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초기 기독교사 - 조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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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초기 기독교사 - 조헌국


거창군 기독교 장로교회사



작성자 조헌국(거창교육청 학무과장, 진주교회 장로)




1. 거창지역 교회 설립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의 기록을 통해 보면 거창의 첫 교회 성립은 1904년 가을 거창군 고제면 개명리 교회이다.
초기에 박순명(朴順明), 김종한(金宗漢) 외 십여 명이 믿어 교회가 성립되고 미국인 선교사 스미스((W. E. Smith: 沈翊舜)와 조사(助事)(요즘 전도사와 같음) 김주관(金周寬)이 시무하였다. (김주관은 1913년에 부산 초량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받았다)
두 번째 교회는 1906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교회로서 선교사 스미스의 전도로 안덕보(安德保), 김명칠(金明七), 김순일(金順一) 등이 믿고 안덕보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니 조사 오형선(吳亨善)이 시무하였다.
다음으로 1906년 거창군 가조면 마상리 교회로 선교사 스미스의 전도로 양진규(梁鎭奎)가 믿고 신자가 점차 많아 교회가 성립하였다. (현재 가조교회로 이어져 온다.)
1907년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 가천교회가 선교사 스미스의 전도로 추용경(秋鏞競) 부자(父子)가 주님을 믿고 연보하여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08년에는 의병의 난으로 거창군 교회가 적지 않은 피해를 받았다.
1909년 거창군 신원면 와룡리 교회가 성립하였다. 서울 박응용(朴應用)의 전도로 본동 서재에서 40여 명이 예배를 드리다가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인도자 김윤명(金潤明)이 근거없이 의병 혐의로 잡히니 교회가 환란을 입어 겨우 7명이 예배를 드리다가 그 후 부흥하였다. (현재는 교회가 와룡리에는 남아 있지 않는다.)
1909년 거창읍교회가 성립하였다. 조재룡(曺在龍), 김억주(金億住) 등이 주님을 믿고 오형선 집에서 예배를 드리더니 읍내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18년에는 오형선을 장로로 안수하여 당회가 성립하였고 그 후 주남고(朱南皐), 심문태가 장로로 피선되고 목사로는 이재풍, 김길창이 시무하였다.
1913년 거창군 주상면 성기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호주 선교사 맥레(F. J. L. Macrae: 孟皓恩) 과 권서(勸書)(성서보급인으로 전도사 격임)인 오형선의 전도로 믿는 자가 많아 설립되었다.
이상의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거창은 1904년 가을 부산, 창원, 함안, 밀양, 김해, 합천, 함양 등 14 개 처에서 전도한 스미스 선교사에 의해 고제면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고 1908년에는 의병의 난으로 교회에 환란이 심했고 이듬해인 1909년에 비로소 거창읍에 교회가 성립되었다.
1923년 전에는 거창군에 일곱 군데 교회가 성립되었다. 1읍 11면인 거창군에 북상면, 위천면, 마리면, 남상면, 가북면에는 그 때까지 교회가 설립되지 않았다.
미국 선교사 스미스의 전도로 고제 개명, 웅양 노현, 가조 마상, 남하 가천 등 네 교회가 설립되고 호주 선교사 맥레가 주상 성기교회를 설립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선교사가 처음 들어오기는 1885년 4월 미국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 두 분이었다. 그후 미국 외에도 카나다와 당시 영국 식민지인 호주장로교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910년 당시 조선에서 선교를 하던 국가끼리 선교구역을 나누어 맡기로 하여 부산 경남은 호주 선교부 관할 지역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먼저 와서 활동하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1914년 철수하였다. 1889년에 한국에 온 호주 선교부는 부산진에 본부를 정하고 진주(1902년), 마산(1911년), 통영과 거창(1913년)에 지부를 개설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와 병원을 열기도 했다.
거창에 기독교 복음을 처음 전한 외국인 선교사는 미국 북 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스미스(Walter E. Smith: 沈翊舜) 선교사였지만 경남 선교를 맡은 호주 선교사들이 1913년 거창에 지부를 열고 계속 활동하였다.
스미스 선교사는 1874년 미국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1891년 18세때 뉴윈드에서 메릴랜드 대학에 입학하여 1895년에 졸업하고 1897년 24세때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898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수료했다. 1년간 목회 훈련후 목사 안수를 받고 1902년 한국 선교사를 희망하여 파송받았다.
아담스(J. E. Adams)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뒤 후임으로 미국 북 장로회 부산 선교부에 배치 받았다. 후에 초량교회 김주관에게서 어학 공부를 하였고 그와 함께 거창, 함양, 합천 등지를 선교하였다.
김주관은 1858년 함안 칠원 출신으로 상업차 부산에 들러 영선현에 자리 잡고 교회에 출석하여 1903년 8월 5일 45세때 세례를 받고 선교사를 돕다가 1913년에 초량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다.
조선 장로교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미국 북장로교회 파송 스미스 선교사가 개척한 14개처 교회 설립은 다음과 같다.
1903년 김해 시례동교회, 1904년 가을 거창군 개명리 교회, 1905년 김해 내삼교회, 1906년 동래 구포교회, 창원 북부 교회, 거창 노현리 교회, 거창 마상리 교회, 함양 화산교회, 1907년 함안 계내교회, 김해 생곡교회, 거창 가천교회, 함양 봉산교회, 1908년 밀양읍교회, 합천 팔산교회 등이다.
스미스 선교사는 1912년 말까지 초량교회 전신인 영주동 교회 즉 영선현 교회에서 활동하였다. 어빈(Irvin)등과 경상도 나환자를 위한 사업을 하기도 하였고 1910년에는 선교부 회장을 맡기도 했고 1917년에 귀국하여 1932년 7월 6일 델라웨어주 웰밍턴 자택에서 59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부인 퍼넬(Grace Pernell)은 1869년 생으로 1남 2녀를 낳고 1945년에 소천했다.
거창 초기 기독교인으로 중요한 인물은 오형선으로 주상 성기교회 권서로, 웅양 노현교회 조사로 시무했다. 거창읍교회 설립 때는 처음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처음 장로가 되어 당회가 조직되게 하였다. 거창읍교회 두 번째로 장립한 장로는 주남고이었고, 세 번째는 심문태이다. 처음 목사는 이재풍 목사이고 2대는 김길창(金吉昌)목사가 시무하였다.
조사로는 고제 개명교회 김주관과 웅양 노현교회 오형선이고 신원 와룡교회 김윤명은 인도자로 나온다.
거창군 초기 교인은 고제 개명교회의 박순명, 김종한, 웅양 노현교회의 안덕보, 김명칠, 김순일, 가조 마상교회의 양진규, 남하 대야 가천교회의 추용경 부자, 거창읍교회의 조재룡, 김억주, 신원 와룡교회는 서울 박응용이 전도한 것으로 나온다.


