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과 사망의 표현에 대해?

남단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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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소천과 사망의 표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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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구실/문의답변/381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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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 홈에서 '백목사님 사망'보다 '소천 召天'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 듯 (제목 -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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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 중에서 '백 목사님 사망'이라는 이런 단어를 접할 때에 그 느낌이 별로 좋지를 않습니다. 일반교인이 일반적인 글을 쓸 때에는 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그냥 지나칠 수 있겠으나 그래도 교리를 연구하는 분들이 교리 내용의 글을 다룸에 있어서 분별없이 '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전체 좋은 글에 옥의 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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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백 목사님에 대해서는
사망이라는 용어대신 소천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겠고
소천이라는 용어보다는 순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백목사님의 소천은 일반적 소천이 아니라 특별한 소천이기 때문입니다.
순생의 상급은 순교의 면류관입니다.
이 또한 성경적 공식입니다.



(답변) 특별한 일이 아니면 과거 표현을 유지하는 편임을 이해하셨으면


1.소천과 사망

공회의 신앙노선은 특별하게 변경해야 할 필요가 없으면 이전 표현을 유지하는 편입니다.

일반 진영에서는 '소천 召天'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죽었을 때 '소천'이라고 하지 '사망'이나 '죽었다'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회 신앙노선에서는 특별하게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없으면 표현과 형식은 최대한 단순화시키고 있습니다.

혹 단어의 분석적 의미로 살펴볼 때 문제점이 있다 해도 이미 그 표현을 오랫동안 사용하여 입에 익어 있을 때는, 이미 그 단어가 사회인들이 알고 사용하는 것과 달리 우리가 알고 사용하는 새로운 단어로 상대하게 됩니다.


2.백목사님 가시던 마지막 해에 '메모'라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백목사님께 배운 것이 있습니다.

'메모'라는 책은 백목사님 생존 마지막 순간에 완성된 교훈 요약서입니다. 그때까지는 설교 내용을 책으로 읽을 수 있도록 구어체를 문어체로 단순하게 교정하는 것이 목회연구소의 업무 전부였으나, '메모'라는 책을 만든 취지는 설교 내용을 단순하게 따라가지 않고 여러 설교를 단 몇 줄로 요약하여 핵심 내용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설교의 교훈 요약 형태로 만들어졌으나 실은 백영희조직신학의 교리 체계화의 시작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내용의 뜻을 간추리기 위해 설교 중 표현된 내용을 재구성한다는 발상은 사실 총공회 신앙노선에서는 금기사항 정도였습니다. 백목사님의 직접 지시로 이 일을 연구부에서 하게 되었고, 초기작업은 연구부 직원들이 대충 모았으나 마지막 책자로 내기 전에는 토씨 하나까지 백목사님이 직접 검토하고 교정하여 출간한 책입니다.

당시 사람을 기르기 위해서 그러했겠지만 내용을 검토 확정하는 일에 답변자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목사님을 개인 면대하여 전 과정을 관련했습니다. 당시 답변자는 고어적 표현 또는 커나오는 젊은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표현, 표현 자체가 원 뜻과 달라지는 단어 등 모든 문제점을 하나도 빼지 않고 목사님께 건의를 했고 이유를 조목조목 달아가며 이의제기까지 하면서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님은 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지, 또 왜 이렇게 요약을 하는지 등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철없고 무지하고 전혀 엉뚱한 말만 하는 답변자를 세뇌시키느라고 탈진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메모'라는 책이 결과적으로 하나 나오게 되었는데, 그 이면에서는 답변자가 백목사님께 교훈을 요약하고 교리를 정리하며 책으로 발표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조심하며 어떤 면을 주시해야 하는지, 너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현재 이 홈에서 적고 있는 답변자의 글은 그 표현과 자세와 방향이 원래 답변자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물론 배운 대로 다 되지는 않았겠지만 백목사님의 그런 검토와 교정 때문에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백목사님 표현법의 특징은 '간단하게' '겸손하게' '제3자의 시각으로' '핵심사안을 간파'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답변자가 적은 글 중에 백목사님 식의 표현법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주로 출간하는 책의 서문입니다. 이곳 문답방처럼 한번 글을 적은 다음 새로 교정할 여유가 거의 없는 경우는 백목사님의 표현법을 마음속에 늘 생각만 하고 참고만 하지 그대로 다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걸음마 수준이라 그럴 것입니다.

이번 질문과 관련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소천과 사망이라는 표현을 두고, 아마 백목사님께 글과 표현을 두고 미리 배울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없었더라면 답변자는 소천이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설명을 통해 미련한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깨닫게 되어 오늘 이 홈을 통해 이 홈이 가장 존중하고 극진하게 대하는 분을 향해 '사망'이라는 표현을 때때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사망'이라는 표현이 갖는 여러 문제점을 알지만 '글'에 관한 한 '메모' 뿐 아니고 공회의 공식 발표문 등 많은 기회를 통해 백목사님으로부터 글을 적고 표현하는 자세나 기술이나 방편까지 직접 배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백목사님의 '사망'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을 참작해 주셨으면 합니다.


