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믿음과 행위의 관계
1. 들어가며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는 것을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야고보서는 마태복음과 더불어 가장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책에 속한다. “믿음으로만”의 절대 교리에 어떻게 “행위”나 “선행”을 덧붙일 수 있는지 도무지 그 논리적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없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자를 사용하는 한 그 무엇도, 그 어떤 기독교적 요소도 “믿음” 곁에 나란히 놓을 수 없다는 것이, 또 무슨 명목으로도 믿음의 절대적인 위치를 양보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으로만”의 “...만”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야고보서에서 기독교인들이 던지는 신랄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에서의 용서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사역에 어떻게 인간의 행위가 감히 첨가될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은 교회 전체나 기독교인 전부에 관한 일반적 서술은 아니다. 교회 일각에서는 - 한국에서도 - 이미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나 교회지도자들, 혹은 평신도들이 기독교적 행위와 거룩한 삶을 믿음 이상으로 중요시하고 강조해 왔는데, 이들에게 야고보서의 행위에 관한 높은 목소리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기독교를 예수님의 구속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자신의 삶을 바꾸고 사회를 고쳐가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 사람들에게도 야고보서는 결코 쉽지 않은 책이다. 행위 만이 아니라 이보다 앞서 믿음에 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이미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근거로 하고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학과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추상적이고 심미적이며 주관적인, 혹은 신화적인 믿음을 말해야 하고 이 믿음 위에서 삶을 논해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이 부딪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21세기로 들어가는 문턱에서도 기독교가 도덕이나 사회윤리 이상의 것이라고 말해야 하고 그 독특성과 절대성을 믿어야만 하는가?
기독교인들이 야고보서에서 만나는 문제는 이렇게 두 종류이다.
첫째, 믿음을 중요하게 취급해온 사람들에게 야고보서는 행위를 묻는다. 이것은 야고보서의 주제 중 하나이며 야고보서가 기록된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 행위를 중시해온 사람들에게 야고보서는 반대로 믿음을 문제 삼는다. 야고보서는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행위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하여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기독론적 ‘믿음’은 야고보서의 배경으로 진하게 전제되어 있다.
2. 양면성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위의 관계” 문제를 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인정해야 한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 문제는 한 쪽에 ‘믿음’ 개념이, 다른 한 쪽에 ‘행위’ 개념이 올려진 천칭과도 같다. 어느 한 쪽이 올라가거나 어느 한 쪽이 내려가도록 조절해서는 안된다. 둘 중 어느 한 개념이 상처를 입도록 이해하거나 설명해서도 안된다는 충고이다.
성경에서 행위의 문제를 믿음과의 관계에서 다룰 때, 교회가 목숨을 걸고 전파하고 보존해온 복음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믿음을 최대한 긍정하며, 혹은 완벽한 믿음을 전제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행위의 결핍이나 태만한 삶을 시정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행위를 강조하면 자동적으로 믿음이 배제되거나 제한받거나 혹은 그 역할을 축소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잘못된 선입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또 성경에서 믿음의 문제를 삶의 차원에서 다룰 때, 믿음의 주체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요 이들이 유한한 공간과 시간의 궤도를 걸어 역사를 채워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이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현실세계를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세계로 긍정하며, 피와 살의 조화 안에서 벌어지는 정신작용이나 영적 현상 내지 하나님과의 영적관계를 설명하고 조절하고 기독교적으로 이끌어가려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다. 믿음을 강조한다고 육체를 절단하고 인간을 영으로만 이루어진 연체동물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말틴 루터가 경직화되어가는 로마 캐토릭 교회를 향해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을 때, 그는 윤리를 내동댕이치고 망나니처럼 살아가기 시작하며 “오직 믿음으로만”을 외치지는 않았다. 이런 삶은 그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그대로 실행하려고 무던히도 애쓴 사람이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배드로 성당의 높은 계단을 무릅으로 오르락 내리락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교회개혁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다음에도 그는 ‘선행’의 가치와 역할을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설교한 사람에 속한다. 그는 행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잊혀져 가던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이를 위해 믿음없는 행동, 은혜없는 율법적 행위, 하나님의 주권을 계산하지 않은 인간의 공로의 허구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교회개혁자들은 어려서부터 검소와 절제와 선행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개혁자적 주장은 선한 삶을 포기하자는 외침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윤리를 인본주의로 낙인찍거나 삶의 충고를 무차별하게 행위구원론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정반대로 가장 정제된 행위와 겸손하고 거룩하며 경건한 삶에 기독교의 진수인 ‘믿음’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대로는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순수하고 깨끗한 삶을 잃지 않았다. 행위를 중시해오던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잊혀져 가던 보고를 찾아야 한다고 목숨을 걸고 외친 것이 교회개혁이었다.