2. 거창 기독교인 항일 독립운동

거창군사에 수록된 기록과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하면 거창에서 있었던 군정서 의용병 및 자금 모집사건은 1934년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펴낸 고등경찰요사에 의해 알려졌다.
1919년 8월 경북 칠곡군 출신 이덕생과 김천군 출신 김태연이 거창읍 중앙리 359번지 오형선(당시 42세)의 집에 와서 오형선, 고운서, 주남고(34세: 주남선 목사의 처음 이름))와 만나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 군자금과 의용병(독립군)을 모집하여 만주의 군정서(軍政署)에 파견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김태연이 신도출로부터 군자금 813원을 받고 주남수(30세: 주남고 동생), 이사술, 이성년, 백기주 등 4명을 의용병으로 선발, 인솔하여 만주로 갔다.
1920년 3월 주남수(朱南守)는 거창으로 돌아와 오형선, 송명옥과 공모하여 오형선의 집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신한별보(新韓別報)를 등사하여 배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주남고는 1년형을 받아 복역하였으나 그 외 사람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주남수는 출감후 다시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가담하였다. 그는 1982년 독립유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기미 독립만세 운동과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한국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주남고(朱南皐)(후에 주남선으로 이름을 바꿈)는 1888년 9월14일 거창에서 출생하여 15세때는 군수로부터 효자상을 받을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다.
조재룡과 함께 시장에서 전도하는 호주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고 기독교로 입신하여 1912년 맥레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914년 4월 집사로 임명받고 1916년에서 1917년까지는 함양읍교회 5대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지역 독립만세운동에 투신하여 군자금 모집에 관여한 것으로 1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투옥되었다가 일시 보석으로 출옥했던 1919년 12월 28일 오형선 장로에 이어 두 번째 장로로 장립받고 그 후 1921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0년 4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6월 11일에 목사 장립을 받고 소천하신 이홍식 목사 후임으로 취임하였다.
설교 때 민족의식을 불어넣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그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일제는 거창읍교회에 압력을 넣어 주 목사를 물러나게 하여 1938년 9월에 강제로 사임 당하였다.
무임목사가 된 주남고는 1940년 서상원, 이주원과 함께 140원의 운동자금을 가지고 경남을 순회하며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일본 경찰이 1940년 7월16일 다시 체포하여 평양 감옥에 수감하고 고문과 회유를 되풀이하였지만 끝내 굽히지 않았다. 1945년 5월, 공판에 회부하였다. 주남고는 옥중에서 이름을 주남선(朱南善)으로 바꾸었다.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과 더불어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그 해 10월 사임한 이운형 목사 후임으로 1945년 12월 다시 주남선 목사가 7대 목사로 다시 부임하여 거창읍교회를 맡았으며 1946년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현재 고신대학의 전신이며 장로교 고신 교단의 모체가 된다. 그 해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유공자 표창을 주려 했으나 사양했다.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951년 3월 63세로 서거했으며 그 뒤 ‘해와 같이 빛나리’ 라는 전기가 발간되어 그의 투쟁기록과 신앙생활이 소개되었다.
1924년 2월 3일 거창교회 세 번째 장로로 장립한 심문태 장로는 거창 출신으로 1934년 공부하러 호주에 갔다가 그 후 종교교육의 특별과정과 청소년 활동에 대한 연구를 위해 미국에 갔고, 1937년에 귀국하여 해방 후에 진주교회(현재 진주시 봉래동 소재) 목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심문태는 1919년 3월 대구에서 성경학교 재학중 이만집 목사가 주도하는 만세 시위운동에 교사와 같이 참가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10월의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그 공훈으로 정부로부터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이상의 기록에서 우리는 거창이 낳은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인 오형선 장로와 주남선 목사, 주남수 집사 형제와 심문태 목사를 만나게 된다.
특히 거창에서 독립운동을 한 주남선 목사는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동생 주남수는 같은 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아 형제가 독립 유공자로 업적을 남겼다.


