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중국교회 관련 자료 [교계현실]
삼자 교회의 유형
인보라
삼자 교회라도 동일하지를 않고 다양한 유형으로 존재한다. 최근의 삼자 교회의 유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날로 부흥하는 교회: 이런 교회의 특징은 집회나 사역자(평신도
사역자 포함)가 많고, 점차 큰 교회로 성장하면서 목회자 또한 풍부한 경험으로 열심히 성공적인 목회를 해 나간다. 절강성에 이런 교회가 많이 있다.
2) 황량형 교회: 교인수가 오히려 감소하고 청년 신자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전임 목회자가 없거나 있어도 무자격자여서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류의 교회는 주로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내륙의 농촌 지역에 적지 않다.
3) 보통형 교회: 부흥하는 교회와 황량형 교회의 중간에 있는 교회이다.
이러한 상황은 목회자의 부족이 주원인이다.
4) 애국애족형 교회: 이런 류의 교회 강단에서는 애국교육을 목적으로 한
메시지가 공허하게 외쳐지고 있다. 따라서 교인들의 영적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종교적인 신도로 머물게 된다. 이런 류의 교회가 적지 않다.
5) 혼란형 교회: 성경 말씀에 온전히 선 목회자가 없거나 극히 적어 종종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내용을 가르치고, 극단으로 가기도 해 많은 혼란을 일으키는 교회이다.
삼자 교회의 문제점
1. 목회자 문제: 목회자가 양적으로 부족하다. 있다고 해도 부자격자가 많고 부패현상이 심각하다. 그리고 목회자 간에 세대차이에서 오는 갈등, 복음적이고 충성된 목사와 정치적이고 완고한 목사간의 갈등이 크다. 그리고 농촌교회의 전임목회자 부재 현상은 상당한 기간 호전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
2. 가정 교회와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3. 삼자 교회의 정통성 문제. 중국이 더 과감한 시개혁과 정치체제 변화를 추구할 경우 삼자 교회는 정통성 논리에서 가정 교회 입장보다 훨씬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4. 어린이 주일학교 운영문제와 청년회 지도 및 운영문제가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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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회가 처한 곤경
인보라
중국가정교회는 지금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다. 이것은 가정교회가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곤경들이다. 가정교회가 처한 곤경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가정교회와 진솔한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고, 가정교회를 섬길 수 있다. 가정교회는 지금 격변의 와중에 있다.
가정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곤경은 가정교회가 쇠퇴할 수 있는 위기가 될 수도 있고, 명실상부한 중국교회로 자리 매김 할 수 있는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중국가정교회가 처한 곤경들은 전화위복이 되어야 한다. 로마서 8:28은 중국가정교회에도 주신 약속이다.
가정교회가 곤경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높이, 넓게 도약할 때 중국의 복음화는 물론 지상명령(마28:19-20,행1:8)도 성취될 것이다. 우여곡절이야 있겠지만 주님께서 가정교회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가정교회는 안과 밖에서 집요한 공격을 당하고 있다. 밖에서는 정부의 등기에 대한 압력과 은밀하고 교묘한 핍박, 이단의 발호와 위협, 정부가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벌금형을 선고함으로 가정교회의 재정을 파괴하고 가정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경제 문제 해결에 매달리게 하는 것은 가정교회가 감당하기 힘든 곤경들이다.
가정교회는 안에서도 신학 논쟁, 세속화, 지도력의 도전, 조직의 분열 등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전방위 도전을 받고 있는 가정교회를 어떻게 섬길 수 있을 것인가?
가정교회는 중국정부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문화혁명 때와 같은 핍박을 한다면 가정교회가 정결케 되고 부흥하는데 유익할 터인데 은밀하게 핍박하니 곤고한 것이다. 정부는 가정교회가 종교사무국에 등기하도록 요구한다.
가정교회가 종교사무국에 등기하고 삼자회에 가입하면 합법이요, 등기하지 않으면 불법 종교활동이 된다. 교회가 조직이 있으면서 등기하지 않으면 사교(邪敎)가 된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종교사무국과 각급 종교기관들은 모든 가정교회로 등기하도록 요구하였다.
가정교회가 등기하지 않으면 재산을 차압하고 전도인들을 체포하여 노동교화소에 송치하였다. 정부의 등기와 삼자가입에 대한 압력은 집요하다. 가정교회가 나름대로 존재하며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이지만 가정교회 사역자들이 지방 현지 종교국이나 공안국 관리들과의 관계에 기인한 것도 사실이다.
전에는 지방 종교국이나 공안국에서 묵인하여 주었지만 중앙 정부에서 가정교회를 등록시키고 삼자회에 가입하도록 집요하게 강요하기 때문에 더 이상 관계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가정교회들이 정부의 등기에 대한 압박을 물리치기가 어렵게 되어 간다. 정부는 신학이나 신앙을 따라 정통과 이단을 분변하지 않고, 등기 여부에 따라 이단을 분변한다. 종교사무국에 등기하고 애국조직인 삼자회에 가입하면 합법이요 정통이고, 등기하지 않고 가입하지 않으면 불법이요 이단이다.
중국공산당은
"4개 견지(마르크스 모택동사상의 견지, 공산당 영도의 견지, 민주전정(民主專政)의 견지, 사회주의의 길의 견지)"를 접수하면 정통이요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으로 판단한다.
가정교회가 종교국에 등기하고 삼자회에 가입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이는 삼자회에 드는 것을 일제시대 신사참배했던 교단에 가입하는 정도로 이해하는데서 기인하는 오해이다.
가정교회는 삼자교회의 과거만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삼자교회가 앞장서서 가정교회를 핍박하고 공안국에 고발하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삼자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중국공산당과 정부이기 때문이다.
가정교회는 삼자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한다. 물론 가정교회 지도자들도 삼자교회에 구원받은 사람들도 있고 복음적인 교역자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럴지라도 삼자교회를 교회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교회가 종교국에 등기하고 삼자회에 가입한다면 잠시 핍박은 그치나 교회로서의 정체성과 생명은 끝난다고 간주한다.
애국종교조직인 삼자회에 가입하기를 원치 않는 가정교회는 불법적 환경에서 생존해야 한다. 이들은 해외 교회들 및 다른 가정교회조직과 공개적으로 왕래하며 교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정교회는 폐쇄적이 되어 작은 교제권에 머무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혈안이 되고 있다.
법륜궁 사태이후 법륜궁을 체포하지 못하자 그 여세를 모아 가정교회 지도자를 체포하고 있다. 현재 가정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여기 저기로 피하면서 사역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공안국이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사회범이나 경제범으로 체포하기 때문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정부의 핍박이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정교회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가정교회는 이단의 위협을 받고 있다.
화동지역의 어느 교회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요 몇 년간 우리 이곳의 교회는 항상 이단과 극단의 침입을 받습니다. 이단과 극단은 우리의 사역에 큰 어려움을 주고 교회의 안정에도 영향을 줍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단을 분별해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단은 주를 사랑하는 신자들이 성경 진리를 단편적으로 인식하여, 단편적으로 인식한 것을 절대화하고, 또 그것을 널리 보급하는데 있다. 중국교회의 이단은 특정사회주의 중국에서 일어난 것이며, 전통민간신앙의 영향과 사회주의정권의 가정교회에 대한 압력, 사회적 반응 등의 환경 아래서 출현한 것이다.
중국에 나타난 이단은 창시자의 독재, 권력의 절대화, 금전적 탐욕, 비정상적인 윤리관계, 정욕에 이끌리는 공통적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리고 성경해석에 착오가 있으며 기독교 신앙과 중국 전통종교 등을 혼합한다.
가정교회가 폐쇄적인 면과 개인을 숭배하는 경향, 그리고 전통종교의 영향 등이 이단출현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단의 위협은 가정교회에 신학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농촌 가정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기적이나 생명력있는 간증을 통해 주를 믿었기 때문에 성경진리의 방면에 체계적인 인식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단이 침투해 왔을 때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단들이 각 교회에서 열심을 내어 신자들을 끌어간다. 일단 이단에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다. 하남성의 어느 가정교회 장로 3인이 <동방번개파>를 반대하다가 다리를 잘렸다. 그밖에 이단집단의 지시에 불순종하거나 배반하면 암살의 위험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중국의 이단에는
1) 후한파(呼喊派)-
예수는 피조물이며 재림하지 않는다. 예수의 육체 가운데도 사탄의 마음이 있다. 하나님은 세 분이 변해 한 분이 되셨지만 삼위일체는 아니다. 천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가 바로 천국이다. 오직 리창서우(李常受)만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이므로 그에게만 경배와 찬양을 돌려야 한다. 성경은 이미 뒤떨어진 책이다.
2) 충성파(衆生派)-
집회시 이상을 볼 때까지 격렬하게 울어야 한다. 그러면 횐옷 입은 사람이 신자들의 죄가 사해졌다고 써준다. 또 "소자야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소리를 들은 신자만이 진정한 죄사함과 거듭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3일 밤낮을 울면서 죄를 깊이 인식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오직 생명회에서만 구원과 거듭남을 얻을 수 있다.
3) 링링교(靈靈敎)-
화(華)씨라는 사람이 자신이 바로 구세주이며 예수는 두 번째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화씨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고 성령충만함을 구하며, 영가를 부르고 영무를 추며 방언을 말하고 영적 세례를 받아야 한다.
1월 17일을 성탄절로 바꾸어 지내며 물세례와 성찬식을 폐지한다. 오직 계시록과 종말론, 대재난에 대해서만 설교한다. 그리고 생산활동은 하지 않는다.
4) 산반푸런파(三班僕人派)-
산반푸런파가 모든 진리를 갖추고 있다. 지도자는 '따푸런(大僕人-큰 종)'으로서 그만이 유일한 선지자이다. 자신을 모세나 다윗으로 비유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믿지 않는다. 만약 '산반푸런파'에 가입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신자들의 헌금이 바로 구원받았다는 증거이다.
신자들은 '큰 종'을 섬겨야지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된다. 성찬식과 경배와 찬양을 반대한다.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했다. 좁은 문은 가정교회이며, 삼자교회는 큰 문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혼인을 금지하고 부부는 별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동방의 번개(東方閑電派)-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가 변하여 아들이 되었고, 아들이 변하여 성령이 되었으며, 이 셋이 변하여 하나의 신이 되었다. 예수가 처음에는 남성의 몸으로 성육신하였다가, 두 번째는 중국에서 여성의 몸으로 성육신하셨다. 지금은 천년왕국의 시대로 오직 계명을 잘 지키고 여성의 몸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를 잘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외에 먼투회(門徒會), 스투신신화(司徒信心會), 토론토의 복음(多倫多之福), 뻬이리왕(被立王), 해외에서 들어간 이단 등이 있다.
가정교회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중국정부는 가정교회 모임과 사역자 훈련을 불법활동으로 간주하여 전국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한다. 화룬공 사태 이후 1999년 10월 8일 중앙정부는 각성의 유관기관들에게 지하천주교를 치라고 통지하였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기독교인들도 포함된다. 인민대회는 10월 30일 사교를 타격하는 법률(사교조직을 취채(取締)하고 사교의 활동을 방어하고 징치하는 활동에 관한 결정)을 제정하였다.
중앙 검찰과 법원은 이 법률을 공포하기 전인 10월 8일 이미 이 법령의 집행방안을 통과하였다. 10월 12일 광주의 임헌고(林獻羔)목사를 체포하여 심문하였고, 광주가정교회의 지도자인 이덕현(李德賢)목사를 체포하고 가택수사를 하였다. 현재 중국정부는 가정교회를 치기 시작하였고, 벌금을 부과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벌금도 법규에 따르도록 하였다. 하남성에서는 1인당 2,000유안(한화 약 280,000원)내지 5,000유안(한화 약 700,000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2,000유안은 농민의 1인의 1년 수입이요, 5,000유안은 도시인의 1년 수입이니 벌금이 혹독한 것이다. 중국정부는 가정교회가 십일조를 받는지. 일반신자들이 봉헌하는 것이 위법이 아닌지를 알기 위해 재정을 검사한다는 명분으로 가정교회를 공격한다.
그래서 가정교회는 헌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정상적인 봉헌에 의한 수입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전임사역자들의 생활비를 제공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1998년 하남성 무양(舞陽)에서 체포된 40명의 신자들은 400,000유안의 벌금을 물었다. 1999년 당하(唐河)에서 체포된 31인은 300,000유안의 벌금을 물었다.
그리하여 가정교회 전도인들은 곳곳에서 돈을 빌리게 되었고, 생활은 곤난하게 되어 3-7년의 노동교화나 노동개조형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득이 사역을 그만두고 마음에 고통스러워하면서 돈을 번다. 전에는 중국 전역에서 선교하던 가정교회 조직이 지금은 벌금을 물어내려고 가정이나 교회 밖에서 노동하고 있다.
그러니 새로운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중국정부의 벌금책략은 가정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곤경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에서 이단조직이 제공하는 경제적 원조는 신자는 물론 전도인들까지 이단 조직에 끌어들인다.
나아가 중국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많은 가정교회 전도인들이 전에는 전임사역을 하였으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업을 갖고 사역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풀타임 사역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직업을 갖는 것이다. 전임전도인의 부족이 농촌과 도시 가정교회의 가장 큰 문제이다. 당연히 풀타임 사역을 하려는 헌신자가 없게 되었다.
어느 가정교회는 청년 헌신자들을 뽑아 3,4년 사역자로 양육을 한다. 사역자로 양육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지만 더 큰 어려움은 교육과 훈련을 마치고 졸업한 청년 사역자들이 결혼을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대개 결혼을 동기들끼리 한다. 그러다 보니 졸업을 한 후에 보면 배출한 사역자가 반으로 줄어든다. 그러다가 청년 사역자가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려고 집에 남게 되고, 아버지는 생활비를 벌게 되니 사역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물론 이들은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 그러나 한 교회의 설교자를 키우려고 한 것이 아니다.
청년 사역자들에게 생활비만 해결된다면 그들은 기꺼이 전임사역자로 헌신할 것이다. 가정교회가 반드시 풀고 가야 할 문제는 전임사역자를 세우는 일과 그들의 생활비를 해결해 주는 일이다. 난제임에는 틀림없지만 풀려고 하면 길은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 4:19은 가정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백지수표이다. 가정교회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재정적인 문제도 채워질 것이다.
가정교회는 내부적인 곤경에 처해있다
가가정교회는 외부에서 오는 곤경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문제로 곤경에 처해 있다. 사실 외부적인 문제도 크지만 내부적인 문제가 더 해로울 수 있다. 가정교회가 성숙하고 강건한 교회가 되려면 내부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가정교회는 신학논쟁으로 기진(氣盡)하고 있다. 논쟁을 하면 힘이 빠진다. 특히 교회가 신학적 논쟁에 휩쓸리게 되면 영적 생명은 쇠잔해지고 맥없는 교회가 된다.
가정교회가 신학적 논쟁을 하는 것들은
1) 성령론의 문제 : 오순절파와 비오순절파의 성령세례의 정의와 방언이 구원의 증거냐 하는 논쟁.
2) 인간론의 문제: 3원론(영,혼,육)과 2원론(영혼,육)의 난제. 워치만 니의 신학적 영향은 전국에 퍼져있다. 그래서 당연히 3원론을 따르는 이단들이 발생하였다.
3) 구원론의 문제 : 일차구원(一次救援)이냐 다차구원(多次救援)이냐의 논쟁.
4) 종말론의 문제 :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 것이냐. 이런 문제들은 신흥 가정교회가 젊은 교회라서 성경해석, 역대 교회발전에 대한 이해, 신학사상의 검토 등이 모두 미숙하고 중국정부의 종교정책이 가정교회들로 지하로 들어가게 하여 홀로 신앙과 종교생활을 한데 기인하는 것이며 해외교회들의 무분별한 신학의 수출에도 원인이 있다.
부요한 가정교회 사역자들이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
경제개방의 충격으로 가정교회 사역자들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시험과 유혹에 직면해 있다. 과거에는 "주를 위해 반드시 고난을 받는다"는 신앙으로 외부의 핍박에 굳건히 맞설 수 있었고, 이단의 침입도 막을 수 있었다. 물질의 유혹은 핍박보다 저항하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풍요로운 생활이 가정교회 사역자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온주교회 등 경제적으로 부요한 지역의 가정교회들은 지금 세속화의 증상 등이 나타나고 있다. 온주교회는 대표적인 강성한 가정교회이며 전 중국 가정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교회이다. 온주교회의 물질적 풍요는 그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해외 교회가 걸어간 세속화와 쇠락의 길을 걷게 하였다.
생명이 충만하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각종 비리와 직장과 사업체내에서의 불법행위가 판치고 있다. 중국가정교회의 원동력인 평시도의 자발적인 사역의 참여가 시들해지고 있다. 평신도 사역자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마지못해 하는 뜨악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중국교회들이 전도중심의 시대에서 목양의 시대로 사역의 틀이 바뀌어서 주님이 전임사역자를 애타게 부르고 계시건만 누구하나 풀타임 사역자로 헌신하는 사랍을 찾기 힘들다.
중국교회는 20년간 굉장히 빨리 발전하여 양이 목자를 찾는 격이 되었고, 근래 10년간은 신자가 신속히 증가하나 전도인의 훈련이 따르지 못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전도인이 주를 믿은 지 2,3년에 불과하지만 곧바로 현지의 목회자가 되어 마음속에 부족함에 대한 염려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밖에도 젊은이들은 해외나 국내에서 제공되는 훈련을 받고, 독서능력이 교회의 어른들을 초월하여 교회의 중년 지도자들이 위기의식을 갖는데 이르렀다.
가정교회가 해외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그 부작용으로 기존조직이 분열되고 있다. 선교사들이나 해외교회들이 가정교회의 최고지도자를 통로로 해서 교통하고 동역해야 하는데 최고지도자 밑에 있는 지도자들과 교류함으로 기존의 지도력이 무력해지고 조직도 분열되고 있다.
해외에서 후원받는 통로가 최고지도자였을 때는 그 지도자의 지도 아래 있지만 자기도 선교사와 직거래할 수 있게 되자 독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족가정교회 조직들이 수도 없이 세워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해는 되지만 바람직한 일은 결코 아니다. 가정교회가 비록 외형적으로 막강한 조직은 아닐지라도 엄연히 계통이 있고, 지도력이 있는데 그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안팎으로 곤경에 처한 가정교회를 돕고 섬기는 길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1) 집중적으로 중국가정교회의 합법화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집중적으로 기도하여 상황을 바꾸었고, 베드로가 체포되어 투옥되었을 때 합심기도하여 천사가 베드로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옥문을 열어 주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위기에 처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해외 성도들의 중보기도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중국가정교회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교회와 성도가 해외에 적음을 기이히 여기신다. 곤경에 처한 가정교회를 섬기는 길은 집중적으로 가정교회가 합법화되고, 신앙의 자유와 예배, 전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중보기도하는 일이다. 이 일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즉시 할 수 있다.
2) 가정교회의 경제적 필요를 채워주고 경제적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해외 기독실업인들이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여 가정교회 신자들로 창업하게 하여 그들로 지방의 현대화와 경제방면에 공헌하게 해야 한다. 가정교회 신자들이 지방기업에 주력하게 되면 가정교회가 합법화되고 사회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정교회 스스로 재정문제를 해결하도록 길을 열어주게 될 것이다. 재정이 자립되어야 진정한 토착교회가 될 수 있다.
3) 가정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이단문제의 해결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말씀 가운데 굳건히 서서 정확한 분별력을 갖는 것이다. 철저한 신학교육과 성경교육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사역자 교육시 조직신학, 교회사, 교회사와 관련된 이단의 역사, 중국교회의 이단과 역사적 이단의 비교등을 집중적으로 강의하고, 이단에 대처하는 변증적 중점사항을 확실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밖에 중국교회의 이단문제를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대처하는 지침을 저술하여 제공하는 것이 요청된다.
4) 가정교회의 장년 지도자들은 자기들에게도 훈련을 시켜달라고 하며 각 지방에 2년제 전도인훈련반을 세워달라고 희망한다. 현재 각 지역의 훈련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크다. 가정교회의 사역자 훈련에 대한 필요를 다 채우기 위해서는 교수요원을 배출하여 그들로 자기 교회조직에서 교수요원들끼리 협력하여 사역자들을 훈련하도록 해야 한다.
가정교회 사역자를 훈련할 수 있는 교수요원을 양성하는 사역을 위해 인력을 분배하고, 재정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중국내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제 삼국에서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5) 가정교회들로 피차를 용납하고, 자기들이 보는 것을 절대 진리화하는 것을 타파하고, 가정교회들이 신앙상 교류하도록 촉진하여 하나의 진리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중국교회가 피차 용납하고, 상호교류하며,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흥왕케 한다면 중국선교단체들은 더 많이 가정교회와 교류하고, 학습하되 피차 용납하며 서로 완전에 이르도록 하여 중국의 복음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가정교회에 필요한 것은 다른 교회를 배우고, 다른 교회의 좋은 것을 받아들이되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신 사명과 비젼, 은사를 잊지 않는 것이다. 내 것을 갖고 있으면서 중심을 잡고 남의 것을 받아들일 때 건실하고 넉넉한 교회가 될 수 있다.
6) 세계교회사와 해외교회들의 세속화에 대한 쓰라린 경험을 나눔으로 세속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 배는 물위에 떠 다닌다. 물이 없다면 배가 항해할 수 없다. 그러나 물이 배에 들어오면 배는 침몰하고 만다. 그와 같이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속화되면 교회의 생명은 다하게 된다. 세속화된 교회는 소금도 아니고 빛도 될 수 없다.
서구교회들이 하나님의 그 망극한 은총을 입고 물질적인 복을 받았건만 그 부요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그 부요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떠나갔다. 한국교회도 서구와 미국교회가 간 세속화의 길을 그대로 따라왔고, 이제 벼랑에 서 있다. 가정교회는 해외교회의 좋지 않은 점을 본받지 말고 처음 주님께 받은 그 비젼대로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세속화를 거부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온주교회와 같은 가정교회들은 큰 사명을 부여잡아야 한다. 자기 계통의 교회를 많이 설립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중국의 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책임지는 사명과 비젼을 갖고 나아갈 때 부요함에도 불구하고 세속화되지 않고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는 교회가 될 것이다.
7) 선교사들이 가정교회의 교회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선교사들은 가정교회를 주장하고 주관하고싶은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선교사는 중국에 섬기는 자로 파송받았지 중국교회를 장악하고 주장하라고 보냄받은 것이 아니다. 선교사가 자기 분수를 지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싶은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가정교회는 분열을 그치고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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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회의 형성과 발전
인보라
Ⅰ. 가정교회의 기원과 원류
1. 1949년 이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한 교회 정치화에 대한 순수신앙의 조직화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고 이로서 「전체주의」적 통치가 시작되었다.
