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김석준목사님의 <체계신앙신학 -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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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궁극교회 날 짜 2003/05/27 (19:41:52)
홈페이지 번 호 3 조 회 297
제 목 체계신앙신학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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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교재는 고 김석준목사님께서 대동신학교에서 강의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현재 김경형목사님께서 궁극교회와 안양 포도원제일교회, 대전의 평안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이 교재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본 교재는 기독교인들 대상으로 무작위 배포하는 것이 아닌 김경형목사님께서 강의하시는 집회에 참석하시는 분들에게 한정적으로 배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는 전체를 올리지는 않습니다.
운영자에게 개인적으로 본 교재를 신청하셔도 보내드리지 않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한글 2002로 작성했습니다.
제일장. 인죄론.(인간의 기원)
인간이라고 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동작의 중심이 되는 존재인고로 신론 다음에 인죄론이다. 하나님께서 독존자로 계시면서 구원을 선택했고, 당신이 선택하신 구원의 제 1목적물이 인간이기 때문에 신론 다음에 순서적으로 인죄론을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모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순서로 보고 있다.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에 대해 인간창조의 동기와 원인과 목적을 알아야 하고, 보다 앞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제一절. 인간창조의 동기.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인죄론에서 인간을 논하매 인간창조의 성격을 먼저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혹 신학자들 중에는 인간창조의 기원에 있어서 인간의 교리나 성경적 도덕 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보다 인간창조를 말할 때에 그 동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인간은 자존자가 아닐뿐더러 또 자존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런고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는 어떤 동기가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면 인간창조의 동기를 필연적으로 물을 것이고, 인간창조의 동기를 묻는다면 인간을 창조하신 그 창조주를 먼저 알아야 한다.
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론에서 자세히 설명이 되었으나 우리가 인간을 창조하게 된 동기를 여기서 알아보기로 하자.
이 하나님은 물론 자존자시요 독존자시요 영원자시요 생존자시요 인격자시요 무한자시요 절대자이시니 이 분이 인간을 창조하게 된 동기는 그의 인격성 때문이다.
그 인격자가 독존하여 계시던 그곳이 무한한 곳이요, 영원히 새로운 곳이요, 신령계로서 완전계이다. 이런 신령계에서 독존자로 이것을 누리고 계셨는데 이 신령계를 홀로 누리기에 족하시지만 이 신령계를 당신 외에 타 존재가 함께 누리도록 하고 싶어서 창조하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을 창조하게 된 동기는 천국이라 하겠다. 이 천국이 없었던들 이 인간을 창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 동기에 대해서는,
(1) 하나님.
① 속성.
② 천국.
③ 천국의 성질.
(2) 인간을 창조하게 된 원인.
① 인격성.
② 실력성장.
(3) 창조의 목적.
① 후사를 삼으려고.
② 영원히 그 가운데 행하며 누리게 하려고.
③ 영원히 영광과 사랑의 대상을 삼으려고.
● 구원역사는 영원 전서부터 시작됨.(딛1:2)
신성 - 인간성 말고 순수한 인격.
인성 - 신성 말고 순수한 인격.
성부 하나님은 인성은 없다. 그러나 인격은 있다.
성자 하나님은 인성도 신성도 있는 인격자이시다.
1. 신령계가 동기가 됨.
인간을 창조하시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인격성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 신령계가 인류창조의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그 신령계는 하나님 홀로 독존하고 계시던 곳이요, 또 완전자로 무한자로 계시던 곳인데 그 신령계 자체가 이질성이 없는 곳이니 거기는 마찰도 충돌도 대립도 없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신령성 완전성 무한성을 가진 존재로서는 그 존영 면이나 쾌락 면이나 향락 면이 극치적이다. 또한 그곳은 무한한 곳이다. 범위적으로 무한이요, 종류적으로 무한이요, 본질과 본성적으로 무한한 곳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다른 존재가 그 세계에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 자체의 쾌락성이나 향락성이나 존영성이 축소나 감퇴됨이 없다. 무한한 곳인고로 이곳은 인격자로서 누리기에 극치의 좋은 세계이다. 이 신령계를 하나님 당신 홀로 독존하시고 독권하시고 독단적으로 누리시기에 신 자체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마땅하다. 일면 당신 홀로 누리시기에는 아까울 정도이다. 그래서 이 신령계가 인류를 창조하는 일에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 하나님이 무인격적 목석이나 금수라면 창조고 동기고 간에 없다. 인격자인고로 창조했다.
천사들을 언제 지었다는 그것이 성경에 없다. ‘그것을 언제 지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관계가 없다. 우리는 계시된 것만 연구할 따름이다.
독존자로 계시던 그 곳이 어떤 곳이었겠느냐? 공간의 세계일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던 명칭은 무엇일까? 우리가 쓰는 평범한 용어로 신령계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끼리 통하는 의사용어로 신령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왜 그 곳을 신령계라고 하느냐? 물질계와 구별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신령계와 정신계를 혼동하지 말라. 일반학자들은 혼동을 한다. 사색, 추리 모두 정신계이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영과 이성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정신계는 사색 안의 이상의 세계요, 신령계는 사색 바깥의 실존계이다. 따라서 신령계와 정신계를 구분할 것이다.
인간 한 존재가 생각하는 것은 정신계이고,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없어진다. 그러나 신령계는 별존계이다. 인간이 없어도 신령계는 실존한다. 이 신령계는 무한하다. 시간적으로 영원, 종별에 무한 완전계이다. 누리기에 무한, 기쁨에 무한, 향락이 무한이다. 몇 백 몇 천 수억이 와서 살아도 하나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하나님의 그 쾌락이 감퇴나 감소되지 않는다. 우리가 장차 그 곳에 존재하고 그곳을 누리고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신령계라고 붙인 것이다.
대학생이 좋다고 하는 것과, 어린아이들이 좋다고 하는 것과는 양과 질이 다를 수 있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천국은 어떤 사람이 보아도 다 ‘참 좋다’고 한다.
양적 질적 본질적인 면에서도, 시감성에서 청감성에서 그 누가와도 좋다고 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당신이 와도 ‘참 좋다’ 할 수 있는 곳이다. ‘좋다’의 극치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것이다.
이곳을 이름을 붙여
통치성을 말할 때 神國.
존재성을 말할 때 靈國.
성질적으로 말할 때 樂園.
관계성적으로 말할 때 天堂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그 낙원은 통치성이 아닌 성질적인 면에서 말한 것이다. 십자가의 형벌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하는고로 죽음의 선을 넘어가면 이와 반대로 영화롭고 좋다고 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지 천국과 낙원을 분리시켜 말한 것은 아니다. 관계성으로 말할 때는 천당이라고 한다. 엡2:19의 권속이란 관계성으로 말한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누리시기에 과분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혼자 누리시기에 아깝다는 이것이 인간을 창조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제二절. 인간창조의 원인.
하나님은 인격자이신고로 그 인격성에서 여러 가지 고안 등이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인격성이라는 말은 속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 속성이 곧 신의 인격성인데 그 속성에는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이 있다.
이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으로 그 신령계를 독존적으로 누리고 계실 때에 부족함이나 쓸쓸함이나 고독함이나 불쾌감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신은 절대자요 완전자이신고로 그런 불행적인 성분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게 된 원인이 하나님 당신이 불행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또 신은 절대자시요 완전자이신고로 선성과 애성이 충만하다. 이 선성과 애성은 상대성을 가지는고로 이 애성은 필연적으로 선성적인 상대를 찾기 마련이다. 그런고로 당신의 인격성의 선성과 애성이 인간을 창조한 원인이 된 것이다.
※ 인류창조의 동기와 원인을 착각하지 말 것이다. 동기는 밑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찾고,(존재와 사건) 원인은 내심에서 찾는다.
신 자체적 성질인 사랑의 발작에서, 인격적 속성에서 인간을 창조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궁극적 구원을 어디서 찾느냐?
一. 신의 인격성.
신은 비 물질적 존재이며 무형적인 존재요 무형체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비 물질적이고 무형체적이긴 하지만 인격성을 소유했다.
혹 ‘비 물질적이며 비 물질성이며 무형체적인 존재가 어떻게 인격성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그 지식은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이지 하나님 자체는 그 지식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비 물질적 무형체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격성을 소유하신 분이다. 그 인격성은 절대 정확 완전하신 인격성이다. 그의 지혜지식성은 완전이다. 그의 도덕성(선 사랑 거룩 진실)도 완전하시다. 그의 능력성도 완전하시다. 이처럼 그는 완전하신 인격성인고로 그 인격성에서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지셨던 것이다. 인격자가 아니고는 이런 느낌이 있을 수가 없다.
※ 인격성이 사람을 창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비 인격자라면 이런 생각이 안 났을 것이다.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짓자’ 인간은 대 선택의 목적물이다.
1. 신의 애성이 원인이다.
신의 애성은 신의 인격성의 일부분이다. 애성에는 필연적으로 상대성을 갖게 된다. 상대성이 없을 때에는 그 애성 자체의 효력성을 발휘치 못한다. 애성의 효력성을 내기 위해서는 상대자가 있어야 한다.
이 애성은 신의 애성으로 이 신의 애성은 수동적 동화적인 애성이 아닌 자체적 발생적인 애성이니 만큼 애성에서 필연적으로 상대성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이 신은 신 자신의 애성의 상대성을 위해 당신의 형상(속성, 인격성)과 같은 존재를 짓자고 한 것이다.
인간의 애성은 동화적 수동적 애성이다. 동화적 애성이라는 말은 상대가 먼저 존재하고, 그 상대자가 어떤 작용을 했을 때 인간 속에서 애성이 발작되는 것이다. 또 수동성이란 인간 자체에게는 그 애성(아가페)이 본래적으로는 없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그 애성을 받아 자체화 해서 상대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 애성을 수동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애성은 인간의 그 애성처럼 동화적이거나 수동적이 아니고 자체적 발생적인고로 이 신의 애성이 상대성을 찾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창조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2. 신의 선성이 원인이다.
선이란 ① 신령계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사용하고 누리는 것을 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② 나 자신이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것(영원적 불변적 유익)을 선이라고 한다. 신 자체적으로 누리심, 활동하심, 다스리심 이것이 신 자체적 유익이니 이것이 자체적 결과적 영원적 궁극적 선이요, 또 신령계를 상대에게 누리게 해 주는 것도 선이다. 또한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어질 수 있는 사건도 선이다.
이것이 선의 개념인데 우리 인간들이 선이라 할 때는 이런 영원과는 상관없이, 신령계와는 상관없이 현재적으로 육적으로 임시적으로 상대에게 어떤 유익이 되게 한 것을 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의 원리는 그것이 아니다. 인간이 말하는 선은 현재적으로는 선이라고 하나 그 인간의 행위가, 그 동작이 내일이나 미래에는 선이 아닌 악일 수도 있다.
※ 성경이 말하는 선은 영적으로 자타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영원히 유익이 된다는 것은 신령계를 통치 지배 사용 활용을 한다는 말이다. 또 상대적 선이란 그 상대를 영원히 행복 되게 유익하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
신의 선성이란 당신 자신이 천국을 지배하고 사용하는 것을 말하며, 타 존재에게도 그렇게 하게 해 주는 것이 신의 선성이다.
이 선성이 인류창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신에게 선성이 없었더라면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의사는 없었을 것이다.
선(善): 동사인 경우 - 상대에게서 찾는다.
동명사인 경우 - 자기가 자기에게도 선이 사용된다. 예: 자살행위 에서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 창1: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선하더라’ - 물질에 대한 의미가 아니라 인격자의 어떤 행위를 한 성분에서 찾아야 한다. 상대에게 건너가는 발생적인 선이다.
성경은 단어학의 구속을 받을 수 없다. 단어가 말하는 그 뜻만 가지고 있는 성경이 아니다. ‘왜 여기에서 이 단어를 썼느냐?’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입법자로서 강자로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그 인간을 놀리는 것에 취미와 재미를 삼는, 마치 돼지나 닭을 기르는 사람과 같은 의미로써 하나님을 알면 안 된다.
대개는 십일조 안 내고 주일 안 지키고 하면 때리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안 하면 벌받고 고통을 당하니 억지가 아닌 단 마음으로 하라고? 인간은 고생이 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 등 모든 관계성은 신적인 관계성이 있어야 한다. 창조하신 원인이 하나님의 선성에서 되었다.
교회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업을 놓고 교인을 농락해도 되느냐? 영원한 행복과 존영을 위해서 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선성이다. 이렇게 살다가 보면 어떤 인간 앞에서는 미안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미안한 것이 없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선성을 잊어버리지 말 것. 영적 결과를 내다보고 말할 것.
제三절. 인간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필연적으로 어떤 목적이 계셨다. 하나님은 인격자시요 완전자시요 세밀하신 분이시니 목적이 없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분명히 어떤 목적 하에서 하신 것이 틀림이 없다. 하나님이 목적없이 일을 했다면 그 인격은 무언가가 불완전이다. 완전한 인격성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 뚜렷한 목적 하에서 인류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인가?
※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을 모르면 구원론은 허술하게 된다. 인간의 타락 후부터 구원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보게 되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했다’ 라는 말이 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타락 후에 구원사역을 시작하느라고 서두를 것 없이 아예 타락하지 않도록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아예 타락치 않을 자로 짓던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좀 모자라는 인격자가 된다.
왜 타락할 수 있는 인간으로 지었느냐? 구원계획은 타락 이전 영원 전부터이다.
무슨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했느냐? 일반적으로는 하나님 당신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길이 길이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一. 후사(子)를 삼겠다는 목적이다.(엡1:5, 3:6)
하나님께서는 신령계에서 영원히 독존자로 계실 수도 있고, 그렇게 계신다고 해서 부족이나 불행이나 무슨 고독함이나 쓸쓸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격성과 애성과 선성에서 인간이라는 상대적인 존재를 지어서 후사로 삼을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여기서 ‘후사’ 라는 말은 당신이 죽고 그 후에 대를 이어서 어떤 일을 맡긴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당신이 현재적으로 하시고 있는 일,(통치 지배 활용 사용 누림) 하고 계시는 것을 타에게도 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것을 활용적 사용적 후사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이 후사를 삼기 위함이요, ‘아들’ 이라고 한 것은 당신의 그 주권과 소유권과 활용권을 맡기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게 된 목적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성경에 보면 인간을 선한 일을 위해서 지었는데, 그 선한 일은 ‘예비한 것을 영원히 행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했다.(엡2:10)
인류창조의 원인 목적 동기가 없으면 믿음은 흔들린다.
교회는 에덴동산에서부터이다.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어떤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다. 선악과 따먹는 것에서부터!
二.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존자로 독존자로 완전자로 인격자로 존재했고, 당신이 영원히 존재하실 그곳 역시 무한하고 완전한 곳이다. 무한이라는 말은 시간적 공간적 종별적 무한이요, 완전이라는 말은 질적인 면에서 성적(聖的)인 면을 말한다. 이곳을 인간들은 신령계라, 혹 완전계라, 혹 무한계라 한다.
이곳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말이나 글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이곳은 이 물질계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곳이요, 신령적인 것만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다. 물질적인 존재는 그 곳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다.
이곳은 본질은 진리요 본성은 사랑이요 본능은 생명인 곳이요, 이곳은 단일성적인 곳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이질적인 것은 용납이 되지를 않는다.(존재적 단일이 아닌 성분적 단일을 말함) 또한 활용 면, 통치 면, 치리 면, 사용 면 등 어떤 면에서도 외부적 제재를 받지를 않지만 다만 자기 실력의 제재를 받게 된다.
이런 곳을 당신이 독존적으로 누리지 아니하시고 타 존재(택자)에게 영원한 유업으로 주셔서 이 가운데서 당신(神)과 똑같이 행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택자인과 불택자인을 구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절대자이신 신에게는 택자인과 불택자인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다. 인간창조의 목적이란 택자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 말에 대해 이의를 단다면 이의를 다는 그 사람에게 해 줄 말은 같은 인간이지만 창조주의 지으신 목적이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즉 제 1 목적물인 인간과, 제 2 목적물인 인간으로 나누게 된다는 말이다.
제 1 목적물은 하나님의 택자를 말하고, 제 2 목적물은 불택자를 말하니 성경은 이 불택자를 가리켜서 ‘본래 잡혀죽기 위해서 난 이성 없는 짐승이라’(벧후2:12)고 했고, 또 ‘저희가 말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 라고 했고, 또 다른 성경에는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쓰이는데 사용되게 함)’(잠16:4) 라고 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여러 곳에 택자와 불택자를 분명하게 구별했으니 택자는 하나님의 제 1 목적물이요 불택자는 제 2 목적물인데 여기에서 말한 목적물이란 제 1 목적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딛1:16, 2:7, 14, 3:8, 미6:8)
에베소서 2장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 만드신 바니 하나님이 전에 예비해 놓은 곳에 행하기 위해서 지었다’
※ ‘하나님이 전에 예비해 놓은 곳에 행하게 하기 위해서 지었다’ - 그렇다면 인간을 만들기 전에는 어떤 하나님이시냐? 쓸쓸하고 고독한 하나님이시냐? 완전하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쓸쓸함과 고독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당신 자신을 위해 지으신 것은 아니다. 당신이 사용하려고 지으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으니 지옥에 보내야겠지만 차마 다 지옥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 일부만 보내자’ 이렇게 생각한 것인가? 거기에서 택자, 불택자가 나온 것인가?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는 그곳에 두기 위해서이다.
三.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를 삼기 위해서.
이 사실은 성경 66권 전체가 가르치는 교훈이기 때문에 어떤 성구 하나로 뒷받침할 수가 없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똑같이 증명하고 있다. 특히 구약의 아가서나 호세아서 등은 너무나 실질적으로 말씀해 놓은 계시이다. 아가서 같은 것은 부부적 애성적 사랑의 대상자로 말하고 있다. 또한 호세아서도 일반적 애정적 사랑은 고멜과 같이 불순행위가 섞였을 때에는 미움으로, 독살로 바꾸어지지만 이 성경의 애정성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성서 초두에 나타난 책들(오경)은 부모와 자식간의 그 어떤 애정성(스톨게)을 말하고 있고, 또 역사서라고 하는 성경에는 국민적 혹은 민족적(필레오, 상대적)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혹 성서학자들 가운데는 호세아서는 신약적 성격을 지녔다고 하나 실은 66권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대상자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각양적인 사랑(희랍어로 스톨게, 필레오, 에로스)을 아가서, 호세아서는 애로스적 사랑을 표시했고, 오경은 스톨게적 사랑을 표시했고, 다른 여러 역사서들은 필레오적 사랑을 표시했고, 신약성서는 아가페적 사랑을 표시했다고 하나 그러나 실은 66권 전체가 다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말이다.
아가페(ἄγαπη)라는 이 단어는 사전학적 원어학적으로는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나 계시적 면에서는 그보다 더 차원 높게 무조건적이며 생명적이며 불변적이며 다양적인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이 말도 학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 낱말이 무엇을 계시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지으신 목적 중 하나가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고자 함이었다고 하는 것을 한 두 구절만이 아닌 성경 전체의 흐름이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아가페로 물었지만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했다.
아가페는 단어학 사전학 원어학적으로는 무조건적 사랑을 말하고 있으나 그 뜻만이 아닌 생명적 무조건적 불변적 다양적인 사랑으로 일방적인 한 면의 사랑이 아니고 복합적인 사랑이다.
일반적인 사랑인 육신의 아버지적인 사랑(스톨게)에서 에로스적인 사랑을 못 느낀다. 육신의 우정적인 사랑에서도 느낄 수 없다. 사랑의 성분이 조금씩 다르다. 하나님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제四절. 인간창조의 성경적 보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피조물이면서도 특별히 인간을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피조물로 지으셨으나 인간을 중심물로, 목적물로 지으셨음이 틀림이 없다.
1. 같은 피조물인데도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성서가 인간창조에 대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역사적이요 역사성이지만 하나님의 보도의 목적은 계시적 교훈목적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성경에서 인간창조의 보도를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만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일차적으로는 역사성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역사성이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해야 한다.
※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지금 신학계를 보면 학적 연구와 신학적 신앙의 연구와 다른 점이 있다.
신학: 하나님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조직신학: 체계신학이라 불리어지기도 한다.
체계적 신앙신학: 신앙을 위한 신학이다.
오늘날 신앙과 신학을 별개로 취급하기 때문에 교회는 엉망이다.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돈만 많이 나오면 은혜라고 한다. 신앙은 신학의 토대 위에 올라서야 신앙이다. 체계적 신앙을 신학 위에다 세워야 하는 것이다. 부흥강사는 신학과 별개인 영파로 부흥회 하는 자 많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성경에 보도된 사실을 역사적인 사실로만 받아들여 왔다. 과연 그것을 알릴 목적이냐, 다른 것이 또 있느냐? 내용은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으나 계시목적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2. 이중보도.
성경에 인간창조에 대해 기록된 것은 이중적으로 보도되어 있다.
ꊱ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같이 지었다고 보도하고,
ꊲ 창세기 2장 7절에 인간을 흙으로 지었다고 보도하고.
● 이 이중보도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주장은(창 1장과 2장의 인간창조)
(1) 전후 기록의 상이점에 대하여.
상이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중으로 창조했다는 말인지, 창세기 1장에 창조된 인간과 2장에 창조된 인간이 한 인간이 아니고 다른 존재인지’ 하는 면에서 주장이 각기 다르다.
ꊱ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는 다른 존재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만능의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편으로 창조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ꊲ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는 다른 목적, 다른 방편, 다른 존재로 창조 했다.
ꊳ 1장의 창조는 인간초기의 창조요, 2장의 창조는 인간창조의 완성이 다.
즉 1장의 창조는 인간창조의 계획과 설계라면, 2장의 창조는 그 계획한 설계대로 실물을 창조했다는 주장이다.
3. 후자는 전자를 보충하고 있다는 주장.
다시 말하면 앞의 (1)에서는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의 상이성을 주장하는데 반해서 여기서는 2장의 창조는 1장의 창조의 보도를 더욱 상세하게 보충적으로 설명한다는 말이니 곧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했다는 그 방편을 상세하게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2장에 가서 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이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보도한 바대로 하나님의 창조성이 상이한 것으로 주장을 하고, 보충을 한다고 하는 주장은 1장과 2장의 이중보도가 상이점이 있으나 창조성은 단회적이요, 그 단회적인 것을 1장에서는 세밀하게 방편까지 논하지 못한 것을 2장에서 상세히 그 방편을 보도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학문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신앙을 위한 학문이 필요하지 신앙을 위하지 않는다면 절대 필요가 없다. 신앙적 입장에서 학문을 연구해야지 신앙을 떠난 학문은 연구하지 말라!
● 이중보도성을 막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달라진다.
① 1장은 창조의 능력이 다양하기 때문에? 2장에는 흙을 주물러서?
② 1장의 미완성 창조를 2장에서 완성?
③ 1장은 계획설계, 2장은 완성보충?
보수주의는 창조적인 사역은 하나인데(① ② ③은 아니지만) 2장은 상세하게 기록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무엇 때문에 이중으로 기록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중의 보도사실을 기록한 것은 계시 면으로 볼 것이다.
‘두 아담 창조냐, 한 아담 창조냐’가 문제가 아니고 무엇 때문에 이중보도를 했는가? 무엇을 계시하고, 무엇을 교훈하고,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2장 19절에 인간창조만 이중보도를 하지 않고 흙으로 각종 새를 지으셨다고 했다.
㉮ 이중보도의 상이점은?
이중보도를 한 것은 인간창조의 창조사를 가르칠 목적이 아니고 계시적 교훈이 목적이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인간은 제 1 창조가 있고, 제 2 창조가 있다. 제 1 창조는 진동되지 않는 인간창조, 제 2 창조는 진동될 인간창조.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는 한 인간이지만 이 인간은 이중적(영육) 존재라는 것을 설명키 위해 이렇게 이중보도를 하신 것이다. 1장의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비 물질적인 무형체적인 인간창조를 말하고, 2장의 창조는 물질적인 형체적인 인간창조를 설명한다. 인간창조의 순서는 동시이던 선후의 순서가 있던 상관이 없다.
㉯ 이중적 보도의 이유.
ꊱ 진동될 인간이 있고, 진동되지 않을 인간이 있다.
시간적 창조로 보면 1장은 시간이 없고, 2장에는 시간을 요하는 느낌이다. 이것도 계시가 있지나 않을까?
ꊲ 인간은 이중요소로 됐다고 알려줌.
단일요소는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
ꊳ 1장의 창조는 인격성 무형체 비 물질적 창조이고, 2장은 물질적 형체적 인 인간창조를 말한다.
ꊴ 기록순서는 전후로 됐지만 상관없다.
공관복음은 가견적 보이는 면으로 기록을 했고, 요한복음은 무형행 면을 기록했다. 요한복음의 창조가 먼저냐, 창세기의 창조가 먼저냐? 요한복음은 창조주를 중심해서 말을 하고, 창세기는 물질창조 시로부터 말을 한다.
一. 신의 도모.(창2:4~)
신의 창조의 순서로 보면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의(만물) 피조물들을 창조하실 때는 신의 특별하신 도모가 없다. 그러나 인간창조에 있어서는 신의 특별하신 도모가 있다.
피조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똑같은 피조물임이 틀림이 없지만 이렇게 창조하신 것은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다. 인간을 특별히 도모하신 것은 대소의 관계 때문이 아니다. 대소의 관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인간보다 더 큰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의 양상, 질 이것을 다른 피조물보다 특별히 도모하신 이유는?
※ 하나님의 도모 -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① 다른 피조물보다 크기 때문에 그런가?
② ‘이것(인간)은 좀 다르게 짓자’ 하고 의논을 했다는 말인가?
왜 하나님이 이렇게 지었는가? 왜 특별한 도모가 있었는가? 인간은 특별하기 때문인가? 하나님은 이런 도모를 안 해도 능히 지을 수 있는데!
1차적인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인고로 인간에게 이 사실을 계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인공위성보다 더 세밀하다.
1.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시는 면에 혹 천사창조에 대해서도 문서계시로 말하지 않고, 마귀(자존자가 아님)의 시존성에 대해서도 문서계시에는 말하지 않지만 우리 인간에게 계시상 필요한 것은 그 시존성에 대해서 계시하고 계신다.
성경에 계시된 대로 볼 때에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계획이나 도모에 대해서 설명함이 없지만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짓자’ 하시고 사전에 도모를 하셨는데, 그렇게 도모를 하신 것은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수호하고 사용케 하기 위해 그렇게 도모하신 것일까?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 후에 기록된 기사를 보면 모든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심이 분명히 그 목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 천사창조의 도모가 계시된 데가 없다. 어떻게 지었다는 것이 없다고 해서 자존자로 보지 않는다. 유다서를 근거로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되었다고?
하나님이 마귀를 지었다고 하면 하나님의 책임성에서 성경이 달라진다. 마귀가 우리 구원에 절대 필요없는 존재라면 당장이라도 없애버리고 무(無)로 돌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마귀의 시존성에 대해서는 기록치 않고 존재성과 활동성만을 기록한 것은 성경은 계시성이기 때문이다.
도모, 의논, 계획.
‘모든 만물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인간은 이런 자인고로 그렇게 지었다.
2. 신께서 대화의 상대자를 삼기 위해서 도모했다?
하나님은 본래 위적으로는 삼위일체로 계시나 본체는 독존성이기 때문에 독존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대화의 상대자가 없기 때문에 대화의 상대자로 삼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인간은 영원히 신의 대화의 상대가 되어 드려야 한다. 신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특별한 도모를 하신 목적이 대화의 상대를 삼기 위해서 지으셨기 때문이다.
※ 독존하고 계시니까 심심해서 인간을 지었나?
이렇게 되면
① 하나님의 완전성이 파괴된다.
② 하나님의 선성에 맞지 않는다. 예: 병원에서 환자의 곁에 대화자로 있 듯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3. 예배와 제사를 받기 위해서 특별 도모를 하신 것이다?
수많은 피조물들이 있으나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제사와 예배를 요구하심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특별히 제사와 예배를 요구하셨고, 선택받은 인간, 즉 민족적 선택이나 지파적 선택이나 개인적 선택을 받은 존재로서 신이 요구하시는 대로 예배와 제사를 드리지 않을 때에는 신이 노하기도 하셨다. 이런 것을 볼 때는 신은 분명히 예배와 제사를 요구하고 계신다. 그런고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특별 도모를 하신 것은 예배와 제사를 받으실 목적으로 하신 것이다.
※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예배와 제사를 드리라고 한 적이 없고, 또 드리는 피조물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이것을 안 하면 벌을 주어서라도 예배와 제사를 받으신다. 인간을 이것 때문에 지었다고?
인간이 이런 것을 해 드리면 하나님 당신에게 기쁨에 쾌락에 존영에 보탬이 될까? 예: 솔로몬이 양을 천 마리를 드렸는데 그 중에 몇 마리나 잡수시겠나? 그 냄새는 좋아하시나?
예배와 제사가 하나님께 필요한가? 예배와 제사와 제물이 하나님에게 어떤 보탬이 될까? 없다면 왜 이것을 요구하셨는가?
‘하나님 이것을 받으시고 기뻐하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고맙다고 해라!’ 이것은 시은자이다.
하나님에게는 예배가 필요 없다. 그러면 예배를 폐지하면 어떨까?
왜 예배를 드리라고 했을까? 예: 인간이 닭을 기르는 이유는? 잡아먹으려고!
이와 같은 관념으로 예배와 제사를 받아먹으려고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 것은 이용해 먹으려고 기르는 것인가?
4.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에 그렇게 도모하신 것은 당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 삼기 위해서 하신 것이니 대 선택의 목적물이란 독존하시던 그 신령계를 인간이 영원히 유업으로 받아서 하나님의 자권(子權)을 가지고 신의 영적인 총애를 받으며 영원히 존재케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자로 지으신 것이다.
※ 대 선택: 존재선택이 아니고 사건선택이다.
하나님의 사고력에서 선택하고, 선택의 사건은 구원이다.
구원: ① 기본구원. ② 건설구원.
영원적 궁극적 결과적 존영적 구원이라 함은 신령계를 유업으로 받아 다스리고 지배하고 느끼고 누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 물에 빠져 죽을 나를 구해준 것은 구원은 구원이지만 이것이 결과적 궁극적 구원이 아닌 이유는 또 물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준 것은 구원은 구원이지만 최종적 궁극적 구원이 아닌 것이다. 살아난 나사로가 또 죽었을까, 아직도 살아 있을까? 죽었다. 성경에는 죽었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안 죽었다는 말도 없다.
二. 도모하신 인격성.(우리)
① 하나님께서 ‘우리’ 라는 말을 사용하셨는데 ‘우리’ 라는 말은 단수가 아 닌 복수이다.
‘우리’ 라고 복수로 사용하신 것을 대부분 말하기를 성부 성자 성령 삼격삼위의 의논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성부 성자 성령 삼격이 의논하여 지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② 하나님 자체를 칭할 때는 복수명사형을 사용하기 때문에 복수명사를 사 용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언어학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복수명사이기 때문에 복수로 쓸 수 있다고? ‘엘로힘’ - 복수명사.
단수라도 복수명사를 쓰는 경우가 있다. 독자가 자기 아버지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 ‘우리 아버지’ 라고 한다. 과부나 홀아비는 혼자 살아도 ‘우리 집’ 이라고 한다. 우리 조국도 있고, 나의 조국도 있다.
③ 여기 ‘우리’ 라는 용어가 ‘단수냐, 복수냐’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부께서 단독적으로 도모, 창조했다는 것도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 합이 되어 창조했다는 말도 아닌 인간창조의 도모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피조물과 특수적인 피조물을 구별키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제 1 목적물과 제 2 목적물을 구별해서 하신 말이다.
우리가 여기서 깨닫고 가야할 것은,
도모성이 중요한 것이지 ‘우리냐 나냐, 단수냐 복수냐, 삼위의 하나님이냐 단위의 하나님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기서 특별 도모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야 한다.
※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큰 뜻을 알아야지 말재간 말수법이 아니다. 66권 성경 전체가 주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로써 들면 다 들릴 수 있도록 전체는 구원도리를 가르친다.
선성과 애성은 상대성을 찾는다.
신령계: 사색 바깥 실존계.
정신계: 사색 중 이상의 세계.
두 요소의 결합인 1인: 마10:28, 눅8:55, 고후4:16, 빌1:22.
설교는 누구보고 하느냐? 이성!
三. 신의 특별한 동작.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일반적인 피조물들은 신의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으니 어떤 것은 명령으로, 어떤 것은 '무엇이 있으라' 하시던가, 또 '무엇 무엇이 되라' 하셔서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은 특별하신 동작으로 창조하셨다. 인간을 신의 도모에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실 것을 계획하시고 형상대로 지으시되 특별히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했다.
※ 하나님만 자존자요 하나님 외에 모든 존재는 다 피조물이다. 이 피조물에는 물질적인 존재와 비 물질적인 존재(마귀, 천사)가 있고, 물질적인 존재는 6일 동안 창조하셨다. 자연스런 동작으로 ‘…있어라, 갈라져라, 나누어져라!’ 동식물 어류 조류는 간접창조이다. 땅을 보고 명령을 해서.
1.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동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
(1) 인간창조의 복잡성 때문에 특별 동작을 하셨다고.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 구성요소가 복잡해서 창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특별 동작인가?
이 말도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구조와 비 물질성적인 요소인 영 이성 양심 본능 감각성 등 이런 것은 인간 외에 다른 어떤 존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단순히 일반적인 피조물을 창조하심처럼 명령으로만은 하실 수가 없어서 특별 동작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학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신의 전능성을 불신하고 들어간다. 무능한 자에게 있어서는 창조나 제작에 있어서 복잡한 것은 어렵다고 하겠지만 전능자에게는 복잡이 하등의 상관이 없다.
(2) 타 피조물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특별 동작으로 지었다고.
일반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가 아니고 인간만이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인간을 특별 동작으로 지으셨다는 설이다.
이 학설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성경은 전부 계시목적인데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계시성에서 이탈인고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 외에 다른 모든 존재를 창조하실 때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창조를 하셨는데 그처럼 일반적인 동작으로 창조하신다고 해서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3) 계시와 교훈적 목적을 위해 특별 동작으로 인간을 창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특별 동작으로 창조를 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것은 쉬운 방법으로는 인간을 창조하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고 굳이 이렇게 창조역사를 하신 것은 그 순서 하나 하나를 아무 뜻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창조의 순서 자체도 계시성으로 그렇게 했으며, 그 계시성대로 창조된 것을 그 순서대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계시로 주신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그것을 기록한 기록의 순서가 다르다고 볼 필요는 없다. 계시원리로 성경을 보면 기록영감의 감화가 와서 이미 있는 여러 사건 중에 교훈의 재료가 될만한 것들을 선출해 기록하도록 감화한 것이 아니라 성경계시는 그 성경을 기록하기 전에 계시목적으로 활동영감의 감화에 의해 하나님의 직접 동작이나(창조역사) 혹은 간접 동작(섭리 치리역사)으로 활동된 것을 기록영감의 감화로써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단순히 창조에만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고 창조를 하면서 그 창조의 방편이나 순서도 계시목적으로 그 방편을 쓰신 것이고, 그 계시목적의 순서대로 창조를 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그 순서가 아무 뜻이 없는 것이 아니고 순서 하나 하나가 계시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특별 동작을 하신 것도 계시목적으로 하신 것이다. 즉 창세기 1장의 창조와 도모는 하나님이 선택성과 예정성을 말하고, 창조는 단회적이니 이것은 중생을 계시하고, 2장의 창조는 점차적인 성화구원을 가르치고,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어준 것은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입어야 하나님의 목적대로 영원히 참된 인간으로서의 가치성과 효력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니 이 인간창조의 특별 동작하심은 계시와 교훈목적이 분명하다.
※ 창조의 순서도 계시목적으로 그 순서를 쓴 것이다.
성경은 기록영감의 감화가 와서 이미 있는 사건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교계에서 이 설을 90%이상 지지)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교훈목적으로 교훈이 될만한 것을 선택해 편집한 것이 아니다.(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성이 없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근원과 발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순서 하나 하나도 계시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고, 이것이 문서화된 것이 성경이다.
구약은 역사계시 행동계시로 말씀이 동작으로 나타났다. 예: 내가 편지를 써서 보냈을 경우 말을 보내니 글이고, 읽고 들어가니 말이다.
2.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특별 동작의 방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 방편이 어떠했으며, 왜 또 그런 방편을 쓰셨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보자.
(1)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짓자.
우리의 형상이란 어떤 형상인가? 하나님께서도 고정된 형상이 있다는 말인가?
(2)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했다.
신의 특별한 동작에서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받게 했다. 이 인격성은 단회적 창조이다.
‘우리의 형상대로’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인간의 인격성의 창조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인 영혼창조를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이미 예정하시고, 그 예정대로 인격의 주체성인 영혼을 창조했다는 말이다.
(3) 흙으로 육을 지었다.
분명히 흙으로 지은 것은 육이라고 했고, 그러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 지으신 이 인간은 흙으로 지은 인간이 아니다. 본 장의 흙으로 지은 인간과, 형상으로 지은 인간은 한 인간이면서 다르다. 흙으로 돌아가는 이 인간은 참 인간이 아니다.
(4)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함.
혹자들은 이 생기를 하나님의 일부분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코에 불어넣은 이 생기는 하나님의 일부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왜 이 생기를 불어넣었을까?
이 생기는?
① 자연생명?
② 영의 생명?
③ 하나님의 생명?
④ 신의 성품성?
①의 생명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도 있다. 이것들에게는 생기를 안 넣어도 자연생명이 있다.
②의 영의 생명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을 창조하실 때에 죽은 영혼을 창조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왕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그 영혼을 살려줄 바에야 아예 원래 영혼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지을 것이지!
③의 하나님의 생명이라 하면 인간도 하나님의 생명의 소유자이니 인간은 영육의 죽음이 없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라면 후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죽었으니 같은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도 가사적 생명의 소유자라는 말이 된다.
④ 신의 성품성이라면?
(5)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음.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일정한 용모, 형상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 인간이 알아듣기 쉽도록 형상이라는 용어를 쓴 것이다.
● 신의 형상이란?
① 외형적 용모가 아니다.
물질은 유형적 고정체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고정된 형체가 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 ‘형상이라, 모양이라’는 원어를 사용했다.
② 그의 속성을 말한다.
신의 속성은 비 공유적인 속성(4속성)과 공유적인 속성(8속성)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형상대로’란 공유적인 속성을 말한다. 이 속성이 곧 하나님의 인격성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일반적 피조물들은 일반적으로 지었으나 인간은 신의 속성대로 인격적인 존재로 지었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신은 완전하신 존재이신 반면에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요 영원 불멸의 존재로되 신의 완전을 향하여 가고 있는 존재이다. 신의 완전성을 닮아 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곧 신의 형상이다.
③ 비 공유적인 속성도 포함한다.
신의 형상(인격성, 속성) 중에는 인간이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속성이 있으니 그의 자존성이나 영원성이나 완전성이나 존재적 단일성은 그 누구도 영원히 소유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 중에 신의 영원성은 우리 인간이 과거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으나 미래적으로는 소유할 수가 있다. 그리고 신의 완전성에 도달은 불가능하지만 신의 완전을 향하여 갈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신과의 존재적 단일은 불가능하지만 성질적 성분적 단일성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가능하다.
④ 무형성을 말한다.
이 형상이라는 것을 유형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신의 영원성을 파괴시키는 큰 모순을 가져오게 된다.
3. 인간 두 요소의 합성.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은 단일요소, 단성요소로 지으셨지만 인간만은 두 요소의 합성체로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을 두 요소의 합성으로 지으신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 계셨을 것이다.
※ 인간은 두 요소의 합성요소로 되어졌다. 신령계의 요소와 물질계의 요소로!
1) 비 물질성인 영(영혼)을 창조했다.
비 물질성이라고 해서 전부가 다 영적 요소는 아니다. 물론 원어상으로는 영은 프뉴마(πνεύμα)이고, 비 물질 중에 목숨은 푸슈케(Ψυχή), 생명은 조에(ζωή), 육신은 소마(σώμα) 라고 하는데 영 이외의 것은 전부 다 육에 속한다.
혹자들은 물질과 비 물질의 합성적인 요소로 구성된 인간임을 인정하면서 물질(보디, 싹스)로 된 신체를 육이라고 하고, 그 외의 비 물질성은, 즉 옛사람 육성 육신성 자연생명 목숨(푸슈케) 등은 영성(프뉴마)과 동질로 취급해서 이성적인 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 물질성 전체를 영성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영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적 대상이 소유한 요소인데 이 영성은 불멸의 요소이다. 이 불멸의 요소가 아닌 것은 다 영성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고기-싹스)은 언젠간 없어질 것이고, 동시에 프뉴마도 조애도 없어질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양심도 이성도 영육이 결합체로 있다가 영육이 나누어질 때에 영계로 따라 올 수 없는 것이니 이것들은 다 영성이 아니고 물질에 소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영이라고 할 때 비 물질성이라는 말이지 비 물질성은 다 영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으신 것이 영이다. 이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불멸의 존재로 지음받은, 혹은 불가식적인 무형체로 지음받은 영혼이다. 그러나 이 영혼은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
이 영은 육체나 이성이 없을 때라도 청각성 미각성 감각성이 없는 자체적 독립적 무 활동적인 존재가 아닌 자체적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요소요, 시각성과 미각성과 촉각성을 느낄 수 있는 요소이다.
※ ① 비 물질적인 영.
② 신령적인 요소와 물질적인 요소.
③ 인간은 물질요소와 비 물질적 요소의 합성으로 지음.
비 물질적인 영혼을 창조했다는 말은 비 물질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 물질이라고 해서 전부 영에다 붙일 수는 없다. 영은 비 물질성이지만 비 물질이 곧 영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렇다면 사랑은 하나님이신가?
우리 아버지는 엿장수다. 그렇다면 엿장수는 우리 아버지인가?
인간이 두 요소의 합일체로 지음받은 것은 일반적으로 다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어느 선까지가 영이고, 어느 선까지가 육이라고 하는가? 영이라고 할 때 어떤 것이 영이냐? 프뉴마 외에 비 물질성인 이성 마음 생명 목숨 양심도 있는데 이것도 다 영으로 보아야 하느냐? 어느 한계선까지 영이냐? 영계, 신령계까지 못 가는 것은 전부 육에 소속된 것이다. 이것은 죽음의 선에서 분리된다.
죽었다고 할 때 영이 죽었다고 하느냐, 육이 죽었다고 하느냐?
혼: 어떤 기운을 말한다. 목수들이 ‘나무의 혼이 빠졌다’고 한다. ‘학교의 혼’ 이라 할 때는 학교의 전통을 말한다.
식물 - 생혼.
동물 - 각혼.
사람 - 영혼.
그러나 동물에는 이성이 없는고로 틀리는 것이다.
영 양심 이성을 모두 영으로 보는 자가 많다. 중생된 영은 성령을 거역할 수 없고 죄를 짓지 못하지만 이성까지 영으로 보게 되면 이성 속에 마음이 있는지라 중생한 사람도 이 마음이 죄를 짓는고로 중생된 영도 죄를 짓는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중생한 자라도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착한 양심이란 진리 따라가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이 불상을 때려부수면 양심이 가책이 되지만 기독교인이 때려부수면 양심이 가책을 받지 않는다. 착한 양심은 진리지식의 지배를 받는다. 중생된 영은 악한 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한다.
영의 한계선은 오직 영까지 뿐이다. 비 물질 전부가 영은 아니다. 영은 육체를 가지지 않아도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가 있다. 이 영이 물질인 육을 벗어난 후에는 영 자체적으로 활동을 하고 느끼기도 한다.
이성이 성화된 것만큼 영이 자란 것이고, 영이 자란 것만큼 이성도 자란 것이다. 부활의 능력 성질 감각이 다르다.(고전15:39 - 부활의 성질)
2) 물질로써 인간의 육을 창조했다.
창세기 1장 26, 27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창조했다는 말은 없고 다만 신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했고, 2장에서는 인간을 흙으로 창조했다고 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인간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보면 흙으로 돌아갈 인간과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갈 인간이 있다고 했으니 이 말은 마치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것처럼 느끼기 쉽다.
그렇다면 이 말이 같은 인간이라도 어떤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고, 어떤 인간은 낙원으로 간다는 말인지? 그리고 3장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곧 음부로 돌아간다는 말인지? 그래서 그런지 학자들 간에는 두 종류의 인간론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볼 때에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많은 인간 중에 어떤 종류의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고, 특수적인 인간은 낙원이나 혹은 영계로 간다는 말이 아니고 한 인간으로서 두 요소의 합성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비 물질성인 영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나 성분이 아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그 인간은 물질적인 육을 말한다. 그렇게 볼 때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고’ 라고 한 이 말은 인간의 영육 전체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식물과 채소를 먹는 인간, 즉 이마에 땀을 흘리며 식물을 먹고 사는 그 인간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 있고,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인간이 있다. 흙으로 돌아갈 인간은 흙으로 지음받은 물질적인 육을 말하고,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음받은 인격성인 영을 말한다.
2장의 ‘흙으로 지으시고’ 한 이 말을 인간 전체의 완전 창조론으로 착각하지 말라.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실 때에 그 흙으로 영과 육을 아울러 지은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물질을 원료로 해서 비 물질인 영을 창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창조시 흙을 원료로 해서 인간의 영육 두 요소의 합성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영을 별도로 짓고 육은 흙으로 지으셨다. 영은 비 물질성이고, 육은 흙을 원료로 한 물질성이다.
※ 창세기 1장 27절에는 인간을 흙으로 지었다는 말은 없고, 창세기 2장에는 흙으로 지었다고 했다.
개혁주의는 1장의 보충은 2장이라고 한다.
3장의 ‘너는 흙이니’ 하는 말에 영은 포함되지 않는다.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 영은 천국으로, 육은 땅으로.
2장에서 인간을 인격성으로 지은 것은 단회적 찰나적인 창조이다. 말씀으로 영을 짓고, 흙으로 육을 지었다. 주권성 위에 단일성이다.
(1) 물질인 육은 흙이 원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을 흙으로 지으셨다. 이 흙은 물질이므로 물질인 이 흙을 가지고 비 물질인 영을 창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2) 흙으로 지은 육의 요소.
인간의 육을 흙으로 지었으나 흙 그대로가 아니고 흙을 재료로 삼아 육신을 지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흙으로 지음받았는데 지음받은 흙이란 인간의 용모(육체)만이 아닌 물질적인 육체 전부를 말한다. 물질인 육체에 소속된 것은 피와 살과 뼈, 그리고 신경 감각 본능 이성 양심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혹 학자들 중에는 비 물질성(이성과 양심)은 영이라고 말하나 이것을 영이라고 할 수 없다. 생각 마음 등은 분명히 영이 아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육신의 생각, 육신의 소욕’ 이라고 했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 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다 육에 속한 것이다. 그런고로 엄격히 영은 단순히 영성만, 즉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속성대로 지음받은 것만을 말하고 그 외에는 다 육이다. 이 육을 물질적인 육(싹스)과 비 물질적인 육(소마)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성경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다. 벗어야 할 옛사람이란 소마를 말하고,(엡4:22~24) 새사람은 중생된 영을 말한다.
그런고로 인간의 구성요소를 단순히 물질만이 육이고 비 물질성은 없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다가 영육이 분리되어 다른 세계로 갈 때에 영이 가는 세계로 가지 못하는 부분은 전부 육성이다. 영은 아닌 것이다.
※ 만일 이성과 양심이 영을 따라간다고 하면?
(3) 육의 작용.
이 육 중에는 비 물질성인 이성과 물질성인 육(싹스)이 있는데, 비 물질성인 이성은 절대 자유성이 보장된다. 그리고 물질적인 육은 대개는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비 물질성인 이성의 결정에 따라 육은 움직여지고 있다.
육은 자유성을 가진 인격성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육은 도구라고 한다. 그러나 이성은 자유성을 가졌는데 이 자유성으로 이성이 영에게 피동될 때는 구원운동 생명운동이요, 부패성에게 피동될 때는 사망운동이다. 이성이 결정하는 대로 육은 움직이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육을 입혀주신 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국의 영원한 후사로 삼았으니 흙을 원료로 하여 육을 지으실 필요가 없이, 즉 육을 입히지 말고 영만 지어 물질계를 통과함이 없이 신령계에서 영원히 존재케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데 하나님께서 그 방편을 취하지 않고 흙을 원료로 해서 육을 지어 입힌 것은 구원목적에 의한 선한 뜻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 영만 지어 영계에서 살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이 하나님과 일치성이면 신령계를 누릴 수 있나? 구속 후는 단일성이다. 영계와 물질계를 다 누리니 원상복구 이상이다.
인격의 세계에서는 차등성이 있어야 인격의 가치가 나타난다. 기계적이 아니다.
거울을 보며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렇게 지었을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듣고 고쳐준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를 고쳐달라고 할 것이다. 그게 안 되니 자기 마음대로 성형수술을 하지 않는가?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것을 만들지 말고 영원한 신령계로 들어갈 것을 만들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는 미장원이다.
3) 두 요소로 결합된 1인.(마10:28, 눅8:55, 고후4:16, 빌1:22)
두 요소라고 해서 두 사람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두 요소로 합성, 결합된 1인이라는 말이다. 1인이기 때문에 외부로 나타나는 인격은 1인격이지만 그 인격을 지배하는 두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때로는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2인, 3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때로는 한 인간 속에 두 요소가 싸우기도 한다. 이것을 내적 투쟁, 대내전이라고 한다.
※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 하니 나 한 사람이 같은 또 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양복 벗고 한복을 입으라’고 하면 누구보고 하는 소린가?
설교는 누구보고 하는가? 영이냐, 육이냐? 모두 이성보고 하는 소리다.
남자를 먼저 짓고 그 후에 여자를 창조했다. 이 사실에 대해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냥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만 했고, 창세기 2장에 와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는데 남자는 진흙을 빚어서 창조하시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를 원료로 해서 역시 진흙을 빚어서 창조했다고 세밀히 말하고 있다.
(1)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 창조했다는 설.
원래는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만 짓기로 하시고 남자만 지었는데 남자 한 사람만 지어놓고 보니 인격적으로 그 남자와 짝할만한 상대자가 없기 때문에, 즉 물론 다른 피조물이 있기는 하나 인격적 대화의 대상이 아니므로 쓸쓸하게 지냈기 때문에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 남자의 배필을 만드시기로 하고 여자를 지으셨는데 이 여자를 지을 때에 남자의 갈빗대를 원료로 해서 여자를 지었으니 이 여자는 남자에 의해서 생겨진고로 혹 학자들 중에는 여자들은 영혼이 없고 다만 많은 갈빗대 중의 하나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갈빗대 하나 하나에는 영혼이 없는 것처럼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설도 있다.
(2) 영의 창조와 육의 창조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영육을 동시에 창조하지 않으시고 영을 먼저 창조하시고 육을 창조하신 것이다.
위에서 말한 학자들은 인간창조에 있어서 영육을 구분치 않고 단순히 육적인 인간만 보니 동시창조로 보인다. 그러나 영육을 구별해서 영의 창조는 선행적이요 남녀 동시 창조이니, 창세기 1장 27절의 동시에 창조된 것은 영적 인격성이다. 그리고 2장에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진흙을 빚어서 창조를 했는데 진흙은 물질이니 이 물질을 가지고 비 물질인 영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2장의 창조는 단순히 물질적인 육이다. 이 육은 사람이 물질계에 있을 동안에 필요하기 때문에 진흙을 빚어서 물질인 인간의 육을 창조하신 것이다.
사람이 이 물질계를 떠나 신령계에 가면 그 곳에는 물질이 필요없고 비 물질인 영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는 안다. 따라서 사람이 죽을 때에는 물질인 육은 완전히 벗어버리고 비 물질인 영만 신령계로 올라가고, 또 앞으로 부활을 한다 해도(혹은 살아있는 자는 변화하고) 그 부활체와 변화체는 물질적인 육이 아니고 물질이 비 물질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물질계에 있을 동안에는 남성 여성, 이성이 필요하나 이 물질을 벗고 신령계에 가서는 남성 여성이 필요가 없다. 활동적 통치적 후사적인 면에서 다 하나님의 아들이다.(엡1:5) 그리고 애정적인 상대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만 신랑이요, 모든 성도는 다 신부의 입장이 된다.
그런고로 1장은 영의 창조를 말하고,
2장은 육의 창조를 말하니,
인간의 사역의 주체성인 영의 창조는 남녀 선후의 구별이 없이 동시에 같은 조건으로 창조하시되 다만 물질인 육은 이 세상에서 활동적 필요성과 번식적 필요성과 구원목적에 의한 상대적 필요성에 따라 남성과 여성에 차별을 두어 남성창조는 선행적이요 주권적이요 시은적 시애적 통치적인 위치와 입장에 두고, 여성창조는 후행적이요 남자로부터 산출적이요 의존적이요 수애적이요 수은적이요 피 지배적이요 순종적 복종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육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2인 동체원리로 살게 하기 위해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은 것이다.
※ 원래는 남자 하나만 창조를 했는데 창조해 놓고 보니 매우 쓸쓸하게 보이고 안 되게 보여서 여자를 지었다고? 다른 동물들은 암컷 수컷이 있고, 심지어 식물까지도 그런데 인간을 지을 때는 왜 남자만 지었느냐?
우리는 영육의 분리와 창조 동시설을 믿을 수 없다.
영 창조는 먼저, 육 창조는 후에 한다. 태 속의 아기는 어느 것이 먼저 창조냐? 영 창조는 남녀 동시성이요 동등성이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할 의무, 통치적 의무, 주권적 의무, 은혜를 베풀어줄 의무, 다스리고 지배할 의무가 있다. 여자는 순종할 의무, 복종할 의무가 있다.
육의 창조는 차별이 있게 했다.
영이 시간성이냐?(시간에 속했느냐) 주체성이냐?
(3)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에 남자의 갈빗대로 지었다고 하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지으실 때에 남자의 갈빗대로 지으셨을까?
① 남자를 지을 때는 흙을 원료로 해서 지으시고, 여자를 지을 때는 남자의 갈빗대로 지었다고 하니 남자의 육체의 원료는 흙이요, 여자의 원료는 남자의 갈빗대이다. 이렇게 한 것은 남자와 여자의 육체는 동질이라는 뜻이다.
② 하나님이 인간의 영을 지을 때는 말씀으로 지으시고, 육을 지을 때는 물질인 원료가 필요했던가? 원료가 없으면 인간의 육을 지을 수가 없던가? 결코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원료가 없어도 얼마든지 창조할 수 있으나 영과 육의 가치성을 구별하기 위해서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었고, 육은 흙으로 지으신 것이다. 즉 육은 땅이라는 것이다. 또 인간의 육과 영과의 관계성을 말해주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성을 말해주고 있다.
③ 남녀 동등권을 가지기 위해서라는 설. 즉 여자를 만들 때 남자의 갈빗대로 지은 것은 남녀 동등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남자의 갈빗대를 원료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실 때 남자의 머리부분을 뜯어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신처럼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몸의 중심인 갈빗대로 여자를 지은 것은 남자의 머리부분도 아니고 발 부분도 아닌 중간지점의 것으로 지었으니 남녀 동등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발 부분의 것을 찢어서 원료로 했다면 남자는 여자를 신발처럼 천대하고 다니라고 했겠다!?
※ ‘갈빗대가 어디 붙어 있느냐’가 아니고 ‘어떤 역할을 하느냐’ 이다.
갈빗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싸고 있다. 여자는 갈빗대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남자의 위치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명예 위신 체면을 보호해야 한다. 갈빗대가 요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부러져도 보호해야 한다.
④ 결합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갈빗대가 하나의 인간 독립체는 될 수 없다. 길가에 어떤 사람의 갈빗대가 하나 있는 것을 보고 ‘여기 사람 하나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여기 갈빗대가 하나있다’고 한다. 그러나 갈빗대 하나가 없는 사람을 보고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자는 남자 없이 독립적으로 인정받기 힘들다. 즉 남녀 합일 결합체가 될 때에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남자 여자가 각각 혼자서 생산할 수 없다. 남자 여자의 결합에서 온전한 가정이 이루어지고 생산의 역사는 계속될 수 있다. 그래서 남녀 결합의 원리를 가지고 살게 하기 위해서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지은 것이다.
3. 인간의 우월한 지위.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같은 피조물이면서 인간은 특수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 물론 이 특수성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조물주의 특별도모로 지음받은 존재.
인간이 타 피조물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 것은 같은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는 특별한 도모 하에서 지었다는 것이다. 인간 외에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특별한 도모로 지은 것은 없다.
(2)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창1:27)
같은 피조물이면서도 인간만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이니 이 형상이란 얼굴 모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비 물질적 무형체적인 존재인고로 신에게는 형체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의 속성대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 다음 가는 위치가 인간의 지위이다.
형상: 신의 속성을 말한다.
(3) 신의 축복의 대상자.(창1:28)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지으시고 특별히 인간에게만 복을 주신다는 약속과 계약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복이란 어떤 복인지? 이 복 속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으나 궁극적인 복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복이다.
(4) 우월한 지위.(육해공의 정복권을 받음-창1: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에게 육해공을 정복하라는 정복권을 주셨지만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이 정복권을 주신 일이 없다. 이 정복권을 받은 자는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우월한 지위 중에 하나인 이 정복권을 가지고 정복을 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특수적인 축복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또 한 면으로는 책임성이 있음을 알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복을 하며 살도록 명령을 했는데 인간이 도리어 정복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특수적인 축복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요, 이 특권을 스스로 상실하는 것이다. 또 의무적인 면으로 볼 때 자기가 하여야 할 의무수행을 못했으니 이는 곧 범죄자가 된다.
인간에게 육해공을 정복하라고 하는 것은 특권이요 축복이다. 그럼에도 그 무엇에게 정복을 당하는 것은 불행이요,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다. 인간은 이 현존세상에 있으면서 육해공을 정복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육해공을 정복하는데 무엇으로 정복을 할 것인가?
타락한 인간은 이 정복성 역시 타락이 되어 사망적으로 무력적으로 경제적으로 사상적으로 정복을 하려고 한다. 사람이 타락해서 미개하면 미개한 것만큼 악랄하고, 악랄한 것만큼 잔인하게 무력적 정복을 통해 육해공을 정복해 왔다. 이 정복을 위해서 역대의 많은 거짓된 영웅들이 사람의 많은 피를 흘리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신 정복성은 이런 정복이 아니다.
또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기의 경제로써 약소민족이나 빈곤국가의 영토를 정복해 왔는데 이 정복도 표면적으로는 선적인 정복 같으나 이 역시 사역적이며 강압적이며 사망적이다. 결국은 이 정복도 성공하지 못한다. 이 역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정복성은 아니다.
인간세상에서 정복 중에 가장 무서운 정복은 사상정복 점령이다. 마르크스나 레닌은 성경에 근거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성립을 시켜 어리석은 나라나 국민들을 유인해 많은 나라와 영토를 사상적으로 점령 정복하였다. 이 정복을 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무력적으로 정복을 한다. 이 정복이 무서운 정복이다. 이 정복 역시 타당한 것으로 인정을 받을지 모르나 이것도 형이하학적인 정복이요, 사망적 정복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축복과 특수적인 정복권은 그런 방법이 아니다. 이 정복성은 진리정복이요, 사랑적 정복이요, 생명적 능력적 정복이다.
생명적 정복이라는 말은 생명을 가지고 사망권 내에 있는 자를 생명권 내로 끌어들이는 정복을 말한다. 이 정복은 죽을 자를 영원히 죽지 않을 자로 만들어 가는 정복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악한 인간을 진리로써 정복하여 신령계에 무한계에 가서도 손색이 없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진리정복이다. 이 정복을 할 때 정복을 당하는 자는 살게 되고, 참된 자가 된다.
이 정복은 죽여가면서 정복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정복을 하는 것이니 이 사랑은 인적인 사랑이 아니고 신의 완전적 다양적 절대적인 사랑을 던져줌으로써 이 사랑을 받고 느끼게 될 때 자원적으로 정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 사랑에 정복을 당하는 모든 존재는 참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 정복은 능력적인 정복이니 여기에 정복을 당한 것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고 취소됨이 없다. 이 정복은 사망을 이기고 원수를 이기고 죄를 이기는 정복이다.
※ 무력적 정복은 정복이 아니다. 사상적 정복, 무력적 정복 모두 임시적이다.
마귀가, 이단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나올 때 또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고 할 것이다.
진리로 사랑으로 생명으로 능력으로 정복을 하라! ‘공부 잘 하라, 돈 잘 벌어라, 예수 잘 믿어라’ 하지 말고 예수 잘 믿는 이치를 가르쳐라! 학교 갈 때는 공부 잘 하는 이치를 배우러 가는 것이지 공부 잘 하라는 꾸중을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정복되고, 바울에게 디도나 디모데는 스스로 정복당한 것이다. 정복된 이들은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벗어나면 죽는다.
상대방이 나를 미워할 때 나는 더 그를 사랑하면 그가 정복될 가능성이 있다. 미움의 화살이 오면 사랑을 폭탄으로 응사하라!
현존세상에서 사랑으로 정복하는 것은 곧 천국을 정복하는 것이라 했으니 실은 육해공만을 정복하는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니고 천국까지도 점령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힘쓰는 자가 천국을 빼앗는다’고 했다.
천국의 점령은 공간적 위치적 점령도 되지만 종별적 점령도 된다. 위치적 공간적 점령이라는 말은 자기가 점령한 그 위치에 자기가 설 수 있고 갈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는 말이고, 종류적 점령이라는 말은 천국의 수많은 각양의 종류 중에 자기가 점령한 소유만 자기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천국점령이라고 한다.
(5) 통치권을 받은 자.(창1:28)
인간의 우월한 지위 중에 또 하나가 통치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통치하라고 했다. 이 통치성은 자신이 신과 연결되어 신의 능력에 의한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 통치권은 주관적 능동적 자율적 통치가 아닌 신과의 결합적 통치요 의존적 통치요 동화적 유기적인 통치성을 말하고 있다.
예: 국왕이 군수에게 그 고을을 다스리라고 할 때는 국법에 의해서 그 고을을 다스리되 자기의 권한으로 다스리지 않고 국왕의 권한으로 다스림과 같다.
※ 하나님이 다스리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다스리라는 말이 아니다. 주관적 능동적 자율적으로가 아니고 유기적 결합적 의존적 피동적으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근원적 하나님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간접적 통치로 만물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그렇게 통치하게 하심은 그 통치성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통치적인 그 사역을 통한 이면적 효력성이 중요한 것이다.
그 이면적 효력성이란 하나님께서는 통치의 방편을 통하여 인간에게 당신의 능력과 성품을 넣어주시니 인간이 통치를 통해 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이 통치의 효력성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표면적으로는 신이 통치를 하는 것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내가 신의 능력과 성품을 입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인간은 신에 의해서 통치를 많이 하면 많이 한 것만큼, 또 그 어려운 통치를 어렵다 하지 않고 힘들여 하면 하는 것만큼 그 통치를 하는 자는 이면적으로 받는 것이 크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한다.(보충은혜)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통치를 받으며 만물을 통치할 때 하나님의 충만하신 충만함이 내가 말씀에 충만하고, 내가 말씀에 충만함이 모든 만물에게 충만해지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통치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통치를 받지 않으면 나는 만물을 통치하지 못한다. 통치하는 것을 내가 들을 때에는 명령이지만 그 명령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다. 만일 사역만이 목적이라면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잘 하실 테니 굳이 우리에게 시키지 않는다.
아무 유익이 없는 동작이 있다. 아무 것도 아닌데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것을 순종하므로써 은혜를 주신다. 이 실습을 이 세상에서 하는 것이다. 이 실습을 통해 그 분의 성품과 능력을 입는 것이다.
이 통치는 과거사가 아니고, 미래적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영적 통치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통치는 영계와 직결되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통치를 잘 받고, 잘 해야 한다.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뜨끔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감동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내가 입는 것, 능력을 입는 것이다.
(6) 수호권을 받은 자.(창2:)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했는데 그 다스림은 자기 자신이 신의 의사에 의해 다스림을 받되 자기의 마음을 바로 다스려야 되고, 다음에 몸을 다스려야 되고, 외계에 있는 것 중에는 수권범위 내에 있는 것을 다스리고, 외계에 있는 것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다스리는 것만이 아닌 또 지키라고 했다. 인간은 지킬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지키라고 할 때는 능력도 주신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지난 과목에서 논한 바 있으나 여기서 인간의 우월한 지위 면에서 보는 수호권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특수적인 우월한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
지키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지키라는 말인가? 자기 자체를 바로 지키라는 말이니 자기 자체를 생명권을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자기의 마음이 생명권을 이탈치 않도록 지키고, 자기의 몸이 생명권을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 마음은 생명권의 담을 넘어가서 여러 가지 죄를 짓게 되고, 또 내 몸이 이 생명권을 넘어가서 여러 가지 죄를 짓게 된다.
※ 다윗의 눈이 금남구역을 넘어갔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제五절. 낙원의 창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을 위하여 특별히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다.
이 동산을 창설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동산에서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성과 목적성이 그러했다고 하면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목적성과 계획성이 파괴를 당한 것이 되고,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목적성과 계획성과 설계성이 인간에 의해 바꾸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창조의 목적이 기껏 에덴동산 낙원 정도나 주시기 위해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초인간에게 낙원 동산을 주신 것은 후대의 모든 인간에게 천국을 주실 계시목적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계획성도 설계성도 파괴됨이 없이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진행되어 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 인죄론에서는 부득이 낙원을 말하게 된다. 낙원을 주신 목적을 말할 때 위에서 하는 말과 아래서 하는 말이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딛2:1)
에덴동산에 거처의 이유를 거기서 영원히 살도록 하려 한 것이라고 하면 인간의 활동에 의해 하나님의 인격성이 다 깨어진다는 말이 된다.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는 현상을 인간이 볼 때는 지구가 도는 것으로 보이지를 않는다.
낙원을 주신 것은 계시성으로 주신 것이다.(엡2:10)
一. 이 동산에 거주할 인간의 의무.
하나님께서 이 동산을 특별히 창설해 인간에게 주셔서 막연히 이 낙원에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니고 이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의무성을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이 의무를 모르면 영원히 낙원과는 상관이 없는 자요, 반면에 이 의무성을 깨닫고 그 의무대로 살면 그 삶 자체가 현재적 낙원이요 미래적 낙원이 되는 것이다.
1. 은밀계시를 알고 살아야 한다.
사건과 존재와 성문계시를 통하여 이 은밀계시를 깨닫고 알아야 한다. 즉 이 말은 낙원동산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 인간을 여기서 살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왜 이 환경, 이 현실 속에서 살게 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살게 하신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이 환경 이 현실 속에서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즉 누릴 목적으로 살라는 말인가,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라는 말인가, 자신들의 기능적 지능적 인격적 온전을 위해서 살게 하신 것인가? ‘왜 살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의무는 신의 은밀계시인 이 낙원에서 지능적 기능적 인격적 신의 성품을 입어 온전자가 되라는 것이다.
※ 인간을 그냥 막연하게 지은 것이 아니다. 왜 낙원에서 살라고 한 것인가? 실컨 먹고 마시고 누리고 살라는 말인가, 아니면 어떤 목적과 뜻이 있는 것인가?
에덴동산에 사는 궁극목적을 아담에게 얘기는 안 했지만 어떤 목적으로, 어떤 뜻으로 살게 했는가를 아담이 알았더라면! 모르면 모두 절단이다.
오늘 나를 이 현실에서 살라는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 인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현실에서 어떻게 하던 누리려고 한다.
첫째 계시는 은밀계시를 붙잡고 사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살라고 하는 목적성은 신의 기능적 지능적 인격성을 입고 살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수주일만 하면 되는가, 아니면 주일을 지키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양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가? 이 성문계시를 왜 주었는가?
2. 거처의 의무.
하나님이 주신 이 낙원동산은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다른 존재에게 있어서는 타처가 더 좋고 적절한 곳이 있을지 모르나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이곳이 가장 적절한 곳임을 알고 자기의 현실에 불만을 가지지 말고 살아야 한다.
이 현실에서 은밀계시를 잡은 자는 불만이 없다. 그렇지만 인간이 신의 의지계시를 저버리고 누리려 하면 불만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누리자는 주의가 아닌 신의 의지계시를 잡고 불만이 없이 만족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가지고 사는 자라면 이보다 더 좋은 곳(현실)은 없음을 알아야 하며, 현실에 불만이 없이 살아야 한다.
아담은 첫째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둘째 의무를 저버리기 마련이다. 자신을 신의 온전하심을 입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누리는 주의, 누리는 목적으로 살다보니 현실에 대하여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결과로 인해 자기의 현실이 물질인 인간이요 피조물인 인간이요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으로 이 현실에 사는 것이 만족이 아니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성경에 그 사건을 기록하신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서이다.
※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여기서 살아라’ 한 것은 영원히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 온전자가 되는데는 이 낙원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저버리고 나니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나오고, 이 마음이 나오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가’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현실은 누리라고 준 것이 아니고 건설을 위한 것이요 온전자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이 세계가 건설하기에는 가장 적합하다.
누가 비뚤어진 것인가? 누리면서 만족하라는 말인가? 아니다. 위의 것을 붙잡은 자로, 계시를 붙잡은 자로 건설하며 살라고 한 것이다.
‘에덴동산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지형적 위치보다 계시적 면으로 깨달아 에덴동산에서 심신이 결합하여 살아야 한다. 몸은 에덴동산에 살고 있으나 마음은 떠나 있으면 의무수행을 어긴 것이다.
옛날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주신 에덴동산의 그 낙원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나에게 마련해 주신 이 환경, 이 현실이 바로 에덴동산이라는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은밀계시를 붙잡지 못하고,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곳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이탈하면 그 선물 동산에서 살 자격이 없다. 회개치 않으면 쫓겨 나간다. 가령 몸은 에덴에 있으면서 마음에 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것을 원했으면 이것은 에덴동산의 거처의 의무를 어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린 데서부터 싹이 터 나와 현실에 대한 불만죄에 빠져 거처의 의무를 수행치 못하고 에덴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최초의 죄가 들어온 과정이요 순서이다.
아담이 결정적으로 죄를 짓게 된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물행 유형행 이전에 무형행 심행에서 이미 죄가 결정된 것이다.(마5:27, 28) 우리는 이것을 바로 배우고 바로 깨달아(범죄의 과정의 순서) 범죄를 막아야 한다.
※ 죄의 기원이 어디냐? 대개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죄의 시초라고 말한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유형행의 죄인데 그 이전에는 죄가 아닌가? 예수님이 보시는 죄는 심행을 보신다. 죄는 활동 이전이다.
오늘날 우리가 짓는 죄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누리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리거나 모른 데서 나온 것이다. 성문율을 어긴 것만이 죄가 아니다. 자기에게 온 사건 환경이 구원을 이루는데 지장이 있다고 하며 불만을 가진다면 그것은 죄가 아닌가? 어떤 현실이라도 구원을 못 이룰 것이 있는가?
3. 통치하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말하기를 그 어떤 다른 존재에게 순종도 의존도 동화도 지배도 받지 말고 통치하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만물을 통치하라’ 하실 때는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이 능력은 인간에게 본유적으로 주시기도 했지만 모든 만물을 통치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과 동화적 피동적 유기적 통치를 해야 된다. 그런고로 통치는 적극적인 면이다. 이 통치를 하는 것이 순종이요, 통치를 받는 것은 불순종이요 거역이다.
※ 이것은 실질적 역사이면서 실질적 하나님의 계시이다.
신의 온전성을 입어나가는 데는 낙원동산 이상 좋은 곳이 없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볼 때도 이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이 사실을 모르니까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은밀계시를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모르면 하나님을 향해 불만이 나온다.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고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의존적 피동적으로 다스렸느냐 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에게 통치를 받으면 죄이다. 다스리라고 했지만 현실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불순종이 나온다.
● 다스리는 순서:
①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고.(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
② 몸을 다스리고.
↓
③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됨.
↓
④ 만물을 통치케 됨.
4. 지켜라.
하나님은 인간을 통치하게 했고, 또 수호적 의무를 명령했다.
이 수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외계의 것이 내계로 침범하여 오는 것을 막고, 내계의 것이 생명권 외계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 의무수행은 자기가 자기를 적극적으로 통치를 하게 되면 염려가 없으나 이 통치성이 중단되면 통치적으로 박탈된다. 지킬 힘도 없어진다. 이 동산에 있어서는 안 될 동산 외계의 그 어떤 것이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지키지 못하면 죄다. 내 속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내 소원 취미 모두는 생명외계로 탈출하게 되니 이것이 못 나가도록 지켜야 한다.
※ 청각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죄가 들어온다.
5. 따먹어라.(생명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언제든지 긍정적인 것을 먼저 말한다. ‘다스리라’ 한 것은 긍정적이요 적극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인간을 교훈하실 때 부정적 소극적인 것으로 하지 않고 긍정적 적극적으로 하신 것은 구원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는 인간에게 따먹지 말라고 먼저 말하지 않고 따먹으라고 먼저 말씀하신 것은 좋은 미덕을 먹으라는 말이다. 누가 보아도 그 과실은 아름다운 과실이다.
※ 적극적 긍정적으로 나갈 때는 어떤 소극성이 끼어 들 수 없다. 기독교는 고행주의 극기주의 염세주의가 아니다. 또한 초절주의가 아닌 초월주의이다. 이용주의 지배주의이다.
‘따먹어라’ - 생명과, 일반과, 아름다운 생각, 미덕, 행동은 하라!
제 1 의무를 지키면 제 2, 제 3, 제 4, 제 5의 의무는 자연적으로 지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돌변적이라도 아름다운 말(구원이 되는)이 나온다.
먹기 좋은 과실을 먹을 때에는 영이, 진리가, 양심이 방해치 않는다.
‘생명과를 먹으라’ - 기독자가 먹을 것은 영원히 생명과이다.
에베소교회에게 ‘회개하라, 그리하면 생명과를 주어 먹게 하리라’
6. 먹지 말라.(선악과)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을 선적인 과실도 먹지 말고, 악적인 과실도 먹지 말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또 두 성분(선의 성분과 악의 성분)이 있는 과실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 과실은 두 개의 과실이라는 말도 아니고, 선과 악이 함께 들어 있는 과실이라는 말도 아니고, 또한 이 과일 자체 속에 선과 악이 들어 있다는 말도 아니다. 이 과실을 따먹으면 그 결과가 선을 아는 일에 주관적이요 자율적으로 되는 것이니 이 열매는 과연 하나님의 금단의 열매이다.
5대 의무를 수행치 못하면 필연적으로 이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또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성문율을 어기는 것이다.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했으니 이 말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죄가 결정된다고 하는 죄의 시초를 말하는게 아니고 죽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죄의 시초가 선악과를 따먹는 데서부터가 아니고 그 이전에 벌써 죄는 구성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성문율을 어기는 물행만을 죄로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무형행 심행에서부터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 죄를 짓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 ‘따먹어라, 따먹지 말라, 에덴동산에 거처하라, 다스려라, 지켜라’ 이 모두가 성문계시이다.
이 성문계시 이면에는 은밀계시가 있다. 이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성문계시를 표면적으로 지킨다 할지라도 실은 바로 지키는 것이 못된다. 성문계시 이면의 은밀계시를 바로 깨달아 이 은밀계시를 붙잡고 성문계시를 하나 하나 지켜나가게 되면 표면적으로는 성문계시를 지키는 것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은밀계시를 지키게 되는 것이다.
혹자들은 이 66권의 성경은 가감을 못한다 하며 성경에 기록된 액면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단순하게 듣기로는 가장 보수적인 것 같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가령 성경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이 있는데 그 사람이 성경 액면 그대로 순종을 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또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을 했으니 액면 그대로 지킨다면 성경에 기록된 치수대로 방주를 지어야 할 것이며, 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을 떠나라 했으니 지금도 애굽에 있는 자는 애굽을 떠나는 것이 순종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현재 애굽에서 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사는 자는 어떻게 그 말씀을 순종할 것인가? 오른손이 범죄하면 자르라고 했고, 눈이 범죄하면 그 눈을 빼라고 했으니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가? 그런고로 성문계시 이전에 은밀계시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 일반적으로 선악과를 따먹는 그 때를 죄의 시초(기원)로 본다. 그러나,
① 은밀계시를 버린 것이 죄의 시초요,
② 현실에 불만.
③ 직무수행 못함. 다스리지 못하고.
④ 지키지 못하고.
⑤ 생명과를 먹지 않고(아름다운 과실, 먹기 좋은 과실) 먹어서는 안 될 선 악과를 먹었다.
타락의 순서를 모르면 밤낮 죄 짓는다. 실범은 유형행, 심범은 무형행이다.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인간으로서 이 6대 의무를 다 행하게 되면 이제 그 앞에는 네 강이 있으니 이 강을 통하여 은혜(수입)를 받게 된다.
二. 에덴에서 흐르는 네 강.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이 에덴동산과 네 강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창세기 2장 10절로 14절에 네 강을 말한 것은 에덴동산의 지형적 위치를 가르칠 목적으로 말한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이 네 강을 근거로 낙원의 위치를 정하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이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리하여 6천년의 역사가 흘렸지만 아직도 낙원의 위치를 정확히 정하지 못하고 갑론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낙원동산의 네 강을 말한 것은 동산의 위치를 가르칠 목적이 아니고 역시 계시목적으로 주신 것이다. 계시목적으로 하다보니 지정학적으로 맞지 않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비단 이 낙원동산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다. 성경을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는 그런 일이 많다. 가령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대하여 말할 때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마1:8) 라고 했으나 실은 웃시야가 요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웃시야는 아마샤에게서 낳았다. 이것은 역사적 사학적으로는 맞지 않으나 계시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계시성이지 역사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서이지 지리학 서적이거나 사회학 서적이 아니다.
네 강은 지리학적인 면에서는 정확하지 못하나 계시성에는 가장 적합한 것이다.
※ 네 개의 강은 대략의 위치를 말하고 있다.
‘에덴의 위치가 어디냐’ 하더니 지금은 ‘예수의 재림이 계룡산이냐’ 한다.(사단의 짓이다)
1. 비손강.
이 비손강을 첫째 강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마르지 않고 크고 넓은 강이기 때문에, 또는 다른 세 강의 원 줄기 강이기 때문에 첫째 강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사실 네 강의 원 줄기는 유브라데강이다. 이 강은 그 하류가 인도양에서 죽 내려와 바벨론 바그닷드의 아라랏산 계곡으로 연이어 있는 강인고로 오히려 이 강을 첫째 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임에도 지금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비손강을 첫째 강이라고 말했다.
이 비손강이 유브라데강의 지엽의 강인지, 아니면 유브라데 지역의 어느 한 지방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이 비손강을 첫째 강이라고 한 것이 이 강에는 정금과 베들리엄 진주 호마노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강속에는 이런 귀중한 보배들이 있으나 이 보석들 위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보석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강속에 있는 이 보배를 채취할 것이다.
※ 어떤 사람은 ‘아라랏산이 에덴동산이 아닌가’ 한다. ‘이 강이 원 줄기가 되어 네 강으로 번진 것이 아닌가’ 한다.
또는 제 1 조상 아담이 아라랏산? 그리고 제 2 조상 노아의 발상지?
에덴이 바그닷드냐? 아니면 아라랏산이냐?
첫째 강이라고 하는 말은 아무렇게나 한 말이 아니고 계시성으로 한 말로 정금과 베들리엄과 호마노가 있기 때문이다.
요단강물은 맑지 않고 흐리다.
비손강의 보물은 6대 의무를 마친 자가 가진다. 흐르는 세월, 흐르는 사건 속에 정금 진주 호마노가 있다.
그냥 보면 하나의 흐르는 강이다. 그러나 6대 의무를 지킨 자는 흐르는 물 속에서, 사건 속에서, 시간 속에서, 환경 속에서 이 진주를 캐낸다. 이 사람은 은밀계시를 잡은 자이다. 무진장의 보배를 캐낸다. 이것을 가지고 자기의 황금보석 진주 집을 짓는다.
2. 기혼강.
이 강은 둘째 강으로, 급류로 흐르는 강이다. 급류로 흐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빠지면 전부 강물에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이것은 6대 의무를 다하여 비손강으로 살지 않는 인생들은 그의 시간도 경제도 정력도 자기의 모든 소유도 기혼강처럼 급류로 떠내려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비손강으로 살아 보석을 채취하지 못하면 기혼강의 강물처럼 다 흘러 떠내려간다는 것이다.
※ 급류로 흐르는 곳에는 무엇이든지 빠지면 건지지 못한다.
3. 힛데겔강.
힛데겔강은 굴곡이 많기 때문에 강물이 급류로 흐르지는 않으나 급류가 아닌고로 물이 맑지 못하고 많은 찌꺼기가 있다.
사람이 비손강으로 살지 못하고 힛데겔강으로 살면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강이지만 그 속에는 오만 찌꺼기가 쌓이고 강물도 맑지 못하다. 어둑침침하고 썩어 냄새가 나는 것이다.
※ 보기에는 맑게 보이나 속에는 어둑침침하다. 냄새 나고 썩은 것이다.
4. 유브라데강.
이 강은 일명 그발강이라고도 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발강이라고 했다. 이 강은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언약으로 주신 경계지역의 강이다. 이 강을 표준하여 이남은 이스라엘, 이북은 이방나라 앗수르이다. 그래서 이 유브라데강은 분명히 강은 하나이면서 이름도 둘이요 소유주도 둘이다.
이 강을 강 이남에서는 이스라엘강이라고 하고, 강 이북에서는 앗수르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강은 이스라엘의 강도 되고 앗수르의 강도 되고, 또는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그발: 경계라는 뜻이다.
※ 혈통은 유대인인데 겉으로는 이방인과 같다.
뚜렷한 경계를 지어라,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지으라고 하는 강이다.
제六절. 사람의 통일성.
현재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인종을 보면 인류의 통일성을 믿기는 어렵다. 왜? 이 지구상의 인간들 중에 여러 종족의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종학적 견지에서 볼 때 피부적으로 특이한 종별이 있고, 골각적으로 특이한 종류가 있고, 또 각 개인의 신체의 대소가 각이하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통일성을 믿기란 어려운 것이다.
※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은 하나다. 그런데 인종학적으로 연구하게 될 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피부적으로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갈색인종이 있고, 또 골각적으로 서양인`과 동양인이 있고, 같은 동양인이라도 필리핀인과 우리 한국인과는 그 골각이 다르다. 백인과 인디안인과도 골각이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사실 가운데서 사람의 통일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一. 사람의 통일성.
현재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인종들은 각이하게 특색적인 체질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보면 인류의 시조는 단일조상으로 모든 인류는 이 단일시조의 자손임이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현재 지구상의 지방에 따라서 각각의 인종이 체질적으로 각이하게 다른 것은 수 백대 수 천대를 내려오면서 기후나 풍토에 따라 인간의 체질과 피부가 변할 수도 있는 것이요, 유전적인 유전성에 의한 경향이 크기도 하지만 문화혜택에 의하여, 혹은 병적인 요인으로, 혹은 공해적 영향에 의하여 인간의 체질이나 피부나 골각이 변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 성경은 인류의 통일성을 가르치지만 과학자들은 이 사실을 부인한다. 피부가 다른 것을 보고 그렇게 말을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해골들을 수집하여 각 인종의 조상을 찾는다고? 질병이나 공해의 영향을 받아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형제끼리는 비슷하지만 사촌으로 내려가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인류의 통일성에 있어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류는 혈육적 통일이다. 어떤 지방에 사는 인생이라도 아담의 후손 외에 다른 인종은 없다.
혹자들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류의 조상이 된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또는 다른 동물과 또 다른 동물과의 결합으로 반수반인이 나오고, 그 후대에 완전한 인종이 되어진 것처럼 보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인류는 결코 그렇지 않고 혈육적으로 통일이다.
※ 혈육적 통일성을 무시하고, 아담을 무시하고 인류의 조상을 원숭이라고? 또 어떤 자는 원숭이 + 곰 = 어떤 특수한 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한국의 설은 곰 + 한웅 = 단군이 태어남.
인간은 혈육적 통일성인 동시에 종류적 통일성을 가졌는데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그 많은 인종을 볼 때에 종류적 통일성을 믿기도 어렵다. 왜? 풍속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른고로 통일성을 믿기란 극히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풍속이나 언어나 전통 같은 것은 그 지역에 있는 인종들이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아 좀 더 이치적인 면이 발달이 되어 문화적으로 발전을 해 나가다 보면 같은 형제지간이라도 엄청나게 다를 수가 있다. 따라서 외부적인 언어나 풍속 습관이 일치하지 않고 통일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인류의 통일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옛날 미 대륙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고 있을 때 그들이 이 흑인들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영혼도 이성도 없는 한 인종으로 보았던 것이다. 왜? 백인들은 그 때에 벌써 그만큼 문화가 발달이 되어 문화적인 생활을 해 나왔고, 흑인들은 문화적 면이 미개해 백인들이 볼 때 야만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지금에 와서 그 누가 흑인들에게 이성이나 영혼이 없다고 하겠는가?
피부나 골각이나 언어나 풍속은 지방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혈육적 종류적으로 통일성이 있음이 틀림이 없다. 혹 의학적, 생활학적으로 혈액형이나 인체구조에 있어서 약간의 다른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사람에 대해 가르치는 바는 혈육적 통일이요, 종류적으로 절대 통일이다. 백인만이 참된 인종적 인간이고, 흑인이나 야만인들은 인간이면서도 비 인종적 비 통일적 인간인 것이 아니다.
※ 인간은 영혼 양심 이성 감정이 통일되어 있다.
풍속 습관은 자연환경의 지배에 따라 다르고, 이성적 작용에 의해 다르다. 그러나 많은 피조물 중에 인간은 종류적으로 통일이다.
1. 근원적 통일성, 그리고 궁극적 통일성과 비 통일성.(엡1:10)
인간은 수천 대로 내려가면서 많은 인류가 살지만 근원적으로는 통일이다.
이 근원적 통일이라는 말은 상술한 바와 같이 단일시조에서 많은 종족이 나왔다는 말인데, 즉 한 조상의 후손이 그 시대 시대에 각 지방으로 흩어져 수 백년 혹은 수 천년을 내려왔다는 말이다.
(1) 인류의 근원이 통일이다.
혹자들은 인간을 자연발생으로 생겨진 존재라고 하지만 어떻게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자연발생을 할 수가 있느냐? 이것은 근원적 통일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또 이 학설은 성경적으로, 학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고 다만 한 개인의 추측에 불과하다.
많은 인류의 근원이 자연발생이라고 하면 자연발생할 그 때 자연발생한 그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혹자들 중에는 토생적 발생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 토생적 발생이라는 말은 인간이 흙에서 솟아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은 인류의 발생은 자연발생이나, 토생적 발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창조이다.
우리가 인간의 근원적 통일성을 바른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자신의 구원까지 흐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먼저 인간의 근원적 통일성을 바로 알고, 또한 궁극적 통일성과 비 통일성을 알아야 한다.
(2) 궁극적 통일성.(엡1:10)
인간을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 면에서 예정성과 계획성과 설계성과 섭리성을 볼 때 이는 통일성이지만 한 아담의 후손이면서 선택의 제 1 목적물인 택자와 제 2 목적물인 불택자가 있기에 이는 통일성이 아닌 비 통일성이다. 즉 인류는 한 조상의 후손으로 났으니 이는 통일성이지만 택자와 불택자가 있다는 면에서는 생명과 사망으로 갈라지니 이것이 비 통일성이다. 여기서 택자는 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이고, 불택자는 택자를 위하여 지음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여기서 궁극적 통일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 지음받은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 결과적 영원적 통일이라는 말이다.
※ 택자는 택자대로 빠지는 통일성이요, 중간은 비 통일성이고, 불택자는 불택자대로 통일성이다.
(3) 궁극적 비 통일성.
인간은 근원적으로 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혈육적 종류적 근원적으로 통일이 되어 사망선까지 도달하고 있는데 비 통일이라는 말은 사망선에 가서 어떤 인간은 구원과 영생에로 가게 되고, 또 어떤 인간은 정죄와 영원한 형벌과 사망에로 가게 되니 이것을 전 인류적으로 볼 때 인류의 근원은 단일시조에서 통일성으로 내려왔다가 궁극에 가서는 영생과 영벌, 사망과 죽음으로 영원히 분리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비 통일성을 사망선에서 보려고 하지 말고 죽음 이전에 인간의 통일성 속의 비 통일성을 볼 줄 아는 시각성을 가져라! 이것을 일명 영안(靈眼)이라고 하는 것이다. 통일이면서 비 통일을 보라!
2. 인종의 통일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
성경이 인류의 통일성에 대하여 증명하고 있다. 성경이 증명하는 대로 보면 인류의 통일성을 의심할 바가 없다. 물론 성경이 증명하는 것은 외적이며 역사적인 면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외적이며 역사적인 면에서의 통일성을 학적으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또한 계시적으로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학문적 지식이 성행이 된다 해도 우리는 그것으로 족하지 않다. 계시적 지식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성경적 증언을 살펴보면서 그 이면의 계시 면에서의 인종의 통일성을 찾아보기로 하자.
※ 인종의 통일성이라는 것은 다른 책에도 있지만 성경도 증언하고 있다. 곧 인류의 시조가 단일시조라고 말한다.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산출되어 나왔다고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는 영성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후에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낫다고!
우리가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라고 하는 것을 학적으로 아는 것만으로 족하게 여길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을 한 아담에게서 산출되도록 했는가? 계시적 면에서 왜 이렇게 했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택자 불택자의 조상이 따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인간으로서 택자 불택자를 모르게 하려고 한 조상에게서 산출되도록 한 것이다. 기본구원은 동등(선택 예정 계획 설계 출생 그리스도의 구속 중생까지)이지만 최종적 궁극적 결과적 구원은 차등이다. 누리는 영광, 활동, 존귀가 다르다.
이렇게 차등이 있는 것인데, 만일 이 차등성을 인간 자기가 건설해서 이루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아예 인간 개개인을 차별적으로 지어서 차등적으로 살도록 지어 놓았다고 한다면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항의는 못하지만 항의할 수밖에 없는 처사가 되는 것이다.
인격적 세계에서는 한 형틀에서 나온 블록처럼 똑같은 모양으로 되지 않는 것이다. 인격의 세계에서는 미모의 차이, 실력의 차등이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3절~: 기본구원은 동등이다. 그 다음에 미모 존영 실력은 개개인이 마련해야 한다. 영모의 미모성은 자기 노력 하에 달려 있다.
가인은 불택자의 모형이고,
아벨은 택자의 모형이다.
전도는 인간 모두를 택자로 보고 해야 한다. 불택자로 보면 죄가 된다.
스데반이 사울을 택자로 보았을까, 불택자로 보았을까? 어떤 행동을 해도 택자로 보았다.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보고 ‘네 할 일 빨리 하라’고 했다. 자기 할 일 자기가 하는 것을 시비할 것 없다. 돼지와 아이가 구정물을 먹을 때 누구를 말리고, 누구를 내버려두어야 하느냐? 너 할 일, 나 할 일을 분명히 구별하라!
같은 시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택자와 불택자는 분명히 갈라져 있는 것이다. 택자라는 자기의 본분을 잊지 말라!
성경이 증언하는 인종의 뜻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1) 유기적 타락의 통일성.
모든 인간은 최초 시조인 아담으로부터 유기적으로 산출되어 계대를 이어 내려왔는데 이 유기적인 통일성에는 타락의 유기적 통일성도 있다. 인류는 타락의 유기적 통일성을 가졌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다 타락한 상태이다.
인종학적인 면으로 볼 때도 전 인종은 통일적이요, 타락성적인 면에서 볼 때도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수많은 인종 중에 인종학적 측면에서 이 통일성을 벗어난 인종은 하나도 없다. 전부는 다 유기적인 통일성이요, 여기에는 타락의 유기적 통일성이다.
※ ‘유기적 타락성’ 이라 할 때의 ‘유기적’ 이란 유전성과는 다른 것이다.
인종학적 면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졌다.
타락적인 면에서 통일성 - 역사 속의 모든 인류가 아담 이후로 타락치 않은 인간이 없다. 전부는 유기적 타락성으로 통일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역시 통일성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통일성은 개체적이면서 구속적 통일성이다. 구속을 입는데는 개체가 다 입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고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인간이 있느냐?
① 무죄시대 - 에덴동산에 그냥 있어도 천국에 가지느냐?
② 양심시대 - 모세 이전. 양심만 잘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③ 율법시대 - 율법만 잘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④ 은혜시대 -
단독적 구속사업은 예수님 자신.
유기적: 전도해서 진리적인 관계로.
이성과 몸도 유기적인 관계성.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안 입고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유기적이 없이 실력배양을 할 수 있느냐?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이 통일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
2) 인류애성의 통일성.
이 통일성이라는 말은 인간과 인간만이 통할 수 있는 애성을 말한다.
세계 인종의 피부와 모양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사랑하는 면에서 인류애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인류애적 통일성을 가진 것이다. 물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
인류애의 통일성이라는 말은
(1) 사랑의 성질이 통일이라는 말이다.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종이 종족별로 피부색깔이나 신체의 대소의 차이나 모발의 색깔 등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인간들이 주고받는 사랑의 성질이 이런 종류에 따라 다른 것은 아니다.
모든 인류는 운명의 차이가 있고 인간의 숫자나 인물은 차이가 있으나 사랑의 통일성을 가졌다. 문화의 차별과 외형은 다를지라도 사랑만은 통일성이다. 이것을 보면 인간은 단일시조의 후손임이 틀림이 없다.
(2) 전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사랑은 전 인류적 통일성이다.
인류애의 전 인류적 통일이라는 말은 상호간에 상대방을 인간으로 생각지 않고 비 인종으로 느낄 때는 그렇지 않으나 피차에 인종으로 알 때에는 그 인류애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 항에서 말한 인류애의 통일성은 각 종족별로 사랑을 하는 사랑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고, 본 항에서는 각 종족을 초월해서 A라는 종족이 B라는 종족을 대할 때 그 상대 종족을 같은 인간으로 알 때에는 피차에 인간으로서 주고받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지역이 다르고 종족이 다르다 할지라도 이 사랑은 동질이다. 통일성을 가졌다.
물론 한 때 어떤 지역에서는 분명히 인종이지만 그 인종을 인종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의 하등동물로 착각을 했기 때문에 이 통일성을 가진 인간애로 수수관계를 갖지 못했으나 현금에 와서 피차에 분명한 인종임을 알고 난 후에는 지성적 인격적 차별은 가지고 있으나 그 사랑은 역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가령 과거에는 백인종이 흑인종을 인종이 아닌 하나의 금수로 알았기 때문에 금수로 취급했지만 현금에 와서는 문화혜택을 입고 문명이 발달된 백인들이 천재지변을 당해서 사경에 있는 흑인들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인류애가 통일성으로 나타난다. 슈바이처가 아메리카 흑인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사실도 하나의 예이다.
※ 전 항의 요지는 끼리끼리의 사랑이다. 새는 새끼리, 동물은 동물끼리, 인간은 인간끼리의 사랑.
인류애적으로 사랑의 통일성을 가졌다.
물론 여기서 인류애의 통일성이라는 것은 단일시조에서 모든 인종이 산출되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다고 하는 것을 알리기도 하는 것인데, 단일시조에서 산출된 인종이 풍토나 자연조건의 영향을 받아 피부가 변질되고 신체가 변질되어 냉한방 지역에서는 비교적 신체가 크고 피부가 백색으로 되었고, 열대지방에서는 피부도 검고, 어떤 지방에서는 신체도 작은 이런 종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의 인류애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고, 지역에 따라서도 변함이 없고, 환경에 따라서도 변함이 없이 언제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인류애가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단일시조의 후손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는 역사적이요 또 학문적인 면이라 하겠으나 계시적인 면으로 볼 때도 인간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즉 여기서의 통일성이라는 말은 제 1 목적물로 지음받은 인류의 통일성을 가르치는 것이니 이 통일성은 법적인 통일성이요,(전 인류는 단일법으로 사는 것) 통치적 통일성이요,(하나님 한 분의 치리만을 받아야 하는 것) 생명적 통일성으로(새생명) 기독자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보유하여야 할 통일성을 가르친다.
※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유대인과 이방인의 법이나 생명이 다르지 않다. 우리 기독교인은 법적 통일성을 가졌다. 진리는 만인에게 통일성을 가졌다.
구약시대의 성도는 천국에 가면 정복이고,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왕 노릇을 한다고? 이것은 아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그 커트라인이 어디냐? 진리는 주먹구구 엄펑덤펑이 아니고 칼날 위로 걸어가는 것이다.
기독자는
법적 통일성: 어느 나라, 어느 인간이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치리적 통일성: 어느 땅, 어느 왕이라도 하나님의 치리적 통일성을 가졌다.
생명적 통일성: 어느 땅, 어느 왕이라도 하나님의 생명적 통일성을 가졌다.
애정적 통일성: 어느 지방, 어느 나라 인류이던 통일성을 가졌다.
우리 기독자는 통일적 사랑을 가지게 된다.
부자(父子)의 사랑, 부부의 사랑을 초월해서 아가페로 바꿔라.
부부: 스톨게
우정: 필레오
최종적 결과의 모든 애(愛)는 오직 아가페뿐이다. 아가페 사랑은 복합적 다양적 사랑이다.
3. 인간의 통일성에 대한 학문적 증언.
학자들 간에 인종의 통일성에 대해 이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대 헬라의 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통일성을 부인하면서 토색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종의 자연발생설로써 인간이 땅속에서 나왔다고 하며 인종의 단일기원을 부인한다.
그 외에 인종의 단일 시조설을 부인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각자가 여러 서적에서 참고하시길...
(1) 사학적 견지에서 논증.
인종의 기원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여러 인종의 기원의 전설에서 그 위치를 중앙아시아라고 하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아서 아담이 원래 지음을 받아 살던 곳이 중앙아시아가 아니겠느냐고 한다.
(2) 어학에 의한 논증.
원시적 원서들의 어원이 대개는 유사하기 때문에 어원의 이 큰 유사성을 근거로 인류는 단일성 시조라고 한다.
(3) 심리학에 의한 논증.
영혼은 사람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심리학적으로 어떤 종족이나 국민에 속한 인물이던 모든 인류의 영혼이 실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들은 다 동일한 육체적 사욕, 본능, 정욕과, 동일한 경향과 재량을 가지고 있고, 특히 동일한 고등성질을 가졌으니 모든 인간은 도덕적 영적인 특질들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 생리학에 의한 논증.
자연과학으로 인종의 단일시조를 증언했는데, 또한 생리학적으로도 증언하고 있다. 생리적 공동적 판단은 인류가 단일족으로 구성됐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인류의 생리적 통일성의 근거는,
① 인종들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중간층계의 종족들이 무한하게 있다는 것.
② 모든 종족들의 두뇌 골격 치아의 성질이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③ 최대로 상이한 형의 개인들이 결혼을 하지만 능히 자손을 생산하며, 그 자손들이 계속적으로 생산능력을 가져온 것이다.
④ 신체의 정상적인 온도가 동일하며, 평균 맥박수가 동일하며, 질병에 대 하여 동일하며, 다른 동물과 혈액형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5) 동물학 생물학에 의한 논증.
동물학자들은 추상하기를 인류를 자조 면으로 본다. 단일 부부에게서 인류를 추적하여 인류의 동류설을 강조한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은 인류 다조설을 자신 있게 증거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 낙원의 창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 동산에서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설계성이 바꾸어질 수 있다.(딛2:1, 엡2:10) 성경 전부는 축소판이요 비밀설이요 계시성이다.
● 에덴에 거주하는 인간의 의무.
(1) 거처의 의무.
은밀계시를 잡고 살 것 - 신의 기능적 지능적 인격이 입혀짐.
불만은 은밀계시를 놓친 데서 나온다 - 은밀계시를 놓치니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유혹 당함. 마5:27, 28 - 무형행의 심행에서 죄는 결정된다.
(2) 통치의 의무.
통치력을 주었다. 동화적 피동적 유기적 통치.
(3) 수호의 의무.(지켜라)
외계의 침범을 막고, 내계의 것을 생명권 외계로 탈출시키지 말 것.
(4) 따먹어라.
미덕은 먹어라, 아름다운 생각 마음 행동은 하라!
제 1) 의무를 지키면 2)~5)의 의무는 지키게 되고, 아름다운 실과를 먹게 된다.
먹기 좋은 과실을 먹을 때 영이, 진리가 방해치 않는다. 그러니 생명과를 먹어라. 기독자가 먹고 살 것은 영원히 생명과이다.
(5) 먹지 말라.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으면 결과는 선을 아는 일에 주관적이요 자율적이 되니 이 열매는 과연 하나님의 금단의 열매이다.
1)에서 5)까지의 의무를 수행치 못하면 필연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기 마련이고, 성문율을 어기는 것이다.
성문율 그대로 지켜야 한다면 ‘애굽을 떠나라’ 해서 다 애굽을 떠났는데 왜 죽였느냐? 방주를 지으라고 했으니 지금도 그 치수대로 방주를 지어야지, 오른손이 범죄하면 자르고, 눈이 범죄하면 빼어 버려야지!
● 에덴의 네 강.
1. 비손강: 정금 베들리엄 호마노.
2. 기혼강: 급류. 시간도 경제도 정욕도 소유도 모두 급류에.
3. 힛데겔강: 굴곡마다 찌꺼기.
4. 유브라데강: 경계강.(그발강)
● 육해공 정복권을 받음.
● 통치권을 받음.
● 수호권을 받음.(창2:15)
● 여성을 남자의 갈빗대로 지은 이유.
‘갈빗대가 어디 붙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떤 역할을 하느냐?
그러나 통치적 후사적인 면에서 다 하나님의 아들이다.(엡1:5)
● 사람의 통일성.
다만 이성적 작용이나 자연환경의 지배에 따라 풍속은 다르다.
인간구조의 이분설은 맞으나 작용 면에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 이성과 양심은 중생치 못하느냐? 이성이 영이라고 한다면 ‘범죄한 영혼은 죽는다’고 했으니 타락 즉시 죽어야지!
중생한 영이 범죄한다고 말하면 ‘이성이 육이냐, 영이냐’를 먼저 따질 것.
화인 맞은 양심이란 진리지식을 버린 양심을 말한다. 양심은 진리지식의 지배를 받는다. 양심의 가책을 안 받으려면 진리지식을 빼버리면 된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 선악의 척도는 무엇이며, 선악의 판단은 누가 하느냐?
① 국가법률 - 나라 지방마다 다르고,
② 도덕률 - 나라 지방마다 다르고,
③ 양심율 - 각 사람마다 다르고,
④ 종교율 - 각 종교마다 다르고,
⑤ 생명율 - 절대적인 척도이다.
먼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척도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 자체가 근원적 자체적 본성적 본질적 선이시다. 방편이야 어떻건 하나님이 하신 것이 선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전부 악이다.
하나는 버려 두고,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님과 유기적인 결합으로 하나님에게 붙잡혀 한 것은 선이다. 일의 크고 작은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누가 했느냐?’
사람들은 선과 악을 외모와 종별과 방편에서 찾지만 하나님은 근원에서 선악을 찾는다. 바리새인들이 선악(일반도덕)을 몰라서, 성경을 몰라서 정죄를 받았나?
하나님과의 결합은 중생된 영이 진리와 영감으로 더불어 유기적인 결합. 이 때는 주격이 영이다.
믿음은 순종이요, 그 순종이란 진리와 영감에게 피동성 결합성 동화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진리와 영감의 감화로 됐느냐? 똑같은 활동이라도 구별해야 한다.
일생동안 이성과 몸이 지은 죄를 영이 책임을 혼자서 못 지니 그리스도가 대신 지고 공법 앞에서 심판을 받고 죽음.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지고!
이 세상에서의 상벌과 징계와 행복은 죄의 대가이거나 의행의 대가인가?
● 사건과 존재를 통하여 회개시키는 작업.
진리와 영감을 보내주지 않으면 영이 성장하지 못함. 진리가 없이는 회개는 불가능.
스승 잘못 만나면 성장에 지장이 있다. 무지에서 오는 것이 있고, 패역에서 오는 것이 있다.
영 성장과 이성의 성장률은 똑같은가?
질적 분리는 되지만 존재는 분리하지 못한다. 성화를 입는 방편은 매우 다양적이다.
오순절: 이적적 신앙 - 잘 믿으면 만능이다.
보수주의: 말씀대로 믿자 - 말씀대로 해야 천국 간다.
세속주의: 사회주의 - 천국이 있는지는 죽어봐야 안다. 그러니 세상에서 나 잘 하자.
복음주의: 내세주의 - 활용적 천국. 천국은 이 세상에서의 실력과 직결.
계명 지킨 결과성을 보지 말고 계명을 지킨 그의 인격성을 보라!
● 두 요소로 결합된 1인.(마10:28, 눅8:55, 고후4:16, 빌1:22)
외부의 1인격 속에 지배하는 두 요소: 옛사람, 새사람 - 엡4:22.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라’ - 누구보고 하는 소리냐?
제七절. 인성의 시조와 번식.
인간은 신의 피조물 중에 하나임은 틀림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을 때는 특수적으로 지으셨다.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인간은 물질적인 육과 비 물질적인 영과의 결합체로 구성됐다고 하지만 인간의 성질은 그 외에도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정신적인 요소는 어떤 방식으로 번식하며 수적 증가를 하는가?
신학은 사람의 성질의 정신적 요소에 대한 연구에 주력을 하지만 또한 물질적 요소에 관해서도 언급하게 된다.
※ 사람은 신의 피조물이요, 물질적인 육과 비 물질적인 영이 독립이 아니고 결합된 1인, 결합된 단일인격으로 활동하도록 되어 있다.
‘인간의 성질의 요소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떻게 번식이 되느냐’ 하는 것을 신학에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육의 인격과 영의 인격이 따로 활동한다는 것이 아닌)
一. 인성의 구조.
생물학적 의학적으로 인간의 신체의 구조와 세포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발표를 하지만 전인적인 면(육 이성 영)에 대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없고, 많은 이설들이 있다. 혹자들은 영육의 분리 없이 단순한 육체적 인간으로만 보는 자가 있고, 혹자들은 신체와 영과 혼 이렇게 삼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많은 이설들이 있는데 이들이 주장하는 학설을 대략 분석하면,
1. 단일 성분설.
이 학설은 인간의 영혼을 결합체로 보지 않고 즉,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물질존재만 인정을 하는 소위 유물론 사상과 비슷한 학설이니 영혼이 없이 단순한 신체가 자연생명으로 사는데 그 모든 욕구나 욕정은 신체의 작용이고, 나아가서는 이상이나 혹은 꿈같은 것도 신체의 작용이라고 한다.
이 자들은 인간의 신체 제일주의요, 신령계는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인간은 사선에서 완전히 끝나버릴 것을 주장을 한다.
※ 영육부인: 사두개인, 여호와의 증인, 공산주의.
인간은 신체로만 구성이 됐다고 하며 욕구 욕망 등은 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일반동물보다 고등동물일 뿐 영이나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내세를 부인하는 자는 신체위주로 산다.
2. 삼분설.
인간의 삼분설을 주장하는 학설이 많은 사람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학설은 본래 성경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헬라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성경학자들이 말하기 이전에 헬라철학에서 인간의 삼분설과 이분설을 대립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성경학자들이 헬라철학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삼분설을 주장을 하면서 그에 관한 근거로 성경을 인용하여 성경의 지지를 받으려 했다.
고대철학에서 주장하는 삼분설은 신체와 영과 혼을 갈라놓았다.
신체는 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영과 혼은 비 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육체와 혼과 영을 말했다.(히4:12, 살전5:23)
3. 이분설.
이분설을 주장하는 자들도 적지는 않다. 이분설도 헬라철학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이 이분설 역시 철학적이면서 성경적이다.
이분설과 삼분설은 서로 양보치 않고 대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볼 때 단순한 물질적인 성분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고 비 물질성이 있기 때문에 물질인 육과 비 물질인 정신계를 단일요소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일부 학자들은 물질적인 육과 비 물질적인 것의 양분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비 물질성, 즉 선과 악이라는 것, 혹은 선적인 요소와 악적인 요소, 일반적 형이하학적 지향적인 요소와 일반적 형이상학적 지향적인 요소는 대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일요소로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일요소가 어찌 대립성을 띌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니 삼분설을 주장하는 그 주장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원어적으로 분명히 소마와 프슈케 프뉴마(몸 혼 영)가 있기 때문에 삼분설을 주장한다.
그 뿐만이 아니고 일부 학자는 소마와 프슈케 프뉴마 외에 칼디아(마음)까지 나누어서 사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별로 인정치 않는다.
(1) 일반 학에서 말하는 이분설.
일반적이며 보편적으로 사람의 실유에 있어서 신체와 혼의 근원적 두 부분을 가지고 주장한다.
이 학설에 의하면 인간은 실유적 가견적 물질적인 신체가 있고, 그 외의 불가견적 비 물질적인 모든 요소를 혼이라고 하여 이분설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주장은 육은 물질만을 말하고 비 물질적인 것은 전부 혼으로 단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영과 혼을 같은 실유로 보며 때에 따라서 혼과 영의 칭호를 번갈아 부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단일실유 이분설을 주장한다.
※ 물질적인 것은 육, 비 물질적인 것은 혼이다. 영과 혼은 같은 것이다. 단일실유 이분설이다.
(2) 철학적인 면에서의 이분설.
헬라철학자들도 일반 학에서 말하는 이분설과 비슷한 이분설을 주장한다.
원래 인간의 이분설은 철학에서 말하는 삼분설과 대립되어 주장하던 학설이다.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분설이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분설이라고 하나 ‘일반 학에서 말하는 이분설과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분설 중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냐’ 하고 선택을 하라고 할 때 헬라철학에서의 주장이 더 성경적이라고 하니 이들이 헬라철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헬라철학에서 말하는 학설은 신체는 피조물이고 혼은 천계에 순수한 혼신관념으로 존재하다가 사람의 신체에로 화신 되었다고 주장한다.(플라톤) 그리고 혼은 비 창조물이고 불사적이기 때문에 신격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며, 신체는 혼의 감옥으로 혼이 신체에 갇혀 있는 것이니 이는 마치 굴이 껍데기에 폐쇄되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의 인간이 죽을 때에 혼은 몸을 떠나서 천계로 올라가거나 다른 어떤 몸으로 들어가 재 화신 된다고 한다.
※ 혼은 비 창조요 신격의 일부다. 신체 속에 화신. 신체는 창조.
일반학자와 다른 점은 일반 학은 둘 다 창조, 플라톤은 몸을 지을 때 영을 주었다.
아리스토 톨은 혼을 동물적인 국면과 이성적인 국면으로 나누고, 혼은 하늘에서 창조되어 형성되는 신체에 배치됐다고 본다. 그런데 배치되는 시점은 인간의 신체가 모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혼을 창조하셔서 넣어준다고 한다.
이 교리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하여 로마 카톨릭의 교리로 발전했다.
에칼트와 그 후의 3철학은 신체와 혼의 독립적 기원을 접하고 그것들을 인생인격에서의 외관적 통일성을 주장했다.
이는 이분설적이다. 독립적 활동이나 상호관계 없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혼과 신체가 서로 그 어떠한 유기성도 가지지 못한다. 몸은 마음의 지배를 받아서 움직인다. 몸이 마음을 움직인다. 마음이 몸을 움직인다.
데칼트는 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서로 분리, 별개라고 한다. 몸은 몸대로 지배를 하려고 한다. 마음은 마음대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외관상으로 볼 때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3) 개혁파에서 주장하는 이분설.
개혁파에서 이분설을 주장하되 역시 일반적 보편적인 신학에서 말하는 이분설에서 뚜렷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이분설은 헬라철학과 다르다.
개혁주의에서 이분설을 주장할 때 물질적인 신체와 비 물질적인 혼을 말하고, 이 혼과 물질인 신체와는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유기적인 두 실체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고 쾌락적 실체로 보고 있다. 따라서 영과 혼은 같은 것이니 혼이 곧 영이라는 실체로 보고 있다.
그래서 비 물질성은 영혼이요, 물질성은 신체라고 주장하면서 죄를 지을 때는 결합적 동작이므로 사람이 행동할 때마다 그 전체의 행동이니 영혼이 범죄하는 것이 아닌 육이 범죄하는고로 육이 죽는다고 본다.
사람 안에 두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동시에 사람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한다.
※ 개혁파의 주장은 헬라철학과 다르다. 영과 혼은 같다. 신체가 먼저 지음을 받을 때 코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니 별개가 아니고 그 신체 속에 흡수되어 신체는 신령이 되어 버린다.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영육이 죄를 짓는 것이다.(영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그렇다면 사람이 신체고, 신체가 사람인가?
에베소서 2장 1절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사람이 죽었다는 말인가, 육체가 죽었다는 말인가, 영이 죽었다는 말인가?
실유적으로 영과 육을 구별할 수 있다.
미 중생자는 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 죽은 자이다. 사람은 살았지만 인간의 주체성인 영은 죽어 있다. 인간에게는 안 죽은 것이 있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실유성으로 나눈다. 육신의 소욕 영의 소욕, 양자될 것 양자된 것.
(4) 두 학설의 상이점.
앞에서 말한 이분설과 삼분설의 양론에 대하여 다 각각 그 주장의 타당성을 말하고 있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학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신체의 실존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영(프뉴마)은 비 물질성이기 때문에 인간의 오관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들리는 것도 아니고, 냄새로 맡을 수도 없고, 입으로 맛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서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 수도 없으나 실유성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다.
그런데 혼(전3:21)에 대하여 ‘프슈케’ 라는 호칭이 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영과 혼의 두 이름이 있다고 해서 각각 두 실체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영은 실체임에 틀림이 없으나 혼(프슈케)은 어떤 독립적인 실체라기보다 어떤 실체의 동작의 능력을 말한다. 이 혼은 실체인 영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이나 다른 어떤 무형의 동작을 말하는 것이다. 예: 사람 외에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혼이라는 칭호를 명사로 많이 쓰기도 한다.
※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다 실유성으로 볼 수 있느냐? 영이 혼이고 혼이 영이냐? 전도서 3장 21절에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라고 했는데 혼이 영이라면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고로 영과 혼은 구별된다. ‘사슴이 혼이 나서 도망가더라’ 하면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는 말인가?
영이 신체에 흡수됐다면 이론상 분리는 되나 실질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자가 있다. 영이 신체에 흡수된 것은 이론상 분리만이 아니라 실질적 분리도 된다. 실유적 관계가 있으면서 유기적 관계이다.
‘죽었다’ 하면 전인이 다 죽은 것인가, 한 면만 죽은 것인가?
영의 능력적 작용성을 영혼이라고 한다.
불신자는 영은 죽었지만 이성이 작용하고 있다.
대개의 학자들의 주장을 분석해 보면 이성을 혼이라고 하는 듯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성은 비 물질로서 무형적 작용을 하는고로 영의 작용과 마음의 작용을 인간이 정확하게 선을 긋기가 심히 곤란하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미 중생자의 영은 죽었기 때문에 활동불능임을 우리는 믿는다. 그럼에도 미 중생자들도 얼마든지 내적 무형적 작용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의 작용일까? 분명히 영의 작용이 아닌 마음의 작용이다. 영은 죽어 있으나 마음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은 작용중단 상태에 있지만 마음은 얼마든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 이성을 영에 결부시켜 이성적 영이라고 하고 있다. 만일 이성이 영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완전 타락(완전 죽음, 전적 무능, 활동 불능성)을 부인하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런고로 마음은 영이 아니다.
그리고 이성의 작용의 능력성을 혼이라고 할 수 있다. 불신자나 미 중생자의 혼의 작용을 인정할 수 있다.
※ 플레토: 물질과 정신이.
아리스토텔레스: 물질과 정신이 - 영육의 창조성.
데칼트: 물질과 정신이 상호 관계없이 작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작용한다.
일반신학: 양심을 영으로 본다.
● 통일과 두 요소.
개혁주의: 사람의 행동(영육)마다 - 사람의 전체다.
영이 범죄가 아니라 육이 범죄 - 마음을 영으로 본다.
영과 혼을 나눌 수 없다. 연합해서 영혼은 신체에 동작하고.
여기서 문제는 미 중생자가 말씀에 대해서 어떤 동작이나 행동에 갈등이 생길 수 있는가 이다.
영과 유기적 동화적 동작이 있고, 영과 유기적 비 동화적 동작이 있다.
(5) 이분설의 정설.
인성의 구조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 간에 구구한 이설이 있다. 그 중에는 ‘삼분설이냐, 이분설이냐’ 하는 것이다.
소위 삼분설을 주장하는 학자의 주장은 인간의 영의 실존적 실체와, 혼의 실존적 실체와, 육(신체)의 실존적 실체를 볼 때 인정을 받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이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인간을 물질인 신체(소마)와 비 물질인 것 전부를 영으로 보고 물질인 신체와 비 물질인 영혼이 결합이 되어 두 실체가 하나의 결합체로 되니 논리적 분리는 가능하나 활동적 작용적으로 불가분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삼분설보다 이분설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삼분설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 우리는 영혼 마음 양심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혼은 무엇인가? 혼은 어떤 실체가 아니다. 혼을 실체로 보면 삼분설이 된다. 혼이라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붙일 수 있다. 활동의 영은 독립적 실체이다. 능력적이다.
二. 전인(全人)에 대한 구조.
사람이란 물론 개체로 보면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인 이 사람을 구조적으로 분석을 한다면 다양하게 분석이 된다.
다양하게 세밀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우선 이분으로 나누면 물질성과 비 물질성으로 나누게 된다.
물질적인 단일실체와 비 물질성을 복합적인 단일실체로 보게 되면 이분설이 된다.
1. 물질적 구조.
순전히 물질이다. 이것을 육신, 또는 신체(소마, 싹스)라 하는데, 그렇다면 물질인 이것은 단일성 물질이냐, 복합적 물질이냐? 이 소마 역시 복합물이다. 즉 피부 모발 골각 피 신경 이것을 구별하면 골각이 피부이거나 고기일 수 없고, 피가 모발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자연생명, 육의 욕구, 정욕, 식욕, 본능적인 것 등의 소마나 싹스에 속한, 즉 육에 속한 모든 것을 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분리한다고 하면 인간은 삼분설이 아니고 얼마든지 그 이상으로 나눌 수도 있다.
육이라 할 때에 어떤 철학자라도, 어떤 신학자라도 앞에서 말한 것들 중에 그 어떤 하나가 빠졌다고 해서 그것이 육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 비 물질적인 구조.
한 인간 속에는 물질뿐만이 아니고 비 물질적인 요소가 있다.
비 물질적인 것에는 명칭적으로 하나만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작용도 단일적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즉 프뉴마-영, 프슈케-혼, 칼디아-마음, 조애-생명, 스네데시아-양심 등이 있는데, 마음만 해도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보면 선한 마음이 있고, 양심도 선한 양심이 있고, 그 외에 비 물질성에는 혼 마음 생명 목숨 생각 정신 등이 있는데 이런 모든 것을 영을 포함해서 정신계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물질적인 여러 가지 복합적 구조로써 단일신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몸 육체 신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비 물질성 전부를 하나의 복합체로 보아서 정신이나 영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헬라철학과 일반신학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다만 이분설과 삼분설의 차이점은 ‘혼은 실체성이냐, 아니냐’ 하는데 있다.
※ 삼분설의 가능성, 그러나 아닌.(루터의 주장)
인간구조의 삼분설이 인간의 지식으로 보면 어떤 면에서는 가능하게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물질인 육과, 비 물질인 일반적인 지성적 감성적인 혼과, 또한 하나님과의 지식적 동작을 할 수 있는 영으로 볼 때 삼분설도 타당성이 있게 생각이 된다.
그리하여 삼분설로 보는 구분은,
① 물질인 육체(소마, 싹스): 신체에 대해서는 순 물질과, 물질 속에 들어 있는 물질로 동작되는 것을 말한다.
② 정신적인 면: 비 물질성인데, 이 비 물질성 중에는 일반적 지성적 감성 적 의지적인 면을 정신면이라 하고, 이것을 총칭해서 혼 이라고도 한다.
③ 영적인 면: 영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성적 지성적 의지적인 것을 말 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차원 높은 신과의 신령적 관계성 을 맺는 요소를 말하며, 그 관계성을 영적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삼분설의 타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3. 이분설에 대한 정확한 분리.
많은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인성의 구조에 대해 이분설을 주장한다.
여기서 단순히 이분설이라 할 때는 그 답이 맞으나 그 이분설을 구체적으로 분리하고 해석을 하게 되면 그 답이 틀리게 나올 수도 있다.
많은 철학자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물질적인 육과 비 물질적인 정신계 혹은 영으로 보고 그렇게 분리했다. 또한 종교적인 면에서의 주장은 순 물질은 물질로서의 종교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고, 비 물질성은 전부가 물질성과 달리 근원적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1) 물질적인 육.
물질은 전부가 육이다. 이 육 속에는 자연생명과 감각성과 본능성이 있다.
(2) 비 물질적인 요소.
비 물질적인 요소에는 양심과 이성이 있다. 물론 자연생명과 감각과 본능은 물질을 떠나 어떤 독립적인 실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논리적으로 학적으로는 분리할 수가 있으니 실체적으로 물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비 물질성인 양심과 이성은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냐? ‘양심=이성=양심’ 인가? 다시 말해서 ‘피부=골각=피부’ 인가?
물론 피부와 골각은 하나의 실체이다. 그런 것처럼 양심과 이성이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실체로 보지 않는다. 이성을 떠나서 양심의 작용은 불가능이다. 양심은 이성과 지식과 동반해서 작용한다.
(3) 실존적 독립적 인격적인 영.
이 영(프뉴마)은 실존적 독립적 인격적인 실체이다. 물론 인간의 육과 함께 있을 때는 육신과 결합체로 인격적으로 작용을 하나 이 영이 중생 했을 경우 독립적 작용을 한다. 예를 들면 중생한 사람의 이성과 몸이 범죄했을 때 중생된 영은 그 이성과 몸과 결합되어 유기적으로 그 죄행에 동화되지 않고 그 때는 영은 분명히 독립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다. 우리의 이성과 몸이 죄를 짓고 있을 때 중생된 영은 양심을 통하여 작용을 하고 있음을 우리가 현저히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분설의 정확한 분리는 영과 육으로의 분리이니 독립적인 실체로서 작용하는 영이 있고, 또 영을 무시하고 결합적 유기적인 활동의 작용을 하는 신체와 비 물질적인 모든 것은 다 육에 속하는 것이다. 이 전부를 육이라고 한다.(영을 제외한)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이요,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진 것이다. 영은 복합체가 아니고 진리와 영감으로 결합된 독립적 결합체이다. 육은 물질성과 비 물질성이 결합, 혹은 물질적 복합과 비 물질성의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 즉 육의 완전분리는 논리적 분리라기보다 실질적 분리로 본다.
다시 말해 기독자가 세상에 존재하다가 죽음의 선을 넘어 천국에 갈 때는 영만 간다. 영은 다 간다. 그리고 그 때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은 영이 아니다. 이성과 양심은 영이 아닌고로 죽음의 선을 넘어 천국에 갈 때에 이 이성도 양심도 천국에 못 간다. 이것은 육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다. 영이 허물과 죄로 죽을 때에 함께 죽지 않고, 영이 중생할 때에 동시에 완전히 중생하지 못하고, 또 영이 천국 갈 때에 함께 못 가는 것은 영이 아니다.
영은 비 물질성이지만 물질인 육체나 물질적인 육체보다 능력적으로 세밀적으로 더욱 민첩하게 민활하게 동작하는 실체이다. 이 영은 정신이나 마음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이 영은 독립적인 무형적 활동을 할 수 있고, 또한 인격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실체이다. 따라서 이 영이 인간의 육과(이성을 포함한) 결합체로 있을 때에 영의 활동성이 다른 물질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 이성을 통하지 않고 이성을 거쳐 육만을 통해서 타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방언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고전14:14)
보통은 이성을 통해서 영이 작용을 하지만 방언을 하는 경우에는 자기가 기도를 하는지, 무엇을 하는지를 느낄 수 없이 하기도 하고, 방언을 외부로 했지만 방언을 하면서 어떤 나라의 말로 하는지를 느낄 때가 있고, 어느 때에는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이 영은 이성과 육이 무 동작 상태에 있을 때에도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그 때는 우리 이성이 영과 결합이 되지 아니 했으므로 영의 동작을 심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잠잘 때 이성과 몸에 소속된 전부가 잠들고 있지만 영은 신체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
영의 활동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자연법이나 생명법이나 육의 자연법을 초월하기 때문에 영은 잠들지 않는다.
‘신앙이 잠들었다, 영이 잠들었다’ 하는 말은 영 자체가 잠이 들었다는 말이 아니고 이성이 영의 작용에로 연결이 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는 말이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런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반사작용을 한다. 이 영이 진리와 접선상태에 있으면 영은 진리대로 독립적으로 얼마든지 작용할 수 있다.
만일 영의 작용과 육의 작용을 동일작용으로 보고 육의 작용이 중단되면 영도 동시에 중단되는 것으로 보아서 육이 잠들 때에 영도 같이 잠든다고 보던가, 영육을 동일체로 보아서 영의 작용이 육의 작용이요, 육의 작용이 영의 작용이라고 하면 이 영은 육이 죽을 때에 동시에 죽어야 할 것이다. 또한 육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에는 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육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에는 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육이 죽어 무덤에 있는 동안에는 영도 무덤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영육이 결합체로 있을 때는 동시에 영육의 두 활동을 할 수는 없으나 영이 작용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육이 죽은 후에는 영은 언제든지 동작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비유(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영육이 동시에 신령계에 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육이 언제 부활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다.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도 육이 부활 승천해서 천국에 갔다는 말은 없다.
아브라함의 육도, 부자와 나사로의 육도 땅에 매장된 채 썩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영은 신령계에 가서 뜨거움도 목마름도 고통도 괴로움도 느낀다고 했으니 그 느낌은 육적 촉감적 신경적 감각성이 아닌 순전히 영성인 것이다. 이것이 곧 영의 작용이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기 전 한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신 말씀은 그 강도의 영육이 동시에 무덤에서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그 강도의 육체는 무덤에 있을 것이고 그 영은 비 작용 상태로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의 작용은 독립적 인격적 진리와 영감으로 유기적 신적 동작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일반적으로 영육을 논리적으로는 분리하지만 영의 작용은 분리를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움직임을 영육 동시작용으로 보고 있다.
● 영육 동시작용설.
① 영이 주체가 되어 육을 지배해서 동시작용.
② 육이 움직일 때에 영도 동시작용.
③ 영도 육도 피동 됨이 없이 서로 작용.
④ 영작용=육작용=영의 작용.(보수측)
예: 술은 육이 먹었느냐, 영이 먹었느냐?
영육 동체작용이냐, 영이 독립적 작용을 하느냐? 잠들었을 때 영도 잠을 자느냐? 꿈은 영의 작용으로 보기 힘들다.
하나님 다음으로 민첩한 것이 영이고, 영 다음에 민첩한 것이 정신이고, 그 다음이 이성이다.
일반학자들은 정신계와 영계를 같이 보고 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하는 것은 영을 보고 하는 말이다.
이성과 몸이 비 신앙적 작용을 하고 있을 때 꾸짖는 것이 영이라고 본다. 영과 육의 동체작용으로 보게 되면 육이 죽으면 영도 죽은 상태가 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남보다 먼저 부활했다는 말인가? 강도보고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한 이것은 몸도 승천한다는 말인가?
영은 독립적 작용을 한다. 진리와 결합되었을 때 진리와 유기적인 작용을 한다.
三. 타락한 영의 상태.
영이 타락했다는 말은 진리와의 연결에서 단절되었다는 말이다. 진리와 연결이 된 것은 곧 하나님과 연결이 된 것이다.
영이 하나님과 단절이 되면 영은 타락한 상태요 죽은 상태이다. 영이 하나님과 단절이 되면 죽은 상태이니 작용불능 상태로 돌아간다. 이 작용불능 상태란 영육이 결합체로 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 영의 작용의 능력을 주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영이 작용불능이니 이 영이 그 상태로 육과 결합되어 있는 기간동안에는 선행도 악행도 못하고 완전히 죽은 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이 영은 이성과 몸을 지배하지 못하고, 이성과 몸도 영의 지배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영이 이 물질 시공세상을 벗어나서는 이성과 몸과 별개로 단독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실 예는 나사로와 함께 있던 부자의 경우를 말할 수 있다.
