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십자가를 향하여 (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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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십자가를 향하여 ( 추천)


십자가를 향하여 원저자 Tom Wright 역자 정용성 2001.10.10
ISBN 89-8223-051-1 93230 말씀사랑/학사원 출간

요약

십자가를 향하여



저자 소개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말씀 하신 것 대신 , 사람들 이 십자가를 향하여 던진 가향 칠언
을 상고 해 보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곧 사람들 의 배후에서 그들을 통해 음성을 내
고 있던 사탄의 의도를 보게된다. 이 설교는 마음을 사로잡아, 예수님의 사활 과 그를 따
르는 자들에게 미치는 계속되는 성령의 영향력에 어찌 음답해야 할 것인가를 요청하고 있
다.
이글 의 집필자 톰 라이트는 옥스퍼드 대학교 우스터 대학 교목이자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에서 캐논 교수로서 목회사역에 종사한다. 탁월한 신약 학자이자 학문과 목회적
심상을 두루 겸비한 학자이자 목회자 이다. 합리적이고 날카로운 지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 온유한 영성을 겸비한 인격자 이다.
이 책은 걸프전 발발 즈음 대학 교목으로 섬기면서 , 십자가와 성령에 대한 주제로 고민
중, 십자가에 대해 어찌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교회가 어찌 성령의 역사하는 모임이 될
것인가, 교회가 어찌 세상을 변혁시킬수 있는지 고민하며 펴낸 책으로 알려진다.

가상칠언 과 달리 상대적으로 가향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십가가에 달린 예수님을 십자
가 주변인물을 통해서 조명해 보는 , 이색적 이고 통찰력 있는 책이다. 성탄 과 부활 사
이의 사탄의 시험과 수치의 절정인 수난의 십자가의 현장으로 인도받음으로, 신선함 과
잔잔한 감동을 얻게된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교회는 , 사회에 비추임에 깊은 영
성 과 사려 깊은 성경 주해를 통해, 영성 과 지성이 겸비된 제안을 한다.

제 1부 가시 면류관
1.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대적 의 총공격, 집중 공세 속에 외쳐지는 말, 네가 하나님의 아
들 이거든 십자가 에서 내려오라! 이는 군중 뒤에서 조정하는 사단의 말이요, 참소하는자
의 말이요, 시험하는 자의 말이다. 사단의 음성은 가장하여 들려온다. 상식적으로도, 사려
깊고 분별된 , 합리적 이성의 목소리로, 하여 사단의 음성인지 인식하기 어려울 때가 무
척 많다.

공생애 시작 시, 세례 받을 때 예수님의 신원 과 소명을 확증 받고(마3:17), 광야에서 다른
소리를 들으신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이거든 .....바로 그 말이다.
이는 소명 과 사역 자체에 대한 공격이다. 이는 비단 십자가 위의 예수님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공격과 같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은 메시아를 학수 고대하고 있었으나, 정복자 메시아 에 의한 승전
을 고대 하였다. 유월절 마다 , 수전절 마다( 폭군 에피파네스 가 더럽혀 놓은 성전을 마카
비가 다시 정결하게 한 축제일) 고대하였던 자유와 승리가 ,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메시
아를 그들 에게 보내실 것 이라는 믿음 과 소망을 품고 간구하였던 것은 뿌리깊은 신앙
때문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의 언약과 보증, 하나님 자신의 진정한 성품 과 능력에 의존되어
있었다. 이같은 배경 하에서 십자가 위의 인물을 향하여 구경꾼을 통해 사탄이 조롱하는
음성을 이해 하여야 한다. 이는 거짓 메시아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저 십자가 에 매달려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그의 간절한 바램은 과 철저히 시
험 받으심. 그 배후에는 복종이 있다.



2. 아들아, 너를 근심하며, 찾았노라. (눅 2장41-52)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을 제자들에게 알릴 때 제자들은 알수 없었다. 구속 하시는 일을 완
성하러 오신 분 과 , 로마 십자가가 그 구 속의 절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관하여 이
해할수 없었다.
예수님의 어머니 에게도 십자가 처형은 자신이 평생 품고 키워온 주제의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단편적 비극적 멜로디가 이제는 전 곡을 연주하는 현장에 직접와서 듣고 있는 자
리이다.
12살 먹은 아들을 잃고 3일 동안 근심 과 고통 가운데 찾아 헤메던 그때는 단편 멜로디
였을 것이다. 발단의 장소로 찾아간 곳에 현인들 에 둘러싸여 담화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
한다.
하얀 수염의 랍비들 과 서기관에 둘러 쌓인 예수 와 3일 동안 제대로 잠도 못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게 근심, 안도감, 분노, 사랑, 당황 스러움의 마리아 와 요셉.
아들아 너를 근심하며 찾았노라!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줄 어머니는 모르셨나요!...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십자가 그늘 밑에 있는 예수의 어머니는 3일
이 아니라 3년 동안 근심하며 아들을 찾고 있었다. 자식을 키우며 속이 까맣게 탄 자신의
모든 삶을 인도해 왔던 그 장소에서, 예수를 향하여 퍼붓던 비아냥 거림이 마리아 의 가슴
에도 가슴에 사무치게 새겨지도록 들려오고 있었다.
네가 하나님의 어머니 라면, 네 자식을 명하여 십자가 에서 내려 오라고 하라. 그래야 사
람들이 너를 복받은 여자라고 부르지 않겠니? 천사 가브리엘은 이런 일을 당할 것이라 입
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어제 까지는 이스라엘 의 자존심 과 희망을 한 몸에 받았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 의 실망 과 혐오스러움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아픔이 마리아 의 가슴에
선명하게 교차되어 다가왔다. 종려주일의 환호가 이제는 비난으로...아우성치는 군중의 함
성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세계에 그가 왔으나 세상은 그를 영접치 않았고, 자신의 영
토에 왔으나, 아무도 영접치 않았고, 그는 이스라엘이 학수 고대하여 왔던 분이고, 세상이
갈망하고 있는 분이나, 그는 오셔서 기쁨은커녕 아픔만 안겨주고 계시는 듯 보인다.
그녀는 이제 이스라엘의 소망 과 위로를 잃어버리고 비탄에 빠져야 하는 또 다른 3일을
지새워야 하는 찰나에 있었다. 지난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산의 고통을 그녀의 육체에
가득 채웠듯...

아들아 너를 근심하여 찾았노라. 어찌 알지 못하였나이까?
우리도 우리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 하시는 사랑이 이 세상 에서 해산의 고통을 감
내하며 품고 있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산고는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는 구속 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순간에 들어서고 있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을 품은자 로 부름 받은 우리들... 우리는 주를 찾을수 있
는 곳이면 어디든지 막론하고 찾아나설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고통과
패배와 연약함 과 실망 과 죽음 속에서도 함께 일하고 계신다. 그 주님 과 함께 하기에 우
리가 우리됨이다.