당과 정부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관리와 통제로 교회는 정치화되었고, 이 결과 중국교회의 분리와 분열이 초래되었다. 중국교회가 분리되고 분열된 가장 중요한 이유로 많은 교회지도자와 평신도들이 삼자애국운동이 기독교 운동이 아니라 정치운동이기에 교회가 이런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기독교와 교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정부에 의해 관리되어 지는 것을 본직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하기에 위험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전체주의적 관리 아래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교회형태를 형성하고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2. 평신도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신앙조직
1950년대 중반부터 기존교회의 목회자들이 삼자애국운동과 정부의 정치, 사회운동에 강압적으로 참여가 되어 신도에 대한 목양과 교회 관리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또 기독교내의 삼자애국운동이 당과 정부의 지도와 감독, 관리아래 기독교의 정치화를 초래하여 교회의 순수신앙적 노선에서 이탈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평신도들에 의한 신앙적 이유에서 자발적인 가정교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3. 1949년 이전의 중국의 토착교회의 영향을 받아 교회성격과 형태가 형성되어짐
1949년 이전의 중국교회의 토착화적인 신앙전통이 1949년 이후의 중국 가정교회가 존재와 형성, 전개, 발전에 원류적 모델이 되었다.
첫째로
우선 가정에서 집회를 유지하는 것은 정치환경적인 이유와 비공개적 존재의 요청에서도 있지만 이전 워치만 니 계영의 「기독교인 집회처(?)」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반드시 십자가를 내걸어야 하고, 예배당 건축문에서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둘째로
가정을 중심으로 교회사역을 시작하고 전개하는 것은 「예수가정」에서도 기인한다. 가정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시작하며, 전개하는 것 등은
「예수가정」에서 이미 좋은 모델을 제사하였다.
셋째,
고난을 당연시하는 정신과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으면 예수의 길이 아니라 하는 것은 「예수가정」의 신앙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교회의 지도자 발굴과 훈련도 정규적인 신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위치만 니, 왕명도, 경전영, 등의 도제식 전통에 따랐다.
넷째,
가정교회의 신앙 및 성서, 신학관에 있어 강한 보수성과 성서적 문자주의(文字主義), 영해(領解), 구원절대주의적 특징도 워치만 니와 왕명도, 또 가옥명 드의 양향을 받았다. 다섯째, 교회 목양과 운영에 있어 가부장적 특징도 토착화 운동 지도자들의 전통을 게승하고 있다.
Ⅱ. 가정교회의 특징
중국의 가정교회는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규정될 수 있다.
첫째,
중국의 평신도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러하기에 항상 신앙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강조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면서 존재와 발전을 애 나가고 있다.
둘째,
서양의 제도적인 교회의 영향과 관계가 미약한 상황에서 중국의 정치, 전통, 종교환경에서 독특하게 교회가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기에 탈 서양적 교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한 이후 해외와 서양교회의 영향력과 관계성이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
가정이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다. 즉 가정교회의 활동중심은 항상 가정이 되었으며, 교회를 개척하고 발전해 나가는 데에도 항상 가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넷째,
중국의 가정교회는 비공인, 불법적인 종교조직이기에 가정교회의 존재와 전개, 발전은 항상정부와 공인된 교회로부터 제재와 금지를 당하게 되었고 은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섯째,
중국의 가정교회는 삼자교회의 조직처럼 어떤 하나늬 통일적인 형태나 조직체로 존재와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전역에 무작위적이며, 개별적인 특성을 지니면서 존재하고 발전해 나가고 있다.
Ⅲ. 가정교회의 종류
1. 공개적 가정교회
공개적 가정교회란 교회가 공개적으로 존재하고, 활동도 대담하게 전개해 나가는 가정교회를 가리킨다. 보통 공개적 가정교회의 존재형태를 취하는 교회는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비교적 추명한 인물이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공개된 인물이다.
또 공개성을 갖고 존재하는 부분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로 구성된 교회들이다. 이런 가정교회는 지역의 「양회」와 삼자교회, 통전부, 종교국, 공안국 뿐만 아니라 지역적, 전국적, 국제적으로 알려진 교회들이다. 정부는 이런 가정교회가 중국의 종교정책과 법규 등을 위배하였기에 언제든지 통제와 규제를 할 수 있지만 통제와 규제로 인한 부작용을 고려하여 공개적으로 존재토록 묵과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정부는 언제든지 이들에 대한 법적 대응을 할 수 가 있다. 이들을 주로 대 도시에 존재하며, 해외와의 교류도 빈번하며, 정기집회와 여러 활동들이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외부인들이나 심지어 해외에서 온 사람들도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교회가 광주의 임헌고 교회이다.
2. 반(半)공개적 가정교회
반공개적 가정교회는 교회의 존재가 주변사람이나 정부에서도 알고 있지만 별다른 제재와 탄압을 받지 않으면서 교회의 정기모임은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한편 기타 활동은 비밀적으로 또는 은밀한 장소에서 진행되고 잇는 형태의 가정교회이다.
반공개적 가정교회는 공개적 가정교회처럼 널리 알려지거나 지도자들이 유명한 것도 아니며, 단지 지역에서 공인된 삼자교회에 등록이 되거나 가입하지 않은 상태이면서 정부와 「양회」호부터 어떤 통제와 규제를 받지 않은 교회들이다. 통제와 규제를 받지 않은 이유는 정부와 「양회」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 할 수도 있고, 방관하거나 무관심 속에서 간과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교회들은 비록 지역의 사람들이 그들의 모임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큰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지만 그들역시 지역에서 존재하고 활동을 할 때 여전히 비공개적으로 하길 원한다. 반공개적 가정교회의 공개적인 모임은 주로 소형으로 진행되며, 노인들의 모임, 장애인들의 집회, 이웃들과의 회합 등으로 표출시키면서도 기타의 지도자 훈련이나 세례식, 특별모임들은 비밀적으로 비밀적인 장소에서 개최된다. 반공개적인 가정교회는 대도시와 농촌 모두 널리 존재하고 있다.
3. 비(非)공개적 가정교회
비공개적인 가정교회는 비밀적으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가정교회로 대부분의 중국가정교회는 이런 종류에 속해 있다. 비공개적 가정교회는 비공개적으로 존재하면서 정부나 「양회」또는 지역주민, 지역신도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교회이다. 이들 교회의 집회와 활동들은 모두 비공개적으로 은밀하게 진행이 되며, 구성원들은 서로 잘 알고 외부사람이 비공개적 가정교회를 참여할 때에는 구성원들의 소개와 안내를 받아야 나 한다.
이들은 외부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노출되고 발각되는 것을 위험한 일 또는 위기적인 일로 간주하기에 존재와 활동에 대한 보안을 매우 신경 쓰고 있다.
비공개적 가정교회는 정부와 공인된 삼자교회에 대해 위협을 느끼며, 외부에서 온 낯선 사람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다. 그래서 고정적인 출석자와 참석을 허락 받은 자를 제외하고는 모임과 활동에 참여가 불가능하다. 도시의 비공개적 가정교회는 소규모가 적어 보통 20명 내외이며, 많을 때 70명까지 있다. 반면에 농촌의 비공개적 가정교회는 규모가 커서 20명에서 100명 이상이 되기도 한다.
Ⅳ. 가정교회의 형태
1.비(非)조직, 정체적 가정교회
단순하게 예배, 기도, 성도의 교제를 유지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이 가정교회는 전문적으로 목양을 책임지는 전임사역자가 없으며, 조직적으로 체계화되어 교회를 운영하고 또 발전적 양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도 않는 교회이다.
집회장소로 사용되는 장소는 보통 인도 자급으로 있는 신도나 비교적 집회처소로서 여유있는 공간이 있는 신도들이 집을 이용하고 있다. 주로 집회와 교제가 활동의 주 내용이 되며,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전도 활동은 하지 않고 있으며 현상 유지적 차원의 성격이 강하다. 신도들은 보통 적게는 5-10명이고, 많게는 30~40명까지도 있다. 중국에 있어 대부분의 가정교회는 이런 비조직적, 정체적 가정교회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2. 반(半)조직, 반(半)발전적 가정교회
단순하게 예배, 기도, 성도의 교제 뿐 만 아니라 교회 내에 사역에 대한 분업과 책임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전임 또는 책임적 위치에 있는 사역자가 있는 교회형태이다. 특히 교회내의 초보적인 양육과 전도, 목양의 프로그램이 있어 신도들에 대한 관리와 목양이 일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 지역 뿐 만 아니라 다른 현, 성까지도 전도와 설교, 양육, 순회 목양을 부정기적으로 시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교회들은 자체적인 제약성 즉 인재적, 물질적 제약성 등으로 인해 발전 속도와 양상이 느리며 늘 여러 상황으로 인해 사역들이 정체되거나 지속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3. 조직적, 발전적 가정교회
교회 내에 전문적인 전임사역자가 있어 계획적인 양육과 목양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또 체계적인 교회운영과 관리가 되어 있는 자립적인 교회이다. 그리고 자체적인 사역자 훈련과정과 배출체계를 갖추고 있어, 본지역 뿐 만 아니라 다른 현, 성까지 지속적인 개척정도 사역을 실시하고 개척된 곳에서는 새롭게 목양이 전개된다.
이런 가정교회는 조직적으로 교회사역이 진행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와 「양회, 지역 기타 교회조직들로 부터의 압력과 위협도 일정적으로 받고 있다. 또 지역적, 전국적인 연락망이 형성되어 있으며, 해외 교회 조직과도 협력체계를 갖고있다.
Ⅴ. 가정교회의 분포와 운영
1. 숫자의 통계와 파악문제
가정교회와 가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숫자통계와 존재, 활동의 파악은 중국의 기독교적인 상황에서 볼 때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또 가정교회가 비공개적으로 존재를 하기에 어디에 누가 있는 지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자생자멸 하기에 오늘의 상황과 내일의 상황이 다를 수 있어 정확하게 말하기란 어려움이 있다. 그러면 기존의 여러 숫자통계와 파악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이는 중국교회의 지역상황과 전국 각 지역을 다니며 사역하는 자들이 대략적으로 파악한 통계와 추산들이라 할 수 있다.
즉 큰 계열의 가정교회와 그들의 활동영역 내에서 파악한 통계숫자를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숫자도 있기에 모든 통계는 실제존재 숫자보다 항상 적을 수밖에 없다.
2. 분포상황
중국정체에 있어 가정교회가 많이 분포된 지역은 다음과 같다. 하남성, 안휘성, 복건성, 절강성, 산동성, 하북성, 광동성, 흑룡강성 등이며 적게 분포된 지역으로 서장, 청해, 감숙, 귀주, 광서, 운남, 등이다.
이것은 주로 해당지역의 기종 기독교인의 상황과 기독교 전통, 새로운 사역자들에 의한 개척활동의 전개사황, 지역 사람들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받아 드리는 정도 등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3. 가정교회의 탄생과 운영
1) 탄생과 시작
기독교 신자의 탄생은 복음을 듣고 믿음에서 비롯되며, 교회는 기독교 신자들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이다. 가정교회의 탄생도 기독교인들의 결합으로 시작되며, 신도들 자박성에 의해 형성되어 졌다.
특히 가정교회의 경우 기독교 신앙을 갖은 이들이 현지에서 기존 삼자교회가 없을 경우 자연스럽게 신앙의 인도자 중심으로 가정교회가 이루어지며, 혹 지역에 삼자교회가 있다 할지라도 복음전도자가 삼자교회의 배경이 아니고 또 기피할 때는 더욱 가정교회를 결성하여 가정교회가 시작된다.
2) 운영과 전개
가정교회는 신도들의 집회와 서로의 교제, 사귐 그리고 신앙적 관계의 강화 등의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운영되고 있다. 가정교회에 있어 중요한 것은 책임적 역할을 하는 지도자와 교역자의 상황과 지역의 환경적 상황, 또 신도들의 상황 등에 의해 운영과 전개가 좌우되기도 한다.
비조직, 정체적 가정교회의 경우 주로 집회처소로 제공되고 있는 인도자의 인도에 따라 운영을 하며, 집회시간, 횟수, 강사선정, 집회내용을 관장한다. 경제부분도 특별히 지출되는 비용이 거의 없기에 헌금활동도 일반적으로는 없다. 그러나 특별활동과 지출부분에 있어 보통 신도 구성원들이 같이 협력을 하면서 운영을 해나간다.
Ⅵ. 가정교회의 발전양상
1. 은밀성과 음성적 발전양상
중국의 가정교회는 그 시작에서부터 전개에 이르기까지 은밀하고 비공개적으로 발저하였다. 지금도 공개적 가정교회를 제외하면 중국의 가정교회는 여전히 중국의 현실과 보안문제로 말미암아 은밀적이며, 음성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고 또 은밀하게 발전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노출은 곧 시한부인 것이다.」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지배적이다.
2. 신앙적 보수주의와 폐쇄성적 발전양상
중국의 가정교회는 항상 제약받고 고난의 현실과 외부와의 교류의 단절 등의 이유로인해 보수적인 신앙적 양성과 폐쇄적인 모습을 유지하면서 발전하여왔다. 특히 이들이 농촌을 주무대로 식자층보다는 지식수준이 낮은 층을 대상으로 전도와 활동을 전개하였기에 전통적인 소농민적 폐쇄성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 성서해석도 「문자주의」나 「영해,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선호하며,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나 위배되는 사항은 극렬하게 반대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3. 양성화의 시도 및 활동 대두
1) 공개적으로 존재, 활동
중국 가정교회의 한 종류인 공개적 가정교회는 정부와 공인된교회의 경고와 제재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존재하여 가정교회 양성화의 모델이 되고있으며, 가정교회가 양성화되는데 효시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공개적 가정교회는 단순한 예배뿐만 아니라 어린이 및 청소년 등 각종모임, 성경공부와 지도자훈련, 전도활동과 대외교류 등을 활발하게 진행시키고 있다. 중국의 공개적 가정교회는 광주, 하문(厦문), 북경, 온주(溫州) 등지에 있다.
2) 전도활동의 대담성 확대 - 대담하고 다양한 전도활동의 시도
(1) 공공장소에서의 전도집회 : 극장, 대학의 소강당과 공간, 공원, 호텔의 장소를 임대하여 기독교의 절기와 기타 공휴일에 전도집회를 개최한다.
(2) 기차역 프레트폼에서 정차하는 기차에 들어가서 전도지를 나누면서 전도 : 훈련된 복음전도자들이 자체적으로 제작한 전도지를 사용하여 프레트폼 입장권을 구입하여, 정차하고 있는 기차에 들어가 승객들에게 복음전도를 한다.
(3) 병원과 기타 공공장소에서 전도행위 : 기독교 의인들이나 관계자들의 협력으로 병원의 병실에서 전도와 심방사역을 진행한다.
(4) 한적한 거리와 길가에서의 전도집회 : 단순한 복음설교에서 조직적인 선도팀에 의한 전도집회의 개최 그리고 새로운 신자들을 교회로 흡수하여 양육 활동의 전개와 교회생활을
시작하게 한다.
3) 정부와 공인된 교회에 대한 항의표시
(1) 공개적 항의 편지와 활동 : 1988년 3월 24일 가정교회 지도자인 장성재(張성才)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신앙자유 문제에 대해 항의편지를 보냈으며, 같은해 4월 3일 당시의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의 주석인 정광훈(丁光훈)에게 삼자회가 교회에 대해 핍박하는 일을 참을 수 없다고 해서 항의 편지를 보냈다.(1988년 4월 9일 정광훈의 답변이 있었고, 1988년 4월 16일 장성재의 재회답이 있었다.)
(2) 선언문과 성명 : 1998년 8월 22일 12명의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하남성(河南省)에서 정부를 향해 성명을 발표9하였다. 성명서는 정부에게 삼자교회이외에도 가정교회를 합법적인 교회로 인정하고, 복음으로 투옥된 자들을 무조건 석방할 것이며, 가정교회의 활동과 제한을 완화시킬 것을 요구하였다.(《일본 크리스챤 신문》, 1998년 10월 18일자, 〈중국교회와선교〉제5호 참고)
4) 가정교회의 존재와 현황을 공개 또는 비공적으로 해외의 소식통에 보고와 전달
중국의 가정교회는 자신들의 존재와 그들이 정부와 공인된 교회들로부터 핍박과 제재, 금지를 당하고 있는 일을 공개, 비공개적으로 해외의 영향력 있는 개인, 단체, 언론매체에 알리고 있다. 1988년 4월 미국의 빌리 그레함 목사가 중국을 방문할 때 하남성의 가정교회 지도자인 서영택(徐永擇)은 그를 만나 중국의 가정교회 상황과 실태를 알리려 하였다. 서영택의 계획에 대해 정보를 입수한 정부의 공안기관은 4월 16일 서영택을 체포하였다. 그후 서영택은 3년여 동안 옥고를 겪었다.
1997년 10월 중국의 국가주석 강택민(江澤民)이 미국을 방문하기 앞서 중국의 가정교회에서는 팩스와 인터넷을 이용하여 해외의 교회와 선교단체에게 강택민이 미국을 방문할 때 미국 정부와 정부관리로 하여금 중국에서 종교탄압의 심각성 문제를 항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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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신학
인보라
1. 성경관.
정광훈은 삼자교회의 성경관과 관련된 신학적 전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1) 서구선교사들과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특별히 성경을 중시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그 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2) 중국 내의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성경에 대한 그들의 관념이 새롭게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성령께서 항상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롭게 주실 수 있는 새로운 조명을 강조한다. 성령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성경본문 이해의 어떤 특정한 면만을 강조하는 선을 넘어서 이제 참으로 서로 깊은 은혜를 나누고 존중하며 연합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데 있어서 그들도 이제는 적극적이다.
3) 성경 전체가 중요하지만 실제적으로 성경의 특정 부분이 특정 상황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2. 신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신학사상은 하나님을 단지 그리스도인들만의 하나님으로 보는 편협한 관념에 반대한다. 종파주의적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신도와 비신도, 영적 신도와 비영적 신도로 구분하여 하나님을 영적 신도의 하나님으로만 묶어두던 태도에서 벗어나 하나님은 전 인류의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교회지도자들은 신도들이 교회 밖의 모든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사물을 보고 그것들도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3. 기독론.
우주적 그리스도의 사상은 그리스도가 전 인류를 구원한 것이지 단지 신자만을 구원한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택자에 대한 관심으로 제한된 그리스도의 관심을 우주적인 그리스도관으로 확대해서 보아야 한다. 중국신학은 기독론 중심의 신학이다.
즉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나서, 그의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아버지 하나님께로 향해가야 한다. 이에 따라 성령도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면에 치중해 있다. 이러한 기독론은 형제 사랑을 만인사랑으로 확대하고 예수의 형상이 신도들과 사회와 국가인민을 위해 공헌하도록 고무시킨다.
4. 인간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담의 범죄(원죄)를 초월하여 인성이 완전히 몰락해버리지 않았다. 본래 중국 전통문화에는 원죄라는 개념이 없으며, 오히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본성이 선하다고 믿기 때문에 중국교회는 지난 30-40년간 원죄론을 강조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원죄를 강조하는 대신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과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현재 중국의 이러한 인간론은 중국 전통문화의 인성론과 부합될 뿐 아니라 중국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소극적이며 염세적, 비관적 정서를 벗어버리고 적극적인 인생관을 갖게 하며 자발적으로 현실 사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고무해 준다.
5. 구원론.
사람이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는 인간의 죄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기초 위에 달린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다.
복음의 기초를 죄악에 두고 교회의 앞길을 인류의 절망에 둔 구원론을 중국교회는 반대한다. 오히려 인간이 완전히 손상되어야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가 하나님의 면류관이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졌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계를 관리하기 때문에, 인류는 하나님이 구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6. 종말론.
전천년설에서 후천년설로 바뀌어야 하는데, 후천년설이 더욱 중국상황에 맞는 이론이다. 세상은 점점 더 좋아져 갈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1958년부터 중국교회의 각파는 연합예배를 실시함으로써 교파후시대에 들어섰는데, 이는 세계 초유의 일이다. 장래 우리 주님의 양들이 한 무리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중국에서부터 시작될 것이고, 중국기독교회가 연합의 발단이 될 것이다.
중국교회가 순조롭게 교파후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던 것은 중국교회가 비교적 젊은 교회로서 서구의 배타주의적이고 교파주의적인 영향을 덜 받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교회의 연합원칙은 중국문화가 구대동존소이(求大同存小異: 큰 공통점을 추구하면서 작은 차이점도 보존한다)의 사상을 주창하는 것에 기초한다.
교회가 내 세운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사람에게 유익'이라는 내용의 구호는 중국기독교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영성과 경건을 배양하도록 고무한다.
공의는 하나님의 의도와 요구이며 사회주의는 바로 공의가 실천되는 사회를 모색하는 것으로 성경정신에 위배되기는커녕 오히려 상당히 부합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를 옹호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가난함과 부족함을 추구하는 것은 절대로 기독교적이 아니다. 가난과 고행, 가난할수록 영성이 강하다는 신조가 해롭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진정한 기독교란 생산과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지 빈곤함으로 신앙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7. 교회론.
중국교회는 최근 10년간 신학사상이나 교회조직에 있어서 그 초점을 사회참여의 방향으로 대폭 조정하여 시대조류에 적응하고 사회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상황화 방면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중국교회에 있어서 남은 문제는 현재 갖추어 놓은 기초 위에 어떻게 하면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처럼 완전하고 국정에도 적합한 신학체계를 세우느냐, 어떻게 하면 중국정세에 알맞은 교회체제를 창출해 낼 것이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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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적 정치화 신학에 대한 분석
“정광훈 문집”해독
“삼자”의 본래의 함의는 “자치, 자양, 자전”이다.
교회의 한가지 생존방식이나 선교책략이다. 그러나 수십 년 간 중국대륙에서는 아주 복잡한 현상으로 변해있다.
“삼자애국운동”(최초에는 “삼자혁신운동”이라 불렀다.)은 당시의 청년회인사 오약종 등에 의해 시작되고 중공의 대력적인 지지를 받은 정치운동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삼자신학에 대해서는 삼자교회사람들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은 삼자교회의 상층인물들은 대부분이 신학공부를 한 적이 없고 성직인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을 읽었고 주교신분인 사람은 이미 은퇴한 정광훈이다.
