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고신의 배교 언급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비교에서 해명 [기타]
분류: 교단-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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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의 배교"를 언급한 원래 강사의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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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영환 날짜 : 2003/11/15 조회 : 101
이번에 강현복, 최성림 두 분의 목사님의 글에 언급된, 고려신학대학원 성경신학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차이점"이란 주제로 첫 번째 강의한 울산남노회 소속 김 영환 목사(현, 무임목사)입니다.
두 분의 목사님은 첫 번째 글에서 제가 "고신 교회는 배도하였다"는 말을 공적인 강의 시간에서 말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신대원 교수회가 신중하게 살펴야 할 사안"이라고 하였고, 두 번째 글에서는 저의 강의안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과연 이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글에서는 저의 강의에 대해 두 가지로 직접적인 우려를 나타내셨습니다. 첫째는,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가 "언약과 선택을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천편일률적으로 개혁교회의 좀 더 나은 원리를 내세워 장로교회의 보다 못한 부분을 비판하는 것"에 대한 우려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왜 지금까지 한번도 공 교회 앞에서 장로교회의 이 많은 문제점과 신앙고백서의 취약성을 말하지 않는 이유"와 "개혁교회가 무엇을 근거로 한국장로교회, 더욱 고신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을 수 있는지 이에 대한" "답변"을 듣기를 원하였습니다.
두 분 목사님이 세미나의 강사가 누구인지를 아셨고, 또 저의 강의에 대한 우려와 함께 공개적인 질문을 하셨으므로, 더 이상 침묵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합당하지도 않다고 판단하여 이제 두 분 목사님을 비롯하여,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동일한 염려와 우려를 갖고 계실 모든 분들에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는, 제가 "고신 교회가 배도하였다"고 말했다는 주장에 대한 해명을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두 분 목사님의 우려에 대해 재론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공 교회 앞에 밝히지 못한 이유와 자매교회의 문제에 대해 답변하겠습니다.
1. 해명
1.1 "고신 교회가 배도하였다"고 하지 않았다.
먼저 저는 "고신 교회가 배도하였다"는 말을 강의시간에 공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두는 바입니다. 강의가 끝난 후, 기숙사에서 사적인 자리에서 저와 몇몇 학생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에 대하여 제가 "배도 운운하였다"는 여러분의 추론은 문제의 사안에서 별개입니다. 오히려 두 번째 글에서 인용된 저의 글이 문제라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재인용해 보겠습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를 받지 않고, 가르치고 배우지 않는 장로교회는 과연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장로교회를 보라. 장로교회라는 간판은 달고 있으면서 정작 그 신앙고백서를 가르치고 배우지 않음으로, 교회 안에 얼마나 다양한 신앙과 생활로 나뉘어져 있는가? 그런 교회가 과연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기야 우리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신앙고백서를 받지 않는, 이름만 장로교회로 시작되었으니 더 무엇을 말하리요!"
이 내용은 "교회의 회원권" 문제를 다루는 항목에 있는 글입니다. 이 항목에서 저는 신앙고백서에 관하여, "장로교회는 이 신앙고백서를 단지 직분자들에게만 서약하게 하고, 일반신자들은 그 멍에에서 자유롭다. 즉 일반 신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 이 신조를 따라 살 것을 서약하지 않고서도 교회의 회원이 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직분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까지 모두 이 일치신조를 따라 믿고 살아갈 것을 고백하며 서약한다"고 양 교회의 차이점을 먼저 밝힌 후, 성경을 근거로 하여 신앙의 일치가 아니고서는 교회가 한 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였습니다(고전12:13, 엡4:3-6 등). 그런 다음 위에 인용된 내용을 말하였습니다.
