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CCM, 열린예배는 일반 교계에서도 비판 - 고신포럼
열린 예배의 광풍이 교계를 휩쓸고 갔습니다. CCM은 조금 일찍 그리고 열린 예배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개념들은 일반 교계에서도 교과서를 좀 아는 쪽에서는 비판합니다. 이 노선은 이 노선의 위치에서 맡을 일이 따로 있고, 그런 저급의 문제들은 교계 일반 전문가들의 글을 통해서도 충분하게 논할 수 있다고 봅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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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2013 수도권지역 경인/서경노회 신학포럼, 참빛교회에서 열려
코닷
2013년 수도권지역 경인/서경노회 신학포럼이 지난 5월 2일(목) 120여명의 목회자 및 교역자, 장로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부천 참빛교회당(담임 김윤하 목사)에서 있었다.
고려신학대학원은 올해부터 전국 8개 지역 중 특정 지역을 선정하여 신대원은 매년, 지역은 4년에 한 번씩 개최(대전충청, 수도권(2013년) / 전라, 대구경북(2014년) / 제주, 부산(2015년) / 울산, 경남(2016년)하고자 계획하고 2013년 대전충청과 수도권 지역을 4군데로 나누어 신학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다.
▲ 단체사진
이에 따라 2013년 들어 네 번째로 개최된 경인/서경노회 신학포럼은 준비위원장인 박재우 목사(경인노회장)의 사회, 이성호 기획실장의 인사, 김광주 목사(경인노회 부노회장)의 기도에 이어 이성호 교수가 “성찬으로 회복되는 예배”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다.
“성찬으로 회복되는 예배”
▲ 이성호 교수
이성호 교수는 강의를 통해 “오늘날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로 대변되는 탈 형식적 예배는 교회 문턱을 많이 낮추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름을 추구하기 보다는 세상과 같음을 추구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음악에 있어서 CCM은 일반 가요와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과연 이런 식의 예배가 교회를 튼튼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 즉 거룩함이 없다면 사람들이 교회에 올 이유가 무엇인가? 세속화의 거대한 흐름을 교회가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면, 교회는 자신의 표지인 설교와 성례를 통하여 자기 거룩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교회에서 설교는 들리는 거룩성이라고 한다면, 성례는 보이는 거룩성이다. 거룩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냄에 있어서 성찬은 설교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성찬은 교회의 거룩성을 확보하게 함으로 예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성찬은 무엇보다 식사(천국잔치)의 의미가 드러나도록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 제정말씀, 찬송, 등이 지금 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환한 분위기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자주 성찬식을 시행하여 성도의 교제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찬은 작은 교회에서 훨씬 더 용이하게 시행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부분에 있어서 큰 교회에 비해 열세에 놓은 작은 교회는 이 장점을 최대한 살릴 필요가 있다. 성찬의 세부적 시행에 있어서 너무 특별하고 새로운 예식을 추구하기 보다는 보편적 예식을 추구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예배를 보다 더 건강하게 하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 김종욱 목사
논찬으로 김종욱 목사(새순교회 담임)는 “이성호 교수의 논문을 통해 첫째, 왜 우리가 성찬에 대한 기대와 열망, 또는 실천의지가 없는가?에 대한 이유를 깨닫게 해 줘서 감사하다. 둘째, 성찬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언급해 줘서 매우 감사하다.
셋째, 성찬을 예배와 관련하여 예배의 필수 요소로 생각하지 않고, 예배와는 별개로 생각하여 반드시 예배 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고, 설교와의 관계에서 설교는 믿음을 일으키고 성찬은 믿음을 강화시킨다는, 그리하여 설교와 성찬은 본질적으로 연합체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지적은 고마운 일이다. 또한 그 동안 소외되었던 성찬이 예배에서 올바른 자리매김을 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에 동의 한다. 넷째, 삼위일체적 예배와 관련하여 성찬이 삼위일체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너무 기독론적으로만 이해되고 적용되어지다보니 성찬에 임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주어지는 신비적인 연합, 능력, 은혜에 대한 경험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성찬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요소, 즉 성찬에서 성찬의 신비적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당한 세례가 전제되어야 한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예배의 회복을 부르짖으면서 찬양과 분위기의 회복으로. 또는 프로그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우를 범한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의 회복은 성경의 가르침처럼 말씀과 성찬 모두의 회복이다. 말씀이 믿음을 일으키고 성찬을 통해 성령께서 신비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도록 하자. 논문을 통해 귀한 깨달음과 도전, 그리고 성찬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새로이 갖도록 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하였다.
