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통합 측 장로님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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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4 00:00
일시 : 09.8.28.
이름 : 통합 측 장로님
1. 신상
1936년 생이며 현재 74세
1953년 18 세에 처음 교회를 출석했고 현재 주변 지역의 통합 측 원로 장로님
2. 교회 출석
1953년 18 세 되던 해에 동네 아는 집에서 놀다가 자고 오는데 아침에 소나기가 쏟아졌고 의지할 곳이 없어 외따로 있는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새벽 예배 중. 처음 나오는 사람이 새벽기도까지 나온다고 해서 환영. 서귀덕 집사님이 김판심 집사님에게 나를 이야기해서 그때부터 교회를 출석. 교회 출석은 전적 노력했고 출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배당 터를 닦으며 건축이 시작.
3. 개척
- 사택 예배
손양원 목사님 사모님이 애양원에서 나와서 가정 집에서 예배 드리고 계셨는데 원래 사모님은 애양원교회를 다니시다가 밖에 나와서 바로 개척을 했고 애양원에서는 동네에다 직원들 가족이나 주일 학생들 때문에 따로 성암교회를 개척.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초가집을 산 것이 백동학 집사님 집이며, 그 집은 장차 건축할 예배당 터와는 50-70m 정도의 거리.
- 애양원
애양원 교인들은 사모님을 좋아했고 따랐으나 위에 있는 후임 목사님이 사모님을 견제, 후임은 공개적으로 배척은 하지 않으나 보이지 않게 압박. 사모님은 애양원에서 나온 뒤에도 애양원 일반 교인들을 심방. 애양원은 지역의 노회와 상관 없이 선교부가 직접 운영했고 후임은 선교부 계통에 배경이 든든하여 특별한 관계.
4. 정양순 사모님
- 신앙
사모님이 심방할 때 가방을 들고 많이 따라 다님. 토 요일이면 꼭 심방을 다니는데 자기도 어려운데 애양원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도 나눠 주고 그래. 사모님을 따라 다니면서 제일 불안한 것이 나환자 촌인데 가면 그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 자기 손수건으로 닦아 주고 그 손수건으로 또 자기도 닦고. 그런데 그 손수건을 가지고 감 같은 것을 먹을 때는 그 감을 그 손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먹으라고 주는데 나는 불안해서 너무 고통. 며칠 전에도 집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밥을 먹으면 된장에 뽕 잎 같은 것 넣어 놓았던 것 닦아 가지고 밥에 올리고.
한 번씩 교인들이 사모님 집에 가서 우스개 놀이, 그 때는 비가 오면 예수님 오신다고 밭에서 일하다 모두 교회로 모여 들고 했는데, 한 번은 여자 집사님들이 남자 나환자 복장을 꾸며 갖고 옆 교회를 가니까 저기 동네 사랑방으로 가라고 밀어 내고, 또 사모님 집으로 가니까, 입원하러 왔는데 하루 밤 잘 수 없냐 그러니까 식모를 보면서 단번에 '방 비워 줘라. 너는 여기 와서 자고... ', 얼른 들어 오라고 하니까 집사님들이 가방이고 뭐고 내 버리고, 달아나.
실제로 어느 날 비가 무지 많이 떨어지는데 막 병든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려고 오는데, 차에서 내리니까 비가 와서 애양원까지 들어 가지 못하고 옆 교회로 갔는데, ‘저 옆에 교회로 가 보시오.’ 해서 우리 교회로 보낸 것. 그 날 저녁에 사모님이 모두 자는데 그 사람 담요 덮어주고 우리도 그래 같이 있는데, 아침에 보니까 그렇게도 험한 환자를 무릎에다 눕혀 놓았음. 저녁 녁에 비 맞았다고 이불을 덮어주고 ...
5. 초기 교인들
- 서귀덕
애양원의 총무 과장이며 마을의 유지였던 차종석 장로님 부부는 둘 다 신앙이 좋았고 고신 신앙을 좋아했으나 차 장로님이 애양원의 행정을 총 책임 진 문제가 워낙 크니까 선뜻 움직이지 못했고 부인 서 집사님은 애양원에서 개척한 교회를 다니면서도 마음은 사모님 교회에 있었고, 서 집사님은 장로 2 - 3 명 묶어 놔도 못 당할 신앙과 성격으로 유명. 찬송가를 불러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만 하는 정도.
- 초기 교인
사모님 개척 교회 교인은 여반 몇 명과 주일 학생들 뿐인데 서 집사님이 남편 때문에 경제 자유가 없으니까 정양순 사모님은 외지 각처로 다니면서 모금을 했고, 사모님 계시지 않은 평소에는 김판심 집사님이 교회 실제 살림. 청년 중에는 김종화가 수고했고, 예배당을 지을 때는 등도 없고 후레쉬도 없고 바닷가에서 갯돌하고 자갈을 밤마다 이어 날랐으며 안 믿는 사람들의 인심이 움직여 동네 사람들이 건축 기간에는 교회를 다니면서 건축을 해 주었고 건축이 끝난 뒤에는 제 자리로 돌아 감.