친칭의 비유로 돌아간다면, 비어 높이 올라가 버린 천칭의 한 편에 복음과 믿음을 올려 놓음으로 행위나 삶이 올려진 다른 한 편과 평행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외침은 믿음을 버리자는 선동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주님의 교회라면, 어떤 시련과 핍박 하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복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이요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님이 살아계신데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만약 누가 믿음을 부정하거나 그 절대적 역할을 거부한다면 그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다. 교회라고 부를 수도 없다. 교회는 믿는 자들이 모인 단체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한 책으로서 어디에서도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도 복음과 믿음을 경시하지 않는다.
물론 행위를 믿음 위에 세우자는 것도 아니다. 행위가 더 중요하다거나 행위가 앞서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야고보는 고난 당하는 열 두 지파를 향하여 마음을 비우고 그저 행동하는 기계가 되기만 하면 옳다고 말하지 않았다. 야고보는 육체를 가진 인간을 마치 영적 신물처럼 취급하고, 고된 역사적 삶의 현장을 빠져나가며, 사회로부터 혼자만의 세계로 움추려 드는 기독교인들의 내면화 경향을 수정하기 위하여 믿음의 문제는 가만 놔두고 삶의 문제를 다루며 행위를 첨가하려고 야고보서를 쓴 것이다.
천칭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 보자.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 등이 활동하던 교회개혁시기와는 반대로 천칭은 삶의 추가 놓여야할 한 쪽 편이 높이 들리어져 있는 꼴이다. 야고보는 그곳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란 추를 올려 놓음으로써 천칭을 평행으로 조절하려고 고심하고 있다.
한 편의 강조는 자동적으로 다른 한 편의 부정이나 약화를 동반하지 않는다. 믿음과 행위가 바람직하게 조화를 이루고, 기독교인 개인과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충분히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주님의 형제 야고보도 행위 편만 강조하는 식의 편지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야고보서가 지금의 형태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강조하는 내용이 글을 쓰던 당시에 등한히 여겨지고 있었다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다.
야고보서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강화되고 행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가고 있다는 특수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점증하는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기독교인임을 알려주기 쉬운 선한 행위들을 자제하려는 경향이 행위의 약화를 초래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야고보서도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 처럼 특수한 시대와 특수한 장소의 특정한 문제를 다루는 특수한 문서인 셈이다. 우리는 야고보서에 강조되고 있는 상황성 속에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3. 세가지 유형
전통적으로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다루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믿음’ 개념을 폭넓게 이해하여 기독교적 믿음을 삶의 모든 국면 즉 행위도 포함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방법.
둘째, ‘행위’ 개념을 아주 넓게 정의하여 행위에 전인격이 반영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방법. 물론 믿음도 행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취급된다.
세째, 믿음과 행위를 좁게 정의하며 둘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법. 이 경우 믿음과 관계없는 행동은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제외되기 때문에 행위는 믿음 혹은 믿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취급된다.
야고보서의 논의는 세번째 유형에 속한다.
4. 광의의 ‘믿음’
‘믿음’이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로 파악할 때, 살아계신 예수님과 한 사람의 실제적 만남이 전제된다. 믿음은 이 만남에서 발생하는 인격적 의존관계로서 예수님에게 삶의 주도권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 섬기므로 그의 모든 삶은 예수와의 관계에서 조명된다. 따라서 그에게는 예수님을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 혹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뜻 사이에 작은 거리감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설명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말할 수 있다. 믿음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신적 주권 아래 굴복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 그의 말씀 즉 계명에 의해 통제된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 하지말라고 금지하신 것이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이다. 믿음이 행위를 위한 문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이란 단어 속에 행위는 자동적으로 포함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예를 들어 본다. 어떤 아버지가 한살박이 아이를 높은 곳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이 아이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순간 겁없이 껑충 뛰어내린다.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그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버지의 말이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선뜻 뛰어내리지 못하고 주저한다면, 혹시 아버지가 실수하여 땅에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한다면 아이는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면 ‘믿음이 작은 자’이다. 불신이 불순종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믿음은 곧 믿음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믿는다면 비록 예수님께서 이천 여년 전에 하신 말씀일망정 우리는 모르는 체 할 수가 없다. 막 뛰어 내리는 어린 아이처럼 불가능한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예’라고 대답하지 않겠는가? 그 말씀을 하신 분이 지금 우리 앞에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살아계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이 하신 말씀에 대한 순종적 행위를 포함하므로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전혀 문제거리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을 믿으라거나 하나님을 믿으라는 복음은 동시에 그 분들이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는 복음적 명령이기도 하다. 행위를 거부하라는 권고는 아니다. 삶을 중지하라는 명령으로 들어서도 안된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배제하고 하늘만 쳐다보며 해바라기처럼 내리는 하늘의 단비에 목을 축이도록 수동적으로 살아가라고 부탁할 수는 없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고 허용하는 것이 기독교는 아니지 않는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계시지 않고 삼년 동안 부지런히 설교하시고 가르치시며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그 표준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 속에 삶에 대한 충고도 함께 다 말한 셈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하신 말씀의 진실성도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입과 언어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벙어리로 지내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며, 가르치시고 율법을 주신 분이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길을 알려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을 넓은 의미로, 그리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실제적 의존으로 파악할 때, 믿음과 행위가 격리될 조그만한 틈도 없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문제는 주요주제가 되지 못한다.
