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한국교회 신학 발전과 고신 -정성구 -고신 50년을 말한다 (3)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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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한국교회 신학 발전과 고신 -정성구 -고신 50년을 말한다 (3) [고신]


분류: 교단-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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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61 등록일 : 2002-06-26
교단설립 50주년 기획특집 / 고신 50년을 말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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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교단 설립 50주년을 기념해서 고신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이 무엇이며, 고신 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적 입장이 한국교회의 신학발전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이번 기획 특집에서 필자에게 맡겨진 일이다. 그런데 먼저 짚고 갈 것은 “정말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결국 일찍이 선교 신학자 요한네스 벌까일 박사 (Johanes Verkuyl)의 말처럼 “번역신학 또는 화분갈이 신학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서양 신학자들의 책들을 번역해서 그 노선을 따르는가에 따라서 결국 신학의 색깔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순교자의 신앙노선을 따르려는 확실한 깃발이 있었기에 그것이 커다란 에너지가 되어서 개혁주의 신학노선을 힘차게 외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특히 고신의 창설자였던 한상동 목사의 감화력과 영권이 진리 운동의 깃발로 모이게 했고,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커다란 함성이 되었다. 그 후에 고신의 신학적 정체성과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이 되었다.


■ 고신신학의 정체성과 방향

한상동 목사는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한국교회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오직 진리운동의 투사로서 옥고를 치르면서 이른바 산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모습이 고신 교단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커다란 감화력과 영향력을 미쳤다. 한상동 목사는 신학자가 아니고 신앙가 이긴 해도 그의 설교와 사상과 삶이 고신 교단의 버팀목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신학적인 저서를 남긴 일은 없다. 하지만 그의 설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외쳤고,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울면서 권면했다. 비록 신학적 자기 체계는 세우지 못했으나, 그것은 바로 개혁주의자들의 사상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한상동 목사의 사상과 삶이 고신 신학의 배경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신의 신학이란 한 마디로 1946년에서 1960년까지 15년까지의 ‘고신의 박 교장’ 즉 박윤선 박사의 신학적인 입장에 기초를 두고 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고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되기까지 한국의 보수 신학의 대변지였던 ‘신학지남’(神學指南)이 폐간되고,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있던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등은 일본 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르고, 만주 봉천 신학교에서 광복의 때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해방과 광복이 이를 때까지 한국교회의 신학은 공백기였다. 말하자면 신학이 없던 시대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의 깃발에 맞서서 이른바 대한예수교 장로교 신학교 즉 총신이 평양신학교의 후신으로 세워지고, 그전에 이미 고신이 태동했다.

총회신학교 측은 자유주의 신학 노선에 맞서서 일찍이 마포삼열 목사가 전해준 대로 옛 미국 북 장로교회가 지켰던 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자유주의 대 보수주의로 대칭 되면서 총신의 깃발은 보수주의 운동의 맹주가 되었다. 그런데 꼭 같이 그레샴 메쳰과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의 영향을 받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는 신학적인 입장이 완전히 같으면서도, 박형룡 박사는 교의 신학적인 변증을 하면서 보수신학을 지키려고 했다.

이에 반해서 박윤선 박사는 보다 주경 신학적인 입장에서 ‘신정통 신학’ 곧 빨트 신학을 비판하면서 칼빈주의적 성경해석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1950년대 초 박윤선 박사가 얼마간 암스텔담 뿌라야 대학교에서 유학하고 온 후부터 그의 신학적 색깔이나 화두는 당연히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노선을 줄기차게 외쳤다.


■ 박윤선 박사와 ‘파숫군’

박윤선 박사의 신학적 입장은 그의 주석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신학교 잡지였던 ‘파숫군’지(紙)에서 10여 년 간 가장 확실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윤선 박사는 파숫군지에다 거의 1년 동안 ‘칼빈주의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헨리미터(H. H. Meeter)의 ‘칼빈주의 기본 사상’을 발췌해서 연재하였다. 그 외에도 박윤선 박사의 성경주석 전부에 나타난 칼빈과 아브라함 카이퍼, 헬만 바빙크, 리델보스, 흐로솨이퍼, 도예베르트, 볼렌호번 등 거의 모두가 화란 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기까지 그는 고려파의 대변인이었고 고려파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윤선 없는 고려파는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고려파를 대표하는 신학자였다. 1937년에 박형룡 박사는 부트너(L. Boettner)박사의 ‘칼빈주의 예정론’을 번역하면서 교의적으로 칼빈주의 입장을 고수했다면, 박윤선 박사는 카이퍼와 바빙크에 심취하면서도 헨리미터의 칼빈주의를 그대로 번역 소개하였다.

