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은 어디로 가고 있나!
글쓴이 : 박양 날짜 : 2004/11/26 조회 : 100
교회은악 어디로 가고 있나!
교회음악 어디로 가고 있나?
文化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항상 인간들에게 좋은 것만 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음악 문화란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모든 문화가 그러하겠지만 특히 음악 문화는 항상 그 시대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래서 음악 문화에 따라 그 시대의 문화는 여러 형태로 변모(變貌)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가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체는 반드시 그 소리에 따라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동식물에게 음악(소리)보다 더 직접적이고 빠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이렇듯 어떤 생명체이든 소리에 무감각하거나 반응이 없다면 그 생명체는 이미 죽은 존재이다. 이러한 현실들이 요즈음 젊은이들 음악 속에서 너무 여실히 들어나고 있다. 그들이 과감히 벗을 수 있는 것도, 미친 듯이 날뛸 수 있는 것, 살인, 자살, 폭력, 마약 등 이모두가 음악의 명령 때문이다. 굳이 음악 문화라고 단정을 하지 않더라도 현대의 문화는 정통이나 전통이 사라진지도 오랜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 크로스 오버, 퓨전 등 이런 문화는 민족이나 인종이나 사회나 종교에 관계없이 전 세계에 태풍처럼 그 위세를 몰고 가고 있다. 최근의 모 무가지신문(無價紙新聞)에 우리나라 록 가수의 대부격인 사람이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마약주사를 놔주지 않는다고 소란을 피웠던 일이 있었다. 굳이 록음악 뿐만 아니라 세상에 속한 음악이나 예술은 거의가 마약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음악에 가사만 성경적이면 기독교음악으로 간주하고 있는 몰지각한 음악인들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이에 한발 앞서서 이를 교묘히 문화라는 빌미로 교회로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무지한 목사들이 더 큰 문제다. 무당이 왜 음악을 사용하는가? 그 이유는 신이 내리지 않아도 강렬한 음악만으로도 그들은 곧바로 최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음악을 논하지 않더라도 원시나 고대에도 음악은 제의(祭儀)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아 음악은 신과의 관계에서는 필수적인 한 요소로 인식되어져 아주 귀중하게 다루어지며, 신령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서양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말하기를 “나에게는 정치도 권력도 부도 필요가 없고 음악만 준다면 세계를 지배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철학이 지배하던 시대에도 음악의 위력에 대해서는 결코 좌시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의 시대에도 음악을 모르면 목사가 되지 말라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 본인은 그 당시 칼빈의 음악관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을 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교회의 예배음악 만은 칼빈의 사상을 고수하고 싶은 것이 본인의 심경이다. 왜냐하면 찬양, 찬송, 찬미라는 것이 단순히 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 120년에 즈음하여 기독교 역사에 보기 드문 기록들을 남겼다. 소위 양적 성장을 보면은 말이다. 물론 부흥의 동기는 여러 가지로 분류를 하겠으나 그 중에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크다는 견해가 공론이다. 특히 오순절 계통에서 일어난 복음송이다. 이 복음송의 영향으로 곧 교회 예배의 문화가 신비주의며 기복적이요 이기주의 신앙으로 완전히 변화되게 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요즈음 개척교회라고 생기면 바로 갖추어지는 것이 드럼이요 키보드를 설치하여, 세상의 무도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음악은 기존교회의 예배 음악과는 물과 기름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도록 되어 버렸다.
