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최진도 - 고신(1952-58), 주영진, 해방후 이북교회 위기, 이기선, 박윤선, 한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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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최진도 - 고신(1952-58), 주영진, 해방후 이북교회 위기, 이기선, 박윤선, 한상동






■ 기 / 획 / 특 / 집 - 역사의 현장 속으로 원로와의 대화 (19) / 최진도 목사와의 대화
“영혼 구원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013.04.03 15:31 입력
1929년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긴제에서 최병익, 김병선 씨의 9남매 중 셋째로 출생한 최진도 목사는 고신교회와 합동교단에서 활동한 목회자이다. 최진도 목사는 이북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고, 월남해 고려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부산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활동했다.



최 목사는 평양대부흥의 영향을 크게 받은 평안남도 긴제에서 출생했는데, 모친은 그를 임신했을 때,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접하고 믿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김일성대학 화공과에 재학 중 주일성수가 발각돼, 공산당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며, 주기철 목사의 장남 주영진 전도사가 사무한 긴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이후 6.25 동란의 와중에서 1·4후퇴 때 월남해 목회자의 길을 갔다. 고려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958년 제12회로 고려신학교를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중 천막교회였던 동래읍교회(현 내성교회)를 담임하며 한상동 목사와 박윤선 박사와 가까이에서 교제하게 된다. 최진도는 1963년 고신이 합동측으로부터 환원할 때 환원에 동참하지 않고 합동 교단에 남아 여러 교회를 목회하던 중 2004년 부산 당감제일교회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병원 전도자 혹은 지하철 전도자로 활동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지난 3월 21일,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의 도움을 받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최진도 목사을 만나 그의 삶의 여정을 들었다.

■ 김흥식 연구원 / 고신역사연구소




▲최진도 목사

최진도 목사

?1929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긴제 출생

?1949 세례(이기선 목사 집례)

?1951 고려신학교 입학

?1952 동래읍교회(현 내성교회) 개척

?1958 고려신학교 12회 졸업

?1958 동일교회 시무

?1962 충일교회 시무

?1967 서대신제일교회(현 신평로교회) 시무

?1972 성산교회 시무

?1974 송정교회 시무

?1976 장전제일교회 시무

?1980 당감제일교회 시무

?2004 당감제일교회 원로목사, 은퇴.



■ (편)역서

?알렉산더 스튜아트, ‘로마교 교리와

성경교리’(개혁주의신행협회, 1961)

?‘성경제목사전’(칼빈문화사, 1961)





김흥식 연구원 : 목사님께서는 6.25 동란 중에 월남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북한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지요?

최진도 목사 : 저는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50리 정도 떨어진 농촌 마을인 긴제에서 자랐습니다. 9남매였는데, 위로 누나와 아래의 동생이 일찍 죽어, 7형제가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지요. 저희 부모는 직접 선교사들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우리 집을 예배 처소로 내 놓았습니다. 모친이 주님을 영접한 해, 저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습니다. 모태신앙인 셈이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북에서 피난 나올 때, 나오시지 못했습니다. 동생들도 나오지 못했지요. 저와 아버지와 형, 동생 둘만 남한으로 피난을 나왔지요.

아버지는 자녀 교육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면 소재지에 오르간이 있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오르간을 구입해 주셨습니다. 물론 시골이라 음악 교사가 있을 리 없지요. 그래서 혼자서 오르간을 연습해 나중에는 연주할 수 있게 되었지요.








김 연구원 : 당시, 음악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셨나요?

최 목사 : 학교에서는 음악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목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 큰 행운이지요. 음악을 배우게 된 것도 이유택 목사님의 관심과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평양에서 하숙하면서 신현교회를 다녔습니다. 신현교회는 장대현교회에서 1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이유택 목사님께서 시무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목회도 잘하셨을 뿐 아니라, 평양신학교에서 강의도 하셨습니다. 이분은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남달랐습니다. 그 당시 유명했던 지휘자 김동진 선생을 초청해 학생찬양대를 지도하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후에 공산당의 핍박을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실력도 있고, 영력도 있고, 충성심도 많았던 분이셨습니다.



