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탁명환의 생애, 월간지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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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탁명환의 생애, 월간지의 실상




송사에 원고의 말이 옳은 것 같으나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이단 전문가인 탁명환, 그런데 다음 글을 읽으니 혼동스럽습니다. 그러나 크게 본다면 다음 글이 모두 옳다 해도 그 모든 내용을 거치면서 그 분은 발전했고 임종 때에는 최종적으로 깨끗하게 하나님 앞에 순교로 섰을 수도 있습니다.

이 홈이 아는 것은 그 분은 우리를 잘못 정죄했다가 사과하고 취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뭔지를 잘 모르겠으나 일단 우리 노선과 우호적인 상황이어서 이런 글을 싣기에는 주저 되는 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이 정말 옳다면 이런 모든 비판을 넘어 서야 합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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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명환씨의 생애, 월간지의 실상

2004/08/28


http://blog.naver.com/rhkdtlr0222/140005333463



이용섭. [탁명환, 그는 과연 누구인가]. 도서출판



두로. 1994년

탁명환 씨의 생애

탁명환(본명 탁경술, 1964년 11월 17일 개명) 씨는 1937년 7월 8일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리 179번지에서 아버지를 탁두섭 씨로, 어머니를 안삼례 씨로 해서 3남3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백산국민학교, 백산중학교, 신흥고등학교를 거쳐 전북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960년 4월 26일 육군에 입대하여 대구 16헌병대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1961년 9월 대구영남신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역 1년 3개월 동안 수학했다.
1963년 2월 2일 육군에서 만기 제대한 후 그는 1965년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장로(현재는 목사)가 운영하는 복음신보(현재의 복음신문)의 취재부 기자로 일하면서 신흥종교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개신교계는 나운몽 장로를 이단시했다. 그리고 탁명환 씨도 1976년 11월 27일 기독공보 지면을 통해서 용문산 기도원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한편 1969년 7월 탁명환 씨는 사이비종교 용화교의 정체를 폭로하는 논픽션 『용화교』라는 책으로 인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18일 만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당시 탁명환 씨는 순수한 사명감과 투철한 정의감으로 불의와 투쟁했다. 그러다 보니 생활형편이 어려워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70년 10월 1일 탁명환씨는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마포 성결교회의 한 사무실을 빌려 신흥종교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1972년에 그는 『한국의 신흥종교 기독교편』이라는 저서를 내놓았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문선명 교주의 통일교에 관한 원론적인 비판을 조금 시도했다. 1973년 3월에 탁명환 씨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1975년 3월 졸업했다. 그때의 지도 교수는 문상희 교수였고, 석사학위논문의 제목은 ‘동방교 신도 교육에 있어서 비판적 고찰’이었다. 또한 1973년 3월 20일 탁명환 씨는 사이비종교인 동방교의 정체를 폭로했는데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얼마 후 동방교는 와해되어 버렸다.

1974년 12월 2일 그는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99인의 통일교 지지성명’ 광고에 대한 반박문을 발표했다.
1974년에는 11월 25일 『세칭 구원파의 정체』란 150쪽 분량의 단행본을 출판했다. 그 책 출간 후 1975년 1월 18일 극동방송국 전 선교부장 권신찬 씨가 그 책의 내용을 이유로 삼아 탁명환 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그는 1976년 4월 2일 제9차 공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김덕환 씨는 탁명환 씨가 과거 군대 생활중 대구영남신학교 야간부에 재학할 당시 권신찬 씨가 영남신학교의 성경강해 과목을 맡고 있던 강사였다고 주장했다.(『탁명환 그는 과연 가룟 유다인가?』,김덕환 著,p,111,112).그리고 권신찬 씨와

탁명환 씨는 탁명환 씨가 죽기 직전까지 서로 교리 문제로 싸웠다. 그후 탁명환 씨는 1978년 1월초부터 6월 중순까지 신흥종교에 대한 강연회를 3회에 걸쳐 가나안 농군학교(당시 교장 고 김용기 장로)에서 했다.


탁명환 씨는 1978년 9월 10, 11일 양일간에 걸쳐 갑자기 각 신문을 통해서 ‘통일교회에 대한 사과문’이라는 광고를 냈다. 그후 1979년 6월 10일 탁명환 씨는 통일교는 십자가가 없는 이단이라는 비난성명을 발표했고, 동년 11월 25일 통일교 비판서인 『통일교의 실상과 그 허상』이란 책을 발간했다. 1980년 1월 1일 그는 신흥종교문제연구소를 국제종교문제연구소로 개칭했다. 1981년 4월에는 한국예수교 협의회 (KCCC) 기관지인 월간지 「성별」을 인수했고, 그 다음해 6월 잡지 이름을 「현대종교」로 바꿨다.
그런데 탁명환 씨는 1980년 2월 18일 자신을 죽인 임홍천 씨의 소속 교회인 대성교회에서 이단 비판 강연회를 열었는데 그것을 그 자신도 시인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는 대성교회에 출석하는 신도들의 착하디 착한 신

앙의 색깔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3년 전 바로 이 교회

에서 이단의 정체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그들 신도들의 진리를

향한 갈망을 그 눈빛에서 보았기에 더욱 이 교회 신도들을 위하

는 애정이 강렬해진다. 그렇기에 그 어떤 수난이 뒤따른다 하더

라도 바른 신앙의 진로를 그들 신도들에게 제시해 주어야만 한

다는 것이 필자의 욕심 없는 소망이다(「현대종교」 1983년 3월호 p. 81).