이 사람은 수십 년 동안 전국삼자교회주석을 담임하였고, 또 수십 년간 중국삼자교회의 최고 학부인 금릉협화신학원의 원장을 담임했었다. 삼자교회의 유일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삼자 노선을 대표하는 발언인이다.
정광훈은 큰 기대를 걸고 얼마전 자기의 일부 강연과 문장을 수록한 문집을 출판하였다.
대륙 관방 매체들은 그를 위해 신문발표회를 소집하고 대대적인 선전을 해주었다. 최근 정씨는 정부의 대대적인 지지 하에서 도처에서 유세하여 자기의 “신학사상”을 팔고 있다고 하는데 신학원들과 각급 삼자교회들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선”(정광훈 선집)을 읽게 하였는데 당년에 “모택동 선집”을 읽던 기세라고 한다. 그는 “신학사상건설”운동의 고조를 일으키려하는데 종교계의 문화대혁명이라 할 수 있다.
정씨가 삼자의 사상을 대표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씨의 문집으로부터 삼자신학을 검토하는 것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아래 인용한 자료들은 정씨 본인이 골라내고 편집한 것이다. 역림출판사에서 1998년 남경에서 출판한 “정광훈 문집”, 그러므로 인용할 때 페이지 수만 밝혔다.“
1, 삼자의 정치배경
삼자운동으 주요 지도자들 예를 들면 오약종등은 대부분 기동교청년회에서 왔다.
당시의 청년회인사들은 “사회복음파”에 속하는 자들 이였다. 그들은 회개나 중생의 체험이 없었으며 예수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드리지 않은 사람들이다.
정씨의 말대로하면 “그들은 예수를 위대한 도덕교사와 사회개혁가로만 찬양하였다.
P.91 예수가 전했던 것은 분명히 천국에 관한 복음이였다.
마 4:17 그러나 사회복음파는 그것을 사회정치를 변화시키자는 주장으로 보았고 기독교학설로 사회를 개조하려고 시도하였다. 중공혁명이 정권을 획득한 후 ”그들은 혁명이 중국으로 하여금 거대한 인심을 흥분시키는 성과를 획득하였다는 것과 기독교가 중국을 개조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대비는 그들이 기독교사역에 종사하려던 신심에 동요를 주었다.“(p. 91-92)
그들의 신앙은 실질상 일종의 정치신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사상과 구별점이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교회를 떠나 “그들이 더욱 힘있다고 여기는 조직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씨는 “그중 대다수가 오약종 선생의 제자들이며 또 그의 친구들이다”라고 알려주고 있다.(p. 92)
그런데 사상이 이렇게 선진적인 오 선생이 왜 공개적으로 입당하지 않고 교회에 남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오 선생의 후계자인 정씨는 40년대 제네바에 있을 때 한 성공회 목사가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대륙을 발견한 듯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진리필승”이라는 금기도 증정했다.(p. 507)
이로부터도 그가 공산주의에 대한 숭배심을 볼 수가 있다. 49년 정씨는 오씨와 만나 이런 관건적인 문제를 물었다. “만약 종교가 핍박을 받는다면 그래도 당신은 공산당을 옹호할 것입니까?” 오씨는 긍정적인 회답을 주었다. (p. 467) 정은 이후 귀국하였는데 이 문제에서 이미 중요한 결정을 한 것이 분명하였다.
50년대 초, 정이 귀국 후 오씨는 그를 금릉협화신학원 원장을 담임하게 하였고 화동종교국 라 국장은 이미 그와 정치와 신학의 밀접한 관계를 연구하고 있었다. 바로 그가 말하는 “정치시비의 신학사상에서의 반영과 신학사상이 신도의 정치태도에 일으키는 작용” (p. 504)이다.
이는 그의 공산주의 세계관의 확립과 신학을 “정밀한 정치”로 보는 사상의 형성과 큰 관계가 있다.
2, 삼자정치화 종교관
삼자교회의 종교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맑스 레닌주의 종교관이다.
종교는 다만 객관현실의 허환과 거꾸로 된 반응이라고 인정한다. 정씨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부정에서 우리는 이 점을 확실히 볼 수가 있다. 그는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전에 내가 받았던 교육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은 최고무상의 권력이며, 그는 우리를 소멸할 수도 있고 우리로 하여금 권력을 가질 수도 있게 한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상들은 권력욕에 충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하고 사회를 독점하려는 사회구조와 대중심리의 반영과 실적인 증명이다. (p. 97)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하나님의 유일성, 전지, 전능에 대한 신실한 신앙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권위, 절대지식, 영원불변, 절대통치, 독단, 다른 것을 용납 안함, 이런 인간이 억지로 하나님에게 부여한 신성들을 한쪽으로 해야한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특히 남성들의 자기들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p. 112)
정씨는 명확히 종교를 잘못된 인식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명의상의 종교인이므로 조금 완곡하게 쓰고 있다. “종교는 다만 착오적인 인식이고 인식의 착오일 따름이다.”(p. 351)
맑스 레닌주의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이 중공이 종교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이며 종교소멸의 이론근거가 되는 주장에 대해서는 정씨는 동감을 표시하나 신도군중들의 종교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완곡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기독교의 신앙은 확실히 마취적인 작용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p. 264)
정씨의 종교관과 중국이 역대로 믿어오던 경전학설은 완전히 일치한 것이다.
즉 종교는 우매하고 낙후한 세계관이고 맑스 레닌주의만이 과학적인 세계관는 것이다.
한 번은 그는 발언 중 성공회의 중공을 옹호하는 목사들과 오약종을 대대적으로 찬양하면서 “이런 일들은 기독교를 믿는 것은 과학적인 세계관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 모두가 과학적인 세계관을 갖게되는 과정에 있다.”(p. 496-497)
우리는 주교신분의 정씨가 갖고있는 것이 맑스주의 세계관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맑스 레닌주의는 무신론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주교로서 당연히 공개적으로 자기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주교”와 “무신론자”, 정상적인 인간의 논리로선 어떻게도 연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주교가 무신론자에 대한 태도를 볼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첫째로,
그는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의 구별을 없앴다. 그는 신은 이토록 위대하다. 지어는 “어떤 사람들이 모종의 원인으로 그의 이름을 칭송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를 부인할지라도 신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p. 2)
그리고 또 무신론자의 주장에 동감을 표시한다. “이런 무신론은 적극적인 내용이 있다. 이는 인간의 요소를 많이 강조하여 인간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인류의 외침을 대표하며, 인간들이 운명을 자기가 장악하게 끔 고무 격려한다.(p.140)
그는 또 무신론자들의 ”숭고한 인격“에 대해 대대적으로 찬미한다.
예를 들면 노르만 뻬쮼, 뢰봉 등에 대해서 ”그들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아주 우수한 인격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인격과 품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p. 242)
무신론자들을 백방으로 찬미하고 정씨는 또 신학적으로 무신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무신론은 종교계인사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대한 비판이다.”(p. 109)
그리고 무신론자들이 부인하는 것은“우주의 독재자”이며“중국민간종교의 잔혹한 염라대왕”이면, “허구적인 신명”들이라고 비호한다.
정씨의 논리대로라면 오직 무신론자들이 믿는 것만이 진정한 신일 것이다.
3, 삼자의 정치화 성경해석
기독교신앙의 근거인 성경에 대해서는 삼자에서는 기본 상 자유주의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중국교회의 절대 부분의 신도들이 성경의 권위를 아주 중시하므로 50년대 화동 종교국장의 지시 하에서 정씨는 “우리나라기독교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기요파신학”을 연구하고 한편의 복음주의관점의 문장을 썼는데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가?”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정씨가 이 문장을 자신의 문집에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문장이 그의 진정한 신학사상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문집에서 정씨의 성경관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을 한 권의 고전 문학작품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의 내용을 설명할 때 “이는 히브리민족의 세계의 기원과 인류의 유년시기의 이야기들로서 역사와 법률 시사를 포함하고 있다....(p. 498)라고 하면서
”신의 계시“에 대해서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 그가 선교의 혐의를 받을까 하였다면 적어도 ”기독교도들은 성경을 신의 계시라고 받아들인다.“라고는 했을 것이다.
둘째로 정씨의 이성으로 성경을 판단하려는 자유주의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는 성경과 현대과학의 모순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고대의 서적이 오늘의 과학관점에 부합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경을 위해 변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계시를 부인하고 이성을 최고로 생각하며 과학을 성경을 재는 자로 생각하고 있다.
정씨에게 있어서 성경은 신학연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직 신학사상의 참고자료일 뿐이다.
그는 한 번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성경은 그의 언어를 통하여, 시적인 뜻과 사람에게 주는 미감을 통하여 우리에게 대량의 신학사고의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p. 369)
성경해석을 할 때 삼자의 보편적인 방법은 태조표명적인 사회정치 성경해석이다. 예를 들면 복음서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빵을 나눌 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장면을 정시는 이렇게 해석한다. “양식의 분배문제는 확실히 성찬식의 기본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재부와 기회??? 분배하는 가하는 것은 어떻게 사회를 조직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현신한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p. 4)
이 모든 것은 영에 속한 것에 대한 세속화이다.
정씨는 늘 성경의 역사배경과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현실정치로 성경을 해석한다.
예를 들면, 그는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 할 것이라는 소식을 선포하는 것을 “그는 인민의 해방에 관심이 없다.‘라고 해석하고 바울이 말하는 ”이신칭의’는 “인성의 해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마서 13장 1절의 ”모든 권리를 장안한 자는 하나님이 세웠다“는 말은 정씨는 완전히 정치적인 수요로 해석한다. 이 말을 국민당에게는 ”인민들을 마취시킨다.“, 그러나 ”오늘의 인민정권아래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이 말을 하는 것은 반동이 아니다. 이는 안정과 단결에 유리한 것이다.“(p. 406)
4, 삼자의 정치화 신학
정씨의 정치적인 성경해석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는 삼자의 정치화 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성경의 권위를 특별히 강조하는 기독교신교정통신앙에 있어서 “성경해석은 신학의 기초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지는 하나의 명제이다.
그러나 삼자 영수들은 신학을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정씨? 여러 번 사람들이 신학을 경시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성경은 하나의 위대한 신학거작“이다. 라고 하였다. 그가 강조하는 신학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삼자영수들의 머리 속에서는 신학은 정치이다. 정씨는 미국에서 유학 시에 이미 “하나의 의식형태와 세계관으로서의 신학이 진보거인 혹은 반동적인 정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심각히 체험하였다.” 그러므로 정씨는 여러 번 그의 학생들에게 “신학공부 하는 것은 정치를 떠나서는 안 된다. 어떤 때에는 신학은 가장 정교롭고 세밀한 정치이다.”
“어떤 때”뿐만 아니라 삼자의 “신학사고”는 일관적으로 신학단어를 통한 정치적인 태도 표명에 있다. 정씨의 말대로 하면 “새로운 정치관점의 수립과 동시에 자신이 신학사고를 진행하여 현실을 정치적으로만 옹호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통하게 해야한다.”(p. 318)
정씨는 이런 신학상에서 “통하게”하는 것은 먼저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의 정치현실을 신학적으로 긍정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씨는 반복적으로 “이 세상은 마귀의 장악 하에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중공의 혁명을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보면서 “이 그리스도의 구속역사에서 인류는 진보와 해방 민주와 박애를 쟁취하는 운동이 하나로 연결되였다.”(p. 96)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중공의 혁명을 찬미하기 위해 정씨는 논리적인 합리성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중공집정이후의 중국신도인수의 대량의 증장의 원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 “혁명이 장기간 광대한 인민의 영혼을 속박하고 있던 봉건권위를 뒤흔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낡은 상황에 대한 불만과 함께 초월과 동경을 찾기 시작했다.”(p. 72) 이렇게 아름다운 새 중국이 어떻게 여기서는 “낡은 상황에 대한 불만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정씨에게 있어서 영적인 일과 정치를 혼란시키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오약종등 “기독교지식분자”들의 입을 빌려서 바울이 말하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을 공산당과 해방군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안이 아닌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생각하나다.” (p. 82)
이런 순 정치화 신학의 극단적인 예는 정씨의 부활론에서 나타난다. 모두 알다시피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이 직접 목격하였고, 성경이 분명히 기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독교 부흥의 근본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씨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은 누구도 잘 모른다”,
그리고는 간부들의 어투로 “그러나 부활의 도리는 군중기초가 있다.”(p. 186)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정치적인 결정인 것처럼, 군중들의 의견을 청취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처럼 말하나 사실상 부활을 부인하고 있다. 다만 이는 군중들의 동경심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삼자신학에서 제일 많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정씨는 입을 여나 다무나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가 말하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일반 기독교인들은 아마 그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요 3:16)을 말하는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실제적으로 하나의 정치개념이다. 정씨는 노골적으로 승인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념과 중국이 응당 사회주의로 가야한다는 신념은 통일적인 것이다.“(p. 108) 그가 말하는 사랑은 곧 ”사회주의“이다. 그는 이렇게 논증한다. ”사회주의는 대규모적인 사랑이다. 사회주의는 사회제도로 형성된 사랑이다.“(p. 214)
그리고는 ”다른 제도하의 사회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p. 108) 지어 그는 “사랑으로 통치하는 천국”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꿔 대신하자고 주장한다.(p. 32)
이로부터 우리는 그가 말하는 “사랑”에 대한 정치적 함의를 알 수 있다.
이상은 “정광훈 문집”에서 열거한 일부 재료에 대한 분석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삼자신학의 일부윤곽을 볼 수가 있다. 삼장의 배경응은 기본 상 청년회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복음파에 속하며 공산당간부들은 그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정치적인 수요로 인해 맑스 레닌주의 종교관을 받아들였으며 무신론자와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그들이 성경에 대한 해석은 정치적인 시각에서의 억지 해석이다. 그들은 신학을 일종의 정치로 보고 있다. 그들의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실제적으로는 일종의 정치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신학은 성경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씨를 위주로 하는 삼자신학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정치적인 수요를 만족시키려고 성경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정치신학은 사회복음이나 자유주의신학이라고도 칭 할수 없다. 사회복음은 기독교의 사상으로 사회를 개조하는 것을 강조하며 사회에 대해 일정한 비판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은 철학적인 사변을 가종하며 적어도 조금의 독립적인 사고는 갖고 있다.
그러나 삼자신학은 완전히 일종의 기회주의이다. 정씨가 해방신학에 대한 태도가 한가지의 좋은 예이다. 원래 해방신학은 중공의 정치적인 표준으로 볼 때는 혁명적이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 중공은 이미 정권을 취득하였기에 “우리의 정황으로 보면 해방절대화를 신학의 영원한 주제로 삼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p. 29) 정씨를 위주로 하는 삼자신학은 실제상 일종의 신학용어로 표현한 정치적인 태도이다.
일종의 “가짜 신학”이다. 곧 모든 사람들에게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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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기원과 역사
인보라
1. 삼자교회의 기원
삼자교회는 중국이 1949년 공산화된 이후 형성된 교회이다. 삼자교회는 일원화된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실행하기 위한 대중운동의 일환인 삼자혁신운동(三自革新運動)을 통해 생겨났다.
1951년 4월 16일부터 21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인 151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무원 종교사무처에서 개최한 「미국의 원조를 받는 기독교 단체회의의 처리를 위한 회의」에 참가한 후, 「연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기독교 항미원조 삼자애국혁신운동 위원회 준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54년 7월 28일 244명의 교회 대표자들은 북경에서 열린 「제 1차 전국 기독교회의」에 출석하여 삼자애국혁신운동의 정신에 입각하여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약칭 三自會)를 건립하였다. 삼자회에 가입한 교회를 삼자교회라 칭한다.
삼자회는 "중국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영도아래 전국의 기독교 신도들을 단결하여 조국을 사랑하면서 국가의 법령을 준수하고 자치. 자양. 자전의 삼자를 지지해 나가자"를 주장한다.
삼자혁신운동의 목표는 정부의 지도를 받는 전국적인 성격을 띤 기독교 조직의 건립이었다.
1) 자치
자치는 각 교회가 제국주의와 관계를 철저히 단절하고 중국 기독교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2) 자양
자양이란 제국주의와 경제적 연관성을 철저히 제거하고 중국 기독교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책임지고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3)자전
자전이란 제국주의의 남은 사상들을 철저히 말살하여 각 교회에서의 설교는 오직 성경에 의거한 순수한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삼자교회의 역사
1950년대의 삼자교회는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 개조와 국가건설이란 목표에 의해 당과 국가에서 원하는 교회와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의식화 교육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교육을 학습 받아야 했다. 그리고 교회정돈 작업을 통한 합병운동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많이 축소되었다. 1960년대의 삼자교회는 50년대보다 더 강력하게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교회가 계속적으로 감소되는 한편 하방(下放)운동을 통한 교역자외 교인의 노동개조, 인민공사란 집단화와 정치학습으로 교회활동에 참가하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1961년부터는 주일학교와 각 부서의 활동이 차례로 금지되었다. 교회의 각 부서의 폐지는 교인들의 필요와 영성에 많은 결핍과 부족을 초래하였다.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에 많은 성도들이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극심한 비판과 노동개조에 처해졌다. 홍위병들은 삼자회를 강제로 해체하고, 삼자회 지도자를 비판하였으며 수정주의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1980년대 공산당의 정책 전환으로 통일전선 전략적 고려에서 삼자교회와 삼자회의 활동이 재개될 수 있었다. 이 때 문화혁명 당시 중단되었던 통일전선부, 종교사무국, 삼자회 등이 재건되고, 1966년 이전까지의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이 회복되어 1980년 4월에 삼자교회가 재건되었다.
1980년 남경회의를 통해 종교에 대한 통일전선적 측면에서의 종교신앙자유정책이 추진되었고, 이로 인하여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간에 대립과 충돌이 생겼다. 그 결과 1982년 3월에 <19호 문서>를 공포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삼자회는 정부의 현대화 정책에 부응하여 기존의 삼자원칙에 의거해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금전적인 지원이나 투자를 받지 않았던 것에서 나름대로 원칙과 틀을 마련하여 해외의 금전적인 지원과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삼자교회는 6.4천안문 사태의 영향으로 1990년에 종교사무국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종교관리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1991년에 <6호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종교관리를 위한 법규와 조례가 상당수 만들어졌다. 1989년 천안문사태시 정광훈(丁光訓)의 민주화운동지지 이후 종교사무국에서 좀더 직접적으로 삼자신학교를 관리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는 삼자전국회의를 열어 교회행정제도 건립에 초점을 두고 교회관리와 치리를 지방 삼자교회까지 이르게 하였다.
지금까지 되어진 과정을 보건대 삼자교회와 종교사무국 측의 종교법제화 움직임과 종교관리, 통제의 움직임이 강화되면서 삼자회의 정통성과 합법성은 더욱 보장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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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녕성 기독교 규장제도(교회헌법)
제1장 총칙
*제 1 조*
우리는 공동히 삼위일체이신 유일한 참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앙망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구주이심을 믿으며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로 ?성경?의 계시와 교훈에 따라 도성육신의 지리를 실천하고 영생의 길을 걸어야 한다.
*제2조*
우리는 공동히?성경?은 하나님께서 감동하신 것이고 교회를 건설하는 데 표준이고 근거이며 역시 신자들의 신앙의 규범과 모든 일을 행하는 데 준칙이다 라는 것을 승인하여야 한다.
*제3조*
우리는 자치, 자양, 자전의 방침을 농호하고 독립 자주의 교회를 세우는 원칙을 견지하며 개혁, 개방, 형세에 적응하기 위해 각 나라 교회지간의 우호를 적극 발전시켜야 하고 또하 해도 적대 세력과 침투활동을 방지하고 제어하여야 한다.
*제4조*
우리는 공동히 믿음하에서 서로 존중하는 것을 제참하고 같은 점을 찾고 부등한 점을 보류하며 계속 연합예배의 방향을 견지하고 점차 그리스도안에서 합하여 하나로 됨을 실현하여야 한다.
*제5조*
우리는 공동히 나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길을 걷고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사업에서나 일터에서 생활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쳐야 한다.
제2장 교회의 자치
*제6조*
(1) 죵교활동: 신자들은 교회와 교회전통에 근거하여 교회에서 인장한 교목자들으 l인도하에 지정된 죵교 장소에서 헌법 법류과 정책에 어긋나지 않는 종교 활동ㅇ르 진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경복독, 설교, 찬송, 기도, 세례, 성찬 및 교회절기, 혼례, 장례의식 등. 교회 또는 집회점의 거리가 멀어 다니시기에 불편하신 노인, 불구자들은 한 신자의 집을 정해 놓고 책임자를 세워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고 교제할 수 있다.
소수사람들이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짓하고 약을 쓰지 말라고 하며 거짓된 “방언”, “예언”. “간증”하여 사람들의 신체 건강을 해롭게 하고 사회질서, 생산질서, 생화질서에 영향을 주며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을 왜곡하는 현상ㅇ르 반드시 권도하고 제지시켜야 한다.
*제7조 기독교의 의식*
(1) 예배집회:
신자들에게는 지정한 종교활동 장소에서 숭배집회 등 종교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 집회의 시간, 차수는 본교회나 집회점에서 실제 전황외 신자들의 요구에 따라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이나 생활, 사회질서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삼아야 한다. 지대를 넘어 크게 벌이는 종교활등은 반드시 정부 관계 부문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2) 가정집회:
한 가정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성경 읽고 기도하며 참미 부르고 교제하는 등의 활동을 가리킨다.
(3) 세례:
교회의 성례의 한가지이다. 이것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을 표시하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결심의 표시이다. 교회전동에 의하면 세례의 방식은 물세례(물을 찍는 세례)와 침례두가지가 있다. 이 두가지는 신앙상 다 같은 의미와 효과이다.
구도 억지로 한가지 방식만 따르라고 할 수 없다. 세례는 한번만 받는다. 세례는 즉 본 교회 또는 상급교회에서 임명한 현재성직자가 베풀 수 있고 현임 성직자가 아니면 셰례를 베풀 수 없다. 어는 누구도 마음대로 남에게 세례를 주면 안되고 세례는 응당히 본 교회당에서 또는 지정된 장소에서 진행해야 한다. 연로한 자, 불구자, 병이 중한 환자등 행동이 불편한 자들에게는 교회에서 성직자를 파송하여 그의 집에 가 게례를 줄 수 있다.