5. 전인적 ‘행위’
두번째 유형은 첫번째 유형의 논리적 귀결에서 나온다. 즉 믿음이 행위를 포함한다는 논리로부터 행위만을 취급해도 믿음이 다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 ‘행위’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동작이나 뜻없는 움직임과 같은 좁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전인적 행동이라는 넓은 의미를 부여받는다. 모든 행위에는 인격이 반영되고, 따라서 인간의 행동은 각기 윤리성이나 종교적 색채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행동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창이다. 즉 인간의 행동을 그 행동의 주체와 관련짓는다. 사람은 육체만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인격과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다.
행위의 문제를 거리낌없이 천국이나 구원과 연결하는 용법이 바로 이런 인격과 행동의 일체성에 근거한 것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 틀림 없으므로 열매를 보고 좋은 나무라고 판단하고 따라서 좋은 나무가 받을 칭찬과 축복을 약속한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으므로 나쁜 열매를 보고 나무가 나쁘다고 말하고 나쁜 나무가 받을 저주와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다. 나쁜 열매, 열매가 없음은 나쁜 나무임의 증거이므로 심판이, 좋은 열매나 열매 많음은 좋은 나루임의 증거이므로 축복이 주어진다.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믿음 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소유하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영적 사역을 감지하거나 알아챌 수 있겠는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보고 하나님께 받은 구원, 축복, 은총을 확인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정당한 방법이 된다. 양들로 비유된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고 염소로 비유된 사람들에게 그들이 한 일들을 근거로 하여 영원한 저주를 선포하는 것은 바른 방법이다. 그것은 행위구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그의 인격, 그의 신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마음에서 나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행위, 열매만을 가지고 심판과 축복을 말하는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인본주의요 자력구원 내지 행위구원론이라고 몰아붙여서는 안될 것이다.
6. 야고보서의 ‘믿음’
야고보서에서는 대부분 ‘믿음’이 아주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인격적인 관계에 적용되기보다는 지식에 적용된다. 그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지적 동의’를 뜻한다. ‘사실로 인정함’, ‘수긍함’, 그렇다고 ‘긍정함’이 야고보서의 믿음 개념이다. 즉 객체에 대한 주체의 인격적인 의존관계가 아니라 어떤 정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귀신들도 믿고 뜬다”고 말할 수 있었다(약 2,19).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알고 있다. 아니 사람들 보다 더 잘 알고 두려워하며 벌벌 뜬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런 지식을 믿음이라고 표현했다. 어문학적으로 틀린 표현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그 말을 ‘믿는다’고 표현한다. 자신이 보지 못한 일,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정보를 이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때 말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기는 하겠지만 좁은 의미의 ‘믿음’에서는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내용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믿는다’는 용어가 채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관계된 인격적 신뢰나 전인적 의존감정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야고보서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아주 특수한 형태의 믿음, 즉 구원얻는 믿음의 한 변종을 취급하며 교인들과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교회가 존립해 가는 동안 어느 순간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여 야고보는 잘못된 교인들의 경향을 교정하려는 의도로 야고보서를 쓴 것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고 주님을 잘 믿으며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기능하고 있는 바른 기독교인들의 구원론을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야고보가 귀신들도 믿고 뜬다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귀신들이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귀신들이 하나님을 우호적으로 대하며 순종하며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겼을 리는 없다. 귀신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알고는 있어도 두려워하며 도망치려 하거나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주시기를 소원했다. ‘의존’이란 의미의 믿음은 귀신들에게는 조금도 적용되지 않는 단어이다. 그런데도 그가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이 ‘믿음’은 기독교 세계에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그런 긍정적 의미의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믿음은 귀신들이 가진 믿음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귀신들에게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정도 뿐이다. 야고보는 전혀 기독교적 특색을 인정할 수 없는 이런 종류의 믿음을 경고한다. 