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헌금을 자본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 교회의 속화 방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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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헌금을 자본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 교회의 속화 방지책


글쓴이 : 이세령 날짜 : 2004/07/25 조회 : 77

헌금은 자본이 아니다



헌금은 자본이 아니다.

교회가 수익 기관을 운영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논의를 제기한것은 현재의 고신교회의 방향성을 가늠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교회가 직접 개혁기관(reformed organization)을 가질수 있는가의 문제보다 더 예민한 문제이다. 개혁기관은 교회와 사회의 중간적인 존재로서 학교나 병원 그리고 구제기관 사회변혁 기관으로서 정당이나 직장 연합체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관들은 성도들이 교회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는 참된 가능성을 바탕으로 세운 것이다. 이는 나그네로서 세상을 사는 성도됨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어야만 참된 문화행위가 가능하다는 근거위에서 비록 다수는 아니라도 세상에서 참된 빛의 삶을 살기 위해 세운 개혁기관들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입장위에서 세워진 개혁기관들 조차도 교회사의 역사가 깊지 않고 전혀 다른 한국교회의 환경에서 우리 교회의 우선적 관심이 되는가는 논의의 대상이 될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논의는 개혁기관의 정도를 넘어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 교회 안에서 존재하고 교회가 운영해도 되는가이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서 신학교와 선교사 파송의 일과 구제사역을 담당한다. 즉 복음의 정신에 합당한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는” 복음의 원칙을 지킬수 있는 사역만을 교회가 담당한다.

현재의 논의에 중심에는 우리 복음병원과 은급재단이 있다. 비록 시작은 구호병원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수익기관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부도 혹은 대출, 3년내 흑자 전환 불가능이라는 자본주의의 첨병의 언어가 복음병원에 따라다닌다. 이제 복음을 가진 교회가 수익기관인 복음병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살펴본다. 그리고 은급재단이 가진 좋은 목표지향과 달리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본다. 또한 최근에 고신 교회가 학교 법인과 관련해서 총회 운영방식의 변화를 가졌는데 이또한 본질적인 문제점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1. 사이버 나이프와 수익
최근 기독교보를 보면 고가 첨단 의료 장비인 사이버 나이프의 도입 결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경제여건이 건실치 못한 상태에 있는 병원으로선 중요한 결정이었다. 수익성이라는 관점에서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거나 혹은 일부가 적용되더라도 여전히 수익성이 높은 고가의 첨단 장비인 사이버 나이프를 도입하여 다른 병원들과 차별화를 꾀함과 동시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경영진의 중요 결정이다. 이것에 대해서 교단의 대책위에 해명을 하였고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사이버 나이프를 왜 도입하려고 하는가? 결국은 수익성의 문제이다. 고가의 장비를 통한 시술로 고수익을 꾀한다는 현실적인 결정이다. 이러한 결정 배경 뒤에 있는 생각이 무엇인가? 경영진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을 인정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떤 생각에서 바른 판단이라고 허락하는가?

결국 수익이 복음 병원의 최고의 목표라는 것이다. 경쟁에서 살아 남고 높은 수익을 얻자는 기업의 목표와 다름 아니다. 이것은 복음 병원이 아닌 일반 병원들이 대체로 추구하는 방향이다. 복음병원은 그 형태와 존재방식과 사역방향에서 전혀 세상의 병원과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 의료행위가 어떻게 기독교 병원과 세상의 병원과 다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치료행위 자체는 다를 수 없다. 신자 의사가 하는 치료방식과 불신자 의사가 맹장수술을 할 때 다른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대상에 따른 치료 방식의 차별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존재한다. 같은 암에 걸린 사람이라도 가격을 불문하고 최상의 치료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적절한 비용안에서 여전히 적실한 치료를 선택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소득 형편에 따라서 치료의 차등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이것은 과거, 발달한 의료 장비보다는 의사의 손에 의한 시술에 더 의존할 때는 장비의 차이가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의료 장비의 차이가 시술에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지고 있는 오늘날 더욱 현실적인 고려를 요구한다.