타락한 영은 육과 결합체로 있을 동안만 죽은 상태다. 진리와 단절이 된 고로 하나님이 그를 붙잡고 활동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 영은 작용불능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이 완전 사망, 비 작용 상태에 있지만 인간이 여전히 인격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은 영의 작용에 의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순전히 이성과 몸의 작용이다. 이 때의 이성과 몸의 작용운동은 중생한 성도들이 이성과 몸이 영과 결합되어 있지 않는 상태와 똑같다.
※ 영은 독립적 작용을 한다. 진리와 접선되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작용을 한다. 진리와 끊어지면 타락한 상태요, 작용불능 상태이다.
불신자의 영은 죽은 상태이고, 미 중생자도 마찬가지이고, 중생을 한 자도 타락한 상태는 그 영이 작용불능 상태이다.(몸을 입고 있는 동안) 그리고 신령계에 들어가서는 독립적 작용을 한다.
四. 거듭난 영의 상태와 작용.
사람의 영이 거듭나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했다. 죄와 사망이라는 것은 비 물질성이니 이것을 색소나 요소로 말한다고 하면 ‘뒤집어썼다, 입었다, 포박되었다, 감염 염색되었다’고 할 수 있고, 요소로 보면 사망성 죄악성으로 부패되었다고 본다.
영을 중생시켜 살릴 때 단순히 죽은 영에다 새생명을 넣어서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 자체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고로 먼저 그 영을 살려야 한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의 대형(代刑)을 입혀 탈색을 시켜서 죄악성을 제거해 요소적으로 법적으로 무죄성으로 만들어 타락하기 이전의 본래의 상태로 하고, 그 다음에(시간적으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행(代行)을 입혀 염색을 시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지게 해야 한다. 이것을 의의 예복을 입히는 것이라고 하고, 신학적으로는 칭의라고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본질과 본성의 변화라고 한다. 이렇게 된 영은 타락하기 이전의 원상복구 상태가 아니고 그 이상인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된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 중생된 영이 소유하고 있는 새생명은
근원적으로는 신의 생명이요,
순서적으로는 새생명이요,
소유적으로는 영의 생명이요,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이요,
능력적으로는 불사성, 불변성으로 중생된 영이다.
이 영은 언제나 진리와 영감으로 결합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이 성령을 내주적 내재적 결합적 영감이라고도 한다. 이 내재적 영감은 영을 중생시킬 때 들어와서 이 영과 결합된 상태로 영원히 유지하게 된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계신다는 말이다.
이 중생된 영과 내 속에 들어 있는 내재적 영감의 결합성이란 중생된 그 영은 영 자체로 보면 살아난 영이요, 또 작용적으로 보면 생명과 결합체(롬8:16)로 작용한다는 말로써 내주해 계시는 성령이 불휴적으로 작용을 하신다면 영도 불휴의 작용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결합의 주격은 성령이다. 주격자이신 성령이 주격적 작용을 하시고, 나의 중생된 영은 성령의 작용에 의하여 유기적 결합적 동화적 작용을 하는데 이성이나 육이 이 영의 동작에 동행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 자체의 작용이 중단됨은 없다.
영의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말은 영 자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이성과 몸이 중생된 영과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그것이 중단이라는 말이다. 영은 생명과 결합체로 있기 때문에 어떤 선행의 행동이나 생명운동을 하다가 중단하는 일은 없다. 계속적이다. 어떤 사람이 의행을, 신행을, 생명운동을 중단하고 있는 것은 영이 중단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과 몸이 중단하는 것이다.
만일 이 중단을 영이 중단하는 것이라고 한다고 하면 곧 성령의 활동이 중단한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된다면 생명운동을 중단한 죄에 대한 책임은 몸이나 이성이나 영이 아니라 성령이 져야 한다.
중생된 영은 독립적 인격적으로 언제든지 활동하며, 인간의 몸 안에 있을 때나 몸을 떠났을 때나 얼마든지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몸이 죽기 전에는 영이 그 몸을 떠나 외계에서 독립적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육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몸 자체의 단독적 작용은 구원이 아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사망계에 있는 것을 생명계로 끌어들이는 것을 말하는데 영이 자체적으로 단독적인 활동을 영원히 해 보아야 이성과 몸에 작용을 주지 못하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이란 영의 작용이 이성과 몸에 건너와 이성과 몸에 접선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여질 때 되는 것이다.
※ 영은 실존체 독립체이다. 진리와 접선되었을 때만 동작한다. 동작불능 상태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이 상태는 이질적인고로 하나님의 새생명을 거기다 넣을 수는 없다.
대형을 입히는 것은 무죄상태로 만드는 것이고, 대행을 입히는 것은 칭으로써 이는 의의 예복을 입혀 놓는 것이다.
고전3:16 - 중생된 영이 나의 속에 내주해 계신다. 영은 성령과 결합체이다. 주격자는 성령이다. 내 영은 성령과 유기적 피동성 동화성을 가지고 있다.
중생된 영은 진리와 영감이 하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요소는 전혀 없다. 왜? 죄악성을 완전히 탈색시킨고로! 말씀대로 살기 싫어하고, 순종하기 싫어하는 것은 영이 아니고 이질성이다. 찌꺼기 그것이 남아 있어서 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완전 탈색은 대형이다. 여기서 또 대행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입혀 놓으면 하나님이 하고 싶으면 나도 하고 싶고, 하나님이 하기 싫으면 나도 하기 싫은 것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중생된 영이다.
하나님은 피로가 없다. 생명과 영은 계속 돌아간다. 피곤을 느끼는 것은 이성이다. 영이 활동을 중단한다면 성령이 책임을 져야 한다.
영이 잠들었다는 말은 성령의 활동이 이성과 몸에 건너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것은 곧 이성과 몸이 영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것을 잡고 싸워야 한다.
이성, 몸 + 영 = 이성과 몸이 성화돼 나가고,
영 + 이성, 몸 = 영이 성장돼 나간다.
제八절. 도덕적 성질.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음받은 존재요, 이 인간에게는 도덕적 성질이 있다. 물론 이 도덕적 성질을 신의 성품이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신의 성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속성을 12속성으로 볼 때 공유적인 속성(8속성)과 비 공유적인 속성(4속성)이 있는데 이 속성을 하나님의 인격성이라고 한다.
이 하나님의 인격성 중에는 인간에게 전달된 인격, 즉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을 때 받은 인격성이 있으니 곧 8속성이다. 이 8속성은 다음과 같으니 ‘지혜 지식 선 사랑 거룩 진실 의 주권’ 인데 이 전부를 도덕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 인격성을 삼분해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으로 나눈다. 이것을 공유적인 속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 공유적인 속성은 ‘신의 자존성 영원성 완전성 단일성’으로 이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있는 절대적인 속성이다.
공유적인 속성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없는 하나님께서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 도덕성을 넣어 주셨는데 우리 인간이 가진 이 도덕성은 하나님의 자존적 영원적 완전적 무한적 단일적 절대적인 도덕성은 아니다. 하나님의 도덕성은 원형적인 도덕성이요, 우리 인간의 도덕성은 모형적인 도덕성이다. 이 모형적인 도덕성은 아무리 성결하고 깨끗해도 모형은 모형이지 원형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신령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을 안 했다 할지라도 본래적인 인간의 그 도덕성을 가지고는 그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도덕성은 인적으로는(타락하지 않았을 때) 완전한 도덕성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형적인 도덕성이지 원형적 도덕성은 아닌고로 이 인간의 도덕성은 하나님의 완전적인 도덕성에 비하면 이는 불완전한 도덕성이기 때문에 이 도덕성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진 도덕성이 인적인 도덕성이냐, 신적인 도덕성이냐? 신적인 도덕성은 만인에게 본래적으로 계시되어 있는 것이냐, 점차적 수락적이냐?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진 도덕성이 인적인 도덕성이라면 이 도덕성은 시간 따라 변하고, 지방 따라 변하고, 민족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이 도덕적 척도는 인류간에 따라 일정하지 못하니 어떻게 이 도덕적 척도를 기준을 한단 말인가?
※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도덕적인 존재이다. 도덕성은 인격성인데 인격성 전체가 도덕성이 아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타락을 했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간다?
그렇다면 만일 타락을 안한 상태로 죽음과 부활이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며, 천국에서 살 수 있는가? 갈 수 없는 조건은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단회적인 구속성을 입고 신의 도덕성을 나의 도덕성으로 입어 천국에 가는 것이다. 단어 하나가 구원을 좌우한다.
一. 양심.(συνείδησις-스네이데시스)
인간은 도덕적인 성질의 존재요,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양심이 있는 존재이다.
그러면 사람 속의 양심이란 무엇이냐? 원어는 συνείδησις(스네이데시스)라 한다. 혹 이것을 우리말로는 어진 마음이라는 뜻인데, 학자들은 ‘양심은 사람의 도덕적 생활의 근본적 가증’ 이라고 말한다. 그런고로 혹자들은 양심을 독립적 작용과 활동을 하는 기관으로 보아서 양심의 척도대로 사는 것을 선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은 죄악성이고, 양심의 인정을 받는 것은 선으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 양심은 그 지방, 그 시대, 그 민족에 따라,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척도에 의하여 분열과 대립성을 일으키기도 한다.
● 불파의 오류.(지식이 깨지지 않고)
양심은 완전히 파괴를 당하거나 없어지지 않지만 때로는 이 양심이 무디거나 흐려진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양심은 더러워질 수 있고, 화인 맞을 수 있다. 그런고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대형, 대행)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완전적인 도덕성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도덕적 성질은 모형적인 도덕성으로 원형적 도덕성을 입을 수 있는 바탕이라는 말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간으로 도덕적 완전자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진리와 영감으로, 또는 모든 존재와 사건과 환경을 동원시켜 단회적 구원사역이나 점차적인 중복적 구원사역의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 양심과 하나님과의 관계: 일반종교는 양심의 작용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양심은 정(正)과 사(私), 당위와 부당위의 분별로 도덕적 판단을 행하며, 당위와 부당위의 실천에 대립하는 명령을 발하므로 영혼의 도덕적 법정을 전개한다. 그렇지만 이 양심은 단독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그런고로 양심이 단독적으로 정과 사, 당위와 부당위에 대하여 바른 지식이 없이는 판단할 수 없고, 다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최고적인 기존지식에 의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정과 사, 당위와 부당위에 대한 도덕적 행동을 실천하도록 명령하니 만일 지식이 바르지 못할 때는 정을 사라고 할 것이고, 사를 정이라 할 것이니 이 양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기관이라고 단정을 짓기는 어렵다. 잘못하면 이 양심이 하나님과 적대관계를 맺게 하는 수도 있다.
※ AA하지박사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도덕적 문제들이 의지의 상태, 즉 동작과 양심에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의 관계에 관여하는 의지와 양심은 사람의 탁월한 도덕적 성질의 기초이다. 그러나 이 인적 영혼의 심력들은 각자가 모든 도덕적 구별과의 관계에서 운용된다는 것도 진정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① 지능적 인격은 인지와 판단에서.
② 감정적인 것은 유쾌한 감상 그것의 반대에서.
③ 의지는 선택 혹 거절함과 행동함에서 운용된다.
스트롱 역시 하지박사와 같은 뜻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능력을 지성 감정 의지들로 보고, 여기서 도덕적 행동의 실현의 큰 능력의 기관을 양심이라고 본다.
도덕적 성질을 가진 것이 인간이다.
① 지능적 감정적 의지적.(AA하지)
② 지성 감정 의지.(스트롱)
1. 동반한 지식.
양심은 지식이 없이 독립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양심은 지식과 동반해서 움직이고 있다. 즉 양심은 어떤 법칙에 의해서, 다시 말해 율법이나 도덕적 법적 지식에 의해서 작용하고 있다.
※ 양심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 본래적으로 양심에 하나님의 도덕법이 계시되어 있느냐, 아니면 수락적이냐, 아니면 외부로부터 받아야 하느냐?
각자가 양심대로 정한다면 양심의 기준이 어디냐?
2. 도덕적 분별과 대립.
양심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대립성을 일으킨다고 본다.
양심은 도덕성을 어겼을 때 대립성을 일으키지만 그러나 양심이 파멸될 수는 없다.
(1) 양심의 오류성.
양심은 유오할 수 있다. 우리는 양심이 받아들인 표준에 의하여 판단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따라서 때로는 양심이 잘못될 수 있다. 사람이 공의를 버리고 나갈 때 양심이 더러워지고 잘못되기도 하는 것이다.
(2) 양심은 독립적 작용의 실체가 아니다.
양심은 자기의 최고 지식의 지배를 받는 기관이다. 그런데 만일 인간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양심을 독자적인 절대 정확성을 가진 독립적 작용의 실체로 알고 일생동안 그 양심의 지배를 받고 살면서 자신은 양심의 가책이 없이 옳게 산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큰일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개개인의 양심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갑의 양심의 작용성과 을의 양심의 작용성과는 각자의 지식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건에 있어서도 양심의 작용도 달라진다. 그런고로 ‘양심시대에는 사람들이 양심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말은 부당하다.
물론 우리는 양심대로 살면서 양심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양심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전부는 심판거리다. 자기의 양심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하나님 앞에 심판거리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종별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맞았으나 자체적 자원적 활동이 아닌고로 이는 구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자는 양심도 지켜야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지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리지식이 사(私)가 되면 아무리 자기가 양심껏 살았다고 해도 구원은 될 수 없다.
모든 개개인의 양심이 각각의 척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각자 가진 최고의 지식이 단일지식일 때는 양심도 일치한 작용을 하게 된다. 그런고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리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 양심은 지식에 따라서 달라진다. 지식이 바꾸어지면 양심은 바꾸어진다. 주일을 지키지 않고도 양심에 가책을 안 받는 사람이 있다. 받을 것을 안 받고, 안 받을 것을 받는 양심이 있다. 그런고로 양심을 지키기에 앞서서 진리지식을 바로 배워야 한다. 예: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의 사진을 앞에 놓고 그 사진을 밟고 지나가면 살리고, 안 밟으면 죽인다고 할 때 진리지식을 알아야 이 시험에서 이긴다.
3. 신체와 영의 관계.
사람은 존재와 영과의 두 요소로 결합된 존재인데, 이 두 요소의 동작이 일상생활에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교계는 각이한 이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있다.
1) 일원론.
이 일원론은 영육이 분리가 없이 물질적인 육의 단독 혹은 단면적인 동작으로 본다. 마치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 그 과일 속에 어떤 영적 요소가 내재해 나뭇가지에게 땅으로 떨어지자고 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즉 물질인 과일이 비 물질적인 요소와의 상호관계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뭇가지에서 과일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동작도 그렇게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
2) 유물론.(有物論)
이 유물론은 기초적 실체는 물질이요, 영혼은 물질의 산물이라고 본다. 영혼은 물질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 영혼은 물질의 동작에 피동적 동화적 동작으로 본다.
3) 유심론.(有心論)
기초적 실체는 심(心)이요, 물질은 심으로부터 인출된다. 그러므로 육신의 동작은 절대적으로 심의 동작에 의존적이요 동화적으로 본다.
4) 유영론.(有靈論)
기초적 실체는 영으로 이 영이 물질이라고 칭하는 것을 자체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모든 것은 영으로부터 인출된 것이요, 이 영으로부터 인출된 물심은 영에 의하여 동작한다고 본다.
이 이론이 일반적으로는 상당히 타당성을 가진 것 같으나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하는 말과는 배치가 되니 만일 물심이 영의 산물이요 인출물이라고 하면 영이 물심의 창조자라는 말이 되는 것이고, 또 영이 죽었다는 말은 성립이 될 수가 없게 된다.
물심의 작용이 영에 의한 피동적이요 동화적이라고 하면 그 주체성인 영이 죽으면 물심의 동작도 죽어야 할 것이다.
※ 이 주장은 영이 창조자가 된다. 영이 심과 물질을 낳았다? 그렇다면 주체성인 영이 죽으면 어떻게 심과 물질이 움직이겠느냐?
5) 이원론.
이원론에는 두 가지 설이 있으니 본질적 이원론과 일반적 이원론이 있다.
(1) 본질적 이원론.
이 본질적 이원론은 영은 영대로 독립적으로 생겨졌고, 육은 육대로 독립적으로 생겨졌으니 각각 근원 혹은 기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렇던 것이 하나로 결합이 되어 한 사람을 이루고 있다가 또 분리돼서 갑의 영이 을의 육과 결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2) 일반적 이원론.
우리가 앞서서 헬라철학자들의 이원론적인 주장을 고찰해 보았다. 그 헬라철학자들의 이원론 사상을 보면 플레토의 이원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 데카르트의 이원론 등이 있다.
이들의 이원론 사상은 물질의 동작이 심에 미치고, 심의 동작이 물질에 미친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병행론, 기회론도 있다. 그리고 예설 조화론도 있다. 이 예설 조화론은 심의 동작이 물질에 미치지 않고, 동작이 심에 미치지 않고 각각 독립적 동작이 동시성을 이루어 동작한다고 하는 것이다.
※ 심이 물질을 지배치 않고, 물질이 심을 지배치 않고 각각 독립적으로 동시에 동작한다고. 하나님이 각각을 동시에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안 보고 안 듣고 어떻게 마음의 움직임이 있겠느냐? 그러니 몸이 마음을 움직였다고 하는 것이다.
(3) 상관론.(실체론적 이원론)
실체론적 이원론은 존재와 영혼은 서로 다른 실체들로서 교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 교호작용의 방식은 인적 고사를 회피하여 우리에게 신비스러움을 남겨주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결합적 유기적 관계성을 보아야 한다.
● 결합적 유기적 관계성.
우리가 비 물질인 영과 물질인 육을 엄격히 분석하면 이원론임이 틀림이 없다. 즉 요소적으로는 물질적 요소인 신체와, 비 물질적 요소인 영이니 논리적 실제적으로는 분리가 된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도 영을 창조하시고 물질인 육체는 흙으로 지었다고 말했다. 흙으로 육체를 지으셨다는 것은 일원론적 입장처럼 물질인 흙을 가지고 비 물질인 영을 지었다는 말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영이란 하나님께서 코에 불어넣은 생기(기운 바람 숨)이니 분명히 영은 비 물질성이라고 본다. 그런고로 이런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실체론적으로 이원론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영육은 일인격의 결합체이지 본질적인 이원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 ① 사람을 단일요소로 보는 자가 있고,
② 신체는 흙을 원료로 해서 지었으니 그 흙을 가지고 영도 지었느냐?
4. 영이 인격의 주체성.
인간은 분명히 비 물질적인 영성과, 영적 실체성과, 물질적인 육체로 결합된 존재인데 영이 단일인격의 주체성임은 틀림이 없다. 이 주체성은 신의 상대적 주체성이요, 목적 주체성이요, 계약적 주체성이다.
※ 물질인 육과 비 물질성인 영과의 결합성을 누구든지 부인치 못한다.
영이 서로 바꾸어져 들어 갈 수 있다면 나중에 죽은 후 정신없는 영이 부활시에 아무나의 몸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은 있을 수 없다.
인격의 주체성은 상대적 주체성이다. 곧 영이다. 죄를 지었을 때 고깃덩어리를 보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약적 상대적 목적적 조건도 전부 고깃덩이가 아닌 영이다.
5. 이성과 신체와 결합된 육체.
우리 인간을 영을 완전히 분리시켜 놓은 채 육체만 본다고 하더라도 육체 속에는 비 물질성인 이성과 육과의 신비로운 결합체를 이루고 있다. 어떤 학자들의 말처럼 물질이 심의 동작에 동화적 작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물질의 영향을 받아 심적 충동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니 심이 물질의 동작에 의하여 동화작용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결합은 신비한 결합이다. 물질인 신체 속에는 감각성이 있고 본능성이 있어서 감각과 본능을 존재라고 보고, ‘신체물질의 동작과 심의 두 동작 중에 어떤 동작이 선행적 동작이냐’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이 동작을 결합적 동작으로 보고 물질의 감각성이 이성에 의욕적 충동성을 넣어준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성의지의 결단이 물질을 동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 관계성을 가지고 심은 심대로 자기 위치, 자기 분야에서 물질과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고, 물질은 물질의 작용을 다하면서 심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6. 비 물질적 육에 속하는 이성의 절대 자유성.
우리 인간은 물질적인 요소와 비 물질적인 요소가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비 물질성은 전부 영으로 보고 물질성만을 육이라고 단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 물질성인 이성은 분명히 비 물질성이지만 이것을 영으로 볼 수는 없다. 이것을 비 물질적인 육이라고 한다.
비 물질적인 육이라는 용어는 사전학적 용어학적으로는 타당치 않으나 영과 육을 분리할 때는 이성을 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그러나 혹 학자들 중에는 이성을 이성적 영이라고 하나 이성을 영이라고 하면 많은 난제를 피할 수가 없다. 이성은 의지 마음 사상 생각 등등인데 이것은 분명히 비 물질성임이 틀림은 없으나 영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 중생자의 영은 죽어가고 있는 영이 아니라 ‘죽었던(과거완료) 자라’ 했으니(엡2:1) 이 죽었다는 말은 육체존재를 말함도 아니요, 육에 소속된 것을 말함도 아닌 영을 지시한 것이다. 즉 미 중생자들의 영은 완전히 죽었던 것이다.
죽었다는 말은 작용불능, 동작불능이라는 말인데 실질적으로 미 중생자들은 그 영의 작용은 완전히 죽은 상태이니 동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 중생자들도 얼마든지 이성의 작용을 하고 있다. 의지 사고 비판 결정 선택 등은 다 이성의 작용이다. 만일 이성이 영이라면 영이 죽은 자가 어떻게 이러한 활동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런고로 우리 인간은 이성과 육체와, 즉 물질적인 육체와 비 물질적인 육체와의 결합된 결합체로 보고, 또 영과 육체와도 결합된 결합체로 볼 수 있다.
7. 인격의 주체성인 영이 살았을 경우.(중생한 경우)
이 이성은 독립적 활동적인 실체는 못 된다. 이 이성은 언제나 의존성을 가지니 의존적인 실체이다. 의존적인 실체인 이 이성은 중생된, 혹은 살아있는 영에게 의존하여 동작, 작용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영에게 의존하지 않고 다른 어떤 요소에게 의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성이 영에게 의존하던지, 안 하던지 하는 것은 절대 자유성이 보장되어 있다.
전 인격은 한 사람 일인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요소는 물질과 비 물질이 결합되어 있고, 인격의 주체성은 단일성이다. 이 이성은 절대적 의존자이며 자유성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런고로 이 결합성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 영이 육에서 나왔느냐, 육이 영에서 나왔느냐, 아니면 동시냐?
하나님께서 영과 육을 지었는데 육은 흙이다. 그렇다면 영은 무엇일까? 육체를 지어놓고 영을 집어넣었는가? 코에 입김을 불어넣었으니 이것이 영인가?
‘입김을 불어넣었다’ 하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일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피조물인가?
‘중생된 영이 범죄한다, 안 한다’ 하는 변론이 되면 먼저 ‘이성이 육이냐, 영이냐’를 따질 것이다.
이성을 육에 결합시켜 말하게 되면 중생한 영도 범죄한다는 말이 된다. 이성을 영에 붙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 하는 이것이 문제가 된다.
중생치 못한 사람은 영이 죽었다. 여기에다 이성까지 포함시키면 이성도 죽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러나 지금 미 중생자도 이성은 작용을 한다.
이성과 영을 분리하라! 이성은 절대적인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
二. 의지(καρδία-마음).
의지는 우리가 흔히 쓰는 이성의 일부분이다. 넓은 의미에서 종합적인 의미로 말할 때는 이성이라 하는데 이 의지란 이성의 한 부분을 말한다. 여기서 의지라고 하는 것을 단순한 의지 면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하고 생각해야 된다.
인간의 의지라, 이성이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마음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음을 부정적인 마음과 긍정적인 마음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건을 두고 한 면으로는 긍정적인 의욕과 결정이 생기는가 하면, 반면에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기도 하니 이렇게 볼 때는 마음이 둘인 것 같기도 같다.
그러면 이 의지라고 하는 의지는 무엇인가? 인간은 의지적인 이성적인 존재임은 틀림이 없으나 이 의지의 위치는 어디에 있으며, 의지는 둘인가, 하나인가? 어떻게 1인 속에 두 의지가 있을 수 있느냐?
의지가 둘이라고 할 때는 분명히 무형적인 인간은 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 단일 육체이면 그를 두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한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렇다면 단일 육에 단일 의지인데 어찌하여 단일 사건에 있어서 의지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어지게 되느냐? 이것을 흔히 선심과 악심으로 표현을 하는데 어떤 사건에 있어서 선적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의욕은 선심, 그 사건의 선악을 구별치 않고 단순한 자기의 이해타산으로만 처리하려고 할 때는 악심이라고 한다.
그러면 단일 인간 속에 선심 따로, 악심이 따로 있는 것인지, 또한 단일 의지가 선적 작용과 악적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좀 구별하기 힘들다.
※ 양심만 쓰면 구원인가? 마음이 영이고, 영이 마음인가? 진리지식 버리면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다.
화인: 불에 달군 쇠도장으로 양이나 소에게 찍는다. 신경마비, 감각이 없다.
‘우상이다, 아니다’ 할 때 양심은 진리지식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니 진리지식을 버리면 우상을 섬겨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우상의 제물이라도 기도하고 먹으면 괜찮다고 가르침 받으면 먹게 된다. ‘음행, 목매어 죽은 것, 우상제물 먹지 말 것’ 먹지 말라는 지식을 가진 자와, 이 진리지식이 없는 자와 그 양심의 작용은 다르다. 양심은 서로 같은데 지식이 다르다.
자기 양심의 가책을 안 받고 살아도 전부 사망일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을 안 받으려면 진리지식을 빼버리면 된다.
의지는 몇 개인가? 악한 마음도 있고, 착한 마음도 있나? 양심은 자기 속의 최고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의지 이성 마음은 동시에 각각 작용을 하나 실체는 하나다. 집에 호주(戶主)가 여럿이 있다. ‘아버지, 목사, 여보‘ 그러나 하나다.
우리 인간 속에 이성이 있고, 또 그 속에 타락성 혹은 신학적으로 부패성이 있고, 불신자나 미 중생자일 경우 하나님이 인간으로 지었을 때 받은 본래성이 있는데 이 본래성은 인간의 타락성이나 부패성과는 대립적이다.
인간이 중생했을 경우에는 그 사람 속에 부패성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중생된 영성이 있는데 성경에는 부패성은 옛사람, 영성은 새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부패성이나 영성은 의지나 이성이 아니다. 의지나 이성은 활동적인 성격이요 자유적인 활동적인 실체이니 이 이성은 영성이나 부패성에게 의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이 부패성과 결합이 됐을 때는 도덕적 종교적 율법적으로 비 선적인 결정이 되고, 이 이성이 중생된 영성(중생자)에게 접선되어 피동될 때는 도덕적 종교적 선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선의 결정과 비 선의 결정은 이성이 한다. 그러나 이 이성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리고 이 이성이 교체되는 교체성은 어떻게 신속한지 어떤 때는 꼭 동시작용인 것처럼 느껴지니 이 때는 이성이 단일성으로 보이지 않고 둘로 보여지기도 한다.
본래성에 이성이 접선하면 어떤 결정체가 나온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라’ - 이성에게 말하는 것이다.
1. 양론의 대립.
결정론과 비 결정론이 있는데 결정론과 비 결정론은 의지를 단일 의지로 보되 ‘의지의 자유성이냐, 비 자유성이냐’ 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1) 결정론.
이 결정론은 이성 동기 선사(善事) 등등 다른 요소의 결의에 의하여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2) 비 결정론.
이 비 결정론은 인간의 결의는 자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혹 학자들 중에는 결정론과 비 결정론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의 결정이 타의 어떤 영향이 없이 결정된다고 본다. 또 혹자는 타의 영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도 한다.
이렇게 되면 결정론과 비 결정론은 결국은 죄책임 문제로 돌아간다.
※ 결정론은 벌써 그렇게 되겠금 되었다는 것. 비 결정론은 인간의 자발적이라는 것.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죄책이 없고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성을 부인하는 자는: 인간의 절대 자유성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
의지의 자유성을 주장하는 자는: 인간의 절대 자유성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
마음은 하나지만 요소는 둘이다.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당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으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사정없이 때려부쉈더라면 신나게 소원이 이루어질 터인데 붙잡혀가니 맥이 풀렸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옳으니까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고 능력이 나타나니까 따르고 있었다. 3일만에 부활하니까 그 때서야 깨달았다.
2. 인간의 의지와 자유행동.
과연 인간의 의지란 자유하는 것인가? 또한 자유행동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자유하는 행동자로 구성하는 것은 비 결정론에 의하면 의지의 자아 결정력이요, 결정론에 의하면 영혼의 자아 결정론이다. 비 결정론은 말하기를 ‘우리의 결의의 동작들은 원인이 없는 현상이니 오성의 판단과 성향들의 정서에 모든 예비적 조건들이 다 성취된 후에라도 의지는 평형상태로 남아 있어 선택의 행위는 의지의 자아결정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지 영혼의 예비적 상태들에 의하지 않으므로 내 속에서의 결의들은 우발적이라’고 한다. 결정론은 의지의 모든 동작은 영혼 자신의 자발에서 자원하는 것으로 본다.
※ 결정론은 영혼에서 움직여진다는 것이고, 비 결정론은 의지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
결정론은 영의 결정이 의지에서라고 하니 영의 완전 사(死)를 무시한다. 영이 죽어도 활동은 하니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과만 끊어졌지 다른 모든 작용은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성을 하나의 실체성으로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 자유권이 보장되어 있는데 이 자유는 육체의 자유성이냐, 영의 자유성이냐?
인간은 물론 영육이 결합된 존재이다. 결합된 존재로서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속성이요 인격성으로 독립적으로 존재가 가능한 실체성이다. 즉 육과 결합체로서도 존재할 수 있으나 육을 떠나서도 독립적으로 인격적으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실체성이다.
육이 자연생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 영과 육은 결합체로 있으며, 타락 전 인간은 그 영이 인간의 인격의 주체성으로 있다. 인격의 주체성인 이 영이 모든 육체에 유기적 자유적 결합적 지배관계로 있다.
이 자유성이란 영과 육의 자유성이니 타락 전에 인간의 영은 신의 능력에 속박 성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절대 자유성이 보장되어 있었으니 이 자유성으로 인해 타락을 했다.
또 인간의 절대 자유성이란 이성의 자유성이니 이성은 독립적 단독적 활동성적인 존재가 아니고 의존적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기관이다. 이 의존이란 인간의 본래성에 의존하던가, 타락적 부패성에 의존하던가 무엇인가에 의존해서 활동하는 기관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성은 영에게 의존할 수 있는 자유성과, 육(싹스)에게 의존할 수 있는 자유성이 보장된다. 영(새사람)에게 의존한 신체는 생명적 구원적 영적 결의 결정 행동이 나오고, 옛사람(부패성)에게 의존하게 되면 사망적 심판적 악적인 결의 결정이 나오게 된다.
※ 유심론은 마음에 의해서 영이 생겼다.
유물론은 육에 의해서 영이 생겼다.
유영론은 영에 의해서 물질이 생겼다.
예설 조화론은 영육이 각각 행동자이면서 동시에 의논 없이 활동한다.
자유성은 이성이냐, 영이냐, 육이냐? 영이 자유성이라면 영이 죽으면 몸도 죽어야 한다. 이성은 절대 자유성이면서 절대 의존성이다.
三. 도덕적 책임.
도덕적 책임의 구성에 의지의 자유행동이 근본적 요인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도덕적 책임을 지려면 인간의지의 절대적인 자유권과 지배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고는 이 도덕적 책임은 질 수 없는 것이다.
① 결정론은 의지가 도덕적 책임을 안 진다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② 비 결정론은 말하기를 도덕적 책임을 도의적으로 의지가 져야 된다고 한다.
이 논리들은 약간의 모순성이 있다. 결정의 절대적인 자유성이 없는데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주격자로서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말이니 부당하다.
그러면 육신이 행동한 것을 누가 책임을 지느냐?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이원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할지?
그러나 병행론적 기회론이나 예설 조화론적 입장에서 보면 육은 육대로, 영은 영대로 각각 책임을 진다고 한다. 그렇게 보게 되면 죄책임은 하나님에게 돌아 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들은 우리 인간이 행동한 행위에 대해서 그 책임성이 하나님에게 돌아간다고 단정을 짓지 못하고 육이 행동한 것은 영이 도의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보고 있다.
1. 도덕적 책임을 위한 선악의 구별.
우리는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논하기 전에 선악에 대한 구별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선은 무엇이 선이며, 악은 무엇이 악인가? 선과 악의 판단을 누가 하며,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다 두느냐?
물론 죄와 선, 악과 의에 대한 그 척도가 각 나라 민족 지방 종족 시대에 따라 법률적인 척도나, 도덕률에 의한 척도나, 또한 개개인의 양심율에 따른 척도나, 또 각 종교의 종교율에 의한 척도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그 국가의 법률적으로는 정죄가 되지만 종교율에서는 선이 되는 것도 있고, 또 국가법률에는 죄가 되지 않으나 도덕률에는 죄가 되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선악의 척도는 무엇이며, 그 판단은 누가 하느냐? 선악의 척도는 하나님이요, 선악의 판단은 하나님만 내리게 되어 있다. 즉 본질과 본성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이질적인 것은 전부가 죄요 불의이다.
선은 근원적 자체적으로, 본질과 본성적으로 하나님 한 분뿐이다. 활동적인 선악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 선이요,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것은 전부가 죄요 사망이다. 즉 하나님 당신의 마음에 들고 당신이 좋은 것은 선이요, 하나님 당신에게 안 좋은 것은 전부가 악이다.
※ ‘잘못해서 벌을 준다’ 할 때 죄와 악을 전제하고 전개하는데 그보다는 먼저 선과 악을 구별해야 한다. 죄악을 알아야 책임을 지우게 된다.
선과 악의 척도는 무엇이며, 이 판단은 누가 하느냐?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이것(진리법)은 최고의 법이다.
예;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으로→ 고등법원에서 대법원으로.
국가법에는 죄이지만 도덕법에는 죄가 아닌 것이 있다. 예: 병든 어머니를 위한 도둑질. 우선 어머니부터 살려놓으려고 한 이것을 가지고 여러 종교법에서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 그러니 어느 법이 척도가 되겠느냐?
우리는 먼저 그 사람이 가지는 척도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는 버려 두고 하나는 데려가고’ - 시간이 같고, 장소가 같고, 활동이 같고, 일의 양이 같은데 왜 한 사람은 버려 두고, 한 사람은 데려갔느냐? 일 잘 하고 열심히 한 사람을 천국에 데려간다는 말은 없다.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하나님께 붙잡혀 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인고로 이것은 믿음이요 선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은 모두 죄이다.
일반적으로 종별과 방편에서 선악을 찾는다 - 주관적 능동.
하나님은 근원에서 선악을 찾는다 - 피동적 능동.
절대적 피동적 자유성은 이성이다.
하나님과의 결합적 상태란 중생된 영이 진리와 영감에 유기적으로 더불어(결합) 할 때이다. 이 때는 주격이 영이다.
롬8:16 ‘성령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 성령과 중생된 영과의 결합체.
영→ 이성→ 몸→ 활동으로 된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표면상 육이 했지만 생명운동이다. 이 관계가 아닌 영에게 지배를 받지 않은 활동은 악이요 죄이다.
2. 일반적인 선악의 개념.
일반적으로는 선악을 외모와 종별과 방편을 보고 말한다. 그 방편이 비 법률적일 때는 국법에 의하여 정죄하고, 또 그 종별이 비 도덕적일 때는 도덕률에 의하여 정죄한다. 또한 일반적으로는 일반공중이 정죄를 할 때는 그것이 죄악시되고, 또 공중에 의하여 선시할 때는 선으로 인정을 한다. 일반적으로는 활동과 결정과 사리를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게 된다.
3. 종교적 도덕적인 관념.
종교인과 일반도덕은 선악의 판단을 종교율과 도덕률에 의하여 한다. 그러나 이 종교율과 도덕률은 인간세상에서 일정하지를 못하다. 각 종교마다 갑의 종교율과 을의 종교율이 일치한 것도 있지만 대립적인 것도 적지 않다. 만일에 이러한 종교율에 의하여 선악을 구별한다면 어느 종교율을 기준으로 해서 선악을 구별하나?
많은 종교율은 각치성이요 또 대립성이기도 하다. 불교의 종교율과 기독교의 종교율은 완전 대립이다. 그런고로 종교율에 의한 선악의 구별은 심히 어렵다. 도덕적인 견해도 마찬가지다. 도덕률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도덕률은 변하고, 인류에 따라 지방에 따라 도덕률은 변하고 있으니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지방의 도덕률에 맞추어야 하는 것인지? 그런고로 인간의 선악은 도덕적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종교율과 일반적 도덕률은 전부가 다 유기적인 율이요 인본적인 율이다.
선악을 상대성적으로 볼 때 어떤 한 개인에게는 선이 되지만 타에게 그 사실이 적용될 때는 선이 아닌 악이 될 때도 있다. 또 어떤 개인에게는 선이 되지만 전체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으로는 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선악이라는 선악은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법에 판결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는 인간의 선악이란 최고적인 하나님 앞에서의 선악을 말하는 것이다.
※ 세상사람들은 종별을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한다.
이 세상에는 애매한 것이 많다. 지방법원에서는 ‘선이다’ 하고, 대법원에서는 ‘악이다’ 하고.
종교율은 많다. 기독교 불교 유교 등등.
율을 찾기 전에 죄부터 찾자. 모르면 평생 죄짓고도 모른다.
4. 기독교적 성경적 견해.
이 기독교적 성경적 견해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견해와 특수적인 견해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고집하기를 성경의 법대로 된 것은 선이요, 성경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성경적인 면에서 애매한 것이 많다. 구약도 성경이요, 신약도 성경이라고 볼 때 신구약 성경에 일치되지 않는 부분도 간혹 있다. 이런 경우에 구약의 법을 따르느냐, 신약의 법을 따르느냐? 구약적 척도로는 정죄가 되지만 신약의 척도에서는 죄가 안 되는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떤 성경을 정확한 척도로 삼아야 하느냐?
기독교 신자들은 이럴 경우 종교회의에서 결의된 것을 절대적인 척도시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인적 결의이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맞는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교훈이 절대라고 본다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그들 나름대로 철저하게 성경대로(구약) 법을 지키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표면적 활동적으로 법을 철저하게 지켜왔지만 그들의 준법행위가 그 어느 것 하나도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선이라고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선악의 구별이란 심히 어려운 것이다.
※ ‘머리를 깎아라, 깍지 말라’ 구약 안에서도 ‘살인하지 말라’ 하고서는 사울에게는 아각 왕을 죽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느 성경을 지켜야 하느냐?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돈을 주고 사라’ 어느 법을 지켜야 하느냐? ‘항상 기도하라’ 그러면 설교시간에도 기도할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철저한 자들이요 성경적인데 그들은 선이 아니었다.
‘성경대로 살았다’ 할 때 성경대로만 살면 죄를 안 지은 건가?
그렇다면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가? 예수님께서도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았다.
성경은 계시이며, 문서계시 속에 알맹이가 들어 있다.
四. 생명율.
우리 인간의 선악의 판단의 기준은 법률도 아니요 도덕률이나 양심율이나 종교율이나 기독교의 외적 견해도 아닌 생명율이다.
‘성경적’ 이라는 말은 성경 문구대로 행함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의 본 뜻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성경에 쓰여 있는 문구 문맥 가견적인 것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생명율이란 성경 66권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객관적으로 볼 때는 생명율의 척도인데 활동적인 결합적인 면으로는 인간이 진리와 영감으로 하나님과의 유기적 결합적 동작여부에 따라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의사에 순종한다고 할 때 그 순종이 ‘하나님의 인격성에 피동성이냐, 아니냐’ 하는 여부에 따라서 선도 되고, 악도 된다는 말이다. 활동적으로 하나님에게 유기적 결합으로 피동된 것이 선이요, 하나님과 유기적 결합에서 피동되지 못하고 단절된 것은 그 종별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만한 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는 선이 못 된다.
선이란 근원적 자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선이요, 활동적으로는 하나님과 유기적 결합적 관계에서 피동된 것만 선이라 한다.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않은 것은 믿음으로 행치 않은 것이니 그 모든 것이 죄라는 말이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진리와 영감에 피동성 결합성 동화성을 말하는 것이다. 진리와 영감에 결합 피동 동화되지 않은 것은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이니 죄가 되는 것이다.
※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죄냐? 일반적으로는 종별적인 것을 가지고 죄를 정한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양심적으로 한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죄라고 말했다.
바리새인들은 죄를 몰라서 이렇게 되었나?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왜 몰랐느냐? 성경을 정확무오한 생활의 법칙으로 삼고 살았지만 왜 정죄를 받았나? 그들은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계시의 뜻을 몰랐다.
오늘날 자기는 성경 그대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본문 글자 그대로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믿음으로’ 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되 진리와 영감에 결합적 순종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진리와 영감의 감화로 됐느냐?
욥35: 인간의 악행과 선행이 하나님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근원적 자체적 선 - 하나님 자체.
활동적 선 - 하나님의 활동.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에게 붙잡혀서 한 것.
그렇게 한 효력이 무엇이냐? 하나님 앞에 붙잡혀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능력적 성질이 입혀진다.
자유선택권은 이성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생시와 생지에는 자유가 없다.(존재의 시작) 내가 이 세상에 나고 싶어서 낫느냐, 하나님이 나라고 해서 낫느냐?
자유성 - 존재 이후에 의지적 지각적 자유성을 가지고 있다. 본래성은 일반적 선이다.
1. 기독교적 성경적 바른(正) 책임성.
기독교에서 죄를 정하기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정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지켰지만 왜 죄인가?
인간이라는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성과 의무성과 주권성과 책임성이 있다. 그런고로 인간은 죄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혹 기독교에서 철학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죄의 책임문제에 대해 많은 논란들이 있다.
결정론과 비 결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절대 자유성이 부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시고, 또 모든 주위환경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동원시켰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으니 결국 연약한 인간이 그 죄책임을 진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또 ‘인간은 그 영이 물질이 아니어서 육을 지배할 수 없는데 육이 지은 죄에 대해 어떻게 영이 책임을 질 수 있느냐’고 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 그리고 하나님은 물질이 아닌고로 죄짓는 기관이 아니니 그 하나님에게 죄책임을 돌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육이 지은 죄를 영에게 돌린다는 것도 가혹한 일이고 하니, 그래서 죄를 짓는 자는 육이니 인간은 그 죄책임으로 인하여 일생을 죽음으로 끝마치되 이 육은 범죄치 않은 영과는 별개인고로 육은 죄의 대가로 필연적으로 지옥에 가게 되고, 영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 천국에 간다는 학설도 있다.
※ 죄책임에 대한 여러 주장들
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 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죄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숙명론)
② 물질은 영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은 물질의 지배를 받지 않으니 육이 지은 죄에 대해 영은 책임이 없고 죄의 대가로 육이 죽는다. 영은 다 천당 간다고.
③ 영은 죄를 짓지 않으나 도의적으로 책임을 지어야 되지 않겠느냐?(개혁 파) 예: 소가 남의 밭의 콩을 뜯어먹었으면 배상은 주인이 한다.
사건적으로 어디까지 책임을 지느냐? 이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먼저 ‘영이 죄를 지을 수 있느냐, 지을 수 없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는 하나님과 단절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물질인 육이 죄를 짓는 것과, 비 물질인 육이 죄를 짓는 것이 어떻게 다르냐?
영이 할 책임성 의무성을 다하지 못하고 위치를 지키지 못하면 죄이다.
육이 할 책임성 의무성을 다하지 못하고 위치를 지키지 못하면 죄이다.
마음은 자기의 의무성을 다 했지만 육은 다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 마음으로는 자기 할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신체가 영의 일을 할 수 있는가? 영이 해야 할 의무성과 책임성을 몸이 대신할 수 있는가?
1) 인격의 주체성적 책임.(완전 책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법을 정하셨는데 이 율(律)의 목적은 심판이나 정죄가 아니고 구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율을 주신 것 자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이 율(영이 지켜야 할 율, 이성이 지켜야 할 율)을 지키면 구원이 되고, 반면에 어기게 되면 심판을 받아야 한다.
어떤 범죄를 했던 범죄를 하면 영은 인격의 주체성으로서 그 죄책임을 져야 한다. 이 말이 영 자신은 그 죄를 짓지 않았으나 도의적으로 죄책임을 진다는 말은 아니다. 이 영이 인격의 주체성으로 죄책임을 진다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적 원인적으로 볼 때에 그 죄책임을 안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은 모든 죄책임을 완전히 지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 영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의 책임을 지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 영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도의적이 아니고 실범자로서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영이 끊어진(원죄) 것만 책임을 져야 하느냐? 아니다. 이성과 끊어진 것도 영이 책임을 져야 한다.
영은 끊어져도 하나님의 율법은 지킬 수 있다. 이럴 경우 계명을 지켜도 선이 아니다. 방편적으로는 선이지만 실질적 근원적으로 죄가 된다. 성경대로 살아도, 율법과 계명을 지켜도 죄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 종교말년이 그랬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그 자체가 죄요, 무슨 일을 해도 다 죄이다. 믿음으로(의) 진리와 영감으로 피동된 것이 아니면 모두 죄이다. 하나님과 영이 끊어지면 인격적 결합이 안 되니 모두 죄이다.
‘율법을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 끊어졌느냐, 아니냐’ 하는 이것이 문제다. 하나님과 끊어지고 다른 것을 붙잡으면 붙잡은 그것이 우상이다. 아는 죄보다 모르는 죄가 더 많다.
2) 인격적 자체적 영적 책임.
우리 인간은 인격자요 영원한 존재자로서 우리들의 죄책임은 영이 인격적으로 자체적으로 영적으로 지게 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 죄책임을 누가 지느냐’ 하는 문제로 많은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도의적으로 영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인간이 실수나 혹은 고범죄를 짓게 되면 범죄한 본인이 그 죄의 책임을 지고 죄의 양만큼 형벌이나 벌금을 내고 일단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경우도 있는데 자신이 과오를 범한 일도 없고 고범죄를 지은 일도 없으나 자기의 수권범위 내에 있는 존재나, 교육적 교훈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가 죄를 범했을 때 자신이 실범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범한 죄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경우처럼, 즉 스승이 제자로 인하여 도의적 책임을 지는 일도 있고, 부모가 자식으로 인하여 도의적 책임을 지는 일도 있고, 상사가 부하의 과실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책벌을 받는 일이 있듯이 영이 도의적으로 죄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엄격히 분석해 보면 도의적 책임이란 실은 억울하기도 하다. 부모가 자식을 잘못 가르치거나 스승이 제자를 잘못 가르쳐서 자식이나 제자가 죄를 지을 경우에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당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부모로서 성의껏 자식에게 교훈을 했지만 그 아들이 범죄를 했을 경우에 부모가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또 스승이 제자들에게 성의껏 교훈을 했지만 혹 제자들 중에 잘못되는 경우에 스승이 그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영이 죄책임을 진다는 것은 이와 같이 육이 범죄한 것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말은 아니다. 영과 육의 결합적 존재인 인간의 주격자인 영이 주격자로서의 자신이 범죄한 것에 대해 엄격히 책임을 져야 하고, 또 자신의 범죄로 인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기 전에는 신의 생명을 입기에 불가능해져서 이성과 몸이 선행 불가능하게 되어진 것은 전부 영이 범죄한 까닭이니 모든 책임을 단연코 영이 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이 범죄한 것에 대한 책임을 영이 다 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최초에 죄를 짓게 된 원인이 영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서이고, 그로 인해 점차적으로 모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으니 영이 모든 죄의 실범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모든 죄책임을 능히 다 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영은 모든 죄책임을 완전히 지고 죽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이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하여 완전히 죄책임을 졌으니 육은 그 책임이 없다는 말인가?
우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임성을 양면으로 보아야 한다. 양면으로 본다는 것은 심판에는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한 공심판과, 하나님의 지성법에 의한 사심판이 있는데 영이 자기의 모든 죄를 완전히 책임을 지고 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하므로 하나님의 지공법인 공심판에 의하여 영육이 다 무죄자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지성법에 의하여 사심판의 책임은 인격적 자체적 영적으로 본인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져야 한다는 이 말은 곧 영과 육이 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영이 범죄하므로써 그 책임을 지고 즉시 죽었고, 육은 그 범죄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죽는 것으로써 그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인격적 자체적 영적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책임성에 있어서 어떤 과오의 책임이 단회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어떤 과실을 범했을 때 그 죄의 중과에 따라 벌금을 물던가 시간적 형을 마치고 나면 그 책임이 일단 벗어지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어떤 과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단회적 유효기간적 징벌이 끝나면 그 책임이 벗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고 우리는 자신이 범죄한 죄책을 인격적으로 져야 되고, 자체적 영적으로 그 죄책임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라!
※ 도의적 죄책임은 억울한 일이 많다.
지공법은 공심판.
지성법은 사심판.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한 책임은 영은 영대로 단번에 죽었고, 육은 점차적으로 죽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한 공심판은 영이 다 책임을 진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전히 해결되었다. 고로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하여 나는 죄인이 아니다. 그러나 또 죄인이다.
권신찬파는 중생한 날을 알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어린아이 자기가 난 날을 아느냐? 변화는 중생한 자나, 못한 자나 다 한다.
중생을 하면 죄인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죄인이다. 사심판에 있어서 나는 죄인이다.
심범자는 죄책을 느낀다. 다윗은 용서를 받았지만 죄로 인하여 평생동안 눈물을 흘렸다. 바울은 ‘나는 아직 죄 아래 팔려 있다. 죄인 중에 괴수로다!’ 라고 했다.
(1) 징계와 책임.
인간세상에서는 인간들 보기에 법을 어겼던가 양심을 어겼던가 종교율을 어기면 죄라고 정죄할 뿐이지 생명법에 의한 죄성은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도덕법이나 종교의 율법에 의한 가견적 죄를 범했을 때 그 자에게 일시적으로 징계를 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범죄한 사람마다에게 다 동일하게 징계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자에게는 징계를 하시기도 하지만 하자에게는 징계를 하지 않기도 하신다.
그렇다면 징계란 범죄의 대가인가, 죄의 책임인가? 즉 어떤 범죄 사실에 대해 세상에서 일시적 징계를 받았다고 해서 영원한 자체적 책임성은 무시가 되는가?
※ 대개는 생명법은 모르고 가견적인 죄나 법적 도덕적인 죄만 말한다.
A, B, C가 동일한 죄를 지었어도 꼭 동일한 징계가 오지 않는다.
징계가 죄의 대가인가, 죄책임인가? 또한 징계를 받았어도 거기에 대한 심판이 또 있는가? 매를 맞았다고 해서 심판은 감점인가? 징계는 죄의 대가도 아니고 책임도 아니다.
(2) 현 세상에서의 불행과 죄의 책임.
현 세상의 모든 인류의 생활에서 행복과 불행은 각 개인마다 각이하게 다르다. 즉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이 행복과 불행이 죄책임이라고 볼 수 있느냐? 의행(가견적 가식적 육적)은 행복이 오고, 죄행 즉 불법은 불행이 오느냐?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가견적으로 행복한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의행의 대가요, 자신의 모든 불행은 죄의 대가라고 볼 수 있느냐? 그리고 죄행의 대가로 이 세상에서 불행으로 살았다면 죽음 저 편에 가서는 그 죄책임에 따른 불행은 없는 것이고, 의행의 대가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죽음 저 편에 가서는 그 존영이 감퇴가 되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일반적 지식과 이론들은 죄행의 대가는 불행이요, 의행의 대가는 성공과 행복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 기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보통의 죄행이 아닌 극악적인 죄행을 한 자인데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평안히 잘 살다가 죽을 때에도 고통을 모르고 편안하게 죽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현 세상에서 의행으로 살았어도 가견적 가식적으로 불행한 경우도 있을 것이니 이럴 경우에 그 불행을 보고 그를 죄인이라고 단정을 한다면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겠는가?
※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전부 죄의 대가라고 볼 수 있느냐? 행복은 의행의 대가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못 사는 것이냐?
법과 계명을 심판할 목적으로 내었느냐? 구원목적이다.
인간에게 생명법을 갖다 대면 모두 죄인이다.
죄짓기 전에 고난을 주어서 죄를 지었다고?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부(富)를 주면 죄를 안 짓겠느냐?
(3) 현 세상의 행복과 고난과 영원한 보상문제.
인간이 현 세상에서 불행하게 사는 자가 있기도 하나 행복하게 사는 자도 있다. 그런데 현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모두 의행의 대가라고 속단을 내리면 비 이치적, 비 성서적이다.
자신의 의행의 대가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면 천국의 영원한 존영이 감퇴가 되느냐? 즉 우리의 신앙행위에 따라 현 세상에서 보상을 받고, 현세의 그 보상으로 인하여 영원한 존영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의행의 대가를 안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한 선행의 대가를 이 땅에서 받으면 영원한 상이 없으리라’고 한 말은 ‘네가 현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현실을 누리면 영원한 존영이 감퇴된다’고 하는 말이다. 현 세상에서 행복을 주셨다고 해서 영원한 존영을 감퇴시키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현 세상에서의 행복은 보상이 아님을 단정을 지어라!
※ 기독자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은 믿음을 안 지켜서인가? 못 사는 것이 의행의 대가인가, 악행의 대가인가? 못 사는 것이 악행의 대가라면 그는 천국에서도 상급이 없을 것이니(못 살 것이니) 그 사람은 이중의 대가를 받는 것이다.
눈에 안 보이면 무조건 믿으면 되는가? 표면을 표준하여 말하지 말라!
(4) 자체적 영적 책임.
인간이 범죄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영원히 져야 한다. 택자인 경우 공심판의 책임은 예수님이 완전히 져 주었고, 사심판은 자기의 자체적이요 인격적이요 영적임을 알라! 자체적이란 능력적 실력적 민감적(향락성, 쾌락성, 만족성)이라는 말이고, 영적이라는 말은 이것으로 자기는 영원히 지속해야 한다는 말이니 이것이 곧 책임이다.
※ 도의적 책임은 벌받은 것을 다시 받는 느낌,
자체적 무능은 무엇을 할 수 없는 무능상태.
중생 후에 죄를 짓는 것은 영이 다시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영의 강제적 지배성이란 곧 영이 인간의 이성과 몸을 강압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영이 강압적으로 이성과 몸을 지배치 않은고로 이 영은 도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성은 영에게 강제지배를 받겠금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인간의 영은 그 인격의 주체성인고로 이성은 인격의 주체성인 영에게 완전히 자유할 수 없고 강권 강압을 받겠금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이 이성을 지배하지 아니할 때 이성은 그 영으로부터 자유한다고 본다. 그런고로 이성과 몸이 더불어 범죄할 때 영이 이성을 지배치 않으면 그 이성은 영을 떠나 방종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인간의 범죄라고 한다.
※ 도의적 책임성론: 이성을 절대 자유성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영이 이성의 자유성을 잡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성의 절대 자유성에 맞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절대 자유보장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라는 말은 영의 자유요, 이성의 자유를 말한다. 이성의 절대 자유성은 그 무엇에게도 강제 강권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것. 영의 자유성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영의 절대적 자유성에서 인간의 타락을 가져오게 되었고, 중생한 이후의 영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내재적으로 진리와 영감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자유는 생명과 단일성적이니 이 영은 절대적 의존성이요 자유성이다. 의존성 피동성 동화성이 자원이요 자유이다. 이 자유는 영원히 제재를 받지 않은 자유성이요, 다만 제재를 받는 것은 자신의 실력에게만 제재를 받는 것이다.
※ 타락 전의 영: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과의 단일성이 아니다.
인간은 원형이 아니고 모형. 하나님과 유기적 의존적 가범성 가사성.
● 타락 전의 영과, 중생 후의 영과 다른 점.
타락 전의 영: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과 단일성이 아님. 가범성적 가사성적이다.
중생 후의 영: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었다. 성질적으로 하나님과 단일성. 그리스도의 중보로 하나님과 절대로 끊어질 수 없다. 자유성이 의존성이요, 의존성이 곧 자유성(자유하는 종)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예: 어떤 자가 종을 사서 놓아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자신을 사서 놓아준 주인에게 자원적으로 들어가 능동적으로 자유하는 종으로 산다.
종은 제 마음대로 하는게 아니라
① 먼저 주인의 성질을 파악해야 한다.
② 사건이 왔을 때 주인에게 묻는다.
이성의 자유란 중생한 후에 영은 완전 깨끗 거룩하여졌기 때문에 그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과의 단일성적이지만 이성은 영이 중생함과 동시에 단회적 찰나적으로 중생하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성화 되어 나가는 기관인고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 단일성이 아니고 이질성인데 이 이질성 그대로 절대 자유하는 기관이라는 말이다.
이 이성은 절대 의존적이면서 자유하고 있다. 새사람인 중생된 영에게 의존하여 활동할 수도 있고, 옛사람인 육(싹스)에 의존하여 활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이 육과 접선되어 있을 때 영이 그것을 강제적으로 끌어올 수는 없다. 또 이성이 영과 접선되어 영에게 피동 되어 있다가 그것을 떠나서 옛사람에게 갈 때 영은 그 이성을 강제적으로 붙들어 매지는 못한다. 마치 우리 인간이 성령에게, 진리에게 붙잡혀 활동을 하다가 육으로 기울어 질 때 성령이 붙잡을 능력은 있으나 계약적 관계상 강제적으로 붙잡지 못하고 놓아 둘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도 이성이 육으로 기울어질 때에 그냥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은 진리로써 양심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권고는 한다.
성령이 외부에서 진리를 통하여 사건적으로 존재적으로 활동적으로 회개시키는 운동을 하는데 이 때 회개하는 자는 이성이다. 아무리 성령이 외적으로 회개시키는 운동을 한다고 해도 인간 자기가 회개치 않을 때는 성령도 어쩔 수가 없다.
※ 심판이 있는고로 이성은 절대 자유다.
성화를 입는 방편은 사건과 종별과 환경과 형편에 따라 다양적이다.
중생 전에는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영이 도의적으로 지지만 중생 후에는 못 진다. 진리와 영감을 보내주지 않으면 영이 성장을 못한다. 그런고로 진리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장하지 못한다. 옳은 스승을 못 만나면 성장에 지장이 있다.
2. 인간(인성)의 번식.
우리는 인간학 면에서 인간을 하나의 씨(종자)로 본다. 그런데 우리가 이 씨를 육만으로 보아야 하느냐, 영만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영육 전 인간을 다 씨로 보아야 하느냐? 혹자들은 육만으로 보는 자가 있고, 또는 영육으로 보는 자가 있다.
전 인간을 하나의 씨와 같이 번식해 나오는 존재라고 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 대개 세 가지를 말한다.
① 선재론.
② 유전론.
③ 창조론.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선재론.
선재론은 우리 인간의 영과 육이 생기기 전에 이미 어떤 세상에 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 생겨졌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혹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 아담의 영을 창조하실 그 때에 모든 인간의 영을 동시에 다 창조해 두었다가 인간의 존재 하나 하나가 구성될 때마다 그 존재 속에 영혼을 넣어준다는 학설이다. 이 학설들 역시 일치하지 않다.
① 관념적 선재론.
실제적 선재가 아니고 어떤 관념적으로 영이 선재해 있다가 존재가 있을 때 그 영이 들어간다.
② 예지적 선재론.
실질적으로 영이 선재하지 않고 예지적으로 영이 선재하고 있다가 존재 속에 들어간다.
③ 계획적 선재론.
인간의 존재가 생겨지면 영을 넣어주기 위해 계획하고 있다는 것.
④ 실제적 선재론.
영은 그 이전에 선재하고 있었는데 선재하고 있었던 그 영이 존재가 생겨질 때 들어간다는 설.
(1) 진술.(인간영혼의 선재론에 있어서의 여러 학설들)
① 플레토의 진술.
육체의 수만큼 인간의 영이 선재하고 있었는데 그 영의 선재 수만큼 육체가 산출되기 때문에 이미 선재하고 있는 영이 다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영이 감각적으로 존재로부터 인출되지 않는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키 위해서 이것을 주장한다.
② 필로의 선재론.
영혼이 존재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ꊱ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유출물이다.
ꊲ 죄의 선재.
ꊳ 형벌로 영은 존재 속에 수감되었다.
ꊴ 그런고로 이 영혼은 존재로부터 해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혼의 수대 로 존재가 난다고.(고로 산아제한이 소용없다)
③ 오리겐의 선재론.(영의 선재설)
영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선재하고 있었다고 한다.(창1:27의 창조를 육 창조로 봄)
이 설은 원인의 이원론을 명백히 주장하지도 않고, 악신 선신의 이원론을 주장하지도 않는 물영 이원론 사상에 근거한 철학이니 물질인 육체가 창조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인간의 영이 창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철학사상이나 플레토의 철학사상과는 조금 다르니 일반적인 선재론은 육체의 수만큼 인간의 영이 선재하고 있었는데 그 영의 선재 수만큼 육체가 산출되기 때문에 이미 선재하고 있는 영이 다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반해 오리겐의 주장은 좀 달리 영의 선재 수와 물의 선재 수와 물영 동수성을 주장치 않는다. 다만 막연하게 영은 육보다 훨씬 더 많은 수로 선재하고 있는데 그 영이 범죄하므로 범죄한 그 영을 위하여 물질인 육을 창조하고 생산해서 선재하던 영을 그 육체에 수감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형벌의 기한만 차면 그 영들은 영의 세계로 간다고 한다.
※ 일반적인 선재설은 영의 수와 육체의 수가 같다. 그 수가 다 차면 심판을 한다고 한다. 오리겐은 육체보다 영이 더 많다. 필로는 선재세상에서 범죄한 영의 감옥이 곧 육이다. 고로 출감하는 도를 닦아야 한다. 해탈되면 영은 그 영의 세계로 간다.
일반적인 주장과 다른 점은 영이 전생에서 크게 죄를 지은 자와 적게 죄를 지은 자에 따라서 육의 고통도 다르다고 한다. 이 고통을 보아서 범죄의 형벌을 알 수 있다. 오리겐은 감옥의 죄의 형기가 죄 지은 각자마다 다르다.
④ 독일의 신학자.
언제 어느 때 인간을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
(2) 이의.(異議)
인간의 영혼에 대한, 혹은 인성의 번식에 대한 선재론적 주장에 대해 많은 이의가 있다. 물론 각자 주장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나름대로 타당성을 전개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에 대한 이의도 들어봄이 좋을 것이다.
① 비 성서적이다.
인간의 번식에 대해 선재론적 주장은 비 성서적이라는 것이다. 성경 어떤 구절에도 위의 사람들이 주장한 바와 같은 그런 사건들을 찾아 볼 수 없다. 가령 필로나 오리겐이 주장한 것처럼 인간이 선재세상에서 범죄하여 물질인 세계로 와서 육에 수감되었다는 성구는 신구약 66권에 없는 것이다.
※ 선재론을 성경이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성경구절에도 없다. 비슷한 것도 없다. 그래서 비 성서적이다.(롬5:12, 창1:27)
② 물영 이원론에 기초했다.
선재론적 주장의 영이 선재세상에서 선재적으로 실존하고 있다가 물질세계에 와서 물질인 육 속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물영 이원론에 기초한 것이니 이 물영 이원론은 물질인 육과 비 물질인 영과는 결합적인 혹은 유기적인 어떤 관계도 없이 다만 영은 본래적으로 물질과는 상관없는, 혹은 물질인 육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영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는데 범죄하므로 육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대로 영이 범죄하므로 영을 수감하기 위한 목적으로 육신을 창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창조의 목적과 근원과 원인과 실유성이 전부가 물영 이원론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물영 이원론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영이 곧 육이요, 육이 곧 영이라’고 하거나, ‘영을 창조하니 육이 생겨진 것이고 육을 창조하니 영이 생겨졌다’고 해도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영의 창조와 육의 창조가 시간적으로 동시성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은 분명히 육은 물질인 흙을 원로로 해서 창조했다고 했고, 영은 물질인 흙으로 창조치 않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었다던가 혹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직접 창조했다고 했는데 이것을 물영 이원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 물영 이원론은 철학적인 용어이다.
신에 대해서 이원론을 주장하는 자도 있다.(영원한 복음 한애녹) 자존자는 둘인데 선신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악신도 있다고 한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옆에서 악신이 흔들어 버린고로 선신(하나님)과 악신이 싸우게 되었으나 결국은 선신이 이긴다는 것.
① 1대 1로 투쟁을 하면 선신이 이기지만 어떤 활동성에 있어서는 선신이 하는 일을 악신이 흔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선신은 구원운동을 함.
② 이 세상은 선과 악의 싸움터라고.
인간을 어떻게 보면 이원론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육을 창조해 놓고 코에 불어넣은 김이 영이다?
창세기 1장 27, 28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영과 육은 개체성이 아니고.
③ 인격적 의식이 없던가.
만일 이들의 주장과 같이 영과 육이 완전한 독립적인 실체들이라면 육이 없을 때, 즉 영이 육에게 수감되기 전에 영이 의식적 실체로 존재했고, 육은 육대로 의식적 인격적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 영과 육의 두 인간이 만나 한 인간이 되어 영이라는 인간은 내재하고, 육이라는 인간은 외재하면서 각각 독립적 의식적 인격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가 육 속에 있던 영이 떠나도 육은 단독적으로 의식적 인격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 물영 이원론의 주장처럼 영은 독립적 인격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육도 그러하다고 하면 영도 독립적 한 인간이요, 육은 육대로 의식적인 한 인격인 두 사람의 결합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싫으면 서로 인사하고 개체로 있는가?
영은 육신의 죽음 이전에는 모든 인격적 활동을 독립적으로 할 수 없고 육의 인격적 활동을 통해서만 활동을 한다. 심행과 물행을 떠나서는 영행을 할 수가 없다.
물영 이원론: 인격의 주체성은 둘이다. 동시에 두 인격이 작용을 한다.
④ 죄의 기원과 하나님의 공의를 밝히지 못한다.
만일 인간의 영이 선재세상에서 범죄하여 물질계로 쫓겨와서 육체에 수감된다면 인간의 죄의 기원은 달라질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기원은 에덴동산인데 이들이 말하는 죄의 기원은 육체가 생기기 전 영만이 있을 때 범죄했다고 한다.
이 이론은 최초 범죄의 시험의 시초를 육신이 없는 상태로 후퇴시킨 다음에 하나님이 그 타락한 자들을 회복시키기에 심히 곤란한 상태에 있다고 함으로 죄의 기원에 대해 난점을 만들게 된다.
※ 하나님의 공의가 애매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애매해진다.
⑤ 신체를 사고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신체를 사고적인 그 무엇으로 만드는 논리이니, 영혼은 처음에 신체가 없이 존재했으나 범죄하므로 후에 이것(육체)을 받아 취했다고 주장하니 이렇게 말함은 사람과 천사와의 구별을 어렵게 한다. 즉 사람도 원래는 천사처럼 비 물질적인 신체로 있었다고 하니 인간이 육체를 입기 전에는 천사로 있었다는 논리가 되고 만다.
⑥ 인류의 통일성을 파괴한다.
이것은 인류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이니 모든 개인의 영혼들이 현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하면 인간의 통일성이 파괴된다.
⑦ 의식의 지원이 없다.
사람의 신체가 영혼의 감옥, 즉 형벌을 받는 곳이라는 사실을 영혼이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도리어 신체와 영혼의 분리를 공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재론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물영 이원론이다. 이단적 학설이다.
2) 유전론.
유전론이란 인간의 신체가 부모로부터 출생할 때 영도 동시에 그 부모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 인간의 육과 영이 같이 부모로부터 생겨졌다고.
그렇다면 육은 물질이니까 전가가 된다고 하지만 영은 어떻게 전가가 되느냐?
(1) 진술.
사람은 영도 육처럼 부모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진다고 하는 이 진술은 자손은 그 부모의 자손이라는 것에서부터 그 원리가 생겨지는 것이다.
자손이 부모로부터 난 자손이 아니라면 그 자손이 그 부모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런고로 자손이라는 말은 신체만 그 부모의 자손이 아니고 전인적인 자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① 영육의 구별이 없이 전인이 동시에 출생했다는 말이다.
만일 인간의 영혼이 부모로부터의 유전이 아니라면 물영 이원론의 선재론일 것이요, 그렇지 않고 인간의 영의 창조론을 주장한다면 그 영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즉 인간의 신체가 구성되어 있을 때 언제 어느 시에 하나님이 그 영혼을 창조해 넣었다는 말인가?
※ 인간이 출생시 영육이 동시에 출생한다. 그게 아니라면 물영 이원론이다. 만일 창조론이라면 언제쯤 창조해 넣겠느냐? 모태에서 막 나올 때 창조해 넣었겠느냐?(모태의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부정모혈로 착상될 때 창조됐다고 보는 자도 있다.
② 신체는 신체로부터 유전되고, 영은 영으로부터 유전되고.
사람이 출생할 때 시간적으로는 영육이 동시에 유전이 되지만 신체로부터 영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고, 영으로부터 신체가 유전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연히 영과 육을 분리했다. ‘영은 영이요, 육은 육이니라’ 했으니 육의 유전과 영의 유전은 엄연히 분리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체는 물질이 유전이요, 영은 비 물질적 실유적인 유전이다.
※ 영이 신체로 유전되느냐, 신체에서 영이 유전되느냐? 신체유전은 부모로부터.
아이가 난자(母)냐, 정자(父)냐? 고깃덩어리 유전은 아버지의 것만도 아니고 어머니의 것만도 아니다. 영의 유전은 부모의 혼합적인 유전이 아니고 부모로부터 유전이다.
③ 영혼의 절단적 유전론.
부(父)나 모(母)의 영혼이 한 토막 잘라져서 유전된다.
④ 영은 부(父)의 영으로써 유전됨.
우리가 여기서 유전론이라고 하는 말은 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체의 유전성은 가식적이요 가견적인고로 생물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니 이의함이 없다. 그러나 영은 비 물질성이요 불가식적인고로 ‘유전론이냐, 선재론이냐, 창조론이냐’ 하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의 번식은 부모로부터 유전됨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난 그 후에 또 다른 사람들을 지었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 유전했다면 아버지의 영이라고? 예: 옥수수가 밭에서 나느냐, 씨에서 나느냐?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가 무죄성이 되지 만일 마리아의 영에서 나왔다고 하면 예수님도 원죄를 지고 나온다는 말이 된다. 이 원리를 물질을 가지고 설명하기 어렵다.
현재 유전론과 창조론이 있다. 기본교리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과 관계가 없다. 이런 것을 가지고 싸울 필요는 없다.
(2) 증명.(유전론이 옳다고 하는)
우리가 인간의 번식이 ‘유전론이냐, 창조론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라고 하면 영육을 합한 것을 인간이라고 하지 영을 떼 놓고 육만을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일 선재론을 물영 이원론이라고 한다면 창조론 역시 물영 이원론임이 틀림이 없다. 왜? 물질인 육은 부모로부터 유전을 받고, 그 속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아 일단 물질인 육체가 구성된 후에 넣어준다고 하면 이 역시 물영 이원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인간의 번식’ 이라고 하는 말도 육만의 번식이라고 한다면 ‘전인적 번식’ 이라는 말은 쓸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영육이 아물러 조상으로부터 유전되는 것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라고 하면 영육 결합체로 합일된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물체만 있고 그 속의 영과 자연생명이 떠나게 되면 이것은 하나의 인간으로 볼 수 없다. 명칭 자체가 신체나 송장으로 바꾸어진다. 그런고로 인간의 그 육이 부모로부터 태어났다면 영도 조상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 라고 하는 말은 영을 별도로 창조했다는 말이 아니고 중생된 영 전부를 ‘모든 영’ 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중생된 영은 그 영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중생됨, 거듭남’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로 난 자, 거듭난 자, 중생한 자’의 하나님을 ‘영의 아버지’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 아버지께로써 낫다는 말은 본래 그 사람이 영이 없었는데 중생할 당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영이 생겨졌다는 말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 영을 지었다는 말도 아닌 죽었던 영을 다시 신의 생명으로 살려 놓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영’ 이라는 말은 ‘중생된 모든 영’ 이라는 말이요, ‘모든 영의 아버지’ 라는 말은 중생된 모든 영은 하나님께로 낫다는 말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영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 선재론은 물영 이원론이다. 창조론도 역시 물영 이원론이다.
선재설: 육체는 영의 감옥.
필로는 영의 해탈을 주장.
오리겐은 영의 죄대로 고생을 받아야 한다.
‘모든 영의 아버지’라 함은 인류 전체의 영을 말함이 아니고 중생자의 아버지로서 이미 있었던 영이 죽어 있었는데 이것을 살려 놓았다는 면에서의 말이다.
(3) 진술.(성경적 제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매 사람마다의 영을 창조했다는 성경구절이 없고 다만 일남일녀로 창조했다는 말만 있다.(창1:27, 28)
이 일남일녀라는 말은 육을 말하는 것인지, 영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성이나 구원 선택성을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자는 육이라기보다는 영임이 틀림이 없고, 그렇다고 또 육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육을 같이 보되 육보다는 영을 주격으로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했다는 말은 영을 중심으로 창조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육의 창조는 흙을 빚어서 창조했다고 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한 번 창조하신 후 그 다음에 인간 개개인을 창조했다는 말은 없고 ‘누구는 누구에게서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낳고’ 하고 있다. ‘누구를 낳았다’는 말은 신체만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성경에 인간의 신체는 조상으로부터 나고, 거기에 대한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이 없다.
① 하나님께서 기운을 그 코에 불어넣어 주셨다.(창2:7)
이 기운(생기)을 인간의 영혼으로 보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육체는 인간이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만들어진 그 육체에 기운인 영혼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만 그 코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지 그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코에 기운을 불어넣은 적은 없고,(하나님은 코에 기운을 한 번만 불어넣어 주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생기(영혼)가 되어 그 영혼에서 인간의 모든 영혼은 유전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②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고전11:8)
이 말을 보면 육은 분명히 남자가 여자에게서 낳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영육이 유전된다는 것이다.
③ 하나님께서 창조작업을 6일 동안에 완전히 마쳤다.(창2:2)
성경은 분명히 당신의 창조가 6일만에 마쳤다고 했는데 인간의 영혼만은 계속적으로 창조하신다는 것은 타당치 않다. 일단 하나님의 직접 창조작업을 마치고 난 후 창조된 그 신체들이 번식해 나간다는 것이다.
④ 자손은 그 조상의 허리에 있다.(창46:26, 히7:9,10)
‘자손은 조상의 허리에 있다’는 말은 육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영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고로 인간은 그 육체만 신체만 부모로부터 유전된 것이 아니고 영육이 아울러 유전된 것이다.
영은 그 개체 인간의 주체성이다. 그런데 이 주체성인 영을 무시하고 육만을 지적해서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없다.
※ 창세기 2장 2절에서 창조작업을 마쳤다.
‘레위는 아직 그 조상의 허리에 있다’ - 아브라함은 레위가 나기 전에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뜻.(예수님을 상징, 족보가 없다) 이 때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고?
⑤ 동식물 생활의 유추(遺推).
이 주장은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을 영으로 착각하는 주장이다. 인간의 영은 출생 시에 출생 전의 원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질은 영이 아니고 이성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식물 생활의 유추로써 인간의 영혼의 유전론을 증명하는 것은 어색한 점이 없지 않다. 동식물들이 세상에서 무수히 번식되어 가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똑같이 번식이 되어간다는 말인데, 물론 숫자적으로 한 동물이 많은 새끼동물을 번식하는 것처럼 한 인간이 많은 인간의 영혼을 유전 번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소는 소로써 소를 번식하고, 개는 개를 번식하는 것처럼 그 조상의 영혼의 선한 성질대로 유전되는 것을 영혼의 유전으로 보고 있다.
⑥ 정신적 특수성의 전승.
사람은 유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육체도 부모의 체력에 따라 유전이 되고, 성질도 부모의 성질에 따라 유전된다고 한다. 즉 성질이 곧 영이라는 말이다. 육체의 유전은 가견적이고, 영의 유전은 특수적인 정신면으로 보고 있다.
육체가 유전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영도 유전했기 때문에 부모의 성질을 닮았다는 말이다.
※ 학자들은 비 물질 전부를 영으로 보고 있다. 성질을 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외형이 아버지를 닮은 자는 아버지의 성질을 닮았는가? 어머니의 성질을 닮은 것이 어머니의 영인가? 예수님의 영은 마리아의 영인가?
⑦ 원죄유전의 기초.
원죄를 증명하려면 영혼의 유전론을 떠나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원죄유전을 기초로 하면 영혼도 유전이라는 말이 된다.
⑧ 성육신 교리에 포함.
예수님의 영혼이 인간 마리아의 영혼에서 유전된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4) 이의.
여러 철학자들의 주장이나 신학자들의 주장에 이의가 없지는 않다. 물질적 가견적인 것에 대해서도 학적으로 이의가 있거든 하물며 비 물질적인 인간번식에 대해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개체 개별적이고 지식적으로 상당한 칭하가 있는고로 이의가 있는 것은 인간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이들의 각각의 주장에 대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주장은 하지만 절대 정확성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많은 이의들이 대개는 영론에 대해 이의가 있다. 신학적으로 예정론 예지론 등에도 이의가 없지는 않지만 신학적 주장은 전제적 공동적 공인을 받는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것이다. 어떤 학설의 주장이던 반드시 이의가 있어야 한다. 없으면 안 된다.
※ 어떤 자는 참의 가치를 알고, 어떤 자는 참의 가치를 모른다. 그런고로 여기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이의를 달 때에 구태여 답변을 할 필요가 없다. 이의를 단다고 하는 것은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비판이다. 인간의 삶은 참을 붙잡고 참되게 살다가 가야 할 인생이다.
이의를 달 때에 ‘나는 이것이다’ 라고 고집해야 하느냐? 상대가 이렇게 들어오면, 나는 저렇게 답변하는 그런 태도를 버려라. 만일 그렇게 한다면 비 진리를 보호하는 자가 된다.
이의를 다는 자들을 미워하지도 원수시도 대적시도 하지 말라. 이의를 달 때 그것을 진리로 비춰 보고 연구의 자료로 삼을 것이다. 대답을 해 줄 필요가 없다. 다만 ‘정말 진리를 찾거든 와 보라!’ 라고 하면 된다.
철학자들은 문제제시→ 답변→ 반박을 늘 준비하고 있다.
대개 보면 자체에 대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의를 단다. 교훈을 먼저 주지 말고 참을 붙잡으려고 하는 마음을 넣어 줄 것이다. 잘못하면 거짓이 왕성해진다.
● 상대가 이의를 달 때 나는 어떤 수입을 보는가?
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틀렸느냐, 맞느냐’를 재 심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② 제시한 이의를 가지고 내가 가진 진리에 비추어 보니 내가 가진 진리에 대해 더 확실성을 가지게 되어 더욱 든든해지고,
③ 잘못을 알게 되니 좋고,
④ 저 사람에 비해 나는 좋은 것(옳은 것)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감사해 한다.
● 이의를 가지고 나올 때의 나의 태도.
① 적대시 말라.
② 변론 반박하지 말라.
③ 그 사람에게 나의 것을 이해시키려고 애쓰지 말라.(단, 참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진리를 준다) 바꾸어지지 못한 사람에게 좋은 칼을 주지 말라. 강도에게 좋은 칼을 줄 수 없다.
①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이라는 주장에 대한 오해.
물질창조는 끝났으나 영의 창조는 아직도 계속이다. 창조를 마쳤다고 했는데 왜 계속이냐?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쳤다(창2:2)는 말은 그 때에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를 마쳤다는 말이지 부분적인 창조, 즉 인간의 영혼창조의 역사는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재 창조역사를 하고 계신 것을 신약시대의 바울이 말했다. 그러므로 유전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창세기 2장에서 마쳤다고 하는 것은 큰 오해다.
※ 창조론: 하나님의 창조는 아직도 계속한다.
유전론: 하나님의 개별적 직접적 창조는 이미 끝났다.
② 성육신 교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만일 유전론을 주장하는 학설대로 본다면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출생. 그러나 영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인간의 영혼이 유전된다면 인간은 아버지의 영혼이 유전될 수도 있고, 어머니의 영혼이 유전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도 부모의 영혼을 유전 받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럴 경우 원죄유전은 어떻게 해결할까?
부정모혈로 태어나되 아버지의 영혼으로 유전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령잉태) 출생함. 마리아의 난자 속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착상되었으므로 예수님은 육체를 유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으시다. 다른 사람은 모두 남자의 정자로 됨.
죄 책임은 영혼이 받느냐, 육신이 받느냐? 예수님의 고깃덩어리는 피조물. 영혼의 유전은 필연코 원죄가 있다.
③ 철학적 도리에 위반.
사람의 신체는 개체적이고, 영혼은 그 신체와 단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렇다면 아담은 원죄의 책임만 지고 후대 자손들의 죄의 책임은 지지 않느냐’ 하는데 대해 문제가 된다.
※ 영혼은 단일체.
신체는 개별적이고, 영혼도 개체이다.
원시적인 원죄문제가 아닌 유전론을 주장한다.
아담이 지은 그 죄를 개체만 질 수 있느냐? 모든 조상의 죄를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④ 기독론적 난관.
만일 아담 안에서 인성 전체가 범죄를 했고, 따라서 그 죄는 인성의 각 부분의 실제적인 죄라고 할 때 피할 수 없는 결론은 그리스도의 인성도 역시 원죄의 책임을 지고 아담 안에서 실제로 범죄하고 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무죄를 가르칠 길이 없고, 그리스도는 대속의 주가 될 수 없게 된다.
또 이 학설(유전론)은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이 마리아의 몸과 영혼으로부터 인출되지 않았다면 그는 참 사람이 아니었고, 참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들의 구속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마리아의 몸으로부터 영혼과 육신을 다 유전 받았다고 주장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의 영혼유전을 설명하려면 모든 인간의 영혼도 부친의 영혼으로부터 유전되기보다 모친의 영혼으로 유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보게 되면 예수님의 영혼은 마리아의 영혼에서 유전 받아야 하고, 마리아의 영혼에서 유전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영혼에는 유죄성이 있으니 유전성에는 필연코 죽임이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인간의 구속주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유전론을 주장하게 되면 기독론에 부딪친다.
원죄문제에 대해 유전론을 주장한다.
창조론이라면 왜 죄 지은 영혼을 창조했느냐?
기독론에서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구속주가 될 수 없다. 마리아의 영혼을 받았다면 원죄가 있게 된다.
※ ① 어머니의 영혼을 유전 받았다.
② 예수님도 그 영혼을 받았다면 원죄가 있다.
③ 구속주가 될 수 없다.
아버지의 영혼에서 유전되는 원칙을 세워놓고,(여자는 밭, 남자는 씨앗) 예수님의 잉태는 아버지의 정액이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완전한 인간)
원죄성을 가져야 인간이냐,(아담 범죄 이후) 원죄성이 없어도 인간이냐?(아담 범죄 이전)
계시록 3장의 증인의 표준. 빛은 모든 죄를 물리침.
3) 창조론.
창조론이 개혁교회의 보통적인 교리로써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주장을 보면 아이들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생식되거나 인출되지 않고 하나님의 직접 활동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것이다.
※ 창조론은 유전이 아닌 부모로부터 직접 창조된다고 한다.
(1) 진술.
이 창조론은 헬라교회에서 처음부터 받아들여졌고, 그 이후에 개혁교회에서도 받아들여졌으니 루터교회에서 유전론을 경향하고, 어거스틴도 이 설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① 헬라교회.
헬라교회에서 이 설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헬라철학이 밑바탕이 되어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학설을 찬성했다.
② 스콜라 학자들.
스콜라 학자들 중에 다수의 학자들은 미 결정으로 있다가 나중에 이 학설을 많이 지지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걸음 더 아나가서 지성적인 영혼이 생식의 방식으로 전달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라고까지 했다.
③ 개혁자들.(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 중에 많은 학자들이 이 창조론을 지지했다.
④ 개혁파 중에 특별히 창조론 지지자들.
칼빈, 베자, 투레티니 이 외에 많은 학자들이 창조론을 주장했다. 영혼들이 우리의 시조로부터의 혈통에 의해 인출된다고 하는 고대의 저술가들의 주장을 모두 허구라고 했다.
영혼 창조론은 각 개인의 영혼을 하나님의 직접창조에 기원한다. 그러나 그 창조의 시작에 대해서는 잉태 시인지, 그 후에 언제인지 확정할 수 없다고 한다.
(2) 영혼의 성질.
① 오염의 원인.
영혼은 순결하게 창조됐지만 패괴한 신체와 연합된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처음에 영혼이 신체를 통해서 창조되었고, 다음에 신체와 접촉되어 오염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면 죄를 물리적인 무엇이라고 추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영혼이 비록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의하여 생성될지라도 태아의 심리생활에서, 즉 부모의 생활에서 예조되므로 인생전부를 무겁게 누르는 죄의 혼잡 아래서, 혹은 그 안에서 실유를 얻는다는 말이 된다.
※ 문: 영혼이 개별적 특수적 창조라고 하면 왜 더러워졌느냐?
답: 원래는 순결하게 창조했지만 패괴한 육체로부터 때가 옮아졌다가 아 니고 무거운 죄에 억눌려져서 오염됐다고.
이렇게 되면 전 태아 구원론이 나온다.(빠빙크) 낳자마자 영혼을 넣어주면 살고, 좀 늦으면 죽는다.
영혼의 오염성은 위에서 말한 그 이론이 아닌 영혼의 원죄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영을 깨끗하게 창조했으나 육에다 결합을 시키매 영육이 결합됨과 동시에 영은 인격의 주체성이기 때문에 주격자인 책임자로서 원죄를 져서 그 영혼이 창조 즉시 오염된다고 한다.
※ 창조론 입장에서 원죄의 정의.
영혼은 원래 깨끗하게 창조했다. 창조 찰나 육체와 결합되니 죄는 한 사람이 졌지만 연대책임을 진다. 인격의 주체성이요 주격자인고로 영이 책임을 진다.
② 은혜 없는 창조와 그 공의성.
창조론 자들은 위에 제출된 설명에 보충으로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 피조자에게 처음부터 성령의 감화를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들을 하늘의 은사와 초자연적 광명이 없이 창조했으니, 이것은 아담이 자기와 자기의 후손들에게 올 은사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인고로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하신 일이라고 한다.
※ 인간의 영혼이 창조될 당시는 오염되지 않았지만 육체에 억눌려 오염되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이는 구원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하늘의 특별은혜와 초자연적 은혜를 주지 않으니 이는 모든 인간에게 줄 은혜를 아담의 범죄가 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③ 자연적 생명산출과 별로 다르지 않다.
찰스 하지는 창조론은 인간 영혼산출의 직접적인 권능의 행사는 다른 경우의 생명의 산출 시에 나타나는 것보다 다른 것이라고 필연적으로 추측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일반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것이다.
(3) 증명.
① 성경적 제시.
이 학설은 창조론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관찰한 것이다. 사실 이 창조론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 많은 성경이 창조론적인 이론을 보존하고 있다.
ꊱ 원시적 창조의 기록.
신체의 창조와 영혼의 창조를 현저하게 구별한다. 신체는 땅으로부터,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했다. 신체와 영혼은 실체가 상이할 뿐 아니라 기원이 상이하다. 후자의 기원은 전자의 것보다 더 고등한 것을 제시한다.
ꊲ 시혼과 기혼적 구별의 반복.(신체는 흙, 생기는 숨)
하나님께서 인간의 코에 불어넣은 것이 영이라면 이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인간은 하나님의 일부라는 말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부라면 인간의 영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유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갈 수 없을 것이다.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의 일부가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된다.
ꊳ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강조.
직접창조, 간접창조 모두 하나님의 창조이다.
ꊴ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히12:9)
여기서 ‘모든’ 이란 제한성을 가진 말로서 예를 들면 ‘8. 15 광복을 모든 국민이 기뻐했다’ 할 때 지구상의 모든 국민이냐? ‘모든 국민이 양을 잡아먹었다’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한다.
ꊵ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민16:22)
② 증명.
ꊱ 영혼의 성질의 조응.
이성과 영을 착각해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ꊲ 기독론에 부합.
그는 진정한 신체와 이성적 영혼의 참된 인성을 가지고 여인에게서 출생되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시되 오히려 죄는 없으신 분명한 사람이었다. 단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아담의 범죄의 죄책과 오염에 참여치 않았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는 아담 안에서 범죄한 동일 숫자적 신체에 참여하지 않으신 때문이다.
※ 창조론은 예수님의 무죄성에 대한 증명이 없다. 영혼창조 시에 죄지은 영혼을 창조치 않았지만 육체에 넣어주니 죄에 억눌려 오염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원죄의 유전을 신체에 두게 된다.
또 하나는 연대적 책임이다.
그리스도의 무죄를 주장하면 인간의 원죄는 어떻게 유전되느냐?
① 깨끗한 영혼을 창조했다. 이 영혼이 죄가 있는 신체에 억압되니 오염 되었다. 죄가 신체로 오염되었다고 함.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마리아의 몸에서 유전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② 유전론에서 보면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인고로 영 자체는 무죄성이지 만 대표적 견지에서 아담이 죄책을 지게 된다. 아담의 대표적 견지에 서의 죄책에 대해 예수님도 연대책임을 진다고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 은 동일 죄에 참여치 않았다. 이 주장은 이성과 영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영혼이 유전된다. 예수님의 영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ꊳ 자녀의 개성.(이 설은 이성과 영혼을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자녀의 영혼은 개체적 실유로써 부모의 영혼들과 같지 않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니 자녀의 정신적 특징을 비교해 보면 자녀가 부모와 같은 것도 있지만 부모와 다른 것이 더 많이 있다. 이 사실이 자녀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인출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는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특별창조를 받은 증거라는 것이다.
※ 이 주장은 인간의 영혼을 이성으로 보고 있다. 성질을 영혼의 요소로 본다. 영혼이 아버지를 닮았으니 아버지의 그 성질이 곧 영혼이다.
중생 전은 죽은 영혼이다. 중생 후부터 이성과 몸을 통하여 작용한다.
(4) 이의.(異議)
영혼 창조론의 부당함을 아래와 같은 반론들이 증명한다.
① 창조주의 책임문제. 스트롱의 반론.
② 만일 영혼이 기원적으로 패괴된 경향들을 가졌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을 도덕적 해악의 직접적인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요,
③ 만일 영혼이 순결하게 창조됐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이 영혼을 부패한 신체에 배치한 것이 되므로 하나님을 도덕적 해악의 간접적인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다.
※ ① 하나님께서 영혼창조 시에 해악한 영혼을 창조했다면 하나님은 해악 하게 한 원인자이다.
② 순결하게 지은 그 영혼을 신체 속에 넣어서 죄를 짓게 하느냐?
우리의 신체는 영을 통하여 성화 받는다. 영혼은 부패한 신체가 없이는 성장을 못한다. 영은 본래부터 타락이다.(영혼 단일론. 개체 개별적으로)
중생한 사람의 자식은 죄가 있는가?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가진 기술을 가지고 나오는가? 그리스도의 구속은 개체 개별적이다.
④ 정신적 도덕적 특징에서 나타남.
이 견해는 부모가 자녀의 신체만을 출생한다고 봄으로 자녀에게 부모의 정신적 도덕적 특징들이 나타나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도 정신을 영혼으로 보고 있다.
⑤ 신적 작업방식에 부조화.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현재의 작업방식에 조화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이 지금은 일반적인 방편을 통하여 작업을 하신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영혼창조라는 하나님의 직접 창조의 행위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은 6일 동안 창조를 마치고 그 후에는 섭리 유전.
⑥ 원죄유전의 기초에 흠결.
이 견해는 영혼의 유전을 부정하므로 원죄의 유전을 설명할 기초에 흠결하다고 비난을 받는다.
창조론이라면 창조된 영혼들이 어떻게 시조의 죄책과 오염을 전승한다는 것인가? 유전론은 시조 아담이 인류의 언약적 대표인 사실 자체가 원죄유전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죄책임은 각각이다.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전가시키지 말라’(겔18:20)
죄의 전가와 벌과는 다르다.
죄: 각각 자기가 당함.
벌: 타가 대신 맞을 수 있다.
(5) 신중한 결론.
선재론은 철학에 근거. 창조론이 더 성서적이고 기독교에서 더 효력적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유전론(영혼과 이성을 착각해서 주장하는 유전론)은 첫째, 영론에 대한 지식이 많이 빈약함을 보여주고 있다. 원어상으로 마음(칼디아)과 이성과 영혼(프뉴마)은 엄연히 실체적으로 다르다. 물질인 신체는 신체로써 혹은 물질성으로써 유전되고, 비 물질인 영은 영으로 유전됨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주장하는 유전론은 어디까지나 물질계를 떠나지 못한 상태에서의 주장이니 ‘인간의 영혼이 아버지로부터 유전됐느냐, 어머니로부터 유전됐느냐’ 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식한 말이다. 이는 자연법칙에도 맞지 앉는 말이니, 즉 ‘호박이 종자에서 나왔느냐, 밭에서 나왔느냐’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창조론의 주장도 많은 허점을 보이고 있다. 만일 창조론을 강력히 주장한다면 인간의 물영 이원론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즉 인간의 신체는 부모로부터 유전하고, 영혼은 창조된다고 하면 성경에 중생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본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개체의 영혼들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죽은 영혼을 창조해 넣었다는 말이 되니 어떻게 생명의 하나님이 죽은 영혼을 창조하여 넣었겠느냐? 이 문제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만일 산 영혼을 창조해 넣었다고 하면 그는 언제 죽었다는 말이냐? 또 정신적 작용을 영혼으로 본다면 ‘죽은 영혼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느냐’ 하는 이런 난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영혼의 창조론을 주장한다면 하나의 간접창조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땅에게 ‘수목을 내라’ 하심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개체의 영혼을 창조했다기보다 간접창조로 볼 수 있고, 그게 아닌 유전론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영혼은 그 조상으로부터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이니 인간영혼의 타락 혹은 부패성은 최초에 일시적으로 타락된 그것으로 계속 유전이 되는 것이지 그 후에 조상들이 지은 죄책임이 이중 삼중 사중으로 덧붙여질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 타락 후에, 아담 타락 후에 짓는 모든 죄는 이성과 몸이 죄를 짓는 것이지 죽은 영이 계속 죄를 짓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 주장대로라면 몇 대 위의 영이나, 수천 대를 거쳐 내려와서 유전 받은 영이나, 심지어는 타락된 아담의 영이나 모두가 죽었기 때문에 영의 원죄의 중량은 동일하다는 말이 된다.
그런고로 창조 면으로 볼 때는 간접창조요, 또 하나님의 섭리원리로 볼 때는 유전성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원죄문제나 그리스도의 무죄성이나 모든 인류의 구속성이 정확하게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된다.
※ 우리는 구태여 말하면 창조론을 받아들이되 개체 개별적 창조가 아닌 간접창조로 믿는다.
제九절. 원인(原人)의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형상의 여러 가지 견해)
一. 성경적 논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말은 원시상태의 인간에 대해서 하는 말인데 성경에 의하면 사람의 본질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1. 형상과 모양.
성경에 보면 ‘형상이라, 모양이라’는 두 가지 말을 썼는데 두 가지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모양이라’ 한 이것을 일반학자들은 원어학적으로 형상은 히브리어로 ‘셀렘’ 헬라어로는 ‘에이욘’, 모양은 히브리어로는 ‘데무트’ 헬라어로는 ‘호모이오시스’ 라고 하면서 성경을 언어학적인 면으로 해석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단어의 뜻도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언어학적인 그 뜻이 성경의 계시성을 완전히 설명하지를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왜 ‘형상이라’ 혹은 ‘모양이라’는 말로 기록을 했는지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여러 단어 중에 인간이 쓰는 용어로는 이 말이 가장 근사하기 때문에 썼다고 본다. 그러나 이 용어가 용어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계시성을 완전히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다.
※ 말(言)이 실체를 100% 증명치 못한다.
1) 지, 의, 성(거룩).
하나님의 형상은 지식적인 면과 의지적인 면과 거룩적인 면으로 구성됐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혜 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말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비 고정적 무형적 존재이시니 형상을 유형체의 고정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된다.
2) 생명과 영생.
사람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로 고찰할 때 그의 영성, 혹은 인격성, 혹은 속성, 혹은 본성적 본질적인 요소를 말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의 영적인 존재로 창조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영혼은 비록 신체와 연합되어 있으나 신체 없이도 독존할 수 있는 실유체이다. 이 점에서 사람은 영적 실유요,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한 인간의 신체도 그리스도의 구속을 점차적으로 덧입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충만히 입어 생명적 부활을 하게 되면 그 부활체는 영적 실유로 영체와 단일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은 생명과 영생이요 독존할 수 있는 실유라고 말하나 우리는 우리의 육체도 부활로서 하나님이 형상대로 되어짐을 믿는다.
3) 육의 몸.
신체는 영이 아닌 물질이지만 영혼과 연합하여 영혼의 자기 표현에 적당한 기구로 봉사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여진다.
사람의 신체는 특별히 영혼의 영생에 참여하는 적당한 기관과 하등 피조물계에 주관적인 행사를 하는 기구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육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인간의 활동성에서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4) 만물의 치리.
사람이 육해공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창조된 것도 그의 신적 형상의 일부로 보여진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관 씌우신 영화와 존귀는 이 만물치리의 권위를 가르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일반 피조물계를 통치하는 치리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2. 여러 파의 하나님의 형상관.
(1) 로마 카톨릭의 견해.
하나님의 형상을 로마 카톨릭에서는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구별한다.
그들 중에 성행하는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인간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신체의 불사성 같은 어떤 자연적 은사들을 사람에게 부여했다. 그리고 영성, 자유, 불사성은 자연적 재능들이니 이것들은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을 구성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자연적 능력들을 서로 조절하여 열등한 것을 고등한 것들에게 상당히 종속시켰는데 이렇게 설정된 조화를 자연적 의지라고 칭한다.
사람은 죄가 없었고 완전한 무죄상태로 살았다고 한다.
의지의 자유: 초자연의 불사이다.
(2) 헬라 정교회의 견해.
하나님의 형상은 독점적으로 그의 이성적 성질로 구성됐다고 말한다.
(3) 루터파의 견해.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의 원 의와 동일시하여 이 인간이 타락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다고 변명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원인이 가졌던 고상한 성품이었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된 것으로 본다.
※ 원상회복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게 된다. 사람의 실수로 하나님의 계획성이 사역성이 실패가 된 것을 그리스도로 통하여 원상복귀하는 것이 구원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우리가 루터파를 이단시하지 않고 있으나 하나님의 형상, 타락론, 구원론 등이 칼빈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 비슷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론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거룩성, 영성, 선성)
(4) 개혁파의 하나님의 형상관.
개혁파란 칼빈의 견해를 그대로 받은 계열을 말한다.
이 개혁파의 신학자들은 신의 형상이 독점적으로 사람의 이성적 성질로 구성됐다는 견해와, 이것이 창조주와의 도덕적 일치로 구성된다는 견해 사이에서 중간입장을 취하여 둘을 다 포함한다. 이 개혁파의 견해는 루터파보다 좀 더 융통성이 있고 포괄적이라고 볼 수 있다.
(5) 하나님의 형상의 광범위한 포함.
물론 개혁파 학자라고 해서 신의 형상에 대해 완전 통일성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여러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 다르기도 하다.
①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의 성질이 다른 여러 종의 동물들의 그것 보다 우월한 매권에 확장된다는 원리를 세웠다.
② 찰스 하지는 땅에 사는 자들 중에 하나님의 형상인 신적 유사를 반영하 는 것은 영이요 지성적 자유적 행위이니 이는 정당하게 보편적 주관권 을 부여받은 때문이라고 한다.
③ 윗시우스에 의하면 사람 안의 신의 형상이란 사람의 영적 불사적 성질 로서 이로 인해 그의 거룩으로 그의 주관권이 구성된다고 한다.
④ AA하지는 사람의 하나님의 형상을
ꊱ 그의 성질의 종류에 관한 것이니 사람은 하나님처럼 자유적 이성적 인격적 영으로 창조됐으며,
ꊲ 그는 하나님처럼 지식 의 진 성의 성질이 완전성을 가지고 창조되었 다.
ꊳ 인간이 가진 자연계 위의 주관권이 신과 같이 창조됐다고 말한다.
⑤ 웨스트민스트 표준문서는 소요리 문답(10)에서 원 의와(1번) 만물 위의 주관권(2번)의 두 가지 만을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켰 다. 그것이 곧 이성적이며 불사적인 영을 가지고 있고, 지식 의 참된 거룩을 부여받아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과 그것을 수행할 능력을 가지며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행복하며 주관권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위에 진술한 여러 견해들을 종합 요약하면 개혁파 입장에서 본 신의 형상론이 아래와 같이 몇 가지로 요약된다.
㉮ 타락해도 하나님의 형상성은 남아 있다.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성은 파괴되었다.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성은 상실되었다.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성은 변질되었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을 하나님의 본질을 입었다는 것으 로 착각.
㉰ 인간의 본질과 본성은 하나님의 본성의 일부인데 그 일부를 원료로 삼 아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말하는 자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이냐? 인간이 입은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락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과 본성도 타락이 된 것인가? 결국은 하나님의 일부가 타락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인간이 입은 하나님의 형상의 그 원료가 하나님의 일부라고 하면 신 일부 타락설이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유실되어 그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졌다고 하게 된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도로 찾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 혹은 영혼에서 찾기도 하고, 인격 모형에서도 찾기도 한다.
단순성, 영성, 불변성, 불사성 등의 품질들과 지 정 의 등의(심력들과) 자극 의식 및 자아결정의 자연적 현상들에서 신의 형상이 나온다.
⑥ 원 의에서 찾는다.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참 지식, 의, 거룩을 나타낸 그 본성과 지성적 도덕적 완전적 원 의에서 신의 형상을 말한다.
⑦ 신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
물질적 근원에서가 아니라 영혼이 영생에 참여하는 적당한 기관임과 하등 피조물에게 주관권을 행사하는 기구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신체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
ꊱ 부활 후 불사성.(부활체)
ꊲ 지배하고 다스림. ꋡ 영에. ꋢ 도덕성. ꋣ 신체.
⑧ 지상 주관권에서.
사람의 지상 주관권에서 권위적 신의 형상이 나온다.
만물을 지배, 발달 이것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자가 있다.
二. 신의 형상의 가치.
‘신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에 속하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다.
신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에 구성된다는 것을 개혁파는 부인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형상에 포함되는 요소들을 차별 없이 동등하게 중요시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신의 형상 안에서 영혼의 본질의 품질들을 잃어버리면 사람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사람이 그것들을 잃어버리더라도 원 의는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람이 신의 형상의 본성을 잃어버릴지라도 사람은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① 전자는 본질적인 하나님이 형상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
② 후자는 비 물질적인 하나님이 형상이니 죄로 인하여 상실될 수 없다고.
1. 하나님의 형상의 가치.
신의 형상은 독점적으로 자체적으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신의 형상의 가치는 객관에 의해 정해진 가치도 아니고, 어떤 상태적인 관계에 의해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닌 독립적으로 완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가치성은 무엇이 많다고 해서, 또는 누가 말했다고 해서 결정되는 객관적인 가치성은 아니다. 이것은 순 독립적이다.
2. 전가적 피동적 가치.
‘하나님의 형상’ 이라 할 때 우리가 ‘형상’ 이라는 명칭 용어를 사전학적으로 본다면 모순이 없지는 않다. 만일 ‘형상’ 이라는 명칭 용어가 사전학적인 뜻만 가지고 있다면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논란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사전학적 원어학적 뜻을 벗어나서 그 이상의 더 깊고 높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 많은 학자들이 신의 형상에 대해 많은 논리를 전개한다.
형상이란 사전학적으로 모양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니 ‘형상이라, 모양이라’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유형적인 것을 말한다.(생긴 꼴) 그러나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김, 얼굴의 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일정한 고정된 형체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형체가 없는 분이신데, 고정적인 유형체가 아니신데 어떻게 형상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고로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사전학적 어학을 초월해서 특수적인 뜻을 가진 명칭이요 용어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가치성에 있어서 전가적 가치성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의 독유성이 아니고 전가성적이니 이 형상을 타에게 전가시켜 그 형상을 전가 받은 자, 곧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가 원형이신 창조주처럼 인격적인 존재가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형상의 가치성이다.
내 모양을 닮게 할 수는 있지만 줄 수는 없는 것이다.
3. 활용적 가치성.
형상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비 활동성이요 무 활동성이다. 그러나 신의 형상은 활동성이요 활용성이다.
신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활동은 육체의 활동만이 아니고 의적 선적 도덕적 활동성이 있으니 이 활동성은 신의 형상에서 활동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했다고 하면 이 인간은 유형적인 신체적인 활동밖에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활동적인 면, 인격적 무형적 활동, 소위 말하는 정신적 의적 성적(聖的) 활동은 신의 형상의 활동성이니 이 활동성은 신체의 활동보다 더 세밀하고 신속하고 민감하고 다양하다. 이 신의 형상의 가치성은 금생뿐만 아니라 인간이 신령계에 가서도 영원히 활용하는 것이니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인 것이다.
제十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형상관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다. ‘형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이냐’ 하는 그 문제만을 가지고 많은 학자들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논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왜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는가’ 하는데 대한 그 원인이나 동기나,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한 분이 없다.
우리가 아래의 이치를 연구하다가 모를 때에는 위의 이치를 깨닫고 나면 아래 이치는 자연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이냐’ 하며
신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하고,
이성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하고,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고,
또 영과 육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도 하고,
또 원시인간의 원 의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고,
또 타락하므로 하나님의 형상 유실론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각양의 논리들을 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원인이나 동기나 목적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임을 자연적으로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자는 ‘하나님이 형상이란 무엇이냐’ 하는데 대해 장시간 두고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을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느냐? 짓자고 할 때는 동기와 원인과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니냐?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이 아니고 영원 전서부터 해 오고 있었다.
타락을 하지 않았다면 구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타락을 허용한 것이니 타락은 구원순서 중에 없어서는 안될 순서 중에 하나이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행복한 안락처, 행복한 사건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데 최고의 행복적 낙원처가 어디냐? 그 곳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지었다. 하나님이 인격자가 아니었더라면, 천국의 안락처가 없었더라면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에서의 구원의 일반적인 개념은 ‘에덴동산에서 마음대로 살아라’ 했는데 타락하므로 비참해졌기 때문에,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원시상태로 살기를 원했는데 타락을 했으므로 이제는 구원이 필요하게 되어 원상복구 시켜 주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개체가 전체가 되면 극락이라고 한다. ‘타락하기 전 원시상태로 돌아가자’ 이게 구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관은 전혀 다르다.
기독자는 원인 동기 목적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당사자는 바로 나이기 때문에!
一. 원인.
신이 모든 피조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신 것은 피조물을 다 만들어 놓고 보니 인간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는 느낌이 나서 인간을 만든 것처럼 볼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보는 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피조물을 위하여 지음받은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보면 창조의 순서로는 만물이 선행적으로 피조되었고 인간은 마지막에 지음을 받았지만 인간을 위해서 만물을 지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만물을 위해 지었다고 하면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짓게 된 원인이나 동기는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논리가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지으신 것도 아니요, 또 하나님 자신에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절대로 필요해서, 즉 인간이 없으므로 당신의 절대성이나 완전성에 부족감이 있어서 인간을 지으신 것도 아닌 다만 인간 자신을 위해 인간을 지으신 것이니 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당신의 형상이 곧 인격성이기 때문에 당신의 인격성이란 곧 속성을 말하는 것이니 이 속성인 인격성은 쾌락성, 향락성, 만족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인격성이 원인이 되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격성이 없는 무 인격적 비 인격적인 존재였더라면 인간을 창조할 수도 없고,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이 인격자이기 때문에 그 인격 대 인격, 형상 대 형상의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원인은 곧 당신의 형상인 인격성 때문이다.
※ 덮어놓고 부는 것이 나팔인가? 두드리면 북인가?
의사는 신체의 구조의 명칭을 알지만 일반사람은 몸 속의 것은 무조건 창자라고 한다.
하나님 당신이 인격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를 인격자로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격 대 인격의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지으셨다.
사실 ‘인격이라, 성질이라’ 해도 그 표현이 완전치 못하다. 인간의 용어를 빌려쓰자니 ‘형상’ 이라고 부른다.
인격성은 어떤 기관인가? 기쁨을 만족을 쾌락을 느끼는 기관이요 형상이다. 좋으니까 넣었지 나쁘면 이것을 안 넣었겠지! 인격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곳에 넣어도 느낄 줄 모를 것이고, 이렇다면 인격이라는 이름도 글자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인격자이기 때문에 이 인간이 누릴 곳을 만들어 놓은 것이 천국이다. 인격자이기 때문에 행복적인 쾌락적인 이런 곳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 곳을 추구하는 성분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자기의 주관적 행복적인 울타리(라인, 보금자리, 안락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 자기가 자기를 축소시키지 말라!
二. 동기.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동기는 만물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기 위해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독존적으로 생존적으로 인격적으로 당신의 무한계 완전계 신령계를 지배하시고 사용하시고 누리실 때에 그 가치성이 형상인 인격성에서 효율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그 형상대로 짓게 된 것이다.
만일 신령계 무한계 완전계가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인간을 지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 짓고자 하는 동기도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 신령계 무한계 쾌락계 향락계 만족계를 그 만큼 효율적으로 누리는 데는 신의 형상인 인격성이 필요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게 된 것이다.
1. 신령계의 쾌락성이 동기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 신령계가 어떤 곳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곳은 물질계가 아님이 틀림이 없다. 물질계는 아니지만 물질계 이상으로 그 곳은 쾌락성이 충만한 곳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사도요한이 진리로 인해 밧모섬에 귀향 가서 있을 때 주님은 그 요한에게 미래의 신령계를 물질계처럼 보여 주셨는데 요한이 그 세계를 물질계처럼 보기는 했으나 그것은 물질계가 아니고 신령계임이 틀림이 없다. 요한이 아직 죽지 않고 영육 결합체로 있을 때 영안으로 본 그것을 이성을 통하여 느끼도록 했기 때문에 물질계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깊이 기도하고 있을 때 그는 3층 천에 올라가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바울이 본 그 세계도 신령계임이 틀림이 없다.
요한에게 보여주신 그 세계와 바울에게 보여주신 그 신령계는 각이한 곳이 아니고 동일한 곳이었는데 이것을 바울은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고 무엇으로 상징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로 말할 수 없는 세계’ 라고 말했고, 요한은 자기가 본 그 세계를 그 때 당시에 물질계에서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최고 가치 있고 좋은 명칭들을 들어서 기록한 것인데 그 때 당시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명칭이나 용어는 극히 제한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본 그것을 인간이 사용하는 명칭이나 용어로 정확하게 표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 세상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명칭과 용어를 인용해서 표현한 것이었다.
요한이 말한 대리석 혹은 진주 열 두 보석 등은 세상인간들이 말하는 물질의 보석은 아니다. 즉 옛날 페르시아 왕궁을 꾸몄던(에1장) 보석과 같은 물질의 보석은 물론 아니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그 명칭은 그 때 흔히 사용하던 명칭을 그대로 옮겨 기록한 것이다. 즉 명칭은 그 명칭이라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그 보석이란 페르시아 왕궁을 꾸몄던 보석과 같은 그 보석이 아닌 신령한 보석이다.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의 쾌락성 역시 이 세상에서의 타락한 인간들이 쾌락이라고 하는 그런 저속하고 조잡하고 저질적인 쾌락은 아니다.
우리가 옛날 신화 같은 것을 믿을 수 없지만 그 신화에 보면 마음 좋은 사람이 깊은 산에 들어가서 신령(신선)들을 보았는데 그들의 쾌락성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흥풀이 하는 그런 저속한 쾌락성이 아닌 조용한 가운데서 글짓기나 장기나 바둑을 두고 있는 그런 것을 말했다. 이것은 일종의 신령계의 쾌락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만일 저속하고 무식한 사람이 그것을 본다면 쾌락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성경에 보면 그 나라의 쾌락성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쾌락이요, 노래부르는 쾌락이요, 하나님 앞에서 합창을 하며 서로 화답하는 쾌락이라고 했다. 그 나라의 쾌락성은 물론 이 세상에 있는 쾌락이라고 하는 쾌락과는 전혀 다르게 고차원적이다. 불변적 영원적 쾌락성임이 틀림이 없다.
이런 쾌락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쾌락은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성으로서만 누릴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쾌락이다. 하나님의 인격성이 아니고는 그 세상의 쾌락을 누릴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 쾌락은 어떤 존재든지, 즉 목석이나 금수라도 그 곳에 가면 누리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명철 민감 민첩 민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하면 인적인 그 인격으로서는 절대로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천국은 성분적으로 성질적으로 단일된 곳인고로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 세계에서 쾌락과 행복을 느끼게 하고 누리게 하기 위해 지으셨으니 이것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게 된 동기이다.
※ 바울은 천국이 너무 쾌락적이기 때문에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심히 도취해 버리면 어떤 때는 내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고깃덩어리가 3층 천에 올라간 것이 아니고 영안의 눈으로 생생하게 본 것이다. 이것을 글로 쓰면 축소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 바다만큼 넓다’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축소되어 버린다. 인간이 쓰는 용어나 문자로써 천국을 다 형용을 못한다.
천국은 요한이 인간들이 쓰는 명칭 용어를 가지고 표현한 그 정도가 아니고 그 보다 더하다. 요한이 본 그것이 전부라면 인간이 얼마든지 그 정도는 꾸며놓을 수 있다. 천국은 그 이상이다.(고후9:15, 12:4)
그 세계가 너무 쾌락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선성: 자타에게 영원히 유익을 주는 것.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좋아하면 하나님은 시기가 날까? ‘너 좋으니 나 좋고, 나 좋으니 너 좋고. 그 성도가 은혜 받으니 나도 좋고’ 하는 이것이 생명의 세계요,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그것이 나온 선성이다.
천국에 쾌락성이 없으면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동기가 안 일어났을 것이다.
천국을 말한 본문 문자는
성경은 천국을 축소시켜 놓은 천국의 축소판이다.
2. 천국의 무한성이 동기가 됨.
하나님이 누리시던 혹은 누리고 계시던 그 천국은 과거적으로 무한히(시간적) 누려왔고, 미래적으로도 무한히 누릴 천국이다. 천국의 쾌락성이란 불쾌성이 병행되거나 고락이 교체됨이 없다. 시간적으로 영원히 누리는 무한한 천국이다.
만일 그 신령계가 유한된 낙원의 곳이라면 얼마 가다가 없어질 것이니 구태여 인간을 만들어서 그 인간들로 하여금 그 세계(낙원)를 누리도록 인격성을 입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세계는 시간적으로 미래적으로 무한히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되 신의 모형인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요, 또 그 신령계의 쾌락성은 양적으로 당신 홀로 누리시기에 알맞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와 누릴지라도 축소되거나 삭감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 외에 어떤 다른 존재가 나타나서 그 쾌락성을 같이 누리게 될 때 당신이 누릴 쾌락성의 1/2이 삭감되거나 손실이 되어 당신이 누릴 그 쾌감성이 빈약해진다고 하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존재가 천국의 그 쾌락을 함께 누린다고 할지라도 각자가 그 천국을 누리는 누림성이 양적 질적으로 감소되지 않는다. 아무리 먹을 사람이 많아도 먹을 것이 무한하고, 마실 자가 아무리 많아도 마실 것이 무한하기 때문에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 무한한 것을 홀로 누리시기보다는 이것을 다른 존재로 하여금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 대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것이고, 또 이것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신의 형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 천국의 무한성: ① 시간적으로 ② 분량적으로 무한하다.
이렇게 무한한 천국을 나(하나님) 혼자 누릴 필요가 뭐가 있는가?
3. 천국의 완전성.
이 신령계는 무한계요 완전계이다.
완전이라는 말은 고통이나 불행적인 것이 병행하던가 혹은 혼합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한 완전이라는 말은 이 이상 더 좋은 곳이 없다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쾌락적 완전이요 향락적 완전이니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미비하거나 미숙하거나 불완전한 것이 결코 없는 곳으로 양적이라기보다 질적인 면의 완전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천국 자체는 양적 질적 완전이지만 세상에서 구원 얻어 천국에 간 성도들은 거의가 그 천국의 완전에 미달된 상태다. 능력적 미달이요 지능적 미달이요 기능적 미달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현존세상에서 이 천국을 바라보고 자기를 하나님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가야만 한다.
※ 천국이라는 천국은 모든 것이 최고 극치요 완전이다.
4. 천국의 충만성.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완전이라는 말에는 충만이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 충만이란 물질계에서 물질적인 것은 사용하면 사용하는 것만큼, 시간이 흐르면 흐른 것만큼 감소가 되듯이 감소되듯이, 즉 이 세상에서 어떤 물질이 있는데 그 물질을 사용하면 사용한 것만큼 감소요, 세월이 흐른 것만큼 감소가 되듯이 감소되는 것이 아닌 계속적으로 솟아나 넘쳐흐른다는 말이다. 그릇에 있는 물은 마신 것만큼 줄어들지만 물이 솟아나는 샘에서는 언제나 그 물이 넘쳐흐르듯이 감소가 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넘쳐흐른다는 말이다. 마신다고 먹는다고 사용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계속 넘쳐흐른다는 말이다.
이 천국은 물론 외래적인 기쁨도 있으나 내발적 기쁨도 있고, 또한 외래적 만족도 있고 내발적인 만족도 있다. 이 천국은 모든 것이 거룩하고 행복적인 것이 언제나 충만하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이 충만을 인간으로 하여금 맛을 보게 하고 먹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다.
※ 세상물질은 사용할 수록 감소되고,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록 빨리 줄어든다.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자꾸 흘러 넘쳐 나온다는 말이다. 천국은 충만한 곳.
三. 우리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목적.
하나님께서 신령계와 물질계를 창조하실 때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특별히 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심에는 필연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목적성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작은 존재라도 아무 계획이나 목적도 없이 지으실 분이 아니신데 이렇게 거대한 물질계 혹은 우주계를 비판하고 이 물질계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신의 형상을 가진 인격자로 만듦에 대해서 아무런 목적없이 지으셨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이 목적성에 대해서도 이러 이설들이 없지는 않다.
이 목적성에 대해서
(1) 혹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 물질계를 맡겨서 통치하고 지배하고 수호하게 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설과,
(2) 당신이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목적으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설과,
(3)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 이렇게 지었다는 설이 있다.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면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성과 존영성을 알아드릴 자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알리기 위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한다.
(4) 계약적 대상을 삼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으니 상대성 원리처럼 당신의 거룩성과 선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인격자로 지어서 선악과를 만들어 그것으로 계약조건을 삼아 인간과 계약을 맺게 된 것이라고 함이니,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가 아니면 계약적 상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라야 계약의 상대자가 되기 때문에 계약적 상대자를 삼기 위해서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는 설들이 있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에 대해 많은 이설들이 있다. 그러나 원인과 동기에 목적에 대해 말한 학자들은 없다.
목적성에 있어서
(1) 물질계를 통치하고 지배하게 하기 위해서(창1:27): 성경 해석상으로 대개는 이렇게 본다.
이렇게 되면 원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가 없어진다. 만물을 창조해 놓고 보니 통치할 자, 다스릴 자가 필요해서 만든 것처럼 된다. 이것은 만물을 위해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2) 영광을 받기 위해서: 일반물질로 이미 누리고 있는 그 영광이 부족해서 인간을 지었다고 보게 된다.
‘사람의 제 1되는 목적은 그를 영화롭게, 영원히 즐겁게 하는 것’ - 말은 맞는데 해석을 붙이면 틀리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내가 그 분의 영광과 그 분의 속성을 입음으로 그 분은 영광이 되고 좋아하신다. 이 세상은 받은 것으로 되지만 천국은 주는 것으로 된다. 인간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
(3) 하나님은 전능자 완전자 만능자이지만 누가 알아주는 자가 있어야지! 만물을 지어 놓아 봐야 인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이 능력을 알아줄 자로 인격을 가진 인간을 만들었고, 당신을 알아달라고 홍수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전쟁으로 인간에게 본때를 보여준다고?
(4) 계약적 대상을 삼기 위해서.
이 네 가지를 신관에 갖다 대면 다 달라진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목적.
1. 신자(神子)를 삼기 위해서.(엡1:5)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설들도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다 성경을 근거해서 한 말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신론에 의해 본다고 하면 이 이설들은 아무래도 불완전함 감을 피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속성 면이나 완전성 면에서 볼 때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한 신의 자녀를 삼기 위한 것이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목적이라는 것이 가장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자녀는 필연 그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은 외모를 닮는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본질과 본성적으로 닮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형상이란 외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앞 절에서 말한 바가 있다. 예컨대 돼지새끼는 그 아비를 닮았고, 개는 개를 닮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자로 만들었으니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인간의 원인의 무형성의 원 의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없어졌으나(전적 타락) 신의 형상 자체가 전혀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곧 신의 형상과 같이 지음받은 인간의 원인이 변질되었다는 말이니, 변질이 되었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변질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질 자체가 변질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성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을 했어도 신의 형상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을 수 있었으니 대형을 입어 원상복구가 되었고, 대행을 입어 원상복구 이상으로 의로워져 신의 새생명으로 연결되어 살아났으니 본질과 본성적 생명적으로 신의 자녀가 된 것이다.
신의 자녀가 된다는 이 말은 법적으로 된 것이 아니고 본질과 본성적으로 되었다는 말이니 본질과 본성적으로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과 본성적으로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존재가 있지만 천하에 어떤 존재도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혹은 부르는 존재는 없다. 객관적으로 부르지 못하게 해서 자기는 부르고 싶으나 못 부르는 것이 아니고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지 못한고로, 또 본질과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생각조차도 없는 것이다.
※ 나 닮도록 만들자. 왜? 자녀를 삼기 위해서!
2. 신의 신부를 삼기 위해서.
이에 관해 기록된 성경은 계시록, 에베소서, 아가서, 예레미야, 호세아.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목적은 당신의 애성은 참된 애성(아가페)이니 이 애성은 단면적 애성이 아니고 복합적 다양적 애성인고로 그 애성을 부어주고 싶어서, 부어주기 위해서 신부를 삼는다고 말한다.
이 애성은 인인 간에 주고받는 애성이 혈육적 사랑이 다르고, 우정적 상대적 사랑이 다르고, 이성적 애성이 다른 것처럼(물론 그 외에도 애성의 성질을 구별하면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단면적이고 각양적인 사랑이 아니고 복합 다양적이기 때문에 수애자가 그 사랑을 받을 때에는 느낌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다.
시애자인 하나님이 사랑을 주실 때 수애자로서 그 사랑을 받는 자가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때에는 혈육적인 사랑을 받는 것을 느끼게 되고, 또 ‘당신이여 여보 주여 나의 신랑이여’ 하게 될 때는 애로스적 사랑을 받는 것으로 느껴지는 등 같은 사건에서 수애성의 감정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고로 그 분의 사랑을 어떤 사랑이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것을 성경은 아가페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지체적으로 이 아가페는 없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아가페 사랑을 받아서 남에게 줄 수 있으니 이것은 발생적이 아니고 수동적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성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족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신부와 신랑의 깊은 애정의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 개는 개끼리 결혼하고 소는 소끼리 결혼한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당신의 아내를 삼기 위해서. 만고불변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로 삼으신 것을 누구도 막지 못한다. 신부로 삼지 않으려면 당신의 형상대로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부가 신랑의 마음을 몰라주면 되겠느냐?
하나님의 매를 맞으면서, 하나님의 권고를 받으면서 사랑을 느낀다.
세상 육신의 부모에게는 이 사랑이 없다.
3. 영원한 후사를 삼기 위해서.(엡3:6)
신이 존재하고 계시던 그 신령계는 신성을 가진 분만이, 혹은 절대성 완전성을 가지신 분만이 통치 지배 사용하고 누리고 느낄 수가 있다. 신의 성품을 가지지 못한 자는 이 신령계를 통치도 사용도 지배도 누리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 나라를 당신과 함께 당신처럼 통치 지배 사용 누리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짓지 아니하면 안 되었던 것이다.
※ 후사는 존재적 후사가 아닌 사역적 후사이다.(사용적 활용적)
신의 성품이 아니면 그 나라를 통치 지배 사용 누리고 느끼지 못한다.
제十一절. 신의 형상인 인간의 원시상태.
사람의 원시상태에 대해 구구한 학설들이 있다. 혹 학자들 중에는 원숭이가 진화돼서 사람이 되었다는 터무니없는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고, 또 혹자들은 사람의 원시상태가 신체적 모양은 물론 원숭이와 구별되어 있지만 지능 면이 원숭이와 동등할 정도의 저능적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저능적 지능이라는 말은 비판성이나 평가성이나 판단성이, 그리고 감성인 시감성 청감성 등 모든 면이 원숭이와 다를 바 없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진보하고 발전하여 의복도 입고 거처지도 만들고 또 나아가서는 하등동물을 양육도 하고 지배도 함으로써 원숭이보다 지능 면이 점점 발달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자들도 있다.
또 혹자들은 인간과 원숭이가 원시상태에서는 그 차이점이 다른 동물들의 차이정도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차별의 거리가 점점 멀어진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정통학자들은 사람은 원시인 본래부터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자로 지어졌다고 말한다.
※ 혹자들은 원시상태를
① 원숭이 중에 하나가 진화되고 진화돼서 사람이 된 것이라고 하기도 하 고.
② 인간이 원시상태에서는 원숭이는 아니지만 원숭이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상태였지만 발전됨에 판단력과 비판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③ 인간은 원숭이와 다른 면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여러 피조물 중에 하나로 지은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여러 피조물들과 동등목적으로 지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대개의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수많은 일반적 피조물 중의 하나로 지었지만 다만 다른 피조물보다 조금 우수하게 특수하게 지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피조물 중에 어느 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목적선택의 제 1목적물이라는 것을 적극적인 면에서 부인하지는 않으나 그 사실 자체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자연적으로 부인이 되어 인간을 하나님의 제 1목적물인 특수적인 피조물로 보지 않고 다만 위치적인 면에서 차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비 생명적인 물체와 생명적인 물체와의 차등성, 또 생명적인 물체(식물성)와 생명적인 물체이면서 비 감각적 비 본능적 물체와 감각적 본능적인 물체와의 차이성, 같은 동물성이라 할지라도 곤충에 포함되는 동물성과 곤충이 아닌 파충류의 동물성과의 차이성처럼 인간이 일반동물보다 다른 것은, 혹은 차이가 있다고 하면 그런 면에서의 차이밖에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은 동물보다 탐구력 진취성 발전성 진보성이 우세한 차이밖에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만일 인간이 여러 피조물들 중에 하나로 지음 받았지만 다만 피조성에 있어서 여러 피조물들에 비해 성질적 차이뿐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특수적이고 영원한 목적성과 결과성은 부인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원시상태에서부터 그 구조성에서 일반적 피조물에 비해 지능적인 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독특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성을 가진 자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즉 인간을 지으시되 일반적인 피조물보다 여러 면을 조금 우세하게 특수하게 지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원인 동기 목적이 중요한 것이다.
※ 일반적인 학자들의 견해.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인간도 역시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로 지음 받았다. 여러 피조물을 짓는 중에 ‘무엇도 만들어 볼까, 무엇도 지어볼까’ 하며 계획 없이 하다보니 ‘사람도 하나 지어볼까’ 해서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
돌은 무생명체, 나무는 유생명체 다만 차이는 생명. 나무는 감각성과 본능성은 없으나 동물 곤충 파충류는 감각성 본능성을 가졌다. 인간은 이것들보다 조금 우세하게 지었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보다 인간은 최고로 지음받은 것이라고 한다.
철학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무생물을 짓고 나서 실력이 느니까 그 다음에는 유생명체를 지었고, 또 실력이 느니까 그 다음에는 인간을 지은 것이라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고급 피조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수하게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원인 동기 목적성이 뚜렷한고로 그 원인 동기 목적성을 위해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당신의 원대한 목적성이 없고 인간에게 이 세상의 삶이 다라고 하면 인간은 목석이나 금수보다 더 못할 때가 많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지 않으면 안 되는 동기 원인 목적이 있다. 인간을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 아니다.
一. 원시상태의 신의 형상.
1. 타락 이전 인간의 원시상태.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타락 이전 본래 지음 받을 그 당시에 인간의 구조는 완전한 인간으로 지음받은 것이다.