누구라도 그리고 어느 시점이라도 기독교인의 믿음은 귀신들에게서도 발견되는 역사적 지식의 수용, 지적 동의와는 구별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분위기를 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적 믿음을 이런 것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핍박으로 인하여 모두가 이러한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야고보서가 다루는 믿음은 귀신들의 앎과 구별할 수 없는 지식, 즉 예수님과 하나님 그리고 그 구속사역에 관한 지식이다. 이런 믿음에는 행위가 동반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을 통해 누구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알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계획과 구속사역을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성경이 보도하는 대로 사실로 인정할 수도 있다. 그것도 일종의 믿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이 복음을 통해 몰랐던 세계의 영적 사실들을 아는 것에서 멈추어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도 믿음은 믿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에게도 있는 그런 믿음이며, 우리가 첫번째 다룬 것과 같은 거룩한 삶을 포함하는 그런 믿음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야고보의 가슴 속에도 넓은 의미의 ‘믿음’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예수를 만나고 예수님과 교제했으며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 앞에 직접 무릅을 꿇고 ‘주님!’하고 고백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음’은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믿음’은 처음부터 지식의 차원이 아니었다. 또 후에라도 지식으로 전락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살아계신 예수를 실제로 믿고 의존하고 따라었다. 믿음은 그들에게 현실이었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생생한 체험이요 삶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풍랑 속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어린아이처럼 믿고 모두를, 심지어 그들의 목숨조차도 주님에게 맡기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그들의 믿음은 성령을 통해 교회를 찾아오시고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여전히 이전처럼 인격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었다. 살아계신 주님의 손에 모두를 맡긴채 믿음으로 어려운 역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목격자들에게 믿음은 지식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복음을 통해 예수에 관해 듣고 배우고 성령을 통해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달랐다. 그들은 우선 복음을 들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들의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임, 복음이 전하는 내용에 지적으로 동의함으로 나타난다. 주님이 하신 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미 등등 모든 것이 복음을 통해서 정보로 제공된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도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우선 이론으로 전달된다. 생생한 믿음, 즉 체험과 삶으로서의 믿음에 도달하기 위한 복음이 전하는 바 그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영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주님을 만날 때는 누구라도 그 앞에 고개숙이고 무릅을 꿇으며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의 체험은 어떤 사람에게는 생생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성령의 은사는 다른 사람까지도 알 수 있도록 요란하고 톡특하게 주어질 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본인들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히 주어진다. 모든 것이 확실하여 주님을 보지 않고도 목격자들 이상으로 확실하게 살아계신 주님을 의지하고 모두를 맡기고 살아가는 교인들에게야 야고보가 무슨 말을 더 하기를 원했을까마는, 복음을 수용하면서도 인격적 의존으로 성장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를 쓸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처해있던 역사적 정황이 기독교인임을 밝히기 보다는 감추기 쉬운 시대가 오고 있었다. 기독교 제2세대. 즉 예수를 보지 못하고 복음을 통하여 예수를 알게 되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와 만나는 세대.
야고보는 바로 이런 믿음이 귀신들의 앎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논지는 진정한 믿음은 지식 이상이어야 한다는데 있다. 역사적 지식으로 복음을 수용하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귀신들 보다는 더 나은 것이 믿음이어야 한다. 야고보는 이 문제를 성령의 충만, 성령세례, 성령의 은사나 거듭남 등 모든 사람들에게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운 요소들을 사용하여 논하지 않고 행위의 문제로 이것을 설명한다. 바른 믿음에서는 바른 행위가 따라 온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입으로 만이 아니라 그리고 지식으로 만이 아니라 그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바 예수님의 말씀을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형식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손해를 자초하면서까지 형식과 체면을 지키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가 다루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는 길은 이 좁은 의미의 ‘’믿음‘개념을 오해없이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바른 기독교적 삶이라고 하는 것을 그 배후에 전체적으로 예상해야 한다.
