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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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9 00:00
1. 지방교회에 대한 기억들
며칠 전, 미국에 계신 공회 가정에서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 설교 자료를 보내 주셨습니다. 백 목사님 설교로 재독하는 분이 생활 속에서 알게 된 분이 지방교회 가정이었고 자연스럽게 대화와 자료 교환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방교회 소식은 간간히 전해 들을 기회가 있었고 늘 알고 있는 그런 내용이어서 특별하게 제 인식이 달라 진 것은 없었으나 이 번에는 설교 테이프여서 서울 순회 가는 차 안에서 2 개 설교를 들어 봤습니다. 2011년 7월의 캘리포니아 집회 기간 설교들이었습니다.
1974년경, 주변에 지방교회를 다니는 분이 학교 서무실에서 근무하며 '오, 주여!'라고 하루 종일 입 밖에 소리를 내어 모두들 '오주여 교회'를 다닌다며 수군거렸고 그 때가 지방교회를 접촉한 첫 기억입니다. 공회 교회는 모두가 항상 '주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에 저는 우리 비슷한 분들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 분이 자기들은 예배로 모이면 일반 교회들처럼 설교자나 예배 순서가 미리 짜여 져 있지 않고 그 시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인 누구라도 설교나 기도를 하게 되어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공회 교회는 주보 없이 매 시간 주님 원하는 말씀을 전하려고 주보 한 장도 발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면으로도 우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또 그 분들은 한 지방에 한 교회만 세우고 교인들은 모두 서로를 형제로 부른다는 것이 제가 당시 기억하는 전부였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 삼분설 교리를 살피다가 워치만 니라는 분이 삼분설을 말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령한 면에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분의 저서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3 권 사서 한 번 읽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영과 마음을 구별한 대목에서 너무 반가웠으나 삼분설을 확고하게 잡은 것 외에 교리적으로 더 이상 특별한 면을 발견할 수 없고 다만 경건과 하나님 동행에 실감적 체험의 세계가 귀하여 좋은 마음으로 기억에 담아 둔 정도였습니다.
1999년 pkst 이 홈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지방교회 분들을 직접 접촉할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이 홈을 통해 알게 되는 분들이어서 달리 지방교회 교리나 내부 상황을 두고 다른 대화를 할 일은 없었습니다. 1990년대는 한국교회에서 지방교회를 이단 시비로 상대하며 교계적 논란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지방교회의 주장은 교회 소식들을 통해 듣는 그대로여서 과거 알던 것을 지금도 유지하고 계시며 한국 교계의 특수성 때문에 이단 시비에 걸려 고생한다는 생각 정도였습니다.
2004년에 지방교회를 열심히 다니시다가 홈을 통해 제가 목회하는 교회를 출석하게 된 분이 계셨고, 이 분을 통해 지방교회 내부 이야기를 좀 깊이 있게 듣게 되었습니다. 또 평소 제가 지방교회의 장단점에 대해 짐작하던 부분들을 확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지방교회의 훈련 프로그램으로 제작 된 테이프를 듣게 되어 이제는 설교를 들을 입장으로 설명이나 평가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지방교회 교인들은 그 숫자는 많지 않으나 그 믿는 방향과 자긍심 그리고 실제 그 분들이 열심히 믿으려 하는 등의 행동은 일반 교회들과 비교하면 확실하게 차이가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몇 가지 간단한 내용만으로 상대했고, 이 번에는 설교 자료를 통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평가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2. 지방교회 설교를 듣고
1) 좋은 점
- 생명력
설교 테이프를 들으며 참으로 복 된 사람들이 진실 되이 믿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계속 느낄 수 있었습니다. 쉬운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지금은 말세입니다. 복 된 사람도 희귀하고 진실 되이 믿으려고 노력하는 분들은 더욱 더 희귀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테이프로 들은 지방교회 집회는 Anaheim in LA입니다. 믿음의 씨조차 말라 버렸다 할 만한 곳입니다. 그 곳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는 내용이 설교 내내 이어 지는 이런 일을 기대하지 못했는데 그 집회는 실제 그러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지도자가 돌아 가신 지 50여 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하나님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순수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스승을 가졌다 해도 자체 신앙을 갖지 못하면 달리는 차량의 엔진이 멈추어도 바퀴는 한참을 더 굴러 가는 듯이 그렇게 흉내는 낼 수 있는데 50여 년 세월이 지나서도 아직도 이 정도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모임이라면 스승 속의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가진 신앙의 발로라고 느꼅습니다.
신혼의 며느리가 시부모를 부르듯 또는 신혼의 사위가 처부모를 부르듯 하지 않고 품 안의 3 세 아이가 부모의 품에 포근하게 기대어 부비는 모습입니다. 맏 딸이 노년의 부모님을 모시고 품위 있게 그 속 깊은 감사를 표시하는 모습입니다.
