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초기 고신에 미친 박윤선의 영향 - 허순길
초기 고신에 미친 박윤선의 영향
미래교회포럼에서 허순길 교수 발표
코닷
4월 30일(화) 대전 대덕구 중리동에 위치한 총회세계선교센터에서 열린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 두 번째 날 오전포럼 시간에 허순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은퇴교수)는 “고신초기와 박윤선”이라는 제하의 발표를 하였다. 허순길 박사는 고신 2세대에 속하는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박윤선 박사가 고신을 떠나기 전 그의 제자 및 비서로 있으면서 개인적인 교분을 맺었다. 허 박사는 박윤선 목사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경험과 박윤선 목사와 관련한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회고적인 발표를 진행하였다.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허순길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고신의 터를 놓은 신학자 박윤선
박윤선은 고려신학교 설립에 동참하였고, 고신교회 출발 초기 고신의 신학과 신앙의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상동, 주남선 목사가 순교적 신앙을 가진 신실한 분들로서 신학교 설립에 열의가 있었으나 신실한 정통신학의 지식을 갖춘 신학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박윤선 역시 마침 신학교육의 기회를 찾고 있던 터라 한상동 목사의 요청을 쾌히 수락하여 신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고려신학교가 개교했을 때 전임교수로 봉사한 신학자는 박윤선 뿐이었다. 비록 한상동, 한명동, 이상근, 박손혁 목사가 시간강사로 도왔지만, 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박윤선은 온종일 주경신학, 조직신학, 성경신학, 성경원어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이후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한부선 선교사, 성경장로교회의 마두원, 최의손, 함일돈이 내한하여 도움을 주었다.
고신 초기 칼빈주의를 주도한 박윤선
박윤선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두 번 유학하여(1934-36, 1938-39) 메췐(G. Machen)과 밴틸(C. Van Til)의 지도 아래서 신약과 변증학을 전공하면서 칼빈주의를 깨닫게 되었다. 박윤선은 자서전 『성경과 나의 생애』에서 “평양신학교 시절에는 보수주의이면서 주관적 체험을 탐구하는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평양신학을 마친 후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연구한 후부터는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 신학을 재정비하게 되었다.” 라고 회고한다.
박형룡은 초기 선교사의 신학을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을 유럽의 칼빈 개혁주의에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라고 평가했지만 박윤선은 달랐다. 그는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에서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보다 근본주의 신학이 짙게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는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칼빈주의 신학에 매혹되고 이를 강조하였다. 이는 메췐과 밴틸 아래서 칼빈주의 신학을 정비한 이후 카이퍼, 바빙크, 스킬더의 교의학과 흐로솨이데, 흐레이다너스 등의 주경을 접한 결과로 보인다.
▲ 초기 고신에 미친 박윤선의 영향에 대해 발표하는 허순길 박사
순수한 개혁교회를 지향한 박윤선
순수한 개혁교회를 지향한 박윤선의 노력은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박형룡이 떠날 당시 그를 따르지 않고 고려신학교에 그대로 머문 것을 통해 나타난다. 박윤선은 박형룡의 제자였음에도 그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박윤선은 한상동, 주남선과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선교사들의 배경 등을 포괄적으로 이해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에서 대세를 이루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선교사들은 미국 북장로교회(당시 연합장로교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북장로교회는 이미 자유주의를 수용하였고 중심 신학교인 프린스톤 신학교는 1929년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재편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윤선은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과 협력하는 것이 정통적 장로교회 건설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오직 성경’의 원리에 선, 고신의 부흥을 이끈 박윤선
박윤선은 성경의 무오를 믿고 절대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율주의를 반대하고 타율주의를 제창하며, 계시의존사색을 강조하였다. 이런 박윤선의 영향으로 박태선 이단이 당시에 큰 파장을 일으킬 당시에 고신교회와 성도들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당시 예배당 확보를 위한 소송을 반대한 것도 ‘오직 성경’의 원리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박윤선은 신학과 경건을 겸비한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회개의 사람이었다. 일제 시 한 번 범한 신사참배의 죄를 숨겨 두지 않고 집회 중에 공적으로 회개했다. 또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능력과 응답을 믿고 기도 생활에 충실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강의는 늘 열강이었고 그의 열정적 설교에는 큰 감화와 부흥이 뒤따랐다. 그는 고신 초기에 신학교와 교회에 영적 활력을 불러온 사람이었다.