6. 신앙 노선 문제
- 고려파
처음 장로교가 분리 될 때 애양원은 총회 파에 섰고 사모님은 고려 파에 확고. 그래서 강사로 모시는 분들도 출옥 성도. 옥중에서 입이 찍혀 뭉개 진 목사님, 이런 분들이 오신 정도.
- 애양원의 압박
손 목사님 순교 후 애양원 목사님이 사모님께 압력 행사. 애양원에서 지어 준 사택에서 부산으로 가게 하는 운동. 사모님이 신풍을 떠나야 신풍에서 고려파 운동이 줄어 드니까.
- 건축
양 아들 안재선이 교회 예배당 건축 때 나무를 순천 제제소에서 가져 왔는데 그 집과 무슨 관계, 목수는 어떤 사람이 정처 없이 떠 돌며 옛날 군인 가방 같은 데 목수 연장을 넣고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들어 왔다가 일을 맡음. 보수를 보고 한 것이 아님. 우리가 교회를 먼저 시작했으나 애양원에서 경쟁을 한다고 뒤에 시작했고 돈이 많아서 1 년만에 완공하고 우리는 뒤에 완공. 건축 비용은 초가집에서 예배를 보며 사모님이 모금 운동을 해 와서 돈이 모이는 대로 조금씩 건축하느라고 3년에 완공. 건축 자재는 돌인데 달섬에서 깨어 나름. 애양원이 돈이 많으니까 우리 교회 석공들까지 돈을 더 주고 데려 가니까 그 밑에 사람들도 그 쪽으로 일하러 가고 사람을 구하지도 못하게 하여 방해.
낮에는 자기 일을 하고 밤에만 나와서 일을 하니까 안 믿는 청년들이 모두 나와서 일을 했고, 나는 안 믿는 가정이고 신앙도 없었으나 밤에 예배당 짓느라고 낮에는 밥상 앞에서 기도하다 졸아서 엎어진 정도. 지금도 어디 가서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이 일하려 하시면 하나님이 쓰신다고 확신있게 증거. 교회 건축이 특별하게 역사 되었다는 것에 자부심.
토지는 처음 구암 동네 뒤에 마을에서 땅을 비워놓았는데 예배당을 지으려 하니까 동네에서 반대를 하면서 대토를 준다고 제의를 했고 그 대토는 곡식이 안 되는 박토이니 옥토하고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예배당 터로서는 바꾼 곳이 더 좋았다. 하나님께서 석수도 불렀고 목수도 불렀고 교회 일하는 데 청년들을 동원 시켰다. 그들이 밤낮으로 일했으나 건축이 끝나니까 그 청년들은 원래 불신 상태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건축은 하나님의 뜻
7. 개인 연혁
27세 결혼, 첫 아이를 낳고 교회를 다니다가 서울로 갔고 결혼은 불신 결혼이었으므로 교회 주례 때문에 하나는 세례를 받고 하나는 최소한 학습이 필요해서 신부가 믿는다고 하는데 여천 상암 어디라 해서 교회를 갔으나 교적에 없어, 당회장 남영환 목사님이 6개월 후에 하자 하여 학습 받고 결혼식을 하려 했으나, 신부 집 근처에 예배당이 없어 가마 타고 장가 갈 때니까 교회 청년들이 신부 집에 가서 마당에다 예배 볼 곳을 임시 지어 가지고 거기서 박래석 전도사님 주례.
8. 교역자
- 하 전도사님
고신 시절에 하 전도사님인가 경상도에서 온 전도사님이 먼저 계셨는데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던지 교회 지어 놓고 아직 가마니 깔고 예배 드릴 때인데 옆 교회 예배 끝나고 집으로 가는 시간까지 기도. 1시간이고 뭐고 그렇게 오래. 대표 기도도 그렇게 오래 하시고.
- 류우열 전도사님
그 후 류우열 목사님이 오셨는데 나중에 애양원의 원장 목사님이 합동 측으로 개척을 시켜 총회 파로 갔다가 통합에서 은퇴. 이 쪽으로 온 사람은 생활비와 지원을 통해 저 쪽으로 데려 가고 저 쪽에 온 목회자는 이 쪽에서 고려 파를 만들어 넘어 오게 하여 서로 신앙 노선 정립
- 박래석 전도사님
그 후임은 박래석 조사님이고 젊을 때 오셨고 설교도 잘했고 대인관계를 굉장히 잘했으며 이교부라는 김현봉 목사님 최 측근에게 많이 배우는 그런 시기. 교인들 온상에서 일도 많이 도와주고 환자들이 있으면 토끼 사다가 배를 내서 잡아다 주어 보양도 시켜서 지역에서는 인정을 받는 정도. 신풍에 비행장이 들어오고 예배당 이전 관련 보상비 일부로 순천의 남문교회를 개척
- 곽봉빈
그 후임은 이북에서 피난 오신 분. 익산군 삼기면 기산교회에서 신풍 부임.