서경노회 서기 박승환 목사가 기도함으로 오전 강의를 마치고 부천 참빛교회에서 준비한 점심식사 및 간식을 나누면서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서경노회장 강영국 목사의 사회, 서경노회 부노회장 조원근 목사의 기도로 시작된 오후 포럼에서는 하재성 교수(목회상담학)가 “치유적 예배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다.
치유적 예배 가능한가?
▲ 하재성 교수
하재성 교수는 강의를 통해 “예배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인격적인 섬김과 교제의 장으로서 모든 믿는 자들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예배자인 인간의 경험과 필요가 다양하지만 예배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현실적 필요 때문에 예배의 신비롭고 상징적인 본질이 바뀔 수는 없다.
예배를 통해 예배자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경험을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이 만나고 거기에서 영적인 교제가 일어난다. “예배를 통해서 수직적으로는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수평적으로는 예배에 참여한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배는 수직적인 동시에 수평적인 교제와 나눔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속받은 사람들의 교제”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 시대와 문화마다 예배자 없는 예배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예배는 철저히 예배자의 언어와 가치와 삶을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그 가운데서 예배자들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이 목회자이다. 그리스도 이외에 그 누구도 예배의 중보자가 아니지만 목회자는 말씀과 성찬으로 은총이 각각의 몸과 삶에 임하도록 예배를 인도한다. 백성들의 마음을 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향하게 요청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가 그 각각의 삶에 내려지기를 기도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고난과 삶의 모순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목회자이어야 한다. 예배 인도자의 인격적인 경청과 성도 개개인에 대한 존중은 예배에서 내려지는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를 방해없이 전달하는 핵심 요소이다.
이와 더불어 예배의 각각의 순서가 가진 의미가 예배자들에게 인격적이고 반복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소중한 은혜의 메시지가 면밀하게 전달되기 위해 예배 인도자는 예배자들의 개별적인 삶의 이야기에 익숙해야 한다. 그 뿐 아니라 에배자들의 삶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목회적 반응을 보이는 인격적인 사역자이어야 한다. 거기에서 인격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소통을 경험할 수 있다. 성도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그들의 인격적인 신뢰를 받지 못하는 목회자가 인도하는 예배가 과연 얼마만큼의 하나님의 은혜를 소통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인격은 유연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예배 의식에서 경직성을 극복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연속성과 유연성은 동시에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집중은 상담과 달리 예배를 그르칠 수 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엎드림으로써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주권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예배 속에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예배의 신비성은 인간의 경험의 다양성을 모두 품을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거기에서 예배의 치유성이 나타난다. 그 치유는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 지은재 목사
다양한 예배와 예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성도들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성례를 통해 자신이 성령 안에서 구원의 확실한 표를 받았음을 알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구원이 상징적이거나 모호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확실한 표를 받았음을 인식할 때 은혜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구원과 신령한 복과 같은 영적인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배의 풍성함은 목회자 자신이 알고 누리는 만큼 성도들과 공유할 수 있고, 성도 자신이 이해하고 생각하는 만큼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예식을 만들거나, 치유를 주제로 새로운 형태의 예배 형식을 창조하기 보다는, 주어진 예전과 예배의 형식을 보다 풍성하게 하고, 그 속에 포함된 다양한 예배 순서들의 의미를 매 시간마다 나눔으로써, 그 예배가 자동화된 습관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깊이 체험되는 실존적 사건으로 경험되는 것이 예배를 치유되게 하는 것이다. 예배가 예배자들의 삶을 품고, 하나님의 은총이 성육신한 그리스도와 같이 그들의 삶에 소통될 때 그들의 삶은 치유적인 예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기획실장 이성호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패널 토의 및 토론 시간에는 강의한 하재성 교수와 패널로 지은재 목사(일산백석교회 담임), 김종욱 목사가 참여하여 먼저 패널로서 지은재 목사가 두 교수의 강의에 대해 간략히 논찬하고 이후 강사와 패널 간에 질의 토론을 나누고 또한 경인/서경노회 목사들도 두 강의에 대한 질의응답을 통하여 1시간 20분간의 열띤 토론 시간을 가졌다.