김 연구원 : 해방 후, 이북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했지요? 목사님이 경험하신 일을 말씀해 주시지요.

최 목사 : 저는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김일성대학 화공과에 입학했습니다. 2학년 때, 주일성수 문제가 발각되어 학생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받았습니다. 제가 교회 간 것을 반동이라 했어요. 김일성대학은 공산당 간부를 양성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기독교 신앙이 허락될 리 없지요. 결국 학교에서 추방당하고, 정치보위부 감옥에 갇혔습니다. 당시 보위부 감옥에 갇혔다고 하면 대부분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알지도 못했던 정치보위부의 수장이 저를 책임지고 석방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건져주셨듯이 저를 정치보위부의 감옥에서 구해주신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 때가 1948년입니다. 만약에 믿음을 숨기고 계속 김일성대학에서 계속 지냈더라면, 공산당 간부가 되어 전선으로 나가 부상당하거나 죽었을지도 모르지요. 주일성수 때문에 반동으로 몰려 죽을 위기를 겪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저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영진 전도사님도 만나고 월남하여 고려신학교에 다니게 된 것입니다.



김 연구원 : 목사님은 명문학교에서 공부하셨군요. 평양고등보통학교는 당시 명문 학교로 알려진 학교 아닙니까? 김동길 교수도 그 학교 출신이지요? 김일성대학에 입학하신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신 것 같습니다. 이북에서 계실 때,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신 분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최 목사 : 정치보위부 감옥에서 나와 시골에 숨어 지내며 믿음 생활할 때, 제가 만난 분이 주영진 전도사입니다. 아주 귀한 분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장남이셨는데, 긴제교회에서 5년 정도 사역하였습니다. 이 분은 언제나 한복을 입고 다니셨습니다. 주 전도사님은 6·25동란이 나기 사흘 전, ‘기독교연맹’이란 어용단체에서 잡아갔습니다. 주 전도사님은 예배시간에 연맹원들이 설교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과 공산당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했어요. 교인들 모두 주 전도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순교를 피할 수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주 전도사님은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을 따라 순교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6·25동란 이후, 주 전도사님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김 연구원 : 주기철 목사님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주영진 전도사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그를 아는 이도 별로 없는데 목사님의 증언이 후일 귀한 자료가 되겠습니다.

최 목사 : 그렇습니다. 그의 사진 한 장 알려진 것이 없는데, 제가 부모님 사진은 못가지고 왔지만 주영진 전도사님 사진은 가져 왔습니다. 주 전도사님의 설교는 마치 불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성적이었어요. 본문을 강해하는 열정은 주기철 목사님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주 전도사님의 설교를 받아 적은 것이 두꺼운 노트 20권 분량이었습니다. 피난 올 때, 궤짝에 넣어 땅에 묻어 두고 왔는데 이 일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은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훌륭한 분에게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주 전도사님께서 로마서를 강해하셨을 때, 로마서 전체를, 계시록을 강해하셨을 때에는 계시록 전체를 완전히 암송했습니다. 주 전도사님께 성경을 배우면서 많은 성경을 외우게 되었지요. 당시 우리들이 자주 부르던 찬송은 통일찬송 364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었습니다. 주일예배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감격이 넘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긴제가 시골이었지만, 주 전도사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해서 팔도에서 수백 명이 모여, 성경을 배웠습니다.



김 연구원 : 북한에서의 경험은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생소한 일인데, 핍박 중에서도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에게도 격려가 됩니다.

최 목사 : 그렇습니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평양에서만 신앙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은 아닙니다. 평양에서 북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선천이란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조만식 선생님께서 오산학교를 세우고 가르쳤지요. 이곳에도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주일이 되면 가게가 문을 닫고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갔습니다. 평남 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긴제교회에서 함께 성경을 배웠던 분들 중에는 순교한 분들이 여러 있습니다. 김승춘 선생님은 주일학교에서 봉사했는데 공산당에게 잡혀가 매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이북에서는 교회에 나간다고 하면 초등학생 아이도 벌을 받고 추방당했습니다. 신앙을 갖고 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와 비슷하게 공산당의 핍박 가운데 신앙생활하다가 1·4 후퇴 때 피난하여 고려신학교를 나와 목회하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홍근섭 목사님은 고려신학교를 제8회로 졸업하고 전국적으로 사경회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내수동교회를 담임하셨지요. 최준호 목사님도 고려신학교를 제8회로 졸업하시고 부산의 동일교회에서 시무하시면서 사경회를 인도하셨지요.