9. 집회
- 백영희
하 전도사님 시절에 백 목사님이 집회 온 기억. 백 목사님이 애양원에 따로 집회 오셨다는 것은 말만 들어 기억이 있고 당시는 건성으로 다녔기 때문에 애양원 집회에는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우리 교회에서도 별도 집회 인도한 기억이 틀림 없고 당시 백 목사님은 조사님 시절이며 우리 교회가 초가 시절은 지났고 설교 때 원고는 아니고 메모지 비슷하게 몇 자 써서 한문 풀이 식으로 했고, 그때 젊었을 집회 인도하신 걸 한번 봤고, 나중에 목사님들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제명 당했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목사 안수를 할 때 교단에서 안 해 줘서 목사 5인이 필요하니까 김현봉 목사님과 그 계열에서 안수 받는다고 했음.
- 김현봉
김현봉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분이지만 우리 교회는 이교부라는 김 목사님의 측근과 가까운 목회자가 계셔서인지 자주 집회
- 이교부
교회가 비행장 때문에 예배당을 이전할 때 예배당 옆의 사택을 지으면서 그가 건축한 정도로 챙기던 교회. 머리가 비상했고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과 같은 전북 출신.
10. 소속
- 고려파
처음에 고신으로 출발했고 1961년 제대 후 한참 지난 뒤에 박래석 전도사님이 삭발했으며 이 때는 김현봉 목사님의 신풍 집회 인도가 있은 후 한참 뒤.
- 김현봉
박래석 목사님 인연으로 교회가 이교부라는 인물과 연결을 많이 가지면서 김현봉 목사님 교회로 소속이 되었는데 교인들은 교회의 소속 변경을 모르고 따라만 가는 형편.
- 이병규
1965년 김현봉 목사님 사후에 이교부 측을 거쳐 이병규 목사님 계신 측에 소속
- 백영희
1974년에 소속 확정. 손 목사님 사모님의 개척으로 내려 온 교회가 총공회로 가입하게 될 때 계신 측에 남기를 원하는 교인이 소수 있었고 분쟁을 통해 다수 교인은 그 예배당에서 그대로 총공회 소속. 모두들 아현교회 김현봉 목사님과 이교부 씨로부터 초기에 다 은혜 받고 좋아했는데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열심을 가지다가 지나쳐서 그렇게 됨
11. 기타
(1) 정양순 사모님
- 신앙
어쩌다가 안재선이 한 번씩 오면 사모님이 보선 발로 맨발로 뛰어가서 ‘재선아-!’ 껴 안으면 우두커니 섰고.
사모님이 성대가 좋아서 상당히 찬송을 잘했고 가끔 ‘내가 복장 하나 할란다.’ 하고 나가서 독창. 사모님은 성경 옥편이라 불렸고 전도사님들이 '전도사님 사택으로 좀 갑시다.' 해서 당신이 이해가 될 때까지 뜻을 물어봐서 가르쳐서 고쳐 주고. 설교가 잘못 되면 다시 뒤 시간에 나와서 가르치시고...
- 근검절약
한번은 심방을 가다가 어느 사람이 지게 목발이 길어서 잘라서 내 버린 것이 하나가 있는데 그 도막을 주워서 가방에다가 넣더라고. 사모님 그걸 가지고 무얼 할 수 있느냐 하니, 화로에 불씨 넣으련다, 그때는 성냥도 귀하고 그때 항상 불을 담아 놓고 화로로 묻혀서 했잖아요? 그러면서 불씨 하련다고 도막을 주워서 넣더라고. ‘사모님 지게 목발 도막 그냥 내버려요 했는데, 사모님은 그만큼 경제적으로도 철저했고.
(2) 서귀덕
- 교인 챙기기
주일날이면 밥도 못 먹고 집에서 쫓겨난다고 해서 서귀덕 집사님이 김판심 집사님 집에다가 쌀을 줘 가지고 교회 오는 사람들 돌아 갈 때 밥을 먹여 보내게 했고,
- 신앙 이야기
서귀덕 집사님 집에는 낮으로는 못 가고 밤으로 가는데 밤에 가면 비밀도 듣고 재미도 있고 또 연락도 해야 되니까...
- 목회자 섬기기
한 번은 밖으로 빨리 오라더니 창고에 가서 쌀을 한 가마니 지워줘. 힘이 없어 기지도 못하는 사람이 쌀 한 가마니 짊어지워 주는데 어떻게 그거 짊어매고 교회로 왔더니, 박래석 목사님 있을 때인데, 식구가 9 명. 밥 할 쌀이 없어서 물만 끓이고 있었어. 지금 생각하면‘하나님께서 이렇게 쓰시는구나.’ 이것을 지금 생각해...
- 사랑의 교인들
서기덕 집사님, 사모님, 김판선 집사님 세 분에게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아 가지고 처음 교회 다닐 때 안 나갈 수가 없었어.
- 훗날
사모님은 부산으로 가고 나서도 한 번씩 신풍에 오셨고, 삼각산 기도원 그런 데서 가끔 만나면 그렇게 반가워 하실 수가 없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