이어 경인노회 서기 정연규 목사가 기도하고 광고함으로 모든 행사를 마쳤다.
2013년 05월 09일
고신의 공예배, 무엇이 본질인가?
2013 중부권지역 대전/충청노회 신학포럼
코닷
2013년 중부권 대전/충청노회 신학포럼이 지난 4월 25일(목) 60여명의 목회자 및 교역자, 장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새하늘시민교회당(담임 정영호 목사)에서 있었다.
고려신학대학원(김순성 원장)은 올해로 8회째를 맞이하고 있는 신학포럼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지역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활성화 방안에 대해 청취하고 지역 포럼 장소에서 설문조사 및 토론회를 갖고 있다.
▲ 단체사진
고려신학대학원은 올해부터 전국 8개 지역 중 특정 지역을 선정하여 신대원은 매년, 지역은 4년에 한 번씩 개최(대전충청, 수도권(2013년) / 전라, 대구경북(2014년) / 제주, 부산(2015년) / 울산, 경남(2016년)하고자 계획하고 2013년 대전충청과 수도권 지역을 4군데로 나누어 신학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2013년 들어 세 번째로 개최된 대전/충청노회 신학포럼은 준비위원장인 정영호 목사(대전노회장)의 사회, 이성호 기획실장의 인사, 진영부 목사(대전노회 부노회장)의 기도에 이어 유해무 교수가 “고신의 공예배, 무엇이 본질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다.
▲ 유해무 교수
이어 유해무 교수는 강의를 통해 “예배 역사에서 살핀 대로 하나님의 기여에 속하는 세례와 성찬이 있어야 공예배이다. 그래야 공교회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토론이 요청되며, 그런 과정을 거쳐 공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한다. 세례가 설교와 함께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장로가 물그릇을 들고 수종드는 방식보다는 별도의 세례단이나 세례소를 설치하여 세례의 의미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설교단과 성찬상은 동격이며, 이른바 ‘아랫 강단’이라는 표현은 합당하지 않다. 그리고 성찬상을 성결하게 지키기 위하여 개혁자와 개혁신조들은 권징을 교회의 표지에 넣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기여인 말씀과 성례가 바로 서야 공예배도 바로 선다. 그래야 비로소 언약의 상대인 예배자의 응답인 기여도 나온다. 예배자는 항상 언약의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자로 나설 수 있다. 그래서 영광의 찬송이 있고 회개기도가 있다. 또 헌금이 있고 감사 찬송과 화답 찬송이 있다. 이런 요소들은 다 언약적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기여에 대한 예배자의 응답이다. 응답은 구원 선포를 듣고 구원을 체험하고 난 뒤에 드리는 찬양의 성격을 지닌다. 즉 대표기도는 구원 사역을 나열하면서 삼위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행하였음으로 아뢰고 구원의 주인이심을 찬양한다.
찬송도 그렇다. 찬송 역시 구원을 간구하거나 체험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조 있는 기도이다. 그렇다면 찬송과 기도는 언약적 사건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응답하는 예배자로서의 기여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현재 고신교회 안에서 찬송이 정말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인가? 애초부터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부흥의 영향으로 구원의 체험을 담고 있지만, 체험자의 경험이 중시되는 찬송의 전통을 전수받았다. 여기에는 옳은 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약을 중시하지 않고 개인의 감정과 결단을 촉구하는 특성을 지닌다. 굳이 언약을 말하자면 우리가 주도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려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본래적인 언약은 아니다. 우리는 구원을 즐거워함에서 더 나아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을 불러야 한다. 그러므로 공예배의 찬송은 송영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찬송가는 어떠한가?