(4) 성찬:
교회의 성례식의 한가지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떡을 땐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 버리신 것을 표시하고 잔의 표도즙은 주님께서 우리를 우해 보혈을 흘려 죄를 사해 주셨다는 표시이다. 우리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심은 주님과 연합을 표시한3다.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성찬의 형식은 여러개의 떡과 잔으로도 할 수 있고 하나로도 할 수 있다.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는 다 성찬을 받을 수 있는데 반드시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고 죄를 회개함을 깨끗케 한 후 받아야 한다. 성찬식은 반드시 본 교회나 또는 상급교회에서 임명한 성직자가 집행해야 하고 비성직자는 성찬을 진행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성찬을 함부로 나누어 주어서는 안된다. 성찬은 응당히 본 교회에서 진행해야 하고 행동이 불편한 자들을 위해 교회에서 사람을 보내어 집에까지 가져다 줄 수는 있다.
(5) 성탄절:
교회 전통 절기이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매년 12월 25일(양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된다. 교회나 집회점에서는 성탄절 예배와 여러거지 형식인 경축 활동을 진행할 수 있다.
(6) 부활절:
교회 전통 절기이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매년 춘분 후 보름달이 둥근 첫 예배날을 부활절로 정했다. 교회나 집회점에서는 부활절 예배나 각종 형식의 경축 활동을 거 행할 수 있다. 부활절의 전 금요일이 수난절이 된다.
(7) 평화기도일:
중국 기독교 전국 양회 창의에 근거하여 매년의 두 번째 예배날을 “세계 평화 기도일”로 정하였다.
(8) 추수감사일:
어떤 지방에서 지켜오던 전통적인 교회의 절기앋. 단지 교회의 전통에 의해 일정한 형식의 경축 숭배 황동을 거행할 수 있다.
(9) 혼례:
국가 혼인법을 지키는 전제하에 교회에서는 남녀 신자 본인(혹 한사람만 신자이지만 상대방의 동의에 거쳐)의 원함과 요구에 근거하여?성경?의 교훈과 교회의 원칙에 따라 본 교회당에서는 신혼 부부를 위해 혼례식을 거행할 수 있다.
(10) 장례:
본인은 생전 요구와 가족의 요구에 근거하여 교회에서?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원칙에 따라 부르심을 받고 돌아간 신자를 위해 장례나 추도 예배를 거행할 수 있다.
*제8조 활동장소*
(1) 예배당:
신자들이 숭배집회를 진행하는 장소이다. 이미 개방된 정식 교회당의 종교 활동과 사무관리는 당지 교회 조직에서 전부 책임져야 한다.
(2) 집회점:
정식 교회당이 없는 곳에서는 갈 방면의 협상과 정부비준으로 하여 지정된 장소나 혹은 신자 가정에서 예배집회를 할 수 있다. 법률의 보호를 받는다. 활동과 사무관리는 집회점 책임자가 맡아 해야 한다.
*제9조 교회조직 기구*
(1) 신자 대표 대회:
요녕성 신자 대표회의는 전 성신자사 교회내에서의 최고권력 기구이다. 수요에 따라 저익로 회의를 열어 성기독교 삼자 내국 운동위원회와 성기독교 협회성원을 선거, 산생한다. 그리고 도성상부위원회의에서 향회의 영도성원을 추선하여 4년간 임명한다. 연속선거하면 연임할 수 있다.
전 성신자 대표회의는 양회의 공작 보고를 듣고 심사할 권리가 있고 성양회의 영도 성원을 임명하거나 해임하는 것과 성양회의위원을 선거하는 가람들을 증가하거나 감소할 권리가 있다. 각시. 현(구) 신자 대표회의를 열고 조직 형식 선거, 절차 및 직능은 다 성신자 대표회의 것과 같다.
(2) 기독교 삼자 애국 운동위원회:
요녕성 기독교 삼자 애국 운동위원회는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사랑 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조직이다. 그 목적은 헌법 법률 허가의 번위에 따라 신자들의 정상적인 종교 신앙 활동의 권리를 소호하고 자치, 자양, 자전의 방침을 견지하고 전체 신자들도 단결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등에게 덕을 주는 길을 걷게 하며 중국 특색을 가진 독립자주의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요녕성 기독교 삼자 애국 운동위원회는 성신자 대표회의 선거로 산생되는 데 4년간 임명한다. 연속 선거하면 연임한다. 종교 활동을 이미 회복한 시, 현에서는 응당히 시, 현 기독교 삼자애국 운도위원회 혹은 소조를 성립해야 한다. 그의 선거 순서는 성의것과 같다.
(3) 성기독교 협회:
\성기독교 협회는 기독교의 교수 조직이다. 그 목적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 모든 교목자들 뭇 신자들과 단결하고 연합하며 성령의 인도하에 성경의 말씀에 따라 마음을 합하여 주님의 교회를 건설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성기독교 협회는 성신자 대표회의에서 선거예 의하여 위원회가 산생된다. 주요 인원은 현임 성직자가 담임하고 담임 기간은 4년간인데 연속 선거하면 연임한다. 조직이 있는 시, 현에서도 기독교 협회 조직을 성립할 수 있다. 선거 순서는 성와 것과 같다, 각급 기독교 삼자 애국 위원회와 기독교 협회조직은 분공합작의 관례이다. 연합 호상간 존주의 원칙을 견지하는 기초위에서 성, 시 각 급량의 조직은 교회의 거룩한 일에 효과적인 망초와 복무를 제공해야 한다.
(4) 교회당 관리 위원회, 집회점 관리 소조:
교회당 관리 위원회, 집회점 관리소조는 교회 집회점의 관리기구이다. 그 목적은 교회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고 신자들이 교회나 집회점 관리 공작중의 민주 작용을 충분히 발휘히여 교목자들과 협조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주님의교회를 잘 세우는 것이다.
이 관리 소조는 본 교회당, 집회점 신자 대표회의에서 선거하여 산생된다. 현직 교목자는 응당히 교회당 관리 위원회(집회점 관리 소조)에 참가해야 한다. 교회당 관리 위원회(집회점 관리소조)에서는 분공 책임제를 실행해야 한다. 본 교회당 집회점 신자 대표회의 폐회기간 교회당 관리 위원회, 집회점 관리소조에서는 교회당과 집회점 관리 권력을 실행해야 한다.
주요 공작은 시, 현 양회에서 추천한 교목자를 초청하여 교목자와 협조하여 거룩한 일을 잘하고 해외 종교 적대세력의 침투 활동을 제어하는 것이다. 일체 비법 위법한 혼란 활동을 제지하고 교회의 방산 및 물질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교회당 관리 위원회와 집회점 관리 소조는 응당히 기독교양회의 영도 감독하예서 공작을 벌려야 한다.
(5) 성, 시, 현 각급 교회 조직지간의 관계:
본 지방교회의 민주 관리와 자주권을 충분히 존중하는 기초위에서 현행의 행정구역에 의하여 성, 시, 현 각급 교회 조직간에 응당히 예속 관계를 명확히 하여야 한다. 상급 교회 조직간에 응당히 예속 관계를 명확히 하여야 한다.
상급교회 조직이 하급교회에 대한 행정 관리와 사무 공작상의 관게를 기도관계이다. 교무상에서는 예를 들어 거룩한 일들에는 영도, 검사, 협조, 평행의 권력과 책이 있다. 교회당 관리 위원회는 응당히 주위의 집회점 소속범위를 명확히 하여야 한다. 교회당 관리의 원회사이 집회점 사이에는 예속 관계가 없다.
제2장 교회의 자치
*제10조 교회의 자양*
(1) 신자봉헌:
성경의 말씀과 교회의 전통에 따라 신자 개인이 영적으로 받은 것에 근거하여 교회를 위해 자원적으로 봉헌하는 것인데 힘이 닿는데까지 하고 다른 어떤 강박을 받지 않는다.
(2) 생산수입:
교회의 구체적인 정황에 근거하여 교회에 현재 있는 조건을 이용하여 어떠한 생산 사업을 하므로 교회의 재정수입을 증가하여 자양의 내원으로 할 수 있다.
(3) 집과 토지의 세금수입:
교회의 집과 토지의 소유권은 원칙상에 시, 현, 양회에 있다. 그 세놓은 부분의 세금은 교회의 자양 수입으로 할 수 있다.
(4) 해외기증:
삼자원칙을 견지하고 국가 외사활동에 관한 정책을 준수하는 전제하에 어떠한 조건도 덧붙이지 않는 해외 교회 단체난 개인의 기증은 받아도 된다. 만일 기증이 덧붙이는 조건이 있으면 꼭 성, 시 현 양회에 신청하고 보고하여 연구한 후 결정을 한다. 만일 자원적으로 연보궤에 넣은 헌금은 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어떠한 사람도 자기 마음대로 받을려고하고 또한 교회의 명의로 헌금을 받고 개인 주머니에 넣으면 안된다.
*제11조 재정제도*
(1) 일터책임제:
교회의 재무 관리에는 명확한 분공이 있어야 한다. 회계, 출납, 보관등 직을 설립하고 각기 제 책임을 하여 일터책임제를 실행해야 한다.
(2) 수입, 지출제도: 건정하게 수입, 지출 수속과 심사비준 제도를 정립하여 장부가 세밀하고 명확하여야 한다. 조건이 있는 교회는 응당히 은행장부를 세워야 한다. 현금수입은 반드시 즉시로 은행에 저금해야하고 제때에 교회의 수입, 지출 정황을 공포하고 신자들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3) 연보궤관리: 봉헌상자(연보궤)는 반드시 관리하는 사람을 세워 보관해야 한다. 궤를 열 때 두사람 이상이 있어 제때에 세금액 수입, 지출 정황을 공포해야 하고 전체 신자들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4) 교목자는 직접 제무관리에 참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재정수입, 지출 정황을 검사, 감독할 책임이 있다.
*제12조 교회조직 기구*
(1) 방산귀속:
현 상태를 존중하는 정황하에서 각 교회에 속한 범위내의 원교회 방산은 원칙상 당지 시, 현 양회의 소유로 되어야 한다.
(2)예배 집회하는 장소 외에 남아도는 방산을 교회에서 구체적인 정화에 근거하여 사용할 수 있고 또는 세를 내거나 약간의 생산 사업을 하여 교회의 경제 수입을 증가시켜도 된다.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사고 팔거나 교회 방산을 다른데로 넘겨줄 권리가 없다. 확실히 성시 건설 규모 계획에 들어 다시 건설하게 되거나 연합 건설하여야 할 때에는 반드시 시, 현 양회 위원회의에서 연구 결정을 거쳐야 하고 또 즉시로 성양회로 신청하여야 한다.
(3)각 지교회에스는 한 사람을 세우든가 방산관리 소조를 ???워 즉시로 수리하고 특별히 예배집회하는 집안을 제때에 수리하여 사용케하여야 한다.
제4장 교회의 자전
*제13조*
◀ 교목인원:
우리성의 교회의 전통에 근거하여 각지 교회에서는 목사(교목장로), 교사, 장로, 전도원들의 교목자들을 남겨야 한다.
(1) 목사(교목장로)의 안수:
신학원을 필업하였거나 동등학력이 있고 교회의 일에 일정한 실천경험이 있는 자는 당지 교회의 뭇 성도들의 추천과 시, 현 양회의 심사를 거쳐 성 양회에 알려 심사비준을 한 후 세분 이상의 성직자들이 안수하여 목사로 된다. 목사(교목장로)의 직책은 교회의 감독이다. 각양 거룩한 일들을 주장하고 목회하는 것이다.
(2) 교사:
신학원을 필업했거나 신학적 배양을 받고 비교적 풍부한 성경 지식이 있으며 경견한 신양이 있고 일정한 교목능력이 있으며 영적과 도덕적으로 우수한 형제니 자매님을 교회에서 초청하고 성,시,현 양회의 비준을 거쳐 교사 직분을 받는다. 교사는 반드시 목사님을 도와 강단의 일과 목회하는 일에 몸바쳐 주님께 봉사아여야 한다.
(3) 장로회 추천과 안수:
교회의 실제 정황과 수요에 따라 신자들 가운데서 신앙이 경건하고 교회일에 열심하며 신자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을 추천하여 시, 현 양회의 심사를 거쳐 성 양회에 알려 심사 비준한 이상의 성직자가 아수하여 장로로 된다. 장로의 직책은 목사님을 도와 교회의 일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4) 전도원:
일정한 ?성경?학습의 훈련을 받고 교회의 공작 경험이 있으며 목회능력이 구비되고 신앙이 경견하며 영적과 도덕적으로 우수한 자를 교회로부터 추천하여 시, 현 양회의 심사를 거쳐 동의한 후 성 양회에 알려 전도인 직분을 받는다.
◀ 주: 성직자는 성례권이 있어 능히 집행할 수 잇는 목회자를 놓고 말한다. 즉 우리 성에서는 목사와 교목장로를 가리켜 말한다.
*제14조*
의무전도인:
성이나 시의 성경학습의 훈련을 받고 신앙이 경건하며 영적과 도덕적으로 우수하고 교회일에 열심이며 “삼자”를 옹호하는 자를 본 교회에서 추천하여 시, 현 양회의 심사를 거쳐 증명을 받으면 의무로 전도할 수 있다. 본 교회나 집회점에서 설예식외에 기타 예배 활동을 주장할 수 있다.
*제10조 교회조직 기구*
(1)재직 교목자와 의무전도인들은 힘써 보교회 집회점의 양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 만일 규장제도를 위반하고 법에 어긋나는 비법활동이 있어서 교육하고 도와주어 듣지 않으면 상급 양회에 알려 교회내에서 맡은 직무를 면해버린다.
(2) 재직이 아닌 교목자와 교회의 인정을 거치지 않은 자는 예배 활동을 주장할 수 없다. 신자들은 기독교의 기발을 듣고 비법 위법한 자칭 전도인으로 제지시키고 제어할 권리가 있다.
(3) 어떤 교목자와 의무 전도인이든지 시, 현을 넘어가 활동을 하려면 반드시 성과 관계되는 시, 현 양회의 동의를 거쳐 소개신을 가지고 가서 당시 양회와 연계를 가져야 한다.
(4) 각 기층의 교회당, 집회점에서는 외 시, 현의 교목자나 의무전도인을 초청하여 일을 할려면 반드시 먼저 관계되는 양회의 동의를 거치고서야 일을 배치할 수 있다.
*제16조*
신자를 받아들이는 것:
초신자가 일년이상 열심히 교회 단체생활에 참가하고 기본 교리와 삼자 교육을 받아 신앙이 경건하여 졌고 교회의 삼자에 합격하엿으면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입교한다. 세례를 받은 후 신자들이 소유하는 권리와 응당히 드려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교회의 신자들의 수량을 늘이는 것보다 신자들의 소직을 제고하여야 한다. 노년, 병환자들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겠다고 요구하면 사정을 참작하여 관례를 타파할 수 있다.
*제17조 교회의 집회점의 건립*
(1) 집회점의 건립:
신자들의 발전과 분포되어 거주하는 지리환경에 근거하여 교회의 집회점이 비교적 먼 곳에서는 신자들이 일정한 수량에 달하면 당지 교회조직에 집회점을 세우려고 신청 할 수 있다. 조건이 성숙된 후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교회조직에서는 당지 정부 조직에 신청한다.
정부 비준을 거쳐 집회점은 정식으로 활동하고 관리기구를 성립해야 하며 교목자나 의무전도인이 있어야 하고 배양하여야 한다. 그 종교 활동은 다 법률의 보호를 받는다. 지보히점은 부근 교회에 속하다.
(2) 교회의 건립:
정식 교회당이거나 작은 교회 또는 교목자가 있는 집회점에서는 집회할 때 상당한 수량의 신자들이 모이면 신자들의 일치한 요구에 따라 당지 교회조직에 교회를 세우곘다고 신청하면 정부비준을 청들어 정식교회를 세울 수 있다.
*제18조 신학교육과 의무일군 훈련*
(1) 동북기독교 신학원:
전 동북교회의 교목 후계자를 배양하는 목적을 두고 세워진 것이다. 각 지교회에서는 교원의 자질과 경비상으로부터 지지해 주어야 한다.
(2) 각 지교회는 다 청년 후계자를 배양하는 일에 적극적이여야 하고 일정하게 신앙이 경건하고 부르심을 밝히 깨달았으며 몸바쳐 주의 사업을 지망하하는 청년 남녀 신자들을 선거하고 추천하여 신학원에 들어가 더욱 깊이 공부하게끔 하여야 한다.
(3) 각 지교회에서는 적극적으로 단기 의무 일군 훈련반을 모집하여야 한다. 조건이 되는 교회에서는 정기로 계획있게 계통적으로 배양하여 몇 년을 지속하므로 학원의 수평이 초급신학정도에 달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수년내 각 교회당, 집회점에는 다 의무 전도인이 있어 순전한 복음을 전해주고 신자들의 영적수요를 만족시켜야 한다.
*제19조 ?성경?과 종교서적의 관리*
(1) ?성경?과 각종 종교서적의 출판, 인쇄하는 것은 모두 전국과 성 양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며. 각 지교회에서는 응당히 책임자를 세워 예약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게하여 신자들이 ?성경?과 종교 서적을 구입에 수요를 보장하여야 한다.
(2) 국가출판, 인쇄의 법령에 따라 어떤 단체거나 개인은 물론 하고 마음대로 찍고, 함부로?성경?과 종교서적을 발행하여서는 안된다.
(3) 해외 교회 단체나 개인이 선물로 많은 ?성경?이나 종교서적을 주었으면 전국 양회나 성, 시 양회를 거쳐 통일적인 수속을 밟아야 된다. 어던 해외 단체나 개인이 마음대로 종교서적을 돌리는 것은 중국교회에 대한 간섭과 우호치 못한 행동이라고 본다.
(4) 내력이 분명치 못한 종교서적, 전도지, 그림등을 마음대로 돌려 읽거나 복제하지 못하며 즉시로 성과 시 양회에 바쳐 처리하게 하여야 한다.
제5장 부칙
*제20조*
본 규장제도는 요녕성 기독교 양회 상무 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연구 토론하고 광범한 각지 교회의 의견을 쟁취한 후 요녕성 기독교 삼자 애국 운동위워노히 제 3기 즉 요녕성 기독교 협회 제2기 제2차 전체 회의에서 통과한 것이다.
*제21조*
본 규장제도는 해석권은 성 양회에 속한다. 집행하는 과정 중 불합당한 곳이 있으면 반드시 성 기독교 양회 위원회의를 거쳐야만 수개한다.
*제22조*
본 규장제도는 1989년 2월 1일부터 시행한다.
요녕성 기독교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
요녕성기독교협회
198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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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1)
인보라
삼자교회에 대한 인식이 참으로 다양하여 한 마디로 말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선교사는 물론 한국교회가 삼자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까지 삼자교회에 대한 이해는 주로 삼자교회 자체의 선전선동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삼자교회에 대해 알 수 있었던 또 다른 루트는 중국복음선교회(CMI)의 자료들을 통해서였다. 또한 중국에서 삼자교회와 협력하여 그들의 대변인이 되었던 NCC 계열 인사들의 왜곡된 선전, 그리고 내밀하게 삼자교회와 협력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강의나 기고를 통해서 아는 것이었다.
여기에 우리의 삼자교회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있다.
삼자교회가 선전하는 삼자교회의 실체는 사실과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고, 친 삼자교회적인 사람들이 전하는 삼자교회에 대한 인식도 편향적일 수밖에 없거나 표피적인 것이다.
그리고 화교들이 전해주는 삼자교회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도움이 되었으나 현실하고는 거리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가정교회가 삼자교회를 보는 인식을 직접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근래 삼자교회에 대한 가정교회의 인식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를 얻게 되어 정리하여 내놓는다.
삼자교회의 실상을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현실이 나로 생각하도록 하였다.
나는 평범한 신도로서 처음 주님을 믿을 때 교회에 대한 의식이 약하였다. 나는 50년대 교회 내부의 치열하고 잔혹한 투쟁에 대하여 들어보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개방 후 규모가 큰 삼자교회에 가보면 성경에 있는 선한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에 만족할 수 없어서 삼자교회에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나는 몇 명의 신도와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신학원에 다닌 적이 없기에 매번 집회 때마다 설교할 수 없어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열심히 읽을 뿐이었다. 성경을 한 번, 또 한 번 열심히 읽었더니 점차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었다.
나의 영적 생명은 확실히 성장하고 있어서 좋은 결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이 때 가정집회는 지하교회이며 불법적이기에 금지하고 신도들을 체포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집회가 금지 당하고 체포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벌금 선고가 가장 가벼운 형벌이었다.
나는 이것이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50년대의 그 투쟁이 나 자신과 관계가 없다면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나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선택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에는 삼자회(삼자회 지도를 받는 교회)와 가정교회(삼자회에 속하지 않은 가정 교회)가 있다. 그러므로 중국의 모든 신도들은 삼자회와 가정교회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사실상 신도들이 갖고 있는 입장이 이미 자기의 선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삼자회와 가정교회의 차이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무의식간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는 자기 마음을 어기는 것도 있고, 마지 못해 따른 것도 있고, 또 심지어 다른 동기와 목적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간노선은 존재하지 않고 선택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말아야 하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엡5:17). 그래서 삼자회와 관련된 서적들을 보았다.
그 중에 <금릉신학지(金陵神學志)>와 삼자회의 발기인 오요종의 <암흑과 광명>은 삼자회의 신학사상과 삼자교회의 모토를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삼자회는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삼자회에 참석하지 않고, 삼자회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삼자회의 신학교육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삼자회의 길을 가지 않겠다는 길을 선택하였다.
중국헌법에는 종교신앙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즉 중국공민은 종교를 신앙하고 신앙하지 않는 자유가 있으며 종교신앙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한 개의 종교에서도 교파별 선택의 자유도 있다. 그래서 나는 헌법이 부여한 합법적인 공민권을 이용하여 광명정대하게 나의 선택을 공개하려는 것이다.
3. 신학은 마땅히 대가(大家)가 논해야 한다.
성경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만민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하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관직을 가진 사람을 물론하고 누구라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깃발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넘겨주어 진리의 깃발을 휘날리게 하는 것이 모든 신도들의 사명이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경전이며 모든 신도들의 신앙의 근거이기에 비방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삼자회 지도자들은 맹목적으로 자기를 높이고 성경을 내리 누르고 실용적인 수법으로 성경의 해석을 왜곡하고 마음대로 더하거나 삭제하였다.
성경의 의미를 늘여 연장하거나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설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한 성경은 다 맞는 것이 아니기에 그대로 따르지 말고 비판적인 방법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도 모자라서 성경의 내용을 다시 편찬할 것을 건의하였다. 중국과 관계없는 부분을 삭제하고 중국의 도교, 불교, 유교 경전을 보태어 중국문화에 적합한 성경으로 만들자고 하였다.