3. 이 사람은 아무것 도 그릇 행한 것이 없노라.( 누가복음 2장41-52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은 목적은 예수님은 이 따위 종류 의 메시아라는, 실패한 메시아
라는 것으로 강도 사이에 두고 처형 하였다. 이는 로마의 팔레스틴 통치를 종식 시키려고
무력 사용을 하던 유대 혁명 당원에게 적용시키던 단어(레스테스) 이다. 즉 거룩한 도적의
무리들 이라는 것이다. 자질구레한 자들은 십자가형을 하지 않았다. 못밖은 또 다른 목적
은 민중 선동가 로서 , 백성들을 현혹 시키고, 하나님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 사용하는자
임을 가장하여 백성들을 현혹 시킨자 라고 공개적 으로 선포하기 위함이다. 로마에 대적
하던 가짜왕 . 로마인 들은 예수를 민족 주의자 메시아 라고, 유대인들은 그가 민족주의자
가 아니라 고 거세 시키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발적 으로 범죄자들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ㅏ. 자신을 죄인으로
만드는 대신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죄에 찌들려 사는 기질과 그들이 옮기고 있
는 더러움을 그들 에게서 없애버리셨다. 그가 청결하고 죄가 전혀 없으시므로 , 그는 치
유하고, 용서하며, 구원하는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셨다. 이는 삭개오 에게도 그러했고, 문둥
병자 에게도 그러했고, 혈루증 여인 에게도 그러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다. 누
가 나를 손을 댔느냐? 그녀가 당황했음은 물론이다. 누군가 나에게 접촉 하였느니라. 능
력이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아느니라. 예수님의 특별한 능력, 무력이 아닌 사랑의 능력,
압제하는 힘이 아닌 건강하고 청결한 능력은 이 여인이 많은 세월 가지고 있었던 의식적
인 부정보다 더 강하였다.
나인성의 과부 의 아들, 죽은 시신이 놓여있는 관에 손을 대는 것 같은 행동은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불결하게 되려고 돌아버리지 않는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허나 예수님은 부정
에 전염되지 않았고, 대신 한 번 더 능력이 반대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분은 인간의 부정을
그대로 취하셨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그의 온전함을 취하셨다. 그분은 당신 자신 안에 우
리의 부정을 빨아들이셨으므로 , 우리의 부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하셨고, 당신
자신의 정함을 대신에 우리에게 흘려보내 주신 것이다. 우리의부정을 대신 취하고 예수님
의 온전함 과 정함을 주심이 ,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의 의미를 의도 하도록 도와주기 위
하여 복음서 에서 보이는 실마리이다.
이제 갈보리 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을 본다. 자기 아들은 하나님의 택한 자이지만,
범죄자의 죽음을 당하는 자이자 혁명가 이다. 그는 로마에게 대항 하다가 실패한 반역자
의 죽음을 당하고 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정의한 메시아 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
이 미루어 생각하고 풀어가도록 내버려두셨지만 , 자신을 스스로 메시아 라고 , 왕 이라고
선언하신 적이 결코 없었다. 예수님은 결코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 의 야심을 보증하여 주
고, 그들 의 배타적 인 정결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자신의 아버지의
일을 하러 왔으며,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공정하게 가장 절망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들의
수준으로 낮춰서 가져오기 위하여 오셨다. 범죄자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음으로 , 범죄
자 들이 이제 낙원에서 그와 함께 있을수 있게 되었다.

그분은 전체 이스라엘이 죄책을 지고 있는 범죄에 대해서도 죄가 없으시다. 헌데 하나님을
반역한 세계 전체를 대표하는 이스라엘 과 동일하게 되셨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부정하고
신실하지 않고 , 사랑이 없고, 거룩하지 못한 우리와 동일하게 되셨다. 자신이 친히 우리의
죄 있는 모습 그대로 취하시고 그 죄를 감당 하시며, 대신에 자신의 거룩을 우리 의 옷으
로 입히시고, 자신의 정결함을 우리의 선물 과 능력으로 주셨다. 또 진정한 대적은 로마
가 아니었고, 하나님 백성의 정치적 대적은 사탄이요, 죄와 사망 이었다. 이제 사탄은 진짜
문제가 어디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고 단호히 이 문제를 찾아서 핵ㄹㅎ고자 돌진하여 오고
있는 자신의 대적 고 마주 대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강도와 반역자 수준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으나, 세상 어느 누구 보다도 그 예수님이 자신의 나라에 임하시는 죄 없
으신 왕을 알아보고 있다. 그 왕은 죄와 사망을 이기고 십자가를 통하여 통치 하시는 분
이시다. 그분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며 마음 깊숙히 새기고 감사하며, 겸손한 기도를 드리
자.

4. 내가 쓸 것을 썼노라.(요한복음19장17-22절)

빌라도는 재치없는 꽉막힌 사람이었다. 퉁명스럽고,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기도 하던 자이
다. 죄수 명패를 가지고도 입씨름을 하였던 자였다. 예수님의 죄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 했다. 이 죄명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며, 십자가가 내포하는 의의를 역설적
으로 함축하여 놓고 있다. 색다른 방법으로 유대민족과 그 통치자를 조롱하며, 이것이 자
신이 생각하는 바라는 것을 은연중 암시함 이었다. 너희들 중에 왕 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이렇게 종말을 고할 것이요, 너희가 조심하지 않으면 이같이 될 것이니 조심하라는 의도이
기에, 내가 쓸 것을 썼을뿐이라 한 것이다.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 모독죄 였는데, 로마 법정 에서는 정치적인 소요를 잃으킨 자로 선
동자요, 메시아요, 왕 이라 주장했다는 죄목이다. 이는 상당수 유대인 들과 대부분의 제자
들이 은근히 예수님 께 기대하던 류 의 지도자에 해당하는 죄목이다. 바나바는 사실 예수
님이 뒤집어 쓴 죄목에 해당했지만, 유대인들은 대신 예수님을 버렸다. 죄가 전혀 없는 예
수님은 정말 말 그대로 대신 죽었다. 우리의 슬픔을 지시고, 우리의 고통을 담당하셨다.
사단은 예수님을 사람들 이 원하는 메시알 만들려고 필사적 으로 유혹 하셨다. 만약 예수
님이 사탄의 유혹을 따라 사람들 이 원하는 지도자 가 되었다면, 실제 상황 과 다를바 없
이 십자가 위에서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사람 입장에서도 실패자요, 반란
이라는 고소 내용이 사실상 성립된다. 이는 실패한 메시아 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더 더
욱이 불 순종한 실패자가 된다.
빌라도 가 생각하는 한 예수님은 정치적 인 메시아 이자 , 실패한 메시아 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외치며 주장 하였지만, 가이사 의 나라가 그를 맹렬한 기세로 호통치며, 벌
을 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십자가 위에서 가이사 의 것
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다. 지금도 종교와 사회가 겉보기 에만 나눠진 것 처럼 보일 뿐
이지, 여전히 상호 연관되어 있다. 다만 무언의 상호 보호 조약을 맺고 있을뿐이다. 로마
인 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새롭게 충성을 바치도록 불러모으는 행위는 곧 가이사 에게 바
치는 충성을 약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대 지도자 입장도 하나님께 진정한 충성을
바치게 되면, 그들의 행위가 믿음이나, 신뢰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 , 두려움 과 상처받
은 오만함 으로부터 기인된 것임을 발견할 것이기에 , 하여 그들의 사욕에 미혹되어 대의
를 바치던 그들 의 헌신을 약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에 예수님은 이같은 역사적 이고,
정치적인 핵심이유로 십자가 형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 식민 지배체제에 대한
유대 민족주의 적인 대안을 제시하러 오시지 않았고, 제시도 하지 않았기에 빌라도는 예수
를 심문 하면서 놀랐고 , 당대에 생각되던 메시아 가 아니었기에 어떤 범주로 예수님을 다
루어야 할지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은 세상 지배자들 끼리 나눠먹기 식이었다. 내
가 너에게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리라. 내가 이 모든 것을 양도 받았으므로 이제 내가
주고자 하는 자 에게 주리라 함이 사탄의 주장 이었다. 사람들 이 가이사를 숭배할 때 사
실은 사단을 숭배하는 것이다. 정부를 하나의 신으로 삼을 때는, 사실 그 정부를 마귀로
삼는 것이다. 비록 품위있고 세련된 사회 에서는 실제 우상숭배 하는 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극단적 행동들을 무시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편
향된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의도하는 세상 질서는 다르다. 세상 주관자들 과 힘에 의한 굴복 이는 ,
모든 에너지들이 사랑과 창조성을 함양 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도록
의도 하셨다. 이들의 주어진 권세는 하나님께 위임 받은 권세이므로 하나님 앞에 그들 자
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권세임을 잘 알고 있다. 허나 통치자 하나님을 잊기 시작하면 누구
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고, 오직 자신들 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자
신들 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정부가 하나 의 신이 될 때 주위를 딴데로 돌리
며 주장 하려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그 수간 마귀가 되기에 이다.
인간 존재는 인간이 누려야 할 권세를 정부에 제공하여 왔고, 정부는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쫓아내고 자신들 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해 왔다.

사단은 예수님 에게 오직 한 가지 조건 만을 내걸고 이 세상 나라를 제시 하였다. 엎드
려 자신에게 경배하라. 십자가는 그 거절이 빚어낸 직접적 결과이다. 예수님 의 전 생애의
사역은 사실 마귀와의 투쟁 이었다. 예수님이 싸우셨던 대상은 바로 이 세상의 지배자 들
이었다. 단순한 대안 제시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제시하셨다. 그 세상 에서 하나님은 하
나님으로 인정받고, 경배를 받을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던 사람 존재답게 창
조주를 섬기며, 사랑하고 자유를 누리고 살아갈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요, 여기에 바로 신비가 있고, 비밀이 있다. 십자가 에서 예수님은 세상 주관자들을 벌
거벋겨 버리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군왕 들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온
세상에 공포 하셨다. 결과적으로 십자가는 패배가 아닌 승리요, 극적으로 이 승리를 다시
주장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통치하고 있음을 , 세상 주관자들은 승복
해야 했고, 하나님 나라가 사단의 나라를 패배 시키고 그 계획을 헛되게 만드셨음을 , 세
상 나라들 은 원칙상 우리 하나님 , 메시아 의 나라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계기를 마련한
곳이 바로 십자가 이다. 그 분의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신호 이자 상징이
다.