교회음악의 빠른 세속화를 부추긴 이유의 또 하나가 우리가 부르고 있는 통일 찬송가의 역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통일 찬송가야말로 우리나라 찬송가 역사 중에서 가장 낙후된 찬송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⅔ 이상이나 되는 찬송이, 찬송이 아닌 복음송으로 예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서 찬송가라는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이 또 다른 찬송가 제작을 놓고 10여년이 넘도록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현재에도 불투명한 상태로 수많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 모두가 중이 제사보다 젯밥에 눈이 어둡기 때문이다. 현재의 통일찬송가 역시 그러한 추한 역사가 있었듯이 새로운 찬송가 또한 그러한 젯밥에 관심들이 많기 때문에 더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번 찬송가 제작에도 물질의 작용이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것은 뻔한 사실이다. 새로이 제작되는 찬송에는 교계가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의 작품이나 신학적이나 예배학적으로나 교리적인 면에도 못 미치는 것들로 보아 이들의 물질 공세가 클 것으로 사료된다. 이단들이 만들어낸 엉터리 이단 책자를 만들 듯이 말이다.
이보다 더 교회음악의 본질적인 문제는 세속화에 있다. 70~8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에서 교회와 세상의 벽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는 과거에 세속음악들이 교회로 들어오던 때와는 그 방법이 무질서하게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완전히 상업적인 것으로 주로 미국에서 수입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간단한 예로 악기 사용에서 볼 수가 있는데 과거에는 술집이나 카페에서 아니면 무도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악기들이 이제는 교회의 전용 악기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음악 역시 세속 방법으로 만들어지며 연주 방법이나 가수의 창법 또한 세속 방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특히 요즈음 기독교TV나 기독교 방송 매체에서 보고 듣는 음악들은 하나 같이 전혀 교회적이지 않다. 기독교 서점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도 가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완전히 세상 음악이지 기독교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TV에서는 가수들의 모습이나 무대의 환경을 보아도 완전히 세상의 쇼~장이지 전혀 교회적이지 않다. 가톨릭 평화방송 역시 여기에 뒤질세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다. 불교방송 역시 세상음악에 빠져 있고 이제는 스님들도 대중가요를 부르며 음반까지 만들고 있다.
교회음악가들이 많이 있다고는 하지만 청소년 음악(CCM)에 대해서 제대로 규제를 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 수많은 음악신학교라고 하는 곳에서도 “꿩 잡는게 메”라는 식으로 교회와 예배라는 엄격한 태두리를 망각한 체 신학 부재의 음악들을 가르치며 CCM 가수들은 세상음악 가수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성경에 복음송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를 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란 항상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히브리서 13:15절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고 한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음송은 찬송 그 자체이다.
본인은 이런 현실을 보면서 오래 전 신학자인 로이드 죤스씨가 한 말이 기억이 난다. “말세에는 강단에 말씀이 흐려지고 딴따라들이 올라 올 것이다“고 말이다. 여기에 걸맞게 2004년 10월 8일 국민일보에 이런 글이 올랐다는데 참으로 놀랐으며, 순복음교회가 이 글을 자세히 보았으면 하는 맘이 간절하다. 이태형 기자가 올린 교회 이야기라는 코너에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글을 읽으며 참으로 공감이 갔는데 이런 글은 한국교회들이 심각하게 보고 깨달아야 할 일이다. 글 중에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불렸던 A W 토저는 ‘연예 오락’이라는 큰 우상이 예배를 타락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말년에 ”세상이 교회 속으로 침투해 교회를 잔인하게 유린하는 것을 막지 못해 크리스천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토저는 ‘예배인가 쇼인가’(규장)라는 저서에서 성장을 위해서 대중의 인기에 야합하고 거대기업의 경영방식을 무차별적으로 차용하며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방식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토저의 말대로 과연 우리가 교회에서 드리는 그 무엇이 ‘예배’인지, 아니면 ‘쇼’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다. 토저는 말한다.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는 극적인 행위가 예배다. 예배는 쇼가 아니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순수한 동기에서 피어나는 우리의 향내를 맡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가 라기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더 즐겁게 즐기며 예배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갖고 인본주의적인 분위기 와 또한, 의식주의로는 가톨릭화 되어 가는 것이 현대의 예배하는 모습들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으며, 진보주의 교회들은 소위 열린예배 예배예술 드라마예배 등등 진정한 예배를 상실한 체 쇼를 벌이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 예배의 현주소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예배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깨닫는 다면 교회들이 물량주의 대형주의 권위주의 그것조차도 식성이 차지를 않아 세습에 까지 목숨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예배에서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없다는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절간에서 복 달라고 불공을 드리고 오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성도가 백명만 넘어가도 참다운 코이노니아는 이룰 수가 없다. 