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한명동의 삶-고신의 역사이며 백목사님 설교에 많이 언급된 인물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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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한명동의 삶-고신의 역사이며 백목사님 설교에 많이 언급된 인물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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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동목사님은 백목사님의 설교 내용에서도 몇 손가락 꼽을 만큼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신의 행정적인 면을 두고는 고신교단 50년 역사를 만들어 온 인물입니다. 백목사님을 서부교회로 오게 한 장본인이며 백목사님이 가장 칭찬하는 사모상이 바로 한목사님 사모님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설교록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부분은 신학교를 신학대학으로 그다음 일반 대학으로 만들었던 중심 인물이어서 그는 고신의 진리운동을 세상 운동으로 탈선 타락 시켰다는 지적입니다. 그가 나온 일본의 신호신학 역시 목사님은 지극히 우려하던 곳입니다.

여기서 한목사님의 생애를 소개하는 것은 그가 걸어온 그의 고신 역사는 대부분은 우리 공회 및 설교록 내용과 어떤 형태로든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글은 고신의 대표적인 역사교수의 글이며 이 글의 역사적 사실은 대부분 정확하다고 이곳에서도 평가합니다. 단, 이 글이 평가하고 있는 바에 대하여는 이곳에서는 거의 전부를 반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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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동 목사가 살아 온 삶의 여정 - 이상규 교수(고신대 역사신학)

지난 9월 14일(금) 저녁 한명동 목사님께서 이 땅에서의 나그네길 92년의 생애를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그 동안 와병중에 계셨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종종 가서 뵙지 못
한 일이 죄송하기만 하다.

그러나 한목사님은 복된 생애를 사셨다. 그분이 남긴 가르침과 신앙 유산은 오고 오는 수많
은 세대들에게 소중한 재산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조국의 장래가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인 1901년에 나신 목사님은 민족의 수난과 고난을 체
험하셨고, 선교초기의 상황과 교회의 발전, 일제하의 탄압, 광복후의 혼란, 그 와중에서 이
루어진 교회 쇄신운동, 고신교단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한 세기의 역사를
가슴에 안고, 그 시대의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셨던 교회의 지도자였다. 이재 그의 생애를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가 살아온 생의 여정을 간단히 정리해 두고자 한다.


1. 출생과 성장, 교육

한명동 목사님은 1909년 10월 14일(음) 부산시 사하구 신평동에서 한치명(韓致明)씨와 배봉
애(裵奉愛)씨 사이에 4남 3녀 중 4남으로 출생하였다. 부산 보통학교(지금의 부산고등학교)
를 거쳐 부산 제2공립 상업학교(현 부산상업고등학교)에서 수학하고 1929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모든 배움에 대해 애정과 열망을 가지고 있던 한목사님은 대학 교수가 되어 학자의 길을 꿈
꾼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 있는 창신(昌信)학교 교원으로 부름을 받고 1931년 4월
부터 일하게 되었다. 박손혁, 이수필, 배성근, 현흥택 등은 동료교사였다. 만 4년을 일한
그는 이 학교에서 1935년 3월까지 만 4년간 봉사한 후 신학공부를 위해 교사직을 사임했
다.

그가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을 때 주위의 모든 이들은 평양 신학교로 가도록 권면했으나, 문
창교회를 담임하고 계셨던 주기철 목사 만은 일본으로 가서 공부하도록 권면하였다고 한
다.

주기철 목사님은 “나는 조국의 교회를 위해 이 목숨을 버리겠으니 한집사는 일본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하라”는 권함을 받고 1935년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
너가 그해 3월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한목사님은 5년간 신학교육을 받고 1940년 3월 졸업하였다. 미국 남장로교회
가 경영하던 이 학교에서 한목사님은 칼빈주의 신학을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 여
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된다.


2. 신앙생활, 신학수업, 목회활동

한목사님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부산 제2공
립학교에 다닐 때 건강이 좋지 못해 잠시 휴학하고 있을 때 그의 형인 한상동목사가 있는
다대포에 갔는데, 이때 그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16세 때인
1924년 10월이었다.