3.백목사님의 소천을 '사망'으로 표현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몇 가지 말씀드린다면

①성경에서 '소천'보다는 '죽음'이라는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면으로 꼭 기억해야 할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표현한 것으로 예를 들면, 노아의 경우 창9:29에서 '죽었더라'고 했고, 아브라함도 창25:8에서 '죽어'라고 표현했으며, 이삭은 창35:29, 요셉은 창50:26에서 '죽으매'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삭과 야곱의 경우는 죽어 자기 조상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했는데 이들 역시 낙원으로 옮겨가기 전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은 '죽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신앙의 사람들에게 다 해당된 표현입니다.

이후 신34:5에서 모세, 수24:29에서 여호수아, 삼상28:3의 사무엘, 행2:29의 다윗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에서도 이런 표현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에게까지도 이 표현은 계속된다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성경이 성도의 마지막 순간을 '소천' 또는 '하늘나라로 갔다'고 표현하지 않고 간단하게 '죽었더라 = 죽음 = 사망'으로 표현한 것은 이 세상에서 그 몸이 활동 종료를 하게 되었다는 면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이 이 세상에서 종료되면 그 이후 일어나는 일은 사람이 죽을 때마다 일일이 표현을 하지 않아도 낙원으로 갔다가 재림 때 부활하고 이후 천국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후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함축해서 간단하게 죽음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②설교록에서 알 수 있듯이 백목사님의 평소 표현도 소천 대신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다른 진영에서는 '소천'이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공회에서는 소천이라는 표현을 원래부터 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혹 다른 진영에서 들어온 분이나 다른 진영과 접촉이 많은 분들에 의하여 종종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백목사님부터 죽었다는 표현을 늘 사용합니다. 따라서 답변자도 주로 죽었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이곳 홈에서 간략하게 함축을 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죽음'이라는 한글보다 '사망'이라는 한자를 사용해야 할 때에는 소천보다 죽음이나 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손양원목사님 주남선목사님 주기철목사님 등 한국교회사의 대표적인 순생 순교자들, 또는 총공회 내에서 홍순철목사님이나 서영준목사님 또는 추순덕집사님처럼 특별히 귀하게 살다간 순생자들의 죽음도 소천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설교록 전체를 통해서 '소천'이라는 단어는 검색을 해도 발견할 수가 없는 정도입니다.

설교 뿐 아니고 평소 백목사님의 사적 대화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곳 신앙노선에서 평소 생활하는 분들의 경우는 소천의 뜻이 덜 옳아서가 아니고 그냥 죽었다는 표현이 입에 익어 자연스런 표현이 되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변경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또 죽었다는 표현이 세상에서 활동이 끝나고 구원의 기회가 끝났다는 의미이며 그 이후에 대하여는 따로 표현하지 않아도 너무 확고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뜻을 더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가까운 사람끼리 이름을 부르고 성을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③'소천'이라는 단어가 있는 줄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소천'이라는 단어 외에도 '소천'처럼 그 단어의 뜻을 가지고 살피면 분명히 더 옳고 좋은데도 일부러 이전에 사용하던 단어를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대로 우직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대구공회에서 한자에 능통한 목사님 한분이 '축복'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 누구를 복을 주시라고 복을 빈다'는 뜻인데, 기도 중에 '하나님 우리를 축복해 주옵소서'라고 말을 하면 '하나님이 다른 존재에게 우리를 향해 복을 주라고 하나님이 빌고 사정'하는 뜻이 된다며 '하나님의 축복' 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주라는 식의 표현은 '축복'이 아니고 '복'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야 교리적으로 옳다고 지적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목사님의 설교와 평소 표현을 보면 '복'이라는 표현과 '축복'이라는 표현을 함께 섞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백목사님은 한자에 능통한 분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표현의 차이와 문제점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잘못된 표현인 '축복'을 대단히 많이 사용합니다. 백목사님이 사용을 했기 때문에 우리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총공회신앙노선의 표현습관이 형성되고 내려온 과정을 설명드리고 있습니다.