한사람의 목사가 어찌 그 많은 성도들을 어루만지며 위로와 보살핌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한마디로 현대교회들의 예배(쇼)는 쇼를 할 수밖에 없으며, 또 성도들은 쇼를 관람하고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더 신명나는 쇼~장을 찾아 철새들처럼 날아다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찬양은 노래가 아니라 삶의 열매이다. 삶의 열매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찬양, 찬송, 찬미, 칭송이라는 용어들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결과임을 알게 된다. 대표적인 찬송으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을 때 불렀던 찬송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춤추지 않을 수가 없고, 입을 열어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춤과 찬송은 결과적인 것이지 찬송하므로 마음이 열리는 그런 최면(催眠)적인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이 찬송하게 하시는 것과 음악에 흥분되어 뛰면서 노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목회자들은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종종 기독청년들이 즐기는 CCM콘서트에도 관심을 가지고 참석하여 저들이 무엇에 심취하며 또 무엇에 은혜를 받고 있는가를 예의주시 하여야 할 것이다.
본인은 기독 청소년들의 음악관을 알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여 교육을 하고 있다. 구태여 CCM 활동에 대해 논하지 않더라도 기독교TV를 통해서만 보아도 옳고 그름을 얼마든지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모습이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방법대로 흔들고 세상의 방법대로 벗고 세상의 방법대로 춤추고 노래하고.........
음악이 마약보다 더 악하고 무섭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깨달았으면 하는 맘 간절하다. 마약을 먹도록 하는 것이 음악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간단한 예로 세상 음악을 하면서 마약에 손을 대보지 않은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래서 메시지보다 더 강력한 것이 음악이라는 사실임을.......
소리에도 시끄럽고 괴로운 소리가 있고 아름다운 소리가 있듯이(이러한 사실은 동식물들을 통해서 오래 전에 입증되었으며 또 이를 동식물의 양육 재배에 적용하여 대단한 수확을 얻고 있다.) 음악에도 반드시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교회라는 공동체는 거룩함과 경건의 처소임을 근본으로 알고 교회나 성도에 걸 맞는 음악문화를 만들어 가도록 연구를 하여 청소년들에게 바른 찬송관과 바른 예배문화에 참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찬양신학이란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과목이다. 위에서도 밝힌바 대로 음악을 모르면 목사가 되지 말라는 것처럼 음악은 목회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바로 알아야 할 대단히 귀중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호흡과 같은 것이다. 본인이 신학교에서 찬송을 가르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은 목사들이 음악을 너무나 모른다는 것이다. 혹 안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알던 것 외에는 전혀 불러보지도 못한 곡들이 거의 다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많은 찬송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찬양신학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찬송을 예배의 어떤 연결고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대다수 목사들의 찬송신학이다. 그래서 찬송을 고르는 것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전혀 도외시하다 보니 기껏해야 1년에 겨우 50여곡을 사용하는데 그치고 만다. 첫 송 같은 경우는 1년 내내 한 곡으로 끝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목사들이 음악의 전문인으로서의 요구가 아니라 과거의 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음악의 위험성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을 잘 기억하고 현대에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사악한 음악들을 분별할 줄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문화란 반드시 세상 것과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자체는 성도의 공동체요 예배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며 이는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음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는 쇼~가 아니며, 찬송은 분위기를 일구어 내는 도구가 아니다. 찬송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영광의 열매로 나타나는 열매이다. 그러므로 삶은 리허설이요 예배는 나타나는 현실인 것으로 교회의 음악은 노래를 넘어 열매 그 자체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