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역사 - 신편찬송가 새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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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역사 - 신편찬송가 새찬송가

(신편찬송가 - 1936년)

2024-12-14
[키워드로 읽는 한국 찬송가의 발자취] <5> 시련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가 절정에 이른 암울한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선교사와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찬송가 재개정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신정찬송가’(오른쪽)와 ‘신편찬송가’ 표지 모습. 한국찬송가공회 제공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가 절정에 이른 암울한 시기였다. 일본은 중일전쟁과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으로 확전하며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냈다. 한글 사용 금지, 일본어 강제 사용, 창씨개명 등으로 조선인의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으며,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도 날로 심해졌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도 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복음전도와 함께 성경과 찬송가의 재개정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만들어진 찬송가집이 바로 ‘신정찬송가’(1931)와 ‘신편찬송가’(1935)였다. 먼저 신정찬송가는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 만든 ‘찬숑가’(1908)를 개정 증보한 찬송가집이다. 제작을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조직됐으며 아펜젤러 선교사가 위원장을 맡았다. 개정위원으로는 장로교의 공위량(William C Kerr) 안대선(W J Anderson) 선교사, 김인식 변성옥 목사가 참여했다. 1924년부터 4년간 진행된 개정 작업을 통해 314장이 선정됐다. ‘찬숑가’에서 절반 이상을 채택하고 청년찬송가(1922)에서 70편을 선별했으며 한국인 창작 찬송 6편도 수록됐다. 특히 김활란의 ‘캄캄한 밤 쌀쌀한 바람 불 때’와 남궁억의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은 통일찬송가까지 이어진 대표적 한국인 작사곡이다.

신정찬송가는 가사와 음악의 억양을 자연스럽게 다듬고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살린 직역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만 직역을 고집한 나머지 한국인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기존 가사의 자연스러움을 해쳤다는 비판도 있었다. 신정찬송가 314장 중 80여곡이 통일찬송가(1983)에 수록됐으며, 이 중 66곡은 번역이 그대로 유지됐다. 통일찬송가에 실린 대표적인 곡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영광 나라 천사들아’ ‘나의 사랑하는 책’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등이다.

‘신정찬송가’는 원래 장로교와 감리교가 함께 사용하기로 하고 제작에 들어갔으나 여러 이유로 장로교가 사용을 거부하자 감리교회만 사용하게 됐고 장로교는 단독으로 ‘신편찬송가’를 제작한다. 신편찬송가는 장로교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직접 제작했기 때문에 신편찬송가의 판권과 판매 등은 장로교 총회에서 관리했다.

신편찬송가는 총 400장으로 구성되었다. ‘찬숑가’를 기초로 40곡을 삭제하고 신정찬송가에서 70장을 선택했으며 100곡을 새로 추가했다. 기존 ‘찬숑가’에 수록된 동일한 곡의 구성을 유지함으로써 교인들의 혼란을 최소화했다. 신편찬송가의 서문 격인 ‘사례의 말씀’에는 미국 장로교 총회 발간 가곡풍 찬송가 채택, 성결교 부흥성가 수용, 300여명의 조선 목사와 40명의 교회 찬양대 인도자 의견 청취, 안대선 선교사와 현제명의 편집, 참여 등 주요 편집 방향이 기록돼 있다.

신편찬송가의 번역본 찬송가가 통일찬송가에 그대로 채택된 곡은 총 58편이다. 지금도 애창되는 대표적 찬송의 사례를 들면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예수 앞에 나오면’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만세 반석 열린 곳에’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참 아름다워라’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등이다.

신정찬송가와 신편찬송가는 일제의 강탈이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 암울한 1930년대에 제작된 찬송가집이다. 따라서 두 찬송가집의 제작 과정과 편집 등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이 있을 수 있다. 신편찬송가의 경우 기독교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문인 춘원 이광수가 10곡 넘게 신편찬송가를 번역하고 윤문한 일이나, 이용도계 이단 논란을 받았던 전영택 등이 번역자로 선정된 점 등이 그런 비판 중 하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도 복음의 희망을 이어가고자 했던 선배들의 노력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재평가돼야 할 것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33893877




(새찬송가)

장로교 정통 신학 표방… ‘새찬송가’ 출간
입력2025.02.08.