사이버 나이프를 도입하여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것은 틀린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의 다른 지향점을 가진다. 첫째는 앞서 말한 수익률의 게임을 선점하는 일이다. 즉 돈이 많은 환자들에게 고가의 시설을 이용해서 잘 치료하겠다는 선한 의지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일도 생겨난다. 암이라는 절명의 위기 앞에 의사가 주도권을 지고 행할 수 밖에 없는 시술에서 병원의 정책적 지지를 받는 시술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대다수의 환자는 효용에 대비해 가격이 훨씬 높은 시술의 결과로 결국 서민인 자신의 주머니도 함께 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료보험을 통한 전면적 혜택이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하지만 전면적인 의료보험 숫가 적용에 의한 혜택은 보편화라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이루어진다.

병자를 앞에 놓고 최고의 치료행위를 가족들이 제공하려고 하는 것을 잘 부추기면서 수익을 높이는 행위가 고가의 의료장비 구입이다.

최고의 의료 서비스와 환자의 고액 지출에는 병원의 수익이라는 지대하면서도 원천적인 관심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 복음병원이 정말 이렇게 해서라도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하는 병원이기를 교회가 정말 바라는가이다. 사이버 나이프를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환자를 돌보는 최고의 병원이 되기를 바라고서 우리가 복음병원을 운영하는가이다.

2. 은급 재단과 수익
은급 재단의 설립은 퇴임한 목회자들을 위한 배려이다. 이는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은급 재단이 20-25년 동안 15%정도의 적립금을 넣으면 마지막 생활비의 100%를 약속하는 것은 지나친 수익률 게임이다.

연금이라고 하지 않고 은급 재단이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독지가의 기부금을 통해서 어느 정도 모자랄 수도 있는 분량을 메우자는 의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의 한 보도에 의하면 장기적으로 높은 수익을 위해서 부동산 투자를 결정했다. 즉 화폐 가치 손실 분을 고려해 흔히 설정하는 국채 수익률 정도의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서 그 이상의 수익을 은급 재단이 필요로 한다는 반증처럼 보인다.

이처럼 국채 수익률 이상의 수익을 기대하는 자금 운영은 자본주의적인 표현에 의하면 투자이다. 수익률 게임에 뛰어드는 것이다. 최근 극도로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에서 거품이 될 지 모르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뛰어들어서 고수익을 창출하자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에 투자하는 일을 무조건 투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상적인 가치 이상으로 가격이 오르는 최근의 부동산 시장의 등에 타자는 의도는 분명하다. 수익은 위험에 대한 반사 이익이다.

은급 재단이 내세운 자산에 대한 수익률 더내기의 정점인 생활비의 100% 지급 보장은 목회자 급여의 특성상 최고점에 이른 은퇴시점 마지막 급여를 고려하면 투자 전문가라도 쉽게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것은 소위 투자 선수들이 하는 도박 행위에 비교하고 있다.

국민연금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요동하고 있다. 이제 국민 연금도 더 내고 덜 받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소득의 16%까지 부담금을 올리고서도 낸 것보다 덜 받는 게 국민연금 제도이다. 그런데 100%를 평생 받을 수 있다는 말은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누가 책임질 수 있는가?

은급 재단의 수익률이라는 문제 때문에 합동 교단은 납골당 사업에 20억을 투자하려다가 문제가 되어서 현재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러한 수익률의 게임은 결국 통일교의 유력자의 배서가 든 어음 건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3. 수익 재단을 위한 고신 총회의 2분화
고신 총회가 작년부터 총회를 2원화 하고 있다. 조직의 효율성을 위해서 광역 부서회의를 만들어 소총회 형식을 도입하였다. 이와 더불어서 학교 법인의 논의를 위해서 일반 총회를 마치고 별도의 총대들이 다시 모여서 법인을 위한 총회를 한다. 명분은 학교 법인 논의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는 이유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의 총대들이 모인 중에 다시 총대를 추려서 학교 법인의 재정관계를 별도로 의논한다는 내용이다. 그만큼 교회의 총회에서 학교 법인의 문제가 시간을 많이 차지하고 복잡하다는 의미이다.