5. 유대인 의 왕 (이사야 52장 13-53장 12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되, 아담의 죄악으로 엉망이 된 것을 원 상태로 회복 시키기
위하여 부르셨고, 이스라엘은 진정한 인류가 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세상의 빛 과
소금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대표로 부름을 받았듯이, 이스라엘 의 왕,
기름부음을 받은자는 당연히 최고의 대표 이어야 했다. 하나님께 완벽한 복종을 하며 섬김
으로서, 하나님의 세계를 지혜롭고 정의롭게 다스릴수 있는 자의 모델이 되었다. 이처럼 다
윗 왕 위를 계승하는 이스라엘 의 왕 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도
구가 되어야 한다. 헌데 이스라엘 자체 부터가 대속 되어지고 개조 되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됨이 문제 자체였다. 그 근본 문제는 민족적 자만심, 오만 불손함의 모습, 자신이 섬
기려고 부름을 받은 세상의 다른 민족에 대해 자동적 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핵심에는 죄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같은 때에 선지자들 은 새언약과 이를 이룰 종을
예언한다. 이사야 자신도 자신이 이야기 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편으로는 이상 적인 이스라엘과 합치하고, 이스라엘 왕이 가진 왕의 특징들이 부
여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과 대조 되면서 이스라엘을 대리하는 인물 이다.
그 종은 대리적 죽음을 할 것이고, 그분이 대표하는 자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언약을 다
시 새롭게 하실 분도 바로 그분 이시다. 새로운 멧시지가 온 세계에 걸쳐서 다시 울려 퍼
지게 될 것이다. 그 분의 복음은 이스라엘 지경을 넘어서 전해질 것이다. 선지자가 본
바로는 포로 생활 의 고난에서 하나님이 대신 값을 치르고 세상을 도로 회복 하시는 방법
을 미리 볼 수 있다. 세상의 죄가 이스라엘 에게 다 맞겨져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지탱할
수 없었고, 다음 차례로 이스라엘 대표인 유대인 의 왕 에게 다 맞겨졌다. 십자가 상의
예수는 이스라엘 이요, 그분 은 그 종이다. 하나님의 고난을 받는 종이요, 그 분은 이스라
엘이 부름 받은 소명에 순종 하였다.

메시아는 가이사의 대적자 가 되는 민족주의적 왕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그 분은 항상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려고 의도 하셨던 바대로 , 이 세상을 다스
리기 위해서 오셨다. 바로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을 위해 죽으시는 방법을 택 하셧다. 이
세상의 고통을 자신이 담당 하시려고 오셨다. 자기 자신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을 다 끌어 모으려고 오셨다. 너희들 중에 누구든지 가장 큰 자가 되려 하는 자는 마땅히
너희의 종이 되어야 만 한다. 바로 이 구약의 약속과 전해온 소명에, 갈보리 언덕 위로 올
라가시면서 예수님이 복종 하셨다.
1) 세상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원래 지혜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선한 피조
물 이었다.
2) 사람은 자신들 을 만드신 창조주 에 대항 하여 반역하여 왔고,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
리는 어두운 세력들 에게 종노롯 하게 되었다.
3) 하나님은 친히 인간과 전체 우주를 치유 하시고, 회복 시키실수 있는 계획을 추진시키
셨다. 이 계획속에 이스라엘을 부르심이 있었고,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곤경에
빠진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신들 이 세움을 받은 그 임무를 완수할 수가 없었다.
4) 하나님은 이스라엘 과 세상을 위해 대신 죽으심 으로 이스라엘 의 임무를 수행 하시고,
이스라엘 과 세상을 구원하실 분을 보내시기로 약속 하셨다. 이 약속은 오직 하나님 자신
만이 오셔서 성취할수 있는 약속임을 알게 되었다.
5)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보내셔서 이 구원 행위를 계속하여 이행 하실 것 이라고 또한
약속 하셨다. 이 성령은 온 인류 와 온 우주 의 갱신과 치유를 완수하실 것이다.

십자가 의 예수님은 공중 권세자들의 의도로 유대인의 왕 팻말을 붙여 수치와 고난을 당
하였으나, 실상은 유대인의 왕 이셨고, 이스라엘 의 임무 가 오직 그분에게만 양도 되었다.
세례 요한 이 이스라엘에게 선포할 때에 ,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을 극적으로 확증하였다.
또 세례 요한은 전체 이스라엘 민족 자체로는 하나님의 구원 도구가 될 수 없다고 엄중하
게 경고 하였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로마의 진노가 이스라엘 에게 임함은 자신들 이 받은 민족적 소명을
악마적 인 민족주의적 오만불손함으로 왜곡 시켜버린 당신의 반역한 백성들 을 벌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로 경고 하시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죄악 스러운 민족과 자신을 동일시 하
고 계신다. 또 이스라엘 의 신성한 소명을 민족주의 적인 환상으로 왜곡 시켰던 자들 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하였다. 그들 의 신원을 자기 자신의 신원으로 삼으시고, 예수님 자
신을 유대인 의 왕으로 표를 붙인 로마 십자가 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유대 민
족주의적 인 반역자 의 죽음을 당하셨다. 하지만 자기 자신 만은 이러한 죽음을 당할 이
유가 전혀 없는 무죄한 분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열심 당원이 되었고 , 반역자
가 되었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 의 소망 과 야망을 가슴 깊이 살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 분이 받은 유혹은 실제적 인 유혹 이었다. 그 분은 자신의 백성을 사랑 하셨고, 예루
살렘을 사랑하셨다. 예루살렘 멸망을 예견시 고소하다 하지 않으시고, 슬피 우셨다. 그
분은 이스라엘 이 원하는 대로 싸우러 갈수도 없었고, 수수방관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유
혹하는 사탄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세상의 쓴 맛을 다 보셨다. 한편 으로는 수년동안
예루살렘이 자신에게 불러왔던 달콤한 노래, 자유의 노래를 들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
나님의 뜻에 복종 하고자 자기 자신의 행동 으로 그 노래를 단호히 저항 하면서 , 지금
십자가 에 매달려 있다.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 처럼,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마지막 으로
쳐다보고 있다. 흠이라고는 전혀 찾아볼수 없는 사랑으로 예루살렘이 당연히 받아야 할
심판을 자신이 스스로 받으면서 ,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유대인 의 왕이 되었다.

십자가는 그 분이 이스라엘의 메시아 로 등극하는 자리이다. 이는 십자가 에서 그 분은 이
스라엘 의 메시아 가 해야했던 이스라엘 과 세상을 위한 일을 최종적 으로 수행 하고 계
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의 왕으로 십자가 위에서 등극 하셨다. 해골의 뜻을 지닌
갈보리 언덕에 마지막 으로 뭍혔다. 십자가 밑의 아담의 해골,

다윗,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 거인에 맞서고 있어요.
내가 포도즙 짜는 틀에서 뽑아낸 네 개의 반반한 못들을 가지고서.
아담, 당신은 지금 어디 있나요? 여기 문밖에 있어,
두르도는 화염검의 역정을 샀거든.
사랑하는 너, 황금성 예루살렘 아, 복종하는 눈으로 너를 보노라.
내 이마 에 피를 흘려야 너는 떡을 먹게 되리라.


