들지 않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격의 통일성 또는 단일성'의 문제에 대하여 우선 소결론을 내린다면, 불신자와 신자의 내면을 두고 보다 많은 시간을 갖고 살펴보시기를 요청합니다. 성경은 한 사람 속에 판단과 결정을 각각 따로 내릴 수 있는 두 존재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판단과 결정을 제 자유로 내릴 수 있는 존재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따르게 됩니다.


(2)믿는 사람이 가진 것은 전부 천국으로 가느냐는 문제

①모든 존재를 물질로만 파악하셔서 기능문제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보통의 경우, 사람을 하나의 존재로 파악할 때 대개 그 사람의 몸을 상대할 때는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는데, 그 사람의 마음을 상대할 때는 몸과 다른 차원의 존재로 따로 상대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 동작할 때는 몸과 마음이 합해서 사람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을 분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몸은 각각 분리 보관이 가능한 존재들입니다. 마음은 그 존재의 형식이 몸과 다를 뿐입니다.

이번 질문자 외에 다른 반론들을 접하면서 흔히 만나게 되는 지적 중에서 '기능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분리 존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상대하느냐'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존재 형식이 다르듯이, 그리고 몸과 마음이 어떤 때는 분리 보관되며 활동도 분리 되어 나오는 것처럼, 몸이나 마음이 움직여 만든 기능 역시 얼마든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사람은 사랑해도 그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라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행동 지침에서 끝나지만 하나님 앞에는 분리 가능한 것이니 그 사람 자체와 그 사람의 행위는 따로 계산 됩니다. 너무 대화가 확대되지 않도록 이 면은 이 정도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좀더 폭넓은 범위에서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②한번 이 땅 위에 존재한 것은 그냥 무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자유의사를 가지고 판단과 결정을 했던 존재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타락한 천사와 인간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돌과 나무와 짐승은 자유의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행동의 결과를 두고 자기가 감수해야 하는 처벌과 상급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존재했던 것은 하나님 앞에 영원히 존재하게 됩니다.

다만 꼭같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을 '영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좀 특이하게 들릴지 모르나 불택자들도 영생합니다. 그러나 그 영생은 지옥에서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야 하는 영생이니 그 영생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기쁨으로 사는 영생과는 다릅니다.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같다는 뜻입니다. 만물도 현재 모습과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냥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서 천지가 다 풀어지고 새하늘과 새땅이 만들어질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는, 재림의 불심판이란 현 세상이 무로 돌아가고 없어지는 조처가 아니고 현재 타락한 상태의 더러워지고 부패한 이 세상 만물을 죄를 탈색시키고 의로 된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 조처입니다. 따라서 재림의 불심판은 그동안 존재했던 것을 없애고 6천년 전처럼 다시 없는 가운데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을 깨끗하게 새로 배치하고 변형 변질시키는 조처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모습은 천년왕국에 관련된 성구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존재했던 것을 완전히 재편하는 불심판의 분류는 크게 2가지입니다. 우선 공심판에서는 택함과 불택이라는 오직 한 가지 기준으로 택자는 무조건 천국이고 불택자는 무조건 지옥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할 때도 오직 그 기준으로 무조건 중생시켰고 하나는 무조건 버렸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 심판의 분류도 그렇게 간단하게 나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심판은 복잡하기가 마치 세상에서 중생된 사람이 남은 평생 신앙 투쟁을 위해 얼마나 복잡한 일이 많고 관련된 사안이 많았던 것처럼 꼭 그렇게 복잡하게 일일이 심판을 하게 됩니다. 어린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을 바로 봉사했는지 아니면 문전박대 했는지까지 살피게 되고, 그 눈이 범죄 할 때 그 전신의 역할과 지원이 어떠했는지 그 죄의 죄질이 어떠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미쳤는지를 전지의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낱낱이 따져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6장에서는 청지기 비유의 셈하라 하신 회계결산 감사로 비유하기도 했고, 또 히브리서 13장 17절에서는 회계할 자로 그날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두리뭉실 묶어서 택자는 천국, 불택자는 지옥으로만 딱 부러지게 이분하고 나머지 계산은 없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현재 모든 조직신학들이 비록 구원을 받았으니 어찌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정도로 의를 촉구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탄식에 탄식할 일입니다. 유치원 시절 배운 것을 가지고 대학 전공에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정도라 하겠습니다.