다른 예가 있다. 서울의 한 교회는 시내 한복판에 건물을 가지고 있다가 주상 복합 건물을 짓고 아래층에 백화점을 운영하였다. 그런데 그 교회는 당회를 모일때 마다 회계문제를 의논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뿐만 아니다. 우리 교단의 부산의 모교회는 교회 이전을 하는 방식으로 아파트를 분양하는 방식을 취하다가 결국은 교회 분열까지 가는 사태를 맞았다.

교회가 재산을 가지려고 덤비고 이익을 얻으려 효율성을 고려하는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증거이다. 교회는 복음이라는 정신 안에서만 효율성이 가능하다. 즉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정신 안에서 효율성을 고려해야 한다.

4.헌금은 자본인가?
앞의 여러 가지 예는 교회가 수익을 추구하는 증거들이다. 수익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도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인정되어 왔다. 칼빈도 이익을 얻으려는 인간의 본성을 타락한 본성으로 인정하고 이를 바르게 이용하려 하였다. 칼빈 이전에도 수익에 대해 어거스틴은 빈부의 격차를 원죄의 현상중에 하나로 보았고, 다른 교부들도 죄의 현상으로 부의 차별성을 보았다. 수익 자체가 인간의 삶에서 거부될 수 없는 삶의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수익이 만들어 내는 차별적인 현실을 성경은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칼빈을 비롯하여 개혁가들이나 혹은 교부들은 한결같이 가난한 자들의 필요가 부의 존재가치를 결정하도록 시험한다고 말한다.

신자는 개인적으로 사회 속에서 살면서 부나 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결과로서 부나 이익은 복음이 요청하는 삶의 대상물이다. 즉 다른 사람의 부족에 대한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서의 각성이 늘 필요하다. 이러한 복음 정신에 의해서 움직이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수익을 추구하여서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다. 단지 성도들이 얻은 소득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 헌금을 바친 것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수익을 전제하지 않고 다른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돕는다. 이것이 복음이 가진 참된 정신이다. 값없이 얻은 은혜의 복음을 따라서 값없이 나누어 주는 곳이 교회이다. 성도들은 자신의 소득에서 다른 가난한 사람의 몫이 있음을 인정하는 헌금을 늘 드리면서 소득이나 부 그리고 이익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늘 고백한다.

교회가 이렇게 존재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참된 복음의 빛안에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증거한다. 교회는 죄를 억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를 제거하는 기관이다. 이곳에는 죄의 영향물인 수익과 이익과는 거리가 먼 존재방식을 가진다. 값없이 준것을 값없이 나누는 곳이다.

교회에 성도들이 낸 헌금은 자본이 될 수 없다. 자본은 수익을 전제로 투자된 돈이다. 그러나 성도의 헌금은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값없이 나누라고 낸 것이기에 즉 교회가 운영하는 기관은 수익기관일수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중세 교회나 수도원의 타락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잊어먹은 발언이다.

비록 형식은 현대의 주식투자와 같이 개미 군단과 같은 성도들이 교회에 헌금을 내지만 절대로 이익을 목표로 수익을 목표로 헌금하지 않는다. 값없이 낸다. 값없이 의를 행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다. 복음 증거와 연약한 자를 위로하는 것이다. 사랑이 식어갈 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소망을 가지고 교회는 복음으로 서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 헌금을 자본금으로 여기고 병원을 수익기관으로 이용하고 수익기관의 성장으로서 확장하고 돈이 되는 일만을 골라서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수익금으로서 은급금을 지급한다고 생각해보자. 교회 건축을 하고 얼마의 수익이 생겼는가를 위해서 총회의 며칠을 소모한다고 생각해보자. 가능한 일인가? 주주 총회와 다름아닌 총회가 아닌가?