삼자회는 예수의 이름을 빼지 않고 종교의 대연합을 도모하여 세계의 진정한 종교를 건립하자고 공언하였다. 그들은 진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있으므로 복음의 진정한 도에 대하여 혁신을 하자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듣기 좋게 새로운 소식, 새로운 빛, 법 중의 법, 신선한 만나, 중국문화에 뿌리를 둔 기독교라고 한다.
그들은 이 교회가 아니면 앞날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기존의 교회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고, 생존 공간을 획득하지 못할 것이며, 역사에 의해 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구세주로 자처하였고 신도들을 잘못 들어간 길에서 구하여 개조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외국의 新派신학(자유주의신학)을 대량 들여와 우리의 두뇌를 씻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중국교회의 지도권을 탈취하였고 선량한 남녀신도들을 우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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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2)
4. 삼자회의 신학은 現代派(자유주의 新神學) 신학사상 체계이다.
근대에는 기독교의 신학 분파는 아주 많으나 대략 현대 신파와 복음파의 두 개 분파로 나눌 수 있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는 다섯 가지 관점이 있다.
현대파는
1) 성경은 마땅히 역사적 비판의 방법으로 이해해야 하고, 일점일획도 오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연의 발전에 따라 진화되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은 원숭이가 진화되어 온 것이라고 여긴다.
2) 말씀이 성육신하는 것은 승인하나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는 하나의 우화(寓話)로 본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은 동정녀와 충분한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능력을 표시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분노의 하나님이나, 구속의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는 것은 믿지 말아야 한다.
4) 부활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부활을 육체의 부활로 여기지 않는다.
5)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은 단지 시적 의미의 상징이고 정의가 죄악을 정복하는 것을 상징한다.(오요종의「암흑과 광명」, pp.189-191)
이 다섯 가지는 기독교의 기본신앙과 관계된 것이다.
복음주의는 이런 다섯 가지 점에서 자유주의와 맞서고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삼자회의 창시자이고 첫 번째 지도자인 오요종은 철저한 자유주의자로서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저서 <암흑과 광명>에 있는 그의 신앙고백에서 산상보훈은 매우 감동적이라고 하였다.
그는 신학 문장에서 <주여! 나의 구주여>라는 말을 많이 인용한다. 이것으로 자기 신앙의 순수함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단락에서 그는 한 번도 <주여! 나의 구주여!>를 인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복음의 기본 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오요종은 성육신, 동정녀 탄생, 부활, 삼위일체, 최후의 심판, 예수 재림 등을 모두 황당하고 괴이한 것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것을 믿지 않아도 종교신앙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암흑과 광명, p.76)
오요종이 창설한 삼자회가 어떤 신학관점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밝혀진다. 오요종이 자기는 복음주의를 초월하는 사람이라고 자칭하는데, 이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신앙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금의 삼자회 지도자인 정광훈은 "오요종은 나의 40여년간의 스승이며 친밀한 벗이다"라고 하면서 "훌륭한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낳는다"고 하였다.
훌륭한 자유주의의 스승이 훌륭한 자유주의 제자를 배양해 낸다는 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오요종을 계승한 신학적 관점은 현대파와 한 혈통일 뿐 만 아니라 오요종보다 더 현대적이어서 오요종과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고 표면에 두터운 양가죽을 더 입었을 뿐이었다.
정광훈은 오요종보다 투명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더 크게 신자들을 미혹한다. 반 세기가 지나서야 신도들이 정광훈의 현대파적인 행태를 식별하게 되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은 중국의 변혁기인 1949년 신중국이 설립되었을 때 전통적인 신앙을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전통에 반하는 사고의 결과 "신학에서는 솔직하게 조금도 보류함이 없이, 두려움 없이 한 차례 혁신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관계되는 기본 진리인 신앙과 불신의 분야, 동정녀 탄생한 예수, 중생, 부활, 이신칭의 등은 말 할 것도 없고 인성론, 기독론, 구속론 및 타종교에 대한 태도 등등에 대하여 혁신적이다.
그들은 혁신에 대하여 일종의 설법이 있다. 심지어 성경의 내용까지 고쳤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일반 자유파도 아니며 어떤 초월파도 아니다. 다음에 기술하는 것은 삼자회의 신학기관지인 <금릉신학지(金陵神學誌)>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신학사상은 삼자회의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좌우할 것이기에 신학지에 기록된 글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4.1 성경 내용을 개편하고 도교, 불교, 유교 경전을 더한다.
중국의 저명한 삼자회 기독교학자인 사부아(謝扶雅)교수는 봉상례(封尙禮)목사에게 성경을 개편할 것을 건의하였다. 삼자회 지도자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홍콩의 곽서겸(郭書謙)이 쓴 이 글을 신학지에 게재하였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내용이다. 곽서겸이 말하기를 "중화기독교의 성경을 개편해야 하는가? 우리 중국기독교는 이런 넓은 가슴과 담량이 있는가? 사교수의 건의를 접수할 것인가?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상의할 줄 믿는다. 성령의 계시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 사교수는 1970년 말에 함경계간(函景季刊) 주필 봉상례 목사에게 중화기독교가 사용할 성경을 제출하였다. 그 성경은 신약전서, 구약록요(舊約錄要), 유경비지(儒經備旨), 도불권우(道佛拳隅)로 구성되었다.(신학지 24기-25기 p.81)
삼자회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정식으로 광대한 신도들에게 성경 개편의 건의를 전하였다. 그들은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 성경은 중화문화에 맞는 성경이 되고 기독교도 중국문화에 뿌리박을 수 있고 발달 할 수 있다.
곽서겸은 그 글에서 진일보하여 사교수가 무엇 때문에 유교, 도교, 불교의 경서를 성경에 보탰는가를 해석하였다. 사부아는 "중국의 유가 경전 중에 사서오경, 역경, 대학, 논어, 맹자는 몇 천년을 사용해 왔다. 그래서 이미 중화의 일부분으로 되었다. 도가의 노장(老壯)과 중국의 불장(佛臧) 등은 중국의 고승이 쓴 것이기에 절대로 구약의 선지서보다 손색이 없다.
예수는 유대의 율법과 선지교훈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버리지 말고 승인해 주어야 한다. 만약 예수가 신주(神州)에서 태어났다면 그 역시 중화민족의 윤리도덕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버리지 말고 성사가 되게 해야 한다. 그는 최후로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개정하는 것을 상의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건의의 출발점은 중국의 기독교가 중국문화에 맞는 성경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성경의 본의를 배반한다고 평론할 수 없다."
본래 현대파인 오요종이 성경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부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오늘 삼자회의 현대파는 성경에서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믿을 필요가 없다(신학지 21기 p.30)고 하면서 성경을 다시 재편하는 것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성경에 다른 종교의 경서를 더하여 써 넣겠다고도 하였다.
성경을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고친다면 역대의 성도들의 신앙이나 순교자들은 원통한 것이다. 중국의 사교수가 중국의 도교, 불교, 유교를 보태면, 인도의 사교수도 인도교나 요가의 경전을 더할 수 있지 않는가? 각 나라마다 고유의 이교가 있는데 자기의 생각대로 각 나라의 특성에 따라 고쳐, 각 나라 특색의 종교가 된다면 기독교는 어떠한 종교가 되겠는가?
성경을 빙자해 말하기를 성령의 계시를 기다려 완성하리라 한다. 성령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가? 그의 계시의 말씀을 그가 변개하시겠는가? 게다가 악령이 성경을 고칠 수 있겠는가?
동시에 그의 글 속에서 "넓은 가슴과 용기"는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려냐, 네가 전능자와 같아 지려냐"의 사단의 용기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하나님의 계시를 변개하겠는가? 계속 말하기를 "구약의 오경, 6선지서와 다윗의 시는 성도가 배워야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나 전기는 사학자가 연구할 것이지 성도가 꼭 읽고 배워야할 필요가 없다.
또 하나님처럼 자처하여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쓰라 하여 쓴 것을 사교수가 읽을 필요가 없고 삭제해야하고, 도교, 불교, 유교의 경전을 더하려 한다. 사 교수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고, 연구하게 하는 사 교수의 머리는 누군가? 사단이다! 사 교수가 성경의 개편에 대한 건의는 개인 의견이다. 글을 쓴 곽을 대대적으로 추천한 것도 개인의 일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믿던, 모든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문제는 중국기독교 신학 출판물의 대표인 금륭신학지가 사 교수의 글을 전면 보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독자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이 사 교수의 건의에 동의한다고 이해 할 것이다. 너희들이 성경을 개편하려 했다면 무엇 때문에 뒷 표지에 당당하게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고 정통신앙을 견지하자고 커다랗게 인쇄하였는가? 책 내용에는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의 권위를 비방하는 글이 나왔는가?
(주: 이것은 95년 24-25부터 책 뒤에 인쇄한 것)
이것은 너희들이 양의 가죽을 쓰고 교회에 들어온 잔혹한 승냥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마7:15) 너희의 행위는 분명히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것이고, 성도들을 기만하는 비겁한 행위이기에, 반드시 밝혀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중요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국내외의 중국 정통교회라 자처하며 전 중국 기독교 대표라는 명의를 걸고, 합법교회이며, 높은 자리에 앉아, 신학지의 고문이며, 편집, 주필, 교정하는 너희들은 우리 평신도들을 어디까지 우롱하려는 것이냐?
너희는 하나님의 교회를 어디로 끌고 가려느냐? 너희는 참 선지자냐, 거짓 선지자냐? 나는 너희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짓선지자라 말한다. 우리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국성도의 대표의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
너희 거짓선지자들아 하나님께서 이 일에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들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신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4;2).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5-6)
계시록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마음대로 말씀을 고칠 줄을 아시고 태초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점점 엄하게 경고하셨다. 말씀하시기를 성경을 마음대로 고치는 자는 최후 심판의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이르노니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에함을 저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4.2 믿음과 불신의 경계를 돌파하다.
믿음과 불신은 분명한 경계가 있다. 이는 각 사람마다 생사의 선이다.(요3;36) 엄숙한 개념인데 삼자회 지도자는 공개적으로 믿음과 불신의 선을 넘어서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뜻인 인애와 공의를 실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이 대략적인 구조이지만 아직 완전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고, 다만 그의 취향은 개방적으로 여러 진보적인 요소들을 용납하고 종교의 문호개방을 하자는 것이다.(신학지 35기 p.43)
이 말은 아주 분명히 그들의 신앙이 믿음과 불신앙에 관계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신학지 3기 p.23), "지금까지도 교회에 믿음과 불신의 선상에 선 사람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사람 누구도 자기의 자녀로 본다"(신학지 19기 p.67) 그들이 신앙, 불신앙을 파괴함이 개방적이라는 뜻은 그들이 이해하기에 인류의 문화, 과학, 예술, 정의, 화평, 쟁취, 진보등은 모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며,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며. 다른 종교의 종교인도 포함하여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것이 그들의 대단원의 중심 사상이다. 그들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 알리라."(요일2;29하)의 성경을 근거로 한다. 이것은 포장의 의미이다. 성경이 말하길 "너희가 그의 의로운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에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킴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도 요한이 그들을 격려하는 것은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8절)는 목적이다. 그들은 왜 이 말씀을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는가? 그것은 정광훈이 "지금 중국의 배경 아래서 이신청의 교리를 신자와 불신자의 윤리 행동 상에 불필요한 거리로 만들었다.(신학지24-25기, p.41)고 한 것에 기인한다.
그들은 신앙과 불신앙을 모호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를 혼란하게 했다. 그들은 "만약 예수가 사람을 질책하는 것은 비기독교인인 불교도나 이슬람 등등의 기타 교도가 아니라 부정의 한 사람이다."(신학지5기, p.78) 라고 말하였다.
삼자회는 신파 지도자들의 원칙을 적용해 필요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며 교회지도자의 권위를 수호하고 무엇을 설교하며, 하지 말아야 함을 임의로 명령을 내린다. 이는 절대 불가한 것이다. 성도는 진리를 벗어난 설교를 용납할 수 없다. 성도의 손에는 성경이 있고, 누가 말하던 성경의 원칙을 준수해야한다.
신앙과 불신앙은 분명한 한계가 있고, 해석이 필요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5;1)
위의 말씀이 분명히 말하듯 믿는 사람은 살 것이고 불신자는 죽을 것이다. 이를 어길 수 있으랴?
하나님께서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삼자의 지도자 정광훈은 이신청의를 강조하여 말하는 사람은 뼈에 사무치게 증오한다하며, 여러 가지로 풍자하였다. "어떤 사람의 신학이란 그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돈다---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믿고 안 믿는 것이나 구원문제도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예수 믿는 신앙은 무엇이 있는가? 덕일진(德日進: 떼아르 드 샤르뎅)은 말하기를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풍부할 수 있다 한다.(신학지3기, pp.19-20)
기독교는 확실히 풍부하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실제의 의가 있는가? 하나님의 풍부는 모두 주 안에서이며, 믿음을 전제로 한다.
만약 사람이 믿음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면 예수와 관계가 없고 계약 밖의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으며 하나님도 없다(엡2;12).
이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한 사명은 전도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기독교는 전도의 종교이고, 안 믿는 자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는 것이 중심 사명이고 제일 중요한 일이다.
다만 정 주교는 상상외로 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고 믿고 안 믿는 문제를 글로 표현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하는 주교는 이미 4복음서를 읽어보았다.
믿음을 강조하신 분은 먼저 예수님이시다. 사람이 묻기를 무엇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시니"(요6;29). 또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쳐신 것은 믿음! 믿음! 믿음! 아주 여러 번이다.(요6:35,37,39,40,44,47,51,54,56)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 외침은 죄인을 찾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 후 인류 역사상 오늘날까지 찾으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음성이다. 이에 믿음만이 유일한 대답인 것이다.
믿음은 사람의 이성이 하나님에 대한 항복(降服)과 귀의(歸依)이다. 믿음을 갖은자는 예수 안에서 도장 위에 도장을 찍음이다. 성령이 내주하고, 영원히 살고, 영생을 얻는다. 믿음은 이와 같이 중요하고 엄숙한 문제인데 "문장을 쓰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말을 하는 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금능신학원 부원장 진택민은 말하기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의 적지 않은 성도들은 자주 믿음과 불신앙, 영적인 문제 사이에 놓여있다.
전 인류를 이분화해 하나는 기독교 요, 하나는 비 크리스챤---이렇게 문제를 본다.
이는 너무 간단하며 주관적이 아닌가.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말할 때 교리에 매달려 해석해서는 안 된다.(신학지2기, p.5) 인류에 대해 기독교 방식으로 분리하면 자연히 하나는 기독교 다른 하나는 비기독교이지 몇 개로 분리되겠는가?
이것이 단순화며 주관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사실에 맞게 객관화 한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명백한 일을 가지고 믿음과 불신앙의 경계를 부수고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려 하는가?
새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 어떤 사람은 늘 두 문제가 대두되는데 (믿음의 문제, 영에 속한 문제) 복음파와 현대파 사이에서 많은 분열과 필요 없는 다툼을 조성했다.
현재 30여년의 경험을 결산해 볼 때 중국의 현대 신학의 특징을 말하면 종교주의를 벗어났다.(신학지2기, p.5) 그들은 이 몇 마디말로, 새로운 현대파를 만들며 게다가 이 다툼은 필요 없으며, 이것이 혼란시킨다고 설득한다. 복음파와 현대파의 신학관점은 절대적으로 대립되며, 믿음과 불신의 구별이다.
이는 양자의 경계를 긋는 것이고 교회의 누룩을 없애는 것인데 이를 사람이 분열을 초래하며 필요 없는 다툼이다 말할 수 있는가?
종파를 초월하는 것은 마땅한데 현대파는 종파가 아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개념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서로는 자기가 초월파라 하며 서로 위에 있으려 하며 겉으로는 공정한 것처럼 한다. "신학사상 상 우리는 서로 존중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전의 신파와 구파 그리고 복음파와 현대파의 불일치를 벗어나자는 것이다.(신학지13기, p.18)
이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요종의 현대 자유파 보다 더 발전한 것이고 멀리간 것이다. 오늘날 연합이란 권력선전의 꾀이고, 중국교회를 신파로 통일하는 과정이다.
연합은 거짓이며 복음신앙으로 고치려는 것이 진짜이다.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 그들은 몇 개의 영향있는 복음파의 지도자들을 조직하였다면서 몇 마디 외쳐대는 "다수는 소수를 돌봐준다"는 말로 속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신학과 교회의 나아가는 방향과 성경에 부합되는지의 여부를 관찰해야한다. 이것이 관건이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무엇을 초월했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교훈을 초월한 것이고,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다(요이 9), 이것이 그들의 진면목이다.
4.3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불필요한 것이다.
"예수의 탄생은 동정녀 수태인가 아닌가? 예수의 인간과 다른 점은 완전한 신인합일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신인합일인가? 이 두 가지는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신학지2기, p.31)
이 말은 오요종계의 현대파의 말이다. "동정녀 출생의 예수는 하나의 만들어진 얘기고, 우화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의 성령수태로 인한 동정녀 출생을 부정하는 것이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육신의 부인이며 나아가 예수의 구속주의 자격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가 만약 동정녀 탄생한 것이 아니면 그는 필연적으로 부모가 난 것이다. 그러면 태중에서 죄를 갖고 나온 것이다. 그의 십자가에 달림은 자기의 죄를 담당한 것이며 대속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구속 은혜까지 뿌리 채 뽑아버린 독설이 아닌가?
만약 예수가 일반사람과 정도 차이만 있고 본질적 차이가 없다면, 성육신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마귀가 인간의 마음에 심어놓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며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으로 정죄되었다.(마26;63-66, 요5;18)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부활케 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게 하셨다.(롬1:4)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고 자기를 말씀하셨다. 필연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인간과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주이며 인간을 창조 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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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3)
4.4 돌이켜 자신을 새롭게 하면 중생한다,
신이 있는가 없는가는 작은 일이며. 사소한 일이다. 신학지 2기 p.31에 이런 말도 있었다.
"나는 이번 대륙과 북경의 중앙 통전부장 평걸삼과 화평반점에서 만날 때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사선생, 우리는 이미 많은 착오를 범했어요!' 그의 이 말은 매우 성실하고 담백한 것이었다. 누가 잘못이 없겠는가? 돌이켜 새롭게 함은 예수의 중생의 길이 아닌가. 신이 있다 없다함이 작은 일이며, 사소한 일이다.'
'중생'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다. 중생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다(요3;5-6). 게다가 謝는 잘못을 인정함이 그가 중생이라 말하고,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는 긴밀한 관계가 없고 작은 일이며 사소한 일이다.
사의 말로 통전부장은 중생하였다. 다만 그는 무신론자이다. 예수를 믿지도 않으며 게다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중생케 하시나? 그의 중생은 스스로 다시 태어남인가, 정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 사(謝)는 도대체 누구인가? 앞에서 나왔듯이 성경을 다시 고치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이 사부아 교수이다. 그는 중국특색의 중국교회 신학을 건설함에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다만 예수만 탐구하고, 사람들의 수요와 사랑을 예수의 숭고한 인격에 의해 나라사람을 변화시킨다, 새로운 인류를 건립하기 위해 회개에 의한 구원과 동정녀 수태와 부활 등 기본소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신학지14-15기, p.33)
이렇듯 믿지 않는 사교수가 신학지에 자기 이름이 오르내리므로 신앙의 선배 영웅인 것처럼 치켜세운다. "완벽한 신학이론이 있으며, 아시아의 신학의 숲을 족히 이룰 수 있다"(신학지24-25기, p.79)
사실 사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며 성경을 고치는 가짜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저주하며 죽이실 것이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신18;20)
우리는 신학자의 이야기를 맹목적이 아닌 사실을 변론하여 받아들이는데, 그들은 단지 한번의 숨을 내쉰 것이지만, 처음의 하나의 잘못이 백 사람의 잘못을 만든다.
4.5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이며, 사람이 명백히 알지 못하면, 누구라도 바르게 설교할 수 없다.
이것은 정광훈의 어느 부활절 날의 설교인데 제목은 주님이시다.
(신학지 2기상) "오늘날 전세계의 1/4이 부활을 믿고 있어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은, 사람들은 명백하게 모르지만, 다만 10억의 사람 생각에 부활의 대표진리는 대단히 심오하다. 이것은 신앙상식에 위반되며 2000년이나 불변하였다.
누구도 분명히 설교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한번에 없앤다는 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한 단락의 말을 반복하여서 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비상식적이다. "사람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또"누가 정확하게 밝히 설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당신은 물론 '1/4의 인구가 믿고, 십억인구가 심오히 의미를 갖고 2000년 역사가 있다해도' 모두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글 중에 정은 다시 부활정신에 대해 예를 들기를 장극가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살았지만 죽었고, 어떤 자는 죽었지만 살아있다" 곽말로가 문일다를 기념할 때 말하기를 "하늘 아래서 많은 금과 돌과 석고와 나무로 문일다를---우리는 지금 당신의 죽음을 기념할 수 없고, 당신의 다시 삶을 축하한다." 정은 또 고시(故試)를 인용하여 죽은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정이 말하는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정신의 부활이다.
글로 기록된 그리스도의 부활은 "누구라 분명히 말하랴" 이 누구의 글자는 예수와 사도가 모두 떠났으므로 역사 속에서 아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께서 친히 강하게 증거하신 것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베드로, 요한, 아곱은 유력하게 부활을 증거하였다. 특별히 고린도전서15장에서 사도바울도 강력하게 증거하였다.
2000년이 지났지만 그의 증거의 음성은 약화되지 않았다. 매번 성경을 읽을 때마다 믿음이 더 강해진다. 바울이 말하기를 주님이 부활 후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 두 사도에게 보이시고,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다. 여기까지 설교하시고 더 고조를 높여 말하기를 "친히 500명에게 보이시고, 그 중의 반 정도는 아직 여기 있다."
여기까지 읽고, 그들의 마음은 격동하여 끓어올랐다. 그때 있었던 사람은 제일 좋은 증거이다. 그리고 우리도 오늘 살아있는 증거이다. 바울이 당시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그때 바라본 사람들 중 살아있는 사람이 있고 그는 필연적으로 자기 눈으로 주의 부활을 본 사람이다. 얼마나 힘이 있는가!