물론 대성교회는 이단은 아니자만 박윤식은 문제 인물임에 틀

림이 없다(p. 82).


또한 박윤식 목사의 성품에 인간적인 장점도 있는 것을 알지만



그가 주장하는 교리적인 문제에 하자가 있는 한 이단 시비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현대종교」 1990년 8월호 p. 222).

위와 같은 언급을 한 후 바로 그는 대성교회의 박윤식 씨에 대한 비판의 표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은 돈의 문제에 있어서 초연해야만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이 지구상의 여러 종교 중에서도 특히 이단 사이비종교에 대해서 연구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탁명환 씨는 그렇지 못했다. 즉 그는 자신에게 어떤 교회가 금전적 지원과 협조(「현대종교」에 광고 게재 등)를 해줄 때는 그 교회에 대해서 일절 비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C목사의 S교회는 탁명환 씨가 죽기 직전까지 그를 도와 주었으므로 그는 그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 논쟁을 한 번도 걸지 않았다) 그 교회가 그의 비리나 부정직함으로 인해서 그에게 경제적 지원과 협조를 하지 않으면 그 얼마 후부터는 그 교회에 대한 이단 시비 논쟁을 일으키곤 했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대성교회와 성락교회다(기독교 남침례회, 담임 목사 김기동). 그런데 대성교회가 탁명환 씨에게 물질적 지원과 협조를 중단했던 이유는 그가 1978년 9월 10, 11일 ‘통일교회에 대한 사과문’이라는 광고를 냈기 때문이었다(「신동아」 1994년 4월호 p. 358).
그러나 성락교회는 탁명환 씨의 ‘통일교회에 대한 사과문’발표 이후에도 1983년말까지 「현대종교」 정기구독료, 협조비, 광고비 명목으로 탁명환 씨를 계속 도와주었다. 하지만 성락교회도 1984년부터 「현대종교」의 보도 자세를 그 이유로 해서 탁명환 씨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협조를 일절 중단했다.
그런데 탁명환 씨 사후, 임홍천 씨의 소속 교회인 대성교회가 대성교회의 박윤식 씨와 탁명환 씨가 서로 적이 되어버린 이유는 대성교회로부터 탁명환 씨에게 매달 50여 만 원 씩 지급되던 것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갓에 대해서 탁명환 씨 측은 그 돈이 「현대종교」의 광고비 명목이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동아일보 1994년 2월 22일자).
월간지를 운영함에 있어서 가장 큰 소득원은 광고료이다. 이 점은 탁명환 씨도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시인한 적이 있다.

목숨을 내걸고 유서를 써놓고 18년간 추적하면서 8번이나 고소

를 당한 필자를 그대들은 가만히 앉아서 그 집단(구원파를 지칭

함)의 광고를 내주고 이익을 얻고 그야말로 그 집단의 보도에

놀아나면서 무슨 할말들이 그렇게 많은가?(「현대종교」 1991년 9월호 p.151)

또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인 김동섭 씨도 「월간 조선」 1994년 4월호의 ‘신흥종교연구가 탁명환의 생애, 찬반 엇갈리는 이단 고발자의 비상한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탁명환 씨)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의 단점이 ‘종교연구

가’라는 입정보다 ‘잡지 경영자’라는 위치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단이라 규정된 집단에서 주로 걸고 넘어진

것이 “광고 줄 때는 말을 안 하다가 광고를 안 주면 몰아친

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직원들은 “이단규정과 광고 문제를 결

부짓는다는 것은 말로 안된다. 이단은 성경적으로 해석해서 나

오는 결론이고, 광고는 잡지의 생명인데 이단 종파라고 고지식

하게 안 싣는다면 어떻게 잡지를 운영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

한다(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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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명환씨는 종교인이 아닌, 잡지경영자??월간지의 실상

2004/08/19


http://blog.naver.com/rhkdtlr0222/140005052342



종교인 아닌, 잡지경영자 탁명환?