5. 이익에 대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
엡4:28절은 성도들이 노동으로 얻는 이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 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여기서 교회에 도둑질하던 자가 들어온다. 그러면 그에게 일단 도둑질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나서는 제손으로 수고해서 일을 하게 한다. 그래서 수익을 얻고 그것으로 먹고 사는 법을 가르친다. 이것만 가르치면 학교나 다름없다. 여기서 교회는 한걸음 나아가서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서 노동을 하라고 한다. 가난한 자의 몫을 하나님이 나의 노동의 결과에 담아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칼빈을 비롯해서 제8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신약적인 적용으로서 부의 사용을 말하였다. 부를 나만의 것으로 이해하고 향유하는 것은 바로 8계명을 어기는 행위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창조된 세상에서 이익을 내지만 차별을 누리기 위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이 땅위에 끝없기 있기에 그들을 위해서 섬김의 도구가 되어야 함을 8계명은 요청한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얻은 소득 중에 헌금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정신에 근거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연약한 이웃을 돌보는 것은 바로 나의 소득에 다른 사람의 몫으로서 이익을 준 것으로 믿는다. 이것은 교회가 직접 이익을 내는 일에 주체로서 뛰어들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수익을 내는 주체는 개인이나 회사이다. 교회는 그 결과를 소비하고 분배하는 주체일 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복음을 근거한 존재이기에 값없이 얻은 은혜를 값없이 나누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럼으로 세상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세상의 존재방식과 동일한 경쟁과 수익게임에 주체로 나서서 존재하고 그 이익으로 다른 사람을 유익케 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으로 존재하고 복음으로 봉사하는 곳이 교회이다.

# 글을 마치면서
성도가 복음을 가졌지만 세상속에서 수익을 취한다. 이는 삶을 영위하는 창조의 방식이다. 여기에 죄가 개입해서 부의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바꾸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부의 차별의 도전을 이용해서 복음을 성취하는 노력을 감당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교회는 복음을 가진다. 값없이 얻은 것을 값없이 내어놓는 곳이고 봉사하는 곳이다. 여기에 수익과 자본의 논리가 들어오면 안된다. 성도들의 헌금은 수익을 전제한 자본이 아니다.

큰 병원, 한수 이남의 최고의 암병원은 우리가 아니면 안 되는가? 그 명성이 우리교회를 부요하게 만들까? 아니면 교회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조그만 병원이지만 고통 받는 작은 자들을 위한 병원이 되면 안될까? 왜 서울의 다일천사병원은 운영이 될까? 그리고 그 병원은 더 확장되는 일이 가능할까? 지금 한국에 병원이 모자라는가? 왜 우리가 그런 사이버 나이프를 꼭 가진 병원이어야만 하는가? 왜 한수 이남의 최고의 병원이 되려고 하는가?

은급 재단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목사들이 다른 직분자들과 다르지 않다. 즉 다른 성도들이 세상속에서 연금 제단속에서 혹은 국민 연금속에서 생활을 의탁하듯이 목사들도 목사들의 조직을 교회와는 별도로 가지면서 다른 성도들과 똑같은 수익율의 게임을 하는 연금제단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연금만이 아닌 은급 재단으로서의 면목이 서도록 돈을 많이 내고 많이 가져가는 방식을 페지하고 일정한 액수로 환급하는 복음의 평균함을 성취해야 한다(고후8:13-15). 교회가 상당 부분의 은급부담금을 부담하는데 어떻게 복음의 방식을 저버리고 목사들이 자본주의 방식으로 환급을 생각하는가? 교회의 지도자들은 합동측의 납골당 사태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미 수익율의 게임을 위해서 우리 교단 은급금의 상당액수가 복음병원으로 들어갔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까?

교회는 수익과 관계없는 복음으로 존재한다. 거듭 성도들의 헌금은 수익을 전제한 주식투자가들의 자본이 결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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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세령 날짜 : 2004/06/15 조회 : 207

<수익기관의 교회 소유> 논의를 위한 문제제기



<수익기관의 교회 소유> 논의를 위한 문제제기

저는 최근에 "잘못된 교회 정치와 복음"이란 제목의 글을 쓰면서 고신 교회와 신학교의 관계에서 잘못된 교회 정치가 교회의 복음을 가리운 경우들을 몇가지 예시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고려학원의 수익기관인 복음병원과 관련하여 관선이사의 철수를 위해서 교회를 저당잡히고 헌금을 하는 일이 적절치 않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논의가 진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실제로 기독교보에 현유광 교수가 이일에 문제제기를 하셨습니다. 교의학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수익기관을 교회가 가질수 있는가를 논의하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학적 결론 위에서 경제적이며 경영학적인 차원을 논하자는 논지입니다.

