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광군 야월교회 간단소개
http://www.mjk1004.org/sub5_4_detail.asp?CatNo=5&PSize=10&PageNo=4&IndNo=25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서 (10) 집단순교지 영광야월교회
집단순교지 영광야월교회(전남 영광군 염산면)기독교헤럴드 기사(11)
문준경순교기념관 관장 김헌곤 목사
미국 남장로교 소속 유진벨(배유지)선교사는 목포에 선교센터를 세우고 북쪽으로 나아가며 선박을 이용한 복음 전파에 매진했다.그러던 중 야월리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교회가 없는 상태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908년4월5일 이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염산리교회로 명명했다.이후1939년에 염산면소재지에 염산교회가 들어서자1947년 마을 이름을 따서 야월교회로 개명하게 되었다.야월리는 천일염전이 크게 발달한 곳이다.
염산면은 공산당 거물 김삼룡의 고향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공산당원들이 활동한 지역이다. 6.25개전 이후 공산당들과 좌파 세력들은1951년9월까지 야월교회 성도들을 설도 분주소에 끌어다 때려죽이고 허리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잔인한 학살을 하였다.이시성씨는‘김성종 영수,조양현 영수,최판섭 집사 최판원 집사,김두석 성도 등을 수문 앞에 개별적으로 끌고 가 바다에 빠뜨려 처형하였다.’고 증언했다.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집사는 해방 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그의 가족들도 같은 날 희생되었는데 마을 공동묘지 앞에10m넓이의 깊은 구덩이를 파고 떠밀어 생매장되었다.이후 이 구덩이에서 사체80구를 수습했다.
최판섭 집사는 어머니가 울면서“네 장형 최판원 집사가 잡혀 죽게 되었다.네가 분주소에 들어가면 네 장형을 살려준다고 하니 네가 들어가거라.”하자 찬송을 부르며 설도 분주소로 갔다.결국 최판섭 집사는 설도 수문에서 물에 빠져 장렬히 순교했다.형 최판원 집사와 함께.남석우 씨는 예수 믿는 반동분자라 해서 돌에 맞아 두개골이 파열됐다.숨을 겨우 건져 집으로 옮겨진 후 결국 회생하지 못해 순교했다.이처럼 야월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노인부터 젖먹이까지 전교인65명이 순교한 것이다.
공산세력은 교회당 건물도 완전히 불태워 없애버렸다.야월리는 여러 해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다. 1952년이 되어서야 안창건 전도사(천호동성결교회 원로)의 사랑채에서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1988년에 부임한 배길양 목사는 순교자의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순교자들의 명단을 추적해65인의 명단을 확정하고 순교기념탑에 이름 하나하나를 새겼다.이후 전국에서 순례자들의 방문이 늘어났는데 야월교회 출신으로 교단 총회장이 된 안영로 목사가 총회 결의로‘야월교회 순교기념관’건립을 이끌어내어 전국 교회가 헌금에 동참한 결과2009년7월 연건평250평 규모로‘기독교인 순교기념관’과‘교육관’을 건립하게 되었다.현재 심재태 목사가 담임하며 순교의 영성을 강물처럼 흘려보내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고 있다.야월교회 성도들의 순교의 삶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발자취이다.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서 (10) 집단순교지 영광야월교회
집단순교지 영광야월교회(전남 영광군 염산면)기독교헤럴드 기사(11)
문준경순교기념관 관장 김헌곤 목사
미국 남장로교 소속 유진벨(배유지)선교사는 목포에 선교센터를 세우고 북쪽으로 나아가며 선박을 이용한 복음 전파에 매진했다.그러던 중 야월리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교회가 없는 상태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908년4월5일 이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염산리교회로 명명했다.이후1939년에 염산면소재지에 염산교회가 들어서자1947년 마을 이름을 따서 야월교회로 개명하게 되었다.야월리는 천일염전이 크게 발달한 곳이다.
염산면은 공산당 거물 김삼룡의 고향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공산당원들이 활동한 지역이다. 6.25개전 이후 공산당들과 좌파 세력들은1951년9월까지 야월교회 성도들을 설도 분주소에 끌어다 때려죽이고 허리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잔인한 학살을 하였다.이시성씨는‘김성종 영수,조양현 영수,최판섭 집사 최판원 집사,김두석 성도 등을 수문 앞에 개별적으로 끌고 가 바다에 빠뜨려 처형하였다.’고 증언했다.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집사는 해방 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그의 가족들도 같은 날 희생되었는데 마을 공동묘지 앞에10m넓이의 깊은 구덩이를 파고 떠밀어 생매장되었다.이후 이 구덩이에서 사체80구를 수습했다.
최판섭 집사는 어머니가 울면서“네 장형 최판원 집사가 잡혀 죽게 되었다.네가 분주소에 들어가면 네 장형을 살려준다고 하니 네가 들어가거라.”하자 찬송을 부르며 설도 분주소로 갔다.결국 최판섭 집사는 설도 수문에서 물에 빠져 장렬히 순교했다.형 최판원 집사와 함께.남석우 씨는 예수 믿는 반동분자라 해서 돌에 맞아 두개골이 파열됐다.숨을 겨우 건져 집으로 옮겨진 후 결국 회생하지 못해 순교했다.이처럼 야월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노인부터 젖먹이까지 전교인65명이 순교한 것이다.
공산세력은 교회당 건물도 완전히 불태워 없애버렸다.야월리는 여러 해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다. 1952년이 되어서야 안창건 전도사(천호동성결교회 원로)의 사랑채에서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1988년에 부임한 배길양 목사는 순교자의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순교자들의 명단을 추적해65인의 명단을 확정하고 순교기념탑에 이름 하나하나를 새겼다.이후 전국에서 순례자들의 방문이 늘어났는데 야월교회 출신으로 교단 총회장이 된 안영로 목사가 총회 결의로‘야월교회 순교기념관’건립을 이끌어내어 전국 교회가 헌금에 동참한 결과2009년7월 연건평250평 규모로‘기독교인 순교기념관’과‘교육관’을 건립하게 되었다.현재 심재태 목사가 담임하며 순교의 영성을 강물처럼 흘려보내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고 있다.야월교회 성도들의 순교의 삶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발자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