그(故 탁명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의 단점이 [종교연구가]라는 입장보다 [잡지 경영자]라는 위치 때문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월간조선1994년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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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교회와 탁명환씨는 이단시비에 얽힌 악연을 갖고 있다. 결국 그것이 탁씨의 죽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으나 원래부터 탁씨가 대성교회를 비난했던 것은 아니다.
박윤식(대성교회)목사와 탁소장(현대종교)의 만남은 197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문안교회 목사의 소개로 이단사이비 종교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는 탁씨를 처음 만난 박목사는 탁씨와 뜻을 같이하고 연구소에 지원을 하는 등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처음엔 탁씨도 대성교회 집회에 참석, [대성교회 교인들의 예배 모습을 보니 대성교회 같은 교회가 하나만 더 있어도 교리적으로 틀린 것을 바로 고칠 수 있겠다]며 높이 평가했다. 박목사 역시 탁씨를 통일교 등과 싸우는 유일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연구소 활동을 돕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형호제하던 시절은 불과 몇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금이 가게 된 것은 79년 탁씨가 통일교 비판 서적인 [통일교 실상과 허상]을 출판하려다가 이를 알게 된 통일교 측으로부터 출판을 보류한다는 조건으로 수억원을 받기로 하고 이 돈을 받기 위해 다방에 나갔다가 그들의 음모에 걸려 공갈 사기 죄로 체포되면서부터. 당시 박목사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지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 탁씨에게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이단 시비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신동아199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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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지의 실상 목록열기(4)


통일교와의 은밀한 거래! 사건의 전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월간지의 실상

2004/08/25 02:25


http://blog.naver.com/rhkdtlr0222/140005227281



1. 탁명환씨는 1976년초에 통일교 문집단측에 생계비 및 연구비를 요구하면서 통일교 비판을 자제하겠다고 제의하였는데 통일교측에서는 신흥종교문제연구소라는 간판 대신 국제종교문제연구소로 바꾸어 달고 통일교 비판을 중단할 것을 조건으로 연구비를 지원할 것을 약속하고 1976년7월23일 오후4시 서울 서부역뒤 중림동 소재 국일반점에서 탁명환씨와 K모씨,통일교측에서 2명이 동석한 자리에서 월30 만원씩 1년분 300만원을 연구비 명목으로 1차로 지원 받은 자이다.

2. 이날 이후 탁명환씨는 신흥종교문제연구소 간판을 없애고 통일교 지시대로 국제종교문제연구소로 간판을 바꾸어 달고 교묘하게 기독교를 비판해온 위장 행세한 파렴치한 자이다.

3. 탁명환씨는 간판을 바꾸어 달았으나 계속 통일교를 비판했으므로 통일교 측에서 고소할 방침을 굳히자 속죄하는 뜻으로 사과문을 내겠다고 용서를 구한 후 사과문을 써주고 그 사과문을 1979년9월10일 11일자에 동아일보 및 7개 일간 신문에 그 사과성명서를 발표한 파렴치한 행위를 저질렀다.

4. 통일교 문선명 집단은 분명히 적그리스도 이단집단임에도 불구하고 황금에 눈이 어두워 돈을 요구하여 받고, 간판까지 바꾸어 달고, 통일교 문선명집단의 요구대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교계인사들을 비방고소하는 등 엄청난 선의의 피해자를 낳게 한 이것이 바로 파렴치한 탁명환의 행위요, 정체이다.


■ 파렴치한 탁명환씨

국제종교문제연구소 탁명환소장이 그동안 신흥종교문제연구소라는 간판을 가지고 기성교회와 신흥종교를 이중 기만하고 갖가지 수법으로 파렴치한 행위를 일삼아 온 행적이 드러나 교계를 경악케 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탁씨가 79년 9월, 통일교회에 사과문을 발표한 이래 최근에 다시 사과문 발표 이전과 같은 내용의 비방행각을 재개함으로써 통일교회 측에서 그동안 덮어 두었던 사과문 발표 전후의 사정을 밝힘으로써 드러났다.
통일교회의 한 관계자 박길연씨에 의하면, 최근 탁씨가 ‘통일교회 실상과 허상’ 이라는 책자 발간과 잡지투고, 집회강연으로 일방적인 비방을 일삼고 있는 데 대해 ‘그동안 탁씨의 개과천선만을 기다렸으나 추호의 반성없이 교계를 우롱하는 처사를 계속하고 있어 더 이상 한국교계가 그의 이율배반적 행위에 현혹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득이 전모를 밝힐 수밖에 없다고 그 경위를 말했다.
그에 의하면, 지난 76년 3월경 갑자기 탁씨가 전화로 만나자고 제의 한 후 ▲그동안 통일교에 대해 고의적으로 비난 모함을 하여 미안하다. 앞으로는 중상모략, 인신공격은 안하겠다. 그리고 신흥종교보다 기성종교에 문제가 더 많다 ▲앞으로 기성교회의 부흥회, 수도원, 신학교 등을 본격적으로 비판해야겠는 데 그럴 경우 기성교회에서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통일교회에서생계를 보장해 달라고 요청해 왔었다는 것.
이에 통일교회 측에서는 ▲통일교회의 건전한 비판은 환영한다. 비판을 받아야 성장하는 것 아니냐.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비판에 그쳐라. 그리고 생계비를 보장할 수는 없고 귀하의 신흥종교문제연구소를 국제종교문제연구소로 바꾸어 한국교계 전체발전과 기독교의 연합에 기여할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한다면 연구비는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대답했고, 통일교회의 이 조건을 탁씨가 받아들여 76년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서부역뒤 중림동 소재 국일반점에서 탁씨와 그와 같이 일하는 K모씨 통일교회 측 2명이 동석한 자리에서 탁씨의 요구대로 월 30만원씩의 1년분 연구비 3백만원을 지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탁씨는 통일교회에 대해 악의적 비난을 계속할뿐더러 간판도 바꾸지 않고 비판책자를 만드는 등, 수차례의 기만행위를 계속하자 79년9월 통일교회 측에서 최후대책으로 탁씨의 언행과 책자를 모아 사기 및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방침을 굳히자 이 사실을 안 탁씨가 ▲고소는 언제라도 할 수 있지 않느냐, 속죄하는 뜻으로 사과문을 내겠다. ▲사과문을 낸 후에도 내 태도가 달라지지 않거든 언제든지 고소해도 달게 받겠다며 자필로 각서와 사과문을 써서 통일교회 측에 넘겨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탁씨는 국내 각 신문지면을 통해 사과문에서 ‘다년간 통일교회를 비판해온 내용이 사실과 달라 본인의 비판으로 통일교회에 피해를 준 데 대해 심심한 사과를 표하고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을 다짐 한다’고 밝혔다.
탁씨는 이 사과문에서 또 사과문발표의 동기를 “본인에게 통일교회의 자료를 제공해왔던 사람들이 명예훼손 등 범죄혐의로 구속기소된 것을 계기로 광범위한 자료를 다시 입수, 종합 분석한 결과 본인의 비판에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자필로 사과문을 쓴 탁씨는 그 후 ‘강압에 의해 본인의 뜻과 달리 썼다’고 주장하나 통일교회 측은 “평소 유언장을 휴대하고 경향각지를 돌며 생명을 걸어놓고 통일교회 비판운동을 한다고 말한 그가 강압에 의해 사과문을 썼다고 변명하는 것은 자가 당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80년 1월 16일 주간종교)