6.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 마태복음 27장45-50절)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 오후 3시 경 어느 구경꾼의 소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엘리야 가 하나
님의 백성을 구출 하거나 자신이 친히 메시아 적인 구출자 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다시
돌아올 것 이라는 전승으로 인해, 유월절 밤에는 엘리야 가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또 엘리야 가 마실 포도주 와 잔을 준비해야 했다. 유대 백성들 은 하나님이 그들
을 위하여 무었인가 하시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소망 하고 있다. 그 일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사 자기 백성을 구원 하시는 것이다. 이듬해 예루살렘 에서 우리들은 최종적
으로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유월절 을 기념하게 될 것이다. 쿰란 공동체는 이
소망을 제사장 모습을 한 메시아 개념으로 표현한다. 다윗과 같은 메시아 의 반려자, 혹
은 선구자 이다. 엘리야 가 와서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 으로 임하기 직전에 이스라엘이 올
바른 질서를 회복 하도록 만든다 는 것이다. 구경꾼 들이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함은 자신들 들 과 같이 유대교가 앙망하고 고대하던 것 과 동일한 고대를
하고 있다고 여겼다. 로마 압정에서 의 구출자를 자신들 이 고대했듯 유월절 주간에 갈망
하는 고대하던 엘리야 요, 당대의 풍습대로 엘리야를 위해 잔을 부어놓고 , 그가 들어오도
록 문을 열어 놓았으리라. 십자가 위에서 고통의 절정에 이른 예수님이 와서 구해달라고
엘리야를 부르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문을 종식 시켜 달라고 탄원
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원하던 불 의 사람 이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엘리야 이기를 소망하여 왔다. 세례 요한 은 예수님을 가리켜 불로서 세례
를 베풀자라고 하였다. 야고보 요한 역시 메시아의 멧시지를 배척하는 자들에게 불을 내리
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점진적으로 선지자 보다 더 큰 메시아요, 왕이시지 선구자 가 아
님을 깨닳게 되었다. 군중들 이 착각한 것은 비단 언어의 문제 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와 그 죽으심이 가진 온전한 의미가 무었인지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에서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다. 고 말씀 하셨다. 엘리야
가 할 일은 이미 이뤄졌다. 이미 새로운 시대, 새 언약의 시대, 죄 용서의 시대가 도래 하
였다. 유월절을 기념하던 방문이 열려있음은 엘리야 가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룟 유다가 나가도록 내버려두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 엘리야로 온 세례 요한이
준비한 왕의 사역이 착수되어 진행중에 있었다. 진정한 유월절이 일어나는 곳은 갈보리
이다. 어떻게 그 분은 이스라엘 과 세상을 구속하시고 다시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대리인
이 된다는 말인가.? 십자가 위의 그분, 허물로 인하여 찔림을 당해본 그분, 죄악으로 인하
여 상처를 입은 그분, 그 분위에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형벌이 가해졌고, 그 가 채
찍에 맞음 으로 그들 이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은 그 시간 어두움 과 공포로 인하여 엄습
하는 전율을 경험 하셨다. 사탄 과 가룟 유다 베드로 또 자연인 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기
질 과 자기 백성에 대한 그의 모든 사랑이 합심하여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를 넘어지
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 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만하게 구체화 시킨 그 순간, 그
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졌음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경
험 하셨다. 죄인들 과 자신을 동일시 함으로서 죄인들 이 구원을 받을수 있게 되었다. 바
로 이 죄인의 구원이 그 먼 여정의 목적지 요, 그 길은 쓰라림 과 잔인하고 섬득한 죽음
을 통과하는 육체적 고문에서 맺었다. 그 여정이 처절하고 황량함은 ,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는 영적인 암흑에서 그 길이 끝남 이라는 것이다.
모든 대적들을 불을 내려서 , 태워 없앰으로 이스라엘 의 정치적 인 원수들을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러 오시는 엘리야 와 정치적 인 메시야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님 에 의해 성취되는 방법 이다. 지난날 엘리야가 불
로 세상 권세자를 대항 하였듯 ,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주관자들과 대결을 버리고 있다. 로
마의 권력, 이스라엘의 율법, 이 둘 모두의 배후에 있는 사단이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
고 하려고 파괴하는 힘이 맞서서 대결을 벌인다. 사랑으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 된
다.

7.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이었도다.(막 15장33-39절)

우상숭배자요 이방 로마인, 무장으로 길들여진 로마군인 백부장, 고집세고 완고한 군인. 그
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신성모독 죄를
지고 소환되어 심문을 받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 자신이 누기라 생각하기에, 위엄있는
유대 음식법 과 바리새 전통을 폐기하려 드는가? 예수님은 마치 하나님 한분 외에는 적
합치 않은 지위를 친히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듯 , 월권, 또 수상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권위와 신분을 주장하고 있었다.
종려주일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에서 군중들은 호산나를 부르며 아우성 치며 환호 하였
다. 이때 적들은 모종의 궐석재판을 열어서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어
야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가야바는 공식 재판에서 네가 메시아, 찬송받으실 이의
아들 이냐고 예수님께 맹세 시키고 물음으로 ,전체 질문을 통해 제기된 난제의 결론을 자
신이 의도하는 바 대로 이끌고 간다.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숙어는 당시까지는 메시아,
기름부음받은 자를 지칭하기 보다는 그저 인간 존재요, 왕일 뿐이었다. 유대인들은 신적인
메시아 자체를 원래 믿지 않고 있었다. 가야바는 자기 자신의 신학적 기준에 따라 내적으
로 이미 그 답이 무었인가 알고 있어싸. 예수님이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은 하늘
이 두쪽 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를 알고 계셨다. 내가 그렇다. 너 가야바도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권
능자 의 오른편에 앉는 것을 볼 것이다. 이는 다니엘서 와 이사야서 의 근거한 응답을 하
고 계신다. 다니엘이 본 인자 같은이는 이스라엘 의 대표로 고난을 당한후, 하나님에 의해
자신의 옳다고 인정을 받고 영광의 자리로 높임을 받을 분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의 신
원을 다 떠맡으셨다. 세상 죄에 짓눌려서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하는 이스라엘 의 운명이 그
분에게 다 이양 되었고, 다 완수되었을때에 비로서 하나님은 그 분을 옳다고 인정하실 것
이다. 지금 예수님은 가야바 에게 은연중 말씀하신다. 가야바 야 눈을 열고 보아라. 지금
네가 주관하는 이 하급법정의 심문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진짜 법정은 바로 이 순간 하
늘 에서 열리고 있고, 조금 있으면 나는 옳다고 인정을 받게 될 것이며, 네가 그르다는 것
을 곧 알게 되리라. 그 사실 증거는 자신이 권능자 의 우편에 앉게 되며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보좌 자체를 함께 나누어 앉게 될 것이고, 하나님 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에 이를 것 이로되 , 구름을 동반하여 영광에 이를 것이다. 구름은 구약에서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알리는 상징적 인 신호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가야바 에게 한 응답
은 의미상 제한을 가진 그렇다 였다. 가야바 가 생각한 메시야 와 전혀다른 메시야 인 것
이다. 대제사장 보기에는 자신 마음대로 처결할수 있는 듯 한 불쌍한 메시아 였고, 십자
가 형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 하려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독과 오해와 수치의 죽
음에 복종함으로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군중들은 네가 만일 메시아 이거든, 십
자가 위에서 내려 와 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하지만 메시아 이기에 십자
가 에 머무르셔야 한 것이다. 오직 그 분만이 할수 있는 일을 수행하심 이었다. 유일하고
독특하게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이 세상의 고통과 수치, 죄의 책임을 홀로 감당하고 계셨
다. 만일 당장 십자가 에서 내려 오셨다면,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독특한 소명에 불복종으
로 최후의 승자는 사단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은 속죄받을 길 없이 , 사탄의 지배 속에 황
량하게 내버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만이 할수 있는 일을 위해서 죽어
야 했다. 그 길만이 세상을 속죄할수 있는 생명의 길 이었으므로.. 가야바가 자신의 주장
을 신성 모독으로 몰고갈수 밖에 없는 처지였음을 인지 하였어도 예수님은 진리를 포장없
이 그대로 선언하고 계셨다.

