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서영일의 박윤선과 풍유적 성경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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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서영일의 박윤선과 풍유적 성경해석


알레고리적인 해석

박윤선이 교회를 위하여 성경을 교훈적이고 실천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알레고리(풍유)적 해석을 자주하게 된 것 같다. 한 신약 교수의 말처럼,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성경의 진리를 삶에 적용시키려 하는 모든 신자들이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241) 박윤선은 부당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피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였지만 많은 경우에 한국 신자들이 “영해(靈解)라고 부르는 것의 유혹에 넘어갔다. 이러한 이중적인 그의 모습이 요 21 : 11의 해석에 드러난다.”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짖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우선 고래(古來)의 알레고리를 부정한다.

여기 이른바 153이란 숫자는, 학자들의 영적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데, 100은 이방인들, 50은 유대인들, 3은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한다(Cyril of Alexandria). 그러나 153은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242)

그러나 그는 곧이어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도 일종의 이적이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보호하심을 상징한다(Godet)"고 덧붙였다. 243) 그러나 그물 안의 고기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이 교회를 보호하심이 될 수 있겠는가? 바로 앞 절(21 : 4)에 대한 해석도 헹스텐버그를 인용하면서,

···날이 새어 갈 때”란 말은 구원운동의 서광을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바다 가에 서신 것”은, 그가 부활하셨으므로 이제는 세상에 계시지 않고 세상 건너편에 계심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바다”는 세상을 상징한다. 244)

바다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진 것에 대하여도 박윤선은 헹스텐버그를 인용하면서 영적으로 해석한다. 오른쪽은 이방을 상징하여, 제자들이 이방 땅으로 간다면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올 것을 말한다고 한다. 245)
이 같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가지고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예수님의 능력에 의하여 죄인이 성자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요 2 : 10의 “가장 좋은 포도주”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될 구원의 즐거움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246)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고대 교부들이 한 것처럼 알레고리로 해석하지는 않았으나, 기름과 포도주가 “상한 심령에 대한 유일한 치료약”인 복음을 “비유로” 가리킨다고 하였다. 247) 잃은 은전의 비유에서, 은전을 잃은 여인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확신하였다. “여기서 여자는 교회를 상징한다. 이 해석이 당연한 이유는 그 아래 ‘등불을 켜고’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등과 같다. 교회는 등불 같은 복음 진리를 믿음과 행함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다(마 5 : 16).” 248) 박윤선은 여인이 등불을 켠 것은 근동 지방의 집에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많은 주석가들의 해석을 채택하지 않았다. 249)
구약에서도 “영해”는 계속된다. 레위기의 음식 규례에 대한 해석에서 이렇게 쓴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표준을 여러 가지로 靈解한다. 굽이 갈라진 것은 성별을 비유하고, 새김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비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영해는 성경적 두시받침이 없으니 추측에 불과하다. 250)

한편으로는 이렇게 영해를 반대하면서도 영해와 거의 다름없는 결론을 내린다. “위의 두 가지 특징[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을 가진 짐승들은 육식동물이 아니므로 사납지 않고 정결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온유의 덕과 성결의 덕을 숭상하는 하나님 백성은 이런 것들을 먹을만하다. 251) 물에 있는 짐승들에 관하여도 이렇게 영해를 반대한다.

어떤 학자들은 “지느러미와 비늘”을 각각 영해하여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재미있게 말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이 성경적 보장이 없는 한, 우리는 안심하고 그것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고기는 그것들이 없는 고기보다 정결한 것으로 믿는다. 성경의 이 부분 말씀은 이런 자연물들 가운데서도 깨끗한 것을 취하여 하나님 백성에게 성결의 도를 가르친 것뿐이다. 252)

그러나 위의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그러면 “비늘 없는” 고기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보통으로는 뱀처럼 생긴 것으로서 죄악을 상징한다. 253)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물고기들 중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들(9절)은 주로 물에 뜨며, 또 물 밖에까지 뛰어 오를 때도 있다. 이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위에 소망을 두는 飛躍하는 생활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늘이 없고 지느러미도 없는 고기들은 주로 진탕 속에 구멍을 뚫고 거기서 살거나 혹은 물 밑에서 기어다니며 살고 있고, 그것들의 생활 습관 특징은 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창 3 : 14). 그것들은 땅에 속하여 땅의 것을 좋아하는 불택자들을 상징한다. 254)