3. 거창교회 설립과 초기 교역자

거창교회는 1908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금광업을 하던 서울 출신 오형선이 서울 기독 청년회관(YMCA)에 출입하면서 복음을 듣고 관심이 있던 중 웅양교회 안덕보 집사의 전도로 믿기로 작정했다. 1909년 5월 금광사무소에서 금광 사무원 박창호를 권유하여 예배를 시작했다.
이 때 거창읍 조재룡과 김극서는 이미 2년전 안의교회 교인 조정섭의 전도로 믿었으나 예배당이 없어 곤란을 느끼던 중 금광사무소에서 예배드림을 알고 동참하였다. 안덕보 집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건축연보를 하니 25원이 되므로 거창읍 하동 현 자생의원 터에 있는 초가 3간을 18원10전에 사서 예배당으로 했다.
1909년 10월 10일 주일에 거창군내 교인 다수가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제직을 선택하니 영수에 오형선, 집사에 조재룡, 서기에 김극서, 감독에 김억주 등이 당선되어 이 날을 거창읍교회 창립일로 하였다. 교인 수는 18인으로 늘어나 이 때 주남고가 믿고 후일 김억주는 고향인 성주로 가고 김극서는 만주 봉천으로 가서 장로가 되었다. 오형선은 1923년부터 1924년까지 함양읍교회 9대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09년 10월에 박성애 초대 전도사가 부임하였는데 그는 1878년 부산진 출생으로 1905년 카를 의사 겸 선교사(Hugh, Currell: 巨烈烋)와 함께 그 가족이 진주로 와서 전도사로 도우다가 거창에서 시무후 1915년에 진주 옥봉리교회(현재 봉래동 소재 진주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다가 신학을 하고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첫 한국인 목사로 시무하다가 그후 창원읍교회로 옮겨 갔다.
거창읍교회 제7회 제직회록(1914.12.7)과 제9회 제직회록(1915.2.7)에 의하면 제직회 참석자는 길아각, 맹호은 선교사와 황보기 조사, 최성봉, 주남고, 이형근, 주남수, 오형선 집사였다.
1916년 4월 한국인 초대 담임 목사로 이재풍 목사가 부임하여 1918년 12월까지 시무하였다. 2대는 김길창 목사가 1923년 1월에 부임하여 1926년 7월까지 시무하였다. 김길창목사는 1919년 6월 9일 마신 문창교회 전도사를 하다가 1921년 9월 21일 장로로 장립받았다가 후에 목사가 되어 거창읍교회에 시무하였다.
3대는 김만일 목사가 1926년 9월에서 1929년 6월까지 시무했는데 그 후에 1943년부터 1946년까지 부산 초량교회에 시무하기도 했다., 4대는 이홍식 목사가 1929년 11월에 부임하여 1930년 4월에 소천하였다.
그 후임에 5대 목사로 1930년 6월에 취임한 주남고 목사는 1938년 9월 강제로 사임하고 1940년 7월 다시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가 1945년 8월 해방이 되어 출옥하였다.
주 목사가 투옥된 후 1939년 1월에 6대 목사로 이운형 목사가 부임하여 시무하다가 1945년 10월 사임하고 12월에 주목사가 다시 7대 목사로 취임하였다.
주 목사는 1946년 6월 20일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의 전신)를 한상동, 박윤선 목사와 함께 설립하고 1948년에는 고려고등성경학교를, 1950년 4월 20일에는 거창 성경학원을 설립했다. 6.25전쟁기간에는 교인들 대부분이 피난을 갔지만 주 목사는 폭격 속에서도 기도와 심방을 계속하며 교회를 지키다가 1951년 3월 23일 간암으로 향년 63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주 목사는 거창교회에서는 집사로, 장로로, 전도사로, 또 두 번에 걸쳐 목사로 시무하면서 봉사하였다. 해방후 1946년 장로교 교단이 재건되고 신사참배자 자숙과 고려신학교 인정 문제로 경남노회가 분열되고 1952년 현재의 장로교 고신 교단이 성립되는데 출옥성도인 주 목사는 그 중심의 인물로 활약이 컸다. 2001년 1월 21일에는 거창교회가 주남선 목사 장학회를 창립하였고 같은 해 4월 23일에는 주 목사 서거 50주년 기념 강좌를 고신대와 공동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주남선 목사 장남 주경중 성도 (후에 장로 장립 받음)가 설립자였던 거창고등학교 설립에도 거창교회가 모체가 되어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거창지역의 중심교회인 거창읍교회는 1965년에 거창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동안 거창교회가 분립 내지 개척한 교회는 다음과 같다. 1934년 무릉교회, 1951년 1월2일 창남교회, 1963년 거창제일교회, 1978년 거창중앙교회, 1978년 5월 5일 둔마교회, 1978년 5월 14일 가지리 군인교회 등을 세웠다.