세상을 구속하는 임무를 수행토록 이스라엘 이 부름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없었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그 일을 담당하러 오사 되돌려주기로 작정 하
셨다. 예수님은 유혹과 증오와 저주를 한 몸에 다받으시고, 세상의 쓰디쓴 쓰라림 을 다
맛보셨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그 모든 것을 다 빨아들여서 없애 버리셨다. 세상에 있
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셨다. 바로 이 놀아운 사랑이 우리 안에 내주하
고 계시며, 역사하시는 예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 지향해야 할 행동 양식이 되
었다. 이 소명을 십자가 에서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에게서 받았다. 백부장은 예수님 에
게 부과 한 죄상의 성격을 알면서도 , 경탄 , 경외하는 마음으로 선언 하였다. 진짜 이분
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 이었다. 쉽자가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 과 다를바
없는 사랑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시고, 대중 앞에서
수치의 십자가 에 못밖히셨다. 우리는 성육신을 이해하지 않고 십자가를 이해할수 없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육신 또한 이해할수 없다. 최후의 만찬에서 말이 아닌 행동
으로 자신이 친히 하신 말씀을 극대화 시켜 보여 주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ㅉ기는
내 몸이라 (막 14장 22절) 아무 신념 없이, 아무 연고 없이 고난 당하신 분이 아니라 언제
나 사랑이 풍부하신 하나님 자신 이시다. 우리 심령과 기억, 상상력, 삶에 붙어있는 모든
오염과 두려움, 죄책감, 수치로 부터 우리들을 구원 하시기 위해 사람 의 몸을 입고 친히
오셔서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다. 하나님은 결코 초월해 계시기만 한 분이 아니시다. 자
신의 백성의 유리 방황 함에 깊은 애정으로 관여하시고, 다정 다감하게 사랑하사 반복하
여 구해내신 하나님이시다. 그들 의 고통과 어리석음을 근심 하시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
는 행동을 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 나사렛 예수와 ,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분과 전혀
다를바 없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고통과 황당함의 비극들을 그 십자
가의 엄중하나 놀라울 정도의 사랑스런 빛으로 승화 시키려 시도해 보았다면 십자가 의
진리를 깨닳기 시작 하였다고 말할수 있다. 백부장 의 독백은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자가 에 나타난 거의 믿을수 없는 사랑의 계시에 경외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타낸 반응이다. 이는 십자가 와 우리로 하여금 따를수 있도록 만드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먼저 사랑하신 주권적 사랑이
보조를 맞춰가는 반응이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이다. 십자가 에서 죽기까지 내어주시는 사
랑을 우리는 보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랑은 결코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으로 인식한다.
기독도가 그 십자가 에 이르자 그의 무거운 멍에가 어깨에서 스르르 벗겨지더니, 등에서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덤입구 까지 계속 굴러가더니, 그 안으로 떨어져 굴러가기 시
작했다. 그 다음 부터 그 짐을 보지 못하였다. 그분은 자신이 슬픔을 당함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셔싸. 자신이 죽음 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초래한 죄들
은 이미 다 이루어 졌다. 사망이 더 이상 그 분을 붙들어 둘수 없었다. 우리가 다시 십
자가를 쳐다보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분은 죽은자 가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다.
이 소식과 더불어 한 멧지지가 퍼지기 시작한다. 우리 인간의 압제가가 졌다. 시온아 말
하라, 너의 하나님이 왕 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죄와 고난
을 감당하는 행위를 하셨다. 따라서 죄와 고난은 끝이 나싸.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여명
이 밝아 오고 있다. 이제 그 분은 죄악과 고난에 대한 승리하는 개선가를 부르며 축제를
벌이고 있다. 온 세상이 이 좋은 소식, 복음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 할렐루야.


제2부 사랑의 불꽃
8. 새로운 창조 (요 21장 1-19절)

사도 요한은 말씀 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교회는 그 육신을 말씀 으로 되돌려
놓았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살과 피를 가지고 있는 육 이고 말씀이다. 이 요
한 복음 21장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기함에 관하여, 그 사랑의 신선함에 관하여, 희망 과
새로운 출발에 관하여 강력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는 새 창조에 관한 말씀이다. 옛 습관
으로 온밤을 지새우며, 차가운 고깃배 안에서 피곤에 지친 예수님의 제자들, 삭막함, 피곤
함, 절망에 젖은 이들, 힘은 들였지만 잡은 것 없고, 미명은 밝아오고 있었다. 제자들은
이미 새로운 창조를 맛보았지만 잠시 옛 창조가 남긴 어두운 구석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
다. 평생 직업 삼은 자신에게 그물을 쳐보아라 하는 명에 꼬치 꼬치 따지며 거부하기 에는
지쳐있던 이 들이었다. 헌데 그물을 드리웠더니 자신들 이 온밤을 지새워 잡은 것보다 많
은 고기가 잡혔다. 짤막한 언급, 서둘러 .. 첨벙첨벙... 다른 제자들 은 노를 저어 고기를 끌
고왔다. 예수님이다. 예수님이다. 그 분은 그들 에게 잡은 고기를 몇마리 가져오라 시킨
후 와서 아침 식사 하라고 말했다. 부활 이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창조, 이미 존재해 왔
던 만물의 새로운 질서를 의미한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질서
의 시작, 즉,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 것이다. 부활은 이제 전혀 새로운 눈으로 이 세상
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심을 의미한다. 이제 옛 방식으로 사물을 보던 것을 그치고 , 실
수를 저지르고, 왜 우리는 아무것 도 잡지 못하고 있는지, 걱정하는 것을 그만 두라고 요
구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열어 새로운 생명을 믿고, 우리의 가슴을 열고 새로운
생명을 사랑하고, 우리의 손을 펴서 새로운 생명을 제시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를 받았다.
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기에 이다. 그 분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가 실현되었기에 이
다.
누구 누구하고, 언제, 어디서, 무었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사회적 인 신
원 과 신분 관계를 두루 나타내고 확인 하거나 , 새로운 신분 상승을 도모하기 위한 중요
한 사회적 인 요소들 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에서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파티를 열었
다. 일종의 축하잔치이다. 이는 옛 유대인 의 사상이 그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메시아가
오실 때에는 큰 향연이 있을 것인데, 바로 메시아의 큰 잔치이다.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 그분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서로 하나님 백성으로 다 함께 결속될 것이고, 이스라엘 의
구속 의 때가 드디어 도래 하였다는 사실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이 일을 하시고 다니신 것
이다. 물론 다가올 십자가 때문에 그의 사역 내내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드리워졌지만,
잡히시던 날 밤 모든 식사를 종결 시키는 만찬을 기념 하였다. 유월절 만찬 이로되, 전혀
다른 식사자리, 처형당하시고 사라지시는 해방의 만찬, 비극적 인 종말을 암시하는 승리의
축하 만찬 이었다. 이와 달리 이제 부활 하신후 갈릴리 해변에서 이른 아침의 햇살을 받
으며, 제자들 과 조반울 먹는 그들...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 예수님은 그들을
새로운 축하 잔치에 초대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 하지만 몇 주후 예루살
렘 권세자들 앞에서 서서 담대히 말하는 변화가 있다. 힘있는 자에게 굴복하기 보다 오히
려 하나님게 복종한 베드로, 어떻게 그런일 이? 바로 새로운 창조를 기념하는 새로운 축
하 잔치에 동참 하였기에 이다. 이제 성만찬 에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눠 마신 것은 하
나님의 미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함이요, 우리가 새 창조를 맛볼수 있는 매개수단이 되
었다.

잡은 고기 없어 골(crossness)만 잔뜩나 있던 것이, 이 모든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기념을
하는 , 새창조 의 백성,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백성이 되었다. 신선한 빛이 비추이는 세
상, 신선한 용서 와 새로운 시작 과 새로운 소망이 생동하는 세상..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
났다는 사실을 축하하며, 기념하기를 배워야한다. 식사 후 새로운 창조의 햇살은 중천에
떠오르고, 기념 잔치는 끝났다. 이어서 하신 일은 위임 명령 이다. 예수님은 아직 베드로
라 부르기 보다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고 계신다.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예 , 주
님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네가 나의 어린 양을 먹이기를 원
한다. 나는 네가 새롭게 되기를 원한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태산 과도 같이 남아있기에,
오늘 예수님 과 조반을 함께 한 우리들은 먼저 해변을 따라 오랫동안 걸어다닐 준비를 해
야만 한다. 부활이 우리를 위해 좋은 소식 이라면, 세상을 위해서도 좋은 소식이다. 새로
운 위임이 없이는 축하잔치가 이기적 인 방종으로 전락될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 축하
잔치 없이는 , 그 위임은 우리 자신의 자만심에 영합하고, 다른 이 들에게 우리의 죄책감
이나 두려움을 다만 짊어지우기만 하면서, 캄캄한 바다에서 고기 잡듯, 사회 개량 사업 만
하는 꼴로 전락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지시를 따라 어떻게 양떼를 먹일지 처음
부터 배워가면서, 십자가 의 길을 따라 그 분을 쫓아가야 한다.
그 길은 세상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감당하는 길이며,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그들 을 사랑한다고 말해다오. 그들을 위해 죽었다고 말해다
오. 그들을 위해 살아다오. 새로운 창조가 있다고 말해다오. 새로운 기념 잔치가 있다고
말해다오. 그ㅡ을 만드시고, 그들을 위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해다
오. 그들 이 나를 찾는다면 찾을수 있다고 말해주려므나. 단순히 말로써가 아니라 다시
한번 말씀 이 육신이 되게 하라. 너의 손 바닥에 있는 못자국으로, 근심 고통을 말없이 나
눔으로 말하라. 그들을 위해 삶을 포기하고 말해 주어라. 그들 이 너를 찾음으로서 나를
찾게 될 때까지. 베드로야. 나를 따라 오너라!.