민수기 17 : 8의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해석하면서, “살구나무[원래는 아몬드나무]란 뜻은 깨어 있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은 죽은 것이 아니고 깨어 있어서 때가 이르매 마침내 성취를 본다”고 하였다. 255) 민수기 28 : 5~7의 소제(素祭)에 대한 해석에서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간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노력과 순종을 비유하고, ‘기름’은 성령을 비유하고, ‘독주’는 그의 기쁜 순종을 비유한다.” 256) 또한 새 소제를 드릴 때에 떡 두 덩이를 드리는 것이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였는데, 첫째로 떡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고운 가루로 드려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둘”이라는 숫자가 증인의 숫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257)
박윤선은 삼손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사건들 속에서도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찾는다. 사사기 15 : 4, 5에 여우의 꼬리를 묶고 횃불을 붙여 블레셋의 발을 태운 사건을 다루면서, 삼손이 혼자서 밭을 태울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한 데는 “수수께끼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우”로 번역된 그 짐승은 땅굴 속에 거하면서 썩은 것을 그 식물로 취한다. 그것은 부패한 성질의 소유자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꼬리에 횃불이 매달린 것은 부패한 자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 심히 부패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강퍅한 그대로 고집하다가 그 진노 가운데서 멸망한다. 그 짐승들의 꼬리를 맺어 놓고 거기에 횃불을 붙였으니, 그 짐승들이 발광하며 날뛰는 바람에 곡식 밭은 전부 파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회개할 소망이 없는 블레셋의 망동과 그 멸망을 비유하기도 한다.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이 취한 자 같이 발광하다가 망한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많이 예언하였다. 258)

박윤선이 이렇듯이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자주 호소하는 약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만,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몇몇 잘못된 해석 때문에 그의 신학적 체제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를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 스펄젼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박윤선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위대한 찰스 스펄젼은 때로 설교 본문을 의문스럽게 해석하고 있으나,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성경적인 메시지가 왜곡되지는 않았다. 259)

“···성경의 위대한 가르침은 몇몇 특정한 구절들의 해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60)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난해한 구절들에 접근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 한다면, 261) 박윤선은 분명 이러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당연시하던 당시(1957년)의 한국교회에(오늘날에도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알레고리의 위험성을 제기하고 경고한 사람이 바로 박윤선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62) 그는 이렇게 썼다.

(5)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중심의 것이니 만큼 해석자는 그 본문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어떻게 관계된 것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諷諭濫用을 피하여야 한다. 갈 4장에서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풍유로 해석한 일이 있으나 그것을 靈感된 풍유적 해석이니 만큼 특수 취급되야한다. 해석자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원칙상 풍유로 간주하여서는 안 된다. 해석가는 깊은 뜻을 찾아보려고 풍유해석을 방법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犯過하는 것이다. 해석자가 그 현재에서 깨닫지 못하는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그냥 모를 것을 둠이 합당하다. 그것은 그 개인에게만 준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교회에 준 까닭이다. 그 자신이 그 때에 찾지 못하는 깊은 뜻을 후대의 교회가 찾게도 될 것이다. 263)

때때로 그도 다른 목사들처럼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오류에 빠질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그 해악과 위험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알레고리화하려는 성향 때문에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이 되지 못하고 도덕주의적인 것이 되고 때로는 예화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레미야 18 : 13~16을 본문으로 한 다음의 설교 요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레바논 산은 유대 북방에서 해발 1만 피트나 되는 높은 산인데 항상 눈으로 덮여 있다. “레바논”이란 말은 희다는 듯이다. 하나님께서는 거기 눈이 늘 덮여 있는 사실로써 유대인들을 가르치셨는데, 눈이 레바논 반석을 떠나지 않는다 함은 충성을 비유한다. 레바논산에 쌓인 눈이 흘러 내려서 먼 곳에까지 찬물을 공급하므로 사람들을 시원케 한다. 충성은 남들은 시원케 해 주는 법이다. 잠 25:13에 말하기를,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와 같아서 능히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고 하였다. 충성은 이렇게 귀하다. 충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명을 떠나지 않음이다.
1. 로마의 폼페이(Pompeii) 성은 갑자기 베수비우스 화산이 터지는 바람에 불구덩이에 파 묻혔다. 그것이 1000년 후에 발굴되었는데, 군대의 파수병이 그 초소를 떠나지 않고 무기를 들고 서서 죽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엇다. 그것이 충성이다.
2.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깊이 들어가 30년 동안 복음 전파에 충성하였는데, 마지막 2년 동안은 실종되었었다. 후에 발견된 대로 그는 꿇어앉아 기도하다 죽은 것이었다. 그것이 충성이다.
3. 다른 예화. 264)