사회와 국가에서 선한 가치로 통용되기도 하는 수익, 이익, 이윤, 잉여라는 문제를 교회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시는 복음의 원리와 배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가진 개인 성도들은 이윤을 추구하여도 되지만 그러나 교회는 이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할때 생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교회가 교인들의 편리를 위해서 기독교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을 운영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교회가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을 하면서 교회 건축을 할 수 있습니까? 또한 교회가 빌딩을 지어서 분양을 할수 있습니까? 더욱 큰 문제는 교단이 목회자의 노후를 보장하는 아름다운 취지를 위해서 은급제단을 만들었는데, 연금을 주기 위해서는 수익성있는 투자를 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수익성의 재단을 직접운영하고 장기적인 투자 수익이 있는 부동산에 투자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사회 경제 윤리적으로 하자가 없지만 교회가 직접할일입니까? 교회가 직접해야 할 일입니까? 아니면 목회자들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서 봉사해야 할 일입니까? 은급제도 밑에 있는 수익기관화의 문제점도 같이 복음병원과 같은 수준에서 논의를 해야 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규정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지 이윤을 추구하는 개인개인들만의 집합은 아니다라는 특별한 개념규정이 있어야 합니다. 시너지 효과로 불리우는 측면을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규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집단과 집합은 시너지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특수한 성격은 어떻게 규정이 되어야 합니까? 단지 시너지 효과의 한 부분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교회됨을 가능케 하는 위로부터의 주심이 별도로 있습니까?

갈수록 경제가 비중을 차지하고 여기에 따라서 나름의 경제적 윤리가 요청되는 사회와 국가와 달리 교회가 가진 복음의 윤리는 다른 윤리입니까? 잉여나 이윤 그리고 이자 그리고 이익과 수익이라는 경제용어가 낮 설은 교회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여러 형제들의 지혜를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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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세령 날짜 : 2004/06/15 조회 : 258

잘못된 교회 정치와 복음



# 기독교보 게시판에 지난 5월 31일에 올린 글입니다. 필요한 논의 전개를 바라면서 이곳에도 올립니다.


잘못된 교회 정치와 복음

교회 정치는 교회를 세우는 질서이다. 그렇기에 교회정치는 세상 정치와 다른 교회적인 논리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교회적인 논리는 바로 복음이다. 세상의 적자생존, 경쟁, 힘의 논리등과 다른 것이 바로 교회 정치의 논리이다. 섬김과 잃어버림과 낮아짐 그리고 거룩함의 보존이다.

오늘 고신교회가 격고있는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교회를 움직이는 교회정치의 논리에 세속적인 방식이 너무 깊이 자리잡음이다.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거슬러서 짚이는대로 나름의 연결을 구하되,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피려한다.

1. 현재의 고려학원 관선이사 해결노력
교회가 수익기관을 둘수 있는가의 기본적인 물음 제기가 계속되고 있는가운데, 고신교회는 이렇게 답을 하고 있다. 일단 살리고보자. 그리고 살리기 위해서 예배당도 저당잡히고, 교회를 봉사하기 위해서 세운 기관들의 건물도 저당잡히고, 더우기 선교사들의 후생과 관련된 비용들도 저당잡힌다. 그리고 성도들은 헌금을 계속하라고 홍보를 한다.

만약에 신학적으로 교회가 수익기관을 두는 것이 옳지않다고 결론이 난다면 이 모든 노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신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병원을 살려야 하는가? 오히려 병원을 끊고나면 신학교가 참되게 사는 방식이 있지 않는가?

이즈음에 경제논리가 동원된다. 저 웅장한 건물이 아쉽고, 다시 건물을 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라고 질문한다. 과연 교회가 헌금을 할 것인가를 의문시한다. 교회는 자신을 인도할 목자를 위해서 지금도 헌금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의문시한다. 어리석은 질문이 아닌가? 교회는 지금도 신학교를 위해서 헌금하고, 목사를 양성하는 일이 중요하고 이일만은 교회가 할일이라고 여기고 사람을 기르고 후원하고 상회비를 기꺼이 내고 있다. 그런데 그 돈을 전부 병원살리는 일에 집어 넣고 있다.