두 분 목사님은 이 인용된 내용이 다름 아니라 "배도"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글 자체는 변명할 여지없이 "배도"의 의미와 같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런 교회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는 교회의 4대 속성으로서 니케아 신경과 (부분적으로)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교회가 이 속성을 상실할 때 그것은 분명 "배도(교)"라고 말할 수 있고, 더 이상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급하게 제가 "고신 교회가 배교하였다"는 말을 한 것이나 진배없다고 단정짓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결코 제가 말장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1.2 교회론
첫째는, 교회에 대한 이해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장로교회에 속한 대부분의 신자들은 교회를 이해할 때, 교단 전체를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로 이해하고, 지역교회는 그에 속한 지교회로 알고 있습니다(신앙고백서25장). 그러나 성경(과 개혁교회 신앙고백서)은 오히려 지역 교회를 완전한 보편교회로 보고 있습니다. 잘 아시듯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완전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합니다(고전1:2). 고린도 교회는 결코 전체 보편 교회에 속한 지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각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여러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각 처에 있는 완전한 보편적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둘, 셋, 그 이상의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도적 신앙의 일치로 말미암는 것입니다(고전12:4-6, 엡4:3-6, 요17장, 행1:14, 4:32, 유해무, 개혁교의학, 554-555 참조). 그러므로, 한 지역 교회가 어떤 한 제도적인 교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단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의 교회들이 무슨 교단을 창설하고, 거기에 가입하였으므로 단일성을 고백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터인 사도와 선지자들의 유전한 복음을 받아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킴으로 말미암아 단일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이제 해명하자면, 제가 강의에서 말한 그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론의 잣대로 하지 않고, 성경(과 개혁교회의 신조)의 교회론을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직하게 우리 고신에 속한 교회들(단수가 아닌 복수)에 적용하자면, 각 지역에 있는 완전한 보편 교회(복수가 아닌 단수)가 신앙고백서를 따라 가르치고 배우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가 과연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분 목사님이 제가 "고신 교회가 배교하였다"는 말을 했다고 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또 실상 저는 "고신 교회가 배교하였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고신에 속한 교회들의 총회는 1969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정식 채택하였고, 그 이후로 이 신앙고백서를 - 미국연합장로교회와 같이 - 수정하거나 폐기하지 않고 아직도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3 언중유골
그러나,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두 분 목사님이 저에 대하여 주장하신 "고신 교회가 배교했다"는 말은 여전히 언중유골이 있다고 판단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강의안에서 "한국장로교회를 보라. 장로교회라는 간판은 달고 있으면서 정작 그 신앙고백서를 가르치고 배우지 않음으로, 교회 안에 얼마나 다양한 신앙과 생활로 나뉘어져 있는가?"라고 적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각 처에 있는 교회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그 교회들이 신앙고백서를 따라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지, 또 그렇게 살고 있는지 직접 살펴보지 못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 교회들이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설교와 가르침에서, 혹은 교회 생활 전체에서 이 신앙고백서를 우리 신앙의 표준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들이 - 비록 몇몇 적은 수의 교회들을 제외하고는 - 아마도 거의 없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현금 신대원에서도 - 비록 신조학 과목이 있다 할지라도 - 우리 신앙표준 자체를 심도 있게 배우는 과목이 없는 것과, 장로, 집사 고시에 - 소교리문답 시험만 있고 -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없다는 것과 언약의 자녀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작성된 소교리문답이 실제 주일학교와 중고등부에서 가르쳐지지 않는다는 점, 또 어른들을 위하여 작성된 대교리문답이 실제 가르쳐지지 않는다는 점이 그 증거들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신자들은 우리 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신앙고백서가 무엇인지, 심지어 그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장로교회이면서도 다른 많은 교파들의 신앙과 생활이 신자들 속에 스며들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혼합주의 신앙의 온상인 기도원에 출입하고 있으며, 교파를 초월한 집회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그 결과 한 지역 교회 안에 신자들 사이에 얼마나 다양하게 신앙과 생활이 분열되어 있습니까? 저는 바로 이런 점에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 안에 "신앙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다고 보았으며, "신앙의 일치"가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한 몸"이라고 할 수 없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단일성과 거룩성과 보편성과 사도성을" 보유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2. 두 분 목사님이 표명한 우려에 대한 재론 1(선택과 언약)
2.1 의도적인 실수?