4. 호주선교회 거창지부 활동

호주선교회 부산 경남지역 종교 및 교육활동 보고서를 보면 1913년에 조직된 거창지부는 거창과 안의, 함양, 합천, 초계를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맥레(Macrae:孟皓恩) 목사는 1910년 9월 한국에 도착하여 진주에 2년 있다가 그 후 1912년 5월 자신이 이미 순회설교를 하고 있던 거창에 새 지부를 개소했다. 그는 곧 새로 도착한 켈리(Kelly:吉雅各) 목사 부부와 합류했다.
그들은 해외선교회가 설립한 집에 거주했다. 그러나 맥레 목사는 한국식 집을 짓는 것을 제안했으며 해외선교위원회는 두 번째 거주지를 세우는 것에 동의했다. 그는 이 집으로 그의 신부인 홀(Hall) 양을 데려 왔는데 그녀와는 1915년 1월 일본에서 결혼했다. 그 해 중반에 맥레 목사는 창신학교와 그 지역의 교회를 담당하게 되어 마산으로 이주했다.
거창지부가 처음 개소되었을 때 장로교 여자선교회는 거창에 아무 선교사도 보내지 않았다. 당시 거창지부에서는 한국의 권서 여인들이 여성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후 1914년 새 선교사들인 에베리 양, 스키너 양이 거창에 배치되었다. 에베리 양은 여성들의 복음 전도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어 진주에서 1년 봉사후 휴가차 귀국해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스키너 양은 초등학교를 세우려고 계획했으나 새로운 총독부 규제로 등록 신청이 불가능하여 강습소라는 비공인 학교로 만족해야 했다. 이 강습소는 이전에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많은 소녀들의 교육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더 중요한 것은 비록 교육과정상 허용되지는 않았지만 정규학교 교육내용을 가르치기 전에 매일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점이다.
1916년 9월 스키너 양은 마산으로 옮겨가고 그 후임에 스코트 양이 거창에 왔다. 그녀는 그 후 23년간 거창지부에서 교육활동, 순회선교활동 등을 하여 ‘거창의 감독자’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1961년 멜버른에서 죽었다.
켈리 목사 부부가 사임하고 1916년에 도착한 토마스 목사 부부가 1922년 사임했다. 토마스 목사와 켈리 목사는 지부의 전도 사업을 담당했고 토마스 부인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많은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활동도 담당하였다.
그 후로는 거창지부에는 코트렐 목사 부부가 거주한 2년(1936-1938)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성 선교사가 배치되었다.
일부 지부 감독은 주로 진주에서 컨닝햄 목사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지부의 책임은 대부분 여성 선교사들 즉 1940년까지 스코트 양, 1919-21년 태트 양, 1921-22년 클라크 양, 1922-29년 맥카거 양, 1929-40년 던 양, 1년 동안 학교와 유치원에 많은 도움을 준 엘리스 양에게 주어졌다.
1923년 세 가지 자격증을 소유한 간호사 딕슨 양이 유아 복지와 보건 진료를 발전시키기 위해 거창에 전임으로 임명되었다.
거창에서 여성활동과 아동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고 1929년에는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 보고되었다. 스코트 양은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업을 시작하고 완료했지만 불행하게도 일꾼의 부족으로 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1930년에는 아동활동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대부분의 교사가 기독교계 상급학생들로 구성되는 하계학교에는 1,000명 이상이 등록했다.