③히4:13에서는, 심지어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리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전부 그날 심판 앞에서 증인을 서게 될 것입니다. 비유가 아니며 과장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에서 이미 그 만물들이 지금은 하나님 때문에 속으로만 탄식하고 있을 뿐이고 또 우리가 이용하면 만물은 당하고만 있을 뿐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여 그들에게 죄와 사망으로 변질된 면을 탈색시켜 놓으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만물도 6천년 인류역사에서 어떤 때 어떤 역할을 했으며 죄에게 어떻게 사용되었고 의인에게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전부 드러나게 될 것인데, 하물며 믿는 사람들의 언행심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언행심사를 하면서 자기 몸과 마음에 쌓여진 의의 기능과 죄의 기능은 각각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되어 의의 기능은 우리의 영원한 나라 실력이 될 것이고, 죄의 기능은 지옥에 영원히 버려 태워지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3)지옥 간 죄의 기능의 독립적인 호소 가능성

①오늘 세상은 의사표현이 제한 된 기간입니다.

마음이 몸을 떠나서는 따로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마음 뿐만 아니라 몸도 공간이 넓으면 자기 의사를 건너편으로 보낼 수 없고 또 이곳과 저곳 사이에 공기가 없어 진공상태가 되면 음파가 형성될 수 없고 또 음파가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심지어 나는 발표를 해도 상대방이 소경이거나 귀머거리가 되면 나의 손짓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의 발성을 청취하지 못합니다.

오늘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에 표현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는 뱀과 사람의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뱀과 사람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만물과 사람의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그때 대화로 사용된 언어가 영어였느냐 히브리어였느냐 아담이 살던 곳으로 추정되는 이라크어였느냐고 되묻는 분이 계신다면 창세기도 읽어보지 않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대화를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의 상태는 부활 후 천년왕국과 하늘나라의 예고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과 만물 사이에 시간과 공간과 언어의 불편이 없었고 대기의 음파 전달 방법이 필요없던 때였습니다. 아담의 몸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어떻게 몸과 마음에 속한 한낱 기능이 기능 자체적으로 발언을 할 수 있느냐는 반론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타락하여 저주받은 이 세상의 의사전달 수단과 그 과정만을 전부로 알고 부활 후에도 그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고 봤다면 성경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참고로, 홍포입은 부자가 있던 음부와 아브라함이 있던 낙원 사이에는 대기가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홍포입은 부자의 대화는 오늘 이 땅 위에 우리가 혀와 입을 움직여 공기를 진동시키고 그 진동에서 발생된 음파를 상대방 고막에 울려서 상대방이 듣게 되는 방법으로 대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홍포입은 부자가 서로 대면하여 대화한 것도 그 음부에 있던 부자는 음부에 올 때 얼굴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아브라함도 자기 얼굴은 중동의 팔레스타인 지방 막벨라 굴 속에 두고 왔습니다. 두 사람이 자기 얼굴을 각각 세상에 두고 왔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부자가 아브라함을 목격하려면 눈과 시신경과 뇌세포가 정상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동시에 아브라함과 부자 사이에는 빛이 존재해야 하는데, 태양은 음부에까지 그 빛을 도달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육안으로 부자가 아브라함을 본 것이 아닙니다.

즉,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는 이 세상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얼굴을 보고 대화하고 또 아브라함의 품에 손주가 안기듯 나사로가 안긴 것으로 그 장면을 떠올렸다고 한다면 성경을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그 영계의 차원이 어떠한지 이 세상 물질계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알아 들을 수 있는 상황으로 바꾸어 표현한 다음, 그 곳의 실상은 다른 성경 전체를 참고하고 또 성령으로 깨달아 알아라고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부자의 영이 아브라함에게 안긴 상태에서 그 기능은 지옥에서 낙원의 아브라함에게 대화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우선 그 장면에 대한 분위기와 시각적 연상 자체를 완전히 달리 바꾸지 않으면 천국을 타락한 오늘 세상으로 만드는 큰 죄가 될 것입니다. 마치 부모 품에 안긴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의 손가락 마디 하나가 담 너머에 떨어져 나와 그 집 거실 안을 빼꼼히 쳐다보며 내가 말을 잘 안 들었지만 좀 봐 줄 수 없느냐는 식으로 대화한다고 지금 백목사님의 기능구원론을 이해하신 듯 합니다. 혹 질문자는 그런 인상을 가진 적이 없을지 몰라도 지금까지 공회 내에서 이 문제로 대화할 때 반론하던 분들은 한결같이 그런 장면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었습니다.