저의 교회론은 위의 글에서 함께 밝혀졌으므로, 이제 두 번째 우려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두 분은 제가 "웨신 3장과 7장 그리고 대교리문답 31문답을 통해 웨신이 [언약과 선택을 같이 보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그는 대교리문답 32문답을 제외시켰"다고 하면서, 이것을 "의도적인 실수"라고 하셨고, "결국 장로교회 안에서 언약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면서 이 주장은 "상당히 편파적인 시각인 듯" 하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선택과 언약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3장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대해 말한 후, 7장에서 두 번째 언약 곧 은혜 언약은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모든 사람" 곧 택자들과 맺었다고 말합니다(3절). 또 대교리문답은 "은혜 언약은 누구와 맺어졌습니까?"라는 질문에 "은혜 언약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그의 후손인 모든 택자와 맺어졌습니다"라고 답합니다(31문답). 소교리도 역시 은혜 언약을 택자들과 맺었다고 가르칩니다(20문답).
2.2 대교리 32문답
이제 문제의 핵심 - 두 분이 우려한 - 대교리 32문답을 제외시킨 것이 저의 "의도적인 실수"라고 하셨습니다. 두 분이 제시한 글에는 제가 의도적으로 실수하면서 제외하지 않는 -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추측건데, 바로 이 32문답이 선택과 언약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다시 말해 대교리문답도 언약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단정코 저는 이 문답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키지 않았으며, 그럴 의향도,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남에 대한 32문답도 역시 택자들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중보자와 그에 의한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예비하시고 제공하신 것, 신앙을 요구하신 것, 성령을 약속하시고 주신 것, 믿음의 역사, 거룩한 순종의 은혜가 나타나는 대상은 "택자들"로 언급됩니다.
2.3 영원작정-시간집행
이제 보십시오. 제가 강의안에 적은 그대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하나님의 선택을 말한 것은 성경을 따라 그대로 말하는 바른 고백입니다. 이로써 장로교회가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 그리고 웨슬레의 사상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표명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곧 구원 언약(평화 언약)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은혜 언약이 택자들과 맺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경우, 영원에서 작정된, 선택된 자들은 시간 내에서 자동적으로 중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K. 스킬더 박사에 의해 이미 오류로 밝혀진 개혁파 전통의 예정론 곧 영원 작정 - 시간 집행이라는 구도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경이 말하는 언약의 자리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언약은 두 당사자(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가 있으며, 약속과 함께 요구(의무)가 주어지고, 이 요구에 불순종할 때, 언약적 위협 곧 저주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원에서 예정된 택자들은 완전한 구원에 이른 자들이기 때문에, 언약적 축복과 저주는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2.4 개혁파 전통의 예정론
바로 이것이 화란 국가 개혁교회에서 분리한 두 교회(1834, 1886)가 연합한 화란 개혁교회들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소위 신 칼빈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고통 당했던 문제가 아니었습니까? 그는 칭의와 언약과 교회가 모두 영원에서 작정되었고, 완성되었으며, 그것들이 시간 내에서 실현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캄프하이스, 영원한 언약). 그러나 카이퍼에게 고민은 실제로 세례 받은 유아들이 모두 중생하지 않음에 있었습니다. 그는 세례 그 자체가 효력을 산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세례는 필연적으로 중생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은 외적인 표징만 갖고 있을 뿐, 중생한 내적인 능력을 받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카이퍼는 교회의 회원 전체가 포함되는 외적 언약과 오직 택자들로 구성되는 내적 언약을 구분하고, 오직 택자들만 중생을 얻어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카이퍼가 원한 바는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인 출발점을 갖도록 하는데 있었고, 또 모든 자녀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그 반대가 증명되기까지는 중생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5 은혜 언약은 택자와 맺어진 것이 아니다.