■ 통일교회에 사과한다

신흥종교문제연구소 소장 탁명환씨가 지금까지 그의 통일교회에 대한 비판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확인하고 “이 같은 오류를 범한데 대해 통일교회 측에 사과한다”고 발표했다.
10일, 11일, 국내 7대 일간지에 발표한 사과문을 통해 탁명환씨는 “다년간 신흥종교문제연구소를 운영해 오면서 통일교회를 ‘비윤리적집단’ ‘신형공산주의’ ‘정치집단’ ‘사교집단’이라고 비판했었으나 본인에게 비판의 자료를 제공했던 일부 통일교회 이탈자들이 명예훼손 등 범죄행위로 구속기소된 것을 계기로 새로운 각도에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 검토한 결과 본인의 비판내용 중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었음을 확인, 정정 해명한다”고 말했다.
탁명환씨는 자신의 비판내용 중 잘못된 부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① 비윤리적인 집단 ② 정치집단 ③신형 공산주의 사교집단 운운의 비판이 근본적으로 오류였음을 시인했다.
특히 탁씨는 그가 비판했던 통일교회의 비윤리적 집단 운운에 대해 “본인은 통일교회의 창시자 문선명씨가 1955년 7월4일 사회풍기 문란혐의로 구속기소된 것으로 알고 통일교회를 비윤리적 음란집단으로 단정, 비판해 왔던 바 조사결과 당시 사건은 병역법위반혐의로 기소되었다가 동년·10월 4일 선고공판에서 무죄로 석방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외에 통일교회를 에워싸고 문제되어 온 음란집단 운운은 그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 이에 정정한다”고 밝혔다.
탁명환씨는 또 “이상 세가지 항목이외에 일부 통일교회 이탈자들이 제공한 잘못된 자료에 의하면, 본인이 통일교회를 부정적으로 비판함으로써 통일교회에 피해를 준 데 대해 사과의 뜻을 표하며, 다시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고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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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명환씨의 실체!월간지의 실상

2004/09/07 00:17


http://blog.naver.com/rhkdtlr0222/14000559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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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보시는 바와 같이 우측의 사진은 탁명환씨

입니다. 과연 이 사진은 조작일까요? 조작한 사진이라면 저도 이렇게 올릴수가 없습니다. 이 사진에 대한 대략의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탁씨가 예수 믿는 사람인가?" 누군가가 이렇게 필자에게 묻는다면 필자는 자신있게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그가 예수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그렇다면 탁씨는 뭐냐?" 누군가가 거듭하여 묻는다면 필자는 그가 [종교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종교인]과 [기독교인]의 차잇점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본 책자와 화보에 나타나듯 그는

[[ 박수무당 ]]이다. 교회 집사라는 위인이 또한 신학교를 두 곳이나 다녔던 사람이, 각 교회에서 강연을 하면서 강사료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골백번 신앙고백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던 사람이, 한 때 목사가 되려고 작정했던 사람이

빨간 무당보자를 버젓이 쓰고 울긋불긋 복( 福 )

자가 무수히 박힌 채색 무당옷을 입고, 사천왕이 그려진 오색부채를 들고, "얼쑤! 얼쑤!"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탁씨가 한국 기독교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제 3세계에서 온 외국인들에게 무당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탁씨를

[샤만 크리스챠니티]라고 주장한다면 어떤이들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러한 반신앙적 행위가 지니는 성경적 의미는 실로 심각한 것이 아닐수 없다.