건강이 좋지 못해 고민하고 있던 그는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형님의 전도
를 받고 우선 병이라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산 항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것이 그의 입신의 동기였다. 하나님은 육체의 연약을 통해 믿음의 부요함으로 인도하신 것
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27년 1월 17일 항서교회에서 담임목사였던 박성애(朴聖愛)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20세가 되던 1928년 4월부터 1931년 3월까지는 부산 항서교회에서 서리집사
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마산창신학교 교원으로 가게 되어 주기철 목사가 사무하던 문창교회에 출석하게 되
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 한상동 목사는 육신으로는 형님이지만, 영적으로는 신앙의
아버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주기철목사님의 신앙지도를 받은 것은 축복이었다.

한명동 목사는 고베신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아마가사끼(アマカサキ)의 아마가사끼(尾崎)
교회(1935. 9-1936. 3), 니시노미야(西宮)교회(1936. 4-1937. 3), 오오기(靑木)교회(1937.
4-1940. 3) 등 세 교회를 개척 전도하였다.

신학교를 졸업 한 후에는 1940년 3월 24일 재 일본 조선기독교 대회에서 목사안수 받고,
1942년 4월까지 일본 오오사까 시깐지마 고노하나(比花)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고, 1942
년 4월부터 1944년 5월까지 약 2년간은 고베시에 있는 하야시다(林田)교회(현 고베교회) 담
임목사로 시무하였다.

비록 가족들은 그의 귀국을 만류했으나 조국의 교회를 위해 일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해방
을 1년 앞둔 1944년 귀국하여, 1944년 10월부터 경남 밀양군 하남읍 수산리의 수산교회 목
사로 봉사했다.

이 교회에서 약 17개월 일한 그는 부산의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의 청빙을 받고 1946
년 2월 부산으로 왔고 1949년 10월까지 이 교회에서 일했다.

그리고는 당시 고려신학교 교사(校舍)였던 부산시 중구 광복동 1가 7번지에서 신학교 학생
들과 인근 주민을 위해 전도(傳道)교회란 이름의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 교회는 후일 부
산 남교회(南敎會)로 발전하였고, 이 교회는 학교의 중요한 행사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였
을 뿐만 아니라 학교를 여로 모로 후원하였다.

이 교회는 삼일교회와 더불어 고신교단의 중심교회이자 고신의 정신적 이념적 모체교회의
역할을 했다. 고려신학교의 졸업식이 주로 이 교회에서 거행되었고, 고려신학교를 후원하
고 지원하는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한목사님은 남교회에서 꼭 30년간 시
무하고 1979년 12월 은퇴하였다.


3. 고신대학교를 위한 봉사

한명동 목사님의 생애에서 고려신학교, 고신대학교를 위한 봉사는 40여년간 계속되었다. 고
려신학교는 1946년 9월 20일 설립되었는데, 이 때부터 한목사님은 이 학교운영과 경영에 깊
이 관여하게 되었다.

1946년부터 그는 고려신학교의 서무, 재정 담당자로 일했으며 1947년 봄 학기부터는 강사
로 교수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교수로 봉직하면서 성경과 실천신학 분야의 과목을 교수하였
다. 고려신학교가 예과 2년, 본과 3년의 5년제 학교로 출발한 것은 교무를 맡았던 한목사님
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와 동일한 학제였다. 고려신학교는 지적 훈련과 영적 훈련 양자
를 강조했는데, 이것도 한명동 목사의 정신이었다. 지적 훈련은 박윤선 목사가, 영적 훈련
은 한상동 목사가 주도했는데, 한명동 목사님은 이 양 측면을 적절히 연결하는 행정적 뒷받
침을 했다.

물론 한명동 목사님 자신도 학생들의 신앙과 훈련을 감당하고, 새벽기도에서부터 철저한 경
건훈련을 실시하셨다. 고려신학교를 위한 그의 봉사는 어느 한 측면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
다. 후에는 강사 혹은 교수로, 재단이사로, 그리고 이사장으로 학교발전을 위해 기여하였
다.

오늘의 기독교대학과 관련하여 한명동 목사의 기여중의 하나는 그의 원대하고도 광대한 기
독교대학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상이었다. 그에게는 개혁주의 문화관에 입각한 일종의 카이
퍼적 견해(Kuyperian view)가 있었다.

그는 현재의 송도교정 맞은편의 땅과 감천지역, 그리고 신평지역 등 주변의 광대한 지역을
확보하고, 신학은 물론이지만 개혁주의 세계교회 건설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기독교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 이상의 소유자였다. 이 당시 이런 이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
실 자체가 매우 놀랍다.