241) Moises Silva, Has the Church Misread the Bible?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in the Lifht of Current Issues, Grand Rapids : Zondervan, 1987, p. 64
242) 박윤선, [요한복음 주석], 서울 : 영음사, 1984, p. 605.
243) 위와 같음.
244) 위의 책, p. 603.
245) 위의 책, p. 604.
246) 위의 책, p. 103.
247) 박윤선, [공관복음 주석], 서울 : 영음사, 1985, p. 511.
248) 위의 책, p. 609.
249) I. H. Marshall, Luke : The New Bible Commentary, Revised, D. Guthrie ed., London : Inter-Varsity Press, 1970, p. 912 ; Lewis Foster, Luke : NIV Study Bible, Kenneth Barker ed., Grand Rapids : Zondervan, 1985, p. 1569.
250) 박윤선, [레위기·민수기·신명기 주석], 서울 : 영음사, 1985, p.441.
251) 위의 책, p. 442
252) 위의 책, p. 442
253) 위의책, p. 90. 그러나 사실상 뱀은 비늘이 있다.
254) 위의 책, pp. 91~92.
255) 위의 책, p. 249.
256) 위의 책, p. 306.
257) 위의 책, p. 310.
258) 박윤선, [여호수아·사사기·룻기 주석], 서울 : 영음사, 1976, p. 295.
259) Moises Silva, Has the Church Misread the Bible?, p. 93.
260) 위의 책, p. 92.
261) 위와 같음.
262)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서울 : 총신대출판부, 1986, p. 125f.
263) 박윤선, “성경해석 방법론,” <파수군> 62, 1957년 4-5월호, p.9.
264) 박윤선, “레바논의 눈을 본받자.” [영생의 원천]. 서울 : 영음사, 1968, p. 48.