평가 및 논찬
허 박사는 주일성수 문제 관련 박윤선이 고신을 떠나게 된 것에 대하여 당시 승동과의 합동을 추진하는 정황과 맞물려 고신이 과오를 범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아울러 “고신 교회의 선진들인 한상동, 주남선 등이 남긴 귀한 순교적 신앙, 교회의 정화, 회개, 참된 교회의 재건 등과 관련한 유산과 더불어 고신 초기에 신학교와 교회를 참된 개혁주의 교회로 가꾸고 내외에 개혁주의 신학, 신앙의 정체를 드러내게 한 사람은 박윤선”이라고 강조하며 “박윤선과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갖고 쇄신하는 데 봉사하기를 바란다”는 당부로 발표를 마무리하였다.
▲ 논평하는 최만수 교수
논찬을 맡은 최만수 교수(고신대 교양학부)는 허 박사의 발표가 “초기 고신의 마지막 제자인 허 박사님의 논문은 스승에 대한 존경과 스승의 교단을 떠남에 대한 안타까움이 잘 묻어나 있다”고 언급하며, “초기 고신이 정통 칼빈주의 위에 선, 순수한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오직 성경의 원리에 충실하며, 부흥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는 데 기여한 박윤선의 의미를 잘 드러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당시 박윤선 뿐만 아니라 고신의 부흥을 이끈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것과 “박윤선이 주일 성수 관련 고신을 떠나게 된 문제에 고신과 승동 간 정치적 사건이 개입했다는 추측에 대해서는 좀 더 역사적 고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허 박사는 이에 대하여, “당시 본인이 ‘파수군’ 담당자로서 여론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할 만한 충분한 정황이 있다. 박윤선 박사의 오직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원리가 교단의 정치적 사건과 관련하여 지연 등에 매이지 않는 성향으로 나타나 교단 내에서 박윤선 박사에 대한 일종의 서운함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답변하였다.
청중에서는 “역사를 직접 경험한 선배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평가는 후대에 맡기고 마음껏 말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수십 년이 지난 일도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는 분위기가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다. 허 박사는 “주관적인 내용들을 객관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발표를 쓸 때도 매우 조심스러웠다”고 답변하였다.
2013년 05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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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고신초기와 박윤선
허순길 목사
들어가는 말
▲ 허순길 목사
전고려신학대학원장
‘고신 초기와 박윤선’이란 제목을 받고 고신 2세대에 속한 사람으로 박윤선의 신학과 신앙과 생활이 초기 고신교회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기억하고 아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유익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고려신학교가 설립 개교한 것은 1946년 9월 20이었고, 고신교회가 총 노회로 출발한 것이 1952년 9월 16일이었다. 필자가 고려신학교 예과에 입학한 것은 1954년 9월이었다. 그러니 이때 고려신학교는 개교한 지 8년, 고신교회가 형성된 지는 2년이 된 때였다. 수년 전부터 전국 SFC 수양회나, 지도자 수련회 등에 참석하여 박윤선 교수의 강의나 설교를 가끔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를 가까이하고 자주 듣게 된 것은 신학교에 입학한 1954년부터였다. 예과 재학 중에 예과 2년제가 4년제로 바뀌어 4년제 대학 과정(칼빈학원)이 되었다. 1957년 9월 칼빈학원 4학년 2학기 때 필자는 박윤선 교장 집의 가정교사로 부름을 받게 되어 이제 그와 개인적인 밀접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다음해 3월에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박윤선 교장은 자기의 비서(조교)로 도와 달라는 요청을 하셨다. 이후 필자는 신학교 재학 3년 동안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를 전적으로 돕게 되었다. 주로 그의 주석원고를 정리하여 출판하는 일과 외국에 보내는 편지를 타자하며 돕는 일이었다. 1960년 10월 신학교 졸업반 마지막 학기를 맞았을 때 박윤선 교장은 주일 성수 문제로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고신 초기 약 4년 동안 박윤선과 가까이 지내게 되므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많은 유익을 얻게 되었다. 이제 필자가 그를 가까이 모시고 지나오며 보고 아는 대로의 고신 초기와 박윤선에 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고신의 터를 놓은 신학자 박윤선