우리의 소명은 그 찬송 , 그 비젼, 그 희망에 아멘 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말씀 과 육신
으로 아멘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성자 하나님 께
서 만족히 여기실 것이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온 세상에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9. 하나님의 소명(창12장1-5, 막 1장 16-20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인간의 반역을 역전 시키는 기나긴 여정에 돌입하셨다. 아
브라함을 부르시고, 한 가문의 기초를 놓는 외롭고 쓸쓸한 임무를 부여 하셨다. 가문을 통
하여 이 세상을 다시 바로 돌려놓는 그일을 작정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출생지는 소위
말하는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 였으며, 전도 유망한 출세의 길, 좋은 가문 출신 이었다. 많
은 가속과 엄청난 재산을 보유 하였다. 사회적 기반이 든든하고 ,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부자였다. 헌데 그에게 창조주는 전혀다른 것을 요구하신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생각도 못한 일을 위해, 즉시 시행 하기보다는 , 지금 지시하는 내용이 무었인지 안간힘을
다해 듣고, 지시하는 내용의 의미를 실감하게 되었으리라. 아브람은 고독한 감상에 젖은
몽상가가 아니요, 빈틈없이 상황을 통찰하고 영리하게 협상을 이끌어 내는 전형적 인 중동
의 장사꾼이다. 아브라함 가족은 겟발을 나부낀 힘찬 행지 보다는, 부름을 받았을 때에 머
뭇 거리며 나왔고, 머뭇 거리며 보냄을 받은 곳으로 떠나갔고, 지시받은 바를 행 하였다.
아브라함 가족은 이제부터 시작하여 이 세상 에서 지혜롭게 듣고 선택하며, 행동 하여야
할 책임을 인류가 면제 받을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택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책임을 감당
할수 있도록 새로운 가족 집단으로 , 책임있는 행동을 수행함 으로 , 다른 이들 도 그러한
일을 행하도록, 더 나아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으로 다시 회복되어 모든 굴레에서 벋
어나도록 부름을 받았다.
마리아 역시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는 꿈과 꿈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신념이 자라나고
있었다. 주책없는 생각 이었을까? 스스로를 책망해 보기도 하며... 허나 소망 과 신념이
자라서 , 천사가 자신 앞에서서 자신이 설레며 품고 있던 꿈을 이야기 할 때, 예 하고 대
답하였다. 하지만 꿈이 실현 되기도 전에 자신의 아들이 보잘 것 없이 누추한 군중과 어울
리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점령군의 손에 의해 실패한 메시아로 , 백성들 을 현혹한 자칭
민족 지도자로 처형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메시아 의 어머니라 일컬음 받음이 일장 춘
몽에 불과 하였음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하는 비운의 어머니 였다. 하나님의 극 적인 소명
이 보여주는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마리아 는 겪을 때로 다 겪어 보았다. 너무 빨
리 임신하여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고, 자신이 생각하던 메시아 와 동떨어진 메시아를 따
라다니느라 자존심 과 기쁨 마저 다 내어놓고, 자신의 아들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이는 마리아를 여장부 여걸로 만드시는 것 아닌 , 세상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담당
함으로써, 세상을 치유하기 위하신 하나님의 뜻 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 하시며, 갈릴리 로 오셔서 처음 하신일 도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소명을 부여하신 것과 비슷하게 소집 명령을 공포 하시는 것이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 내가 네게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
을 이루게 하리라. 곧 너의 사업 과 조상의 직장을 버려두고 와 더불어 가자. 내가 너에
게 해야 할 또 다른 일자리를 주리라. 이 일은 새로운 방법으로 너를 최대한 사용할 것이
며, 네가 이전에 스스로 가지고 있는 줄 상상도 못하였던 잠재력을 너 에게서 이끌어 내리
라. 헌데 이 부르심은 느닷없이 불쑥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순수한 마음 만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 혼합 된 동기였다. 아무튼 이들은 순종하고
따라나섰다. 소박한 철학을 가지고, .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실 때에, 와서 불태우라고
분부하신다. 새로운 열정으로 불타는 사람들 이 되기를 원하신다. 잡동사니가 제련될 때
까지, 다른 방향으로 따라 갈려고 하는 모든 욕망과 열심을 깨끝이 다 소멸 할 때 까지
자신을 불태우도록 분주 하신다. 결정적 인 시기가 도래하여 이리 저리 흩어지고 도망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성령의 능력과 불로 , 온 세상에 치유와 화해와 생명과
사랑을 가져감으로서 원래 아브라함 에게 한 약속을 성취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부르
심은 안으로 부터 일하고 , 밑바닥 에서 부터 일하기에 충분하리 만큼 겸손해지는 것을 의
미한다. 세상 자체 그 내부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밑 바닥에 살고 있는 사람들 과 더불어
살아가기에 족하리만큼 겸손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부르신다. 낮아진 모습으로 세상 속에
서 살아가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 와 화해, 그리고 생명 과 사랑을 전하는 곳이 , 바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최선을 다하여 그 음성에 순종 하려
고 고군 분투하는 장소이다. 궁핍한 자들의 외침이 있는 장소, 육체적, 감정적, 지적, 영적
필요가 있다고 외치는 곳 어디든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이 있는 장소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장소이다. 고통받는자 안에서 신음하며 탄식하는 성령의 음성이요, 그
분의 치유하는 손길 , 그 분의 눈물, 그 분이 웃을수 있도록 하는 자가 되라는 음성이다.
우리 자신이 있는 모습 그대로 그 부름에 응해야 한다. 어떤 가식도 치장도 필요가 없다.
우리의 할 일은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창조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균형을 유지하면 , 첫 번 제자를 부르신 이후 계속하여 부르신 예수님을 따
르라는 누군가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상상하는 것 과는 다른 곳
에 가서 마음을 다하여 치유하는 일을 하라고 부르시는 음성, 삶의 전반의 문제 투성이 장
소에 들어가 헌신할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분 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 모든 관계에서 지혜롭게 온유하게 처신하며, 그
분이 지으신 세계와 그 분의 자녀들 과 그 분이 피로 값완전하다. 곧 창조주 의 선한 목
적 이라는 맥락 가운데 현재 피조 세계의 진통과 일시성이 설정된다. 피조 세계는 하나님
의 자녀들 이 나타남을 학수고대 한다. 이는 인류가 피조 세계의 청직이 로 역할을 감당
하도록 만들어졌기에 이다. 왜 인간 구원 이유가 세상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것 뿐 아니
라, 인간 구원을 통해 세상 자체가 고침을 받게 되는지 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인류 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 가운데 반드시 차지하고 있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 , 세
상에 대한 현명하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책임을 감당할 때에야, 하나님의 피조질서는 하나
님의 구원 목적을 따라 회복될 것이다. 지금 피조 세계는 종노릇 하고 있으며, 이 세상
을 해방 시키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 의 영광이다. 이 영광 스러운 자유는 교회가
소유하게될 영광을 피조 세계도 동일하게 나누게 된다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영광은 첫 아담이 타락할 때 잃어버린 바로 그 영광이다. 즉 피조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
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는 연쇄적인 출애굽이 있다. 이스라엘 이 애굽에서 구출되어
나왔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나와서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갔고, 교회가 로마서 6장에서 세
례를 통하여 거듭났고, 이제 놀랍게되 온 우주 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세상은 허무한
애굽에서 종노릇 하여 왔다. (20절) 이 허무란 부패와 타락, 죽음을 함축적 으로 의미한
다. 하나님이 그의 피조 세계를 이런 이상한 상태에 내어버려 두셨다. 화가 나서 버려두
심이 아닌 , 인류가 반역함으로 이다. 모세가 도착 하였을때에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
녀들 과 같이, 예수님이 등장 하셨을 때 의 아담의 후손과 같이 우주 자체는 어느날 현명
한 통치에 응답하는 감격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통치가 하나님이 구속 하셨던 인류, 지
금도 구속하고 계신 인류 의 영광이다.
8장 19-22절 의 절정으로서 바울은 창세기3장 의 중대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더 이상 이브는 없다. 이제는 전체 피조물 이다. 마치 하나님이 남자가 되시고, 피조물
은 여자가 되어서 ,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 바울은 세상을 단지
선하다거나 악 하다고 너무 단순하게 분석하지 않고 그 배후의 핵심을 통찰한다. 이 세상
의 고통을 새 시대를 탄생 시키기 위해서 해산의 고통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유대 묵시 사
상의 중요한 개념을 빌려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예수 안에서 한편으로 성취 되었고, 또
한편으로 교회의 시대를 특징짓는 고난 속에서 성취되어 졌다. 교회 자체는 전적으로 이
세상안에 연루되어 있으며, 전체 세계를 특징짓는 영광과 수치, 위엄 과 비극을 자체 내에
서 구체적 으로 경험 하고 있다. 고통(22절), 고대(23절 ) , 지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
되 , 미래의 우리 자신의 그림자 와 같은 모습의 우리 자신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 아직
성취되지 않았고, 보지도 못한, 양자됨 과 우리 몸 의 구속이 속히 이뤄지기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이 양자됨은 우리 의 인간성에 대한 재 확증을 하는 양자됨이다.