②이 세상에서도, 영계의 대화형식을 몇 곳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눅19:40에서 '이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하셨습니다. 막4:39에서는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했고 제자들이 41절에서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차원에서 발언하고 청취하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발락에게로 가는 발람에게 나귀를 통해 발언을 시켰습니다. 신24:15과 약5:4에서는 추수한 품군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품군의 삯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사람과 만물의 대화가 많지는 않지만 존재했습니다. 이는 타락한 이후 사람과 만물이 저주를 받게 되어 모든 활동과 대화가 단절되고 둔탁해졌을 뿐이지 에덴동산 범죄 이전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고 또한 우리가 영계에서도 이 땅에서와 같은 형식으로 대화하고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차원과 형태가 마치 몸과 마음이 다르고, 마음과 영이 다르듯이, 그렇게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죄를 지어 생겨진 기능도, 오늘은 우리 몸 속에 하나의 분자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 기능이 자기 육체의 입을 통하지 않고 몸 밖에 다른 존재와 직접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는 그 기능이 따로 분리해서 존재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런 타락한 세상 차원의 존재형식에 너무 안주하고 익숙해져 있다 보니까 우리는 이런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 모든 제한이 다 풀릴 것입니다. 물론 어지럽게 풀려서 방종과 반란과 혼탁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죄와 저주로 제한된 것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만물이 모두 벌거벗고 속 모습을 완전히 모든 존재에게 노출 시키듯이 그렇게 드러날 것입니다. 즉 상대방의 의사를 알아차리고 또 나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하는 데 있어 어떤 제한도 제약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음부의 홍포입은 부자의 죄의 기능과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의 대화는 기능에게 무슨 지렁이 입과 같은 발성기간이 있어 그렇게 발언이 가능한가 라는 차원으로 보지 마시고, 그런 발성이 따로 없어도 그 기능이 죄의 기능이 될 때, 천국에 와 있는 홍포입은 부자의 마음이 그 죄의 기능을 억제하고 세상에서 회개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쳤던 것에 대하여 모르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최측근 비서가 자기 죄를 다 지고 감옥에 들어 앉아 있고 그 사람 때문에 자기는 국회의원으로 버젓이 자기 일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말이 없다 해도 그 마음과 마음이 너무 잘 알다 보면 비서가 아무 요구도 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가 지은 죄라며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는 그 태도를 보며 그 국회의원이 그 비서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귀머거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는 우리가 말없는 대화가 많고 말없는 경고도 있고 불평을 전혀 한 적이 없는데도 그 사람의 불평을 듣고 내가 조심하는 일이 있습니다.


③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기회에 한번 더 죄를 지은 것은 '둘째 사망'입니다.