인간구조의 완전성이란 인간은 신체가 있고 그 신체 속에 비 물질적인 생명성 감각성 본능성이 있으니 인간의 신체를 물질적인 인간이라고 하면 이 비 물질적인 면은 비 물질적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는 성분으로 이것을 도덕성 혹은 인격성이라고도 하고, 철학적으로는 이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성 속에는 지혜지식성 도덕성 주권성이 다 들어 있다. 이것을 비 물질적 이성적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같은 비 물질성이면서 이성적인 인간보다 탁월한 영적 인격성이 있으니 영적 인격성이란 물질적 존재를 떠나서도, 이성적 인간을 떠나서도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인격성을 말한다.
이성적 인격성은 신체와 결합되어 있고, 신체를 떠나서는 자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성적인 인격성과 신체와는 논리적으로는 분리가 되나 실체적으로는 분리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적 인격성이란 신체나 이성적 인격성을 떠나서도 독립적으로 존재, 활동할 수 있는 기관이다. 즉 신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다가 자연생명이 죽을 때 신체와 이성도 동시에 활동작용이 중단이 되어 죽지만 영적 인격성은 자연생명이 죽게 되면 이 물질계를 벗어나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별개의 신령계에 독립적으로 가서 활동하는 존재이다. 중생한 영은 천국에서 산 영으로 활동하고, 중생치 못한 영은 지옥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적 인간, 이성적 인간, 영적 인간이 결합된 것을 영육 결합적 인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현존세상에서는 신체가 없는 영적 인간만을 보고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또 영이 없는 이성만을 가지고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신체와 이성과 영이 결합된 그 전부를 지칭하여 인간이라고 말을 한다.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인데 원시인간이 현재의 우리 인간과 비교해서 그 차이점이 구조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구조현상은 신체 이성 영) 원시인간은 죄에 감염될 수 있는 소위 가범성적, 가사성적으로 되어 있었으나 죄가 감염되지는 아니했던 상태가 다른 것이다.
혹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죄에 감염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는 자도 있으니, 즉 현재 우리 인간이 출생 당시(간접창조 받음)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처럼 원시인간도 하나님께서 직접창조(간접창조의 반대) 하실 때 타락된 인간으로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지음받은 후에 인간이 잘못하여 죄에 감염된 것이 아니고 죄에 감염된 인간으로 창조함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볼 수 없다. 엄연히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의 상태를 선을 그어서 말할 수 있다. 타락 이전에는 그 인간이 죄에 감염되지 않은, 즉 죄악성이 없는 신의 형상이요, 타락한 후에는 죄악성에 감염돼 죄악성이 있는 인간으로 되어진 것이다.
※ 인간이라고 하는 인간은
논리적으로는 분리가 되나 활동적 실체적으로는 분리가 어렵다.
영적인 인간은 육을 떠나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
원시인간이나 현대인간이나 구조성에는 똑같다. 다른 것은 혹자들은
① 창조 당시 죄악성이 있는 인간으로 지음 받았다.
② 가범성만 있었지 죄악성은 없다. 영생이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다.
2. 감염성을 가졌으나 감염되지 않은 원시상태의 인간.
혹자들 중에 인간은 원시인간 때부터 죄악성에 감염되어 있다고 하나 이것은 억설에 지나지 않는다. 최초의 원시인은 죄악성에 감염됨도 없고 신의 거룩한 성품이 감염된 것도 없었다. 다만 다른 피조물보다 다른 점은 이 인간은 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그 인격성에는 감염성이 있으니 원시인간은 감염성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다. 타 피조물들은 죄에 감염되거나 의에 감염되는 성분이 없다.
일부 학자들 중에는 물질계악설을 주장하여(그노시스주의) 물질은 다 죄요 악이라고 하나 실지로는 물질 자체가 악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지으시고 ‘선하다’고 했다. 물질이 악에게 등용된다고 해서 그 물질에 죄악성이 감염되어 죄화될 수는 없다. 가령 의사의 손에 칼이나 망치가 들리면 좋게 쓰이지만 반대로 악인의 손에 들려서 악하게 쓰여졌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한 인간이 악으로 감염되어서 악을 지은 것이지 그 도구까지 악해진 것은 아니다. 또한 본능을 가진 동물의 경우에 그 동물은 피조원리(예: 사납게 지음받은 맹수)에 따라 사는 것뿐이지 그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었다고 해서 죄악에 감염된다거나, 그 동물이 성자들에게 쓰임 받는다고 해서 거룩한 신의 성품을 입거나 하지는 않는다.
인간만이 감염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던 그에 대한 죄책임을 지지 않는다. 즉 인간이 흉기를 들어 사람을 죽인 책임을 인간과 흉기가 반반씩 나눠서 지는 것이 아니고 전부 인간이 지는 것이고, 그 죄로 인해 그 죄악성이 사람에게만 감염되는 것이지 그 흉기에게는 죄악성이 감염되지 않는다.
동물들은 그 종류에 따라, 또는 훈련을 받음에 따라 그 성질이 사납기도 하고 유순하기도 하지만 성질과 죄악성과는 별개이다. 일반적으로 성질이 유순하면 선이라 하고, 잔혹하면 죄악성으로 보지만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은 선악의 구별을 그렇게 하지 않고 신의 거룩한 성품만이 선이요 의요, 신의 성품이 아닌 이질적 성품은 그 성질이 인간 면에서 아무리 이타적이라 할지라도 선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든다면 공자 같은 이는 인간적으로 볼 때 결점이 없으리만큼 유순하지만 그 유순이 선일까? 그 유순은 신의 성품을 입은 유순이 아니고 인적인 면에서의 유순이기 때문에 선이 아니다. 인간의 인격성 전부는 선성이 아니고 의성이 아니고 죄악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칼로 사람을 죽이면 사람을 죽인 그 칼도 감염되고 악해지느냐? 감염성은 인간 외에는 없다. 맹수들은 원래 그렇게 지음 받았다. 사나움=악, 유순=선이 아니다.
동물들은 훈련과 교육에 따라서 인간의 명령에 따르는 것에 차이가 있으나 이것은 감염이 아니다. 인간 외에는 감염성을 입을 필요가 없다. 인간은 감염될 수 있도록 지었다. 타락 전에 감염될 자로 지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지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것이 동시에 감염될 수 없다. 죄에 감염이 안 되려면 적극적으로 의에 감염자로 살면 된다.
3.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원시상태의 인간.(양면적 감염성자이지 동시 적 감염성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감염되도록 지으셨는데 이것은 신의 성품을 감염시킬 목적으로 그렇게 지으신 것이다. 다만 인간이 선이나 의, 또는 죄악성으로 감염될 수 있는데 동시에 양면적 요소가 감염되지는 않는다. 그런고로 현재 인간이 죄악이 감염되고 있을 때 동시에 의를 감염시킬 수 없고, 의로 감염되고 있을 때 동시에 죄가 감염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인간이 계속적으로 신에게 피동 되고 동화되어 선과 의를 감염시키고 있을 때에는 죄가 감염되지를 않는다. 그러나 의를 감염시켜 나가는 그 일을 스스로 중단하게 될 때에 죄에 감염되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죄에 감염되지 않게 하려면 소극적으로 죄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계속적으로 의에 감염되는 활동만 하면 죄의 감염은 되지 않는다. 현재 죄에 감염되고 있는 동안에도 인간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의에 감염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의에 감염성의 우선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의에 감염성의 우선권을 가지게 지은 것은 계시목적에서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사건선택이 있었으니 이 사건선택이란 당신이 누리고 활용하시는 그 신령계를 ‘다른 누구와 함께 누렸으면!’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그 천국을 함께 누릴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으니 여기서 존재선택이 나오는 것이니 인간이 그 천국을 하나님처럼 누리려면 신의 성품인 의를 입지 않고는(감염)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고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감염성을 넣어서 신의 성품을 감염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의도 죄도 감염될 수 있으나, 즉 빨간 물이나 검은 물에 염색될 수 있으나 의에 대한 감염 면이 우선적이다.
물론 우리를 의만 감염이 되고 죄악성은 감염되지 않도록 지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선성의 사역의 계획과 설계가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의의 감염의 적극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느껴진다. 즉 ‘인생아, 너는 의로 감염되지 않으면 죄가 감염이 되는 존재이니 죄에 감염이 안 되려면 부절이 휴식 없이 계속적으로 의에 감염되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기독자들은(신의 대 선택의 제 1목적물로 지음받은 존재) 죄에 감염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혀 감염된 죄악성을 다 탈색을 시켜 중생케 했으므로 중생한 자의 죄악성을 입은 인격은 부활할 때 완전히 제거되고 만다. 우리 기독자는 현세에서 입은 모든 죄악성을 영원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탈색되고 제거되어 신의 성품을 입은 선성만을 영원히 입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다.
※ 인간은 죄와 의가 동시에 감염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마음도 활동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잘 때도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자란다. 공백기간은 없다.
인간을 감염성자로 지은 것은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런 자로 지었다는 것이 참 놀랍다.
二.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인격)의 원상.
인간은 하나님의 대 구원선택의 목적물이기 때문에 인격적 실유적으로 창조되었고, 목석이나 금수와는 엄연히 구별이 되었다.
인간의 인격의 주체성인 영은 그 내용에 있어서 단순성 영성 불가견성 비 물질성 불멸성 등의 품질들과, 지정(知情) 등의 심력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 기능으로 특별히 자신을 세상과 하나님을 관련하여 아는 것과 도덕적(일반도덕과 생명도덕) 목적을 향하여 결정을 하는 이중작용을 한다.
※ 특수적이 아닌 신자나 불신자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1. 영구성.
인간의 영은 불사적이어서 영원히 영원히 의식적 존재로 영존한다.
인간이 신적 형상의 제 1목적물이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되는 것을 중지하기 전에는 잃어버릴 수가 없다. 혹 정신이상자라 해도 그것이 희미할지는 모르지만 파멸되지는 않는다.
※ 미 중생자는 영의 작용을 느끼지 못한다. 느낀다고 한다면 느끼는 그것은 영이 아닌 이성이다.
‘영이 죽었다’는 말을 영은 활동을 하는데 다만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라고 하는 자가 있다.
이성의 활동을 영의 활동으로 본다면 중생한 영도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말이 된다.
미 중생자는 활동적으로도 죄를 짓고 영으로 살아도 죄짓는다. 미 중생자가 육신+영의 결합체로 있을 때는 활동을 하지 못한다. 발광체가 없을 때는 반사체가 그 기능이 마비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과 결합되면 활동을 한다. 영은 물질계를 벗어나면 독립적으로 활동을 한다.
형상(인격성): 영은 완전 독립적 인격이시다.
이성(인격성): 육체와 영혼을 떠나서는 활동을 못한다.
영의 활동이 이성에 반사한다. 신체는 이성의 희로애락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이성은 영의 반사작용을 예민하게 한다.
2. 성숙성.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을 성숙한 것으로 지었다. 사람 역시도 성숙한 상태로 지으셨으나 최초에 지음을 받은 그 즉시에 인격성은 진공상태였다. 왜냐하면 경험도 체험수학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험적 지식이나 체험적 지식이나 수학적 지식에 있어서 유아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지 않게 쉽게 터득이 되고 쉽게 인식이 되고 인식된 것을 사용 활용하게 되었다. 어떤 현상을 보고 즉각적으로 분석해서 적합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명철한 두뇌였다. 그러나 경험적 지능은 공백상태였다.
영이 죽은 후에도 인격적 작용을 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가사에 곡을 붙이는 것이라던가, 꽃을 보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격의 작용이다.
인간의 영은 인격의 주체성이요, 이성이 마비되면 동물과 같다.
원인은
① 성숙한 육체.
② 이성적 정신적 성숙.
③ 과거적 기억은 없으나 성숙성에 있어서 영아성이 아닌 진공상태였다.
三. 도덕적(인격) 하나님의 형상의 원상.
인간은 인격적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 목적으로 삼으며, 자기를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의 유한한 반영으로 만드는 정서 및 의지의 선한 경향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 도덕이라는 말은 유교의 전용적인 용어가 되었고,
자비라는 말은 불교의 전용적인 용어가 되었고,
구원과 감사는 기독교의 전용적인 용어가 되었다.
짐승들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면에서의 순종이지 인격적인 면에서의 순종은 아니다.
타락 전에 아담과 하와의 사랑은 본능일까, 이성일까? 짐승과는 다른 이성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었다. 무엇을 보고 일어나는 그 마음이 도덕성이다.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도덕성이요 인격성이다.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인격성이요 곧 도덕성이다.
원시상태의 그 영혼이 천국에서 마음대로 활용 활동할 수 있겠느냐? 단일성이 아닌고로 갈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어디까지나 모형이다. 단일성적이 아닌 것은 천국에 용납이 안 된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1. 적극적 성.(聖)
이 성(聖)이라는 낱말 자체도 우리가 해석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거룩에 대해 정의를 내린 것이 일치하지 못하고 각이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
거룩이라는 말은 원어학적으로 직역하면 구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구별이라는 말과 거룩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하기는 어렵다.
거룩이라는 말은 원래는 하나님에게만 적용이 되는 말로 다른 모든 존재는 불완전성이지만 하나님은 완전이라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라는 말이요, 다른 모든 존재는 비 절대적이지만 하나님만은 절대자라는 뜻에서 거룩이라는 말이다.
그 외에 같은 피조물이면서 소와 말은 같은 피조물이면서 소는 소요 말은 말이라는 면으로 구별할 때 이것도 구별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하기오스(거룩)라는 말은 붙이지 않는다. 많은 소들 중에 한 마리가 있다고 해서 ‘저기는 전부 소다’ 라고 하지 않듯이 그런 것에다 거룩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말은 고차원적 고가적 절대적 완전적 성품을 지니고 있는 완전 독일무이한 존재라는 뜻을 가진 거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체적 독립적 독자적 거룩성을 가지고 계신다. 수많은 존재 속에서 구별하고 구별해서, 비교하고 비교해서 최상급의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 거룩=구별. 존재와 질적으로. 구별=존재적 구별(피조물간에). 거룩=자체적 존재적.(조물주)
어떤 분은 인간 타락 전의 상태는 무죄상태가 아니고 적극적인 거룩성을 가진 상태라고 말한다.
원인의 형상(선성)과 그리스도의 구속 후의 인격성의 선성과 같은가, 다른가? 어떤 분은 같다고 보는 자가 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원상회복인가?
원인의 형상과 구속 후의 인격성은 무죄성 면은 같다고 볼 수 있으나 타락 전의 영은 칭의성이 없다. 구원이 원시상태의 회복이라면 하나님의 계획이나 설계에 실패성이 들어 있다. 즉 인간이 들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실패하도록 해서 하나님 이것을 다시 원상회복 시켰다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무능자가 된다.
에덴동산은 물질계이다. 여기서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지었는데 인간이 타락을 해서 하나님은 다시 그것을 회복시켰지만 이미 에덴동산은 없어졌고 해서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인가?
원상(에덴동산에서의)의 거룩은 피동적 모형적 거룩이다. 이 거룩은 신령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동화적인 거룩은 아니다.
● 인간의 두 가지 거룩.
① 같은 피조물이지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에 비해 독특성 특수성을 가진 거룩이니 이 특수성에는 다른 피조물과 구조현상이 다르다는 점과,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영육이 결합된 존재로 지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는 것이다.
② 인간은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이요, 그런고로 원형적 신의 거룩을 입을 수 있는 거룩성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을 입을 수 있는 바탕의 거룩을 가진 자이다. 이런 성분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없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이 입혀지지 않으나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거룩이 입혀질 수 있다. 이것이 곧 도덕적 형상이다.
2. 상대적 완전.(양적 완전이 아니고 질적 완전)
이 완전은 하나님과 같은 완전이 아니고 모형으로서의 완전적이라는 말이니 모형으로서 완전적이라는 말은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을 갖추고 있는 완전이라는 말이다. 즉 이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이 그 어느 한 부분이 없다거나 일부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질적으로 완전이라는 말이다. 타 피조물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완전이라는 말이다.
※ 어린아이는 신체적 구조면으로는 완전이지만 인격적인 면은 완전이 아니다.
모정은 아가페 사랑이 아니다. 아가페는 아니나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지혜 지식은 천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생명과, 구속 후의 생명은 같은 생명이 아니다. 완전히 다르다.
3. 전체적 조화.
원 의(原義)는 또한 사람을 구성한 모든 요소의 완전한 조화와 적정한 복종을 포함한다. 그의 이성은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그의 의지는 그의 이성에게 복종하고, 그의 정서와 욕구는 그의 의지에게 복종하고, 그의 신체는 영혼에게 충실히 복종하는 기관이었다.
4. 하나님과의 교통.
원인의 원 의도 하나님과의 교통이 수반했다.
이 교통수반에 있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① 하나님이 인간에게 유형체로 나타나셔서 인간과 대화했다는 학설이다.
그렇다면 이 때 하나님은 무슨 옷을 입고 오셨으며, 아담과 하와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나?
②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시되 무형체 음성으로써만 대화 교통 의논했다 는 설.
③ 그 때는 영이 타락되기 전이니 영의 활동성이 무형체로 무음으로 이성 에게 민감하게 반사되고 있고, 하나님의 의사는 인간의 영에 반영될 때 유형체나 다름이 없이 무음이나 귀로 들리는 음성으로 명확하게 교통했 다는 설이 있다.
四. 외면적 하나님의 형상의 원상.
비 물질적 무형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물질적이며 유형적인 사람의 신체에 반영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영혼의 자기 표현을 위한 기관임과 하등 피조물계에 주관권을 행사하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신적 형상인 것이다.
신의 형상이란 고정적 용모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데 외면적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대개 인식하기로는 얼굴, 형상, 인간의 생김새, 이목구비, 수족신, 구조, 형상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외면적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의 생김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 동작이 육체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영이 주격이 되어 이성과 신체로 통하여 하등 피조물에게 주관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영의 동작은 영 자체의 동작이 이성과 신체를 통하여 나타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외형적 하나님의 형상이란 타락 이전 인간의 영의 작용이 신체로 통하여 나타난다는 말이다. 타락 이전에는 영의 동작이 이성을 통하여 신체로 나타나던 것이다. 이것을 외형적 하나님의 형상이라 한다.
타락 이전에는 영의 찬송이 신체의 입을 통하여 불려지기도 했고, 짐승의 이름을 짓기도 했지만 타락 이후에는 영이 이성으로 건너오지 않았다. 그러나 중생 후에는 가능인 것이다. 예: 멀리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통하여 연락한다.
1. 완성상.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를 창조하실 때 영아로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그 신체의 창조는 완성된 사람으로 출세케 했다. 시간적으로 이제 금방 세상에 출연했을 그 당시는 영아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인간이 현세에 출세하기 전에 어떤 별개의 세계에서 그 만큼 성장해 가지고 현세에 출세한 것도 물론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창조의 예정을 하시고, 예정을 하신 후 창조하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그 동안에 영아인 인간이 예정세계에서 성장하다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완전체로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신체가 성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은 출생함과 동시에 완성된 인간으로 출세한 것이다.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그러하다. 모든 피조물들을 지으실 때 영아적 피조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완성된 피조물로 지었던 것이다.
※ 인간창조 당시에 완성상으로 지었다. 영아를 거치지 않고 완성품으로 지었다. 피조물들을 모두 그렇게 지었다.
고고학자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20억 년, 30억 년으로 본다. 성경상으로 보면 나이가 그렇게 될 수 있느냐?
과학적 증명으로 소나무의 나이테나 마디를 보고 수령을 짐작한다. 이런 방법으로 볼 때 해송의 나이는 정확하다. 그러나 대나무의 나이는 1년에 한꺼번에 자라서 다음은 늙기 때문에 틀리게 된다. 육송은 오래되면 마디가 없어진다.
소나무는 2, 3월에 물이 오르니 이 때의 소나무 진액은 맛이 달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면 물은 송진냄새가 나고, 또 한 달이 지나면 그 물은 송진이 된다. 이렇게 해서 껍질이 된다.
땅속에서 뼈다귀를 발견해 화학적인 변화를 이용해 그 동물의 생존연대를 측정하지만 시체인 경우 죽은 즉시로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자란다.
지구가 생성된 연도가 20억 만년이 된다고 하며 과학적 근거를 댄다. 석탄의 경우 천지개벽이나 지진으로 나무들이 숯이 되어 매몰된 것이 시간이 흘러서 석탄이 되었다고 한다. 돌에 새겨진 발자국이나 돌에 박힌 나무잎사귀, 짐승들, 달걀, 고기 등을 가지고 연대를 측정한다. 창조할 그 때에 하나님께서 땅속에 모든 것을 저장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과학기구를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측정한다면 창조 때의 나이가 정확하게 나올까? 20대 또는 30대의 나이로 아담을 막 지었을 때 과학자가 아담의 나이를 측정한다면 몇 살로 나올까? 과학에 안 맞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성이다.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의 과학을 초월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2. 불사성.(不死性)
이 설은 사람을 죽지 않게 지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영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신체를 두고 하는 말이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전인에게(영육) 사(死)의 요소가 없는 것으로 지으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망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처음 지음 받을 때 불사성으로 지음 받았는데 가사성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의 육은 전인이 가범성적이요 가사성적으로 믿는다. 물론 타락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직접 범죄자가 아닌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생존기간이 영원히가 아니고 유한성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피조물들이 생겨지고, 또 이미 있던 피조물들은 죽고 이렇게 교체되고 있는데 같은 물질인 인간의 육체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신체를 불사성적으로 지었다고 하면 하나님에게는 숫자적 예정이 있겠지만 인간 편에서 생각해 볼 때 그 많은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최후 인간까지 죽지 않고 다 살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혹 모든 인간이 에녹과 엘리야처럼 세상생활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면 부활교리와 하나님의 예정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런고로 우리는 인간의 영육이 다 가범성적으로 가사성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단순히 가사성으로 지었다고만 하게 되면 이론적으로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안 죽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게도 된다.
※ 영육이 가사성이다.
3. 낙원생활.
인간에게 낙원이라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나 낙원을 낙원으로 느끼는 요소가 더 중요하다. 만일 조물주께서 우리를 금수로 지었다면 낙원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그런고로 낙원을 낙원으로 느끼는 요소가, 성질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곳을 낙원이라고 만들었는데 우리 인간의 성질 성격이 그것과 배치가 되고 대립이 된다고 하면 그 곳은 인간에게 낙원이 될 수가 없고 지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낙원이라는 현실과 인간이 그 현실에 적응하는 성격 성질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사람은 꽃을 잘 가꾸어 놓고 그것을 보고 좋아하는데 소는 그 옆에서 풀을 먹기 위해 꽃의 아름다움을 다 밟아 버리는 경우가 있으니 사람은 그 꽃을 아름다운 꽃으로 보았으나 소는 그것이 아름다워 보일 리가 없다. 그런고로 아름다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시감성도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셔서 그 인격으로 신의 성품을 닮게 해 그 낙원을 누리고 통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 이전에는 그 낙원과 인간의 성질이 잘 적응이 되었던 것이다. 시감적인 것이나 감각적인 것 혹은 청감적인 것 등 모든 것이 인간성질에 잘 적응이 됐다는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낙원이 낙원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그 낙원동산과 인간의 성격이 적응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낙원이 낙원으로 느껴지지 않고 불안의 동산, 공포의 동산, 두려움의 동산, 부끄러움의 동산이 되어서 많은 사람이 살지 않고 단 두 사람만이 살면서도 수치를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낙원동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고, 멸시하는 것 같고, 불안을 주는 것 같고, 심지어는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느끼는 그 면이 완전히 변질되어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 것이다. 낙원이 변질이 된 것이 아니고 낙원은 영원히 낙원으로 있지만 인간이 변질이 되고 보니 이 낙원은 인간에게 낙원일 수 없고 불안의 에덴동산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 낙원도 좋지만 그 보다 낙원을 낙원으로 느낄 수 있는 성질 요소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낙원을 낙원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성질적 변질이다. 지옥이다. 인격자가 아닌 금수나 곤충들도 낙원이 낙원만큼 느껴지겠느냐?
원인의 낙원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질(요소)에 맞겠금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성질이 낙원에 적응하듯 인간도 역시 그런 인격자로 지은 것이 원인의 형상이다.
낙원은 그대로 있고 인간이 변한 것이다. 낙원을 낙원이라고 느낄 수 있는 영이 죽은 것이다. 낙원을 느낄 수 있는 성분이 바꾸어졌다. 그렇게 되니 두 부부는 낙원이 낙원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고, 부부지간인데도 서로 흉을 보고, 다른 사람이 없어도 부끄럽다고 가리게 되었다.
부끄러워하는 그 느낌이 무엇이냐? 처음으로 아픔을 느꼈을 때 낙원이 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서 변질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원상복귀는 타당한 말로 들리나 타락이 되니 낙원과 대립이다. 사람의 범죄의 양이 많은 것만큼 낙원에 적응이 아닌 대립이 되고 하나님의 진리와도 대립이 된다. 평소에도 선악과를 먹고 싶을 때도 있고, 생명과를 먹고 싶을 때도 있다.
선악과: 영웅, 세상의 출세.
생명과 먹는 자는 천국의 모든 존재와 사건이 잘 적응이 된다.
五. 권위적 하나님의 형상의 원상.
인간은 하등 피조물을 주관하는 권위를 받아 만물의 영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일반적인 피조물과 똑같이 창조하시지도 않았고, 또 일반적인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로 창조하시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대 구원의 선택의 제 1목적물로 지었기 때문에 존재적으로 하나님 다음 가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학자들은 인간창조를, 혹은 권위성을 여러 각양의 피조물들 중에 하나로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모든 만물창조의 목적성이 없어진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창조의 목적을 뚜렷이 가져야 한다.
일반학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지었고, 그 여러 피조물 중에 인간은 좀 특수하게 지어서 인간에게 지배권 혹은 주관권 영장권을 부여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대 선택의 목적물로, 인격적인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 다음 가는 권위를 주셨던 것이다.
※ 하나님께서 아무 목적없이 만물을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 선택은 구원. 그 구원은 결과적 구원이니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사랑을 받고 느끼고 신령계를 누리고 다스리고 지배하며 하나님의 영광성을 누리는 것이다.
1. 통찰적 권위.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격적으로 지으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지키라고 하셨다.
이렇게 통치하고 지키려면 통찰적 권위를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인간에게 통찰적 권위를 주신 것이다. 인간 외에 다른 어떤 물질적인 피조물에게도 이런 통찰적 권위를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에게 통찰적 권위를 주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니 그 목적은 모든 것을 통찰하는 중에 자신의 통치력이 성장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2. 탐구적 권위.
인간은 통찰적 권위만 가진 것이 아니고 탐구적 권위도 가졌다. 물론 탐구성이란 일반 피조물들이 자기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참을 찾는 권위를 부여했다는 말이다. 즉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권위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인이 창조된 그 즉시로 모든 물질계의 성질을 다 알고, 종류를 다 알고, 물질이치를 다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도덕이치를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창조됐을 당시에 그는 지성적인 면이 진공상태로 지음을 받았으나 탐구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질을 탐구할 때 물질을 알게 되고, 또 물질이치를 알게 되고, 물질의 성질 연합 등등을 탐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인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중에 도덕이치를 탐구하게 된 것이다.
이 탐구적 권위는 영원히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도덕이치 속에 무한히 숨어 있는 도덕이치 생명이치를 탐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일반 피조물과는 달리 교육기관이 있어서 그 교육기관에서 물질이치와 일반 도덕이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지식이나 물질에 대한 일반 도덕이치와 물질이치를 탐구한다. 그렇지만 일반 생물계에는 생명이치의 탐구권은 없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종교기관에서는 도덕이치, 영의 이치, 생명이치를 탐구하게 된다. 이 종교기관은 순전한 도덕이치 생명이치를 탐구하는 기관이다.
3. 진보적 권위.
일반 피조물들은 창조할 그 당시나 수천 년 후인 현재나 진보성이 없다. 그들에게는 진보적 권위를 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피조물들은 거처지에 있어서 진보성이 없고, 또 자기의 꾸밈에 대하여 진보성이 없고, 활동성에 있어서 진보성이 없다.
※ 까치는 십 년 전이나 천년 전이나 집과 옷과 먹이가 똑같다. 그러나 인간은 진보다.
1. 나무껍질 - 식물성.
2. 양털 - 동물성.
3. 섬유 - 화학성.
왜 이렇게 주느냐? 구원을 위해서이다. 구원을 실지로 입혀준다.
제十二절. 행위언약에서의 인간.
1. 서언.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의 대상을 삼으셨다. 인간 외에 그 누구도 당신의 언약의 대상을 삼지 아니하셨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이다.
그러면 인간은 과연 하나님과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동질 동류 동종 동급 동등이 되어야 언약의 대상자로 삼을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언약의 대상자로 삼으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모든 피조물에 비해 말할 수 없는 영광이다. 그야말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우냐? 인간이 감히 조물주와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고등적으로 대우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 삼으셨고, 또한 후사를 삼기 위하여 창조했고, 또 사랑의 대상자로 창조했으니 언약의 대상자를 삼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도 이것이 당연하지만 다른 모든 피조물 편에서 볼 때도 무한히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모든 만물들은 인간을 두려워 할 것이다. 또 모든 만물들은 인간에게 복종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들이 볼 때 인간도 자신들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인간 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도 당신의 계약 혹은 언약의 대상자로 삼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언약의 대상자를 삼는다는 것은 벌써 자유를 그 만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유하는 면에서 하나님과 동등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유하신 것처럼 인간도 자유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인간처럼 절대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틀림없이 복종하게 되어 있다. 자유라는 것은 전혀 없다. 오직 인간에게만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언약의 대상을 삼으셨다. 인간 외에 그 무엇과도 언약의 대상을 삼지 않으신 것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 언약이라는 용어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감히 어떤 존재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이 과연 언약의, 계약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가? 동류 동급 동종 동질 동등이라야 언약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피조물이 볼 때 인간이 참 영광스럽기도 하다.
‘인간을 당신의 후계자, 언약의 대상자로 삼았다’고 하는 이 말에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을 언약의 대상자로 삼고 언약을 하신 것은, 혹은 계약을 하신 것은 그 인간이 위약을 하면 벌을 주기 위한 목적은 결코 아니다. 동류 동종의 인간으로서 등급적 차등이 있는 존재로 지어 영원히 우등의 존재로 만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언약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명심하고 위약 없이 지켜나가는 자, 또 아무리 그 언약을 지키기에 난한 일이 있어도 나와 언약하신 그 분을 생각하여 그 분을 존중히 여겨 언약을 지킬 경우, 또 그 분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면서 세상에서 그 어떤 자나 또는 그 어떤 사건이 왔을 때도 계약하고 언약하신 그 분을 생각해서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언약을 위약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에 그는 그 만큼 모든 사람에 비해, 또한 어떤 일에 있어서 언약을 어긴 자들에 비해 우등적 차등이 생기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 언약이 없이는 인간은 차등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세운 목적은 차등이다. 그리고 이 언약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기 위해 세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그 만큼 언약을 지키는 자는 실력이 배양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자가 된다. 이렇게 언약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영적 실력이 배양되게 되는 것이다.
이 언약은 결코 언약하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하신 것은 아니고 인간을 위해 하신 것이다. 우리 피 언약자가 언약을 이행한다고 해서 언약자인 하나님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언약을 순종하므로, 혹은 이행하므로 이행하는 자신이 동등인 인간 중에서 우등적인 차등한 인간이 되어지는 것이다.
우등적 월등적 차등적인 인간이 된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모든 면이 월등할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도 동종 동류 중에 월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모든 환경이나 현실이 그 언약을 이행하기에 쉽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아주 어려운 환경을 동원시키신다. 그리고 같은 조약의 언약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 언약을 이행하는데 있어서 쉽고 어려운 차별이 생긴다.
※ 언약을 주신 목적.
동류 동종의 인간과 차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절대 복종 자면 차등이 될 수 없다. 차등이 있게 하려니 자유를 주심과 동시에 언약을 주신 것이다.
이 언약은 벌을 주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니다. 아무 이유 없이 또는 항의성을 없애기 위해서, 못하게 하기 위해서 언약을 주신 것은 아니다. 더욱 존영자가 되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언약을 이행함에 따라 우리의 실력이 배양되도록 했다. 그렇지만 언약을 이행하기에 쉽도록 모든 환경을 동원하지는 않는다.
언약은 어려운 관문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것이 그럴 수 없이 중요하기 때문에 부모 형제와의 정이 끊어질 때도 있다.
인간은 그 분의 요구, 그 분의 의사, 그 분의 일에 순종하고 갈 자이다. 그렇게 나아갈 때 환경을 쉽도록 해 주시려니 그렇게 생각 말라! 같은 환경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쉽고 어렵고, 시간에 따라서 쉽고 어렵고.
행위언약을 지키므로 우리의 실력이 배양된다고 하면 언약을 주지 않아도 우리의 실력을 배양할 수도 있다.
2. 타락 이전의 행위언약.
하나님께서 인간과 행위언약을 하실 때 인간 타락 이전에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지키고 따먹고 따먹지 말고’ 이렇게 표면적으로 언약하신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당신의 예정에서는 인간이 타락 전에 그리스도를 주실 것까지 다 언약을 했지만 그러나 이 언약은 인간과 직접 언약은 아니었다.
언약이라는 것은 말로 약속한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성경대로 보면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약하시기를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했다. 그 때에 에덴동산에만 거처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들을 위하여 특별히 에덴에다 동산을 지으시고 그 곳에 인간을 살게 했다고 했으니 이것도 일종의 계약 중에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고 ‘너는 에덴동산의 외계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타락 이전에 하나님이 인간과 세운 언약은 에덴동산에 거처하라는 것이다. 또 만물을 다스리라는 말을 했고, 지켜라 수호하라 했고, 또 생명과와 일반과는 따먹되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다.
이렇게 언약했으나 인간은 절대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에덴동산을 절대로 이탈할 수 있는 의사도 권리도 자유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의 언약에서 이탈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때 인간이 그 언약대로 지키고 살았더라면 지금도 인간은 죄에 감염되지 않았을 것이고, ‘고통이다, 불행이다’ 하는 것을 경험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언약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죄에 감염되었고, 그들에게는 불행과 고통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처음으로 불행을 경험했을 것이고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이 이 언약을 위약하고 불행적인 고통적인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것이 위약자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① 에덴동산에 거처하라.
이 말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지어주신 내 현실에 만족하고 마음으로 그 현실을 원망치 말고 떠나지 말고 그 현실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의 목적을 구원건설에 두게 되면 자기의 어떤 현실도 구원에 집착시키기 때문에 불평이 없지만 반대로 구원과 상관없이 누리며 살려고 하게 되면 자기의 현실에 대해 불평이 나오게 된다. 자기의 현실을 싫어하는 것은 생의 목적이 틀린 것이다.
② 다스려라, 통치하라.
우리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에게 다스림 받지 않고, 이용을 당하지 않고 만물을 통치하려면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결합이 되어 만물과 관계를 가지라는 말이다.
③ 지켜라.
이 언약은 외계에 있는 것이 침범치 못하게 지키는 것과, 내계에 있는 것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 통일역사의 생명권, 대 치리권 내에서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지켜야 한다.
④ 따먹어라.
적극적 권고적인 교훈이다. 도덕을 행하고 선행을 행하고 진리를 먹어라, 선을 먹어라, 의를 먹으라는 말이다.
⑤ 따먹지 말라.
부정적 소극적인 권고이다. 원리 원칙적으로 생명과를 따먹고 살면 선악과는 자연적으로 안 먹게 된다. 왜? 생명과를 먹고 나니 선악과를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생명과를 배불리 먹고 나면 선악과의 생각이 안 난다. 선악과를 먹고 싶은 마음은 생명과를 안 먹었다는 증거이다.
비 진리적인 것, 사망적인 것, 세상적인 것, 거짓된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이 곧 인간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하신 언약이었다.
3. 타락한 이후에는 은혜언약.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행위언약을 주셨다. 행위언약을 주신 것은 완전히 사망계에 빠지기 전이요, 죄에게 포박되기 전이기 때문에 인간이 선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행과 선행을 할 수 있고, 또 그 나름대로 에덴에서 지상 최대의 낙을 누릴 수 있고, 또 그 낙을 누릴 때에는 어떤 방해도 없고 누림의 낙이 감퇴나 감소나 삭감이 없다.
인간에게 향락이 쾌락이 감소 감퇴된 것은 범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그 행위언약을 타락 이전에 잘 지켰더라면 이런 불행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약을 이행하지 못하고 위약 하므로 인간에게는 그 모든 행복과 쾌락이 감소 감퇴되고 불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은 행위언약을 이행하기에는 불가능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 자체가 완전히 죄에게 포박되어 죄의 노예가 되었고 사망 아래 빠져 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그 사망계를 벗어날 길이 없고, 죄의 종에서 해방될 힘이 없게 되었다. 행위언약이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행위언약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진정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한 후에 은혜언약을 안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언약을 주셔서 타락한 후의 인간은 은혜언약 하에 있게 된 것인데 이 은혜언약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시기로 한 것이니 무상으로 주시는 이유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이 무효화 됐으니 무효화된 이 행위언약이 무효화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은혜언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은혜언약이 없이 행위언약을 지킨다고 하면 표면적으로는 지키는 것 같으나 실은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행위언약에 있어서 에덴동산에 거처하라는 것은 에덴동산은 자기의 현실을 통해서나 자신의 내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니 곧 자신의 현실에서 이성과 영이 결합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라는 것인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이 행위언약을 하나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간이 타락한 후에 이 행위언약이 완전 무효는 아니다. 은혜언약을 입음으로써 다시금 행위언약은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혹자들 간에는 인간이 타락하므로 행위언약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영원히 무효가 되고 이제는 은혜언약으로써만 살면 된다고 하면서 행위언약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을 무시하고 있는 언약이 아니고 인간에게 되어 있는 행위언약을 다시금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은혜언약이란 일방적인 언약인데 물론 하나님의 예정세계에 있어서는 벌써 영원 전에 의지세계에서 예정을 했으나 인간에게 언약을 주신 것은 타락한 이후이다. 즉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인간아, 네가 타락해라, 타락하면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주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언약이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약속을 했다는 뜻인데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하신 일은 없다. 인간이 행위언약을 이행하지 못하고 죄에게 포박되어 죄의 종이 되어 완전히 사망에 빠졌을 때 ‘독생자 그리스도를 너를 위해 보내주마’ 하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은혜언약이 행위언약과 다른 점은 행위언약은 인간에게 ‘무엇 무엇을 하라, 여기서 거처하라, 다스려라, 지켜라’ 이렇게 했고, 은혜언약은 ‘하라 하지 말라’가 아니고 기능도 주권도 자유도 전혀 없는 사망 가운데 불행 중에 있는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서 너를 건져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은혜언약은 죄악 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죄에서 탈출해 나올 수 없는 인간에게, 실망과 낙망과 절망에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미련해 놓으신 영원한 존영을 받기를 포기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그러면서도 그 사망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만 불가능한 인간에게 모든 죄 값을 그리스도가 대신 지불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서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가 없이 인간의 모든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해주시고, 또 영원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천국의 국민, 천국의 권속이 될 수 있는 주권회복, 의의 회복을 약속하신 것이 은혜언약이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찾아서 이 연결을 해 보려고 인위적으로 노력을 해 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도성인신 하셔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를 중보로써 영원 불변의 완전 결합을 시켜주마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 이 영을 우리 인간이 자력으로 도저히 살릴 수 없는 것이다. 죽은 송장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살릴 수 없는 것처럼 완전 타락하여 영이 완전히 죽은 자로서 살아날 길은 전혀 없는 것이다. 죽지는 않았으나 죽어가고 있는 육신이 이미 죽은 영혼을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육신의 어떤 의행이나 선행이나 도덕이나 수양이나 사색으로 죽은 영을 살릴 길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죽은 영을 살릴 길이 없으니 죽음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즉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은 그 영혼을 살려보고자 많은 육체적 노력을 하지만 이것은 다 불가능한 장난이다. 그런 것을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이나 호응이나 조력을 받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의 단독행위로 하나님의 영원 불멸 불사의 생명으로 살려주겠다는 언약이다.
완전 타락하여 이미 영이 죽은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이 몸이 또 문제이다. 이 몸은 조만 간에 죽음의 선을 넘게 되는 것이다. 죄에게 속박되어 사망으로 끌려가고 있는 처절하고 가련한 존재인 인간은 이 문제를 바라보며 탄식하고 통곡만 할뿐 죽어 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할 길이 없다. 불로초로도 불사약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고 오직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이 죽음 앞에서는 내가 나를, 남이 나를, 내가 남을 바라볼 뿐 속수무책이다.
이런 인간에게 또한 부활의 약속을 하셨으니 ‘네 몸이 죽음의 선을 넘으면 죽음 저편에서 너의 공로 없이 하나님의 단독사역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혀 영원히 죽음과 상관이 없는 몸으로 부활케 해 주마’ 하는 이것 역시 은혜언약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언약을 어겨 타락하므로 에덴동산에서 축출을 당해야만 했고, 이제는 범죄한 인간이 갈 곳이란 지옥밖에 없다. 이런 인간을 가만히 놔두면 지옥에 간다. 필연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지옥으로 가는 이 길에서 탈출할 힘이 없고, 자유가 없고, 권리가 없다. 그런고로 인간으로서는 지옥으로 가는 이 모든 인간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또한 지옥으로 가는 인간이 지옥을 면하도록 하기란 천사로서도, 그 어떤 피조물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조건도 요구도 없이 당신 단독적으로 천국 가게 해 주마고 약속하신 것이니 이것이 곧 은혜언약이다.
※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다른 점은?
행위언약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대신 해 주겠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것이지만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것을 대신 해 주겠다고 하는 것.
은혜언약은 ① 사죄 ② 칭의 ③ 중보 ④ 새생명 ⑤ 부활 ⑥ 천국이다. 은혜언약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행위언약이다.
4. 전 인류에게 주신 행위언약.
행위언약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에 대한 언약의 사실을 행위언약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행위언약은 역사적으로 아담에게만 주신 언약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이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는 그 언약 당시에 인간이라고는 아담과 하와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만 주신 언약이요, 또 그 이후에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이미 축출 당하여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시대인고로 거기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악과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이 언약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주신 행위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담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고 전 인류를 대표해서 아담에게 주신 것이니 언약의 당사자는 아담이라고 할 수 있으나 대표적인 면을 말할 때는 전 인류에게 주신 것이요, 또 뿐만 아니라 이 언약은 표면적 역사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계시적인 면에서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 언약은 살아있는 것이다.
당시의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와 일반과와 생명과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 상징이라는 말은 역사성을 부인하는 면에서 상징이라는 말이 아니고 계시 면에서 상징적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에게 에덴동산에 거처하라는 이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현실을 이탈하지 말고 그 현실에서 다른 현실을 부러워하지 말고 살라는 말이요, 또 에덴동산에서 만물을 다스리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동화되고 피동 되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물을 다스리라는 말이요, 지키라는 말은 성경 여러 곳에 말한 대로 외부적인 것이 혹은 거짓이나 죄악성이 우리 속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요, 내 마음이 원치 않는 곳으로 나가지 않도록 혹은 하나님의 치리성을 이탈하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요, 일반과와 생명과를 따먹으라는 말은 생명운동인 진리생활을 일반생활에서 하라는 말이니 곧 일반생활을 진리에 맞추어서 하라는 말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은 비 진리적인 것, 죄악적인 것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최초 인간인 원인에게 역사적으로 주신 것이요, 그 후 시대 사람에게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것을 좀 더 확대시킨 것이 십계명이요 율법이다.
그런고로 이 언약을 아담에게만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 인류에게 다 주었으니 이 언약을 지키면 생명이요 구원이요, 이 언약을 어기면 사망이 된다.
많은 인류가 이렇게 죽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죽게 해서 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이 법을 실질적으로 어겼기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흔히 생각하기로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죄 때문에, 아담이 이 언약을 위약 했기 때문에 그 후대의 모든 인류는 다 죽었다고 하나 모든 인간이 이 언약을 위약한고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비단 에덴동산의 선악과 문제만이 행위언약이 아니고 그 후에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도 행위언약이다. 대개는 이 행위언약을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언약이라고 하나 이 언약 역시 전 인류에게 주신 언약이다.
우리가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의 언약을 제 1 행위언약이라고 하고, 모세의 율법을 제 2 행위언약이라고 명명하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제 1 행위언약이나 제 2 행위언약은 인간에게만 주신 언약이다. 만인에게 주신 언약이기 때문에 후대의 전 인류는 이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만일 이 언약이 어떤 특정인에게나 특수한 민족에게만 주신 언약이라고 하면 오늘 이방인들은 이 언약을 안 지켜도 된다는 그런 결론이 나온다.
선민 이스라엘이건 이방인이건 하나님 앞에 심판 받기는 동일하다. 다만 옛날 선민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자기들만이 이 언약의 대상자인 것처럼 되어서 내려온 것은 이 법이 그 민족들에게만 국한되어서가 아니고 그들은 하나의 계시목적으로 혹은 모형으로 혹은 모델(표본)로 등용되어서 교훈기관으로 쓰여졌기 때문이지 그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전혀 구별 없이 이 언약을 똑같이 지키게 되어 있다.
※ 전 인류에게 주신 행위언약.
언약이라고 하면 에덴동산의 선악과만으로 알고 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도 행위언약이다. 모세율법은 제 2 행위언약이라고 한다.
‘다스려라, 지켜라, 통치하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것은 빼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말만 하고 있다. 인간이 1차적으로 이것을 다 어겼다.
제 1 행위언약은 아담에게만, 제 2 행위언약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것이라고 보는 자가 있다.
이방인들은 예수 믿어서 구원 얻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다고 하는 자도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공자교훈도 율법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역사적으로 그 때 당시 에덴동산 안에 다른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담에게만 말했다. 아담에게 실지로 그 말을 한 곳이 공간적인 에덴동산이지만 우리에게는 상징적으로 나에게 주신 현실이 곧 에덴동산이라는 말이다. 나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현실을 골라서 주신 것이다.
아담에게 에덴동산에서 살라고 했는데 그 곳이 가장 좋은 곳일까, 나쁜 곳일까, 중간일까? 아담과 하와가 그 때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물질계에서 제일 좋은 곳에 살게 했다고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이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것이다’ 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역사적이고, 우리들에게는 상징이면서 현실이고 계시이다.
신학자일수록 신앙이 깊어야 한다.
‘아담에게만이 아니고 전 인류에게’라 함은
① 아담은 인류의 대표라.
② 상징적으로 보기 때문에 전 인류에게라.
제 2 행위언약은 유대인만이 아니고 전 인류에게 주신 행위언약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심판은 율법을 가지고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가지고 심판을 하고, 이방인들에게는 도덕법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는 이 법을 가지고 한다. 정죄도 이 법을 가지고 하고, 속량도 이 법을 가지고 입었고, 이방인들의 정죄와 속량도 이 법을 가지고 한다. 그래서 이 법을 전 인류에게 주신 행위언약이라고 한다.
제十三절. 행위언약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
본래는 하나님 한 분만 자존자로 독존하여 계셨고 그 외의 다른 모든 존재는 독존자로 계시던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 피조물들을 분리해 보면 신령적인 피조물과 물질적인 피조물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에게만 이 언약을 주셔서 언약의 대상자로 삼으셨다.
인간 외에도 수많은 피조물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유독 인간에게만 이 언약을 하셔서 언약의 대상자로 삼았을까?
언약이란 벌써 상대에게 자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자유성이 없다면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동원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만은 그의 형상인 인격성을 가진 자로 창조했고, 인격성에는 자유성이 있으니 인간에게 이 자유성을 주셔서 자유하게 하시고, 또한 언약을 주셔서 언약적 관계를 맺었는데 이 언약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다.
행위언약은 인간이 그 약속을 행위로 혹은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요, 은혜언약은 인간의 어떤 행동의 조건이 없이 거저 주시겠다는 언약이니 시은자 편에서는 무조건적 일방적이요, 수은자 편에서는 수락적 상대적이다.
시은자 편에서 일방적이라는 말은 상대방이 받아들이던 안 받아들이던 상관없이 주기로 약속하신 것은 준다는 말이요, 수은자 입장에서 수락적 상대적이라는 말은 시은자가 주실 때 수은자는 받아들임으로써 그 언약이 성립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 은혜언약이 무조건적 일방적이라는 말은 수은자의 수락과 거부의 어떤 권리도 능력도 작용하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역사라는 말이니 이는 시은자의 일방적인 은혜라고 볼 수 있다.
불가항력적 은혜란 택자들에게 진리와 영감이 와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히실 때에는 인간이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이다. 또 수락적 상대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인에게 주셨지만 수은자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은혜언약을 입지 못한다는 말이다.
본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은혜언약이 아니고 행위언약이니 이 행위언약은 제 1 행위언약과 제 2 행위언약이 있다.
행위언약이라 할 때 일반적으로 제 1 행위언약인 선악과 문제를 주로 말한다. 즉 인간이 제 1 행위언약을 위약해 타락하여 영원히 멸망 받게 되었는데 멸망 가운데 빠진 인간을 건져서 원상복귀 시키기 위해 모세의 율법인 제 2 행위언약을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제 2 행위언약을 지키면 제 1 행위언약을 어겨 죽게 된 거기서 구원을 입어 원상복귀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 2 행위언약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이것마저도 지키지 못하면 영원히 구원을 받을 길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은혜언약을 사랑으로 주셔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상에 말한 것을 간추려 말하면
(1) 하나님이 제 1 행위언약을 주신 것은 최초 원인을 에덴동산에서 죄 없이 고통 없이 죽음 없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주셨다는 것이다.
(2) 제 2 행위언약을 주신 것은 에덴동산에 살면서 행복하고 만족했던 인간이 제 1 행위언약을 어겨 멸망과 고통 중에 빠지게 되었고 그 낙원동산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으므로 죄와 멸망 중에 있는 그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주신 것이니 인간이 이 행위언약을 지키므로 말미암아 원상복귀를 시켜주신다는 것이다.
(3) 인간이 제 2 행위언약마저 지키지 못해 영원한 멸망 중에 빠지게 되었으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공성을 잠재하시고 자비를 베푸사 은혜언약을 주셔서 이제는 제 2 행위언약을 지키지 않아도 이 은혜언약만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 은혜언약 마저 불신하여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제는 하나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그는 이제 할 수 없이 영원히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상의 것은 일반적 학자들이 주장하는 설이다.
※ 본래 하나님은 자존자요 독존자요 그 외에는 모두 피조물이다.(신령계와 물질계에서)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님이 언약의 대상자를 삼으신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을 당신의 언약의 대상자로 삼으시기 위해 인간을 인격자로 지으셨으니 인간은 하나님의 인격적 대상자이다.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 해 놓고 제 1 행위언약을 주셨다. 이유는 죄 없는 상태로 살게 하기 위해서! 행위언약을 주었더니 그 인간이 언약을 어겨서 쫓겨나게 생겼다. 역사적으로는 이렇게 보인다.
그렇다면 만일 행위언약을 안 주었더라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그대로 오래 살 것이다. 그러니 1차적인 행위언약을 주신 것이 잘못이 아닌가?
인간을 내어쫓고 나니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제 2 행위언약을 주어서 에덴동산을 회복한다고?
그렇게 해 놓고 하나님께서 1500년 이상 기다려 봐도 제 2 행위언약마저 지키는 자가 없거든! 그래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그러면 율법을 안 지켜도 좋으니 너희들은 믿기만 해라(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이 사실을 수락만 해라)’ 한 이것이 은혜언약이라고!
시은자 편에서 일방적.
수은자 편에서 수락적.
하나님 편에서는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은 너희들이 몰라도 내가 다 준다’ 수은자 편에서는 그것을 내가 안 받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 1 행위언약은 하나님도 인간도 모두 실패이다. 또 은혜언약을 받은 자는 절반 성공이다.
一. 행위언약의 원인.
우리가 전 인류를 놓고 생각할 때 인간을 하나님과 무관한 상대적 관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인간을 단순히 상대적으로만 볼 때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수많은 피조물들 중에 유독 인간만을 신의 언약의 대상자로 삼으신 것은 인간만이 인격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희미해진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언약의 대상자로 삼은 것은 인간이 인격자이기 때문에 언약의 대상자로 삼았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언약의 대상자로 삼기 위해 인간을 인격자로 창조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 언약이란 하나님의 목적선택의 대상자인 인간에게 인간창조의 목적의 완전한 효과를 입히기 위해서 하신 것이니 이 언약의 궁극목적은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 구원선택의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과 같은 자라야만 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인격성을 닮아야 사랑의 대상자가 되고, 하나님과 같은 인격의 소유자라야 그 신령계를 누릴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했다.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인격성을 지혜지식적으로 도덕적으로 능력적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주셔야만 했던 것이다.
혹 학자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주신 것은 원인이 본래대로 에덴동산에서 영존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나 이 설은 부당하다. 이 설이 부당한 것은 만일 그 목적으로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주셨다고 하면 하나님은 전지 전능자가 아닌 무지 무능자가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행위언약을 주시면 인간이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알지 못했다는 말이요, 또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영존하도록 한 그 계획은 실패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하신 것은 사람의 인격성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수수관계에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심이 없었더라면 인간을 찾아오셔서 행위언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선지자 호세아가 음녀 고멜을 붙잡고 ‘이제는 다시 헤어짐이 없이 잘 살자’고 하는 언약은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한 까닭이다.
하나님에게 사랑이 없었더라면 이 언약은 없었을 것이요, 또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사랑하지 아니했더라면 이렇게 언약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의 발작에 의하여 인간을 사랑의 대상자로 사랑의 수수관계성을 가지기 위해 인간을 인격자로 지으신 것이다.
만일 사랑의 수수관계가 아니고 시애자의 일방적 사랑이라면 인격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 상대방이 사랑을 받아 느끼던 안 느끼던 상관이 없이 시애자는 사랑만 베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당신에게 있는 사랑을 부어주는 것으로만 족하시지 않고 당신이 누리고 느끼시던 그 쾌락적인 사랑을 인간이 받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인격자로 지으신 것이니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고, 그 상대자인 인간은 그 사랑을 받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인격자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사랑을 받아 느끼는 데는 인격자라야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행위언약의 원인은 사람의 인격성과 사랑의 수수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를 삼기 위해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으니, 지으신 후에 그냥 막연하게 지으신 것으로 끝나고 그 후에 언약도 명령도 대화도 없다면 이것은 신의 목적에 어긋남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하신 것이니 이렇게 하심은 인간을 사랑하심에서이다.
※ 행위언약의 원인은 사람과 인격적인 수수관계를 위해서이다.
어떤 학설을 보면 아래 위가 없고 가운데 토막만 있다. 왜? 이단소리가 두려워서!
기독교는 형이하학의 기독교가 아니다.
① 인격자이기 때문에 행위언약을 하신 것인가? 어떤 언약을 하긴 해야 되겠는데 찾다가 인간을 만났다 이것인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 을 인격자로 지은 목적이 무효가 되고 구원선택이 무효가 된다. 언약 을 안 하면 못 사는 분인가?
② 행위언약의 대상자로 삼기 위해 인격자로 지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인격성이 없으면 사랑은 일방적이 된다. 사랑을 받고 느끼고 하는 방편으로 행위언약을 주신 것이다. 사랑치 않으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을 것이다.
二. 행위언약의 동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위언약은 주지 아니하시고 은혜언약만 해서 우리 인간이 그 은혜언약의 효력만 입었더라면 모든 인간이 차등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언약이 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권적으로 인간을 차등 되게 했더라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아니요, 또 공정하지도 못하니 하나님의 지공성이 파괴가 되고 결국은 하나님은 하후하박의 하나님이 되고 만다.
만일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공성대로 인간에게 은혜언약만 주셨다면 모든 인간이 그 은혜언약만 입어 기본구원을 동등하게 입었을 것이고, 또한 기본구원이 동등인 것처럼 다른 모든 것도 동등일 터이니 이렇게 되면 인간은 인격자로서 차등으로 오는 그 쾌감과 그 만족감은 영원히 감소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고로 행위언약인 기본은혜는 동등이지만 중복은혜는 차등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차등된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행위언약을 안 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공성도 이루고, 또한 차등으로 인한 행복감과 만족감을 인간으로 하여금 온전히 맛보게 하기 위해서 만인 평등적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이 행위언약을 주셔서 차등 되게 하신 것이다.
제 1차 행위언약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되지 아니했더라면 이 현존세상에서 구원경쟁을 할 길이 없고, 구원경쟁이 없이는 차등이 있을 수 없고, 또 제 2 행위언약이 없으면 계명을 더 지키고 덜 지키는 자가 없을 것이니 역시 차등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위언약을 하시게 된 동기는 인간을 차등 되게 하려는 것이니, 이 차등이 되게 하기 위해서 행위언약을 주셨다는 말이다.
제十四절. 죄인.
一. 죄의 기원.
신령계와 물질계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들 중에 하나님만 자존하시고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생겨진 것이니 그 모든 것의 기원이 창세기 1장의 창조에 의해 생겨졌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지 아니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기원도 밝혀놓지를 않으셨으나 다른 모든 존재가 다 기원이 있음과 같이 죄 역시도 기원이 있음이 틀림이 없다.
죄에 대한 기원을 밝혀놓지 않아서인지 이 죄의 기원에 대해 여러 이론들 중에 그 어느 이론도 죄의 기원을 명백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으니 철학자들이 논리하는 죄의 기원과,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죄의 기원이 서로 상이한 점이 많이 있다.
우리가 죄의 기원에 대해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죄의 기원에 대해 생각할 때 죄가 생겨짐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성과 인간의 죄의 결정적 구성성을 알아 인간에게 있어서 죄가 무엇이며, 무엇이 죄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죄의 기원이라고 하는 말을 ‘악의 기원이라, 마귀의 기원이라, 악령의 기원이라’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 하나님은 기원이 없다.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천사는 자존자가 아니냐, 신들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성경은 천사들을 어떻게 지었다고 계시할 필요가 없어서 말을 안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만이 자존자이시다.
죄의 기원이 언제부터냐? 왜 죄를 허용했느냐? 죄에 대한 기원을 말하려고 하니 마귀에 대한 기원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죄나 마귀에 대해 학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죄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지느냐?
二. 철학적 신학적 논의.
죄의 기원에 대해 많은 이설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철학적 기원과 신학적 기원이 있다. 그러니까 고대 철학자들이 죄의 기원에 대해 논한 이론과, 성경을 근거해 신학자들이 논한 이론이 있다.
혹자들은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죄에 대해 당시 희랍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인 면에서 논거 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불가한 이론이다. 이 성경은 어떤 철학자의 영향을 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화 감동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어떤 법학이나 철학의 영향을 받아 기록됐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철학자들(희랍의 철학자, 스콜라 철학자, 소크라테스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자가 있다.
역사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가 쉽고, 또한 성경은 축자 영감설이기 때문에 성경이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우길 수도 있다. 이것은 최초의 성경(코이네)이 헬라문자이기 때문이다. 용어가 사람의 말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기록할 때 헬라문자로 기록을 했기 때문에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만일 그 때 당시 헬라문자가 없었다면 성경을 기록하지 못했을까? 다른 나라의 문자는 없었던가? 예: 마이크가 있었기 때문에 설교를 하나? 마이크가 없어도 설교할 수 있다.
만일 헬라의 문화나 철학이 없었더라면 성경이 전혀 딴 말이 되었을까? 사도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한 것은 틀림이 없으나 헬라의 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록했던가? 바울이 로마의 영향을 받아 기록을 했는가? 성령의 감화 없이? 문화를 이용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라면 그 때 당시에 문화가 달랐더라면 성경도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하며 죄에 대해 논거할 때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고 깨닫기 쉽도록 그 때 당시의 보편적인 지식으로 깨닫기 쉬운 사건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그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기 쉽도록 하자니 그 때의 문화와 사건들과 그 때의 말로 기록을 한 것이다.
일반적인 문화도 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서구문화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문화기구가 고유적이 아니다. 신문에 새로운 용어가 상당히 많다. 그 시대에 가장 유행되고 있는 문화를 이용해서 쓴다.
종교는 유대인,
말은 헬라어,
정치는 로마.
성경은 유기적인 축자 영감설로서 성령의 감동 감화로 기록한 것이다. 그 시대의 문화 문물을 이용해 기록한 것이지 그 영향을 받아서 기록한 것은 아니다.
철학자들의 죄에 대한 논거와, 신학자들의 죄에 대한 논거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1. 철학적 노력.
① 어떤 자들은 악을 생 자체의 일부로 보고 삶의 자연적 구조에서 죄에 대한 해답을 찾기를 촉구하고,
② 어떤 사람은 선세 존재에서 죄가 왔다고 주장.
③ 또 어떤 자는 현세 존재에서 사람의 자유선택에 의하여 죄가 결정된다 고 하기도 한다.
※ 철학적 노력에서
① 물질과의 접촉에서 악이 생겼다.
② 태어나기 전부터 죄를 지어서 쫓겨온 것이 이 세상이다.
③ 인간의 자유선택에 의하여 죄가 생겼다.
2. 종교의 신학적 노력.
종교의 신학자들이라고 하면 이종교를 포함치 않고 기독교를 지칭해서 하는 말이다. 기독교 외에 기타 종교의 학설들은 일종의 철학에 불과하다. 신학이라 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교리를 중심한 학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많은 신학자들이 죄의 기원에 대해 구구한 설명을 해 왔으나 지금까지도 난제 중의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많은 이설들이 죄의 기원에 대해 명백하게 정의를 내린 것이 없다. 다만 신학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죄의 기원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러면서도 대개의 학자들이 거의 의사일치를 이루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최초로 죄를 지은 것은 아담이 선악과의 계약을 위약한 것이요, 그 이전에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다는 유다서를 근거로 죄의 기원은 아담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신학자들의 논거에 의하면 죄의 기원을 천사들에게서 찾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천사는 하나님에게 수종 드는 신령계의 영물에 불과한데 그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천사가 타락을 했다면 그 천사를 타락하게 한 어떤 악이, 혹은 죄나 마귀가 선재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거룩하게 지음받은 천사 속에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성질이 들어 있었다는 것인지?
마귀가 혹은 천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께서 천사를 지으실 때 마귀나 천사에게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성분을 넣어준 것이라면 그 천사 외에 다른 모든 천사들도 타락한 그 천사처럼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요소가 현재도 남아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되면 문제는 커지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성스러운 천사 사환들을 영물로 지으실 때 왜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요소가 없도록 짓지 않으신 것일까? 그 성분이 없도록 지었더라면 그 천사가 하나님을 거역하지는 아니했을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지으실 때에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자로 지었기 때문에 그 천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죄의 책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알기는 천사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천사들이 죄의 성분을 가진 자는 있을 수 없는 장소인 천국에서 하나님을 거역했으니 다른 모든 천사도 같은 성분으로 지었다면 현재 천국에 있는 그 많은 천사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성분이 들어 있을 것이니 그들이 언제 또 하나님을 거역해 쫓겨나서 마귀가 될지 모른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죄의 기원에 대해 밝혀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유다서에 계시된 천사 타락론은 아직도 정확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난해 중의 난해로 남아 있다.
이렇게 죄의 기원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구원론 자체가 바르지 못하므로 인간의 존재성과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모든 것을 하나의 상대성으로 이해해 객관 대 객관으로 보고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즉 자존하신 하나님이 독존자로 계시면서 자원적으로 독권적으로 구원을 선택하시고, 선택한 이 구원완성 완사를 위해 사용하시려고 창조도 존재도 죄도 악령도 마귀도 창조 내지는 허용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데서 오는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알고 나면 모든 난제는 해결이 되는 것이다.
※ 신학자는 원효대사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θεός(하나님)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신학자라고 하는 것인데 다른 학자들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하와를 타락케 한 사단(천사)은 언제 타락했느냐?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타락, 즉 죄가 있었다고 한다.
왜?
①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요소를 넣어서 지었기 때문에 이 천사는 필연 적으로 거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다. 그러니 어찌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느냐?
② 그러면 똑같이 지었다면 지금 있는 천사들도 언제 마귀가 될지 모른다 는 말이 되니 이 난제는 ‘결국 모르겠다’ 하는 말로 결론이 난다.
③ 객관 대 객관, 상대 대 상대로써 보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 께서 구원역사를 위해 그렇게 했다.
3. 역사상의 논의.
(1) 최초 교부들 중에 이레니우스는 낙원에서 아담의 자원적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기원된다고 한다.
(2) 그노시스(노스틱)주의 자들은 물질계악설을 주장하니 악이 물질계에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여 물질을 접촉하는 것이 곧 죄라고 보았다.
3) 오리겐은 영혼 선재론을 주장하여 죄의 선재적 기원을 말했다.
4) 3, 4세기의 헬라 교부들은 아담의 죄와 그 후손들의 죄의 관련을 삭감하려는 경향을 보였다.(원죄를 부인하는 것처럼)
5) 라틴의 교부들은 사람의 현재의 죄악한 상태에 대한 설명을 낙원에서의 아담의 최초 범죄에서 발견하려는 경향을 점차 더 명백히 나타내었다.
6) 동방교회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펠라기우스의 영향을 받아 원죄를 부정하는 상태로 설명했다.
7) 서방교회와 어거스틴주의는 우리가 아담 안에서 유죄하고 오염됐다고 주장한다.
8) 반 펠라기우스파는 아담과 관련을 시인하지만 죄의 오염만 설명한다고 주장했다.
9) 개혁파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랐고,
10) 소기노(소시니안파)파는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따랐고,
11) 알미니안파는 반 펠라기우스를 주장했다.
12) 그 후에 칸트는 사람 안에 본래적인 악이 있음을 주장했으나 이것을 초감각 세계에 속하는 자기가 설명을 못하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13) 라이푸닛쯔는 죄를 우주의 필연적 제한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았고,
14) 술라이 막허.
15) 릿출.
16) 진화론자들.
17) 칼발트.
三.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논고.
죄의 기원에 대해 논리할 때 우리는 그 이전에 죄라는 자체를 먼저 알아야 죄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혹은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정죄를 받을 수 있는 죄이냐’ 하는 문제다.
우리가 앞서 많은 교부들과(헬라, 라틴)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죄의 기원에 대해 논거 했는데 우리는 먼저 죄의 구성과, 죄의 정죄의 척도를 알아야 한다.
죄라는 것을 일반적으로는 동사로만 봐서 상대적으로 죄가 구성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성경에는 명사로도 죄를 표시했으니 죄가 명사로 쓰여질 때는 죄라는 것이 단독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죄(하말티아)란 ‘법을 어겼다, 혹은 하나님의 뜻에 적중함에 미달했다’는 말인데 이 죄라는 명칭이 동사로 쓰일 때도 있고, 명사로 쓰일 때도 있다는 것이다.
※ 죄의 기원을 말하기 전에 ‘무엇이 죄냐, 죄의 성분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한다. 보통은 행동의 결과를 보고 죄라고 말하지 죄가 독자적으로 있지 않다고 한다.
창세기에 ‘죄가 문 앞에 잠복해 있다’고 했다. 죄가 개같이 생각한다. 죄를 쫓는 방법으로 구부리면, 곧 기도하면 된다?
죄(주어, 명사)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 로마서에는 죄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 민수기 33장 22절에는 죄가 너를 찾아내리라.(아간의 경우) 죄의 종이라. 죄가 너를 다스렸다.
이런 말들을 보아 분명히 명사적인 죄가 있다.
죄를 명사적으로도 말했고 동사적으로 말했다.
로마서 7장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악은 곧 죄이다. 그러면 죄가 죄를 행하나?
국가법적으로는 동사로 보고, 성경적으로는 둘 다 볼 것.
동사적으로 보게 되면 죄의 기원을 찾기는 막막하다. 마귀가 따로 있고 죄가 따로 있는 것인가?
1. 동사적인 죄.
이 동사적인 죄의 개념은 일반적인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죄라 할 때는 인격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인데 특별히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자에 한해 죄가 구성되는 것이지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못한 피동적 동화적인 존재에게 있어서는 죄가 구성되지를 않는다. 가령 사람이 흉기를 들어 사람을 죽였을 경우 사람을 죽인 그 자는 사람이 아닌 흉기요, 죽은 자는 사람의 손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흉기에 맞아 죽은 것이지만 사람을 죽인 살인죄를 흉기가 짓는 것이 아니고 흉기를 사용한 사람이 그 죄책임을 지고 죄의 구성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본다면 이 세상에 혹은 신령계와 물질계를 통틀어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돼 있는 존재가 인간 외에도 또 있는지 이것이 문제이다.
만일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고 조물주의 주권에 피동적이요 동화적인 존재에게 죄를 정죄한다고 하면 그 존재를 그렇게 움직이도록 주권적으로 섭리하신 그 섭리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죄의 기원을 찾으려면 먼저 지금까지 말한 이 면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고는 죄를 정죄할 수가 없다.
죄를 찾기 전에 죄가 구성될 수 있는 자유자인지 인격자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움직여졌다면 죄책임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된다.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처럼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존재가 있느냐? 천사가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면 최초의 천사타락만이 아니라 지금도 종종 천사가 타락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 천사의 타락은 한 번밖에 없다.
인간만이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다른 모든 존재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구원섭리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궁극적 최종적으로 볼 때 모든 일반적 피조물들은 절대 자유가 없다. 그러한 존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활동을 하게 했다고 하기보다는 그 활동을 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섭리 면으로 대국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다.
죄가 구성되려면 첫째로 자유성자라야 한다. 인간 외에 절대 자유자는 없다.
천사나 마귀가 착한 일을 해서 천국 갔다는 말은 없다. 마귀도 착한 일을 할 수가 있는가? 전부는 나쁜 일만 한다.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만들었다.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그 자유는 주지 않은고로 이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의행도 악행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사는 죄의 속박 아래 지음받은 존재이다. 사람은 의행도 할 수 있고 죄행도 할 수 있다. 자유하는 인간 외에는 죄를 구성할 수 없다.
1) 죄의 척도.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중에 죄의 관련과 구성은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왜 인간은 죄가 구성되느냐?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요 도덕성이 있기 때문에 죄가 구성되는 것이다. 비 인격의 세계는 죄가 구성될 수 없다. 앞단에서 말한 바 있지만 죄는 절대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야 만이 구성되는 것이고, 죄라는 말은 도덕성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에게는 자연이치가 있고 도덕이치가 있는데 이 도덕이치를 어기는 것이 곧 죄라는 말이다.
일반적 피조물들은 자연이치만 지키면 되는 것이니 인간이 보기에 그것들이 도덕이치를 지키는 것 같은 것도 있지만 실은 이것은 다 본능적인 것이다. 비 인격적인 존재들은 자연이치만 지키도록 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본능으로 살도록 되어 있다.
도덕이치를 지켜야 할 존재는 인간만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연이치를 지키면서 또한 도덕이치도 지켜야 한다. 이 도덕이치를 어기는 것이 곧 행동적인 죄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 도덕이치를 지키게 한 것은 역시 구원목적이다. 인간 외에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직접 구원의 대상자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이치를 줄 필요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선택의 목적물이기 때문에 이 구원을 위해 도덕이치를 주신 것이다. 이 도덕이치 속에는 율법과 계명과 율례와 규례와 법도가 다 들어 있다.
이 도덕이치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 도덕이 아니고 생명이치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생명이치인 도덕이치를 순종하고 능동적 피동적으로 살아가면 이것이 곧 자기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위해 도덕이치를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것이다.
※ 원앙새는 본능에 의해 짝을 잃어도 혼자만 산다. 일반 피조물들은 자연이치를 어긴다고 죄는 아니지만 자기의 목숨이 죽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피조물들은 자연이치만 지키면 된다. 그들에게는 도덕이치가 필요 없다. 그것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도덕이치를 어기는 것이 죄이다. 도덕이치라는 말은 생명이치와 같은 말이니 생명이치가 아닌 것은 도덕이치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도덕이치를 순종하고 지키면 구원이 되지만 이 도덕이치를 어기게 되면, 불순종하게 되면 정죄를 받아 죄가 되는 것이다. 이 도덕이치를 순종하여 자기에게 구원이 되면 자신이 좋은 것이지만 도덕이치를 불순종하여 죄가 되게 하면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인간에게 이 도덕이치를 주어놓고서 불순종을 하면 죄가 되게 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은 도덕이치를 어기면 죄가 되게 한 것은 도덕이치를 순종하면 구원이 되게 하는 그 일에 더욱 효과를 주기 위한 촉진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에서도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운동을 가르치는 선생이 보다 더 능률적으로 효력적으로 학습의 효과를 내기 위해 잘못한 학생에게 채찍을 가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제 1 목적물로 지음받은 인간으로서 도덕이치를 순종하여 구원이 되는 것은 자기에게 큰 존영이요 영광이지만 이 이치를 어기면 죄가 된다고 하는 이것이 자기에게 무거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치를 많이 어겼건 작게 어겼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죄사함 받기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이치를 어겨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는 일에 노력을 더 많이 해야 되는 것이라거나 작게 지었다고 해서 노력을 작게 들여야 되는 것이 아닌 도덕이치를 작게 어긴 자나 많이 어긴 자나 내 자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기는 마찬가지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완전 깨끗해지는데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이치를 어기면 죄가 되게 한 것은 다만 우리의 구원을 촉진시키기 위함이지 정죄하여 영벌을 주실 목적은 결코 아니다.
※ 왜 우리 인간에게만은 이 법을 지키라고 하느냐?
대개는 이 법을 지킬 때 오는 효력성을 모른 채 다만 한 인간으로서 법을 지켜야만이 되고, 이 법을 어기면 정죄 받는 죄가 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작은 것 하나 하나를 지킨 것만큼 자기에게 오는 효력성을 모르고 있다.
마태복음 5장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계명을 왜 주었느냐?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계명을 어겨도 정죄를 안 하면 좋겠는데 왜 하느냐? 실력의 촉진제요 구원의 촉진제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동일하게 입은 일차적 구속은 완전하다.
죄는 어떤 한계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죄를 몇 가지 이상을 지어야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작게 짓건 크게 짓건 그 질은 동일한 것이다. 차등성에서 영원한 심판이다.
죄와 영적인 자체적 심판과는 어떻게 되느냐? 도덕이치를 어겨 정죄 받은 것이 죽음 저편에 가서 영적 자체적 심판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정죄를 했건 안 했건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자기의 영적 자체적 심판이 된다.
정죄를 안 했더라면 영적 자체적 심판이 안될 터인데 했기 때문에 자체적 심판인가? 예: 학교교칙이 공부를 못하면 퇴학을 시킨다고 되어 있을 경우 이 법을 정해놓지 않았다면 공부 못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할 터인데 이 법을 적용시켰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 것인가? 법이 있던 없던 그 학생은 무능자이다.
무능은 수치이다. 무능은 둔감이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심판은 없다.
① 3개월간 감옥을 갔다 오겠느냐?
② 30개월 아무 맛도 없이 있겠느냐?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을 정죄할 수 있는 척도가 한 가지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죄의 척도가 있는데 그 척도에서 옳은 척도는 하나뿐이다.
갈 5:23 -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
(1) 그 나라의 국법.
이 세상에는 각 민족이나 종족이나 국가나 지방마다 국민이 있는데 이 국민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국법이 있다.
이 국법은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단일법이 아니고 각 나라마다 다르다. 어느 나라의 국법에는 정죄가 되지만 다른 나라의 법에는 정죄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정죄를 받을 때에는 그 국법과는 상관이 없다.
(2) 일반 도덕법.
국법보다 차원이 높은 것이 도덕법이다. 국법은 도덕법을 어기는 자를 규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 도덕법에는 인륜 혹은 인인관계에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모든 곳에 이 도덕법이 있다. 상도덕 노동도덕 교통도덕 교훈도덕 목회도덕 등 이런 도덕들이 있는데 이 도덕법은 국법보다는 차원이 높다. 그러나 이 도덕법 역시도 전 인류가 단일법이 아니고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니 이 척도도 절대 정확성이 없는 것이다.
(3) 인간의 양심법.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인데 이 인격성에는 양심이 작용을 한다.
혹자들은 이 양심이 인간의 인격의 내적 최고기관인 영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영이 아니다. 다만 이 양심은 자기 속에서 최고의 지식의 지배를 받는 기관이기 때문에 이성과 함께 작용을 한다고 볼 수가 있다.
이성에서 지식을 전달치 않으면 양심은 작용치 못한다. 그러나 이 양심이 어떤 민족이나 지방이나 국가에 따라서 다르다는 차원의 말이 아닌 순전히 개체 개별적으로 작용을 한다. 따라서 사람마다 양심의 척도가 다를 수 있다.
각자마다 양심의 척도가 달라지는 것은 각자의 인격이 지배받는 있는 최고 지식이 각자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상에게 절을 해야 된다고 하는 지식이 들었을 때와, 절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지식이 들었을 때와는 양심의 작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4) 종교법.
종교법이라 하면 좀 막연한 생각이 든다.
이 세상은 인간이 사는 곳마다 단일종교가 아닌 각이한 많은 종교가 있고, 각 종교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죄의 바른 척도를 찾을 때 어떤 종교법을 찾아야 완전한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냐? 각 종교인들은 자기가 심봉하는 종교가 진리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절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최후 심판 때까지 어떤 것이 진리라고 객관적으로 정의를 내리지를 못하고 있다. 다만 우리 인간은 자기 주관적으로 ‘이것이 절대 진리다’ 라고 하며 믿고 가는 것뿐이다.
(5) 생명법.
이 생명법은 모든 법보다 최고의 법이니 곧 생명율이다. 이것을 생명율 혹은 법이라고 한 것은 이 법은 사망계에 있는 것을 살려 놓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법은 모든 법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이 법만이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한편으로는 진리라 참이라 옳은 것이라고도 한다. 만인은 이 법의 정죄를 받아 죽게 되는 것이다.
이 법을 이해시키고 인식시키기 위해서 성문법이 있는 것이다. 성문법은 생명법을 나타내 보이는 껍데기이다. 그런데 옛날 육적인 이스라엘 종교말년에 유대인들은 종교법인 성문법은 잘 지켰으나 이면적인 생명법을 지키지 못한고로 그들의 모든 행위는 다 정죄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다른 모든 법을 지켰다 해도 생명법에 위반이 되면 정죄를 받게 된다. 이 생명법의 근원은 하나님의 의사요, 생명법의 본질은 진리요, 이 법의 능력은 생명이다. 이것만이 절대법이다.
우리 기독교는 이 법을 바로 깨닫고 이 법대로 살아야 한다. 모든 법은 이 법을 가르쳐주고 설명해주는 것이지 참 법은 아니다. 인간을 영원히 정죄할 수 있는 유일의 법은 이 법이요, 또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법이 이 법이다.
이 법 외에, 혹은 이 법을 무시하고 다른 법을 생명을 바쳐가며 지켰다 할지라도 구원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반대로 다른 법을 어겨가면서라도 이 법을 순종할 때는 구원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이 아말렉 왕과 그 족속을 죽이는 것은 국법과 도덕법과 종교법을 어기는 것이 되지만 생명법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는 것이 의요 선이지만 죽이지 않을 때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 나를 정죄할 수 있는 법이 여러 가지다.
국가법은 각 나라마다 다르다. 그 법을 어겼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정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참 좋다’ 하는 기준을 어디다 두고 말하느냐? 제 보기에 좋으니 참 좋은가?
선악과 따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는 같은 눈이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선은 하나님 눈에 보기 좋은 것이 선이다. 하나님만 완전자요 하나님만이 척도다.
아담과 하와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기준해서 동화적 피동적 유기적 선악관을 가졌는데 이제 떨어져 나오니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내 마음에 안 들면 나쁘고, 나에게 잘 해 주면 좋다고 하게 되었다. 타락 후 이것이 인간의 척도가 되어 버렸다.
모든 법의 정죄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생명법에 대니 정죄가 되는 것이 있다. 생명법 외의 척도는 전부 가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종교법(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과 로마의 국가법(나는 왕이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죄인인가? 제사장들은 이것을 다 잘 지켰다. 그래서 그들은 의인이 되었나?
우리는 최고 최후적인 이 법을 지켜야 한다.
국가법에 의해 무죄선언이 됐다고 해서 다른 법에 의해 정죄 되는 것은 없는가? 도덕법으로는 벌을 주어야 하겠는데 국가법이 없어서 처벌을 못하는 예가 있느냐? 또 국가법이나 도덕법에는 안 결려도 양심법이나 종교법에는 죄가 되는 것이 있느냐? 종교법에는 걸리지만 자기의 양심법에는 죄가 안 된다고 해서 안심이 될까? 진리가 빈약한 것만큼 양심의 죄의 관념은 빈약하다.
종교법은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명법은 나를 정죄 한다. 생명법 이상은 없다.(갈5:23 - 금지할 법이 없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법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 내가 가지고 살아야 할 척도는 이 생명법이다. 생명법을 자기 양심법으로 삼아라!
신사참배 안 하면 죄라! 이것은 명사적인 죄가 아니고 동사적인 죄이다. 성경에는 명사적인 죄와 동사적인 죄가 있다.
2. 명사적인 죄.
창4:7 - 죄가 문에 엎드린다. 민32:23 - 죄가 너를 찾아내리라. 롬6:, 7:.
일반적으로 죄라 할 때 동사적인 죄만 죄인 줄 인식을 하지만 성경은 동사적인 죄만이 아닌 명사적인 죄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동사적인 죄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인데 율법이 없이는 이 죄는 구성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방종행위, 즉 인간의 행위에 대해 율법이 들어 죄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니 인간과 인간의 행위, 그리고 율법 이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죄가 구성이 되지를 않는다.
반면에 명사적인 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보면 인간의 행동 이전에 그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자를 말하고 있으니, 이는 삼각성(인간, 행동, 율법)이 아닌 독립성이며, 혹 인간과 유기적임을 보여준다.
이 명사적인 죄는 인간을 떠나서 어떤 별개세계나 허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과 함께 있고,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니 인간과 유기성이요, 또 이것이 인간 속에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니 독립성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우리는 특별히 이 명사적인 죄를 조심해야 한다. 명사적인 이 죄를 단속하면 동사적인 죄는 구성되지를 않는다. 그러나 명사적인 죄를 단속하지 못하면 이 명사적인 죄가 인간을 동사의 죄로 끌고 가는 것이다.
※ 죄라는 죄가 언제부터 생겼느냐?
때리는 것은 동사적인 죄요, 때리고 싶은 마음은 명사적인 죄이다.
창4:7 -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 죄의 종으로 다스림 받지 않게 하라!
인간이 최초에 지은 죄가 무엇이냐? 거짓말, 거역 죄를 지은 죄가 표면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 지키지 않고 다스리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그 위에 은밀계시를 붙잡지 않는 것은 현실불만에서이다.
명사적인 죄의 근원은 천사타락인가, 마귀 악령인가?
동사적인 죄는 명사적인 죄에서. 명사적인 죄로 인해 동사적인 죄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제이장. 기독론.
제 一 편. 그리스도의 필요성.
엡1:4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기독론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론 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아’ 혹은 ‘마샤’ 라는 말이다. 순 우리말로는 ‘수류자’(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말인데 ‘구세주’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낱말풀이로 하여 ‘기독’ 이라 ‘그리스도’라 ‘수류자’라 ‘구세주’라 부르고 있으니 이 말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역시 ‘그리스도’라 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하는데 이 그리스도의 필요성에 대해 일반적 견해로 본다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해서 구세주가 오는 것처럼 되어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이렇다면 성경은 좀 달리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니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왔다, 혹은 필요했다’고 성경은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라고 한 것을 보면 인간의 타락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 받을 것이 예정되었고, 그 예정된 대로 인간이 창조함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라는 말을 단순히 구세주 혹은 수류자라는 일반적인 낱말의 뜻에 국한시키지 말고 이것을 좀 더 초월하여 특수적인 명칭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기독 혹은 수류자가 아니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즉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일부분만 나타내는 것이니 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단순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에다 국한시키지 말고 좀 더 고차원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은 사역적 일부분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 속에는 인간을 창조할 수 있었고 예정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는 이 말은 원인적인 그리스도, 동기적인 그리스도, 목적적인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기독이라는 명칭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뜻, 그 칭호에다 국한시켜 버리지 말아야 한다.
※ 그리스도라는 말은 한문으로는 기독이다. 야수. 순 우리말로는 수류자, 기름부음 받은 자이고, 헬라어로는 메시아.
신학박사들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했다고 보고 있다. 즉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이 타락을 안 해도 그리스도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왔다’가 아니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했다. 사랑 안에서 자기의 자녀로 우리를 선택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시고자 하는 그 마음이 생겼던 분이시다.
① 단순히 허물과 죄에 빠져 있는 우리를 구속한 그리스도보다,
② 만물을 창조한 그리스도보다,
③ 우리를 창조하고자 한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길이 길이 살게 했는데 인간이 장난을 한 번 치니 하나님의 계획이 확 비틀어져서 인간에 의해 하나님이 계획을 다시 짜야 하는 것인가?
성경을 기록할 때 그리스도를 인간이 사용하는 문자 중에 가장 가까운 용어인 수류자라고 했다. 그러니 작은 낱말 뜻에다 하나님의 대 구원을 속박시키지 말자. 하나님의 대 뜻을 그 낱말 속에 축소시키지 말자.
학자들은 조그마한 병 속에 그리스도를 집어넣고 ‘그리스도라는 뜻은 이것 만이다’ 하는 식으로 주장하며 그 외의 것을 말하면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과오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요한복음에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라고 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역사세계에 와서 일만하고 간 이것만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큰 것만 예정을 했고, 작은 것은 예정을 안 했나? 이것은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인간을 통하여 사용하게 하셨는데 이 그리스도란 하나님 외에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바로 그 여호와로서 당신의 의지세계에서 당신의 인격성, 활동성이 이 땅에서 사역적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호와로 계시지 않고 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느냐?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본체와 단일 신격이신 하나님이신데 단일 신격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혹은 여호와께서 없어져 버리고 그리스도로 변화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시작하시고 착수하시고 완성하신 그 면이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인간의 구원선택도 예정도 설계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시고 설계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의 성질도 알아야 되고, 그리스도의 필요성도 알아야 된다.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의 단일 인격성에서 활동하신 그 성령의 활동의 역사성이 그리스도요, 이 그리스도로서 선택 예정 계획 설계하신 것이 막연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라야 만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던 것이다.
※ 엡1:4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엡2:10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여호와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하지 않고 왜 꼭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 라고 하는가?
① 본래는 여호와 하나님은 단일 인격성적 하나님이신데 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붙이게 되었느냐? 그리스도로 되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 자리 에서 없어졌느냐? 하나님이 변해서 그리스도가 되었느냐?
② 본체는 하나이면서 이름만 둘이냐? 아무 의미도 없이 이름만 하나 더 가졌느냐?
그리스도란 결과적인 그리스도만이 아닌 원인적인 그리스도도 되시니 이 분은 하나님의 단일 인격성이신 분으로 이 단일 인격성에서 구원이라는 것이 작용 발생해서 인간의 구원사역을 책임지신 분이다.
하나님의 단일 인격성과 천국의 단일성 때문에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했다. 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의 단일 인격성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로 인한 효력이 아니면 천국에서 단일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역적인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는 천국의 단일, 하나님의 단일이다.
하나님의 본체에서 성자가 생겨지고 성령이 생겨졌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라고 하는 이것은 억지다.
유출은 존재적 유출이 아니고 사역적 유출이다.(요1:3, 4) 잘못하면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파괴하기 쉽다.
구원은 시작이 있다. 구원을 시작한 그 성품이 그리스도요, 사역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제一절. 원인적 필요성.
① 하나님의 단일 인격성.
② 천국의 단일성.
하나님께서는 신령세계에서 사시고 인간은 물질계에서 제일 좋은 곳인 에덴동산에서 살게 했지만 에덴동산에 사는 인간이 하나님은 신령계 완전계에서 살고 자신은 물질계 불완전계에서 사는 것이 못마땅해 불평을 하며 타락을 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내가 너희들의 요구대로 물질계에 살던 너희들을 신령계에 살도록 해 준다’ 한 것이 구원인가?
구원을 이렇게 보니 인간이 그렇게 일을 안 일으켰더라면 인간은 영원히 물질계에서 살터인데 일을 일으켰기 때문에 구원 얻어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으로 잘 되었다고?
이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 계획 절대성으로 보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 보기에는 그런 것 같으나 그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했다. 타락하면 입히고, 안 하면 안 입히고가 아니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로 통하여 구원하기로 예정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타락을 안 해도 필요하다.
처녀의 몸을 통해 역사세계에 오셔서 십자가로 마친 그리스도는 사역적인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리스도가 있었다. 복중에 생길 때 그리스도가 됐다면 하나님은 시작이 없지만 그리스도는 시작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시작 이전에 말씀이 계셨다. 하나님에게나 성령님에게나 그리스도에게는 시작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무시무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역적인 그리스도만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력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필요했으니 이것을 그리스도의 원인적 필요성이라고 한다.
(1)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인격적 관계는 마치 꽃이 아름다워서 인간이 꽃에게 사랑을 주어도 꽃은 그 인간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일방적 수수관계가 아니다.
인간은 불교의 부처와는 비 인격적 관계, 무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으니 그 관계성은 인간이 정성을 드리지만 부처는 그것을 받지 못하는 일방적 수수관계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과도 일방적 관계는 가질 수가 있지만 하나님과 상호 유기적 인격적 수수관계는 하나님이라야 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통해 이 관계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당신과의 인격적 수수관계이다.
(2) 신령계를 누리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필요성.
그 신령계는 하나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통치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사용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누릴 수도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느낄 수도 없다. 하나님이라야 그 신령계를 누리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주심은 하나님의 전 인격성이 원인이다.
(3)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필요성.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이 더 있을 수도 없고, 다른 어떤 존재가 하나님이 될 수도 없다.
인간은 본래 인간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닐 뿐만 아니라 본질과 본성적으로도 하나님과 동성 동질도 아니다. 하나님과 동질 동성적인 존재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자체가 하나님과 단일 존재로 되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면 그 된 양만큼 하나님과 인격적인 수수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령계는 본래는 하나님만이 누리는 곳이고, 하나님은 하나님만 상대하시는 분이신데 그리스도로 통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을 수 있도록 하시되 그렇다고 해서 진리의 하나님께서 진리의 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방편을 쓰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칙적인 이 진리를 무시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그 성품을 입지 않고도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할 수도 있고, 그 신령계를 누리고 느낄 수 있게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불변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또 진리라고 하는 이 진리 자체가 불변적이기 때문에 그 방편을 쓰시지 않고 인간이 비록 하나님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입도록 해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지며 신령계를 누리고 느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근본적으로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에 비해 이질인 인간에게 신의 성품을 입히기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경에 말하기를 ‘피 뿌림을 입기 위해 인간은 나그네가 된다’고 했다. 이 피 뿌림이란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한다. 우리 인간이 1차적으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인 구속을 입지 않고는 신의 성품을 덧입을 수가 없다. 신의 성품을 덧입히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셔서 죄에 속박되어 있는 것을 속량 하시고, 구속을 입혀서 중생 시켜 놓으시고, 중생함을 입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인 진리와 영감으로 점차적으로 계속적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시켜 덧입히는 일을 하신 것이다.
1. 성질적 단일성의 필요성.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의 성질은 단일성적이시다. 하나님 자체가 마찰성이나 대립성이나 충돌성이나 이질성이 없다.
하나님의 구원선택의 대 목적물로 지음받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단일성적 존재가 되지 아니하면 구원결과의 효력성이 없는 것인데 이 인간이 하나님과 단일성적 존재로 만들어지는 데는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 이질적인 인간은 하나님과 단일성이 되지 못하고, 천국과도 단일성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단일성적 성분으로 만들어지는 데는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 천국과는 대립성이 없다. 전부는 단일성이다. 하나님과 단일성적 존재가 아니면 천국에서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고로 이 구원이라는 구원의 효력성이 단일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운동이라는 말을 환언하면 단일성운동이라는 말과 같다.
※ 왜 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한 그 즉시로 타락하기 전에 천국에서 살도록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 인간은 하나님과, 또한 천국과 단일성이 아니다.
죄만 안 지으면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있느냐, 의로워야 들어가느냐?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곧 그리스도의 의라야 들어간다.
‘노아는 의인이라!’
타락 전에는 하나님과 단일성적인 의는 없고 하나님과 상대적인 의이다.
의를 입혀준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인 의를 입혀준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죄지으라고 보냈는가? 골탕 먹이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피 뿌림)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입게 했다.
애당초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지었다면 이 세상을 거치지 않고도 천국에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공정성이 파괴된다.
① 인격의 세계에서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그 관계성에 구별이 있어야 되고,
② 인간과 인간과의 차등성이 있어야 된다.
우리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짓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입을 수 있는 자로 지었다.
하나님이 단일성적이요 단일성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그와 같은 단일성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했다. 1차적인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 뿌림을 입지 못하면 하나님과 단일성이 되지 못한다.
2. 의사적 단일성의 필요성.
인격자라 할 때는 의사의 자유가 있으니 이 인격자는 개체 개별적 독립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본체적으로는 단일이지만 위적으로는 상대적인데, 성자는 땅에서 기도하고 성부는 천국에서 기도를 들으시고(그러나 2위 2체라는 말은 아님) 이렇게 상대적이었지만 성부와 성자는 의사적으로 대립성이 없이 단일성이었던 것이다.
성부의 의사와 성자의 의사가 각이한 의사가 아니듯이 성자의 모든 활동은 절대적인 자유활동이지만 그 자유활동 역시 성부의 의사와 단일성적 활동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은 하나님은 완전자이신고로 동시에 단면적 의사나 단면적 활동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고 동시에 각이한 활동을 하는 분이시다. 활동이 다르다고 해서 당신 자체의 의사가 내적 대립성이나 마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사는 완전하신 인격성에서 생겨진 의사이기 때문에 동시에 다양적인 활동을 하실 수 있는 분이요, 그 활동이란 그 분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다. 즉 동시에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동시에 다양한 의사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동시에 다양적인 의사를 가질 수도 있고, 동시에 다양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고로 천국이라는 천국에는 모든 존재가 각이하게 활동을 하지만 하나님의 의사에 대립된 활동은 없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 존재는 이 분야에서 하나님의 의사대로 활동을 하고, 저 존재는 저 분야에서 하나님의 의사대로 활동을 한다.
우리가 같은 의미에서 보면 교회생활을 할 때 같은 시간에 각각 다른 활동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사에서 나온 활동이 아니라고 속단을 내리며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의사적 단일이라는 말은 단 하나의 의사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 대립성이 없는 의사를 가진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속에 의사가 만 가지가 있으면 나에게도 만 가지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품은 의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의사가 아닌 의사는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나의 의사가 하나님의 의사와 단일이 되지 못하면 영계에 가서는 자기의 모든 활동은 중단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의사적 단일이라는 이 면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의사적 단일이 아니면 구원의 결과성은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의사와 단일 의사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는데는 그리스도가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고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의사와 단일의사의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그리스도가 왜 필요했는가? 우리가 범죄 했기 때문에 구원해 내는 그 면에만 필요했던 그리스도가 아니다. 천국은 단일성적 천국이다. 우리를 성질적 단일, 의사적 단일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실은 인간의 타락도 타락해서는 안될 인간이 타락한 것이 아니고 궁극적인 면으로 보면 타락이라는 과정이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순서 중에 하나이다. 알고 보면 타락이 꼭 필요했다.
인격적인 존재에게 주어진 특수한 특권은 자유이다. 누구든지 의사의 자유는 있다. 대립적인 의사도 있고 충돌과 마찰적인 의사도 있다. 이런 의사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면 천국이 혼잡해진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의사에 단일로 맞추어진 단일성적 의사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있다. 또한 천국은 하나님의 의사에 맞지 않는 활동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그 자는 만고에 멍청이다. 존재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으나 활동중단, 만고 멍청이다.
활동은 의사에서 나오고, 의사는 인격에서 나온다. 갓 출생한 아이는 의사는 없고 다만 본능뿐이다.
이 세상에서 대소 전쟁, 대소 마찰, 대소 대립을 의사단일이 되게 하는 방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다.
하나님은 동시에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신다. 그러나 한 의사를 가지신 분이다.
말씀에 피동된 순종으로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입어진 성품은 천국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잠재하고 있다. 하나님은 공 세운 것을 좋아하시지 않고 만들어진 것을 좋아하신다.
의사가 많은 사람은 활동이 많다. 활동이 없느니 만큼 모든 것은 축소된다.
천국은 통일이다. 예: 지휘자 한 사람의 지휘에 동시에 두드리고 때리고 발로 걷어차고 밀었다 당겼다 불었다 빨았다 하는 여기에서 우렁찬 음악이 나온다. 노래곡조를 모르면 만고 멍청이다.
마태복음 28장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했는데 우리가 이치만 알면 누구든지 제자를 삼을 수 있다. 교회에 나오는 자 중에 교회의식만 있지 제자는 드물다.
● 제자를 삼는 과정.
① 지식적 제자를 삼는다.
② 도덕적 제자를 삼는다.
③ 나중엔 심복이 된다.
천국은 단일성적 천국이다. 천국의 성질과 하나님의 성질은 동일적 성질이다. 한 의사를 가지고 모든 존재가 사는 곳이 천국이다. 능력도 그러하다.
이 세상은 의사 면에서 대립적인 의사가 있고, 각치성적 의사가 있고, 합치성적 의사가 있고, 단일성적 의사가 있다.
의사단일은 마음에 있는 것을 가져간다. 천국은 명령도 지시도 할 필요가 없다. 이 땅에서도 의사단일이어야 천국을 이룬다.
예수님이 시몬을 찾아오신 목적이 있다. 제자를 삼아, 사도를 삼아 천국의 일등보좌에 앉혀주려고 찾아왔다. 그러나 시몬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 의사단계.
① 처음엔 대접조로 나온다. ‘부탁이니 가 주자’(들어주는 것)
② 시몬의 배를 요구하심에 선심으로 나온다.
③ 순종 - 말씀에 대해 사업의 실패가 와도 순종.(보통은 이것을 최고로 본 다) 이치에 맞던 안 맞던 순종하고 보니 고기를 많이 잡았다.
성공 소원 성취 목적달성 유명해진 것을 복 받았다고 한다.
④ 이것 이상 올라가야 주님의 의사에 단일이 된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 ‘주님처럼 위대한 분이 나를 제자 삼으려고 합니까? 나를 제자 삼으면 당신의 위치 위신 체면이 무엇이 됩니까? 그러니 나를 떠나소서’ ‘이제 네가 내 의사를 아는구나,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전에는 고기 많이 잡는 것으로 성공을 삼고 살았는데 이렇게 되니 이미 취하고 이룬 성공도 내어버리고 예수님과 단일 의사로 간 것이다.
고기 잡는 베드로와 사람 낚는 베드로는 그 실력이 천지차이다.
교인을 진리를 가지고 낚았느냐, 그물을 가지고 잡았느냐? 무엇을 가지고 잡았느냐에 따라 그 가르침은 다르다.
천국에는 일일이 지시가 없다. 자원적 자유적 능력적 자유이다. 하나님의 의사를 모르면 활동중지가 된다.
3. 능력적 단일성의 필요성.
하나님의 인격성도 단일 인격성이요, 천국도 단일성이기 때문에 능력적 단일성이 아니면 그 천국이 자기에게 아무 필요가 없고 자기는 천국에서 천국이 주는 효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것의 종류가 이 세상에 만물이 무수한 것보다 더욱 무한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유한한 물질계의 것도 능력이 없으면 그것에 대해 아무 효력을 입지 못하는 것처럼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이 움직여지게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그 능력을 입지 못하면 그 천국의 것을 아무 것도 사용도 활용도 못하게 된다. 천국의 모든 것을 사용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단일 능력이라야 된다.
4. 생명적 단일성의 필요성.
인간이나 다른 모든 피조물(생물)들은 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기는 했으나 이 모든 생명은 개체 개별적 생명을 소유하고 존재하고 있다. 이 개체 개별 생명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적 생명이긴 하지만 하나님 자체생명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은 이 세상에서만 생명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천국에서는 존재하지를 못한다. 천국에는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존재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완전하신 생명인고로 그 천국에는 이 생명이 아니면 존재하지를 못한다. 인간이나 일반생물들이 가진 이 개체 개별 생명은 유한한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이기 때문에 이런 생명을 가진 인간이 천국에 가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어 개체 개별적 존재가 하나님 한 분의 단일 생명을 소유하게 해야 하므로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없다.
생명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근원적 혹은 원인적 생명과, 피조적 생명이다. 그리고 이 생명이라는 생명은 독립적인 존재이거나 독립적인 요소는 물론 아니다. 이 생명은 이론적 성분적으로는 분리가 되지만 존재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는 어떤 존재 속에 결합적으로 있는 생명이다. 그러나 이 생명은 인간에게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생명이 있는 존재도 있고, 생명이 없는 존재도 있다. 모든 존재 속에 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존재가 그 생명이 떠나간다고 해서 존재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생명은 모양도 형체도 중량도 색깔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 원인적 근원적 생명.
이 세상에는 생명적 존재와, 무 생명적 존재가 있다. 혹은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기도 하지만 전체 존재적으로 볼 때는 생명적 존재와 무 생명적 존재로 나눌 수 있다. 생명이라는 용어는 한 가지이지만 같은 생명이 아니다.
※ 생명(조에-ζώη)이 무엇이냐? 언어학적으로는 ‘생명이라, 목숨이라’ 하는데 이 생명은 신비스러운 것이다.(목숨: 목으로 숨을 쉰다는 말인가? 목으로 숨을 쉬는 것은 호흡이다)
일반사회는 인간을 기준하고 물질을 기준해서 언어가 생겨졌기 때문에 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 ‘잘못되었다’ 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기준해서 하는 말이냐? 물질계에서 사용하던 용어로 신령계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하니 늘 물질적인 관념으로 말을 하고 생각하게 된다.
성경의 용어가 천국의 용어인가? 그렇다면 천국에는 각 나라 사람들이 오는 곳이니 각 나라 말을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천국에 간 사람들끼리 어떻게 통할까? 집에서 개만 보던 아이가 산에서 늑대를 보면 산에도 개가 있더라고 할 것이다. 이름이 같다고 같은 것으로 보지 말라!
원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하나님의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 아니다. 이 생명은 원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도 생명이 있느냐? 하나님은 곧 생명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으니 ‘나는=생명이다’ 하는 이 말은 나(예수님)에게도 일반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 가지고 있는 생명은 일반적인 존재들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그 생명은 곧 근원적인 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생명은 피조적이거나 수동적인 생명이 아니고, 그렇다고 소유적 생명도 아닌 당신 자신이 곧 생명이시다. 생명 같은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은 곧 생명이시다. ‘사랑=하나님, 진리=하나님’ 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곧 생명이신데 이 생명에서 모든 생명들이 피조 되어 나온 것이다.
소유적 생명을 가진 나는 이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다르다. 만일 같다고 하면 하나님도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나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가 아니고 ‘나는 생명이다’ 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사랑은 하나님이다?
우리 아버지는 엿장수다=엿장수는 우리 아버지다?
(1) 완전한 생명.
종교적 원인적 이 원 생명은 곧 완전적인 생명이다. 완전적 생명이라는 말은 능력적 완전이요 본질적 본성적으로 완전인고로 불변성을 가진 생명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은 불변성이요 불사성이요 또 완전에 도달한 생명인고로 성장이나 쇠퇴나 변질이 없는 생명이다.
(2) 영원한 생명.
이 생명은 영원적인 생명이니 무시무종의 생명이다. 무시무종의 생명이라는 말은 과거적 영원이요 미래적 영원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은 시공간의 제재를 받지 않는 생명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질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고로 자체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변질이나 쇠퇴나 죽음이 있을 수 없다.
(3) 무한적 생명.
이 생명은 독존적인 생명이면서 무한적인 생명이다. 무한적인 생명이라는 말은 이 원 생명이 많은 것을 창조하거나(일반생명을 창조한 것) 많은 존재에게 생명(중생 시킬 때 넣어주는 신의 생명)을 나누어준다고 해서 그 원 생명이 감소가 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많은 존재에게 생명을 주어도 이 생명은 여전히 충만적 생명으로 충만하게 있다.
2) 피조적 생명.
하나님의 생명 외에 모든 생명은 다 피조적 생명이다. 이 피조적 생명에 있어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영물들의 생명.
이 생명은 자연생명과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 생명은 자연법칙을 어겨도, 자연의 혜택을 입지 않아도 유지할 수 있는 생명들이다. 이 생명을 예를 든다면 천사 마귀 인간의 영 등이다.
우리는 천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원 생명이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적 생명이다. 원 생명은 하나님 한 분의 생명밖에 없고 그 외에 어떤 존재도 다 지음받은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사가 활동을 하는 것은 무 생명적인 존재가 활동하듯이 기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들도 개체 개별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지만 그 생명은 자연생명이 아닌고로 자연법칙을 초월해 있으니 초자연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영물들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생명이다.
이 생명은 천사의 생명과, 마귀의 생명과, 또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산 영(영이 살아서 있을 때)의 생명이니 이 생명들은 동질적 동급적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 생명은 원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도 아니고, 또 일반적인 물체가 가지고 있는 자연생명도 아닌 오직 영물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이다.
(2) 물질적 자연생명.
이 세상에는 많은 존재가 있는데 이 존재들 속에는 생명적인 존재와 무생명적인 존재가 있다. 같은 물질이면서도 생명이 있는 존재가 있고, 생명이 없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생명이라 할 때 의례히 자연생명을 두고 말한다.
물질계에 있는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을 인간들이 말하기를 ‘자연생명이라, 생리생명이라’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생명을 ‘육의 생명, 물질의 생명, 자연생명, 생리생명, 가사적 임시적 생명’ 이라고 지칭한다.
※ 이 세상에 이런 생명을 존재케 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원 생명, 근원적 생명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물체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육의 생명, 혹은 자연생명, 또는 생리생명이라, 일반생명이라, 임시적인 생명이라, 죽을 가사적 생명이라’ 한다.
이 생명은 물질은 아니지만, 즉 그 생명자체는 물질이라고 볼 수 없으나 물질 속에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물질적 자연생명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 생명은 물질이 없으면 존재불능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물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물질적 생명이라고도 하고, 자연법칙에 의해 유지되는 생명이기 때문에 자연생명이라고도 한다.
이 생명은 원 생명에서 유출된 것도 아니고, 연결된 것도 아니고, 연합된 것도 아닌 완전히 개체 개별적 독립적 생명이다. 하나 하나 독립해 있는 독립적 생명이다. 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물체가 크다고 해서 그 생명이 크고, 작다고 해서 작은 것도 아니다.
또 이 생명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편파적 존재가능의 생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무 하나는 한 생명이지만 그 가지를 꺾어서 심으면 그 생명이 또 장성한다. 그런 경우에 그 생명이 파편처럼 떨어져 나가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 타 존재에 붙어서, 혹은 땅에 붙어서 생존할 수 있다.
인간도 전체의 신체가 죽기 전에 그 사람의 눈알을 빼서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의 밝은 눈의 혜택을 볼 수 있다.
① 생명의 수명.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다양한 것을 발명했지만 생명만은 아직 인간의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 생명은 모든 물체가 공동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이 아닌 개체 개별적 생명이기 때문에 유한적 생명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생명이다.
생명은 생명 자체에 특수성이 있어서 이 생명이 어떤 존재의 수명을 좌우한다기보다 그 생명을 소유한 물체의 특수성에 의해 이 생명의 수명이 좌우된다고 보아야 한다. 즉 같은 물체이면서 그 생명을 잠시 유지하는 것이 있고,(하루살이 같은 것) 수백 년을 유지하는 생명이 있다. 또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있고, 식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들이 있다. 이런 생명들의 수명은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다 유한적 생명이다.
※ 생명이 물체에 들어가서 그 생명이 그 물체의 수명을 좌우하느냐, 물체가 생명에 들어가서 그 물체가 그 생명의 수명을 좌우하느냐? 학의 생명이 하루살이 속에 들어가면 천 년을 사느냐?
파리가 가진 생명, 노루가 가진 생명 각각 그 생명이 다른 것인가, 아니면 생명은 같은데 생명이 들어간 물체가 각기 다른 것인가? 똑같은 물질인데 물체의 변화에 따라 그 생명이 좌우되는 것이냐?
눈에 보일 듯 말듯 한 생명체도 알을 낳는데 그 알은 먼지보다 작다. 그 생명체 속에 코끼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집어넣으면 코끼리가 되어 움직이겠느냐? 이것도 저것도 생명이 떠나가면 죽기는 다 죽는다. 모든 물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은 유한된 생명이다.
② 식물의 생명.
하나님께서 모든 식물을 창조하실 때 식물의 종류에 따라 각각 생명을 주어서 생명적 물체로 창조하셨다. 물체를 따로 짓고 그 속에 생명을 별도로 넣어주었다기보다, 즉 생명과 물체를 별개성으로 지은 것이 아닌 물체 자체를 지을 때 생명적 물체로 지었다. 그렇지만 물체와 생명은 같은 것은 아니다. 물체와 생명은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 물체가 곧 생명이고, 생명이 곧 물체가 될 수는 없다.
물체 속에 생명이 있음이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물체가 생겨질 때 그 물체 속에 생명이 있어서 생명적 물체가 되었으니 그 물체에서 생명이 떠나가게 될 때 물체도 동시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동물뿐만 아니고 동식물을 막론해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물체를 분리할 수는 있다. 생명이 있는 물체와,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가 그 생명이 없어진 물체와는 완전히 구별이 된다. 독립적으로 있는 생명이 A라는 물체 속에 있다가 B라는 물체로 옮겨가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생명이 어떤 물체 속에 있다가 그 물체에서 떠나면 그 물체는 생명이 없는 죽은 물체가 되는 것이니 이 생명이 독립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거나 타 물체로 들어가서 존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물체 자체가 생명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또한 생명은 어떤 물체와 결합적으로 존재는 되지만 물체를 떠나는 날에는 그 생명은 무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여진다.
모든 식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다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일 년 초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나, 수령이 수백 년이 되는 고목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나 그 생명들은 물질의 생명이요 자연생명임이 틀림이 없다. 또 각각의 생명이 각기 다른 것도 아니다. 동질의 생명이지만 물체에 따라 생명의 수한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생명은 무한히 번식할 가능성이 있고, 또 이 생명은 형체도 없이 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으로 자연계가 없어지면 이 생명도 다 없어진다. 자연계가 있는 동안에는 이 생명이 많이 번식이 되어가지만 그 날에는 자연계와 여기에 속한 생명은 모두 다 없어진다.
※ 자연생명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이 생명이 그렇게 귀중한 생명인가?
식물의 생명은 자연생명이고 물질생명이고 물질에 예속되어 있으니 독립적 존재의 생명은 아니다.
생명은 이전될 수 있는가, 없는가? 논리적으로는 독립이 될 수 있으나 분리적 존재의 생명은 아니다. 생명의 크고 작음은 나무의 크고 작은 것에 다르지 않다. 물체에 따라서 생명의 유효기간이 좌우된다.
③ 동물의 생명.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도 역시 물질적 자연생명임이 틀림이 없다. 물론 한 존재에 한 생명으로 생존함이 틀림이 없으나 어떤 경우에 보면 식물의 생명처럼(나뭇가지나 풀을 잘라 심으면 편파적 파생적으로 개별적으로 존재함과 같이) 편파 혹은 파생적으로 생존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본래 두 생명 이상을 소유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한 생명에서 일부분을 떼어내게 되면 그 존재는 잘라낸 것만큼 감소가 됐으나 생명은 여전히 본래 생명대로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잘린 손가락도 혈연만 같으면 이어진다.(질과 질은 동일)
동식물이 똑같이 생명이 물체를 떠나면 존재하지 못하고, 물체는 생명을 떠나면 가치가 없다.
이 생명은 비 물질성이면서 아주 신비스러운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 물체가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생명이 떠나면 그 힘은 없어지고 모든 기능도 없어진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능은 생명에서 나온 것인가, 물체에서 나온 것인가? 기능 자체는 생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체에 있는 것이다.
물체에 있다고 한다면 생명이 떠난 물체라도 물체 속에 기능이 존재한다는 말이 되니 기능은 계속 발휘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못한다고 해도 그 기능이 물체에 있지 생명에 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보아서 물체와 기능과 생명은 너무나 신비스러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은 비 물질이면서 물체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힘은 생명에 있는 것인가, 물체에 있는 것인가? 아무리 힘이 있는 동물이라도 생명이 떠나면 그는 죽는다.
동물들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신체와 생명과 기능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기능은 물체가 가지고 있느냐, 생명이 가지고 있느냐? 이론적으로 구분은 되지만 유기적인 관계이다.
물체의 크기에 따라 그 안에 든 생명의 크기도 달라지는 것인가? 물체가 생명을 따라가느냐?
물체=생명이 아니다.
기능=생명이 아니다.
기능은 물체에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생명이 떠나가면 기능도 없다.
(3) 인간의 존재생명.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영육이 논리적으로도 분리가 되고 실질적으로도 분리가 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대로는 인간이 영육의 분리로써 존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육이 분리되어 존재 불가능하다는 말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우리 인간은 영육이 분리되어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죽었다’ 할 때는 신체가 죽었다는 말인데 사람이 죽으면 그 신체인 육은 매장이 되지만 그 신체 속에 있던 영은 신체와 함께 있지 않고 신령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영과 결합되어 있던 신체는 독립적으로 되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이미 구속받은 자들) 또는 최후 심판 때까지(구속받지 못한 자들) 있다가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 때 흙에 있던 신체들은 부활을 해서 영체로 변화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 생명과 육신의 생명은 각각 독립적인 생명임을 알 수 있다.
본 단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의 생명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존재의 생명을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의 생명은 과연 어떠한 생명일까? 이 생명 역시 물질적 자연생명임이 틀림이 없다.
이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 외에는 다 피조적 생명이다. 인간이 본래 지음 받을 때 원인의 영의 생명도 하나님 자체의 생명이 아닌 피조적 생명이다.
같은 피조적 생명이지만 영의 생명과 육신의 생명은 분리가 된다. 원인의 영의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물질적 자연생명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영의 생명은 결합돼 있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적 생명이 아니고, 또 자연은총으로 혹은 자연법에 의하여 사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의 생명은 물질의 생명이요 자연생명이다. 우리는 이 생명을 동물들의 생명과 둥등시 한다. 이 말은 생명의 소유자인 인간의 신체를 동물의 신체와 동등시한다는 말이 아니고 물질이 가지고 있는 자연생명을 동등시한다는 말이다. 즉 동물들 속에 있는 생명도 신의 피조적 물질적 유한적 자연생명이요, 인간의 신체 속에 있는 생명도 역시 피조적 물질적 유한적 자연생명이니 자연이치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들은 이 인간의 신체생명을 일반동물들의 생명과 달리 보는 자도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신체 속에서 생명이 유지하고 있는 한 그 신체에서 작용되는 기능성이 동물들과 달리 탁월하기 때문이다. 일반동물들이 작용하는 부분, 즉 본능성과 감각성과 활동성은 동일하지만 이성적인 면, 비판성, 판단성, 사색성, 탐구성, 개발성, 발전성 등은 동물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니 이들은 인간만이 가진 이러한 기능성과 지능성이 곧 생명의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생명의 작용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과 생명이 아무리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 할지라도, 또 신체와 그 이성이 결합되어 있다 할지라도 생명이 떠나면 그 이성은 완전히 작용 불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신체와 이성과 생명은 각각 귀중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이는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신체 속에 있는 생명을 가장 신선하고 가치 있게 본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수한 목적 하에 지으셨기 때문에 특수적으로 짓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특수성이란
① 일반 피조물에 비해 특수하다.
② 영육 결합체로 지음 받았다.
③ 두 생명의 존재로 지음 받았다.
원인은 영의 생명과 육의 생명 모두 피조적 생명이다. 일반동물보다 탁월하다. 이성과 생명과 신체이다. 인간의 영의 생명은 일반동물의 생명과 다르다.
생명과 이성은 다르다. 우리는 생명과 물질과 이성을 분리시킴.
여기서 무엇이 중요한가? 생명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물체와 이성이 없으면 가치가 없다. 생명 없는 물체는 송장이다. 물체와 생명은 있어도 이성이 없으면 식물이다. 물체의 생명은 아무리 귀중해도 유한된 생명이다.
① 수동적 단일생명.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창조성이 특수하고, 창조 이전에 창조를 위한 도모성도 특수하고, 목적성도 특수하지만 또 하나 특수한 것은 수동적 단일생명이 특수하다. 이 수동적 단일생명은 인간에게만 가능하고 인간에게만 준 것이다. 이 수동적 단일생명이란 피조적 생명이 아닌 원 생명이요 근원적 생명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적 피조적 자연생명만 생명으로 알고 있지 영원한 참 생명인 수동적 단일생명에 대해서는 무지상태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의 생명의 귀중성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물질적 자연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지 자연생명과 비교가 되지 않는 수동적 단일생명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생명을 우리는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ꊱ 이 생명의 명칭.
ꋎ 근원적으로 신의 생명.
ꋏ 시간적으로 영원한 생명.
ꋐ 소유적으로 영의 생명.
ꋑ 능력적으로 완전한 생명.
ꋒ 본질적으로 진리생명.
ꋓ 가치적으로 불사생명이다.
이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생명이니 이 생명은 한 인간에게 던져 준 하나님의 파생적 생명이 아니고 신의 단일생명이다. 또 이 생명은 인간 자체의 생명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받은 수동적 생명이다. 인간만이 이 생명을 받아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로 통하여서만이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이란 인간이 수동적 단일생명을 받음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물질적 자연생명에 관계되는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아니고(물론 결과적으로는 이 물질의 자연생명도 새 생명에게 흡수되어 삼키는 면에서도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생명적 단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창조주이신 신의 원 생명이 우리 인간 개개인에게 오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로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신인양성 일위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이 생명이 인간에게 접선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존재들이 그리스도로 통해서 하나님의 한 생명을 받아 살기 때문에 이를 수동적 단일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 수동적 단일생명은 영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생명이다.
우리 인간은 두 생명을 가지고 산다(물체생명, 영의 생명).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세 가지 생명이다.(물체생명, 영의 생명, 육신)
물질의 자연생명은 범죄 하여 죽었다.(피조적 생명) 그러나 영의 생명은 그대로 있다.
① 우리 인간은 특수도모의 존재로 지었다.
②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특수성이 있다.
③ 인간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으니 이것은 수동적 단일생명이다.
물질적 자연생명은 자연법을 떠나면 죽는다. 부지런히 쓰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옮겨라.
이 생명은 파생적 생명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결이다. 하나님과 단일생명이요 한 생명이다. 이 수동적 단일생명은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필요하다.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이 없다.
예수님의 인성은 성자나 도덕가는 될 수 있으나 구원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구원은 불가능이다. 연결을 짓는데는 인간의 공로가 몇 %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것인고로 끊어질 가능성은 없다. 한 번 중생 후에는 죽는 법이 없다.
생명이 중요하다. 그러니 고깃덩어리의 생명을 아끼지 말고 수동적 단일생명으로 살라! 이 생명에 접선시키면 모든 것은 살아난다.
ꊲ 영적으로 죽은 생명.
인간이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을 때 원인의 영의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었고, 이 피조적 영의 생명은 가사성적이었기 때문에 이 생명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죽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후대 인간들에게 계속적으로 그 죄가 유전(혹은 창조)되어 왔고, 물질적 자연생명도 인간의 생산과정에서 유전되어 왔다. 즉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은 그 영의 생명이 죽은 상태로써 유전됐다는 말이다.
인간이 출생할 당시에 그 육체가 자연생명을 유전 받는 것처럼 영도 생명을 유전 받는 것이 아니고 육은 산 육으로 출생을 하지만 영은 죽은 영혼으로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사영(死靈)유전론이라는 말이다.
혹자들은 인간이 출생해서 죄를 의식하지 아니할 때에 죽는 영아는 천국에 간다고 보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사영유전론을 부인하고 생영 유전론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영유전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인간은 개체 개별적으로 새로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만이 그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생겨질 때에 영적으로 죽은 자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통하여 하나님이 생명이 인간에게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영은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ꊳ 재 존재(중생된 성도)가 영원히 단일 생명으로 산다.
이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들은 현존세상에서 개체 개별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영계에서는 수동적 단일 생명을 소유한 자는 개체 개별 생명이 아니고 전체는 한 생명으로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두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개체 개별 생명이니 이 생명을 칭하기를 육의 생명이라, 생리생명이라, 자연생명이라, 임시생명이라, 혹은 가사적 생명이라고 한다. 또 한 생명은 중생된 영의 생명이니 이 중생된 영의 생명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이 영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인데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만 받는 생명으로 단일 생명이기 때문에 중생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그 본질과 본성이 같고 시간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능력적으로 차별이 없다.
그렇지만 이 생명을 우리 인간의 말로는 가히 표현은 할 수가 없으나 구태여 표현한다고 하면 그 생명의 충만에는 차별이 있다고 할는지? 왜냐하면 이 생명은 날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소되는 생명이 아니고 죽은 생명을 삼키고 나면 그 죽은 것을 삼켰으니 이 생명은 곧 충만한 생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개체가 이 생명을 충만하게 함에 있어서 갑이라는 사람이 이 생명을 주격으로 죽을 생명을 삼켜서 자기의 새생명을 충만케 했을 경우 전체의 단일 생명은 더 커진 것이지만 이 생명이 단일 생명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도 같이 충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예를 들면 산에 있는 하나의 나무가 한 생명을 가지고 사는데 그 나무의 열매 중 하나가 크게 열렸을 때 그 하나의 중량이 큰 것만큼 그 나무의 전체 열매의 중량이 커지지만 그 하나의 열매가 커졌다고 해서 그 나무의 다른 열매도 커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이 생명은 영원히 단일 생명이기는 하지만 개체 개별적으로 생명의 충만에 차별이 있다. 현존세상에서 이 생명이 주격이 되어 죽을 것, 썩을 것, 혹은 자연생명을 많이 삼킨 생명과, 이 생명을 가지기는 했으나 이 생명이 주격이 되지 못하고 죽을 것, 썩을 것, 육체의 생명을 삼키지 못한 생명과는 영원히 개체 개별적 차별이 있는 것이다. 생명뿐만이 아니고 모든 것이 이렇게 격차가 생기는 것이다.
이 이치를 오해하면 천국은 공동세계 공동소유 공동주권 공동생명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만일 생명이나 천국이나 그 전부가 공동소유라고 하게 되면 활동을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의 차별이 개체 개별적으로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생명은 공동생명이 아니고 단일생명이며 개체 개별 생명이다. 이것은 논리 자체는 모순이 있으나 결코 모순이 아니다.
※ 기독자는 두 생명을 가지고 산다. 자연생명과 영의 생명이 있다. 영의 생명은 영원히 단일 생명이다.
천국은 전체 존재가 한 생명을 가지고 산다. 본질과 본성, 그리고 시간에도 환경에도 차이는 없으나 개체 개별적 격차는 있다.
새생명이 주격이 되어 살면 시간적 자연생명을 시간적으로 삼키니 예를 들면 순교는 새생명에게 삼킴이 된 것이다. 죽을 생명을 삼켰으니 새생명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공동생명이 아니고 개체 개별적 단일 생명으로 사는 곳이다. 이것은 용어로는 모순이지만 사실인 것이다. 천국은 공동의 장소이지만 개체 개별성이다. 어떤 면에서? 생명의 충만 면에서 개체 개별성이다.
ꊴ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이다.
이 생명은 비 물체요 무형적이기 때문에 물질적 유형적인 것으로서는 어떻게 비유할 수 없으나 이것을 구태여 비유한다고 하면 이 생명은 원 생명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 지엽적 단일생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꼭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물질적으로 비유를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계적으로는 이 생명의 소유자는 원 생명적 생명권 내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개체 개별적인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개체 개별적으로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이 생명연결은 없다. 그런고로 나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결합성은 영원히 이 상태로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중생할 때만 하나님과의 결합을 시켜 놓은 것이지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이 중생된 영이 하나님과 한 덩어리가 되어 일체성을 이룬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육을 벗은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필요 없이 하나님과 직접 연결이 되어 영원히 존재한다는 말도 아니다.
현재 우리의 영도, 앞으로 육신이 부활한 영체도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채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된 채로 사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속시키는 데와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데에만 임시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일시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도, 예수 그리스도의 결합도 영원적이다. 이 중보로써 모든 성도들은 생명적 연결이 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단일생명은 원형적인 단일생명이 아니고 지엽적인 단일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만 해 놓고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부활 후에는 영원히 존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는 임시성이 아니고 영원성이다.
생명권 내에 있으면서 개체 개별 생명이다.
충만성은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 바 된 것이다.
주권 면에서 볼 때 인간 자기의 생명은 사람이 모른다. 나올 때에 배정 받아 나온 것이다. 하루 하루 새생명에게 얼마나 삼킨 바가 되었느냐?
ꊵ 진리와 영감을 통하여 오는 생명.
이 생명은 필연코 진리와 영감으로 오는 생명이다. 그런고로 이 생명을 진리생명이라고 말한다.
만일 어떤 자가 이 생명을 원하면서도 진리를 싫어한다면 이 생명의 충만운동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생한 자가 진리를 배척한다고 해서 중생 시킬 때 온 그 생명이 떠나간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1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 생명을 받을 때도 진리와 영감으로 그리스도의 중보로 통해 온 것인데 진리와 영감을 통하여 온 이 생명은 고정적으로 계속 내주하고 있는 것인데 활동적인 면에서의 생명운동, 생명사역이란 이 생명운동이 내 속에서 진리와 영감을 통하여 계속 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기본적으로 와서 있는 생명이 있고, 내 속에서 활동적으로 역사 하는 생명이 있다는 말이니 이 생명운동 생명활동은 언제든지 진리와 영감으로 활동하게 된다. 또한 나를 통하여 타 존재에게 이 생명이 활동적으로 역사할 때도 진리와 영감으로 역사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없이는 생명의 활동이 없다는 말이다. 진리 따로, 활동 따로, 생명 따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고로 진리와 영감이란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 진리는 무시하면서 자신의 활동이 ‘생명운동이라, 생명활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진리가 없이도 이적 기사가 일어날 수 있다. 초자연의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적과 기사라고 해서 다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인 선적인 일이라도 다 진리와 영감의 역사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다. 진리가 없이 단독적으로 생명의 역사는 하지 않는다.
중생한 기독자는 어떤 죄를 지어도 고정적 기본생명은 떠나가지 않는다. 죄 중에 제일 큰 죄를 우상숭배라고 했다. 이 죄를 지어도 기본생명은 안 떠나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 방종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느냐?
ꊶ 육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 가능한 생명.
우리 인간은 두 생명이 있는데 인간이 생겨질 때부터 두 생명(자연생명과 영의 생명)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고 육의 생명은 생겨지면서부터 혹 유전적으로 받은 생명이지만 영의 생명은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고 출생 이후에 개체 개별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니 물론 방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행을 입고 그리스도의 중보로써 진리와 영감을 통하여 받는 것으로 이 생명은 육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 그 이성이 진리와 영감을 수락하므로 말미암아 이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간단히 말한다면 인간이 중생 하는 것은 육신이 살아 있을 때에 하는 것이지 육신이 죽은 후에는 중생할 수 없는 것이다.
성도의 육체의 부활은 죽은 자도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도 부활과 같은 영체로 부활할 수 있으나 이 죽은 영혼이 하나님의 단일생명으로 중생 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만 가능한 것이다.
※ 죽은 후에는 중생하지 못한다. 큰 죄를 지었건 작은 죄를 지었건 죄 값은 사망인 것이다.
중생자가 죽을 때 회개 못하면 지옥에 가느냐?
중생한 이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렇지만 회개하면 사함 받는가? 회개해도 사함 받지 못한다. 즉 의로 바꾸어지지 않는다.
천주교의 속죄권이나 송장을 누여 놓고 기도하는 것은 헛것이다. 그러니 죽은 자를 위해 울 필요도 없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 죽음으로써 다 끝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육체의 생명이 살아 있을 때이다.
제二절.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막연하게 그리스도는 필요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에 있어서 구속적인 면에서 필요하다는 것은 신학자들의 주장이 부분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동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 타락을 한 자이기 때문이요, 뿐만 아니라 인격의 세계에서 격차 관계상 혹은 차등의 관계상 양적 완전자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고 완전을 향하여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불완전자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에 구속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 동감을 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성장을 하려면 그리스도의 1차적인 구속을 입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구원에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一. 속죄의 필요성.
