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칼빈의 생애 요약 [세계교회사]
분류: 교회사 -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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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장로교회(안산교회) 홈인용/ 배영근, 200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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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1507년 프랑스의 북부 삐칼텐주 노용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의 유력인사로서 교회에서 오랫동안 서기와 회계의 직분을 맡아 봉사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판단력이 예리하고 지혜가 특출하여서 그 지방의 귀족들 및 교직자들과 교분이 있었으며 신임도 받는 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경건과 조용함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칼빈은 그의 부친의 희망대로 12세 때부터 교회의 목회자를 보좌하는 일을 했고, 14세 때에는 파리에 있는 말쇄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몬테이구 대학으로 옮겼는데 그곳에는 기독교사의 큰 인물들인 에라스무스와 로욜라 등이 있었다. 칼빈은 그곳에서 성경연구와 스콜라주의 철학, 토론학을 배웠는데 이는 수사학과 더불어 후일에 그의 종교개혁 변증을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그의 나이 19세 무렵 그의 아버지는 노용의 교권자와 충돌이 있었고 이로 인해 큰 파문이 일게 되자 아들을 세속적으로 출세시켜 보고자 법학을 공부하길 권했다. 이 때문에 결국 칼빈은 올레온 대학을 거쳐 부느제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칼빈은 이때 배운 법학과 헬라어를 통하여 조직적인 종교개혁과 주석을 쓸 수 있는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고, 또 교회의 정치와 행정, 제도에 대하여서도 개혁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1532년, 칼빈은 갑작스런 회개와 회심의 체험을 경험하게 되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기게 된다. “갑작스런 회개를 통하여 완악하기로는 누구보다 더 강하였던 나의 모든 생애를 정복하여 복음을 가르치려는 마음으로 불붙게 하였다." 즉, 그는 극적인 회심을 통하여 복음의 종으로 인생이 전환된 것이었다.
칼빈이 목회자로의 삶을 주로 살았던 곳은 스위스의 제네바였다. 그는 기독교강요로 인하여 핍박을 받다가 파리를 떠나 제네바를 통과하여 스트라스부르크에 가려고 하였다. 도중에 그는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려고 여장을 잠시 풀었는데, 그때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파렐이 아침 일찍 칼빈을 찾아와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칼빈은 학구적인 성격과 앞으로의 연구계획, 그리고 자신의 내성적인 면 등을 들어 사양하였으나, 파렐의 여러 번 간청으로 그곳에서 개혁자로서,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일을 두고 후일에 칼빈은 회고하기를 "그때 마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게 손을 펴시고 나를 사로잡는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교도시였던 제네바는 파렐의 생명을 건 활동으로 미사가 폐지되었고, 시민들은 복음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까지 받아놓은 교회개혁의 성공지가 되었다. 이때가 칼빈의 나이 27세 때였고 1536년 7월 하순경이었다.
당시 제네바의 사회상은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극도로 타락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도 하에 극히 복잡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개혁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운동이 반대파로 인해 무너질 위기에 놓였을 때 파렐은 칼빈에게 성경강해를 부탁했다. 말씀교육을 통한 개혁을 지속적으로 벌이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산 파엘교회에서 바울서신 강해를 시작으로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목회는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틈이 나는 대로 토론을 하였고 이로 인해 로잔과 그 주변의 주민들은 개신교 신앙을 택하게 되었다. 이때 칼빈은 세 가지의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는데 첫째, 모든 어린이들에게 복음적 신앙의 요점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다음 세대까지 종교개혁이 이어지는 데에 역점을 두었고 둘째, 도덕적 훈련을 시켜 새로운 교회와 질서를 만들고자 했으며 세 번째는 이런 교회 형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신앙고백’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고 시민 자치회의 결의에 의해 좌절되게 되었다. 결국 시 의회의 가결에 의해 칼빈은 제네바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제네바를 떠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주로 루터파 사람들이 개혁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부쳐가 유력한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칼빈은 친구 부쳐의 초청으로 불란서 피난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약 400명 정도의 교인들이 있는 그 곳이 칼빈에 의해 개혁파의 센터가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연구와 저술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1539년에는 기독교강요 2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도 내었다.