교제의 좋은 예가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언약의 법이며, 언약 갱신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십계명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십계명을 들으면, 우리는 교독과 동시에 응답한다. 여기에는 지난 한 주간 동안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의 응답과 동시에 앞으로 한 주간은 온전하게 지키겠다는 서약의 응답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예배에서 십계명을 교독하는 좋은 전통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아무리 주일 오전에 시간의 제약이 있다하더라도, 십계명을 읽도 들으면서 언약을 갱신하고 항상 예배가 언약적 교제임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예배 집례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요청된다. 집례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 화목의 말씀을 맡은 그리스도의 사신이다(고후 5:19). 그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명령을 주셨고(마 28:18-20) 성찬 집례를 명하셨다(눅 24:19; 고전 11:25-26). 달리 말하자면 집례자의 섬김을 통하여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기여가 나타나며, 예배에서 집례자는 삼위 하나님의 사신인 셈이다. 곧 목사가 이 일에 수종(隨從)드는 사역자이다. 목사는 이 사역을 항상 당회와 협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사역이 얼마나 엄위함을 알아야 한다. 동시에 아무나 설교와 성례를 집례할 수 없다. 고신교회 안에서도 아무나 설교하는 경향이 있다. 성례는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말씀의 사역조차 아무에게나 맡긴다면, 이것은 언약의 갱신인 예배에서 하나님의 기여를 무시하는 언약 파기에 해당하는 큰 잘못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신학교육도 이해하여야 한다.
이 외에도 고신교회가 공교회로서 공예배를 바로 세워야 할 바가 많이 있을 것이다. 개혁교회의 모토 중 하나인 ‘계속적 개혁’은 어느 영역보다도 예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배는 언약적 사건이며, 언약의 쌍방인 하나님과 예배 회중의 교제이다. 이를 공예배가 정확하게 바르게 드러내어 고신교회가 공교회임을 확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논찬으로 곽창대 목사(한밭교회 담임)는 “먼저 유해무 교수의 글과 발표를 통해 명쾌한 가르침과 크게 도전 받은 점들을 몇 가지로 간추려보겠다.
1. 발표자는 개혁신학에 근거한 예배의 본질과 정신을 명료하게 밝혔다. 고신교회에서 주일마다 공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는 없다. 그리고 주일의 공예배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기되는 질문은 ‘주일의 공예배가 성경 계시에 근거한 바른 예배인가?’라는 것인데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적으로 성경 계시에 근거한 예배의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발표자가 예배를 언약적 사건으로 정리한 것은 아주 성경적이며 그것이 개혁신학적 예배관의 핵심임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2. 발표자는 성경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 예배의 변천사를 언약적 사건으로서의 예배라는 관점에서 평가와 아울러 간명하게 정리한 것도 논리가 정연할 뿐 아니라 현재 고신교회의 예배가 나아가야 할 분명한 방향과 개선해야 할 문제점들을 개괄적으로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3. 발표자는 개혁신학의 터 위에 세워진 고신교회들이 총회가 규정한 예배지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교회의 연합과 일체성 확립이 크게 손상될 것이라고 우려한 것도 지극히 당연한 신학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4. 발표자가 제시한 대로 예배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친밀한 교제의 장이 된다면 그 예배를 통해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로 성장할 것을 기대하게 한다.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신 것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부어주시기 위함이며 그 초청에 응답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할 뿐 아니라 은혜 받은 자답게 살려는 결단과 함께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기여와 백성들의 기여라는 쌍방간의 질서정연하고 조화로운 교통을 고무하기 위해 적절한 순서를 정하는 것이 마땅한데 총회 헌법의 예배지침에 예시한 주일 공예배의 순서는 복잡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에 부합하는 적절한 순서라고 평가할 수 있다.
5. 예배에서 하나님의 기여 부분 가운데 핵심인 설교와 성례의 바른 이해와 균형 잡힌 집행이 요청된다는 발표자의 제안은 마땅하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하면서 참회와 결단으로 나아가게 하는 십계명의 낭독도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6. 예배의 종말론적인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발표자가 강조한 것도 아주 유익했다. 예배자는 지금 예수님의 부활과 승리를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날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러 삼위일체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하는 천상의 예배를 지금 여기서 맛보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바로 주일의 공예배임을 이해할 때 주일의 예배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발표자의 글을 더 잘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리려고 한다. 1. 플리니 총독의 편지에서 고대교회의 예배 모습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는데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의 속사도들이나 교부들 중에서 그 당시의 예배의 모습을 묘사한 글은 없는가?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란다. 더불어서 초대교회나 고대교회의 예배 모습이나 순서가 개혁신학적인 예배의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교회의 예배는 계속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의 예배가 그때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로 발전해야 할까요? 즉 예배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면 어떤 점에서 그리해야 할까요?