결국 세례의 기초는 가정된 혹은 예상된 중생에 놓여 있는 것이며, 세례는 하나님의 선택을 인치는 표징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스킬더는 선택과 언약을 올바르게 구분하고, 세례의 기초는 선택이 아니라 언약이며, 세례는 선택의 표징이 아니라 은혜의 표징이라고 바르게 잡았습니다. 그리고 선택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오묘한 일"에 속하고, 언약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는 "나타난 일"입니다(신29:29). 하나님은 분명 선택의 하나님이시나 우리와 상관하실 때는 언약으로 하십니다. 그리고 이 은혜 언약의 다른 편 당사자는 택자들이 아니라 "신자와 그 자녀들"입니다(창17:7, 행2:39 등).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와 그 자녀들에게 언약의 복음, 약속과 의무 그리고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선포해야 합니다. 곧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대로 우리는 택자들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1944년에 우리 고신 교회와 자매 관계를 맺고 있는 화란 자유개혁교회들이 새로이 창설되었습니다.
2.6 정당하고 바른 판단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고신에 속한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오직 "선택"에 집중되어 있었고, 선택과 언약의 관계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 대부분의 목사들이 배운 교의학의 교과서가 벌코프의 조직신학인데, 그는 사실상 카이퍼와 바빙크를 잇는 개혁파 전통의 예정론의 선상에 있었고, (최근 10여 년 어간에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을 제외하고) 1930-40년대에 화란에서 있었던 선택과 언약의 논쟁에 대해, 더구나 지금 우리가 자매교회관계를 맺고 있는 화란자유개혁교회들이 선택과 언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배우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선택과 언약의 분명한 관계를 "오직 개혁교회만 설교하고 장로교회는 설교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상당히 편파적인 시각"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하고 바른 판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들 솔직하게 말해 보십시오. 우리가 선택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우리의 선택됨을 확인하고 위로 받았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내가 과연 택자일까?"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더 깊은 고민에 빠지지는 않았습니까? 정직해집시다. 다들 후자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이 동일한 결과가 카이퍼의 영향 아래 있던 교회들에게 있었습니다. 즉 카이퍼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신자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확인하기 위하여 주관주의, 체험에 바탕을 둔 경건주의로 다시 회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선택과 언약을 정확하게 구별하고 또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우리 교회의 현실입니다!
3. 두 목사님의 우려에 대한 재론 2(교회질서)
3.1 성경과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교회질서
흔히들, 교회질서(혹은 정치)는 교리와는 무관한 혹은 적어도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질서야 어떻든, 복음의 교리만 분명하고 확고하면 바른 교회라는 사고는 결국 그 교회질서를 성경의 원리 위에서 세우지 않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교회질서는 반드시 성경에 일치하고, 신앙고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를 "적당하게, 질서대로" 다스리십니다(고전14:40). 또 (H. 바빙크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말씀과 성례가 순수하게 집행되고, 교리와 생활이 이 말씀을 따라 건설되기 위해 선한 정치는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정치는 신앙고백을 보존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불순한 신앙고백이 교회 질서를 잘못되게 하는 것처럼, 그릇된 정치가 신앙고백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에 자체의 특수한 정치를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교리와 올바른 교회질서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허순길, 역사적으로 본 개혁주의 직분).
3.2 "좀 더 나은"과 "보다 못한"?
교회 질서에 관해서, 결코 저는 "개혁교회의 좀 더 나은 원리를 내세워 장로교회의 보다 못한 부분을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저의 강조는 "좀 더 나은"과 "보다 못한"의 대조에 있습니다. 교회 질서에 있어서, 과연 개혁교회는 단순히 "좀 더 나은" 원리를 가지고 있고, 장로 교회는 단순히 (개혁교회) "보다 못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까? 그 대신에 저의 강조는 그 "좀 더 나은"과 "보다 못한"이 "성경과 신앙고백에 일치하고 조화되는 원리"에 대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3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의 숨겨진 본질
그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가 최초 작성한 "장로 교회 정치의 형태"는 실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의 협상의 산물이었습니다(허순길). 잘 아시다시피, 그 총회는 장로교정치체제를 지지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고교회주의자들, 회중교회주의자들, 국교회주의자들, 또 장로교체제와 감독교회체제를 함께 수용하기를 원하는 이 다섯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총회의 교회정치는 순수한 의미에서 장로회정치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교회질서는 장로회정치이면서도 감독교회체제의 뉘앙스가 곳곳에 배여 있습니다.
