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세상을 초월하고 살았던 초대교회 교부들 [세계교회사]
분류: 교회사-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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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회의 참 모습은 열 두 제자들의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가 활동하던 초대교회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고 죽는 날까지 전도했습니다. 이때는 성령에 붙들려 어디든지 갔던 시기였고 어떤 증거든지 담대하게 외쳤던 시기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느라고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활동했으나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하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과 섞여 살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 살았지만 그들은 하늘에 속한 딴 세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전하고 가르치는 증거는 이론에 그치지 않았으니 바로 능력이었습니다.
자연이 변동되고 천지가 그들을 옹위하며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2.열 두 제자를 이어가는 운동들이 그 후시대에 기도원 운동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접 활동하던 시기가 1세기였고 그 제자들의 제자들인 속사도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2세기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제자들을 통해 내려오던 권능은 식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전 시대는 자기 경건을 가진 상탱서 남에게 전하는 일이 가능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전도와 경건을 함께 가지는 것은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남을 살리겠다고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멀어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세상을 멀리하면 전도하고 가르칠 기회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3세기로 들어서면서 초대교회는 뚜렷한 현상을 하나 맞이하게 됩니다. 전도하고 가르쳐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것은 잘 알지만, 자기의 신앙이 부족하니 남을 살리기 위해서 우선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기도원 운동을 하게 됩니다. 오늘로 말하면 백영희신앙노선에서 그 모습을 일부 찾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에 집중하다 보니까 수도원이 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사회생활이 체질적으로 싫어서 현실 도피처를 찾아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우선 자기 충전을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목적으로 왔다가 하나님과 교재에 푹 빠져들어 다시는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수도원에서 도를 닦아 성자의 반열에 오르려는 공명심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목적은 여러가지였으나 여기서는 성령에 붙들려 수도원을 찾았던 분들, 남을 살리려면 내가 먼저 살아야 하기 때문에 들어왔던 분들, 수도원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세상을 아주 잊어버리고 살았던 성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숨겨져 왔던 몇몇 일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3.수도원 운동은 3세기경 이집트 사막 지역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넓은 광야 어느 한 쪽에 숨어버리면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되는 세계가 이집트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집트가 회교국가지만 당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이방 나라였습니다. 신앙박해를 피해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들로 도피한 신앙인들도 있었고, 또 전도를 하러 일부러 찾아다닌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집트는 초기 수도원 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수도원 운동도 중세 천주교의 수도원 제도로 이어지게 되는데 중세 천주교의 수도원은 그 폐해가 이루 말도 못할 정도였고 또 고행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통해 신앙을 다시 출발하게 된 우리 교회들은 예수님 열 두 제자들의 초대교회를 표본으로 삼았고 따라서 그 후시대에 나타난 수도원 운동은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는 비록 수도원 제도를 배척하였지만, 원래 건전했을 때 수도원이 가졌던 경건과 기도생활의 정신은 그대로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이르면서 이런 경건과 기도생활이 거의 실종이 되었지만,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붙이지 않아도 1700여년 전 초대교회가 가졌던 경건과 기도의 신앙노선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4.이제 소개하는 일화들은, 2가지 위험한 문제가 있습니다만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초대 교회 사막 교부들의 신앙행적을 잘못 이해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오히려 극진한 경건주의인 줄로 착각하기 좋을 경우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세계를 참으로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런 능력과 기적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자유주의 신신학에 빠진 분들은 무슨 미신같은 소리냐고 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건전한 신비주의입니다. 말씀대로 바로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동행이 기본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걸음에는 어떤 초자연의 신비로운 일도 다 일어날 수 있다는 신앙걸음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말씀을 떠나 자기 주관에 빠진 불건전한 신비주의를 거부합니다. 동시에 불건전한 신비주의를 거부한다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초자연 역사를 몽땅 없애버린 자유주의 지식주의 신앙노선도 거부합니다.
5.다음 자료들을 소개하는 것은,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남의 일같지 않은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관련 홈페이지들이 교계나 신앙 관련 소식을 전한다고 이런 저런 자료들을 소개하여 그 숫자가 많아지는 것으로 권위를 삼고 있으나, 잘못 올린 소식 하나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에 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어떤 소식이든지 하나를 소개할 때는 많은 면으로 조심하고 있습니다. 소식이 지식주의를 조장할 수 있고, 바람 든 무우처럼 읽는 사람을 변질 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 이 자료를 올리는 것은, 오늘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 능력이 박물관에 박제가 되어 전시용으로나 소개되거나, 아니면 수천년 전에 있었던 전설같은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오늘도 우리가 믿고 순종만 하게 되면 당장에 그 박제를 다시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로 만들 수 있고, 역사 속에 소개된 내용이 오늘 내 현실에 전개되는 실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문제인데,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탄식이 문제입니다.
이제 이집트 사막 등에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으로 동행하며 한평생 세상을 떠나 살던 의인들의 걸음을 고요히 대하며 오늘 교회와 나를 비교해 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