계2:11에서 말씀하신 대로 현실에서 죄에 지지않고 말씀대로 바로 살아나간 우리 심신의 요소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으로 구원받아서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데도 다시 죄를 짓게 된다면 이는 둘째 사망입니다. 우리 중생한 사람이 중생 후에도 사망에 속한 짓을 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성구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사망에 속한 것은 계20:14에서 영원히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 분리되어 지옥에 버려진 우리의 죄 기능, 죄지을 때 관계된 모든 것들이 비록 그 형태는 이 세상 표현으로 지금 '기능'이라고 주로 말하지만 우리의 표현에 상관없이 우리가 믿고 난 뒤에 다시 죄를 지어 발생된 것은 지옥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무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그 아들이 가진 죄까지 천국에 함께 따라 들어가지는 못하게 됩니다. 계22:15에서 개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 개는 지옥 갈 불택자를 개로 비유한 것이 아니고 택한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개같은 인격을 말합니다. 개같은 행동과 이력과 실력과 개처럼 다른 사람을 침노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④질문 마지막 부분에서 부자를 불신자로 보자고 하셨는데, 불택자라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부자에게서 떨어져 나간 어느 부분이 부자 자신에게 대화를 할 수 있겠느냐는 선입견이 질문 내용에 내내 적용된 것 같습니다. 존재의 형식과 대화의 방법은 오늘 세상과 영계에서는 도저히 생각도 하지 못할 차원으로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를 다시 한번 요청드리며, 마지막으로 질문자께서 음부에 있는 부자는 바로 불택자 부자이고 그가 낙원의 아브라함에게 대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인격의 통일성' 차원에서 옳다고 하셨는데, 만일 인격의 통일성 또는 단일성이라는 것을 질문자 생각하시는 모습으로 유지하려 한다면, 이 부자와 나사로 예화는 천주교로부터 나온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깨뜨리는 문제로 발전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쉽게 말해서, 천주교는 인간의 노력이 천국가는데 필요하다는 주장이고, 교회는 천국가는 것만큼은 인간의 노력은 어떤 의미도 없고 전적 택함으로 중생받고 구원얻는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첫 교리로 놓을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부자와 나사로가 낙원과 음부로 나뉘게 된 근거는 바울이 말한 대로 전적 은혜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부자와 나사로의 행동에 따라 주어진 결과인지를 보셔야 합니다. 눅16:25에서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성구는 눅18:18에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을 때, 22절에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얻는 법은 전적 은혜가 아니라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이 부자청년을 두고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구들이 바로 천주교 1천년간 천하 교인들의 재산을 약탈할 때 가장 앞서 써먹은 것입니다. 천주교 신학자들이 바로 이런 성구들을 근거로 하여 구원론을 형성시킨 것이 천주교 구원론이고, 루터와 칼빈의 개혁은 그 천국은 전적 은혜로 간다고 로마서를 인용하는데, 이런 부자청년의 예화는 아직도 우리 교회들이 개운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영희구원론의 범위는 교리체계 전체를 살려놓고 있습니다. 홍포입은 부자가 '날마다 호호로이 연락'하는 나쁜 일을 하다가 음부에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위로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문제로 발전해 버립니다.

구원은 전적 은혜이므로 택자와 불택자로만 구원을 구별해야 하고 세상에서의 행동은 천국의 실력과 대우와 영광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한 것에서 택한 아들로 볼 수 있고, 그가 음부에서 호소하는 것은 택한 이들의 죄의 기능이 분리되어 음부에서 불에 탈 것인데 그 호소가 분명히 만군의 주의 귀에 들릴 것이고, 세상에서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회개의 순간도 저버린 그 기능이 자기 본부를 향해 호소할 것입니다.


⑤이 본문은 그냥 철학적 심리분석적 입장에서 간단히 주고받을 사안이 아닙니다.

신사참배를 앞장서서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전국교회로 하여금 강제로 하도록 교권으로 누르고 그것도 모자라서 숨어 있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경찰에 밀고하여 잡아 넣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해방 후에는 출옥성도를 자칭 의인이라 한다며 바리새인으로 욕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출옥성도들로 뭉친 고신교단을 제명해 버리고 그리고 오늘까지 한국교회의 교권을 통째로 독식하여 오히려 한국교회의 최고 의인이며 선지자 노릇을 하며 이 땅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누릴 것을 홍포입은 부자 이상으로 누리고,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그 죄를 회개하자는 고신교단의 제의를 뿌리치고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의 사후를 두고 이 본문과 결부시켜 본다면, 너무 무리겠습니까 아니면 적절하다 하겠습니까?

갖은 악랄한 짓을 골라서 골라서 다 해놓고 세상에서 마음껏 교권과 세상 영광까지 다 누리다가 죽은 이들은, 소위 고신교단의 주장처럼 지옥에 갈 불택자였다고 하는 것이 좋을지? 그들이 비록 세상에서 발람처럼 돈에 팔려 갖은 죄를 다 지었다 해도 그래도 택한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그렇게 죽은 그들과 비참하게 감옥에서 죽은 주기철목사님, 후에 죽은 손양원목사님이 하늘나라에서 꼭같이 지난 세상일을 두고 기뻐하고 자랑스럽고 감사하고 얼굴을 들고 다닐지?