병원이 살면 신학교가 살것이라고 누가 보장해 주었는가? 진리와 순결한 거룩함 그리고 잃어버림 때문에 교회와 신학교가 살수 있는 길이 있음을 왜 재산으로 환원시키는가?

교회가 가진 복음의 논리로서 오늘의 문제를 정확히 보려고 하지 않는다. 회계의 손익은 볼수는 있어도 교회가 생존하는 논리는 잃어버리고 있다. 교회와 신학교는 진리와 거룩함을 붙잡기 위해서 즉 나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자리에서 더 안전한 자리매김이 가능하다.

섣부른 정치논리와 경제감각으로 교회문제를 다루지 말자. 교회는 무어라해도 복음의 부요함이 있다. 다시 한번 논의를 시작하자. 교회가 과연 수익기관을 가지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이것을 살리기 위해서 교회의 헌금을 이렇게 부어넣어도 되는가?

2. 이성구 교수 학위 논문에 대한 총회 결정과 동대구 노회의 목사 제명
이성구 교수의 학위 논문에 대해서 오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입장이라는 교회의 판결을 내렸다. 교회가 결정하면 전부 옳은가? 결정에 진정성이 있는가? 신학교의 교수회의가 문제가 없다는 결정을 하여서 받은 것을 그리고 총회가 주석을 쓰는 것으로 문제를 정리한 것을 다시 소총회를 열어서 뒤집고, 본인에 대한 공회의 소명기회도 한번 없이 교회가 결정을 했다. 여기에 타락한 교회 정치적인 논리가 없는가?

세상정치의 추악한 면이 이데올로기로서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 현실에서는 빨갱이로 대표되는 메카시 방식이 존재했다.

정치적인 행위에 분명한 잘못을 지적하고 도의적이며 실증적인 죄목으로 교수의 자리를 내어놓게 해야한다. 근거도 없이 신학적인 문제로 사람을 잡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교회 정치는 교회를 압살하고 진리를 가리운다. 개혁교회의 성경관을 좀 더 검토해보자. 독자의 선입견으로 채워서는 안되는 구약학의 학문적 논리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정치라는 수의 논리로 표결해 버렸다.

마찬가지의 한 측면이 동대구 노회가 목사를 연속해서 3명이나 제명한 일이다. 주일과 십일조에 대한 입장이 신대원 교수들과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문제가 없음이 확인되어도 정치적인 논리에 의해서 제명을 한다. 이단은 아니지만 함께 할수 없다는 것이 정치적인 논리가 아닌가? 교회의 헌법은 해석의 외연이 시대에 따라서 적용하는 과정에서 제고될 수 있다. 교회의 전통이 진리와 양심을 질식시켜서는 안된다.

같이 할수 없어서 제명한다. 무슨 패거리 정치집단이 교회나 노회인가? 서로 부족하기에 함께 격려하며 같이 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 집단이 아니기에 진리에 위배되지 않으면 서로 안고 이해하고 가야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 아닌가? 교회 정치가 복음을 밀어내고 있다.

4. 신대원 독립과 개혁파의 정치적 오류
신대원을 전문대학원으로 전환하자는 이야기는 오래되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진행했던 분이 신대원 원장었다. 실제로 총회가 이를 결정하려는 분위기로 갔다. 그러나 이에 결정적으로 제동을 걸었던 흐름이 개혁파의 세력이었다.