그에 의해 추진된 칼빈대학의 설립은 기독교대학을 이루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한목사님은
예과 2년 과정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아 4년과정의 인문교육을 강화함으로서 교양교육에 바탕
을 둔 신학교육을 효율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신학교 교수회의 위임을 받고 l955년 9월 칼빈학원을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의
이름을 칼빈학원이라고 명명한 사실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염두에 두
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이 학교가 계속되지 못하고 l964년 3월 다시 고려신학교 대학
부로 통합, 흡수되었지만 이 기독교대학의 이상은 1971년 고려신학대학으로, 1980년에는 고
신대학으로, 1993년에는 현재의 고신대학교로 이어져 오고 있다.


4. 고신교단을 위한 봉사

한목사님은 고신교단을 위해서도 많은 기여를 했다. 1954년 5월 부산시 서구 암남동 34번지
의 1만5천평의 대지를 확보하는 일에나 1955년 3월 고려신학교 교사 연 건평 594평을 신축
하는 일에도 그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

고려신학교가 개교하던 1946년 당시는 이사회 서기로 봉사하였고 그후 수 차례 이사로 봉사
하였으며, 1976년 9월부터 2년간은 제10대 이사장으로 봉사했다. 뿐만 아니라 부산노회장으
로, 총회장으로 봉사했다.

특히 두 차례에 걸쳐 20년간(1960-1971, 1974-1983) 선교부장을 역임하면서 교단선교 운동
을 주도한 일은 그가 남긴 커다란 공헌이다. 1951년에는 그가 시무하던 제일영도교회에서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을 창설했는데, 지금은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하였고
청소년의 복음화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5. 후기의 날들

한목사님은 정년으로 모든 직에서 은퇴한 후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도서를 고신대학교 도서
관에 기증하였고, 장남 고 한기범 박사, 차남 고 한기태 박사의 장서도 기증케 하였고, 초
대 총장인 이근삼 박사가 기증한 도서와 함께 총 1만여권의 장서로 본교 중앙도서관에 ‘한
명동목사 기념도서관’(Collection)을 설치한 일은 그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는 진정한 칼빈주의자였다. 그에게는 문화적 소명의식과 문화변혁적 이상이 있었다. 그에
게는 목회활동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성역(聖役)이었다.

그는 부산의 제일영도교회와 부산 남교회에서 일한 33년을 포함하여 목사안수를 받은 후 40
여년간 목회자로 봉사하였고, 고신대학과 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했기에 고신대학교
는 개교 50주년을 기념하여 그에게 최초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바 있다. 그는 학위
수여식에서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엔 호미를 들고 지구촌 개척 봉사단으로 일어
날 때”라고 강조한 일이 있다.

고신대학교(와 신대원)에 대한 그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2000년 2월 8일 필자와의 만남
에서 앞으로 고신이 신학적으로 좌경화 되지 않고, 또 세속주의에 물들지 않게 되길 바란다
고 하면서 필자에게 평신도들을 위해서는 신앙지침서를 편찬해보라고 권하셨고, 고신신학
의 정립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하신 말씀을 필자는 깊이 세기고 있다.

필자는 그 동안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뵙지 못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멀찍이 뵐 정도였다.감
히 자리를 함께 할 위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5년 사이에는 감사하게도 가
까이에서 뵙고 회고담도 듣고, 또 고신 역사의 뒷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아득한 후배이자 이제 경우 학문의 길에 선 필자를 격려해 주시고, 칭찬해 주신 일 또한 필
자에게는 분에 넘치는 사랑이었다. 진실되게 말하면 무슨 칭찬할 일이 있었겠는가? 후배와
후학에 대한 사랑과 격려가 아니었을까? 한번은 어떤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는데, “이목
사가 설교한다기에 왔다”며 불편한 몸을 마다않고 오신 날, 그날의 설교가 가장 힘겨운 설
교였다.

한번은 목사님이 사셨던 부산 괴정동의 아파트에 필자를 불러 송구하게도 점심을 함께 하시
고는 필자를 위해 간절이 기도해 주셨다. 그리고는 필자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아파트 입
구까지 나오셔서 배웅해 주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
다. 그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천천히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는 나그네의 세월 92
년을 마감하고 저 천국으로 향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