그리스도의 인간의 구속사역은 원래는 하나님의 예정이나 계획에 없었는데 우리 인간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또는 범죄 했기 때문에 돌변적으로 구속사역을 실행하신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이 타락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타락을 하건 안 하건 그리스도의 대형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1. 인간의 완전 타락과 속죄의 필요성.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완전 타락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아담 개인의 타락이 후대 자손에게까지 미칠 수 있느냐’ 하는 반론이 없지는 않으나 인류의 조상 아담 한 사람의 타락으로 온 인류가 타락한 것이 분명한 것이다.
전체 인류의 완전 타락론에 있어서 학자들의 주장이 각각 다르기도 하다.
1) 대표적 전적 타락설.
이 대표적 전적 타락설은 전 인류를 대표한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타락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두 타락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아담은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타락을 했다는 것은 수긍이 가지만 아담 외의 일반적 인간까지도 아담으로 인해 타락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억울한 감이 없지는 않다.
2) 유전적 전적 타락설.
이 타락설은 아담의 후손으로 출생한 본인은 타락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치 부모의 성질을 자식이 유전 받듯이 아담의 타락을 유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영의 생명이나 자연생명, 혹은 육을 유전 받을 때 타락성도 함께 유전 받는다는 것이다.
3) 동참적 전적 타락설.
이 설은 인간의 육체는 부모의 생리법칙에 의하여 생겨진 것이지만 그 영혼은 부모로부터 유전 받기 때문에 후손의 그 영혼은 더 높은 조상의 타락한 영혼이 유전되어 있으므로 개체의 모든 영혼은 아담이 실지로 범죄해서 죽었던 그 영혼이 계속적으로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인고로 온 인류는 완전 타락을 했다는 것이다. 전적 타락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고는 생명을 얻어 살아 날 수 없다는 것이다.
※ 초 한 개에 불을 붙인 불의 크기나 열 개에 불을 붙인 불의 크기나 각각의 초 하나의 불의 크기는 같은 것처럼 그 후손들의 죄의 유전은 같다.
초에 처음에 불을 붙였다가 그 불이 꺼진 후 다시 성냥불로 그 초에 불을 붙였다면 그 불은 처음 불과는 다른 불이다.
영혼 창조설을 주장하려면 죄의 대표설 또는 유전설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① 죄 있는 영혼을 집어넣어 주느냐?
② 세례요한의 출생이 안 맞는다.
③ 유전설이라면 부모가 중생 했으면 그 부모의 자식도 역시 태어날 때부터 중생이 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二. 하나님의 지공성.
하나님의 지공성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 했으니 인간이 범죄한 것을 용서, 묵인하시지 않고 원죄이던 자범죄이던, 큰 죄이던 작은 죄이던 그 결과는 사망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모든 인간은 실질적으로 범죄하지 않는 자가 전혀 없다. 심지어 모태에서 죽었거나 출생 즉시로 죽었다 할지라도 그 영혼은 죄와 사망 아래서 출생했고, 원죄를 가진 자로 출생했기 때문에 필연코 사망이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단연코 죽었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본 인간이 그 형벌을 담당케 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신의 지공법에 의해 심판을 대신 받아 처형당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대형이라 속량이라 속죄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한다는 말이거나 묵인해 준다는 말이 아니고 대신 죽어준다는 말이다.
인간은 전적 타락의 죄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혹은 대형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 타락의 두 가지.
① 근본적 자체적 타락: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진 것. 전적 타락.
② 도덕적 타락.
근본적 자체적 타락이 되면 하나님과 진리적 생명적 치리적 사역적으로 단절이 되어 버린다. 이 연결이 되어야 유기적이 나온다.
선의 기준, 타락의 기준이 어디냐? 인간이 보는 선악의 기준은 정확하지 못하다.(자기 기준, 인간 기준) 도덕의 척도의 기준은 각 나라마다 일치하지 못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촌끼리 결혼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본은 찬양을 한다. 특별히 유대나라에서는 집안끼리 하지 않으면 이방인이라고 뽑아 버린다. 마호멧교는 이방 독신여자에게 남편노릇 해 주는 것이 선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 하나님과 연결을 짓고 있는 것이 진리이다. 이 진리로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통치성이, 하나님의 사역성이, 하나님의 생명성이 아담에게 흘러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자유적인 동시에 하나님과 유기적 결합적 피동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진리와는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진리만 붙들면 된다. 하나님의 활동성이 진리로 통하여 건너오는 것이다. 그런고로 아담의 활동의 근본은 하나님이다. 아담의 단독 활동이 하나님과 유기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피동적 피동, 능동적 피동, 강압적 피동을 구별할 것이다. 능동적 피동은 타의 소원이 나의 자체화된 것이다. 신앙생활은 능동적 신앙생활이 제일 좋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사가 곧 진리이니 아담이 이 진리를 잡고 살 때 아담의 아이디어, 그 기억력은 비상했다고 보아진다. 이것이 현재 우리 속에 잠재해 있다.
하나님의 사역성이 진리로 통하여 아담의 활동으로 나온다. 무형행→ 유형행→ 물행으로 나온다. 즉 신행(神行)→ 영행→ 심행→ 이성→ 몸으로 나온다.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자의 도덕을 기준해서 선악을 말한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본적 기준에서 볼 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다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도덕법 종교법을 어겼는데도 선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님의 의사를 따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한 애매한 것도 많다. ‘부모를 공경하라’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미워하라’ 했고, ‘살인하지 말라’ 했는데 사무엘은 사울에게 ‘아각 왕을 죽이라’ 했고, 다말의 경우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가진 것은 이스라엘의 기존법에는 용납이 되지 않는 돌로 쳐죽이는 죄인데도 오히려 그러한 다말을 통해 생명적 그리스도의 계대가 이어지기도 했고, 다윗의 경우 본처의 자식이 아닌 신하를 죽이고 그 아내를 취해서 낳은 아들로 생명의 계대가 흘러간 것 등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선악의 기준을 보여준다.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타락이다. 이것이 연결되는 데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으면 안 된다.
아담 타락 후에도 아담의 의지의 작용은 그대로 할 수 있다. 끊어진 상태에서의 의지의 작용을 주관적이라 자율적이라 능동적이라 한다. 끊어진 것을 의식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끊어졌다고 해서 그 당장에 180도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이다. 가치 판단 취미가 모두 하행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은 상행이다. 하나님과 아담과의 연결은 진리적 연결인고로 끊어지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하다.
중생 후의 연결은 기본연결과 중복연결이 있다. 타락 전의 연결은 일방적 연결이요, 가범성적 가사성적 연결이다.
타락 전에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지만 근본적 타락이 되니 이제는 지식적 가치적 판단적 평가적 욕망적 행동적으로 물질을, 세상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죄는 물행적 죄만 보면 안 된다. 물행 그 이전에 은밀계시를 놓친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은밀계시를 놓친 것이란?
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에덴동산에 살게 했는가? 구원을 위해서 살라고 한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② 은밀계시를 놓치면 현실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 은 자기가 구원을 이루기에는 최고 좋은 것이다. 그 현실을 다스리자, 지키자, 지키면서 따먹자.(생명과 일반과 따먹고) 선악과는 따먹지 말 라!
목적성을 버리게 되면 현실에 불만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지키고 다스리지 못하니 뱀이 들어온다. 뱀은 구멍만 나면 들어온다.
하나님이 진리를 끊어버린 것이 아니고 자기가 버린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사단의 통치를 받겠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이 자기 밭, 자기 동산인가, 제 마음대로 따먹게?!
지식적 타락이 되면 옳은 것이 비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따먹으면 죽는다고 하는데 따먹고 행복할 줄 아는 것이 지식적 타락이다. 세상을 붙들고 그것이 안 썩는 것으로 알게 된다.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알게 된다. 십일조 내면 쓸 것이 모자라고 손해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이것이 가치 평가적 타락이다. 영보다 임시가 좋아 보이는 것이다.
성경은 도덕적 타락보다 근원적 자체적 타락을 타락으로 말한다. 전체적 타락에서 성질적 타락이 나오고, 성질적 타락에서 도덕적 타락이 나온다. 문자적 타락보다 성질적 타락을 심사할 것.
1. 인간이 아니면 속죄는 불가능.
앞에서 하나님의 지공성이 인간의 죄를 묵인할 수 없는 것이요, 또한 그 죄로 인해 인간이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것도 하나님의 애정성이 묵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즉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과 고통에 빠진 인간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공성대로 영원한 형벌 아래 둘 수는 없으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에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묵인하신다고 하면 이는 곧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되는 일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공성에 의하여 인간의 타락을 엄격히 정죄를 하고 그 정죄에 대한 형벌을 하셔야 했으니 그 형벌은 영원한 사망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공의대로 인간을 정죄 하여 영원한 사망 아래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애정성이 결코 용납치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구원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당신이 친히 인간이 되어 인간계에 오신 것이니 당신이 인간이 되심은 인간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이다.
범죄자가 인간이요, 이 형벌을 받을 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을 수 없는고로 인간 대신 형벌을 받기 위해 완전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를 그리스도라 혹은 메시아라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대속을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대속적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떤 누구도 이론이 없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필요성에 대한 교리는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 오직 기독교만의 특수적인 기본교리 중의 하나이다.
※ 일반사람 중에 교회에 관심이 있는 자들은 속죄의 교리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지공성과 지성성이 없다고 하면 죄에 대해 형벌치 않고 하나님과 연결을 지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공성에 의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공성과 지애성은 대립이 아니고 일치성이다. 이것은 우리의 건설구원에 있어서 절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의 기본구원의 영원한 멸망을 당신의 애정성이 용납치 않는다. 그런고로 대신 형벌이 필요하다.
죄의 형벌로 인해 죽었다고 하면 그 사람을 판사가 죽인게 아니고 법이 죽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법에 대해서는 지극히 공의로우시나 아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사랑이시다. 죄에 대한 용서는 사랑이 아니고 죄를 조장하는 것이다.
2.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시고 그 만물을 상대하여 당신의 계약의 상대자로 삼지 않으시고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만드신 목적에 있어서 그 목적성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과 만물을 동등으로 취급하거나 동등으로 상대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목적이 인간을 위해서 지었고, 또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은 다른 피조물들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만 언약 혹은 계약을 맺으셨던 것이다. 행위언약이나 은혜언약이나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과의 계약의 상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자유권을 주셨지 만물들에게는 자유권을 주지 않으신 것이다. 따라서 언약의 대상자가 아닌 만물들에게는 정죄도 심판도 없는 것이다.
간혹 만물들이 형벌을 받는 것 같은 일이 있기도 한데 그것은 만물들이 하나님 앞에 언약을 어겨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인간의 교훈을 위해 인간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대상자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는 것도 인간뿐이다.
인간 외에 모든 만물들은 인간구원을 위하여 어떤 유한한 기간동안 존재하다가 무(無)로 돌아가고 말지만 인간은 특수목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과의 언약(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선포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언약을 위약 했으니 이로 인해 행위언약대로 심판(공심판)을 받아 영원한 사망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범죄자는 인간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자도 인간이요, 형벌을 받을 자도 인간이다.
이러한 죄를 범한 인간의 죄를 속죄 혹은 대형 하려면 인간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경에는 인간이 범죄 했을 때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 대속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소나 양이나 염소의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 한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형식계시요 형용계시이다.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갑이라는 존재가 범죄를 했으면 필연코 범죄한 그 본인이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갑이 범죄한 것에 대한 형벌을 을이 대신 받을 수 있는 원칙을 허용하신 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성이 파괴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범죄를 했으면 범죄를 한 본인이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대속의 길을 허용하신 것을 대형이라고 하고 이 속죄, 대형을 담당한 분이 곧 인간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존재는 많지만 하나님 앞에 죄가 구성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계약의 상대자이다. 계약의 상대자가 아닌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법이 구성되지 않으니 정죄가 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왜 사람과만 법을 세워 놓았느냐?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써 영원한 대형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어떤 사물을 뒤에서 보는 사람과, 앞에서 보는 사람과는 견해가 다르다.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측면과 측면에서 보고, 상하에서 보아야 만이 완전한 원형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만 원형을 주었다. 왜? 인간만이 특수목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 지은 자도 인간이고, 영원히 형벌을 받을 자도 인간이다.
그러면 구약의 속죄제사에서 짐승을 잡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대형의 법으로 세워놓은 것이다.
시대마다 구원이 다른가? ‘행동시대 양심시대 율법시대 은혜시대’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구원의 방편은 만 인간이 시간과 시대를 막론하고 같다.
하나님께서 대속의 원리를 세웠는데 이 원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격자가 필요하다.
3. 인간이라도 죄인이면 불가능이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그 조건이 첫째로는 인간이어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인간이든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대속의 자격이 되느냐 하면 인간인 동시에 무죄인이라야 한다.
만일 범죄자가 다른 인간을 대신해 형벌을 받는다고 해도 이는 자기의 죄로 형벌을 받는 것일 뿐이지 죄인이 타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을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해 받는 죄의 대가는 그 죄의 다소나 경중에 상관없이 사망이기 때문에 무죄인이 아닌 범죄자이면 자기의 죄의 대가로 자기가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하기 때문에 대속의 자격은 없는 것이다. 자연법에 의해 출생한 모든 인간은 다 범죄자인고로 정죄 하에 있기 때문에 속죄의 자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속죄제물이 되려면
① 인간이라야 되고,
② 무죄인이라야 된다.
아담의 혈통을 받아 난 자는 무죄인으로 출생할 수는 없다.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아담이 최초에 범죄할 당시의 그 범죄에 동참자이기 때문에 실범자이다. 따라서 인간을 대속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무죄인이어야만 했으니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특수방법으로 출생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아담의 영과 육에서 유전된 분이 아니고 성경대로 말씀이 잉태하여 육신이 되신 분이니 이는 말씀이 육신의 껍데기를 입은 것이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이 인간은 일반인간과 출생방법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구성요소와 잠재적 성분과 성격 면에서는 완전한 인간이다.
이 인간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출생하여 33년간 생존하시면서 그 존재기간 동안에 범죄의 요소를 극기나 극복이나 인내로 통과한 것이 아니고 전 삶을 택자들의 구원에 신경을 기울이고 사셨기 때문에 그 속에 잠재하는 인성이 육성 인간성 죄성으로 나타날 분초 찰나 순간이 없었던 것이다.
혹자들은 예수님의 거룩성을 고조시키다 보니 예수님은 범죄할 가능성조차도 없으신 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무죄성과 인성을 구별하지 못한데서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범죄할 가능성조차 없다고 하게 되면 이는 곧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성이라는 인성이 곧 자유성이요 범죄성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인간성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범죄성과 연결이 되어 사신 적이 없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영혼이 아니기 때문에 조상들의 범죄에 동참자도 아니시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에게는 자범죄도 없을 뿐 아니라 동참적인 원죄도 없는 것이다.
만일 유전론은 부인하고 창조론을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도 일반인간과 똑같은 인간인데 왜 다른 인간에게는 원죄가 전가가 되고 예수님에게는 원죄가 전가가 되지 않는지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만일 아담의 타락은 인류를 대표해서 타락한 것이라고 하는 대표적 타락론을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도 인류 중의 하나에 포함되어야 하니 원죄의 죄인에 해당될 수밖에 없게 되니 이에 대한 답은 어떻게 할 것인지?
인간 치고 원죄에 해당이 안 되는 자는 하나도 없다. 아담이 대표로 타락을 했으니 모든 인류가 다 원죄에 해당이 되지만 예수님이 원죄나 자범죄에 해당이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은 실범자도 아니고 원죄의 동참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이시기에 인간 대형의 대속에 있어서 이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 대속의 자격자가 되려면
(1) 인간이라야 되고,
(2) 무죄인이라야 된다.
아담의 후손은 다 죄인이다.
① 전가설이면 예수님도 인간인고로 죄가 전가됨.
② 대표설이면 예수님도 인간에 포함이 되니 원죄가 있게 됨.
③ 유전론: 이것을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도 실범자가 된다.
조상의 원죄의 유전을 안 받으려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죄인이다. 인간성은 의식하지 않았다. 전부는 구원에 투자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는 인성이 없었느냐? 구원에 총 집중한고로 인성은 고개를 들지 못한 것이다. 인간성은 범죄성이다.
4. 속죄의 자격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불가함.
인간을 속죄함에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자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인간을 속죄할 자격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속죄의 사역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속죄를 하려면 인간이 당하는 무한한 고통을 당해야 하고, 멸시와 천대도 받아야 하고, 견디기 어려운 심신의 고통도 당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이는 인간을 위한 속죄는 불가능하다.
인간을 위한 속죄는 대속인데 이 대속이라는 말은 대형을 하신다는 것이니 대고 대사 대멸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누구든지 이를 대신하려고 하는 자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일을 하는데는 사랑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격과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속의 자격이란
① 인간이라야 되고,
② 무죄인이라야 되고,
③ 죄를 이긴 능력자(세상을 이긴 능력자)라야 되고,
④ 자기를 이긴 능력자라야 된다.
아무리 이런 자격과 능력을 갖춘 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일은 제 삼자가 권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설득을 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닌 다만 자원적 소원이 돼서 나와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 자원성은 사랑의 발작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에게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의 대속은 어려웠을 것이다. 범죄한 인간을 대속 하는 데는 이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우리 인간의 죄의 대가를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지불했다고 한다. 죄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말은 죄의 대가는 형벌이요 죽음이니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죽음으로 받았다는 말이다. 이 형벌을 죽음으로 받은 것을 죄의 대가를 피로 지불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 속죄는 곧 대속이니 이 대속에는 대형 대고 대사가 따른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묵인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해 인간의 형벌을 대신 받을 수 있는 자격자이시니 그 자격은
① 인간이라야 하고.
② 무죄인이라야 하고.
③ 능력자라야 하고 - 자신과 세상과 죄를 이긴 능력자.
④ 자원적이라야 하고.
⑤ 사랑이 있어야 한다 - 사랑의 극치의 소유자라야 하는데 누가 이런 일 을 할 수 있겠느냐?
5.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완전 형벌.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광대하신 구원계획과 사역을 이로 헤아릴 수 없고, 자세히 알기도 어렵지만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왜 이 구원사역의 계획과 설계를 이처럼 복잡하게 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꼭 이런 방편이 아니고는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었던가?
물론 전능의 하나님께서 이 방편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인간구원을 더욱 쉬운 방편으로 하실 수도 있지만 이 방편을 사용하신 것은 이 방편이 가장 선하신 방편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신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왜 이 방편을 쓰셨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구원계획과 설계와 방편 속에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증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聖)성과 선성과 지공성과 지애성과 지식성이 충분히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원에 하나님의 전 인격이 동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방편에서 인간의 그 어떤 사랑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이 나타나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지극히 공의로우심이 나타나 보이고,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심이 나타나 보인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거룩한 뜻대로 되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대속을 놓고 ‘만일 인간이 대속을 한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하지 않고 간단하게 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간단한 것인가? 하나님의 이 방편 외에는 더 좋은 것이 없는 것이다.
아이를 낳았으면서 그 아이가 먹고 마실 것을 충분하게 주지 못하면 부모가 죄를 짓는 것이다. 아이의 기본소유가 있는 것이다. ‘기본소유에서 몇 %냐, 몇 분의 일이냐’를 따지는 것이다.
어머니 태 속의 아이의 구원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영혼 창조설을 주장하여 태어날 때 그 아이에게 영을 넣어준다고 한다면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 뱃속에서 죽은 아이는 무로 돌아가느냐?
마리아의 경우는 메시아 잉태를 명령을 받은 직후에는 잘 몰랐으나 세례요한의 어머니가 마리아에게 잉태 사실을 말을 하니 그 때서야 자기 속에 성령으로 잉태된 한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지만 그러나 네 사람이다. 복중에서 뛰고 논다.
우리가 갈 천국이 무한 다양하지 않다면 단순히 ‘예수 천당’ 하면 되겠지만 구원설계가 세밀하고 복잡한 것이기에 그 이상으로 더 올라가야 한다.
이런 방편을 쓰신 것은 거룩한 방법이요 선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하나님의 공의성과 거룩성에 하나도 위배됨이 없다. 애성에도 조금도 위배됨이 없다. 빈약함이 없다.
무엇을 보아서 하나님은 지극히 공의로우시다고 인정이 되느냐?
공의성과 지성성과 공평성과 공정성을 구별할 것이다.
공의성: 그의 행한 대로 정확하게 법대로 이행. 이것을 어디서 볼 수 있 나? 독생자를 죽이는 것을 보니까!
지성성: 지극히 거룩함. 무엇을 보니?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서 이질성 은 절대로 용납이 안 된다.(성분적 성질적 이질적)
공평성: 빈부의 차이 고저의 차이를 주었지만 이것은 임시이니 영원히 차이 를 준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주신 것을 가지고 달란트 장사를 해야 된다. 하나님은 %로 계산한다. 영원세계를 놓고 보면 공평 이요 공정이다. 천국의 점령권은 동등하다.
공정성: 많이 준 자에게나 적게 준 자에게나 똑같이 요구치 않는다.
6.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완전 생활.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와서 인간 비슷하게 살아간 것이 아니다. 즉 인간처럼 인간흉내나 내며 살다가 간 것이 아니다. 완전 인간으로서 생활을 하신 것이다.
완전 인간으로 살았다는 것은 물론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성에는 변함이 없지만 신성의 조력에 의하여 외래적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것이지 인간 흉내 내러 온 것이 아니다.
7. 그리스도는 인간차원에서 완전 생활.
모든 인간들은 한 인간으로 와서 그 생활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인간차원에서의 기준법에 불완전하고 미달된 생활을 하고 갔으나 그리스도는 세상에 와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인간차원의 기준법에 100% 완전한 생활을 하고 가신 분이시다.
이 세상에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인생이 오고 갔으나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생활을 하고 간 이는 아무도 없다. 다 불완전한 생활을 하다가 갔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세워주신 인간수준에서의 완전이라는 기준선이 있는데 그 기준선에 도달하고 간 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 인간+하나님=예수. 예수님은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금식기도 하실 때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보통 인간보다 훨씬 쉬웠나? 예수님도 희로애락을 완전히 느끼신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인간생활로 하나님의 기준점에 완전히 도달한 것이다.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점에 도달했느냐? 석가? 공자?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른 점은?
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도달.
② 기독교는 생명이 둘.
③ 부활.
④ 단일성.
(1) 신성의 도움을 받아 고통을 삭감하거나 감소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완전한 인간이 됐다고 해서 신성이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완전적인 기준점에서 완전한 생활을 하시기에는 적지 않은 노력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성의 도움을 받아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신성의 도움을 받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성의 결합이 없이 살았다는 말은 아니다. 신성결합과 완전한 인성의 행위와는 별개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흉내 정도나 낸 것이 아니고 완전한 인간으로 살으셨는데 신성의 도움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할 때 그 원수들은 그리스도에게 고난을 가하면서 고통을 감하게 하려고 마취약을 먹이려고도 했고, 또 나아가서 신성의 도움을 받으라는 조롱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신성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받는 그 모든 고통을 삭감 혹은 감소시키려고 하지를 않았다.
※ 하기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견디기 어렵다고 해서 신성의 도움을 받아 고통을 아픔을 감소하려고 하지 않았다. 도움을 받을 비굴한 분이 아니시다.
도움을 받으면 그리스도성이 삭감된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는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도움을 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도움을 받아 가지고 할 바에는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움을 받았다면 그리스도가 위대한 것일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도움을 받으려는 존재로 살지 말라! 그리스도는 성부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다.
(2) 정신적인 고(苦)와 육신의 고를 다 당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와서 외래적으로 오는 모든 정신적인 고와 육신의 고를 다 당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 당했다’는 말과 ‘고통에게 정복을 당했다’는 말을 구별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는 외부적으로 그에게 주는 정신적 고통과 육신의 고통을 다 당하기는 했지만 이것을 느끼면서 그 고통에게 정복을 당하지는 않은 것이다. 즉 동화되지는 아니했다. 동화되고 정복되어 화동 되지는 아니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정신 고를 전혀 당하지 아니했다면 그리스도로서의 책임완수를 못한 것이요, 육의 고통을 당하지 아니했다면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정신 고와 육의 고를 많이 당했다. 그러나 그 고통에 동화되고 정복이 되어 화동 되지는 아니했다.
어떤 자들은 정신 고와 육의 고를 전혀 당하지 않았다는 자들이 있다.
(3) 애성의 극치로써 고통에게 화동 되지 않고 승리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하시 하처를 막론하고 외적으로는 태연이었고 내적으로는 일심전력이었다. 모든 신경을 구원에 집중을 시켰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모든 고통을 사랑의 극치로써 이길 수 있었고, 또한 내적으로 일어나는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그 정신적 고통이라는 것이 느껴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사셨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구원과 사랑으로만 충만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구원을 바로 알지 못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단순하게 외적으로 증명되는 사역만 마친 것이 아니고 내적 투쟁에서 고통에게 정복되거나 화동 되지 않고 승리했음이 놀라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기로는 그리스도께서 외래적인 고통이나 내발적인 고통에 정복을 당하건 당하지 안건 상관이 없이 인간 대신 형벌을 받는 대형만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어떠한 형편으로서든지 대신 형벌만 받는다고 해서 속죄의 완사가 성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역적 대형보다 사랑의 극치로서 모든 고통을 다 당하면서도 그 고통에 화동 되지 않음이 더 귀중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 대신 형벌을 받는 것보다 고통에게 화동 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사역에서 그리스도를 심사해야 하느냐, 출생이라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심사해야 하느냐? 사역이 비슷하면 그리스도인가?
표면만 연구하다 보면 그리스도와 흡사한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도 열 두 살 된 아이가 박사들과 이야기할 정도의 신동이 있다면 그 아이를 그리스도시 할 수 있는가? 물질을 이성을 초월했다고 그리스도냐? 사역적인 면만 보면 그리스도가 수없이 있을 수 있다. 기독론은 사역적인 면만 보는 것이 아니다. 사역적인 면으로는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닮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구간에서 난 그것이 특이한 것인가? 그렇다면 6. 25 전쟁 때 구유보다 더 못한데서 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완전 기준성에 완전한 분으로 사셨으니 죄를 이기고, 자기를 이기고, 그 어떤 무엇에게도 화동 되지 않고 걸어가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간 자가 그리스도 외에는 없느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화동 되지 아니했다.
사역에서 연구하지 말고 출생에서부터 심사하라! 부모가 누구냐? 성령으로 난 자라야 한다. 기독론을 모르면 이단자에게 몰린다. ‘나는 예수다’ 하거든 이력을 가지고 심사하지 말고 성령으로 잉태된 자인지를 보아라.
제三절. 칭의의 필요성.(대행적 필요성 - 마5:20)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구원이라는 용어는 간단하면서도 다양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구원이라는 용어 속에 구원의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놓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지옥에 갈 자를 천국 가게 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지만 이 구원을 분리하고 세분하면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구원이 있고, 대속적 구원, 대행적 구원, 중보적 구원, 소유적 구원, 건설적 구원, 성화적 구원, 성장적 구원 등 이렇게 다양한 구원이 있다.
그런데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대형)으로 말미암아 무죄자가 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되는 구원은 속죄구원에 불과하다.
성경에 말하기를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정을 지었다.(마5:20) 이 말을 보면 우리 인간이 원인의 무죄상태에서도 천국에 들어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원인은 무죄성을 가졌으나 의인이 아닌고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능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에덴동산에서 의를 입도록, 혹은 의행을 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행을 못하고 죄행을 하면서 죄인이 되고 만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무죄만 되면 천국에 입국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나라는 무죄의 나라인 동시에 의의 나라이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면 입국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죄인과 의인을 동등시 할 수 없다.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혹은 대형은 인간을 무죄인이 되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대행은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이다.
※ 인간의 구원에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가? 그리스도가 필요한고로 그리스도를 보냈다. 왜? 인간을 구원해야 하는고로!
의인=무죄인=의인. 의도 없고 죄도 없는 상태는 무죄인. 아담의 범죄 전 원인이 이런 상태이다. 이 때에 천국에 갈 수 있나? 갈 수 없다. 무죄인은 천국 못 간다. 왜? 그 나라는 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죄인은 본질과 본성이 천국과는 대립인고로 천국에 용납이 안 된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도 그리스도가 필요했고, 범죄한 인간에게도 그리스도가 절대 필요하다. 죄만 속하면 안 되고 의행적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一. 무죄인과 천국.
우리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다 죄인이다. 이 죄는 모든 인간 각자가 원죄도 실범이요 자범죄도 실범이다. 그렇지만 이 죄를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사함을 입어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무죄인으로서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이 대속을 입게 되면 무죄인밖에 안 되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천국은 의의 나라요 생명의 나라요 진리의 나라인고로 무죄성은 무엇이든지 용납된다고 하는 착각은 버려야 한다. 무죄인과 천국은 동질 동성이 될 수 없다. 무죄인과 천국은 결코 단일성이 아니다.
유죄인과 무죄인을 구별해야 하고, 또 무죄인과 의인을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무죄인과 천국은 엄격히 격차가 있고 구별이 되어 있다.
※ 천국은 혼돈 혼잡 혼탁한 나라가 아니고 거룩한 곳, 깨끗한 곳이기 때문에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무죄인의 색깔과 천국의 색깔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예: 유죄인은 검은 색깔이라면 무죄인은 하얀 색깔이고 의인은 붉은 색깔이다.
1. 자범죄와 무죄인.
이 세상에 많은 인간이 출생을 하는데, 혹은 생겨지는데 자범죄를 짓지 않고 죽음의 선을 넘은 인생이 많이 있다. 그리하여 혹자들 중에 자범죄를 짓지 않는 무죄인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믿는 자들도 있다. 즉 태중에서 죽은 사람이나, 출생 후에 죄를 의식하기 전에 죽은 자들은 자기가 자범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지 않느냐 해서 ‘전 유아 구원론’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고대에 많은 학자들이 이 주장을 해 왔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은 천국에 대해 무식한 연고요, 구원에 대해 무식한 연고이다. 인간은 자범죄가 없다 할지라도 원죄가 있기 때문에 결코 천국에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2. 도덕성에 무죄인.
자범죄와 도덕성의 죄와는 또 구별된다. 자범죄란 하나님의 성문법에 관한 죄인데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 성문법에 위배되는 죄성을 말하는 것이고, 도덕성에 무죄인이란 성문법을 떠나 신인관계보다 인인관계 혹은 인사관계 인물관계에 있어서의 죄이다.
우리 인간은 대신관계의 죄가 있고, 대물관계의 죄가 있고, 대아관계의 죄가 있다.
※ 자기가 자기에게 짓는 죄는 대악(大惡)이다. 죄는 타살 죄보다 자살 죄가 더 크다. 이것은 도덕법에 속하는 죄이다. 대신관계 이외의 죄는 대부분 도덕성에 속한다.
예수 잘 믿는 것과 도덕과는 구별이 된다. 도덕적으로 무죄인은 천국 문간에도 못 들어간다. 아담의 후손 치고 대속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3. 원죄에서의 무죄인.(타락 전)
원죄에 무죄인이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느냐? 만일 원죄의 무죄인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면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기 전에 천국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범죄치 않아도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한 인간이었다.
인간세상에서 원죄에 무죄인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이전일 때뿐 그 이후에는 없다. 전 인류는 다 죄인이라는 말이다. 의인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했으니 여기에서 의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 의를 말하는 것이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 다니엘이 사무엘이 의인이다’ 하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의 칭의를 입은 의를 말하고, 사건적으로 볼 때는 인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니 기본 의를 밑천으로 하여 중복적 의의 생활을 한 것을 지칭해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 마태복음 5장 20절에 말한 바리새인의 의는 지상 최상급의 의이다.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의 의는 모두 인조척도의 의이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신조척도에 거의 맞도록 율법과 계명을 지키느라 애를 쓴 자체는 예수님도 인정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척도가 아닌 인조 의를 행했다. 하나님께 피동된 능동적인 의가 아니다.
예수님의 의는 신조 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어 놓은 의이다. 이렇게 천국은 거룩한 곳이다.
二. 인적인 의인과 천국.
이 세상에는 인간들이 볼 때 어떠한 사람은 의인이라 혹은 선인이라 혹은 성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 인간이 이런 사람들을 단편적으로 볼 때 참 의인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즉 인간 보기에 의인이라고 칭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지옥에 가게 둔다고 하면 너무나 공평치 못하다고 느껴진다.
만일 그런 의행을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 중에 최고 의인과 최고 악인과는 격차가 극대 극이니까 극명하게 표시가 나지만 중간의 의인과 중간의 악인의 분기점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구별하기가 심히 어려우니 어느 선에서 잘라 의인으로 인정을 해 천국에 가게 할 것이냐?
물론 이 말은 인적 의인 득구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본문에서 근본적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것은 인적인 의는 아무리 의행을 해도 그 의행은 진리와 영감으로 된 신의 본질과 본성적 의가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용납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런고로 천국은 필연코 인적인 의, 인조 의로써는 입(入)하기는 불가하고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된 신적인 의라야 가능하기 때문에 칭의적 대행적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1. 인적인 의행.
인간세상에서 의행과 죄행은 구별이 된다. 인간이 볼 때 죄행은 악이요, 의행은 좋은 것 착한 것 선한 것으로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의행은 인간기준에서 볼 때는 의행이지만 참 의행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 의행이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그림 같은 의행이다. 그리스도가 진리와 영감으로 해 놓은 의행만이 참 의행이다. 다른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의행과 인간의 의행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표면적인 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성격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다. ‘인적인 의행이다, 신적인 의행이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기준해서 하는 말이니 인적인 의행은 가(假) 의행이요, 신적인 의행인 진(眞) 의행이다. 천국은 진 의행이라야 용납이 되지 가 의행은 용납이 되지를 않는다.
2. 신적인 의행.
인적인 의행은 종별과 활동을 두고 말을 하고 있으니 사람의 활동이 종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타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의행이라고 한다. 한 사람을 위했던 여러 사람의 유익을 위했던 자기의 희생을 생각지 않고 타의 유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을 인적인 의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적인 의행인 그리스도의 의행은 종별이나 외모 활동에 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성격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신적인 그리스도의 의행도 타의 유익을 위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인적인 의행과 신적인 의행을 분별할 때 같은 종류, 같은 활동이지만 그 활동을 보는 인간에 따라서, 또는 인간이 보는 각도에 따라서 인적인 의행으로 보기도 하고 신적인 의행으로 보기도 한다는 말이 아니고 신적인 의행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격이 되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진 의행을 두고 하는 말이고, 그것이 아닌 것은 아무리 인간 보기에 선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신적인 의행이 아닌 인적인 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신적 의행의 기준.
의행의 기준에 있어서 인적인 의행의 기준은 그 기준이 명확하지를 못하다. 어떤 활동 어떤 행동 어느 선까지를 의행이라고 하고, 어떤 선 어떤 활동까지를 죄행이라고 할지가 애매하다.
혹자들은 의행과 죄행 사이에 중간상태를 두면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의행과 악인의 중간상태의 그 사이에 또 의행과 죄행의 중간상태가 생기게 되니 애매한 것이 자꾸 생길 뿐이다. 그런고로 인적인 의행과 신적인 의행은 완전히 구별되어야 한다. 신적인 의행은 그 기준이 뚜렷한 것이다.
(1) 타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의행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활동하신 것은 그 활동 전부가 타를 위한 활동이요 타에게 유익이 되는 활동이다. 그의 도성인신도 출생도 성장도 육적인 일반활동도 십자가의 사활 승천도 당신의 희생 전부는 타에게 유익이니 곧 의행이다.
(2) 하나님에게 기쁘심이 되는 것이 의행이다.
그리스도의 활동 전부는 하나님의 의사와 대립성이나 혹은 각치성이 없고 전부는 신의 뜻에 맞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니 이 전부는 의행이다.
(3) 진리와 영감에 피동 되는 것이 의행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은 진리와 영감을 떠나서 한 활동은 없고 진리와 영감에 의해 피동적이요 동화적인 활동이니 전부는 의행이다.
(4)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것이거나 유기적 간접적으로 하신 것은 의행 이다.
이 기준대로 본다고 하면 의행과 죄행의 구별은 애매성이 없고 뚜렷한 것이다. 타에게 유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는 것은 죄행이요, 하나님의 허락 하에 한 것은 하나님에게 피동 되어 한 것이니 의행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에게 피동된 활동이 아니면 피동되지 않은 활동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중간상태는 없는 것이다. 의행과 악행이 명백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에게 피동된 활동이 아니라면 아무리 외부적 활동을 그리스도와 똑같이 했다고 해도 의행은 아니다.
三.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
우리 인간은 구원목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이 구원의 완성은 의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 의란 일반적인 인적인 인간기준에 의한 의가 아니고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린 의를 말하는 것이다.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치 못하면 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니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드릴 수 있는 자는 일반인간으로는 불가능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1. 인간으로서는 불가능.
인간은 구성요소에 있어서는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기준에서 인간을 볼 때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 불완전한 인간이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불문법) 만족을 드리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구약성경이나 모세의 법은 성문법인데 이 성문법이 표면적 법이라면 성문법보다 더 높은 것은 불문법이다. 이 불문법을 인간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성문화시켜 주신 것이 성문법이다.
인간으로서 혹 이 성문법을 지킬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인간 중에 혹 몇 사람이 가능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은 성문법이 아니고 성문법 이상의 불문법이니 이 불문법에 만족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은 성문법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문법으로만 본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모양, 어떤 상태, 어떤 심리로 죽었건 인간의 죽을 죄를 대신해 형벌을 받아 죽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성문법 통과) 그러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인 이 불문법은 단순히 대신 죽는 것만이 아닌 죽기는 죽는데 고통에게 동화되지 않고 정복당하지 않고 감염 당하지 않고 그 고통을 완전히 이기고 죽어야만 되는 것이니 이것을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룬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 성문화된 성경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있을까? 혹 있을 수 있다.
성문법대로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을 통과하려면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고통에 감염 동화되지 않고 죽으면서 이겨야 한다. 이것이 곧 불문법이다. 이것이 완전한 의다. 이래야 우리에게 칭의를 입힐 수 있다.
2. 무죄한 인간만이 가능.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을 통과하려면 무죄한 인간이라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원인과 같은 무죄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원인과 같은 무죄인으로서는 성문법은 통과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인 불문법을 통과하기에는, 만족을 이루어 드리기에는 불능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다 감각성이 있고 심적 혹은 육적 촉감성이 있기 때문에 죄와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인고로 이 구원사역을 인간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위해 도성인신 했다.
도성인신 하신 이 그리스도는 심적 육적 감각성이나 촉감성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일반인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이 똑같아서 모든 느끼는 면이 일반인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일반인보다 탁월한 점이 있다면 애정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애성의 극치성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지만 우리와 다른 점은 무죄성이니 이 무죄성이라는 말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이요 죄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 애성의 극치성이라는 말은 그의 사랑은 신적인 사랑, 발생적인 사랑, 근원적인 사랑의 소유자시라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인 불문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리기에는 불능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칭의는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려서 완전한 의를 이루신 사역인 것이다.
제四절. 중보의 필요성.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라는 구원사역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에 대해 아는 지식들은 단순히 우리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인줄 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떠한 형태로서든지, 혹 목석과 같은 형태이던지 금수와 같은 형태이던지 이런 것은 상관이 없이 단순히 천국입국만 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는 신인결합이다. 신인결합이 없이는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하게 천국입국만이 아니다. 천국입국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를 입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만일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즉 그리스도로부터 입어야 할 혜택을 입지 않고 천국에 입국한다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혜택을 입지 않은 것만큼 천국의 혜택도 입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 혜택도 입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천국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어서 무죄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대형을 입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의로운 자가 되는 이것을 칭의라고 하는데 이 의는 기본적인 의이다. 그리고 이 기본적 의를 입었으면 이제는 중복적으로 신의 성품을 충만하게(진하게) 덧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해 주신 것을 중보라고 하는데 이 중보가 없이는 신인결합이 있을 수 없고, 이 결합이 되지 않는 한 완전구원도 불가능하다. 신인결합으로써만이 구원은 완전히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단순하게 경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최고적으로 계획하신 것이니 이 구원의 궁극목적은 신과의 결합이요, 신과의 동일한 수준에 끌어오려 보좌만 차이가 있고 누리는 면과 느끼는 면은 하나님과 동등하도록 하게 하셨으니 이 구원사역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조물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격차를 두지 않고 조물주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당신과의 결합으로 최고의 행복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고자 하시는 그 목적이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
※ 우리의 구원은 단순하게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고 어떤 성질로, 어떤 성분으로 천국에 들어가느냐 하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천국이 좋아도 목석과 같은 자가 들어 갈 수 있느냐? 천국에서 천사들은 인격자요 우리는 그 이하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 천국입국이 구원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천국입국이 중요한 것만큼 대형 대행 대속 칭의도 중요하다. 또 신인결합성이 그 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 거대한 구원사역을 알게 될 때 이 일을 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느끼는 것이다. 예: 미국에 보내준다고 하면 미국에 가는 것은 좋지만 돼지 치게 하려고 데려간다고 해도 좋은가?
나를 보좌만 다르고 느낌이나 활동이나 누림이나 쾌감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과 똑같이 만들어 주기 위해 중보의 사역을 해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은 모든 고통을 얼마든지 물리치고 능가할 수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신인결합이 필요했던 것인가? 결합의 원리는 신이 인간수준에 내려와서 인간과 하나가 되고, 이 인간을 천국에 데리고 올라가 당신과 함께 뒹굴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중보는 왜 필요한가? 인간을 구원의 수준으로 올리기 위함이다.
무조건 ‘십일조 바쳐라, 주일 지켜라, 영광을 돌려라’ 하게 되면 왜 그것을 요구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게 된다. 무지가 죄가 된다.
一. 진리적 결합.
진리적 결합이라는 말은 진리를 통하여 결합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창조자시요 주권자시요 독권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진행하실 때 스스로 질서를 어기거나 이치를 어겨가면서 하지를 않으신다. 절대적으로 진리적이다. 그렇지만 법 아래서 준법이 아니고 성격적 성질적 준법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이 결합성은 진리로써 결합하는 것이니 단순하게 진리결합이라고 하는 것보다 그 진리대로 동작하므로 진리결합이 되어지는 것이다. 진리대로 동작하지 않고는 신인간에 진리결합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즉 신과 인간 사이에 진리로써 결합을 하는데는 그 진리로써 통한 자로만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 하나님께서 ‘지켜라’ 해 놓고 안 지킨 것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지킨 것이다. 법 아래서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원적으로 소원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진리적 결합에 있어서 인간은 아무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은 진리를 통한 공로가 있는 것이다.
二. 생명적 결합.
생명적 결합이라고 할 때의 생명이란 물론 자연생명은 아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단일생명이다.
생명적 결합이라는 말은 영의 생명으로 되어 있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단일생명의 줄을 던져 주니 우리 인간은 던져준 그 생명 줄을 붙잡으므로 생명적 결합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적 결합처럼 생명에 단절됨이 없이 활동한 그 인격으로써 우리와 생명적 결합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 생명적 결합은 생명을 결합시키는 중보자가 그 활동 면, 그 사역 면에 있어서 한 번이라도 생명에 단절성이 있으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생명결합을 하기 위해서 사역적으로 활동적으로 성질적으로 생명에 단절됨이 없으시다. 그 분의 이러한 사역으로써 생명적 결합이 되어지는 것이다.
※ 생명줄을 던져주기만 하면 결합이 된다면 구태여 중보가 필요가 없다. 이 중보자는 사역 하나 하나마다 하나님과 진리와 생명과 끊어짐이 있으면 결합이 불가능하다.
이 일을 하신 분은 한 분밖에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생명으로 연결시켜주기 위해서 하나님과 끊어짐이 없이 걸어간 것이다. 이것을 완전사라고 하는 것이다.
三. 능력적 결합.
여기서 결합이라는 말은 물론 기본적 결합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 기본적 결합을 함에 있어서 능력적 결합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능력이 미 중생한 영사(靈死)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그 사영자가 능력을 힘입어 중생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영자가 능력적으로 하나님과 결합이 되려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모든 사건을 한 번도 패배함이 없이 전부는 이기는 능력자가 결합을 시켜야만 되는 것이다. 만일 수많은 사건 중에, 혹은 투쟁 중에 작은 패배라도 있다면 능력적 결합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역을 마치기까지 한 번도 패함이 없는 능력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능력적 결합을 시켜주신 것이다.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 한 번도 패함이 없는 능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표면은 사람이지만 그 이면은 생명이다. 능력이다. 진리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간에 중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보기에는 사역이지만 그 속을 파헤쳐 보면 진리적 결합이요 능력적 결합이요 생명적 결합이다. 말 한 마디, 활동 모두는 결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속에는 모두 진액이다.
우리 인간은 단절 투성이라도 십 년 전의 자기를 쳐다보면 무엇인가 좀 달라지는 것이다.
보충능력과 기본능력은 다르다. 보충능력은 기본능력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지만 가룟유다와 같은 경우는 보충능력에 일시적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四. 인간이라야 인간과 결합할 수 있다.
이 결합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결합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셔서 인간과 직접 결합할 수는 없다. 인간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니면 인간과는 결합이 되지 않는다.
‘결합이라, 연결이라’ 할 때 물과 물은 결합이 될 수 있다. 열과 열은 결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결합을 하려면 신이 인간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인간과 결합을 하려면 그 구성요소나 성격이 완전히 인간이라야지 인간 비슷해도 안 된다. 또 인간이면서 인간 껍데기만 잠시 빌려 입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서 모든 면에 손색이 없는 인간이라야 인간과 흠이 없이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 구원하실 분이 인간이 아니면 인간과 결합이 되지 않는다. 수억만 명의 인간 속에 이런 인간 저런 인간이 있는데 완전한 인간이라야 한다.
1. 본질적으로 인간이라야 인간과 결합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에 그 육체만을 가지고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형적 물질적인 인간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인간이라야 한다.
본질적 인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이 따로 있고, 금수의 본질이 따로 있고, 나무의 본질이 따로 있듯이 각각의 종류대로 본질이 따로 있는데 인간 역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적 본래적 원인적 본질을 가진 인간이 타락을 하므로 죄악성이 보충이 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인간+죄악성=죄인이라고 말한다.
본질적인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기본적 본질까지 변질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의 본질에 죄악성이 입혀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본질과는 동질이다. 다만 우리 인간은 ‘인간의 본질성+죄악성=죄인’이 됐으나 예수님은 인간 본질 그대로다. 죄악성이 보태짐이 없다. 이 본질적인 인간이 아니면 본질적으로 인간과 결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죄인이 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으니 인간 원인 그대로 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를 입으니 인간의 본질에서 본성이 변한 것이 아니고 본질은 그대로 있으면서 예수님처럼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인간 대 인간으로써 결합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인간이라는 말이다.
※ 본질대로란 인간의 무죄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죄=본질이 바꾸어진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었다.
인간+죄=죄인+예수 그리스도의 대형을 입으니=원인+예수그리스도의 의=의인. 이래야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성화구원이 나온다.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 - 하나님과 결합상태를 말한다. 세상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천국은 신령천국과 직결이다. 천국은 본점이다.
마네킹이 사람이냐? 본질이 같아야 결합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라고 해서 신성이 제외된 것이 아니다.
2. 성격적 인간이라야 결합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결합하기 위해 성격적으로 인간과 다른 성격이 아니고 동질의 성격의 소유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말은 가범성 가사성 희로애락성 충동성 충격성 감각성 등을 일반인간과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고, 성격 역시도 일반인간과 똑같은 성격의 존재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반인간과 성격적으로 같지 않으면 합할 수가 없다. 즉 인간이 식물을 요구하는 성격을 가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식물을 요구하는 성격의 소유자이시다. 무화과 먹기를 좋아하고 인간이 먹는 떡과 고기를 잡수셨으니 그 모든 성격이 인간과 똑같은 동질의 성격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의 껍데기만 쓰고 있으면서 본질 면에나 성격 면에서 인간과 다르다고 하면 인간과 결합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그런 분이라면 예수님의 생애는 그렇게 위대하다고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성격상으로도 충동도 충격도 감화도 희로애락도 감각도 없는 존재라면 그 분의 세상살이에서 위대한 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일반인간과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물질계에 대해 초월한 것이 아니고 일반인간에 비해 월등한 성격을 가지고 이긴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렇게 위대하거나 놀라울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성격이 인간의 성격 그대로라야 인간과 성격적으로 결합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당신이 인간과 성격적 결합을 하시는 것은 인간의 그 성격을 신의 고상한 성격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 성격적 차이가 있으면 결합이 안 된다.
세상사람들은 서로 간의 화목을 위해 성격을 맞추고 모양도 맞추지만 우리 기독자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성격이 맞던 안 맞던 그런데 동화되지 말고 자타의 성격을 그리스도와 맞추어야 한다. 말씀의 도가 들어가고 만들어지면 억지가 아니고 자동적으로 되어 나온다.
3. 차원적 인간이라야 인간과 결합이 된다.
사람은 모든 사람의 차원이 동등이거나 동급의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전 인간을 총칭해서 볼 때 인간의 차원이 있다. 목석의 차원이 있고, 곤충들의 차원이 있고, 동물들 세계의 차원이 있고, 인간계의 차원이 있고, 신의 차원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원적 인간이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낮아지심이 목석같이 낮아지심이 아니고, 곤충이나 금수처럼 낮아지신 것이 아니고 인간차원으로 내려와서 인간차원에서 인간과 결합하여 인간을 신의 고차원의 세계로 끌어올리고자 하신다는 면에서의 말이다.
차원적 인간이 아니면 인간과 차원적으로 결합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신으로서 인간이 되셨는데 그의 인간 되심은 본질적으로 인간이요, 성격적으로 인간이요, 차원적으로 인간이었다. 그러면서 인간이 되셔서 그 인간차원으로 영원히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인간차원에 있는 인간을 당신과 결합시켜 인간을 고차원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사역을 하신 것이다.
※ 인간과 결합하기 위해 당신보다 낮은 차원인 인간으로 오셨다.
그리스도의 원 목적은 중보인데 중보완사의 결과 효력 효과가 무엇이냐? 곧 인간이 진리대로 능력대로 생명대로 살게 함이로되 단순하게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시킴만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은 차원의 절정의 느낌과 행복을 누리게 하려하심이다.
인간을 이런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본질적 인간이 아니면 안 되는고로 예수님께서는 본질적 인간이 되셔서 진리 생명 능력으로 걸어가신 것이다. 이것이 곧 구원이요 신앙이다.
五. 신이라야 신과 결합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이신고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길을 아예 다 막아버리던가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타락하지 아니했을 것이요, 인간이 타락치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인 그리스도로 오셔서 대속이라는 그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이라는 구원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대속이 필요한 그런 구원이 아니고 인간구원은 본래부터 칭의적 그리스도가 필요했고, 중보적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대속의 그리스도는 범죄하므로 필요하고, 칭의적 중보적 그리스도는 대속 이전에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진리적 연결상태로 있기는 했으나 이 연결은 만고 불변적 결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과는 성질적으로 다른 연결인 가범성적 연결이요 가사성적 연결이요 가절성적 연결이기 때문에 이 연결로써는 완전구원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의 중보적 결합으로 인한 이 연결은 불범성적 연결이요 불사성적 연결이요 확실한 연결이다. 그런고로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이런 그리스도가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앞 절에서 인간과의 이 연결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주셨다는 것을 말했는데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주지 아니했더라면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 본체가 없어지고 인간으로 되어 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제 이위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실 때에도 하나님의 본체는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체이신 하나님이 따로 있고, 제 이위이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각각의 하나님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물음은 물질을 벗어나지 못한 물질계를 연상하는 하나의 논법이다. 본체이신 일위의 하나님은 그대로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된 하나님은 그 본체로써 성육신을 하신 것이니 본체가 각체가 아닌 하나이면서 위만 다른 것뿐이다.
그리스도가 된 그 하나님은 본래적으로 제 이위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과 하나의 본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파생자가 아니고 유출자가 아니고 자존자요 영원자요 완전자요 무한자이시다. 이 하나님이 도성인신을 해서 인간과 결합을 했고, 또 본체의 하나님으로 계셨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과 결합을 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 함으로써 신성은 없어지고 완전한 인간으로 화해져 버린 것이 아니다. 잘못 생각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도성인신 하여 인간이 됐을 때 신성을 포기했거나 혹은 신성이 떠났거나 없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신성은 완전한 신성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또 인성은 인성대로 되어졌던 것이다.
인성을 입으심은 인간과 결합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요, 신성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신 것은 신과의 결합을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 그리스도가 인간성을 입었을 때에 신성이 떠나갔거나 신성이 없는 완전한 인성이라면 그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결합은 될 수 있으나 본체이신 하나님과의 결합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입고 인간이 됐을 때에도 신성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지 않고 신성 그대로 있다면 인간과 결합이 불능하고, 인성을 입고 신성을 버리던가 포기하던가 했더라면 하나님과 결합이 불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신인결합에 있어서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자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 대속 칭의 중보 이 세 가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개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만 이라면 속죄만 하면 된다. 만일 구원이 그렇게 단순 간단하다면 하나님도 인간도 고생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멸시 천대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하는 이런 고생을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선악과를 괜히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선악과를 안 지었더라면 인간이 오늘날 이 고생을 안 할 터인데 왜 이렇게 하신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범죄할 때 범죄하지 못하도록 봉쇄를 하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이런 저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설계를 잘못했는가?
범죄를 안 해도 그리스도의 칭의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칭의는 인간을 인간수준에 두지 않고 당신의 수준에 끌어올리기 위해서 필요했다. 구원계획은 칭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당신의 온전을 입혀주기 위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다.
끊어지지 않는 완전한 결합이다. 신부와 신랑의 결합이 제일 좋은 예이다. 인간과의 결합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인간과 결합을 시키려고 하니 칭의를 입히고, 인간을 하나님처럼 결합상태로 영원히 유지하게 하기 위해 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단순히 대속목적이 아니다. 칭의를 입히심은 당신과 같은 성질로 만들기 위함이다.
① 죄만 대속하기 위해 사람된 것이 아니고,
② 당신의 의를 입혀 본질과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올리려고,
③ 당신과 영원한 결합을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④ 신성을 버리고 사람이 됐다면 인간과의 결합은 되겠지만 하나님과의 결 합은 안 되니 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인간과 결합하여 인간수준에 있으려고가 아니고 하나님과 결합시켜 하나님과 같게 하려고 신으로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중보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교리이다.
1. 본질과 본성적인 신이 아니면 신과 결합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와 신과의 결합은 개체적 결합성이 아니고 본래적 원천적 결합성이다.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결합은 단절되었던 것을 결합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와 제 일위(본체)이신 신성과의 결합은 본래적 결합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으실 때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결합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재결합한 것이 아니다. 결합된 상태로써 인성을 입은 것이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양성 일위도 본래적 결합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했으니 이것이 곧 본래적 결합인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부정모혈의 생리법칙대로 출생했다면 본래는 단절이었지만 도중에 신성과 인성과의 결합이라는 논리를 펼 수 있으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에 끊어진 적이 없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과 끊어짐이 없고, 인성과 신성과도 끊어짐이 없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본질과 본성이 완전한 인간이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본질과 본성적 하나님이시다. 제 이위의 하나님과 제 일위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고 곧 본체는 하나이시나 위만 다르고 그 양 위가 각각 결합을 한 것이거나 각각 활동한 것이 아니고 본래적 결합적으로 역사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이 곧 본질과 본성적 신의 결합이다.
혹자들은 예수님이 인성을 입으므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서 이질성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이질성이 되면 신과의 결합은 어려운 것이다.
※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다’ 하면 그 인격성이 하나님이요, 본체가 하나님이요, 성질이 하나님이요, 성분이 하나님과 동질 동성이요,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과 다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이시다.
웟치마니는 옛사람과 새사람은 잘 갈라놓았지만 기독론, 죄론에는 어둡다.
오늘날 구속을 말할 때 주로 그리스도의 사역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출생을 심사할 것.(부정모혈이라면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속죄, 칭의, 중보의 필요성이다.
오늘날 속죄의 그리스도까지만 볼 줄 알았지 칭의와 중보의 그리스도는 어둡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② 우리를 하나님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갖기 위 해,
③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해서 인간이 하나님 수준에서 영원히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2. 도덕적으로 완전자이신 신이 아니면 신과 결합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임이 틀림없으나 인성을 입음으로 신성의 도덕성이 일반인간처럼 타락했거나 속화되었거나 변질되었거나 한 것은 아니다. 완전한 신성의 도덕성과 차이가 없는 도덕성이다.
(1) 인성을 입기 전의 제 이위이신 그리스도의 도덕성.
본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이 도덕성은 제 일위이신 신의 도덕성과 같은 도덕성이다. 인성을 입기 전에도 도덕적 신이시다.
(2) 인성을 입고 난 후의 신성의 도덕성.
그리스도께서 신인양성 일위로 인성을 입으셨을 때 신성의 도덕성이 인성의 어떤 영향을 받아 하락되거나 변질되지 않았다.
(3) 그리스도의 인성의 도덕성.
그리스도의 신성은 비 물질성이라서 물질과 접촉함이 없고 사망계와 상관이 없으므로 도덕성이 하락이나 변질이 없다 할지라도 그 분의 인성은 물질성이요 물질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물질과 접촉을 해야 했고, 물질의 혜택을 입어야 했는고로 타락된 존재와 접촉도 하고 유혹도 받게 되니 인성의 도덕성이 신성의 도덕성과 같을 수는 없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즉 그노시스주의 학설처럼 물질계악설을 주장하여 물질은 다 악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이 악한 물질과 접촉이 되면 접촉될 때마다 인간이 더러워진다고 보았다. 이런 논리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의 도덕성의 하락과 속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물질은 다 악이라고 하지만 물질 자체가 악일 수는 없다. 이 물질은 악에게 인용 당하기도 하고 선에게 인용 당하기도 한다. 성경에 말하기를 ‘우리의 육체는 병기와 같으니 육체가 죄에게 쓰임 받으면 죄의 병기가 되고 의에게 쓰임 받으면 의의 병기가 된다’고 했다.
물질은 전부 악하다고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의 인성도 물질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도 악하다는 이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육체는, 혹은 인성은 물질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결코 악은 아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인성의 도덕성이 하락이나 변질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4) 그리스도의 인격의 도덕성.
그리스도의 인격의 도덕성은 신성의 도덕성과 동질적 도덕성이다.
인격성과 신성은 양성이 분리는 되지만 도덕성은 분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의 모든 동작이 신성과 단절이 되거나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활동을 했다거나 개체적 대립적 충돌적으로 활동을 했다면 양성이 각각의 도덕성이 되겠으나 그리스도의 인성의 모든 동작은 신성과 양성 일위 결합으로 한 활동이었기 때문에 신인양성의 구별은 되지만 도덕성은 하나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신이시다.
※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라야 신과 결합이 된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신이라야 되고, 도덕성은 신적 도덕성이라야 된다. 예수님은 인성의 도덕성과 신성의 도덕성을 따로 가지신 것이 아니다. 이것을 성경이 뒷받침한다.(가나에서 어머니보고 ‘여자여’, 십자가상에서도 ‘여자여’) 인성은 신성에 피동 되어 계속 지배를 받았다.
양성이 구별은 되지만 활동의 도덕성은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도덕성은 하나다. 하나님과 도덕적 단일이다. 위만 다를 뿐 본체는 하나다.
십자가의 고통은 사역의 단일은 아니다. 활동은 단일. 신성에 피동.
3. 능력적으로 완전자이신 신이 아니면 신과의 결합은 불가능.
그리스도의 신성의 능력은 곧 성부의 능력이다. 신성의 능력과 성부의 능력은 각위적 능력이 아니고 단일능력이다. 단일능력이라는 말은 한 가지 일밖에 못한다는 말이 아니고 한 능력으로 각각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물이 피가 되게 하는 능력을 행했는데 애굽의 술객들도 같은 종류의 일을 했다. 그러나 이 때의 능력은 한(같은) 능력이 아니다. 즉 한 능력이 아니라도 표면적으로는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경신학자들 중에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모든 만물을 지었다’ 하는 이것을 가지고 창세기 1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천지를 지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을 때 손이나 발로 짓지 않고 말씀으로 지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로고스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되거나 발생된 말씀이라는 뜻이 아닌 완전하고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인 로고스를 말하는 것이다. 즉 이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모든 만물을 지었다는 말은 제 이위이신 로고스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말이니 만물을 지은 이 능력과, 성부 자체의 능력과, 또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는 이 능력들은 각각의 능력이냐, 한 능력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물을 피가 되게 하는 능력과, 애굽의 술객들이 행하는 능력이 사역의 종류는 같으나 한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능력은 사역은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한 능력이다. 같은 그 능력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한 것이고, 만물을 창조한 그 능력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자연계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적으로 완전하신 신이 아니면 신과의 결합을 할 수 없는 것이다.
※ 능력은 달라도 같은 사역을 할 수 있다. 사역이 같다고 해서 같은 능력으로 보면 안 된다.
능력을 심사할 때는 그 목적성을 분별하면 된다. 예수님의 능력과 술객들의 능력과는 그 목적이 다르다. 모세의 능력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목적이고, 술객들은 이스라엘을 애굽에 붙들어 놓는 목적이다.
단일능력이라 할 때 한 가지만이 아닌 여러 가지를 한다. 병자 고치는 능력과 만물을 창조한 능력은 한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신성의 능력과 인성의 능력이 있는데 인성의 능력은 신성에 피동 된다. 사도들의 능력도 같다.
예수님의 능력은 신인양성 결합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결합은 진리적 생명적 능력적 결합이다. 결합의 대상자는 인간인고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야 인간과 결합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과 결합한 것이다. 또한 인간을 하나님과 결합시켜야 하는 고로 신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六. 신성과 인성의 양성 일위의 결합이 아니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의 제재를 받음이 없이 모든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획하신 구원사역 목적으로 자연법과 도덕법과 일반법과 특수법을 마련하셨으니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치를 어겨가며 일을 하지는 않으심을 알 수 있다. 혹 자연법을 어기고 하시는 경우에는 자연법을 어기신 것이 아니고 당신은 초자연의 능력자, 만능의 능력자이심을 알려주심이다.
하나님은 자연법이나 혹은 도덕법이나 일반법이나 특수법 아래서 법의 제재를 받으며 활동을 하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자연법과 도덕법, 진리법과 생명법의 입법자이시므로 모든 법을 지배하는 신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 법을, 그 이치를 무시하며 어떤 일을 진행하시지는 않으신다. 즉 당신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법을 어겨가며 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의 중보적 결합운동도 꼭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중보를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굳이 이렇게 하심은 이치대로 하시다 보니 이런 중보역사를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물론 대속도 중요하고 칭의도 중요하나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도 중요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중보의 역할을 위해서는 신성으로 만도 안 되고 인성으로 만도 안 된다. 신성과 인성 양성 일위가 아니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결 혹은 접선이 능력적으로 어려운게 아니고 이치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결합도 신성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은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선행적으로 계획 완료해 놓으시고 여기에 적합한 존재를 물색 혹은 탐색을 하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신인 양성 일위의 존재인고로 이 사명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대속 칭의 결합으로 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이 대속과 칭의의 결합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는 자격자가 천상 천하에 아무도 없을 뿐 아니라 그 3직 중 한 부분만이라도 수행할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이 아니었더라도 인간의 대속과 칭의의 사역은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에 정복당함이 없으신 무형자이시고 완전하신 분인고로 대속의 자격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칭의의 사역도 가능했다. 즉 그는 인간으로서 일생동안 하나님에게 전적 피동 되어 신적인 의행으로만 살으셨기 때문에 일생동안 해 놓은 그의 의행으로써 당신의 택자들에게 그 의를 입혀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이 아니라 할지라도 대속과 칭의의 사명은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은 대속과 칭의로써만이 완사 되는 것이 아니고 신인결합이 되어야만 절대적으로 효력을 내는 것이다. 중보와 결합이 아니고는 신의 생명이 인간에게 건너와서 인간이 영원한 생존자요 인격자요 능력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속하고 칭의를 입혀주었다 할지라도 양성 일위의 결합으로써 중보역할을 하지 못했더라면 우리에게 영생이 있을 수 없고 결합이 될 수도 없다. 우리의 영생은 결합에서이다. 이 결합으로 인해 구원이 영원한 효력이 되는 것이다(영생).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이치를 깨닫고 나면 기독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해 신성 부인이나 완전한 인성 부인 따위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학자들 중에는 구원도리라는 대 원리를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거나 잠재해 둔 채 단순히 우리 인간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만을 보고 그 그리스도에 대해 ‘인성이냐, 신성이냐’를 연구하다 보니 혹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기도 하고, 혹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기도 하고, 또 혹자는 양성 각 위의 비 결합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고로 신학을 연구하는데는 근원부터 원인부터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이설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구원이라는 구원은 대속자도 필요하고 칭의도 필요하지만 그 외에 신과 인간과 연결을 시켜주는 중보의 그리스도의 필요성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과 인간과 연결시키는 이 그리스도는 인성만으로도 불가능하고, 신성만으로도 불가능하고, 일성 일위로도 불가능하고, 같은 성 각 위의 비 결합성도 불가능하고 다만 신성과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적인 존재자라야만이 중보자로서의 자격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자는
① 무죄성적인 인간이라야 되고,
② 그 일생을 하나님과 결합적 동화적 생애로 살아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 에 만족을 이루어 드린 분이라야 하고,
③ 신성과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적인 존재라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할 때 이상의 조건을 염두에 두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니 예수는 과연 그러한 분인가’ 하고 심사해야 한다. 이렇게 연구할 때 ‘과연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틀림없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 구원도리는 대속과 칭의, 그리고 하나님의 새생명이 건너와야 성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중보적 연결이라야 구세주의 자격자이다.(대속, 칭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무죄자이어야 하며 신성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자, 양성 일위자라야 중보 결합 구원이 된다. 연결을 못 시키면 구원이 아니다.
대형은 신의 도움이 없다. 대행도 신의 도움이 없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드려야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신인양성 결합은 중보에서.
1. 일성 일위로써는 불가능.
일반적인 모든 인간은 단순한 인격성을 가진 인성적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을 일성 일위의 존재라고 한다.
일성 일위이면 그 어떤 일면에만 접촉 혹은 결합이 가능하지만 신과 인간과의 양편 동시 결합은 불가능한 것이다. 양성 일위의 결합이라야 동시에 양편에 접선 결합이 되는 것이다.
(1) 인성으로서의 일성 일위.
일반인간은 일성 일위의 인격성만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될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되지 아니했더라면 예수님도 그 인격성이 일성 일위뿐이었을 것이다. 일위의 인격성으로는 아무리 온전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고 깨끗하게 살아도 신성과의 결합은 불능하다. 일위의 인격성은 아무리 깨끗하고 거룩해도 신성이 아닌고로 신성과 결합이 될 수 없다.
(2) 신성으로서의 일성 일위.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림 하시되 마리아의 몸에 잉태가 아닌 그냥 신성으로만 내려왔다고 하면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입었다 할지라도 이것은 자연법대로 입은 육체가 아닌고로 그 육체는 인성일 수 없다. 인성은 자연법 아래 생겨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성은 완전하게 자연법대로 생겨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가지기 위해 말씀으로 잉태했고, 인성을 입기 위해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된 것이다. 즉 구원이 불가능한 방법인 일성 일위가 아닌 양성 일위의 몸을 가지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신성으로서 일성 일위이시다. 우리 인간은 인격성으로서 일성 일위이다.
※ 일성 일위는 신성을 두고 말할 수도 있고, 인성을 두고 말할 수도 있다.
성부 하나님은 일성 일위로 신성 일위, 성령도 신성 일위, 예수님은 양성 일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정성을 들여 구원사역을 하시는 것이다.
2. 이성 이위로써는 불가능.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강조하다 보니 인성을 부인하게 되는 자가 있고, 또는 신성 일위만 고조하는 자가 있고, 그런가 하면 신성을 반박하다가 인성을 부인하는 자도 있고, 인성을 반박하다가 신성을 부인하는 자도 있다. 또는 이 양론을 다 반박하며 양성을 긍정하다 보니 이성 이위를 주장하는 자도 있다. 이들은 ‘신성과 인성이 다른데 어떻게 일위가 될 수 있느냐’ 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성 이위로 보는 것이다. 양성 이위를 주장하는 자들의 요지는 ‘신성과 인성 각 성이 어떻게 일위의 결합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구원도리를 알지 못해서 하는 말이요, 구원도리는 제외하고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이냐, 인성이냐’ 하는 그 문제에만 치우치다 보니 이런 변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다른 모든 신학을 연구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기독론을 연구할 때 말 그대로 ‘기독=그리스도’ 이니 그리스도라는 그 존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왜 필요했는가’ 하는 거기서부터 생각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양성 이위의 주장은 할 수 없고 양성 일위가 확실하게 믿어지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라스틱주의 그노시스주의 - 물질은 전부 악이다.
(1) 각 성 각 위가 되면 결합은 불가능.
신성과 인성은 각각의 위인데 예수님께서 이 양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위가 일위가 아닌 이위라고 하면 결합은 불능하다.
혹 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양성은 믿지만 일위성을 믿지 못하고 양성 이위성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양성 이위를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입고 세상에 와서 존재할 때 인성은 인성대로 작용했고 신성은 신성대로 각 성 각 위의 작용을 했다고 주장하게 되니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인성만 십자가에 달려 있고 신성은 떠나가 버렸다고 하는 이단설이 나오게 된다.
예수님께서 행동하실 때 모든 일을 인성이 했으나 인성이 그 활동을 할 때에 신성과 별개로 활동하지도 않았고, 또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적인 것을 통과할 때에는 신성의 협조를 입어 인성이 힘 안 들이고 고통도 당하지 않고 느낌도 없이 쉽게 한 것은 아니다.
인성이 신성과 결합이 되어 있으면서 모든 사역에 있어서 신성이 주격이 된 것뿐이지 실질적으로 인성이 다 한 것이다. 마치 우리 기독자가 어떤 일을 할 때 성령의 감화 감동에 의해 한다고 해서 인간의 활동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일을 할 때의 수고나 어려움이나 고통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 최선의 힘을 다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인성의 활동이 그러했던 것이다.
우리 기독자는 성령과 결합되어 있는 중생된 영이 주격이 되어 이성과 몸이 그 영에게 피동 되어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활동할 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초능력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러나 대개는 그 모든 감각성이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신 활동이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통 중에도 신인양성의 결합성이 이성 이위 각 성 각 위로 나누어짐이 없이 영원히 계속 지속했으니 그의 인격성의 활동은 완전한 인격성으로써 통과한 것이다.
혹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인격성은(여기서는 느낌) 떠나고 신성으로 달렸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양발과 양손에 못을 박았으나 아픔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우리가 믿을 수 없다. 또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인성이 신성에게 완전히 삼켜버렸기 때문에 고통이 없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부당하다. 예수님은 끝까지 양성 일위였지 각 성 각 위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있으면서 신성이 떠난 것도 아니고, 인성이 떠난 것도 아니고, 또 인성이 신성에게 삼킨 바 된 것도 아니다. 다만 신성은 주격성으로 있고 인성은 소유격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당신의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애정성과 지정성의 극치가 이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때가 예수님의 애성이 그 어떤 때보다 극치적이었고 지정성도 그 어느 때보다 이 때가 가장 극치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성 이위는 용납할 수 없고 양성 일위의 결합성을 안 믿을 수 없다.
(2) 양성 일위의 정통설.
이미 양성 일위의 결합에 대해 말을 했지만 양성이란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신성이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파생체나 유출체나 발생체가 아니고 본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런고로 그의 양성 중에 신성은 자존자요 영존자요 완전자이시다. 그러나 한편 인성은 자존자도 아니고 완전자도 아니고 절대자도 아닌 피조물이다.
혹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체의 피조설을 부인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육체는 피조물임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의 태중에 있을 때 탯줄이 있었고, 그 탯줄로써 마리아가 먹은 양분을 먹어 성장했고, 또 생후에는 마리아의 젓을 먹고 물질을 먹고 생존했다. 그런고로 그는 완전한 인성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과 똑같이 영원성 자존성 완전성 절대성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그런고로 양성이라고 할 때 신성에 대해서는 그의 본체이신 하나님과 하나인 신성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인성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인간의 인성과 똑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의 인성은 자연법 아래 존재해야만 했던 것이다. 다만 우리와 다른 것은 죄에 정복되지 않고 감염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양성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하니 예수님이 양성이라고 해서 이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혹 말할 때 성부는 일위요, 성령은 삼위요, 성자는 이위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위라고 하는 말은 서열적 순서적으로 하는 말이다.
제 일위이신 성부도 한 위요, 제 이위이신 성자도 한 위요, 제 삼위이신 성령도 한 위이시니 예수님께서 양성 일위라는 말은 사역적인 면으로 볼 때 신성이 주격이 되고 인성은 신성의 소유격이 되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었다 할지라도 이위가 될 수 없고 그는 영원히 한 위이시다. 그는 인성을 입기 전에도 제 이위이신 한 위요,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영원히 한 위시요, 이와 같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활동을 하고 계실 때에도 한 위이셨다.
(3) 결합.
이 결합이라는 말은 양성 각 위의 결합을 말하는게 아니고 양성 일위의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양성 일위의 결합에 대해 말할 때 신성과 인성의 분계선을 분명히 그어서 어디까지는 인성이고 어디까지는 신성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물체가 끊어진 것을 이어 놓는, 즉 A물질과 B물질을 연결시켜 놓은 것과 같은 뜻으로 결합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신성과 인성의 양성 일위의 결합성이란 그런 뜻이라기보다 분리할 수 없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 양성 일위의 결합이 중요하다.
(4) 양성 일위로만 가함.
그리스도의 양성에서 신성은 하나님의 본체와 동일하다고 이미 말한 바가 있는데 이 신성은 본체에서 파생되어 나와 인성을 입기 위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본체는 하나이시다’ 하는 그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고 있을 때에도 그 신성은 본체를 떠나 별개체인 제 이체가 되어 인성과 결합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양성 일위라는 말을 잘못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본체와의 분리성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성 일위의 교리를 깨닫고자 할 때 그리스도의 양성 중에 비 물질인 신성은 인간의 육신인 인성을 입었어도 여전히 본체와 단일성의 하나라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이것을 잊게 되면 유일신의 하나님이 아니고 두 분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또 양성 일위라 할 때 하나님이 인성을 입었다고 해서 본체이신 하나님은 없어져 버렸다는 말도 아니다. 본체는 변함없이 본체로 계시고, 그 본체이신 하나님이 위만 다른 인성을 입었으니 그 일위이신 하나님이 인격성과 결합하여 중보의 사명을 다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자 혹은 택자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은 만고불변의 구원이다.
이 구원을 입은 인간이 구원을 얻은 후에 신화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성이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버린다거나, 하나님이 신이 아닐 수도 있다거나, 인간이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신이 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이 영원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신으로 영원하시고,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영원하다. 신의 영원과 인간의 영원 사이에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도 불변으로 영원하시다.
※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세상에 내려와서 인간을 전부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의 그 중보성은 33년 동안 만인가? 아니다. 이것은 영원적이다. 임시성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히 인간이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五절. 영원 불변적 변화 부활의 필요성.
혹자들은 말하기를 우리 인간의 구원은 영혼만 구원을 얻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영혼구원만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일시적이고, 그리고 또 인간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전체 인류에게 해당되는 사실도 아니다. 즉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한 신령계로 가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다만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모든 인간(중생한 자)의 부활이 선후에 차서가 없이 동시에 부활을 하기 때문에 부활 전에 미리 죽은 자들은 부활할 때까지 흙(땅)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가 흙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라기보다 땅에서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땅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자들도 있지만 에녹과 엘리야는 그 육체가 땅에서 기다림이 없이 영과 함께 승천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시에 생존하고 있는 성도들은 땅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이 그 때 바로 부활하여, 혹은 변화하여 예수님과 함께 공중으로 휴거하여 신령계로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렇게 오묘하게 설계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성도는 영혼만 구원을 얻고 육체는 구원 얻지 못한 채 썩어 흙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영혼의 구원이 중요한 것만큼 우리 육체의 구원도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영혼의 구원은 이미 말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고 칭의를 입고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중생해서 찰나적 단회적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고, 완성된 이 영혼의 구원은 그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성장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육체의 완전구원은 부활로 볼 수 있는데 부활이 올 때까지 육체를 성화시키고 감염시키며 부활의 때를 기다리다가 부활함으로써 육체의 구원은 종결되는 것이다. 즉 영혼의 구원은 완전에서 시작하여 성장되어 가는 것이고, 육체의 구원은 영혼구원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성화되어 부활에서 끝을 맺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이 중요한 것만큼 육체의 부활구원도 중요한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사역을 아니했더라면 우리 육체의 부활구원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구원을 얻지 못한 채 영혼구원만 얻어 육은 영원히 흙으로 돌아가 버린다고 하면 인간의 구원을 완전구원으로 보기 힘들다. 자기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 있고 육체는 멸망을 받아 썩어 흙으로 있다고 하면 물론 육신이 죽어 썩어 흙이 돼서 인격도 의식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완전구원의 이론상 불합리하다. 그런고로 우리는 구원을 볼 때 영육구원으로 보아야 한다.
영혼의 구원은 사죄 칭의 중보 새생명으로 구원을 얻고, 우리의 육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어 부활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니 이것을 영육의 완전구원으로 보아야 한다.
또 영은 찰나적 단회적으로 사죄 칭의 중보 새생명 중생으로 구원을 얻어 그 이후부터 계속적으로 성장해 나가야 하니 이 성장은 도덕적 성장, 지혜지식적 성장, 능력적 성장으로 영육이 분리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성장되어 나가야 하고, 또 육은 부활이 올 때까지 성화되고 감염되어야 하니 이를 위해 연관구원 혹은 건설구원을 단회적 찰나적인 부활로써 구원이 완성될 때가지 부절이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
이것을 구별하면 1차적으로는 영혼의 기본구원이요, 둘째로는 영혼의 성장구원이요, 셋째로는 육의 성화 건설구원이요, 넷째로는 부활 완전구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구원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혹자들은 기독자의 구원을 단순히 영혼구원만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던지 한평생 살다가 죽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영혼만 천국에 가면 다 인줄 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구원을 상세히 볼 때 우리의 영혼구원에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뿐만 아니라 우리 육의 구원에까지 그리스도는 절대로 필요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종류와 구원의 방편을 혹은 성격을 알지 못하고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흔히 알기로는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죽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만 본다면 그리스도는 안 죽어도 될 죽음을 죽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그리스도의 사활은 적들이 죽였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라고 계시치 않고 우리의 영혼구원을 위해 필연코 죽어야만 했고 부활해야만 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이지 아니했더라면 우리의 영혼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안 죽어도 될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고 안 죽으면 안될 죽음을 죽은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원수들은 자기들이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완전을 위해 죽여준 셈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 않았더라면 부활이 없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 성도의 육체의 부활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기 때문에 부활을 시킨 것이 아니고 우리의 부활을 위해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부활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다.
이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이 죽음을 죽을 수 없고, 이 죽음을 죽지 않고는 이 부활을 할 수 없고, 이 부활을 하지 못했더라면 우리 육체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런고로 우리의 육체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처럼 필요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우리의 몸은 썩을 육체이기 때문에 아무렇게 해도 되느냐? 안 된다. 우리 기독자의 구원은 영혼구원만이 아니고 육체의 구원도 중요한 것이다.
양면적 구원이니 영혼구원은 단회적 찰나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 칭의 중보 새생명으로 되는 것이고, 성장구원은 단회적 찰나적이 아니고 자연생명이 다하기까지 점차적인 구원이다. 이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그냥 두면 안 된다. 물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
옛사람 새사람.(엡4:22-24) 중생치 못한 사람에게는 새사람이 없다.
고전3:16 - 영이 한 번 중생 후는 네 몸은 성령의 전이다.
중생시켜 놓은 성령은 나가지 않는다. 진리와 영감으로 결합이다.
영 자체는 계속 작용이다. 그러나 영은 강제적으로 못한다. 이성은 자유이므로 영을 잡을 수도 있고 육을 잡을 수도 있다. 영은 강제권을 못 쓰고 양심에다 말하고 있다. 이성이 양심과 영과 끊어지는 찰나 옛사람과 손을 잡는다. 중생한 사람은 항상 옛사람이 아니면 영이다.
벧후 2:11 -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 영혼을 거스리는 이것은 영혼이 아니다.
이성이 없이는 영의 작용을 느끼지 못한다. 영의 작용은 하나님의 소원성이다. 외부로써 육을 통해 때린다. 옛사람은 고깃덩어리 편안하게 지내자! 이성이 결정권을 내린다. 이것을 인격으로 보는 것이다.
영의 구원은 중생과 성장, 육의 구원은 성화와 변화와 부활.
一. 부활의 개념.
우리 인간은 영육이 영원히 존재한다. 육을 임시적인 존재라고 볼 수 없다. 영도 육도 영원한 존재임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영은 영원이요 육은 임시라고 하는 이것은 육의 존재성이 임시라는 말이 아니고 비 부활적 생명, 비 변화적인 생명으로 누리고 느낌이 임시라는 말이다. 우리의 영은 중생하기 이전에는 존재적으로는 실존하고 있으나 활동적 작용적으로는 죽어 있는 것이다.
혹자들은 영이 미 중생한 자들의 비 물질적 정신적 작용을 영의 작용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이성의 작용이다. 영의 작용은 그 작용 성격이 전체가 신적이요 신령적이요 천국적이요 진리적이다.
영이 중생하지 않고는 참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부를 수도 없고, 천국을 사모할 수도 없다. 그러나 죽은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게 되면 그 영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적이요 신령적이요 영원적이요 천국적이요 진리적인 작용을 한다. 미 중생자들도 정신작용인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무형행인 그 심행은 신적이 아니요 신령적이 아니요 천국적이 아니다.
중생 이전에는 영은 비 작용상태에서 살았기 때문에 활동적으로나 작용적으로 볼 때 영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생됨으로 영의 존재성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도 세상에 생존하다가 사선을 넘고 나면 일시적으로 육체가 없는 것 같으나 부활 후에는 육체의 존재성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순 영과 부활체인 신령체와의 다른 점은 순 영은 비 물질인고로 사람의 눈에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한 영체는 보여질 수도 있고 안 보여질 수도 있고, 만져지기도 하고 안 만져지기도 하고, 시공간의 제한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하고, 음식물을 흡수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어떤 장애물의 제재를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으니 이것은 비 부활체인 육체와도 다르고 순 영과도 다른 점이다. 그런고로 우리의 육체라는 육체는 영의 구원을 얻은 자에 한해서 필연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어 부활해서 육체의 구원을 입게 되는 것이다.
※ 1. 부활 안한 육체: 시공간의 제한을 받음. 만져짐.
2. 부활한 육체: 초월적 존재. 만져지기도, 안 만져지기도.
3. 영: 보여지지 않는 비 물질.
4. 부활한 육체: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있다.
사람이라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부활한다.
1. 생명적 부활: 구원을 이룬 것을 누리기 위하여.
2. 사망적 부활: 심판의 부활.
사망자의 부활도 그리스도의 권능이 필요하다.
1. 불신자의 부활.
불신자도 이 세상살이를 다 한 후에는 신자처럼 죽음의 선을 넘는다. 성경대로 보면 신자의 부활은 선행하고 불신자의 부활은 후행한다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모든 신자는 부활하지만 불신자는 그 때 부활하지 못하고 천 년을 더 기다렸다가 천 년 후에 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한다고 되어 있으니 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한 부활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지 못한 부활이기 때문에 인간을 멸망케 했던 죄악성 타락성 고통성 전부가 제거되지 못한 채 그대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불신자도 부활해야 할 것은 인간은 이 물질계에서 영원히 존재할 자가 아닌 물질계가 끝이 날 때 비 물질계로 가서 영원히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육체가 비 물질적인 육체로 부활 혹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신자도 이미 죽은 자는 죽은 후에 최후 심판 때까지 땅에 대기하고 있다가 부활을 하고, 그 때까지 죽지 않고 있던 자들은 죽음을 통과치 않고 살아 있는 그대로 사망의 부활을 하게 되는데 물질의 생명체는 비 물질의 생명체로 변해지지만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의 권능을 입지 못한 연고로 죄악성과 고통을 제거하지 못한 채 부활한다. 그런고로 그는 영원히 고통을 느끼게 되고 고통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학자들은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밑에서 위로 쳐다본 것. 뿌리를 인간에게 두고 전개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적 신적 계시를 오해하게 된다.
단순히 형벌감당이라면 타락을 했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논리가 나온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단일성을 입기 위해서는 타락 전이라도 그리스도의 구속이 꼭 필요하다. 타락치 않았더라면 신성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모두 예정적이요 설계적이니 죽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고 부활은 필연코 필요하다. 우리의 부활이 절대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예정된 순서 중에 하나이다.
진리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철학은 인간에서부터.
① 그리스도의 부활.
↓
② 성도의 부활.
↓
③ 불신자의 부활.
이렇게 부활은 순서적으로 이론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보를 두고 말할 때, 인간의 영원성을 두고 말할 때는
① 영만.
② 육만이 아니고.
③ 실지로 영육이 아울러 영원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영원한 존재로 지었는데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이 없었더라면 영은 구원을 얻는다고 해도 육은 부활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영육부활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을 입지 못한 자는 사망의 부활이다. 나도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입지 못했다면 그와 같을 수밖에 없다.
2. 신자의 부활.
이 부활이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독특하게 사용하는 용어인데 이것은 재생이나 환생과는 달리 말 그대로 부활이다.
부활이라는 말은 물질은 물질대로, 비 물질은 비 물질대로 본래대로 환생한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이 본래는 물질성과 비 물질성으로, 혹은 영과 육이 결합된 자로 존재하고 있었으나 물질과 비 물질의 결합이 아닌 물질적인 것을 비 물질성으로, 육체는 영체로 영원 불변적인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부활이란 기독교의 전문적인 용어이다.
재생은: 본래대로 살아나는 것.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환생은: 그 인격체 그 육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 불교의 윤회설 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윤회는: 죽었다가 딴 것으로 태어나는 것.
환생은: 죽었다가 누구의 집에 태어난다는 것.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집에 태어난다는 것.
부활은: 영육 결합도 아니고, 물질과 비 물질의 결합도 아닌 육체가 완전히 영체로 변해지는 것이다.
(1) 피동적 부활.
신자의 부활은 피동적 부활이지만 불신자의 경우는 수동적 부활이다.
수동적 부활이란 자력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또 어떤 부활의 권능을 입어서 부활하는 것도 아닌 타력이 부활을 시켜 주니 부활을 받는 것이다.
불신자는 자체적으로 부활할 능력이 없고, 또 자기를 부활시켜 줄 수 있는 객관의 능력을 입지도 못하므로 다만 타력이 부활을 하게 해 주어야만 부활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자신이 부활을 하고 안 하고의 자유성도 권리도 능력도 없는 것이다. 이들은 영원히 사망을 누릴 것을 생각하면 부활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자의 부활은 수동적 부활이 아니고 피동적 부활이니 피동적 부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음으로써 부활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간도 부활은 불능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을 위한 부활의 첫 열매요, 부활의 권능이요, 모든 성도들에게 입혀줄 부활의 기본이다. 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으므로 결합적으로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자력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으면 마치 자력으로 부활을 하는 것처럼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불신자의 부활은 수동적 부활. 살려 일으켜 줌으로써 된다. 신자의 부활은 피동적 부활
입는 것에는 세 가지.
① 그리스도의 구속.(중생)
②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진리와 영감으로 유기적)
③ 부활의 권능을 입고.(필연적으로)
(2) 사자(死者)들의 동시 부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출생에 선후의 차서가 있고, 이 세상에서 생존하다 죽는 것도 동시가 아니고 선후의 차서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출생의 순서대로 죽음의 순서가 나열되지는 않는다. 출생의 순서가 따로 있고, 죽음의 순서가 따로 있다. 그러나 부활은 기독자에 한해서는 전 인류가 동시성이다. 아무리 죽음의 순서가 선행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의 부활은 동시이다. 이는 부활의 권능을 출생 당시에나 중생 당시에나 사시(死時)에 입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자가 동시에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기독자의 부활이 왜 동시냐? 예수님의 부활을 입는 것이 동시이기 때문이다.
기본구원에 동등, 신자권(神子權)에 동등, 영생권에 동등, 자유성에 동등. 하지만 차등 격차 차서가 있다. 출생에 차서, 능력적 실력적 차등, 성화구원의 차등, 활동적 치리권에 차등, 영광에 차등.
(3) 생자(生者)들의 부활도 동시.(살전4:)
예수님께서 지상에 재림하실 때 생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공로와 권능을 입어 부활할 때 일단 죽어서 부활의 권능을 입고 부활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고 사자(死者)들은 사자들대로 부활의 권능을 입고 부활을 하게 되고, 생자들은 죽음이 없이 산 상태 그대로 부활의 권능을 입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 이전에는 생자와 사자가 전혀 다른 모양으로 있다. 사자들은 영육이 분리된 상태로 있고, 또 사자들의 육체는 자연생명이 떠났거나 혹은 부패되었거나 혹은 흙으로 변해 버렸거나 흙도 없이 원소로 돌아가고 말았거나 한 상태로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기만 하면 이것은 다 영체로 변해진다. 그러나 생자들은 부활의 권능을 입기 전에는 육의 자연생명이 영육 결합체로 있다가 부활 즉시로 영체로 변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생자나 사자나 다 부활의 권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고로 부활의 권능을 입기 전에는 생자와 사자는 이렇게 엄청나게 차별이 있으니 사자들의 육체는 사망에 머물고 있고 영혼은 천국에 가 있고, 생자들은 그 육체가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고 영은 천국에 못 가고 그 육체와 함께 머물고 있다가 영체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자의 부활이란 이렇게 신비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공로가 없었더라면 우리 기독자의 이 신비스러운 부활의 가치와 영광은 없을 것이니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대속에서만이 아니고, 칭의에서만이 아니고, 중보에서만이 아니고 부활에 있어서도 이렇게 필요함을 알 수 있다.
※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미래적으로 입고 중생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활은 미래적으로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예: 엘리야 에녹의 부활. 모세의 시체도 찾다가 못 찾았다.
죽은 자는 자연생명이 없다. 감각성이 없다. 분리된 상태이다. 생자는 자연생명이 있다. 감각성이 있다. 영육 결합체이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육을 입고 있는 자는 육에 속한 것은 다 빠져버린다. 그리고 일인격의 단일체 영체로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결과를 탄생키 위해 자원적으로 죽으셨다. 예수님은 죽음에도 손해가 없고 전부는 수입이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에 만족, 칭의 부활에 만족 수입이다.
二. 예수의 부활.
세상에는 불의, 불행의 죽음이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므로 부활했다고 보고 있다.
학적인 면에서 연구해 볼 때 이 이론이 타당성이 있으나 사실은 이것과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거기서 이루어진 결과성을 볼 때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적 불행의 죽음도 아니고 죽었기에 부활이 아닌 부활을 위해 죽으셨으니 이렇게 죽으심은 다양적인 목적에서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활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이 있으나 우리는 잡다한 이론과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로 하고 그 부활을 우리 일반인간의 부활과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기독자의 부활과는 가치관이나 목적성이나 능력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으나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과는 가치적으로 차이가 있고, 방편적 차이가 있고, 능력적으로 차이가 있다.
※ 방편: 예수님의 부활은 능동적 부활, 우리의 부활은 피동적 부활이다.
1. 예수님의 부활은 단독적 부활이다.
모든 사람들은 사자는 사자들대로 동시에 부활의 권능을 입고 부활을 하고, 생자들은 생자들대로 부활의 권능을 입고 동시에 부활을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 홀로 단독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어떤 객관이 부활의 공로를 입혀줌으로써 하는 부활이 아니다. 이 부활은 당신이 자원적으로 자유의사대로 한 부활이기 때문에 단독적 부활이다.
2. 능동적 부활이다.
다른 모든 존재들은 생명의 부활을 할 때 객관에 의해 부활의 공로를 입고 부활을 하게 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수동적 부활도 아니고 피동적 부활도 아닌 능동적 부활이다.
예수님은 죽음도 자유성을 가진 자유적 자원적 죽음이다. 예수님은 생사의 자유가 있고, 생사의 권리가 있고, 생사의 능력이 있다. 이와 같이 부활에 있어서도 자유와 권리와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그 죽음이 자신이 죄에게 속박되어 죄에게 끌려 사망에로 갔기 때문에 죽은 죽음이므로 이 죽음은 자유의 죽음이 아니요 죄의 속박 아래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 죄값을 지불하기 전에는 죽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인데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인고로 그 죽음에서 자유적으로 자원적으로 벗어져 나갈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예수님을 사망계로 끌고 가지를 못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망계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원적으로 자유적으로 사망계에 뛰어들어 죽은 죽음인 것이다. 죄에 포박된 자가 아니고 인간구출 목적으로 자원적으로 사망계로 들어온 자이기 때문에 죄와 사망이 강압적으로 죄 아래로 포박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망 안에서도 자유 했다. 즉 예수님은 어떤 죄에게도 속박성이 없기 때문에 사망계와 생명계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자원적으로 죽으셨으니 그 죽음은 죄와 사망 아래 강제적으로 속박 포박되어 죽은 죽음이 아니었던고로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사망에서 뛰쳐나와 부활체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이 사망에로 들어간 것 역시 그 사망계를 이겨 정복하기 위해 자원적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능동적 부활이다.
※ 예수님의 부활과 인간들의 부활과는 그 자체가 다르다. 불신자들은 죽고 사는 문제의 자유가 없고, 부활도 하고 안 하고의 자유도 없다. 오직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만이 부활을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입힐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나온다.
① 예수님의 부활.
② 신자의 부활.
③ 불신자의 부활이 같을 수는 없다.
부활은 이렇게 다양한 것이다.
3. 부활을 위한 자원적 사.(死)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죽음과는 다른 죽음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운명 시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며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났다. 예수님은 그 영혼이 떠남과 동시에 신체에 작용하던 모든 것은 다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영육이 분리가 됐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영육은 완전 분리가 됐지만 그의 신성과 인성은 주격성인 영혼과는 완전 분리가 아니고 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죽으심은 이런 상태로서 완전한 죽음이었다.
혹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순간적 기절이라고 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말을 인정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영이 죽은 육체로부터 완전 분리요, 육체에 머물고 있던 자연생명도 육체로부터 완전 분리이니 육체를 중심해서 작용하는 이성도 본능도 감각도 모두는 분리 혹은 중단이었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요, 부활이 없었다면 성도의 생명의 부활도 없을 것이고, 산 성도의 신령한 영체의 변화의 부활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고 부활을 전제로 하고 부활을 위해 자원적으로 죽으신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전혀 다르다.
4. 타를 위해 사활(死活).
일반인간들은 그 죽음이 타를 위한 죽음이 아니다. 또 부활 역시도 인간은 죽었기 때문에 부활을 하는 것이고, 죽었기 때문에 부활이 필요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죽었기 때문에가 아닌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사활을 위한 죽음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은 방편이 다르다.
방편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자원적 자유적 능동적 부활이요, 기독자의 부활은 피동적 부활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타를 위한 부활이요 일반사람들의 부활은 자기를 위한 부활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 그리고 비 성도의 부활은 엄청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목적이 뚜렷하고 가치가 다르다. 방편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치가 따로 있는 것이요, 예수님의 그 부활이 우리 기독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복잡 다단하게 해야만 했던가? 그 속에 택자와 불택자, 그리고 성도의 다양적 누림의 느낌의 활동의 실력의 차등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정성 공평성이다.
三. 부활의 권능.
성경에 바울을 통하여 부활의 권능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부활의 권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켜 놓은 이 부활의 권능은 과연 어떤 권능을 가졌는가? 이 권능을 입게 되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권능의 소유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은 능동적인 권능이요, 우리는 수동적인 권능인데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차이만 있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과 우리의 부활의 권능이 본질과 본성에 차이가 없다. 이 부활의 권능이란 신적 초자연적인 권능인데 모든 택자들에게 이 권능을 입히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일반세상에서 능력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고 있고, 성경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대개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할 때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자연계의 능력의 압박을 벗어나고 제재를 벗어나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연계에 소속되어 있는 인간은 불가불 자연의 능력에 압박을 당하고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다. 자연계에서 존재하고 있는 일반존재들은 자연법칙인 자연의 능력에 항거하지 못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아홍수 때 사람들이 죽음을 싫어했으나 자연의 능력이 밀려올 때 그들은 항거하지 못하고 그 자연의 능력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 홍수의 심판은 자연의 법칙이나 자연의 능력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또 소돔 고모라성의 유황불의 죽음은 신의 특수활동에 의한 역사에 항거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 수 있고, 홍해의 물에 애굽의 군대가 몰사한 것 역시 자연의 능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인간 개개인이나 단체나 전 인류는 다 자연의 힘 앞에 굴복을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유럽이나 중동지역에서 옛날에 인류들이 살다가 간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인간의 과학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 인간들이 수십 수백 년 기간동안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건설한 모든 것들이 자연의 힘이 한 번씩 심술을 부릴 때엔 인간은 그 자연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음을 볼 수 있다. 옛날 인간들이 쌓아 놓은 성터나 탑이나 교량 등은 자연의 힘이 한 번씩 쓸어 가면 여지없이 파괴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곤충은 곤충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전부 다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극히 작은 식물이라도 반석이나 대지를 갈라놓는 능력이 있고, 또 작은 곤충이라도 거대한 나무를 갉아먹어 죽게 하는 힘이 있고, 그런가 하면 그 곤충을 엄습해 잡아먹는 새가 있고, 또 그 조류를 잡아먹는 짐승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많은 능력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능력을 자랑하는 자가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자연계에서 비상한 힘을 가졌다 할지라도 자연의 힘 앞에서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만다. 그런고로 이 자연계에 살고 있는 인생은 자연의 능력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자연의 힘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해 있는 인생으로서 누구나 다 당하는 생로병사 역시 자연의 능력이니 인간은 이 자연의 능력에 의해 오는 노쇠를 막을 수 없고, 가는 시간을 잡을 수 없고, 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이것은 인간이 자연의 힘에 속박되어 있는 연고이다. 부활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 자연의 힘을 감히 벗어날 수 없다.
※ 인간은 만물의 최고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자연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인간에게 과학의 힘이나 그 어떤 능력이 있다 해도 노아홍수 때 자연의 능력에 의해 다 죽고 만 것이다. 아무리 자기 목숨을 안 뺏기려고 해도 항거할 수 없다. 또한 소돔 고모라성도 유황불에 땅이 꺼져 사해바다가 되었다. 폼페이는 화산이 터져 도시가 대파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교량이라도 자연의 힘에 의해 무너진다. 인간은 자연의 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끼가 바위를 자르고, 작은 벌레가 큰 나무를 죽이고, 그 위에 또 새가... 모두는 자연의 힘에 굴복을 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이 자연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가? 인간의 힘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한다.
부활의 능력은 자연의 법과 능력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부활을 하셨으므로 부활의 능력을 가지진 것이다.(능동적) 우리는 수동적이다. 자연의 능력을, 범위를, 속박을, 압력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부활의 능력이다.
1. 죽음을 벗어나는 능력.
이 부활의 능력은 인간이 사망권을 벗어나는 능력이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음이라는 것을 앞에 놓고 사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예정적으로 철학적으로 숙명적으로 출생했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죽음이 뒤따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출생만 있고 죽음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필연적으로 죽음에 굴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이다. 부활의 능력이란 이 사망권을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다.
※ 이미 죽은 자라도 부활의 능력만 입으면 그 죽음의 속박권에서 나올 수 있다. 또 살아서 믿으면 죽음이 와서 나를 끌고 가지를 못한다. 사망에게 포박이 되어 있어도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죽음이 나를 억압하지 못한다. 부활의 능력만 가지고 있으면 죽음은 순순히 나를 내어주고 억압치 못한다.
(1) 영이나 영의 기능을 죽음이 이기지 못한다.
내가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영육이 사망할 가능성이 있고, 멸망 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 아래 있던 나의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 중생을 하고 나면 사망이 와서 나의 영을 죽이지를 못한다.
나의 이성과 몸이 영과 결합이 되어 활동을 하다가 육체가 죽음을 당하면 영적 기능이 그 죽음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즉 영의 활동성은 필연코 이성과 몸을 통하여 나타나는 기능이요 활동이며, 또한 육과 결합체로 있는 존재이며, 중생된 영은 죽지 않는 존재이지만 사망에 의해 영적 활동성이 제재를 받게 되면 영적 기능이 활동적으로 죽은 상태가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부활의 권능을 입고 나면 영이나 영적 기능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죄에게 어떤 제재를 받지도 않는다.
※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우리의 영의 활동성은 독립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인데 영적 기능 작용이 이성과 몸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 영의 활동성이 이성에 접선이 되기 전에는 우리는 그 영의 활동성을 의식하지 못한다.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이 영적 활동의 기능이 죽을 수 있다.
육체는 사망의 제재를 받는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이 존재는 안 죽는다.
(2) 육체의 죽음이 미치지 못한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했을 때는 죽음이 와서 가자고 하면 어떤 방편으로 가자고 하던지 거역 없이 항거 없이 갈 수밖에 없는 약한 인간이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은 공통적으로 이 사망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연법에 자연능력에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부활의 능력만 입으면 감히 죽음이 접근하지를 못한다. 자연법 역시 접근이나 공격이나 제재를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능력을 입은 자는 그 육체라도 노쇠도 없고 죽음도 없다.
우리 인간의 육체가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자연법에게 굴복을 당하여 노쇠하게 되고 죽음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죽음이나 자연법이 육체까지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
※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생로병사이다. 또한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멸망이나 죽음의 제재를 받았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이 모든 것에서 해방이다. 노쇠나 죽음이 와서 나를 끌고 가지를 못한다.
(3) 소유나 영광에 있어서 어떤 방해나 제재를 받지 않는다.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입은 후에는 소유가 어떤 소유라 할지라도 쇠하던가 감소하던가 빼앗기던가 죽을 것이 없게 되니 이 부활의 능력은 죽음만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고 모든 면에 약탈도 노략도 당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빼앗길 가능성도 있고, 버려야 할 위험성도 있다. 존영도 마찬가지다. 즉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한 자기의 영광과 소유와 존영은 다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소유를 언제 어떻게 빼앗길지 모른다. 어떤 환경이 와서 빼앗아 가던지, 사건이 와서 빼앗아 가던지, 존재가 와서 빼앗아 가던지, 죽음이 와서 빼앗아 가던지 빼앗아 간다.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가진 소유도 안전된 소유가 아니고, 영광도 존귀도 심히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안심을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부활의 능력만 입으면 이 모든 소유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 완전한 소유요, 그 영광은 길이 길이 빛날 것이다. 그 영광은 누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이렇게 부활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우리의 소유라던가 영광이라던가 부귀 공명 등 나의 모든 것을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그런 상태에 있었다. 도둑이 와서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갖다주기도 한다. 무엇이 와서 빼앗아 갈지 아무도 모른다.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영원한 공명, 영원한 소유, 영원한 존영을 누리지를 못한다.
2. 물질계를 벗어나는 능력.
이 부활의 능력이라는 능력은 인간이 물질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다.
물질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때는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하면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계의 속박 아래 살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인간이 지음 받을 때 일반적인 피조물과는 달리 영육 결합체로 지음을 받았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상관없는 영이 나의 인격의 주체성이라 할지라도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불가불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 외에 다른 모든 물질계에 소속된 피조물들은 물질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계나 물질이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계에서 물질이치를 지키며 물질이치 아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물질이치로만 지음받은 것이 아니고 물질은 육체와 비 물질인 영과의 영육 결합체로 지음을 받았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이 영도 육체를 떠나 작용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영이 내 인격의 주체성이라 할지라도 육체는 물질이기 때문에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계에 속박되어 있는고로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면 우리 인간은 영육이 아울러 물질계를 벗어나게 된다. 부활은 물질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 달나라 별나라도 역시 물질계이다. 인간은 물질계에 속박되어 있는고로 물질이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물질계를 벗어날 수 있다.
(1) 사람의 육체는 물질계의 속박 하에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시되 흙으로 원료를 삼아 지으셨다. 흙이 원료가 된 육체는 물질계의 속박 하에 있고, 영은 중생 이전에는 물질인 육 속에 죽은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니 활동 면 기능 면에 죽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죽은 영은 육체가 물질계에 속박되어 있는 한 영도 여전히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된 영 역시도 새생명으로 살아났으나 그 육체와 결합체로 있고, 또 활동적으로 이성과 육체로 활동하기 때문에 영육이 분리되기 전에는 육체 때문에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죽기 전에는 영육이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죽은 후에도 인간의 육체는 여전히 물질계의 속박 하에 있게 되고, 중생된 영은 육신과 분리가 돼 물질계를 벗어나게 된다.
※ ①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죽은 영혼 은 육체 안에 있기 때문이고 물질계의 속박 하에 있기 때문이다.
② 중생된 영은 육체와 결합되었기 때문에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③ 죽은 후에도 육체는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물질이치를 벗어나 지 못하고 있다.
④ 중생한 자의 영이 물질을 떠나 있으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물질계를 지배하거나 다스리지 못한다.
(2) 물질계를 떠나 살 수 있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할 때는 영육이 아울러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계의 속박 하에 물질이치대로 살아야 하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우리의 육체까지도 물질계를 떠나서 살 수 있다. 물질계에 살면서 물질계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이 아닌 물질계를 발아래 밟고 물질을 다스리면서 지배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부활을 못한다.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물질계를 떠날 수 있는 능력자가 되고, 물질계를 떠나서도 살 수 있는 능력자가 된다.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입을 수 있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부활의 능력을 기독자에게 입혀주기 위한 부활인 것이다.
※ 우리 육체는 스스로 물질계를 떠날만한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다. 또 물질계를 떠나 살 권리가 없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물질계를 떠날 수도 있고 안 떠날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3) 물질이치를 지키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물질이치를 떠나서는 안 된다. 물질계를 떠날 수 없으니 물질계에서 살아야 되고, 물질계에서 살자니 물질이치를 지켜야 된다. 물질이치를 지킨다는 말은 물질이치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물질계에다 물질이치와 생명이치를 주었는데 우리 인간은 물질인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물질이치를 벗어나면 안 되고, 신령한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이치와 생명이치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물질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도덕이치를 어기면 영과 영적 기능이 죽게 되고, 물질이치를 어기면 물질인 육체가 죽게 된다. 인간이 물질계에 살면서 물질이치를 어겨 육체가 죽으면 영의 성장도 중단이요, 그 육체의 성화도 중단이다. 그런고로 이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한 물질계에서 영을 성장시키고, 또한 몸에다 구속을 입혀 성화를 시켜나가는 작업을 부절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물질계에 살아야 되고, 물질계에 살려면 물질이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니 물질이치를 지켜야 되고 물질이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물질이치의 지배는 정확하니 물질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물질이치의 지배를 바로 받을 수 없다.
※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하면 물질이치를 지켜야 된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은 후에는 우리의 육체도 물질이치를 벗어나서 살 수 있다. 물질이치인 자연법이 부활의 능력을 입은 자를 다스리지 못한다.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물질계의 어떤 이치도 다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치를 벗어난다는 말은 자연법을 벗어난다는 말이다. 자연법을 벗어난다는 말은 자연의 힘까지도 벗어난다는 말이다. 자연의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다.
이렇게 부활의 능력은 자연이치 자연법을 벗어나게 하고, 자연의 능력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약 독초를 먹을 수 있고 공중을 얼마든지 다닐 수 있다.
영 성장과 성화는 물질계에서 한다.
3. 악령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내 속에 악령이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죄성이 나의 속에 잠재해 육신의 부패성과 함께 결합이 되어 언제나 나를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이 악령은 절대로 유혹을 하지 못한다.
(1) 육체의 부패성이 다 제거된다.
우리 인간이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 인간 속에 타락성 부패성 죄악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 아닌 이질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면 이 모든 육체의 부패성은 완전히 제거되는고로 유혹을 받는 기관 성분이 없기 때문에 유혹을 받지 않는다.
(2)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유혹자가 접근치 못한다.
유혹자가 유혹을 할 때 물질을 가지고 유혹을 한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물질인 육체가 비 물질인 영체로 완전히 변화되는고로 물질의 것을 가지고 접근하지를 못한다.
(3) 거룩하기 때문에 사망이 접근하지 못한다.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아무리 거룩하다 할지라도 죄악의 찌꺼기, 부패성이 다소라도 있기 때문에 악령과 죄와 사망이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완전히 입은 후에는 성질적으로 깨끗한고로 악령은 그 거룩한 것에 접근치 못한다. 어두움이 빛에 접근치 못함과 같이 악령은 부활의 능력을 입은 자에게 접근치 못한다.
※ 죽음은 골고다까지 따라 왔으나 부활까지는 못 따라 간다. 악령도 마찬가지다.
四. 부활의 성격.
부활의 성격이란 어떤 것인가? 이미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교훈을 많이 들어왔다. 부활의 능력을 입은 자는 유혹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목석과 같이 무감각 무의식 무분별의 상태로 되어지는? 아니면 지각을 가지고 있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유혹을 받지 않을 수가 있느냐?
우리 인간이 부활의 성격을 감히 상상키 어렵다. 그러나 대충 말한다면 몇 가지로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으로 동질 동성으로 된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면 영육이 각 별 결합체가 아니고 단일체로 되어 버린다. 영육 단일체가 된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진 단일체이지만 하나님에 비하면 본질과 본성은 차이가 없으나 능력의 차이는 없지 않다.
(2) 신령계와 동질 동성으로 된다.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과 동질 동성이므로 하나님과 성질적으로 맞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지게 되고, 또 신령계와 동질 동성으로 되기 때문에 그 신령계가 주는 모든 낙을 실력껏 누리게 된다.
(3) 그 인격 전체가 신령적 인격으로 되어지기 때문에 신령계를 느낄 수 있는 자가 된다.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그 성격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 동질 동성이요, 신령계와 동질 동성이요, 또 그 인격이 신령적이기 때문에 신령계를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필요한 것이니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자로서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쌍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하나님과 상대함에 무한한 효력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제二편. 그리스도의 품위.(그리스도의 一位性)
정통교회의 그리스도의 품위관은 예수 그리스도는 양성 한 위라는 것을 변함없는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품위에 관한 정통교회의 신앙을 작성하여 선언하되 4대 부사를 사용하여
① 그는 혼잡이 없다.
② 그는 변함이 없다.
③ 그는 분할이 없다.
④ 그는 분리가 없다.
양성을 가지신 것으로 믿으니 성(性)들의 구별이 연합에 의해 제거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각 성은 특징이 보존되고, 아울러 한 위와 한 실존으로 결합되었으니 이위로 갈리우거나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제一절. 그리스도의 일위에 관한 정통적 진술.
교회의 정통견해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소유하는데 각 성은 본질에서 변치 않았고, 그 정상적인 속성들과 능력들이 박탈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분할되지 않는 단일 인격이시니 신성과 인성의 양성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고로 연합된 그는 정당히 말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아니라 신인(GOD Men)이시라고 본다.
※ 혼합된 제 3의 어떤 성의 일위라고 한다면 신성적 일위냐, 인성적 일위냐? 그는 신인양성 일위이다.
一. 성(性)과 위(位)와 의지(意志)의 정의.
이 교리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 성과 위라는 명사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성(性)이라는 명사는 어떤 물건의 물건 되게 하는 모든 근본적 품질들의 총화를 가르친다. 실체의 모든 근본적 품질들이다. 따라서 성이라는 물건은 여러 부분에 공통한다. 한편 위(位-인격)라는 명사는 이성 혹은 지각성의 부여를 받은데 따라 그 행동들은 책임 있는 주체가 되는 완전한 실체를 가르친다. 즉 위라는 것은 근본적 구성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것이 향하는 목표이다. 따라서 위라는 것은 성에 무엇을 부가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실존개체이다. 그런데 로고스(λόΥος)는 위로 되지 않는 독자적으로 존재치 않는 인격을 취한다.
※ 용어는 같은 용어이지만 뜻이 다를 수가 있다. 어떤 자는 비 물질 전체를 영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니 말이다.
용어의 개념이 일치하지 않으면 의사충돌이 된다. 통하지 않는다. 아디까지 새사람인지 쪼개라는 말이다.
성과 위와 의지를 다른 말로 하면
① 위란 비 물질적 실체적 존재이니 성과 혼돈이 아니다.
② 성이란 실체적 의미로 위의 한 부분이 아니다. 성이라는 속성들은 복 합이니 실체적 존재와 혼돈하지 말라.
③ 의지란 행동의 원형이니 실체적 존재와 혼돈될 것이 아니다.
二. 위와 성의 관계.
1. 신적 위의 양성의 연합.
위라는 말은 인격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인간적인 위라 하지 않고 신적 양위의 양성이시라고 하니 이는 영원부터 신성을 가지셨던 하나님께서 신적 위가 인성을 취하셔서 양성의 연합을 이룬 것이다.
이 말을 오해해서 신적 위가 인성을 취하신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양성이 혼합되어 제 3의 성, 즉 인성도 아니고 신성도 아닌 신성과 인성이 혼합된 일종의 새로운 신인 혼합성을 생성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 흔히 위와 성을 말하면서도 잘 모르는 때가 있다. 이위 이격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신적인가, 인적인가? 이렇게 되면 양성 양위가 된다.
성부는 그냥 일성 일위, 성령도 일성 일위, 성자는 양성 일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혼합성이 아니다. 신성 인성 양성 이위도 아니다. 어떤 제 3의 성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이 인성을 입었다고 해서, 또는 인성이 신성을 입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질이 변질 변화된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이 맞느냐?
① 사람이 중생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아주 진하게 입으면 인성 이 감퇴되어 신화 된다.
② 아무리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었다 할지라도 인성은 인성 그대로이니 신 성을 입어도 신화 되는 것이 아닌 인성이 신성을 향하여 발전을 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진화 진보 발전이다.
잘못하면 불교의 교리처럼 인간이 신이 된다고 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탄생 시에는 인성이었다가 마지막에는 인성은 없어지고 신성이 되느냐? 신성 인성에 변질 변화가 없이 그대로 보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을 해서 신성은 그대로이고 인성은 자라남. 자랄 수록 진보 발전 진화이다. 인성은 없어지고 신성화 된 것이 아니다. 신성 위가 주체성이 되어 인성이 그 신성에 순종한 것이지 인성이 신성을 입어 신화돼 인성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역시 성도도 같다.
2. 복합 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영과 육의 결합체인 일인격이시며 신성과 인성 양성 복합 일위성인데 신성이 주격이시다. 사람은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 한 인격을 구성함과 같이 신자의 인성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한 위로 구성됐다.
※ 복합 위라는 말은 양위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기 전에 완전한 신성으로서 인격을 유지했고, 인성을 입었어도 그 인격성에 보충이나 변동성은 없으나 신성으로 계실 때와 다른 점은 인성을 취하므로 복합 일위성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부와 계시다가 성육신 하므로 새로이 별개로 생긴 것이냐? 창세 전에 계셨다.
요한복음 1장: 불변성. 제 2위는 로고스. 모두는 일성 일위. 도성인신 함으로써 신성이 인성을 취했다. 양성이면서도 일위이다. 어느 한 성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신성도 있고 인성도 있다. 양성 일위 교체성이 아니다. 양성 일위 불변성이다. 예수님은 두 위로 나타남이 없고 언제든지 일위이다. ‘예수님의 신성이 곧 영혼이다’ 하면 안 된다.
3. 인성 자체와 비 인격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잠재해 버리고 나면 인성이 있을까, 없을까?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인격성이 나온 것인가?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의 인격성이 없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예수님이 껍데기가 없는 사람인가?
4. 인성은 독자적 실존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로고스를 입었어도 그의 인성은 독자적 실존을 가지지 아니했다. 이 말은 ‘인성은 독자적 실존이 아니다’ 라는 말과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로고스가 인성을 입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만고불변의 결합이다. 인성을 말할 때 인격성까지 무시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는 비 인성이다’ 하게 되면 예수님은 인성이 없는 비 인성의 존재요, 신성만 가지신 분이 되는고로 시험을 받을 필요가 없고, 먹고 싶고 자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분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도 가지고 계시고 신성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예정 예지 실행이 단선적 복선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보기에는 그의 인성이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에 흡수되어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고 신성에게 완전 결합된 것이다. 예수님의 동작은 신성과 인성의 교체적 동작이 아니고 신성의 주체성의 동작이었다.
5. 인성은 불완전성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성을 빼버리면 그는 완전한 인간이다. 이 분이 신성을 입어 인성이 신성에 완전 피동 결합되니 자체적으로 인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
6. 인성의 의식과 의지.
인성과 의지를 혼돈하지 말라. 다시 말해 인성이 없다고 할 때 인격성을 두고 말하는 것뿐이지 의지는 있는 것이다.
인성에 의지와 의식이 없는가? 의지와 의식은 위이냐, 성이냐? 인격이냐, 성이냐?
인격: 의식 의지 판단 등. 예수님은 인성도 있고 의지 의식도 있다. 이것은 인격이다. 이것이 성에 속한다면 위는 무엇을 말하느냐?
위: 하나님의 최고 결정성을 위라고 보면 된다.
의식 의지는 성이다. 여기서 결정을 하는 것은 위인 것이다. 인격 최고의 초점이 위이다. 위와 인격은 같은 것이 아니다. 혼돈하지 말라. 인성은 인격성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위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성에는 신성의 인격성이 있고, 인간의 인격성이 있다. 곧 신성의 의지 의식이 있고, 인성의 의지 의식이 있다. 양성을 가지고 있으나 신성과 인성 일위이시다. 그리고 그 결정은 위가 한다.
제二절. 그리스도의 일위의 증명과 유추.
一. 성경적 증명.
‘성경적 증명’ 하고 나올 때 성경의 권위성을 믿는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만 성경의 권위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위에 대한 논리를 인간이 할 수 있는데 까지는 논리하고 그 이상 할 수 없는 것은 무조건 믿는 것뿐이다. 우리의 논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 무엇이 어떻게 해서 비가 되는지를 아이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1. 단일 인격의 자칭.
성경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일인격으로 자칭을 했지 두 인격으로 자칭하기 않았기 때문에 양성 일위가 틀림이 없다.
그리스도의 일인격에 대해 말할 때 ‘만일 두 인격이시라면 언제 그 말을 했을 것인데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보니 일인격이다’ 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
과연 말 한 마디가 없기 때문에 일인격이라고 하는 논리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느냐? 예를 들어 어느 섬에 여러 가지 새가 있다고 말하면서 참새라는 말을 한 번도 안 했다고 할 때 그 섬에는 참새가 없다고 단정을 지을 수 있느냐? 그 섬에 참새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양성 이위라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양성 일위가 아니라면 중보의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인격에 대해 말을 안한 것을 보니 일인격이 틀림이 없다?
2. 양성 일위의 연합된 표시.
양성 일위를 전제로 하고 보면 모든 성경이 그렇게 보이지만 양성 이위로 보면 또 그렇게도 보이는 성구도 있기도 하다.
예지성의 출처는 예정에서이다. 실행성과 예정 면을 보면 예지성임이 틀림이 없다.
예: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이 말은 신성이 한 소리인가, 인성이 한 소리인가? 인성이 신성에게 동의하는 소리인가, 거부하는 소리인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한 이 말은 신성이 없이 인성이 아프다고 하는 건가?
‘술 먹지 말라’ 하는 성경구절을 내세운다면 ‘술 먹으라’ 하는 구절도 있으니 성경구절을 대며 먹지 말라고 하면 성경구절 가지고 마시게 된다. 반론자들 모두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주장한다. 악령의 사역도 성경구절을 가지고 한다.
3. 한 위(一位)가 어느 한 성품에 맞는 표현으로 제시되었다.
위(인격성)가 한 성으로부터 인출된 칭호로 지시되면서 다른 성은 속성들에 귀속을 받는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신적 칭호로 지시되면서 인적 속성들과 행동들에 귀속되었다. 다른 편으로는 그가 인적 칭호로 지시되는 동시에 신적 속성들과 행동들이 그 위에 술정 되었다.
※ 양성이 나왔는데 이 위가 한 성에만 속했느냐, 또는 한 성품에 속해 있으면서 위가 없느냐?
① 위가 한 성에만 속해 있어서 다른 위가 움직일 때 이 위는 움직이지 않 았느냐?
② 또는 신성이 주체가 되면 위가 신성에 가 있고 인성이 주체가 되면 인성 에게 가느냐?
③ 또는 위가 신성에만 있는데 인성이 작용을 하니 인성이 신성으로 가 가 지고 인성으로 나타났느냐? 아니면 인성은 묵살되고 신성으로 나타났느 냐?
예수님이 순수한 인성으로 말한 때가 있느냐? 인성으로 보인다고 해서 신성은 없느냐? 어떻게 보면 인성으로 보이고, 어떻게 보면 신성으로 보인 때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고 결합적이다.
예수님의 인성은 위와 대립적으로 산 것이 아니고 인성이 제재가 없이 신성에 맞게 사셨다.
二. 합리적 유추.
그리스도의 중보와 위의 양성의 결합은 사람의 이성으로 파악하기 불능한 신비이다.
1. 육체와 영혼.
이 연합은 사람 안의 육체와 영혼의 연합과 비교가 되지만 몇 가지 상사점이 있다.
① 사람 안에는 물질과 정신의 두 실체가 가장 밀접히 연합이 되어 있으나 오히려 혼합되지 아니했다. 중보 안의 두 성의 연합이 이와 유사하다.
② 인격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혼에 있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도 그렇다.
③ 영혼과 신체가 상호 감화이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도 그렇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움직임은 신성에 의해서 모든 것을 움직였다.
⑤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존영의 존재가 됨과 같이 예수님도 그 인격이 로고스를 입은고로 존영이라! 즉 그리스도는 신성을 입었기 때문에 존 귀하다. 고로 그리스도는 신성을 입었기 때문에 경배의 대상이다.
2. 가능성의 근거.
그리스도의 양성 일위의 근거의 기초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에는 성질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도 들어 있는 것인데 만일 사람이 딴 무엇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양성 일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성 일위이심의 근거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에 둔다고? 그러나 위는 일위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위인고로 두 존재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학적으로 보면 이 말이 맞으나 구원목적으로 보면 틀린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오인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내재성으로 보기 쉽다. 하나님이 내재성이냐, 유기적 결합이냐? 불에 달구어진 쇠를 예로 들 수 있지만 불완전하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이다.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내 속에 내재해 계시는 하나님은 독립적으로 인격적으로 주체성으로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거역할 수도 있다. 피동 순종을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살았다. 사람으로서 신의 만능으로 살아 갈 수도 있지만 인간으로 사셨다.
아래의 두 문제 중 어느 것이 맞느냐?
① 그리스도는 사람 보기에 사람처럼 살았지만 실은 하나님이시다. 다만 어려울 때는 하나님으로서 그 일을 처리했다.
②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므로 능력적으로 권능적으로 전혀 힘을 안 들이고 잘 살 수도 있지만 하나님으로 살지 않고 순전히 사람으로만 살았다.
신성으로 살지 않고 인성으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도 있고 안 느낄 수도 있고, 또 신성과 인성이 같이 느낄 수도 있고, 절대 유능으로도 살 수 있고 무능으로도 살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위이다.
제三절. 일위의 같은 성의 연합의 결과는?
신성은 불변적이지만 다만 활동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가변성적 결합이다.
인성이 신성과 결합을 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불변적인 연합을 하기 위해서라고?
신성의 위는 불변적이고 인성은 가변성적인고로 위가 하나라면 불변적 결합체요, 위라 둘이라면 가변성적 결합이 된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이 불변적이라기보다 신적으로 보면 만고불변이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변적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는 양성 일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一. 이중전달.
그리스도께는 인성의 특수성이 있고 신성의 특수성이 있는데 그 두 특수성이 전달된다.
1. 위(位)로써 인격의 전달.
신성이 인성을 입는 일이 주목적이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수난 체험을 느끼기 위해 신성이 인성을 입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은 신성이 인성을 입은 것이다. 고로 인성인 동시에 신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고통의 수난이 어떠한지를 경험치 못해서 모를 것이라고?
위는 사람인 동시에 신성이다. 신성인 동시에 사람이다. 그래서 고통을 느낀다. 고통을 받기는 인성이 받지만 신성도 같이 느낀다.
잘못 이해하게 되면 그리스도를 이성 이위성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이성 이위성으로 느끼게 된다.
신성이 인성을 입지 않으면 신성이 인성을 느끼지 못할까? 예수님께서 이것을 경험키 위해 신성이 인성을 입은 것인가? 신체, 곧 인성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은 모든 것을 경험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은 것은 수난 고통 죽음 등을 경험키 위해서라고? 이것은 아닌 것이다. 안 입고도 다 아신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은 것은 인성을 경험키 위해서가 아니고 다른 목적으로 인성을 입은 것인데 그 인성을 입음으로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성을 안 입으면 고난을 모른다는 말은 아니다. 인성의 고난이 신성에 전달되었다. 또한 신성의 활동성이 인성을 통해 나타나기도 했다.
오병이어는 신성으로 했느냐, 인성으로 했느냐? 인성으로 신성에 붙잡혀서 했다. 바람을 꾸짖음도 인성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은 것은 신성의 활동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로고스로 육체를 입은 것이다.
① 신성의 동작은 인성을 통해 나타난다.
② 인성을 입은 목적은 신성의 행동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인성을 안 입 으면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성이 없이도 할 수 있다.
③ 인성을 입은 목적이 신성의 행동을 나타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④ 신성이 인성의 동작으로 나타날 그 때는 일위이기 때문에 곧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언제부터 하나님이신가? 착상 때, 탄생 시에, 12살 때, 30살 때, 세례를 받을 때? 착상될 그 때는 하나님의 행세를 안 하신 것인가, 아니면 못하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때부터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신성이 일위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성을 통해 수감했고, 신성이 인성을 통해서 나타난고로 하나님이시다.
육체의 하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은 하나님이었다. 앞으로 만날 우리 하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 때는 안 만져질 하나님이고, 지금은 안 보이는 하나님이지만 다른 분이 아니다. 이 하나님은 친구도 스승도 애인도 부모도 되어 주신다. 이 하나님은 지금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보이지 않으나 지금 곁에 계신다. 히브리인들은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을 저 푸른 창공에 좌정하신 하나님으로 본다.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고 한 일이 너무나도 많다. 인간의 수난도 인성을 입고 당했고, 신성도 인성을 입고 했고, 또 하나님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33년간 인성을 입고 실질적으로 보여주셨다.
2. 성(性)과 혹 공작의 전달.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이 신성의 주체성이 없이 인성만 한 것인가? 구속은 인성이 했지만 그 사역을 할 때 신성도 있었느냐? 구속사역을 할 때 신성이 인성을 거들어 주지는 않았지만 그 때 위적으로는 분할되었느냐, 양성 일위로 있었느냐? 양성 일위로 있었다. 인성이 신성이 보조 없이 하기는 했으나 위까지 분리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 못을 박으면 아플 수도 있고 안 아플 수도 있다. 인간들은 아픔이 올 때 안 아픈 방편을 쓰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픈 방편을 택하신 것은 사랑의 발작에서였다. ‘나는 너의 방패요 반석이다’ 라는 말속에 이것이 다 들어 있다. 즉 ‘네가 맞을 매를 내가 대신 맞아주마’ 하시는 것이다.
인성의 수난을 신성이 들어서 커버할 수 있다. 그러나 신성은 커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구경만 하고 있었느냐? 위가 하나이기 때문에 인성의 고난에 신성도 참여했다. 유능을 버리고 스스로 무능했고, 영화를 버리고 스스로 비하했다.
십자가는 인성이 졌지만 그 사역을 하기는 인성만 한 것이 아니고, 신성이 거들어준 것도 아니고 위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신성이 참여한 것이다.
문답: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양성의 협력에 의해 수행된 것인가? 만일 신성의 협력에 의해 십자가를 쉽게 졌다고 하게 되면 신성부인은 안 된다고 해도 자연히 인성부인이 되고 만다.
물위로 걸어간 것은 신성의 행사가 인성을 통해서 나타난 것. 순종하므로!
문답: 각 성이 특별한 정력을 가지고 역사한 것인가? 바다 위로 가는 것은 신성이 독특하게 인성으로 나온 것. 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양성의 활동이 일위성으로 역사 한다. 십자가를 지심도 양성의 협력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배의 대상이 되심은 물질인 고깃덩어리가 귀중하므로 거기에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신성과 인성 모두 때문이다. 신령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며 물질인 예수가 없는데서 예배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예배가 아니다. 인성을 강조하게 되면 철학인들도 숭배의 대상이 된다. 어디까지나 신성과 인성 양성이다.