신앙의 생명력, 교육에 의하지 않고 제도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노력에 의하지 않고 실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 집회의 아버지로 오셔서 그들과 어울린 저녁 식탁처럼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동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런 상황을 그리는 단 하나의 소원만을 가졌음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 경건성
부모를 사랑한다 해도 본 데가 없고 배운 데가 없는 막 가는 가정의 아이들은 그 언행이 거칠기 이루 말을 못합니다. 중심이 중요하지 표현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분들도 계시니 표현이 반복하다 보면 속에 있는 중심을 뒤 집어 버립니다. 이런 면에서 중심 없는 표현은 외식이나 중심을 바로 가진 분들이 표현까지 정중하게 질서 있고 규모를 알며 만사를 조심하며 노력한다면 이 경건은 이 경건이 가진 생명을 더욱 생명 되게 만들고 그 생명을 유지하며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 어느 교회인들 예배라고 예배라 하기도 민망하고 교회라 해도 교회 이름 붙여 주기가 정말 낯이 뜨겁고 설교라 해도 설교일 수 없는 설교로 넘치는 시대에 조용하면서도 뜨겁고, 뜨거우면서도 조심하며, 조심 속에 사랑의 호소가 있고 이 모든 것은 경건이라는 좋은 그릇에 잘 관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면 때문에 지방교회 교인들은 천하에 자신들만 교회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겠다고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어 보면 귀한 말씀이 많습니다만, 그 책만 전한다면 그 책을 전하는 이들은 배달부에 지나지 않는데 지금은 인터넷에 그 내용을 올려면 놓으면 추후로는 배달부조차 필요도 없게 됩니다. 지방교회는 없어 져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지방교인들은 그렇지 않고 그들이 스승 없는 50여 년 지난 오늘도 자기들이 원하고 좋아서 스스로 설교 테이프에 담아 놓은 정도의 귀한 신앙은 자기 신앙으로 생생하게 살려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 원만성
하나님과 동행을 원하며 주님의 그 은혜가 아니라 그 은혜 속에 있는 주님 자체를 요구하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개 이 정도로 신앙의 차원이 깊어 지게 되면 통일교나 전도관처럼 도덕적 선을 붕괴 시키며 갖가지 험악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도덕을 지키며 인간들의 상식에 맞는 행동을 잘하는 모범적인 교단들은 공통적으로 그들 속에 하나님의 내재와 그 내재를 향한 몸부림을 구경할 수가 없습니다. 지방교회 말씀 속에는 주님의 은혜도 귀하나 그 은혜를 주신 그 주님의 존재 자체를 향하는 간절함과 실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의 도덕적 타락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일반 신앙을 기준으로 볼 때 열심히 잘 믿는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대개 치우쳐서 좀 병적 장애자적 사회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성이 원만하면 그 속에 신앙이라는 것을 구경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됩니다. 그런데 이 분들은 신앙의 간절함이 살아 있으면서도 사회성에 장애를 보이는 교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원만이라는 것은 여간 가지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좌나 우로 치우치는 것이 보통인데 원만한 길을 잘 잡고 계셨습니다.
여러 모로 참 반가웠습니다. 우리 나라의 재건 교회가 생명력과 경건력이 넘쳐 흘렀으나 그 분들은 인격적으로 사회성 면에서는 정신과 병원에 입원해야 할 사람들로 지탄 받을 정도였는데 우리는 그들의 신앙이 귀해서 그 면만을 강조하여 귀하게 봤으나 고신으로부터 일반 교단들은 이단이라는 소리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지방교회는 원만한 면까지 갖추어 보기 좋았고 반가웠습니다.
2) 아쉬운 점
- 시야가 좀 좁은 면
지방교회 교인들은 마치 공회 교인들처럼 자신들만이 신앙의 전부인 줄 알고 자기들 외에는 교회가 없고 교인도 없는 정도로 취급합니다. 말을 하지 않아서 자기들만 잘 믿고 나머지는 다 이단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살펴 본 바로는 오늘 교계를 기준으로 보면 탁월하게 잘 믿으려 노력하는 것은 보이나 이런 모임과 이런 운동과 이런 신앙은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에서나 제대로 믿으려는 분들은 많지 않아도 그래도 늘 면면히 이어 져 왔던 모습니다. 미국의 경건했던 시기에는 많았고 미국의 오늘에도 아미쉬들처럼 생명력과 경건력을 갖추고 자기들 세계를 잇고 있는 분들은 있습니다.