그러나 한편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는 거의 무정부상태로 돌아갔으며 날로 부패하고 신교는 구교의 세력에 다시금 힘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칼빈의 초청을 다시금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시의회는 1540년 칼빈을 재 초청하기로 결의하여 초청한다. 이에 대해 처음에는 칼빈이 선뜻 응하지 않았으나 파렐의 간곡한 권유 때문에 1541년 9월 제네바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1564년 5월 그의 마지막 때까지 23년간 철저한 개혁운동가로 목회하며 지내게 되었다.
제네바에서 2차 목회하는 동안 신학적인 문제로 두 번의 충돌이 있었다. 반대파중의 일부는 칼빈이 주장한 예정설에 대해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 죄의 책임자로 삼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에 대해 배치되고 전통적 해석에 반하는 것이라고 한 비난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세르베투스에 의해 받은 비난이다. 세르베투스는 특히 삼위일체론에 대하여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교리는 "머리 셋을 가진 신", "악마의 환상"이라고 조롱하는 자였다. 칼빈은 그를 신성모독죄를 지은 자로 낙인을 찍었고 결국 그는 1553년 8월 상순에 나폴리로 가던 도중 체포되어 화형을 받게 되었다. 옥에 있는 그를 찾아가 칼빈은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불응 하였다고 한다.
1564년에 이르러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던 그는 설교를 중단하게 된다. 제네바 전체가 그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였지만 그의 마지막의 때는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이 정보를 접하게 되자 쾌재를 불러 대었다. 유럽 전역에는 칼빈이 벌써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칼빈이 죽고 나면 불란서가 제네바 시를 침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을 로마 가톨릭 측에서 퍼뜨렸다. 이로 인해 제네바 시는 일시에 공포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칼빈은 아픈 몸을 이끌고 시의회에 나가 하나님과 동맹함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격려하여 제네바 시민들을 굳세게 하였다. 이후 얼마동안은 건강이 호전되어 걸어 다녔으나 그해 부활절에는 걸을 수가 없어서 의자에 실리어 성만찬을 하였다. 그러나 1개월 후에 극도로 쇠약해져서 결국 1564년 5월 27일 토요일에 하나님께로 갔다. 그의 원대로 묘비 없이 평토장되었고 공동묘지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부활을 기다리는 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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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쪽에서 본 칼빈 - 통합측 장신대)
[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칼뱅… “신앙의 힘으로 세상을 개혁하라”
장 칼뱅은 1509년 7월10일 프랑스 느와용에서 법률가였던 제랄 코반(Gerard Cauvin)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이름은 장 코반(Jean Cauvin). 라틴어로는 요하네스 칼비누스(Johannes Calvinus)로 쓰고 장 칼뱅(Jean Calvin)은 프랑스어 이름이다. 영어권에서는 존 칼빈(John Calvin)으로 부른다.
칼뱅은 20대 초반에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최종 학위는 1531년 오를레앙 대학에서 받은 법학박사이다. 학위를 마친 후의 그의 생애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1533년에서 1536년까지는 프랑스 앙굴렘과 스위스 바젤을 전전하며 신학을 연구한 기간이었다. 이때 쓴 책들이 1534년의 ‘영혼의 깨어 있음에 관하여(Psychopannychia)’와 1536년의 ‘기독교강요’ 초판이다. ‘기독교강요’는 1559년 최종판인 7판(크게 보면 4판)이 나올 때까지 계속 개정된 칼뱅 필생의 역작이다.
이후 1536년에서 1538년까지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차 망명생활을 한다. 이즈음 칼뱅이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이 통과된다. 칼뱅은 제네바 시민의 종교교육과 교회조직을 관할하게 됐다. 그러나 그의 과감한 개혁은 반대자들의 벽에 부닥쳤다. 1538년 기욤 파렐과 함께 성찬방식에 대한 논쟁에 연루돼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1541년까지 칼뱅은 지금 프랑스 땅이 된 독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프랑스 피난민을 위해 목회를 했다.