처음에 '복'과 '축복'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사람들이 섞어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때만 해도 목사님은 2가지의 차이를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의 아주 초기 자필 기록을 보면 '축복'이라는 표현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모든 분들이 '복' 대신에 '축복'이라는 단어가 더욱 듣기 좋게 들리기 때문에 뜻이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축복'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축복이라는 단어가 어느날 복이라는 단어를 대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이라는 단어보다 '축복'이라는 단어는 사용빈도가 많아지고 더 호감을 가진 단어가 되었으며 의미적으로도 두 단어는 동일한 단어로 인식되는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일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게 되는 경우, 백목사님은 일반인들의 언어사용 습관을 국어문법과 어법에 맞추어 교화를 시키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신 국어학자들이 할 일이고, 아니면 일반 다른 교회의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주력할 껍데기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교리의 중요한 문제를 깨달아 세워나가고 투쟁을 해야 하는 마당에 그런 세상 상식에 속한 표현의 정확성 문제를 가지고 국어 어문학적 투쟁을 벌이게 되면 정말 해야 할 중요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숨기는 것이 백목사님의 혜안입니다.

어떤 표현은 그 표현 때문에 천하와 대적하고 피해가 발생되어도 밀고 나가는 것이 있고, 어떤 표현에 대하여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세상을 조용히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생 교리를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 등이 첫번째 경우의 대표적 예가 되겠고 축복이라는 단어가 두번째 경우입니다. 그리고 '소천'이라는 표현은 구별해서 사용하는 분들이 급증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따라갈 만큼 대세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한가지 참고 하실 것은 백목사님의 표현 변화는 1950년대까지에 한정되고, 1960년대 이후부터는 변화된 표현들에 대하여는 거의 무시정도로 일관합니다. 아마 1950년대까지는 고신에 소속해 있었기 때문에 표현 때문에 외부와 바로 마찰되는 경우가 많아서 고신과 진리투쟁에 집중하려고 표현 문제에 관하여는 따로 표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④또한 이 신앙노선은 일반인의 가장 단순하고 표나지 않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일반인들이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던 표현을 새로 개발해서 먼저 사용하므로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일반 교회의 성향입니다. 교회의 제도나 표현 각종 행동에서 그런 앞서가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숨는 것이 이곳 신앙노선입니다.

그래서 백영희신앙노선은 5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오늘 현재나 너무도 변화가 없고 밋밋하다는 표현을 듣습니다. 백목사님 초기 신앙생활을 아는 분들은 70년 전이나 오늘이나 같다고 할 정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반사'라는 표현도 총공회에서만 오늘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사'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이 외에도 일반 교회는 '연보'를 '헌금' 또는 '성금'으로 '예배당'을 '성전'으로 '목회자'나 '교역자'를 '성직자'로, '성경'을 '성서'로 표현합니다.

백목사님께 이런 표현들 중에서 몇 가지는 아무래도 좀 고쳐보자고 건의한 적이 수차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백목사님은 현재 이곳에서 답변자가 소개하는 내용으로 답변자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답변자는 그런 설명을 반복해서 듣고도 마음에 동의가 되지 않아 무지하게도 계속 건의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1986년부터 1988년까지 기간 중에는 답변자가 백목사님께 진리나 교훈의 내용은 바꿀 수 없으나 표현은 커나오는 젊은 사람들의 변화된 언어환경을 고려해야 옳지 않느냐고 대단히 집요하게 이의제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목사님 생존 마지막 해에 답변자는 왜 표현까지도 백목사님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그 원인을 비로소 알게 되고 이후 오늘까지 답변자로서는 소속 때문에 무작정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고 필요성을 파악하기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는 입장을 갖게 됩니다.