김 연구원 : 이북에서 월남하실 때는 사선을 넘는 심정이었겠습니다.

최 목사 : 그렇지요. 목숨을 걸고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북에서 피난 왔을 때가 22살 때였습니다. 1950년 11월 5일 평양을 떠나 홀로 부산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헤어진 부친과 형님, 동생 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인 일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가족과 만난 후, 해운대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미군부대에서 탄약운반 등의 온갖 궂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부친이 이듬해 심장병으로 4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지요. 당시 해운대교회에는 김장원 목사님이 시무하셨는데, 저는 여러 가지 일로 봉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향에서 피난 온 최준호 장로님이 저를 일부러 찾아와 고려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교역자가 되라고 권했습니다.



김 연구원 : 그래서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셨군요.

최 목사 : 예, 해운대에서 막노동하고 지내던 중 고려신학교의 학생으로 있던 최준호 장로님이 강권했어요.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추천서를 받아야 했는데, 이북에서 온 저를 보증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 이북에서 온 사람은 빨갱이나 간첩으로 의심받기 십상이었으니 말입니다. 제가 속하여 있던 해운대교회에서도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량교회에 시무하시던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갔지요. 한 목사님께 평양에서 피난 온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고려신학교에 가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했는데, 두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추천서를 써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입니다. 한 목사님께서는 사람을 잘 믿어주었습니다. 그때가 1952년입니다.



김 연구원 : 한상동 목사님이 도움을 주셨군요.

최 목사 : 한상동 목사님은 제 은인입니다. 제가 한 목사님을 은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제가 전도사 때도 많은 도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과 2년 때, 정문호 목사와 함께 공부하였는데, 그가 건강이 나빠지면서 자신이 개척한 천막교회인 동래읍교회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25세의 나이로 개척교회를 맡게 된 것입니다. 제가 처음 부임할 당시 교인들은 4-50명가량이었습니다. 교인들은 천막에서 예배드렸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진흙에 발이 빠지고, 엉망이 된 바닥에 앉아 예배드렸습니다. 그래서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리고, 백 삼십여 평의 대지를 마련해 목조 예배당을 건축하고 싶다고 하였지요. 그러자 한 목사님께서는 즉석에서 알겠다고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회계 집사님을 부르셔서 저와 동행하게 하여, 대지 비용을 전액 지원해 주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할 때와 예배당을 건축할 때, 저를 믿어주신 것입니다. 당시 제 나이가 26살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가 지금의 동래 내성교회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제가 한상동 목사님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지요.



김 연구원 : 신학교에 재학할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최 목사 : 고려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특히 박윤선 박사님의 은혜가 컸습니다. 저를 아들처럼 생각해주시고, 늘 자상하게 대해주셨지요. 신학교를 마칠 무렵, 박윤선 교수님은 저를 교장실로 불러 “최 전도사가 앞으로 신학교를 위해서 유학을 해야 해, 내가 다 준비해뒀어”라고 하셨습니다. 전액 장학금과 경비까지도 준비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이북에 있을 때부터 복음 사역, 특히 목회사역을 하기로 서원했다고 말씀드리고, 박 목사님의 따듯한 권면을 거절했어요. 박 목사님이 성산교회에서 목회하시다가 사임할 무렵에도 저를 불러 후임으로 청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성산교회에서 일하게 된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저를 아들처럼 생각해 주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사모되는 이화주 전도사님과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특히 저와 이 전도사님은 동역자입니다. 동래읍교회에서 저와 함께 사역하다가 박윤선 목사님과 혼인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영광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친 일도 있습니다. 영광신학교는 용호동에 있는 나환자들의 신학교였는데, 제가 그곳에서 나환자들을 만나고 신학을 가르쳤지요.