야고보는 ‘행위’ 개념은 좁게 보고 있지 않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논리적으로 가능한 믿음없는 무색의 행위, 인격성 없는 단순한 동작이나 비윤리적인 움직임을 의미하는 ‘행위’는 애당초 야고보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성질을 내포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의나 비교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행위란 어디까지나 인격의 반응, 신앙의 표현으로 정의된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노력하는 것은 그러니까 행위가 가미되지 않는 특수한 형태의 믿음에 인격과 진정한 신앙을 반영하는 행위, 삶을 첨가하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뗄 수 없는 통일체로 나타날 때에 진정한 기독교적 삶이 된다. 이것은 기독교 2세대에 속하는 우리에게 아주 적합한 충고인 것이다.
7. 산 믿음과 죽은 믿음
야고보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는 후대의 상황에서는 믿음은 언제라도 쉽게 지식적인 것으로 그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제2 기독교 세대의 사람들에게 무엇이 기독교인의 근거요, 기독교 공동체의 존립기반으로 삼을 것인가? 성령의 충만이나 성령으로 거듭남은 모두에게 확실한 믿음의 표적이 되기는 어려웠다. 또 믿음이라는 현상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교회의 객관적 근거로 삼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그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정의하기 위하여 넓은 의미의 ‘믿음’개념과 ‘믿음’과 ‘행위’의 뗄 수 없는 관계성 문제를 도입했다. 즉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이 행위를 통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행위의 문제에 치중함으로써 관념적 차원의 믿음, 즉 기독론적 지식을 가지는 것을 구원얻는 믿음으로부터 구별하였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자랑하고 고백하는데도 그의 믿음이 행위와 삶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2장 14절). 그것은 헛것이다(20절). 사탄이나 귀신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구원얻는 믿음은 최소한 귀신들의 떠드는 소리와는 구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19절) 고 야고보는 질문한다. 그런 믿음은 사실은 교회에서 긍정하는 그런 믿음은 아닌 것이다.
야고보가 든 예를 생각해 보자. 형제나 자매가 굶주리고 있는데 평안하기를 빌기만 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평안하기를 빌려면 그가 평안해질 수 있도록 그들이 쓸 것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인사하거나 염려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도움을 주지 않는 염려와 걱정, 평안을 비는 인사가 아무 것도 아닌 것 처럼,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17절). 그것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지식이다.
야고보는 믿음을 제한하거나 부정하면서 이런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야고보서가 로마서를 반대한다거나 바울을 수정하려고 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믿음을 근거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출발점, 교회의 구성원리가 깊이 새겨져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이 믿음의 근거 위에 삶의 문제가 믿음의 열매로 세워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야고보는 행위를 부정하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행함이 없는 사람은 믿음의 유무나 진실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말만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적 행위는 항상 믿음의 열매로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다(18절).
야고보는 다른 예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한 사건을 거론했다. 그의 논지는 아브라함은 생각만 하거나 말만 하지 않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를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은 실행으로만 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행위의 문제만을 취급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시작했다. 이 사건에서도 가장 돋보인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그러ㅓ나 믿음은 그의 행함을 만들어내었고, 순종의 행위로 인하여 그의 믿음이 완전케 되었다(21-22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믿을 때 의롭다고 하신 것이 이렇게 그의 행위, 삶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믿음을 희생시키거나 약화시키거나 무시하는 글을 쓰지는 않았다. 기독교의 출발점에서 말한다면 그는 분명 “믿음으로만”이라는 고백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믿음이 반영되는 삶의 영역을 믿음이나 마찬가지로 강조해야만 했다.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야고보서 전체의 문맥에서 볼 때 이 믿음을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결과요 그 열매인 행위를 필수적인 것으로 첨가시키는 역할을 하는 말씀이다. 야고보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로 무작정 행위나 윤리만을 강조하는 윤리학 교과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기독교적 신앙과 이에 근거한 행동을 요구하는 다른 형태의 기독교 복음서이다. 믿음이 선행하지 않으면 야고보서의 행위에 대한 강조는 빛을 잃고 만다.
라합의 예도 같은 종류에 속한다. 라합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깊은 신앙이 있었다. 그 신앙은 자신의 민족을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속하겠다는 각오로 두 정탐을 숨겨준 행위에서 확인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예수의 속죄희생과 우리를 향하신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우리를 불러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여전히 이 세상에 남겨져 세상의 유혹과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믿음의 씨앗은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것 만이 예수님을 육체로 만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믿음이 관념적인 지식, 복음의 수용이 아니라 복음의 수용으로 비롯된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 응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는 말로 야고보는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대로 세상을 정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