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
▲ 정주채 목사
향상교회담임
얼마 전에 우리는 새벽기도회에서 로마서 9-11장을 묵상하였다. 이 부분의 본문은 읽을 때마다 어렵게 느껴지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본문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우리는 본문을 변증법적인 형식을 따라 접근해볼 수 있다. 변증법이란 정(正, 긍정) 반(反, 부정) 합(合, 종합)으로 이루어지는 사고의 틀이다. 이 경우 正은 이스라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고, 反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 것이고, 合은 그리하여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히브리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계시와 구원의 언약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완악해져서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배척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졌고, 이들이 놀라운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를 유진 피터슨 박사의 방식으로 설명하면, 아들이 아버지 집을 박차고 나가면서 열어놓은 대문으로 동네 아이들이 들어가서 정원에 잔뜩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누리는 은혜와 복을 보며 질투를 느끼고 돌아온다. 이는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버린 탕자가 고백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한 결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 이제는 이방인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든 언약의 백성들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틴 루터는 이런 내용을 요셉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려갔다. 그런데 애굽은 요셉으로 말미암아 큰 복을 받아 누렸다. 그 결과로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그에게로 와서 구제를 받고 복을 누리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의 복음은 배척되었다. 그런데 이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들어가서 구원의 큰 축복이 되었다. 이 축복이 이제는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오고 있다. Back to Jerusalem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의 구원이 완성된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살핀 뒤 바울 사도는 외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말씀 그대로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와 그 경륜을 누가 다 헤아리며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방법을 누가 다 찾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신비이다. 오묘함 그 자체이다. 복음 자체가 신비요 비밀이 아닌가? 어찌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가?
이 외에도 신비는 많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의적 순종은 어떻게 조화되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또 어떻게 조화되는가? 물리세계에도 신비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무서운 속도와 엄청난 소음을 내며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조용한 가운데서 자유롭게 활동하며 사는가? 이 신비는 이해하는가?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13년 07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