이상과 같은 가증한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믿는 성경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탁씨를 분석할 수 있겠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엄하게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다.

우리는 이교의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는 <거룩한 >사람들로서 세상에서 위험천만한 일은 주 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성경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날평지에서 "시날 대 축제" 를 벌여 놓고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아합왕 시대에는 요부 이세벨로 인하여

여호화의 종교가 바알, 아세라 등 토속종교에 동화되기도 하였다 .

탁씨는 한국 교회를 [토속종교]인 샤마니즘과 혼합하려는 몰지각한 신앙인들의 모델케이스로서 그의 반 신앙적인 행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탁씨이기에 [조상숭배는 예의범절]이라는

주장에 동의한것이다. [탁명환, 그는 과연 누구인가] 도서출판 두로 저자 이용섭





성경에서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5:22)"고 말씀하시고,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제물을 먹이고 자신뿐아니라

남도 행음하게 하는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아니하는자가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가?

판단은 여러분 자신이 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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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탁명환, 그는 과연 누구인가]. 도서출판



두로. 1994년



탁 씨가 천주교 예수회 수도회의 성직자로 믿었던 알베르토 리베라의 행적



필자도 1991년 중순까지는 탁명환 씨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필자의 시각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자칭 전직 천주교 예수회 수도회의 주교(?) 알베르토 리베라의 문제에 부딪히면서부터 탁명환 씨의 인격과 양심을 조금씩 조금씩 파악하게 되었다. 즉 그때부터 그가 그리스도교의 참된 정신에게 멀리 이탈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칭 예수회 수도회 주교(?) 알베르토 리베라에 얽힌 모든 문제를 좇다 보면 탁명환 씨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선교 1세기를 넘긴 오늘날 한국개신교계의 도덕적, 학문적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이 모든 것들에 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과거 알베르토 리베라가 일으켰던 사건은 대단히 심각하고 비극적인 것이었으므로 앞으로 한국교회사에 그것이 기록되어야 마땅한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에 여라차례 와서 아래와 같은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고 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베르토 리베라의 두 번째 한국행은 극동방송국, 한국대학생선교회, 기독교연합신문사,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챤신문사, 교회연합신문사가 후원을 했다. 또한 국민일보도 1990년 1월 13일자 교계 소식란을 통하여 1990년 1월 15일부터 19일 동안의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의 알베르토 리베라 초청전도회를 소개 보도했다. 그후 필자는 1992년 10월경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관의 사무처장에게 알 베르토 리베라에게 장소를 대여해 주었던 것에 대해서 사과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상과 같이 한국개신교계의 거의 모든 기관과 사람들은 알베르토 리베라가 진짜 전직 천주교 예수회 수도회의 주교인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목사이자 월간 「교사의 벗」발행인이며 아동문학가인 강정훈 씨는 알베르토 리베라의 주장들을 자신의 신학적, 교리적 이론체계의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시작된 가톨릭교회』라는 천주교 비방서적을 펴내기도 했다,

탁명환 씨도 그의 「현대종교」1990년 5월호 p.233에서 알베르토 리베라의 만화시리즈 6권을 천주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책들이라면서 소개 추천했을 뿐만 아니라, 강정훈 씨의『로마에서
시작된 가톨릭교회』라는 책도 1991년 7월호 신간안내란에다 소개 추천했다.
그리고 탁명환 씨는 자신의 번역서인 『어떻게 이단들에게 답해야 할까』의 역자 서문에서 월터 마틴 박사가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이단종파연구가이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번역서 p.206에서 월터 마틴박사가 소장으로 있는 기관이 미국에 있는 "이단에 빠진 사람을 돕는 기관’들 중의 하나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단히 놀랍게도 월터 마틴 박사는 알베르토 리베라를 이시대의 가장 뛰어난 거짓서지자요, 희대의 사기꾼으로 단정하여 무시했다. 반면에 알베르토 리베라는 월터 마틴 박사가 로마교황청의 특수비밀요원이라고 어이없는 주장을 했다.
탁명환 씨는 로마가톨릭교회(천주교회)를 이단 교파로 시종일관 주장해 왔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악명 높은 천주교 비방서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랄프 우드로우의 『로마 카톨릭주의의 정체』를 그의 「현대종교」1990년 5월호에서 광고까지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탁명환 씨는 로마가톨릭교황의 교황을 요한계시록 13:18의 666인 적그리스도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주의의 정체』와 현대종교」1990년 11월호(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고 천장웅 교수의 논문)는 로마교황을 666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는 뜻의 라틴어인
VICARIUS FILII DEI를 제멋대로 근거 없이 666으로 계산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하고 있는데 필자는 『로마천주교회와 알베르토 리베라』 에서 로마교황이 절대로 666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후에도 「현대종교」1993년 6월호의 만화코너란이 라틴어 "비카리우스 필리 데이"를 언급하는 것을 탁명환 씨가 또다시 용납함으로써 이미 그때에도 로마교황을 적그리스도인 666으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