실제로, 1788년에 미국장로교회의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교회질서를 약간의 수정을 거쳐 그대로 수용하였고, 이후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바람직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진전되어 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두 가지 예를 들자면, 첫째, 목사를 "교회에서 첫째" 직분으로 보고, 장로는 평신도로서 단순히 교인의 대표자로 명시한 것입니다. 둘째, 노회를 개교회들 위에 두는 상회로 본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직분의 계급화의 길을 열어놓았고, 완전한 보편교회로서의 개교회의 독립성과 신앙의 일치 안에서 개교회들의 연합인 노회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3.4 고신 교회의 교회정치의 문제점들
이러한 모습은 고스란히 우리 고신 교회의 교회 정치에 나타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직분의 계급화는 심각할 정도입니다. 위임목사와 임시목사의 구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목사"는 계급주의 직분관의 전형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목사는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목사"이기 때문입니다(교회정치 5장 34조 3). 이는 감독교회정치에서나 볼 수 있는 직분의 계급화입니다. 또 장립집사와 서리집사의 구분 역시 그렇습니다. 이는 성경뿐만 아니라 원래 전통적 장로교정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교회에 특이한 것입니다. 모든 직분은 교회를 위하여,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나와야 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행1:15-26, 행6:1-6 등). 그러나 우리 교회정치는 어떤 직분은 회중이 가담하지 않고, 어떤 직분자(들)의 권위로 세울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중에 첫째가 개체교회의 형편에 따라 당회나 목사가 선임하는 서리 집사이고, 회중의 청빙없이 당회가 선임하는 부목사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목사가 교회의 회원이 아니라 노회의 회원이라는 사실이 목사가 다른 직분들과는 확연히 구별되고, 위에 있는 직분인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교회정치가 목사와 장로를 둘 다 장로의 반열에 두지만 여전히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로 보고 있는 것도 계급화에 한 몫을 거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직분간의 동등권을 파괴하고, 계급적 직분관을 형성한 대강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저는 파생적으로 한 가지를 더 언급하려 합니다. 먼저 우리 고신 교회는 성경과 그 총회의 장로교정치에도 없는 직분을 새로 첨가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준직원으로서 강도사와 목사후보생, 임시직분으로서 전도사, 권사 등입니다. 또 우리 정치는 명예적 특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원로 목사, 공로 목사, 은퇴장로, 원로장로, 은퇴집사, 또 각 직분의 무임상태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소위 이런 직분들은 교회 봉사의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의도되었다 할지라도, 음으로 양으로 계급적이고, 명예적 직분관을 형성하는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크게 둘째로, 우리 고신 교회 정치는 개교회의 완전한 보편적 독립성과 신앙의 일치에 의한 단일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미 지적한 대로, 17세기의 그 총회가 작성한 교회정치가 다른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의 합의적 산물로서, 처음부터 장로회정치이지만, 감독교회의 정치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던 연유에서 기인합니다. 우리 교회 정치는 노회를 명확히 "상회"라고 표현합니다(12장 89조). 상회로서 노회는 사실상 상설치리회로서 많은 직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93조). 특히, 개 교회의 당회와 직분자들, 소속기관과 단체가지 "총찰"하고, 장로 선택과 임직을 "허락"하고, 개체교회를 "시찰"하며, 개체교회의 모든 처리 방침을 "지도"합니다. 제가 큰따옴표로 강조한 "총찰", "허락", "시찰", "지도" 등의 표현은 개교회의 독립성을 현저히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감독교회적 노회 성격을 드러내며, 이는 결국 신앙의 일치로 말미암은 교회들의 연합인 노회의 바른 성격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예들은 약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과 그 위대한 개혁의 원리를 벗어나 감독교회체제로의 회귀임과 동시에 시대의 조류를 따름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4. 마지막 두 가지 질문 중 첫 번째에 대한 답변
4.1 무지와 용기없음에 대한 용서를 구함.