박윤선 박사의 칼빈주의는 우선 포괄적인 삶의 체계로서 칼빈주의를 소개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파숫군’지에 실렸던 박윤선 박사의 첫 번 글은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와 칼 빨트의 기본 원리’란 제목 아래서 양자의 차이점을 지적한 학술적인 논문이다. 그는 이 글에서 “설교에 있어서 칼빈과 빨트의 차이점”, “계시 문제에 있어서 칼빈과 빨트의 차이점”, “기도에 있어서 칼빈과 빨트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칼빈주의 최대 표현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위기 신학”에서 칼빈주의와 신 정통주의 차이점을 명백하게 지적했다.

그런데 고신의 신학적 화두는 이른바 보수주의 또는 복음주의라는 말보다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란 말에 더 익숙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개혁주의 신학운동은 한상동 목사의 순교자적 영성에 증폭되어,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그 시대의 사명을 다하면서 교회와 신학 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와 한상동 목사가 갈라지고 박윤선 박사가 총신의 교수와 교장으로 오면서 신학의 강조점은 총신의 보수주의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으로 힘을 얻게되고 그 후 합신의 신학적 정체성에도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 제2세대 신학자들

고신에서 박윤선 박사의 이탈은 커다란 교단적 손실이긴 해도 한국 장로교회 전체에 미친 영향으로 본다면 긍적적 시각도 없지는 않았다. 박윤선 박사 없는 고신은 교단의 폐쇄성과 맞물려 그토록 개혁주의 노선을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적 한계를 벗어 날 수도 없었고 다른 장로교단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였다.

다만 이근삼 박사의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잇기 위한 노력은 크게 평가되어야 했다. 이근삼 박사의 칼빈주의에 대한 관심은 여러 소 논문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아무래도 1960년대 이전의 화란 뿌라야 대학교의 칼빈주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교회 전체에 신학적인 영향은 별로 없었다. 아마 이근삼 박사의 개혁주의 대학건설의 비젼이 오늘의 고신대학교를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면서도 개혁주의 대학교로 가려고 할 때 여러 가지 환경적 여건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신에서 신학적인 대변인으로서는 오병세 박사를 들 수 있다. 물론 이근삼, 오병세, 홍반식 등 세 박사들은 실제로 박윤선 이후의 교수들로서 이미 초기 고신의 영향력을 잃은 후 차세대들임을 부인 할 수 없다. 특히 오병세 박사의 경우 그는 신학자이면서 교정 가이며, 여러 번 고신의 학장을 역임 한 바 있다. 오 박사는 한국 신학계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한 저서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 박사는 ‘개혁주의 신행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많은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저서들을 번역하도록 일한 것은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개혁주의 신행협회는 불란서의 피에레 말셀(P. Marcel)박사나 화란의 뎅그링크(J. D. Dengerink)박사들이 주동되어 세운 국제적인 기구였고, 박윤선 박사가 한국에 가져왔으나 한국에서는 독특하게 고려파를 중심으로, 특히 오병세 박사를 중심으로 발전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행협회의 번역서들은 모두가 믿을 수 있고, 권할 만한 책들인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고신의 신학적 향방을 은연중에 말한 것은 바로 개혁주의 신행협회의 번역서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개혁주의 신행협회는 총신의 교수들도 가담하기는 했으나 오병세 박사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고신의 박윤선 이후에 교수들이 한국 신학계에 개혁주의 신학노선으로 철저히 영향을 끼치려고 할 때, 새롭고 창의적 저서들이 쏟아져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기대에 미흡한 점도 없지 않다. 결국은 입으로의 개혁주의 보다 확실하게 저서로서 한국교회 앞에 내어놓아야 했었다. 그것은 아마 부산이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물론 고신이 한국 신학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컸었다. 그러나 고신대학교로서 즉 기독교 인문대학교가 됨으로서 그 옛날 순교자적 신앙과 개혁주의 신학노선을 깃발로 들고나올 때와 비교하면 다소 빛이 바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고신대학교는 옛날 아브라함 카이퍼가 뿌라야 대학교를 세워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려던 위대한 꿈을 따라서 대학교로 발전했다. 그것은 고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총신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신학교들이 대학교가 되면서 세상에서의 권위도 못 찾고 개혁신학을 철저히 지키지도 못해서 신학의 순결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도 아무도 부인 할 수 없다.

박윤선 박사가 고신을 떠나고 고신의 대변지였던 ‘파숫군’지가 폐간되었을 때 이미 고신은 그 시대의 사명을 다했고, 새롭게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했다. 밖에서 본다면 고신은 지나치게 과거 지향적인 삶에 머물러서 회상하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적극적으로 대비하고 맞서 싸우기를 바란다. 곧 신학의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모든 자유주의적인 신학적 상황에서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아픔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한국 신학계를 향한 새로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