김 연구원 : 고려신학교에서 발행했던 ‘파수군’에 보니 목사님께서 번역하시는 글도 있던데, 영어도 잘 하신 것 같습니다. 또 집필하신 책도 있으시지요?

최 목사 : 제가 학생 때부터 영어에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졌어요. 나중에 벌 코프의 조직신학책 요약판을 번역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외의 번역서는 1961년, 개혁주의 신행협회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된 알렉산더 스튜아트의 ‘로마교 교리와 성경 교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로마천주교의 이단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여 선교사 핸슨(Marjorie Lucy Hanson) 선교사님 집에 있던 ‘Roman Dogma and Scriptural Truth’라는 책을 보고 번역한 것이지요. 로마천주교의 실상을 잘 알지 못하던 그 시절에 이런 내용을 알려야겠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번역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해,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성경제목사전’도 번역했지요.



김 연구원 : 목회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최 목사 : 핸슨 선교사도 출석하던 성경장로회에서 설립한 충일교회와 서대신제일교회 그리고 박윤선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성산교회에서 시무했고, 그 후 장전제일교회에서 5년 정도 시무하다가 당감제일교회에서 24년을 사역하고 은퇴하였습니다. 얼마 전, 내성교회 60주년 기념예배 때, 저를 청하기에 가서 설교하면서 한상동 목사님의 은혜와 교회의 역사를 말한 일이 있습니다.



김 연구원 : 목사님을 뵈오니, 은퇴한 이후에도 참 바쁘신 것 같습니다. 당감제일교회에서 은퇴하시고 전도활동을 시작하셨나요?

최 목사 : 은퇴 후에 하나님께서는 저를 병원으로 보내셨습니다. ‘백병원 원목으로 사역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시간에 매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례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복부수술을 받은 세계로병원에서도 매월 한 번씩 설교하기로 했지요. 주례에 있는 좋은삼성병원도 7년째 정기적으로 방문해 전도하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저희 형님도 고신의료원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호스피스 봉사를 하고 있지요.

병원전도뿐 아니라, 지하철이나 거리에서도 전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지하철에서 전도한 지, 16년이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안티 크리스천으로부터 욕설을 듣거나 폭행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저를 파출소로 끌고 가기도 했는데, 저는 순순히 파출소로 따라 갑니다. 파출소 경찰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럴 때면 고발당하여 로마 법정에 서게 되었던 사도 바울이 생각나지요.

그렇지만 매번 고초만 겪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머리에 손을 대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기도해주면, 아이와 부모가 좋아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리고 저의 전도에 감동을 받아서 교회로 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하는 수고를 위로한다며 선물을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도비로 쓰라고 백만을 주신 분도 두 분이나 있었습니다. 두 번 받은 후원금으로 6천권의 전도 책자를 제작했습니다. 전도할 때에 제가 가지고 있는 오카리나가 유용하게 쓰입니다.



김 연구원 : 목사님께서는 전도할 때에 오카리나를 연주하시는데, 음악적인 영역이 목사님의 사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겠습니다.

최 목사 : 말씀드렸다시피 부친의 열성으로 갖게 된 음악적인 경험은 교회 개척과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직후, 신학교에서 교회음악을 가르치라는 청을 받고, 얼마동안 음악을 가르친 일도 있습니다. 음악전공자가 아니었기에 강사로 오라는 청을 거절하였지만, 계속되는 교수회의 요청에 응한 것입니다. 저는 주로 합창법을 가르쳤습니다. 목사들은 주로 성경을 가르치지만 교인들에게 모범적인 찬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김 연구원 : 마지막으로 고신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최 목사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5-16)라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분부하신 말씀대로 전도하는 일이 교회 사역에 가장 우선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외형적인 건물이나 외형에 치중하다보면 기독교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지요. 목회자나 교회가 해야 하는 가장 주요한 일차적인 과제는 복음 전도입니다. 저는 고신교회가 이런 근본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교단 초기의 그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희 세대가 공부할 때는 십자가를 메고 장터에 나가 전도했는데, 요즘에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요. 물론 전도 방식은 다를 수 있으나 복음전도에 대한 열심히 부족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정통이 있는 고신교회가 전도에 모범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