이후 오늘까지 답변자는 이제 과거 답변자가 백목사님을 졸랐던 것처럼 이제는 답변자가 목회하는 교회나 직접 접촉하게 되는 분들이 바꾸자는 제안을 수없이 하고 있는데 그들을 줄기차게 설득하며 과거 목사님이 답변자를 향해 말씀하던 내용을 가지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답변자가 백목사님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너무 느껴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천'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죽음'이나 '사망'과 비교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소천'이라는 표현이 신앙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더 신앙적인 표현이라도 실제 단어 사용을 할 때는 보류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표현은 덜 정확한데도 실제 생활에서는 사용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미가 더 정확하다 하여 표현 방법을 바꾸기 시작하면, 이것 뿐 아니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표현들에 대하여서도 더 신앙적인 표현이 개발될 때마다 우리가 평소 사용한 여러 입에 익은 표현들을 교체해 나가야 하는 문제까지 확대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교회에서 사용하는 표현 중에는 교체해야 할 표현이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많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번 교체했다 해도 언어환경이라는 것은 세월과 생활의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니 그렇게 언어환경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바꾸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글성경으로 번역된 현 개역성경 본문을 다시 번역해야 하느냐는 문제까지 미리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현재 한글 성경의 표현 중에는 100여년 전 한글성경을 처음 번역하던 당시 언어환경에서는 예측조차 하지 못했던 언어 환경의 변화를 거친 것이 있습니다. 이래서 조금이라도 글을 아는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성경을 새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반대하는 측은 아마 이곳 백영희신앙노선밖에 없을 것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당시 번역이 서툴었다고 해도 또 당시는 정확해도 이후 언어환경이 변하여 첫 번역의 표현이 이후 시대에 문제점이 있다 해도, 한번 사용한 표현은 그 표현을 바꾸어 사용하는 것보다 그 첫 표현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그 표현을 가지고 은혜를 받고 진리를 깨닫고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성경이나 교회 안에서 사용되어온 표현들은 이미 세상 언어와 다른 또 하나의 언어체계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번역하고 처음 채용할 때는 세상 불신자들의 언어를 사용했으나 한번 사용한 다음부터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신앙 안에서 서로 그 단어가 의미하는 내용을 우리끼리 알고 사용하여 시대와 다른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그 표현 자체를 보수하며 그 단어가 의미하는 내용을 그 단어에 맞추어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의 '집사'라는 단어는 과거 봉건주의 시대에 주인 밑에 그 가정 살림을 총괄하던 머슴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더 좋은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했는데, 이 단어는 성경을 번역하던 초기에만 한국에 존재했고 그 이후에 이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으며 현재는 완전히 멸종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가정총무라는 단어가 지금으로서는 나은 표현일 것입니다. '약대'라는 표현도 지금 누구에게 물어봐도 알지 못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들은 한글성경 안에만 존재하는데 100여년 성경을 번역하던 당시 언어환경에서는 최적의 표현이었으나 현재로는 최악의 표현이라고 비판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표현을 당시 세상으로부터 차용해 왔지만 이후로는 세상이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든 상관치 않고 이 단어를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성경표현으로 존재시켜 왔습니다.

이 신앙노선에서 예를 든다면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가 '재독'이라는 단어입니다. 재독이라는 단어는 '다시 재 再' '읽을 독 讀'이라고 글자를 사용합니다. 처음 설교필기만 있을 때 설교는 한번 듣고 끝내지 말고 반복해서 그 내용을 공부하라는 뜻으로 재독을 사용했는데, 이후 설교록과 녹음 테이프를 거쳐 백목사님 생존 마지막 시기에는 녹화테이프가 있었습니다. 필기시절 책을 한번 더 읽으라는 강조를 위해 '재독'이라는 표현이 시작되었다가 이제 녹음테이프를 통해서 공회 모든 교역자와 교인들이 이 설교를 여러번 반복해서 듣고 공부하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때 '재청'이라고 하지 않고 '재독'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 표현 때문에 교인들 사이에 지적이 있었으나 결국 녹음 테이프를 다시 듣는 것이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공회 내에서는 '다시 듣는다'는 의미보다 '설교를 다시 접하여 공부한다'는 뜻이므로 그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용되다가, 마지막에는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설교를 보고 듣는데도 '재독'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 표현 문제를 두고 백목사님은 회의 때나 사석에서 주변에 그 단어가 주는 느낌과 사용에 대한 실효성 등을 많이 살피고 연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테이프를 통해 듣고 또 보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해도 이미 '재독'이라는 단어는 설교록을 다시 읽는다는 겉모습에서 시작했으나 그 의미는 설교내용을 한번 듣고 끝내지 않고 반복해서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니까 그대로 사용하라 해서, 서부교회의 광고에까지 그렇게 계속 사용되어 왔습니다.

오늘 어떤 교인이라도 이 재독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하면, 이곳에서는 제안자께 대하여 그 문제점을 파악하신 것은 충분히 공감하고 또 죄송하게 되었다고 양해를 구하겠지만 그렇다고 '재독'이라는 단어를 '재청'이나 '재청견' 등으로 변경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2.백목사님에 대하여 '순교'라는 표현과 '사망'이라는 표현

①이곳은 백목사님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극진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의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는 분들은 흔히 이곳 홈을 백영희우상화라며 사정없이 비판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이 홈의 신앙차원은 우상을 혼동할 정도가 아니고 다른 이들에게 우상화로 가는 길을 제공할 차원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이곳은 우상화로 가지는 아니해도 극진히 존경하고 따를 만한 신앙의 지도자가 실종된 시대에 그렇게 해도 될 지도자와 신앙지도의 자료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오히려 부러워 하라고 다른 분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총공회 신앙노선 중에서도 부산공회를 중심으로 '순교하신 백영희목사님'이라는 표현이 너무 습관적으로 입에 익어 있는 분들에 대하여 그 충정과 애착은 이해를 하지만 그런 표현을 입에 익히게 된 총공회 분열사의 이면을 알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홈에서 답변자는 '순교하신 백영희목사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이유는 이곳 홈의 답변자는 백목사님의 사망이 순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총공회 내부 수정노선의 지도급 인사인 백태영목사님과 맞서 왜 순교인지를 설득시켜 오늘 부산공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백목사님은 순교자라는 사실을 자신있게 표현하게 하였고 총공회 수정노선에 있는 분들에게도 백목사님의 사망을 순교가 아니라고 발언할 수 없도록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순교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백영희'라는 이름은 그냥 '백영희'로 사용되는 것이 더욱 낫다는 차원이라는 뜻입니다.