누가 감히 믿지 않으리요! 어찌 분명히 설교하지 못하리요!? 그러나 그가 쓴 "주입니다"에서 바울의 강한 음성과 비교할 때 얼마나 창백하고 무력한가, 정말로 '반동'이며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기념하는 주의 부활의 이름을 빌어 주님의 부활을 실제로 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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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4)
4.6 현대파의 인성론: 인성은 본래 선하다(性善)
이것이 삼자 지도자의 인성론이다. "정주교의 이해에 따르면 원시인의 인성은 첫 사람의 타락에 따른 완전손상 상태에 있지 않았다.(전적 타락이 아니다)
죄의 문제에 대해 전통적 그리스도 선교는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중국의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정주교도 죄의 교리에 대해 엄숙하게 대처하지 못했다.--이점에 중국에서 강조되는 전통적인 성선설이 이 세기의 3-4십년대 자유주의 신학과 맑스주의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신학지 24-25기, pp.40-41)
이것은 정광훈의 친구인 미국의 신학자의 80회 생일잔치 때 말한 것의 일부인데 정의 인성론의 솔직한 진술이다.
다시 정의 말을 보면 "중국의 몇 천 년이래 성현과 학자의 가르침 중 몇 사람의 뛰어난 인물이 말한 인생의 죄악에 관한 것이 있다.
중국의 고대 전설 중에는 시조의 타락에 대한 이론이나 죄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없다. 맹자는 공자보다 아래임을 인정하면서 성선설을 가르쳤다. 송조 이후 20세기 20년대까지 중국의 지식인은 모두 이렇게 인생을 이해하였다. 중국의 어린 학생들은 바로 삼자경을 읽는다. 삼자경의 시작은 인생의 처음은 선하다는 것이다.(신학지4기, p.9)
정이 다시 말하길 "사람이 어느 정도 타락되었을 때 사람이 말하길 완전히 손상되었다하는데 맞는가 틀리는가?---중국의 과거 수 백년간 아이들이 입학해 첫 수업은 바로 인생의 처음은 선하다이다."(신학지13기, p.6)
성선설은 중국 전통철학중 하나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성론은 성선설을 거부한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3:22)
진택민 말에 의하면 "우리는 긍정적으로 세상과 사람은 좋은 것으로 보아야한다."(신학지 2기, p49) 진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 보시기에 창조한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더라"를 인용하여 "우리는 긍정적으로 세계와 사람을 좋은 것으로 보아야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가 세상에 대한 기본태도"라 한다. 이 말을 사람들은 해석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진의 성경에는 창세기 3장이 없는가? 오늘의 세계와 사람은 창세기 1장에 관계하지 않고 3장에 관계한다.
죄의 문제는 교리 상 민감한 부분이다. 죄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면 발붙일 곳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죄가 있다는 것을 억지로 승인한다. 전적 타락의 이 말에서 정광훈과 전택민이 강조하는 것은 죄에 대해 뭔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정광훈은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도는 인류의 타락과 선의 결핍에 대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만이 죄에서의 구원이다라고 설교한다. 그러나 신중국의 출현으로 많은 새로운 현상과 현실에 있어 전통신앙에 대한 반감과 의심을 갖는 일부 성도들이 생겨났다."(신학지14-15기 , p.2)
사실은 성도가 그런 것이 아니다. 여전히 정광훈 스스로 하는 의심이다. 여기서의 전통신앙은 인간의 죄성을 지적한다. 그래서 의심을 갖는 전통 성도라 함은 바로 정광훈이 사람의 죄성에 의혹을 제출하는 것이다.
전적 타락의 개념은 사람이 악한 일을 한다거나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파괴적이다가 아니라 죄가 이미 사람의 각 방면을 타락시킨 것을 의미한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8)
동시에 죄는 전 인류에 미치는 것이다. 이 교리는 아주 정확히 자기와 주위
상황에 맞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죄에 대해 전도함을 반대한다. 그것은 바로 구속에 대해 터무니없고 아무 내용이 없다.
우리는 복음의 기초를 죄악 가운데 둠을 반대한다. 복음은 교회가 앞길이 있기에 필요하다. 인류가 전망이 없고 세계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중에 구속의 수단이 계획되었고, 사람이 완전 타락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찾는다.
인류는 하나님 창조의 면류관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관리하게 하셨다. 그래서 구속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신학지14-15기, p.18) 이것은 지독한 독초요 성경을 벗어난 극악인 것이다.
죄를 말하지 마라. 그러면 복음은 어디에 기초하는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사람의 결국은 사망인데 무슨 전망이 있는가?
사람이 이와 같은데 세상은 무슨 희망이 있는가? 만약 사람과 세상이 앞날에 희망이 있다면 구속이 왜 필요한가?
누가 구하는가? 하나님의 창조 중 구속의 수단은 왜 필요한가?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서 구원할 가치가 있어 구했다면, 이 말은 사람은 어느 면에서 확실한 가치가 있고 게다가 이 가치는 하나님의 생명의 가치와 같고, 하나님의 생명과 바꿀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구원의 은혜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복음의 교리를 위반한 것을 드러냄이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구속은 그의 은혜인 사랑일 뿐이다. 그의 이름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의에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시25:11,23;3) 그렇다해도 사람은 무엇을 선택할 수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속에서 사람을 동반함은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히2;6)
4.7 반드시 버려야할 "그의 이름 외에는" 교도주의
"만약 기독교가 오늘날 중국의 처지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자면 필수적으로 전통을 버려야하는데 "전통적인 그의 이름 외에는"의 교도주의, 다원화의 세계 속에서 모든 배타주의, 모두 고립을 피할 수 없으며 자기를 내몰며 모퉁이에 처하게 한다.(신학지17기, p.13)
"그이름 외에는"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절대적인 진리인데 삼자회의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 이 말을 버려야한다고 한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는가? 전도 때 귀를 기우려야할 그 이름 외에는 구원을 얻을 이름이 없다. 이 정도로 정확히 인도한다. 그 외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 없다.
전도인이 자기는 그것을 불신하며, 하필 기독교를 신앙하는가?
그렇다면 자기를 기만하며 남도 기만하는 것이 아닌가?
진짜와 가짜 신앙은 반드시 분명한데 어찌 배타주의라 하는가?
원칙이 없고 적당히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이 말들이 사실 적합했어도 무는 소용이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또 무슨 실제 의의가 있는가?
적당히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의 이름 외에는 이것을 버리라는 의미는 그리스도 외에 진리와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보편구원론과 모든 종교를 하나로 바로 종교 대 연합의 전주인 것이다.
신학지6-7기 p.12에서 그가 말하길 "우리는 실지로 상상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의 말씀을 베들레헴과 팔레스타인 소수의 사람에게 국한되었다는 것----- 그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고 매 시대 각 사람에게 줄 수 있는데----각 지방의 문화와 선지자 성자들을 통해 자기를 계시하시고---만약 기타 종교를 철저히 잘못이다 말하며 기독교의 선에 위배된다면 필자는 기독교를 생명의 고등교육으로 보고 사상을 중등교육으로 보겠다.
"필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반드시 유교도가 되어 중등교육을 받고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은 기독교 신자가 되는가?
이 도리는 성경에서 말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 계시를 하시고 성현에 말하심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그들을 정확히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거짓 종교를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맞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 세상에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고 반대하는 입장에 서고, 떠나고, 이교를 의지하고, 그것을 대오로 믿고 그들과 형제를 맺으며 생명을 갈망한다면.
이것은 타락이고 배교이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욕이요 도에 빛나간 행위이다. 삼자회의 가는 방향은 이교도와 연합이다.
우리는 절대 따를 수 없고 그들은 죄악 속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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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5)
4.8 세계 각 종교의 연합
이 제목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그들이 발표한 잘못된 이론을 보라(신학지21기. pp. 24-26)
"기독교도들이 말하길 기독교는 유일한 진리이고 권위의 종교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와 추종하는 자들은 모두 가짜이다.
만약 개종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
이렇게 자기 중심의 진리는 드러내지 않은 신념이다. 즉 하나님은 유한하여서 하나의 방식으로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만약 기독교의 권위로 다른 더 나은 우리의 문화와 영향력 있는 기타 종교를 부인하며 결합을 거세게 거절한다면 너무 어리석지 않는가!--- 그들의 마음은 너무 좁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보시지 않겠는가---성경에서는 하나님은 동등한 기초아래 인류를 창조하셨다.
사람의 머리로는 하나님의 비밀을 도대체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인류는 자기의 구체적인 존재로서 부동한 각도에서 이 긍극적인 진리를 탐구한다.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지 않는 전제아래 우리는 지금 우리의 신학을 갱신할 때이다"
믿음과 불신을 돌파하고, '그 이름 외에'를 버린 신파신학의 결국은 종교의 대 연합이다. 이것은 신파신학의 방향이다. 이것이 삼자신학의 치명적인 잘못이다. 이것은 공개적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말과 글로 벌하며, 위장을 폭로하며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위의 글에서 삼자회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그들은 완전한 거짓선지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성경의 절대권위를 허물고, 가짜종교와 동등시하고, 신앙을 혼합하고, 교회가 큰 음녀의 길로 빠지게 하였다. 사실 삼자회는 중국기독교의 대 이단이다.
광명과 흑암이 어디가 같은가. 그리스도와 열거한 자들이 어디가 같으며, 성전과 우상이 어디가 같은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들 가운데로 나아감이다. 성별하여 주께로 돌아 오라. 하나님 한 분이신 기독교는 세상에 짝이 없고 유일한 구원인 것이다.(사44:24,45:5,43:10,11,13)
자칭 하나님을 믿는 삼자의 지도자들아,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거짓 종교의 신은 가짜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눈이 있어도 못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고 입에는 숨이 없는 것이 신인가? 바울이 아덴의 우상을 보고 그들과 연합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을 고치고(사람의 생활, 동작, 존재.) 창조주 하나님께로 귀속하라고 권고할 것인가?
이것이 바울의 자기중심적인 좁은 마음의 절대화란 말인가?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마음이다.(하나님을 이해하는 각도가 다르고, 이교도의 가는 길이 서로 다르고, 이르는 길은 같고, 추구하는 것이 달라도 하나에 이르고) 각도가 다른데 어찌 바울을 감동시켜 아덴 사람을 권유하겠는가?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그의 흘린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 다시 말해 예수는 문이요. 저 문을 통하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는 영원에 이르는 유일의 길이다. 주님이 제자를 떠나시기 전의 물으심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까?" 베드로는 주 외에 영생의 길이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확실하게 한가지 방법으로 구원하신다. 이것으로 하나님이 유한하다 하겠는가.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지만 성경이 알려 주는 방법은 한가지 방법만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선택이다. 무엇이 불복할 것이 있는가? 무식한자 중 가장 큰 무식한자는 하나님을 논하는 것이다.
삼자회의 지도자 세상에 지혜자들, 그러나 자칭 예수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담하게 내가 믿는 것이 바로 절대적인 진리이다라고 승인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승인한다 "자기 중심으로 마음이 좁고 우둔하다." 이를 하나님을 세상의 지혜로 우둔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같은 관념을 가진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한다.
금능신학원의 진택민부원장은 스위스신파 신학자인 공한사(孔漢斯)를 특별 숭배 추천한다. 孔은 보편주의(普世主義) 대연합론자이다. 공은 말하길 "보편주의는 기독교 내부에만 국한하지 말고, 필수적으로 모든 종교 내에 포함한다. 오늘날 진리와 오류의 경계를 간단히 기독교와 다른 종교사이에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모든 각 종교에는 모두 크고 작은 진리와 오류가 있다.---그 누구도 그 진리를 점유하지 못했다.(신학지6-7기, p.103) 孔한사는 공정하게 모든 종교 안에 진리와 오류가 있다라고 했다.
때문에 그는 대연합을 요구하며 서로 엑기스를 취하여 생존하자 한다. 공은 이미 "세계적종교"를 건립하기 시작하고, 그를 위해 표준을 제시했다. "즉
1) 진리에 맞아야 하며, 독점하거나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
2) 인생의 윤리 척도에 맞아야 하며, 인본주의를 내리면 안 된다.
3) 각 종교는 바르게 전하고(正傳) 본래의 진리를 버려서는 안 된다."(신학지13기, p.29)
진택민이 다시 말하길 孔한사의 공덕을 노래하고 칭찬하기를 당대의 대 신학자다.--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화합하고 보편신학의 선봉 용사요 사도다.(21항) 이 시대의 선지자다(22항) 孔한사가 90년대와 21세기에 새로운 공헌을 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30항)
진은 孔한사를 왜 이렇게 숭배하는가? 그것은 삼자회의 지도자 역시 세계 대 연합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정광훈은 그의 우주적 그리스도에서 신학론 중에서 말하길 "그리스도의 구원행위에서 인류에 진보, 해방, 민주, 박애의 운동을 하나에 연결 시켰다.---하나님의 구원하심은 교회의 영역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우주적이다.
제2차 바티칸 회의에서처럼 "모형있는 교회 외에 많은 진리와 성화 요소가 확실히 있고, 누구를 막론하고 양심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구속에 주의 도움을 받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요소들이 모두 크고 작은 독립된 선들이라면 기독교는 하나의 완전하고 아름다운 원이다."(신학지14-15기, p.4)
정은 언어 예술에 능하다. 특별히 민감한 문제에 대하여 직접 말하지 않고 빙빙 돌려서 말한다. "세계 종교 대연합"은 제일 중요한 카드이다. 이 카드가 삼자의 진면모이다. 바로 양의 탈을 쓴 잔혹한 이리의 모습이 아닌가!
정은 갑자기 제2차 바티칸 회의를 들먹이며 함축성 있게 말했지만, 본인의 말의 뜻은 분명한 것이다. 정의 유형교회 외에 '진리와 성화의 요소'는 바로 세계 각 종교를 말함이며, 인류의 추구하는 진리의 각 사상 의식이나 정치 주장이나 운동모두 정광훈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에서 이 모두가 크고 작은 각개의 독립된 선이며 최종적으로 한 개의 원으로 되는 것이다. 즉 대 연합이다.
나의 이렇게 이해함은 주관적 추측이 아니다. 정을 좋은 동역자라 인정하는 진택민 부원장이 인용한 천주교신학자 파니카(尼)는 말하길 "그리스도--진리의 풍부성은 역사적 예수를 훨씬 능가한다. 때문에 진리는 변하지 않고 다만 진실한 방식으로 다른 종교 중에서 표현할 수 있고, 나사렛 예수 외에 다른 역사형식으로도 출현할 수 있다."
진이 스스로 말하길 "이제 다시 정광훈의 우주적 그리스도를 보게되면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설교에서 우주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진리는 동의어 이다.(신학지17기, p.3) 정광훈의 우주적 그리스도와 파니카의 그리스도--진리는 동의어이며 뜻도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광훈의 우주적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각 종교 중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각 사람의 몸에 자리를 잡았다. 이는 확실한 정광훈의 관점이다. 그는 해방신학을 찬양하는데 이렇게 말한다. "전도는 그리스도가 인간에 오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그리스도가 나오게 해야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기에 그들에게서 그것을 발견해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신학지3기, p.17)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글 중에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글을 볼 수 있다. "한 불교도 몸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 이것은 완전히 마귀의 진리이다! 공공연히 이것을 중국 기독교 최고의 시사지 금능신학지에 실었다. 이것에서 그들의 흑심을 알 수 있다. 삼자회를 어디로 인도하려는가?
기독교 영수와 주교인 정광훈 자신의 어깨에 중국 기독교 나아갈 길의 중임이 메어져 있다. 그의 신학관은 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큰 방향을 좌우한다. 하지만 정은 한사람의 대 연합자요 보편주의자 이다. 때문에 신학 유학생 중 하나는 우주적 그리스도를 읽고 "나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신학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주적 그리스도 신학관은 우리의 시야를 교회 외에 각 방면을 발전시킬 수 있고 만유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자기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제한하였다.--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불신사이에 경계를 두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반함이며 하나님은 세인을 자녀로 보고계시다.(신학지19기, p.67)
정광훈의 신학의 관념은 중국 전통철학의 영향을 받은 동시에 서방 자유주의의 각종 신파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늘에 와서 정은 성도와 신학생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것이 대단한 것이다.
삼자회는 비주류 신파신학다. 그들은 신학의 철학화을 통해 하나의 학파를 만들고 한 모퉁이에서 큰 인물들을 배출 시켰다. 종교 지도자들은 아름다운 글을 써 세상에 펴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평신도들은 앞사람의 먼지만 바라보는 꼴로 소화시키지 못하는데 어찌 진리를 분별할 수 있으리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딤전6:20)고 경계하였다.
이 말은 또한 경건한 오늘의 평신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마음에 아로새겨라. 소털 같은 신학의 숲에서 길을 잃지 말고, 주님을 영접한 자들은 깨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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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6)
5. 삼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삼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이는 정광훈이 한 말이다.
5.1 삼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신학지 10기 2항)
정광훈이 말하기를 삼자회 조직은 줄곧 정치성이 비교적 강한 조직이라 인정되고 있다.--- 한 차례 한 차례 정치 운동에 따라 모든 국가는 점점 고도로 집중된 일원화 지도자를 찾는데 교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적지 않은 지방에서 교회의 일에 실제 지도권은 삼자조직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되어 적지 않은 지방 삼자는 애국의 기치를 높이 들어 자치 자양 자전의 군중운동과 군중조직이 교회 옆에 혹은 교회 위에 있게 되었다. 교회 같으면서 교회가 아니고 정부 같으면서 정부가 아니다. 삼자교회는 이러한 한 개의 교회 지도자 관리 부분이다.(신학지 18기 30항)
정광훈은 또 50년대 후기 당시 역사적 원인으로 삼자는 교회를 관리하는 기구로 되었다. 교회 위의 지도자로 되었다. --바울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교회관은 중시 받지 못하였다.----삼자 조직 통치교회,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삼자의 머리를 더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이것은 성경의 교회에 대한 교훈이고 이단은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는 집단은 당연히 교회가 아니고 더구나 하나님의 교회는 아니다. 몸의 머리가 장삼이면 그 몸은 장삼의 것이다. 몸의 머리가 이사이면 몸은 이사의 것이다. 몸이 머리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의 정치적 강한 삼자조직 즉 삼자회의 머리 그러면 삼자회는 교회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교회인가 아닌가? 당연히 삼자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즉 교회가 아니고. 잘 분별하여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5,2 삼자회는 여러 머리의 교회
"삼자의 책임자는 목사가 아니고, 신학훈련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일을 관리하고, 목사를 관리하고 성도를 관리한다. 모인 사람과 재물을 관리하는 권한을 같고 있다. 어느 신자는 농으로 목사 아닌자가 목사를 관리한다 한다.(신학지 24-25기 51항)
"종교 사업 부문에서 정도가 지나치게 월권행사를 하는 상황이며 예로 어느 지방에서는 慕道友領洗(진리를 사모하는 자에게 세례를 줌) 모두 그들의 피준을 받아야한다. 이럼에도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교회를 관리한다고 한다.(신학지 24-25 52항) "어느 지방 정부부문에서는 교회를 아주 엄격하게 관리한다. --교회가 구속을 받기 때문에 원래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잃었다.(신학지 24-25, 106항)
어떤 지방의 교회활동에 대하여 일명 '삼정' 관리방법을 택한다 즉 `부분` `사람` `장소`의 세가지를 정한다. 한부분의 성도와 성직자들은 다만 규정된 어느 장소에서만 종교의 활동을 해야한다. 위반자는 법으로 처벌한다.(신학지 10기 10항)
어느 지방은 교우증과 성도증을 발급한다.(신학지 18기 30항) 어느 지방의 종교사무와 간부들은 종교단체의 돈을 점유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일은 한 번 두 번의 일이 아니다.(신학지 10기 15항)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자회는 각 삼자회와 기협회(`양회`라 함)에서 종교활동의 관리를 받는다. 전국의 성, 지방, 시 , 현의 양회와 종교부분에서 층층히 내려오면서 우산을 돌려 물을 뿌리 듯 각층의 단위를 만든다. 때문에 삼자회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머리는 아니지만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회' 그래 머리가 많은 교회다. 모든 머리는 교회를 관리한다. 교회는 그들의 지도를 받는다.
우리는 모두 안다. 하나의 몸에는 하나의 머리가, 삼자는 머리가 여러 개다. 괴물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5.3 삼자회의 스스로 빛을 낸다.
한 몸에 여러 머리는 비정상이다. 행동상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앙 원칙에 지불한 대가는 생존공간을 쟁취하였다. 교회를 잘 치리하지 못하여 문제는 점점 많아지며 목사를 고발하는 편지가 어떤 때는 매일 백 통이 넘는다. 집안의 험은 밖으로 안 전하려해도 그럴 수 없었다. 아예 내부를 정돈해 드러내어 삼자의 현상을 새롭게 수립해야했다. 그래서 구중들에게 인상을 바꿔주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얼음이 3척이요, 이한기를 하루아침에 능히 바꿀 수 있는가). 아래는 그들이 폭로한 문제인데 사람을 놀라게 한다.(신학지 26기 46항)
"왜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삼자를 가까우면서도 멀리하는가? 그리고 많은 일부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반대한다. 사광의 선생은 자르는 아픔 중에 부정을 내어놓는다(갈라서 부정을 꺼냄).
'어떤 지방의 삼자 애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상태와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어느 성도들과 책임자의 의견을 따르며 삼자애국회를 벗어났다. --어떤 지방의 양회 지도자는 삼자의 깃발을 들과 삼자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들을 하는데 외국사람들에게 비굴하고 심지어 외국 종교세력의 대리인이 된다.
재무 장부는 오랫동안 공포하지 않고 교회는 개인의 세상으로 되었다. 한 사람이 말하면 모든 것이 결정된다. 성도들은 목양을 얻지 못하고 상한 심령을 끌어안고 일어나지 못하고 갈 수밖에 없다. 돈만 보고 덕을 보지 않으며 인재들을 중시하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갖고 위에서의 분부만 듣고 성도의 목소리는 듣지 않으며, 어떤 이는 개방의 기회를 이용해 삼자의 도를 역행하고 꾀를 써 자신의 입지 만을 세우며 어렵게 이어온 삼자의 단결을 부숴 버린다.---근심스럽다 몇 글자로 형용할 수 있는가?(신학지 10기 6항)
중국교회(삼자회) 내에서 생긴 많은 문제는 우리가 확대경으로만 찾도록 작은 것이 아니라, 많게는 교회의 성질과 같지 않은 현상이 교회의 간증에 영향을 받게했다. 오늘날 교회의 권력화는 교회의 책임자는 높은 곳에 있고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사욕을 채우므로 성도들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남긴다. 일부 교회의 책임자들의 크고 작은 아래 기관에 일들을 상부에(정부) 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우를 받겠지만 성도 앞에서는 위신을 잃었다. 그들은 심지어 권력을 이용하여 교회 내에 명령을 내리고 교회가 교회답지 않게 한다.