1935년에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선교사의 순회 전도활동은 없었으나 거창지부에서 개최한 성경학급에는 300명의 여성이 참석했다. 그리고 마을 성경학교에는 약 800명의 아동이 등록하였다.
1938년 새로운 교회가 거창에 세워졌고 장로교 여자 선교회 건물들은 수리되었다. 신사참배 정책은 한동안 강요되지는 않았으나 그 정책을 준수하도록 하는 압력이 계속되었다.
그 후 아동 복지와 건강 진료활동은 선교회와는 별개의 주요 사업이 되었다. 1935년부터 또 다시 정치적 간섭이 증가했다. 딕슨 양은 처음부터 낡은 건물과 부족한 장비로 운영했으나 1940년 9,246엔의 비용으로 전부터 계획해 왔던 훌륭한 진료소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사회사업은 1941년 4월 끝이 났다. 건물은 폐쇄되고 선교사는 귀국했다. 1947년 전쟁이 끝난 뒤 한국에 다시 온 던 양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귀국할 때까지 한국인들과 같이 일했다. 그 후 그녀는 1958년 은퇴할 때까지 순회 전도활동과 아울러 지역의 성경학급과 성경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1923년부터 한국에서 봉사했고 한국인과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940년 말 통계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거창지부에는 3명의 전임목사, 4개의 조직교회, 26개의 불완전하게 조직된 교회, 2,251명의 신자가 있었다.
호주 선교부 정책은 의료활동은 진주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진료소 활동은 모든 지부에서 어느 정도 수행되었다. 그 가운데 아동 복지 활동과 건강진료소 활동은 다음과 같다.
1914년 에베리 양이 거창에 임명되었다. 거기서 그녀는 어머니들과 유아들을 돌보는 특별한 활동을 하였다. 어느 지역에나 그러한 활동의 필요성은 명백히 나타났다.
한편 거창에서 현대식 유아복지 건강센터의 설립을 위한 계획이 진전되었던 것은 1923년이었다. 호주 빅토리아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유아복지 대학원 과정을 이수한 딕슨 양은 이 분야가 한국에 특별한 기여를 할 것이라 보았다.
자금이 모아지고 계획이 세워졌으나 건축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휴가에서 돌아온 후였다. 그 동안 유아 복지 활동은 불충분한 시설물과 있기는 하지만 부적절한 건물로 상당히 어렵게 수행되었다.
새 건물은 1940년 4월 17일 모든 지역 교회와 당국의 관리들이 참석한 기념식을 가지고 문을 열었다.
그 센터는 의료 감독권을 가진 진주병원의 산하기구여야 한다는 조건 하에 허가가 이루어졌다. 그 해 동안에 테일러 박사와 그 후 맥라렌 박사는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였고 딕슨 양은 상당히 자주 계속적으로 방문하였다. 한국인 간호사는 부인 학급을 만들어 조언도 하고
위생과 육아에 관해 강의하며 그 밖의 일들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여성, 아동, 나환자들이 치료를 받았으나 의사들이 방문하는 동안에는 많은 남성들 또한 진료를 받았고 작은 수술도 행해졌다.
끊임없는 경찰의 간섭은 활동을 어렵게 하였으나 딕슨 양은 1936년 2,537회의 방문을 하면서 1,099명의 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었고 1,042건이 그들의 가정에서 왕진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심한 경우는 진주로 보내졌고 때로는 진료비가 지불되기도 하였다.
유아 복지활동은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고 지역민들은 1940년 교육활동이 폐쇄된 후에도 활동의 재정비를 요구했다.