홈페이지 번 호 3 조 회 297
제 목 체계신앙신학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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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교재는 고 김석준목사님께서 대동신학교에서 강의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현재 김경형목사님께서 궁극교회와 안양 포도원제일교회, 대전의 평안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이 교재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본 교재는 기독교인들 대상으로 무작위 배포하는 것이 아닌 김경형목사님께서 강의하시는 집회에 참석하시는 분들에게 한정적으로 배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는 전체를 올리지는 않습니다.
운영자에게 개인적으로 본 교재를 신청하셔도 보내드리지 않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한글 2002로 작성했습니다.
제일장. 인죄론.(인간의 기원)
인간이라고 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동작의 중심이 되는 존재인고로 신론 다음에 인죄론이다. 하나님께서 독존자로 계시면서 구원을 선택했고, 당신이 선택하신 구원의 제 1목적물이 인간이기 때문에 신론 다음에 순서적으로 인죄론을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모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순서로 보고 있다.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에 대해 인간창조의 동기와 원인과 목적을 알아야 하고, 보다 앞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제一절. 인간창조의 동기.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인죄론에서 인간을 논하매 인간창조의 성격을 먼저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혹 신학자들 중에는 인간창조의 기원에 있어서 인간의 교리나 성경적 도덕 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보다 인간창조를 말할 때에 그 동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인간은 자존자가 아닐뿐더러 또 자존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런고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는 어떤 동기가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면 인간창조의 동기를 필연적으로 물을 것이고, 인간창조의 동기를 묻는다면 인간을 창조하신 그 창조주를 먼저 알아야 한다.
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론에서 자세히 설명이 되었으나 우리가 인간을 창조하게 된 동기를 여기서 알아보기로 하자.
이 하나님은 물론 자존자시요 독존자시요 영원자시요 생존자시요 인격자시요 무한자시요 절대자이시니 이 분이 인간을 창조하게 된 동기는 그의 인격성 때문이다.
그 인격자가 독존하여 계시던 그곳이 무한한 곳이요, 영원히 새로운 곳이요, 신령계로서 완전계이다. 이런 신령계에서 독존자로 이것을 누리고 계셨는데 이 신령계를 홀로 누리기에 족하시지만 이 신령계를 당신 외에 타 존재가 함께 누리도록 하고 싶어서 창조하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을 창조하게 된 동기는 천국이라 하겠다. 이 천국이 없었던들 이 인간을 창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 동기에 대해서는,
(1) 하나님.
① 속성.
② 천국.
③ 천국의 성질.
(2) 인간을 창조하게 된 원인.
① 인격성.
② 실력성장.
(3) 창조의 목적.
① 후사를 삼으려고.
② 영원히 그 가운데 행하며 누리게 하려고.
③ 영원히 영광과 사랑의 대상을 삼으려고.
● 구원역사는 영원 전서부터 시작됨.(딛1:2)
신성 - 인간성 말고 순수한 인격.
인성 - 신성 말고 순수한 인격.
성부 하나님은 인성은 없다. 그러나 인격은 있다.
성자 하나님은 인성도 신성도 있는 인격자이시다.
1. 신령계가 동기가 됨.
인간을 창조하시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인격성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 신령계가 인류창조의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그 신령계는 하나님 홀로 독존하고 계시던 곳이요, 또 완전자로 무한자로 계시던 곳인데 그 신령계 자체가 이질성이 없는 곳이니 거기는 마찰도 충돌도 대립도 없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신령성 완전성 무한성을 가진 존재로서는 그 존영 면이나 쾌락 면이나 향락 면이 극치적이다. 또한 그곳은 무한한 곳이다. 범위적으로 무한이요, 종류적으로 무한이요, 본질과 본성적으로 무한한 곳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다른 존재가 그 세계에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 자체의 쾌락성이나 향락성이나 존영성이 축소나 감퇴됨이 없다. 무한한 곳인고로 이곳은 인격자로서 누리기에 극치의 좋은 세계이다. 이 신령계를 하나님 당신 홀로 독존하시고 독권하시고 독단적으로 누리시기에 신 자체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마땅하다. 일면 당신 홀로 누리시기에는 아까울 정도이다. 그래서 이 신령계가 인류를 창조하는 일에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 하나님이 무인격적 목석이나 금수라면 창조고 동기고 간에 없다. 인격자인고로 창조했다.
천사들을 언제 지었다는 그것이 성경에 없다. ‘그것을 언제 지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관계가 없다. 우리는 계시된 것만 연구할 따름이다.
독존자로 계시던 그 곳이 어떤 곳이었겠느냐? 공간의 세계일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던 명칭은 무엇일까? 우리가 쓰는 평범한 용어로 신령계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끼리 통하는 의사용어로 신령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왜 그 곳을 신령계라고 하느냐? 물질계와 구별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신령계와 정신계를 혼동하지 말라. 일반학자들은 혼동을 한다. 사색, 추리 모두 정신계이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영과 이성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정신계는 사색 안의 이상의 세계요, 신령계는 사색 바깥의 실존계이다. 따라서 신령계와 정신계를 구분할 것이다.
인간 한 존재가 생각하는 것은 정신계이고,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없어진다. 그러나 신령계는 별존계이다. 인간이 없어도 신령계는 실존한다. 이 신령계는 무한하다. 시간적으로 영원, 종별에 무한 완전계이다. 누리기에 무한, 기쁨에 무한, 향락이 무한이다. 몇 백 몇 천 수억이 와서 살아도 하나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하나님의 그 쾌락이 감퇴나 감소되지 않는다. 우리가 장차 그 곳에 존재하고 그곳을 누리고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신령계라고 붙인 것이다.
대학생이 좋다고 하는 것과, 어린아이들이 좋다고 하는 것과는 양과 질이 다를 수 있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천국은 어떤 사람이 보아도 다 ‘참 좋다’고 한다.
양적 질적 본질적인 면에서도, 시감성에서 청감성에서 그 누가와도 좋다고 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당신이 와도 ‘참 좋다’ 할 수 있는 곳이다. ‘좋다’의 극치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것이다.
이곳을 이름을 붙여
통치성을 말할 때 神國.
존재성을 말할 때 靈國.
성질적으로 말할 때 樂園.
관계성적으로 말할 때 天堂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그 낙원은 통치성이 아닌 성질적인 면에서 말한 것이다. 십자가의 형벌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하는고로 죽음의 선을 넘어가면 이와 반대로 영화롭고 좋다고 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지 천국과 낙원을 분리시켜 말한 것은 아니다. 관계성으로 말할 때는 천당이라고 한다. 엡2:19의 권속이란 관계성으로 말한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누리시기에 과분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혼자 누리시기에 아깝다는 이것이 인간을 창조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제二절. 인간창조의 원인.
하나님은 인격자이신고로 그 인격성에서 여러 가지 고안 등이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인격성이라는 말은 속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 속성이 곧 신의 인격성인데 그 속성에는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이 있다.
이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으로 그 신령계를 독존적으로 누리고 계실 때에 부족함이나 쓸쓸함이나 고독함이나 불쾌감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신은 절대자요 완전자이신고로 그런 불행적인 성분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게 된 원인이 하나님 당신이 불행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또 신은 절대자시요 완전자이신고로 선성과 애성이 충만하다. 이 선성과 애성은 상대성을 가지는고로 이 애성은 필연적으로 선성적인 상대를 찾기 마련이다. 그런고로 당신의 인격성의 선성과 애성이 인간을 창조한 원인이 된 것이다.
※ 인류창조의 동기와 원인을 착각하지 말 것이다. 동기는 밑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찾고,(존재와 사건) 원인은 내심에서 찾는다.
신 자체적 성질인 사랑의 발작에서, 인격적 속성에서 인간을 창조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궁극적 구원을 어디서 찾느냐?
一. 신의 인격성.
신은 비 물질적 존재이며 무형적인 존재요 무형체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비 물질적이고 무형체적이긴 하지만 인격성을 소유했다.
혹 ‘비 물질적이며 비 물질성이며 무형체적인 존재가 어떻게 인격성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그 지식은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이지 하나님 자체는 그 지식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비 물질적 무형체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격성을 소유하신 분이다. 그 인격성은 절대 정확 완전하신 인격성이다. 그의 지혜지식성은 완전이다. 그의 도덕성(선 사랑 거룩 진실)도 완전하시다. 그의 능력성도 완전하시다. 이처럼 그는 완전하신 인격성인고로 그 인격성에서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지셨던 것이다. 인격자가 아니고는 이런 느낌이 있을 수가 없다.
※ 인격성이 사람을 창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비 인격자라면 이런 생각이 안 났을 것이다.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짓자’ 인간은 대 선택의 목적물이다.
1. 신의 애성이 원인이다.
신의 애성은 신의 인격성의 일부분이다. 애성에는 필연적으로 상대성을 갖게 된다. 상대성이 없을 때에는 그 애성 자체의 효력성을 발휘치 못한다. 애성의 효력성을 내기 위해서는 상대자가 있어야 한다.
이 애성은 신의 애성으로 이 신의 애성은 수동적 동화적인 애성이 아닌 자체적 발생적인 애성이니 만큼 애성에서 필연적으로 상대성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이 신은 신 자신의 애성의 상대성을 위해 당신의 형상(속성, 인격성)과 같은 존재를 짓자고 한 것이다.
인간의 애성은 동화적 수동적 애성이다. 동화적 애성이라는 말은 상대가 먼저 존재하고, 그 상대자가 어떤 작용을 했을 때 인간 속에서 애성이 발작되는 것이다. 또 수동성이란 인간 자체에게는 그 애성(아가페)이 본래적으로는 없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그 애성을 받아 자체화 해서 상대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 애성을 수동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애성은 인간의 그 애성처럼 동화적이거나 수동적이 아니고 자체적 발생적인고로 이 신의 애성이 상대성을 찾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창조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2. 신의 선성이 원인이다.
선이란 ① 신령계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사용하고 누리는 것을 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② 나 자신이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것(영원적 불변적 유익)을 선이라고 한다. 신 자체적으로 누리심, 활동하심, 다스리심 이것이 신 자체적 유익이니 이것이 자체적 결과적 영원적 궁극적 선이요, 또 신령계를 상대에게 누리게 해 주는 것도 선이다. 또한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어질 수 있는 사건도 선이다.
이것이 선의 개념인데 우리 인간들이 선이라 할 때는 이런 영원과는 상관없이, 신령계와는 상관없이 현재적으로 육적으로 임시적으로 상대에게 어떤 유익이 되게 한 것을 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의 원리는 그것이 아니다. 인간이 말하는 선은 현재적으로는 선이라고 하나 그 인간의 행위가, 그 동작이 내일이나 미래에는 선이 아닌 악일 수도 있다.
※ 성경이 말하는 선은 영적으로 자타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영원히 유익이 된다는 것은 신령계를 통치 지배 사용 활용을 한다는 말이다. 또 상대적 선이란 그 상대를 영원히 행복 되게 유익하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
신의 선성이란 당신 자신이 천국을 지배하고 사용하는 것을 말하며, 타 존재에게도 그렇게 하게 해 주는 것이 신의 선성이다.
이 선성이 인류창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신에게 선성이 없었더라면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의사는 없었을 것이다.
선(善): 동사인 경우 - 상대에게서 찾는다.
동명사인 경우 - 자기가 자기에게도 선이 사용된다. 예: 자살행위 에서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 창1: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선하더라’ - 물질에 대한 의미가 아니라 인격자의 어떤 행위를 한 성분에서 찾아야 한다. 상대에게 건너가는 발생적인 선이다.
성경은 단어학의 구속을 받을 수 없다. 단어가 말하는 그 뜻만 가지고 있는 성경이 아니다. ‘왜 여기에서 이 단어를 썼느냐?’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입법자로서 강자로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그 인간을 놀리는 것에 취미와 재미를 삼는, 마치 돼지나 닭을 기르는 사람과 같은 의미로써 하나님을 알면 안 된다.
대개는 십일조 안 내고 주일 안 지키고 하면 때리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안 하면 벌받고 고통을 당하니 억지가 아닌 단 마음으로 하라고? 인간은 고생이 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 등 모든 관계성은 신적인 관계성이 있어야 한다. 창조하신 원인이 하나님의 선성에서 되었다.
교회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업을 놓고 교인을 농락해도 되느냐? 영원한 행복과 존영을 위해서 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선성이다. 이렇게 살다가 보면 어떤 인간 앞에서는 미안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미안한 것이 없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선성을 잊어버리지 말 것. 영적 결과를 내다보고 말할 것.
제三절. 인간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필연적으로 어떤 목적이 계셨다. 하나님은 인격자시요 완전자시요 세밀하신 분이시니 목적이 없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분명히 어떤 목적 하에서 하신 것이 틀림이 없다. 하나님이 목적없이 일을 했다면 그 인격은 무언가가 불완전이다. 완전한 인격성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 뚜렷한 목적 하에서 인류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인가?
※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을 모르면 구원론은 허술하게 된다. 인간의 타락 후부터 구원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보게 되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했다’ 라는 말이 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타락 후에 구원사역을 시작하느라고 서두를 것 없이 아예 타락하지 않도록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아예 타락치 않을 자로 짓던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좀 모자라는 인격자가 된다.
왜 타락할 수 있는 인간으로 지었느냐? 구원계획은 타락 이전 영원 전부터이다.
무슨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했느냐? 일반적으로는 하나님 당신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길이 길이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一. 후사(子)를 삼겠다는 목적이다.(엡1:5, 3:6)
하나님께서는 신령계에서 영원히 독존자로 계실 수도 있고, 그렇게 계신다고 해서 부족이나 불행이나 무슨 고독함이나 쓸쓸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격성과 애성과 선성에서 인간이라는 상대적인 존재를 지어서 후사로 삼을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여기서 ‘후사’ 라는 말은 당신이 죽고 그 후에 대를 이어서 어떤 일을 맡긴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당신이 현재적으로 하시고 있는 일,(통치 지배 활용 사용 누림) 하고 계시는 것을 타에게도 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것을 활용적 사용적 후사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이 후사를 삼기 위함이요, ‘아들’ 이라고 한 것은 당신의 그 주권과 소유권과 활용권을 맡기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게 된 목적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성경에 보면 인간을 선한 일을 위해서 지었는데, 그 선한 일은 ‘예비한 것을 영원히 행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했다.(엡2:10)
인류창조의 원인 목적 동기가 없으면 믿음은 흔들린다.
교회는 에덴동산에서부터이다.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어떤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다. 선악과 따먹는 것에서부터!
二.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존자로 독존자로 완전자로 인격자로 존재했고, 당신이 영원히 존재하실 그곳 역시 무한하고 완전한 곳이다. 무한이라는 말은 시간적 공간적 종별적 무한이요, 완전이라는 말은 질적인 면에서 성적(聖的)인 면을 말한다. 이곳을 인간들은 신령계라, 혹 완전계라, 혹 무한계라 한다.
이곳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말이나 글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이곳은 이 물질계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곳이요, 신령적인 것만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다. 물질적인 존재는 그 곳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다.
이곳은 본질은 진리요 본성은 사랑이요 본능은 생명인 곳이요, 이곳은 단일성적인 곳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이질적인 것은 용납이 되지를 않는다.(존재적 단일이 아닌 성분적 단일을 말함) 또한 활용 면, 통치 면, 치리 면, 사용 면 등 어떤 면에서도 외부적 제재를 받지를 않지만 다만 자기 실력의 제재를 받게 된다.
이런 곳을 당신이 독존적으로 누리지 아니하시고 타 존재(택자)에게 영원한 유업으로 주셔서 이 가운데서 당신(神)과 똑같이 행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택자인과 불택자인을 구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절대자이신 신에게는 택자인과 불택자인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다. 인간창조의 목적이란 택자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 말에 대해 이의를 단다면 이의를 다는 그 사람에게 해 줄 말은 같은 인간이지만 창조주의 지으신 목적이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즉 제 1 목적물인 인간과, 제 2 목적물인 인간으로 나누게 된다는 말이다.
제 1 목적물은 하나님의 택자를 말하고, 제 2 목적물은 불택자를 말하니 성경은 이 불택자를 가리켜서 ‘본래 잡혀죽기 위해서 난 이성 없는 짐승이라’(벧후2:12)고 했고, 또 ‘저희가 말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 라고 했고, 또 다른 성경에는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쓰이는데 사용되게 함)’(잠16:4) 라고 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여러 곳에 택자와 불택자를 분명하게 구별했으니 택자는 하나님의 제 1 목적물이요 불택자는 제 2 목적물인데 여기에서 말한 목적물이란 제 1 목적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딛1:16, 2:7, 14, 3:8, 미6:8)
에베소서 2장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 만드신 바니 하나님이 전에 예비해 놓은 곳에 행하기 위해서 지었다’
※ ‘하나님이 전에 예비해 놓은 곳에 행하게 하기 위해서 지었다’ - 그렇다면 인간을 만들기 전에는 어떤 하나님이시냐? 쓸쓸하고 고독한 하나님이시냐? 완전하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쓸쓸함과 고독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당신 자신을 위해 지으신 것은 아니다. 당신이 사용하려고 지으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으니 지옥에 보내야겠지만 차마 다 지옥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 일부만 보내자’ 이렇게 생각한 것인가? 거기에서 택자, 불택자가 나온 것인가?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는 그곳에 두기 위해서이다.
三.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를 삼기 위해서.
이 사실은 성경 66권 전체가 가르치는 교훈이기 때문에 어떤 성구 하나로 뒷받침할 수가 없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똑같이 증명하고 있다. 특히 구약의 아가서나 호세아서 등은 너무나 실질적으로 말씀해 놓은 계시이다. 아가서 같은 것은 부부적 애성적 사랑의 대상자로 말하고 있다. 또한 호세아서도 일반적 애정적 사랑은 고멜과 같이 불순행위가 섞였을 때에는 미움으로, 독살로 바꾸어지지만 이 성경의 애정성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성서 초두에 나타난 책들(오경)은 부모와 자식간의 그 어떤 애정성(스톨게)을 말하고 있고, 또 역사서라고 하는 성경에는 국민적 혹은 민족적(필레오, 상대적)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혹 성서학자들 가운데는 호세아서는 신약적 성격을 지녔다고 하나 실은 66권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대상자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각양적인 사랑(희랍어로 스톨게, 필레오, 에로스)을 아가서, 호세아서는 애로스적 사랑을 표시했고, 오경은 스톨게적 사랑을 표시했고, 다른 여러 역사서들은 필레오적 사랑을 표시했고, 신약성서는 아가페적 사랑을 표시했다고 하나 그러나 실은 66권 전체가 다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말이다.
아가페(ἄγαπη)라는 이 단어는 사전학적 원어학적으로는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나 계시적 면에서는 그보다 더 차원 높게 무조건적이며 생명적이며 불변적이며 다양적인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이 말도 학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 낱말이 무엇을 계시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지으신 목적 중 하나가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고자 함이었다고 하는 것을 한 두 구절만이 아닌 성경 전체의 흐름이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아가페로 물었지만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했다.
아가페는 단어학 사전학 원어학적으로는 무조건적 사랑을 말하고 있으나 그 뜻만이 아닌 생명적 무조건적 불변적 다양적인 사랑으로 일방적인 한 면의 사랑이 아니고 복합적인 사랑이다.
일반적인 사랑인 육신의 아버지적인 사랑(스톨게)에서 에로스적인 사랑을 못 느낀다. 육신의 우정적인 사랑에서도 느낄 수 없다. 사랑의 성분이 조금씩 다르다. 하나님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제四절. 인간창조의 성경적 보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피조물이면서도 특별히 인간을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피조물로 지으셨으나 인간을 중심물로, 목적물로 지으셨음이 틀림이 없다.
1. 같은 피조물인데도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성서가 인간창조에 대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역사적이요 역사성이지만 하나님의 보도의 목적은 계시적 교훈목적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성경에서 인간창조의 보도를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만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일차적으로는 역사성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역사성이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해야 한다.
※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지금 신학계를 보면 학적 연구와 신학적 신앙의 연구와 다른 점이 있다.
신학: 하나님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조직신학: 체계신학이라 불리어지기도 한다.
체계적 신앙신학: 신앙을 위한 신학이다.
오늘날 신앙과 신학을 별개로 취급하기 때문에 교회는 엉망이다.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돈만 많이 나오면 은혜라고 한다. 신앙은 신학의 토대 위에 올라서야 신앙이다. 체계적 신앙을 신학 위에다 세워야 하는 것이다. 부흥강사는 신학과 별개인 영파로 부흥회 하는 자 많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성경에 보도된 사실을 역사적인 사실로만 받아들여 왔다. 과연 그것을 알릴 목적이냐, 다른 것이 또 있느냐? 내용은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으나 계시목적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2. 이중보도.
성경에 인간창조에 대해 기록된 것은 이중적으로 보도되어 있다.
ꊱ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같이 지었다고 보도하고,
ꊲ 창세기 2장 7절에 인간을 흙으로 지었다고 보도하고.
● 이 이중보도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주장은(창 1장과 2장의 인간창조)
(1) 전후 기록의 상이점에 대하여.
상이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중으로 창조했다는 말인지, 창세기 1장에 창조된 인간과 2장에 창조된 인간이 한 인간이 아니고 다른 존재인지’ 하는 면에서 주장이 각기 다르다.
ꊱ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는 다른 존재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만능의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편으로 창조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ꊲ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는 다른 목적, 다른 방편, 다른 존재로 창조 했다.
ꊳ 1장의 창조는 인간초기의 창조요, 2장의 창조는 인간창조의 완성이 다.
즉 1장의 창조는 인간창조의 계획과 설계라면, 2장의 창조는 그 계획한 설계대로 실물을 창조했다는 주장이다.
3. 후자는 전자를 보충하고 있다는 주장.
다시 말하면 앞의 (1)에서는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의 상이성을 주장하는데 반해서 여기서는 2장의 창조는 1장의 창조의 보도를 더욱 상세하게 보충적으로 설명한다는 말이니 곧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했다는 그 방편을 상세하게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2장에 가서 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이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보도한 바대로 하나님의 창조성이 상이한 것으로 주장을 하고, 보충을 한다고 하는 주장은 1장과 2장의 이중보도가 상이점이 있으나 창조성은 단회적이요, 그 단회적인 것을 1장에서는 세밀하게 방편까지 논하지 못한 것을 2장에서 상세히 그 방편을 보도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학문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신앙을 위한 학문이 필요하지 신앙을 위하지 않는다면 절대 필요가 없다. 신앙적 입장에서 학문을 연구해야지 신앙을 떠난 학문은 연구하지 말라!
● 이중보도성을 막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달라진다.
① 1장은 창조의 능력이 다양하기 때문에? 2장에는 흙을 주물러서?
② 1장의 미완성 창조를 2장에서 완성?
③ 1장은 계획설계, 2장은 완성보충?
보수주의는 창조적인 사역은 하나인데(① ② ③은 아니지만) 2장은 상세하게 기록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무엇 때문에 이중으로 기록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중의 보도사실을 기록한 것은 계시 면으로 볼 것이다.
‘두 아담 창조냐, 한 아담 창조냐’가 문제가 아니고 무엇 때문에 이중보도를 했는가? 무엇을 계시하고, 무엇을 교훈하고,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2장 19절에 인간창조만 이중보도를 하지 않고 흙으로 각종 새를 지으셨다고 했다.
㉮ 이중보도의 상이점은?
이중보도를 한 것은 인간창조의 창조사를 가르칠 목적이 아니고 계시적 교훈이 목적이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인간은 제 1 창조가 있고, 제 2 창조가 있다. 제 1 창조는 진동되지 않는 인간창조, 제 2 창조는 진동될 인간창조.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는 한 인간이지만 이 인간은 이중적(영육) 존재라는 것을 설명키 위해 이렇게 이중보도를 하신 것이다. 1장의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비 물질적인 무형체적인 인간창조를 말하고, 2장의 창조는 물질적인 형체적인 인간창조를 설명한다. 인간창조의 순서는 동시이던 선후의 순서가 있던 상관이 없다.
㉯ 이중적 보도의 이유.
ꊱ 진동될 인간이 있고, 진동되지 않을 인간이 있다.
시간적 창조로 보면 1장은 시간이 없고, 2장에는 시간을 요하는 느낌이다. 이것도 계시가 있지나 않을까?
ꊲ 인간은 이중요소로 됐다고 알려줌.
단일요소는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
ꊳ 1장의 창조는 인격성 무형체 비 물질적 창조이고, 2장은 물질적 형체적 인 인간창조를 말한다.
ꊴ 기록순서는 전후로 됐지만 상관없다.
공관복음은 가견적 보이는 면으로 기록을 했고, 요한복음은 무형행 면을 기록했다. 요한복음의 창조가 먼저냐, 창세기의 창조가 먼저냐? 요한복음은 창조주를 중심해서 말을 하고, 창세기는 물질창조 시로부터 말을 한다.
一. 신의 도모.(창2:4~)
신의 창조의 순서로 보면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의(만물) 피조물들을 창조하실 때는 신의 특별하신 도모가 없다. 그러나 인간창조에 있어서는 신의 특별하신 도모가 있다.
피조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똑같은 피조물임이 틀림이 없지만 이렇게 창조하신 것은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다. 인간을 특별히 도모하신 것은 대소의 관계 때문이 아니다. 대소의 관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인간보다 더 큰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의 양상, 질 이것을 다른 피조물보다 특별히 도모하신 이유는?
※ 하나님의 도모 -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① 다른 피조물보다 크기 때문에 그런가?
② ‘이것(인간)은 좀 다르게 짓자’ 하고 의논을 했다는 말인가?
왜 하나님이 이렇게 지었는가? 왜 특별한 도모가 있었는가? 인간은 특별하기 때문인가? 하나님은 이런 도모를 안 해도 능히 지을 수 있는데!
1차적인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인고로 인간에게 이 사실을 계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인공위성보다 더 세밀하다.
1.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시는 면에 혹 천사창조에 대해서도 문서계시로 말하지 않고, 마귀(자존자가 아님)의 시존성에 대해서도 문서계시에는 말하지 않지만 우리 인간에게 계시상 필요한 것은 그 시존성에 대해서 계시하고 계신다.
성경에 계시된 대로 볼 때에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계획이나 도모에 대해서 설명함이 없지만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짓자’ 하시고 사전에 도모를 하셨는데, 그렇게 도모를 하신 것은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수호하고 사용케 하기 위해 그렇게 도모하신 것일까?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 후에 기록된 기사를 보면 모든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심이 분명히 그 목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 천사창조의 도모가 계시된 데가 없다. 어떻게 지었다는 것이 없다고 해서 자존자로 보지 않는다. 유다서를 근거로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되었다고?
하나님이 마귀를 지었다고 하면 하나님의 책임성에서 성경이 달라진다. 마귀가 우리 구원에 절대 필요없는 존재라면 당장이라도 없애버리고 무(無)로 돌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마귀의 시존성에 대해서는 기록치 않고 존재성과 활동성만을 기록한 것은 성경은 계시성이기 때문이다.
도모, 의논, 계획.
‘모든 만물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인간은 이런 자인고로 그렇게 지었다.
2. 신께서 대화의 상대자를 삼기 위해서 도모했다?
하나님은 본래 위적으로는 삼위일체로 계시나 본체는 독존성이기 때문에 독존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대화의 상대자가 없기 때문에 대화의 상대자로 삼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인간은 영원히 신의 대화의 상대가 되어 드려야 한다. 신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특별한 도모를 하신 목적이 대화의 상대를 삼기 위해서 지으셨기 때문이다.
※ 독존하고 계시니까 심심해서 인간을 지었나?
이렇게 되면
① 하나님의 완전성이 파괴된다.
② 하나님의 선성에 맞지 않는다. 예: 병원에서 환자의 곁에 대화자로 있 듯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3. 예배와 제사를 받기 위해서 특별 도모를 하신 것이다?
수많은 피조물들이 있으나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제사와 예배를 요구하심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특별히 제사와 예배를 요구하셨고, 선택받은 인간, 즉 민족적 선택이나 지파적 선택이나 개인적 선택을 받은 존재로서 신이 요구하시는 대로 예배와 제사를 드리지 않을 때에는 신이 노하기도 하셨다. 이런 것을 볼 때는 신은 분명히 예배와 제사를 요구하고 계신다. 그런고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특별 도모를 하신 것은 예배와 제사를 받으실 목적으로 하신 것이다.
※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예배와 제사를 드리라고 한 적이 없고, 또 드리는 피조물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이것을 안 하면 벌을 주어서라도 예배와 제사를 받으신다. 인간을 이것 때문에 지었다고?
인간이 이런 것을 해 드리면 하나님 당신에게 기쁨에 쾌락에 존영에 보탬이 될까? 예: 솔로몬이 양을 천 마리를 드렸는데 그 중에 몇 마리나 잡수시겠나? 그 냄새는 좋아하시나?
예배와 제사가 하나님께 필요한가? 예배와 제사와 제물이 하나님에게 어떤 보탬이 될까? 없다면 왜 이것을 요구하셨는가?
‘하나님 이것을 받으시고 기뻐하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고맙다고 해라!’ 이것은 시은자이다.
하나님에게는 예배가 필요 없다. 그러면 예배를 폐지하면 어떨까?
왜 예배를 드리라고 했을까? 예: 인간이 닭을 기르는 이유는? 잡아먹으려고!
이와 같은 관념으로 예배와 제사를 받아먹으려고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 것은 이용해 먹으려고 기르는 것인가?
4.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에 그렇게 도모하신 것은 당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 삼기 위해서 하신 것이니 대 선택의 목적물이란 독존하시던 그 신령계를 인간이 영원히 유업으로 받아서 하나님의 자권(子權)을 가지고 신의 영적인 총애를 받으며 영원히 존재케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자로 지으신 것이다.
※ 대 선택: 존재선택이 아니고 사건선택이다.
하나님의 사고력에서 선택하고, 선택의 사건은 구원이다.
구원: ① 기본구원. ② 건설구원.
영원적 궁극적 결과적 존영적 구원이라 함은 신령계를 유업으로 받아 다스리고 지배하고 느끼고 누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 물에 빠져 죽을 나를 구해준 것은 구원은 구원이지만 이것이 결과적 궁극적 구원이 아닌 이유는 또 물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준 것은 구원은 구원이지만 최종적 궁극적 구원이 아닌 것이다. 살아난 나사로가 또 죽었을까, 아직도 살아 있을까? 죽었다. 성경에는 죽었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안 죽었다는 말도 없다.
二. 도모하신 인격성.(우리)
① 하나님께서 ‘우리’ 라는 말을 사용하셨는데 ‘우리’ 라는 말은 단수가 아 닌 복수이다.
‘우리’ 라고 복수로 사용하신 것을 대부분 말하기를 성부 성자 성령 삼격삼위의 의논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성부 성자 성령 삼격이 의논하여 지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② 하나님 자체를 칭할 때는 복수명사형을 사용하기 때문에 복수명사를 사 용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언어학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복수명사이기 때문에 복수로 쓸 수 있다고? ‘엘로힘’ - 복수명사.
단수라도 복수명사를 쓰는 경우가 있다. 독자가 자기 아버지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 ‘우리 아버지’ 라고 한다. 과부나 홀아비는 혼자 살아도 ‘우리 집’ 이라고 한다. 우리 조국도 있고, 나의 조국도 있다.
③ 여기 ‘우리’ 라는 용어가 ‘단수냐, 복수냐’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부께서 단독적으로 도모, 창조했다는 것도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 합이 되어 창조했다는 말도 아닌 인간창조의 도모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피조물과 특수적인 피조물을 구별키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제 1 목적물과 제 2 목적물을 구별해서 하신 말이다.
우리가 여기서 깨닫고 가야할 것은,
도모성이 중요한 것이지 ‘우리냐 나냐, 단수냐 복수냐, 삼위의 하나님이냐 단위의 하나님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기서 특별 도모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야 한다.
※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큰 뜻을 알아야지 말재간 말수법이 아니다. 66권 성경 전체가 주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로써 들면 다 들릴 수 있도록 전체는 구원도리를 가르친다.
선성과 애성은 상대성을 찾는다.
신령계: 사색 바깥 실존계.
정신계: 사색 중 이상의 세계.
두 요소의 결합인 1인: 마10:28, 눅8:55, 고후4:16, 빌1:22.
설교는 누구보고 하느냐? 이성!
三. 신의 특별한 동작.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일반적인 피조물들은 신의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으니 어떤 것은 명령으로, 어떤 것은 '무엇이 있으라' 하시던가, 또 '무엇 무엇이 되라' 하셔서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은 특별하신 동작으로 창조하셨다. 인간을 신의 도모에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실 것을 계획하시고 형상대로 지으시되 특별히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했다.
※ 하나님만 자존자요 하나님 외에 모든 존재는 다 피조물이다. 이 피조물에는 물질적인 존재와 비 물질적인 존재(마귀, 천사)가 있고, 물질적인 존재는 6일 동안 창조하셨다. 자연스런 동작으로 ‘…있어라, 갈라져라, 나누어져라!’ 동식물 어류 조류는 간접창조이다. 땅을 보고 명령을 해서.
1.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동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
(1) 인간창조의 복잡성 때문에 특별 동작을 하셨다고.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 구성요소가 복잡해서 창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특별 동작인가?
이 말도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구조와 비 물질성적인 요소인 영 이성 양심 본능 감각성 등 이런 것은 인간 외에 다른 어떤 존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단순히 일반적인 피조물을 창조하심처럼 명령으로만은 하실 수가 없어서 특별 동작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학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신의 전능성을 불신하고 들어간다. 무능한 자에게 있어서는 창조나 제작에 있어서 복잡한 것은 어렵다고 하겠지만 전능자에게는 복잡이 하등의 상관이 없다.
(2) 타 피조물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특별 동작으로 지었다고.
일반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가 아니고 인간만이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인간을 특별 동작으로 지으셨다는 설이다.
이 학설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성경은 전부 계시목적인데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계시성에서 이탈인고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 외에 다른 모든 존재를 창조하실 때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창조를 하셨는데 그처럼 일반적인 동작으로 창조하신다고 해서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3) 계시와 교훈적 목적을 위해 특별 동작으로 인간을 창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특별 동작으로 창조를 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것은 쉬운 방법으로는 인간을 창조하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고 굳이 이렇게 창조역사를 하신 것은 그 순서 하나 하나를 아무 뜻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창조의 순서 자체도 계시성으로 그렇게 했으며, 그 계시성대로 창조된 것을 그 순서대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계시로 주신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그것을 기록한 기록의 순서가 다르다고 볼 필요는 없다. 계시원리로 성경을 보면 기록영감의 감화가 와서 이미 있는 여러 사건 중에 교훈의 재료가 될만한 것들을 선출해 기록하도록 감화한 것이 아니라 성경계시는 그 성경을 기록하기 전에 계시목적으로 활동영감의 감화에 의해 하나님의 직접 동작이나(창조역사) 혹은 간접 동작(섭리 치리역사)으로 활동된 것을 기록영감의 감화로써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단순히 창조에만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고 창조를 하면서 그 창조의 방편이나 순서도 계시목적으로 그 방편을 쓰신 것이고, 그 계시목적의 순서대로 창조를 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그 순서가 아무 뜻이 없는 것이 아니고 순서 하나 하나가 계시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특별 동작을 하신 것도 계시목적으로 하신 것이다. 즉 창세기 1장의 창조와 도모는 하나님이 선택성과 예정성을 말하고, 창조는 단회적이니 이것은 중생을 계시하고, 2장의 창조는 점차적인 성화구원을 가르치고,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어준 것은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입어야 하나님의 목적대로 영원히 참된 인간으로서의 가치성과 효력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니 이 인간창조의 특별 동작하심은 계시와 교훈목적이 분명하다.
※ 창조의 순서도 계시목적으로 그 순서를 쓴 것이다.
성경은 기록영감의 감화가 와서 이미 있는 사건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교계에서 이 설을 90%이상 지지)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교훈목적으로 교훈이 될만한 것을 선택해 편집한 것이 아니다.(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성이 없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근원과 발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순서 하나 하나도 계시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고, 이것이 문서화된 것이 성경이다.
구약은 역사계시 행동계시로 말씀이 동작으로 나타났다. 예: 내가 편지를 써서 보냈을 경우 말을 보내니 글이고, 읽고 들어가니 말이다.
2.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특별 동작의 방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 방편이 어떠했으며, 왜 또 그런 방편을 쓰셨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보자.
(1)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짓자.
우리의 형상이란 어떤 형상인가? 하나님께서도 고정된 형상이 있다는 말인가?
(2)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했다.
신의 특별한 동작에서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받게 했다. 이 인격성은 단회적 창조이다.
‘우리의 형상대로’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인간의 인격성의 창조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인 영혼창조를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이미 예정하시고, 그 예정대로 인격의 주체성인 영혼을 창조했다는 말이다.
(3) 흙으로 육을 지었다.
분명히 흙으로 지은 것은 육이라고 했고, 그러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 지으신 이 인간은 흙으로 지은 인간이 아니다. 본 장의 흙으로 지은 인간과, 형상으로 지은 인간은 한 인간이면서 다르다. 흙으로 돌아가는 이 인간은 참 인간이 아니다.
(4)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함.
혹자들은 이 생기를 하나님의 일부분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코에 불어넣은 이 생기는 하나님의 일부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왜 이 생기를 불어넣었을까?
이 생기는?
① 자연생명?
② 영의 생명?
③ 하나님의 생명?
④ 신의 성품성?
①의 생명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도 있다. 이것들에게는 생기를 안 넣어도 자연생명이 있다.
②의 영의 생명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을 창조하실 때에 죽은 영혼을 창조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왕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그 영혼을 살려줄 바에야 아예 원래 영혼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지을 것이지!
③의 하나님의 생명이라 하면 인간도 하나님의 생명의 소유자이니 인간은 영육의 죽음이 없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라면 후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죽었으니 같은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도 가사적 생명의 소유자라는 말이 된다.
④ 신의 성품성이라면?
(5)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음.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일정한 용모, 형상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 인간이 알아듣기 쉽도록 형상이라는 용어를 쓴 것이다.
● 신의 형상이란?
① 외형적 용모가 아니다.
물질은 유형적 고정체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고정된 형체가 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 ‘형상이라, 모양이라’는 원어를 사용했다.
② 그의 속성을 말한다.
신의 속성은 비 공유적인 속성(4속성)과 공유적인 속성(8속성)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형상대로’란 공유적인 속성을 말한다. 이 속성이 곧 하나님의 인격성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일반적 피조물들은 일반적으로 지었으나 인간은 신의 속성대로 인격적인 존재로 지었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신은 완전하신 존재이신 반면에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요 영원 불멸의 존재로되 신의 완전을 향하여 가고 있는 존재이다. 신의 완전성을 닮아 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곧 신의 형상이다.
③ 비 공유적인 속성도 포함한다.
신의 형상(인격성, 속성) 중에는 인간이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속성이 있으니 그의 자존성이나 영원성이나 완전성이나 존재적 단일성은 그 누구도 영원히 소유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 중에 신의 영원성은 우리 인간이 과거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으나 미래적으로는 소유할 수가 있다. 그리고 신의 완전성에 도달은 불가능하지만 신의 완전을 향하여 갈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신과의 존재적 단일은 불가능하지만 성질적 성분적 단일성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가능하다.
④ 무형성을 말한다.
이 형상이라는 것을 유형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신의 영원성을 파괴시키는 큰 모순을 가져오게 된다.
3. 인간 두 요소의 합성.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은 단일요소, 단성요소로 지으셨지만 인간만은 두 요소의 합성체로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을 두 요소의 합성으로 지으신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 계셨을 것이다.
※ 인간은 두 요소의 합성요소로 되어졌다. 신령계의 요소와 물질계의 요소로!
1) 비 물질성인 영(영혼)을 창조했다.
비 물질성이라고 해서 전부가 다 영적 요소는 아니다. 물론 원어상으로는 영은 프뉴마(πνεύμα)이고, 비 물질 중에 목숨은 푸슈케(Ψυχή), 생명은 조에(ζωή), 육신은 소마(σώμα) 라고 하는데 영 이외의 것은 전부 다 육에 속한다.
혹자들은 물질과 비 물질의 합성적인 요소로 구성된 인간임을 인정하면서 물질(보디, 싹스)로 된 신체를 육이라고 하고, 그 외의 비 물질성은, 즉 옛사람 육성 육신성 자연생명 목숨(푸슈케) 등은 영성(프뉴마)과 동질로 취급해서 이성적인 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 물질성 전체를 영성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영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적 대상이 소유한 요소인데 이 영성은 불멸의 요소이다. 이 불멸의 요소가 아닌 것은 다 영성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고기-싹스)은 언젠간 없어질 것이고, 동시에 프뉴마도 조애도 없어질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양심도 이성도 영육이 결합체로 있다가 영육이 나누어질 때에 영계로 따라 올 수 없는 것이니 이것들은 다 영성이 아니고 물질에 소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영이라고 할 때 비 물질성이라는 말이지 비 물질성은 다 영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으신 것이 영이다. 이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불멸의 존재로 지음받은, 혹은 불가식적인 무형체로 지음받은 영혼이다. 그러나 이 영혼은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
이 영은 육체나 이성이 없을 때라도 청각성 미각성 감각성이 없는 자체적 독립적 무 활동적인 존재가 아닌 자체적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요소요, 시각성과 미각성과 촉각성을 느낄 수 있는 요소이다.
※ ① 비 물질적인 영.
② 신령적인 요소와 물질적인 요소.
③ 인간은 물질요소와 비 물질적 요소의 합성으로 지음.
비 물질적인 영혼을 창조했다는 말은 비 물질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 물질이라고 해서 전부 영에다 붙일 수는 없다. 영은 비 물질성이지만 비 물질이 곧 영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렇다면 사랑은 하나님이신가?
우리 아버지는 엿장수다. 그렇다면 엿장수는 우리 아버지인가?
인간이 두 요소의 합일체로 지음받은 것은 일반적으로 다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어느 선까지가 영이고, 어느 선까지가 육이라고 하는가? 영이라고 할 때 어떤 것이 영이냐? 프뉴마 외에 비 물질성인 이성 마음 생명 목숨 양심도 있는데 이것도 다 영으로 보아야 하느냐? 어느 한계선까지 영이냐? 영계, 신령계까지 못 가는 것은 전부 육에 소속된 것이다. 이것은 죽음의 선에서 분리된다.
죽었다고 할 때 영이 죽었다고 하느냐, 육이 죽었다고 하느냐?
혼: 어떤 기운을 말한다. 목수들이 ‘나무의 혼이 빠졌다’고 한다. ‘학교의 혼’ 이라 할 때는 학교의 전통을 말한다.
식물 - 생혼.
동물 - 각혼.
사람 - 영혼.
그러나 동물에는 이성이 없는고로 틀리는 것이다.
영 양심 이성을 모두 영으로 보는 자가 많다. 중생된 영은 성령을 거역할 수 없고 죄를 짓지 못하지만 이성까지 영으로 보게 되면 이성 속에 마음이 있는지라 중생한 사람도 이 마음이 죄를 짓는고로 중생된 영도 죄를 짓는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중생한 자라도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착한 양심이란 진리 따라가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이 불상을 때려부수면 양심이 가책이 되지만 기독교인이 때려부수면 양심이 가책을 받지 않는다. 착한 양심은 진리지식의 지배를 받는다. 중생된 영은 악한 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한다.
영의 한계선은 오직 영까지 뿐이다. 비 물질 전부가 영은 아니다. 영은 육체를 가지지 않아도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가 있다. 이 영이 물질인 육을 벗어난 후에는 영 자체적으로 활동을 하고 느끼기도 한다.
이성이 성화된 것만큼 영이 자란 것이고, 영이 자란 것만큼 이성도 자란 것이다. 부활의 능력 성질 감각이 다르다.(고전15:39 - 부활의 성질)
2) 물질로써 인간의 육을 창조했다.
창세기 1장 26, 27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창조했다는 말은 없고 다만 신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했고, 2장에서는 인간을 흙으로 창조했다고 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인간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보면 흙으로 돌아갈 인간과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갈 인간이 있다고 했으니 이 말은 마치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것처럼 느끼기 쉽다.
그렇다면 이 말이 같은 인간이라도 어떤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고, 어떤 인간은 낙원으로 간다는 말인지? 그리고 3장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곧 음부로 돌아간다는 말인지? 그래서 그런지 학자들 간에는 두 종류의 인간론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볼 때에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많은 인간 중에 어떤 종류의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고, 특수적인 인간은 낙원이나 혹은 영계로 간다는 말이 아니고 한 인간으로서 두 요소의 합성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비 물질성인 영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나 성분이 아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그 인간은 물질적인 육을 말한다. 그렇게 볼 때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고’ 라고 한 이 말은 인간의 영육 전체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식물과 채소를 먹는 인간, 즉 이마에 땀을 흘리며 식물을 먹고 사는 그 인간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 있고,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인간이 있다. 흙으로 돌아갈 인간은 흙으로 지음받은 물질적인 육을 말하고,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음받은 인격성인 영을 말한다.
2장의 ‘흙으로 지으시고’ 한 이 말을 인간 전체의 완전 창조론으로 착각하지 말라.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실 때에 그 흙으로 영과 육을 아울러 지은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물질을 원료로 해서 비 물질인 영을 창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창조시 흙을 원료로 해서 인간의 영육 두 요소의 합성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영을 별도로 짓고 육은 흙으로 지으셨다. 영은 비 물질성이고, 육은 흙을 원료로 한 물질성이다.
※ 창세기 1장 27절에는 인간을 흙으로 지었다는 말은 없고, 창세기 2장에는 흙으로 지었다고 했다.
개혁주의는 1장의 보충은 2장이라고 한다.
3장의 ‘너는 흙이니’ 하는 말에 영은 포함되지 않는다.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 영은 천국으로, 육은 땅으로.
2장에서 인간을 인격성으로 지은 것은 단회적 찰나적인 창조이다. 말씀으로 영을 짓고, 흙으로 육을 지었다. 주권성 위에 단일성이다.
(1) 물질인 육은 흙이 원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을 흙으로 지으셨다. 이 흙은 물질이므로 물질인 이 흙을 가지고 비 물질인 영을 창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2) 흙으로 지은 육의 요소.
인간의 육을 흙으로 지었으나 흙 그대로가 아니고 흙을 재료로 삼아 육신을 지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흙으로 지음받았는데 지음받은 흙이란 인간의 용모(육체)만이 아닌 물질적인 육체 전부를 말한다. 물질인 육체에 소속된 것은 피와 살과 뼈, 그리고 신경 감각 본능 이성 양심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혹 학자들 중에는 비 물질성(이성과 양심)은 영이라고 말하나 이것을 영이라고 할 수 없다. 생각 마음 등은 분명히 영이 아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육신의 생각, 육신의 소욕’ 이라고 했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 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다 육에 속한 것이다. 그런고로 엄격히 영은 단순히 영성만, 즉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속성대로 지음받은 것만을 말하고 그 외에는 다 육이다. 이 육을 물질적인 육(싹스)과 비 물질적인 육(소마)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성경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다. 벗어야 할 옛사람이란 소마를 말하고,(엡4:22~24) 새사람은 중생된 영을 말한다.
그런고로 인간의 구성요소를 단순히 물질만이 육이고 비 물질성은 없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다가 영육이 분리되어 다른 세계로 갈 때에 영이 가는 세계로 가지 못하는 부분은 전부 육성이다. 영은 아닌 것이다.
※ 만일 이성과 양심이 영을 따라간다고 하면?
(3) 육의 작용.
이 육 중에는 비 물질성인 이성과 물질성인 육(싹스)이 있는데, 비 물질성인 이성은 절대 자유성이 보장된다. 그리고 물질적인 육은 대개는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비 물질성인 이성의 결정에 따라 육은 움직여지고 있다.
육은 자유성을 가진 인격성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육은 도구라고 한다. 그러나 이성은 자유성을 가졌는데 이 자유성으로 이성이 영에게 피동될 때는 구원운동 생명운동이요, 부패성에게 피동될 때는 사망운동이다. 이성이 결정하는 대로 육은 움직이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육을 입혀주신 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국의 영원한 후사로 삼았으니 흙을 원료로 하여 육을 지으실 필요가 없이, 즉 육을 입히지 말고 영만 지어 물질계를 통과함이 없이 신령계에서 영원히 존재케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데 하나님께서 그 방편을 취하지 않고 흙을 원료로 해서 육을 지어 입힌 것은 구원목적에 의한 선한 뜻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 영만 지어 영계에서 살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이 하나님과 일치성이면 신령계를 누릴 수 있나? 구속 후는 단일성이다. 영계와 물질계를 다 누리니 원상복구 이상이다.
인격의 세계에서는 차등성이 있어야 인격의 가치가 나타난다. 기계적이 아니다.
거울을 보며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렇게 지었을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듣고 고쳐준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를 고쳐달라고 할 것이다. 그게 안 되니 자기 마음대로 성형수술을 하지 않는가?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것을 만들지 말고 영원한 신령계로 들어갈 것을 만들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는 미장원이다.
3) 두 요소로 결합된 1인.(마10:28, 눅8:55, 고후4:16, 빌1:22)
두 요소라고 해서 두 사람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두 요소로 합성, 결합된 1인이라는 말이다. 1인이기 때문에 외부로 나타나는 인격은 1인격이지만 그 인격을 지배하는 두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때로는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2인, 3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때로는 한 인간 속에 두 요소가 싸우기도 한다. 이것을 내적 투쟁, 대내전이라고 한다.
※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 하니 나 한 사람이 같은 또 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양복 벗고 한복을 입으라’고 하면 누구보고 하는 소린가?
설교는 누구보고 하는가? 영이냐, 육이냐? 모두 이성보고 하는 소리다.
남자를 먼저 짓고 그 후에 여자를 창조했다. 이 사실에 대해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냥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만 했고, 창세기 2장에 와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는데 남자는 진흙을 빚어서 창조하시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를 원료로 해서 역시 진흙을 빚어서 창조했다고 세밀히 말하고 있다.
(1)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 창조했다는 설.
원래는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만 짓기로 하시고 남자만 지었는데 남자 한 사람만 지어놓고 보니 인격적으로 그 남자와 짝할만한 상대자가 없기 때문에, 즉 물론 다른 피조물이 있기는 하나 인격적 대화의 대상이 아니므로 쓸쓸하게 지냈기 때문에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 남자의 배필을 만드시기로 하고 여자를 지으셨는데 이 여자를 지을 때에 남자의 갈빗대를 원료로 해서 여자를 지었으니 이 여자는 남자에 의해서 생겨진고로 혹 학자들 중에는 여자들은 영혼이 없고 다만 많은 갈빗대 중의 하나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갈빗대 하나 하나에는 영혼이 없는 것처럼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설도 있다.
(2) 영의 창조와 육의 창조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영육을 동시에 창조하지 않으시고 영을 먼저 창조하시고 육을 창조하신 것이다.
위에서 말한 학자들은 인간창조에 있어서 영육을 구분치 않고 단순히 육적인 인간만 보니 동시창조로 보인다. 그러나 영육을 구별해서 영의 창조는 선행적이요 남녀 동시 창조이니, 창세기 1장 27절의 동시에 창조된 것은 영적 인격성이다. 그리고 2장에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진흙을 빚어서 창조를 했는데 진흙은 물질이니 이 물질을 가지고 비 물질인 영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2장의 창조는 단순히 물질적인 육이다. 이 육은 사람이 물질계에 있을 동안에 필요하기 때문에 진흙을 빚어서 물질인 인간의 육을 창조하신 것이다.
사람이 이 물질계를 떠나 신령계에 가면 그 곳에는 물질이 필요없고 비 물질인 영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는 안다. 따라서 사람이 죽을 때에는 물질인 육은 완전히 벗어버리고 비 물질인 영만 신령계로 올라가고, 또 앞으로 부활을 한다 해도(혹은 살아있는 자는 변화하고) 그 부활체와 변화체는 물질적인 육이 아니고 물질이 비 물질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물질계에 있을 동안에는 남성 여성, 이성이 필요하나 이 물질을 벗고 신령계에 가서는 남성 여성이 필요가 없다. 활동적 통치적 후사적인 면에서 다 하나님의 아들이다.(엡1:5) 그리고 애정적인 상대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만 신랑이요, 모든 성도는 다 신부의 입장이 된다.
그런고로 1장은 영의 창조를 말하고,
2장은 육의 창조를 말하니,
인간의 사역의 주체성인 영의 창조는 남녀 선후의 구별이 없이 동시에 같은 조건으로 창조하시되 다만 물질인 육은 이 세상에서 활동적 필요성과 번식적 필요성과 구원목적에 의한 상대적 필요성에 따라 남성과 여성에 차별을 두어 남성창조는 선행적이요 주권적이요 시은적 시애적 통치적인 위치와 입장에 두고, 여성창조는 후행적이요 남자로부터 산출적이요 의존적이요 수애적이요 수은적이요 피 지배적이요 순종적 복종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육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2인 동체원리로 살게 하기 위해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은 것이다.
※ 원래는 남자 하나만 창조를 했는데 창조해 놓고 보니 매우 쓸쓸하게 보이고 안 되게 보여서 여자를 지었다고? 다른 동물들은 암컷 수컷이 있고, 심지어 식물까지도 그런데 인간을 지을 때는 왜 남자만 지었느냐?
우리는 영육의 분리와 창조 동시설을 믿을 수 없다.
영 창조는 먼저, 육 창조는 후에 한다. 태 속의 아기는 어느 것이 먼저 창조냐? 영 창조는 남녀 동시성이요 동등성이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할 의무, 통치적 의무, 주권적 의무, 은혜를 베풀어줄 의무, 다스리고 지배할 의무가 있다. 여자는 순종할 의무, 복종할 의무가 있다.
육의 창조는 차별이 있게 했다.
영이 시간성이냐?(시간에 속했느냐) 주체성이냐?
(3)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에 남자의 갈빗대로 지었다고 하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지으실 때에 남자의 갈빗대로 지으셨을까?
① 남자를 지을 때는 흙을 원료로 해서 지으시고, 여자를 지을 때는 남자의 갈빗대로 지었다고 하니 남자의 육체의 원료는 흙이요, 여자의 원료는 남자의 갈빗대이다. 이렇게 한 것은 남자와 여자의 육체는 동질이라는 뜻이다.
② 하나님이 인간의 영을 지을 때는 말씀으로 지으시고, 육을 지을 때는 물질인 원료가 필요했던가? 원료가 없으면 인간의 육을 지을 수가 없던가? 결코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원료가 없어도 얼마든지 창조할 수 있으나 영과 육의 가치성을 구별하기 위해서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었고, 육은 흙으로 지으신 것이다. 즉 육은 땅이라는 것이다. 또 인간의 육과 영과의 관계성을 말해주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성을 말해주고 있다.
③ 남녀 동등권을 가지기 위해서라는 설. 즉 여자를 만들 때 남자의 갈빗대로 지은 것은 남녀 동등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남자의 갈빗대를 원료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실 때 남자의 머리부분을 뜯어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신처럼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몸의 중심인 갈빗대로 여자를 지은 것은 남자의 머리부분도 아니고 발 부분도 아닌 중간지점의 것으로 지었으니 남녀 동등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발 부분의 것을 찢어서 원료로 했다면 남자는 여자를 신발처럼 천대하고 다니라고 했겠다!?
※ ‘갈빗대가 어디 붙어 있느냐’가 아니고 ‘어떤 역할을 하느냐’ 이다.
갈빗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싸고 있다. 여자는 갈빗대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남자의 위치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명예 위신 체면을 보호해야 한다. 갈빗대가 요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부러져도 보호해야 한다.
④ 결합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갈빗대가 하나의 인간 독립체는 될 수 없다. 길가에 어떤 사람의 갈빗대가 하나 있는 것을 보고 ‘여기 사람 하나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여기 갈빗대가 하나있다’고 한다. 그러나 갈빗대 하나가 없는 사람을 보고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자는 남자 없이 독립적으로 인정받기 힘들다. 즉 남녀 합일 결합체가 될 때에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남자 여자가 각각 혼자서 생산할 수 없다. 남자 여자의 결합에서 온전한 가정이 이루어지고 생산의 역사는 계속될 수 있다. 그래서 남녀 결합의 원리를 가지고 살게 하기 위해서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지은 것이다.
3. 인간의 우월한 지위.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같은 피조물이면서 인간은 특수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 물론 이 특수성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조물주의 특별도모로 지음받은 존재.
인간이 타 피조물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 것은 같은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는 특별한 도모 하에서 지었다는 것이다. 인간 외에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특별한 도모로 지은 것은 없다.
(2)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창1:27)
같은 피조물이면서도 인간만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이니 이 형상이란 얼굴 모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비 물질적 무형체적인 존재인고로 신에게는 형체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의 속성대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 다음 가는 위치가 인간의 지위이다.
형상: 신의 속성을 말한다.
(3) 신의 축복의 대상자.(창1:28)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지으시고 특별히 인간에게만 복을 주신다는 약속과 계약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복이란 어떤 복인지? 이 복 속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으나 궁극적인 복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복이다.
(4) 우월한 지위.(육해공의 정복권을 받음-창1: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에게 육해공을 정복하라는 정복권을 주셨지만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이 정복권을 주신 일이 없다. 이 정복권을 받은 자는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우월한 지위 중에 하나인 이 정복권을 가지고 정복을 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특수적인 축복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또 한 면으로는 책임성이 있음을 알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복을 하며 살도록 명령을 했는데 인간이 도리어 정복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특수적인 축복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요, 이 특권을 스스로 상실하는 것이다. 또 의무적인 면으로 볼 때 자기가 하여야 할 의무수행을 못했으니 이는 곧 범죄자가 된다.
인간에게 육해공을 정복하라고 하는 것은 특권이요 축복이다. 그럼에도 그 무엇에게 정복을 당하는 것은 불행이요,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다. 인간은 이 현존세상에 있으면서 육해공을 정복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육해공을 정복하는데 무엇으로 정복을 할 것인가?
타락한 인간은 이 정복성 역시 타락이 되어 사망적으로 무력적으로 경제적으로 사상적으로 정복을 하려고 한다. 사람이 타락해서 미개하면 미개한 것만큼 악랄하고, 악랄한 것만큼 잔인하게 무력적 정복을 통해 육해공을 정복해 왔다. 이 정복을 위해서 역대의 많은 거짓된 영웅들이 사람의 많은 피를 흘리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신 정복성은 이런 정복이 아니다.
또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기의 경제로써 약소민족이나 빈곤국가의 영토를 정복해 왔는데 이 정복도 표면적으로는 선적인 정복 같으나 이 역시 사역적이며 강압적이며 사망적이다. 결국은 이 정복도 성공하지 못한다. 이 역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정복성은 아니다.
인간세상에서 정복 중에 가장 무서운 정복은 사상정복 점령이다. 마르크스나 레닌은 성경에 근거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성립을 시켜 어리석은 나라나 국민들을 유인해 많은 나라와 영토를 사상적으로 점령 정복하였다. 이 정복을 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무력적으로 정복을 한다. 이 정복이 무서운 정복이다. 이 정복 역시 타당한 것으로 인정을 받을지 모르나 이것도 형이하학적인 정복이요, 사망적 정복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축복과 특수적인 정복권은 그런 방법이 아니다. 이 정복성은 진리정복이요, 사랑적 정복이요, 생명적 능력적 정복이다.
생명적 정복이라는 말은 생명을 가지고 사망권 내에 있는 자를 생명권 내로 끌어들이는 정복을 말한다. 이 정복은 죽을 자를 영원히 죽지 않을 자로 만들어 가는 정복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악한 인간을 진리로써 정복하여 신령계에 무한계에 가서도 손색이 없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진리정복이다. 이 정복을 할 때 정복을 당하는 자는 살게 되고, 참된 자가 된다.
이 정복은 죽여가면서 정복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정복을 하는 것이니 이 사랑은 인적인 사랑이 아니고 신의 완전적 다양적 절대적인 사랑을 던져줌으로써 이 사랑을 받고 느끼게 될 때 자원적으로 정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 사랑에 정복을 당하는 모든 존재는 참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 정복은 능력적인 정복이니 여기에 정복을 당한 것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고 취소됨이 없다. 이 정복은 사망을 이기고 원수를 이기고 죄를 이기는 정복이다.
※ 무력적 정복은 정복이 아니다. 사상적 정복, 무력적 정복 모두 임시적이다.
마귀가, 이단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나올 때 또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고 할 것이다.
진리로 사랑으로 생명으로 능력으로 정복을 하라! ‘공부 잘 하라, 돈 잘 벌어라, 예수 잘 믿어라’ 하지 말고 예수 잘 믿는 이치를 가르쳐라! 학교 갈 때는 공부 잘 하는 이치를 배우러 가는 것이지 공부 잘 하라는 꾸중을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정복되고, 바울에게 디도나 디모데는 스스로 정복당한 것이다. 정복된 이들은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벗어나면 죽는다.
상대방이 나를 미워할 때 나는 더 그를 사랑하면 그가 정복될 가능성이 있다. 미움의 화살이 오면 사랑을 폭탄으로 응사하라!
현존세상에서 사랑으로 정복하는 것은 곧 천국을 정복하는 것이라 했으니 실은 육해공만을 정복하는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니고 천국까지도 점령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힘쓰는 자가 천국을 빼앗는다’고 했다.
천국의 점령은 공간적 위치적 점령도 되지만 종별적 점령도 된다. 위치적 공간적 점령이라는 말은 자기가 점령한 그 위치에 자기가 설 수 있고 갈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는 말이고, 종류적 점령이라는 말은 천국의 수많은 각양의 종류 중에 자기가 점령한 소유만 자기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천국점령이라고 한다.
(5) 통치권을 받은 자.(창1:28)
인간의 우월한 지위 중에 또 하나가 통치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통치하라고 했다. 이 통치성은 자신이 신과 연결되어 신의 능력에 의한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 통치권은 주관적 능동적 자율적 통치가 아닌 신과의 결합적 통치요 의존적 통치요 동화적 유기적인 통치성을 말하고 있다.
예: 국왕이 군수에게 그 고을을 다스리라고 할 때는 국법에 의해서 그 고을을 다스리되 자기의 권한으로 다스리지 않고 국왕의 권한으로 다스림과 같다.
※ 하나님이 다스리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다스리라는 말이 아니다. 주관적 능동적 자율적으로가 아니고 유기적 결합적 의존적 피동적으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근원적 하나님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간접적 통치로 만물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그렇게 통치하게 하심은 그 통치성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통치적인 그 사역을 통한 이면적 효력성이 중요한 것이다.
그 이면적 효력성이란 하나님께서는 통치의 방편을 통하여 인간에게 당신의 능력과 성품을 넣어주시니 인간이 통치를 통해 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이 통치의 효력성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표면적으로는 신이 통치를 하는 것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내가 신의 능력과 성품을 입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인간은 신에 의해서 통치를 많이 하면 많이 한 것만큼, 또 그 어려운 통치를 어렵다 하지 않고 힘들여 하면 하는 것만큼 그 통치를 하는 자는 이면적으로 받는 것이 크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한다.(보충은혜)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통치를 받으며 만물을 통치할 때 하나님의 충만하신 충만함이 내가 말씀에 충만하고, 내가 말씀에 충만함이 모든 만물에게 충만해지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통치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통치를 받지 않으면 나는 만물을 통치하지 못한다. 통치하는 것을 내가 들을 때에는 명령이지만 그 명령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다. 만일 사역만이 목적이라면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잘 하실 테니 굳이 우리에게 시키지 않는다.
아무 유익이 없는 동작이 있다. 아무 것도 아닌데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것을 순종하므로써 은혜를 주신다. 이 실습을 이 세상에서 하는 것이다. 이 실습을 통해 그 분의 성품과 능력을 입는 것이다.
이 통치는 과거사가 아니고, 미래적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영적 통치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통치는 영계와 직결되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통치를 잘 받고, 잘 해야 한다.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뜨끔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감동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내가 입는 것, 능력을 입는 것이다.
(6) 수호권을 받은 자.(창2:)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했는데 그 다스림은 자기 자신이 신의 의사에 의해 다스림을 받되 자기의 마음을 바로 다스려야 되고, 다음에 몸을 다스려야 되고, 외계에 있는 것 중에는 수권범위 내에 있는 것을 다스리고, 외계에 있는 것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다스리는 것만이 아닌 또 지키라고 했다. 인간은 지킬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지키라고 할 때는 능력도 주신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지난 과목에서 논한 바 있으나 여기서 인간의 우월한 지위 면에서 보는 수호권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특수적인 우월한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
지키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지키라는 말인가? 자기 자체를 바로 지키라는 말이니 자기 자체를 생명권을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자기의 마음이 생명권을 이탈치 않도록 지키고, 자기의 몸이 생명권을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 마음은 생명권의 담을 넘어가서 여러 가지 죄를 짓게 되고, 또 내 몸이 이 생명권을 넘어가서 여러 가지 죄를 짓게 된다.
※ 다윗의 눈이 금남구역을 넘어갔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제五절. 낙원의 창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을 위하여 특별히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다.
이 동산을 창설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동산에서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성과 목적성이 그러했다고 하면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목적성과 계획성이 파괴를 당한 것이 되고,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목적성과 계획성과 설계성이 인간에 의해 바꾸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창조의 목적이 기껏 에덴동산 낙원 정도나 주시기 위해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초인간에게 낙원 동산을 주신 것은 후대의 모든 인간에게 천국을 주실 계시목적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계획성도 설계성도 파괴됨이 없이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진행되어 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 인죄론에서는 부득이 낙원을 말하게 된다. 낙원을 주신 목적을 말할 때 위에서 하는 말과 아래서 하는 말이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딛2:1)
에덴동산에 거처의 이유를 거기서 영원히 살도록 하려 한 것이라고 하면 인간의 활동에 의해 하나님의 인격성이 다 깨어진다는 말이 된다.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는 현상을 인간이 볼 때는 지구가 도는 것으로 보이지를 않는다.
낙원을 주신 것은 계시성으로 주신 것이다.(엡2:10)
一. 이 동산에 거주할 인간의 의무.
하나님께서 이 동산을 특별히 창설해 인간에게 주셔서 막연히 이 낙원에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니고 이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의무성을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이 의무를 모르면 영원히 낙원과는 상관이 없는 자요, 반면에 이 의무성을 깨닫고 그 의무대로 살면 그 삶 자체가 현재적 낙원이요 미래적 낙원이 되는 것이다.
1. 은밀계시를 알고 살아야 한다.
사건과 존재와 성문계시를 통하여 이 은밀계시를 깨닫고 알아야 한다. 즉 이 말은 낙원동산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 인간을 여기서 살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왜 이 환경, 이 현실 속에서 살게 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살게 하신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이 환경 이 현실 속에서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즉 누릴 목적으로 살라는 말인가,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라는 말인가, 자신들의 기능적 지능적 인격적 온전을 위해서 살게 하신 것인가? ‘왜 살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의무는 신의 은밀계시인 이 낙원에서 지능적 기능적 인격적 신의 성품을 입어 온전자가 되라는 것이다.
※ 인간을 그냥 막연하게 지은 것이 아니다. 왜 낙원에서 살라고 한 것인가? 실컨 먹고 마시고 누리고 살라는 말인가, 아니면 어떤 목적과 뜻이 있는 것인가?
에덴동산에 사는 궁극목적을 아담에게 얘기는 안 했지만 어떤 목적으로, 어떤 뜻으로 살게 했는가를 아담이 알았더라면! 모르면 모두 절단이다.
오늘 나를 이 현실에서 살라는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 인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현실에서 어떻게 하던 누리려고 한다.
첫째 계시는 은밀계시를 붙잡고 사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살라고 하는 목적성은 신의 기능적 지능적 인격성을 입고 살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수주일만 하면 되는가, 아니면 주일을 지키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양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가? 이 성문계시를 왜 주었는가?
2. 거처의 의무.
하나님이 주신 이 낙원동산은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다른 존재에게 있어서는 타처가 더 좋고 적절한 곳이 있을지 모르나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이곳이 가장 적절한 곳임을 알고 자기의 현실에 불만을 가지지 말고 살아야 한다.
이 현실에서 은밀계시를 잡은 자는 불만이 없다. 그렇지만 인간이 신의 의지계시를 저버리고 누리려 하면 불만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누리자는 주의가 아닌 신의 의지계시를 잡고 불만이 없이 만족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가지고 사는 자라면 이보다 더 좋은 곳(현실)은 없음을 알아야 하며, 현실에 불만이 없이 살아야 한다.
아담은 첫째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둘째 의무를 저버리기 마련이다. 자신을 신의 온전하심을 입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누리는 주의, 누리는 목적으로 살다보니 현실에 대하여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결과로 인해 자기의 현실이 물질인 인간이요 피조물인 인간이요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으로 이 현실에 사는 것이 만족이 아니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성경에 그 사건을 기록하신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서이다.
※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여기서 살아라’ 한 것은 영원히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 온전자가 되는데는 이 낙원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저버리고 나니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나오고, 이 마음이 나오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가’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현실은 누리라고 준 것이 아니고 건설을 위한 것이요 온전자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이 세계가 건설하기에는 가장 적합하다.
누가 비뚤어진 것인가? 누리면서 만족하라는 말인가? 아니다. 위의 것을 붙잡은 자로, 계시를 붙잡은 자로 건설하며 살라고 한 것이다.
‘에덴동산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지형적 위치보다 계시적 면으로 깨달아 에덴동산에서 심신이 결합하여 살아야 한다. 몸은 에덴동산에 살고 있으나 마음은 떠나 있으면 의무수행을 어긴 것이다.
옛날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주신 에덴동산의 그 낙원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나에게 마련해 주신 이 환경, 이 현실이 바로 에덴동산이라는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은밀계시를 붙잡지 못하고,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곳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이탈하면 그 선물 동산에서 살 자격이 없다. 회개치 않으면 쫓겨 나간다. 가령 몸은 에덴에 있으면서 마음에 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것을 원했으면 이것은 에덴동산의 거처의 의무를 어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린 데서부터 싹이 터 나와 현실에 대한 불만죄에 빠져 거처의 의무를 수행치 못하고 에덴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최초의 죄가 들어온 과정이요 순서이다.
아담이 결정적으로 죄를 짓게 된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물행 유형행 이전에 무형행 심행에서 이미 죄가 결정된 것이다.(마5:27, 28) 우리는 이것을 바로 배우고 바로 깨달아(범죄의 과정의 순서) 범죄를 막아야 한다.
※ 죄의 기원이 어디냐? 대개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죄의 시초라고 말한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유형행의 죄인데 그 이전에는 죄가 아닌가? 예수님이 보시는 죄는 심행을 보신다. 죄는 활동 이전이다.
오늘날 우리가 짓는 죄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누리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리거나 모른 데서 나온 것이다. 성문율을 어긴 것만이 죄가 아니다. 자기에게 온 사건 환경이 구원을 이루는데 지장이 있다고 하며 불만을 가진다면 그것은 죄가 아닌가? 어떤 현실이라도 구원을 못 이룰 것이 있는가?
3. 통치하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말하기를 그 어떤 다른 존재에게 순종도 의존도 동화도 지배도 받지 말고 통치하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만물을 통치하라’ 하실 때는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이 능력은 인간에게 본유적으로 주시기도 했지만 모든 만물을 통치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과 동화적 피동적 유기적 통치를 해야 된다. 그런고로 통치는 적극적인 면이다. 이 통치를 하는 것이 순종이요, 통치를 받는 것은 불순종이요 거역이다.
※ 이것은 실질적 역사이면서 실질적 하나님의 계시이다.
신의 온전성을 입어나가는 데는 낙원동산 이상 좋은 곳이 없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볼 때도 이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이 사실을 모르니까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은밀계시를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모르면 하나님을 향해 불만이 나온다.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고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의존적 피동적으로 다스렸느냐 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에게 통치를 받으면 죄이다. 다스리라고 했지만 현실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불순종이 나온다.
● 다스리는 순서:
①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고.(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
② 몸을 다스리고.
↓
③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됨.
↓
④ 만물을 통치케 됨.
4. 지켜라.
하나님은 인간을 통치하게 했고, 또 수호적 의무를 명령했다.
이 수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외계의 것이 내계로 침범하여 오는 것을 막고, 내계의 것이 생명권 외계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 의무수행은 자기가 자기를 적극적으로 통치를 하게 되면 염려가 없으나 이 통치성이 중단되면 통치적으로 박탈된다. 지킬 힘도 없어진다. 이 동산에 있어서는 안 될 동산 외계의 그 어떤 것이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지키지 못하면 죄다. 내 속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내 소원 취미 모두는 생명외계로 탈출하게 되니 이것이 못 나가도록 지켜야 한다.
※ 청각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죄가 들어온다.
5. 따먹어라.(생명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언제든지 긍정적인 것을 먼저 말한다. ‘다스리라’ 한 것은 긍정적이요 적극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인간을 교훈하실 때 부정적 소극적인 것으로 하지 않고 긍정적 적극적으로 하신 것은 구원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는 인간에게 따먹지 말라고 먼저 말하지 않고 따먹으라고 먼저 말씀하신 것은 좋은 미덕을 먹으라는 말이다. 누가 보아도 그 과실은 아름다운 과실이다.
※ 적극적 긍정적으로 나갈 때는 어떤 소극성이 끼어 들 수 없다. 기독교는 고행주의 극기주의 염세주의가 아니다. 또한 초절주의가 아닌 초월주의이다. 이용주의 지배주의이다.
‘따먹어라’ - 생명과, 일반과, 아름다운 생각, 미덕, 행동은 하라!
제 1 의무를 지키면 제 2, 제 3, 제 4, 제 5의 의무는 자연적으로 지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돌변적이라도 아름다운 말(구원이 되는)이 나온다.
먹기 좋은 과실을 먹을 때에는 영이, 진리가, 양심이 방해치 않는다.
‘생명과를 먹으라’ - 기독자가 먹을 것은 영원히 생명과이다.
에베소교회에게 ‘회개하라, 그리하면 생명과를 주어 먹게 하리라’
6. 먹지 말라.(선악과)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을 선적인 과실도 먹지 말고, 악적인 과실도 먹지 말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또 두 성분(선의 성분과 악의 성분)이 있는 과실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 과실은 두 개의 과실이라는 말도 아니고, 선과 악이 함께 들어 있는 과실이라는 말도 아니고, 또한 이 과일 자체 속에 선과 악이 들어 있다는 말도 아니다. 이 과실을 따먹으면 그 결과가 선을 아는 일에 주관적이요 자율적으로 되는 것이니 이 열매는 과연 하나님의 금단의 열매이다.
5대 의무를 수행치 못하면 필연적으로 이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또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성문율을 어기는 것이다.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했으니 이 말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죄가 결정된다고 하는 죄의 시초를 말하는게 아니고 죽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죄의 시초가 선악과를 따먹는 데서부터가 아니고 그 이전에 벌써 죄는 구성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성문율을 어기는 물행만을 죄로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무형행 심행에서부터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 죄를 짓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 ‘따먹어라, 따먹지 말라, 에덴동산에 거처하라, 다스려라, 지켜라’ 이 모두가 성문계시이다.
이 성문계시 이면에는 은밀계시가 있다. 이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성문계시를 표면적으로 지킨다 할지라도 실은 바로 지키는 것이 못된다. 성문계시 이면의 은밀계시를 바로 깨달아 이 은밀계시를 붙잡고 성문계시를 하나 하나 지켜나가게 되면 표면적으로는 성문계시를 지키는 것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은밀계시를 지키게 되는 것이다.
혹자들은 이 66권의 성경은 가감을 못한다 하며 성경에 기록된 액면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단순하게 듣기로는 가장 보수적인 것 같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가령 성경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이 있는데 그 사람이 성경 액면 그대로 순종을 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또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을 했으니 액면 그대로 지킨다면 성경에 기록된 치수대로 방주를 지어야 할 것이며, 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을 떠나라 했으니 지금도 애굽에 있는 자는 애굽을 떠나는 것이 순종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현재 애굽에서 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사는 자는 어떻게 그 말씀을 순종할 것인가? 오른손이 범죄하면 자르라고 했고, 눈이 범죄하면 그 눈을 빼라고 했으니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가? 그런고로 성문계시 이전에 은밀계시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 일반적으로 선악과를 따먹는 그 때를 죄의 시초(기원)로 본다. 그러나,
① 은밀계시를 버린 것이 죄의 시초요,
② 현실에 불만.
③ 직무수행 못함. 다스리지 못하고.
④ 지키지 못하고.
⑤ 생명과를 먹지 않고(아름다운 과실, 먹기 좋은 과실) 먹어서는 안 될 선 악과를 먹었다.
타락의 순서를 모르면 밤낮 죄 짓는다. 실범은 유형행, 심범은 무형행이다.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인간으로서 이 6대 의무를 다 행하게 되면 이제 그 앞에는 네 강이 있으니 이 강을 통하여 은혜(수입)를 받게 된다.
二. 에덴에서 흐르는 네 강.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이 에덴동산과 네 강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창세기 2장 10절로 14절에 네 강을 말한 것은 에덴동산의 지형적 위치를 가르칠 목적으로 말한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이 네 강을 근거로 낙원의 위치를 정하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이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리하여 6천년의 역사가 흘렸지만 아직도 낙원의 위치를 정확히 정하지 못하고 갑론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낙원동산의 네 강을 말한 것은 동산의 위치를 가르칠 목적이 아니고 역시 계시목적으로 주신 것이다. 계시목적으로 하다보니 지정학적으로 맞지 않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비단 이 낙원동산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다. 성경을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는 그런 일이 많다. 가령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대하여 말할 때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마1:8) 라고 했으나 실은 웃시야가 요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웃시야는 아마샤에게서 낳았다. 이것은 역사적 사학적으로는 맞지 않으나 계시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계시성이지 역사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서이지 지리학 서적이거나 사회학 서적이 아니다.
네 강은 지리학적인 면에서는 정확하지 못하나 계시성에는 가장 적합한 것이다.
※ 네 개의 강은 대략의 위치를 말하고 있다.
‘에덴의 위치가 어디냐’ 하더니 지금은 ‘예수의 재림이 계룡산이냐’ 한다.(사단의 짓이다)
1. 비손강.
이 비손강을 첫째 강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마르지 않고 크고 넓은 강이기 때문에, 또는 다른 세 강의 원 줄기 강이기 때문에 첫째 강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사실 네 강의 원 줄기는 유브라데강이다. 이 강은 그 하류가 인도양에서 죽 내려와 바벨론 바그닷드의 아라랏산 계곡으로 연이어 있는 강인고로 오히려 이 강을 첫째 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임에도 지금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비손강을 첫째 강이라고 말했다.
이 비손강이 유브라데강의 지엽의 강인지, 아니면 유브라데 지역의 어느 한 지방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이 비손강을 첫째 강이라고 한 것이 이 강에는 정금과 베들리엄 진주 호마노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강속에는 이런 귀중한 보배들이 있으나 이 보석들 위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보석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강속에 있는 이 보배를 채취할 것이다.
※ 어떤 사람은 ‘아라랏산이 에덴동산이 아닌가’ 한다. ‘이 강이 원 줄기가 되어 네 강으로 번진 것이 아닌가’ 한다.
또는 제 1 조상 아담이 아라랏산? 그리고 제 2 조상 노아의 발상지?
에덴이 바그닷드냐? 아니면 아라랏산이냐?
첫째 강이라고 하는 말은 아무렇게나 한 말이 아니고 계시성으로 한 말로 정금과 베들리엄과 호마노가 있기 때문이다.
요단강물은 맑지 않고 흐리다.
비손강의 보물은 6대 의무를 마친 자가 가진다. 흐르는 세월, 흐르는 사건 속에 정금 진주 호마노가 있다.
그냥 보면 하나의 흐르는 강이다. 그러나 6대 의무를 지킨 자는 흐르는 물 속에서, 사건 속에서, 시간 속에서, 환경 속에서 이 진주를 캐낸다. 이 사람은 은밀계시를 잡은 자이다. 무진장의 보배를 캐낸다. 이것을 가지고 자기의 황금보석 진주 집을 짓는다.
2. 기혼강.
이 강은 둘째 강으로, 급류로 흐르는 강이다. 급류로 흐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빠지면 전부 강물에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이것은 6대 의무를 다하여 비손강으로 살지 않는 인생들은 그의 시간도 경제도 정력도 자기의 모든 소유도 기혼강처럼 급류로 떠내려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비손강으로 살아 보석을 채취하지 못하면 기혼강의 강물처럼 다 흘러 떠내려간다는 것이다.
※ 급류로 흐르는 곳에는 무엇이든지 빠지면 건지지 못한다.
3. 힛데겔강.
힛데겔강은 굴곡이 많기 때문에 강물이 급류로 흐르지는 않으나 급류가 아닌고로 물이 맑지 못하고 많은 찌꺼기가 있다.
사람이 비손강으로 살지 못하고 힛데겔강으로 살면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강이지만 그 속에는 오만 찌꺼기가 쌓이고 강물도 맑지 못하다. 어둑침침하고 썩어 냄새가 나는 것이다.
※ 보기에는 맑게 보이나 속에는 어둑침침하다. 냄새 나고 썩은 것이다.
4. 유브라데강.
이 강은 일명 그발강이라고도 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발강이라고 했다. 이 강은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언약으로 주신 경계지역의 강이다. 이 강을 표준하여 이남은 이스라엘, 이북은 이방나라 앗수르이다. 그래서 이 유브라데강은 분명히 강은 하나이면서 이름도 둘이요 소유주도 둘이다.
이 강을 강 이남에서는 이스라엘강이라고 하고, 강 이북에서는 앗수르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강은 이스라엘의 강도 되고 앗수르의 강도 되고, 또는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그발: 경계라는 뜻이다.
※ 혈통은 유대인인데 겉으로는 이방인과 같다.
뚜렷한 경계를 지어라,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지으라고 하는 강이다.
제六절. 사람의 통일성.
현재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인종을 보면 인류의 통일성을 믿기는 어렵다. 왜? 이 지구상의 인간들 중에 여러 종족의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종학적 견지에서 볼 때 피부적으로 특이한 종별이 있고, 골각적으로 특이한 종류가 있고, 또 각 개인의 신체의 대소가 각이하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통일성을 믿기란 어려운 것이다.
※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은 하나다. 그런데 인종학적으로 연구하게 될 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피부적으로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갈색인종이 있고, 또 골각적으로 서양인`과 동양인이 있고, 같은 동양인이라도 필리핀인과 우리 한국인과는 그 골각이 다르다. 백인과 인디안인과도 골각이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사실 가운데서 사람의 통일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一. 사람의 통일성.
현재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인종들은 각이하게 특색적인 체질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보면 인류의 시조는 단일조상으로 모든 인류는 이 단일시조의 자손임이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현재 지구상의 지방에 따라서 각각의 인종이 체질적으로 각이하게 다른 것은 수 백대 수 천대를 내려오면서 기후나 풍토에 따라 인간의 체질과 피부가 변할 수도 있는 것이요, 유전적인 유전성에 의한 경향이 크기도 하지만 문화혜택에 의하여, 혹은 병적인 요인으로, 혹은 공해적 영향에 의하여 인간의 체질이나 피부나 골각이 변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 성경은 인류의 통일성을 가르치지만 과학자들은 이 사실을 부인한다. 피부가 다른 것을 보고 그렇게 말을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해골들을 수집하여 각 인종의 조상을 찾는다고? 질병이나 공해의 영향을 받아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형제끼리는 비슷하지만 사촌으로 내려가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인류의 통일성에 있어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류는 혈육적 통일이다. 어떤 지방에 사는 인생이라도 아담의 후손 외에 다른 인종은 없다.
혹자들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류의 조상이 된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또는 다른 동물과 또 다른 동물과의 결합으로 반수반인이 나오고, 그 후대에 완전한 인종이 되어진 것처럼 보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인류는 결코 그렇지 않고 혈육적으로 통일이다.
※ 혈육적 통일성을 무시하고, 아담을 무시하고 인류의 조상을 원숭이라고? 또 어떤 자는 원숭이 + 곰 = 어떤 특수한 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한국의 설은 곰 + 한웅 = 단군이 태어남.
인간은 혈육적 통일성인 동시에 종류적 통일성을 가졌는데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그 많은 인종을 볼 때에 종류적 통일성을 믿기도 어렵다. 왜? 풍속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른고로 통일성을 믿기란 극히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풍속이나 언어나 전통 같은 것은 그 지역에 있는 인종들이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아 좀 더 이치적인 면이 발달이 되어 문화적으로 발전을 해 나가다 보면 같은 형제지간이라도 엄청나게 다를 수가 있다. 따라서 외부적인 언어나 풍속 습관이 일치하지 않고 통일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인류의 통일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옛날 미 대륙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고 있을 때 그들이 이 흑인들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영혼도 이성도 없는 한 인종으로 보았던 것이다. 왜? 백인들은 그 때에 벌써 그만큼 문화가 발달이 되어 문화적인 생활을 해 나왔고, 흑인들은 문화적 면이 미개해 백인들이 볼 때 야만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지금에 와서 그 누가 흑인들에게 이성이나 영혼이 없다고 하겠는가?
피부나 골각이나 언어나 풍속은 지방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혈육적 종류적으로 통일성이 있음이 틀림이 없다. 혹 의학적, 생활학적으로 혈액형이나 인체구조에 있어서 약간의 다른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사람에 대해 가르치는 바는 혈육적 통일이요, 종류적으로 절대 통일이다. 백인만이 참된 인종적 인간이고, 흑인이나 야만인들은 인간이면서도 비 인종적 비 통일적 인간인 것이 아니다.
※ 인간은 영혼 양심 이성 감정이 통일되어 있다.
풍속 습관은 자연환경의 지배에 따라 다르고, 이성적 작용에 의해 다르다. 그러나 많은 피조물 중에 인간은 종류적으로 통일이다.
1. 근원적 통일성, 그리고 궁극적 통일성과 비 통일성.(엡1:10)
인간은 수천 대로 내려가면서 많은 인류가 살지만 근원적으로는 통일이다.
이 근원적 통일이라는 말은 상술한 바와 같이 단일시조에서 많은 종족이 나왔다는 말인데, 즉 한 조상의 후손이 그 시대 시대에 각 지방으로 흩어져 수 백년 혹은 수 천년을 내려왔다는 말이다.
(1) 인류의 근원이 통일이다.
혹자들은 인간을 자연발생으로 생겨진 존재라고 하지만 어떻게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자연발생을 할 수가 있느냐? 이것은 근원적 통일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또 이 학설은 성경적으로, 학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고 다만 한 개인의 추측에 불과하다.
많은 인류의 근원이 자연발생이라고 하면 자연발생할 그 때 자연발생한 그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혹자들 중에는 토생적 발생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 토생적 발생이라는 말은 인간이 흙에서 솟아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은 인류의 발생은 자연발생이나, 토생적 발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창조이다.
우리가 인간의 근원적 통일성을 바른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자신의 구원까지 흐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먼저 인간의 근원적 통일성을 바로 알고, 또한 궁극적 통일성과 비 통일성을 알아야 한다.
(2) 궁극적 통일성.(엡1:10)
인간을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 면에서 예정성과 계획성과 설계성과 섭리성을 볼 때 이는 통일성이지만 한 아담의 후손이면서 선택의 제 1 목적물인 택자와 제 2 목적물인 불택자가 있기에 이는 통일성이 아닌 비 통일성이다. 즉 인류는 한 조상의 후손으로 났으니 이는 통일성이지만 택자와 불택자가 있다는 면에서는 생명과 사망으로 갈라지니 이것이 비 통일성이다. 여기서 택자는 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이고, 불택자는 택자를 위하여 지음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여기서 궁극적 통일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 지음받은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 결과적 영원적 통일이라는 말이다.
※ 택자는 택자대로 빠지는 통일성이요, 중간은 비 통일성이고, 불택자는 불택자대로 통일성이다.
(3) 궁극적 비 통일성.
인간은 근원적으로 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혈육적 종류적 근원적으로 통일이 되어 사망선까지 도달하고 있는데 비 통일이라는 말은 사망선에 가서 어떤 인간은 구원과 영생에로 가게 되고, 또 어떤 인간은 정죄와 영원한 형벌과 사망에로 가게 되니 이것을 전 인류적으로 볼 때 인류의 근원은 단일시조에서 통일성으로 내려왔다가 궁극에 가서는 영생과 영벌, 사망과 죽음으로 영원히 분리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비 통일성을 사망선에서 보려고 하지 말고 죽음 이전에 인간의 통일성 속의 비 통일성을 볼 줄 아는 시각성을 가져라! 이것을 일명 영안(靈眼)이라고 하는 것이다. 통일이면서 비 통일을 보라!
2. 인종의 통일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
성경이 인류의 통일성에 대하여 증명하고 있다. 성경이 증명하는 대로 보면 인류의 통일성을 의심할 바가 없다. 물론 성경이 증명하는 것은 외적이며 역사적인 면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외적이며 역사적인 면에서의 통일성을 학적으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또한 계시적으로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학문적 지식이 성행이 된다 해도 우리는 그것으로 족하지 않다. 계시적 지식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성경적 증언을 살펴보면서 그 이면의 계시 면에서의 인종의 통일성을 찾아보기로 하자.
※ 인종의 통일성이라는 것은 다른 책에도 있지만 성경도 증언하고 있다. 곧 인류의 시조가 단일시조라고 말한다.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산출되어 나왔다고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는 영성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후에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낫다고!
우리가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라고 하는 것을 학적으로 아는 것만으로 족하게 여길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을 한 아담에게서 산출되도록 했는가? 계시적 면에서 왜 이렇게 했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택자 불택자의 조상이 따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인간으로서 택자 불택자를 모르게 하려고 한 조상에게서 산출되도록 한 것이다. 기본구원은 동등(선택 예정 계획 설계 출생 그리스도의 구속 중생까지)이지만 최종적 궁극적 결과적 구원은 차등이다. 누리는 영광, 활동, 존귀가 다르다.
이렇게 차등이 있는 것인데, 만일 이 차등성을 인간 자기가 건설해서 이루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아예 인간 개개인을 차별적으로 지어서 차등적으로 살도록 지어 놓았다고 한다면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항의는 못하지만 항의할 수밖에 없는 처사가 되는 것이다.
인격적 세계에서는 한 형틀에서 나온 블록처럼 똑같은 모양으로 되지 않는 것이다. 인격의 세계에서는 미모의 차이, 실력의 차등이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3절~: 기본구원은 동등이다. 그 다음에 미모 존영 실력은 개개인이 마련해야 한다. 영모의 미모성은 자기 노력 하에 달려 있다.
가인은 불택자의 모형이고,
아벨은 택자의 모형이다.
전도는 인간 모두를 택자로 보고 해야 한다. 불택자로 보면 죄가 된다.
스데반이 사울을 택자로 보았을까, 불택자로 보았을까? 어떤 행동을 해도 택자로 보았다.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보고 ‘네 할 일 빨리 하라’고 했다. 자기 할 일 자기가 하는 것을 시비할 것 없다. 돼지와 아이가 구정물을 먹을 때 누구를 말리고, 누구를 내버려두어야 하느냐? 너 할 일, 나 할 일을 분명히 구별하라!
같은 시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택자와 불택자는 분명히 갈라져 있는 것이다. 택자라는 자기의 본분을 잊지 말라!
성경이 증언하는 인종의 뜻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1) 유기적 타락의 통일성.
모든 인간은 최초 시조인 아담으로부터 유기적으로 산출되어 계대를 이어 내려왔는데 이 유기적인 통일성에는 타락의 유기적 통일성도 있다. 인류는 타락의 유기적 통일성을 가졌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다 타락한 상태이다.
인종학적인 면으로 볼 때도 전 인종은 통일적이요, 타락성적인 면에서 볼 때도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수많은 인종 중에 인종학적 측면에서 이 통일성을 벗어난 인종은 하나도 없다. 전부는 다 유기적인 통일성이요, 여기에는 타락의 유기적 통일성이다.
※ ‘유기적 타락성’ 이라 할 때의 ‘유기적’ 이란 유전성과는 다른 것이다.
인종학적 면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졌다.
타락적인 면에서 통일성 - 역사 속의 모든 인류가 아담 이후로 타락치 않은 인간이 없다. 전부는 유기적 타락성으로 통일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역시 통일성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통일성은 개체적이면서 구속적 통일성이다. 구속을 입는데는 개체가 다 입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고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인간이 있느냐?
① 무죄시대 - 에덴동산에 그냥 있어도 천국에 가지느냐?
② 양심시대 - 모세 이전. 양심만 잘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③ 율법시대 - 율법만 잘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④ 은혜시대 -
단독적 구속사업은 예수님 자신.
유기적: 전도해서 진리적인 관계로.
이성과 몸도 유기적인 관계성.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안 입고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유기적이 없이 실력배양을 할 수 있느냐?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이 통일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
2) 인류애성의 통일성.
이 통일성이라는 말은 인간과 인간만이 통할 수 있는 애성을 말한다.
세계 인종의 피부와 모양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사랑하는 면에서 인류애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인류애적 통일성을 가진 것이다. 물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
인류애의 통일성이라는 말은
(1) 사랑의 성질이 통일이라는 말이다.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종이 종족별로 피부색깔이나 신체의 대소의 차이나 모발의 색깔 등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인간들이 주고받는 사랑의 성질이 이런 종류에 따라 다른 것은 아니다.
모든 인류는 운명의 차이가 있고 인간의 숫자나 인물은 차이가 있으나 사랑의 통일성을 가졌다. 문화의 차별과 외형은 다를지라도 사랑만은 통일성이다. 이것을 보면 인간은 단일시조의 후손임이 틀림이 없다.
(2) 전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사랑은 전 인류적 통일성이다.
인류애의 전 인류적 통일이라는 말은 상호간에 상대방을 인간으로 생각지 않고 비 인종으로 느낄 때는 그렇지 않으나 피차에 인종으로 알 때에는 그 인류애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 항에서 말한 인류애의 통일성은 각 종족별로 사랑을 하는 사랑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고, 본 항에서는 각 종족을 초월해서 A라는 종족이 B라는 종족을 대할 때 그 상대 종족을 같은 인간으로 알 때에는 피차에 인간으로서 주고받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지역이 다르고 종족이 다르다 할지라도 이 사랑은 동질이다. 통일성을 가졌다.
물론 한 때 어떤 지역에서는 분명히 인종이지만 그 인종을 인종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의 하등동물로 착각을 했기 때문에 이 통일성을 가진 인간애로 수수관계를 갖지 못했으나 현금에 와서 피차에 분명한 인종임을 알고 난 후에는 지성적 인격적 차별은 가지고 있으나 그 사랑은 역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가령 과거에는 백인종이 흑인종을 인종이 아닌 하나의 금수로 알았기 때문에 금수로 취급했지만 현금에 와서는 문화혜택을 입고 문명이 발달된 백인들이 천재지변을 당해서 사경에 있는 흑인들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인류애가 통일성으로 나타난다. 슈바이처가 아메리카 흑인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사실도 하나의 예이다.
※ 전 항의 요지는 끼리끼리의 사랑이다. 새는 새끼리, 동물은 동물끼리, 인간은 인간끼리의 사랑.
인류애적으로 사랑의 통일성을 가졌다.
물론 여기서 인류애의 통일성이라는 것은 단일시조에서 모든 인종이 산출되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다고 하는 것을 알리기도 하는 것인데, 단일시조에서 산출된 인종이 풍토나 자연조건의 영향을 받아 피부가 변질되고 신체가 변질되어 냉한방 지역에서는 비교적 신체가 크고 피부가 백색으로 되었고, 열대지방에서는 피부도 검고, 어떤 지방에서는 신체도 작은 이런 종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의 인류애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고, 지역에 따라서도 변함이 없고, 환경에 따라서도 변함이 없이 언제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인류애가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단일시조의 후손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는 역사적이요 또 학문적인 면이라 하겠으나 계시적인 면으로 볼 때도 인간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즉 여기서의 통일성이라는 말은 제 1 목적물로 지음받은 인류의 통일성을 가르치는 것이니 이 통일성은 법적인 통일성이요,(전 인류는 단일법으로 사는 것) 통치적 통일성이요,(하나님 한 분의 치리만을 받아야 하는 것) 생명적 통일성으로(새생명) 기독자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보유하여야 할 통일성을 가르친다.
※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유대인과 이방인의 법이나 생명이 다르지 않다. 우리 기독교인은 법적 통일성을 가졌다. 진리는 만인에게 통일성을 가졌다.
구약시대의 성도는 천국에 가면 정복이고,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왕 노릇을 한다고? 이것은 아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그 커트라인이 어디냐? 진리는 주먹구구 엄펑덤펑이 아니고 칼날 위로 걸어가는 것이다.
기독자는
법적 통일성: 어느 나라, 어느 인간이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치리적 통일성: 어느 땅, 어느 왕이라도 하나님의 치리적 통일성을 가졌다.
생명적 통일성: 어느 땅, 어느 왕이라도 하나님의 생명적 통일성을 가졌다.
애정적 통일성: 어느 지방, 어느 나라 인류이던 통일성을 가졌다.
우리 기독자는 통일적 사랑을 가지게 된다.
부자(父子)의 사랑, 부부의 사랑을 초월해서 아가페로 바꿔라.
부부: 스톨게
우정: 필레오
최종적 결과의 모든 애(愛)는 오직 아가페뿐이다. 아가페 사랑은 복합적 다양적 사랑이다.
3. 인간의 통일성에 대한 학문적 증언.
학자들 간에 인종의 통일성에 대해 이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대 헬라의 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통일성을 부인하면서 토색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종의 자연발생설로써 인간이 땅속에서 나왔다고 하며 인종의 단일기원을 부인한다.
그 외에 인종의 단일 시조설을 부인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각자가 여러 서적에서 참고하시길...
(1) 사학적 견지에서 논증.
인종의 기원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여러 인종의 기원의 전설에서 그 위치를 중앙아시아라고 하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아서 아담이 원래 지음을 받아 살던 곳이 중앙아시아가 아니겠느냐고 한다.
(2) 어학에 의한 논증.
원시적 원서들의 어원이 대개는 유사하기 때문에 어원의 이 큰 유사성을 근거로 인류는 단일성 시조라고 한다.
(3) 심리학에 의한 논증.
영혼은 사람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심리학적으로 어떤 종족이나 국민에 속한 인물이던 모든 인류의 영혼이 실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들은 다 동일한 육체적 사욕, 본능, 정욕과, 동일한 경향과 재량을 가지고 있고, 특히 동일한 고등성질을 가졌으니 모든 인간은 도덕적 영적인 특질들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 생리학에 의한 논증.
자연과학으로 인종의 단일시조를 증언했는데, 또한 생리학적으로도 증언하고 있다. 생리적 공동적 판단은 인류가 단일족으로 구성됐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인류의 생리적 통일성의 근거는,
① 인종들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중간층계의 종족들이 무한하게 있다는 것.
② 모든 종족들의 두뇌 골격 치아의 성질이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③ 최대로 상이한 형의 개인들이 결혼을 하지만 능히 자손을 생산하며, 그 자손들이 계속적으로 생산능력을 가져온 것이다.
④ 신체의 정상적인 온도가 동일하며, 평균 맥박수가 동일하며, 질병에 대 하여 동일하며, 다른 동물과 혈액형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5) 동물학 생물학에 의한 논증.
동물학자들은 추상하기를 인류를 자조 면으로 본다. 단일 부부에게서 인류를 추적하여 인류의 동류설을 강조한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은 인류 다조설을 자신 있게 증거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 낙원의 창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 동산에서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설계성이 바꾸어질 수 있다.(딛2:1, 엡2:10) 성경 전부는 축소판이요 비밀설이요 계시성이다.
● 에덴에 거주하는 인간의 의무.
(1) 거처의 의무.
은밀계시를 잡고 살 것 - 신의 기능적 지능적 인격이 입혀짐.
불만은 은밀계시를 놓친 데서 나온다 - 은밀계시를 놓치니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유혹 당함. 마5:27, 28 - 무형행의 심행에서 죄는 결정된다.
(2) 통치의 의무.
통치력을 주었다. 동화적 피동적 유기적 통치.
(3) 수호의 의무.(지켜라)
외계의 침범을 막고, 내계의 것을 생명권 외계로 탈출시키지 말 것.
(4) 따먹어라.
미덕은 먹어라, 아름다운 생각 마음 행동은 하라!
제 1) 의무를 지키면 2)~5)의 의무는 지키게 되고, 아름다운 실과를 먹게 된다.
먹기 좋은 과실을 먹을 때 영이, 진리가 방해치 않는다. 그러니 생명과를 먹어라. 기독자가 먹고 살 것은 영원히 생명과이다.
(5) 먹지 말라.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으면 결과는 선을 아는 일에 주관적이요 자율적이 되니 이 열매는 과연 하나님의 금단의 열매이다.
1)에서 5)까지의 의무를 수행치 못하면 필연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기 마련이고, 성문율을 어기는 것이다.
성문율 그대로 지켜야 한다면 ‘애굽을 떠나라’ 해서 다 애굽을 떠났는데 왜 죽였느냐? 방주를 지으라고 했으니 지금도 그 치수대로 방주를 지어야지, 오른손이 범죄하면 자르고, 눈이 범죄하면 빼어 버려야지!
● 에덴의 네 강.
1. 비손강: 정금 베들리엄 호마노.
2. 기혼강: 급류. 시간도 경제도 정욕도 소유도 모두 급류에.
3. 힛데겔강: 굴곡마다 찌꺼기.
4. 유브라데강: 경계강.(그발강)
● 육해공 정복권을 받음.
● 통치권을 받음.
● 수호권을 받음.(창2:15)
● 여성을 남자의 갈빗대로 지은 이유.
‘갈빗대가 어디 붙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떤 역할을 하느냐?
그러나 통치적 후사적인 면에서 다 하나님의 아들이다.(엡1:5)
● 사람의 통일성.
다만 이성적 작용이나 자연환경의 지배에 따라 풍속은 다르다.
인간구조의 이분설은 맞으나 작용 면에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 이성과 양심은 중생치 못하느냐? 이성이 영이라고 한다면 ‘범죄한 영혼은 죽는다’고 했으니 타락 즉시 죽어야지!
중생한 영이 범죄한다고 말하면 ‘이성이 육이냐, 영이냐’를 먼저 따질 것.
화인 맞은 양심이란 진리지식을 버린 양심을 말한다. 양심은 진리지식의 지배를 받는다. 양심의 가책을 안 받으려면 진리지식을 빼버리면 된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 선악의 척도는 무엇이며, 선악의 판단은 누가 하느냐?
① 국가법률 - 나라 지방마다 다르고,
② 도덕률 - 나라 지방마다 다르고,
③ 양심율 - 각 사람마다 다르고,
④ 종교율 - 각 종교마다 다르고,
⑤ 생명율 - 절대적인 척도이다.
먼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척도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 자체가 근원적 자체적 본성적 본질적 선이시다. 방편이야 어떻건 하나님이 하신 것이 선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전부 악이다.
하나는 버려 두고,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님과 유기적인 결합으로 하나님에게 붙잡혀 한 것은 선이다. 일의 크고 작은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누가 했느냐?’
사람들은 선과 악을 외모와 종별과 방편에서 찾지만 하나님은 근원에서 선악을 찾는다. 바리새인들이 선악(일반도덕)을 몰라서, 성경을 몰라서 정죄를 받았나?
하나님과의 결합은 중생된 영이 진리와 영감으로 더불어 유기적인 결합. 이 때는 주격이 영이다.
믿음은 순종이요, 그 순종이란 진리와 영감에게 피동성 결합성 동화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진리와 영감의 감화로 됐느냐? 똑같은 활동이라도 구별해야 한다.
일생동안 이성과 몸이 지은 죄를 영이 책임을 혼자서 못 지니 그리스도가 대신 지고 공법 앞에서 심판을 받고 죽음.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지고!
이 세상에서의 상벌과 징계와 행복은 죄의 대가이거나 의행의 대가인가?
● 사건과 존재를 통하여 회개시키는 작업.
진리와 영감을 보내주지 않으면 영이 성장하지 못함. 진리가 없이는 회개는 불가능.
스승 잘못 만나면 성장에 지장이 있다. 무지에서 오는 것이 있고, 패역에서 오는 것이 있다.
영 성장과 이성의 성장률은 똑같은가?
질적 분리는 되지만 존재는 분리하지 못한다. 성화를 입는 방편은 매우 다양적이다.
오순절: 이적적 신앙 - 잘 믿으면 만능이다.
보수주의: 말씀대로 믿자 - 말씀대로 해야 천국 간다.
세속주의: 사회주의 - 천국이 있는지는 죽어봐야 안다. 그러니 세상에서 나 잘 하자.
복음주의: 내세주의 - 활용적 천국. 천국은 이 세상에서의 실력과 직결.
계명 지킨 결과성을 보지 말고 계명을 지킨 그의 인격성을 보라!
● 두 요소로 결합된 1인.(마10:28, 눅8:55, 고후4:16, 빌1:22)
외부의 1인격 속에 지배하는 두 요소: 옛사람, 새사람 - 엡4:22.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라’ - 누구보고 하는 소리냐?
제七절. 인성의 시조와 번식.
인간은 신의 피조물 중에 하나임은 틀림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을 때는 특수적으로 지으셨다.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인간은 물질적인 육과 비 물질적인 영과의 결합체로 구성됐다고 하지만 인간의 성질은 그 외에도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정신적인 요소는 어떤 방식으로 번식하며 수적 증가를 하는가?
신학은 사람의 성질의 정신적 요소에 대한 연구에 주력을 하지만 또한 물질적 요소에 관해서도 언급하게 된다.
※ 사람은 신의 피조물이요, 물질적인 육과 비 물질적인 영이 독립이 아니고 결합된 1인, 결합된 단일인격으로 활동하도록 되어 있다.
‘인간의 성질의 요소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떻게 번식이 되느냐’ 하는 것을 신학에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육의 인격과 영의 인격이 따로 활동한다는 것이 아닌)
一. 인성의 구조.
생물학적 의학적으로 인간의 신체의 구조와 세포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발표를 하지만 전인적인 면(육 이성 영)에 대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없고, 많은 이설들이 있다. 혹자들은 영육의 분리 없이 단순한 육체적 인간으로만 보는 자가 있고, 혹자들은 신체와 영과 혼 이렇게 삼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많은 이설들이 있는데 이들이 주장하는 학설을 대략 분석하면,
1. 단일 성분설.
이 학설은 인간의 영혼을 결합체로 보지 않고 즉,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물질존재만 인정을 하는 소위 유물론 사상과 비슷한 학설이니 영혼이 없이 단순한 신체가 자연생명으로 사는데 그 모든 욕구나 욕정은 신체의 작용이고, 나아가서는 이상이나 혹은 꿈같은 것도 신체의 작용이라고 한다.
이 자들은 인간의 신체 제일주의요, 신령계는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인간은 사선에서 완전히 끝나버릴 것을 주장을 한다.
※ 영육부인: 사두개인, 여호와의 증인, 공산주의.
인간은 신체로만 구성이 됐다고 하며 욕구 욕망 등은 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일반동물보다 고등동물일 뿐 영이나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내세를 부인하는 자는 신체위주로 산다.
2. 삼분설.
인간의 삼분설을 주장하는 학설이 많은 사람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학설은 본래 성경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헬라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성경학자들이 말하기 이전에 헬라철학에서 인간의 삼분설과 이분설을 대립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성경학자들이 헬라철학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삼분설을 주장을 하면서 그에 관한 근거로 성경을 인용하여 성경의 지지를 받으려 했다.
고대철학에서 주장하는 삼분설은 신체와 영과 혼을 갈라놓았다.
신체는 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영과 혼은 비 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육체와 혼과 영을 말했다.(히4:12, 살전5:23)
3. 이분설.
이분설을 주장하는 자들도 적지는 않다. 이분설도 헬라철학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이 이분설 역시 철학적이면서 성경적이다.
이분설과 삼분설은 서로 양보치 않고 대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볼 때 단순한 물질적인 성분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고 비 물질성이 있기 때문에 물질인 육과 비 물질인 정신계를 단일요소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일부 학자들은 물질적인 육과 비 물질적인 것의 양분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비 물질성, 즉 선과 악이라는 것, 혹은 선적인 요소와 악적인 요소, 일반적 형이하학적 지향적인 요소와 일반적 형이상학적 지향적인 요소는 대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일요소로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일요소가 어찌 대립성을 띌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니 삼분설을 주장하는 그 주장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원어적으로 분명히 소마와 프슈케 프뉴마(몸 혼 영)가 있기 때문에 삼분설을 주장한다.
그 뿐만이 아니고 일부 학자는 소마와 프슈케 프뉴마 외에 칼디아(마음)까지 나누어서 사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별로 인정치 않는다.
(1) 일반 학에서 말하는 이분설.
일반적이며 보편적으로 사람의 실유에 있어서 신체와 혼의 근원적 두 부분을 가지고 주장한다.
이 학설에 의하면 인간은 실유적 가견적 물질적인 신체가 있고, 그 외의 불가견적 비 물질적인 모든 요소를 혼이라고 하여 이분설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주장은 육은 물질만을 말하고 비 물질적인 것은 전부 혼으로 단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영과 혼을 같은 실유로 보며 때에 따라서 혼과 영의 칭호를 번갈아 부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단일실유 이분설을 주장한다.
※ 물질적인 것은 육, 비 물질적인 것은 혼이다. 영과 혼은 같은 것이다. 단일실유 이분설이다.
(2) 철학적인 면에서의 이분설.
헬라철학자들도 일반 학에서 말하는 이분설과 비슷한 이분설을 주장한다.
원래 인간의 이분설은 철학에서 말하는 삼분설과 대립되어 주장하던 학설이다.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분설이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분설이라고 하나 ‘일반 학에서 말하는 이분설과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분설 중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냐’ 하고 선택을 하라고 할 때 헬라철학에서의 주장이 더 성경적이라고 하니 이들이 헬라철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헬라철학에서 말하는 학설은 신체는 피조물이고 혼은 천계에 순수한 혼신관념으로 존재하다가 사람의 신체에로 화신 되었다고 주장한다.(플라톤) 그리고 혼은 비 창조물이고 불사적이기 때문에 신격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며, 신체는 혼의 감옥으로 혼이 신체에 갇혀 있는 것이니 이는 마치 굴이 껍데기에 폐쇄되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의 인간이 죽을 때에 혼은 몸을 떠나서 천계로 올라가거나 다른 어떤 몸으로 들어가 재 화신 된다고 한다.
※ 혼은 비 창조요 신격의 일부다. 신체 속에 화신. 신체는 창조.
일반학자와 다른 점은 일반 학은 둘 다 창조, 플라톤은 몸을 지을 때 영을 주었다.
아리스토 톨은 혼을 동물적인 국면과 이성적인 국면으로 나누고, 혼은 하늘에서 창조되어 형성되는 신체에 배치됐다고 본다. 그런데 배치되는 시점은 인간의 신체가 모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혼을 창조하셔서 넣어준다고 한다.
이 교리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하여 로마 카톨릭의 교리로 발전했다.
에칼트와 그 후의 3철학은 신체와 혼의 독립적 기원을 접하고 그것들을 인생인격에서의 외관적 통일성을 주장했다.
이는 이분설적이다. 독립적 활동이나 상호관계 없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혼과 신체가 서로 그 어떠한 유기성도 가지지 못한다. 몸은 마음의 지배를 받아서 움직인다. 몸이 마음을 움직인다. 마음이 몸을 움직인다.
데칼트는 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서로 분리, 별개라고 한다. 몸은 몸대로 지배를 하려고 한다. 마음은 마음대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외관상으로 볼 때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3) 개혁파에서 주장하는 이분설.
개혁파에서 이분설을 주장하되 역시 일반적 보편적인 신학에서 말하는 이분설에서 뚜렷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이분설은 헬라철학과 다르다.
개혁주의에서 이분설을 주장할 때 물질적인 신체와 비 물질적인 혼을 말하고, 이 혼과 물질인 신체와는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유기적인 두 실체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고 쾌락적 실체로 보고 있다. 따라서 영과 혼은 같은 것이니 혼이 곧 영이라는 실체로 보고 있다.
그래서 비 물질성은 영혼이요, 물질성은 신체라고 주장하면서 죄를 지을 때는 결합적 동작이므로 사람이 행동할 때마다 그 전체의 행동이니 영혼이 범죄하는 것이 아닌 육이 범죄하는고로 육이 죽는다고 본다.
사람 안에 두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동시에 사람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한다.
※ 개혁파의 주장은 헬라철학과 다르다. 영과 혼은 같다. 신체가 먼저 지음을 받을 때 코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니 별개가 아니고 그 신체 속에 흡수되어 신체는 신령이 되어 버린다.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영육이 죄를 짓는 것이다.(영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그렇다면 사람이 신체고, 신체가 사람인가?
에베소서 2장 1절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사람이 죽었다는 말인가, 육체가 죽었다는 말인가, 영이 죽었다는 말인가?
실유적으로 영과 육을 구별할 수 있다.
미 중생자는 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 죽은 자이다. 사람은 살았지만 인간의 주체성인 영은 죽어 있다. 인간에게는 안 죽은 것이 있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실유성으로 나눈다. 육신의 소욕 영의 소욕, 양자될 것 양자된 것.
(4) 두 학설의 상이점.
앞에서 말한 이분설과 삼분설의 양론에 대하여 다 각각 그 주장의 타당성을 말하고 있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학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신체의 실존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영(프뉴마)은 비 물질성이기 때문에 인간의 오관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들리는 것도 아니고, 냄새로 맡을 수도 없고, 입으로 맛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서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 수도 없으나 실유성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다.
그런데 혼(전3:21)에 대하여 ‘프슈케’ 라는 호칭이 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영과 혼의 두 이름이 있다고 해서 각각 두 실체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영은 실체임에 틀림이 없으나 혼(프슈케)은 어떤 독립적인 실체라기보다 어떤 실체의 동작의 능력을 말한다. 이 혼은 실체인 영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이나 다른 어떤 무형의 동작을 말하는 것이다. 예: 사람 외에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혼이라는 칭호를 명사로 많이 쓰기도 한다.
※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다 실유성으로 볼 수 있느냐? 영이 혼이고 혼이 영이냐? 전도서 3장 21절에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라고 했는데 혼이 영이라면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고로 영과 혼은 구별된다. ‘사슴이 혼이 나서 도망가더라’ 하면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는 말인가?
영이 신체에 흡수됐다면 이론상 분리는 되나 실질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자가 있다. 영이 신체에 흡수된 것은 이론상 분리만이 아니라 실질적 분리도 된다. 실유적 관계가 있으면서 유기적 관계이다.
‘죽었다’ 하면 전인이 다 죽은 것인가, 한 면만 죽은 것인가?
영의 능력적 작용성을 영혼이라고 한다.
불신자는 영은 죽었지만 이성이 작용하고 있다.
대개의 학자들의 주장을 분석해 보면 이성을 혼이라고 하는 듯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성은 비 물질로서 무형적 작용을 하는고로 영의 작용과 마음의 작용을 인간이 정확하게 선을 긋기가 심히 곤란하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미 중생자의 영은 죽었기 때문에 활동불능임을 우리는 믿는다. 그럼에도 미 중생자들도 얼마든지 내적 무형적 작용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의 작용일까? 분명히 영의 작용이 아닌 마음의 작용이다. 영은 죽어 있으나 마음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은 작용중단 상태에 있지만 마음은 얼마든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 이성을 영에 결부시켜 이성적 영이라고 하고 있다. 만일 이성이 영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완전 타락(완전 죽음, 전적 무능, 활동 불능성)을 부인하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런고로 마음은 영이 아니다.
그리고 이성의 작용의 능력성을 혼이라고 할 수 있다. 불신자나 미 중생자의 혼의 작용을 인정할 수 있다.
※ 플레토: 물질과 정신이.
아리스토텔레스: 물질과 정신이 - 영육의 창조성.
데칼트: 물질과 정신이 상호 관계없이 작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작용한다.
일반신학: 양심을 영으로 본다.
● 통일과 두 요소.
개혁주의: 사람의 행동(영육)마다 - 사람의 전체다.
영이 범죄가 아니라 육이 범죄 - 마음을 영으로 본다.
영과 혼을 나눌 수 없다. 연합해서 영혼은 신체에 동작하고.
여기서 문제는 미 중생자가 말씀에 대해서 어떤 동작이나 행동에 갈등이 생길 수 있는가 이다.
영과 유기적 동화적 동작이 있고, 영과 유기적 비 동화적 동작이 있다.
(5) 이분설의 정설.
인성의 구조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 간에 구구한 이설이 있다. 그 중에는 ‘삼분설이냐, 이분설이냐’ 하는 것이다.
소위 삼분설을 주장하는 학자의 주장은 인간의 영의 실존적 실체와, 혼의 실존적 실체와, 육(신체)의 실존적 실체를 볼 때 인정을 받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이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인간을 물질인 신체(소마)와 비 물질인 것 전부를 영으로 보고 물질인 신체와 비 물질인 영혼이 결합이 되어 두 실체가 하나의 결합체로 되니 논리적 분리는 가능하나 활동적 작용적으로 불가분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삼분설보다 이분설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삼분설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 우리는 영혼 마음 양심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혼은 무엇인가? 혼은 어떤 실체가 아니다. 혼을 실체로 보면 삼분설이 된다. 혼이라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붙일 수 있다. 활동의 영은 독립적 실체이다. 능력적이다.
二. 전인(全人)에 대한 구조.
사람이란 물론 개체로 보면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인 이 사람을 구조적으로 분석을 한다면 다양하게 분석이 된다.
다양하게 세밀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우선 이분으로 나누면 물질성과 비 물질성으로 나누게 된다.
물질적인 단일실체와 비 물질성을 복합적인 단일실체로 보게 되면 이분설이 된다.
1. 물질적 구조.
순전히 물질이다. 이것을 육신, 또는 신체(소마, 싹스)라 하는데, 그렇다면 물질인 이것은 단일성 물질이냐, 복합적 물질이냐? 이 소마 역시 복합물이다. 즉 피부 모발 골각 피 신경 이것을 구별하면 골각이 피부이거나 고기일 수 없고, 피가 모발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자연생명, 육의 욕구, 정욕, 식욕, 본능적인 것 등의 소마나 싹스에 속한, 즉 육에 속한 모든 것을 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분리한다고 하면 인간은 삼분설이 아니고 얼마든지 그 이상으로 나눌 수도 있다.
육이라 할 때에 어떤 철학자라도, 어떤 신학자라도 앞에서 말한 것들 중에 그 어떤 하나가 빠졌다고 해서 그것이 육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 비 물질적인 구조.
한 인간 속에는 물질뿐만이 아니고 비 물질적인 요소가 있다.
비 물질적인 것에는 명칭적으로 하나만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작용도 단일적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즉 프뉴마-영, 프슈케-혼, 칼디아-마음, 조애-생명, 스네데시아-양심 등이 있는데, 마음만 해도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보면 선한 마음이 있고, 양심도 선한 양심이 있고, 그 외에 비 물질성에는 혼 마음 생명 목숨 생각 정신 등이 있는데 이런 모든 것을 영을 포함해서 정신계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물질적인 여러 가지 복합적 구조로써 단일신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몸 육체 신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비 물질성 전부를 하나의 복합체로 보아서 정신이나 영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헬라철학과 일반신학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다만 이분설과 삼분설의 차이점은 ‘혼은 실체성이냐, 아니냐’ 하는데 있다.
※ 삼분설의 가능성, 그러나 아닌.(루터의 주장)
인간구조의 삼분설이 인간의 지식으로 보면 어떤 면에서는 가능하게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물질인 육과, 비 물질인 일반적인 지성적 감성적인 혼과, 또한 하나님과의 지식적 동작을 할 수 있는 영으로 볼 때 삼분설도 타당성이 있게 생각이 된다.
그리하여 삼분설로 보는 구분은,
① 물질인 육체(소마, 싹스): 신체에 대해서는 순 물질과, 물질 속에 들어 있는 물질로 동작되는 것을 말한다.
② 정신적인 면: 비 물질성인데, 이 비 물질성 중에는 일반적 지성적 감성 적 의지적인 면을 정신면이라 하고, 이것을 총칭해서 혼 이라고도 한다.
③ 영적인 면: 영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성적 지성적 의지적인 것을 말 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차원 높은 신과의 신령적 관계성 을 맺는 요소를 말하며, 그 관계성을 영적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삼분설의 타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3. 이분설에 대한 정확한 분리.
많은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인성의 구조에 대해 이분설을 주장한다.
여기서 단순히 이분설이라 할 때는 그 답이 맞으나 그 이분설을 구체적으로 분리하고 해석을 하게 되면 그 답이 틀리게 나올 수도 있다.
많은 철학자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물질적인 육과 비 물질적인 정신계 혹은 영으로 보고 그렇게 분리했다. 또한 종교적인 면에서의 주장은 순 물질은 물질로서의 종교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고, 비 물질성은 전부가 물질성과 달리 근원적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1) 물질적인 육.
물질은 전부가 육이다. 이 육 속에는 자연생명과 감각성과 본능성이 있다.
(2) 비 물질적인 요소.
비 물질적인 요소에는 양심과 이성이 있다. 물론 자연생명과 감각과 본능은 물질을 떠나 어떤 독립적인 실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논리적으로 학적으로는 분리할 수가 있으니 실체적으로 물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비 물질성인 양심과 이성은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냐? ‘양심=이성=양심’ 인가? 다시 말해서 ‘피부=골각=피부’ 인가?
물론 피부와 골각은 하나의 실체이다. 그런 것처럼 양심과 이성이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실체로 보지 않는다. 이성을 떠나서 양심의 작용은 불가능이다. 양심은 이성과 지식과 동반해서 작용한다.
(3) 실존적 독립적 인격적인 영.
이 영(프뉴마)은 실존적 독립적 인격적인 실체이다. 물론 인간의 육과 함께 있을 때는 육신과 결합체로 인격적으로 작용을 하나 이 영이 중생 했을 경우 독립적 작용을 한다. 예를 들면 중생한 사람의 이성과 몸이 범죄했을 때 중생된 영은 그 이성과 몸과 결합되어 유기적으로 그 죄행에 동화되지 않고 그 때는 영은 분명히 독립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다. 우리의 이성과 몸이 죄를 짓고 있을 때 중생된 영은 양심을 통하여 작용을 하고 있음을 우리가 현저히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분설의 정확한 분리는 영과 육으로의 분리이니 독립적인 실체로서 작용하는 영이 있고, 또 영을 무시하고 결합적 유기적인 활동의 작용을 하는 신체와 비 물질적인 모든 것은 다 육에 속하는 것이다. 이 전부를 육이라고 한다.(영을 제외한)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이요,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진 것이다. 영은 복합체가 아니고 진리와 영감으로 결합된 독립적 결합체이다. 육은 물질성과 비 물질성이 결합, 혹은 물질적 복합과 비 물질성의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 즉 육의 완전분리는 논리적 분리라기보다 실질적 분리로 본다.
다시 말해 기독자가 세상에 존재하다가 죽음의 선을 넘어 천국에 갈 때는 영만 간다. 영은 다 간다. 그리고 그 때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은 영이 아니다. 이성과 양심은 영이 아닌고로 죽음의 선을 넘어 천국에 갈 때에 이 이성도 양심도 천국에 못 간다. 이것은 육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다. 영이 허물과 죄로 죽을 때에 함께 죽지 않고, 영이 중생할 때에 동시에 완전히 중생하지 못하고, 또 영이 천국 갈 때에 함께 못 가는 것은 영이 아니다.
영은 비 물질성이지만 물질인 육체나 물질적인 육체보다 능력적으로 세밀적으로 더욱 민첩하게 민활하게 동작하는 실체이다. 이 영은 정신이나 마음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이 영은 독립적인 무형적 활동을 할 수 있고, 또한 인격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실체이다. 따라서 이 영이 인간의 육과(이성을 포함한) 결합체로 있을 때에 영의 활동성이 다른 물질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 이성을 통하지 않고 이성을 거쳐 육만을 통해서 타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방언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고전14:14)
보통은 이성을 통해서 영이 작용을 하지만 방언을 하는 경우에는 자기가 기도를 하는지, 무엇을 하는지를 느낄 수 없이 하기도 하고, 방언을 외부로 했지만 방언을 하면서 어떤 나라의 말로 하는지를 느낄 때가 있고, 어느 때에는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이 영은 이성과 육이 무 동작 상태에 있을 때에도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그 때는 우리 이성이 영과 결합이 되지 아니 했으므로 영의 동작을 심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잠잘 때 이성과 몸에 소속된 전부가 잠들고 있지만 영은 신체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
영의 활동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자연법이나 생명법이나 육의 자연법을 초월하기 때문에 영은 잠들지 않는다.
‘신앙이 잠들었다, 영이 잠들었다’ 하는 말은 영 자체가 잠이 들었다는 말이 아니고 이성이 영의 작용에로 연결이 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는 말이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런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반사작용을 한다. 이 영이 진리와 접선상태에 있으면 영은 진리대로 독립적으로 얼마든지 작용할 수 있다.
만일 영의 작용과 육의 작용을 동일작용으로 보고 육의 작용이 중단되면 영도 동시에 중단되는 것으로 보아서 육이 잠들 때에 영도 같이 잠든다고 보던가, 영육을 동일체로 보아서 영의 작용이 육의 작용이요, 육의 작용이 영의 작용이라고 하면 이 영은 육이 죽을 때에 동시에 죽어야 할 것이다. 또한 육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에는 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육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에는 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육이 죽어 무덤에 있는 동안에는 영도 무덤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영육이 결합체로 있을 때는 동시에 영육의 두 활동을 할 수는 없으나 영이 작용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육이 죽은 후에는 영은 언제든지 동작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비유(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영육이 동시에 신령계에 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육이 언제 부활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다.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도 육이 부활 승천해서 천국에 갔다는 말은 없다.
아브라함의 육도, 부자와 나사로의 육도 땅에 매장된 채 썩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영은 신령계에 가서 뜨거움도 목마름도 고통도 괴로움도 느낀다고 했으니 그 느낌은 육적 촉감적 신경적 감각성이 아닌 순전히 영성인 것이다. 이것이 곧 영의 작용이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기 전 한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신 말씀은 그 강도의 영육이 동시에 무덤에서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그 강도의 육체는 무덤에 있을 것이고 그 영은 비 작용 상태로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의 작용은 독립적 인격적 진리와 영감으로 유기적 신적 동작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일반적으로 영육을 논리적으로는 분리하지만 영의 작용은 분리를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움직임을 영육 동시작용으로 보고 있다.
● 영육 동시작용설.
① 영이 주체가 되어 육을 지배해서 동시작용.
② 육이 움직일 때에 영도 동시작용.
③ 영도 육도 피동 됨이 없이 서로 작용.
④ 영작용=육작용=영의 작용.(보수측)
예: 술은 육이 먹었느냐, 영이 먹었느냐?
영육 동체작용이냐, 영이 독립적 작용을 하느냐? 잠들었을 때 영도 잠을 자느냐? 꿈은 영의 작용으로 보기 힘들다.
하나님 다음으로 민첩한 것이 영이고, 영 다음에 민첩한 것이 정신이고, 그 다음이 이성이다.
일반학자들은 정신계와 영계를 같이 보고 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하는 것은 영을 보고 하는 말이다.
이성과 몸이 비 신앙적 작용을 하고 있을 때 꾸짖는 것이 영이라고 본다. 영과 육의 동체작용으로 보게 되면 육이 죽으면 영도 죽은 상태가 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남보다 먼저 부활했다는 말인가? 강도보고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한 이것은 몸도 승천한다는 말인가?
영은 독립적 작용을 한다. 진리와 결합되었을 때 진리와 유기적인 작용을 한다.
三. 타락한 영의 상태.
영이 타락했다는 말은 진리와의 연결에서 단절되었다는 말이다. 진리와 연결이 된 것은 곧 하나님과 연결이 된 것이다.
영이 하나님과 단절이 되면 영은 타락한 상태요 죽은 상태이다. 영이 하나님과 단절이 되면 죽은 상태이니 작용불능 상태로 돌아간다. 이 작용불능 상태란 영육이 결합체로 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 영의 작용의 능력을 주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영이 작용불능이니 이 영이 그 상태로 육과 결합되어 있는 기간동안에는 선행도 악행도 못하고 완전히 죽은 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이 영은 이성과 몸을 지배하지 못하고, 이성과 몸도 영의 지배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영이 이 물질 시공세상을 벗어나서는 이성과 몸과 별개로 단독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실 예는 나사로와 함께 있던 부자의 경우를 말할 수 있다.