사욕이 많은 사람은 사리를 위하여 연관된 동역자들을 고발해 정부 간부들의 머리를 흔들게 한다. 당을 지어 암투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는 성도들의 마음은 싸늘하다. 한탄하며 실망하며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의 한 면에서 봉건 가장제의 모습을 보게된다. 오직 홀로 독존. 한 지방의 지역 황제. 교회는 개인을 위해 경영하는 사업으로 되었다. 성직상 선후배의 서열을 정하고 능력있는 자들을 시기 질투하고 반대자들을 배척하여 무형의 교회를 건설하는데 저해 요인이 되었다.(신학지 26기 44항)
어느 지방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떠돈다. 목사의 직업화, 설교사업 상업화, 성도 숭배양식화, 교회의 점차적 세속화(신학지 24기-25기 52항) 전도자는 그리스도의 대언자이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주인이 아니다. 현실상 교회 패권을 형성하고 교회가 개인의 권력사업장, 세력의 범위로 되었다.
이일에 어떤 사람은 걱정되는 일은 교회의 세속화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교회라 하는 것이다.(신학지 24-25기 53항)
현재 어떤 삼자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임무가 아니고, 구원의 생명의 길을 설교하지 않고 마음의 경건은 없고 외모의 경건만 있다. 성도의 경건을 이용하거나 혹은 종교적 압력을 힘입어 성도를 어쩔 수 없게 그 길로 몰아넣어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신학지 20기 68항)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관직을 얻기 위해서 수단을 가지지 않으며 일단 자기의 바램이 이루어지면 교회에서 제 멋대로 행동한다. 마음에 들지 않은 성도는 성경으로 압제하고 심지어 욕하며 동역자에게 중상모략 한다. 교회와 정부의 정상적인 관계에서의 왕래가 해하고 비방하며 농하는 것들이다.
어느 주임 목사가 심지어 형제를 고발하는가 하면, 애굽의 요셉의 연극에서 산아제한을 위반하고 야곱이 12아들을 낳았다. 이렇게 선전함이 자식을 많이 낳아 많은 복을 받음이 국가 정책을 위반한 것이란 말인가?
구에서 공안에까지 고발하고,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한다.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가? 그들은 많은 설교자들은 고발의 수단으로 내어 쫒는다. 성도들은 이에 대해 의견이 많다 하지만 힘이 모자라 눈물을 흘리며 이 교회를 떠나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들의 문서에서 뻬낀 일부이다. 삼자회의 진실된 모습을 능히 볼 수 있다. 사실상 사람들은 보고 들어서 이 일들을 능히 알 수가 있다. 삼자교회는 몇 개의 제도를 세우고, 내부를 정리하고, 자기를 개량하고, 국외 성원을 얻고, 일을 잘 처리해도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다. 사실이 증명하듯 80년대 이후 "교회 일을 잘하고, 도에 관계를 바르게 한다." 다만 지금까지 21세기로 넘어설 시점에서 삼자회는 여전히 예전과 같고 , 병이 들어 고치게 어렵게 되어, 성도들이 떠나는 현상이 점점 많아진다.
병을 고치자면 병에 따라 약을 먹어야 한다, 병에 대하여 병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먼저 찾아야 한다. 삼자회의 병의 근원은 그의 자유주의신학에서 생겼다. 자유주의신학은 일종의 철학신학이다. 생명의 도를 설교하지 않고, 외면이 개선되기를 企圖한다. 사실 주 예수의 새 생명의 도는 내면의 새로운 사람의 생명의 도다. 때문에 삼자회는 사람들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가정교회는 우후죽순으로 꽃을 피웠다. 이것이 사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다.
5.4 삼자회는 이제 삼자가 아니다.
삼자회는 삼자의 기치에 세워졌다. 지금은 3자의 실제 내용이 없어졌다.
삼자는 자치 자양 자전을 말한다.
자치는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치리함. 그렇지만 삼자의 머리는 삼자조직이다. 이 조직은 목사와 사람과 돈과 물질을 모두 관리한다. 성도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를 관리한다는 것은 헛된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양은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살린다는 말이다. 특히 외국의 돈에 의지하지 않는데 이것은 교회의 자주의 관건이다. 50년대초, `삼자` 이 기치가 세워진 후, 외국에서 오는 경제 도움을 끊었다. 이것은 교회를 중국화 하는데 제일 중요한 보장이다. 지금은 외국의 경제지원이 삼자에 몰래 침입했고, 해방전의 그런 다른 회가 없고, 다른 명목이 나타났다. 개방후 각양각색의 돈이 들어옴으로 삼자 지도자들은 이것이 가장 큰 유혹이었음을 시인한다.
"해외의 일종의 개인조직과 기금회에서 교회와 신학원에 큰돈을 헌납하여 현대화의 공헌에 투자하였다. 이런유의 공헌은 유혹이 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거절 못하게 한다. 때문에 삼자원칙이 위기에 봉착한다."(신학지 21기 21항)
그들은 거절하려고 해도 아쉽고, 받자니 자양의 기치가 걸려 공개적으로 못하고 변칙의 방법이 통용된다. 그래서 "개혁개방의 형식아래서 우리교회가 자양원칙을 견지하며 동시에 해외교회와도 조건없는 유익을 나눈다."(신학지 24-25기 22항)
이것은 관리의 방법의 말이다. 자양원칙을 견지해야하고 국외의 돈도 갖을 수 있다. `가지다`를 `나누다`로 말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돈을 갖은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소량이니 조건이 없는 등으로 말하면 하늘이 웃지 않겠는가?
사실 주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자양하지 않는 것에 문을 연 것이다. 위에서 녹색의 불을켜 나눌 수 있다면 아래서 당연히 제재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외국 사람이 조건을 붙일 필요가 없다. 스스로 주권을 팔아먹은 것이다.;
거지의 말하는 모습이고 그것을 암시하는 모습이 있다. 그들 자신의 폭로를 보면 "어떤 교회지도자들은 거지처럼 외자를 얻기 위해 교회의 주권을 팔아먹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정말 거지같다.(신학지 24-25 31항) "현재 우리나라는 예전보다 더 개방적이다. 해외에서 오는 사람도 점점 많아진다. 별난 사람 다 있고, 돈도 더 많아지기에 암시적 요소가 더욱 많다.(신학지 18기 28항)
즉 문장의 폭로가 없어도 신학지의 매년의 큰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국제간의 서로의 방문은 성도들로는 되어질 수 없다. 그들이 손님을 접대하는 구격은 모두 큰 차원이다. 모두 고급의 차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양으로선 유지 할 수가 없다. 때문에 삼자회는 자양도 없는 것이다.
자전은
삼자 중 제일 주목하는 자 이다. 그들의 자전은 누가 와서 전하는가 만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전하는가 이다. 의미는 중국에 전도가 되면서부터 무엇을 전하는가? 의 문제는 줄곧 해결이 되지 못하고 지금 그들이 정권을 잡아서 근본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결국 무엇을 전하는가? 그들은 과거를 모두 부정하고 그들의 자유주의신학을 전한다. 이것은 그들이 50년대 성립될 때 결정한 취지이다.
정광훈은 우주적 그리스도를 쓰고 신학지 14-15 1-6항에서 실렸다. 이 글은 중국 기독교 생긴이래 유일한 기독교 신학이라고 추천을 받았다. 그들은 예전의 전도자가 전한 성도들의 믿음은 모두 틀렸기에 모두 바꿔야한다. 정광훈의 이 신학관으로 성경중의 기본도리를 새로히 받아들여야 한다. 앞에서 쓴 삼자회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체계는 그들의 부분적 신학 관점이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실은 삼자회 자유주의 신학의 총강이다. 정은 이 문장의 마지막에서 우주의 그리스도는 응당 "그것은 더는 전통적인 기독론을 만족시키지 못하기에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을 희망한다"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자전은 다른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이런 자전은 우리는 필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요구하는 삼자는 성도자신이 교회를 관리하고 자기의 것으로 교회를 배양하고.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성경에 의하여 하나님의 도를 바르게 설교하는 것이다. 오늘 삼자회는 삼자 이미 변질한 삼자이다. 이름만이 있고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삼자회는 더는 삼자가 아니다.
5.5 깊이 고려할 필요가 없다.
삼자는 80년대에 교회를 잘해가고 도리에 따르는 구호가 있다. 삼자는 잘해나가지 못하고 게다가 관계가 나빠지는 곤란한 함정에 빠졌다. 90년대 상황도 바뀌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래는 음미해볼 말이다. "삼자는 비계의 비교와 같다. 중국의 이 건물이 진, 선, 미의 자태로 동방의 지평선 위에 세워졌을 때 자연적으로 비계는 보이지 않았다. 삼자는 교회의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서이다."(신학지 18기 29항) 삼자회는 스스로 승인한 것이다. 삼자 조직은 그의 비계이다. 현재 그는 생각하기를 허리가 굳어짐이다. 이미 동방의 지평선 위에 세워졌다. 때문에 그들은 비계를 운반하려한다.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논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심사숙고해야 할 것은 무엇 때문에 교회 건립을 하는데 비계가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교회의 건립의 원칙이라면 성경의 도리라면 초기교회의 비계는 무엇인가? 역대 각국 각지의 하나님의 교회의 비계는 또 각각 무엇인가? 이것이 문제점이다.
지난 세기 십자가가 외국을 통해서 중국으로 전해졌기에 사람들에게 서양의 도의 형상을 주었다 하면 삼자회가 생겨 심지어 잉태하여 낳아, 권력의 결과 아래 놓이게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교회를 관리하는 형상을 준다.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를 과연 다른 사람은 우리가 교회를 관리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삼자는 전쟁하는 정치운동과 격렬한 투쟁 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아래에 투쟁적 고소를 서술한다.
당시 공소의 대상은 제국주의 어떤 전도 관련자이다. 다만 모든 전도자는 아니다. 더욱이 중국의 전도자는 아니다. 실제 조작 중 이런 신앙의 경건은 영에 속한 것이고, 일시 삼자의 고려도, 한도에 같이 일한 것, 모두 반애국이므로 타격하자.(신학지 24-25 51항), 여기서의 타격은 피로 쓴 글자이다. 이것은 아벨 이후 흘린 아벨의 피이다.
의인의 피 역사는 최후에 공정한 판단이 있을 것이다. 지금 계속 심사숙고 해보라. 교회는 사랑의 단체인데 어떻게 정치운동을 할 수 있는가? 심지어 공안을 동원할 수 있을까?
삼자회는 교회인가? 하나님의 교회인가?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그의 교회를 건립하였는가?
만약 50년대 초 처럼 先知식의 충성된 종과 여인들을 제거가 삼자회의 본질을 능히 알게 나타낼 수 있다면, 그러면 반세기 이후 지금 이런 사람의 말처럼 흰 종이에 검은 글자를 쓰듯 범사에 하나님 것을 찾음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삼자회가 교회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교회인가의 문제는 쟁론할 필요가 없다.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교회라 하는가 하고 솔직담백하게 말한다.
그들은 투쟁의 수단으로 생존의 공간을 열었다. 그러나 형상은 깨졌다. 스스로 잘못된 관계로 빠지고 말았는데 이는 자업자득이다. 개방후 그들을 계속 정치적 수단으로서 국제 기독교를 겨냥했다. 철판 하나가 아니다. 모두를 격파했다. 먼저 기독교 세계연합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국외 복음파와 교통한다. 삽시간에 세계와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승리는 교회 자신의 건설을 돕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몸은 성장해야 한다. 성장은 신체 내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는 생명의 유기체이다. 이것 또한 삼자가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과 불신을 돌파하면서 생명을 논할 수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책임하지 않으며 생명을 구하는 도를 논하지 않는다. 단 외국사람에게만 잘 보여 교회를 건전하게 건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 문제는 엄숙한 문제이다. 주님을 말하시기를 "------" 여기서 강조하시기를 제일과 기타의 순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절대로 바꿔서는 안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앞자리에 놓아야한다. 하나님을 사람함이 인간을 사랑함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자회는 생명의 도를 중시하지 않고 입에만 달고 다닌다. 그들의 신학 사상은 실제와 결단하는 것인데 입에 다고 다니는 것은 그들 자신이다.
가정집회 핍박에 의해 나온 것이다. 생각해 보라 50년대 가정 집회는 반혁명 단체로 처단되었다. 누가 감히 가정집회를 가지겠는가? 하지만 삼자회는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나도 이렇게 삼자회 조직을 떠난 것이다. 다른 교회를 세워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반대하고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아니다.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은 진리를 논하고 진리를 행한다. 역대의 탐관 부패자 척결에서 그들의 자신이나 자녀는 없다. 그중의 적지 않은 사람은 공직에서 우수한 인력이다. 나 역시그렇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좋은 성도는 좋은 시민이다.
이밖에 또 하나의 문제를 생각해 봐야한다. 삼자회 속에는 확실히 중생 구원된 신도가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럼 우리는 같이 참가하지 않고 같이 삼자회를 건설하지 않는가? 따로 나올 필요가 있는가? 이 문제는 교회 발전의 방향에 관계된다.
우선 우리는 교회의 머리와 교회발전의 추세를 식별해야한다. 이는 교회의 권력과 긍극목적에 관계되는 것이다. 한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전에 이일을 할것인가? 결과는 어떨까 까지 생각해 봐야한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
삼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권위를 행사하지 못한다. 삼자회는 그의 여러 머리의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말한 노출(폭로)현상의 유래이다.
삼자회의 발전의 방향이 삼자회 스스로의 신학에 의해 정해졌다. 삼자회 신파신학은 보편주의 종교 대연합 신학 관념이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세계 각 종교 대 연합으로 결합할 것이다.
계시록 17장 음녀의 앉은 물은--만약 다리의 바른 몸이면, 오늘날 삼자회는 대연합의 여론이다. 이 다리는 진입교이다. 이것은 십분 엄숙한 원칙성의 문제이다. 만약 이 문제를 간단화하면 퇴자를 맞을 것이다. 나는 이런 류의 사람을 알고 있다. 일만하고 진리는 관계하지 않는다 하며 삼자회 속에서 일한다. 결과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 떠돌다 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의 목장은 매우 크다. 삼자회는 대목장의 몇 개의 점에 불과하다. 북경의 1천만 인구에 삼자교회당은 7개 뿐이다. 북경이 큰가 7개가 큰가? 교회당 밖의 목장과 비길바가 못된다. 당연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교회내의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건립은 그리스도를 머리로하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것이 동녀, 순결한 신부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음녀앉은 물과 같은 죄를 거절한다. 봉사는 길이 있는 것이다. 진리의 길이 없는 봉사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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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7)
6. 삼자회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삼자회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삼자회가 많은 거짓 이미지(假想)를 갖고있기에 삼자회의 본질을 투시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6.1 삼자회의 외모는 교회 같지만 실질은 크게 부패한 모임이다.
외모로 보면 삼자회는 모든 면에 장식이 구비되어 있다. 넓은 교회당이 있고 긴 까운을 입고 강단에 선 목사, 백의 천사같은 성가대, 같은 성경을 갖고 줄지어 앉은 신도들, 많은 이름을 가진 종교 지도자, 그 외에 합법적인 보호의 우산이 있다.
그러나 삼자회의 내부는 어떠한가?
현대파가 있는가 하면 복음주의자도 있다. 현대파와 복음파는 물과 불의 서로 상용되지 않고 조화되지 않는 두 개의 대립되는 관점이다. 신앙과 불신앙간의 구별이 서로 뒤엉켜지고 연합의 가짜 이미지를 부여하고 합일의 초대장을 들고 해외에 가서 선전선동을 한다.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인 외국인은 그 안의 실징적인 것을 보지 못한다. 삼자회 밖의 신도나 심지어 삼자회 내부의 신도들도 분별하지 못하고 삼자회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교회의 현상태에 대해 이러 저러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삼자회는 중국의 유일한 정통교회이고 가정교회는 모두 오합지졸이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삼자회나 가정교회나 모두 하나님이 교회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는 사람은 극력 양자의 합의를 촉구하려 한다. 그들의 좋은 마음은 도리어 거꾸로의 범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삼자회는 가짜교회이고 가정교회만이 하나님이 중국에서 일으킨 진짜 교회다. 그것은 가정교회의 머리가 예수이고 진정으로 삼자를 실행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신도 자신들이 교회를 관리하고 자신들이 교회를 먹여 살리고 평신도들을 일으켜 세워 양떼를 목양하게 했다. 가정교회가 아직 유년 단계에 처해 있어 자발적이고 조직이 없고, 지도자가 없으며 광활한 지역에 분산되어 집중하여 통일적인 관리를 할 수 없다.
사역자들은 조직신학의 장비가 없어 제각기 강의하기에 이단사설이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뿌리가 똑 바르고 싹이 꼿꼿하기에 필연코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점차 성장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면 객관적 사실에 부합된다.
6.2 삼자회는 전후가 다르다.
삼자회는 교회의 외형을 갖고 있어 사람들이 식별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더욱 깊은 미혹성이 있다. 바로 삼자회의 앞뒤가 다르고, 상하가 통일되지 않고,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삼자회가 생존하기 위한 필요 때문에 책략상 변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변하든 삼자회의 본질은 떠나지 않는 삼자회는 여전히 삼자회이다. 본질적으로 삼자회는 한 번도 변화된 적이 없다. 삼자회의 지도자가 변하지 않았고, 삼자회의 신학이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앞으로 발전되고 더욱 구체화된다. 이것이 삼자회의 본질이다. 책략상 변하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새로운 형상을 세우지 않으면 적을 많이 둘 것이고 자아 고립, 내부가 더 혼란하고 신도들은 모두가 버리고 저절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럼 먼저 삼자회 전후가 다르다는 것을 보자.
50년대 삼자회가 발표한 문장은 사기등등하고 피 냄새가 하늘을 찔렀지만 지금은 화약냄새가 감소되었다.
<斗>를 내걸고 일어선 삼자회가 지금은 <사랑 愛>의 깃발을 들고 크게 논하여 이것은 은덕이 "더욱 많아지고" 더한다.
머리가 되어진 삼자회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인 사랑이라는 것을 내세워 더 많은 은혜, 은혜를 받는다 한다. <洪恩>이라 한다.
정광훈은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문장에서 "생각하기에 은혜는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부여한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이 성육신이 인류에 준 영향이 아담의 타락이 인류에 대한 영향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우리가 본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는 것이다."(신학지 제 14-15기 4항)
그들이 말한 뜻에 따르면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해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 그러면 예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는 신자든 불신자든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영향력이 아담보다 못하다. 이런 설법은 성경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보편구원론으로 연장시킨다. 과거에 <斗>만 강의하던 그들이 지금 사랑을 크게 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지금은 그들이 변하였다는 가짜 이미지를 심어준다.
과거 그들은 삼자회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자이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반혁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삼자회가 하나의 정부요, 관변 단체임을 스스로 승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 삼자회는 공안보다 더 공안같이 하여서 신도들의 인상은 삼자회는 교회 중의 공안국이어서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체포하는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여기는 은 삼백냥이 없다는 격이다.
나는 모 지방에서 두 번이나 집회를 취체당하고 사람들을 잡아간 일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삼자회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전화를 걸어 공안국에 보고하였다고 하여 그들은 이것을 공(功)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한다.
그전과 다른 점이라면 과거처럼 공개적으로 공안국 요원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 따름이다. 해외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지금 삼자회는 모든 외국 선교사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재삼 설명하고 과거 이름을 거명했던 허드슨 테일러한테도 우호의 손을 내민다. 과거 자주 보던 라는 말도 삼자회 문장에서 다시 볼 수 없다. 필경 <之流> 설법은 일대... 이기에 타격면이 크다.
삼자회가 확대하고 단결하는데 불리하며, 적을 많이 만들게 되고 자아 생존을 위협한다. 그들은 과거가 투쟁이었다는 것을 승인하면서도 계속 싸우고, 스스로도 보장할 수 없으며, 서로의 좋은 관계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의 투쟁도 좋고 지금의 화목도 좋으나 모두 자기를 위하는 책략 수단일 뿐 아무리 변해도 중심을 변하지 않는다.
6.3 삼자회 상하가 통일되지 않는다.
삼자교회에 예배드리러 가서 가끔 사람을 감동시키는 설교를 들을 수 있어서 삼자교회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친척 하나는 한번 삼자회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는 예기를 나에게 했다. 나 역시 감동을 받았다.
다만 그는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지도층에서는 강력 반대함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말하기 "많은 전도인들이 교회의 전통교리를 선포한다. 중요 사람은 서방에서 오고 내용상 보수와 복음주의에 속하고 형식상에서 부흥파에 속한다. 그들은 현대화와 상황화를 비정통, 위험과 이단으로 보고 일체의 현대화와 상황화로 혁신하는 것을 냉담하고 의심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태도이다.(신학지 21기 21항)
성도들은 설교가 좋다고 여기지만 위에서는 욕한다. 그럼 왜 위에서는 반대를 하는데 아래인 교회에서는 기독교 진리가 담긴 설교를 하는가?
이것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중국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복음적인 신앙이다. 이들은 일관적인 정치 설교에 매우 반감을 갖는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일부 복음파의 목사들이 강대상에 올라가는 것을 허용한다.
앞에서 이미 말한바와 같이 삼자회는 한차례의 정치운동과 공소 투쟁 중에서 탄생했다. 당시의 배경하에 삼자회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반동에 속했다.
못 견디는 자는 삼자회에 참가하는 것이 유일한 출로이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전도자가 참가했다. 단 사람들이 비록 삼자회에 참석하지만 원래의 신앙이 하루아침에 현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목사들이 일단 강단에 오르면 기독교의 진리를 설교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오늘날 상하 불일치의 현상이 형성되게 되었다.
삼자회의 상층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의 관점이고 삼자의 주류이다.
복음주의 목사가 성도들을 돕고 꼴을 먹이지만 상층은 이런 현상을 중심에서 떠나고 분열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기에 문 앞에서 팔고 있는 물건은 점주의 물건이 결코 아니지만 최종지배자는 상층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전의 과도형식의 표면현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6.4 삼자회의 겉과 속의 불일치
겉과 속의 불일치, 이는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불일치 현상과 실질의 불일치이다. 표면상에서 중국기독교가 대연합을 했다. 중국은 기독교 중에서 유일하게 종파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것을 종교 지도자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나팔을 분다.