거창 거주 호주 선교사 명단(한국 도착순)





※참고 문헌
거창군사(居昌郡史) 1997년, 거창군 군사편찬위원회 편집
거창교회 요람 2002년 거창교회 편
고난과 은총의 길(함양교회 90년사 1908-1998) 1998년, 함양교회 김종혁 목사 편저
마산 문창교회 100년사 (1901-2001)
부산진교회 100년사 1991년, 편찬위원회 박효생 편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 상권(1865-1911) 192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발행, 차재명 저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 하권(1912-1923) 1968년, 한국교회사학회(회장 백낙준) 편
진주교회사(1905-1930) 1992년, 진주교회 조헌국 편
초량교회 100년사
호주선교회의 부산 경남지역 종교 및 교육활동 1995년, 광명출판사, 이원호, 김성혜 번역
독립유공인물록 1997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994년, 국가보훈처
이 원고는 거창군사(居昌郡史)(1997년 6월 발행) 제7편 종교 제3장 개신교 제1절 개신교의 개관, 제2절 개신교의 현황과 도표 (P1444-6) 등 내용이 빈약하고 틀린 내용이 있어 수정 보완할 필요를 느끼고 자료를 정리했다.
1 항은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 상권(1865-1911) 192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발행, 저자 차재명과 사기 하권(1912-1923) 1968년 한국 교회사학회(회장 백낙준) 편 등 사기 상 하 두 권에 나오는 교회 조직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2 항은 거창군사 제2편 역사적인 변천, 제3장 역사, 제19절 일제시대의 거창 내용 중 5 군정서 의용병 및 자금 모집사건(P684)과 7 거창 출신 독립운동가 차항. 주남선 목사(P692)의 기록과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참고한 것이다.
3 항은 거창교회, 함양교회, 부산진교회, 초량교회, 진주교회, 마산 문창교회의 역사를 참고하였다.
4 항은 ‘호주선교회의 부산 경남지역 종교 및 교육활동’ (1995년 출판, 영문번역서, 광명출판사, 이원호, 김성혜 번역) 책자의 선교지부편 거창지부(PP"159-161)와 의료활동편 아동복지활동과 건강진료소(PP"124-126) 부분의 내용이다.