한국에도 비록 많지는 않아도 곳곳에 가끔 한두 분씩 아미쉬처럼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가는 분들, 지방교회 교인들처럼 생명력을 가진 경건의 신앙으로 실제 생활 속에서 주님을 동행하는 귀한 교인이나 그런 교회가 없지는 않습니다. 지방교회 교인들이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조금만 냉정하게 교계를 살펴 보셨다면 지방교회만 유일의 교회처럼 언행하는 것은 바로 잦아 질 듯합니다.
따라서 지방교회를 두고 '아쉬운 점'으로 표현하는 첫째 문제는 지방교회의 잘못 된 점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시야를 조금 넓게 살펴 보면 지방교회와 같은 형제들이 지방교회 외부에도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지방교회가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의 한 몸을 나누지 않겠다는 면을 강조하는데 자신들 세계 외부에도 자신들과 같은 이들이 있음을 적극 발굴하고 찾지 않는다면 이 소극적인 행동은 교회를 나누는 적극적인 행동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 교리의 연약성
교리란 우선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데는 왜 필요한지도 모를 정도의 책장 속에 꽂아 둘 서적과 같은 위치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교리가 없으면 자라 가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단칸 방 하나를 짓거나 창고 하나를 간단히 지으려면 아무나 재료와 연장을 들고 뚝딱거리면 해결이 되나, 그 것마저도 제대로 지으려면 설계가 필요하고 몇 층 높이로 지으려면 건축 설계의 기술이 정말 중요합니다.
왜 '지방교회'인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대목은 그 교훈 속에 들어 있는 교리의 빈약 또는 연약이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은 정통 교리를 좀 다른 면으로 쉽게 설명해 보려고 했다고 느꼈습니다. 최삼경 목사님의 발표대로 이단으로 갈 문제는 아닙니다. 최 목사님조차 설명을 하다 보니까 자기도 이단처럼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마찬 가지입니다. 실체를 자세히 잘 설명하려다 보면 언뜻 볼 때 실체로부터 좀 먼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 순간에 그 말을 박제를 해 버리고 그 상태 그대로 다른 곳에 가져 가서 이단이라고 하면 모두의 설교는 전부 비성경이라고 정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리 면에서 특별한 점이 없다면 지방교회는 현재처럼 지방교회 외의 교회들을 일반교회로 묶은 다음에 바로 비판하거나 이분법으로 나누는 일을 삼가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지방교회의 교리다운 교리는 사실 그 표현과 강조만 조금 다르지 깊이 보면 초대교회의 것이며 종교개혁의 루터나 칼빈의 것이며 2천 년 내려 온 교회 속에서 항상 제대로 믿으려 하던 분들이 추구했고 가졌고 누렸던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너무 많이 탈선한 교계를 향해 탈선으로부터 교회를 막아 나서려고 노력하는 모임 정도였으면 합니다. 지방교회가 한 지방에 교회가 하나이고, 그 하나가 바로 우리들이므로, 우리 외에 모든 교회와 교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쪼갠 사탄(?)들이라는 식의 논리나 언행은 조금 순화했으면 합니다.
- 성경 해석, 교훈의 빈약
이 부분은 너무 아쉬웠습니다. 이 면을 두고 말한다면 현재 일반 정통 교회들이나 보수 정통을 주장하는 개혁주의 계통의 일반 신학과 비교할 때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지방교회의 설교 내용을 표현하되 단어를 조금만 순화 시킨 다음에 고신이나 합동이나 합신과 같은 일반 교회 강단에 올려 놓으면 참 점잖게 품위 있게 그리고 갈급한 심정으로 설교를 잘한다고 하지 서로 부딪히거나 싸울 사안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교계에 흔한 설교였습니다. 많아서 흔하다는 것이 아니라 교계의 정통 설교의 모범적 교본에 충실한 설교를 하는 경우로 간다면 이런 설교는 그냥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는 말씀은 참으로 자주 나오고 또 실감 있게 잘 외치고 계셨으나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그 내용과 근거와 이유와 방법에 대한 설명은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야 부모가 좋은 내용과 이유를 몰라도 그저 좋은 것이고, 연세 많은 장녀가 부모님을 그리며 효도하는 심정은 그 내용이 너무 많아서 낱낱이 설명할 것도 없이 그냥 부모님이 좋습니다 라고 말만 하면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교인들의 집회라면 신앙이 어린 분도 있고 장성한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원래 좋은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을 할 것도 없습니다. 특별 집회가 필요하고 더구나 교육 훈련 집회의 설교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합시다 라고 말을 하려면 어느 성경의 어느 말씀에 어떻게 담아 주신 어떤 내용인지를 살펴야 하는데 시편을 위주로 많은 말씀을 전하고 있었으나 좀 구체적인 것은 너무 희박했습니다.