2. ‘금령’에 따라 두 예전이 통합되었다고 했는데 그 금령이 무엇인가? 무슨 이유로 이전에는 분리되어 실시하다가 그때부터 통합이 되었을까요?
3. 예배가 본질에서 벗어나면 교회도 변질됨을 교회사를 통해 증명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성직자 중심의 예배와 교회라고 했다. 발표자는 고신교회가 대체로 언약적 사건으로서의 예배 혹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상호 교제를 구현하는 교회라고 생각하는가? 혹 고신교회가 회중을 ‘예배를 보는 관망자’로 전락시킨 면은 없는지 즉 성직자 중심의 일방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4. 성찬에 대해서는 이성호 교수도 발표하겠지만 공예배중에 성찬을 자주 시행하기위해서는 어떤 점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까요?
5. 발표자는 ‘예배의 요소를 다 공예배에서 시행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즉 당회가 예배의 요소와 순서를 결정할 때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상당한 제한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자유가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제한적인 틀을 유지해야 할까요?
6. 발표자가 참여했던 국내외 여러 교회들의 예배에서 그래도 개혁신학적인 예배였다고 인정할 수 있는 예배가 있었는가? 구체적인 사례를 말씀해주면 감사하겠다.
7. 이 땅에서의 예배가 항상 불완전한 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로 당신의 백성들을 초청하시고 만나셔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개혁신학적인 바탕과 거리가 먼 교회들의 예배가 개혁신학적인 예배에는 좀 미흡해도 그 교회들의 예배를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8. 발표자가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다면 주일의 공예배 순서를 어떻게 배열하겠는가?
예배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충청노회 서기 박상우 목사가 기도함으로 오전 강의를 마치고 새하늘시민교회에서 준비한 점심식사 및 간식을 나누면서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충청노회장 정경현 목사의 사회, 충청노회 부노회장 오병욱 목사의 기도로 시작된 오후 포럼에서는 이성호 교수가 “성찬으로 회복되는 예배”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다.
▲ 이성호 교수
이성호 교수는 강의를 통해 “한국교회에서 성찬은 제대로 혹은 충분히 가르쳐지지 않고 있으며 교회에서 올바르게 실천되고 있지 않다. 가장 큰 문제점은 성찬이 지나치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하나의 특별한 연례행사로 치러지고 있다. 성찬이 예배에서 주변부로 밀린 결과 초대교회 원래의 예배 모습에서 상당히 멀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예배 갱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데 진정한 예배 회복은 신실한 성찬 집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본 논문에서는 예배에 있어서 성찬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성찬을 다루기 전에 예배가 무엇인지가 정해져야 한다.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예배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예배의 주관자이시고 그의 백성은 모임에 초청받은 손님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에게 자신의 종들을 사용하셔서 은혜의 수단을 통해 은혜와 복을 내리시며 언약백성들은 여기에 대해서 기도와 찬양으로 응답하신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성찬은 예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은혜의 수단으로서 성찬은 설교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설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로 교인들에 들려주는 것이고, 성찬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물체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은 철저하게 설교에 종속적이다. 설교의 내용이 복음적이지 않다면 성찬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상적인 예배는 설교를 통해 복음이 선포되어 성도들에게 믿음을 일으키고 성찬의 시행을 통하여 그 일으켜진 믿음이 굳세게 서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은 둘 다 모두 성례로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복음을 다른 형식을 통해 성도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설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세례와 성찬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다. 세례가 부실하면 성찬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성찬이 보다 강화되기 위해서는 세례와 성찬을 밀접하게 연계시켜야 하면, 정회원에게만 성찬을 제한시키는 울타리 성찬(fenced communion)이 실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직분자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특별히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성찬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직분의 약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장로와 집사가 성찬에 수종드는 종이라는 인식이 많이 약화되었다. 설교 중심적 예배로 인하여 목사만이 예배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적지 않은 성도들이 좋은 설교를 찾아 헤매는 현상이 오늘날 많이 만연해 있다. 성찬의 회복을 통하여 각 직분자들이 모두 예배에 참여함으로 목사 중심적 예배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 발제자와 패널과의 질의 응답
성찬은 무엇보다 식사(천국잔치)의 의미가 드러나도록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 제정말씀, 찬송, 등이 지금 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환한 분위기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자주 성찬식을 시행하여 성도의 교제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찬은 작은 교회에서 훨씬 더 용이하게 시행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부분에 있어서 큰 교회에 비해 열세에 놓은 작은 교회는 이 장점을 최대한 살릴 필요가 있다. 성찬의 세부적 시행에 있어서 너무 특별하고 새로운 예식을 추구하기 보다는 보편적 예식을 추구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예배를 보다 더 건강하게 하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충청노회장 오병욱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패널 토의 및 토론 시간에는 강의하신 유해무, 이성호 교수와 패널로 곽창대 목사, 임광섭 목사(천안새힘교회 담임)가 참여하여 먼저 패널로서 임광섭 목사가 두 교수의 강의에 대해 간략히 논찬하고 “앞으로 예배에 있어 송영, 십계명, 세례, 성찬 등 예전을 강화 해 나가야 겠다”고 말했다.
