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설교의 차이
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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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2 00:00
성경을 성구 그대로 읽는다면 독경이라 하지 설교라 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성경의 전체 내용을 맞추고, 그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운영하는 이 세상 우리 현실에 맞추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말하고 또 그 성경으로 현실에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은 1절에서부터 끝까지 이어 지면서 여러 면을 가르칩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으로부터 삐뚤어 진 것은 내 속에 있든 남 속에 있든 그 것을 고치고 바르게 잡는 일은 죽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곱 번을 해야 합니다. 일곱 번을 해도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깝게 사는 부부나 가족이나 직장 동료와는 평생 수백 번이 아니라 수천 번 수만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 것을 말하는가? 어떤 짧은 기간에 어떻게 반복을 해도 무한히 반복적으로 끊임 없이 계속해야 합니다. 이 면을 강조하기 위해 '하루'를 말한 것입니다. '하루'가 들어 간 것은 성경의 해석이며 설교입니다.
한 주간에 한 번 정도 용서하는 것이야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일 년에 52 회 정도는 쉽다는 것입니다. 10 년을 살다 보면 490 번 정도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정도를 말하는가?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형제가 말씀에서 삐뚤어 진 길에 있다면 돌려 놓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 할 때 아침에 일어나 나무를 쪼개어 준비했다 했는데 백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밤새도록 나무를 패고 준비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이런 면을 설교하는 분이 강조를 하다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나열은 그 나열이 무조건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하여,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심 때문에 아브라함은 부활의 지식을 얻게 되는데 히11:19에서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하셨으니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통해 자손을 주리라 하신 말씀과 맞추었고 그 결과 '부활' 교리를 깨달았습니다. 부활이라는 선물을 앞에 놓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뻤을까?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흠 없이 바쳐야 흠 없는 부활의 생명을 받아 가질 것이니 있는 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서 부활을 깨닫는 것처럼, 그 말씀을 접할 때 오늘 자기 믿음으로 그 상황을 맞아 보면 당시가 깨달아 지는 것이고 그 감동을 전하는 것이 설교며 성경에 붙들린 사람이 성령에 붙들려 증거를 하다 보면 사람이 학문으로 배워 달성하기 어려운 세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나중에 전체 성경과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용이 된다면 그 때야 비로서 그 해석에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답변자도 아주 최근에야 이 부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세월 속에 좀 두시고 살펴 보시면 좋겠습니다. 구구단을 배워 계산을 해 보면 바로 맞아 떨어 지는 것도 있지만, 왜 일본의 조선 침략이 우리에게 보탬이 되었을까 하는 이런 주제는 무조건 거부하고 반항할 것이 아니라 범위를 많이 넓혀 보면 천하에 우리의 원수는 우리 안에 있지 우리 밖에는 실제적으로 원수가 없도록 하신 말씀을 알 수가 있습니다.
>> 반사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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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8장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고 말씀을 했는데 설교 중에 늘 '하루'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니 학생들에게 성구를 잘못 기억하게 만들까 걱정입니다. 백목사님은 성경을 다 외운 분이라 하는데 모르고 그러셨을 리는 없다고 보이나 성구 인용은 정확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