[키워드로 읽는 한국 찬송가의 발자취] <7> 정통
장로 교단의 분열은 한국교회 찬송가 사용과 출판에 영향을 끼쳤다. 1962년 출판된 ‘새찬송가’ 표지(왼쪽) 모습과 새로 반영된 ‘예배 전의 묵상’ 설명. 한국찬송가공회 제공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한국은 동족상잔의 전쟁 속에 휘말리게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은 합동찬송가(1949)가 출판된 지 1년이 막 지난 시점이었다. 6·25전쟁이 끝나자 이미 진행 중이던 보수와 진보의 신학 논쟁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1959년 예수교장로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로 두 파로 분열했다. 합동 측은 정통주의 신학을 지지하면서 WCC 가입과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통합 측과 기독교장로회(기장)는 WCC 가입과 에큐메니컬 운동 및 토착화 신학을 찬성했다. 이후 장로교는 여러 차례 분열을 거듭하며 각자의 신학 노선을 따르게 되었다. 앞서 고신 측은 1954년 예수교장로회에서 독립했고, 기장 측도 1954년 6월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교단 이름을 변경하고 독립했다.

장로 교단의 분열은 한국 찬송가 사용과 출판에 영향을 끼쳤다. 고신과 합동은 1949년 출판된 ‘합동찬송가’를 에큐메니컬 운동의 산물로 판단했다. 두 교단은 성경적 가치관을 반영한 새로운 찬송가를 만들기로 결의하고, 1957년부터 ‘신편찬송가’를 임시로 사용하며 새찬송가 편찬에 착수했다. 1960년 고신과 합동은 ‘새찬송가’ 출판을 결의했고 2년 뒤 새찬송가를 출간했다.

이에 대응하여 감리교 기장 예장통합 성결 기독교연합회는 1963년 찬송가 개편에 합의하고 제작에 나서 1967년 ‘개편찬송가’를 출판했다. 이렇게 당시 각 교단의 신학 논쟁은 찬송가의 출판과 사용에서도 한국교회를 양분시켰다.

새찬송가 편찬에 나선 고신과 합동은 보수신학의 정신을 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60년 합동은 고신과 새찬송가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크게 3가지 원칙으로 찬송가를 편찬하기로 했다. 첫째, 신편찬송가를 기초로 한다. 둘째, 구미 각국의 찬송가 중에서 원작의 작사 작곡 출판의 역사를 세밀히 알아내 원곡에서부터 직접 번역한다. 셋째, 미비점을 보완해 완벽한 찬송가집을 만든다.

합동과 고신은 새찬송가를 제작할 때 보수 진영의 찬송가를 대표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곡 선정에 신중을 기했다. 번역 또한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면서 가사에 담긴 신학적 내용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 결실이 1962년 12월, 671곡의 찬송과 53편의 교독문으로 구성된 새찬송가이다.

새찬송가는 다양한 찬양집에서 선별됐다. 신편찬송가(1935)에서 356편, 합동찬송가(1949)에서 75편, 청년찬송가(1959)에서 50편, 성가(일본복음연맹·1958)에서 58편, 찬미가(일본기독교단·1954)에서 9편, 미국장로교찬송가집(1955)에서 26편을 선정해 최종 671장으로 출판됐다.

새찬송가의 편집 구조를 보면 전에 없던 ‘예배 전 묵상’ ‘예배 후 묵상’이 추가돼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가다듬게 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각 부분 아래 세부 항목을 배치해 독자 이해를 도왔다. 제목 분류를 살펴보면 1부에서는 찬양과 경배, 성부, 성자, 성령을 다뤘고, 2부에서는 성도의 생애와 교회, 성례전, 3부에서는 일반 성가와 합창곡, 송영으로 마무리했다. 교독문은 시편에서 39편을, 욥기 잠언 이사야 마태복음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요한1서 요한계시록에서 주요 구절 14편을 선별했다.

새찬송가의 탄생은 신학 논쟁과 교단 분열의 아픔을 딛고 정통신학을 표방하는 예수교장로교회가 다시 하나 되는 상징적 계기가 됐다. 당시 합동 측은 WCC 가입과 에큐메니컬 운동이 정통 개혁신학의 순수성을 훼손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보수신학에 입각한 새찬송가를 제작해 사용함으로써 장로교 정통신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한국 찬송가 출간의 역사는 신학적, 정치적 대립 속에서 교단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는 가운데 발전해 왔다. 같은 장로교 안에서도 신학 노선과 교단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찬송가가 편찬되고 사용됐다. 1949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3개 교단이 연합해 ‘합동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하다가도 각 교단 신학 노선에 따라 다시 교단별로 찬송가집을 직접 제작해 사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1962년 제작된 새찬송가는 단순한 찬송 모음집이 아니라 정통신학을 견지해온 보수 진영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맞서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했던 신앙 고백적 결실이었다. 새찬송가의 출판은 당시 신학 논쟁으로 인해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진 한국교회 분열의 단면을 보여주는 시대적 기록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용남 한국찬송가공회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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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02.14 00:00  
공회찬송 과 합하여 쓰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