타락한 영은 육과 결합체로 있을 동안만 죽은 상태다. 진리와 단절이 된 고로 하나님이 그를 붙잡고 활동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 영은 작용불능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이 완전 사망, 비 작용 상태에 있지만 인간이 여전히 인격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은 영의 작용에 의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순전히 이성과 몸의 작용이다. 이 때의 이성과 몸의 작용운동은 중생한 성도들이 이성과 몸이 영과 결합되어 있지 않는 상태와 똑같다.
※ 영은 독립적 작용을 한다. 진리와 접선되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작용을 한다. 진리와 끊어지면 타락한 상태요, 작용불능 상태이다.
불신자의 영은 죽은 상태이고, 미 중생자도 마찬가지이고, 중생을 한 자도 타락한 상태는 그 영이 작용불능 상태이다.(몸을 입고 있는 동안) 그리고 신령계에 들어가서는 독립적 작용을 한다.
四. 거듭난 영의 상태와 작용.
사람의 영이 거듭나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했다. 죄와 사망이라는 것은 비 물질성이니 이것을 색소나 요소로 말한다고 하면 ‘뒤집어썼다, 입었다, 포박되었다, 감염 염색되었다’고 할 수 있고, 요소로 보면 사망성 죄악성으로 부패되었다고 본다.
영을 중생시켜 살릴 때 단순히 죽은 영에다 새생명을 넣어서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 자체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고로 먼저 그 영을 살려야 한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의 대형(代刑)을 입혀 탈색을 시켜서 죄악성을 제거해 요소적으로 법적으로 무죄성으로 만들어 타락하기 이전의 본래의 상태로 하고, 그 다음에(시간적으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행(代行)을 입혀 염색을 시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지게 해야 한다. 이것을 의의 예복을 입히는 것이라고 하고, 신학적으로는 칭의라고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본질과 본성의 변화라고 한다. 이렇게 된 영은 타락하기 이전의 원상복구 상태가 아니고 그 이상인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된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 중생된 영이 소유하고 있는 새생명은
근원적으로는 신의 생명이요,
순서적으로는 새생명이요,
소유적으로는 영의 생명이요,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이요,
능력적으로는 불사성, 불변성으로 중생된 영이다.
이 영은 언제나 진리와 영감으로 결합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이 성령을 내주적 내재적 결합적 영감이라고도 한다. 이 내재적 영감은 영을 중생시킬 때 들어와서 이 영과 결합된 상태로 영원히 유지하게 된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계신다는 말이다.
이 중생된 영과 내 속에 들어 있는 내재적 영감의 결합성이란 중생된 그 영은 영 자체로 보면 살아난 영이요, 또 작용적으로 보면 생명과 결합체(롬8:16)로 작용한다는 말로써 내주해 계시는 성령이 불휴적으로 작용을 하신다면 영도 불휴의 작용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결합의 주격은 성령이다. 주격자이신 성령이 주격적 작용을 하시고, 나의 중생된 영은 성령의 작용에 의하여 유기적 결합적 동화적 작용을 하는데 이성이나 육이 이 영의 동작에 동행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 자체의 작용이 중단됨은 없다.
영의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말은 영 자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이성과 몸이 중생된 영과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그것이 중단이라는 말이다. 영은 생명과 결합체로 있기 때문에 어떤 선행의 행동이나 생명운동을 하다가 중단하는 일은 없다. 계속적이다. 어떤 사람이 의행을, 신행을, 생명운동을 중단하고 있는 것은 영이 중단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과 몸이 중단하는 것이다.
만일 이 중단을 영이 중단하는 것이라고 한다고 하면 곧 성령의 활동이 중단한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된다면 생명운동을 중단한 죄에 대한 책임은 몸이나 이성이나 영이 아니라 성령이 져야 한다.
중생된 영은 독립적 인격적으로 언제든지 활동하며, 인간의 몸 안에 있을 때나 몸을 떠났을 때나 얼마든지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몸이 죽기 전에는 영이 그 몸을 떠나 외계에서 독립적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육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몸 자체의 단독적 작용은 구원이 아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사망계에 있는 것을 생명계로 끌어들이는 것을 말하는데 영이 자체적으로 단독적인 활동을 영원히 해 보아야 이성과 몸에 작용을 주지 못하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이란 영의 작용이 이성과 몸에 건너와 이성과 몸에 접선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여질 때 되는 것이다.
※ 영은 실존체 독립체이다. 진리와 접선되었을 때만 동작한다. 동작불능 상태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이 상태는 이질적인고로 하나님의 새생명을 거기다 넣을 수는 없다.
대형을 입히는 것은 무죄상태로 만드는 것이고, 대행을 입히는 것은 칭으로써 이는 의의 예복을 입혀 놓는 것이다.
고전3:16 - 중생된 영이 나의 속에 내주해 계신다. 영은 성령과 결합체이다. 주격자는 성령이다. 내 영은 성령과 유기적 피동성 동화성을 가지고 있다.
중생된 영은 진리와 영감이 하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요소는 전혀 없다. 왜? 죄악성을 완전히 탈색시킨고로! 말씀대로 살기 싫어하고, 순종하기 싫어하는 것은 영이 아니고 이질성이다. 찌꺼기 그것이 남아 있어서 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완전 탈색은 대형이다. 여기서 또 대행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입혀 놓으면 하나님이 하고 싶으면 나도 하고 싶고, 하나님이 하기 싫으면 나도 하기 싫은 것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중생된 영이다.
하나님은 피로가 없다. 생명과 영은 계속 돌아간다. 피곤을 느끼는 것은 이성이다. 영이 활동을 중단한다면 성령이 책임을 져야 한다.
영이 잠들었다는 말은 성령의 활동이 이성과 몸에 건너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것은 곧 이성과 몸이 영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것을 잡고 싸워야 한다.
이성, 몸 + 영 = 이성과 몸이 성화돼 나가고,
영 + 이성, 몸 = 영이 성장돼 나간다.
제八절. 도덕적 성질.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음받은 존재요, 이 인간에게는 도덕적 성질이 있다. 물론 이 도덕적 성질을 신의 성품이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신의 성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속성을 12속성으로 볼 때 공유적인 속성(8속성)과 비 공유적인 속성(4속성)이 있는데 이 속성을 하나님의 인격성이라고 한다.
이 하나님의 인격성 중에는 인간에게 전달된 인격, 즉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을 때 받은 인격성이 있으니 곧 8속성이다. 이 8속성은 다음과 같으니 ‘지혜 지식 선 사랑 거룩 진실 의 주권’ 인데 이 전부를 도덕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 인격성을 삼분해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으로 나눈다. 이것을 공유적인 속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 공유적인 속성은 ‘신의 자존성 영원성 완전성 단일성’으로 이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있는 절대적인 속성이다.
공유적인 속성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없는 하나님께서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 도덕성을 넣어 주셨는데 우리 인간이 가진 이 도덕성은 하나님의 자존적 영원적 완전적 무한적 단일적 절대적인 도덕성은 아니다. 하나님의 도덕성은 원형적인 도덕성이요, 우리 인간의 도덕성은 모형적인 도덕성이다. 이 모형적인 도덕성은 아무리 성결하고 깨끗해도 모형은 모형이지 원형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신령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을 안 했다 할지라도 본래적인 인간의 그 도덕성을 가지고는 그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도덕성은 인적으로는(타락하지 않았을 때) 완전한 도덕성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형적인 도덕성이지 원형적 도덕성은 아닌고로 이 인간의 도덕성은 하나님의 완전적인 도덕성에 비하면 이는 불완전한 도덕성이기 때문에 이 도덕성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진 도덕성이 인적인 도덕성이냐, 신적인 도덕성이냐? 신적인 도덕성은 만인에게 본래적으로 계시되어 있는 것이냐, 점차적 수락적이냐?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진 도덕성이 인적인 도덕성이라면 이 도덕성은 시간 따라 변하고, 지방 따라 변하고, 민족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이 도덕적 척도는 인류간에 따라 일정하지 못하니 어떻게 이 도덕적 척도를 기준을 한단 말인가?
※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도덕적인 존재이다. 도덕성은 인격성인데 인격성 전체가 도덕성이 아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타락을 했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간다?
그렇다면 만일 타락을 안한 상태로 죽음과 부활이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며, 천국에서 살 수 있는가? 갈 수 없는 조건은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단회적인 구속성을 입고 신의 도덕성을 나의 도덕성으로 입어 천국에 가는 것이다. 단어 하나가 구원을 좌우한다.
一. 양심.(συνείδησις-스네이데시스)
인간은 도덕적인 성질의 존재요,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양심이 있는 존재이다.
그러면 사람 속의 양심이란 무엇이냐? 원어는 συνείδησις(스네이데시스)라 한다. 혹 이것을 우리말로는 어진 마음이라는 뜻인데, 학자들은 ‘양심은 사람의 도덕적 생활의 근본적 가증’ 이라고 말한다. 그런고로 혹자들은 양심을 독립적 작용과 활동을 하는 기관으로 보아서 양심의 척도대로 사는 것을 선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은 죄악성이고, 양심의 인정을 받는 것은 선으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 양심은 그 지방, 그 시대, 그 민족에 따라,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척도에 의하여 분열과 대립성을 일으키기도 한다.
● 불파의 오류.(지식이 깨지지 않고)
양심은 완전히 파괴를 당하거나 없어지지 않지만 때로는 이 양심이 무디거나 흐려진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양심은 더러워질 수 있고, 화인 맞을 수 있다. 그런고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대형, 대행)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완전적인 도덕성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도덕적 성질은 모형적인 도덕성으로 원형적 도덕성을 입을 수 있는 바탕이라는 말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간으로 도덕적 완전자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진리와 영감으로, 또는 모든 존재와 사건과 환경을 동원시켜 단회적 구원사역이나 점차적인 중복적 구원사역의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 양심과 하나님과의 관계: 일반종교는 양심의 작용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양심은 정(正)과 사(私), 당위와 부당위의 분별로 도덕적 판단을 행하며, 당위와 부당위의 실천에 대립하는 명령을 발하므로 영혼의 도덕적 법정을 전개한다. 그렇지만 이 양심은 단독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그런고로 양심이 단독적으로 정과 사, 당위와 부당위에 대하여 바른 지식이 없이는 판단할 수 없고, 다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최고적인 기존지식에 의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정과 사, 당위와 부당위에 대한 도덕적 행동을 실천하도록 명령하니 만일 지식이 바르지 못할 때는 정을 사라고 할 것이고, 사를 정이라 할 것이니 이 양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기관이라고 단정을 짓기는 어렵다. 잘못하면 이 양심이 하나님과 적대관계를 맺게 하는 수도 있다.
※ AA하지박사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도덕적 문제들이 의지의 상태, 즉 동작과 양심에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의 관계에 관여하는 의지와 양심은 사람의 탁월한 도덕적 성질의 기초이다. 그러나 이 인적 영혼의 심력들은 각자가 모든 도덕적 구별과의 관계에서 운용된다는 것도 진정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① 지능적 인격은 인지와 판단에서.
② 감정적인 것은 유쾌한 감상 그것의 반대에서.
③ 의지는 선택 혹 거절함과 행동함에서 운용된다.
스트롱 역시 하지박사와 같은 뜻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능력을 지성 감정 의지들로 보고, 여기서 도덕적 행동의 실현의 큰 능력의 기관을 양심이라고 본다.
도덕적 성질을 가진 것이 인간이다.
① 지능적 감정적 의지적.(AA하지)
② 지성 감정 의지.(스트롱)
1. 동반한 지식.
양심은 지식이 없이 독립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양심은 지식과 동반해서 움직이고 있다. 즉 양심은 어떤 법칙에 의해서, 다시 말해 율법이나 도덕적 법적 지식에 의해서 작용하고 있다.
※ 양심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 본래적으로 양심에 하나님의 도덕법이 계시되어 있느냐, 아니면 수락적이냐, 아니면 외부로부터 받아야 하느냐?
각자가 양심대로 정한다면 양심의 기준이 어디냐?
2. 도덕적 분별과 대립.
양심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대립성을 일으킨다고 본다.
양심은 도덕성을 어겼을 때 대립성을 일으키지만 그러나 양심이 파멸될 수는 없다.
(1) 양심의 오류성.
양심은 유오할 수 있다. 우리는 양심이 받아들인 표준에 의하여 판단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따라서 때로는 양심이 잘못될 수 있다. 사람이 공의를 버리고 나갈 때 양심이 더러워지고 잘못되기도 하는 것이다.
(2) 양심은 독립적 작용의 실체가 아니다.
양심은 자기의 최고 지식의 지배를 받는 기관이다. 그런데 만일 인간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양심을 독자적인 절대 정확성을 가진 독립적 작용의 실체로 알고 일생동안 그 양심의 지배를 받고 살면서 자신은 양심의 가책이 없이 옳게 산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큰일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개개인의 양심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갑의 양심의 작용성과 을의 양심의 작용성과는 각자의 지식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건에 있어서도 양심의 작용도 달라진다. 그런고로 ‘양심시대에는 사람들이 양심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말은 부당하다.
물론 우리는 양심대로 살면서 양심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양심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전부는 심판거리다. 자기의 양심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하나님 앞에 심판거리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종별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맞았으나 자체적 자원적 활동이 아닌고로 이는 구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자는 양심도 지켜야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지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리지식이 사(私)가 되면 아무리 자기가 양심껏 살았다고 해도 구원은 될 수 없다.
모든 개개인의 양심이 각각의 척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각자 가진 최고의 지식이 단일지식일 때는 양심도 일치한 작용을 하게 된다. 그런고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리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 양심은 지식에 따라서 달라진다. 지식이 바꾸어지면 양심은 바꾸어진다. 주일을 지키지 않고도 양심에 가책을 안 받는 사람이 있다. 받을 것을 안 받고, 안 받을 것을 받는 양심이 있다. 그런고로 양심을 지키기에 앞서서 진리지식을 바로 배워야 한다. 예: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의 사진을 앞에 놓고 그 사진을 밟고 지나가면 살리고, 안 밟으면 죽인다고 할 때 진리지식을 알아야 이 시험에서 이긴다.
3. 신체와 영의 관계.
사람은 존재와 영과의 두 요소로 결합된 존재인데, 이 두 요소의 동작이 일상생활에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교계는 각이한 이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있다.
1) 일원론.
이 일원론은 영육이 분리가 없이 물질적인 육의 단독 혹은 단면적인 동작으로 본다. 마치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 그 과일 속에 어떤 영적 요소가 내재해 나뭇가지에게 땅으로 떨어지자고 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즉 물질인 과일이 비 물질적인 요소와의 상호관계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뭇가지에서 과일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동작도 그렇게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
2) 유물론.(有物論)
이 유물론은 기초적 실체는 물질이요, 영혼은 물질의 산물이라고 본다. 영혼은 물질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 영혼은 물질의 동작에 피동적 동화적 동작으로 본다.
3) 유심론.(有心論)
기초적 실체는 심(心)이요, 물질은 심으로부터 인출된다. 그러므로 육신의 동작은 절대적으로 심의 동작에 의존적이요 동화적으로 본다.
4) 유영론.(有靈論)
기초적 실체는 영으로 이 영이 물질이라고 칭하는 것을 자체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모든 것은 영으로부터 인출된 것이요, 이 영으로부터 인출된 물심은 영에 의하여 동작한다고 본다.
이 이론이 일반적으로는 상당히 타당성을 가진 것 같으나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하는 말과는 배치가 되니 만일 물심이 영의 산물이요 인출물이라고 하면 영이 물심의 창조자라는 말이 되는 것이고, 또 영이 죽었다는 말은 성립이 될 수가 없게 된다.
물심의 작용이 영에 의한 피동적이요 동화적이라고 하면 그 주체성인 영이 죽으면 물심의 동작도 죽어야 할 것이다.
※ 이 주장은 영이 창조자가 된다. 영이 심과 물질을 낳았다? 그렇다면 주체성인 영이 죽으면 어떻게 심과 물질이 움직이겠느냐?
5) 이원론.
이원론에는 두 가지 설이 있으니 본질적 이원론과 일반적 이원론이 있다.
(1) 본질적 이원론.
이 본질적 이원론은 영은 영대로 독립적으로 생겨졌고, 육은 육대로 독립적으로 생겨졌으니 각각 근원 혹은 기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렇던 것이 하나로 결합이 되어 한 사람을 이루고 있다가 또 분리돼서 갑의 영이 을의 육과 결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2) 일반적 이원론.
우리가 앞서서 헬라철학자들의 이원론적인 주장을 고찰해 보았다. 그 헬라철학자들의 이원론 사상을 보면 플레토의 이원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 데카르트의 이원론 등이 있다.
이들의 이원론 사상은 물질의 동작이 심에 미치고, 심의 동작이 물질에 미친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병행론, 기회론도 있다. 그리고 예설 조화론도 있다. 이 예설 조화론은 심의 동작이 물질에 미치지 않고, 동작이 심에 미치지 않고 각각 독립적 동작이 동시성을 이루어 동작한다고 하는 것이다.
※ 심이 물질을 지배치 않고, 물질이 심을 지배치 않고 각각 독립적으로 동시에 동작한다고. 하나님이 각각을 동시에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안 보고 안 듣고 어떻게 마음의 움직임이 있겠느냐? 그러니 몸이 마음을 움직였다고 하는 것이다.
(3) 상관론.(실체론적 이원론)
실체론적 이원론은 존재와 영혼은 서로 다른 실체들로서 교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 교호작용의 방식은 인적 고사를 회피하여 우리에게 신비스러움을 남겨주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결합적 유기적 관계성을 보아야 한다.
● 결합적 유기적 관계성.
우리가 비 물질인 영과 물질인 육을 엄격히 분석하면 이원론임이 틀림이 없다. 즉 요소적으로는 물질적 요소인 신체와, 비 물질적 요소인 영이니 논리적 실제적으로는 분리가 된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도 영을 창조하시고 물질인 육체는 흙으로 지었다고 말했다. 흙으로 육체를 지으셨다는 것은 일원론적 입장처럼 물질인 흙을 가지고 비 물질인 영을 지었다는 말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영이란 하나님께서 코에 불어넣은 생기(기운 바람 숨)이니 분명히 영은 비 물질성이라고 본다. 그런고로 이런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실체론적으로 이원론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영육은 일인격의 결합체이지 본질적인 이원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 ① 사람을 단일요소로 보는 자가 있고,
② 신체는 흙을 원료로 해서 지었으니 그 흙을 가지고 영도 지었느냐?
4. 영이 인격의 주체성.
인간은 분명히 비 물질적인 영성과, 영적 실체성과, 물질적인 육체로 결합된 존재인데 영이 단일인격의 주체성임은 틀림이 없다. 이 주체성은 신의 상대적 주체성이요, 목적 주체성이요, 계약적 주체성이다.
※ 물질인 육과 비 물질성인 영과의 결합성을 누구든지 부인치 못한다.
영이 서로 바꾸어져 들어 갈 수 있다면 나중에 죽은 후 정신없는 영이 부활시에 아무나의 몸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은 있을 수 없다.
인격의 주체성은 상대적 주체성이다. 곧 영이다. 죄를 지었을 때 고깃덩어리를 보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약적 상대적 목적적 조건도 전부 고깃덩이가 아닌 영이다.
5. 이성과 신체와 결합된 육체.
우리 인간을 영을 완전히 분리시켜 놓은 채 육체만 본다고 하더라도 육체 속에는 비 물질성인 이성과 육과의 신비로운 결합체를 이루고 있다. 어떤 학자들의 말처럼 물질이 심의 동작에 동화적 작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물질의 영향을 받아 심적 충동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니 심이 물질의 동작에 의하여 동화작용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결합은 신비한 결합이다. 물질인 신체 속에는 감각성이 있고 본능성이 있어서 감각과 본능을 존재라고 보고, ‘신체물질의 동작과 심의 두 동작 중에 어떤 동작이 선행적 동작이냐’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이 동작을 결합적 동작으로 보고 물질의 감각성이 이성에 의욕적 충동성을 넣어준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성의지의 결단이 물질을 동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 관계성을 가지고 심은 심대로 자기 위치, 자기 분야에서 물질과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고, 물질은 물질의 작용을 다하면서 심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6. 비 물질적 육에 속하는 이성의 절대 자유성.
우리 인간은 물질적인 요소와 비 물질적인 요소가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비 물질성은 전부 영으로 보고 물질성만을 육이라고 단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 물질성인 이성은 분명히 비 물질성이지만 이것을 영으로 볼 수는 없다. 이것을 비 물질적인 육이라고 한다.
비 물질적인 육이라는 용어는 사전학적 용어학적으로는 타당치 않으나 영과 육을 분리할 때는 이성을 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그러나 혹 학자들 중에는 이성을 이성적 영이라고 하나 이성을 영이라고 하면 많은 난제를 피할 수가 없다. 이성은 의지 마음 사상 생각 등등인데 이것은 분명히 비 물질성임이 틀림은 없으나 영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 중생자의 영은 죽어가고 있는 영이 아니라 ‘죽었던(과거완료) 자라’ 했으니(엡2:1) 이 죽었다는 말은 육체존재를 말함도 아니요, 육에 소속된 것을 말함도 아닌 영을 지시한 것이다. 즉 미 중생자들의 영은 완전히 죽었던 것이다.
죽었다는 말은 작용불능, 동작불능이라는 말인데 실질적으로 미 중생자들은 그 영의 작용은 완전히 죽은 상태이니 동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 중생자들도 얼마든지 이성의 작용을 하고 있다. 의지 사고 비판 결정 선택 등은 다 이성의 작용이다. 만일 이성이 영이라면 영이 죽은 자가 어떻게 이러한 활동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런고로 우리 인간은 이성과 육체와, 즉 물질적인 육체와 비 물질적인 육체와의 결합된 결합체로 보고, 또 영과 육체와도 결합된 결합체로 볼 수 있다.
7. 인격의 주체성인 영이 살았을 경우.(중생한 경우)
이 이성은 독립적 활동적인 실체는 못 된다. 이 이성은 언제나 의존성을 가지니 의존적인 실체이다. 의존적인 실체인 이 이성은 중생된, 혹은 살아있는 영에게 의존하여 동작, 작용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영에게 의존하지 않고 다른 어떤 요소에게 의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성이 영에게 의존하던지, 안 하던지 하는 것은 절대 자유성이 보장되어 있다.
전 인격은 한 사람 일인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요소는 물질과 비 물질이 결합되어 있고, 인격의 주체성은 단일성이다. 이 이성은 절대적 의존자이며 자유성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런고로 이 결합성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 영이 육에서 나왔느냐, 육이 영에서 나왔느냐, 아니면 동시냐?
하나님께서 영과 육을 지었는데 육은 흙이다. 그렇다면 영은 무엇일까? 육체를 지어놓고 영을 집어넣었는가? 코에 입김을 불어넣었으니 이것이 영인가?
‘입김을 불어넣었다’ 하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일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피조물인가?
‘중생된 영이 범죄한다, 안 한다’ 하는 변론이 되면 먼저 ‘이성이 육이냐, 영이냐’를 따질 것이다.
이성을 육에 결합시켜 말하게 되면 중생한 영도 범죄한다는 말이 된다. 이성을 영에 붙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 하는 이것이 문제가 된다.
중생치 못한 사람은 영이 죽었다. 여기에다 이성까지 포함시키면 이성도 죽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러나 지금 미 중생자도 이성은 작용을 한다.
이성과 영을 분리하라! 이성은 절대적인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
二. 의지(καρδία-마음).
의지는 우리가 흔히 쓰는 이성의 일부분이다. 넓은 의미에서 종합적인 의미로 말할 때는 이성이라 하는데 이 의지란 이성의 한 부분을 말한다. 여기서 의지라고 하는 것을 단순한 의지 면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하고 생각해야 된다.
인간의 의지라, 이성이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마음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음을 부정적인 마음과 긍정적인 마음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건을 두고 한 면으로는 긍정적인 의욕과 결정이 생기는가 하면, 반면에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기도 하니 이렇게 볼 때는 마음이 둘인 것 같기도 같다.
그러면 이 의지라고 하는 의지는 무엇인가? 인간은 의지적인 이성적인 존재임은 틀림이 없으나 이 의지의 위치는 어디에 있으며, 의지는 둘인가, 하나인가? 어떻게 1인 속에 두 의지가 있을 수 있느냐?
의지가 둘이라고 할 때는 분명히 무형적인 인간은 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 단일 육체이면 그를 두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한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렇다면 단일 육에 단일 의지인데 어찌하여 단일 사건에 있어서 의지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어지게 되느냐? 이것을 흔히 선심과 악심으로 표현을 하는데 어떤 사건에 있어서 선적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의욕은 선심, 그 사건의 선악을 구별치 않고 단순한 자기의 이해타산으로만 처리하려고 할 때는 악심이라고 한다.
그러면 단일 인간 속에 선심 따로, 악심이 따로 있는 것인지, 또한 단일 의지가 선적 작용과 악적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좀 구별하기 힘들다.
※ 양심만 쓰면 구원인가? 마음이 영이고, 영이 마음인가? 진리지식 버리면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다.
화인: 불에 달군 쇠도장으로 양이나 소에게 찍는다. 신경마비, 감각이 없다.
‘우상이다, 아니다’ 할 때 양심은 진리지식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니 진리지식을 버리면 우상을 섬겨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우상의 제물이라도 기도하고 먹으면 괜찮다고 가르침 받으면 먹게 된다. ‘음행, 목매어 죽은 것, 우상제물 먹지 말 것’ 먹지 말라는 지식을 가진 자와, 이 진리지식이 없는 자와 그 양심의 작용은 다르다. 양심은 서로 같은데 지식이 다르다.
자기 양심의 가책을 안 받고 살아도 전부 사망일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을 안 받으려면 진리지식을 빼버리면 된다.
의지는 몇 개인가? 악한 마음도 있고, 착한 마음도 있나? 양심은 자기 속의 최고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의지 이성 마음은 동시에 각각 작용을 하나 실체는 하나다. 집에 호주(戶主)가 여럿이 있다. ‘아버지, 목사, 여보‘ 그러나 하나다.
우리 인간 속에 이성이 있고, 또 그 속에 타락성 혹은 신학적으로 부패성이 있고, 불신자나 미 중생자일 경우 하나님이 인간으로 지었을 때 받은 본래성이 있는데 이 본래성은 인간의 타락성이나 부패성과는 대립적이다.
인간이 중생했을 경우에는 그 사람 속에 부패성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중생된 영성이 있는데 성경에는 부패성은 옛사람, 영성은 새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부패성이나 영성은 의지나 이성이 아니다. 의지나 이성은 활동적인 성격이요 자유적인 활동적인 실체이니 이 이성은 영성이나 부패성에게 의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이 부패성과 결합이 됐을 때는 도덕적 종교적 율법적으로 비 선적인 결정이 되고, 이 이성이 중생된 영성(중생자)에게 접선되어 피동될 때는 도덕적 종교적 선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선의 결정과 비 선의 결정은 이성이 한다. 그러나 이 이성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리고 이 이성이 교체되는 교체성은 어떻게 신속한지 어떤 때는 꼭 동시작용인 것처럼 느껴지니 이 때는 이성이 단일성으로 보이지 않고 둘로 보여지기도 한다.
본래성에 이성이 접선하면 어떤 결정체가 나온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라’ - 이성에게 말하는 것이다.
1. 양론의 대립.
결정론과 비 결정론이 있는데 결정론과 비 결정론은 의지를 단일 의지로 보되 ‘의지의 자유성이냐, 비 자유성이냐’ 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1) 결정론.
이 결정론은 이성 동기 선사(善事) 등등 다른 요소의 결의에 의하여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2) 비 결정론.
이 비 결정론은 인간의 결의는 자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혹 학자들 중에는 결정론과 비 결정론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의 결정이 타의 어떤 영향이 없이 결정된다고 본다. 또 혹자는 타의 영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도 한다.
이렇게 되면 결정론과 비 결정론은 결국은 죄책임 문제로 돌아간다.
※ 결정론은 벌써 그렇게 되겠금 되었다는 것. 비 결정론은 인간의 자발적이라는 것.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죄책이 없고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성을 부인하는 자는: 인간의 절대 자유성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
의지의 자유성을 주장하는 자는: 인간의 절대 자유성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
마음은 하나지만 요소는 둘이다.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당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으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사정없이 때려부쉈더라면 신나게 소원이 이루어질 터인데 붙잡혀가니 맥이 풀렸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옳으니까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고 능력이 나타나니까 따르고 있었다. 3일만에 부활하니까 그 때서야 깨달았다.
2. 인간의 의지와 자유행동.
과연 인간의 의지란 자유하는 것인가? 또한 자유행동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자유하는 행동자로 구성하는 것은 비 결정론에 의하면 의지의 자아 결정력이요, 결정론에 의하면 영혼의 자아 결정론이다. 비 결정론은 말하기를 ‘우리의 결의의 동작들은 원인이 없는 현상이니 오성의 판단과 성향들의 정서에 모든 예비적 조건들이 다 성취된 후에라도 의지는 평형상태로 남아 있어 선택의 행위는 의지의 자아결정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지 영혼의 예비적 상태들에 의하지 않으므로 내 속에서의 결의들은 우발적이라’고 한다. 결정론은 의지의 모든 동작은 영혼 자신의 자발에서 자원하는 것으로 본다.
※ 결정론은 영혼에서 움직여진다는 것이고, 비 결정론은 의지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
결정론은 영의 결정이 의지에서라고 하니 영의 완전 사(死)를 무시한다. 영이 죽어도 활동은 하니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과만 끊어졌지 다른 모든 작용은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성을 하나의 실체성으로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 자유권이 보장되어 있는데 이 자유는 육체의 자유성이냐, 영의 자유성이냐?
인간은 물론 영육이 결합된 존재이다. 결합된 존재로서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속성이요 인격성으로 독립적으로 존재가 가능한 실체성이다. 즉 육과 결합체로서도 존재할 수 있으나 육을 떠나서도 독립적으로 인격적으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실체성이다.
육이 자연생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 영과 육은 결합체로 있으며, 타락 전 인간은 그 영이 인간의 인격의 주체성으로 있다. 인격의 주체성인 이 영이 모든 육체에 유기적 자유적 결합적 지배관계로 있다.
이 자유성이란 영과 육의 자유성이니 타락 전에 인간의 영은 신의 능력에 속박 성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절대 자유성이 보장되어 있었으니 이 자유성으로 인해 타락을 했다.
또 인간의 절대 자유성이란 이성의 자유성이니 이성은 독립적 단독적 활동성적인 존재가 아니고 의존적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기관이다. 이 의존이란 인간의 본래성에 의존하던가, 타락적 부패성에 의존하던가 무엇인가에 의존해서 활동하는 기관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성은 영에게 의존할 수 있는 자유성과, 육(싹스)에게 의존할 수 있는 자유성이 보장된다. 영(새사람)에게 의존한 신체는 생명적 구원적 영적 결의 결정 행동이 나오고, 옛사람(부패성)에게 의존하게 되면 사망적 심판적 악적인 결의 결정이 나오게 된다.
※ 유심론은 마음에 의해서 영이 생겼다.
유물론은 육에 의해서 영이 생겼다.
유영론은 영에 의해서 물질이 생겼다.
예설 조화론은 영육이 각각 행동자이면서 동시에 의논 없이 활동한다.
자유성은 이성이냐, 영이냐, 육이냐? 영이 자유성이라면 영이 죽으면 몸도 죽어야 한다. 이성은 절대 자유성이면서 절대 의존성이다.
三. 도덕적 책임.
도덕적 책임의 구성에 의지의 자유행동이 근본적 요인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도덕적 책임을 지려면 인간의지의 절대적인 자유권과 지배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고는 이 도덕적 책임은 질 수 없는 것이다.
① 결정론은 의지가 도덕적 책임을 안 진다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② 비 결정론은 말하기를 도덕적 책임을 도의적으로 의지가 져야 된다고 한다.
이 논리들은 약간의 모순성이 있다. 결정의 절대적인 자유성이 없는데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주격자로서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말이니 부당하다.
그러면 육신이 행동한 것을 누가 책임을 지느냐?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이원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할지?
그러나 병행론적 기회론이나 예설 조화론적 입장에서 보면 육은 육대로, 영은 영대로 각각 책임을 진다고 한다. 그렇게 보게 되면 죄책임은 하나님에게 돌아 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들은 우리 인간이 행동한 행위에 대해서 그 책임성이 하나님에게 돌아간다고 단정을 짓지 못하고 육이 행동한 것은 영이 도의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보고 있다.
1. 도덕적 책임을 위한 선악의 구별.
우리는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논하기 전에 선악에 대한 구별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선은 무엇이 선이며, 악은 무엇이 악인가? 선과 악의 판단을 누가 하며,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다 두느냐?
물론 죄와 선, 악과 의에 대한 그 척도가 각 나라 민족 지방 종족 시대에 따라 법률적인 척도나, 도덕률에 의한 척도나, 또한 개개인의 양심율에 따른 척도나, 또 각 종교의 종교율에 의한 척도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그 국가의 법률적으로는 정죄가 되지만 종교율에서는 선이 되는 것도 있고, 또 국가법률에는 죄가 되지 않으나 도덕률에는 죄가 되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선악의 척도는 무엇이며, 그 판단은 누가 하느냐? 선악의 척도는 하나님이요, 선악의 판단은 하나님만 내리게 되어 있다. 즉 본질과 본성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이질적인 것은 전부가 죄요 불의이다.
선은 근원적 자체적으로, 본질과 본성적으로 하나님 한 분뿐이다. 활동적인 선악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 선이요,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것은 전부가 죄요 사망이다. 즉 하나님 당신의 마음에 들고 당신이 좋은 것은 선이요, 하나님 당신에게 안 좋은 것은 전부가 악이다.
※ ‘잘못해서 벌을 준다’ 할 때 죄와 악을 전제하고 전개하는데 그보다는 먼저 선과 악을 구별해야 한다. 죄악을 알아야 책임을 지우게 된다.
선과 악의 척도는 무엇이며, 이 판단은 누가 하느냐?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이것(진리법)은 최고의 법이다.
예;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으로→ 고등법원에서 대법원으로.
국가법에는 죄이지만 도덕법에는 죄가 아닌 것이 있다. 예: 병든 어머니를 위한 도둑질. 우선 어머니부터 살려놓으려고 한 이것을 가지고 여러 종교법에서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 그러니 어느 법이 척도가 되겠느냐?
우리는 먼저 그 사람이 가지는 척도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는 버려 두고 하나는 데려가고’ - 시간이 같고, 장소가 같고, 활동이 같고, 일의 양이 같은데 왜 한 사람은 버려 두고, 한 사람은 데려갔느냐? 일 잘 하고 열심히 한 사람을 천국에 데려간다는 말은 없다.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하나님께 붙잡혀 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인고로 이것은 믿음이요 선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은 모두 죄이다.
일반적으로 종별과 방편에서 선악을 찾는다 - 주관적 능동.
하나님은 근원에서 선악을 찾는다 - 피동적 능동.
절대적 피동적 자유성은 이성이다.
하나님과의 결합적 상태란 중생된 영이 진리와 영감에 유기적으로 더불어(결합) 할 때이다. 이 때는 주격이 영이다.
롬8:16 ‘성령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 성령과 중생된 영과의 결합체.
영→ 이성→ 몸→ 활동으로 된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표면상 육이 했지만 생명운동이다. 이 관계가 아닌 영에게 지배를 받지 않은 활동은 악이요 죄이다.
2. 일반적인 선악의 개념.
일반적으로는 선악을 외모와 종별과 방편을 보고 말한다. 그 방편이 비 법률적일 때는 국법에 의하여 정죄하고, 또 그 종별이 비 도덕적일 때는 도덕률에 의하여 정죄한다. 또한 일반적으로는 일반공중이 정죄를 할 때는 그것이 죄악시되고, 또 공중에 의하여 선시할 때는 선으로 인정을 한다. 일반적으로는 활동과 결정과 사리를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게 된다.
3. 종교적 도덕적인 관념.
종교인과 일반도덕은 선악의 판단을 종교율과 도덕률에 의하여 한다. 그러나 이 종교율과 도덕률은 인간세상에서 일정하지를 못하다. 각 종교마다 갑의 종교율과 을의 종교율이 일치한 것도 있지만 대립적인 것도 적지 않다. 만일에 이러한 종교율에 의하여 선악을 구별한다면 어느 종교율을 기준으로 해서 선악을 구별하나?
많은 종교율은 각치성이요 또 대립성이기도 하다. 불교의 종교율과 기독교의 종교율은 완전 대립이다. 그런고로 종교율에 의한 선악의 구별은 심히 어렵다. 도덕적인 견해도 마찬가지다. 도덕률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도덕률은 변하고, 인류에 따라 지방에 따라 도덕률은 변하고 있으니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지방의 도덕률에 맞추어야 하는 것인지? 그런고로 인간의 선악은 도덕적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종교율과 일반적 도덕률은 전부가 다 유기적인 율이요 인본적인 율이다.
선악을 상대성적으로 볼 때 어떤 한 개인에게는 선이 되지만 타에게 그 사실이 적용될 때는 선이 아닌 악이 될 때도 있다. 또 어떤 개인에게는 선이 되지만 전체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으로는 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선악이라는 선악은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법에 판결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는 인간의 선악이란 최고적인 하나님 앞에서의 선악을 말하는 것이다.
※ 세상사람들은 종별을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한다.
이 세상에는 애매한 것이 많다. 지방법원에서는 ‘선이다’ 하고, 대법원에서는 ‘악이다’ 하고.
종교율은 많다. 기독교 불교 유교 등등.
율을 찾기 전에 죄부터 찾자. 모르면 평생 죄짓고도 모른다.
4. 기독교적 성경적 견해.
이 기독교적 성경적 견해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견해와 특수적인 견해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고집하기를 성경의 법대로 된 것은 선이요, 성경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성경적인 면에서 애매한 것이 많다. 구약도 성경이요, 신약도 성경이라고 볼 때 신구약 성경에 일치되지 않는 부분도 간혹 있다. 이런 경우에 구약의 법을 따르느냐, 신약의 법을 따르느냐? 구약적 척도로는 정죄가 되지만 신약의 척도에서는 죄가 안 되는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떤 성경을 정확한 척도로 삼아야 하느냐?
기독교 신자들은 이럴 경우 종교회의에서 결의된 것을 절대적인 척도시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인적 결의이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맞는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교훈이 절대라고 본다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그들 나름대로 철저하게 성경대로(구약) 법을 지키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표면적 활동적으로 법을 철저하게 지켜왔지만 그들의 준법행위가 그 어느 것 하나도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선이라고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선악의 구별이란 심히 어려운 것이다.
※ ‘머리를 깎아라, 깍지 말라’ 구약 안에서도 ‘살인하지 말라’ 하고서는 사울에게는 아각 왕을 죽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느 성경을 지켜야 하느냐?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돈을 주고 사라’ 어느 법을 지켜야 하느냐? ‘항상 기도하라’ 그러면 설교시간에도 기도할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철저한 자들이요 성경적인데 그들은 선이 아니었다.
‘성경대로 살았다’ 할 때 성경대로만 살면 죄를 안 지은 건가?
그렇다면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가? 예수님께서도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았다.
성경은 계시이며, 문서계시 속에 알맹이가 들어 있다.
四. 생명율.
우리 인간의 선악의 판단의 기준은 법률도 아니요 도덕률이나 양심율이나 종교율이나 기독교의 외적 견해도 아닌 생명율이다.
‘성경적’ 이라는 말은 성경 문구대로 행함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의 본 뜻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성경에 쓰여 있는 문구 문맥 가견적인 것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생명율이란 성경 66권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객관적으로 볼 때는 생명율의 척도인데 활동적인 결합적인 면으로는 인간이 진리와 영감으로 하나님과의 유기적 결합적 동작여부에 따라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의사에 순종한다고 할 때 그 순종이 ‘하나님의 인격성에 피동성이냐, 아니냐’ 하는 여부에 따라서 선도 되고, 악도 된다는 말이다. 활동적으로 하나님에게 유기적 결합으로 피동된 것이 선이요, 하나님과 유기적 결합에서 피동되지 못하고 단절된 것은 그 종별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만한 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는 선이 못 된다.
선이란 근원적 자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선이요, 활동적으로는 하나님과 유기적 결합적 관계에서 피동된 것만 선이라 한다.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않은 것은 믿음으로 행치 않은 것이니 그 모든 것이 죄라는 말이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진리와 영감에 피동성 결합성 동화성을 말하는 것이다. 진리와 영감에 결합 피동 동화되지 않은 것은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이니 죄가 되는 것이다.
※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죄냐? 일반적으로는 종별적인 것을 가지고 죄를 정한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양심적으로 한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죄라고 말했다.
바리새인들은 죄를 몰라서 이렇게 되었나?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왜 몰랐느냐? 성경을 정확무오한 생활의 법칙으로 삼고 살았지만 왜 정죄를 받았나? 그들은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계시의 뜻을 몰랐다.
오늘날 자기는 성경 그대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본문 글자 그대로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믿음으로’ 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되 진리와 영감에 결합적 순종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진리와 영감의 감화로 됐느냐?
욥35: 인간의 악행과 선행이 하나님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근원적 자체적 선 - 하나님 자체.
활동적 선 - 하나님의 활동.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에게 붙잡혀서 한 것.
그렇게 한 효력이 무엇이냐? 하나님 앞에 붙잡혀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능력적 성질이 입혀진다.
자유선택권은 이성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생시와 생지에는 자유가 없다.(존재의 시작) 내가 이 세상에 나고 싶어서 낫느냐, 하나님이 나라고 해서 낫느냐?
자유성 - 존재 이후에 의지적 지각적 자유성을 가지고 있다. 본래성은 일반적 선이다.
1. 기독교적 성경적 바른(正) 책임성.
기독교에서 죄를 정하기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정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지켰지만 왜 죄인가?
인간이라는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성과 의무성과 주권성과 책임성이 있다. 그런고로 인간은 죄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혹 기독교에서 철학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죄의 책임문제에 대해 많은 논란들이 있다.
결정론과 비 결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절대 자유성이 부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시고, 또 모든 주위환경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동원시켰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으니 결국 연약한 인간이 그 죄책임을 진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또 ‘인간은 그 영이 물질이 아니어서 육을 지배할 수 없는데 육이 지은 죄에 대해 어떻게 영이 책임을 질 수 있느냐’고 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 그리고 하나님은 물질이 아닌고로 죄짓는 기관이 아니니 그 하나님에게 죄책임을 돌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육이 지은 죄를 영에게 돌린다는 것도 가혹한 일이고 하니, 그래서 죄를 짓는 자는 육이니 인간은 그 죄책임으로 인하여 일생을 죽음으로 끝마치되 이 육은 범죄치 않은 영과는 별개인고로 육은 죄의 대가로 필연적으로 지옥에 가게 되고, 영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 천국에 간다는 학설도 있다.
※ 죄책임에 대한 여러 주장들
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 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죄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숙명론)
② 물질은 영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은 물질의 지배를 받지 않으니 육이 지은 죄에 대해 영은 책임이 없고 죄의 대가로 육이 죽는다. 영은 다 천당 간다고.
③ 영은 죄를 짓지 않으나 도의적으로 책임을 지어야 되지 않겠느냐?(개혁 파) 예: 소가 남의 밭의 콩을 뜯어먹었으면 배상은 주인이 한다.
사건적으로 어디까지 책임을 지느냐? 이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먼저 ‘영이 죄를 지을 수 있느냐, 지을 수 없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는 하나님과 단절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물질인 육이 죄를 짓는 것과, 비 물질인 육이 죄를 짓는 것이 어떻게 다르냐?
영이 할 책임성 의무성을 다하지 못하고 위치를 지키지 못하면 죄이다.
육이 할 책임성 의무성을 다하지 못하고 위치를 지키지 못하면 죄이다.
마음은 자기의 의무성을 다 했지만 육은 다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 마음으로는 자기 할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신체가 영의 일을 할 수 있는가? 영이 해야 할 의무성과 책임성을 몸이 대신할 수 있는가?
1) 인격의 주체성적 책임.(완전 책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법을 정하셨는데 이 율(律)의 목적은 심판이나 정죄가 아니고 구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율을 주신 것 자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이 율(영이 지켜야 할 율, 이성이 지켜야 할 율)을 지키면 구원이 되고, 반면에 어기게 되면 심판을 받아야 한다.
어떤 범죄를 했던 범죄를 하면 영은 인격의 주체성으로서 그 죄책임을 져야 한다. 이 말이 영 자신은 그 죄를 짓지 않았으나 도의적으로 죄책임을 진다는 말은 아니다. 이 영이 인격의 주체성으로 죄책임을 진다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적 원인적으로 볼 때에 그 죄책임을 안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은 모든 죄책임을 완전히 지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 영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의 책임을 지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 영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도의적이 아니고 실범자로서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영이 끊어진(원죄) 것만 책임을 져야 하느냐? 아니다. 이성과 끊어진 것도 영이 책임을 져야 한다.
영은 끊어져도 하나님의 율법은 지킬 수 있다. 이럴 경우 계명을 지켜도 선이 아니다. 방편적으로는 선이지만 실질적 근원적으로 죄가 된다. 성경대로 살아도, 율법과 계명을 지켜도 죄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 종교말년이 그랬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그 자체가 죄요, 무슨 일을 해도 다 죄이다. 믿음으로(의) 진리와 영감으로 피동된 것이 아니면 모두 죄이다. 하나님과 영이 끊어지면 인격적 결합이 안 되니 모두 죄이다.
‘율법을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 끊어졌느냐, 아니냐’ 하는 이것이 문제다. 하나님과 끊어지고 다른 것을 붙잡으면 붙잡은 그것이 우상이다. 아는 죄보다 모르는 죄가 더 많다.
2) 인격적 자체적 영적 책임.
우리 인간은 인격자요 영원한 존재자로서 우리들의 죄책임은 영이 인격적으로 자체적으로 영적으로 지게 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 죄책임을 누가 지느냐’ 하는 문제로 많은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도의적으로 영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인간이 실수나 혹은 고범죄를 짓게 되면 범죄한 본인이 그 죄의 책임을 지고 죄의 양만큼 형벌이나 벌금을 내고 일단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경우도 있는데 자신이 과오를 범한 일도 없고 고범죄를 지은 일도 없으나 자기의 수권범위 내에 있는 존재나, 교육적 교훈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가 죄를 범했을 때 자신이 실범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범한 죄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경우처럼, 즉 스승이 제자로 인하여 도의적 책임을 지는 일도 있고, 부모가 자식으로 인하여 도의적 책임을 지는 일도 있고, 상사가 부하의 과실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책벌을 받는 일이 있듯이 영이 도의적으로 죄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엄격히 분석해 보면 도의적 책임이란 실은 억울하기도 하다. 부모가 자식을 잘못 가르치거나 스승이 제자를 잘못 가르쳐서 자식이나 제자가 죄를 지을 경우에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당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부모로서 성의껏 자식에게 교훈을 했지만 그 아들이 범죄를 했을 경우에 부모가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또 스승이 제자들에게 성의껏 교훈을 했지만 혹 제자들 중에 잘못되는 경우에 스승이 그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영이 죄책임을 진다는 것은 이와 같이 육이 범죄한 것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말은 아니다. 영과 육의 결합적 존재인 인간의 주격자인 영이 주격자로서의 자신이 범죄한 것에 대해 엄격히 책임을 져야 하고, 또 자신의 범죄로 인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기 전에는 신의 생명을 입기에 불가능해져서 이성과 몸이 선행 불가능하게 되어진 것은 전부 영이 범죄한 까닭이니 모든 책임을 단연코 영이 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이 범죄한 것에 대한 책임을 영이 다 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최초에 죄를 짓게 된 원인이 영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서이고, 그로 인해 점차적으로 모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으니 영이 모든 죄의 실범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모든 죄책임을 능히 다 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영은 모든 죄책임을 완전히 지고 죽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이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하여 완전히 죄책임을 졌으니 육은 그 책임이 없다는 말인가?
우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임성을 양면으로 보아야 한다. 양면으로 본다는 것은 심판에는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한 공심판과, 하나님의 지성법에 의한 사심판이 있는데 영이 자기의 모든 죄를 완전히 책임을 지고 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하므로 하나님의 지공법인 공심판에 의하여 영육이 다 무죄자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지성법에 의하여 사심판의 책임은 인격적 자체적 영적으로 본인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져야 한다는 이 말은 곧 영과 육이 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영이 범죄하므로써 그 책임을 지고 즉시 죽었고, 육은 그 범죄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죽는 것으로써 그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인격적 자체적 영적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책임성에 있어서 어떤 과오의 책임이 단회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어떤 과실을 범했을 때 그 죄의 중과에 따라 벌금을 물던가 시간적 형을 마치고 나면 그 책임이 일단 벗어지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어떤 과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단회적 유효기간적 징벌이 끝나면 그 책임이 벗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고 우리는 자신이 범죄한 죄책을 인격적으로 져야 되고, 자체적 영적으로 그 죄책임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라!
※ 도의적 죄책임은 억울한 일이 많다.
지공법은 공심판.
지성법은 사심판.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한 책임은 영은 영대로 단번에 죽었고, 육은 점차적으로 죽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한 공심판은 영이 다 책임을 진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전히 해결되었다. 고로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하여 나는 죄인이 아니다. 그러나 또 죄인이다.
권신찬파는 중생한 날을 알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어린아이 자기가 난 날을 아느냐? 변화는 중생한 자나, 못한 자나 다 한다.
중생을 하면 죄인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죄인이다. 사심판에 있어서 나는 죄인이다.
심범자는 죄책을 느낀다. 다윗은 용서를 받았지만 죄로 인하여 평생동안 눈물을 흘렸다. 바울은 ‘나는 아직 죄 아래 팔려 있다. 죄인 중에 괴수로다!’ 라고 했다.
(1) 징계와 책임.
인간세상에서는 인간들 보기에 법을 어겼던가 양심을 어겼던가 종교율을 어기면 죄라고 정죄할 뿐이지 생명법에 의한 죄성은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도덕법이나 종교의 율법에 의한 가견적 죄를 범했을 때 그 자에게 일시적으로 징계를 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범죄한 사람마다에게 다 동일하게 징계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자에게는 징계를 하시기도 하지만 하자에게는 징계를 하지 않기도 하신다.
그렇다면 징계란 범죄의 대가인가, 죄의 책임인가? 즉 어떤 범죄 사실에 대해 세상에서 일시적 징계를 받았다고 해서 영원한 자체적 책임성은 무시가 되는가?
※ 대개는 생명법은 모르고 가견적인 죄나 법적 도덕적인 죄만 말한다.
A, B, C가 동일한 죄를 지었어도 꼭 동일한 징계가 오지 않는다.
징계가 죄의 대가인가, 죄책임인가? 또한 징계를 받았어도 거기에 대한 심판이 또 있는가? 매를 맞았다고 해서 심판은 감점인가? 징계는 죄의 대가도 아니고 책임도 아니다.
(2) 현 세상에서의 불행과 죄의 책임.
현 세상의 모든 인류의 생활에서 행복과 불행은 각 개인마다 각이하게 다르다. 즉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이 행복과 불행이 죄책임이라고 볼 수 있느냐? 의행(가견적 가식적 육적)은 행복이 오고, 죄행 즉 불법은 불행이 오느냐?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가견적으로 행복한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의행의 대가요, 자신의 모든 불행은 죄의 대가라고 볼 수 있느냐? 그리고 죄행의 대가로 이 세상에서 불행으로 살았다면 죽음 저 편에 가서는 그 죄책임에 따른 불행은 없는 것이고, 의행의 대가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죽음 저 편에 가서는 그 존영이 감퇴가 되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일반적 지식과 이론들은 죄행의 대가는 불행이요, 의행의 대가는 성공과 행복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 기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보통의 죄행이 아닌 극악적인 죄행을 한 자인데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평안히 잘 살다가 죽을 때에도 고통을 모르고 편안하게 죽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현 세상에서 의행으로 살았어도 가견적 가식적으로 불행한 경우도 있을 것이니 이럴 경우에 그 불행을 보고 그를 죄인이라고 단정을 한다면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겠는가?
※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전부 죄의 대가라고 볼 수 있느냐? 행복은 의행의 대가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못 사는 것이냐?
법과 계명을 심판할 목적으로 내었느냐? 구원목적이다.
인간에게 생명법을 갖다 대면 모두 죄인이다.
죄짓기 전에 고난을 주어서 죄를 지었다고?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부(富)를 주면 죄를 안 짓겠느냐?
(3) 현 세상의 행복과 고난과 영원한 보상문제.
인간이 현 세상에서 불행하게 사는 자가 있기도 하나 행복하게 사는 자도 있다. 그런데 현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모두 의행의 대가라고 속단을 내리면 비 이치적, 비 성서적이다.
자신의 의행의 대가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면 천국의 영원한 존영이 감퇴가 되느냐? 즉 우리의 신앙행위에 따라 현 세상에서 보상을 받고, 현세의 그 보상으로 인하여 영원한 존영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의행의 대가를 안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한 선행의 대가를 이 땅에서 받으면 영원한 상이 없으리라’고 한 말은 ‘네가 현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현실을 누리면 영원한 존영이 감퇴된다’고 하는 말이다. 현 세상에서 행복을 주셨다고 해서 영원한 존영을 감퇴시키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현 세상에서의 행복은 보상이 아님을 단정을 지어라!
※ 기독자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은 믿음을 안 지켜서인가? 못 사는 것이 의행의 대가인가, 악행의 대가인가? 못 사는 것이 악행의 대가라면 그는 천국에서도 상급이 없을 것이니(못 살 것이니) 그 사람은 이중의 대가를 받는 것이다.
눈에 안 보이면 무조건 믿으면 되는가? 표면을 표준하여 말하지 말라!
(4) 자체적 영적 책임.
인간이 범죄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영원히 져야 한다. 택자인 경우 공심판의 책임은 예수님이 완전히 져 주었고, 사심판은 자기의 자체적이요 인격적이요 영적임을 알라! 자체적이란 능력적 실력적 민감적(향락성, 쾌락성, 만족성)이라는 말이고, 영적이라는 말은 이것으로 자기는 영원히 지속해야 한다는 말이니 이것이 곧 책임이다.
※ 도의적 책임은 벌받은 것을 다시 받는 느낌,
자체적 무능은 무엇을 할 수 없는 무능상태.
중생 후에 죄를 짓는 것은 영이 다시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영의 강제적 지배성이란 곧 영이 인간의 이성과 몸을 강압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영이 강압적으로 이성과 몸을 지배치 않은고로 이 영은 도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성은 영에게 강제지배를 받겠금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인간의 영은 그 인격의 주체성인고로 이성은 인격의 주체성인 영에게 완전히 자유할 수 없고 강권 강압을 받겠금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이 이성을 지배하지 아니할 때 이성은 그 영으로부터 자유한다고 본다. 그런고로 이성과 몸이 더불어 범죄할 때 영이 이성을 지배치 않으면 그 이성은 영을 떠나 방종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인간의 범죄라고 한다.
※ 도의적 책임성론: 이성을 절대 자유성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영이 이성의 자유성을 잡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성의 절대 자유성에 맞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절대 자유보장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라는 말은 영의 자유요, 이성의 자유를 말한다. 이성의 절대 자유성은 그 무엇에게도 강제 강권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것. 영의 자유성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영의 절대적 자유성에서 인간의 타락을 가져오게 되었고, 중생한 이후의 영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내재적으로 진리와 영감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자유는 생명과 단일성적이니 이 영은 절대적 의존성이요 자유성이다. 의존성 피동성 동화성이 자원이요 자유이다. 이 자유는 영원히 제재를 받지 않은 자유성이요, 다만 제재를 받는 것은 자신의 실력에게만 제재를 받는 것이다.
※ 타락 전의 영: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과의 단일성이 아니다.
인간은 원형이 아니고 모형. 하나님과 유기적 의존적 가범성 가사성.
● 타락 전의 영과, 중생 후의 영과 다른 점.
타락 전의 영: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과 단일성이 아님. 가범성적 가사성적이다.
중생 후의 영: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었다. 성질적으로 하나님과 단일성. 그리스도의 중보로 하나님과 절대로 끊어질 수 없다. 자유성이 의존성이요, 의존성이 곧 자유성(자유하는 종)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예: 어떤 자가 종을 사서 놓아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자신을 사서 놓아준 주인에게 자원적으로 들어가 능동적으로 자유하는 종으로 산다.
종은 제 마음대로 하는게 아니라
① 먼저 주인의 성질을 파악해야 한다.
② 사건이 왔을 때 주인에게 묻는다.
이성의 자유란 중생한 후에 영은 완전 깨끗 거룩하여졌기 때문에 그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과의 단일성적이지만 이성은 영이 중생함과 동시에 단회적 찰나적으로 중생하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성화 되어 나가는 기관인고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 단일성이 아니고 이질성인데 이 이질성 그대로 절대 자유하는 기관이라는 말이다.
이 이성은 절대 의존적이면서 자유하고 있다. 새사람인 중생된 영에게 의존하여 활동할 수도 있고, 옛사람인 육(싹스)에 의존하여 활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이 육과 접선되어 있을 때 영이 그것을 강제적으로 끌어올 수는 없다. 또 이성이 영과 접선되어 영에게 피동 되어 있다가 그것을 떠나서 옛사람에게 갈 때 영은 그 이성을 강제적으로 붙들어 매지는 못한다. 마치 우리 인간이 성령에게, 진리에게 붙잡혀 활동을 하다가 육으로 기울어 질 때 성령이 붙잡을 능력은 있으나 계약적 관계상 강제적으로 붙잡지 못하고 놓아 둘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도 이성이 육으로 기울어질 때에 그냥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은 진리로써 양심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권고는 한다.
성령이 외부에서 진리를 통하여 사건적으로 존재적으로 활동적으로 회개시키는 운동을 하는데 이 때 회개하는 자는 이성이다. 아무리 성령이 외적으로 회개시키는 운동을 한다고 해도 인간 자기가 회개치 않을 때는 성령도 어쩔 수가 없다.
※ 심판이 있는고로 이성은 절대 자유다.
성화를 입는 방편은 사건과 종별과 환경과 형편에 따라 다양적이다.
중생 전에는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영이 도의적으로 지지만 중생 후에는 못 진다. 진리와 영감을 보내주지 않으면 영이 성장을 못한다. 그런고로 진리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장하지 못한다. 옳은 스승을 못 만나면 성장에 지장이 있다.
2. 인간(인성)의 번식.
우리는 인간학 면에서 인간을 하나의 씨(종자)로 본다. 그런데 우리가 이 씨를 육만으로 보아야 하느냐, 영만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영육 전 인간을 다 씨로 보아야 하느냐? 혹자들은 육만으로 보는 자가 있고, 또는 영육으로 보는 자가 있다.
전 인간을 하나의 씨와 같이 번식해 나오는 존재라고 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 대개 세 가지를 말한다.
① 선재론.
② 유전론.
③ 창조론.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선재론.
선재론은 우리 인간의 영과 육이 생기기 전에 이미 어떤 세상에 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 생겨졌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혹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 아담의 영을 창조하실 그 때에 모든 인간의 영을 동시에 다 창조해 두었다가 인간의 존재 하나 하나가 구성될 때마다 그 존재 속에 영혼을 넣어준다는 학설이다. 이 학설들 역시 일치하지 않다.
① 관념적 선재론.
실제적 선재가 아니고 어떤 관념적으로 영이 선재해 있다가 존재가 있을 때 그 영이 들어간다.
② 예지적 선재론.
실질적으로 영이 선재하지 않고 예지적으로 영이 선재하고 있다가 존재 속에 들어간다.
③ 계획적 선재론.
인간의 존재가 생겨지면 영을 넣어주기 위해 계획하고 있다는 것.
④ 실제적 선재론.
영은 그 이전에 선재하고 있었는데 선재하고 있었던 그 영이 존재가 생겨질 때 들어간다는 설.
(1) 진술.(인간영혼의 선재론에 있어서의 여러 학설들)
① 플레토의 진술.
육체의 수만큼 인간의 영이 선재하고 있었는데 그 영의 선재 수만큼 육체가 산출되기 때문에 이미 선재하고 있는 영이 다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영이 감각적으로 존재로부터 인출되지 않는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키 위해서 이것을 주장한다.
② 필로의 선재론.
영혼이 존재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ꊱ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유출물이다.
ꊲ 죄의 선재.
ꊳ 형벌로 영은 존재 속에 수감되었다.
ꊴ 그런고로 이 영혼은 존재로부터 해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혼의 수대 로 존재가 난다고.(고로 산아제한이 소용없다)
③ 오리겐의 선재론.(영의 선재설)
영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선재하고 있었다고 한다.(창1:27의 창조를 육 창조로 봄)
이 설은 원인의 이원론을 명백히 주장하지도 않고, 악신 선신의 이원론을 주장하지도 않는 물영 이원론 사상에 근거한 철학이니 물질인 육체가 창조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인간의 영이 창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철학사상이나 플레토의 철학사상과는 조금 다르니 일반적인 선재론은 육체의 수만큼 인간의 영이 선재하고 있었는데 그 영의 선재 수만큼 육체가 산출되기 때문에 이미 선재하고 있는 영이 다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반해 오리겐의 주장은 좀 달리 영의 선재 수와 물의 선재 수와 물영 동수성을 주장치 않는다. 다만 막연하게 영은 육보다 훨씬 더 많은 수로 선재하고 있는데 그 영이 범죄하므로 범죄한 그 영을 위하여 물질인 육을 창조하고 생산해서 선재하던 영을 그 육체에 수감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형벌의 기한만 차면 그 영들은 영의 세계로 간다고 한다.
※ 일반적인 선재설은 영의 수와 육체의 수가 같다. 그 수가 다 차면 심판을 한다고 한다. 오리겐은 육체보다 영이 더 많다. 필로는 선재세상에서 범죄한 영의 감옥이 곧 육이다. 고로 출감하는 도를 닦아야 한다. 해탈되면 영은 그 영의 세계로 간다.
일반적인 주장과 다른 점은 영이 전생에서 크게 죄를 지은 자와 적게 죄를 지은 자에 따라서 육의 고통도 다르다고 한다. 이 고통을 보아서 범죄의 형벌을 알 수 있다. 오리겐은 감옥의 죄의 형기가 죄 지은 각자마다 다르다.
④ 독일의 신학자.
언제 어느 때 인간을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
(2) 이의.(異議)
인간의 영혼에 대한, 혹은 인성의 번식에 대한 선재론적 주장에 대해 많은 이의가 있다. 물론 각자 주장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나름대로 타당성을 전개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에 대한 이의도 들어봄이 좋을 것이다.
① 비 성서적이다.
인간의 번식에 대해 선재론적 주장은 비 성서적이라는 것이다. 성경 어떤 구절에도 위의 사람들이 주장한 바와 같은 그런 사건들을 찾아 볼 수 없다. 가령 필로나 오리겐이 주장한 것처럼 인간이 선재세상에서 범죄하여 물질인 세계로 와서 육에 수감되었다는 성구는 신구약 66권에 없는 것이다.
※ 선재론을 성경이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성경구절에도 없다. 비슷한 것도 없다. 그래서 비 성서적이다.(롬5:12, 창1:27)
② 물영 이원론에 기초했다.
선재론적 주장의 영이 선재세상에서 선재적으로 실존하고 있다가 물질세계에 와서 물질인 육 속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물영 이원론에 기초한 것이니 이 물영 이원론은 물질인 육과 비 물질인 영과는 결합적인 혹은 유기적인 어떤 관계도 없이 다만 영은 본래적으로 물질과는 상관없는, 혹은 물질인 육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영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는데 범죄하므로 육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대로 영이 범죄하므로 영을 수감하기 위한 목적으로 육신을 창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창조의 목적과 근원과 원인과 실유성이 전부가 물영 이원론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물영 이원론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영이 곧 육이요, 육이 곧 영이라’고 하거나, ‘영을 창조하니 육이 생겨진 것이고 육을 창조하니 영이 생겨졌다’고 해도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영의 창조와 육의 창조가 시간적으로 동시성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은 분명히 육은 물질인 흙을 원로로 해서 창조했다고 했고, 영은 물질인 흙으로 창조치 않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었다던가 혹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직접 창조했다고 했는데 이것을 물영 이원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 물영 이원론은 철학적인 용어이다.
신에 대해서 이원론을 주장하는 자도 있다.(영원한 복음 한애녹) 자존자는 둘인데 선신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악신도 있다고 한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옆에서 악신이 흔들어 버린고로 선신(하나님)과 악신이 싸우게 되었으나 결국은 선신이 이긴다는 것.
① 1대 1로 투쟁을 하면 선신이 이기지만 어떤 활동성에 있어서는 선신이 하는 일을 악신이 흔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선신은 구원운동을 함.
② 이 세상은 선과 악의 싸움터라고.
인간을 어떻게 보면 이원론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육을 창조해 놓고 코에 불어넣은 김이 영이다?
창세기 1장 27, 28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영과 육은 개체성이 아니고.
③ 인격적 의식이 없던가.
만일 이들의 주장과 같이 영과 육이 완전한 독립적인 실체들이라면 육이 없을 때, 즉 영이 육에게 수감되기 전에 영이 의식적 실체로 존재했고, 육은 육대로 의식적 인격적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 영과 육의 두 인간이 만나 한 인간이 되어 영이라는 인간은 내재하고, 육이라는 인간은 외재하면서 각각 독립적 의식적 인격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가 육 속에 있던 영이 떠나도 육은 단독적으로 의식적 인격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 물영 이원론의 주장처럼 영은 독립적 인격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육도 그러하다고 하면 영도 독립적 한 인간이요, 육은 육대로 의식적인 한 인격인 두 사람의 결합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싫으면 서로 인사하고 개체로 있는가?
영은 육신의 죽음 이전에는 모든 인격적 활동을 독립적으로 할 수 없고 육의 인격적 활동을 통해서만 활동을 한다. 심행과 물행을 떠나서는 영행을 할 수가 없다.
물영 이원론: 인격의 주체성은 둘이다. 동시에 두 인격이 작용을 한다.
④ 죄의 기원과 하나님의 공의를 밝히지 못한다.
만일 인간의 영이 선재세상에서 범죄하여 물질계로 쫓겨와서 육체에 수감된다면 인간의 죄의 기원은 달라질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기원은 에덴동산인데 이들이 말하는 죄의 기원은 육체가 생기기 전 영만이 있을 때 범죄했다고 한다.
이 이론은 최초 범죄의 시험의 시초를 육신이 없는 상태로 후퇴시킨 다음에 하나님이 그 타락한 자들을 회복시키기에 심히 곤란한 상태에 있다고 함으로 죄의 기원에 대해 난점을 만들게 된다.
※ 하나님의 공의가 애매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애매해진다.
⑤ 신체를 사고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신체를 사고적인 그 무엇으로 만드는 논리이니, 영혼은 처음에 신체가 없이 존재했으나 범죄하므로 후에 이것(육체)을 받아 취했다고 주장하니 이렇게 말함은 사람과 천사와의 구별을 어렵게 한다. 즉 사람도 원래는 천사처럼 비 물질적인 신체로 있었다고 하니 인간이 육체를 입기 전에는 천사로 있었다는 논리가 되고 만다.
⑥ 인류의 통일성을 파괴한다.
이것은 인류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이니 모든 개인의 영혼들이 현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하면 인간의 통일성이 파괴된다.
⑦ 의식의 지원이 없다.
사람의 신체가 영혼의 감옥, 즉 형벌을 받는 곳이라는 사실을 영혼이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도리어 신체와 영혼의 분리를 공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재론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물영 이원론이다. 이단적 학설이다.
2) 유전론.
유전론이란 인간의 신체가 부모로부터 출생할 때 영도 동시에 그 부모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 인간의 육과 영이 같이 부모로부터 생겨졌다고.
그렇다면 육은 물질이니까 전가가 된다고 하지만 영은 어떻게 전가가 되느냐?
(1) 진술.
사람은 영도 육처럼 부모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진다고 하는 이 진술은 자손은 그 부모의 자손이라는 것에서부터 그 원리가 생겨지는 것이다.
자손이 부모로부터 난 자손이 아니라면 그 자손이 그 부모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런고로 자손이라는 말은 신체만 그 부모의 자손이 아니고 전인적인 자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① 영육의 구별이 없이 전인이 동시에 출생했다는 말이다.
만일 인간의 영혼이 부모로부터의 유전이 아니라면 물영 이원론의 선재론일 것이요, 그렇지 않고 인간의 영의 창조론을 주장한다면 그 영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즉 인간의 신체가 구성되어 있을 때 언제 어느 시에 하나님이 그 영혼을 창조해 넣었다는 말인가?
※ 인간이 출생시 영육이 동시에 출생한다. 그게 아니라면 물영 이원론이다. 만일 창조론이라면 언제쯤 창조해 넣겠느냐? 모태에서 막 나올 때 창조해 넣었겠느냐?(모태의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부정모혈로 착상될 때 창조됐다고 보는 자도 있다.
② 신체는 신체로부터 유전되고, 영은 영으로부터 유전되고.
사람이 출생할 때 시간적으로는 영육이 동시에 유전이 되지만 신체로부터 영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고, 영으로부터 신체가 유전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연히 영과 육을 분리했다. ‘영은 영이요, 육은 육이니라’ 했으니 육의 유전과 영의 유전은 엄연히 분리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체는 물질이 유전이요, 영은 비 물질적 실유적인 유전이다.
※ 영이 신체로 유전되느냐, 신체에서 영이 유전되느냐? 신체유전은 부모로부터.
아이가 난자(母)냐, 정자(父)냐? 고깃덩어리 유전은 아버지의 것만도 아니고 어머니의 것만도 아니다. 영의 유전은 부모의 혼합적인 유전이 아니고 부모로부터 유전이다.
③ 영혼의 절단적 유전론.
부(父)나 모(母)의 영혼이 한 토막 잘라져서 유전된다.
④ 영은 부(父)의 영으로써 유전됨.
우리가 여기서 유전론이라고 하는 말은 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체의 유전성은 가식적이요 가견적인고로 생물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니 이의함이 없다. 그러나 영은 비 물질성이요 불가식적인고로 ‘유전론이냐, 선재론이냐, 창조론이냐’ 하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의 번식은 부모로부터 유전됨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난 그 후에 또 다른 사람들을 지었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 유전했다면 아버지의 영이라고? 예: 옥수수가 밭에서 나느냐, 씨에서 나느냐?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가 무죄성이 되지 만일 마리아의 영에서 나왔다고 하면 예수님도 원죄를 지고 나온다는 말이 된다. 이 원리를 물질을 가지고 설명하기 어렵다.
현재 유전론과 창조론이 있다. 기본교리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과 관계가 없다. 이런 것을 가지고 싸울 필요는 없다.
(2) 증명.(유전론이 옳다고 하는)
우리가 인간의 번식이 ‘유전론이냐, 창조론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라고 하면 영육을 합한 것을 인간이라고 하지 영을 떼 놓고 육만을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일 선재론을 물영 이원론이라고 한다면 창조론 역시 물영 이원론임이 틀림이 없다. 왜? 물질인 육은 부모로부터 유전을 받고, 그 속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아 일단 물질인 육체가 구성된 후에 넣어준다고 하면 이 역시 물영 이원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인간의 번식’ 이라고 하는 말도 육만의 번식이라고 한다면 ‘전인적 번식’ 이라는 말은 쓸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영육이 아물러 조상으로부터 유전되는 것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라고 하면 영육 결합체로 합일된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물체만 있고 그 속의 영과 자연생명이 떠나게 되면 이것은 하나의 인간으로 볼 수 없다. 명칭 자체가 신체나 송장으로 바꾸어진다. 그런고로 인간의 그 육이 부모로부터 태어났다면 영도 조상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 라고 하는 말은 영을 별도로 창조했다는 말이 아니고 중생된 영 전부를 ‘모든 영’ 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중생된 영은 그 영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중생됨, 거듭남’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로 난 자, 거듭난 자, 중생한 자’의 하나님을 ‘영의 아버지’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 아버지께로써 낫다는 말은 본래 그 사람이 영이 없었는데 중생할 당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영이 생겨졌다는 말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 영을 지었다는 말도 아닌 죽었던 영을 다시 신의 생명으로 살려 놓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영’ 이라는 말은 ‘중생된 모든 영’ 이라는 말이요, ‘모든 영의 아버지’ 라는 말은 중생된 모든 영은 하나님께로 낫다는 말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영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 선재론은 물영 이원론이다. 창조론도 역시 물영 이원론이다.
선재설: 육체는 영의 감옥.
필로는 영의 해탈을 주장.
오리겐은 영의 죄대로 고생을 받아야 한다.
‘모든 영의 아버지’라 함은 인류 전체의 영을 말함이 아니고 중생자의 아버지로서 이미 있었던 영이 죽어 있었는데 이것을 살려 놓았다는 면에서의 말이다.
(3) 진술.(성경적 제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매 사람마다의 영을 창조했다는 성경구절이 없고 다만 일남일녀로 창조했다는 말만 있다.(창1:27, 28)
이 일남일녀라는 말은 육을 말하는 것인지, 영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성이나 구원 선택성을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자는 육이라기보다는 영임이 틀림이 없고, 그렇다고 또 육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육을 같이 보되 육보다는 영을 주격으로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했다는 말은 영을 중심으로 창조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육의 창조는 흙을 빚어서 창조했다고 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한 번 창조하신 후 그 다음에 인간 개개인을 창조했다는 말은 없고 ‘누구는 누구에게서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낳고’ 하고 있다. ‘누구를 낳았다’는 말은 신체만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성경에 인간의 신체는 조상으로부터 나고, 거기에 대한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이 없다.
① 하나님께서 기운을 그 코에 불어넣어 주셨다.(창2:7)
이 기운(생기)을 인간의 영혼으로 보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육체는 인간이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만들어진 그 육체에 기운인 영혼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만 그 코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지 그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코에 기운을 불어넣은 적은 없고,(하나님은 코에 기운을 한 번만 불어넣어 주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생기(영혼)가 되어 그 영혼에서 인간의 모든 영혼은 유전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②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고전11:8)
이 말을 보면 육은 분명히 남자가 여자에게서 낳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영육이 유전된다는 것이다.
③ 하나님께서 창조작업을 6일 동안에 완전히 마쳤다.(창2:2)
성경은 분명히 당신의 창조가 6일만에 마쳤다고 했는데 인간의 영혼만은 계속적으로 창조하신다는 것은 타당치 않다. 일단 하나님의 직접 창조작업을 마치고 난 후 창조된 그 신체들이 번식해 나간다는 것이다.
④ 자손은 그 조상의 허리에 있다.(창46:26, 히7:9,10)
‘자손은 조상의 허리에 있다’는 말은 육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영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고로 인간은 그 육체만 신체만 부모로부터 유전된 것이 아니고 영육이 아울러 유전된 것이다.
영은 그 개체 인간의 주체성이다. 그런데 이 주체성인 영을 무시하고 육만을 지적해서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없다.
※ 창세기 2장 2절에서 창조작업을 마쳤다.
‘레위는 아직 그 조상의 허리에 있다’ - 아브라함은 레위가 나기 전에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뜻.(예수님을 상징, 족보가 없다) 이 때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고?
⑤ 동식물 생활의 유추(遺推).
이 주장은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을 영으로 착각하는 주장이다. 인간의 영은 출생 시에 출생 전의 원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질은 영이 아니고 이성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식물 생활의 유추로써 인간의 영혼의 유전론을 증명하는 것은 어색한 점이 없지 않다. 동식물들이 세상에서 무수히 번식되어 가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똑같이 번식이 되어간다는 말인데, 물론 숫자적으로 한 동물이 많은 새끼동물을 번식하는 것처럼 한 인간이 많은 인간의 영혼을 유전 번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소는 소로써 소를 번식하고, 개는 개를 번식하는 것처럼 그 조상의 영혼의 선한 성질대로 유전되는 것을 영혼의 유전으로 보고 있다.
⑥ 정신적 특수성의 전승.
사람은 유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육체도 부모의 체력에 따라 유전이 되고, 성질도 부모의 성질에 따라 유전된다고 한다. 즉 성질이 곧 영이라는 말이다. 육체의 유전은 가견적이고, 영의 유전은 특수적인 정신면으로 보고 있다.
육체가 유전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영도 유전했기 때문에 부모의 성질을 닮았다는 말이다.
※ 학자들은 비 물질 전부를 영으로 보고 있다. 성질을 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외형이 아버지를 닮은 자는 아버지의 성질을 닮았는가? 어머니의 성질을 닮은 것이 어머니의 영인가? 예수님의 영은 마리아의 영인가?
⑦ 원죄유전의 기초.
원죄를 증명하려면 영혼의 유전론을 떠나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원죄유전을 기초로 하면 영혼도 유전이라는 말이 된다.
⑧ 성육신 교리에 포함.
예수님의 영혼이 인간 마리아의 영혼에서 유전된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4) 이의.
여러 철학자들의 주장이나 신학자들의 주장에 이의가 없지는 않다. 물질적 가견적인 것에 대해서도 학적으로 이의가 있거든 하물며 비 물질적인 인간번식에 대해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개체 개별적이고 지식적으로 상당한 칭하가 있는고로 이의가 있는 것은 인간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이들의 각각의 주장에 대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주장은 하지만 절대 정확성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많은 이의들이 대개는 영론에 대해 이의가 있다. 신학적으로 예정론 예지론 등에도 이의가 없지는 않지만 신학적 주장은 전제적 공동적 공인을 받는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것이다. 어떤 학설의 주장이던 반드시 이의가 있어야 한다. 없으면 안 된다.
※ 어떤 자는 참의 가치를 알고, 어떤 자는 참의 가치를 모른다. 그런고로 여기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이의를 달 때에 구태여 답변을 할 필요가 없다. 이의를 단다고 하는 것은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비판이다. 인간의 삶은 참을 붙잡고 참되게 살다가 가야 할 인생이다.
이의를 달 때에 ‘나는 이것이다’ 라고 고집해야 하느냐? 상대가 이렇게 들어오면, 나는 저렇게 답변하는 그런 태도를 버려라. 만일 그렇게 한다면 비 진리를 보호하는 자가 된다.
이의를 다는 자들을 미워하지도 원수시도 대적시도 하지 말라. 이의를 달 때 그것을 진리로 비춰 보고 연구의 자료로 삼을 것이다. 대답을 해 줄 필요가 없다. 다만 ‘정말 진리를 찾거든 와 보라!’ 라고 하면 된다.
철학자들은 문제제시→ 답변→ 반박을 늘 준비하고 있다.
대개 보면 자체에 대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의를 단다. 교훈을 먼저 주지 말고 참을 붙잡으려고 하는 마음을 넣어 줄 것이다. 잘못하면 거짓이 왕성해진다.
● 상대가 이의를 달 때 나는 어떤 수입을 보는가?
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틀렸느냐, 맞느냐’를 재 심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② 제시한 이의를 가지고 내가 가진 진리에 비추어 보니 내가 가진 진리에 대해 더 확실성을 가지게 되어 더욱 든든해지고,
③ 잘못을 알게 되니 좋고,
④ 저 사람에 비해 나는 좋은 것(옳은 것)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감사해 한다.
● 이의를 가지고 나올 때의 나의 태도.
① 적대시 말라.
② 변론 반박하지 말라.
③ 그 사람에게 나의 것을 이해시키려고 애쓰지 말라.(단, 참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진리를 준다) 바꾸어지지 못한 사람에게 좋은 칼을 주지 말라. 강도에게 좋은 칼을 줄 수 없다.
①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이라는 주장에 대한 오해.
물질창조는 끝났으나 영의 창조는 아직도 계속이다. 창조를 마쳤다고 했는데 왜 계속이냐?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쳤다(창2:2)는 말은 그 때에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를 마쳤다는 말이지 부분적인 창조, 즉 인간의 영혼창조의 역사는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재 창조역사를 하고 계신 것을 신약시대의 바울이 말했다. 그러므로 유전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창세기 2장에서 마쳤다고 하는 것은 큰 오해다.
※ 창조론: 하나님의 창조는 아직도 계속한다.
유전론: 하나님의 개별적 직접적 창조는 이미 끝났다.
② 성육신 교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만일 유전론을 주장하는 학설대로 본다면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출생. 그러나 영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인간의 영혼이 유전된다면 인간은 아버지의 영혼이 유전될 수도 있고, 어머니의 영혼이 유전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도 부모의 영혼을 유전 받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럴 경우 원죄유전은 어떻게 해결할까?
부정모혈로 태어나되 아버지의 영혼으로 유전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령잉태) 출생함. 마리아의 난자 속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착상되었으므로 예수님은 육체를 유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으시다. 다른 사람은 모두 남자의 정자로 됨.
죄 책임은 영혼이 받느냐, 육신이 받느냐? 예수님의 고깃덩어리는 피조물. 영혼의 유전은 필연코 원죄가 있다.
③ 철학적 도리에 위반.
사람의 신체는 개체적이고, 영혼은 그 신체와 단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렇다면 아담은 원죄의 책임만 지고 후대 자손들의 죄의 책임은 지지 않느냐’ 하는데 대해 문제가 된다.
※ 영혼은 단일체.
신체는 개별적이고, 영혼도 개체이다.
원시적인 원죄문제가 아닌 유전론을 주장한다.
아담이 지은 그 죄를 개체만 질 수 있느냐? 모든 조상의 죄를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④ 기독론적 난관.
만일 아담 안에서 인성 전체가 범죄를 했고, 따라서 그 죄는 인성의 각 부분의 실제적인 죄라고 할 때 피할 수 없는 결론은 그리스도의 인성도 역시 원죄의 책임을 지고 아담 안에서 실제로 범죄하고 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무죄를 가르칠 길이 없고, 그리스도는 대속의 주가 될 수 없게 된다.
또 이 학설(유전론)은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이 마리아의 몸과 영혼으로부터 인출되지 않았다면 그는 참 사람이 아니었고, 참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들의 구속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마리아의 몸으로부터 영혼과 육신을 다 유전 받았다고 주장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의 영혼유전을 설명하려면 모든 인간의 영혼도 부친의 영혼으로부터 유전되기보다 모친의 영혼으로 유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보게 되면 예수님의 영혼은 마리아의 영혼에서 유전 받아야 하고, 마리아의 영혼에서 유전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영혼에는 유죄성이 있으니 유전성에는 필연코 죽임이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인간의 구속주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유전론을 주장하게 되면 기독론에 부딪친다.
원죄문제에 대해 유전론을 주장한다.
창조론이라면 왜 죄 지은 영혼을 창조했느냐?
기독론에서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구속주가 될 수 없다. 마리아의 영혼을 받았다면 원죄가 있게 된다.
※ ① 어머니의 영혼을 유전 받았다.
② 예수님도 그 영혼을 받았다면 원죄가 있다.
③ 구속주가 될 수 없다.
아버지의 영혼에서 유전되는 원칙을 세워놓고,(여자는 밭, 남자는 씨앗) 예수님의 잉태는 아버지의 정액이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완전한 인간)
원죄성을 가져야 인간이냐,(아담 범죄 이후) 원죄성이 없어도 인간이냐?(아담 범죄 이전)
계시록 3장의 증인의 표준. 빛은 모든 죄를 물리침.
3) 창조론.
창조론이 개혁교회의 보통적인 교리로써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주장을 보면 아이들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생식되거나 인출되지 않고 하나님의 직접 활동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것이다.
※ 창조론은 유전이 아닌 부모로부터 직접 창조된다고 한다.
(1) 진술.
이 창조론은 헬라교회에서 처음부터 받아들여졌고, 그 이후에 개혁교회에서도 받아들여졌으니 루터교회에서 유전론을 경향하고, 어거스틴도 이 설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① 헬라교회.
헬라교회에서 이 설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헬라철학이 밑바탕이 되어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학설을 찬성했다.
② 스콜라 학자들.
스콜라 학자들 중에 다수의 학자들은 미 결정으로 있다가 나중에 이 학설을 많이 지지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걸음 더 아나가서 지성적인 영혼이 생식의 방식으로 전달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라고까지 했다.
③ 개혁자들.(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 중에 많은 학자들이 이 창조론을 지지했다.
④ 개혁파 중에 특별히 창조론 지지자들.
칼빈, 베자, 투레티니 이 외에 많은 학자들이 창조론을 주장했다. 영혼들이 우리의 시조로부터의 혈통에 의해 인출된다고 하는 고대의 저술가들의 주장을 모두 허구라고 했다.
영혼 창조론은 각 개인의 영혼을 하나님의 직접창조에 기원한다. 그러나 그 창조의 시작에 대해서는 잉태 시인지, 그 후에 언제인지 확정할 수 없다고 한다.
(2) 영혼의 성질.
① 오염의 원인.
영혼은 순결하게 창조됐지만 패괴한 신체와 연합된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처음에 영혼이 신체를 통해서 창조되었고, 다음에 신체와 접촉되어 오염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면 죄를 물리적인 무엇이라고 추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영혼이 비록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의하여 생성될지라도 태아의 심리생활에서, 즉 부모의 생활에서 예조되므로 인생전부를 무겁게 누르는 죄의 혼잡 아래서, 혹은 그 안에서 실유를 얻는다는 말이 된다.
※ 문: 영혼이 개별적 특수적 창조라고 하면 왜 더러워졌느냐?
답: 원래는 순결하게 창조했지만 패괴한 육체로부터 때가 옮아졌다가 아 니고 무거운 죄에 억눌려져서 오염됐다고.
이렇게 되면 전 태아 구원론이 나온다.(빠빙크) 낳자마자 영혼을 넣어주면 살고, 좀 늦으면 죽는다.
영혼의 오염성은 위에서 말한 그 이론이 아닌 영혼의 원죄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영을 깨끗하게 창조했으나 육에다 결합을 시키매 영육이 결합됨과 동시에 영은 인격의 주체성이기 때문에 주격자인 책임자로서 원죄를 져서 그 영혼이 창조 즉시 오염된다고 한다.
※ 창조론 입장에서 원죄의 정의.
영혼은 원래 깨끗하게 창조했다. 창조 찰나 육체와 결합되니 죄는 한 사람이 졌지만 연대책임을 진다. 인격의 주체성이요 주격자인고로 영이 책임을 진다.
② 은혜 없는 창조와 그 공의성.
창조론 자들은 위에 제출된 설명에 보충으로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 피조자에게 처음부터 성령의 감화를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들을 하늘의 은사와 초자연적 광명이 없이 창조했으니, 이것은 아담이 자기와 자기의 후손들에게 올 은사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인고로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하신 일이라고 한다.
※ 인간의 영혼이 창조될 당시는 오염되지 않았지만 육체에 억눌려 오염되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이는 구원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하늘의 특별은혜와 초자연적 은혜를 주지 않으니 이는 모든 인간에게 줄 은혜를 아담의 범죄가 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③ 자연적 생명산출과 별로 다르지 않다.
찰스 하지는 창조론은 인간 영혼산출의 직접적인 권능의 행사는 다른 경우의 생명의 산출 시에 나타나는 것보다 다른 것이라고 필연적으로 추측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일반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것이다.
(3) 증명.
① 성경적 제시.
이 학설은 창조론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관찰한 것이다. 사실 이 창조론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 많은 성경이 창조론적인 이론을 보존하고 있다.
ꊱ 원시적 창조의 기록.
신체의 창조와 영혼의 창조를 현저하게 구별한다. 신체는 땅으로부터,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했다. 신체와 영혼은 실체가 상이할 뿐 아니라 기원이 상이하다. 후자의 기원은 전자의 것보다 더 고등한 것을 제시한다.
ꊲ 시혼과 기혼적 구별의 반복.(신체는 흙, 생기는 숨)
하나님께서 인간의 코에 불어넣은 것이 영이라면 이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인간은 하나님의 일부라는 말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부라면 인간의 영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유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갈 수 없을 것이다.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의 일부가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된다.
ꊳ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강조.
직접창조, 간접창조 모두 하나님의 창조이다.
ꊴ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히12:9)
여기서 ‘모든’ 이란 제한성을 가진 말로서 예를 들면 ‘8. 15 광복을 모든 국민이 기뻐했다’ 할 때 지구상의 모든 국민이냐? ‘모든 국민이 양을 잡아먹었다’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한다.
ꊵ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민16:22)
② 증명.
ꊱ 영혼의 성질의 조응.
이성과 영을 착각해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ꊲ 기독론에 부합.
그는 진정한 신체와 이성적 영혼의 참된 인성을 가지고 여인에게서 출생되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시되 오히려 죄는 없으신 분명한 사람이었다. 단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아담의 범죄의 죄책과 오염에 참여치 않았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는 아담 안에서 범죄한 동일 숫자적 신체에 참여하지 않으신 때문이다.
※ 창조론은 예수님의 무죄성에 대한 증명이 없다. 영혼창조 시에 죄지은 영혼을 창조치 않았지만 육체에 넣어주니 죄에 억눌려 오염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원죄의 유전을 신체에 두게 된다.
또 하나는 연대적 책임이다.
그리스도의 무죄를 주장하면 인간의 원죄는 어떻게 유전되느냐?
① 깨끗한 영혼을 창조했다. 이 영혼이 죄가 있는 신체에 억압되니 오염 되었다. 죄가 신체로 오염되었다고 함.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마리아의 몸에서 유전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② 유전론에서 보면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인고로 영 자체는 무죄성이지 만 대표적 견지에서 아담이 죄책을 지게 된다. 아담의 대표적 견지에 서의 죄책에 대해 예수님도 연대책임을 진다고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 은 동일 죄에 참여치 않았다. 이 주장은 이성과 영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영혼이 유전된다. 예수님의 영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ꊳ 자녀의 개성.(이 설은 이성과 영혼을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자녀의 영혼은 개체적 실유로써 부모의 영혼들과 같지 않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니 자녀의 정신적 특징을 비교해 보면 자녀가 부모와 같은 것도 있지만 부모와 다른 것이 더 많이 있다. 이 사실이 자녀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인출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는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특별창조를 받은 증거라는 것이다.
※ 이 주장은 인간의 영혼을 이성으로 보고 있다. 성질을 영혼의 요소로 본다. 영혼이 아버지를 닮았으니 아버지의 그 성질이 곧 영혼이다.
중생 전은 죽은 영혼이다. 중생 후부터 이성과 몸을 통하여 작용한다.
(4) 이의.(異議)
영혼 창조론의 부당함을 아래와 같은 반론들이 증명한다.
① 창조주의 책임문제. 스트롱의 반론.
② 만일 영혼이 기원적으로 패괴된 경향들을 가졌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을 도덕적 해악의 직접적인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요,
③ 만일 영혼이 순결하게 창조됐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이 영혼을 부패한 신체에 배치한 것이 되므로 하나님을 도덕적 해악의 간접적인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다.
※ ① 하나님께서 영혼창조 시에 해악한 영혼을 창조했다면 하나님은 해악 하게 한 원인자이다.
② 순결하게 지은 그 영혼을 신체 속에 넣어서 죄를 짓게 하느냐?
우리의 신체는 영을 통하여 성화 받는다. 영혼은 부패한 신체가 없이는 성장을 못한다. 영은 본래부터 타락이다.(영혼 단일론. 개체 개별적으로)
중생한 사람의 자식은 죄가 있는가?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가진 기술을 가지고 나오는가? 그리스도의 구속은 개체 개별적이다.
④ 정신적 도덕적 특징에서 나타남.
이 견해는 부모가 자녀의 신체만을 출생한다고 봄으로 자녀에게 부모의 정신적 도덕적 특징들이 나타나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도 정신을 영혼으로 보고 있다.
⑤ 신적 작업방식에 부조화.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현재의 작업방식에 조화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이 지금은 일반적인 방편을 통하여 작업을 하신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영혼창조라는 하나님의 직접 창조의 행위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은 6일 동안 창조를 마치고 그 후에는 섭리 유전.
⑥ 원죄유전의 기초에 흠결.
이 견해는 영혼의 유전을 부정하므로 원죄의 유전을 설명할 기초에 흠결하다고 비난을 받는다.
창조론이라면 창조된 영혼들이 어떻게 시조의 죄책과 오염을 전승한다는 것인가? 유전론은 시조 아담이 인류의 언약적 대표인 사실 자체가 원죄유전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죄책임은 각각이다.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전가시키지 말라’(겔18:20)
죄의 전가와 벌과는 다르다.
죄: 각각 자기가 당함.
벌: 타가 대신 맞을 수 있다.
(5) 신중한 결론.
선재론은 철학에 근거. 창조론이 더 성서적이고 기독교에서 더 효력적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유전론(영혼과 이성을 착각해서 주장하는 유전론)은 첫째, 영론에 대한 지식이 많이 빈약함을 보여주고 있다. 원어상으로 마음(칼디아)과 이성과 영혼(프뉴마)은 엄연히 실체적으로 다르다. 물질인 신체는 신체로써 혹은 물질성으로써 유전되고, 비 물질인 영은 영으로 유전됨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주장하는 유전론은 어디까지나 물질계를 떠나지 못한 상태에서의 주장이니 ‘인간의 영혼이 아버지로부터 유전됐느냐, 어머니로부터 유전됐느냐’ 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식한 말이다. 이는 자연법칙에도 맞지 앉는 말이니, 즉 ‘호박이 종자에서 나왔느냐, 밭에서 나왔느냐’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창조론의 주장도 많은 허점을 보이고 있다. 만일 창조론을 강력히 주장한다면 인간의 물영 이원론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즉 인간의 신체는 부모로부터 유전하고, 영혼은 창조된다고 하면 성경에 중생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본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개체의 영혼들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죽은 영혼을 창조해 넣었다는 말이 되니 어떻게 생명의 하나님이 죽은 영혼을 창조하여 넣었겠느냐? 이 문제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만일 산 영혼을 창조해 넣었다고 하면 그는 언제 죽었다는 말이냐? 또 정신적 작용을 영혼으로 본다면 ‘죽은 영혼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느냐’ 하는 이런 난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영혼의 창조론을 주장한다면 하나의 간접창조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땅에게 ‘수목을 내라’ 하심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개체의 영혼을 창조했다기보다 간접창조로 볼 수 있고, 그게 아닌 유전론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영혼은 그 조상으로부터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이니 인간영혼의 타락 혹은 부패성은 최초에 일시적으로 타락된 그것으로 계속 유전이 되는 것이지 그 후에 조상들이 지은 죄책임이 이중 삼중 사중으로 덧붙여질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 타락 후에, 아담 타락 후에 짓는 모든 죄는 이성과 몸이 죄를 짓는 것이지 죽은 영이 계속 죄를 짓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 주장대로라면 몇 대 위의 영이나, 수천 대를 거쳐 내려와서 유전 받은 영이나, 심지어는 타락된 아담의 영이나 모두가 죽었기 때문에 영의 원죄의 중량은 동일하다는 말이 된다.
그런고로 창조 면으로 볼 때는 간접창조요, 또 하나님의 섭리원리로 볼 때는 유전성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원죄문제나 그리스도의 무죄성이나 모든 인류의 구속성이 정확하게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된다.
※ 우리는 구태여 말하면 창조론을 받아들이되 개체 개별적 창조가 아닌 간접창조로 믿는다.
제九절. 원인(原人)의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형상의 여러 가지 견해)
一. 성경적 논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말은 원시상태의 인간에 대해서 하는 말인데 성경에 의하면 사람의 본질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1. 형상과 모양.
성경에 보면 ‘형상이라, 모양이라’는 두 가지 말을 썼는데 두 가지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모양이라’ 한 이것을 일반학자들은 원어학적으로 형상은 히브리어로 ‘셀렘’ 헬라어로는 ‘에이욘’, 모양은 히브리어로는 ‘데무트’ 헬라어로는 ‘호모이오시스’ 라고 하면서 성경을 언어학적인 면으로 해석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단어의 뜻도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언어학적인 그 뜻이 성경의 계시성을 완전히 설명하지를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왜 ‘형상이라’ 혹은 ‘모양이라’는 말로 기록을 했는지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여러 단어 중에 인간이 쓰는 용어로는 이 말이 가장 근사하기 때문에 썼다고 본다. 그러나 이 용어가 용어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계시성을 완전히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다.
※ 말(言)이 실체를 100% 증명치 못한다.
1) 지, 의, 성(거룩).
하나님의 형상은 지식적인 면과 의지적인 면과 거룩적인 면으로 구성됐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혜 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말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비 고정적 무형적 존재이시니 형상을 유형체의 고정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된다.
2) 생명과 영생.
사람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로 고찰할 때 그의 영성, 혹은 인격성, 혹은 속성, 혹은 본성적 본질적인 요소를 말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의 영적인 존재로 창조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영혼은 비록 신체와 연합되어 있으나 신체 없이도 독존할 수 있는 실유체이다. 이 점에서 사람은 영적 실유요,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한 인간의 신체도 그리스도의 구속을 점차적으로 덧입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충만히 입어 생명적 부활을 하게 되면 그 부활체는 영적 실유로 영체와 단일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은 생명과 영생이요 독존할 수 있는 실유라고 말하나 우리는 우리의 육체도 부활로서 하나님이 형상대로 되어짐을 믿는다.
3) 육의 몸.
신체는 영이 아닌 물질이지만 영혼과 연합하여 영혼의 자기 표현에 적당한 기구로 봉사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여진다.
사람의 신체는 특별히 영혼의 영생에 참여하는 적당한 기관과 하등 피조물계에 주관적인 행사를 하는 기구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육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인간의 활동성에서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4) 만물의 치리.
사람이 육해공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창조된 것도 그의 신적 형상의 일부로 보여진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관 씌우신 영화와 존귀는 이 만물치리의 권위를 가르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일반 피조물계를 통치하는 치리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2. 여러 파의 하나님의 형상관.
(1) 로마 카톨릭의 견해.
하나님의 형상을 로마 카톨릭에서는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구별한다.
그들 중에 성행하는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인간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신체의 불사성 같은 어떤 자연적 은사들을 사람에게 부여했다. 그리고 영성, 자유, 불사성은 자연적 재능들이니 이것들은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을 구성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자연적 능력들을 서로 조절하여 열등한 것을 고등한 것들에게 상당히 종속시켰는데 이렇게 설정된 조화를 자연적 의지라고 칭한다.
사람은 죄가 없었고 완전한 무죄상태로 살았다고 한다.
의지의 자유: 초자연의 불사이다.
(2) 헬라 정교회의 견해.
하나님의 형상은 독점적으로 그의 이성적 성질로 구성됐다고 말한다.
(3) 루터파의 견해.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의 원 의와 동일시하여 이 인간이 타락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다고 변명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원인이 가졌던 고상한 성품이었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된 것으로 본다.
※ 원상회복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게 된다. 사람의 실수로 하나님의 계획성이 사역성이 실패가 된 것을 그리스도로 통하여 원상복귀하는 것이 구원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우리가 루터파를 이단시하지 않고 있으나 하나님의 형상, 타락론, 구원론 등이 칼빈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 비슷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론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거룩성, 영성, 선성)
(4) 개혁파의 하나님의 형상관.
개혁파란 칼빈의 견해를 그대로 받은 계열을 말한다.
이 개혁파의 신학자들은 신의 형상이 독점적으로 사람의 이성적 성질로 구성됐다는 견해와, 이것이 창조주와의 도덕적 일치로 구성된다는 견해 사이에서 중간입장을 취하여 둘을 다 포함한다. 이 개혁파의 견해는 루터파보다 좀 더 융통성이 있고 포괄적이라고 볼 수 있다.
(5) 하나님의 형상의 광범위한 포함.
물론 개혁파 학자라고 해서 신의 형상에 대해 완전 통일성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여러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 다르기도 하다.
①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의 성질이 다른 여러 종의 동물들의 그것 보다 우월한 매권에 확장된다는 원리를 세웠다.
② 찰스 하지는 땅에 사는 자들 중에 하나님의 형상인 신적 유사를 반영하 는 것은 영이요 지성적 자유적 행위이니 이는 정당하게 보편적 주관권 을 부여받은 때문이라고 한다.
③ 윗시우스에 의하면 사람 안의 신의 형상이란 사람의 영적 불사적 성질 로서 이로 인해 그의 거룩으로 그의 주관권이 구성된다고 한다.
④ AA하지는 사람의 하나님의 형상을
ꊱ 그의 성질의 종류에 관한 것이니 사람은 하나님처럼 자유적 이성적 인격적 영으로 창조됐으며,
ꊲ 그는 하나님처럼 지식 의 진 성의 성질이 완전성을 가지고 창조되었 다.
ꊳ 인간이 가진 자연계 위의 주관권이 신과 같이 창조됐다고 말한다.
⑤ 웨스트민스트 표준문서는 소요리 문답(10)에서 원 의와(1번) 만물 위의 주관권(2번)의 두 가지 만을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켰 다. 그것이 곧 이성적이며 불사적인 영을 가지고 있고, 지식 의 참된 거룩을 부여받아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과 그것을 수행할 능력을 가지며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행복하며 주관권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위에 진술한 여러 견해들을 종합 요약하면 개혁파 입장에서 본 신의 형상론이 아래와 같이 몇 가지로 요약된다.
㉮ 타락해도 하나님의 형상성은 남아 있다.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성은 파괴되었다.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성은 상실되었다.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성은 변질되었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을 하나님의 본질을 입었다는 것으 로 착각.
㉰ 인간의 본질과 본성은 하나님의 본성의 일부인데 그 일부를 원료로 삼 아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말하는 자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이냐? 인간이 입은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락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과 본성도 타락이 된 것인가? 결국은 하나님의 일부가 타락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인간이 입은 하나님의 형상의 그 원료가 하나님의 일부라고 하면 신 일부 타락설이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유실되어 그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졌다고 하게 된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도로 찾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 혹은 영혼에서 찾기도 하고, 인격 모형에서도 찾기도 한다.
단순성, 영성, 불변성, 불사성 등의 품질들과 지 정 의 등의(심력들과) 자극 의식 및 자아결정의 자연적 현상들에서 신의 형상이 나온다.
⑥ 원 의에서 찾는다.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참 지식, 의, 거룩을 나타낸 그 본성과 지성적 도덕적 완전적 원 의에서 신의 형상을 말한다.
⑦ 신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
물질적 근원에서가 아니라 영혼이 영생에 참여하는 적당한 기관임과 하등 피조물에게 주관권을 행사하는 기구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신체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
ꊱ 부활 후 불사성.(부활체)
ꊲ 지배하고 다스림. ꋡ 영에. ꋢ 도덕성. ꋣ 신체.
⑧ 지상 주관권에서.
사람의 지상 주관권에서 권위적 신의 형상이 나온다.
만물을 지배, 발달 이것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자가 있다.
二. 신의 형상의 가치.
‘신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에 속하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다.
신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에 구성된다는 것을 개혁파는 부인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형상에 포함되는 요소들을 차별 없이 동등하게 중요시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신의 형상 안에서 영혼의 본질의 품질들을 잃어버리면 사람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사람이 그것들을 잃어버리더라도 원 의는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람이 신의 형상의 본성을 잃어버릴지라도 사람은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① 전자는 본질적인 하나님이 형상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
② 후자는 비 물질적인 하나님이 형상이니 죄로 인하여 상실될 수 없다고.
1. 하나님의 형상의 가치.
신의 형상은 독점적으로 자체적으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신의 형상의 가치는 객관에 의해 정해진 가치도 아니고, 어떤 상태적인 관계에 의해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닌 독립적으로 완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가치성은 무엇이 많다고 해서, 또는 누가 말했다고 해서 결정되는 객관적인 가치성은 아니다. 이것은 순 독립적이다.
2. 전가적 피동적 가치.
‘하나님의 형상’ 이라 할 때 우리가 ‘형상’ 이라는 명칭 용어를 사전학적으로 본다면 모순이 없지는 않다. 만일 ‘형상’ 이라는 명칭 용어가 사전학적인 뜻만 가지고 있다면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논란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사전학적 원어학적 뜻을 벗어나서 그 이상의 더 깊고 높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 많은 학자들이 신의 형상에 대해 많은 논리를 전개한다.
형상이란 사전학적으로 모양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니 ‘형상이라, 모양이라’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유형적인 것을 말한다.(생긴 꼴) 그러나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김, 얼굴의 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일정한 고정된 형체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형체가 없는 분이신데, 고정적인 유형체가 아니신데 어떻게 형상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고로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사전학적 어학을 초월해서 특수적인 뜻을 가진 명칭이요 용어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가치성에 있어서 전가적 가치성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의 독유성이 아니고 전가성적이니 이 형상을 타에게 전가시켜 그 형상을 전가 받은 자, 곧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가 원형이신 창조주처럼 인격적인 존재가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형상의 가치성이다.
내 모양을 닮게 할 수는 있지만 줄 수는 없는 것이다.
3. 활용적 가치성.
형상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비 활동성이요 무 활동성이다. 그러나 신의 형상은 활동성이요 활용성이다.
신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활동은 육체의 활동만이 아니고 의적 선적 도덕적 활동성이 있으니 이 활동성은 신의 형상에서 활동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했다고 하면 이 인간은 유형적인 신체적인 활동밖에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활동적인 면, 인격적 무형적 활동, 소위 말하는 정신적 의적 성적(聖的) 활동은 신의 형상의 활동성이니 이 활동성은 신체의 활동보다 더 세밀하고 신속하고 민감하고 다양하다. 이 신의 형상의 가치성은 금생뿐만 아니라 인간이 신령계에 가서도 영원히 활용하는 것이니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인 것이다.
제十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형상관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다. ‘형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이냐’ 하는 그 문제만을 가지고 많은 학자들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논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왜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는가’ 하는데 대한 그 원인이나 동기나,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한 분이 없다.
우리가 아래의 이치를 연구하다가 모를 때에는 위의 이치를 깨닫고 나면 아래 이치는 자연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이냐’ 하며
신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하고,
이성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하고,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고,
또 영과 육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도 하고,
또 원시인간의 원 의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고,
또 타락하므로 하나님의 형상 유실론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각양의 논리들을 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원인이나 동기나 목적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임을 자연적으로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자는 ‘하나님이 형상이란 무엇이냐’ 하는데 대해 장시간 두고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을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느냐? 짓자고 할 때는 동기와 원인과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니냐?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이 아니고 영원 전서부터 해 오고 있었다.
타락을 하지 않았다면 구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타락을 허용한 것이니 타락은 구원순서 중에 없어서는 안될 순서 중에 하나이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행복한 안락처, 행복한 사건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데 최고의 행복적 낙원처가 어디냐? 그 곳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지었다. 하나님이 인격자가 아니었더라면, 천국의 안락처가 없었더라면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에서의 구원의 일반적인 개념은 ‘에덴동산에서 마음대로 살아라’ 했는데 타락하므로 비참해졌기 때문에,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원시상태로 살기를 원했는데 타락을 했으므로 이제는 구원이 필요하게 되어 원상복구 시켜 주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개체가 전체가 되면 극락이라고 한다. ‘타락하기 전 원시상태로 돌아가자’ 이게 구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관은 전혀 다르다.
기독자는 원인 동기 목적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당사자는 바로 나이기 때문에!
一. 원인.
신이 모든 피조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신 것은 피조물을 다 만들어 놓고 보니 인간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는 느낌이 나서 인간을 만든 것처럼 볼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보는 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피조물을 위하여 지음받은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보면 창조의 순서로는 만물이 선행적으로 피조되었고 인간은 마지막에 지음을 받았지만 인간을 위해서 만물을 지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만물을 위해 지었다고 하면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짓게 된 원인이나 동기는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논리가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지으신 것도 아니요, 또 하나님 자신에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절대로 필요해서, 즉 인간이 없으므로 당신의 절대성이나 완전성에 부족감이 있어서 인간을 지으신 것도 아닌 다만 인간 자신을 위해 인간을 지으신 것이니 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당신의 형상이 곧 인격성이기 때문에 당신의 인격성이란 곧 속성을 말하는 것이니 이 속성인 인격성은 쾌락성, 향락성, 만족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인격성이 원인이 되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격성이 없는 무 인격적 비 인격적인 존재였더라면 인간을 창조할 수도 없고,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이 인격자이기 때문에 그 인격 대 인격, 형상 대 형상의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원인은 곧 당신의 형상인 인격성 때문이다.
※ 덮어놓고 부는 것이 나팔인가? 두드리면 북인가?
의사는 신체의 구조의 명칭을 알지만 일반사람은 몸 속의 것은 무조건 창자라고 한다.
하나님 당신이 인격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를 인격자로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격 대 인격의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지으셨다.
사실 ‘인격이라, 성질이라’ 해도 그 표현이 완전치 못하다. 인간의 용어를 빌려쓰자니 ‘형상’ 이라고 부른다.
인격성은 어떤 기관인가? 기쁨을 만족을 쾌락을 느끼는 기관이요 형상이다. 좋으니까 넣었지 나쁘면 이것을 안 넣었겠지! 인격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곳에 넣어도 느낄 줄 모를 것이고, 이렇다면 인격이라는 이름도 글자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인격자이기 때문에 이 인간이 누릴 곳을 만들어 놓은 것이 천국이다. 인격자이기 때문에 행복적인 쾌락적인 이런 곳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 곳을 추구하는 성분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자기의 주관적 행복적인 울타리(라인, 보금자리, 안락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 자기가 자기를 축소시키지 말라!
二. 동기.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동기는 만물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기 위해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독존적으로 생존적으로 인격적으로 당신의 무한계 완전계 신령계를 지배하시고 사용하시고 누리실 때에 그 가치성이 형상인 인격성에서 효율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그 형상대로 짓게 된 것이다.
만일 신령계 무한계 완전계가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인간을 지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 짓고자 하는 동기도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 신령계 무한계 쾌락계 향락계 만족계를 그 만큼 효율적으로 누리는 데는 신의 형상인 인격성이 필요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게 된 것이다.
1. 신령계의 쾌락성이 동기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 신령계가 어떤 곳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곳은 물질계가 아님이 틀림이 없다. 물질계는 아니지만 물질계 이상으로 그 곳은 쾌락성이 충만한 곳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사도요한이 진리로 인해 밧모섬에 귀향 가서 있을 때 주님은 그 요한에게 미래의 신령계를 물질계처럼 보여 주셨는데 요한이 그 세계를 물질계처럼 보기는 했으나 그것은 물질계가 아니고 신령계임이 틀림이 없다. 요한이 아직 죽지 않고 영육 결합체로 있을 때 영안으로 본 그것을 이성을 통하여 느끼도록 했기 때문에 물질계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깊이 기도하고 있을 때 그는 3층 천에 올라가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바울이 본 그 세계도 신령계임이 틀림이 없다.
요한에게 보여주신 그 세계와 바울에게 보여주신 그 신령계는 각이한 곳이 아니고 동일한 곳이었는데 이것을 바울은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고 무엇으로 상징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로 말할 수 없는 세계’ 라고 말했고, 요한은 자기가 본 그 세계를 그 때 당시에 물질계에서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최고 가치 있고 좋은 명칭들을 들어서 기록한 것인데 그 때 당시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명칭이나 용어는 극히 제한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본 그것을 인간이 사용하는 명칭이나 용어로 정확하게 표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 세상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명칭과 용어를 인용해서 표현한 것이었다.
요한이 말한 대리석 혹은 진주 열 두 보석 등은 세상인간들이 말하는 물질의 보석은 아니다. 즉 옛날 페르시아 왕궁을 꾸몄던(에1장) 보석과 같은 물질의 보석은 물론 아니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그 명칭은 그 때 흔히 사용하던 명칭을 그대로 옮겨 기록한 것이다. 즉 명칭은 그 명칭이라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그 보석이란 페르시아 왕궁을 꾸몄던 보석과 같은 그 보석이 아닌 신령한 보석이다.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의 쾌락성 역시 이 세상에서의 타락한 인간들이 쾌락이라고 하는 그런 저속하고 조잡하고 저질적인 쾌락은 아니다.
우리가 옛날 신화 같은 것을 믿을 수 없지만 그 신화에 보면 마음 좋은 사람이 깊은 산에 들어가서 신령(신선)들을 보았는데 그들의 쾌락성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흥풀이 하는 그런 저속한 쾌락성이 아닌 조용한 가운데서 글짓기나 장기나 바둑을 두고 있는 그런 것을 말했다. 이것은 일종의 신령계의 쾌락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만일 저속하고 무식한 사람이 그것을 본다면 쾌락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성경에 보면 그 나라의 쾌락성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쾌락이요, 노래부르는 쾌락이요, 하나님 앞에서 합창을 하며 서로 화답하는 쾌락이라고 했다. 그 나라의 쾌락성은 물론 이 세상에 있는 쾌락이라고 하는 쾌락과는 전혀 다르게 고차원적이다. 불변적 영원적 쾌락성임이 틀림이 없다.
이런 쾌락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쾌락은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성으로서만 누릴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쾌락이다. 하나님의 인격성이 아니고는 그 세상의 쾌락을 누릴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 쾌락은 어떤 존재든지, 즉 목석이나 금수라도 그 곳에 가면 누리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명철 민감 민첩 민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하면 인적인 그 인격으로서는 절대로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천국은 성분적으로 성질적으로 단일된 곳인고로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 세계에서 쾌락과 행복을 느끼게 하고 누리게 하기 위해 지으셨으니 이것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게 된 동기이다.
※ 바울은 천국이 너무 쾌락적이기 때문에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심히 도취해 버리면 어떤 때는 내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고깃덩어리가 3층 천에 올라간 것이 아니고 영안의 눈으로 생생하게 본 것이다. 이것을 글로 쓰면 축소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 바다만큼 넓다’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축소되어 버린다. 인간이 쓰는 용어나 문자로써 천국을 다 형용을 못한다.
천국은 요한이 인간들이 쓰는 명칭 용어를 가지고 표현한 그 정도가 아니고 그 보다 더하다. 요한이 본 그것이 전부라면 인간이 얼마든지 그 정도는 꾸며놓을 수 있다. 천국은 그 이상이다.(고후9:15, 12:4)
그 세계가 너무 쾌락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선성: 자타에게 영원히 유익을 주는 것.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좋아하면 하나님은 시기가 날까? ‘너 좋으니 나 좋고, 나 좋으니 너 좋고. 그 성도가 은혜 받으니 나도 좋고’ 하는 이것이 생명의 세계요,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그것이 나온 선성이다.
천국에 쾌락성이 없으면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동기가 안 일어났을 것이다.
천국을 말한 본문 문자는
성경은 천국을 축소시켜 놓은 천국의 축소판이다.
2. 천국의 무한성이 동기가 됨.
하나님이 누리시던 혹은 누리고 계시던 그 천국은 과거적으로 무한히(시간적) 누려왔고, 미래적으로도 무한히 누릴 천국이다. 천국의 쾌락성이란 불쾌성이 병행되거나 고락이 교체됨이 없다. 시간적으로 영원히 누리는 무한한 천국이다.
만일 그 신령계가 유한된 낙원의 곳이라면 얼마 가다가 없어질 것이니 구태여 인간을 만들어서 그 인간들로 하여금 그 세계(낙원)를 누리도록 인격성을 입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세계는 시간적으로 미래적으로 무한히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되 신의 모형인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요, 또 그 신령계의 쾌락성은 양적으로 당신 홀로 누리시기에 알맞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와 누릴지라도 축소되거나 삭감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 외에 어떤 다른 존재가 나타나서 그 쾌락성을 같이 누리게 될 때 당신이 누릴 쾌락성의 1/2이 삭감되거나 손실이 되어 당신이 누릴 그 쾌감성이 빈약해진다고 하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존재가 천국의 그 쾌락을 함께 누린다고 할지라도 각자가 그 천국을 누리는 누림성이 양적 질적으로 감소되지 않는다. 아무리 먹을 사람이 많아도 먹을 것이 무한하고, 마실 자가 아무리 많아도 마실 것이 무한하기 때문에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 무한한 것을 홀로 누리시기보다는 이것을 다른 존재로 하여금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 대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것이고, 또 이것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신의 형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 천국의 무한성: ① 시간적으로 ② 분량적으로 무한하다.
이렇게 무한한 천국을 나(하나님) 혼자 누릴 필요가 뭐가 있는가?
3. 천국의 완전성.
이 신령계는 무한계요 완전계이다.
완전이라는 말은 고통이나 불행적인 것이 병행하던가 혹은 혼합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한 완전이라는 말은 이 이상 더 좋은 곳이 없다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쾌락적 완전이요 향락적 완전이니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미비하거나 미숙하거나 불완전한 것이 결코 없는 곳으로 양적이라기보다 질적인 면의 완전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천국 자체는 양적 질적 완전이지만 세상에서 구원 얻어 천국에 간 성도들은 거의가 그 천국의 완전에 미달된 상태다. 능력적 미달이요 지능적 미달이요 기능적 미달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현존세상에서 이 천국을 바라보고 자기를 하나님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가야만 한다.
※ 천국이라는 천국은 모든 것이 최고 극치요 완전이다.
4. 천국의 충만성.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완전이라는 말에는 충만이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 충만이란 물질계에서 물질적인 것은 사용하면 사용하는 것만큼, 시간이 흐르면 흐른 것만큼 감소가 되듯이 감소되듯이, 즉 이 세상에서 어떤 물질이 있는데 그 물질을 사용하면 사용한 것만큼 감소요, 세월이 흐른 것만큼 감소가 되듯이 감소되는 것이 아닌 계속적으로 솟아나 넘쳐흐른다는 말이다. 그릇에 있는 물은 마신 것만큼 줄어들지만 물이 솟아나는 샘에서는 언제나 그 물이 넘쳐흐르듯이 감소가 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넘쳐흐른다는 말이다. 마신다고 먹는다고 사용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계속 넘쳐흐른다는 말이다.
이 천국은 물론 외래적인 기쁨도 있으나 내발적 기쁨도 있고, 또한 외래적 만족도 있고 내발적인 만족도 있다. 이 천국은 모든 것이 거룩하고 행복적인 것이 언제나 충만하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이 충만을 인간으로 하여금 맛을 보게 하고 먹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다.
※ 세상물질은 사용할 수록 감소되고,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록 빨리 줄어든다.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자꾸 흘러 넘쳐 나온다는 말이다. 천국은 충만한 곳.
三. 우리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목적.
하나님께서 신령계와 물질계를 창조하실 때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특별히 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심에는 필연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목적성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작은 존재라도 아무 계획이나 목적도 없이 지으실 분이 아니신데 이렇게 거대한 물질계 혹은 우주계를 비판하고 이 물질계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신의 형상을 가진 인격자로 만듦에 대해서 아무런 목적없이 지으셨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이 목적성에 대해서도 이러 이설들이 없지는 않다.
이 목적성에 대해서
(1) 혹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 물질계를 맡겨서 통치하고 지배하고 수호하게 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설과,
(2) 당신이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목적으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설과,
(3)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 이렇게 지었다는 설이 있다.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면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성과 존영성을 알아드릴 자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알리기 위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한다.
(4) 계약적 대상을 삼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으니 상대성 원리처럼 당신의 거룩성과 선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인격자로 지어서 선악과를 만들어 그것으로 계약조건을 삼아 인간과 계약을 맺게 된 것이라고 함이니,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가 아니면 계약적 상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라야 계약의 상대자가 되기 때문에 계약적 상대자를 삼기 위해서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는 설들이 있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에 대해 많은 이설들이 있다. 그러나 원인과 동기에 목적에 대해 말한 학자들은 없다.
목적성에 있어서
(1) 물질계를 통치하고 지배하게 하기 위해서(창1:27): 성경 해석상으로 대개는 이렇게 본다.
이렇게 되면 원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가 없어진다. 만물을 창조해 놓고 보니 통치할 자, 다스릴 자가 필요해서 만든 것처럼 된다. 이것은 만물을 위해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2) 영광을 받기 위해서: 일반물질로 이미 누리고 있는 그 영광이 부족해서 인간을 지었다고 보게 된다.
‘사람의 제 1되는 목적은 그를 영화롭게, 영원히 즐겁게 하는 것’ - 말은 맞는데 해석을 붙이면 틀리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내가 그 분의 영광과 그 분의 속성을 입음으로 그 분은 영광이 되고 좋아하신다. 이 세상은 받은 것으로 되지만 천국은 주는 것으로 된다. 인간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
(3) 하나님은 전능자 완전자 만능자이지만 누가 알아주는 자가 있어야지! 만물을 지어 놓아 봐야 인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이 능력을 알아줄 자로 인격을 가진 인간을 만들었고, 당신을 알아달라고 홍수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전쟁으로 인간에게 본때를 보여준다고?
(4) 계약적 대상을 삼기 위해서.
이 네 가지를 신관에 갖다 대면 다 달라진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목적.
1. 신자(神子)를 삼기 위해서.(엡1:5)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설들도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다 성경을 근거해서 한 말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신론에 의해 본다고 하면 이 이설들은 아무래도 불완전함 감을 피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속성 면이나 완전성 면에서 볼 때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한 신의 자녀를 삼기 위한 것이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목적이라는 것이 가장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자녀는 필연 그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은 외모를 닮는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본질과 본성적으로 닮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형상이란 외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앞 절에서 말한 바가 있다. 예컨대 돼지새끼는 그 아비를 닮았고, 개는 개를 닮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자로 만들었으니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인간의 원인의 무형성의 원 의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없어졌으나(전적 타락) 신의 형상 자체가 전혀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곧 신의 형상과 같이 지음받은 인간의 원인이 변질되었다는 말이니, 변질이 되었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변질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질 자체가 변질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성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을 했어도 신의 형상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을 수 있었으니 대형을 입어 원상복구가 되었고, 대행을 입어 원상복구 이상으로 의로워져 신의 새생명으로 연결되어 살아났으니 본질과 본성적 생명적으로 신의 자녀가 된 것이다.
신의 자녀가 된다는 이 말은 법적으로 된 것이 아니고 본질과 본성적으로 되었다는 말이니 본질과 본성적으로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과 본성적으로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존재가 있지만 천하에 어떤 존재도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혹은 부르는 존재는 없다. 객관적으로 부르지 못하게 해서 자기는 부르고 싶으나 못 부르는 것이 아니고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지 못한고로, 또 본질과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생각조차도 없는 것이다.
※ 나 닮도록 만들자. 왜? 자녀를 삼기 위해서!
2. 신의 신부를 삼기 위해서.
이에 관해 기록된 성경은 계시록, 에베소서, 아가서, 예레미야, 호세아.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목적은 당신의 애성은 참된 애성(아가페)이니 이 애성은 단면적 애성이 아니고 복합적 다양적 애성인고로 그 애성을 부어주고 싶어서, 부어주기 위해서 신부를 삼는다고 말한다.
이 애성은 인인 간에 주고받는 애성이 혈육적 사랑이 다르고, 우정적 상대적 사랑이 다르고, 이성적 애성이 다른 것처럼(물론 그 외에도 애성의 성질을 구별하면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단면적이고 각양적인 사랑이 아니고 복합 다양적이기 때문에 수애자가 그 사랑을 받을 때에는 느낌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다.
시애자인 하나님이 사랑을 주실 때 수애자로서 그 사랑을 받는 자가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때에는 혈육적인 사랑을 받는 것을 느끼게 되고, 또 ‘당신이여 여보 주여 나의 신랑이여’ 하게 될 때는 애로스적 사랑을 받는 것으로 느껴지는 등 같은 사건에서 수애성의 감정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고로 그 분의 사랑을 어떤 사랑이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것을 성경은 아가페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지체적으로 이 아가페는 없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아가페 사랑을 받아서 남에게 줄 수 있으니 이것은 발생적이 아니고 수동적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성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족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신부와 신랑의 깊은 애정의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 개는 개끼리 결혼하고 소는 소끼리 결혼한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당신의 아내를 삼기 위해서. 만고불변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로 삼으신 것을 누구도 막지 못한다. 신부로 삼지 않으려면 당신의 형상대로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부가 신랑의 마음을 몰라주면 되겠느냐?
하나님의 매를 맞으면서, 하나님의 권고를 받으면서 사랑을 느낀다.
세상 육신의 부모에게는 이 사랑이 없다.
3. 영원한 후사를 삼기 위해서.(엡3:6)
신이 존재하고 계시던 그 신령계는 신성을 가진 분만이, 혹은 절대성 완전성을 가지신 분만이 통치 지배 사용하고 누리고 느낄 수가 있다. 신의 성품을 가지지 못한 자는 이 신령계를 통치도 사용도 지배도 누리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 나라를 당신과 함께 당신처럼 통치 지배 사용 누리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짓지 아니하면 안 되었던 것이다.
※ 후사는 존재적 후사가 아닌 사역적 후사이다.(사용적 활용적)
신의 성품이 아니면 그 나라를 통치 지배 사용 누리고 느끼지 못한다.
제十一절. 신의 형상인 인간의 원시상태.
사람의 원시상태에 대해 구구한 학설들이 있다. 혹 학자들 중에는 원숭이가 진화돼서 사람이 되었다는 터무니없는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고, 또 혹자들은 사람의 원시상태가 신체적 모양은 물론 원숭이와 구별되어 있지만 지능 면이 원숭이와 동등할 정도의 저능적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저능적 지능이라는 말은 비판성이나 평가성이나 판단성이, 그리고 감성인 시감성 청감성 등 모든 면이 원숭이와 다를 바 없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진보하고 발전하여 의복도 입고 거처지도 만들고 또 나아가서는 하등동물을 양육도 하고 지배도 함으로써 원숭이보다 지능 면이 점점 발달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자들도 있다.
또 혹자들은 인간과 원숭이가 원시상태에서는 그 차이점이 다른 동물들의 차이정도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차별의 거리가 점점 멀어진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정통학자들은 사람은 원시인 본래부터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자로 지어졌다고 말한다.
※ 혹자들은 원시상태를
① 원숭이 중에 하나가 진화되고 진화돼서 사람이 된 것이라고 하기도 하 고.
② 인간이 원시상태에서는 원숭이는 아니지만 원숭이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상태였지만 발전됨에 판단력과 비판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③ 인간은 원숭이와 다른 면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여러 피조물 중에 하나로 지은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여러 피조물들과 동등목적으로 지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대개의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수많은 일반적 피조물 중의 하나로 지었지만 다만 다른 피조물보다 조금 우수하게 특수하게 지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피조물 중에 어느 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목적선택의 제 1목적물이라는 것을 적극적인 면에서 부인하지는 않으나 그 사실 자체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자연적으로 부인이 되어 인간을 하나님의 제 1목적물인 특수적인 피조물로 보지 않고 다만 위치적인 면에서 차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비 생명적인 물체와 생명적인 물체와의 차등성, 또 생명적인 물체(식물성)와 생명적인 물체이면서 비 감각적 비 본능적 물체와 감각적 본능적인 물체와의 차이성, 같은 동물성이라 할지라도 곤충에 포함되는 동물성과 곤충이 아닌 파충류의 동물성과의 차이성처럼 인간이 일반동물보다 다른 것은, 혹은 차이가 있다고 하면 그런 면에서의 차이밖에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은 동물보다 탐구력 진취성 발전성 진보성이 우세한 차이밖에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만일 인간이 여러 피조물들 중에 하나로 지음 받았지만 다만 피조성에 있어서 여러 피조물들에 비해 성질적 차이뿐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특수적이고 영원한 목적성과 결과성은 부인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원시상태에서부터 그 구조성에서 일반적 피조물에 비해 지능적인 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독특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성을 가진 자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즉 인간을 지으시되 일반적인 피조물보다 여러 면을 조금 우세하게 특수하게 지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원인 동기 목적이 중요한 것이다.
※ 일반적인 학자들의 견해.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인간도 역시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로 지음 받았다. 여러 피조물을 짓는 중에 ‘무엇도 만들어 볼까, 무엇도 지어볼까’ 하며 계획 없이 하다보니 ‘사람도 하나 지어볼까’ 해서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
돌은 무생명체, 나무는 유생명체 다만 차이는 생명. 나무는 감각성과 본능성은 없으나 동물 곤충 파충류는 감각성 본능성을 가졌다. 인간은 이것들보다 조금 우세하게 지었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보다 인간은 최고로 지음받은 것이라고 한다.
철학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무생물을 짓고 나서 실력이 느니까 그 다음에는 유생명체를 지었고, 또 실력이 느니까 그 다음에는 인간을 지은 것이라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고급 피조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수하게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원인 동기 목적성이 뚜렷한고로 그 원인 동기 목적성을 위해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당신의 원대한 목적성이 없고 인간에게 이 세상의 삶이 다라고 하면 인간은 목석이나 금수보다 더 못할 때가 많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지 않으면 안 되는 동기 원인 목적이 있다. 인간을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 아니다.
一. 원시상태의 신의 형상.
1. 타락 이전 인간의 원시상태.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타락 이전 본래 지음 받을 그 당시에 인간의 구조는 완전한 인간으로 지음받은 것이다.