또한 탁명환 씨는 「현대종교」1990년 11월호부터 1991년 4월호까지 무려 반년동안이나 최갑도 목사의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로마가톨릭교회’라는 제목의 신학 논문을 게재했는데 그 논문은 천주교회를 완전한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탁명환 씨는 시한부 종말론자로 잘 알려진 S교회 C목사의 종말론에 관한 글이 실린 책도 「현대종교」1991년 5월호 신간안내란에 소개해 주었는데, 그는 과거에 EC통합 대통령이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곤 했고 탁명환 씨와 대단히 친밀한 사이였다. 이와같이 탁명환 씨의 신학적 수준과 자질은 분명히 기대치 이하 였다. 그러면 탁명환 씨와 한국개신교계의 거의 모두가 전직 천주교 예수회 수도회의 주교로 인식하고 있는 알베르토 리베라, 그는과연 누구인가? 지금부터 그의 신상에 관한 것들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는 1935년 9월 19일 스페인의 한 천주교인 가정에서 태어낫다. 성장한 후 그는 1952년에 개신교로 개종하여 1955년 코스타리카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성서신학교 예비 과정(고등학교 비정규 과정)에
입학하여 한 번 낙제한 후 나쁜 언행들로 인해 퇴학당했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카르멘 리디아 토레스라는 스페인 여성과 동거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셋 두었으나 그녀를 버리고, 1977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온 너리 프리아스라는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후 첫째 아들은 그의 학대로 죽었고 둘째, 셋째 아들은 고아원에다 버렸다.
그는 신학, 철학, 심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콜로라도에 위치한 학위 남발 학교에서 돈을 주고 산 것들이다. 그는 사기 전과가 여럿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 근방 타라사의 침례교회 목사였지만 그 교단에서 제명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1978년부터 전직 천주교 예수회 수도회의 주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적그리스도 정보센터란 괴상한 기관을 운영하면서 로마교황이 요한계시록 13:18의 666이라느니 고 캐더린 쿨만 여사가 천주교의 고위급 스파이라느니 인민사원의 집단 자살의 배후 조정자는 천주교회이고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는 예수회 수도회의 부제이자 로마교황 청의 최특급 스파이라는 따위의 악질적인 천주교 비방서적들을
내기 시작했다. 그것들 중에서 R장 악명 높은 것이 자신의 허위 간증 형식으로 만들어진 6권의 알베르토 만화시리즈다. 그는 적지 않은 부동산과 주유소 겸 식품점도 소유하고 있다(C/O CARIS
〔Christian Apologetics : Research and information Service〕의 연구원인 게리 메츠의 연구보고서).