예수님의 대속을 전적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천국은 왔으나 과거 세상에서 했던 일이 천국에서는 너무 환하게 보이기 때문에 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갈런지, 너무도 성경은 환하게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교황처럼 노벨평화상을 받을 착한 사람만 천국에 가지 우리같은 일반 교인들은 아무도 천국에 갈 수가 없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개신교 교회의 구원론처럼 택자는 천국에 가는 것이고 부활후에는 어떤 부끄러움도 없고 손양원 주기철목사님과 오늘 교회 돈에 배부른 우리 목회자가 영원토록 눈꼽만큼도 차이가 없이 꼭같다고 한다면, 우리는 중생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성경과 교회는 전혀 마음에 둘 필요도 없습니다.

백영희구원론은 양쪽의 교리를 범벅해서 우연히 추출한 제3의 방법이 아니고, 성경만을 가지고 읽고 성경으로만 실행해서 살아온 백영희라는 인물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성경교리입니다. 신학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천주교의 이단 교리뿐 아니라 일반 정통교리의 단점까지도 그의 영안을 흐리지 않았고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순종하고 실생활에서 깨달은 대로 행하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도출 된 교리입니다.


3.본문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①영계에서 있었던 대화를 오늘 우리에게 공개하신 뜻을 다시 한번 새기셨으면

이 성구의 대화를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 사이의 일반 대화처럼 그런 환경 그런 차원 그런 동영상을 생각하면서 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곳은 육을 벗어놓고 간 영계입니다. 공간과 존재와 대화의 형식이 전혀 다른 곳입니다. 그리고 그 홍포입은 부자의 대화는 성경에 기록한 이 내용만 전부가 아닙니다.

본문 눅16;24에서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는, 음부와 낙원에 존재하는 모든 택자와 불택자들, 그리고 택자의 기능들의 발언과 탄식 중에서 유일하게 존재한 대화가 이 대화이기 때문에 이 본문에서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이후 부활 이후 우리의 영원한 모습을 가르치되 줄이고 줄여서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대화로 간추려 간단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의 영원한 형편이 어떠한지를 이 대화에서 알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본문 대화의 주 내용입니다.


②'긍휼히 여기사 물을 찍어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탄식해야 하는 앞날이 있습니다.

이 성구는 지옥갈 모든 불택자들의 영원한 신세만 이러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성구가 아닙니다. 성경은 불택자는 봐야 모르고 들어야 알지를 못합니다. 성경 기록은 일차적으로 믿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불택자들만 그런 꼴을 보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이 오늘 세상에서 잠깐 눈 지끈 감고 한번 죄짓는 것의 영원한 후회와 고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록 자기 자신은 천국에 와 있지만 자기에게 속했던 요소가 지옥에서 고통받게 되고 그것을 우리는 봐야 할 것인데, 그 자기 요소가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은 마치 세상에서 입고 있던 옷이 불에 타는 것을 보는 느낌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몸에 달린 손가락의 고통은 아니지만 자기가 살릴 수 있고 천국에 데려 올 수 있었던 자기에게 속한 것들이 자신의 부족 때문에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을 마치 자식이 불에 타는 것을 보는 아버지의 아픔과 같이 그 어떤 형태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천국을 오늘 우리 식으로 우리 기준으로 우리 마음대로 단정해 놓는다면 크게 후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고 미리 보여준 대로의 천국이 우리 앞에 있을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게 된 우리라 해도 죄와 더불어 죽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고, 또 약해서 죄를 지었다면 다윗처럼 미리 눈물로 회개하고 얼른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우리의 영원입니다. 자기가 심은 것은 자기가 추수하게 됩니다. 고전3:15에서 구원을 얻기는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과 같이 벌거벗은 수치도 있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고후5:3, 계3:17 등도 같은 뜻입니다.


③'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오늘 세상에서 믿는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입맛이 끄는 대로 다시 술을 마실 수도 있고, 그것을 단절할 수도 있습니다. 불택자의 행동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결론을 내리든 전부 지옥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의 행동은 결과가 둘로 나뉘게 됩니다. '살았을 때'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는 때입니다. '네 좋은 것을 받았고' 주님과 말씀 앞에 자기 좋아하는 것을 내놓을 수도 있고 주님과 말씀을 거부하고 나 좋은 것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 믿는 우리들입니다.