인간구조의 완전성이란 인간은 신체가 있고 그 신체 속에 비 물질적인 생명성 감각성 본능성이 있으니 인간의 신체를 물질적인 인간이라고 하면 이 비 물질적인 면은 비 물질적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는 성분으로 이것을 도덕성 혹은 인격성이라고도 하고, 철학적으로는 이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성 속에는 지혜지식성 도덕성 주권성이 다 들어 있다. 이것을 비 물질적 이성적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같은 비 물질성이면서 이성적인 인간보다 탁월한 영적 인격성이 있으니 영적 인격성이란 물질적 존재를 떠나서도, 이성적 인간을 떠나서도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인격성을 말한다.
이성적 인격성은 신체와 결합되어 있고, 신체를 떠나서는 자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성적인 인격성과 신체와는 논리적으로는 분리가 되나 실체적으로는 분리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적 인격성이란 신체나 이성적 인격성을 떠나서도 독립적으로 존재, 활동할 수 있는 기관이다. 즉 신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다가 자연생명이 죽을 때 신체와 이성도 동시에 활동작용이 중단이 되어 죽지만 영적 인격성은 자연생명이 죽게 되면 이 물질계를 벗어나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별개의 신령계에 독립적으로 가서 활동하는 존재이다. 중생한 영은 천국에서 산 영으로 활동하고, 중생치 못한 영은 지옥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적 인간, 이성적 인간, 영적 인간이 결합된 것을 영육 결합적 인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현존세상에서는 신체가 없는 영적 인간만을 보고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또 영이 없는 이성만을 가지고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신체와 이성과 영이 결합된 그 전부를 지칭하여 인간이라고 말을 한다.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인데 원시인간이 현재의 우리 인간과 비교해서 그 차이점이 구조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구조현상은 신체 이성 영) 원시인간은 죄에 감염될 수 있는 소위 가범성적, 가사성적으로 되어 있었으나 죄가 감염되지는 아니했던 상태가 다른 것이다.
혹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죄에 감염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는 자도 있으니, 즉 현재 우리 인간이 출생 당시(간접창조 받음)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처럼 원시인간도 하나님께서 직접창조(간접창조의 반대) 하실 때 타락된 인간으로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지음받은 후에 인간이 잘못하여 죄에 감염된 것이 아니고 죄에 감염된 인간으로 창조함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볼 수 없다. 엄연히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의 상태를 선을 그어서 말할 수 있다. 타락 이전에는 그 인간이 죄에 감염되지 않은, 즉 죄악성이 없는 신의 형상이요, 타락한 후에는 죄악성에 감염돼 죄악성이 있는 인간으로 되어진 것이다.
※ 인간이라고 하는 인간은
논리적으로는 분리가 되나 활동적 실체적으로는 분리가 어렵다.
영적인 인간은 육을 떠나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
원시인간이나 현대인간이나 구조성에는 똑같다. 다른 것은 혹자들은
① 창조 당시 죄악성이 있는 인간으로 지음 받았다.
② 가범성만 있었지 죄악성은 없다. 영생이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다.
2. 감염성을 가졌으나 감염되지 않은 원시상태의 인간.
혹자들 중에 인간은 원시인간 때부터 죄악성에 감염되어 있다고 하나 이것은 억설에 지나지 않는다. 최초의 원시인은 죄악성에 감염됨도 없고 신의 거룩한 성품이 감염된 것도 없었다. 다만 다른 피조물보다 다른 점은 이 인간은 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그 인격성에는 감염성이 있으니 원시인간은 감염성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다. 타 피조물들은 죄에 감염되거나 의에 감염되는 성분이 없다.
일부 학자들 중에는 물질계악설을 주장하여(그노시스주의) 물질은 다 죄요 악이라고 하나 실지로는 물질 자체가 악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지으시고 ‘선하다’고 했다. 물질이 악에게 등용된다고 해서 그 물질에 죄악성이 감염되어 죄화될 수는 없다. 가령 의사의 손에 칼이나 망치가 들리면 좋게 쓰이지만 반대로 악인의 손에 들려서 악하게 쓰여졌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한 인간이 악으로 감염되어서 악을 지은 것이지 그 도구까지 악해진 것은 아니다. 또한 본능을 가진 동물의 경우에 그 동물은 피조원리(예: 사납게 지음받은 맹수)에 따라 사는 것뿐이지 그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었다고 해서 죄악에 감염된다거나, 그 동물이 성자들에게 쓰임 받는다고 해서 거룩한 신의 성품을 입거나 하지는 않는다.
인간만이 감염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던 그에 대한 죄책임을 지지 않는다. 즉 인간이 흉기를 들어 사람을 죽인 책임을 인간과 흉기가 반반씩 나눠서 지는 것이 아니고 전부 인간이 지는 것이고, 그 죄로 인해 그 죄악성이 사람에게만 감염되는 것이지 그 흉기에게는 죄악성이 감염되지 않는다.
동물들은 그 종류에 따라, 또는 훈련을 받음에 따라 그 성질이 사납기도 하고 유순하기도 하지만 성질과 죄악성과는 별개이다. 일반적으로 성질이 유순하면 선이라 하고, 잔혹하면 죄악성으로 보지만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은 선악의 구별을 그렇게 하지 않고 신의 거룩한 성품만이 선이요 의요, 신의 성품이 아닌 이질적 성품은 그 성질이 인간 면에서 아무리 이타적이라 할지라도 선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든다면 공자 같은 이는 인간적으로 볼 때 결점이 없으리만큼 유순하지만 그 유순이 선일까? 그 유순은 신의 성품을 입은 유순이 아니고 인적인 면에서의 유순이기 때문에 선이 아니다. 인간의 인격성 전부는 선성이 아니고 의성이 아니고 죄악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칼로 사람을 죽이면 사람을 죽인 그 칼도 감염되고 악해지느냐? 감염성은 인간 외에는 없다. 맹수들은 원래 그렇게 지음 받았다. 사나움=악, 유순=선이 아니다.
동물들은 훈련과 교육에 따라서 인간의 명령에 따르는 것에 차이가 있으나 이것은 감염이 아니다. 인간 외에는 감염성을 입을 필요가 없다. 인간은 감염될 수 있도록 지었다. 타락 전에 감염될 자로 지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지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것이 동시에 감염될 수 없다. 죄에 감염이 안 되려면 적극적으로 의에 감염자로 살면 된다.
3.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원시상태의 인간.(양면적 감염성자이지 동시 적 감염성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감염되도록 지으셨는데 이것은 신의 성품을 감염시킬 목적으로 그렇게 지으신 것이다. 다만 인간이 선이나 의, 또는 죄악성으로 감염될 수 있는데 동시에 양면적 요소가 감염되지는 않는다. 그런고로 현재 인간이 죄악이 감염되고 있을 때 동시에 의를 감염시킬 수 없고, 의로 감염되고 있을 때 동시에 죄가 감염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인간이 계속적으로 신에게 피동 되고 동화되어 선과 의를 감염시키고 있을 때에는 죄가 감염되지를 않는다. 그러나 의를 감염시켜 나가는 그 일을 스스로 중단하게 될 때에 죄에 감염되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죄에 감염되지 않게 하려면 소극적으로 죄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계속적으로 의에 감염되는 활동만 하면 죄의 감염은 되지 않는다. 현재 죄에 감염되고 있는 동안에도 인간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의에 감염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의에 감염성의 우선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의에 감염성의 우선권을 가지게 지은 것은 계시목적에서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사건선택이 있었으니 이 사건선택이란 당신이 누리고 활용하시는 그 신령계를 ‘다른 누구와 함께 누렸으면!’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그 천국을 함께 누릴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으니 여기서 존재선택이 나오는 것이니 인간이 그 천국을 하나님처럼 누리려면 신의 성품인 의를 입지 않고는(감염)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고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감염성을 넣어서 신의 성품을 감염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의도 죄도 감염될 수 있으나, 즉 빨간 물이나 검은 물에 염색될 수 있으나 의에 대한 감염 면이 우선적이다.
물론 우리를 의만 감염이 되고 죄악성은 감염되지 않도록 지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선성의 사역의 계획과 설계가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의의 감염의 적극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느껴진다. 즉 ‘인생아, 너는 의로 감염되지 않으면 죄가 감염이 되는 존재이니 죄에 감염이 안 되려면 부절이 휴식 없이 계속적으로 의에 감염되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기독자들은(신의 대 선택의 제 1목적물로 지음받은 존재) 죄에 감염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혀 감염된 죄악성을 다 탈색을 시켜 중생케 했으므로 중생한 자의 죄악성을 입은 인격은 부활할 때 완전히 제거되고 만다. 우리 기독자는 현세에서 입은 모든 죄악성을 영원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탈색되고 제거되어 신의 성품을 입은 선성만을 영원히 입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다.
※ 인간은 죄와 의가 동시에 감염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마음도 활동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잘 때도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자란다. 공백기간은 없다.
인간을 감염성자로 지은 것은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런 자로 지었다는 것이 참 놀랍다.
二.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인격)의 원상.
인간은 하나님의 대 구원선택의 목적물이기 때문에 인격적 실유적으로 창조되었고, 목석이나 금수와는 엄연히 구별이 되었다.
인간의 인격의 주체성인 영은 그 내용에 있어서 단순성 영성 불가견성 비 물질성 불멸성 등의 품질들과, 지정(知情) 등의 심력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 기능으로 특별히 자신을 세상과 하나님을 관련하여 아는 것과 도덕적(일반도덕과 생명도덕) 목적을 향하여 결정을 하는 이중작용을 한다.
※ 특수적이 아닌 신자나 불신자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1. 영구성.
인간의 영은 불사적이어서 영원히 영원히 의식적 존재로 영존한다.
인간이 신적 형상의 제 1목적물이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되는 것을 중지하기 전에는 잃어버릴 수가 없다. 혹 정신이상자라 해도 그것이 희미할지는 모르지만 파멸되지는 않는다.
※ 미 중생자는 영의 작용을 느끼지 못한다. 느낀다고 한다면 느끼는 그것은 영이 아닌 이성이다.
‘영이 죽었다’는 말을 영은 활동을 하는데 다만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라고 하는 자가 있다.
이성의 활동을 영의 활동으로 본다면 중생한 영도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말이 된다.
미 중생자는 활동적으로도 죄를 짓고 영으로 살아도 죄짓는다. 미 중생자가 육신+영의 결합체로 있을 때는 활동을 하지 못한다. 발광체가 없을 때는 반사체가 그 기능이 마비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과 결합되면 활동을 한다. 영은 물질계를 벗어나면 독립적으로 활동을 한다.
형상(인격성): 영은 완전 독립적 인격이시다.
이성(인격성): 육체와 영혼을 떠나서는 활동을 못한다.
영의 활동이 이성에 반사한다. 신체는 이성의 희로애락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이성은 영의 반사작용을 예민하게 한다.
2. 성숙성.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을 성숙한 것으로 지었다. 사람 역시도 성숙한 상태로 지으셨으나 최초에 지음을 받은 그 즉시에 인격성은 진공상태였다. 왜냐하면 경험도 체험수학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험적 지식이나 체험적 지식이나 수학적 지식에 있어서 유아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지 않게 쉽게 터득이 되고 쉽게 인식이 되고 인식된 것을 사용 활용하게 되었다. 어떤 현상을 보고 즉각적으로 분석해서 적합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명철한 두뇌였다. 그러나 경험적 지능은 공백상태였다.
영이 죽은 후에도 인격적 작용을 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가사에 곡을 붙이는 것이라던가, 꽃을 보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격의 작용이다.
인간의 영은 인격의 주체성이요, 이성이 마비되면 동물과 같다.
원인은
① 성숙한 육체.
② 이성적 정신적 성숙.
③ 과거적 기억은 없으나 성숙성에 있어서 영아성이 아닌 진공상태였다.
三. 도덕적(인격) 하나님의 형상의 원상.
인간은 인격적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 목적으로 삼으며, 자기를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의 유한한 반영으로 만드는 정서 및 의지의 선한 경향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 도덕이라는 말은 유교의 전용적인 용어가 되었고,
자비라는 말은 불교의 전용적인 용어가 되었고,
구원과 감사는 기독교의 전용적인 용어가 되었다.
짐승들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면에서의 순종이지 인격적인 면에서의 순종은 아니다.
타락 전에 아담과 하와의 사랑은 본능일까, 이성일까? 짐승과는 다른 이성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었다. 무엇을 보고 일어나는 그 마음이 도덕성이다.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도덕성이요 인격성이다.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인격성이요 곧 도덕성이다.
원시상태의 그 영혼이 천국에서 마음대로 활용 활동할 수 있겠느냐? 단일성이 아닌고로 갈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어디까지나 모형이다. 단일성적이 아닌 것은 천국에 용납이 안 된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1. 적극적 성.(聖)
이 성(聖)이라는 낱말 자체도 우리가 해석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거룩에 대해 정의를 내린 것이 일치하지 못하고 각이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
거룩이라는 말은 원어학적으로 직역하면 구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구별이라는 말과 거룩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하기는 어렵다.
거룩이라는 말은 원래는 하나님에게만 적용이 되는 말로 다른 모든 존재는 불완전성이지만 하나님은 완전이라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라는 말이요, 다른 모든 존재는 비 절대적이지만 하나님만은 절대자라는 뜻에서 거룩이라는 말이다.
그 외에 같은 피조물이면서 소와 말은 같은 피조물이면서 소는 소요 말은 말이라는 면으로 구별할 때 이것도 구별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하기오스(거룩)라는 말은 붙이지 않는다. 많은 소들 중에 한 마리가 있다고 해서 ‘저기는 전부 소다’ 라고 하지 않듯이 그런 것에다 거룩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말은 고차원적 고가적 절대적 완전적 성품을 지니고 있는 완전 독일무이한 존재라는 뜻을 가진 거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체적 독립적 독자적 거룩성을 가지고 계신다. 수많은 존재 속에서 구별하고 구별해서, 비교하고 비교해서 최상급의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 거룩=구별. 존재와 질적으로. 구별=존재적 구별(피조물간에). 거룩=자체적 존재적.(조물주)
어떤 분은 인간 타락 전의 상태는 무죄상태가 아니고 적극적인 거룩성을 가진 상태라고 말한다.
원인의 형상(선성)과 그리스도의 구속 후의 인격성의 선성과 같은가, 다른가? 어떤 분은 같다고 보는 자가 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원상회복인가?
원인의 형상과 구속 후의 인격성은 무죄성 면은 같다고 볼 수 있으나 타락 전의 영은 칭의성이 없다. 구원이 원시상태의 회복이라면 하나님의 계획이나 설계에 실패성이 들어 있다. 즉 인간이 들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실패하도록 해서 하나님 이것을 다시 원상회복 시켰다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무능자가 된다.
에덴동산은 물질계이다. 여기서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지었는데 인간이 타락을 해서 하나님은 다시 그것을 회복시켰지만 이미 에덴동산은 없어졌고 해서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인가?
원상(에덴동산에서의)의 거룩은 피동적 모형적 거룩이다. 이 거룩은 신령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동화적인 거룩은 아니다.
● 인간의 두 가지 거룩.
① 같은 피조물이지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에 비해 독특성 특수성을 가진 거룩이니 이 특수성에는 다른 피조물과 구조현상이 다르다는 점과,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영육이 결합된 존재로 지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는 것이다.
② 인간은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이요, 그런고로 원형적 신의 거룩을 입을 수 있는 거룩성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을 입을 수 있는 바탕의 거룩을 가진 자이다. 이런 성분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없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이 입혀지지 않으나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거룩이 입혀질 수 있다. 이것이 곧 도덕적 형상이다.
2. 상대적 완전.(양적 완전이 아니고 질적 완전)
이 완전은 하나님과 같은 완전이 아니고 모형으로서의 완전적이라는 말이니 모형으로서 완전적이라는 말은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을 갖추고 있는 완전이라는 말이다. 즉 이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이 그 어느 한 부분이 없다거나 일부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질적으로 완전이라는 말이다. 타 피조물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완전이라는 말이다.
※ 어린아이는 신체적 구조면으로는 완전이지만 인격적인 면은 완전이 아니다.
모정은 아가페 사랑이 아니다. 아가페는 아니나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지혜 지식은 천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생명과, 구속 후의 생명은 같은 생명이 아니다. 완전히 다르다.
3. 전체적 조화.
원 의(原義)는 또한 사람을 구성한 모든 요소의 완전한 조화와 적정한 복종을 포함한다. 그의 이성은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그의 의지는 그의 이성에게 복종하고, 그의 정서와 욕구는 그의 의지에게 복종하고, 그의 신체는 영혼에게 충실히 복종하는 기관이었다.
4. 하나님과의 교통.
원인의 원 의도 하나님과의 교통이 수반했다.
이 교통수반에 있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① 하나님이 인간에게 유형체로 나타나셔서 인간과 대화했다는 학설이다.
그렇다면 이 때 하나님은 무슨 옷을 입고 오셨으며, 아담과 하와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나?
②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시되 무형체 음성으로써만 대화 교통 의논했다 는 설.
③ 그 때는 영이 타락되기 전이니 영의 활동성이 무형체로 무음으로 이성 에게 민감하게 반사되고 있고, 하나님의 의사는 인간의 영에 반영될 때 유형체나 다름이 없이 무음이나 귀로 들리는 음성으로 명확하게 교통했 다는 설이 있다.
四. 외면적 하나님의 형상의 원상.
비 물질적 무형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물질적이며 유형적인 사람의 신체에 반영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영혼의 자기 표현을 위한 기관임과 하등 피조물계에 주관권을 행사하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신적 형상인 것이다.
신의 형상이란 고정적 용모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데 외면적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대개 인식하기로는 얼굴, 형상, 인간의 생김새, 이목구비, 수족신, 구조, 형상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외면적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의 생김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 동작이 육체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영이 주격이 되어 이성과 신체로 통하여 하등 피조물에게 주관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영의 동작은 영 자체의 동작이 이성과 신체를 통하여 나타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외형적 하나님의 형상이란 타락 이전 인간의 영의 작용이 신체로 통하여 나타난다는 말이다. 타락 이전에는 영의 동작이 이성을 통하여 신체로 나타나던 것이다. 이것을 외형적 하나님의 형상이라 한다.
타락 이전에는 영의 찬송이 신체의 입을 통하여 불려지기도 했고, 짐승의 이름을 짓기도 했지만 타락 이후에는 영이 이성으로 건너오지 않았다. 그러나 중생 후에는 가능인 것이다. 예: 멀리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통하여 연락한다.
1. 완성상.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를 창조하실 때 영아로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그 신체의 창조는 완성된 사람으로 출세케 했다. 시간적으로 이제 금방 세상에 출연했을 그 당시는 영아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인간이 현세에 출세하기 전에 어떤 별개의 세계에서 그 만큼 성장해 가지고 현세에 출세한 것도 물론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창조의 예정을 하시고, 예정을 하신 후 창조하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그 동안에 영아인 인간이 예정세계에서 성장하다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완전체로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신체가 성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은 출생함과 동시에 완성된 인간으로 출세한 것이다.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그러하다. 모든 피조물들을 지으실 때 영아적 피조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완성된 피조물로 지었던 것이다.
※ 인간창조 당시에 완성상으로 지었다. 영아를 거치지 않고 완성품으로 지었다. 피조물들을 모두 그렇게 지었다.
고고학자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20억 년, 30억 년으로 본다. 성경상으로 보면 나이가 그렇게 될 수 있느냐?
과학적 증명으로 소나무의 나이테나 마디를 보고 수령을 짐작한다. 이런 방법으로 볼 때 해송의 나이는 정확하다. 그러나 대나무의 나이는 1년에 한꺼번에 자라서 다음은 늙기 때문에 틀리게 된다. 육송은 오래되면 마디가 없어진다.
소나무는 2, 3월에 물이 오르니 이 때의 소나무 진액은 맛이 달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면 물은 송진냄새가 나고, 또 한 달이 지나면 그 물은 송진이 된다. 이렇게 해서 껍질이 된다.
땅속에서 뼈다귀를 발견해 화학적인 변화를 이용해 그 동물의 생존연대를 측정하지만 시체인 경우 죽은 즉시로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자란다.
지구가 생성된 연도가 20억 만년이 된다고 하며 과학적 근거를 댄다. 석탄의 경우 천지개벽이나 지진으로 나무들이 숯이 되어 매몰된 것이 시간이 흘러서 석탄이 되었다고 한다. 돌에 새겨진 발자국이나 돌에 박힌 나무잎사귀, 짐승들, 달걀, 고기 등을 가지고 연대를 측정한다. 창조할 그 때에 하나님께서 땅속에 모든 것을 저장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과학기구를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측정한다면 창조 때의 나이가 정확하게 나올까? 20대 또는 30대의 나이로 아담을 막 지었을 때 과학자가 아담의 나이를 측정한다면 몇 살로 나올까? 과학에 안 맞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성이다.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의 과학을 초월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2. 불사성.(不死性)
이 설은 사람을 죽지 않게 지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영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신체를 두고 하는 말이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전인에게(영육) 사(死)의 요소가 없는 것으로 지으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망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처음 지음 받을 때 불사성으로 지음 받았는데 가사성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의 육은 전인이 가범성적이요 가사성적으로 믿는다. 물론 타락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직접 범죄자가 아닌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생존기간이 영원히가 아니고 유한성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피조물들이 생겨지고, 또 이미 있던 피조물들은 죽고 이렇게 교체되고 있는데 같은 물질인 인간의 육체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신체를 불사성적으로 지었다고 하면 하나님에게는 숫자적 예정이 있겠지만 인간 편에서 생각해 볼 때 그 많은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최후 인간까지 죽지 않고 다 살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혹 모든 인간이 에녹과 엘리야처럼 세상생활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면 부활교리와 하나님의 예정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런고로 우리는 인간의 영육이 다 가범성적으로 가사성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단순히 가사성으로 지었다고만 하게 되면 이론적으로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안 죽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게도 된다.
※ 영육이 가사성이다.
3. 낙원생활.
인간에게 낙원이라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나 낙원을 낙원으로 느끼는 요소가 더 중요하다. 만일 조물주께서 우리를 금수로 지었다면 낙원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그런고로 낙원을 낙원으로 느끼는 요소가, 성질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곳을 낙원이라고 만들었는데 우리 인간의 성질 성격이 그것과 배치가 되고 대립이 된다고 하면 그 곳은 인간에게 낙원이 될 수가 없고 지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낙원이라는 현실과 인간이 그 현실에 적응하는 성격 성질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사람은 꽃을 잘 가꾸어 놓고 그것을 보고 좋아하는데 소는 그 옆에서 풀을 먹기 위해 꽃의 아름다움을 다 밟아 버리는 경우가 있으니 사람은 그 꽃을 아름다운 꽃으로 보았으나 소는 그것이 아름다워 보일 리가 없다. 그런고로 아름다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시감성도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셔서 그 인격으로 신의 성품을 닮게 해 그 낙원을 누리고 통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 이전에는 그 낙원과 인간의 성질이 잘 적응이 되었던 것이다. 시감적인 것이나 감각적인 것 혹은 청감적인 것 등 모든 것이 인간성질에 잘 적응이 됐다는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낙원이 낙원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그 낙원동산과 인간의 성격이 적응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낙원이 낙원으로 느껴지지 않고 불안의 동산, 공포의 동산, 두려움의 동산, 부끄러움의 동산이 되어서 많은 사람이 살지 않고 단 두 사람만이 살면서도 수치를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낙원동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고, 멸시하는 것 같고, 불안을 주는 것 같고, 심지어는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느끼는 그 면이 완전히 변질되어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 것이다. 낙원이 변질이 된 것이 아니고 낙원은 영원히 낙원으로 있지만 인간이 변질이 되고 보니 이 낙원은 인간에게 낙원일 수 없고 불안의 에덴동산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 낙원도 좋지만 그 보다 낙원을 낙원으로 느낄 수 있는 성질 요소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낙원을 낙원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성질적 변질이다. 지옥이다. 인격자가 아닌 금수나 곤충들도 낙원이 낙원만큼 느껴지겠느냐?
원인의 낙원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질(요소)에 맞겠금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성질이 낙원에 적응하듯 인간도 역시 그런 인격자로 지은 것이 원인의 형상이다.
낙원은 그대로 있고 인간이 변한 것이다. 낙원을 낙원이라고 느낄 수 있는 영이 죽은 것이다. 낙원을 느낄 수 있는 성분이 바꾸어졌다. 그렇게 되니 두 부부는 낙원이 낙원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고, 부부지간인데도 서로 흉을 보고, 다른 사람이 없어도 부끄럽다고 가리게 되었다.
부끄러워하는 그 느낌이 무엇이냐? 처음으로 아픔을 느꼈을 때 낙원이 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서 변질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원상복귀는 타당한 말로 들리나 타락이 되니 낙원과 대립이다. 사람의 범죄의 양이 많은 것만큼 낙원에 적응이 아닌 대립이 되고 하나님의 진리와도 대립이 된다. 평소에도 선악과를 먹고 싶을 때도 있고, 생명과를 먹고 싶을 때도 있다.
선악과: 영웅, 세상의 출세.
생명과 먹는 자는 천국의 모든 존재와 사건이 잘 적응이 된다.
五. 권위적 하나님의 형상의 원상.
인간은 하등 피조물을 주관하는 권위를 받아 만물의 영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일반적인 피조물과 똑같이 창조하시지도 않았고, 또 일반적인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로 창조하시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대 구원의 선택의 제 1목적물로 지었기 때문에 존재적으로 하나님 다음 가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학자들은 인간창조를, 혹은 권위성을 여러 각양의 피조물들 중에 하나로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모든 만물창조의 목적성이 없어진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창조의 목적을 뚜렷이 가져야 한다.
일반학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지었고, 그 여러 피조물 중에 인간은 좀 특수하게 지어서 인간에게 지배권 혹은 주관권 영장권을 부여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대 선택의 목적물로, 인격적인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 다음 가는 권위를 주셨던 것이다.
※ 하나님께서 아무 목적없이 만물을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 선택은 구원. 그 구원은 결과적 구원이니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사랑을 받고 느끼고 신령계를 누리고 다스리고 지배하며 하나님의 영광성을 누리는 것이다.
1. 통찰적 권위.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격적으로 지으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지키라고 하셨다.
이렇게 통치하고 지키려면 통찰적 권위를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인간에게 통찰적 권위를 주신 것이다. 인간 외에 다른 어떤 물질적인 피조물에게도 이런 통찰적 권위를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에게 통찰적 권위를 주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니 그 목적은 모든 것을 통찰하는 중에 자신의 통치력이 성장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2. 탐구적 권위.
인간은 통찰적 권위만 가진 것이 아니고 탐구적 권위도 가졌다. 물론 탐구성이란 일반 피조물들이 자기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참을 찾는 권위를 부여했다는 말이다. 즉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권위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인이 창조된 그 즉시로 모든 물질계의 성질을 다 알고, 종류를 다 알고, 물질이치를 다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도덕이치를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창조됐을 당시에 그는 지성적인 면이 진공상태로 지음을 받았으나 탐구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질을 탐구할 때 물질을 알게 되고, 또 물질이치를 알게 되고, 물질의 성질 연합 등등을 탐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인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중에 도덕이치를 탐구하게 된 것이다.
이 탐구적 권위는 영원히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도덕이치 속에 무한히 숨어 있는 도덕이치 생명이치를 탐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일반 피조물과는 달리 교육기관이 있어서 그 교육기관에서 물질이치와 일반 도덕이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지식이나 물질에 대한 일반 도덕이치와 물질이치를 탐구한다. 그렇지만 일반 생물계에는 생명이치의 탐구권은 없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종교기관에서는 도덕이치, 영의 이치, 생명이치를 탐구하게 된다. 이 종교기관은 순전한 도덕이치 생명이치를 탐구하는 기관이다.
3. 진보적 권위.
일반 피조물들은 창조할 그 당시나 수천 년 후인 현재나 진보성이 없다. 그들에게는 진보적 권위를 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피조물들은 거처지에 있어서 진보성이 없고, 또 자기의 꾸밈에 대하여 진보성이 없고, 활동성에 있어서 진보성이 없다.
※ 까치는 십 년 전이나 천년 전이나 집과 옷과 먹이가 똑같다. 그러나 인간은 진보다.
1. 나무껍질 - 식물성.
2. 양털 - 동물성.
3. 섬유 - 화학성.
왜 이렇게 주느냐? 구원을 위해서이다. 구원을 실지로 입혀준다.
제十二절. 행위언약에서의 인간.
1. 서언.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의 대상을 삼으셨다. 인간 외에 그 누구도 당신의 언약의 대상을 삼지 아니하셨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이다.
그러면 인간은 과연 하나님과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동질 동류 동종 동급 동등이 되어야 언약의 대상자로 삼을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언약의 대상자로 삼으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모든 피조물에 비해 말할 수 없는 영광이다. 그야말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우냐? 인간이 감히 조물주와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고등적으로 대우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 삼으셨고, 또한 후사를 삼기 위하여 창조했고, 또 사랑의 대상자로 창조했으니 언약의 대상자를 삼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도 이것이 당연하지만 다른 모든 피조물 편에서 볼 때도 무한히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모든 만물들은 인간을 두려워 할 것이다. 또 모든 만물들은 인간에게 복종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들이 볼 때 인간도 자신들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인간 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도 당신의 계약 혹은 언약의 대상자로 삼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언약의 대상자를 삼는다는 것은 벌써 자유를 그 만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유하는 면에서 하나님과 동등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유하신 것처럼 인간도 자유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인간처럼 절대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틀림없이 복종하게 되어 있다. 자유라는 것은 전혀 없다. 오직 인간에게만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언약의 대상을 삼으셨다. 인간 외에 그 무엇과도 언약의 대상을 삼지 않으신 것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 언약이라는 용어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감히 어떤 존재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이 과연 언약의, 계약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가? 동류 동급 동종 동질 동등이라야 언약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피조물이 볼 때 인간이 참 영광스럽기도 하다.
‘인간을 당신의 후계자, 언약의 대상자로 삼았다’고 하는 이 말에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을 언약의 대상자로 삼고 언약을 하신 것은, 혹은 계약을 하신 것은 그 인간이 위약을 하면 벌을 주기 위한 목적은 결코 아니다. 동류 동종의 인간으로서 등급적 차등이 있는 존재로 지어 영원히 우등의 존재로 만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언약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명심하고 위약 없이 지켜나가는 자, 또 아무리 그 언약을 지키기에 난한 일이 있어도 나와 언약하신 그 분을 생각하여 그 분을 존중히 여겨 언약을 지킬 경우, 또 그 분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면서 세상에서 그 어떤 자나 또는 그 어떤 사건이 왔을 때도 계약하고 언약하신 그 분을 생각해서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언약을 위약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에 그는 그 만큼 모든 사람에 비해, 또한 어떤 일에 있어서 언약을 어긴 자들에 비해 우등적 차등이 생기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 언약이 없이는 인간은 차등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세운 목적은 차등이다. 그리고 이 언약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기 위해 세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그 만큼 언약을 지키는 자는 실력이 배양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자가 된다. 이렇게 언약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영적 실력이 배양되게 되는 것이다.
이 언약은 결코 언약하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하신 것은 아니고 인간을 위해 하신 것이다. 우리 피 언약자가 언약을 이행한다고 해서 언약자인 하나님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언약을 순종하므로, 혹은 이행하므로 이행하는 자신이 동등인 인간 중에서 우등적인 차등한 인간이 되어지는 것이다.
우등적 월등적 차등적인 인간이 된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모든 면이 월등할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도 동종 동류 중에 월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모든 환경이나 현실이 그 언약을 이행하기에 쉽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아주 어려운 환경을 동원시키신다. 그리고 같은 조약의 언약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 언약을 이행하는데 있어서 쉽고 어려운 차별이 생긴다.
※ 언약을 주신 목적.
동류 동종의 인간과 차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절대 복종 자면 차등이 될 수 없다. 차등이 있게 하려니 자유를 주심과 동시에 언약을 주신 것이다.
이 언약은 벌을 주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니다. 아무 이유 없이 또는 항의성을 없애기 위해서, 못하게 하기 위해서 언약을 주신 것은 아니다. 더욱 존영자가 되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언약을 이행함에 따라 우리의 실력이 배양되도록 했다. 그렇지만 언약을 이행하기에 쉽도록 모든 환경을 동원하지는 않는다.
언약은 어려운 관문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것이 그럴 수 없이 중요하기 때문에 부모 형제와의 정이 끊어질 때도 있다.
인간은 그 분의 요구, 그 분의 의사, 그 분의 일에 순종하고 갈 자이다. 그렇게 나아갈 때 환경을 쉽도록 해 주시려니 그렇게 생각 말라! 같은 환경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쉽고 어렵고, 시간에 따라서 쉽고 어렵고.
행위언약을 지키므로 우리의 실력이 배양된다고 하면 언약을 주지 않아도 우리의 실력을 배양할 수도 있다.
2. 타락 이전의 행위언약.
하나님께서 인간과 행위언약을 하실 때 인간 타락 이전에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지키고 따먹고 따먹지 말고’ 이렇게 표면적으로 언약하신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당신의 예정에서는 인간이 타락 전에 그리스도를 주실 것까지 다 언약을 했지만 그러나 이 언약은 인간과 직접 언약은 아니었다.
언약이라는 것은 말로 약속한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성경대로 보면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약하시기를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했다. 그 때에 에덴동산에만 거처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들을 위하여 특별히 에덴에다 동산을 지으시고 그 곳에 인간을 살게 했다고 했으니 이것도 일종의 계약 중에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고 ‘너는 에덴동산의 외계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타락 이전에 하나님이 인간과 세운 언약은 에덴동산에 거처하라는 것이다. 또 만물을 다스리라는 말을 했고, 지켜라 수호하라 했고, 또 생명과와 일반과는 따먹되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다.
이렇게 언약했으나 인간은 절대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에덴동산을 절대로 이탈할 수 있는 의사도 권리도 자유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의 언약에서 이탈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때 인간이 그 언약대로 지키고 살았더라면 지금도 인간은 죄에 감염되지 않았을 것이고, ‘고통이다, 불행이다’ 하는 것을 경험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언약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죄에 감염되었고, 그들에게는 불행과 고통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처음으로 불행을 경험했을 것이고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이 이 언약을 위약하고 불행적인 고통적인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것이 위약자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① 에덴동산에 거처하라.
이 말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지어주신 내 현실에 만족하고 마음으로 그 현실을 원망치 말고 떠나지 말고 그 현실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의 목적을 구원건설에 두게 되면 자기의 어떤 현실도 구원에 집착시키기 때문에 불평이 없지만 반대로 구원과 상관없이 누리며 살려고 하게 되면 자기의 현실에 대해 불평이 나오게 된다. 자기의 현실을 싫어하는 것은 생의 목적이 틀린 것이다.
② 다스려라, 통치하라.
우리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에게 다스림 받지 않고, 이용을 당하지 않고 만물을 통치하려면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결합이 되어 만물과 관계를 가지라는 말이다.
③ 지켜라.
이 언약은 외계에 있는 것이 침범치 못하게 지키는 것과, 내계에 있는 것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 통일역사의 생명권, 대 치리권 내에서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지켜야 한다.
④ 따먹어라.
적극적 권고적인 교훈이다. 도덕을 행하고 선행을 행하고 진리를 먹어라, 선을 먹어라, 의를 먹으라는 말이다.
⑤ 따먹지 말라.
부정적 소극적인 권고이다. 원리 원칙적으로 생명과를 따먹고 살면 선악과는 자연적으로 안 먹게 된다. 왜? 생명과를 먹고 나니 선악과를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생명과를 배불리 먹고 나면 선악과의 생각이 안 난다. 선악과를 먹고 싶은 마음은 생명과를 안 먹었다는 증거이다.
비 진리적인 것, 사망적인 것, 세상적인 것, 거짓된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이 곧 인간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하신 언약이었다.
3. 타락한 이후에는 은혜언약.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행위언약을 주셨다. 행위언약을 주신 것은 완전히 사망계에 빠지기 전이요, 죄에게 포박되기 전이기 때문에 인간이 선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행과 선행을 할 수 있고, 또 그 나름대로 에덴에서 지상 최대의 낙을 누릴 수 있고, 또 그 낙을 누릴 때에는 어떤 방해도 없고 누림의 낙이 감퇴나 감소나 삭감이 없다.
인간에게 향락이 쾌락이 감소 감퇴된 것은 범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그 행위언약을 타락 이전에 잘 지켰더라면 이런 불행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약을 이행하지 못하고 위약 하므로 인간에게는 그 모든 행복과 쾌락이 감소 감퇴되고 불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은 행위언약을 이행하기에는 불가능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 자체가 완전히 죄에게 포박되어 죄의 노예가 되었고 사망 아래 빠져 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그 사망계를 벗어날 길이 없고, 죄의 종에서 해방될 힘이 없게 되었다. 행위언약이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행위언약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진정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한 후에 은혜언약을 안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언약을 주셔서 타락한 후의 인간은 은혜언약 하에 있게 된 것인데 이 은혜언약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시기로 한 것이니 무상으로 주시는 이유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이 무효화 됐으니 무효화된 이 행위언약이 무효화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은혜언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은혜언약이 없이 행위언약을 지킨다고 하면 표면적으로는 지키는 것 같으나 실은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행위언약에 있어서 에덴동산에 거처하라는 것은 에덴동산은 자기의 현실을 통해서나 자신의 내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니 곧 자신의 현실에서 이성과 영이 결합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라는 것인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이 행위언약을 하나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간이 타락한 후에 이 행위언약이 완전 무효는 아니다. 은혜언약을 입음으로써 다시금 행위언약은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혹자들 간에는 인간이 타락하므로 행위언약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영원히 무효가 되고 이제는 은혜언약으로써만 살면 된다고 하면서 행위언약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을 무시하고 있는 언약이 아니고 인간에게 되어 있는 행위언약을 다시금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은혜언약이란 일방적인 언약인데 물론 하나님의 예정세계에 있어서는 벌써 영원 전에 의지세계에서 예정을 했으나 인간에게 언약을 주신 것은 타락한 이후이다. 즉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인간아, 네가 타락해라, 타락하면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주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언약이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약속을 했다는 뜻인데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하신 일은 없다. 인간이 행위언약을 이행하지 못하고 죄에게 포박되어 죄의 종이 되어 완전히 사망에 빠졌을 때 ‘독생자 그리스도를 너를 위해 보내주마’ 하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은혜언약이 행위언약과 다른 점은 행위언약은 인간에게 ‘무엇 무엇을 하라, 여기서 거처하라, 다스려라, 지켜라’ 이렇게 했고, 은혜언약은 ‘하라 하지 말라’가 아니고 기능도 주권도 자유도 전혀 없는 사망 가운데 불행 중에 있는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서 너를 건져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은혜언약은 죄악 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죄에서 탈출해 나올 수 없는 인간에게, 실망과 낙망과 절망에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미련해 놓으신 영원한 존영을 받기를 포기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그러면서도 그 사망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만 불가능한 인간에게 모든 죄 값을 그리스도가 대신 지불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서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가 없이 인간의 모든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해주시고, 또 영원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천국의 국민, 천국의 권속이 될 수 있는 주권회복, 의의 회복을 약속하신 것이 은혜언약이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찾아서 이 연결을 해 보려고 인위적으로 노력을 해 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도성인신 하셔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를 중보로써 영원 불변의 완전 결합을 시켜주마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 이 영을 우리 인간이 자력으로 도저히 살릴 수 없는 것이다. 죽은 송장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살릴 수 없는 것처럼 완전 타락하여 영이 완전히 죽은 자로서 살아날 길은 전혀 없는 것이다. 죽지는 않았으나 죽어가고 있는 육신이 이미 죽은 영혼을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육신의 어떤 의행이나 선행이나 도덕이나 수양이나 사색으로 죽은 영을 살릴 길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죽은 영을 살릴 길이 없으니 죽음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즉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은 그 영혼을 살려보고자 많은 육체적 노력을 하지만 이것은 다 불가능한 장난이다. 그런 것을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이나 호응이나 조력을 받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의 단독행위로 하나님의 영원 불멸 불사의 생명으로 살려주겠다는 언약이다.
완전 타락하여 이미 영이 죽은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이 몸이 또 문제이다. 이 몸은 조만 간에 죽음의 선을 넘게 되는 것이다. 죄에게 속박되어 사망으로 끌려가고 있는 처절하고 가련한 존재인 인간은 이 문제를 바라보며 탄식하고 통곡만 할뿐 죽어 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할 길이 없다. 불로초로도 불사약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고 오직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이 죽음 앞에서는 내가 나를, 남이 나를, 내가 남을 바라볼 뿐 속수무책이다.
이런 인간에게 또한 부활의 약속을 하셨으니 ‘네 몸이 죽음의 선을 넘으면 죽음 저편에서 너의 공로 없이 하나님의 단독사역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혀 영원히 죽음과 상관이 없는 몸으로 부활케 해 주마’ 하는 이것 역시 은혜언약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언약을 어겨 타락하므로 에덴동산에서 축출을 당해야만 했고, 이제는 범죄한 인간이 갈 곳이란 지옥밖에 없다. 이런 인간을 가만히 놔두면 지옥에 간다. 필연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지옥으로 가는 이 길에서 탈출할 힘이 없고, 자유가 없고, 권리가 없다. 그런고로 인간으로서는 지옥으로 가는 이 모든 인간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또한 지옥으로 가는 인간이 지옥을 면하도록 하기란 천사로서도, 그 어떤 피조물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조건도 요구도 없이 당신 단독적으로 천국 가게 해 주마고 약속하신 것이니 이것이 곧 은혜언약이다.
※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다른 점은?
행위언약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대신 해 주겠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것이지만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것을 대신 해 주겠다고 하는 것.
은혜언약은 ① 사죄 ② 칭의 ③ 중보 ④ 새생명 ⑤ 부활 ⑥ 천국이다. 은혜언약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행위언약이다.
4. 전 인류에게 주신 행위언약.
행위언약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에 대한 언약의 사실을 행위언약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행위언약은 역사적으로 아담에게만 주신 언약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이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는 그 언약 당시에 인간이라고는 아담과 하와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만 주신 언약이요, 또 그 이후에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이미 축출 당하여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시대인고로 거기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악과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이 언약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주신 행위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담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고 전 인류를 대표해서 아담에게 주신 것이니 언약의 당사자는 아담이라고 할 수 있으나 대표적인 면을 말할 때는 전 인류에게 주신 것이요, 또 뿐만 아니라 이 언약은 표면적 역사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계시적인 면에서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 언약은 살아있는 것이다.
당시의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와 일반과와 생명과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 상징이라는 말은 역사성을 부인하는 면에서 상징이라는 말이 아니고 계시 면에서 상징적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에게 에덴동산에 거처하라는 이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현실을 이탈하지 말고 그 현실에서 다른 현실을 부러워하지 말고 살라는 말이요, 또 에덴동산에서 만물을 다스리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동화되고 피동 되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물을 다스리라는 말이요, 지키라는 말은 성경 여러 곳에 말한 대로 외부적인 것이 혹은 거짓이나 죄악성이 우리 속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요, 내 마음이 원치 않는 곳으로 나가지 않도록 혹은 하나님의 치리성을 이탈하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요, 일반과와 생명과를 따먹으라는 말은 생명운동인 진리생활을 일반생활에서 하라는 말이니 곧 일반생활을 진리에 맞추어서 하라는 말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은 비 진리적인 것, 죄악적인 것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최초 인간인 원인에게 역사적으로 주신 것이요, 그 후 시대 사람에게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것을 좀 더 확대시킨 것이 십계명이요 율법이다.
그런고로 이 언약을 아담에게만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 인류에게 다 주었으니 이 언약을 지키면 생명이요 구원이요, 이 언약을 어기면 사망이 된다.
많은 인류가 이렇게 죽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죽게 해서 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이 법을 실질적으로 어겼기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흔히 생각하기로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죄 때문에, 아담이 이 언약을 위약 했기 때문에 그 후대의 모든 인류는 다 죽었다고 하나 모든 인간이 이 언약을 위약한고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비단 에덴동산의 선악과 문제만이 행위언약이 아니고 그 후에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도 행위언약이다. 대개는 이 행위언약을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언약이라고 하나 이 언약 역시 전 인류에게 주신 언약이다.
우리가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의 언약을 제 1 행위언약이라고 하고, 모세의 율법을 제 2 행위언약이라고 명명하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제 1 행위언약이나 제 2 행위언약은 인간에게만 주신 언약이다. 만인에게 주신 언약이기 때문에 후대의 전 인류는 이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만일 이 언약이 어떤 특정인에게나 특수한 민족에게만 주신 언약이라고 하면 오늘 이방인들은 이 언약을 안 지켜도 된다는 그런 결론이 나온다.
선민 이스라엘이건 이방인이건 하나님 앞에 심판 받기는 동일하다. 다만 옛날 선민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자기들만이 이 언약의 대상자인 것처럼 되어서 내려온 것은 이 법이 그 민족들에게만 국한되어서가 아니고 그들은 하나의 계시목적으로 혹은 모형으로 혹은 모델(표본)로 등용되어서 교훈기관으로 쓰여졌기 때문이지 그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전혀 구별 없이 이 언약을 똑같이 지키게 되어 있다.
※ 전 인류에게 주신 행위언약.
언약이라고 하면 에덴동산의 선악과만으로 알고 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도 행위언약이다. 모세율법은 제 2 행위언약이라고 한다.
‘다스려라, 지켜라, 통치하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것은 빼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말만 하고 있다. 인간이 1차적으로 이것을 다 어겼다.
제 1 행위언약은 아담에게만, 제 2 행위언약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것이라고 보는 자가 있다.
이방인들은 예수 믿어서 구원 얻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다고 하는 자도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공자교훈도 율법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역사적으로 그 때 당시 에덴동산 안에 다른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담에게만 말했다. 아담에게 실지로 그 말을 한 곳이 공간적인 에덴동산이지만 우리에게는 상징적으로 나에게 주신 현실이 곧 에덴동산이라는 말이다. 나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현실을 골라서 주신 것이다.
아담에게 에덴동산에서 살라고 했는데 그 곳이 가장 좋은 곳일까, 나쁜 곳일까, 중간일까? 아담과 하와가 그 때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물질계에서 제일 좋은 곳에 살게 했다고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이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것이다’ 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역사적이고, 우리들에게는 상징이면서 현실이고 계시이다.
신학자일수록 신앙이 깊어야 한다.
‘아담에게만이 아니고 전 인류에게’라 함은
① 아담은 인류의 대표라.
② 상징적으로 보기 때문에 전 인류에게라.
제 2 행위언약은 유대인만이 아니고 전 인류에게 주신 행위언약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심판은 율법을 가지고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가지고 심판을 하고, 이방인들에게는 도덕법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는 이 법을 가지고 한다. 정죄도 이 법을 가지고 하고, 속량도 이 법을 가지고 입었고, 이방인들의 정죄와 속량도 이 법을 가지고 한다. 그래서 이 법을 전 인류에게 주신 행위언약이라고 한다.
제十三절. 행위언약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
본래는 하나님 한 분만 자존자로 독존하여 계셨고 그 외의 다른 모든 존재는 독존자로 계시던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 피조물들을 분리해 보면 신령적인 피조물과 물질적인 피조물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에게만 이 언약을 주셔서 언약의 대상자로 삼으셨다.
인간 외에도 수많은 피조물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유독 인간에게만 이 언약을 하셔서 언약의 대상자로 삼았을까?
언약이란 벌써 상대에게 자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자유성이 없다면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동원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만은 그의 형상인 인격성을 가진 자로 창조했고, 인격성에는 자유성이 있으니 인간에게 이 자유성을 주셔서 자유하게 하시고, 또한 언약을 주셔서 언약적 관계를 맺었는데 이 언약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다.
행위언약은 인간이 그 약속을 행위로 혹은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요, 은혜언약은 인간의 어떤 행동의 조건이 없이 거저 주시겠다는 언약이니 시은자 편에서는 무조건적 일방적이요, 수은자 편에서는 수락적 상대적이다.
시은자 편에서 일방적이라는 말은 상대방이 받아들이던 안 받아들이던 상관없이 주기로 약속하신 것은 준다는 말이요, 수은자 입장에서 수락적 상대적이라는 말은 시은자가 주실 때 수은자는 받아들임으로써 그 언약이 성립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 은혜언약이 무조건적 일방적이라는 말은 수은자의 수락과 거부의 어떤 권리도 능력도 작용하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역사라는 말이니 이는 시은자의 일방적인 은혜라고 볼 수 있다.
불가항력적 은혜란 택자들에게 진리와 영감이 와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히실 때에는 인간이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이다. 또 수락적 상대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인에게 주셨지만 수은자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은혜언약을 입지 못한다는 말이다.
본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은혜언약이 아니고 행위언약이니 이 행위언약은 제 1 행위언약과 제 2 행위언약이 있다.
행위언약이라 할 때 일반적으로 제 1 행위언약인 선악과 문제를 주로 말한다. 즉 인간이 제 1 행위언약을 위약해 타락하여 영원히 멸망 받게 되었는데 멸망 가운데 빠진 인간을 건져서 원상복귀 시키기 위해 모세의 율법인 제 2 행위언약을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제 2 행위언약을 지키면 제 1 행위언약을 어겨 죽게 된 거기서 구원을 입어 원상복귀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 2 행위언약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이것마저도 지키지 못하면 영원히 구원을 받을 길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은혜언약을 사랑으로 주셔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상에 말한 것을 간추려 말하면
(1) 하나님이 제 1 행위언약을 주신 것은 최초 원인을 에덴동산에서 죄 없이 고통 없이 죽음 없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주셨다는 것이다.
(2) 제 2 행위언약을 주신 것은 에덴동산에 살면서 행복하고 만족했던 인간이 제 1 행위언약을 어겨 멸망과 고통 중에 빠지게 되었고 그 낙원동산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으므로 죄와 멸망 중에 있는 그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주신 것이니 인간이 이 행위언약을 지키므로 말미암아 원상복귀를 시켜주신다는 것이다.
(3) 인간이 제 2 행위언약마저 지키지 못해 영원한 멸망 중에 빠지게 되었으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공성을 잠재하시고 자비를 베푸사 은혜언약을 주셔서 이제는 제 2 행위언약을 지키지 않아도 이 은혜언약만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 은혜언약 마저 불신하여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제는 하나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그는 이제 할 수 없이 영원히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상의 것은 일반적 학자들이 주장하는 설이다.
※ 본래 하나님은 자존자요 독존자요 그 외에는 모두 피조물이다.(신령계와 물질계에서)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님이 언약의 대상자를 삼으신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을 당신의 언약의 대상자로 삼으시기 위해 인간을 인격자로 지으셨으니 인간은 하나님의 인격적 대상자이다.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 해 놓고 제 1 행위언약을 주셨다. 이유는 죄 없는 상태로 살게 하기 위해서! 행위언약을 주었더니 그 인간이 언약을 어겨서 쫓겨나게 생겼다. 역사적으로는 이렇게 보인다.
그렇다면 만일 행위언약을 안 주었더라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그대로 오래 살 것이다. 그러니 1차적인 행위언약을 주신 것이 잘못이 아닌가?
인간을 내어쫓고 나니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제 2 행위언약을 주어서 에덴동산을 회복한다고?
그렇게 해 놓고 하나님께서 1500년 이상 기다려 봐도 제 2 행위언약마저 지키는 자가 없거든! 그래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그러면 율법을 안 지켜도 좋으니 너희들은 믿기만 해라(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이 사실을 수락만 해라)’ 한 이것이 은혜언약이라고!
시은자 편에서 일방적.
수은자 편에서 수락적.
하나님 편에서는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은 너희들이 몰라도 내가 다 준다’ 수은자 편에서는 그것을 내가 안 받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 1 행위언약은 하나님도 인간도 모두 실패이다. 또 은혜언약을 받은 자는 절반 성공이다.
一. 행위언약의 원인.
우리가 전 인류를 놓고 생각할 때 인간을 하나님과 무관한 상대적 관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인간을 단순히 상대적으로만 볼 때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수많은 피조물들 중에 유독 인간만을 신의 언약의 대상자로 삼으신 것은 인간만이 인격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희미해진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언약의 대상자로 삼은 것은 인간이 인격자이기 때문에 언약의 대상자로 삼았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언약의 대상자로 삼기 위해 인간을 인격자로 창조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 언약이란 하나님의 목적선택의 대상자인 인간에게 인간창조의 목적의 완전한 효과를 입히기 위해서 하신 것이니 이 언약의 궁극목적은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 구원선택의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과 같은 자라야만 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인격성을 닮아야 사랑의 대상자가 되고, 하나님과 같은 인격의 소유자라야 그 신령계를 누릴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했다.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인격성을 지혜지식적으로 도덕적으로 능력적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주셔야만 했던 것이다.
혹 학자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주신 것은 원인이 본래대로 에덴동산에서 영존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나 이 설은 부당하다. 이 설이 부당한 것은 만일 그 목적으로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주셨다고 하면 하나님은 전지 전능자가 아닌 무지 무능자가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행위언약을 주시면 인간이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알지 못했다는 말이요, 또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영존하도록 한 그 계획은 실패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하신 것은 사람의 인격성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수수관계에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심이 없었더라면 인간을 찾아오셔서 행위언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선지자 호세아가 음녀 고멜을 붙잡고 ‘이제는 다시 헤어짐이 없이 잘 살자’고 하는 언약은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한 까닭이다.
하나님에게 사랑이 없었더라면 이 언약은 없었을 것이요, 또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사랑하지 아니했더라면 이렇게 언약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의 발작에 의하여 인간을 사랑의 대상자로 사랑의 수수관계성을 가지기 위해 인간을 인격자로 지으신 것이다.
만일 사랑의 수수관계가 아니고 시애자의 일방적 사랑이라면 인격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 상대방이 사랑을 받아 느끼던 안 느끼던 상관이 없이 시애자는 사랑만 베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당신에게 있는 사랑을 부어주는 것으로만 족하시지 않고 당신이 누리고 느끼시던 그 쾌락적인 사랑을 인간이 받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인격자로 지으신 것이니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고, 그 상대자인 인간은 그 사랑을 받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인격자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사랑을 받아 느끼는 데는 인격자라야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행위언약의 원인은 사람의 인격성과 사랑의 수수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를 삼기 위해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으니, 지으신 후에 그냥 막연하게 지으신 것으로 끝나고 그 후에 언약도 명령도 대화도 없다면 이것은 신의 목적에 어긋남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위언약을 하신 것이니 이렇게 하심은 인간을 사랑하심에서이다.
※ 행위언약의 원인은 사람과 인격적인 수수관계를 위해서이다.
어떤 학설을 보면 아래 위가 없고 가운데 토막만 있다. 왜? 이단소리가 두려워서!
기독교는 형이하학의 기독교가 아니다.
① 인격자이기 때문에 행위언약을 하신 것인가? 어떤 언약을 하긴 해야 되겠는데 찾다가 인간을 만났다 이것인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 을 인격자로 지은 목적이 무효가 되고 구원선택이 무효가 된다. 언약 을 안 하면 못 사는 분인가?
② 행위언약의 대상자로 삼기 위해 인격자로 지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인격성이 없으면 사랑은 일방적이 된다. 사랑을 받고 느끼고 하는 방편으로 행위언약을 주신 것이다. 사랑치 않으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을 것이다.
二. 행위언약의 동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위언약은 주지 아니하시고 은혜언약만 해서 우리 인간이 그 은혜언약의 효력만 입었더라면 모든 인간이 차등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언약이 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권적으로 인간을 차등 되게 했더라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아니요, 또 공정하지도 못하니 하나님의 지공성이 파괴가 되고 결국은 하나님은 하후하박의 하나님이 되고 만다.
만일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공성대로 인간에게 은혜언약만 주셨다면 모든 인간이 그 은혜언약만 입어 기본구원을 동등하게 입었을 것이고, 또한 기본구원이 동등인 것처럼 다른 모든 것도 동등일 터이니 이렇게 되면 인간은 인격자로서 차등으로 오는 그 쾌감과 그 만족감은 영원히 감소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고로 행위언약인 기본은혜는 동등이지만 중복은혜는 차등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차등된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행위언약을 안 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공성도 이루고, 또한 차등으로 인한 행복감과 만족감을 인간으로 하여금 온전히 맛보게 하기 위해서 만인 평등적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이 행위언약을 주셔서 차등 되게 하신 것이다.
제 1차 행위언약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되지 아니했더라면 이 현존세상에서 구원경쟁을 할 길이 없고, 구원경쟁이 없이는 차등이 있을 수 없고, 또 제 2 행위언약이 없으면 계명을 더 지키고 덜 지키는 자가 없을 것이니 역시 차등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위언약을 하시게 된 동기는 인간을 차등 되게 하려는 것이니, 이 차등이 되게 하기 위해서 행위언약을 주셨다는 말이다.
제十四절. 죄인.
一. 죄의 기원.
신령계와 물질계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들 중에 하나님만 자존하시고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생겨진 것이니 그 모든 것의 기원이 창세기 1장의 창조에 의해 생겨졌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지 아니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기원도 밝혀놓지를 않으셨으나 다른 모든 존재가 다 기원이 있음과 같이 죄 역시도 기원이 있음이 틀림이 없다.
죄에 대한 기원을 밝혀놓지 않아서인지 이 죄의 기원에 대해 여러 이론들 중에 그 어느 이론도 죄의 기원을 명백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으니 철학자들이 논리하는 죄의 기원과,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죄의 기원이 서로 상이한 점이 많이 있다.
우리가 죄의 기원에 대해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죄의 기원에 대해 생각할 때 죄가 생겨짐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성과 인간의 죄의 결정적 구성성을 알아 인간에게 있어서 죄가 무엇이며, 무엇이 죄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죄의 기원이라고 하는 말을 ‘악의 기원이라, 마귀의 기원이라, 악령의 기원이라’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 하나님은 기원이 없다.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천사는 자존자가 아니냐, 신들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성경은 천사들을 어떻게 지었다고 계시할 필요가 없어서 말을 안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만이 자존자이시다.
죄의 기원이 언제부터냐? 왜 죄를 허용했느냐? 죄에 대한 기원을 말하려고 하니 마귀에 대한 기원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죄나 마귀에 대해 학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죄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지느냐?
二. 철학적 신학적 논의.
죄의 기원에 대해 많은 이설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철학적 기원과 신학적 기원이 있다. 그러니까 고대 철학자들이 죄의 기원에 대해 논한 이론과, 성경을 근거해 신학자들이 논한 이론이 있다.
혹자들은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죄에 대해 당시 희랍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인 면에서 논거 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불가한 이론이다. 이 성경은 어떤 철학자의 영향을 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화 감동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어떤 법학이나 철학의 영향을 받아 기록됐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철학자들(희랍의 철학자, 스콜라 철학자, 소크라테스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자가 있다.
역사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가 쉽고, 또한 성경은 축자 영감설이기 때문에 성경이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우길 수도 있다. 이것은 최초의 성경(코이네)이 헬라문자이기 때문이다. 용어가 사람의 말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기록할 때 헬라문자로 기록을 했기 때문에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만일 그 때 당시 헬라문자가 없었다면 성경을 기록하지 못했을까? 다른 나라의 문자는 없었던가? 예: 마이크가 있었기 때문에 설교를 하나? 마이크가 없어도 설교할 수 있다.
만일 헬라의 문화나 철학이 없었더라면 성경이 전혀 딴 말이 되었을까? 사도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한 것은 틀림이 없으나 헬라의 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록했던가? 바울이 로마의 영향을 받아 기록을 했는가? 성령의 감화 없이? 문화를 이용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라면 그 때 당시에 문화가 달랐더라면 성경도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하며 죄에 대해 논거할 때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고 깨닫기 쉽도록 그 때 당시의 보편적인 지식으로 깨닫기 쉬운 사건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그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기 쉽도록 하자니 그 때의 문화와 사건들과 그 때의 말로 기록을 한 것이다.
일반적인 문화도 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서구문화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문화기구가 고유적이 아니다. 신문에 새로운 용어가 상당히 많다. 그 시대에 가장 유행되고 있는 문화를 이용해서 쓴다.
종교는 유대인,
말은 헬라어,
정치는 로마.
성경은 유기적인 축자 영감설로서 성령의 감동 감화로 기록한 것이다. 그 시대의 문화 문물을 이용해 기록한 것이지 그 영향을 받아서 기록한 것은 아니다.
철학자들의 죄에 대한 논거와, 신학자들의 죄에 대한 논거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1. 철학적 노력.
① 어떤 자들은 악을 생 자체의 일부로 보고 삶의 자연적 구조에서 죄에 대한 해답을 찾기를 촉구하고,
② 어떤 사람은 선세 존재에서 죄가 왔다고 주장.
③ 또 어떤 자는 현세 존재에서 사람의 자유선택에 의하여 죄가 결정된다 고 하기도 한다.
※ 철학적 노력에서
① 물질과의 접촉에서 악이 생겼다.
② 태어나기 전부터 죄를 지어서 쫓겨온 것이 이 세상이다.
③ 인간의 자유선택에 의하여 죄가 생겼다.
2. 종교의 신학적 노력.
종교의 신학자들이라고 하면 이종교를 포함치 않고 기독교를 지칭해서 하는 말이다. 기독교 외에 기타 종교의 학설들은 일종의 철학에 불과하다. 신학이라 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교리를 중심한 학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많은 신학자들이 죄의 기원에 대해 구구한 설명을 해 왔으나 지금까지도 난제 중의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많은 이설들이 죄의 기원에 대해 명백하게 정의를 내린 것이 없다. 다만 신학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죄의 기원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러면서도 대개의 학자들이 거의 의사일치를 이루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최초로 죄를 지은 것은 아담이 선악과의 계약을 위약한 것이요, 그 이전에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다는 유다서를 근거로 죄의 기원은 아담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신학자들의 논거에 의하면 죄의 기원을 천사들에게서 찾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천사는 하나님에게 수종 드는 신령계의 영물에 불과한데 그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천사가 타락을 했다면 그 천사를 타락하게 한 어떤 악이, 혹은 죄나 마귀가 선재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거룩하게 지음받은 천사 속에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성질이 들어 있었다는 것인지?
마귀가 혹은 천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께서 천사를 지으실 때 마귀나 천사에게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성분을 넣어준 것이라면 그 천사 외에 다른 모든 천사들도 타락한 그 천사처럼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요소가 현재도 남아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되면 문제는 커지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성스러운 천사 사환들을 영물로 지으실 때 왜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요소가 없도록 짓지 않으신 것일까? 그 성분이 없도록 지었더라면 그 천사가 하나님을 거역하지는 아니했을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지으실 때에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자로 지었기 때문에 그 천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죄의 책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알기는 천사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천사들이 죄의 성분을 가진 자는 있을 수 없는 장소인 천국에서 하나님을 거역했으니 다른 모든 천사도 같은 성분으로 지었다면 현재 천국에 있는 그 많은 천사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성분이 들어 있을 것이니 그들이 언제 또 하나님을 거역해 쫓겨나서 마귀가 될지 모른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죄의 기원에 대해 밝혀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유다서에 계시된 천사 타락론은 아직도 정확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난해 중의 난해로 남아 있다.
이렇게 죄의 기원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구원론 자체가 바르지 못하므로 인간의 존재성과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모든 것을 하나의 상대성으로 이해해 객관 대 객관으로 보고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즉 자존하신 하나님이 독존자로 계시면서 자원적으로 독권적으로 구원을 선택하시고, 선택한 이 구원완성 완사를 위해 사용하시려고 창조도 존재도 죄도 악령도 마귀도 창조 내지는 허용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데서 오는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알고 나면 모든 난제는 해결이 되는 것이다.
※ 신학자는 원효대사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θεός(하나님)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신학자라고 하는 것인데 다른 학자들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하와를 타락케 한 사단(천사)은 언제 타락했느냐?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타락, 즉 죄가 있었다고 한다.
왜?
①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요소를 넣어서 지었기 때문에 이 천사는 필연 적으로 거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다. 그러니 어찌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느냐?
② 그러면 똑같이 지었다면 지금 있는 천사들도 언제 마귀가 될지 모른다 는 말이 되니 이 난제는 ‘결국 모르겠다’ 하는 말로 결론이 난다.
③ 객관 대 객관, 상대 대 상대로써 보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 께서 구원역사를 위해 그렇게 했다.
3. 역사상의 논의.
(1) 최초 교부들 중에 이레니우스는 낙원에서 아담의 자원적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기원된다고 한다.
(2) 그노시스(노스틱)주의 자들은 물질계악설을 주장하니 악이 물질계에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여 물질을 접촉하는 것이 곧 죄라고 보았다.
3) 오리겐은 영혼 선재론을 주장하여 죄의 선재적 기원을 말했다.
4) 3, 4세기의 헬라 교부들은 아담의 죄와 그 후손들의 죄의 관련을 삭감하려는 경향을 보였다.(원죄를 부인하는 것처럼)
5) 라틴의 교부들은 사람의 현재의 죄악한 상태에 대한 설명을 낙원에서의 아담의 최초 범죄에서 발견하려는 경향을 점차 더 명백히 나타내었다.
6) 동방교회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펠라기우스의 영향을 받아 원죄를 부정하는 상태로 설명했다.
7) 서방교회와 어거스틴주의는 우리가 아담 안에서 유죄하고 오염됐다고 주장한다.
8) 반 펠라기우스파는 아담과 관련을 시인하지만 죄의 오염만 설명한다고 주장했다.
9) 개혁파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랐고,
10) 소기노(소시니안파)파는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따랐고,
11) 알미니안파는 반 펠라기우스를 주장했다.
12) 그 후에 칸트는 사람 안에 본래적인 악이 있음을 주장했으나 이것을 초감각 세계에 속하는 자기가 설명을 못하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13) 라이푸닛쯔는 죄를 우주의 필연적 제한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았고,
14) 술라이 막허.
15) 릿출.
16) 진화론자들.
17) 칼발트.
三.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논고.
죄의 기원에 대해 논리할 때 우리는 그 이전에 죄라는 자체를 먼저 알아야 죄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혹은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정죄를 받을 수 있는 죄이냐’ 하는 문제다.
우리가 앞서 많은 교부들과(헬라, 라틴)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죄의 기원에 대해 논거 했는데 우리는 먼저 죄의 구성과, 죄의 정죄의 척도를 알아야 한다.
죄라는 것을 일반적으로는 동사로만 봐서 상대적으로 죄가 구성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성경에는 명사로도 죄를 표시했으니 죄가 명사로 쓰여질 때는 죄라는 것이 단독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죄(하말티아)란 ‘법을 어겼다, 혹은 하나님의 뜻에 적중함에 미달했다’는 말인데 이 죄라는 명칭이 동사로 쓰일 때도 있고, 명사로 쓰일 때도 있다는 것이다.
※ 죄의 기원을 말하기 전에 ‘무엇이 죄냐, 죄의 성분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한다. 보통은 행동의 결과를 보고 죄라고 말하지 죄가 독자적으로 있지 않다고 한다.
창세기에 ‘죄가 문 앞에 잠복해 있다’고 했다. 죄가 개같이 생각한다. 죄를 쫓는 방법으로 구부리면, 곧 기도하면 된다?
죄(주어, 명사)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 로마서에는 죄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 민수기 33장 22절에는 죄가 너를 찾아내리라.(아간의 경우) 죄의 종이라. 죄가 너를 다스렸다.
이런 말들을 보아 분명히 명사적인 죄가 있다.
죄를 명사적으로도 말했고 동사적으로 말했다.
로마서 7장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악은 곧 죄이다. 그러면 죄가 죄를 행하나?
국가법적으로는 동사로 보고, 성경적으로는 둘 다 볼 것.
동사적으로 보게 되면 죄의 기원을 찾기는 막막하다. 마귀가 따로 있고 죄가 따로 있는 것인가?
1. 동사적인 죄.
이 동사적인 죄의 개념은 일반적인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죄라 할 때는 인격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인데 특별히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자에 한해 죄가 구성되는 것이지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못한 피동적 동화적인 존재에게 있어서는 죄가 구성되지를 않는다. 가령 사람이 흉기를 들어 사람을 죽였을 경우 사람을 죽인 그 자는 사람이 아닌 흉기요, 죽은 자는 사람의 손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흉기에 맞아 죽은 것이지만 사람을 죽인 살인죄를 흉기가 짓는 것이 아니고 흉기를 사용한 사람이 그 죄책임을 지고 죄의 구성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본다면 이 세상에 혹은 신령계와 물질계를 통틀어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돼 있는 존재가 인간 외에도 또 있는지 이것이 문제이다.
만일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고 조물주의 주권에 피동적이요 동화적인 존재에게 죄를 정죄한다고 하면 그 존재를 그렇게 움직이도록 주권적으로 섭리하신 그 섭리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죄의 기원을 찾으려면 먼저 지금까지 말한 이 면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고는 죄를 정죄할 수가 없다.
죄를 찾기 전에 죄가 구성될 수 있는 자유자인지 인격자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움직여졌다면 죄책임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된다.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처럼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존재가 있느냐? 천사가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면 최초의 천사타락만이 아니라 지금도 종종 천사가 타락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 천사의 타락은 한 번밖에 없다.
인간만이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다른 모든 존재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구원섭리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궁극적 최종적으로 볼 때 모든 일반적 피조물들은 절대 자유가 없다. 그러한 존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활동을 하게 했다고 하기보다는 그 활동을 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섭리 면으로 대국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다.
죄가 구성되려면 첫째로 자유성자라야 한다. 인간 외에 절대 자유자는 없다.
천사나 마귀가 착한 일을 해서 천국 갔다는 말은 없다. 마귀도 착한 일을 할 수가 있는가? 전부는 나쁜 일만 한다.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만들었다.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그 자유는 주지 않은고로 이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의행도 악행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사는 죄의 속박 아래 지음받은 존재이다. 사람은 의행도 할 수 있고 죄행도 할 수 있다. 자유하는 인간 외에는 죄를 구성할 수 없다.
1) 죄의 척도.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중에 죄의 관련과 구성은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왜 인간은 죄가 구성되느냐?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요 도덕성이 있기 때문에 죄가 구성되는 것이다. 비 인격의 세계는 죄가 구성될 수 없다. 앞단에서 말한 바 있지만 죄는 절대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야 만이 구성되는 것이고, 죄라는 말은 도덕성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에게는 자연이치가 있고 도덕이치가 있는데 이 도덕이치를 어기는 것이 곧 죄라는 말이다.
일반적 피조물들은 자연이치만 지키면 되는 것이니 인간이 보기에 그것들이 도덕이치를 지키는 것 같은 것도 있지만 실은 이것은 다 본능적인 것이다. 비 인격적인 존재들은 자연이치만 지키도록 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본능으로 살도록 되어 있다.
도덕이치를 지켜야 할 존재는 인간만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연이치를 지키면서 또한 도덕이치도 지켜야 한다. 이 도덕이치를 어기는 것이 곧 행동적인 죄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 도덕이치를 지키게 한 것은 역시 구원목적이다. 인간 외에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직접 구원의 대상자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이치를 줄 필요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선택의 목적물이기 때문에 이 구원을 위해 도덕이치를 주신 것이다. 이 도덕이치 속에는 율법과 계명과 율례와 규례와 법도가 다 들어 있다.
이 도덕이치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 도덕이 아니고 생명이치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생명이치인 도덕이치를 순종하고 능동적 피동적으로 살아가면 이것이 곧 자기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위해 도덕이치를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것이다.
※ 원앙새는 본능에 의해 짝을 잃어도 혼자만 산다. 일반 피조물들은 자연이치를 어긴다고 죄는 아니지만 자기의 목숨이 죽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피조물들은 자연이치만 지키면 된다. 그들에게는 도덕이치가 필요 없다. 그것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도덕이치를 어기는 것이 죄이다. 도덕이치라는 말은 생명이치와 같은 말이니 생명이치가 아닌 것은 도덕이치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도덕이치를 순종하고 지키면 구원이 되지만 이 도덕이치를 어기게 되면, 불순종하게 되면 정죄를 받아 죄가 되는 것이다. 이 도덕이치를 순종하여 자기에게 구원이 되면 자신이 좋은 것이지만 도덕이치를 불순종하여 죄가 되게 하면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인간에게 이 도덕이치를 주어놓고서 불순종을 하면 죄가 되게 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은 도덕이치를 어기면 죄가 되게 한 것은 도덕이치를 순종하면 구원이 되게 하는 그 일에 더욱 효과를 주기 위한 촉진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에서도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운동을 가르치는 선생이 보다 더 능률적으로 효력적으로 학습의 효과를 내기 위해 잘못한 학생에게 채찍을 가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제 1 목적물로 지음받은 인간으로서 도덕이치를 순종하여 구원이 되는 것은 자기에게 큰 존영이요 영광이지만 이 이치를 어기면 죄가 된다고 하는 이것이 자기에게 무거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치를 많이 어겼건 작게 어겼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죄사함 받기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이치를 어겨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는 일에 노력을 더 많이 해야 되는 것이라거나 작게 지었다고 해서 노력을 작게 들여야 되는 것이 아닌 도덕이치를 작게 어긴 자나 많이 어긴 자나 내 자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기는 마찬가지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완전 깨끗해지는데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이치를 어기면 죄가 되게 한 것은 다만 우리의 구원을 촉진시키기 위함이지 정죄하여 영벌을 주실 목적은 결코 아니다.
※ 왜 우리 인간에게만은 이 법을 지키라고 하느냐?
대개는 이 법을 지킬 때 오는 효력성을 모른 채 다만 한 인간으로서 법을 지켜야만이 되고, 이 법을 어기면 정죄 받는 죄가 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작은 것 하나 하나를 지킨 것만큼 자기에게 오는 효력성을 모르고 있다.
마태복음 5장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계명을 왜 주었느냐?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계명을 어겨도 정죄를 안 하면 좋겠는데 왜 하느냐? 실력의 촉진제요 구원의 촉진제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동일하게 입은 일차적 구속은 완전하다.
죄는 어떤 한계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죄를 몇 가지 이상을 지어야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작게 짓건 크게 짓건 그 질은 동일한 것이다. 차등성에서 영원한 심판이다.
죄와 영적인 자체적 심판과는 어떻게 되느냐? 도덕이치를 어겨 정죄 받은 것이 죽음 저편에 가서 영적 자체적 심판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정죄를 했건 안 했건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자기의 영적 자체적 심판이 된다.
정죄를 안 했더라면 영적 자체적 심판이 안될 터인데 했기 때문에 자체적 심판인가? 예: 학교교칙이 공부를 못하면 퇴학을 시킨다고 되어 있을 경우 이 법을 정해놓지 않았다면 공부 못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할 터인데 이 법을 적용시켰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 것인가? 법이 있던 없던 그 학생은 무능자이다.
무능은 수치이다. 무능은 둔감이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심판은 없다.
① 3개월간 감옥을 갔다 오겠느냐?
② 30개월 아무 맛도 없이 있겠느냐?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을 정죄할 수 있는 척도가 한 가지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죄의 척도가 있는데 그 척도에서 옳은 척도는 하나뿐이다.
갈 5:23 -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
(1) 그 나라의 국법.
이 세상에는 각 민족이나 종족이나 국가나 지방마다 국민이 있는데 이 국민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국법이 있다.
이 국법은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단일법이 아니고 각 나라마다 다르다. 어느 나라의 국법에는 정죄가 되지만 다른 나라의 법에는 정죄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정죄를 받을 때에는 그 국법과는 상관이 없다.
(2) 일반 도덕법.
국법보다 차원이 높은 것이 도덕법이다. 국법은 도덕법을 어기는 자를 규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 도덕법에는 인륜 혹은 인인관계에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모든 곳에 이 도덕법이 있다. 상도덕 노동도덕 교통도덕 교훈도덕 목회도덕 등 이런 도덕들이 있는데 이 도덕법은 국법보다는 차원이 높다. 그러나 이 도덕법 역시도 전 인류가 단일법이 아니고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니 이 척도도 절대 정확성이 없는 것이다.
(3) 인간의 양심법.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인데 이 인격성에는 양심이 작용을 한다.
혹자들은 이 양심이 인간의 인격의 내적 최고기관인 영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영이 아니다. 다만 이 양심은 자기 속에서 최고의 지식의 지배를 받는 기관이기 때문에 이성과 함께 작용을 한다고 볼 수가 있다.
이성에서 지식을 전달치 않으면 양심은 작용치 못한다. 그러나 이 양심이 어떤 민족이나 지방이나 국가에 따라서 다르다는 차원의 말이 아닌 순전히 개체 개별적으로 작용을 한다. 따라서 사람마다 양심의 척도가 다를 수 있다.
각자마다 양심의 척도가 달라지는 것은 각자의 인격이 지배받는 있는 최고 지식이 각자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상에게 절을 해야 된다고 하는 지식이 들었을 때와, 절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지식이 들었을 때와는 양심의 작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4) 종교법.
종교법이라 하면 좀 막연한 생각이 든다.
이 세상은 인간이 사는 곳마다 단일종교가 아닌 각이한 많은 종교가 있고, 각 종교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죄의 바른 척도를 찾을 때 어떤 종교법을 찾아야 완전한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냐? 각 종교인들은 자기가 심봉하는 종교가 진리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절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최후 심판 때까지 어떤 것이 진리라고 객관적으로 정의를 내리지를 못하고 있다. 다만 우리 인간은 자기 주관적으로 ‘이것이 절대 진리다’ 라고 하며 믿고 가는 것뿐이다.
(5) 생명법.
이 생명법은 모든 법보다 최고의 법이니 곧 생명율이다. 이것을 생명율 혹은 법이라고 한 것은 이 법은 사망계에 있는 것을 살려 놓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법은 모든 법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이 법만이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한편으로는 진리라 참이라 옳은 것이라고도 한다. 만인은 이 법의 정죄를 받아 죽게 되는 것이다.
이 법을 이해시키고 인식시키기 위해서 성문법이 있는 것이다. 성문법은 생명법을 나타내 보이는 껍데기이다. 그런데 옛날 육적인 이스라엘 종교말년에 유대인들은 종교법인 성문법은 잘 지켰으나 이면적인 생명법을 지키지 못한고로 그들의 모든 행위는 다 정죄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다른 모든 법을 지켰다 해도 생명법에 위반이 되면 정죄를 받게 된다. 이 생명법의 근원은 하나님의 의사요, 생명법의 본질은 진리요, 이 법의 능력은 생명이다. 이것만이 절대법이다.
우리 기독교는 이 법을 바로 깨닫고 이 법대로 살아야 한다. 모든 법은 이 법을 가르쳐주고 설명해주는 것이지 참 법은 아니다. 인간을 영원히 정죄할 수 있는 유일의 법은 이 법이요, 또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법이 이 법이다.
이 법 외에, 혹은 이 법을 무시하고 다른 법을 생명을 바쳐가며 지켰다 할지라도 구원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반대로 다른 법을 어겨가면서라도 이 법을 순종할 때는 구원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이 아말렉 왕과 그 족속을 죽이는 것은 국법과 도덕법과 종교법을 어기는 것이 되지만 생명법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는 것이 의요 선이지만 죽이지 않을 때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 나를 정죄할 수 있는 법이 여러 가지다.
국가법은 각 나라마다 다르다. 그 법을 어겼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정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참 좋다’ 하는 기준을 어디다 두고 말하느냐? 제 보기에 좋으니 참 좋은가?
선악과 따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는 같은 눈이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선은 하나님 눈에 보기 좋은 것이 선이다. 하나님만 완전자요 하나님만이 척도다.
아담과 하와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기준해서 동화적 피동적 유기적 선악관을 가졌는데 이제 떨어져 나오니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내 마음에 안 들면 나쁘고, 나에게 잘 해 주면 좋다고 하게 되었다. 타락 후 이것이 인간의 척도가 되어 버렸다.
모든 법의 정죄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생명법에 대니 정죄가 되는 것이 있다. 생명법 외의 척도는 전부 가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종교법(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과 로마의 국가법(나는 왕이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죄인인가? 제사장들은 이것을 다 잘 지켰다. 그래서 그들은 의인이 되었나?
우리는 최고 최후적인 이 법을 지켜야 한다.
국가법에 의해 무죄선언이 됐다고 해서 다른 법에 의해 정죄 되는 것은 없는가? 도덕법으로는 벌을 주어야 하겠는데 국가법이 없어서 처벌을 못하는 예가 있느냐? 또 국가법이나 도덕법에는 안 결려도 양심법이나 종교법에는 죄가 되는 것이 있느냐? 종교법에는 걸리지만 자기의 양심법에는 죄가 안 된다고 해서 안심이 될까? 진리가 빈약한 것만큼 양심의 죄의 관념은 빈약하다.
종교법은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명법은 나를 정죄 한다. 생명법 이상은 없다.(갈5:23 - 금지할 법이 없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법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 내가 가지고 살아야 할 척도는 이 생명법이다. 생명법을 자기 양심법으로 삼아라!
신사참배 안 하면 죄라! 이것은 명사적인 죄가 아니고 동사적인 죄이다. 성경에는 명사적인 죄와 동사적인 죄가 있다.
2. 명사적인 죄.
창4:7 - 죄가 문에 엎드린다. 민32:23 - 죄가 너를 찾아내리라. 롬6:, 7:.
일반적으로 죄라 할 때 동사적인 죄만 죄인 줄 인식을 하지만 성경은 동사적인 죄만이 아닌 명사적인 죄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동사적인 죄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인데 율법이 없이는 이 죄는 구성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방종행위, 즉 인간의 행위에 대해 율법이 들어 죄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니 인간과 인간의 행위, 그리고 율법 이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죄가 구성이 되지를 않는다.
반면에 명사적인 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보면 인간의 행동 이전에 그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자를 말하고 있으니, 이는 삼각성(인간, 행동, 율법)이 아닌 독립성이며, 혹 인간과 유기적임을 보여준다.
이 명사적인 죄는 인간을 떠나서 어떤 별개세계나 허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과 함께 있고,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니 인간과 유기성이요, 또 이것이 인간 속에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니 독립성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우리는 특별히 이 명사적인 죄를 조심해야 한다. 명사적인 이 죄를 단속하면 동사적인 죄는 구성되지를 않는다. 그러나 명사적인 죄를 단속하지 못하면 이 명사적인 죄가 인간을 동사의 죄로 끌고 가는 것이다.
※ 죄라는 죄가 언제부터 생겼느냐?
때리는 것은 동사적인 죄요, 때리고 싶은 마음은 명사적인 죄이다.
창4:7 -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 죄의 종으로 다스림 받지 않게 하라!
인간이 최초에 지은 죄가 무엇이냐? 거짓말, 거역 죄를 지은 죄가 표면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 지키지 않고 다스리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그 위에 은밀계시를 붙잡지 않는 것은 현실불만에서이다.
명사적인 죄의 근원은 천사타락인가, 마귀 악령인가?
동사적인 죄는 명사적인 죄에서. 명사적인 죄로 인해 동사적인 죄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제이장. 기독론.
제 一 편. 그리스도의 필요성.
엡1:4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기독론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론 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아’ 혹은 ‘마샤’ 라는 말이다. 순 우리말로는 ‘수류자’(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말인데 ‘구세주’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낱말풀이로 하여 ‘기독’ 이라 ‘그리스도’라 ‘수류자’라 ‘구세주’라 부르고 있으니 이 말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역시 ‘그리스도’라 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하는데 이 그리스도의 필요성에 대해 일반적 견해로 본다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해서 구세주가 오는 것처럼 되어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이렇다면 성경은 좀 달리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니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왔다, 혹은 필요했다’고 성경은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라고 한 것을 보면 인간의 타락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 받을 것이 예정되었고, 그 예정된 대로 인간이 창조함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라는 말을 단순히 구세주 혹은 수류자라는 일반적인 낱말의 뜻에 국한시키지 말고 이것을 좀 더 초월하여 특수적인 명칭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기독 혹은 수류자가 아니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즉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일부분만 나타내는 것이니 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단순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에다 국한시키지 말고 좀 더 고차원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은 사역적 일부분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 속에는 인간을 창조할 수 있었고 예정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는 이 말은 원인적인 그리스도, 동기적인 그리스도, 목적적인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기독이라는 명칭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뜻, 그 칭호에다 국한시켜 버리지 말아야 한다.
※ 그리스도라는 말은 한문으로는 기독이다. 야수. 순 우리말로는 수류자, 기름부음 받은 자이고, 헬라어로는 메시아.
신학박사들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했다고 보고 있다. 즉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이 타락을 안 해도 그리스도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왔다’가 아니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했다. 사랑 안에서 자기의 자녀로 우리를 선택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시고자 하는 그 마음이 생겼던 분이시다.
① 단순히 허물과 죄에 빠져 있는 우리를 구속한 그리스도보다,
② 만물을 창조한 그리스도보다,
③ 우리를 창조하고자 한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길이 길이 살게 했는데 인간이 장난을 한 번 치니 하나님의 계획이 확 비틀어져서 인간에 의해 하나님이 계획을 다시 짜야 하는 것인가?
성경을 기록할 때 그리스도를 인간이 사용하는 문자 중에 가장 가까운 용어인 수류자라고 했다. 그러니 작은 낱말 뜻에다 하나님의 대 구원을 속박시키지 말자. 하나님의 대 뜻을 그 낱말 속에 축소시키지 말자.
학자들은 조그마한 병 속에 그리스도를 집어넣고 ‘그리스도라는 뜻은 이것 만이다’ 하는 식으로 주장하며 그 외의 것을 말하면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과오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요한복음에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라고 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역사세계에 와서 일만하고 간 이것만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큰 것만 예정을 했고, 작은 것은 예정을 안 했나? 이것은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인간을 통하여 사용하게 하셨는데 이 그리스도란 하나님 외에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바로 그 여호와로서 당신의 의지세계에서 당신의 인격성, 활동성이 이 땅에서 사역적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호와로 계시지 않고 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느냐?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본체와 단일 신격이신 하나님이신데 단일 신격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혹은 여호와께서 없어져 버리고 그리스도로 변화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시작하시고 착수하시고 완성하신 그 면이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인간의 구원선택도 예정도 설계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시고 설계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의 성질도 알아야 되고, 그리스도의 필요성도 알아야 된다.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의 단일 인격성에서 활동하신 그 성령의 활동의 역사성이 그리스도요, 이 그리스도로서 선택 예정 계획 설계하신 것이 막연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라야 만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던 것이다.
※ 엡1:4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엡2:10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여호와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하지 않고 왜 꼭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 라고 하는가?
① 본래는 여호와 하나님은 단일 인격성적 하나님이신데 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붙이게 되었느냐? 그리스도로 되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 자리 에서 없어졌느냐? 하나님이 변해서 그리스도가 되었느냐?
② 본체는 하나이면서 이름만 둘이냐? 아무 의미도 없이 이름만 하나 더 가졌느냐?
그리스도란 결과적인 그리스도만이 아닌 원인적인 그리스도도 되시니 이 분은 하나님의 단일 인격성이신 분으로 이 단일 인격성에서 구원이라는 것이 작용 발생해서 인간의 구원사역을 책임지신 분이다.
하나님의 단일 인격성과 천국의 단일성 때문에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했다. 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의 단일 인격성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로 인한 효력이 아니면 천국에서 단일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역적인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는 천국의 단일, 하나님의 단일이다.
하나님의 본체에서 성자가 생겨지고 성령이 생겨졌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라고 하는 이것은 억지다.
유출은 존재적 유출이 아니고 사역적 유출이다.(요1:3, 4) 잘못하면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파괴하기 쉽다.
구원은 시작이 있다. 구원을 시작한 그 성품이 그리스도요, 사역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제一절. 원인적 필요성.
① 하나님의 단일 인격성.
② 천국의 단일성.
하나님께서는 신령세계에서 사시고 인간은 물질계에서 제일 좋은 곳인 에덴동산에서 살게 했지만 에덴동산에 사는 인간이 하나님은 신령계 완전계에서 살고 자신은 물질계 불완전계에서 사는 것이 못마땅해 불평을 하며 타락을 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내가 너희들의 요구대로 물질계에 살던 너희들을 신령계에 살도록 해 준다’ 한 것이 구원인가?
구원을 이렇게 보니 인간이 그렇게 일을 안 일으켰더라면 인간은 영원히 물질계에서 살터인데 일을 일으켰기 때문에 구원 얻어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으로 잘 되었다고?
이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 계획 절대성으로 보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 보기에는 그런 것 같으나 그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했다. 타락하면 입히고, 안 하면 안 입히고가 아니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로 통하여 구원하기로 예정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타락을 안 해도 필요하다.
처녀의 몸을 통해 역사세계에 오셔서 십자가로 마친 그리스도는 사역적인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리스도가 있었다. 복중에 생길 때 그리스도가 됐다면 하나님은 시작이 없지만 그리스도는 시작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시작 이전에 말씀이 계셨다. 하나님에게나 성령님에게나 그리스도에게는 시작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무시무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역적인 그리스도만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력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필요했으니 이것을 그리스도의 원인적 필요성이라고 한다.
(1)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인격적 관계는 마치 꽃이 아름다워서 인간이 꽃에게 사랑을 주어도 꽃은 그 인간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일방적 수수관계가 아니다.
인간은 불교의 부처와는 비 인격적 관계, 무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으니 그 관계성은 인간이 정성을 드리지만 부처는 그것을 받지 못하는 일방적 수수관계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과도 일방적 관계는 가질 수가 있지만 하나님과 상호 유기적 인격적 수수관계는 하나님이라야 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통해 이 관계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당신과의 인격적 수수관계이다.
(2) 신령계를 누리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필요성.
그 신령계는 하나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통치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사용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누릴 수도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느낄 수도 없다. 하나님이라야 그 신령계를 누리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주심은 하나님의 전 인격성이 원인이다.
(3)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필요성.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이 더 있을 수도 없고, 다른 어떤 존재가 하나님이 될 수도 없다.
인간은 본래 인간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닐 뿐만 아니라 본질과 본성적으로도 하나님과 동성 동질도 아니다. 하나님과 동질 동성적인 존재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자체가 하나님과 단일 존재로 되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면 그 된 양만큼 하나님과 인격적인 수수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령계는 본래는 하나님만이 누리는 곳이고, 하나님은 하나님만 상대하시는 분이신데 그리스도로 통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을 수 있도록 하시되 그렇다고 해서 진리의 하나님께서 진리의 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방편을 쓰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칙적인 이 진리를 무시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그 성품을 입지 않고도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할 수도 있고, 그 신령계를 누리고 느낄 수 있게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불변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또 진리라고 하는 이 진리 자체가 불변적이기 때문에 그 방편을 쓰시지 않고 인간이 비록 하나님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입도록 해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지며 신령계를 누리고 느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근본적으로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에 비해 이질인 인간에게 신의 성품을 입히기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경에 말하기를 ‘피 뿌림을 입기 위해 인간은 나그네가 된다’고 했다. 이 피 뿌림이란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한다. 우리 인간이 1차적으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인 구속을 입지 않고는 신의 성품을 덧입을 수가 없다. 신의 성품을 덧입히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셔서 죄에 속박되어 있는 것을 속량 하시고, 구속을 입혀서 중생 시켜 놓으시고, 중생함을 입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인 진리와 영감으로 점차적으로 계속적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시켜 덧입히는 일을 하신 것이다.
1. 성질적 단일성의 필요성.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의 성질은 단일성적이시다. 하나님 자체가 마찰성이나 대립성이나 충돌성이나 이질성이 없다.
하나님의 구원선택의 대 목적물로 지음받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단일성적 존재가 되지 아니하면 구원결과의 효력성이 없는 것인데 이 인간이 하나님과 단일성적 존재로 만들어지는 데는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 이질적인 인간은 하나님과 단일성이 되지 못하고, 천국과도 단일성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단일성적 성분으로 만들어지는 데는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 천국과는 대립성이 없다. 전부는 단일성이다. 하나님과 단일성적 존재가 아니면 천국에서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고로 이 구원이라는 구원의 효력성이 단일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운동이라는 말을 환언하면 단일성운동이라는 말과 같다.
※ 왜 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한 그 즉시로 타락하기 전에 천국에서 살도록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 인간은 하나님과, 또한 천국과 단일성이 아니다.
죄만 안 지으면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있느냐, 의로워야 들어가느냐?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곧 그리스도의 의라야 들어간다.
‘노아는 의인이라!’
타락 전에는 하나님과 단일성적인 의는 없고 하나님과 상대적인 의이다.
의를 입혀준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인 의를 입혀준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죄지으라고 보냈는가? 골탕 먹이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피 뿌림)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입게 했다.
애당초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지었다면 이 세상을 거치지 않고도 천국에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공정성이 파괴된다.
① 인격의 세계에서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그 관계성에 구별이 있어야 되고,
② 인간과 인간과의 차등성이 있어야 된다.
우리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짓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입을 수 있는 자로 지었다.
하나님이 단일성적이요 단일성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그와 같은 단일성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했다. 1차적인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 뿌림을 입지 못하면 하나님과 단일성이 되지 못한다.
2. 의사적 단일성의 필요성.
인격자라 할 때는 의사의 자유가 있으니 이 인격자는 개체 개별적 독립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본체적으로는 단일이지만 위적으로는 상대적인데, 성자는 땅에서 기도하고 성부는 천국에서 기도를 들으시고(그러나 2위 2체라는 말은 아님) 이렇게 상대적이었지만 성부와 성자는 의사적으로 대립성이 없이 단일성이었던 것이다.
성부의 의사와 성자의 의사가 각이한 의사가 아니듯이 성자의 모든 활동은 절대적인 자유활동이지만 그 자유활동 역시 성부의 의사와 단일성적 활동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은 하나님은 완전자이신고로 동시에 단면적 의사나 단면적 활동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고 동시에 각이한 활동을 하는 분이시다. 활동이 다르다고 해서 당신 자체의 의사가 내적 대립성이나 마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사는 완전하신 인격성에서 생겨진 의사이기 때문에 동시에 다양적인 활동을 하실 수 있는 분이요, 그 활동이란 그 분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다. 즉 동시에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동시에 다양한 의사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동시에 다양적인 의사를 가질 수도 있고, 동시에 다양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고로 천국이라는 천국에는 모든 존재가 각이하게 활동을 하지만 하나님의 의사에 대립된 활동은 없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 존재는 이 분야에서 하나님의 의사대로 활동을 하고, 저 존재는 저 분야에서 하나님의 의사대로 활동을 한다.
우리가 같은 의미에서 보면 교회생활을 할 때 같은 시간에 각각 다른 활동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사에서 나온 활동이 아니라고 속단을 내리며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의사적 단일이라는 말은 단 하나의 의사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 대립성이 없는 의사를 가진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속에 의사가 만 가지가 있으면 나에게도 만 가지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품은 의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의사가 아닌 의사는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나의 의사가 하나님의 의사와 단일이 되지 못하면 영계에 가서는 자기의 모든 활동은 중단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의사적 단일이라는 이 면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의사적 단일이 아니면 구원의 결과성은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의사와 단일 의사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는데는 그리스도가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고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의사와 단일의사의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그리스도가 왜 필요했는가? 우리가 범죄 했기 때문에 구원해 내는 그 면에만 필요했던 그리스도가 아니다. 천국은 단일성적 천국이다. 우리를 성질적 단일, 의사적 단일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실은 인간의 타락도 타락해서는 안될 인간이 타락한 것이 아니고 궁극적인 면으로 보면 타락이라는 과정이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순서 중에 하나이다. 알고 보면 타락이 꼭 필요했다.
인격적인 존재에게 주어진 특수한 특권은 자유이다. 누구든지 의사의 자유는 있다. 대립적인 의사도 있고 충돌과 마찰적인 의사도 있다. 이런 의사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면 천국이 혼잡해진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의사에 단일로 맞추어진 단일성적 의사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있다. 또한 천국은 하나님의 의사에 맞지 않는 활동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그 자는 만고에 멍청이다. 존재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으나 활동중단, 만고 멍청이다.
활동은 의사에서 나오고, 의사는 인격에서 나온다. 갓 출생한 아이는 의사는 없고 다만 본능뿐이다.
이 세상에서 대소 전쟁, 대소 마찰, 대소 대립을 의사단일이 되게 하는 방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다.
하나님은 동시에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신다. 그러나 한 의사를 가지신 분이다.
말씀에 피동된 순종으로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입어진 성품은 천국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잠재하고 있다. 하나님은 공 세운 것을 좋아하시지 않고 만들어진 것을 좋아하신다.
의사가 많은 사람은 활동이 많다. 활동이 없느니 만큼 모든 것은 축소된다.
천국은 통일이다. 예: 지휘자 한 사람의 지휘에 동시에 두드리고 때리고 발로 걷어차고 밀었다 당겼다 불었다 빨았다 하는 여기에서 우렁찬 음악이 나온다. 노래곡조를 모르면 만고 멍청이다.
마태복음 28장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했는데 우리가 이치만 알면 누구든지 제자를 삼을 수 있다. 교회에 나오는 자 중에 교회의식만 있지 제자는 드물다.
● 제자를 삼는 과정.
① 지식적 제자를 삼는다.
② 도덕적 제자를 삼는다.
③ 나중엔 심복이 된다.
천국은 단일성적 천국이다. 천국의 성질과 하나님의 성질은 동일적 성질이다. 한 의사를 가지고 모든 존재가 사는 곳이 천국이다. 능력도 그러하다.
이 세상은 의사 면에서 대립적인 의사가 있고, 각치성적 의사가 있고, 합치성적 의사가 있고, 단일성적 의사가 있다.
의사단일은 마음에 있는 것을 가져간다. 천국은 명령도 지시도 할 필요가 없다. 이 땅에서도 의사단일이어야 천국을 이룬다.
예수님이 시몬을 찾아오신 목적이 있다. 제자를 삼아, 사도를 삼아 천국의 일등보좌에 앉혀주려고 찾아왔다. 그러나 시몬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 의사단계.
① 처음엔 대접조로 나온다. ‘부탁이니 가 주자’(들어주는 것)
② 시몬의 배를 요구하심에 선심으로 나온다.
③ 순종 - 말씀에 대해 사업의 실패가 와도 순종.(보통은 이것을 최고로 본 다) 이치에 맞던 안 맞던 순종하고 보니 고기를 많이 잡았다.
성공 소원 성취 목적달성 유명해진 것을 복 받았다고 한다.
④ 이것 이상 올라가야 주님의 의사에 단일이 된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 ‘주님처럼 위대한 분이 나를 제자 삼으려고 합니까? 나를 제자 삼으면 당신의 위치 위신 체면이 무엇이 됩니까? 그러니 나를 떠나소서’ ‘이제 네가 내 의사를 아는구나,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전에는 고기 많이 잡는 것으로 성공을 삼고 살았는데 이렇게 되니 이미 취하고 이룬 성공도 내어버리고 예수님과 단일 의사로 간 것이다.
고기 잡는 베드로와 사람 낚는 베드로는 그 실력이 천지차이다.
교인을 진리를 가지고 낚았느냐, 그물을 가지고 잡았느냐? 무엇을 가지고 잡았느냐에 따라 그 가르침은 다르다.
천국에는 일일이 지시가 없다. 자원적 자유적 능력적 자유이다. 하나님의 의사를 모르면 활동중지가 된다.
3. 능력적 단일성의 필요성.
하나님의 인격성도 단일 인격성이요, 천국도 단일성이기 때문에 능력적 단일성이 아니면 그 천국이 자기에게 아무 필요가 없고 자기는 천국에서 천국이 주는 효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것의 종류가 이 세상에 만물이 무수한 것보다 더욱 무한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유한한 물질계의 것도 능력이 없으면 그것에 대해 아무 효력을 입지 못하는 것처럼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이 움직여지게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그 능력을 입지 못하면 그 천국의 것을 아무 것도 사용도 활용도 못하게 된다. 천국의 모든 것을 사용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단일 능력이라야 된다.
4. 생명적 단일성의 필요성.
인간이나 다른 모든 피조물(생물)들은 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기는 했으나 이 모든 생명은 개체 개별적 생명을 소유하고 존재하고 있다. 이 개체 개별 생명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적 생명이긴 하지만 하나님 자체생명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은 이 세상에서만 생명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천국에서는 존재하지를 못한다. 천국에는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존재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완전하신 생명인고로 그 천국에는 이 생명이 아니면 존재하지를 못한다. 인간이나 일반생물들이 가진 이 개체 개별 생명은 유한한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이기 때문에 이런 생명을 가진 인간이 천국에 가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어 개체 개별적 존재가 하나님 한 분의 단일 생명을 소유하게 해야 하므로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없다.
생명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근원적 혹은 원인적 생명과, 피조적 생명이다. 그리고 이 생명이라는 생명은 독립적인 존재이거나 독립적인 요소는 물론 아니다. 이 생명은 이론적 성분적으로는 분리가 되지만 존재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는 어떤 존재 속에 결합적으로 있는 생명이다. 그러나 이 생명은 인간에게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생명이 있는 존재도 있고, 생명이 없는 존재도 있다. 모든 존재 속에 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존재가 그 생명이 떠나간다고 해서 존재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생명은 모양도 형체도 중량도 색깔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 원인적 근원적 생명.
이 세상에는 생명적 존재와, 무 생명적 존재가 있다. 혹은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기도 하지만 전체 존재적으로 볼 때는 생명적 존재와 무 생명적 존재로 나눌 수 있다. 생명이라는 용어는 한 가지이지만 같은 생명이 아니다.
※ 생명(조에-ζώη)이 무엇이냐? 언어학적으로는 ‘생명이라, 목숨이라’ 하는데 이 생명은 신비스러운 것이다.(목숨: 목으로 숨을 쉰다는 말인가? 목으로 숨을 쉬는 것은 호흡이다)
일반사회는 인간을 기준하고 물질을 기준해서 언어가 생겨졌기 때문에 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 ‘잘못되었다’ 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기준해서 하는 말이냐? 물질계에서 사용하던 용어로 신령계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하니 늘 물질적인 관념으로 말을 하고 생각하게 된다.
성경의 용어가 천국의 용어인가? 그렇다면 천국에는 각 나라 사람들이 오는 곳이니 각 나라 말을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천국에 간 사람들끼리 어떻게 통할까? 집에서 개만 보던 아이가 산에서 늑대를 보면 산에도 개가 있더라고 할 것이다. 이름이 같다고 같은 것으로 보지 말라!
원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하나님의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 아니다. 이 생명은 원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도 생명이 있느냐? 하나님은 곧 생명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으니 ‘나는=생명이다’ 하는 이 말은 나(예수님)에게도 일반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 가지고 있는 생명은 일반적인 존재들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그 생명은 곧 근원적인 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생명은 피조적이거나 수동적인 생명이 아니고, 그렇다고 소유적 생명도 아닌 당신 자신이 곧 생명이시다. 생명 같은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은 곧 생명이시다. ‘사랑=하나님, 진리=하나님’ 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곧 생명이신데 이 생명에서 모든 생명들이 피조 되어 나온 것이다.
소유적 생명을 가진 나는 이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다르다. 만일 같다고 하면 하나님도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나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가 아니고 ‘나는 생명이다’ 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사랑은 하나님이다?
우리 아버지는 엿장수다=엿장수는 우리 아버지다?
(1) 완전한 생명.
종교적 원인적 이 원 생명은 곧 완전적인 생명이다. 완전적 생명이라는 말은 능력적 완전이요 본질적 본성적으로 완전인고로 불변성을 가진 생명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은 불변성이요 불사성이요 또 완전에 도달한 생명인고로 성장이나 쇠퇴나 변질이 없는 생명이다.
(2) 영원한 생명.
이 생명은 영원적인 생명이니 무시무종의 생명이다. 무시무종의 생명이라는 말은 과거적 영원이요 미래적 영원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은 시공간의 제재를 받지 않는 생명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질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고로 자체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변질이나 쇠퇴나 죽음이 있을 수 없다.
(3) 무한적 생명.
이 생명은 독존적인 생명이면서 무한적인 생명이다. 무한적인 생명이라는 말은 이 원 생명이 많은 것을 창조하거나(일반생명을 창조한 것) 많은 존재에게 생명(중생 시킬 때 넣어주는 신의 생명)을 나누어준다고 해서 그 원 생명이 감소가 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많은 존재에게 생명을 주어도 이 생명은 여전히 충만적 생명으로 충만하게 있다.
2) 피조적 생명.
하나님의 생명 외에 모든 생명은 다 피조적 생명이다. 이 피조적 생명에 있어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영물들의 생명.
이 생명은 자연생명과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 생명은 자연법칙을 어겨도, 자연의 혜택을 입지 않아도 유지할 수 있는 생명들이다. 이 생명을 예를 든다면 천사 마귀 인간의 영 등이다.
우리는 천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원 생명이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적 생명이다. 원 생명은 하나님 한 분의 생명밖에 없고 그 외에 어떤 존재도 다 지음받은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사가 활동을 하는 것은 무 생명적인 존재가 활동하듯이 기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들도 개체 개별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지만 그 생명은 자연생명이 아닌고로 자연법칙을 초월해 있으니 초자연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영물들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생명이다.
이 생명은 천사의 생명과, 마귀의 생명과, 또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산 영(영이 살아서 있을 때)의 생명이니 이 생명들은 동질적 동급적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 생명은 원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도 아니고, 또 일반적인 물체가 가지고 있는 자연생명도 아닌 오직 영물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이다.
(2) 물질적 자연생명.
이 세상에는 많은 존재가 있는데 이 존재들 속에는 생명적인 존재와 무생명적인 존재가 있다. 같은 물질이면서도 생명이 있는 존재가 있고, 생명이 없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생명이라 할 때 의례히 자연생명을 두고 말한다.
물질계에 있는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을 인간들이 말하기를 ‘자연생명이라, 생리생명이라’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생명을 ‘육의 생명, 물질의 생명, 자연생명, 생리생명, 가사적 임시적 생명’ 이라고 지칭한다.
※ 이 세상에 이런 생명을 존재케 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원 생명, 근원적 생명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물체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육의 생명, 혹은 자연생명, 또는 생리생명이라, 일반생명이라, 임시적인 생명이라, 죽을 가사적 생명이라’ 한다.
이 생명은 물질은 아니지만, 즉 그 생명자체는 물질이라고 볼 수 없으나 물질 속에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물질적 자연생명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 생명은 물질이 없으면 존재불능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물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물질적 생명이라고도 하고, 자연법칙에 의해 유지되는 생명이기 때문에 자연생명이라고도 한다.
이 생명은 원 생명에서 유출된 것도 아니고, 연결된 것도 아니고, 연합된 것도 아닌 완전히 개체 개별적 독립적 생명이다. 하나 하나 독립해 있는 독립적 생명이다. 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물체가 크다고 해서 그 생명이 크고, 작다고 해서 작은 것도 아니다.
또 이 생명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편파적 존재가능의 생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무 하나는 한 생명이지만 그 가지를 꺾어서 심으면 그 생명이 또 장성한다. 그런 경우에 그 생명이 파편처럼 떨어져 나가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 타 존재에 붙어서, 혹은 땅에 붙어서 생존할 수 있다.
인간도 전체의 신체가 죽기 전에 그 사람의 눈알을 빼서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의 밝은 눈의 혜택을 볼 수 있다.
① 생명의 수명.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다양한 것을 발명했지만 생명만은 아직 인간의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 생명은 모든 물체가 공동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이 아닌 개체 개별적 생명이기 때문에 유한적 생명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생명이다.
생명은 생명 자체에 특수성이 있어서 이 생명이 어떤 존재의 수명을 좌우한다기보다 그 생명을 소유한 물체의 특수성에 의해 이 생명의 수명이 좌우된다고 보아야 한다. 즉 같은 물체이면서 그 생명을 잠시 유지하는 것이 있고,(하루살이 같은 것) 수백 년을 유지하는 생명이 있다. 또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있고, 식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들이 있다. 이런 생명들의 수명은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다 유한적 생명이다.
※ 생명이 물체에 들어가서 그 생명이 그 물체의 수명을 좌우하느냐, 물체가 생명에 들어가서 그 물체가 그 생명의 수명을 좌우하느냐? 학의 생명이 하루살이 속에 들어가면 천 년을 사느냐?
파리가 가진 생명, 노루가 가진 생명 각각 그 생명이 다른 것인가, 아니면 생명은 같은데 생명이 들어간 물체가 각기 다른 것인가? 똑같은 물질인데 물체의 변화에 따라 그 생명이 좌우되는 것이냐?
눈에 보일 듯 말듯 한 생명체도 알을 낳는데 그 알은 먼지보다 작다. 그 생명체 속에 코끼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집어넣으면 코끼리가 되어 움직이겠느냐? 이것도 저것도 생명이 떠나가면 죽기는 다 죽는다. 모든 물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은 유한된 생명이다.
② 식물의 생명.
하나님께서 모든 식물을 창조하실 때 식물의 종류에 따라 각각 생명을 주어서 생명적 물체로 창조하셨다. 물체를 따로 짓고 그 속에 생명을 별도로 넣어주었다기보다, 즉 생명과 물체를 별개성으로 지은 것이 아닌 물체 자체를 지을 때 생명적 물체로 지었다. 그렇지만 물체와 생명은 같은 것은 아니다. 물체와 생명은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 물체가 곧 생명이고, 생명이 곧 물체가 될 수는 없다.
물체 속에 생명이 있음이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물체가 생겨질 때 그 물체 속에 생명이 있어서 생명적 물체가 되었으니 그 물체에서 생명이 떠나가게 될 때 물체도 동시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동물뿐만 아니고 동식물을 막론해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물체를 분리할 수는 있다. 생명이 있는 물체와,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가 그 생명이 없어진 물체와는 완전히 구별이 된다. 독립적으로 있는 생명이 A라는 물체 속에 있다가 B라는 물체로 옮겨가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생명이 어떤 물체 속에 있다가 그 물체에서 떠나면 그 물체는 생명이 없는 죽은 물체가 되는 것이니 이 생명이 독립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거나 타 물체로 들어가서 존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물체 자체가 생명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또한 생명은 어떤 물체와 결합적으로 존재는 되지만 물체를 떠나는 날에는 그 생명은 무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여진다.
모든 식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다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일 년 초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나, 수령이 수백 년이 되는 고목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나 그 생명들은 물질의 생명이요 자연생명임이 틀림이 없다. 또 각각의 생명이 각기 다른 것도 아니다. 동질의 생명이지만 물체에 따라 생명의 수한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생명은 무한히 번식할 가능성이 있고, 또 이 생명은 형체도 없이 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으로 자연계가 없어지면 이 생명도 다 없어진다. 자연계가 있는 동안에는 이 생명이 많이 번식이 되어가지만 그 날에는 자연계와 여기에 속한 생명은 모두 다 없어진다.
※ 자연생명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이 생명이 그렇게 귀중한 생명인가?
식물의 생명은 자연생명이고 물질생명이고 물질에 예속되어 있으니 독립적 존재의 생명은 아니다.
생명은 이전될 수 있는가, 없는가? 논리적으로는 독립이 될 수 있으나 분리적 존재의 생명은 아니다. 생명의 크고 작음은 나무의 크고 작은 것에 다르지 않다. 물체에 따라서 생명의 유효기간이 좌우된다.
③ 동물의 생명.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도 역시 물질적 자연생명임이 틀림이 없다. 물론 한 존재에 한 생명으로 생존함이 틀림이 없으나 어떤 경우에 보면 식물의 생명처럼(나뭇가지나 풀을 잘라 심으면 편파적 파생적으로 개별적으로 존재함과 같이) 편파 혹은 파생적으로 생존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본래 두 생명 이상을 소유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한 생명에서 일부분을 떼어내게 되면 그 존재는 잘라낸 것만큼 감소가 됐으나 생명은 여전히 본래 생명대로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잘린 손가락도 혈연만 같으면 이어진다.(질과 질은 동일)
동식물이 똑같이 생명이 물체를 떠나면 존재하지 못하고, 물체는 생명을 떠나면 가치가 없다.
이 생명은 비 물질성이면서 아주 신비스러운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 물체가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생명이 떠나면 그 힘은 없어지고 모든 기능도 없어진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능은 생명에서 나온 것인가, 물체에서 나온 것인가? 기능 자체는 생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체에 있는 것이다.
물체에 있다고 한다면 생명이 떠난 물체라도 물체 속에 기능이 존재한다는 말이 되니 기능은 계속 발휘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못한다고 해도 그 기능이 물체에 있지 생명에 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보아서 물체와 기능과 생명은 너무나 신비스러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은 비 물질이면서 물체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힘은 생명에 있는 것인가, 물체에 있는 것인가? 아무리 힘이 있는 동물이라도 생명이 떠나면 그는 죽는다.
동물들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신체와 생명과 기능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기능은 물체가 가지고 있느냐, 생명이 가지고 있느냐? 이론적으로 구분은 되지만 유기적인 관계이다.
물체의 크기에 따라 그 안에 든 생명의 크기도 달라지는 것인가? 물체가 생명을 따라가느냐?
물체=생명이 아니다.
기능=생명이 아니다.
기능은 물체에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생명이 떠나가면 기능도 없다.
(3) 인간의 존재생명.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영육이 논리적으로도 분리가 되고 실질적으로도 분리가 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대로는 인간이 영육의 분리로써 존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육이 분리되어 존재 불가능하다는 말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우리 인간은 영육이 분리되어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죽었다’ 할 때는 신체가 죽었다는 말인데 사람이 죽으면 그 신체인 육은 매장이 되지만 그 신체 속에 있던 영은 신체와 함께 있지 않고 신령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영과 결합되어 있던 신체는 독립적으로 되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이미 구속받은 자들) 또는 최후 심판 때까지(구속받지 못한 자들) 있다가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 때 흙에 있던 신체들은 부활을 해서 영체로 변화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 생명과 육신의 생명은 각각 독립적인 생명임을 알 수 있다.
본 단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의 생명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존재의 생명을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의 생명은 과연 어떠한 생명일까? 이 생명 역시 물질적 자연생명임이 틀림이 없다.
이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 외에는 다 피조적 생명이다. 인간이 본래 지음 받을 때 원인의 영의 생명도 하나님 자체의 생명이 아닌 피조적 생명이다.
같은 피조적 생명이지만 영의 생명과 육신의 생명은 분리가 된다. 원인의 영의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물질적 자연생명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영의 생명은 결합돼 있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적 생명이 아니고, 또 자연은총으로 혹은 자연법에 의하여 사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의 생명은 물질의 생명이요 자연생명이다. 우리는 이 생명을 동물들의 생명과 둥등시 한다. 이 말은 생명의 소유자인 인간의 신체를 동물의 신체와 동등시한다는 말이 아니고 물질이 가지고 있는 자연생명을 동등시한다는 말이다. 즉 동물들 속에 있는 생명도 신의 피조적 물질적 유한적 자연생명이요, 인간의 신체 속에 있는 생명도 역시 피조적 물질적 유한적 자연생명이니 자연이치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들은 이 인간의 신체생명을 일반동물들의 생명과 달리 보는 자도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신체 속에서 생명이 유지하고 있는 한 그 신체에서 작용되는 기능성이 동물들과 달리 탁월하기 때문이다. 일반동물들이 작용하는 부분, 즉 본능성과 감각성과 활동성은 동일하지만 이성적인 면, 비판성, 판단성, 사색성, 탐구성, 개발성, 발전성 등은 동물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니 이들은 인간만이 가진 이러한 기능성과 지능성이 곧 생명의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생명의 작용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과 생명이 아무리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 할지라도, 또 신체와 그 이성이 결합되어 있다 할지라도 생명이 떠나면 그 이성은 완전히 작용 불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신체와 이성과 생명은 각각 귀중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이는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신체 속에 있는 생명을 가장 신선하고 가치 있게 본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수한 목적 하에 지으셨기 때문에 특수적으로 짓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특수성이란
① 일반 피조물에 비해 특수하다.
② 영육 결합체로 지음 받았다.
③ 두 생명의 존재로 지음 받았다.
원인은 영의 생명과 육의 생명 모두 피조적 생명이다. 일반동물보다 탁월하다. 이성과 생명과 신체이다. 인간의 영의 생명은 일반동물의 생명과 다르다.
생명과 이성은 다르다. 우리는 생명과 물질과 이성을 분리시킴.
여기서 무엇이 중요한가? 생명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물체와 이성이 없으면 가치가 없다. 생명 없는 물체는 송장이다. 물체와 생명은 있어도 이성이 없으면 식물이다. 물체의 생명은 아무리 귀중해도 유한된 생명이다.
① 수동적 단일생명.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창조성이 특수하고, 창조 이전에 창조를 위한 도모성도 특수하고, 목적성도 특수하지만 또 하나 특수한 것은 수동적 단일생명이 특수하다. 이 수동적 단일생명은 인간에게만 가능하고 인간에게만 준 것이다. 이 수동적 단일생명이란 피조적 생명이 아닌 원 생명이요 근원적 생명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적 피조적 자연생명만 생명으로 알고 있지 영원한 참 생명인 수동적 단일생명에 대해서는 무지상태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의 생명의 귀중성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물질적 자연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지 자연생명과 비교가 되지 않는 수동적 단일생명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생명을 우리는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ꊱ 이 생명의 명칭.
ꋎ 근원적으로 신의 생명.
ꋏ 시간적으로 영원한 생명.
ꋐ 소유적으로 영의 생명.
ꋑ 능력적으로 완전한 생명.
ꋒ 본질적으로 진리생명.
ꋓ 가치적으로 불사생명이다.
이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생명이니 이 생명은 한 인간에게 던져 준 하나님의 파생적 생명이 아니고 신의 단일생명이다. 또 이 생명은 인간 자체의 생명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받은 수동적 생명이다. 인간만이 이 생명을 받아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로 통하여서만이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이란 인간이 수동적 단일생명을 받음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물질적 자연생명에 관계되는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아니고(물론 결과적으로는 이 물질의 자연생명도 새 생명에게 흡수되어 삼키는 면에서도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생명적 단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창조주이신 신의 원 생명이 우리 인간 개개인에게 오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로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신인양성 일위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이 생명이 인간에게 접선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존재들이 그리스도로 통해서 하나님의 한 생명을 받아 살기 때문에 이를 수동적 단일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 수동적 단일생명은 영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생명이다.
우리 인간은 두 생명을 가지고 산다(물체생명, 영의 생명).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세 가지 생명이다.(물체생명, 영의 생명, 육신)
물질의 자연생명은 범죄 하여 죽었다.(피조적 생명) 그러나 영의 생명은 그대로 있다.
① 우리 인간은 특수도모의 존재로 지었다.
②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특수성이 있다.
③ 인간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으니 이것은 수동적 단일생명이다.
물질적 자연생명은 자연법을 떠나면 죽는다. 부지런히 쓰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옮겨라.
이 생명은 파생적 생명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결이다. 하나님과 단일생명이요 한 생명이다. 이 수동적 단일생명은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필요하다.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이 없다.
예수님의 인성은 성자나 도덕가는 될 수 있으나 구원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구원은 불가능이다. 연결을 짓는데는 인간의 공로가 몇 %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것인고로 끊어질 가능성은 없다. 한 번 중생 후에는 죽는 법이 없다.
생명이 중요하다. 그러니 고깃덩어리의 생명을 아끼지 말고 수동적 단일생명으로 살라! 이 생명에 접선시키면 모든 것은 살아난다.
ꊲ 영적으로 죽은 생명.
인간이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을 때 원인의 영의 생명은 피조적 생명이었고, 이 피조적 영의 생명은 가사성적이었기 때문에 이 생명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죽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후대 인간들에게 계속적으로 그 죄가 유전(혹은 창조)되어 왔고, 물질적 자연생명도 인간의 생산과정에서 유전되어 왔다. 즉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은 그 영의 생명이 죽은 상태로써 유전됐다는 말이다.
인간이 출생할 당시에 그 육체가 자연생명을 유전 받는 것처럼 영도 생명을 유전 받는 것이 아니고 육은 산 육으로 출생을 하지만 영은 죽은 영혼으로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사영(死靈)유전론이라는 말이다.
혹자들은 인간이 출생해서 죄를 의식하지 아니할 때에 죽는 영아는 천국에 간다고 보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사영유전론을 부인하고 생영 유전론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영유전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인간은 개체 개별적으로 새로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만이 그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생겨질 때에 영적으로 죽은 자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통하여 하나님이 생명이 인간에게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영은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ꊳ 재 존재(중생된 성도)가 영원히 단일 생명으로 산다.
이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들은 현존세상에서 개체 개별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영계에서는 수동적 단일 생명을 소유한 자는 개체 개별 생명이 아니고 전체는 한 생명으로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두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개체 개별 생명이니 이 생명을 칭하기를 육의 생명이라, 생리생명이라, 자연생명이라, 임시생명이라, 혹은 가사적 생명이라고 한다. 또 한 생명은 중생된 영의 생명이니 이 중생된 영의 생명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이 영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인데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만 받는 생명으로 단일 생명이기 때문에 중생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그 본질과 본성이 같고 시간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능력적으로 차별이 없다.
그렇지만 이 생명을 우리 인간의 말로는 가히 표현은 할 수가 없으나 구태여 표현한다고 하면 그 생명의 충만에는 차별이 있다고 할는지? 왜냐하면 이 생명은 날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소되는 생명이 아니고 죽은 생명을 삼키고 나면 그 죽은 것을 삼켰으니 이 생명은 곧 충만한 생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개체가 이 생명을 충만하게 함에 있어서 갑이라는 사람이 이 생명을 주격으로 죽을 생명을 삼켜서 자기의 새생명을 충만케 했을 경우 전체의 단일 생명은 더 커진 것이지만 이 생명이 단일 생명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도 같이 충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예를 들면 산에 있는 하나의 나무가 한 생명을 가지고 사는데 그 나무의 열매 중 하나가 크게 열렸을 때 그 하나의 중량이 큰 것만큼 그 나무의 전체 열매의 중량이 커지지만 그 하나의 열매가 커졌다고 해서 그 나무의 다른 열매도 커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이 생명은 영원히 단일 생명이기는 하지만 개체 개별적으로 생명의 충만에 차별이 있다. 현존세상에서 이 생명이 주격이 되어 죽을 것, 썩을 것, 혹은 자연생명을 많이 삼킨 생명과, 이 생명을 가지기는 했으나 이 생명이 주격이 되지 못하고 죽을 것, 썩을 것, 육체의 생명을 삼키지 못한 생명과는 영원히 개체 개별적 차별이 있는 것이다. 생명뿐만이 아니고 모든 것이 이렇게 격차가 생기는 것이다.
이 이치를 오해하면 천국은 공동세계 공동소유 공동주권 공동생명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만일 생명이나 천국이나 그 전부가 공동소유라고 하게 되면 활동을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의 차별이 개체 개별적으로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생명은 공동생명이 아니고 단일생명이며 개체 개별 생명이다. 이것은 논리 자체는 모순이 있으나 결코 모순이 아니다.
※ 기독자는 두 생명을 가지고 산다. 자연생명과 영의 생명이 있다. 영의 생명은 영원히 단일 생명이다.
천국은 전체 존재가 한 생명을 가지고 산다. 본질과 본성, 그리고 시간에도 환경에도 차이는 없으나 개체 개별적 격차는 있다.
새생명이 주격이 되어 살면 시간적 자연생명을 시간적으로 삼키니 예를 들면 순교는 새생명에게 삼킴이 된 것이다. 죽을 생명을 삼켰으니 새생명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공동생명이 아니고 개체 개별적 단일 생명으로 사는 곳이다. 이것은 용어로는 모순이지만 사실인 것이다. 천국은 공동의 장소이지만 개체 개별성이다. 어떤 면에서? 생명의 충만 면에서 개체 개별성이다.
ꊴ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이다.
이 생명은 비 물체요 무형적이기 때문에 물질적 유형적인 것으로서는 어떻게 비유할 수 없으나 이것을 구태여 비유한다고 하면 이 생명은 원 생명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 지엽적 단일생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꼭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물질적으로 비유를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계적으로는 이 생명의 소유자는 원 생명적 생명권 내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개체 개별적인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개체 개별적으로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이 생명연결은 없다. 그런고로 나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결합성은 영원히 이 상태로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중생할 때만 하나님과의 결합을 시켜 놓은 것이지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이 중생된 영이 하나님과 한 덩어리가 되어 일체성을 이룬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육을 벗은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필요 없이 하나님과 직접 연결이 되어 영원히 존재한다는 말도 아니다.
현재 우리의 영도, 앞으로 육신이 부활한 영체도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채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된 채로 사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속시키는 데와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데에만 임시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일시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도, 예수 그리스도의 결합도 영원적이다. 이 중보로써 모든 성도들은 생명적 연결이 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단일생명은 원형적인 단일생명이 아니고 지엽적인 단일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만 해 놓고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부활 후에는 영원히 존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는 임시성이 아니고 영원성이다.
생명권 내에 있으면서 개체 개별 생명이다.
충만성은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 바 된 것이다.
주권 면에서 볼 때 인간 자기의 생명은 사람이 모른다. 나올 때에 배정 받아 나온 것이다. 하루 하루 새생명에게 얼마나 삼킨 바가 되었느냐?
ꊵ 진리와 영감을 통하여 오는 생명.
이 생명은 필연코 진리와 영감으로 오는 생명이다. 그런고로 이 생명을 진리생명이라고 말한다.
만일 어떤 자가 이 생명을 원하면서도 진리를 싫어한다면 이 생명의 충만운동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생한 자가 진리를 배척한다고 해서 중생 시킬 때 온 그 생명이 떠나간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1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 생명을 받을 때도 진리와 영감으로 그리스도의 중보로 통해 온 것인데 진리와 영감을 통하여 온 이 생명은 고정적으로 계속 내주하고 있는 것인데 활동적인 면에서의 생명운동, 생명사역이란 이 생명운동이 내 속에서 진리와 영감을 통하여 계속 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기본적으로 와서 있는 생명이 있고, 내 속에서 활동적으로 역사 하는 생명이 있다는 말이니 이 생명운동 생명활동은 언제든지 진리와 영감으로 활동하게 된다. 또한 나를 통하여 타 존재에게 이 생명이 활동적으로 역사할 때도 진리와 영감으로 역사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없이는 생명의 활동이 없다는 말이다. 진리 따로, 활동 따로, 생명 따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고로 진리와 영감이란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 진리는 무시하면서 자신의 활동이 ‘생명운동이라, 생명활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진리가 없이도 이적 기사가 일어날 수 있다. 초자연의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적과 기사라고 해서 다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인 선적인 일이라도 다 진리와 영감의 역사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다. 진리가 없이 단독적으로 생명의 역사는 하지 않는다.
중생한 기독자는 어떤 죄를 지어도 고정적 기본생명은 떠나가지 않는다. 죄 중에 제일 큰 죄를 우상숭배라고 했다. 이 죄를 지어도 기본생명은 안 떠나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 방종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느냐?
ꊶ 육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 가능한 생명.
우리 인간은 두 생명이 있는데 인간이 생겨질 때부터 두 생명(자연생명과 영의 생명)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고 육의 생명은 생겨지면서부터 혹 유전적으로 받은 생명이지만 영의 생명은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고 출생 이후에 개체 개별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니 물론 방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행을 입고 그리스도의 중보로써 진리와 영감을 통하여 받는 것으로 이 생명은 육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 그 이성이 진리와 영감을 수락하므로 말미암아 이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간단히 말한다면 인간이 중생 하는 것은 육신이 살아 있을 때에 하는 것이지 육신이 죽은 후에는 중생할 수 없는 것이다.
성도의 육체의 부활은 죽은 자도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도 부활과 같은 영체로 부활할 수 있으나 이 죽은 영혼이 하나님의 단일생명으로 중생 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만 가능한 것이다.
※ 죽은 후에는 중생하지 못한다. 큰 죄를 지었건 작은 죄를 지었건 죄 값은 사망인 것이다.
중생자가 죽을 때 회개 못하면 지옥에 가느냐?
중생한 이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렇지만 회개하면 사함 받는가? 회개해도 사함 받지 못한다. 즉 의로 바꾸어지지 않는다.
천주교의 속죄권이나 송장을 누여 놓고 기도하는 것은 헛것이다. 그러니 죽은 자를 위해 울 필요도 없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 죽음으로써 다 끝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육체의 생명이 살아 있을 때이다.
제二절.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막연하게 그리스도는 필요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에 있어서 구속적인 면에서 필요하다는 것은 신학자들의 주장이 부분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동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 타락을 한 자이기 때문이요, 뿐만 아니라 인격의 세계에서 격차 관계상 혹은 차등의 관계상 양적 완전자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고 완전을 향하여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불완전자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에 구속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 동감을 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성장을 하려면 그리스도의 1차적인 구속을 입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구원에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一. 속죄의 필요성.