1541년부터 1564년 5월27일 서거하기까지 칼뱅은 다시 제네바에서 활동했다. 제네바 시민들이 칼뱅을 다시 부른 것이다. 칼뱅은 제2차 제네바 생활중인 1541년에 ‘제네바 교회의 법령’을 제정,공포하고 1542년 방대한 양의 ‘제네바 요리문답’을 완성한다. 이것은 1552년에 제정한 ‘제네바 신조’의 기초가 됐다.
1551년엔 볼섹과 1553년엔 셀베르와 각각 예정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리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결과로 볼섹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고 셀베르는 화형에 처해졌다.
칼뱅은 1559년 지금의 제네바 대학의 전신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다. 그는 아카데미를 통해 제네바를 개혁운동의 거점도시로 만들었다.
칼뱅은 당시 유럽에서 불길같이 일어났던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유럽 각국의 종교개혁자,집권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프랑스 신앙고백(1559)과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재발견해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을 부각했다. 특히 칼뱅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하는 역할을 강조하면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이중적 예정을 강조했다.
칼뱅의 신학은 성찬론과 예정론을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루터의 신학과 비슷하다.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그리스도 속죄의 절대성,진정한 앎을 위한 계시의 필연성,강력한 인격적 신앙을 강조하는 점은 루터를 계승했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부각시킨 반면 칼뱅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섭리에 초점을 두는 것이 칼뱅 신학이 루터 신학과 다른 점이다.
루터는 당시의 사람들을 교권으로부터 해방하려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반면 칼뱅의 사상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중심으로 한다. ‘오직 주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명제가 이러한 칼뱅의 하나님 중심적 신학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칼뱅은 이 세상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내에 있는 것으로 보고 국가와 교회를 이원적으로 나눈 루터의 두 왕국 이론을 자기의 입장과 구별하였다. 칼뱅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기보다는 세상에 참여하여 변혁시키는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칼뱅은 그가 활동한 제네바를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재설계해 총체적인 도시선교와 사회변혁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다.
스위스의 자연환경을 고려해 직물공업과 정밀공업 육성을 제안해 시민들의 경제에 도움을 주고자 했고 목사 12인과 평신도 12인으로 구성된 ‘종교법원’(Consistoire)을 만들어 신정적 정치를 구현하려 했다.
목사 외에 장로 집사 교사 등의 평신도들을 교회의 리더십으로 세운 대의적 교회정치 형태는 이후의 민주주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칼뱅을 포함한 츠빙글리와 불링거 등의 신학적 영향으로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가 형성됐다. 개혁교회는 우리나라에선 일상적으로 장로교회라고 부른다.
160년전 결성된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는 현재 세계 107개국 215교단 7500만의 신자가 소속돼 있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중심이 된 독일의 루터교회,헨리 8세의 수장령에 의해 설립된 영국의 성공회 등과 함께 개혁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the protestant churches)의 주요 교단을 이룬다.
칼뱅의 사상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두 이념이 모두 칼뱅의 사상에서 유래하였다는 분석도 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칼뱅주의의 금욕주의 정신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또 서구 시민민주주의 정치체계, 그것의 사상적 기반인 로크와 루소 등의 자연권 사상,근대의 시민혁명이 모두 칼뱅의 신학과 연관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칼뱅의 사상을 이러한 이념들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고 그들 사이에 내용적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정도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기독교 강요’ 초판의 서문을 보면 칼뱅이 그의 모국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박해받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강요’의 서문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간문의 형태로 돼있는데 그는 이 서문을 통해 당시로서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그 신자들을 변호했다. 이런 점은 칼뱅의 신학이 일종의 목회적 관심속에서 배태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다른 신학자들과 논쟁하면서 많은 소논문들을 썼다.
칼뱅의 신학은 상당히 실용적이며 시대적인 신학이었다. 현실에 충실한 신학이 영원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주장한 칼뱅은 오늘에도 우리의 교회와 신학이 주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계속적으로 새로워져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노영상 교수(서울대 농화학과 졸업·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석,박사·장신대 기독교와 문화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