②공회 내에서조차 백목사님의 사망을 순교라고 100%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백목사님 사망 당일, 서부교회 교인들과 공회 교인들은 MBC TV 등에서 백목사님의 사망이 자기 교회 교인에게 찔려죽은 참극이라고 몰아가는 뉴스 때문에 심히 당황하고 요동하는 면을 봤습니다. 서부교회 권사님들 장로님들 교역자님들까지 예사로운 죽음은 아니지만 방송에서 정신이상인 자기 교인에게 예배시간에 사고로 죽은 것이라는 내용에 대하여 어떤 설명도 하지 못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순교라고 봐야 하는데...' 라며 웅성거리고만 있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의 죽음이기 때문에 순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라야 순교입니다. 순교의 요건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놓고 서부교회 안에서는 당시 순교의 정의와 이 사건을 놓고 순교에 해당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한 분이 없는 상태에서, 기독교계 신문 언론들의 집중 취재가 있었습니다. 그 기자들은 당시 주일학교 때문에 교계의 뉴스의 중심에 떠오른 백목사님에 대하여 호의는 가지고 있었으나, '순교'라는 표현을 기독교 신문이 사용하게 될 때 그 표현이 가지고 올 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기독교계 언론 중 전국망을 가지고 있는 언론사들의 부산 주재기자들이 서부교회로 즉시 모여들었고 당시 답변자는 서부교회를 대표하여 그들을 서부교회 예배당 5층에서 만나 백목사님의 사망 성격을 두고 설명하였습니다. 순교라는 단어의 남발, 미화, 순교라는 단어가 한국교회사에서 교단 분열사의 중심에 있는 등의 문제점 등을 가지고 날카로운 반론과 변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답변자의 그날 설명으로 부산주재 모든 기자들의 입에서는 순교라는 일치된 탄성이 입에서 나왔고, 이번 순교는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다른 순교들처럼 전시나 기독교 박해시에 나온 것이 아니라 평화시에 나왔다는 설명을 듣는 순간 너무 감격스럽다는 표현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들이 대화 마지막에 염려한 것은 현재 취재기자들로서는 이해가 되지만 본사 편집 데스크에서는 교리적으로 아직 의심스럽게 보는 원로층이나 고위층들이 있기 때문에 순교라는 표현이 결재가 나기는 어렵겠지만, 현재 MBC TV 등에 나간 뉴스 때문에 백목사님이 비참하게 끝을 마치게 되었다는 선입견과 인식은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며 돌아가게 됩니다. 1989년 8월 마지막 주 교계 신문의 논조를 다시 한번 주의깊게 봐 주시고, 그 신문들의 당시 지도부의 교단 소속과 평소 공회에 대한 입장과 타 교단의 순교에 대한 표현 등을 면밀하게 추적해본다면, 답변자의 활동을 짐작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듯 합니다.

이미 부산지역에서 서부교회 백목사님의 지명도는 불신자들에게도 상당 수준 알려져 있었고, 전국적으로는 기독교계 범위에서 백목사님의 존재는 상당히 지명도가 있었기 때문에 답변자는 일반 사회신문을 통해서 백목사님의 사망이 순교라는 사실을 알리거나 아니면 경찰이나 MBC TV 등의 뉴스와 같이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백목사님이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백목사님에게 배워 진리를 알게 된 답변자가 답변자 스스로 좋아서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국내 최대언론인 조선일보를 통해 백목사님의 순교가 있었고 장례식이 있을 것이라고 한글 광고를 올렸습니다. 이런 신문들은 기독교 내의 논리에 의하여 순교라 해도 자기들 신문 기사에서 그렇게 적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광고를 통해 답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적었습니다. 최대일간지 하단 전면광고를 통해 '백영희목사님의 순교소식을 전합니다.'라고 굵직하게 한 줄을 올리는 자신감은 다른 보도를 통해 달리 소식을 들은 이들에게 일반 사회 언론에서 알 수 없는 다른 내막이 있었다는 것을 고지할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교계 최대일간지 국민일보와 부산에서 발행되는 일간지에 다른 목회자들의 이름을 사용해서 답변자는 백목사님의 사망은 순교라는 사실을 자세하게 적었습니다. 답변자의 실명이 나가면 공회 내 반대측에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며 견제가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총공회 신앙노선의 내부 반대측에서 제기되던 순교 부인 주장에 대하여 조목 조목 따져서 이후로는 자기가 순교를 부인한 일이 없다고 발뼘을 할 정도로 입장을 바꾸어놓았습니다.