그리스도의 인간의 구속사역은 원래는 하나님의 예정이나 계획에 없었는데 우리 인간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또는 범죄 했기 때문에 돌변적으로 구속사역을 실행하신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이 타락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타락을 하건 안 하건 그리스도의 대형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1. 인간의 완전 타락과 속죄의 필요성.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완전 타락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아담 개인의 타락이 후대 자손에게까지 미칠 수 있느냐’ 하는 반론이 없지는 않으나 인류의 조상 아담 한 사람의 타락으로 온 인류가 타락한 것이 분명한 것이다.
전체 인류의 완전 타락론에 있어서 학자들의 주장이 각각 다르기도 하다.
1) 대표적 전적 타락설.
이 대표적 전적 타락설은 전 인류를 대표한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타락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두 타락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아담은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타락을 했다는 것은 수긍이 가지만 아담 외의 일반적 인간까지도 아담으로 인해 타락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억울한 감이 없지는 않다.
2) 유전적 전적 타락설.
이 타락설은 아담의 후손으로 출생한 본인은 타락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치 부모의 성질을 자식이 유전 받듯이 아담의 타락을 유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영의 생명이나 자연생명, 혹은 육을 유전 받을 때 타락성도 함께 유전 받는다는 것이다.
3) 동참적 전적 타락설.
이 설은 인간의 육체는 부모의 생리법칙에 의하여 생겨진 것이지만 그 영혼은 부모로부터 유전 받기 때문에 후손의 그 영혼은 더 높은 조상의 타락한 영혼이 유전되어 있으므로 개체의 모든 영혼은 아담이 실지로 범죄해서 죽었던 그 영혼이 계속적으로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인고로 온 인류는 완전 타락을 했다는 것이다. 전적 타락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고는 생명을 얻어 살아 날 수 없다는 것이다.
※ 초 한 개에 불을 붙인 불의 크기나 열 개에 불을 붙인 불의 크기나 각각의 초 하나의 불의 크기는 같은 것처럼 그 후손들의 죄의 유전은 같다.
초에 처음에 불을 붙였다가 그 불이 꺼진 후 다시 성냥불로 그 초에 불을 붙였다면 그 불은 처음 불과는 다른 불이다.
영혼 창조설을 주장하려면 죄의 대표설 또는 유전설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① 죄 있는 영혼을 집어넣어 주느냐?
② 세례요한의 출생이 안 맞는다.
③ 유전설이라면 부모가 중생 했으면 그 부모의 자식도 역시 태어날 때부터 중생이 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二. 하나님의 지공성.
하나님의 지공성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 했으니 인간이 범죄한 것을 용서, 묵인하시지 않고 원죄이던 자범죄이던, 큰 죄이던 작은 죄이던 그 결과는 사망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모든 인간은 실질적으로 범죄하지 않는 자가 전혀 없다. 심지어 모태에서 죽었거나 출생 즉시로 죽었다 할지라도 그 영혼은 죄와 사망 아래서 출생했고, 원죄를 가진 자로 출생했기 때문에 필연코 사망이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단연코 죽었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본 인간이 그 형벌을 담당케 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신의 지공법에 의해 심판을 대신 받아 처형당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대형이라 속량이라 속죄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한다는 말이거나 묵인해 준다는 말이 아니고 대신 죽어준다는 말이다.
인간은 전적 타락의 죄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혹은 대형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 타락의 두 가지.
① 근본적 자체적 타락: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진 것. 전적 타락.
② 도덕적 타락.
근본적 자체적 타락이 되면 하나님과 진리적 생명적 치리적 사역적으로 단절이 되어 버린다. 이 연결이 되어야 유기적이 나온다.
선의 기준, 타락의 기준이 어디냐? 인간이 보는 선악의 기준은 정확하지 못하다.(자기 기준, 인간 기준) 도덕의 척도의 기준은 각 나라마다 일치하지 못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촌끼리 결혼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본은 찬양을 한다. 특별히 유대나라에서는 집안끼리 하지 않으면 이방인이라고 뽑아 버린다. 마호멧교는 이방 독신여자에게 남편노릇 해 주는 것이 선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 하나님과 연결을 짓고 있는 것이 진리이다. 이 진리로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통치성이, 하나님의 사역성이, 하나님의 생명성이 아담에게 흘러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자유적인 동시에 하나님과 유기적 결합적 피동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진리와는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진리만 붙들면 된다. 하나님의 활동성이 진리로 통하여 건너오는 것이다. 그런고로 아담의 활동의 근본은 하나님이다. 아담의 단독 활동이 하나님과 유기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피동적 피동, 능동적 피동, 강압적 피동을 구별할 것이다. 능동적 피동은 타의 소원이 나의 자체화된 것이다. 신앙생활은 능동적 신앙생활이 제일 좋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사가 곧 진리이니 아담이 이 진리를 잡고 살 때 아담의 아이디어, 그 기억력은 비상했다고 보아진다. 이것이 현재 우리 속에 잠재해 있다.
하나님의 사역성이 진리로 통하여 아담의 활동으로 나온다. 무형행→ 유형행→ 물행으로 나온다. 즉 신행(神行)→ 영행→ 심행→ 이성→ 몸으로 나온다.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자의 도덕을 기준해서 선악을 말한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본적 기준에서 볼 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다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도덕법 종교법을 어겼는데도 선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님의 의사를 따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한 애매한 것도 많다. ‘부모를 공경하라’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미워하라’ 했고, ‘살인하지 말라’ 했는데 사무엘은 사울에게 ‘아각 왕을 죽이라’ 했고, 다말의 경우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가진 것은 이스라엘의 기존법에는 용납이 되지 않는 돌로 쳐죽이는 죄인데도 오히려 그러한 다말을 통해 생명적 그리스도의 계대가 이어지기도 했고, 다윗의 경우 본처의 자식이 아닌 신하를 죽이고 그 아내를 취해서 낳은 아들로 생명의 계대가 흘러간 것 등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선악의 기준을 보여준다.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타락이다. 이것이 연결되는 데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으면 안 된다.
아담 타락 후에도 아담의 의지의 작용은 그대로 할 수 있다. 끊어진 상태에서의 의지의 작용을 주관적이라 자율적이라 능동적이라 한다. 끊어진 것을 의식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끊어졌다고 해서 그 당장에 180도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이다. 가치 판단 취미가 모두 하행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은 상행이다. 하나님과 아담과의 연결은 진리적 연결인고로 끊어지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하다.
중생 후의 연결은 기본연결과 중복연결이 있다. 타락 전의 연결은 일방적 연결이요, 가범성적 가사성적 연결이다.
타락 전에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지만 근본적 타락이 되니 이제는 지식적 가치적 판단적 평가적 욕망적 행동적으로 물질을, 세상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죄는 물행적 죄만 보면 안 된다. 물행 그 이전에 은밀계시를 놓친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은밀계시를 놓친 것이란?
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에덴동산에 살게 했는가? 구원을 위해서 살라고 한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② 은밀계시를 놓치면 현실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 은 자기가 구원을 이루기에는 최고 좋은 것이다. 그 현실을 다스리자, 지키자, 지키면서 따먹자.(생명과 일반과 따먹고) 선악과는 따먹지 말 라!
목적성을 버리게 되면 현실에 불만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지키고 다스리지 못하니 뱀이 들어온다. 뱀은 구멍만 나면 들어온다.
하나님이 진리를 끊어버린 것이 아니고 자기가 버린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사단의 통치를 받겠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이 자기 밭, 자기 동산인가, 제 마음대로 따먹게?!
지식적 타락이 되면 옳은 것이 비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따먹으면 죽는다고 하는데 따먹고 행복할 줄 아는 것이 지식적 타락이다. 세상을 붙들고 그것이 안 썩는 것으로 알게 된다.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알게 된다. 십일조 내면 쓸 것이 모자라고 손해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이것이 가치 평가적 타락이다. 영보다 임시가 좋아 보이는 것이다.
성경은 도덕적 타락보다 근원적 자체적 타락을 타락으로 말한다. 전체적 타락에서 성질적 타락이 나오고, 성질적 타락에서 도덕적 타락이 나온다. 문자적 타락보다 성질적 타락을 심사할 것.
1. 인간이 아니면 속죄는 불가능.
앞에서 하나님의 지공성이 인간의 죄를 묵인할 수 없는 것이요, 또한 그 죄로 인해 인간이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것도 하나님의 애정성이 묵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즉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과 고통에 빠진 인간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공성대로 영원한 형벌 아래 둘 수는 없으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에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묵인하신다고 하면 이는 곧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되는 일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공성에 의하여 인간의 타락을 엄격히 정죄를 하고 그 정죄에 대한 형벌을 하셔야 했으니 그 형벌은 영원한 사망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공의대로 인간을 정죄 하여 영원한 사망 아래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애정성이 결코 용납치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구원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당신이 친히 인간이 되어 인간계에 오신 것이니 당신이 인간이 되심은 인간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이다.
범죄자가 인간이요, 이 형벌을 받을 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을 수 없는고로 인간 대신 형벌을 받기 위해 완전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를 그리스도라 혹은 메시아라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대속을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대속적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떤 누구도 이론이 없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필요성에 대한 교리는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 오직 기독교만의 특수적인 기본교리 중의 하나이다.
※ 일반사람 중에 교회에 관심이 있는 자들은 속죄의 교리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지공성과 지성성이 없다고 하면 죄에 대해 형벌치 않고 하나님과 연결을 지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공성에 의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공성과 지애성은 대립이 아니고 일치성이다. 이것은 우리의 건설구원에 있어서 절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의 기본구원의 영원한 멸망을 당신의 애정성이 용납치 않는다. 그런고로 대신 형벌이 필요하다.
죄의 형벌로 인해 죽었다고 하면 그 사람을 판사가 죽인게 아니고 법이 죽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법에 대해서는 지극히 공의로우시나 아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사랑이시다. 죄에 대한 용서는 사랑이 아니고 죄를 조장하는 것이다.
2.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시고 그 만물을 상대하여 당신의 계약의 상대자로 삼지 않으시고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만드신 목적에 있어서 그 목적성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과 만물을 동등으로 취급하거나 동등으로 상대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목적이 인간을 위해서 지었고, 또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은 다른 피조물들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만 언약 혹은 계약을 맺으셨던 것이다. 행위언약이나 은혜언약이나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과의 계약의 상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자유권을 주셨지 만물들에게는 자유권을 주지 않으신 것이다. 따라서 언약의 대상자가 아닌 만물들에게는 정죄도 심판도 없는 것이다.
간혹 만물들이 형벌을 받는 것 같은 일이 있기도 한데 그것은 만물들이 하나님 앞에 언약을 어겨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인간의 교훈을 위해 인간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대상자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는 것도 인간뿐이다.
인간 외에 모든 만물들은 인간구원을 위하여 어떤 유한한 기간동안 존재하다가 무(無)로 돌아가고 말지만 인간은 특수목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과의 언약(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선포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언약을 위약 했으니 이로 인해 행위언약대로 심판(공심판)을 받아 영원한 사망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범죄자는 인간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자도 인간이요, 형벌을 받을 자도 인간이다.
이러한 죄를 범한 인간의 죄를 속죄 혹은 대형 하려면 인간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경에는 인간이 범죄 했을 때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 대속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소나 양이나 염소의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 한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형식계시요 형용계시이다.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갑이라는 존재가 범죄를 했으면 필연코 범죄한 그 본인이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갑이 범죄한 것에 대한 형벌을 을이 대신 받을 수 있는 원칙을 허용하신 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성이 파괴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범죄를 했으면 범죄를 한 본인이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대속의 길을 허용하신 것을 대형이라고 하고 이 속죄, 대형을 담당한 분이 곧 인간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존재는 많지만 하나님 앞에 죄가 구성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계약의 상대자이다. 계약의 상대자가 아닌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법이 구성되지 않으니 정죄가 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왜 사람과만 법을 세워 놓았느냐?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로써 영원한 대형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어떤 사물을 뒤에서 보는 사람과, 앞에서 보는 사람과는 견해가 다르다.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측면과 측면에서 보고, 상하에서 보아야 만이 완전한 원형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만 원형을 주었다. 왜? 인간만이 특수목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 지은 자도 인간이고, 영원히 형벌을 받을 자도 인간이다.
그러면 구약의 속죄제사에서 짐승을 잡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대형의 법으로 세워놓은 것이다.
시대마다 구원이 다른가? ‘행동시대 양심시대 율법시대 은혜시대’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구원의 방편은 만 인간이 시간과 시대를 막론하고 같다.
하나님께서 대속의 원리를 세웠는데 이 원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격자가 필요하다.
3. 인간이라도 죄인이면 불가능이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그 조건이 첫째로는 인간이어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인간이든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대속의 자격이 되느냐 하면 인간인 동시에 무죄인이라야 한다.
만일 범죄자가 다른 인간을 대신해 형벌을 받는다고 해도 이는 자기의 죄로 형벌을 받는 것일 뿐이지 죄인이 타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을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해 받는 죄의 대가는 그 죄의 다소나 경중에 상관없이 사망이기 때문에 무죄인이 아닌 범죄자이면 자기의 죄의 대가로 자기가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하기 때문에 대속의 자격은 없는 것이다. 자연법에 의해 출생한 모든 인간은 다 범죄자인고로 정죄 하에 있기 때문에 속죄의 자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속죄제물이 되려면
① 인간이라야 되고,
② 무죄인이라야 된다.
아담의 혈통을 받아 난 자는 무죄인으로 출생할 수는 없다.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아담이 최초에 범죄할 당시의 그 범죄에 동참자이기 때문에 실범자이다. 따라서 인간을 대속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무죄인이어야만 했으니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특수방법으로 출생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아담의 영과 육에서 유전된 분이 아니고 성경대로 말씀이 잉태하여 육신이 되신 분이니 이는 말씀이 육신의 껍데기를 입은 것이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이 인간은 일반인간과 출생방법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구성요소와 잠재적 성분과 성격 면에서는 완전한 인간이다.
이 인간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출생하여 33년간 생존하시면서 그 존재기간 동안에 범죄의 요소를 극기나 극복이나 인내로 통과한 것이 아니고 전 삶을 택자들의 구원에 신경을 기울이고 사셨기 때문에 그 속에 잠재하는 인성이 육성 인간성 죄성으로 나타날 분초 찰나 순간이 없었던 것이다.
혹자들은 예수님의 거룩성을 고조시키다 보니 예수님은 범죄할 가능성조차도 없으신 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무죄성과 인성을 구별하지 못한데서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범죄할 가능성조차 없다고 하게 되면 이는 곧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성이라는 인성이 곧 자유성이요 범죄성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인간성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범죄성과 연결이 되어 사신 적이 없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영혼이 아니기 때문에 조상들의 범죄에 동참자도 아니시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에게는 자범죄도 없을 뿐 아니라 동참적인 원죄도 없는 것이다.
만일 유전론은 부인하고 창조론을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도 일반인간과 똑같은 인간인데 왜 다른 인간에게는 원죄가 전가가 되고 예수님에게는 원죄가 전가가 되지 않는지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만일 아담의 타락은 인류를 대표해서 타락한 것이라고 하는 대표적 타락론을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도 인류 중의 하나에 포함되어야 하니 원죄의 죄인에 해당될 수밖에 없게 되니 이에 대한 답은 어떻게 할 것인지?
인간 치고 원죄에 해당이 안 되는 자는 하나도 없다. 아담이 대표로 타락을 했으니 모든 인류가 다 원죄에 해당이 되지만 예수님이 원죄나 자범죄에 해당이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은 실범자도 아니고 원죄의 동참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이시기에 인간 대형의 대속에 있어서 이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 대속의 자격자가 되려면
(1) 인간이라야 되고,
(2) 무죄인이라야 된다.
아담의 후손은 다 죄인이다.
① 전가설이면 예수님도 인간인고로 죄가 전가됨.
② 대표설이면 예수님도 인간에 포함이 되니 원죄가 있게 됨.
③ 유전론: 이것을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도 실범자가 된다.
조상의 원죄의 유전을 안 받으려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죄인이다. 인간성은 의식하지 않았다. 전부는 구원에 투자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는 인성이 없었느냐? 구원에 총 집중한고로 인성은 고개를 들지 못한 것이다. 인간성은 범죄성이다.
4. 속죄의 자격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불가함.
인간을 속죄함에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자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인간을 속죄할 자격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속죄의 사역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속죄를 하려면 인간이 당하는 무한한 고통을 당해야 하고, 멸시와 천대도 받아야 하고, 견디기 어려운 심신의 고통도 당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이는 인간을 위한 속죄는 불가능하다.
인간을 위한 속죄는 대속인데 이 대속이라는 말은 대형을 하신다는 것이니 대고 대사 대멸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누구든지 이를 대신하려고 하는 자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일을 하는데는 사랑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격과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속의 자격이란
① 인간이라야 되고,
② 무죄인이라야 되고,
③ 죄를 이긴 능력자(세상을 이긴 능력자)라야 되고,
④ 자기를 이긴 능력자라야 된다.
아무리 이런 자격과 능력을 갖춘 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일은 제 삼자가 권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설득을 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닌 다만 자원적 소원이 돼서 나와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 자원성은 사랑의 발작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에게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의 대속은 어려웠을 것이다. 범죄한 인간을 대속 하는 데는 이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우리 인간의 죄의 대가를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지불했다고 한다. 죄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말은 죄의 대가는 형벌이요 죽음이니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죽음으로 받았다는 말이다. 이 형벌을 죽음으로 받은 것을 죄의 대가를 피로 지불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 속죄는 곧 대속이니 이 대속에는 대형 대고 대사가 따른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묵인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해 인간의 형벌을 대신 받을 수 있는 자격자이시니 그 자격은
① 인간이라야 하고.
② 무죄인이라야 하고.
③ 능력자라야 하고 - 자신과 세상과 죄를 이긴 능력자.
④ 자원적이라야 하고.
⑤ 사랑이 있어야 한다 - 사랑의 극치의 소유자라야 하는데 누가 이런 일 을 할 수 있겠느냐?
5.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완전 형벌.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광대하신 구원계획과 사역을 이로 헤아릴 수 없고, 자세히 알기도 어렵지만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왜 이 구원사역의 계획과 설계를 이처럼 복잡하게 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꼭 이런 방편이 아니고는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었던가?
물론 전능의 하나님께서 이 방편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인간구원을 더욱 쉬운 방편으로 하실 수도 있지만 이 방편을 사용하신 것은 이 방편이 가장 선하신 방편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신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왜 이 방편을 쓰셨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구원계획과 설계와 방편 속에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증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聖)성과 선성과 지공성과 지애성과 지식성이 충분히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원에 하나님의 전 인격이 동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방편에서 인간의 그 어떤 사랑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이 나타나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지극히 공의로우심이 나타나 보이고,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심이 나타나 보인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거룩한 뜻대로 되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대속을 놓고 ‘만일 인간이 대속을 한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하지 않고 간단하게 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간단한 것인가? 하나님의 이 방편 외에는 더 좋은 것이 없는 것이다.
아이를 낳았으면서 그 아이가 먹고 마실 것을 충분하게 주지 못하면 부모가 죄를 짓는 것이다. 아이의 기본소유가 있는 것이다. ‘기본소유에서 몇 %냐, 몇 분의 일이냐’를 따지는 것이다.
어머니 태 속의 아이의 구원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영혼 창조설을 주장하여 태어날 때 그 아이에게 영을 넣어준다고 한다면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 뱃속에서 죽은 아이는 무로 돌아가느냐?
마리아의 경우는 메시아 잉태를 명령을 받은 직후에는 잘 몰랐으나 세례요한의 어머니가 마리아에게 잉태 사실을 말을 하니 그 때서야 자기 속에 성령으로 잉태된 한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지만 그러나 네 사람이다. 복중에서 뛰고 논다.
우리가 갈 천국이 무한 다양하지 않다면 단순히 ‘예수 천당’ 하면 되겠지만 구원설계가 세밀하고 복잡한 것이기에 그 이상으로 더 올라가야 한다.
이런 방편을 쓰신 것은 거룩한 방법이요 선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하나님의 공의성과 거룩성에 하나도 위배됨이 없다. 애성에도 조금도 위배됨이 없다. 빈약함이 없다.
무엇을 보아서 하나님은 지극히 공의로우시다고 인정이 되느냐?
공의성과 지성성과 공평성과 공정성을 구별할 것이다.
공의성: 그의 행한 대로 정확하게 법대로 이행. 이것을 어디서 볼 수 있 나? 독생자를 죽이는 것을 보니까!
지성성: 지극히 거룩함. 무엇을 보니?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서 이질성 은 절대로 용납이 안 된다.(성분적 성질적 이질적)
공평성: 빈부의 차이 고저의 차이를 주었지만 이것은 임시이니 영원히 차이 를 준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주신 것을 가지고 달란트 장사를 해야 된다. 하나님은 %로 계산한다. 영원세계를 놓고 보면 공평 이요 공정이다. 천국의 점령권은 동등하다.
공정성: 많이 준 자에게나 적게 준 자에게나 똑같이 요구치 않는다.
6.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완전 생활.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와서 인간 비슷하게 살아간 것이 아니다. 즉 인간처럼 인간흉내나 내며 살다가 간 것이 아니다. 완전 인간으로서 생활을 하신 것이다.
완전 인간으로 살았다는 것은 물론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성에는 변함이 없지만 신성의 조력에 의하여 외래적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것이지 인간 흉내 내러 온 것이 아니다.
7. 그리스도는 인간차원에서 완전 생활.
모든 인간들은 한 인간으로 와서 그 생활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인간차원에서의 기준법에 불완전하고 미달된 생활을 하고 갔으나 그리스도는 세상에 와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인간차원의 기준법에 100% 완전한 생활을 하고 가신 분이시다.
이 세상에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인생이 오고 갔으나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생활을 하고 간 이는 아무도 없다. 다 불완전한 생활을 하다가 갔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세워주신 인간수준에서의 완전이라는 기준선이 있는데 그 기준선에 도달하고 간 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 인간+하나님=예수. 예수님은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금식기도 하실 때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보통 인간보다 훨씬 쉬웠나? 예수님도 희로애락을 완전히 느끼신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인간생활로 하나님의 기준점에 완전히 도달한 것이다.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점에 도달했느냐? 석가? 공자?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른 점은?
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도달.
② 기독교는 생명이 둘.
③ 부활.
④ 단일성.
(1) 신성의 도움을 받아 고통을 삭감하거나 감소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완전한 인간이 됐다고 해서 신성이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완전적인 기준점에서 완전한 생활을 하시기에는 적지 않은 노력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성의 도움을 받아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신성의 도움을 받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성의 결합이 없이 살았다는 말은 아니다. 신성결합과 완전한 인성의 행위와는 별개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흉내 정도나 낸 것이 아니고 완전한 인간으로 살으셨는데 신성의 도움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할 때 그 원수들은 그리스도에게 고난을 가하면서 고통을 감하게 하려고 마취약을 먹이려고도 했고, 또 나아가서 신성의 도움을 받으라는 조롱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신성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받는 그 모든 고통을 삭감 혹은 감소시키려고 하지를 않았다.
※ 하기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견디기 어렵다고 해서 신성의 도움을 받아 고통을 아픔을 감소하려고 하지 않았다. 도움을 받을 비굴한 분이 아니시다.
도움을 받으면 그리스도성이 삭감된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는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도움을 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도움을 받아 가지고 할 바에는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움을 받았다면 그리스도가 위대한 것일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도움을 받으려는 존재로 살지 말라! 그리스도는 성부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다.
(2) 정신적인 고(苦)와 육신의 고를 다 당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와서 외래적으로 오는 모든 정신적인 고와 육신의 고를 다 당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 당했다’는 말과 ‘고통에게 정복을 당했다’는 말을 구별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는 외부적으로 그에게 주는 정신적 고통과 육신의 고통을 다 당하기는 했지만 이것을 느끼면서 그 고통에게 정복을 당하지는 않은 것이다. 즉 동화되지는 아니했다. 동화되고 정복되어 화동 되지는 아니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정신 고를 전혀 당하지 아니했다면 그리스도로서의 책임완수를 못한 것이요, 육의 고통을 당하지 아니했다면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정신 고와 육의 고를 많이 당했다. 그러나 그 고통에 동화되고 정복이 되어 화동 되지는 아니했다.
어떤 자들은 정신 고와 육의 고를 전혀 당하지 않았다는 자들이 있다.
(3) 애성의 극치로써 고통에게 화동 되지 않고 승리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하시 하처를 막론하고 외적으로는 태연이었고 내적으로는 일심전력이었다. 모든 신경을 구원에 집중을 시켰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모든 고통을 사랑의 극치로써 이길 수 있었고, 또한 내적으로 일어나는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그 정신적 고통이라는 것이 느껴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사셨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구원과 사랑으로만 충만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구원을 바로 알지 못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단순하게 외적으로 증명되는 사역만 마친 것이 아니고 내적 투쟁에서 고통에게 정복되거나 화동 되지 않고 승리했음이 놀라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기로는 그리스도께서 외래적인 고통이나 내발적인 고통에 정복을 당하건 당하지 안건 상관이 없이 인간 대신 형벌을 받는 대형만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어떠한 형편으로서든지 대신 형벌만 받는다고 해서 속죄의 완사가 성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역적 대형보다 사랑의 극치로서 모든 고통을 다 당하면서도 그 고통에 화동 되지 않음이 더 귀중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 대신 형벌을 받는 것보다 고통에게 화동 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사역에서 그리스도를 심사해야 하느냐, 출생이라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심사해야 하느냐? 사역이 비슷하면 그리스도인가?
표면만 연구하다 보면 그리스도와 흡사한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도 열 두 살 된 아이가 박사들과 이야기할 정도의 신동이 있다면 그 아이를 그리스도시 할 수 있는가? 물질을 이성을 초월했다고 그리스도냐? 사역적인 면만 보면 그리스도가 수없이 있을 수 있다. 기독론은 사역적인 면만 보는 것이 아니다. 사역적인 면으로는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닮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구간에서 난 그것이 특이한 것인가? 그렇다면 6. 25 전쟁 때 구유보다 더 못한데서 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완전 기준성에 완전한 분으로 사셨으니 죄를 이기고, 자기를 이기고, 그 어떤 무엇에게도 화동 되지 않고 걸어가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간 자가 그리스도 외에는 없느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화동 되지 아니했다.
사역에서 연구하지 말고 출생에서부터 심사하라! 부모가 누구냐? 성령으로 난 자라야 한다. 기독론을 모르면 이단자에게 몰린다. ‘나는 예수다’ 하거든 이력을 가지고 심사하지 말고 성령으로 잉태된 자인지를 보아라.
제三절. 칭의의 필요성.(대행적 필요성 - 마5:20)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구원이라는 용어는 간단하면서도 다양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구원이라는 용어 속에 구원의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놓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지옥에 갈 자를 천국 가게 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지만 이 구원을 분리하고 세분하면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구원이 있고, 대속적 구원, 대행적 구원, 중보적 구원, 소유적 구원, 건설적 구원, 성화적 구원, 성장적 구원 등 이렇게 다양한 구원이 있다.
그런데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대형)으로 말미암아 무죄자가 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되는 구원은 속죄구원에 불과하다.
성경에 말하기를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정을 지었다.(마5:20) 이 말을 보면 우리 인간이 원인의 무죄상태에서도 천국에 들어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원인은 무죄성을 가졌으나 의인이 아닌고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능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에덴동산에서 의를 입도록, 혹은 의행을 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행을 못하고 죄행을 하면서 죄인이 되고 만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무죄만 되면 천국에 입국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나라는 무죄의 나라인 동시에 의의 나라이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면 입국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죄인과 의인을 동등시 할 수 없다.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혹은 대형은 인간을 무죄인이 되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대행은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이다.
※ 인간의 구원에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가? 그리스도가 필요한고로 그리스도를 보냈다. 왜? 인간을 구원해야 하는고로!
의인=무죄인=의인. 의도 없고 죄도 없는 상태는 무죄인. 아담의 범죄 전 원인이 이런 상태이다. 이 때에 천국에 갈 수 있나? 갈 수 없다. 무죄인은 천국 못 간다. 왜? 그 나라는 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죄인은 본질과 본성이 천국과는 대립인고로 천국에 용납이 안 된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도 그리스도가 필요했고, 범죄한 인간에게도 그리스도가 절대 필요하다. 죄만 속하면 안 되고 의행적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一. 무죄인과 천국.
우리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다 죄인이다. 이 죄는 모든 인간 각자가 원죄도 실범이요 자범죄도 실범이다. 그렇지만 이 죄를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사함을 입어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무죄인으로서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이 대속을 입게 되면 무죄인밖에 안 되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천국은 의의 나라요 생명의 나라요 진리의 나라인고로 무죄성은 무엇이든지 용납된다고 하는 착각은 버려야 한다. 무죄인과 천국은 동질 동성이 될 수 없다. 무죄인과 천국은 결코 단일성이 아니다.
유죄인과 무죄인을 구별해야 하고, 또 무죄인과 의인을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무죄인과 천국은 엄격히 격차가 있고 구별이 되어 있다.
※ 천국은 혼돈 혼잡 혼탁한 나라가 아니고 거룩한 곳, 깨끗한 곳이기 때문에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무죄인의 색깔과 천국의 색깔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예: 유죄인은 검은 색깔이라면 무죄인은 하얀 색깔이고 의인은 붉은 색깔이다.
1. 자범죄와 무죄인.
이 세상에 많은 인간이 출생을 하는데, 혹은 생겨지는데 자범죄를 짓지 않고 죽음의 선을 넘은 인생이 많이 있다. 그리하여 혹자들 중에 자범죄를 짓지 않는 무죄인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믿는 자들도 있다. 즉 태중에서 죽은 사람이나, 출생 후에 죄를 의식하기 전에 죽은 자들은 자기가 자범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지 않느냐 해서 ‘전 유아 구원론’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고대에 많은 학자들이 이 주장을 해 왔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은 천국에 대해 무식한 연고요, 구원에 대해 무식한 연고이다. 인간은 자범죄가 없다 할지라도 원죄가 있기 때문에 결코 천국에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2. 도덕성에 무죄인.
자범죄와 도덕성의 죄와는 또 구별된다. 자범죄란 하나님의 성문법에 관한 죄인데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 성문법에 위배되는 죄성을 말하는 것이고, 도덕성에 무죄인이란 성문법을 떠나 신인관계보다 인인관계 혹은 인사관계 인물관계에 있어서의 죄이다.
우리 인간은 대신관계의 죄가 있고, 대물관계의 죄가 있고, 대아관계의 죄가 있다.
※ 자기가 자기에게 짓는 죄는 대악(大惡)이다. 죄는 타살 죄보다 자살 죄가 더 크다. 이것은 도덕법에 속하는 죄이다. 대신관계 이외의 죄는 대부분 도덕성에 속한다.
예수 잘 믿는 것과 도덕과는 구별이 된다. 도덕적으로 무죄인은 천국 문간에도 못 들어간다. 아담의 후손 치고 대속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3. 원죄에서의 무죄인.(타락 전)
원죄에 무죄인이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느냐? 만일 원죄의 무죄인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면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기 전에 천국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범죄치 않아도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한 인간이었다.
인간세상에서 원죄에 무죄인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이전일 때뿐 그 이후에는 없다. 전 인류는 다 죄인이라는 말이다. 의인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했으니 여기에서 의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 의를 말하는 것이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 다니엘이 사무엘이 의인이다’ 하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의 칭의를 입은 의를 말하고, 사건적으로 볼 때는 인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니 기본 의를 밑천으로 하여 중복적 의의 생활을 한 것을 지칭해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 마태복음 5장 20절에 말한 바리새인의 의는 지상 최상급의 의이다.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의 의는 모두 인조척도의 의이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신조척도에 거의 맞도록 율법과 계명을 지키느라 애를 쓴 자체는 예수님도 인정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척도가 아닌 인조 의를 행했다. 하나님께 피동된 능동적인 의가 아니다.
예수님의 의는 신조 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어 놓은 의이다. 이렇게 천국은 거룩한 곳이다.
二. 인적인 의인과 천국.
이 세상에는 인간들이 볼 때 어떠한 사람은 의인이라 혹은 선인이라 혹은 성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 인간이 이런 사람들을 단편적으로 볼 때 참 의인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즉 인간 보기에 의인이라고 칭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지옥에 가게 둔다고 하면 너무나 공평치 못하다고 느껴진다.
만일 그런 의행을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 중에 최고 의인과 최고 악인과는 격차가 극대 극이니까 극명하게 표시가 나지만 중간의 의인과 중간의 악인의 분기점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구별하기가 심히 어려우니 어느 선에서 잘라 의인으로 인정을 해 천국에 가게 할 것이냐?
물론 이 말은 인적 의인 득구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본문에서 근본적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것은 인적인 의는 아무리 의행을 해도 그 의행은 진리와 영감으로 된 신의 본질과 본성적 의가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용납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런고로 천국은 필연코 인적인 의, 인조 의로써는 입(入)하기는 불가하고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된 신적인 의라야 가능하기 때문에 칭의적 대행적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1. 인적인 의행.
인간세상에서 의행과 죄행은 구별이 된다. 인간이 볼 때 죄행은 악이요, 의행은 좋은 것 착한 것 선한 것으로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의행은 인간기준에서 볼 때는 의행이지만 참 의행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 의행이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그림 같은 의행이다. 그리스도가 진리와 영감으로 해 놓은 의행만이 참 의행이다. 다른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의행과 인간의 의행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표면적인 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성격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다. ‘인적인 의행이다, 신적인 의행이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기준해서 하는 말이니 인적인 의행은 가(假) 의행이요, 신적인 의행인 진(眞) 의행이다. 천국은 진 의행이라야 용납이 되지 가 의행은 용납이 되지를 않는다.
2. 신적인 의행.
인적인 의행은 종별과 활동을 두고 말을 하고 있으니 사람의 활동이 종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타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의행이라고 한다. 한 사람을 위했던 여러 사람의 유익을 위했던 자기의 희생을 생각지 않고 타의 유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을 인적인 의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적인 의행인 그리스도의 의행은 종별이나 외모 활동에 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성격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신적인 그리스도의 의행도 타의 유익을 위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인적인 의행과 신적인 의행을 분별할 때 같은 종류, 같은 활동이지만 그 활동을 보는 인간에 따라서, 또는 인간이 보는 각도에 따라서 인적인 의행으로 보기도 하고 신적인 의행으로 보기도 한다는 말이 아니고 신적인 의행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격이 되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진 의행을 두고 하는 말이고, 그것이 아닌 것은 아무리 인간 보기에 선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신적인 의행이 아닌 인적인 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신적 의행의 기준.
의행의 기준에 있어서 인적인 의행의 기준은 그 기준이 명확하지를 못하다. 어떤 활동 어떤 행동 어느 선까지를 의행이라고 하고, 어떤 선 어떤 활동까지를 죄행이라고 할지가 애매하다.
혹자들은 의행과 죄행 사이에 중간상태를 두면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의행과 악인의 중간상태의 그 사이에 또 의행과 죄행의 중간상태가 생기게 되니 애매한 것이 자꾸 생길 뿐이다. 그런고로 인적인 의행과 신적인 의행은 완전히 구별되어야 한다. 신적인 의행은 그 기준이 뚜렷한 것이다.
(1) 타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의행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활동하신 것은 그 활동 전부가 타를 위한 활동이요 타에게 유익이 되는 활동이다. 그의 도성인신도 출생도 성장도 육적인 일반활동도 십자가의 사활 승천도 당신의 희생 전부는 타에게 유익이니 곧 의행이다.
(2) 하나님에게 기쁘심이 되는 것이 의행이다.
그리스도의 활동 전부는 하나님의 의사와 대립성이나 혹은 각치성이 없고 전부는 신의 뜻에 맞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니 이 전부는 의행이다.
(3) 진리와 영감에 피동 되는 것이 의행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은 진리와 영감을 떠나서 한 활동은 없고 진리와 영감에 의해 피동적이요 동화적인 활동이니 전부는 의행이다.
(4)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것이거나 유기적 간접적으로 하신 것은 의행 이다.
이 기준대로 본다고 하면 의행과 죄행의 구별은 애매성이 없고 뚜렷한 것이다. 타에게 유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는 것은 죄행이요, 하나님의 허락 하에 한 것은 하나님에게 피동 되어 한 것이니 의행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에게 피동된 활동이 아니면 피동되지 않은 활동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중간상태는 없는 것이다. 의행과 악행이 명백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에게 피동된 활동이 아니라면 아무리 외부적 활동을 그리스도와 똑같이 했다고 해도 의행은 아니다.
三.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
우리 인간은 구원목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이 구원의 완성은 의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 의란 일반적인 인적인 인간기준에 의한 의가 아니고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린 의를 말하는 것이다.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치 못하면 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니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드릴 수 있는 자는 일반인간으로는 불가능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1. 인간으로서는 불가능.
인간은 구성요소에 있어서는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기준에서 인간을 볼 때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 불완전한 인간이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불문법) 만족을 드리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구약성경이나 모세의 법은 성문법인데 이 성문법이 표면적 법이라면 성문법보다 더 높은 것은 불문법이다. 이 불문법을 인간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성문화시켜 주신 것이 성문법이다.
인간으로서 혹 이 성문법을 지킬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인간 중에 혹 몇 사람이 가능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은 성문법이 아니고 성문법 이상의 불문법이니 이 불문법에 만족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은 성문법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문법으로만 본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모양, 어떤 상태, 어떤 심리로 죽었건 인간의 죽을 죄를 대신해 형벌을 받아 죽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성문법 통과) 그러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인 이 불문법은 단순히 대신 죽는 것만이 아닌 죽기는 죽는데 고통에게 동화되지 않고 정복당하지 않고 감염 당하지 않고 그 고통을 완전히 이기고 죽어야만 되는 것이니 이것을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룬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 성문화된 성경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있을까? 혹 있을 수 있다.
성문법대로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을 통과하려면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고통에 감염 동화되지 않고 죽으면서 이겨야 한다. 이것이 곧 불문법이다. 이것이 완전한 의다. 이래야 우리에게 칭의를 입힐 수 있다.
2. 무죄한 인간만이 가능.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을 통과하려면 무죄한 인간이라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원인과 같은 무죄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원인과 같은 무죄인으로서는 성문법은 통과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인 불문법을 통과하기에는, 만족을 이루어 드리기에는 불능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다 감각성이 있고 심적 혹은 육적 촉감성이 있기 때문에 죄와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인고로 이 구원사역을 인간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위해 도성인신 했다.
도성인신 하신 이 그리스도는 심적 육적 감각성이나 촉감성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일반인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이 똑같아서 모든 느끼는 면이 일반인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일반인보다 탁월한 점이 있다면 애정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애성의 극치성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지만 우리와 다른 점은 무죄성이니 이 무죄성이라는 말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이요 죄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 애성의 극치성이라는 말은 그의 사랑은 신적인 사랑, 발생적인 사랑, 근원적인 사랑의 소유자시라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인 불문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리기에는 불능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칭의는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려서 완전한 의를 이루신 사역인 것이다.
제四절. 중보의 필요성.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라는 구원사역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에 대해 아는 지식들은 단순히 우리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인줄 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떠한 형태로서든지, 혹 목석과 같은 형태이던지 금수와 같은 형태이던지 이런 것은 상관이 없이 단순히 천국입국만 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는 신인결합이다. 신인결합이 없이는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하게 천국입국만이 아니다. 천국입국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를 입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만일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즉 그리스도로부터 입어야 할 혜택을 입지 않고 천국에 입국한다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혜택을 입지 않은 것만큼 천국의 혜택도 입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 혜택도 입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천국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어서 무죄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대형을 입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의로운 자가 되는 이것을 칭의라고 하는데 이 의는 기본적인 의이다. 그리고 이 기본적 의를 입었으면 이제는 중복적으로 신의 성품을 충만하게(진하게) 덧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해 주신 것을 중보라고 하는데 이 중보가 없이는 신인결합이 있을 수 없고, 이 결합이 되지 않는 한 완전구원도 불가능하다. 신인결합으로써만이 구원은 완전히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단순하게 경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최고적으로 계획하신 것이니 이 구원의 궁극목적은 신과의 결합이요, 신과의 동일한 수준에 끌어오려 보좌만 차이가 있고 누리는 면과 느끼는 면은 하나님과 동등하도록 하게 하셨으니 이 구원사역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조물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격차를 두지 않고 조물주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당신과의 결합으로 최고의 행복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고자 하시는 그 목적이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
※ 우리의 구원은 단순하게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고 어떤 성질로, 어떤 성분으로 천국에 들어가느냐 하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천국이 좋아도 목석과 같은 자가 들어 갈 수 있느냐? 천국에서 천사들은 인격자요 우리는 그 이하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 천국입국이 구원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천국입국이 중요한 것만큼 대형 대행 대속 칭의도 중요하다. 또 신인결합성이 그 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 거대한 구원사역을 알게 될 때 이 일을 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느끼는 것이다. 예: 미국에 보내준다고 하면 미국에 가는 것은 좋지만 돼지 치게 하려고 데려간다고 해도 좋은가?
나를 보좌만 다르고 느낌이나 활동이나 누림이나 쾌감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과 똑같이 만들어 주기 위해 중보의 사역을 해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은 모든 고통을 얼마든지 물리치고 능가할 수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신인결합이 필요했던 것인가? 결합의 원리는 신이 인간수준에 내려와서 인간과 하나가 되고, 이 인간을 천국에 데리고 올라가 당신과 함께 뒹굴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중보는 왜 필요한가? 인간을 구원의 수준으로 올리기 위함이다.
무조건 ‘십일조 바쳐라, 주일 지켜라, 영광을 돌려라’ 하게 되면 왜 그것을 요구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게 된다. 무지가 죄가 된다.
一. 진리적 결합.
진리적 결합이라는 말은 진리를 통하여 결합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창조자시요 주권자시요 독권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진행하실 때 스스로 질서를 어기거나 이치를 어겨가면서 하지를 않으신다. 절대적으로 진리적이다. 그렇지만 법 아래서 준법이 아니고 성격적 성질적 준법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이 결합성은 진리로써 결합하는 것이니 단순하게 진리결합이라고 하는 것보다 그 진리대로 동작하므로 진리결합이 되어지는 것이다. 진리대로 동작하지 않고는 신인간에 진리결합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즉 신과 인간 사이에 진리로써 결합을 하는데는 그 진리로써 통한 자로만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 하나님께서 ‘지켜라’ 해 놓고 안 지킨 것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지킨 것이다. 법 아래서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원적으로 소원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진리적 결합에 있어서 인간은 아무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은 진리를 통한 공로가 있는 것이다.
二. 생명적 결합.
생명적 결합이라고 할 때의 생명이란 물론 자연생명은 아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단일생명이다.
생명적 결합이라는 말은 영의 생명으로 되어 있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단일생명의 줄을 던져 주니 우리 인간은 던져준 그 생명 줄을 붙잡으므로 생명적 결합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적 결합처럼 생명에 단절됨이 없이 활동한 그 인격으로써 우리와 생명적 결합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 생명적 결합은 생명을 결합시키는 중보자가 그 활동 면, 그 사역 면에 있어서 한 번이라도 생명에 단절성이 있으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생명결합을 하기 위해서 사역적으로 활동적으로 성질적으로 생명에 단절됨이 없으시다. 그 분의 이러한 사역으로써 생명적 결합이 되어지는 것이다.
※ 생명줄을 던져주기만 하면 결합이 된다면 구태여 중보가 필요가 없다. 이 중보자는 사역 하나 하나마다 하나님과 진리와 생명과 끊어짐이 있으면 결합이 불가능하다.
이 일을 하신 분은 한 분밖에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생명으로 연결시켜주기 위해서 하나님과 끊어짐이 없이 걸어간 것이다. 이것을 완전사라고 하는 것이다.
三. 능력적 결합.
여기서 결합이라는 말은 물론 기본적 결합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 기본적 결합을 함에 있어서 능력적 결합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능력이 미 중생한 영사(靈死)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그 사영자가 능력을 힘입어 중생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영자가 능력적으로 하나님과 결합이 되려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모든 사건을 한 번도 패배함이 없이 전부는 이기는 능력자가 결합을 시켜야만 되는 것이다. 만일 수많은 사건 중에, 혹은 투쟁 중에 작은 패배라도 있다면 능력적 결합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역을 마치기까지 한 번도 패함이 없는 능력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능력적 결합을 시켜주신 것이다.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 한 번도 패함이 없는 능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표면은 사람이지만 그 이면은 생명이다. 능력이다. 진리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간에 중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보기에는 사역이지만 그 속을 파헤쳐 보면 진리적 결합이요 능력적 결합이요 생명적 결합이다. 말 한 마디, 활동 모두는 결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속에는 모두 진액이다.
우리 인간은 단절 투성이라도 십 년 전의 자기를 쳐다보면 무엇인가 좀 달라지는 것이다.
보충능력과 기본능력은 다르다. 보충능력은 기본능력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지만 가룟유다와 같은 경우는 보충능력에 일시적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四. 인간이라야 인간과 결합할 수 있다.
이 결합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결합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셔서 인간과 직접 결합할 수는 없다. 인간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니면 인간과는 결합이 되지 않는다.
‘결합이라, 연결이라’ 할 때 물과 물은 결합이 될 수 있다. 열과 열은 결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결합을 하려면 신이 인간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인간과 결합을 하려면 그 구성요소나 성격이 완전히 인간이라야지 인간 비슷해도 안 된다. 또 인간이면서 인간 껍데기만 잠시 빌려 입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서 모든 면에 손색이 없는 인간이라야 인간과 흠이 없이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 구원하실 분이 인간이 아니면 인간과 결합이 되지 않는다. 수억만 명의 인간 속에 이런 인간 저런 인간이 있는데 완전한 인간이라야 한다.
1. 본질적으로 인간이라야 인간과 결합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에 그 육체만을 가지고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형적 물질적인 인간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인간이라야 한다.
본질적 인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이 따로 있고, 금수의 본질이 따로 있고, 나무의 본질이 따로 있듯이 각각의 종류대로 본질이 따로 있는데 인간 역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적 본래적 원인적 본질을 가진 인간이 타락을 하므로 죄악성이 보충이 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인간+죄악성=죄인이라고 말한다.
본질적인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기본적 본질까지 변질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의 본질에 죄악성이 입혀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본질과는 동질이다. 다만 우리 인간은 ‘인간의 본질성+죄악성=죄인’이 됐으나 예수님은 인간 본질 그대로다. 죄악성이 보태짐이 없다. 이 본질적인 인간이 아니면 본질적으로 인간과 결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죄인이 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으니 인간 원인 그대로 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를 입으니 인간의 본질에서 본성이 변한 것이 아니고 본질은 그대로 있으면서 예수님처럼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인간 대 인간으로써 결합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인간이라는 말이다.
※ 본질대로란 인간의 무죄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죄=본질이 바꾸어진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었다.
인간+죄=죄인+예수 그리스도의 대형을 입으니=원인+예수그리스도의 의=의인. 이래야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성화구원이 나온다.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 - 하나님과 결합상태를 말한다. 세상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천국은 신령천국과 직결이다. 천국은 본점이다.
마네킹이 사람이냐? 본질이 같아야 결합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라고 해서 신성이 제외된 것이 아니다.
2. 성격적 인간이라야 결합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결합하기 위해 성격적으로 인간과 다른 성격이 아니고 동질의 성격의 소유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말은 가범성 가사성 희로애락성 충동성 충격성 감각성 등을 일반인간과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고, 성격 역시도 일반인간과 똑같은 성격의 존재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반인간과 성격적으로 같지 않으면 합할 수가 없다. 즉 인간이 식물을 요구하는 성격을 가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식물을 요구하는 성격의 소유자이시다. 무화과 먹기를 좋아하고 인간이 먹는 떡과 고기를 잡수셨으니 그 모든 성격이 인간과 똑같은 동질의 성격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의 껍데기만 쓰고 있으면서 본질 면에나 성격 면에서 인간과 다르다고 하면 인간과 결합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그런 분이라면 예수님의 생애는 그렇게 위대하다고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성격상으로도 충동도 충격도 감화도 희로애락도 감각도 없는 존재라면 그 분의 세상살이에서 위대한 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일반인간과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물질계에 대해 초월한 것이 아니고 일반인간에 비해 월등한 성격을 가지고 이긴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렇게 위대하거나 놀라울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성격이 인간의 성격 그대로라야 인간과 성격적으로 결합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당신이 인간과 성격적 결합을 하시는 것은 인간의 그 성격을 신의 고상한 성격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 성격적 차이가 있으면 결합이 안 된다.
세상사람들은 서로 간의 화목을 위해 성격을 맞추고 모양도 맞추지만 우리 기독자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성격이 맞던 안 맞던 그런데 동화되지 말고 자타의 성격을 그리스도와 맞추어야 한다. 말씀의 도가 들어가고 만들어지면 억지가 아니고 자동적으로 되어 나온다.
3. 차원적 인간이라야 인간과 결합이 된다.
사람은 모든 사람의 차원이 동등이거나 동급의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전 인간을 총칭해서 볼 때 인간의 차원이 있다. 목석의 차원이 있고, 곤충들의 차원이 있고, 동물들 세계의 차원이 있고, 인간계의 차원이 있고, 신의 차원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원적 인간이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낮아지심이 목석같이 낮아지심이 아니고, 곤충이나 금수처럼 낮아지신 것이 아니고 인간차원으로 내려와서 인간차원에서 인간과 결합하여 인간을 신의 고차원의 세계로 끌어올리고자 하신다는 면에서의 말이다.
차원적 인간이 아니면 인간과 차원적으로 결합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신으로서 인간이 되셨는데 그의 인간 되심은 본질적으로 인간이요, 성격적으로 인간이요, 차원적으로 인간이었다. 그러면서 인간이 되셔서 그 인간차원으로 영원히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인간차원에 있는 인간을 당신과 결합시켜 인간을 고차원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사역을 하신 것이다.
※ 인간과 결합하기 위해 당신보다 낮은 차원인 인간으로 오셨다.
그리스도의 원 목적은 중보인데 중보완사의 결과 효력 효과가 무엇이냐? 곧 인간이 진리대로 능력대로 생명대로 살게 함이로되 단순하게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시킴만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은 차원의 절정의 느낌과 행복을 누리게 하려하심이다.
인간을 이런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본질적 인간이 아니면 안 되는고로 예수님께서는 본질적 인간이 되셔서 진리 생명 능력으로 걸어가신 것이다. 이것이 곧 구원이요 신앙이다.
五. 신이라야 신과 결합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이신고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길을 아예 다 막아버리던가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타락하지 아니했을 것이요, 인간이 타락치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인 그리스도로 오셔서 대속이라는 그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이라는 구원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대속이 필요한 그런 구원이 아니고 인간구원은 본래부터 칭의적 그리스도가 필요했고, 중보적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대속의 그리스도는 범죄하므로 필요하고, 칭의적 중보적 그리스도는 대속 이전에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진리적 연결상태로 있기는 했으나 이 연결은 만고 불변적 결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과는 성질적으로 다른 연결인 가범성적 연결이요 가사성적 연결이요 가절성적 연결이기 때문에 이 연결로써는 완전구원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의 중보적 결합으로 인한 이 연결은 불범성적 연결이요 불사성적 연결이요 확실한 연결이다. 그런고로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이런 그리스도가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앞 절에서 인간과의 이 연결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주셨다는 것을 말했는데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주지 아니했더라면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 본체가 없어지고 인간으로 되어 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제 이위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실 때에도 하나님의 본체는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체이신 하나님이 따로 있고, 제 이위이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각각의 하나님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물음은 물질을 벗어나지 못한 물질계를 연상하는 하나의 논법이다. 본체이신 일위의 하나님은 그대로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된 하나님은 그 본체로써 성육신을 하신 것이니 본체가 각체가 아닌 하나이면서 위만 다른 것뿐이다.
그리스도가 된 그 하나님은 본래적으로 제 이위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과 하나의 본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파생자가 아니고 유출자가 아니고 자존자요 영원자요 완전자요 무한자이시다. 이 하나님이 도성인신을 해서 인간과 결합을 했고, 또 본체의 하나님으로 계셨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과 결합을 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 함으로써 신성은 없어지고 완전한 인간으로 화해져 버린 것이 아니다. 잘못 생각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도성인신 하여 인간이 됐을 때 신성을 포기했거나 혹은 신성이 떠났거나 없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신성은 완전한 신성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또 인성은 인성대로 되어졌던 것이다.
인성을 입으심은 인간과 결합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요, 신성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신 것은 신과의 결합을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 그리스도가 인간성을 입었을 때에 신성이 떠나갔거나 신성이 없는 완전한 인성이라면 그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결합은 될 수 있으나 본체이신 하나님과의 결합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입고 인간이 됐을 때에도 신성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지 않고 신성 그대로 있다면 인간과 결합이 불능하고, 인성을 입고 신성을 버리던가 포기하던가 했더라면 하나님과 결합이 불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신인결합에 있어서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자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 대속 칭의 중보 이 세 가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개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만 이라면 속죄만 하면 된다. 만일 구원이 그렇게 단순 간단하다면 하나님도 인간도 고생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멸시 천대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하는 이런 고생을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선악과를 괜히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선악과를 안 지었더라면 인간이 오늘날 이 고생을 안 할 터인데 왜 이렇게 하신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범죄할 때 범죄하지 못하도록 봉쇄를 하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이런 저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설계를 잘못했는가?
범죄를 안 해도 그리스도의 칭의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칭의는 인간을 인간수준에 두지 않고 당신의 수준에 끌어올리기 위해서 필요했다. 구원계획은 칭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당신의 온전을 입혀주기 위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다.
끊어지지 않는 완전한 결합이다. 신부와 신랑의 결합이 제일 좋은 예이다. 인간과의 결합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인간과 결합을 시키려고 하니 칭의를 입히고, 인간을 하나님처럼 결합상태로 영원히 유지하게 하기 위해 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단순히 대속목적이 아니다. 칭의를 입히심은 당신과 같은 성질로 만들기 위함이다.
① 죄만 대속하기 위해 사람된 것이 아니고,
② 당신의 의를 입혀 본질과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올리려고,
③ 당신과 영원한 결합을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④ 신성을 버리고 사람이 됐다면 인간과의 결합은 되겠지만 하나님과의 결 합은 안 되니 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인간과 결합하여 인간수준에 있으려고가 아니고 하나님과 결합시켜 하나님과 같게 하려고 신으로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중보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교리이다.
1. 본질과 본성적인 신이 아니면 신과 결합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와 신과의 결합은 개체적 결합성이 아니고 본래적 원천적 결합성이다.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결합은 단절되었던 것을 결합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와 제 일위(본체)이신 신성과의 결합은 본래적 결합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으실 때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결합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재결합한 것이 아니다. 결합된 상태로써 인성을 입은 것이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양성 일위도 본래적 결합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했으니 이것이 곧 본래적 결합인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부정모혈의 생리법칙대로 출생했다면 본래는 단절이었지만 도중에 신성과 인성과의 결합이라는 논리를 펼 수 있으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에 끊어진 적이 없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과 끊어짐이 없고, 인성과 신성과도 끊어짐이 없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본질과 본성이 완전한 인간이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본질과 본성적 하나님이시다. 제 이위의 하나님과 제 일위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고 곧 본체는 하나이시나 위만 다르고 그 양 위가 각각 결합을 한 것이거나 각각 활동한 것이 아니고 본래적 결합적으로 역사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이 곧 본질과 본성적 신의 결합이다.
혹자들은 예수님이 인성을 입으므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서 이질성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이질성이 되면 신과의 결합은 어려운 것이다.
※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다’ 하면 그 인격성이 하나님이요, 본체가 하나님이요, 성질이 하나님이요, 성분이 하나님과 동질 동성이요,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과 다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이시다.
웟치마니는 옛사람과 새사람은 잘 갈라놓았지만 기독론, 죄론에는 어둡다.
오늘날 구속을 말할 때 주로 그리스도의 사역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출생을 심사할 것.(부정모혈이라면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속죄, 칭의, 중보의 필요성이다.
오늘날 속죄의 그리스도까지만 볼 줄 알았지 칭의와 중보의 그리스도는 어둡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② 우리를 하나님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갖기 위 해,
③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해서 인간이 하나님 수준에서 영원히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2. 도덕적으로 완전자이신 신이 아니면 신과 결합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임이 틀림없으나 인성을 입음으로 신성의 도덕성이 일반인간처럼 타락했거나 속화되었거나 변질되었거나 한 것은 아니다. 완전한 신성의 도덕성과 차이가 없는 도덕성이다.
(1) 인성을 입기 전의 제 이위이신 그리스도의 도덕성.
본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이 도덕성은 제 일위이신 신의 도덕성과 같은 도덕성이다. 인성을 입기 전에도 도덕적 신이시다.
(2) 인성을 입고 난 후의 신성의 도덕성.
그리스도께서 신인양성 일위로 인성을 입으셨을 때 신성의 도덕성이 인성의 어떤 영향을 받아 하락되거나 변질되지 않았다.
(3) 그리스도의 인성의 도덕성.
그리스도의 신성은 비 물질성이라서 물질과 접촉함이 없고 사망계와 상관이 없으므로 도덕성이 하락이나 변질이 없다 할지라도 그 분의 인성은 물질성이요 물질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물질과 접촉을 해야 했고, 물질의 혜택을 입어야 했는고로 타락된 존재와 접촉도 하고 유혹도 받게 되니 인성의 도덕성이 신성의 도덕성과 같을 수는 없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즉 그노시스주의 학설처럼 물질계악설을 주장하여 물질은 다 악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이 악한 물질과 접촉이 되면 접촉될 때마다 인간이 더러워진다고 보았다. 이런 논리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의 도덕성의 하락과 속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물질은 다 악이라고 하지만 물질 자체가 악일 수는 없다. 이 물질은 악에게 인용 당하기도 하고 선에게 인용 당하기도 한다. 성경에 말하기를 ‘우리의 육체는 병기와 같으니 육체가 죄에게 쓰임 받으면 죄의 병기가 되고 의에게 쓰임 받으면 의의 병기가 된다’고 했다.
물질은 전부 악하다고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의 인성도 물질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도 악하다는 이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육체는, 혹은 인성은 물질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결코 악은 아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인성의 도덕성이 하락이나 변질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4) 그리스도의 인격의 도덕성.
그리스도의 인격의 도덕성은 신성의 도덕성과 동질적 도덕성이다.
인격성과 신성은 양성이 분리는 되지만 도덕성은 분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의 모든 동작이 신성과 단절이 되거나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활동을 했다거나 개체적 대립적 충돌적으로 활동을 했다면 양성이 각각의 도덕성이 되겠으나 그리스도의 인성의 모든 동작은 신성과 양성 일위 결합으로 한 활동이었기 때문에 신인양성의 구별은 되지만 도덕성은 하나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신이시다.
※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라야 신과 결합이 된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신이라야 되고, 도덕성은 신적 도덕성이라야 된다. 예수님은 인성의 도덕성과 신성의 도덕성을 따로 가지신 것이 아니다. 이것을 성경이 뒷받침한다.(가나에서 어머니보고 ‘여자여’, 십자가상에서도 ‘여자여’) 인성은 신성에 피동 되어 계속 지배를 받았다.
양성이 구별은 되지만 활동의 도덕성은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도덕성은 하나다. 하나님과 도덕적 단일이다. 위만 다를 뿐 본체는 하나다.
십자가의 고통은 사역의 단일은 아니다. 활동은 단일. 신성에 피동.
3. 능력적으로 완전자이신 신이 아니면 신과의 결합은 불가능.
그리스도의 신성의 능력은 곧 성부의 능력이다. 신성의 능력과 성부의 능력은 각위적 능력이 아니고 단일능력이다. 단일능력이라는 말은 한 가지 일밖에 못한다는 말이 아니고 한 능력으로 각각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물이 피가 되게 하는 능력을 행했는데 애굽의 술객들도 같은 종류의 일을 했다. 그러나 이 때의 능력은 한(같은) 능력이 아니다. 즉 한 능력이 아니라도 표면적으로는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경신학자들 중에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모든 만물을 지었다’ 하는 이것을 가지고 창세기 1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천지를 지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을 때 손이나 발로 짓지 않고 말씀으로 지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로고스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되거나 발생된 말씀이라는 뜻이 아닌 완전하고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인 로고스를 말하는 것이다. 즉 이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모든 만물을 지었다는 말은 제 이위이신 로고스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말이니 만물을 지은 이 능력과, 성부 자체의 능력과, 또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는 이 능력들은 각각의 능력이냐, 한 능력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물을 피가 되게 하는 능력과, 애굽의 술객들이 행하는 능력이 사역의 종류는 같으나 한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능력은 사역은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한 능력이다. 같은 그 능력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한 것이고, 만물을 창조한 그 능력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자연계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적으로 완전하신 신이 아니면 신과의 결합을 할 수 없는 것이다.
※ 능력은 달라도 같은 사역을 할 수 있다. 사역이 같다고 해서 같은 능력으로 보면 안 된다.
능력을 심사할 때는 그 목적성을 분별하면 된다. 예수님의 능력과 술객들의 능력과는 그 목적이 다르다. 모세의 능력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목적이고, 술객들은 이스라엘을 애굽에 붙들어 놓는 목적이다.
단일능력이라 할 때 한 가지만이 아닌 여러 가지를 한다. 병자 고치는 능력과 만물을 창조한 능력은 한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신성의 능력과 인성의 능력이 있는데 인성의 능력은 신성에 피동 된다. 사도들의 능력도 같다.
예수님의 능력은 신인양성 결합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결합은 진리적 생명적 능력적 결합이다. 결합의 대상자는 인간인고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야 인간과 결합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과 결합한 것이다. 또한 인간을 하나님과 결합시켜야 하는 고로 신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六. 신성과 인성의 양성 일위의 결합이 아니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의 제재를 받음이 없이 모든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획하신 구원사역 목적으로 자연법과 도덕법과 일반법과 특수법을 마련하셨으니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치를 어겨가며 일을 하지는 않으심을 알 수 있다. 혹 자연법을 어기고 하시는 경우에는 자연법을 어기신 것이 아니고 당신은 초자연의 능력자, 만능의 능력자이심을 알려주심이다.
하나님은 자연법이나 혹은 도덕법이나 일반법이나 특수법 아래서 법의 제재를 받으며 활동을 하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자연법과 도덕법, 진리법과 생명법의 입법자이시므로 모든 법을 지배하는 신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 법을, 그 이치를 무시하며 어떤 일을 진행하시지는 않으신다. 즉 당신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법을 어겨가며 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의 중보적 결합운동도 꼭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중보를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굳이 이렇게 하심은 이치대로 하시다 보니 이런 중보역사를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물론 대속도 중요하고 칭의도 중요하나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도 중요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중보의 역할을 위해서는 신성으로 만도 안 되고 인성으로 만도 안 된다. 신성과 인성 양성 일위가 아니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결 혹은 접선이 능력적으로 어려운게 아니고 이치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결합도 신성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은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선행적으로 계획 완료해 놓으시고 여기에 적합한 존재를 물색 혹은 탐색을 하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신인 양성 일위의 존재인고로 이 사명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대속 칭의 결합으로 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이 대속과 칭의의 결합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는 자격자가 천상 천하에 아무도 없을 뿐 아니라 그 3직 중 한 부분만이라도 수행할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이 아니었더라도 인간의 대속과 칭의의 사역은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에 정복당함이 없으신 무형자이시고 완전하신 분인고로 대속의 자격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칭의의 사역도 가능했다. 즉 그는 인간으로서 일생동안 하나님에게 전적 피동 되어 신적인 의행으로만 살으셨기 때문에 일생동안 해 놓은 그의 의행으로써 당신의 택자들에게 그 의를 입혀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이 아니라 할지라도 대속과 칭의의 사명은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은 대속과 칭의로써만이 완사 되는 것이 아니고 신인결합이 되어야만 절대적으로 효력을 내는 것이다. 중보와 결합이 아니고는 신의 생명이 인간에게 건너와서 인간이 영원한 생존자요 인격자요 능력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속하고 칭의를 입혀주었다 할지라도 양성 일위의 결합으로써 중보역할을 하지 못했더라면 우리에게 영생이 있을 수 없고 결합이 될 수도 없다. 우리의 영생은 결합에서이다. 이 결합으로 인해 구원이 영원한 효력이 되는 것이다(영생).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이치를 깨닫고 나면 기독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해 신성 부인이나 완전한 인성 부인 따위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학자들 중에는 구원도리라는 대 원리를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거나 잠재해 둔 채 단순히 우리 인간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만을 보고 그 그리스도에 대해 ‘인성이냐, 신성이냐’를 연구하다 보니 혹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기도 하고, 혹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기도 하고, 또 혹자는 양성 각 위의 비 결합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고로 신학을 연구하는데는 근원부터 원인부터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이설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구원이라는 구원은 대속자도 필요하고 칭의도 필요하지만 그 외에 신과 인간과 연결을 시켜주는 중보의 그리스도의 필요성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과 인간과 연결시키는 이 그리스도는 인성만으로도 불가능하고, 신성만으로도 불가능하고, 일성 일위로도 불가능하고, 같은 성 각 위의 비 결합성도 불가능하고 다만 신성과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적인 존재자라야만이 중보자로서의 자격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자는
① 무죄성적인 인간이라야 되고,
② 그 일생을 하나님과 결합적 동화적 생애로 살아 신의 지공과 지성의 법 에 만족을 이루어 드린 분이라야 하고,
③ 신성과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적인 존재라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할 때 이상의 조건을 염두에 두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니 예수는 과연 그러한 분인가’ 하고 심사해야 한다. 이렇게 연구할 때 ‘과연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틀림없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 구원도리는 대속과 칭의, 그리고 하나님의 새생명이 건너와야 성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중보적 연결이라야 구세주의 자격자이다.(대속, 칭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무죄자이어야 하며 신성 인성 양성 일위의 결합자, 양성 일위자라야 중보 결합 구원이 된다. 연결을 못 시키면 구원이 아니다.
대형은 신의 도움이 없다. 대행도 신의 도움이 없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드려야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신인양성 결합은 중보에서.
1. 일성 일위로써는 불가능.
일반적인 모든 인간은 단순한 인격성을 가진 인성적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을 일성 일위의 존재라고 한다.
일성 일위이면 그 어떤 일면에만 접촉 혹은 결합이 가능하지만 신과 인간과의 양편 동시 결합은 불가능한 것이다. 양성 일위의 결합이라야 동시에 양편에 접선 결합이 되는 것이다.
(1) 인성으로서의 일성 일위.
일반인간은 일성 일위의 인격성만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될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되지 아니했더라면 예수님도 그 인격성이 일성 일위뿐이었을 것이다. 일위의 인격성으로는 아무리 온전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고 깨끗하게 살아도 신성과의 결합은 불능하다. 일위의 인격성은 아무리 깨끗하고 거룩해도 신성이 아닌고로 신성과 결합이 될 수 없다.
(2) 신성으로서의 일성 일위.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림 하시되 마리아의 몸에 잉태가 아닌 그냥 신성으로만 내려왔다고 하면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입었다 할지라도 이것은 자연법대로 입은 육체가 아닌고로 그 육체는 인성일 수 없다. 인성은 자연법 아래 생겨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성은 완전하게 자연법대로 생겨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가지기 위해 말씀으로 잉태했고, 인성을 입기 위해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된 것이다. 즉 구원이 불가능한 방법인 일성 일위가 아닌 양성 일위의 몸을 가지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신성으로서 일성 일위이시다. 우리 인간은 인격성으로서 일성 일위이다.
※ 일성 일위는 신성을 두고 말할 수도 있고, 인성을 두고 말할 수도 있다.
성부 하나님은 일성 일위로 신성 일위, 성령도 신성 일위, 예수님은 양성 일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정성을 들여 구원사역을 하시는 것이다.
2. 이성 이위로써는 불가능.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강조하다 보니 인성을 부인하게 되는 자가 있고, 또는 신성 일위만 고조하는 자가 있고, 그런가 하면 신성을 반박하다가 인성을 부인하는 자도 있고, 인성을 반박하다가 신성을 부인하는 자도 있다. 또는 이 양론을 다 반박하며 양성을 긍정하다 보니 이성 이위를 주장하는 자도 있다. 이들은 ‘신성과 인성이 다른데 어떻게 일위가 될 수 있느냐’ 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성 이위로 보는 것이다. 양성 이위를 주장하는 자들의 요지는 ‘신성과 인성 각 성이 어떻게 일위의 결합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구원도리를 알지 못해서 하는 말이요, 구원도리는 제외하고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이냐, 인성이냐’ 하는 그 문제에만 치우치다 보니 이런 변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다른 모든 신학을 연구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기독론을 연구할 때 말 그대로 ‘기독=그리스도’ 이니 그리스도라는 그 존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왜 필요했는가’ 하는 거기서부터 생각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양성 이위의 주장은 할 수 없고 양성 일위가 확실하게 믿어지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라스틱주의 그노시스주의 - 물질은 전부 악이다.
(1) 각 성 각 위가 되면 결합은 불가능.
신성과 인성은 각각의 위인데 예수님께서 이 양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위가 일위가 아닌 이위라고 하면 결합은 불능하다.
혹 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양성은 믿지만 일위성을 믿지 못하고 양성 이위성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양성 이위를 주장하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입고 세상에 와서 존재할 때 인성은 인성대로 작용했고 신성은 신성대로 각 성 각 위의 작용을 했다고 주장하게 되니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인성만 십자가에 달려 있고 신성은 떠나가 버렸다고 하는 이단설이 나오게 된다.
예수님께서 행동하실 때 모든 일을 인성이 했으나 인성이 그 활동을 할 때에 신성과 별개로 활동하지도 않았고, 또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적인 것을 통과할 때에는 신성의 협조를 입어 인성이 힘 안 들이고 고통도 당하지 않고 느낌도 없이 쉽게 한 것은 아니다.
인성이 신성과 결합이 되어 있으면서 모든 사역에 있어서 신성이 주격이 된 것뿐이지 실질적으로 인성이 다 한 것이다. 마치 우리 기독자가 어떤 일을 할 때 성령의 감화 감동에 의해 한다고 해서 인간의 활동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일을 할 때의 수고나 어려움이나 고통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 최선의 힘을 다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인성의 활동이 그러했던 것이다.
우리 기독자는 성령과 결합되어 있는 중생된 영이 주격이 되어 이성과 몸이 그 영에게 피동 되어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활동할 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초능력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러나 대개는 그 모든 감각성이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신 활동이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통 중에도 신인양성의 결합성이 이성 이위 각 성 각 위로 나누어짐이 없이 영원히 계속 지속했으니 그의 인격성의 활동은 완전한 인격성으로써 통과한 것이다.
혹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인격성은(여기서는 느낌) 떠나고 신성으로 달렸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양발과 양손에 못을 박았으나 아픔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우리가 믿을 수 없다. 또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인성이 신성에게 완전히 삼켜버렸기 때문에 고통이 없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부당하다. 예수님은 끝까지 양성 일위였지 각 성 각 위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있으면서 신성이 떠난 것도 아니고, 인성이 떠난 것도 아니고, 또 인성이 신성에게 삼킨 바 된 것도 아니다. 다만 신성은 주격성으로 있고 인성은 소유격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당신의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애정성과 지정성의 극치가 이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때가 예수님의 애성이 그 어떤 때보다 극치적이었고 지정성도 그 어느 때보다 이 때가 가장 극치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성 이위는 용납할 수 없고 양성 일위의 결합성을 안 믿을 수 없다.
(2) 양성 일위의 정통설.
이미 양성 일위의 결합에 대해 말을 했지만 양성이란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신성이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파생체나 유출체나 발생체가 아니고 본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런고로 그의 양성 중에 신성은 자존자요 영존자요 완전자이시다. 그러나 한편 인성은 자존자도 아니고 완전자도 아니고 절대자도 아닌 피조물이다.
혹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체의 피조설을 부인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육체는 피조물임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의 태중에 있을 때 탯줄이 있었고, 그 탯줄로써 마리아가 먹은 양분을 먹어 성장했고, 또 생후에는 마리아의 젓을 먹고 물질을 먹고 생존했다. 그런고로 그는 완전한 인성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과 똑같이 영원성 자존성 완전성 절대성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그런고로 양성이라고 할 때 신성에 대해서는 그의 본체이신 하나님과 하나인 신성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인성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인간의 인성과 똑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의 인성은 자연법 아래 존재해야만 했던 것이다. 다만 우리와 다른 것은 죄에 정복되지 않고 감염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양성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하니 예수님이 양성이라고 해서 이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혹 말할 때 성부는 일위요, 성령은 삼위요, 성자는 이위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위라고 하는 말은 서열적 순서적으로 하는 말이다.
제 일위이신 성부도 한 위요, 제 이위이신 성자도 한 위요, 제 삼위이신 성령도 한 위이시니 예수님께서 양성 일위라는 말은 사역적인 면으로 볼 때 신성이 주격이 되고 인성은 신성의 소유격이 되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었다 할지라도 이위가 될 수 없고 그는 영원히 한 위이시다. 그는 인성을 입기 전에도 제 이위이신 한 위요,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영원히 한 위시요, 이와 같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활동을 하고 계실 때에도 한 위이셨다.
(3) 결합.
이 결합이라는 말은 양성 각 위의 결합을 말하는게 아니고 양성 일위의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양성 일위의 결합에 대해 말할 때 신성과 인성의 분계선을 분명히 그어서 어디까지는 인성이고 어디까지는 신성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물체가 끊어진 것을 이어 놓는, 즉 A물질과 B물질을 연결시켜 놓은 것과 같은 뜻으로 결합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신성과 인성의 양성 일위의 결합성이란 그런 뜻이라기보다 분리할 수 없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 양성 일위의 결합이 중요하다.
(4) 양성 일위로만 가함.
그리스도의 양성에서 신성은 하나님의 본체와 동일하다고 이미 말한 바가 있는데 이 신성은 본체에서 파생되어 나와 인성을 입기 위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본체는 하나이시다’ 하는 그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고 있을 때에도 그 신성은 본체를 떠나 별개체인 제 이체가 되어 인성과 결합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양성 일위라는 말을 잘못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본체와의 분리성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성 일위의 교리를 깨닫고자 할 때 그리스도의 양성 중에 비 물질인 신성은 인간의 육신인 인성을 입었어도 여전히 본체와 단일성의 하나라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이것을 잊게 되면 유일신의 하나님이 아니고 두 분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또 양성 일위라 할 때 하나님이 인성을 입었다고 해서 본체이신 하나님은 없어져 버렸다는 말도 아니다. 본체는 변함없이 본체로 계시고, 그 본체이신 하나님이 위만 다른 인성을 입었으니 그 일위이신 하나님이 인격성과 결합하여 중보의 사명을 다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자 혹은 택자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은 만고불변의 구원이다.
이 구원을 입은 인간이 구원을 얻은 후에 신화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성이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버린다거나, 하나님이 신이 아닐 수도 있다거나, 인간이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신이 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이 영원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신으로 영원하시고,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영원하다. 신의 영원과 인간의 영원 사이에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도 불변으로 영원하시다.
※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세상에 내려와서 인간을 전부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의 그 중보성은 33년 동안 만인가? 아니다. 이것은 영원적이다. 임시성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히 인간이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五절. 영원 불변적 변화 부활의 필요성.
혹자들은 말하기를 우리 인간의 구원은 영혼만 구원을 얻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영혼구원만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일시적이고, 그리고 또 인간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전체 인류에게 해당되는 사실도 아니다. 즉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한 신령계로 가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다만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모든 인간(중생한 자)의 부활이 선후에 차서가 없이 동시에 부활을 하기 때문에 부활 전에 미리 죽은 자들은 부활할 때까지 흙(땅)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가 흙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라기보다 땅에서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땅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자들도 있지만 에녹과 엘리야는 그 육체가 땅에서 기다림이 없이 영과 함께 승천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시에 생존하고 있는 성도들은 땅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이 그 때 바로 부활하여, 혹은 변화하여 예수님과 함께 공중으로 휴거하여 신령계로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렇게 오묘하게 설계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성도는 영혼만 구원을 얻고 육체는 구원 얻지 못한 채 썩어 흙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영혼의 구원이 중요한 것만큼 우리 육체의 구원도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영혼의 구원은 이미 말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고 칭의를 입고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중생해서 찰나적 단회적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고, 완성된 이 영혼의 구원은 그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성장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육체의 완전구원은 부활로 볼 수 있는데 부활이 올 때까지 육체를 성화시키고 감염시키며 부활의 때를 기다리다가 부활함으로써 육체의 구원은 종결되는 것이다. 즉 영혼의 구원은 완전에서 시작하여 성장되어 가는 것이고, 육체의 구원은 영혼구원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성화되어 부활에서 끝을 맺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이 중요한 것만큼 육체의 부활구원도 중요한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사역을 아니했더라면 우리 육체의 부활구원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구원을 얻지 못한 채 영혼구원만 얻어 육은 영원히 흙으로 돌아가 버린다고 하면 인간의 구원을 완전구원으로 보기 힘들다. 자기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 있고 육체는 멸망을 받아 썩어 흙으로 있다고 하면 물론 육신이 죽어 썩어 흙이 돼서 인격도 의식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완전구원의 이론상 불합리하다. 그런고로 우리는 구원을 볼 때 영육구원으로 보아야 한다.
영혼의 구원은 사죄 칭의 중보 새생명으로 구원을 얻고, 우리의 육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어 부활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니 이것을 영육의 완전구원으로 보아야 한다.
또 영은 찰나적 단회적으로 사죄 칭의 중보 새생명 중생으로 구원을 얻어 그 이후부터 계속적으로 성장해 나가야 하니 이 성장은 도덕적 성장, 지혜지식적 성장, 능력적 성장으로 영육이 분리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성장되어 나가야 하고, 또 육은 부활이 올 때까지 성화되고 감염되어야 하니 이를 위해 연관구원 혹은 건설구원을 단회적 찰나적인 부활로써 구원이 완성될 때가지 부절이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
이것을 구별하면 1차적으로는 영혼의 기본구원이요, 둘째로는 영혼의 성장구원이요, 셋째로는 육의 성화 건설구원이요, 넷째로는 부활 완전구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구원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혹자들은 기독자의 구원을 단순히 영혼구원만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던지 한평생 살다가 죽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영혼만 천국에 가면 다 인줄 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구원을 상세히 볼 때 우리의 영혼구원에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뿐만 아니라 우리 육의 구원에까지 그리스도는 절대로 필요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종류와 구원의 방편을 혹은 성격을 알지 못하고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흔히 알기로는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죽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만 본다면 그리스도는 안 죽어도 될 죽음을 죽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그리스도의 사활은 적들이 죽였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라고 계시치 않고 우리의 영혼구원을 위해 필연코 죽어야만 했고 부활해야만 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이지 아니했더라면 우리의 영혼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안 죽어도 될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고 안 죽으면 안될 죽음을 죽은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원수들은 자기들이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완전을 위해 죽여준 셈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 않았더라면 부활이 없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 성도의 육체의 부활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기 때문에 부활을 시킨 것이 아니고 우리의 부활을 위해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부활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다.
이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이 죽음을 죽을 수 없고, 이 죽음을 죽지 않고는 이 부활을 할 수 없고, 이 부활을 하지 못했더라면 우리 육체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런고로 우리의 육체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처럼 필요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우리의 몸은 썩을 육체이기 때문에 아무렇게 해도 되느냐? 안 된다. 우리 기독자의 구원은 영혼구원만이 아니고 육체의 구원도 중요한 것이다.
양면적 구원이니 영혼구원은 단회적 찰나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 칭의 중보 새생명으로 되는 것이고, 성장구원은 단회적 찰나적이 아니고 자연생명이 다하기까지 점차적인 구원이다. 이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그냥 두면 안 된다. 물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
옛사람 새사람.(엡4:22-24) 중생치 못한 사람에게는 새사람이 없다.
고전3:16 - 영이 한 번 중생 후는 네 몸은 성령의 전이다.
중생시켜 놓은 성령은 나가지 않는다. 진리와 영감으로 결합이다.
영 자체는 계속 작용이다. 그러나 영은 강제적으로 못한다. 이성은 자유이므로 영을 잡을 수도 있고 육을 잡을 수도 있다. 영은 강제권을 못 쓰고 양심에다 말하고 있다. 이성이 양심과 영과 끊어지는 찰나 옛사람과 손을 잡는다. 중생한 사람은 항상 옛사람이 아니면 영이다.
벧후 2:11 -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 영혼을 거스리는 이것은 영혼이 아니다.
이성이 없이는 영의 작용을 느끼지 못한다. 영의 작용은 하나님의 소원성이다. 외부로써 육을 통해 때린다. 옛사람은 고깃덩어리 편안하게 지내자! 이성이 결정권을 내린다. 이것을 인격으로 보는 것이다.
영의 구원은 중생과 성장, 육의 구원은 성화와 변화와 부활.
一. 부활의 개념.
우리 인간은 영육이 영원히 존재한다. 육을 임시적인 존재라고 볼 수 없다. 영도 육도 영원한 존재임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영은 영원이요 육은 임시라고 하는 이것은 육의 존재성이 임시라는 말이 아니고 비 부활적 생명, 비 변화적인 생명으로 누리고 느낌이 임시라는 말이다. 우리의 영은 중생하기 이전에는 존재적으로는 실존하고 있으나 활동적 작용적으로는 죽어 있는 것이다.
혹자들은 영이 미 중생한 자들의 비 물질적 정신적 작용을 영의 작용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이성의 작용이다. 영의 작용은 그 작용 성격이 전체가 신적이요 신령적이요 천국적이요 진리적이다.
영이 중생하지 않고는 참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부를 수도 없고, 천국을 사모할 수도 없다. 그러나 죽은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게 되면 그 영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적이요 신령적이요 영원적이요 천국적이요 진리적인 작용을 한다. 미 중생자들도 정신작용인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무형행인 그 심행은 신적이 아니요 신령적이 아니요 천국적이 아니다.
중생 이전에는 영은 비 작용상태에서 살았기 때문에 활동적으로나 작용적으로 볼 때 영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생됨으로 영의 존재성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도 세상에 생존하다가 사선을 넘고 나면 일시적으로 육체가 없는 것 같으나 부활 후에는 육체의 존재성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순 영과 부활체인 신령체와의 다른 점은 순 영은 비 물질인고로 사람의 눈에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한 영체는 보여질 수도 있고 안 보여질 수도 있고, 만져지기도 하고 안 만져지기도 하고, 시공간의 제한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하고, 음식물을 흡수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어떤 장애물의 제재를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으니 이것은 비 부활체인 육체와도 다르고 순 영과도 다른 점이다. 그런고로 우리의 육체라는 육체는 영의 구원을 얻은 자에 한해서 필연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어 부활해서 육체의 구원을 입게 되는 것이다.
※ 1. 부활 안한 육체: 시공간의 제한을 받음. 만져짐.
2. 부활한 육체: 초월적 존재. 만져지기도, 안 만져지기도.
3. 영: 보여지지 않는 비 물질.
4. 부활한 육체: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있다.
사람이라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부활한다.
1. 생명적 부활: 구원을 이룬 것을 누리기 위하여.
2. 사망적 부활: 심판의 부활.
사망자의 부활도 그리스도의 권능이 필요하다.
1. 불신자의 부활.
불신자도 이 세상살이를 다 한 후에는 신자처럼 죽음의 선을 넘는다. 성경대로 보면 신자의 부활은 선행하고 불신자의 부활은 후행한다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모든 신자는 부활하지만 불신자는 그 때 부활하지 못하고 천 년을 더 기다렸다가 천 년 후에 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한다고 되어 있으니 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한 부활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지 못한 부활이기 때문에 인간을 멸망케 했던 죄악성 타락성 고통성 전부가 제거되지 못한 채 그대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불신자도 부활해야 할 것은 인간은 이 물질계에서 영원히 존재할 자가 아닌 물질계가 끝이 날 때 비 물질계로 가서 영원히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육체가 비 물질적인 육체로 부활 혹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신자도 이미 죽은 자는 죽은 후에 최후 심판 때까지 땅에 대기하고 있다가 부활을 하고, 그 때까지 죽지 않고 있던 자들은 죽음을 통과치 않고 살아 있는 그대로 사망의 부활을 하게 되는데 물질의 생명체는 비 물질의 생명체로 변해지지만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의 권능을 입지 못한 연고로 죄악성과 고통을 제거하지 못한 채 부활한다. 그런고로 그는 영원히 고통을 느끼게 되고 고통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학자들은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밑에서 위로 쳐다본 것. 뿌리를 인간에게 두고 전개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적 신적 계시를 오해하게 된다.
단순히 형벌감당이라면 타락을 했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논리가 나온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단일성을 입기 위해서는 타락 전이라도 그리스도의 구속이 꼭 필요하다. 타락치 않았더라면 신성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모두 예정적이요 설계적이니 죽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고 부활은 필연코 필요하다. 우리의 부활이 절대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예정된 순서 중에 하나이다.
진리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철학은 인간에서부터.
① 그리스도의 부활.
↓
② 성도의 부활.
↓
③ 불신자의 부활.
이렇게 부활은 순서적으로 이론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보를 두고 말할 때, 인간의 영원성을 두고 말할 때는
① 영만.
② 육만이 아니고.
③ 실지로 영육이 아울러 영원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영원한 존재로 지었는데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이 없었더라면 영은 구원을 얻는다고 해도 육은 부활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영육부활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을 입지 못한 자는 사망의 부활이다. 나도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입지 못했다면 그와 같을 수밖에 없다.
2. 신자의 부활.
이 부활이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독특하게 사용하는 용어인데 이것은 재생이나 환생과는 달리 말 그대로 부활이다.
부활이라는 말은 물질은 물질대로, 비 물질은 비 물질대로 본래대로 환생한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이 본래는 물질성과 비 물질성으로, 혹은 영과 육이 결합된 자로 존재하고 있었으나 물질과 비 물질의 결합이 아닌 물질적인 것을 비 물질성으로, 육체는 영체로 영원 불변적인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부활이란 기독교의 전문적인 용어이다.
재생은: 본래대로 살아나는 것.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환생은: 그 인격체 그 육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 불교의 윤회설 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윤회는: 죽었다가 딴 것으로 태어나는 것.
환생은: 죽었다가 누구의 집에 태어난다는 것.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집에 태어난다는 것.
부활은: 영육 결합도 아니고, 물질과 비 물질의 결합도 아닌 육체가 완전히 영체로 변해지는 것이다.
(1) 피동적 부활.
신자의 부활은 피동적 부활이지만 불신자의 경우는 수동적 부활이다.
수동적 부활이란 자력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또 어떤 부활의 권능을 입어서 부활하는 것도 아닌 타력이 부활을 시켜 주니 부활을 받는 것이다.
불신자는 자체적으로 부활할 능력이 없고, 또 자기를 부활시켜 줄 수 있는 객관의 능력을 입지도 못하므로 다만 타력이 부활을 하게 해 주어야만 부활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자신이 부활을 하고 안 하고의 자유성도 권리도 능력도 없는 것이다. 이들은 영원히 사망을 누릴 것을 생각하면 부활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자의 부활은 수동적 부활이 아니고 피동적 부활이니 피동적 부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음으로써 부활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간도 부활은 불능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을 위한 부활의 첫 열매요, 부활의 권능이요, 모든 성도들에게 입혀줄 부활의 기본이다. 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으므로 결합적으로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자력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으면 마치 자력으로 부활을 하는 것처럼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불신자의 부활은 수동적 부활. 살려 일으켜 줌으로써 된다. 신자의 부활은 피동적 부활
입는 것에는 세 가지.
① 그리스도의 구속.(중생)
②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진리와 영감으로 유기적)
③ 부활의 권능을 입고.(필연적으로)
(2) 사자(死者)들의 동시 부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출생에 선후의 차서가 있고, 이 세상에서 생존하다 죽는 것도 동시가 아니고 선후의 차서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출생의 순서대로 죽음의 순서가 나열되지는 않는다. 출생의 순서가 따로 있고, 죽음의 순서가 따로 있다. 그러나 부활은 기독자에 한해서는 전 인류가 동시성이다. 아무리 죽음의 순서가 선행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의 부활은 동시이다. 이는 부활의 권능을 출생 당시에나 중생 당시에나 사시(死時)에 입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자가 동시에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기독자의 부활이 왜 동시냐? 예수님의 부활을 입는 것이 동시이기 때문이다.
기본구원에 동등, 신자권(神子權)에 동등, 영생권에 동등, 자유성에 동등. 하지만 차등 격차 차서가 있다. 출생에 차서, 능력적 실력적 차등, 성화구원의 차등, 활동적 치리권에 차등, 영광에 차등.
(3) 생자(生者)들의 부활도 동시.(살전4:)
예수님께서 지상에 재림하실 때 생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공로와 권능을 입어 부활할 때 일단 죽어서 부활의 권능을 입고 부활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고 사자(死者)들은 사자들대로 부활의 권능을 입고 부활을 하게 되고, 생자들은 죽음이 없이 산 상태 그대로 부활의 권능을 입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 이전에는 생자와 사자가 전혀 다른 모양으로 있다. 사자들은 영육이 분리된 상태로 있고, 또 사자들의 육체는 자연생명이 떠났거나 혹은 부패되었거나 혹은 흙으로 변해 버렸거나 흙도 없이 원소로 돌아가고 말았거나 한 상태로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기만 하면 이것은 다 영체로 변해진다. 그러나 생자들은 부활의 권능을 입기 전에는 육의 자연생명이 영육 결합체로 있다가 부활 즉시로 영체로 변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생자나 사자나 다 부활의 권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고로 부활의 권능을 입기 전에는 생자와 사자는 이렇게 엄청나게 차별이 있으니 사자들의 육체는 사망에 머물고 있고 영혼은 천국에 가 있고, 생자들은 그 육체가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고 영은 천국에 못 가고 그 육체와 함께 머물고 있다가 영체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자의 부활이란 이렇게 신비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공로가 없었더라면 우리 기독자의 이 신비스러운 부활의 가치와 영광은 없을 것이니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대속에서만이 아니고, 칭의에서만이 아니고, 중보에서만이 아니고 부활에 있어서도 이렇게 필요함을 알 수 있다.
※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미래적으로 입고 중생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활은 미래적으로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예: 엘리야 에녹의 부활. 모세의 시체도 찾다가 못 찾았다.
죽은 자는 자연생명이 없다. 감각성이 없다. 분리된 상태이다. 생자는 자연생명이 있다. 감각성이 있다. 영육 결합체이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육을 입고 있는 자는 육에 속한 것은 다 빠져버린다. 그리고 일인격의 단일체 영체로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결과를 탄생키 위해 자원적으로 죽으셨다. 예수님은 죽음에도 손해가 없고 전부는 수입이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에 만족, 칭의 부활에 만족 수입이다.
二. 예수의 부활.
세상에는 불의, 불행의 죽음이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므로 부활했다고 보고 있다.
학적인 면에서 연구해 볼 때 이 이론이 타당성이 있으나 사실은 이것과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거기서 이루어진 결과성을 볼 때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적 불행의 죽음도 아니고 죽었기에 부활이 아닌 부활을 위해 죽으셨으니 이렇게 죽으심은 다양적인 목적에서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활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이 있으나 우리는 잡다한 이론과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로 하고 그 부활을 우리 일반인간의 부활과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기독자의 부활과는 가치관이나 목적성이나 능력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으나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과는 가치적으로 차이가 있고, 방편적 차이가 있고, 능력적으로 차이가 있다.
※ 방편: 예수님의 부활은 능동적 부활, 우리의 부활은 피동적 부활이다.
1. 예수님의 부활은 단독적 부활이다.
모든 사람들은 사자는 사자들대로 동시에 부활의 권능을 입고 부활을 하고, 생자들은 생자들대로 부활의 권능을 입고 동시에 부활을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 홀로 단독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어떤 객관이 부활의 공로를 입혀줌으로써 하는 부활이 아니다. 이 부활은 당신이 자원적으로 자유의사대로 한 부활이기 때문에 단독적 부활이다.
2. 능동적 부활이다.
다른 모든 존재들은 생명의 부활을 할 때 객관에 의해 부활의 공로를 입고 부활을 하게 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수동적 부활도 아니고 피동적 부활도 아닌 능동적 부활이다.
예수님은 죽음도 자유성을 가진 자유적 자원적 죽음이다. 예수님은 생사의 자유가 있고, 생사의 권리가 있고, 생사의 능력이 있다. 이와 같이 부활에 있어서도 자유와 권리와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그 죽음이 자신이 죄에게 속박되어 죄에게 끌려 사망에로 갔기 때문에 죽은 죽음이므로 이 죽음은 자유의 죽음이 아니요 죄의 속박 아래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 죄값을 지불하기 전에는 죽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인데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인고로 그 죽음에서 자유적으로 자원적으로 벗어져 나갈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예수님을 사망계로 끌고 가지를 못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망계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원적으로 자유적으로 사망계에 뛰어들어 죽은 죽음인 것이다. 죄에 포박된 자가 아니고 인간구출 목적으로 자원적으로 사망계로 들어온 자이기 때문에 죄와 사망이 강압적으로 죄 아래로 포박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망 안에서도 자유 했다. 즉 예수님은 어떤 죄에게도 속박성이 없기 때문에 사망계와 생명계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자원적으로 죽으셨으니 그 죽음은 죄와 사망 아래 강제적으로 속박 포박되어 죽은 죽음이 아니었던고로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사망에서 뛰쳐나와 부활체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이 사망에로 들어간 것 역시 그 사망계를 이겨 정복하기 위해 자원적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능동적 부활이다.
※ 예수님의 부활과 인간들의 부활과는 그 자체가 다르다. 불신자들은 죽고 사는 문제의 자유가 없고, 부활도 하고 안 하고의 자유도 없다. 오직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만이 부활을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입힐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나온다.
① 예수님의 부활.
② 신자의 부활.
③ 불신자의 부활이 같을 수는 없다.
부활은 이렇게 다양한 것이다.
3. 부활을 위한 자원적 사.(死)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죽음과는 다른 죽음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운명 시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며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났다. 예수님은 그 영혼이 떠남과 동시에 신체에 작용하던 모든 것은 다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영육이 분리가 됐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영육은 완전 분리가 됐지만 그의 신성과 인성은 주격성인 영혼과는 완전 분리가 아니고 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죽으심은 이런 상태로서 완전한 죽음이었다.
혹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순간적 기절이라고 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말을 인정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영이 죽은 육체로부터 완전 분리요, 육체에 머물고 있던 자연생명도 육체로부터 완전 분리이니 육체를 중심해서 작용하는 이성도 본능도 감각도 모두는 분리 혹은 중단이었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요, 부활이 없었다면 성도의 생명의 부활도 없을 것이고, 산 성도의 신령한 영체의 변화의 부활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고 부활을 전제로 하고 부활을 위해 자원적으로 죽으신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전혀 다르다.
4. 타를 위해 사활(死活).
일반인간들은 그 죽음이 타를 위한 죽음이 아니다. 또 부활 역시도 인간은 죽었기 때문에 부활을 하는 것이고, 죽었기 때문에 부활이 필요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죽었기 때문에가 아닌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사활을 위한 죽음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은 방편이 다르다.
방편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자원적 자유적 능동적 부활이요, 기독자의 부활은 피동적 부활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타를 위한 부활이요 일반사람들의 부활은 자기를 위한 부활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 그리고 비 성도의 부활은 엄청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목적이 뚜렷하고 가치가 다르다. 방편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치가 따로 있는 것이요, 예수님의 그 부활이 우리 기독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복잡 다단하게 해야만 했던가? 그 속에 택자와 불택자, 그리고 성도의 다양적 누림의 느낌의 활동의 실력의 차등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정성 공평성이다.
三. 부활의 권능.
성경에 바울을 통하여 부활의 권능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부활의 권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켜 놓은 이 부활의 권능은 과연 어떤 권능을 가졌는가? 이 권능을 입게 되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권능의 소유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은 능동적인 권능이요, 우리는 수동적인 권능인데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차이만 있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과 우리의 부활의 권능이 본질과 본성에 차이가 없다. 이 부활의 권능이란 신적 초자연적인 권능인데 모든 택자들에게 이 권능을 입히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일반세상에서 능력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고 있고, 성경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대개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할 때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자연계의 능력의 압박을 벗어나고 제재를 벗어나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연계에 소속되어 있는 인간은 불가불 자연의 능력에 압박을 당하고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다. 자연계에서 존재하고 있는 일반존재들은 자연법칙인 자연의 능력에 항거하지 못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아홍수 때 사람들이 죽음을 싫어했으나 자연의 능력이 밀려올 때 그들은 항거하지 못하고 그 자연의 능력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 홍수의 심판은 자연의 법칙이나 자연의 능력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또 소돔 고모라성의 유황불의 죽음은 신의 특수활동에 의한 역사에 항거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 수 있고, 홍해의 물에 애굽의 군대가 몰사한 것 역시 자연의 능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인간 개개인이나 단체나 전 인류는 다 자연의 힘 앞에 굴복을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유럽이나 중동지역에서 옛날에 인류들이 살다가 간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인간의 과학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 인간들이 수십 수백 년 기간동안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건설한 모든 것들이 자연의 힘이 한 번씩 심술을 부릴 때엔 인간은 그 자연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음을 볼 수 있다. 옛날 인간들이 쌓아 놓은 성터나 탑이나 교량 등은 자연의 힘이 한 번씩 쓸어 가면 여지없이 파괴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곤충은 곤충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전부 다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극히 작은 식물이라도 반석이나 대지를 갈라놓는 능력이 있고, 또 작은 곤충이라도 거대한 나무를 갉아먹어 죽게 하는 힘이 있고, 그런가 하면 그 곤충을 엄습해 잡아먹는 새가 있고, 또 그 조류를 잡아먹는 짐승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많은 능력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능력을 자랑하는 자가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자연계에서 비상한 힘을 가졌다 할지라도 자연의 힘 앞에서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만다. 그런고로 이 자연계에 살고 있는 인생은 자연의 능력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자연의 힘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해 있는 인생으로서 누구나 다 당하는 생로병사 역시 자연의 능력이니 인간은 이 자연의 능력에 의해 오는 노쇠를 막을 수 없고, 가는 시간을 잡을 수 없고, 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이것은 인간이 자연의 힘에 속박되어 있는 연고이다. 부활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 자연의 힘을 감히 벗어날 수 없다.
※ 인간은 만물의 최고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자연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인간에게 과학의 힘이나 그 어떤 능력이 있다 해도 노아홍수 때 자연의 능력에 의해 다 죽고 만 것이다. 아무리 자기 목숨을 안 뺏기려고 해도 항거할 수 없다. 또한 소돔 고모라성도 유황불에 땅이 꺼져 사해바다가 되었다. 폼페이는 화산이 터져 도시가 대파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교량이라도 자연의 힘에 의해 무너진다. 인간은 자연의 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끼가 바위를 자르고, 작은 벌레가 큰 나무를 죽이고, 그 위에 또 새가... 모두는 자연의 힘에 굴복을 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이 자연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가? 인간의 힘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한다.
부활의 능력은 자연의 법과 능력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부활을 하셨으므로 부활의 능력을 가지진 것이다.(능동적) 우리는 수동적이다. 자연의 능력을, 범위를, 속박을, 압력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부활의 능력이다.
1. 죽음을 벗어나는 능력.
이 부활의 능력은 인간이 사망권을 벗어나는 능력이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음이라는 것을 앞에 놓고 사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예정적으로 철학적으로 숙명적으로 출생했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죽음이 뒤따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출생만 있고 죽음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필연적으로 죽음에 굴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이다. 부활의 능력이란 이 사망권을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다.
※ 이미 죽은 자라도 부활의 능력만 입으면 그 죽음의 속박권에서 나올 수 있다. 또 살아서 믿으면 죽음이 와서 나를 끌고 가지를 못한다. 사망에게 포박이 되어 있어도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죽음이 나를 억압하지 못한다. 부활의 능력만 가지고 있으면 죽음은 순순히 나를 내어주고 억압치 못한다.
(1) 영이나 영의 기능을 죽음이 이기지 못한다.
내가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영육이 사망할 가능성이 있고, 멸망 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 아래 있던 나의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 중생을 하고 나면 사망이 와서 나의 영을 죽이지를 못한다.
나의 이성과 몸이 영과 결합이 되어 활동을 하다가 육체가 죽음을 당하면 영적 기능이 그 죽음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즉 영의 활동성은 필연코 이성과 몸을 통하여 나타나는 기능이요 활동이며, 또한 육과 결합체로 있는 존재이며, 중생된 영은 죽지 않는 존재이지만 사망에 의해 영적 활동성이 제재를 받게 되면 영적 기능이 활동적으로 죽은 상태가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부활의 권능을 입고 나면 영이나 영적 기능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죄에게 어떤 제재를 받지도 않는다.
※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우리의 영의 활동성은 독립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인데 영적 기능 작용이 이성과 몸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 영의 활동성이 이성에 접선이 되기 전에는 우리는 그 영의 활동성을 의식하지 못한다.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이 영적 활동의 기능이 죽을 수 있다.
육체는 사망의 제재를 받는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이 존재는 안 죽는다.
(2) 육체의 죽음이 미치지 못한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했을 때는 죽음이 와서 가자고 하면 어떤 방편으로 가자고 하던지 거역 없이 항거 없이 갈 수밖에 없는 약한 인간이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은 공통적으로 이 사망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연법에 자연능력에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부활의 능력만 입으면 감히 죽음이 접근하지를 못한다. 자연법 역시 접근이나 공격이나 제재를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능력을 입은 자는 그 육체라도 노쇠도 없고 죽음도 없다.
우리 인간의 육체가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자연법에게 굴복을 당하여 노쇠하게 되고 죽음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죽음이나 자연법이 육체까지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
※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생로병사이다. 또한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멸망이나 죽음의 제재를 받았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이 모든 것에서 해방이다. 노쇠나 죽음이 와서 나를 끌고 가지를 못한다.
(3) 소유나 영광에 있어서 어떤 방해나 제재를 받지 않는다.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입은 후에는 소유가 어떤 소유라 할지라도 쇠하던가 감소하던가 빼앗기던가 죽을 것이 없게 되니 이 부활의 능력은 죽음만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고 모든 면에 약탈도 노략도 당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빼앗길 가능성도 있고, 버려야 할 위험성도 있다. 존영도 마찬가지다. 즉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한 자기의 영광과 소유와 존영은 다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소유를 언제 어떻게 빼앗길지 모른다. 어떤 환경이 와서 빼앗아 가던지, 사건이 와서 빼앗아 가던지, 존재가 와서 빼앗아 가던지, 죽음이 와서 빼앗아 가던지 빼앗아 간다.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가진 소유도 안전된 소유가 아니고, 영광도 존귀도 심히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안심을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부활의 능력만 입으면 이 모든 소유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 완전한 소유요, 그 영광은 길이 길이 빛날 것이다. 그 영광은 누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이렇게 부활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우리의 소유라던가 영광이라던가 부귀 공명 등 나의 모든 것을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그런 상태에 있었다. 도둑이 와서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갖다주기도 한다. 무엇이 와서 빼앗아 갈지 아무도 모른다.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영원한 공명, 영원한 소유, 영원한 존영을 누리지를 못한다.
2. 물질계를 벗어나는 능력.
이 부활의 능력이라는 능력은 인간이 물질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다.
물질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때는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하면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계의 속박 아래 살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인간이 지음 받을 때 일반적인 피조물과는 달리 영육 결합체로 지음을 받았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상관없는 영이 나의 인격의 주체성이라 할지라도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불가불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 외에 다른 모든 물질계에 소속된 피조물들은 물질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계나 물질이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계에서 물질이치를 지키며 물질이치 아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물질이치로만 지음받은 것이 아니고 물질은 육체와 비 물질인 영과의 영육 결합체로 지음을 받았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이 영도 육체를 떠나 작용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영이 내 인격의 주체성이라 할지라도 육체는 물질이기 때문에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계에 속박되어 있는고로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면 우리 인간은 영육이 아울러 물질계를 벗어나게 된다. 부활은 물질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 달나라 별나라도 역시 물질계이다. 인간은 물질계에 속박되어 있는고로 물질이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물질계를 벗어날 수 있다.
(1) 사람의 육체는 물질계의 속박 하에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시되 흙으로 원료를 삼아 지으셨다. 흙이 원료가 된 육체는 물질계의 속박 하에 있고, 영은 중생 이전에는 물질인 육 속에 죽은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니 활동 면 기능 면에 죽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죽은 영은 육체가 물질계에 속박되어 있는 한 영도 여전히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된 영 역시도 새생명으로 살아났으나 그 육체와 결합체로 있고, 또 활동적으로 이성과 육체로 활동하기 때문에 영육이 분리되기 전에는 육체 때문에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죽기 전에는 영육이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죽은 후에도 인간의 육체는 여전히 물질계의 속박 하에 있게 되고, 중생된 영은 육신과 분리가 돼 물질계를 벗어나게 된다.
※ ①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죽은 영혼 은 육체 안에 있기 때문이고 물질계의 속박 하에 있기 때문이다.
② 중생된 영은 육체와 결합되었기 때문에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③ 죽은 후에도 육체는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물질이치를 벗어나 지 못하고 있다.
④ 중생한 자의 영이 물질을 떠나 있으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물질계를 지배하거나 다스리지 못한다.
(2) 물질계를 떠나 살 수 있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할 때는 영육이 아울러 물질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계의 속박 하에 물질이치대로 살아야 하지만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우리의 육체까지도 물질계를 떠나서 살 수 있다. 물질계에 살면서 물질계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이 아닌 물질계를 발아래 밟고 물질을 다스리면서 지배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부활을 못한다.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물질계를 떠날 수 있는 능력자가 되고, 물질계를 떠나서도 살 수 있는 능력자가 된다.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입을 수 있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부활의 능력을 기독자에게 입혀주기 위한 부활인 것이다.
※ 우리 육체는 스스로 물질계를 떠날만한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다. 또 물질계를 떠나 살 권리가 없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물질계를 떠날 수도 있고 안 떠날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3) 물질이치를 지키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물질이치를 떠나서는 안 된다. 물질계를 떠날 수 없으니 물질계에서 살아야 되고, 물질계에서 살자니 물질이치를 지켜야 된다. 물질이치를 지킨다는 말은 물질이치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물질계에다 물질이치와 생명이치를 주었는데 우리 인간은 물질인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물질이치를 벗어나면 안 되고, 신령한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이치와 생명이치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물질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도덕이치를 어기면 영과 영적 기능이 죽게 되고, 물질이치를 어기면 물질인 육체가 죽게 된다. 인간이 물질계에 살면서 물질이치를 어겨 육체가 죽으면 영의 성장도 중단이요, 그 육체의 성화도 중단이다. 그런고로 이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한 물질계에서 영을 성장시키고, 또한 몸에다 구속을 입혀 성화를 시켜나가는 작업을 부절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물질계에 살아야 되고, 물질계에 살려면 물질이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니 물질이치를 지켜야 되고 물질이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물질이치의 지배는 정확하니 물질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물질이치의 지배를 바로 받을 수 없다.
※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하면 물질이치를 지켜야 된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은 후에는 우리의 육체도 물질이치를 벗어나서 살 수 있다. 물질이치인 자연법이 부활의 능력을 입은 자를 다스리지 못한다.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물질계의 어떤 이치도 다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치를 벗어난다는 말은 자연법을 벗어난다는 말이다. 자연법을 벗어난다는 말은 자연의 힘까지도 벗어난다는 말이다. 자연의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다.
이렇게 부활의 능력은 자연이치 자연법을 벗어나게 하고, 자연의 능력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약 독초를 먹을 수 있고 공중을 얼마든지 다닐 수 있다.
영 성장과 성화는 물질계에서 한다.
3. 악령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내 속에 악령이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죄성이 나의 속에 잠재해 육신의 부패성과 함께 결합이 되어 언제나 나를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이 악령은 절대로 유혹을 하지 못한다.
(1) 육체의 부패성이 다 제거된다.
우리 인간이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 인간 속에 타락성 부패성 죄악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 아닌 이질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면 이 모든 육체의 부패성은 완전히 제거되는고로 유혹을 받는 기관 성분이 없기 때문에 유혹을 받지 않는다.
(2)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유혹자가 접근치 못한다.
유혹자가 유혹을 할 때 물질을 가지고 유혹을 한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물질인 육체가 비 물질인 영체로 완전히 변화되는고로 물질의 것을 가지고 접근하지를 못한다.
(3) 거룩하기 때문에 사망이 접근하지 못한다.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아무리 거룩하다 할지라도 죄악의 찌꺼기, 부패성이 다소라도 있기 때문에 악령과 죄와 사망이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완전히 입은 후에는 성질적으로 깨끗한고로 악령은 그 거룩한 것에 접근치 못한다. 어두움이 빛에 접근치 못함과 같이 악령은 부활의 능력을 입은 자에게 접근치 못한다.
※ 죽음은 골고다까지 따라 왔으나 부활까지는 못 따라 간다. 악령도 마찬가지다.
四. 부활의 성격.
부활의 성격이란 어떤 것인가? 이미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교훈을 많이 들어왔다. 부활의 능력을 입은 자는 유혹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목석과 같이 무감각 무의식 무분별의 상태로 되어지는? 아니면 지각을 가지고 있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유혹을 받지 않을 수가 있느냐?
우리 인간이 부활의 성격을 감히 상상키 어렵다. 그러나 대충 말한다면 몇 가지로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으로 동질 동성으로 된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면 영육이 각 별 결합체가 아니고 단일체로 되어 버린다. 영육 단일체가 된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진 단일체이지만 하나님에 비하면 본질과 본성은 차이가 없으나 능력의 차이는 없지 않다.
(2) 신령계와 동질 동성으로 된다.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과 동질 동성이므로 하나님과 성질적으로 맞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지게 되고, 또 신령계와 동질 동성으로 되기 때문에 그 신령계가 주는 모든 낙을 실력껏 누리게 된다.
(3) 그 인격 전체가 신령적 인격으로 되어지기 때문에 신령계를 느낄 수 있는 자가 된다.
부활의 능력을 입고 나면 그 성격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 동질 동성이요, 신령계와 동질 동성이요, 또 그 인격이 신령적이기 때문에 신령계를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필요한 것이니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자로서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입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쌍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입으면 하나님과 상대함에 무한한 효력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제二편. 그리스도의 품위.(그리스도의 一位性)
정통교회의 그리스도의 품위관은 예수 그리스도는 양성 한 위라는 것을 변함없는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품위에 관한 정통교회의 신앙을 작성하여 선언하되 4대 부사를 사용하여
① 그는 혼잡이 없다.
② 그는 변함이 없다.
③ 그는 분할이 없다.
④ 그는 분리가 없다.
양성을 가지신 것으로 믿으니 성(性)들의 구별이 연합에 의해 제거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각 성은 특징이 보존되고, 아울러 한 위와 한 실존으로 결합되었으니 이위로 갈리우거나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제一절. 그리스도의 일위에 관한 정통적 진술.
교회의 정통견해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소유하는데 각 성은 본질에서 변치 않았고, 그 정상적인 속성들과 능력들이 박탈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분할되지 않는 단일 인격이시니 신성과 인성의 양성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고로 연합된 그는 정당히 말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아니라 신인(GOD Men)이시라고 본다.
※ 혼합된 제 3의 어떤 성의 일위라고 한다면 신성적 일위냐, 인성적 일위냐? 그는 신인양성 일위이다.
一. 성(性)과 위(位)와 의지(意志)의 정의.
이 교리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 성과 위라는 명사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성(性)이라는 명사는 어떤 물건의 물건 되게 하는 모든 근본적 품질들의 총화를 가르친다. 실체의 모든 근본적 품질들이다. 따라서 성이라는 물건은 여러 부분에 공통한다. 한편 위(位-인격)라는 명사는 이성 혹은 지각성의 부여를 받은데 따라 그 행동들은 책임 있는 주체가 되는 완전한 실체를 가르친다. 즉 위라는 것은 근본적 구성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것이 향하는 목표이다. 따라서 위라는 것은 성에 무엇을 부가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실존개체이다. 그런데 로고스(λόΥος)는 위로 되지 않는 독자적으로 존재치 않는 인격을 취한다.
※ 용어는 같은 용어이지만 뜻이 다를 수가 있다. 어떤 자는 비 물질 전체를 영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니 말이다.
용어의 개념이 일치하지 않으면 의사충돌이 된다. 통하지 않는다. 아디까지 새사람인지 쪼개라는 말이다.
성과 위와 의지를 다른 말로 하면
① 위란 비 물질적 실체적 존재이니 성과 혼돈이 아니다.
② 성이란 실체적 의미로 위의 한 부분이 아니다. 성이라는 속성들은 복 합이니 실체적 존재와 혼돈하지 말라.
③ 의지란 행동의 원형이니 실체적 존재와 혼돈될 것이 아니다.
二. 위와 성의 관계.
1. 신적 위의 양성의 연합.
위라는 말은 인격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인간적인 위라 하지 않고 신적 양위의 양성이시라고 하니 이는 영원부터 신성을 가지셨던 하나님께서 신적 위가 인성을 취하셔서 양성의 연합을 이룬 것이다.
이 말을 오해해서 신적 위가 인성을 취하신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양성이 혼합되어 제 3의 성, 즉 인성도 아니고 신성도 아닌 신성과 인성이 혼합된 일종의 새로운 신인 혼합성을 생성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 흔히 위와 성을 말하면서도 잘 모르는 때가 있다. 이위 이격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신적인가, 인적인가? 이렇게 되면 양성 양위가 된다.
성부는 그냥 일성 일위, 성령도 일성 일위, 성자는 양성 일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혼합성이 아니다. 신성 인성 양성 이위도 아니다. 어떤 제 3의 성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이 인성을 입었다고 해서, 또는 인성이 신성을 입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질이 변질 변화된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이 맞느냐?
① 사람이 중생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아주 진하게 입으면 인성 이 감퇴되어 신화 된다.
② 아무리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었다 할지라도 인성은 인성 그대로이니 신 성을 입어도 신화 되는 것이 아닌 인성이 신성을 향하여 발전을 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진화 진보 발전이다.
잘못하면 불교의 교리처럼 인간이 신이 된다고 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탄생 시에는 인성이었다가 마지막에는 인성은 없어지고 신성이 되느냐? 신성 인성에 변질 변화가 없이 그대로 보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을 해서 신성은 그대로이고 인성은 자라남. 자랄 수록 진보 발전 진화이다. 인성은 없어지고 신성화 된 것이 아니다. 신성 위가 주체성이 되어 인성이 그 신성에 순종한 것이지 인성이 신성을 입어 신화돼 인성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역시 성도도 같다.
2. 복합 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영과 육의 결합체인 일인격이시며 신성과 인성 양성 복합 일위성인데 신성이 주격이시다. 사람은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 한 인격을 구성함과 같이 신자의 인성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한 위로 구성됐다.
※ 복합 위라는 말은 양위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기 전에 완전한 신성으로서 인격을 유지했고, 인성을 입었어도 그 인격성에 보충이나 변동성은 없으나 신성으로 계실 때와 다른 점은 인성을 취하므로 복합 일위성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부와 계시다가 성육신 하므로 새로이 별개로 생긴 것이냐? 창세 전에 계셨다.
요한복음 1장: 불변성. 제 2위는 로고스. 모두는 일성 일위. 도성인신 함으로써 신성이 인성을 취했다. 양성이면서도 일위이다. 어느 한 성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신성도 있고 인성도 있다. 양성 일위 교체성이 아니다. 양성 일위 불변성이다. 예수님은 두 위로 나타남이 없고 언제든지 일위이다. ‘예수님의 신성이 곧 영혼이다’ 하면 안 된다.
3. 인성 자체와 비 인격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잠재해 버리고 나면 인성이 있을까, 없을까?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인격성이 나온 것인가?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의 인격성이 없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예수님이 껍데기가 없는 사람인가?
4. 인성은 독자적 실존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로고스를 입었어도 그의 인성은 독자적 실존을 가지지 아니했다. 이 말은 ‘인성은 독자적 실존이 아니다’ 라는 말과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로고스가 인성을 입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만고불변의 결합이다. 인성을 말할 때 인격성까지 무시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는 비 인성이다’ 하게 되면 예수님은 인성이 없는 비 인성의 존재요, 신성만 가지신 분이 되는고로 시험을 받을 필요가 없고, 먹고 싶고 자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분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도 가지고 계시고 신성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예정 예지 실행이 단선적 복선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보기에는 그의 인성이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에 흡수되어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고 신성에게 완전 결합된 것이다. 예수님의 동작은 신성과 인성의 교체적 동작이 아니고 신성의 주체성의 동작이었다.
5. 인성은 불완전성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성을 빼버리면 그는 완전한 인간이다. 이 분이 신성을 입어 인성이 신성에 완전 피동 결합되니 자체적으로 인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
6. 인성의 의식과 의지.
인성과 의지를 혼돈하지 말라. 다시 말해 인성이 없다고 할 때 인격성을 두고 말하는 것뿐이지 의지는 있는 것이다.
인성에 의지와 의식이 없는가? 의지와 의식은 위이냐, 성이냐? 인격이냐, 성이냐?
인격: 의식 의지 판단 등. 예수님은 인성도 있고 의지 의식도 있다. 이것은 인격이다. 이것이 성에 속한다면 위는 무엇을 말하느냐?
위: 하나님의 최고 결정성을 위라고 보면 된다.
의식 의지는 성이다. 여기서 결정을 하는 것은 위인 것이다. 인격 최고의 초점이 위이다. 위와 인격은 같은 것이 아니다. 혼돈하지 말라. 인성은 인격성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위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성에는 신성의 인격성이 있고, 인간의 인격성이 있다. 곧 신성의 의지 의식이 있고, 인성의 의지 의식이 있다. 양성을 가지고 있으나 신성과 인성 일위이시다. 그리고 그 결정은 위가 한다.
제二절. 그리스도의 일위의 증명과 유추.
一. 성경적 증명.
‘성경적 증명’ 하고 나올 때 성경의 권위성을 믿는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만 성경의 권위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위에 대한 논리를 인간이 할 수 있는데 까지는 논리하고 그 이상 할 수 없는 것은 무조건 믿는 것뿐이다. 우리의 논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 무엇이 어떻게 해서 비가 되는지를 아이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1. 단일 인격의 자칭.
성경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일인격으로 자칭을 했지 두 인격으로 자칭하기 않았기 때문에 양성 일위가 틀림이 없다.
그리스도의 일인격에 대해 말할 때 ‘만일 두 인격이시라면 언제 그 말을 했을 것인데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보니 일인격이다’ 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
과연 말 한 마디가 없기 때문에 일인격이라고 하는 논리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느냐? 예를 들어 어느 섬에 여러 가지 새가 있다고 말하면서 참새라는 말을 한 번도 안 했다고 할 때 그 섬에는 참새가 없다고 단정을 지을 수 있느냐? 그 섬에 참새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양성 이위라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양성 일위가 아니라면 중보의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인격에 대해 말을 안한 것을 보니 일인격이 틀림이 없다?
2. 양성 일위의 연합된 표시.
양성 일위를 전제로 하고 보면 모든 성경이 그렇게 보이지만 양성 이위로 보면 또 그렇게도 보이는 성구도 있기도 하다.
예지성의 출처는 예정에서이다. 실행성과 예정 면을 보면 예지성임이 틀림이 없다.
예: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이 말은 신성이 한 소리인가, 인성이 한 소리인가? 인성이 신성에게 동의하는 소리인가, 거부하는 소리인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한 이 말은 신성이 없이 인성이 아프다고 하는 건가?
‘술 먹지 말라’ 하는 성경구절을 내세운다면 ‘술 먹으라’ 하는 구절도 있으니 성경구절을 대며 먹지 말라고 하면 성경구절 가지고 마시게 된다. 반론자들 모두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주장한다. 악령의 사역도 성경구절을 가지고 한다.
3. 한 위(一位)가 어느 한 성품에 맞는 표현으로 제시되었다.
위(인격성)가 한 성으로부터 인출된 칭호로 지시되면서 다른 성은 속성들에 귀속을 받는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신적 칭호로 지시되면서 인적 속성들과 행동들에 귀속되었다. 다른 편으로는 그가 인적 칭호로 지시되는 동시에 신적 속성들과 행동들이 그 위에 술정 되었다.
※ 양성이 나왔는데 이 위가 한 성에만 속했느냐, 또는 한 성품에 속해 있으면서 위가 없느냐?
① 위가 한 성에만 속해 있어서 다른 위가 움직일 때 이 위는 움직이지 않 았느냐?
② 또는 신성이 주체가 되면 위가 신성에 가 있고 인성이 주체가 되면 인성 에게 가느냐?
③ 또는 위가 신성에만 있는데 인성이 작용을 하니 인성이 신성으로 가 가 지고 인성으로 나타났느냐? 아니면 인성은 묵살되고 신성으로 나타났느 냐?
예수님이 순수한 인성으로 말한 때가 있느냐? 인성으로 보인다고 해서 신성은 없느냐? 어떻게 보면 인성으로 보이고, 어떻게 보면 신성으로 보인 때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고 결합적이다.
예수님의 인성은 위와 대립적으로 산 것이 아니고 인성이 제재가 없이 신성에 맞게 사셨다.
二. 합리적 유추.
그리스도의 중보와 위의 양성의 결합은 사람의 이성으로 파악하기 불능한 신비이다.
1. 육체와 영혼.
이 연합은 사람 안의 육체와 영혼의 연합과 비교가 되지만 몇 가지 상사점이 있다.
① 사람 안에는 물질과 정신의 두 실체가 가장 밀접히 연합이 되어 있으나 오히려 혼합되지 아니했다. 중보 안의 두 성의 연합이 이와 유사하다.
② 인격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혼에 있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도 그렇다.
③ 영혼과 신체가 상호 감화이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도 그렇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움직임은 신성에 의해서 모든 것을 움직였다.
⑤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존영의 존재가 됨과 같이 예수님도 그 인격이 로고스를 입은고로 존영이라! 즉 그리스도는 신성을 입었기 때문에 존 귀하다. 고로 그리스도는 신성을 입었기 때문에 경배의 대상이다.
2. 가능성의 근거.
그리스도의 양성 일위의 근거의 기초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에는 성질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도 들어 있는 것인데 만일 사람이 딴 무엇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양성 일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성 일위이심의 근거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에 둔다고? 그러나 위는 일위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위인고로 두 존재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학적으로 보면 이 말이 맞으나 구원목적으로 보면 틀린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오인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내재성으로 보기 쉽다. 하나님이 내재성이냐, 유기적 결합이냐? 불에 달구어진 쇠를 예로 들 수 있지만 불완전하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이다.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내 속에 내재해 계시는 하나님은 독립적으로 인격적으로 주체성으로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거역할 수도 있다. 피동 순종을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살았다. 사람으로서 신의 만능으로 살아 갈 수도 있지만 인간으로 사셨다.
아래의 두 문제 중 어느 것이 맞느냐?
① 그리스도는 사람 보기에 사람처럼 살았지만 실은 하나님이시다. 다만 어려울 때는 하나님으로서 그 일을 처리했다.
②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므로 능력적으로 권능적으로 전혀 힘을 안 들이고 잘 살 수도 있지만 하나님으로 살지 않고 순전히 사람으로만 살았다.
신성으로 살지 않고 인성으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도 있고 안 느낄 수도 있고, 또 신성과 인성이 같이 느낄 수도 있고, 절대 유능으로도 살 수 있고 무능으로도 살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위이다.
제三절. 일위의 같은 성의 연합의 결과는?
신성은 불변적이지만 다만 활동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가변성적 결합이다.
인성이 신성과 결합을 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불변적인 연합을 하기 위해서라고?
신성의 위는 불변적이고 인성은 가변성적인고로 위가 하나라면 불변적 결합체요, 위라 둘이라면 가변성적 결합이 된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이 불변적이라기보다 신적으로 보면 만고불변이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변적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는 양성 일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一. 이중전달.
그리스도께는 인성의 특수성이 있고 신성의 특수성이 있는데 그 두 특수성이 전달된다.
1. 위(位)로써 인격의 전달.
신성이 인성을 입는 일이 주목적이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수난 체험을 느끼기 위해 신성이 인성을 입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은 신성이 인성을 입은 것이다. 고로 인성인 동시에 신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고통의 수난이 어떠한지를 경험치 못해서 모를 것이라고?
위는 사람인 동시에 신성이다. 신성인 동시에 사람이다. 그래서 고통을 느낀다. 고통을 받기는 인성이 받지만 신성도 같이 느낀다.
잘못 이해하게 되면 그리스도를 이성 이위성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이성 이위성으로 느끼게 된다.
신성이 인성을 입지 않으면 신성이 인성을 느끼지 못할까? 예수님께서 이것을 경험키 위해 신성이 인성을 입은 것인가? 신체, 곧 인성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은 모든 것을 경험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은 것은 수난 고통 죽음 등을 경험키 위해서라고? 이것은 아닌 것이다. 안 입고도 다 아신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은 것은 인성을 경험키 위해서가 아니고 다른 목적으로 인성을 입은 것인데 그 인성을 입음으로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성을 안 입으면 고난을 모른다는 말은 아니다. 인성의 고난이 신성에 전달되었다. 또한 신성의 활동성이 인성을 통해 나타나기도 했다.
오병이어는 신성으로 했느냐, 인성으로 했느냐? 인성으로 신성에 붙잡혀서 했다. 바람을 꾸짖음도 인성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은 것은 신성의 활동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로고스로 육체를 입은 것이다.
① 신성의 동작은 인성을 통해 나타난다.
② 인성을 입은 목적은 신성의 행동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인성을 안 입 으면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성이 없이도 할 수 있다.
③ 인성을 입은 목적이 신성의 행동을 나타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④ 신성이 인성의 동작으로 나타날 그 때는 일위이기 때문에 곧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언제부터 하나님이신가? 착상 때, 탄생 시에, 12살 때, 30살 때, 세례를 받을 때? 착상될 그 때는 하나님의 행세를 안 하신 것인가, 아니면 못하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때부터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신성이 일위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성을 통해 수감했고, 신성이 인성을 통해서 나타난고로 하나님이시다.
육체의 하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은 하나님이었다. 앞으로 만날 우리 하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 때는 안 만져질 하나님이고, 지금은 안 보이는 하나님이지만 다른 분이 아니다. 이 하나님은 친구도 스승도 애인도 부모도 되어 주신다. 이 하나님은 지금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보이지 않으나 지금 곁에 계신다. 히브리인들은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을 저 푸른 창공에 좌정하신 하나님으로 본다.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고 한 일이 너무나도 많다. 인간의 수난도 인성을 입고 당했고, 신성도 인성을 입고 했고, 또 하나님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33년간 인성을 입고 실질적으로 보여주셨다.
2. 성(性)과 혹 공작의 전달.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이 신성의 주체성이 없이 인성만 한 것인가? 구속은 인성이 했지만 그 사역을 할 때 신성도 있었느냐? 구속사역을 할 때 신성이 인성을 거들어 주지는 않았지만 그 때 위적으로는 분할되었느냐, 양성 일위로 있었느냐? 양성 일위로 있었다. 인성이 신성이 보조 없이 하기는 했으나 위까지 분리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 못을 박으면 아플 수도 있고 안 아플 수도 있다. 인간들은 아픔이 올 때 안 아픈 방편을 쓰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픈 방편을 택하신 것은 사랑의 발작에서였다. ‘나는 너의 방패요 반석이다’ 라는 말속에 이것이 다 들어 있다. 즉 ‘네가 맞을 매를 내가 대신 맞아주마’ 하시는 것이다.
인성의 수난을 신성이 들어서 커버할 수 있다. 그러나 신성은 커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구경만 하고 있었느냐? 위가 하나이기 때문에 인성의 고난에 신성도 참여했다. 유능을 버리고 스스로 무능했고, 영화를 버리고 스스로 비하했다.
십자가는 인성이 졌지만 그 사역을 하기는 인성만 한 것이 아니고, 신성이 거들어준 것도 아니고 위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신성이 참여한 것이다.
문답: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양성의 협력에 의해 수행된 것인가? 만일 신성의 협력에 의해 십자가를 쉽게 졌다고 하게 되면 신성부인은 안 된다고 해도 자연히 인성부인이 되고 만다.
물위로 걸어간 것은 신성의 행사가 인성을 통해서 나타난 것. 순종하므로!
문답: 각 성이 특별한 정력을 가지고 역사한 것인가? 바다 위로 가는 것은 신성이 독특하게 인성으로 나온 것. 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양성의 활동이 일위성으로 역사 한다. 십자가를 지심도 양성의 협력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배의 대상이 되심은 물질인 고깃덩어리가 귀중하므로 거기에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신성과 인성 모두 때문이다. 신령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며 물질인 예수가 없는데서 예배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예배가 아니다. 인성을 강조하게 되면 철학인들도 숭배의 대상이 된다. 어디까지나 신성과 인성 양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