우리의 현재 실존으로 인하여 표현될수 없을 정도로 열망하며 사모하고 갈망하고 있으나,
아직은 성취되지 않은 소망에 최종적 으로 완벽하게 응답하시는 것이다. 교회의 현재 임
무는 그리스도 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고난도 감당하며, 동참하는
것으로 동일한 일을 두가지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적 으로 다루어지며 치유되는 장소이다. 피조계의 신음에는 교회의 신
음이 그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 성령의 첫 열매를 , 미리 받을 것에 대한 첫 번의 불입금
으로서 의 성령을 받은 우리 자신들 도 속으로 깊이 신음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신음
과, 고통 에 함께 동참하는 것은 성령때문 이다. 바울은 롬 8장26절 에서 말한다. 피조
계가 신음하는 그 속에서 , 교회가 신음하는 그 속에서, 하나님 도 역시 신음하며 고통을
겪고 계신다. 무었보다 특별하게, 우리가 세상에 주목하고 , 세상이 동경하며 사모하는 정
의와 평화, 즉 샬롬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 께서 그 분의 영으로서 피조 세
계의 신음 과 고통, 교회의 신음 과 고통에 동참하고 계시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 기도하신다. 성도 의 찬양 뿐 아니
라 , 피조 세계의 진통을 모두 합하여 하나님 앞에 상달되고 있다.
8장17절 에서 세상 과 교회가 온통 암흑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 왜 버리셨냐 물을 때 성
자 하나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계신,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원망이 역설적 으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증거가 되는 순간이다.
8장27절 에서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으로 언급된 창조주는 알고 계시며, 듣고 계신다. 성
령은 하나님과 일치하여, 똑같이 가지고 계시는 넘치는 사랑에 목적이 서로 공감을 이루면
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 하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온전하고 충만하심 으로 충만하게
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고 하였다. (엡3장19절) 세상도 역시 하나님의 충만하심 으로 인
해 충만해 있으며, 넘쳐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은 하나 의 그릇 이다. 자체가 아
름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질수 있기에 아름답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정의와 평화, 아름다움 과 진리를 위하여 일할때에
소망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이유가 된다. 아픔을 함께 나눌 때 , 우리는 세상의 아픔에 공
감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픔 에 공감하고 있다는 믿음을 깨닳게 된다. 이순간 우리는
하나님 과 세상을 함께 연합시키는 수단이자 처소가 되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찰 때 까지 , 가득차서 넘치게 될 새로운 세상을 해산하는
그 신음 소리를 외쳐야 한다. 이러한 도구가 되는 길은 심각한 기도를 통해서 만 가능하
다. 이 기도는 성령에 의해서 생겨나고, 성 만찬을 통해서 그 모습이 재현되며, 신학, 정
치학, 사회 사업, 예술, 의학등 모든 분야 에서 치유가 이루어 지는 곳에 넘쳐 흘러가는 기
도이다. 이렇게 기도와 사역이 조화를 이루며, 장단을 맞춰가는 과정 속에서 , 우리가 삼
위일체 하나님의 삶과 사랑을 쫓아 갈수 있으며, 현재에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 이다.

11.성만찬 과 그리스도 의 현존(누가복음 19장 41-46절)


이는 하나님의 불시 방문을 알지 못함에 대한 기소장 성격을 가진다, 자신들 이 당면한 관
심사, 민족적 안전, 민족적 순수성에 관한 문제에 매달려 정작 하나님 이 자신의 약속들을
성취하러 오셨을 때에 그들은 엉뚱한 방법에 골몰하고 있었다. 결과, 자신들의 운명이 어찌
결정되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현존 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있으
심 의 주제는 성전을 떠올리게 한다.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달리 우월히 여겨졌던 것은 창
조주 가 그들 의 하나님이시고, 그들 중에 거하신다 는 믿음 이다. 비록 유형 의 형상이
성전에 없으나 , 살아숨쉬는 형상 곧 사람, 그것도 이스라엘 이라는 자신이 하나님의 세상
에서, 하나님을 반영하며, 하나님의 현존이 되는 참된 형상으로 부름을 입었고, 예수님은
그 소망 과 그 운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스라엘 의 하나님은 세상의 조물주 시
요, 자기 백성 과 더불어, 가운데 살고 계시는 분이시다. 성전이 이 모든 것에 관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인간을 만나서 그들을 용서 하시고, 자기
백성의 일원으로 회복 시켜 주시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 성전을 예수님 께서 강도
떼의 소굴이 되었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방문 하심은 심판을 행하시는 비밀
스러운 방문이다. 예수님 의 기사와 표적 또, 식탁 교제등은 이스라엘 안에서 성전이 대
표하고 있는 것이 심오한 차원에서 성취되었다는 신호 이다. 하나님은 긍극적 으로 자신의
참 형상 되시는 당신 자신의 아들 안에서 사람 존재로서, 사람 존재 안에서 거 하신다. 예
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과 더불어 현존 하시는 양식이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현존 하심이 이후 교회 와 성례를 통하여 계속 이어지고 전승되
어 왔다. 이는 본질적 으로 시공간 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의 성령으로
모든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존재 하실수 있으시나, 시 공간에 매인 우리 는 시공
간 밖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이 접촉 하실수 있는 시간의 창조이다.
주 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 과 순전히 영적인 방법으로 관계 하시며, 떡 과 포도
주는 본질적 으로 비 물질적 인 사실에 대한 상징 또는 상기 시켜주는 신호이다.
루터는 성체 공존을, 쯔윙글리는 속이 텅빈 표시로, 칼빈은 하나님의 성령의 행위로 말미암
아 하나님과 그리스도 가 계시는 하늘 의 식탁 자체에 참석하는 예배자 의 현존이다 는
영적 기념을 주장했다. 만찬을 기념함은 십자가 에 처형당한 예수님이 주 이시라고 선포
하는 것이다. 분잔 과 분병은 세상에 그리스도 선포 되어진다 함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진흙을 취하시고, 친히 덧입으시고, 성육신 하심으로 친히 인간이 되셨다. 자기 백성 가운
데 신분을 감추시고, 암행 하시며, 심판 과 자비를 행하시며, 거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
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진흙으로 취하시고 덧입으시고, 인간이 되셨다.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다시 회복 되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 신분을 감추신 하나님의 손
길이 미치는 곳마다 새 생명이 약동 하였다. 예수님 의 생애 와 사역 안에서, 물이 ㅂ를
덮음 같이 온 땅에 가득차게 될 빛나는 영광의 광채를 미리 맛보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
님의 영광으로 충만 하셨고, 그 영광은 십자가 위에서 최 절정을 이루며 계시 되었다. 그
영광은 사랑 의 영광 이기 때문이다. 떡 과 포도주 가 하나님의 위엄으로 다시 새롭게
충만하게 채워지고, 그의 목적들을 짊어지고, 사람들을 위한 진짜 양식이 됨으로 할수 있
다. 이 양식은 심판 하시고, 치유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현존 이기에 , 그 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 분의 살미 나의 삶이 되고, 그리스도 자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
신분을 감추고 익명으로 활동 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성만찬 의 온전한 행위 안에서, 그
리스도는 떡 과 포도주로 우리를 만나신다. 과거의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미래가 속하여 있
는 표상으로 서 우리를 만나신다. 하나님은 심판과 자비로 자기 백성 과 함께 계시며, 떼
어진 떡 과 부어진 포도주 안에 현존 하신다. 이일을 수행할 때 비로서 하나님 영광의 전
달 수단이 될 것이다. 성자의 인격과 성령의 능력으로 성부 하나님께 경배하는 우리 자신
을 지킴으로서, 세상 은 떡 과 포도주 의 상징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시간에 영원히 누
리게 될 모습을 잠시 잠깐 이라도 누리게 된다. 참 그리스도 의 참된 전달도구의 상징이
다. 성찬을 통해 삼위일신 주께서는 계속해서 활동 하시며, 영원과 시간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 이다. 성만찬 에는 새로운 신적 방문이 있고, 이 신적 방문 이 이뤄질 때 알아 차
려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성령으로 인한 하나님의 현존 이 있다. 이는 십자가 에 못 밖
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 의 현존 이다. 그 분이 하나님의 사랑 과 은혜
가 사랑 과 감사 가운데 만나지는 장소인 새로운 성전인 자기 백성 가운데 현존 하신다.
분열을 심판 하시고, 서로 사랑 하라고 우리에게 요청 하시는 분 의 현존 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 생생한 현존 이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시는 현존이다.