당시 원장의 논리는 교회가 신학교를 직영하는 것 외에 다른 수익기관과 교육기관을 가지는 것을 반대한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개혁기관들은 교회의 성도들이 운영하는 일이지, 교회가 직접 운영하는 일이 아님을 밝혔고, 이러한 신학적 교회적인 논리에 근거해서 신대원을 고려학원 법인에서 독립하기를 요청했다. 더욱 국가에서도 전문대학원 제도가 신설되어서 여건이 조성되었다. 수도권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시도는 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다양한 반대 의견속에는 고신 대학은 남이냐는 여론을 몰았다. 그리고 교회 정치적인 논리를 가지고 두개의 학원 이사회를 조직하여 정치적인 자리나눔을 하려고 한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지웠다. 결국은 교회의 본질적인 이해속에서 교회를 역사적인 형태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은 정치 논리와 현실 논리에 의해서 물거품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비록 관선이사 직전 총회가 분리를 결정했지만 그러나 시기가 늦어져서 이제 고려학원의 세기관은 한배를 탄채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현재 신대원만을 살리자는 논리가 결코 성립될수 없는 자리에 이르지 않는가? 결국은 신대원에 자연과학부가 올라오며, 대학은 신급과 관계없이 학생을 모집하자는 안이 나온다. 결코 신대원이 홀로 안전한 지대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신대원의 분리 결정이 너무 늦었다. 왜 그때 바른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논리로 분리를 하려고 할때 이를 개혁파를 비롯해서 교회는 거절을 했는가? 정치논리의 결정적 함정이다.

현재에 개혁파가 그 실질적인 지도력을 상실한 이유로서 바른 교회적인 논리로서 교회를 세우고 이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닌 것을 말하는 것과 온전한 것을 견인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으로 함께 가야한다. 병원과 관련된 많은 부정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신학교를 세우는 긍정을 했었어야 했다.

3. 고신대학 인가와 속임
고신대학을 인가받기 위해서 교회의 결정없이 인장을 도용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대학은 공익법인이었던 복음병원을 수익기관으로 변경하였고 오늘에 이르렀다. 병원은 커졌고, 대학도 발전했지만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터지기 직전이다.

이것은 이사회를 거짓으로 조직한 일의 연속선 상에 있다. 도대체 신학교나 그 건물과 재산이 얼마나 귀하기에 교회는 스스로 가진 복음의 권세를 포기했는가? 코람데오는 누구를 위한 슬로건이었던가?

4. 환원과 신학교
합동이 잘못되었으므로 환원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그렇듯한 논리이다. 그러나 왜 합동이 잘못되었는가? 졸속이었을수 있지만 오랜 역사의 서구의 교회와 달리 한국 교회는 피선교지였고, 전쟁을 격고난 어수선한 한국 교회가 자신의 방식과 필요에 의해서 한 교회됨을 이루었다. 몇가지의 합동을 위한 조건들이 있지만 그 무엇보다 한 교회 됨은 중요하다. 분리를 만들었던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는 이를 서로 부둥켜 안고 받았다.

그리고 나서 정치적이던 혹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인지는 모르지만 합동측은 합동조건과 달리 고려신학교를 페교시키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표시하였고 이에 당시 고신은 하나된 교회를 다시금 깨뜨리고 환원을 하였다. 하나된 교회를 유지하는 일에 절대적인 걸림돌은 고려신학교라는 유무형의 재산이었다. 합동측에 박윤선 박형룡 교수가 있었다. 합동측이 자유주의 신학이기때문에 환원했다고 말할 수 없다. 즉 고려신학교가 진리 그 자체일수 없다. 복음은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다. 한시대의 진리의 상징은 참된 교회앞에 사라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나면 그 의미를 후일 역사가 설명하고 교회가 말해 준다.

하나된 교회를 만들면서 고신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자는 복음의 논리를 가졌다. 그러나 환원하면서 우리는 정치적인 공세에 정치력으로 맛섰다. 복음이 가진 잃어버림의 실제가 고려신학교일수는 없었을까?

글을 마치면서
거듭 교회의 위기는 복음의 논리를 잃어버리고 세속화된 교회정치의 논리에 휩쓸릴때 일어난다. 지금도 문제를 수습하는 논리가 타락한 정치 논리와 산술 논리에만 집착하면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 현실이 유지되는 것이 진리가 아니다. 급한 것처럼 보였던 수습은 벌써 일년을 지나고 있다. 그동안 논의를 제기했지만 급하다는 현실에 논의조차 해보지 못했다. 바른 교회의 논리로 수익기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다루고 문제 수습방안을 찾는 지혜를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시고 이를 믿음으로 수용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