이후 강사와 패널 간에 질의 토론을 나누고 또한 대전/충청노회 목사들도 두 강의에 대한 질의응답을 통하여 1시간 20여분 간의 열띤 토론 시간을 가졌다. 이어 대전노회 서기 배정환 목사가 기도하고 광고함으로 모든 행사를 마쳤다.
2013년 0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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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회복을 위해서는 말씀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
코닷
“16세기 종교개혁이 기독교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교육이다. 이 교육 효과는 "자국어 성경"과 "자국어 설교"를 통해 나타났다. 유럽 각국의 자국어로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지만 자국어 성경 번역을 정당화하고 보편화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이다.”
5월 1일(수) 대전 대덕구 중리동에 위치한 총회세계선교센터에서 있었던 미래교회포럼 셋째 날 오전 발표에서 황대우 교수(고신대학교 교양학부)는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의 기원과 의미 및 적용”이라는 제목를 가지고 이와 같은 내용을 발표하였다. 황 교수의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취리히의 성경공부모임
자국어 성경을 보급하고 자국어 설교를 하는 데 루터가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하지만 루터는 자국어로 드리는 예배는 좋게 생각했지만 자국어 예배 및 설교는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일시적 방편 정도로 생각했다. 츠빙글리는 1520년 이후부터 다른 동료들과 사적 모임을 통해 연속강해 형식으로 성경공부를 진행해 오다가 1525년 6월 19일 "예언연구회" 모임을 개설하였다. 이 예언연구회는 비록 성직자들에 의해 주도된 모임이었고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의 참여가 의무적이었으며 이들을 위한 성경해석과 신학교육이 주요 목적이었다. 하지만 성경해석과 신학에 관심이 있다면 학생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즉 도시의 시민들인 일반교인들도 참석할 수 있었다. 예언연구회는 당대의 학교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이 예언연구회는 당시 성경을 가르쳐야 할 성직자뿐 아니라 성경과 성경에 근거한 교리를 알고자 하는 일반 교인에게 말씀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일반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취리히의 예언연구회는 유럽의 수많은 개혁교회와 영국의 국교 및 비국교도에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임은 성경해석을 위한 종교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 발표하는 황대우 교수
제네바의 성경공부모임: 금요성경연구회
칼빈의 제네바에서도 취리히의 예언연구회와 같은 모임이 "꽁그레가씨옹"(모임, 회집, 회합, 회중이란 뜻)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제네바에 이런 모임을 소개한 것은 파렐과 칼빈이고 그 시기는 1536년 경으로 추정된다. 제네바의 금요성경연구회는 취리히의 예언연구회를 모체로 한 것이므로 이와 유사하게 목회자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하고 대중에게는 자유로운 참여 형식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이 모임의 설립목적은 제네바 교역자들 사이의 교리적인 혼합이나 불일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1540년대와 1550년대의 금요성경연구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목회자와 일반인을 합하여 모두 50~60명 정도였던 것으로, 그리고 이 중 약 40%는 목회자이고 나머지는 비목회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요성경연구회의 진행은 취리히의 예언연구회처럼 선택된 성경 본문의 연속강해 형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교도의 성경연구모임: 말씀연구회
영국에 개방적인 설교연구회가 처음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엘리자베스 집권 초기인 1560년대로 볼 수 있다. 1572년에는 공적 모임이 되었고 세 명의 발언자가 일반 청중 앞에서 성경을 해설하는 형식이었다. 초기의 모임은 단순히 성직자 훈련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점차 발전해 가면서 일반교인들을 수용하여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교역자들의 모임을 통해 다음 모임과 그 모임에서 다룰 성경 본문을 결정했으며, 설교연구회에서 논의된 교리와 발언자들의 삶과 도덕을 평가하고 감독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육받지 못해 설교연구회에서 자유롭게 발표할 수 없었던 성직자들이 얼마나 공부에 진전이 있는지 살피는 것 역시 교역자들의 몫이었다. 방청이 허락된 자는 설교자들이 정한 본문을 찾아 읽을 수 있었고, 성직자들이 모임을 가지는 통안 일반 교인들은 들었던 것을 가지고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신학생들의 훈련과 연습을 위해 사용되는 순서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지역에 따라 신학교로 발전한 설교연구회도 있었다. 1570년대에는 설교연구회가 국교도, 비국교도를 가리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친숙한 관행이 되었다. 당시 통치자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종교에 관하여는 중도적 입장이었지만 영국 교회의 통일된 모습을 원했고 국민에게 반항적인 지성보다는 무지한 순종을 원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의 신앙적 지성을 깨우는 교육의 통로가 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설교연구회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성경공부모임의 의미