과거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워치만 니의 책 3 권을 다 읽었던 기억도 있었는데 그 때와 비교해 보면 발전적으로 평가를 할 때 성경의 이해와 깨달음에 대한 깊이가 너무 아쉽다는 표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제도화의 모순
집중적으로 연구할 과제가 아니어서 성급하게 단정을 하지 못하겠으나, 여러 개의 설교들의 첫 부분은 모두가 체계화 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이 표시 되고 있었습니다. 지방교회의 가치와 특별한 부분이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 중심 다하여 생활 속에서 실제 동행하고 모시고 순종하고 여쭙는 실상의 신앙이라고 들었는데 교재에 이런 번호가 매겨 지고 교육 훈련의 체계가 제시 되면 마치 우유를 모래 밭이나 진흙 뻘판에 부어서는 마실 수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우려를 해 보았습니다.
듣기로도 워치만 니의 제자들이 크게 2 갈래 흐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만 해도 이런 문제는 단순히 지방교회의 역사 고찰로 볼 문제가 아니라 지방교회는 지방교회였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그들의 본질 문제가 됩니다. 둘 중에 옳은 쪽이 있다 해도 그 옳은 쪽은 스스로에게 왜 우리는 단일교회를 그토록 주장했던가 자문자답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들의 과거 원래 교리는 이상주의였지 자신들조차 이룰 수 없는 잠꼬대였다 라고 혹평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방교회 내에서 둘로 나뉘는데 어떻게 하여 외부 교단들을 향해 분리라는 개념 자체를 불인하며 비판을 했던가? 바로 그 비판이 그들의 출발 근거였습니다. 좀 성급했다는 생각입니다.
혹시 제가 들은 설교들이 우리 공회로 말하면 수정 노선에 속하는 것이라 치고, 만일 지방교회의 원래 모습과 취지를 바로 전하고 있는 곳이 있다 해도, 마치 제대로 아는 사람은 총공회 내에서 가장 수정적인 모습을 가진 잠실동교회 하나만을 살펴도 잠실동교회가 버린 공회의 장점은 읽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자세하게 살필 주제가 아니어서 일단 이 정도로 일차 글을 마무리 합니다.
3.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
역사적으로도, 또 오늘 이 사회 곳곳에도, 하나님께서는 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을 한 번씩 주십니다. 그런 분들의 흔적을 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지방교회 분들이 이 노선의 교리와 성경 해석의 깊이를 참고하고 그리고 그들의 내려 온 장점을 잘 유지한다면 이 노선을 행동으로 가르칠 분들이겠다 라는 생각에 부러움을 가져 봤습니다.
이 노선에 선 저를 포함하여 그 누구라도 우리의 인간적 신앙적 부족이 너무 많아서 참으로 한탄스럽지만 그래도 우리가 선 이 홈에서 안내하는 이 신앙 노선은 현재까지 제가 살펴 보고 겪어 보고 들어 본 그 어떤 교회나 신앙 노선과 비교해도 이 노선은 교회의 역사 발전에 정점이며 중심에 서 있음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방교회를 비판하는 분들은 그 누구라도 그 비판을 좀 누그러뜨리도록 권고하고 싶습니다. 좋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아쉬움이야 이 홈에도 있고 백 목사님에게도 있고 루터 칼빈에게도 다 있습니다. 그렇다 해서 그런 성자들에게 있는 아쉬움과 제게 있는 아쉬움은 '아' '쉬' '움'이라는 글자 3 자만 같지 그 내용과 차원이야 하늘과 땅 차이일 것입니다. 지방교회의 아쉬움은 그 교회의 발전적 앞 날에 놓인 과제입니다. 체질적으로 역사적으로 지방교회라는 곳은 비판 받을 정도의 아쉬움이 아니라 발전적 권고를 몇 가지 받았으면 하는 정도입니다. 물론 지방교회 교인들과 직접 겪어 본 이들이 그 교인들과의 마찰 때문에 지방교회를 통째로 비판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지방교회의 이상, 철학, 교리, 노력, 향방, 소원들을 살펴 볼 때 흔치 않은 좋은 분들입니다. 그 분들이 스스로 인간적 부족 때문에 분출하는 모순들이 있다면 지방교회의 구조적 문제로 발현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국 사람, 우리 인간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단점이 원인일 것입니다. 그 교인들이 다른 교파 간다고 그 단점이 달라 지겠습니까? 다른 교파 사람들이 그 교파로 들어 간다고 인간적 단점이 금새 없어 지겠습니까? 하나로 열을 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런 도인은 거의 없고, 하나로 열을 비판하다가 아홉 가지를 잘못 쏘아 맞추는 선무당의 칼이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적어 놓은 내용들이 더 있습니다. 다음 기회에 소개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홈에는 지방교회 출신들이 적지 않게 방문합니다. 이 번 기회에 지방교회 내면을 좀 보게 되어 지방교회 출신분들에게 성의 표시가 좀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