두 분 목사님은 저에게 "왜 지금까지 한번도 공 교회 앞에서 장로교회의 이 많은 문제점과 신앙고백서의 취약성을 말하지 않은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먼저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 대해 반성합니다. 게다가 저의 현재의 지식은 처음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신학대학원에서 배우고, 목사로서 사역하는 동안에 점진적으로, 누진적으로 정립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아들이고, 이 교회 정치 현실의 아들로서 저 자신 역시 많은 부분에서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었음도 인정하며, 또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지 못한 점, 즉 제가 분명히 아는 것에 대하여 용기를 가지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 점도 시인합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교권을 두려워함이기도 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젊은 목사가 노회에서 자유롭게 발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한 것도 (구차한 변명 같은) 이유가 될 것입니다.
4.2 더 큰 이유
그러나 제가 공 교회 앞에서 말하지 못하거나 않았던 더 큰 이유는 우리 교회의 바탕, 신앙과 생활의 자리입니다.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동료, 선후배 목사님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과 거기에 일치되고 조화를 이루는 교회질서에 무관심한 현실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국장로교회는 그 터를 놓던 역사적인 순간"부터 "장로교의 기반이요 교리적 표준인 웨스터민스터 신경에 마땅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데 그 연유가 있고(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482), 늦게나마 1969년 고신 총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채택하였으나 그것은 직분자들의 것이었고 일반신자들의 것은 아니었습니다(허순길, 483). 또 한국장로교회의 기초를 닦은 선교사들이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인물이었으나 당시 미국의 부흥운동과 경건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은 자들로서 신앙고백을 파수하는 개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언드우드 선교사가 감리교 선교사들과 연합하고, 한국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것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른 교파에 대해 관대하고, 포용적인 입장을 가진 교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금 한기총과 교회협이 교단장협의회와 함께 한국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을 하고 있는 이 마당에 신앙고백서와 교회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취급받음에 다름 아닙니다.
4.3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다행스럽게도, 이 번에 두 분께서 저에게 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이미 말했고, 계속 말하렵니다. 고신에 속한 모든 교회들이여, 저에게 정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한 신앙의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직분자들과 신자들이 일치된 신앙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지요? 고신에 속한 모든 목사님, 목사님들의 설교와 가르침은 이 표준문서에 기초하고 있는지요? 어른들에게 대교리문답을, 아이들에게 소교리문답을 가르치고 있는지요? 진실로 이 신앙표준을 파수하면서 다른 교파의 가르침을 배격함으로 참된 교회 건설에 노력하고 있는지요? 만약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신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참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단 대답이 "아니오"라면, - 오! 저를 용서하십시오 - 여러분의 교회는 덜 순수한 교회가 아니라 단지 거짓 교회입니다.
다시 한번 저에게 정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순수한 복음의 교리를 선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집행하고 있으며, 기독교 권징을 합당하게 집행하고 있는지요? 간단히 말해서, 여러분의 교회는 모든 것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되고 또 이와 반대되는 것은 거부하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참된 교회이며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교회 자체나 교회 규정들에 더 큰 힘과 권세를 돌리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려하지 않거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집행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따라 가감하거나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더 의존하거나 범죄한 신자들을 권징하지 않는다면, - 오 형제들이여, 다시 한번 저의 말을 너그럽게 들어주십시오 - 그렇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거짓교회입니다!!
다시 한 번 더 저에게 정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들은 이미 다른 교파 교회들에게 교회의 문을 열어놓지 않았는지요? 장로교회의 강단에, 우리와 신앙과 생활을 달리하는 교회의 강사를 세우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이미 온갖 잡동사니 신앙의 온상인 기도원과 오순절 은사 운동을 하는 집회에 참석하고 있지 않으신지요? 만약 이 질문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자신 있게 말하신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참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만약 불행하게도 긍정의 대답을 하신다면, - 오 형제들이여! 세 번째 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 여러분의 교회는 이미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을 포기한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왜냐하면 보편 교회는 사도적 신앙의 일치로 거룩한 성도의 교통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5. 마지막 질문 중 두 번째에 대한 답변(자매교회 관계)은 곧 정리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주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