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새사람 나는 말씀대로 살고 너 좋아하는 단맛을 끊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새사람의 반대편에 있는 옛사람 자아는 일단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그 옛사람에 속한 인격, 그기 속한 요소들에게 아브라함이 하는 말입니다.


④'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한번 세상 기회가 끝나면 다시는 반복이 없고 무조건 영원 보응과 보상으로 이어지는 오직 한 길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부자의 대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전부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줄이고 줄여서 오늘 우리에게 반드시 들려 주셔야 할 내용만으로 간추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 대화에서 우리는 숨겨진 많은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를 예로 들자면, 현재 현실에서 어떻게 선택하고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두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마련한다는 것입니다.


⑤이 내용을 계속하게 되면 설교가 될까 해서 이 정도에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앞에서 지리하게 교리적 설명을 하게 되는 모습만 본 분들은,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순 이론적인 것으로 너무 지나치게 비약하고 실제 신앙생활에는 소용없는 지식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약간 설명을 드렸지만, 이 기능구원론의 교리가 일단 교리 자체로서 성경과 모든 교리 전체를 바로 파악하여 정곡을 밝힌 것이고 둘째로는 이 교리는 이 본문의 간단한 내용을 간단한 내용에서 그치게 하지 않고 우리가 평생 이 성구 하나만 가지고 믿고 노력해도 될 만한 깊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교리가 아니고는 그 내용을 다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이 교리가 아니면 이 성구를 주일학생들 훈화용으로 한번 써먹을 수 있는 내용밖에 되지 않습니다.

백영희신앙노선에서 교리체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성경과 생활에 핵심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다른 분들께서 종종 질문을 하셔도 기존 설명한 자료를 참고하시도록 안내하고 본격적으로 답변하는 일을 미루어 온 것은, 설명을 한번 제대로 하려면 너무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답변드린 내용은 조직신학에서 기능구원론 원고용으로 적었으면 현재 답변자가 주력해야 할 작업을 반복하지 않고 일찍 끝낼 수 있는 양입니다.

현재 이곳에 이분론과 삼분론을 원어적으로 질문한 분들도 있고 기타 여러 주제토론이 있었지만, 일단 교리 작업 전체요약이 끝이 난다면 거의 모든 토론이나 답변은 기존 제공된 자료를 참고로 할 수 있고 그렇다면 매번 중복되지 않고 간략하게 핵심내용만을 가지고 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자께 한 말씀 요청드리고 싶은 것은, 답변 내용이 길어져서 교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혹 표현에 무례한 점이 있어도 이해해 주시고 오직 내용의 정확성 여부만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께 공통적으로 요청드리고 싶은 것은, 이곳에서 확정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이번에 답변드린 것 이상으로 많은 연구와 오랜 세월의 검토가 있었으며 또한 교계 어느 곳보다 발언의 책임과 신중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각없이 그냥 상대방과 토론에서 이기기 위해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백영희신앙노선의 주요 논점에 대하여는 항상 반론과 지적을 환영합니다만 일단 이곳 여러 자료를 검색하셔서 이곳의 입장을 먼저 충분히 파악하신다면, 질문이나 지적을 하실 때 포괄적으로 하지 않고 어느 대목의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보다 정밀하고 심도깊게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질문은 지적하신 내용에서 '인격의 통일성'이라는 구체적인 면을 가지고 발언하셨기 때문에 답변자도 비교적 소상하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답변 내용 역시 인격의 통일성이라는 면으로 질문하신 분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답변을 드렸지만 여기서 더 좁게 깊게 설명을 드리자면 이번 답변과 같은 차원에서 답변드려야 하는 것이 앞으로도 몇 차례나 더 계속될런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교리 전체를 다 거론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답변 내용에서 재질문이나 보충질문은 언제든지 환영하는 바이지만, 일단 먼저 답변드린 이 내용도 일반 교계에서는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 많을 것이므로 우선 내용을 두고
충분히 살펴보실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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