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전쟁과 현대전의 모습 양상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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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6 00:00
1. 세상의 전쟁 양상
전쟁이라는 말을 들으면 양 쪽에서 동원한 군인들이 밀고 밀리다가 한 쪽이 많이 죽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면 항복을 하는 모습이 떠 오릅니다. 1950년 6.25 전쟁까지는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의 베트남 전쟁부터는 전방 후방이 따로 없고 군인과 민간인이 뒤 섞여 누구를 상대로 어디에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알지 못하는 비정규전 게릴라전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소련이 망하고 미국만이 유일하게 강대국으로 남게 된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이 세상에 대규모 전쟁은 끝나고 미국이 경찰처럼 몇몇의 범인만 쫓아 다니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와 이어 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이제는 누가 적인지 어디에서 총이 날아 올지를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난장판이 벌어 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과거식 전쟁하는데 후방인 미국 본토의 중심부가 어디에서 날아 올지 모르는 총알과 폭탄 때문에 걱정하되 심지어 화학 약품이나 세균이나 핵폭탄을 사용하게 되면 최전선 이상으로 큰 피해가 발생하게 되어 전선이 따로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거 전쟁에서는 국민의 총동원이 있고 대규모로 밀고 올라 가는 전쟁을 지휘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고 양 측이 맞 부딪히는 과정에 영웅이 만들어 지고 갖가지 전쟁담이 나오고 전쟁이 끝나면 동상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제는 전쟁에 전혀 뜻도 없고 일선에 나가지도 않았던 민간인이 대규모로 죽고 그 과정에 사살이 아니라 살인으로, 전투가 아니라 난동으로, 전사가 아니라 사건 기록으로 마무리 되는 시기입니다.
2. 신앙의 전투 현장
- 2천 년 기독교사의 환란들
과거 신앙의 전투 현장은 국가나 사회가 기독교를 반대하고 신앙을 거부하면서 대규모 탄압이 벌어 지고,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교회는 알면서도 무릎을 꿇고 타협을 하며 항복을 하고 그 중에 일부는 끝까지 견디고 그 중에 일부는 죽어 순교자로 기록 되고 그 중에 일부는 생존하여 그 후 새로 출발하는 신앙 자유의 시기에 교계 지도자가 되며 그 순생의 신앙이 다음 세대를 이끌어 다시 교회를 회복 시키되 하나님의 은혜로 대개는 더 큰 번성을 누립니다. 그리고 교회사는 그 역사를 살펴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으며 다시 닥칠 미래를 준비해 왔습니다.
주일을 지키면 밥 먹기가 어려워 지고, 우상을 거부하려면 로마 교황이나 군국주의 독재자가 갖은 방법으로 고문 고형을 했고 투옥을 거쳐 죽음으로 내 몰았으며 그 과정에서 그 가족과 교인들조차 모두 흩어 지거나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이므로 외부 환란이 더해지면 인간 눈에는 아주 사라질 것 같은데도 오히려 그 고난의 시기가 들어 다음 세대의 도약의 발판이 됩니다. 전적 은혜며 기적이며 하나님의 인도였습니다. 초대교회를 향한 로마 황제의 환란에서부터 중세기 천주교 시기와 미개인들을 선교한 중세기 현세기 모든 환란이 그러했으며 우리로 본다면 유교 사회와 일제 식민지 신사참배와 6.25 전쟁의 공산당 환란이 다 그러했습니다.
- 20 세기 후반 이후의 환란들
기독교 선진국인 서양 세계는 20세기에 접어 들면서부터, 그리고 우리 나라는 6.25 전쟁을 이후 1960년대의 발전 이후부터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거의 모든 나라의 경우로 보면 이제는 신앙에 대한 환란의 모습과 내용과 전개 과정이 마치 세상의 전쟁 모습의 변화처럼 급변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면 죽인다거나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세력이 없어 졌습니다. 세상이 법으로 인권을 보호한다면서 기독교를 마음껏 믿을 자유를 주선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예산을 배정하고 세금을 면제하며 각종 사회 혜택을 뿌려 대고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 이슬람 사회나 북한 같은 예외적 사회는 있지만 그들도 외부 눈치를 봐 가며 탄압을 몰래 하거나 무슨 다른 이유를 열심히 갖다 대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신앙을 탄압하는 세상 세력이 유리 너머로 세계인이 구경하고 지켜 보고 감시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옛날식의 무조건 막 가는 탄압이 없어 졌습니다. 만일 예외적 국가조차 그렇게 탄압을 하게 되면 그 만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정상적이고 일반 국가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따라 나 원하는 대로 살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입니다.
고전적 전통적 옛 교회사의 기록적인 환란은 없어 졌다고 해야 할 시점입니다. 최소한 우리 사회 및 우리가 자유롭게 드나 드는 곳은 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좋은 세상이 되었는가? 강제로 신앙을 짓 밟는 행위를 환란이라고 규정한다면 분명히 환란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신앙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타락하고 교회다운 교회는 아예 멸종을 했다 할 만큼 되었는가? 아합이 남에게 강제를 당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팔려 죄를 지었던 것처럼 오늘은 좋은 것이 너무 넘침으로 교회가 자원해서 죄를 짓고 스스로 신앙을 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 기묘한 세상, 더 어려워 진 시대
세상과 주변이 나의 신앙을 빼앗으려고 위협을 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믿는 우리가 세상이 좋아 세상을 닮고 신앙을 버리고 싶어 교회와 신앙과 교리와 바른 길을 다 팔아 치워 버리는 세상, 이 것이 오늘 우리 앞에 닥친 위기의 시기입니다. 결과적으로 비교하면 과거 환란에서 넘어 진 교회와 신앙의 숫자와 분량에 비교하면 현재 신앙과 교회를 포기하고 남아 있는 교회나 신앙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습니다.