그런데 탁명환 씨는 그의 번역서 『어떻게 이단들에게 답해야 할까』 에서 CARIS가 미국에 있는 ‘이단에 빠진 사람을 돕는 기관’들 중의 하나라고 소개했고, 원저자인 로버트와 그레첸 파산티노(둘은 부부사이임)가 CARIS의 소장으로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마틴 박사는 이 책의 추천문을 썼다. 월터 마틴 박사에 의해서 거짓선지자로 규정된 알베르토 리베라는 자신의 6권의 만화시리즈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나는 7세 때인 1942년에 예수회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그때부터
개신교회와 목사를 파멸시키는 특수교육만 10년 이상을 받고 17세부터 악질적인 예수회의 하수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천주교회의 비밀 스파이들인 여성들과 공모하여 미인계로서 목사들을 파멸시켰다. 나는 그러한 방법으로 스페인의 개신교회 19개를 괴멸시킨후 그 공로로 인해서 예수회의 주교가 되었다.
그리고 그후에도 나는 역시 예수회의 특급 스파이 활동을 계속적으로 햇다. 그런 와중에서 나는 천주교회의 음모와 비밀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로마교황청에 있는 컴
퓨터에 이 지구상의 모든 개신교 목사와 개신교 신자의 신상카드가 입력되어 있으므로 어느날 그들이 갑자기 다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1965년 과테말라에서의 에큐메니컬 대회에서 이 모든 것 들을 폭로했기 때문에 나는 비밀리에 예수회의 스파이들에 의해서 납치되어 스페인의 어떤 정신병원에 강제적으로 감금되었다. 거기서 나는 물과 음식도 먹지 못한 채 약 3개월 동안 모진 전기고문과 약물투여로 거의 죽을 뻔한 단계에 이르렀지만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중생을 체험하고 기적에 의해서 해방되었다. 해방된 후 나는 이제까지 예수회의 스파이들에게 여러 번 테러를
당했고 지금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만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천주교회의 비리와 음모와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허황되고 어이없는 내용을 사이비종교연구가라는 탁명환 씨는 진실된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한국개신교계의 거의 모두도 한심스럽게 위와 같은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처러 거짓을 참으로 믿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더 무섭고 비극적인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의 기관지인 가톨릭신문도 이 문제를 1991년 4월 28일자 사회면 톱기사로 크게 다루었고, 곧 이어서 8월 11일자 1면 톱기사로 앞보다 더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인 고려대학교 종교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하찮은 것으로 간주했다(그는 통일교를
민족종교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1991년초 이상과 같은 것들을 너무나도 심각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알베르토 리베라의 주장들이 완전한 거짓이라는 것을 입중하는 『로마천주교회와 알베르토 리베라』를 1991년8월말에 출판했다. 그렇지만 출판되자마자 한국개신교계의 거센 반발과 한국천주교회의 냉담한 무관심 때문에 그 당시 필자는 정말로 사면초가가 되어버렸었다. 그러나 전 가톨릭신학대 학장 백민관 신부, 서강대학교 총장 박 홍신부, 그 밖의 적지 않은 개신교 교수들로부터는 분에 넘치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전 총신대 학장 차모 목사는 알베르토 리베라가 진짜 전직 예수회 수도회의 주교인 줄 알고 그 당시 필자가 다니고 있던 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교단)에 전화를 걸어 필자가 진짜 개신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확인까지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는 탁명환 씨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그후 필자는 1993년 2월 중순경「현대종교」의 한 기자로부터 알베르토 리베라의 정체를 폭로한ㄴ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원고를 써서 그것을 배달증명을 통해서 「현대종교」로 보냈다. 그러나 그 원고를 받아본 탁명환 씨는 전화를 통해서 필자에게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것을「현대종교」에 게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 「현대종교」의 기자들은 그 원고의 게재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에게 1993년 3월 11일자부로 그 원고의 게재를 거부하는 이유를 밝혀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냈지만 처음과 같이 그의 수취 거부에 의해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개신교계의 가장 진보적인 신문인 새누리신문 1993년 3월 13일자 광고를 통해 탁명환 씨에게 아직도 알베르토 리베라를 진짜 예수회 수도회의주교로 생각하는지 여부에 관하여 공개
질의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탁명환 씨가 참된 그리스도교인이었다면 그는 결코 위와 같이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탁명환 씨의 게채 거부로 빛을 못
보았던 필자의 원고는 부록으로 실으니 그 글의 가치 여부는 독자들이 판단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앞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탁명환 씨는 알베르토 리베라를 전직 천주교 예수회 수도회의 주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기독교 이단 문제에 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하는 신학과 교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상당한 부분 결여되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같이 가짜 예수회 수도회의 주교 한 사람의 정체도 제대로 식별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죽기 전까지 함부로 한 사람의 일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단 정죄를 무수히 남발했다. 또한 탁명환 씨는 건국대학교 류영흠 교수가 "천주교인도 구원받습니까?’라는 제목하에 어떤 개신교인이 천주교에 관해서 질문한 것에 대해서 답변한 글을 그의 「현대종교」1987년 1,2월호 pp.174~184에 게재했는데 류영흠 교수는 그 글에서 성모 마리아를 4위 1체 중의 하나라고 강조하면서 천주교에서는 구원이 거의 희박할 것이 라는 주장을 했다.
필자가 전직 천주교 예수회 수도회의 주교라는 알베르토 리베라의 문제로 약 2년 9개월 동안 힘겨운 투쟁을 한 결과 한국개신교계에서 교세가 가장 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교단)는 제 78회 총회 때 알베르토 리베라 만화시리즈의 번역자인 서달석 씨에게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4)연구결론
이상의 연구 내용을 종합해볼 때 서달석 씨의 주장은 구원관에 있어서 이단으로 규정된 구원파 권신찬 씨와 같은 주장을 하는 등 성경의 가르침과 본 장로교회의 신경에 현저히 위배되므로 그의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엄금하고 그에 의한 간행물 구독을 철저히 금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대한예수장로회「제78회 총회 보고서」p.689).

결국 탁명환 씨도「현대종교」1993년 4월호의 이단 사이비도서목록에 알베르토 만화시리즈와 알베르토 리베라의 모든 저서들 그리고 서달석 씨가 펴낸 모든 책들을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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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교회 사건

탁명환씨는 1983년 3 ? 4 월호 ‘현대종교’ 잡지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성교회와 당회장 박윤식 목사를 비방한 사건을 일으켰다.
천방지축 이사람을 비방하고 저사람을 비방하다가 느닷없이 대성교회와 당회장 박윤식 목사를 현대종교 3 ? 4 월호 지면을 통해 비방하자 대성교회측에서는 탁명환씨와 현대종교에 도서반포금지 및 게재금지 등가처분 신청을 냈고 재판부는 대성교회의 요구에 대해 ‘그 이유를 인정’하고 대성교회와 당회장 박윤식 목사를 원색적으로 비방한 기사 도는 저작물인쇄, 제본,판매, 반포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주문과 현대종교가 보관하고 있는 잡지의 조판활자 및 잡지를 서웅ㄹ민사지방법원소속 집달관에게 보관케 한다는 ‘도서반포금지등 가처분 결정판결’을 내렸다.
현대종교의 1983년 3 ? 4 월호 배포금지결정판결소식은 시울신문 4월16일자와 경향신문 4월15일자 지면에 보도되어 현대종교와 탁명환씨의 범법행위가 세인들에게 다시 한번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법을 어기고, 박윤식 목사를 계속 비방하여 현대종교 지면에 계속 비방하는 기사를 내보냈고 ‘도서반포금지등 가처분 결정판결’을 불복하고 문제의 기사가 실린 월간지를 미국으로 빼돌려 팔아 구차한 이득을 취하는 작태를 보였다.