12. 기독교 사회의 이상 과 비젼( 계 21장 1-5절)

기독교 사회의 이상은 항상 이상적 일수 밖에 없다. 일시적 인 효력 만을 지닌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늘 의 시민권은 현재 땅 위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민 권의 모형지자 전형이다. 우리가 이상을 추구해도, 아래로 부터의 사회악과 사
회적 병폐들을 쉬지않고 치유 하기를 계속하여야 함이 우리 이상의 특성이다. 교회는 십
자가를 부여잡고 있다.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는 예수님 의 십자가 이며, 자신의
십자가이다. 우리는 기회 보다는 소명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공동체들 속에서 하나 의
그리스도 인 사회가 된다는 것이 무었을 의미하는가 탐색하고 발견하는 기회 또는 소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그 자신을 숨길수 있는 은신처 에 도피하거나 파당을 지어
자신들 만의 울타리에 치고 들어 앉아있는 꼴로 있다. 삶의 무게에 짖눌려서 학생이나 교
수나... 필요들에 얽매여 전전긍긍 하고 있다. 우리는 똑같은 불안정한 현실의 피해자가 되
어 은신처로 도피해 버린 교회를 시시 때때로 보고 느끼며, 그런 분위기 가 감돌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동체 안에 하나 의 기독교 사회를 가꾸어 가기 위
하여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하고, 또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비젼은 무었일까? 이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인 제자도를 확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도 에 적합하고 자
연스럽게 표현하는 상처입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는 상처입은 의사 자신이 친히 고
쳐 주며 싸매주는 공동체가 되어서 , 이웃에게 그 치유함을 건네줄수 있는 공동체이다.
예루살렘이 영화롭게 될 때에 , 민족들 이 그 성을 볼 것이요, 하나님이 거기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의 사회의 이상은 하나 의 비젼이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주변 사회의 유익 과 변혁을 위하여 받은 바 상처와 그 치유 안에서 그리고 통하여 하나
님의 사랑이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 의 비젼이자, 한 교회의 비젼이며, 하
나님의 상처입은 사랑 의 불로써 정화되고 변혁되어 지는 세상에 대한 비젼이다. 우리가
모든 탐험을 다 마칠 즈음이면, 출발 하였던 곳에 이를 것이요, 맨 먼저 그 곳을 앍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 하나님은 자신의 인간 피조물들이 보다 온전히 자신들
의 본분을 다함으로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 이러한 신비 가운데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미리 바라 볼수 있다.




13. 이 세상이 치유되기 원하옵나이다. ( 시 22편 1-8절, 22-24절 )

교회의 소명은 이 세상을 섬기고 치유하기 위함이고, 십자가 위에서 거두신 승리가 효력을
발휘 하도록 하기 위함 이다. 1 세기 당시 주변 강대국 의 정치적 노리개 이던 유대, 예
수님 이 주후 30년 경에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에 당시대 의
사람 들 눈에는 청년 유대 반군 지도자 정도로 치부 되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 의 십자가
와 예수님 의 십자가 가 왜 차이가 나는가 ? 메시아 운동은 당시 주전 50년 에서 150년
사이에 15가지 운동의 하나요, 대중적 기대와 고조되던 분위기에 따라 편승하여 일어난 민
족주의적 운동 이었다. 하지만 자칭 메시아 중의 어느 누구도 자신들 의 대의가 자신들 의
죽음을 통하여 결실을 맺을 것이라 는 생각을 가진자 는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
스스로 믿기를 자신이 죽되, 이스라엘 의 죽음을 대표적 인 대신 으로 죽기 위해 부름 받
았음으로 , 이스라엘이 그러한 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세상의 죽음을 죽기 위
하여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 세상이 그러한 죽임을 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는 시편의 묵상을 통해 예수님 자신을 의미함 으로 간주하였다고 할 만한 이유를 본다. 여
기 저기 골라서 자신에게 적용한 경우가 아니라 예언은 단지 징조요, 예수님 은 온전한 계
획에 순종하였음을 본다. 역사 안에서 소름 끼치도록 싫고 쓰라린 사건 십자가, 예수님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심은 모든 세대의 소망 과 경외감을 다함께 끌어 모아서 해결하심이
요, 고통 과 눈물이 단지 베들레헴 작은 고을뿐 아니라, 갈보리 언덕 위에서 만족하게 해
결 되었다. 우리가 십자가 의 진가를 알고자 하면 예루살렘 영문 으로 나와서, 십자가 앞
에서 무릎을 꿇고 않아서 두 자루 의 나무와 네 개의 강한 못으로 하나님 을 매달아 놓
았던 그 십자가 에 시간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명백히
말씀 하셨고, 행동 옳김은 3일 후에 옳다 인정을 받으셨다. 처형 후 좌절되어 뿔뿔히 흩
어졌던 제자들, 그들이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나 ,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보았음을 선포한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을 극복케 하시고, 사망 이 더 이상 권세를 주장 치 못하는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세상에 가져 오도록 만드셨다고 주장 하셨다. 부활 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예수님 의 주장이 정당하였음을 하나님이 친히 입증 하시는 것으로 보였다. 그 예수
님 이 부르신다. 십자가 에 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그 강력한 사랑 으로 가가이 지내고
있는 이웃이든, 거리를 둔 이웃이든 상관없이 , 우리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서 , 이 세상을
향한 사명을 감당 하도록 부르신다. 우리는 십자가 에 처형당한 예수를 우리의 주로 선포
하는 부름을 받았다. 예수님의 나라를 선포함 으로 , 이 세상의 고통을 우리 자신이 ㅈ어
지고, 예수 자신 에게만 충성을 다하여 봉사하는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
러면 이 세상은 치유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적 인 주
권적 인 사랑을 가져야 만 , 이 세상을 짊어지고 갈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수 있다.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 16장
33절, 요일 4장4절, 5장 4-5절)

* 서평
할렐루야.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도 의심 슬픔, 고통, 죽음이 닥쳐오는 순간에도 당신의 현존하심 과 승리를 알수 있겠
나이다. 우리의 이해를 능가하는 당신의 사랑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능력을 즐거워 하는 용
서받은 당신의 아들 딸들 로서 살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가득 채우사, 사랑 과 평화로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옵소서. 당신의 포근한 품에 안아 주사, 한 목자 안에서
인도 받는 한 무리의 양떼임을 기뻐 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만 누릴수 있는 참 자유를
얻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다시 새롭게 열어 주옵소서. 사랑을 보고 우리가 응답할수 있
겠나이다. 인도하는 곳 어디이든 소명을 기꺼이 받을수 있도록, 다시 살아나시고 치유하는
능력이 당신께 있음을 믿는 믿음 주소서. 응답할수 있는 준비된 마음을 주소서. 당신 자
신의 소망 과 고난에 공감할수 있겠나이다. 현존을 알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