답변자의 당시 활동을 잠깐 소개하는 이유는, 답변자가 백목사님의 사망을 두고, 순교라는 점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당연하여 그 이후로 오늘까지는 굳이 그런 말을 자꾸 입에 달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홈이 이미 공회 내에서 가지는 영향력이 있는데 이곳에서 백목사님을 순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을 두고 암암리에 이 홈에서조차 순교라는 표현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훼방하는 분들 때문에 그 연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너무 확실하고 당연한 사실은 굳이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홈이 공회 내부인들만 찾는 곳이면 목사님의 순교를 비판하는 사람을 알고 있는 한 전면적으로 그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조처를 취하겠으나, 이 홈은 공회 내부인보다 이제 공회 외부인들이 더 많이 찾는 곳입니다. 처음 개설할 때부터 그렇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공회 외부인들을 상대하는 이 홈에서 말마디에 '순교하신 백목사님'이라는 표현을 계속하게 된다면, 그 내막을 몰라도 일반인들로서는 순교가 아닌 것을 가지고 미화한 것인가 라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곳에서는 그렇게 단정을 하지만 평소에는 일반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순교자 손양원목사님에 대한 표현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그냥 손양원목사님이라고 하지 그 앞에 순교자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붙이지 않고 있습니다. 자꾸 붙인다면 우상화라는 표현이 따르거나 아니면 순교라는 사실에 의심이 오히려 붙게 됩니다.


③바울과 베드로는 순교자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를 모르는 교인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바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지막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는지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는 순교자라는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리나 선교 등 다른 사안을 가지고 설명할 때는 순교자라는 표현은 끄집어내지 않습니다.

백목사님은 순교자라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는 순교가 아닌 죽음으로 사망했다 해도 이미 그가 세상에서 가르친 교리와 설교와 목회는 신약전체 기간을 통해 수백년만에 하나가 나올까 말까 한 정도입니다. 순교자는 한 순간에 몇 백명이 나오기도 하고 어떤 시대는 수십만명이 나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로마제국의 박해시절에는 믿는 사람은 다 순교자였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으나 신약전체를 통해 한 시대를 진정 대표할 시대의 종으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 신앙의 최종을 바로 가지기 위해 평소 사모하여 순생으로 살다가 순교로 끝내야 하는 성도의 충성과 신앙자체를 두고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어떤 반론이나 이의제기가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평생이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았다는 최종 확정이 순교라는 것이므로 순교가 그렇게 중요하지만, 우리는 교리적으로 냉정하게 판정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순교로 죽지 않은 사람의 신앙은 순교로 죽은 사람의 신앙에 미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순교도 순교나름입니다. 어떤 순교자는 순생으로 살다가 자연사한 사람만 못한 신앙도 있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와 중세 치하에서 수없는 순교자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들이 순교로 죽지 않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다윗보다 신앙이 더 낫다고 무조건 단정하지는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순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일반인이 볼 때는 자연사였을찌라도 우리는 성경을 알기 때문에 그의 죽음의 내면은 순교적 요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즉, 순교로 죽음을 확정지운 분들은 그들의 평생이 남다른 순생으로 계속한 복된 사람이라고 우리는 알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순교라는 외형을 갖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뜨거운 순생의 걸음으로 평생을 살아간 아브라함과 같은 분들은 그들의 마지막 사망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다해도 우리는 그의 마지막 죽음의 내면이 일반인의 죽음과 같지 않았을 것임을 성경 전체를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이런 신앙차원에 있는 이들의 죽음을 순교라는 표현에 해당되는냐는 것을 가지고는 성경이 따로 설명하지 않았고 우리도 따로 논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브라함이 죽었다고만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을 다 기록하지 않고 반드시 기록해야 할 부분만 기록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은 성경 다른 부분을 보면서 기록되지 않은 부분까지를 따로 읽게 됩니다.