이제는 믿는다고 우리를 죽여 순교자로 만들어 줄 정권도 세력도 이웃도 없습니다. 우리를 순교자로 만들면 국제 사회가 제재를 해서 우리 하나 죽은 것과 비교할 때 그 국가의 손해가 너무 커서 우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송환을 해 주는 시대입니다. 순교자가 없으니 순생자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님으로 취직에 도움이 되고 사회 생활에 사교의 범위를 넓히고 장관이 되고 장군이 되고 회사에 취직하는 데 도움이 되니 세상을 위해 교회로 들어 오는 이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노래방이나 술집에 가서 노는 것보다 예배당에 오면 놀되 건전하게 좋게 놀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3. 정말 어려운 시기
문제는 이 세상을 가지고 우리 신앙을 짓 밟던 시기의 귀신이나 오늘처럼 세상을 좋아하여 우리가 스스로 신앙을 버리는 시기나 그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은 내나 그 귀신입니다. 그 귀신이 우리를 삼키는 방식을 과거에는 눈에 보이는 '전개 전'으로 지금은 '풀어 놓고 삼키는 전'으로 변경했으니 우리를 삼키는 방법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과거 전보다 지금 전에 삼켜 지는 교회와 신앙이 비교 못하게 많습니다.
주 5일 근무제를 법으로 만들어 주일은 물론 토요일까지 쉬게 하여 주일을 준비하도록 하고, 국기배례처럼 2계명의 문제가 있는 것은 양심자유의 헌법 조항을 통해 탄압이 될 수 없도록 하다가 그래도 안 되니까 국기를 장난거리로 만들어 마음 놓고 국기를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까지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좌파 신문에서 공회의 1970년대 국기배례 고생한 것을 애국행위라고 치켜 세우기까지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면 과거 환란은 평소 준비했다가 환란이 닥칠 때 일사각오로 한 번만 눈을 지끈 감고 죽으면 되는 전쟁이었으나 지금은 1 년 12 개월을, 하루 24 시간 전부를 평생 눈을 부릅 뜨고 긴장하고 각오하지 않으면 다가 오는 환란이 문제가 아니라 준비하는 이 순간에 이미 다 삼켜 버려서 정작 환란이 왔을 때는 싸우고 말고 고민할 것도 없이 이미 실패 신앙으로 끝이 난 상황입니다.
가끔 옛 순생 순교자들의 고문과 고형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제 마음은 진정 그런 길을 걷고 그런 순간에 이기고 싶으나 제 준비와 제 신앙의 수준에서 보면 턱 없이 부족하여 넘 볼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만일 총이나 칼로 즉살한다면 요즘 신앙 상황으로서는 담대하게 신앙을 지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서히 고통을 주는 방식이면 미리 항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거 순생 순교자들에게 닥치던 그런 점진적 장기간 고문과 고형과 비교할 때 최근에 우리 사회와 주변에 엄습하는 이 사회 전체의 죄악 풍조를 고려하면 예전의 성도들을 오늘에 갖다 놓는다면 거의 다 실패하지 않을까? 최소한 대부분이 실패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 오늘을 이긴다고 과거보다 낫다 할 수는 없으나 옛 성도들이 오늘의 변화 된 환란을 이긴다는 것은 아주 어려울 듯 합니다.
이런 시기를 위해 신사참배를 이기고 출옥한 성도들의 해방 후를 짚어 보면 답은 쉽게 나옵니다. 신사참배의 장기간 고문과 고형을 승리한 것은 아무리 우르러 봐도 모자랄 뿐이지만 그 분들이 해방 후 평화시를 만난 다음 거의 전부가 다 신앙에 실패했습니다. 무식하고 우직한 환란에 버틴 이들은 예민하고 간교하여 고등 수법을 부리는 귀신 앞에서는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오늘 예민하게 온갖 수법을 동원하는 귀신을 우리가 이기고 굳건하게 이 신앙을 지킨다 해도 과거식 고문과 고형 앞에서는 거의 다 넘어 질 것 같습니다.
어쨌든 시대 상황이 그 때는 그 방법으로 지금은 이 방법으로 우리 신앙을 흔들며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기의 환란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제가 이길 수 없는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은 피할 길을 주시든 그런 고난까지 이기게 하실 분은 주님이시니 기도하고 부탁할 뿐입니다. 역사 전체의 전개로 볼 때 우리에게 닥치는 환란은 신학교나 전기책을 통해 배우는 그런 모습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지금 보수 정통 신학교에서는 과거 신사참배 같은 환란이 오면 순생 순교적 신앙으로 나가겠다고 결의를 다지며 구호를 외치며 반복 교육이 넘치는 모습을 봅니다. 귀신은 그들에게 과거 그 환란만 보게 하면서 그들의 현재를 다 삼켰습니다. 사실 훗날 싸우니 마니 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교권욕과 돈 욕심과 각종 유혹에 제 정신도 아닌 사람들이 잠꼬대만 하고 있는 모습니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이 글을 읽는, 바로 이 순간 우리는 격전지 한 가운데 선 심정일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 노선의 환란 대비와 승리를 위한 준비는 구시대를 통해 오늘을 늘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