16세기 성경공부 모임은 종교개혁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성직자뿐 아니라 신앙의 열정을 가진 일반 성도들의 지성을 깨웠다. 특히 이 모임의 배경과 목적은 기독교 교리의 통일성에 있었다. 교리의 통일성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교인들에게도 성경을 가르쳤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에서 말씀의 권위와 질서가 바르게 회복될 때 비로소 교회의 잘못된 관습과 윤리적 타락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모임은 지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모임이었다. 일반 교인들은 단순히 방청객이 아니라 질문과 토론을 통해 성경공부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교역자들만을 위한 모임이 있었는가 하면 일반 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모임도 있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16세기 성경공부 모임은 후대에 세 종류의 형태로, 즉 교역자를 양성하는 공적인 신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들의 재교육 및 평생교육, 일반 교인들의 신앙 교육을 위한 사적인 성경공부모임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경공부모임의 적용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은 교회에서 말씀의 권위와 질서를 바르게 회복하기 위한 모범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것을 오늘날 그대로 이식하기는 어렵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경공부모임의 원리와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교회에 응용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다.
오늘날 교계에는 개교회주의가 만연하다. 지역교회간 연합을 통한 동반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같은 지역 내에 있는 가까운 교회들의 교역자들이 사심 없이, 경쟁의식 없이 동역자로서 함께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 정기적인 모임을 조직하는 것이다. 현실을 감안할 때 이상적으로 보이나 오늘날은 이러한 모임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시찰회나 교역자회를 성경공부모임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이것이 잘 정착하면 지역교회의 연합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상호간 경쟁의식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 논찬하는 이성호 교수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문제 해결의 시작과 끝
황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문제 해결의 시작점이자 종착역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단순히 16세기 종교개혁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 교회이기를 원하는 모든 불완전한 지상교회가 끊임없이 자성적으로 외쳐야 할 공동의 구호”라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목회자에게 있어 건강한 목회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과 설교”라는 것을 천명하며 “성경과 설교는 목사가 자신의 양떼인 성도와 더불어 가지는 거룩한 영적 교제의 수단이다. 이 수단을 통해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교회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설교의 권위가 바르게 회복되는 곳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도 회복되고, 그제야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게 될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논찬을 맡은 이성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는 “황 교수의 발표는 이 주제와 관련한 최초의 한글논문인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을 교회에 적용할 필요가 있는데, 현재 교회 모임 중 불필요한 모임을 제하고 이러한 성경공부모임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청중에서는 “실제로 노회 및 시찰회 현장에서 이렇게 실행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앞으로 포럼을 하면서 성경공부모임과 관련된 내용을 따로 주제로 잡아 다룰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2013년 0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