백목사님의 사망은 그 외형 그 외부 모습까지 순교로 나타났습니다. 외부 모습이 순교로 나타나지 않은 사람들도 우리는 하나님만 알고 그 사람만 아는 내면을 꿰뚫어보며 그 내용을 아는데, 하물며 외부로 순교라고 나타난 분의 순교를 두고 그 소속 교인들 입에서 유치원생 맞춤식 구호처럼 또 미신믿는 사람들의 주문외우기처럼 '순교하신 백목사님'이라고 표현하게 되면 역기능이 많을지 아니면 순기능이 많을지, 그 결산이 어떻게 되는지를 미리 예산해야 봐야 합니다. 이곳은 백목사님 사망 초기에는 '순교'라는 단어가 너무 절실했고 필요했으나 그 이후는 꼭 필요한 경우 적절하게 사용하는 지혜와 조절이 필요하다고 느껴 백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에 대하여는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들의 예를 가지고 상대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내에서의 '순교'라는 표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단의 정통성과 비교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로 인식되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주기철 손양원목사님처럼 누구든 그 사정을 알고 인정을 하고 있는 경우는 굳이 따로 사용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순교를 알고 흠모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고, 백목사님처럼 순교라는 외형이 전혀 없는 듯 보이는 경우는 상대방에게 자세하게 내막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봐가며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교단의 지도자로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는 분을 향해 그 내용을 설명하지도 않고 또 설명을 할 수도 없는 분들이 그냥 순교라는 표현을 지나치게 앞세우면 순교로 조작되고 미화되었다고 광고를 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답변자가 백목사님의 순교가 왜 순교가 되느냐고 반론적으로 물었을 때 그 반론에 대한 답변을 하는 교인들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일부 목회자 1-2명에 그친 정도입니다. 대개의 경우는 그분들이 설명하는 대로 순교를 정의한다면 교회의 순직자는 전부 순교자가 되어야 하는 정도입니다. 그리 된다면 백목사님 한분을 순교자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순직자가 순교자가 되고, 그로 인하여 참 순교와 순교자들은 상대적으로 파묻히는 반순교적 행위가 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 죄송한 표현이지만, 총공회 신앙노선의 3대 기본원리 중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 '진리전원일치'인데, 백목사님 사후 공회 내 보수측 지도부 목사님들과 서부교회 지도부 교인들 중에서 이 원리를 바로 설명하고 이해한 분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들의 설명대로 전원일치를 이해한다면 수정노선의 다수결제도가 공회원리가 되어야 하는 정도였습니다. 이제 목사님 사후 15년이 지나고 있고 공회간 투쟁이 종료되는 시점입니다. 답변자의 당시 활동 중에서 이 신앙노선의 정확한 판단과 교육을 위해 필요한 부분들은 꼭 필요한 경우 앞으로 제시해 나가려고 합니다. 이 홈 전체를 통해 천국의 복을 까먹는 일인지 또 없는 역사를 만들어 유권자의 표를 모아 공회교권을 도모하는 것인지, 아니면 꼭 해야 할 표현을 통해 이 신앙노선을 세워가는 일에 필수적인 일인지는 굳이 반복해서 스스로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④순교라는 표현이 마치 북한의 '장군님'과 같은 표현처럼 된 이유가 있습니다.

초기에는 순교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반대론을 완벽하게 토벌하여 적어도 외부로는 다시 그런 말이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백목사님 사후 서부교회와 공회의 분화 과정에서 공회 신앙을 수정하자는 대구공회측에서 의도적으로 백목사님의 이름을 무작정 비판하고 매도하는 전법을 전면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이라는 이름도 이제는 구역질 난다는 표현을 가지고 공회의 신앙노선을 수정하자는 자신들의 전략에 써먹고 있었습니다.

마치 박대통령 때문에 굶어죽던 나라가 잘먹게 되었는데, 당시 야당에서 정권을 잡으려고 박대통령의 경제장점은 묻어버리고 오로지 장기독재라는 면만 강조하여 일단 바꾸기만 하면 잘 되는 것으로 홍보전을 펼쳐 결국 당시 야당들이 이후 전부 정권을 돌아가며 한번씩 잡게 된 것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신앙노선을 수정시켜 이제 일반교회처럼 춤도 추고 놀러도 가고 주일도 범하고 온갖 인간 재미를 보면서 교회를 다니고 싶은데 찬반논쟁이 벌어지면 항상 백목사님의 교훈 자료 때문에 수정노선이 꺾이게 되니까 수정노선에서는 백목사님 이름 자체를 매장시켜 그 이름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게 하지 않으면 내부결속도 또 보수노선과의 이론 투쟁에서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백목사님 사후, 수정노선이 밀리기 시작하자 최후의 카드라고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전국 지방교회들에게서 백목사님의 이름과 총공회라는 이름 자체를 가지고 얼마나 욕이 난무했는지? 15년 전을 돌이켜보면 그때 일이 불현듯 기억날 것입니다.