연재를 마치고
그 동안 아림신문사의 배려로 거창군 기독교 장로교회사를 소개할 수 있었다. 이를 집필한 필자는 작년 9월 거창교육청에 부임하여 와서 각종 자료를 보는 중에 거창군 기독교가 그 역할에 비하여 너무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서 가지고 있는 자료를 통해 되살려 보고자 했다.
이번 원고는 거창군사(居昌郡史)(1997년 6월 발행) 제7편 종교 제3장 개신교 제1절 개신교의 개관, 제2절 개신교의 현황과 도표 (P1444-6) 등 내용이 빈약하고 틀린 내용이 있어 수정 보완할 필요를 느끼고 필자가 가지고 있는 다음 자료를 참고로 하여 정리했다.
1 항은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 상권(1865-1911) 192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발행, 저자 차재명과 사기 하권(1912-1923) 1968년 한국 교회사학회(회장 백낙준) 편 등 사기 상 하 두 권에 나오는 교회 조직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2 항은 거창군사 제2편 역사적인 변천, 제3장 역사, 제19절 일제시대의 거창 내용 중 5 군정서 의용병 및 자금 모집사건(P684)과 7 거창 출신 독립운동가 차항. 주남선 목사(P692)의 기록과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참고한 것이다.
3 항은 거창교회, 함양교회, 부산진교회, 초량교회, 진주교회, 마산 문창교회의 역사를 참고하였다.
4 항은 ‘호주선교회의 부산 경남지역 종교 및 교육활동’ (1995년 출판, 영문번역서, 광명출판사, 이원호, 김성혜 번역) 책자의 선교지부편 거창지부(PP"159-161)와 의료활동편 아동복지활동과 건강진료소(PP"124-126) 부분의 내용이다.

거창의 기독교는 전래의 역사가 깊다. 도내 시군 가운데 먼저 복음이 들어간 지역은 1896년 창원 월백리 교회, 1897년 함안 사촌교회, 1899년 함안 이령리교회, 1897년 밀양 춘화리 교회, 1898년 김해읍교회, 1903년 김해 시례교회, 1904년 김해 일천교회, 1901년 구마산교회, 1902년 통영 동항리교회 등 6개 시군이고 그 다음에 교회가 성립된 지역이 13곳이나 된다.그리고 거창은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들어오고 나중에 경남지역을 맡은 호주선교부의 지부가 부산, 진주, 마산, 통영에 이어 1913년에 개설되어 활동한 곳으로 서북 경남의 선교 중심지였다.
신앙의 전통도 거창지역에 항일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이 많고 특히 주남선 목사는 형제가 항일운동을 하고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 들어가 광복과 함께 출옥한 성도로서 그 후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고신교단을 만들어 보수신학의 바탕에서 좋은 신앙 전통을 남겼다. 거창읍교회에서는 장로로, 목사로 시무하며 거창지역을 장로교 고신교단의 주요지역으로 이끌어 갔다.
그리고 기독교가 지역에 미친 영향도 커서 교회가 많이 설립되고 기독교 학교인 거창고등학교가 개교되어 전영창 목사 가족들이 봉직하며 감화를 끼쳐 수많은 신앙 인물들을 배출해 내었다. 또 한국 교육에 대안학교의 기수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 거창이 교육도시로 이름나고 많은 학생들이 유학 오는 곳이 되었다. 또 농촌지역으로서는 가장 먼저 YMCA도 조직하여 농촌 계몽 등 시민단체 활동을 선도하였다.
이와 같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거창의 기독교는 내년에 거창 기독교계가 단합하여 거창 기독교 전래 100주년 행사를 가진다면 지역 복음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행사라고 생각되어진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므로 현재를 알고 미래를 나아갈 바를 밝혀주는 지침이 된다. 우리 지역의 개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기독교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보고 이제 기독교 전래 2세기를 맞아 기독교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봉사하여야 할 일을 찾아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 하리라고 본다. 이제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