>> yilee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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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Ph.D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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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의 생애와 신학"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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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윤선에 대한 연구 논문의 우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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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Ph.D 박사학위를 받은 서영일목사님의 박사학위 논문인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박윤선목사님의 "생애와 신학"이라고 볼 수 있었고, 박사학위 논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그 내용과 자료들이 충실했기 때문에 참고할 수 있는 좋은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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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박윤선이 백영희에게 소개했던 세계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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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박윤선목사님은 조직신학계를 대표하는 박형룡목사님과 함께 백영희 신앙노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백영희 시대 이전의 세계 기독교 신학 전반을 요약 소개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분입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교계는 이분들이 한국교회를 건전하게 보수하고 지켜낼 수 있도록 보수 신학으로 무장시켰다는 평을 하지만, 백영희 신앙노선에서 본다면 이분들로 인하여 백영희라는 인물은 5백여년 정체되었던 세계 신학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세계 신학의 문제점과 세계 교회의 흐름을 체감하기 위해 허비할 수많은 세월을 아낄 수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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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박윤선으로 인하여 세계 신학과 의사소통을 하게 된 백영희신앙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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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영희라는 인물은 박윤선목사님을 통해 특별하게 아낄 수 있었던 세월을 다시 잘게 나누어 시간 단위로, 분 단위로, 마침내 순간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초 단위로까지 나누어 오늘의 세계 신학이 있게 한 성령과 직접 동행하게 됩니다. 서적을 통해 학을 쌓아가는 신학자들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성령의 현장 학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붙들려 세상 속에서 참된 신앙생활을 해 보는 사람에게만 닥칠 수 있는 수많은 환란과 박해들이 있고 그런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에게 현장에서 바로 바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걸음을 통해 백영희는 세계 신학의 한국내 지부 강의실의 시간 강사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초월하여 세계 신학을 있게 한 성령을 통해 성경을 바로 배울 수가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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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걸음의 단점은, 인간이 공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 단어나 표현법을 익힐 수는 없기 때문에 교계적으로 그 신앙 세계가 전달되는 데에는 불리하며 따라서 시대마다 출중했던 의인이나 성자들이 그 신묘한 이력만 약간 남기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교훈과 신앙노선은 남겨지지 않은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박윤선목사님과 같은 분과 고려신학교에서 직접 접촉하게 되면서 그가 요약 소개하는 세계 신학을 단시간 내에 볼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백영희신앙노선은 혼자만이 가진 경건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세계 신학이 걸어갈 오늘과 이후를 떠맡고 교계로 나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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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며 정통 신학의 장점이 무엇이며 고장난 부분이 무엇이며, 세계 신학이 어디에서 언제쯤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의 인도를 놓쳐버리고 현재 길을 잃고 헤매는지를 소상하게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 신학이 가야할 길과 보충해서 알아야 할 점들을 낱낱이 밝혀 나가되 박윤선목사님을 통해 교계가 일반적으로 알아듣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수단을 가지게 됩니다. 즉, 백목사님의 신앙걸음이 박윤선목사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성령의 사람으로 홀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의사가 소통될 수 있는 신학적 단어와 표현이 거의 없었으나 이제는 그런 의사 전달이 가능한 언어 수단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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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백영희신앙노선을 덕유산에 감추어두고 기르고 준비하였다가 때가 되매 박윤선으로 하여금 세계 신학을 요약 소개받도록 하고 이후는 세계 신학의 선생으로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을 시켰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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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소개 뿐 아니라 세계 신학의 대변자로 백영희와 맞섰던 박윤선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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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목사님은 세계신학과 닿을 수 없는 덕유산 속에서 홀로 성령에 붙들려 살던 백영희로 하여금 세계 신학계 속에서의 백영희신앙노선이 되도록 소개한 역할도 수행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영희신앙노선 정립에 필요한 상대역을 맡고 나서게 됩니다. 박윤선목사님은 그 자신이 스스로 밝히고 또 모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세계 정통 보수신학의 국내 대표부입니다. 그에게 세계 신학을 소개받던 백영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는 전폭 배우는 입장이었으나 그 신학이 오늘 교회를 그대로 맡아야 하고 그 신학으로 오늘도 걸어가야 한다고 강의하는 박윤선목사님에게 대하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이의와 토론을 제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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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목회자로 걸어왔고 1952년이 되어서야 막 부산 서부교회를 맡은 전도사였지만 세계 신학의 문제점 개선점 보충점 새로 나가야 할 길에 대하여, 박윤선목사님은 그 토론 상대방이 되었습니다. 대구 동성로교회 사건을 두고는 표면적으로는 한 교회의 주도권 문제였으나 그 내부적으로는 박윤선목사님과 백영희목사님이 서로 다른 신앙노선을 주장하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갈래길에 섰던 마지막 사건이었습니다. 동성로교회에서 백영희신앙노선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패배하게 되는 박윤선목사님은 이후 20여년 백영희신앙노선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에 보이지 않는 배경과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박윤선목사님이 사망하게 되는 1988년을 앞두고 박목사님은 백목사님을 수시로 찾게 됩니다. 자세한 대화 내용은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세계 정통 보수신학에서 오해했던 모든 것을 철회하고 백영희신앙노선에 대한 깊은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백목사님도 세계신학의 흐름과 현황을 단시일 내에 파악할 수 있게 한 박윤선목사님을 세계의 정통보수 신학을 소개한 스승으로, 또 오늘의 백영희신앙노선을 정립하는데 하나님께서 꼭 필요하여 세운 분으로 감사의 말씀을 직접 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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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옆에 동석했던 분의 오해는 대단하였습니다. 보수 신앙 안으로 들어와서 말한다면 박윤선목사님과 백영희목사님의 신학과 신앙이란 극대 극이었는데, 어떻게 백목사님이 박목사님을 스승으로 또 오늘의 신앙을 있도록 한 은인으로 직접 표현하고 감사할 수가 있는가? 심지어 백목사님의 표현은 외식이라고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설명한 여러 내용에서 이런 표현은 사실이며, 오히려 이런 표현은 두 분이 각자 1988년과 1989년 이 땅에서 그 사역을 종료하는 마지막 순간에 한 분은 참된 양심과 실력으로 이 전 시대를 대표했다고 평가할 수 있고 또 한분은 이전 선배의 수고와 바탕으로 시작하여 그 이후 시대를 맡고 나서는 사람으로 그 신앙의 역사적 의의를 표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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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박윤선이 걸었던 1900년대 초반부의 여러 시대 상황에서 볼 수 있는 백목사님의 초기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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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목사님에게 대한 전기적 연구이기 때문에 논문에서는 1910년대 전반적인 사회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외 박사 학위논문이기 때문에 자료의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 면이 보입니다. 이곳에서는 그 동시기를 살았던 백목사님의 초기 환경을 참고하는 데에 아주 요긴한 부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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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일반 사회적 자료제시도 적지 않으나 특별히 신앙걸음에 전력했던 사람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 해당된 자료를 찾아보는 것은 대단히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역시 박목사님에 대한 연구논문에서 백목사님의 초기 형편을 그의 신앙사적 입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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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이곳에서 참고할 필요는 있고, 그렇다고 시간을 투자하기는 어려웠던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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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목사님에 대한 자료는 이곳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나 기록을 위해 투자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영일목사님이 귀한 실력과 관심으로 자기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박윤선목사님의 생애와 신학을 작성하되 일반 논문에서 볼 수 없는 충실과 성실한 면이 있어 요긴하게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더하여 백영희신앙노선에서의 박윤선의 의미를 몇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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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박윤선이라는 이름은 백목사님 설교록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몇 분 중에 한 분이며 신학자로서는 제일 많이 인용되는 분입니다. 그리고 신앙노선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을 두고 많은 반론과 지적을 주고 받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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