대성교회와 탁명환씨는 이단시비에 얽힌 악연을 갖고 있다. 결국 그것이 탁씨의 죽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으나 원래부터 탁씨가 대성교회를 비난했던 것은 아니다.
박윤식(대성교회)목사와 탁소장(현대종교)의 만남은 197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문안교회 목사의 소개로 이단사이비 종교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는 탁씨를 처음 만난 박목사는 탁씨와 뜻을 같이하고 연구소에 지원을 하는 등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처음엔 탁씨도 대성교회 집회에 참석, [대성교회 교인들의 예배 모습을 보니 대성교회 같은 교회가 하나만 더 있어도 교리적으로 틀린 것을 바로 고칠 수 있겠다]며 높이 평가했다. 박목사 역시 탁씨를 통일교 등과 싸우는 유일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연구소 활동을 돕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형호제하던 시절은 불과 몇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금이 가게 된 것은 79년 탁씨가 통일교 비판 서적인 [통일교 실상과 허상]을 출판하려다가 이를 알게 된 통일교 측으로부터 출판을 보류한다는 조건으로 수억원을 받기로 하고 이 돈을 받기 위해 다방에 나갔다가 그들의 음모에 걸려 공갈 사기 죄로 체포되면서부터. 당시 박목사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지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 탁씨에게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이단 시비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신동아1994년 4월호>




탁명환씨 영결식에는 박찬종 의원도 참석했다






언론은 탁명환씨가 종교계의 영웅이나 순교자인 것 처럼 편파보도








이용섭














1994년 2월 18일 대성교회의 임홍천 씨가 찌른 칼에 맞아 피살된, 이단 사이비 종교연구가로서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진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겸 월간 현대종교 발행인이었던 고 탁명환 씨(이하 고 생략)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은 대단히 동정적이고 긍정적이며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탁명환 씨 빈소에 우리 나라의 최고 지도급 인사들인 김대중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영락교회 원로 목사인 한경직 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수환 추기경, 송월주 스님, 김도현 문화체육부 차관, 조순형 민주당 의원, 김효은 전 경찰청장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조화를 보내거나 직접 방문하여 조문했다. 또한 탁명환 씨의 영결식장에는 박찬종 의원(당시 신정당 대표)과 김상철 전 서울시장이 참석했다.

게다가 우리 나라의 거의 모든 언론은 반대편의 주장은 일절 무시한 채 탁명환 씨가 사명감과 정의감에 충일했던 종교계의 영웅이나 순교자인 것 처럼 왜곡, 편파 보도를 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탁명환 씨에 대해서 좋은 감정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일들이 발생했을까 ?

그것은 과거 우리 나라의 언론이 그들의 무능함과 불성실 때문에 탁명환 씨에 관해서 너무나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탁명환 씨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와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또한 필자도 분명히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필자는 탁명환 씨 사후 언론의 무분별하고 정확치 못하며, 공정치 못한 보도 때문에 그들에게 전화도 많이 하고 기고도 여러 번 했지만 전혀 필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 다만 동아일보의 기자 한 명만이 필자를 찾아왔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이제 역사와 민족과 교회 앞에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펜을 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탁명환 씨는 멀지 않아 한국 교회사에 등장할 인물이다(물론 현재의 한국 교회사에도 등장하고 있음).

그때 이 부족한 소책자는 한국 교회사가들이 그에게 정당하고 공정한 평가를 내리게 할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책자는 탁명환 씨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각을 상당 부분 교정해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계의 현주소를 알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우리 나라 형법 제308조 "사자의 명예훼손" 조항으로 인해서 알고는 있지만, 그것의 증거를 제출할 수 없는 것들은 일절 다루지 않았다. 또한 나중에 기회가 주어지면 이 소책자의 내용을 조금 더 보충하도록 하겠다.



이용섭씨는 프리랜서로서 글을 써왔다. 그는 천주교인이지만 천주교의 마리아우상론을 끊임없이 제기해 온 천주교 이단아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개신교에 가까운 천주교도 이다. 이씨는 그간 교회연합신문, 당당뉴스 등 교계뉴스에 여러번 글을 게재하여 개신교의 개혁론을 주장해왔다. 특히 탁명환과 조용기 목사에 대한 비판은 날카로운 시각과 명확한 증거능력을 갖고 있다.

그는 1954년 부산에서출생했고, 전 월간 "시사정경" 객원기자, 전 월간 "월드 코리아" 객원기자(차장대우), 전 월간 "선택" 객원기자(차장)를 역임했고, 저서로는 1. 로마천주교회와 알베르토리베라 2. 교황제도에 대한 교회사적 비판 3. 탁명환, 그는 과연 누구인가 4. 목사님, 정신차리소!(조용기목사의 신앙관 해부) 5. 여의도의 바벨탑, 수필, 칼럼, 논문 다수를 발표했다.

에클레시안이 이용섭씨의 글을 싣는 것은 누군가가 탁명환씨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론의 기사는 언제든지 받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