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적 삶과 비신앙적 삶의 접촉점
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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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07 00:00
제목분류 : [~성경~성경일반~]
내용분류 : [-성경-성경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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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질문에서 '역사문화적 의미'라는 단어가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와 문화적 의미'인지 '역사문화적 의미'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고, 만일 '역사문화적'이라는 말이 맞다면 그 표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사용하신 분께 물어 주셨으면 합니다. 현대 신학의 난맥상 중 하나는 영어식 표현을 단순 한글번역함으로 원 뜻이 실종되는 현상입니다. 3번 질문은 곧 이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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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신앙적 삶과 비신앙적 삶의 접촉점
1.정의
신앙적 삶이란 하나님께 속하여(①소속)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는(②행동) 생애를 말합니다. 비신앙적 삶이란 에덴동산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 지음 받은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고 (①소속이탈)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 인생이 자기 자유로 살게 된(②행동 이탈)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1:1-18, 요15:8-20)
2.성질
①투쟁점인 두 삶의 접촉점
신앙적 삶이란 비신앙적 삶과 별개로 살 수 없고 반드시 한 울타리 속에 섞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한 울타리 안에 섞여 살면서도 신앙적 삶과 비신앙적 삶은 공존할 수 없고 반드시 하나가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사는 투쟁적 대립적 독자생존적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1:에서 빛과 어두움으로 비유했습니다. 천국은 빛만 있고 지옥은 어두움만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두 존재가 함께 섞여 삽니다. 그러나 이 둘이 접하는 곳에서는 어두움이 이기면 빛이 사라지고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그만큼 없어지고 물러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 문화 심지어 종교에서 대립적으로 내려온 모든 개체들이 평화공존이나 융화모색을 해야 한다고 하여 통일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또 하나의 성경부정입니다. 성경은 악령의 역사가 죽어야 성령의 역사가 살며 죄가 없어져야 의가 일어나며 기독교는 비기독 반기독을 복음으로 점령하여 복음대로 재편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융화 공존을 모색한다는 것은 이미 그 기독교는 내적 생명이 죽고 이름만 남은 것이며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행4:12, 롬8:5-11)
②전도점으로서의 두 삶의 접촉점
물론 신앙적 삶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하여 살지 못하게 막고 또 순종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상과 또 외부 세력과는 생사 투쟁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 적극적으로는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와 접촉을 하되 생사전투로서가 아니고 죽은 자신들이 살아날 복음을 가진 우리로 상대하게 되면 우리를 살린 우리의 복음이 그들에게 들어가서 그들도 역시 우리처럼 살려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극적으로 먼저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지 않도록 애쓰는 한편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이들을 하나님게 속하게 만들어 하나님으로 살게 하는 적극적인 복음생활이 이 두 삶의 접촉점에서 이루어집니다.
(*마28:19-20)
3.종류
①대내적 접촉점
믿는 사람의 승리생활은 흔히 대외전에만 강조되어 있습니다. 외부 박해세력 또는 복음 반대운동과 싸운 역사만을 교회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너무도 역사의 본질과 외형을 구별치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속한 믿는 사람, 아직도 소속되지 않은 안 믿는 사람의 투쟁 마찰 오해 극복을 논하기 전, 우리는 우리 속에 두 자아가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중생된 사람이며 성도라는 이름이 분명한데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께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온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즉, 자기 내부에서부터 신앙적 삶과 비신앙적삶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할 때, 그리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을 듣던 마16:15-24은 한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꼭같은 몸과 마음을 가졌던 베드로였고 또 이때는 예수님을 믿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려 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서 없어지고 악령에 붙들려 순간 악령의 사람으로 움직일 수도 있음을 보입니다.
따라서 신앙적 삶과 비신앙적 삶의 접촉점은 우선 대내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늘 존재하는 것이며 두 삶은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공존 타협이 될 수 없는 관계이므로 죄를 짓는 자기 속의 부패성을 없애나가야 자기 속에 의의 성화가 이루어져가는 것이고 자기 속에 모든 음란 시기 투쟁 비방을 버려야 신령한 젖으로 자라가는 참 사람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평생에 남 모르는 자기 내면의 투쟁의 삶, 우선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고 죽이고 자기를 꺾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바로 이 십자가로 표현되는 고난의 삶이 실은 우리 속에는 두 삶이 있고 이 두 삶은 투쟁 후 하나만 살아남을 수가 있기 때문에 전투로 진행하는 것이고 이 전투에서는 말씀의 법칙대로 살기는 살되 모든 세상 좋은 것은 다 포기를 해야만 갈 수 있기 때문에 예수믿기 이전 옛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고난의 길이며 가시밭의 길이기 때문에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본 이마다 하늘이 주는 평강을 자기 내부에서 받아 충만케 되므로 자기 안에는 주님이 가졌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대외적 접촉점에서와는 약간 달리 대내적 접촉점인 우리 몸과 마음에서는 복음으로 우리 심신을 이기면 이기는 대로 우리 내부가 점점 복음화되어져 갑니다. 투쟁점이자 곧 자기 속에 있는 자신의 여러 요소들을 살려가는 성화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골3:5-10, 벧전2:1-2)
②대외적 접촉점
우선 교회가 어느 사회에 자리를 잡게 되면 하나님 모르던 기존 사회의 모든 요소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께만 움직이려는 교회와는 마찰을 갖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과 바울의 모든 전도걸음에서 발생되는 마찰이 그런 것이며 오늘도 교회가 교회로 유지 존속한다면 사도 때와 꼭 같은 핍박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교단이 하나님 앞에 교회의 전통과 정통을 바로 세워 나가려면 타락한 일반 교단으로부터 불신 세상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에서라도 투쟁과 마찰 오해와 박해가 끊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가르쳐 촛대라고 하였으니 빛을 가진 위치요 어두움을 삼키는 주체를 모신 곳이니 공중에 권세잡은 악령이 점령하고 있는 오늘 땅 위에서 교회가 교회이기를 원한다면 교회가 교회로 움직이는 모든 대외접촉점은 전부가 투쟁이며 마찰이 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는 대외 현실 속에서 교회는 생사를 두고 이겨야 하는 접촉점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가 믿는 바, 교회가 가야하는 바 이 모든 것은 세상 안에 있는 교회로서는 세상과 현실적 접촉을 피할 수가 없으니 여기에서 한편으로는 전투적 승리를 다른 한편으로는 감화적 복음화를 추진해 나가는 곳이 바로 두 삶의 접촉점의 성질이라고 하겠습니다.
(*마10:16-23, 엡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