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예배의 기술적 발달을 반대 - 미디어 사용을 중심으로 (제목 - 관)
글쓴이 : 윤석준 날짜 : 2004/08/24 조회 : 234
미디어 예배에 관하여...
방학이 끝나고 새롭게 학기가 시작됩니다. 저에게는 마지막 학기이기도 합니다. 개강을 눈앞에 두고 게시판에 들어왔다가 문득 미디어 예배에 관한 생각이 나서 이전에 써놓았던 글을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요즘 왠만한 교회치고 프로젝터 하나 설치 안되어 있는 교회 없고, 왠만한 전도사들 중에 유초등부 설교를 파워포인트로 안하는 사람 없는 것이 실정이 되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제가 2-3년 전에 썼던 글을 오늘 올리면서 조금 다듬은 것입니다. 글을 읽어보니 제가 이글을 썼던 때만 해도 큰 교회들 외에는 미디어로 예배 드린다는 데가 많지 않았나 봅니다.
예배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눈앞에 두고도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말씀을 따라 방법을 모색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과 신앙에 있어 "말씀중심"은 참으로 허위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인용하고 설명하는 말씀에 동조하시든 않든간에 최소한 오늘날처럼 미디어와 프로젝터로 띄우고 동영상을 돌리고 하는 예배풍토가 범람한 시점에서 왜 우리는 이런 방법론들에 대해 늘 실용주의적이기만하고 성경이 무어라 가르치는가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았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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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예배 왜 안되는가"
출처 : 다음카페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원본에서 약간 수정함) "질문과 대답" 게시판 3번글
미디어 예배 불가의 이유를 두가지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성경에서의 근거이고, 하나는 저의 견해입니다.
첫째, 성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앞부분은 당시 있었던 파당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수단" 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수단은 "세상의 지혜" 가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전도라는 미련한 수단을 사용하여 구원을 행할 것을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을 선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며, 이렇게 "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 자체를 하나님은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전도" 라는 단어는 "설교"를 의미합니다(노방전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많은 화려한 방법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선택치 않으시고 "전도의 미련한 것" 곧 "말씀선포"라는 방법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지혜" 로는 "알지 못하는 고로"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나 말씀 전하는 "방법"을 생각할 때에, 사람의 임의로 더 좋은 방법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에 더 전달이 잘 될 것 같은 방법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 굳이 설교이어야 하는가? 왜 굳이 목사에 의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한, 말을 통한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말이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전도의 미련한 것" 즉, 설교라는 미련해 보이는 도구를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편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또는 역사적 정황을 볼때 그렇게 고착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게 된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우리는 이 부분을 잘 명심하여야 합니다. 현대에는 성경의 내용만 전달된다면 무슨 방법이든 더 효율적인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어 믿는 자가 구원받게 되는 방법을 일부러 택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는 교회를 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따라잡아야 할것이 아니라 세상을 포기해야 하는 단체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2장에서 계속되는 바울의 주장에서도 뒷받침 됩니다. 2장 1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라고 하며 4,5절에서는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라고 함으로서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가 화려하고 유창한 문장에 있지 않음을 보이기 위하여 일부러 어눌하고 어리석은 것 그대로 보여주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말잘하는 거짓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들의 유창하고 화려함을 일부러 버리고 어리석고 어눌한 방법을 택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그러한 데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쓰고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시대를 막론하고 말 잘하는 거짓교사의 방법이 복음을 전하는데 훨씬 효율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부러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잘 간파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이후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역의 특성과 잘 매치가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쌓아올려진 바벨탑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인간의 힘을 배제한 하나님의 힘 "만으로만"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일부러 "잉태할수 없는" 노부부 아브라함과 사라라를 부르셨으며 여리고에서 싸울때에도 일부러 이길수 없는 방법을 택하게 하셨으며 이후 더 작은 아이성에서는 패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없이는 이길수 없음을 보여주셨고 기드온의 용사들에서는 그들의 승리가 수의 많음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는 왕들에게 전한 사무엘의 메시지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된 자들은 말을 많이 가지지 말고 궁녀를 많이 가지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며, 여리고가 지리적 요처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인간의 무장병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부러 여리고를 건설치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전도의 미련한 것" 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에 관하여 하나님을 더 찬양해야 할것입니다. 미디어와 대형스크린과 프로젝션을 통해 더 잘 이해될수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요, 교육학적 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설령 그것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원 의도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면 과감히 그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효용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의도가 가리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적 관점을 버리고 좀더 하나님께서 설교를 사용하시는 목적을 이해해야 할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서울 모교회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설교를 돕기위한 또는 설교를 대치하는 연극과 드라마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칼빈은 이러한 "전도의 방법" 과 관련하여 유사하게 "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인간을 통해 말씀케 하시는가" 라는 질문에서 "인간을 통해 하시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음을 통해 우리의 겸손을 단련하시는 것" 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좀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부가적으로 한가지 의견을 더 달겠습니다. 이는 성경적 의견은 아니고 저의 경험에 의거한 내용입니다.
미디어 예배는 사실 성도들을 피동적인 예배의 구경꾼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 예배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과의 언약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언약의식이기 때문에 설교의 시간은 "좋은 말씀을 듣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언약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선포와 거기에 반응하는 언약의 대상자로서의 청중의 반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디어 예배는 더 효과적인 "교육"이라는 장점을 취하기 위하여 "언약예식"이라는 본질을 버리게 됩니다. 프로젝트를 통해 교육의 내용을 요약하고 설명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따라하면서 교육적 효과는 더 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성도간의 언약적 관계를 맺는 시간이 되기 보다는 성경교육 시간, 혹은 강좌, 혹은 세미나나 감동과 결단을 주는 시간이 될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미디어 예배는 성도들을 예배의 관람자나 청취자가 되게 합니다. 말씀이 앞에서 전달될 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1인칭과 2인칭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제3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을 객관적 입장에서 듣고 보는 제3자적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이것은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저의 분석입니다) 미디어 예배를 반대합니다(이 반대는 단지 프로젝트를 쓰느냐 안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느냐의 것입니다. 만약 프로젝트를 사용하더라도 단지 말씀의 대지를 띄우는데 사용한다거나 찬송가나 예배 순서를 띄우는데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뒤쳐지지 말아야 된다는 주장을 가지고 와서 교회에 이런 미디어를 활용한 예배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조류가 그러하므로 우리도 그러하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교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세상" 이라는 단어의 용례가 대다수 "교회"라는 단어의 상반되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늘 기억하여야 할것입니다. 세상은 늘 화려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서는 안될것입니다. 비록 오랜 농경정착 문화를 통해 가꾸고 다듬어 아름다운 가나안 여인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오랜 유목생활을 통해 잘 씻지 못하고 잘 다듬지 못한 이스라엘 여인과 통혼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