그러나 내부는 연합은 할 수 없어서 된 것이고, 본래 그들은 처등파성이 강한 작은 집단을 만들어서 연합의 앞에 뿌리려 했지만 현실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을 알고 일시 결합하여 과도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길 현재 계단적 연합 즉 저층적(底層次的) 연합이다 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연합을 그들은 거치장스러워 하고 그들의 신학 창조를 뜻대로 하였다. 그들을 말하면 진퇴양난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아무런 제약없는 독자적 천하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삼십년 경험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런 각종 기독교 성도들을 모두 포함해 광범위한 연합은 신학사상의 창조성과 교회의 개척성을 제한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주 기타 신도들의 민감을 건드릴까봐 걱정하고 위약적 연합을 파괴 할까봐 조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가 진퇴양난에 빠진 것을 말하는데. --아무런 구속 없는 선택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 아닌가?"(신학지 21기 6항)
기독협회가 생긴 이후 표면상은 모두가 좋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이 협력의 글자가 꼴보기 싫어 일찍부터 없애려 하였다. 다만 잠시 조용하기 위해 지도자는 말하기를 "중국의 기독교 협회는 저 협자를 잠시 보류해 두어야 할 것 같아 보인다" 이말 중 協자의 취소하는데 당연히 시간이 문제이고 어쩔수 없이 잠시 기다린다.
위에서 이미 말한대로 교회에서 아직 복음주의 신앙을 들을 수 있는 것을 보아 앞에서 말한 신파신학 관점이 아직 전반적으로 모든 층에까지 미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삼자의 상층은 광대한 복음파 성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심각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그들은 매우 조심하여 급히 서두루지 않고 접어두어 드러내지 않는다. 일단 터저 버리면 취약한 아래층과의 연합이 와해되어 그들이 중국 기독교 천하를 통일하려는 중간다리가 끊어져 버리기에 낭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광훈은 그들의 신학자들에게 잠시 말을 적게하고 서두르지 말아 성도들의 종교 감정을 돌봐야 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러다가 적당한 시기가 오면 성도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완전히 약해서가 아니라 '역량의 원천을 숨긴' 이라하고 잠시적으로 참는 이것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보면 "합일을 위하여 신학자들은 필수적으로 자신을 억제해야 하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평신도 앞에서 너무 앞서 주장을 내놓지 말아야한다. 하나의 중국교회를 위하여 신학을 썻다면 반드시 평신도의 신앙과 감정을 고려해야한다. 그러나 그들이 도전할 수 없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신학지 24-25기 43항)
중국 기독교 연합회는 매우 약하기에 교회의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바삐 새로운 사상을 내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속박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면에서는 약함이 표출되지만 다른이들을 너그럽게 하고 교회의 현실을 존중해 역량의 근원을 감추어야 한다.(신학지 24-25기 44항)
넓게 단결함은 필경 좋은 것이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있다. 우리들이 신학적 사고를 할때 어떤 문제는 강의를 못하게 하거나 적게 말하게 한다. --단결을 위하여 우리의 신학 사유와 표달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일정 한도로 제한을 받는다. 이리하여 돌보는 것이 많아지게 끔되고 새로운 창조가 부족한 형세가 된다. -- 단결이 많아지려면 신학의 새로운 것이 적어져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처럼 현재의 광경을 참아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신학지 18. 23-24항)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새로운 창조를 잊지 않고 있음을 매우 중시한다. 그것은 어느 날 아침 중국 기독교 이 성지를 정복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신학자들이 잠시 안영하는 동안에 삼자회는 저희들의 계승자를 배양해 낸다. 그들의 희망은 후세대를 위탁하려고, 신학원을 계승자를 배양하는 실험 밭으로 만들었다.
계승자에게 말하기를 "신학생은 사상상, 낡은 사상은 비교적 적고, 그들은 신 사회에서 성장해 쉽게 새 사물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신학원내의 큰 강에서 자전을 심는다(실험 밭)(여기서 자전은 신파신학)(신학지 3기 12항) 삼자회는 후계자 양서을 하는 동시에 또 백방백계로 기요파의 신앙을 바꾸려한다.
금릉신학원의 진택민 부원장은 절대다수의 복음파의 중국 성도는 투이지엔커라후터의 책을 추천하여 그들의 사상을 넓혀주고 배타주의 사상을 고쳐 주고 싶다.(신학지 17기 13항)
그들의 책략을 종합해보면 길은 몇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병행하려한다. 연합을 과도형식으로 하고 소리 높여 모두를 받아들이고 다수로 소수를 부르고, 일시적 종교 각 인사들의 감정을 안정시키고, 복음파 목사들 앞에서 잠시 승부하는 것을 참고 먼저 삼자회 내부의 안정과 표면적 단결을 취하여 해외 기독교의 국제 승인을 얻는다.
이와 동시에 자유주의신학을 새로이 창조함을 가속화한다. 적극적으로 후계자를 배출하고, 동시에 연합도중 시기가 생기지 않도록 복음파 신앙에 대하여 트집을 잡는다.
그들은 생각하기에 일단 시기가 성숙되면 실험 밭의 새싹들이 중국의 기독교의 큰 밭에 이식하기에 충분하면 중국교회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자유주의 신학이 된다.
그때가 되면 각 종파를 장기적으로 세뇌 동화하는데, 방향은 그들의 사상관점에 적응하게 하여 순조롭게 변화하여 자유주의파의 방향을 따르며 같이 일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기독교 협회의 협자도 실제상 취소된다. 이러면 삼자회가 중국기독교 통일의 한집으로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잊지말라. 50년대에 들고 나온 깃발이 "중국 기독교 삼자혁신 위원회"라는 것을. 그때 어떤 사람이 제안하길 혁신이라는 두자가 눈에 가시처럼 보여--복음주의신앙을 고쳐 없애는 것으로 보인다 하여 혁신이라는 말을 애국이라고 고쳤다.
비록 애국이라는 말에 반발은 하지 못하지만 눈이 있는 사람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떤 깃발을 사용하던 말이다. 성경의 기본신앙을 바꾸지 않으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삼자회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라면 우리는 그들이 중국의 교회를 통일하기를 희망한다. 반갑게 참가할 것이다. 이렇듯 종파가 없는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의 대 방향은 교회를 대연합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간음을 행하는 교회를 건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과 선을 분명히 한다. 그가 행하는 길에서 우리의 발자취를 남길 수 없다. 시편 1편 3자의 부(不)로 착실하게 옮겨야한다. 不從, 不站 , 不坐 때문에 꼭 지적할 것은 우리와 삼자회는 파벌의 쟁탈이나 종파의 쟁탈이 아니다.
삼자회의 인식에 대하여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신학을 알아야 삼자의 본질과 해악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개인의 원한이나 개인이 포착한 표면적 현상이나 치우친 감정으로 삼자회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나와 삼자회는 개인적 원한이 없다. 그도 나를 해치지 않았다. 처음 나는 삼자회에 있을 때 배불리 먹지 못하였고 그래서 나왔다. 현재 그들의 쏟아져 나오는 문서들에서 잘못된 것들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 방향이 성경의 교리와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나는 그들과의 선을 분명히 하게되었다. 내가 만약 계속 삼자회에 있다면 신앙에 간음을 하는 거짓 교회를 도와 세우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마음 착한 외국인과 해외성도들은 삼자회의 진정한 성도와 기요파 목사님만 보고, 삼자의 원칙적이 잘못을 일반적인 결점으로만 보고 있다. 그래서 천천히 고쳐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은 아래와 같은 맹점이 있다.
1) 그들은 삼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머리가 그리스도가 아닌 신체를 건립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건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허무는 것이다.
2) 그들은 삼자회의 신파 신학의 방향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방향 그것이 교회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반드시 자유주의 신학 방향의 교회를 세운다. 신파 관점을 세계 기독교 연맹이 삼자를 지지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국외 복음파의 일부인사들도 그들과 연합하여 현대파가 지도하는 가짜교회를 공동으로 건립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심사숙고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들 신파 신학의 지도층은 보지 않고 일부 목사만을 본다. 이 과도 시기에 기독교 신앙을 설교하는 것을 보고 삼자가 하나님의 교회라 보고 당연시 지지하고 있다. 자유주의파가 삼자의 중요 신학 사상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결국 신파 신학의 교회를 설립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이런 중요한 신학 입장과 교회의 가는 길의 문제에서 우리는 반드시 멀리 바라보면서 양쪽이 다 좋은 그런파는 될 수 없다.
신앙은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 진리는 진리이다. 50년대의 신앙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이겼다고 말할 수없다. 성경이 존재하는 한 신앙의 후배가 있을 것이다. 사심 없이 경건히 성경을 읽게 되면은 기요신앙을 사람이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진리전쟁의 승리의 북소리는 다시 울리게 될 것이다.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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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8)
인보라
7. 결말
성도라면 반드시 교회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중생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 집의 식구이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태어나면 집에 속하게 되고, 집은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그의 일생의 행위가 이 집을 세우는데 작용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나도 원래는 그러했다.
우리는 하나님 손에 있는 活石(살아 있는 돌)이다, 하나님의 영적 궁전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를 통하여 나타난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이 몸에서 점차로 자라나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지어져 간다. 최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교회가 우리와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건립을 꺼내면 꼭 교회의 나아갈 길을 접하게 된다. 교회의 세움을 말하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는 교회를 건설할 것인가? 매우 엄숙한 문제이다. 게다가 열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증거하기를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열심히 있었으나 참 지식이 없었기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비통하고 교훈적인 것이다.
우리는 평신도이지만 교회의 지도자는 아니지만 교회 발전을 장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길을 걸으며 객관적으로 볼 때 교회의 건설에 작용한다. 무지는 쉽게 다른 사람을 뒤따른다. 맞으면 요행이고 틀리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 때문에 바보같아서는 안된다. 특히 지도자는 성경의 신학사상과 부합하여야한다. 그것은 신학의 방향이 교회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은 황량하다. 자신은 지붕이 있는 집에 있다고 안심할 수 있는가? 건강한 성도는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 혼란한 처지를 개인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의 말로서, 특히 교회의 나아갈 길의 원칙을 삼아 참과 거짓을 교회는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교회 입장에 굳건히 서야한다.
만약 거짓 교회가 앞길을 막아서면 개인의 힘으로 시대의 파도를 구할수 있겠는가? 확실히 힘들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조심스레 명석하게 운용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신임이다. 최고의 영광과 존엄이다. 사람에 대한 제일 정확한 시험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되어 후대에 경고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안에서 경험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북쪽의 여로보암 왕은 두 마리의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숭배하게 하였다. 이것은 여로보암이 한 일이다. 무엇 때문에 성경에서 " 이것이 이스라엘을 죄중에 빠지게 하였다"고 말하는가 (왕상12;30)
그는 왕이다. 백성이 어찌 권력자의 말을 듣지 않겠는가? 백성은 어찌해야 하는가? 이 동일한 시대 배경하에 심지가 굳은 레위인과 여호화를 찾는 이스라엘 백성은 왕이 여호와의 도를 벗어나 자신들의 산업을 버리고 단호히 남하하였다. 여호화의 규정대로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았다.(대하11;13-16)
이 한 무리의 레위인과 백성이 여로보암의 죄에 속하지 않았다. 분명하게 남아 있는 자들은 여로보암이 여호화를 떠난 죄 속으로 같이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어째서 레위인과 여호화를 추구하는 백성이 남하하여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가? 마음 편히 북쪽에 남아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에게 기도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평민을 받아들이는가, 레위인은 그들의 제사장이 아니란 말인가?
당연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무식한 사람들이다. 여호와를 율법에서 어떻게 제사하고 또 율법의 규정이 어떠한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상시에 추구하지 않았기에 정확히 알지 못하여 판단을 흐리고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많은 사람들은 율례와 규범 그리고 율법을 알았지만 왕과의 대항이 무서워 득실을 고려하기 때문이며, 양심을 속여 변명하기를 "여호화여 금송아지는 여로보암이 만든 것이며 표면상으로는 숭배하는 척 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신이시며, 구하나니 책하지 마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옵소서"
여호화 나의 하나님! 나는 힘없는 작은 백성인데 우리에게 왕의 명령에 따르며 권력에 복종하라 하셨습니다. 군왕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었으니 여로보암의 말에 복종함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경배하겠습니까?
없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나의 마음은 그래도 성실한 것인데. 금송아지도 좋고 벧엘도 좋고 레위인도 아닌것도 모두 외면적 일이다. 예절을 따질 필요가 없다. 심령과 성실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두는 스스로 안위하고 양심의 가책을 벗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은 원칙이다. 조금도 융통 협상의 여지가 없다. 성경의 다른 곳에는 계 2장에서 두아두라 교회를 말했다. 자칭 여선지 요시벨이 나와 사단의 심오한 도리로 하나님의 종을 가르치고 신앙에서 간음의 죄를 범하게 하고, 이교도 우상 숭배자와 음행을 행했다.
이런 음란의 도가 교회에 주류가 될 때 요시벨의 교훈을 듣지 않는 무리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시대의 승리자로 불러주셨다(계2;18-26) 계 2,3장 일곱 교회 중 라오디아교회는 유일하게 칭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실패의 라오디아 시대에도 승리자가 있었다(계 3;21) 이 사실은 오늘날 모든 충심으로 주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안위와 고무가 된다.
여로보암 그는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로보암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대로 고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요시벨 여인, 오늘날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을 유인하고 신앙에서 간음을 행하고 주님의 도를 혼란시키는 죄는 역사 중에서 여러 번 나타났다.
오늘날 종교 대연합의 소리는 시대의 새소식 처럼 들리고 솟아 보이고, 조류에 휩쓸리게 하는 힘이 있다. 바짝 따르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파도에 휩쓸려 매몰되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되며, 보수로 보이고, 완고하며 극단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진리는 성경의 진리에 비하면 촛불과 햇빛을 비교함 같아 흑암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사람이 만약 그날 하늘에서 나타나는 빛 가운데 있다면, 멀리서 자색옷을 입고 많은 민족, 사람, 나라를 유혹하는 멋있는 대음녀가 결국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삼자회는 종교대연합의 신학을 공개적으로 내어놓았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두목이다. 요시벨의 음란한 도이고, 진리같은 비학문의 적인 것들이 이미 명확히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나갈 것이며,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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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사
19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되고 외국 선교사가 중국 연안 5개 항구 범위 내에서 자유로이 전도할 수 있게 되자 구미 선교회에서는 잇달아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보냈다.
1858년 천진 조약 및 1860년 북경 조약 체결 후 중국의 선교 사역은 개척시기로 접어들었다. 서양 선교사 외에 중국 본지의 전도 동역자들도 양육되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각처에 전도소가 설치되었다. 전도 사역은 이 시기에 중국교회에 주요 임무였다.
교회와 선교회에는 중국에서 1877년 제 1차 [전국전도대회]가 있었고, 1890년 제 2차 [전국전도대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1,296명의 서양 선교사가 있었으며, 중국인 전도사는 1,657명이나 되었다.
1890년에서 신해혁명(191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북, 하남, 하북, 산동, 산서, 연해의 복주, 소주, 상해 등을 막론하고 교회는 모두 부흥을 이루었다.
산지에 사는 '묘족'의 경우에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났다.
민국 성립 후 기독교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어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신도들은 자신의 선교 책임을 느껴, 뜻을 세워 자립, 자양의 교회를 설립했다.
1911년에서 1919년까지는 중국교회의 자립시기라 할 수 있다.
화남의 장로회에 자립, 자양운동이 있었고,
화중에는 '중국예수교자립회' 운동이 있었으며,
화북에는 '중국기독교회'의 자립 운동이 있었다.
1918년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중국내지전도회'를 발기하여 최초로 중국인이 조직한 선교회가 생겼다.
1920년대에 들어와 중국교회는 반기독교의 애국주의와 공산주의가 충돌하는 어려움을 당했다.
192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고 계속하여 국공합작 및 혁명군 북벌이 있었으며 비기독교운동이 전 교회의 전도 사역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교회는 핍박을 받았으나 끊임없이 성장하였다.
1930년대 교회는 더욱 서로간의 단결합일하고 자치, 자전, 자양(삼자)를 강조했다.
1936년- 1949년에는 중일전쟁을 겪었으나 신도수는 더욱 증가하여 56%의 성장을 536,689명(1936년)에서 834,909(1949년)으로 성장했다.
1951년 정부는 [미국원조금을 받는 기독교 단체의 처리]라는 회의를 열었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중국 기독교 항미 원조 삼자 혁신 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오요종이 주석이 되어 전국 기독인과 더불어 배척 운동을 벌였으며, 배척의 대상은 [제국주의]와 관련 있는 중서(中西) 선교사, 목사, 지도자였고, 이미 세상을 떠난 모리슨 테일러도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중국을 떠났다.
그리고 서방교회와 무관한 자립교회 지도자 왕명도 등도 모두 계속하여 투옥되었다.
1954년 7월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가입치 않으려는 전도인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대약진' 시기에 목회자들도 모두 노도생산에 투입되었음으로 전도인들이 심히 부족하게 되었다.
1958년에 와서는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자 예배드리고자 하는 신도들은 가정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966년 문화혁명 폭발 이래로 삼자교회의 활동조차도 정지되었으며 책임자들은 비판을 받았다. 신도들은 집회를 지하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환란 속에 많은 신도들이 핍박을 당했다.
1979년에 삼자 예배당이 다시 열렸다.
역사를 볼 때 '삼자'는 결코 교회의 새로운 구호가 아니다. 자치, 자전, 자양 정신은 일찍이 중국교회에 존재하던 것이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험난한 개척시기를 거쳐서야 중국에 복음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신도들은 이미 스스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다.
1876년에 중국인 전도사는 750명으로 당시의 서양 선교사 473명보다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에서 선교하면서 적지 않게 중국과 서양의 불평등 조약에 의한 편익을 제공받음으로 인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더욱이 [비기독교운동]의 질책, 반대 회의가 중국교회로 하여금 자립의 길을 걷도록 하였다.
1950년대에는 교회가 원래 사용하였던 자립, 자양을 하나의 조직으로 사용하여 교회에 핍박과 상처를 주었다.
100여 년 동안 중국교회는 전란, 불안, 공격, 핍박을 당했으나 신도의 숫자는 오히려 계속적으로 불어났다. 복음의 씨앗은 이미 중국 대륙에 뿌려졌으며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100배의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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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산주의는 종교의 발전 , 기원 및 본질을 어떻게 보는가?
1) 공산주의는 이렇게 여긴다.
[종교는 인류 사회 발전의 일정한 단계의 역사 현상으로 그 발생, 발전과 소멸의 과정이 있다. (사회 생산력 발전, 수준, 경제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
[원시사회 안에서는 생산력 수준이 지극히 낮고, 원시인은 우매무지하여 자연 현상 및 재해에 신비한 성분이 잠재해 있다고 느꼈으며, 어떤 초자연의 능력이 자연계를 지배한다고 믿어 주문, 기도와 제사로 이런 힘의 자비를 빌리고자하는 시도를 했고, 이에 점차 원시적인 종교관이 형성되었다.]
[계급사회의 형성 이후 계급착취와 압박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며, 사람들은 착취제도가 만들어낸 거대한 고난(기아, 전쟁, 실업 등)에 대한 공포를 갖게 되었고, 생활 및 앞날에 대하여 절망을 하게 되어 현실에서 도피하여 빗물질, 비현실적인 산령한 보호를 눈앞의 고남을 해탈하여 내세의 행복한 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치계급도 또한 종교를 적극적으로 육성, 지지, 이용하고 군중을 마취시키고 조종하여 그 계급 통치의 정신 수단을 공고히 했다. 그러므로 계급사회 속에서 계급의 착취와 압박은 종교 존재와 발전의 주요 근원이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장기 발전을 거쳐 착취 투쟁이 없어지고 경제생활이 절대적으로 보존되고 인민의 과학문화 수준이 높아지면 종교는 자연히 소멸된다.]
[종교는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주관적 의식이며 황당하고 허망하며 왜곡된 반영이다. 일체의 종교는 인간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외부의 힘이 사람의 머리 속에서 환상으로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반영 속에서 인간의 힘은 초인간적인 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종교는 일종의 자아분리의 현상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 생활에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잃게 하고, 일종의 거짓 상황에 빠져들게 하여 착취 계급이 피착취계급을 잠식시켜 가는 독물로서 그들을 핍박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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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헌법의 [종교신앙자유] 조문은 무엇인가?
중국은 1982년에 개헌했으며 그중 36조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종교신앙의 자유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결국 무엇이 종교의 자유란 말인가? 중국 정부의 해석에 의하면 [종교 신앙은 공민 개개의 사사로운 일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그 뜻은 공민 마음 속의 신앙의 자유는 허용하나 그것이 종교활동의 자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행 중국의 종교정책을 주관하는 문서 [우리나라 사회주의 시기 종교문제의 기본관점과 기본 정책에 관하여] (약칭 19호 문건)에서 [공민은 신앙종교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불신앙 종교의 자유도 있다]라고 말한다.
19호 문건은 또한 신도의 활동을 제한하는 각 항의 조치를 열거하고 있다.
[어떤 사람도 종교 장소 이외의 장소에서 유신론을 선전할 수 없으며 혹은 종교 전단과 기타 정부 주관 부분의 허락을 거치지 않고 출판 발행한 종교서적을 배포할 수 없다.
[절대로 어떠한 사람에게도 종교를 강요할 수 없으며 특히 18세 이하의 어린이를 입교할 수 없다.]
[종교는 국가행정. 사법, 학교 교육과 사회 공공 교육을 간섭하는 것을 허락하자 않는다.]
[공산당은 신앙종교 자유를 가질 수 없다.]
이 밖에 지방 삼자회는 구체적으로 [삼정(三定정책)]을 집행하여 교회와 전도인의 활동 범위를 제한한다. 어떤 성(省)에서는 지역적인 특수 상황에 의거하여 구체적인 수칙을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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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 헌법 중에서 종교는 [외국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라는 항목에 대한 실천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중국 헌법 36조:
종교 단체와 종교 사무는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이는 중국교회는 독립, 자주, 자립의 원칙을 견지하며 종교 사무 방면에서 외국 종교 세력의 제재 혹은 간섭을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9호 문건에서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방지하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전도적 측면: 어떤 외국 종교조직도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전도하거나 혹은 대량으로 종교 선전 자료를 운반하거나 배부하는 것을 금한다.
경제적 측면: 외국 종교조직이 제공한 기금과 종교 설립을 위한 경비는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 단체와 종교계 인사 및 기타 단체와 개인 어느 누구도 받을 수 없다.... 헌금은 헌금하는 사람이 순수한 종교적 열심에서 나온 것이며, 어떠한 조건이 붙지 않는 것임이 인정되면 성(省), 시(市), 자치구, 인민정부 혹은 중국 주관 부서의 허락 하에서만 종교 단체가 나서서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