이렇게 수정노선이 지나치게 백목사님 이름 자체를 가지고 욕을 하고 나오자, 이 신앙노선을 지키자는 보수측 중에 일부 지도부가 '순교하신 백목사님'이라는 표현을 맞춤처럼 사용하여 맞불을 놓자는 전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물론 전법이기는 하지만 이 신앙노선과 백목사님에 대한 존경심은 이곳 답변자와 다름없는 분들입니다. 당시 서부교회 교인들의 사소한 접촉에서는 그 필요성이 있었고 그 반복교육이 좋은 효과를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표현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상 생활 표현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표현이 아주 영구적으로 고착되도록 하는 일이 생깁니다. 수정노선과의 결별 후에 안정을 찾아가던 서부교회 내에는 내부적으로 다시 한번 노선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번에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수정하는 운동이 벌어지게 되고 그 구심점에 있는 분이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선임자에 대한 존경심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조용하면서도 착실하게 백목사님 비판을 하게 됩니다. 교회 내 중간 지도층들에게는 백목사님의 숨겨진 사생활이라며 온갖 욕을 퍼뜨리고 지도부에서는 중요한 대목에 적절하게 방향을 틀어쥐고 중요한 발언을 통해 보수측을 압박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신앙노선의 보수를 외치는 내부교인들이 전면전을 선포하고 이후 서부교회는 오늘까지 현상태로 대치하며 갖은 충돌을 빚게 됩니다.

이렇게 양측이 맞붙게 되자 온건 수정론자들은 표나지 않게 뒤로 백목사님에 대한 욕과 모함을 재주껏 퍼뜨리게 되고 그 불을 끄고 상대방과 맞서기 위해 반대측에서는 '순교하신 백목사님'이라는 구호를 평생 가져갈 표현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런 연유를 알지 못하는 분들 중에서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에 대하여 극진한 존경심을 가진 분들은 왜 자신들 입에 '순교하신 백목사님'이라는 표현이 익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순교하신 백목사님'이라는 표현을 그냥 보통 명사로 사용하게 됩니다. 공회 내 보수측 내부의 이런 상황 변화와 비교할 때 이곳 답변자는 그런 표현을 거의 하지 않으니까 마치 이곳이 백목사님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을 제기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시간이 없어 이만큼 많은 말로 설명한 적은 없었으나, 이번에 지적하신 분은 답변자보다 백목사님을 더 사랑하는 분이고, 이 노선에 대한 의지가 더 굳은 분이어서, 배경 설명을 충분히 소개하는 것이 귀한 분의 귀한 사역에 도움이 될까 생각했습니다.


⑤참고로, 이곳 답변자는 설교록에 '목사 백영희'를 '백영희'로 관철한 입장입니다.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설교록을 보면 초기에 '백영희'라고 저자 표시가 된 것이 도중에 '목사 백영희'로 3-4권 바뀌어 출간 된 적이 있습니다.

세상 학문과 실력에서 고차원에 계신 공회교인 중에서 '백영희'라는 이름만으로 저자표시를 한 것이 잘못이라며 목회연구소에 '목사'라는 표현을 붙이도록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자 백목사님께 직접 건의를 하여 바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 백목사님께 '백영희'라고 이름을 적은 것은 '목회설교록'이라는 책제목이 목사의 설교록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같은 표현을 주렁주렁 매달아놓는 것보다 간촐하게 하는 것이 더욱 은혜스럽고 겸손하게 보이며, 칼빈과 루터도 목사였지만 교회사에서는 칼빈목사나 루터목사라고 하지 않고 그냥 이름으로만 사용되는데, 이미 '백영희'라는 이름은 교회사에 칼빈의 이름처럼 남아야 할 차원이기 때문에 설교록 출간 실무책임자로서 '목사'라는 표현을 일부러 뺀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후 실무자 자유로 하도록 허락을 받아 이전처럼 '목사'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백목사님께 만일 '목사'라는 표현을 꼭 적어야 한다면 '목사님'으로 표현하면 했지 '목사'로만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양심으로서는 그렇게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중은 우리가 평소 중이라고 하는데 신문 방송에서 '스님'으로 표현을 하고, 기독교 목사님은 평소 목사님으로 부르는데 책이나 신문에 나오면 꼭 '님'자는 떼버리는 것이 1970년대 불교인이 정권의 중추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현상이고 답변자 양심에는 백목사님 뿐 아니고 어떤 교파에 있다 해도 교회의 성직은 최소한 실제 부를 때 '님'자가 들어갔다면 그렇게 인쇄에도 넣어서 일반 교인들에게 목사님을 목사로 부르게 되는 폐습을 고쳐보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답변자는 글을 쓸 때 백목사님 뿐 아니고 이단이 아닌 이상 모든 교회 성직에는 반드시 '님'자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이기 때문에 이곳 홈에서 백목사님의 순교를 소천이라고도 하지 않고 사망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꼭 그렇게 표현하지 않으면 곤란한 경우에 마지 못해서 사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드린 그런 이유 때문이며, 뒤에 다시 설명한 이유처럼 이곳 홈이 백목사님에 대한 존경과 성직에 대한 애착의 결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님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이후 같은 성질의 지적에 대하여 한 자리에서 설명하고 앞으로는 이곳 글을 인용하여 참고하시라고 드려야 할 것이어서 설명 내용이 비교적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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