고신교회는 고려신학교를 떠나 생각할 수 없고 고려신학교는 박윤선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박윤선은 고려신학교 설립에 동참하였고, 고신교회 출발 초기 고신의 신학과 신앙의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한상동, 주남선 두 목사는 일제 시 신사참배 항거로 평양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해방되어 출옥하게 될 때 해야 할 일을 구상했고, 해방되어 출옥하자 신학교를 세워 순교적 신앙을 가진 충성스러운 교역자를 양성할 뜻에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주남선 목사는 곧 남하했으나 한상동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봉사하게 되어 서로 멀리 나뉘어 있어 그들이 공유했던 뜻을 바로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약 반년 후인 1946년 4월에 한상동 목사가 남하함으로 두 분은 신학교를 세울 뜻을 이룰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교 설립은 뜻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가르칠 신학자가 있어야만 했다.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 두 분 다 순교적 신앙을 가진 신실한 분들이었지만 평범한 목회자이지 신학자는 아니었다. 신학교 설립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신실한 정통신학의 지식을 갖춘 신학자를 찾아야만 했다. 더욱 순교적 신앙을 가진 충성스러운 교역자 양성을 위해서는 이것이 필수적이었다. 해방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한국 교계에 손가락으로 헬 수 있는 수명의 신학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 중에도 정통신학을 갖춘 신학자는 극소수였다.
한상동 목사는 38선을 넘어 남하하자마자 마침 지난날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경험이 있고, 만주 봉천 동북신학교에서 교수한 적이 있는 박윤선이 이미 남하하여 서울 이태원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박윤선은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이미 강사로 봉사하면서 총회의 표준주석 편집부에서 일했고, 고린도후서 주석을 낸 잘 알려진 젊은 주경신학자였다. 특별히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장로교 정통신학의 보루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두 번 유학한 분이라 의심할 수 없는 장로교 정통신학자요, 자기들의 신학교 설립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분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그를 하나님이 그의 신학교 설립을 위해 보내주신 학자로 믿고 바로 그를 찾아가 신학교 설립에 동참하고 교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윤선은 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귀국하여 잠시 고향을 들른 뒤 남하하여 신학교육의 기회를 찾고 있던 터라 출옥한 충복들이 원하는 신학교 설립에 기쁘게 동참하기를 원하고 쾌히 동의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성경연구와 가르치는 일을 소명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5월 박윤선은 부산을 거쳐 진해로 내려와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등 여러분과 함께 모여 신학교 설립을 논의하였다. 당시 여러분이 모여 신학교 설립을 위해 함께 논의했지만 설립자는 주남선, 한상동으로 정했다. 이것은 그 모임에서 박윤선이 제의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설립위원들은 신학교 설립 전지작업으로 그해 6월 23일부터 8월 10일까지 약 두 달 동안 진해에서 박윤선을 강사로 신학강좌를 갖기로 합의하고, 고려신학교 설립취지도 발표하기로 했다. 이 설립취지문은 박윤선의 작품이었다. 이 취지문에는 해방 후 한국 교회에 평양신학교의 복구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남한에 자유주의 신학교인 ‘조선신학교’만 있는 환경 속에서 “正統信仰運動 곧 明白한 正統體系에 있는 眞理運動을 急要”함을 말함으로 설립 이유를 들었으며, “正否와 是非를 斷하는 칼빈주의의 神學을 樹立하고자 한다.”라고 함으로 그 설립목적을 밝혔다.(1) 두 달 동안의 진해 강좌에서 박윤선은 혼자 성경신학, 조직신학, 창세기, 시편, 로마서, 히브리서, 계시록 등 여러 과목을 강의함으로 짧은 기간 동안 신학공부 대한 관심을 높였다.(수료증 참조) 이 신학강좌에는 63명이 참석했고 그 가운데는 이인재, 손명복, 황철도, 홍반식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신학교가 개학하자 입학하게 되었다.
1946년 7월 9일에 진해읍 교회에서 경남노회 제47회 임시노회가 열렸다. 이때 신학교 설립 기성회는 신학교 설립의 인허와 협력을 요청했다. 노회는 이 청원을 받아드렸다. 그해 9월 20일 고려신학교가 부산진에 있는 금성중학교 한 교실에서 박윤선을 교장서리로 세우고 개교를 했다. 그를 처음 교장서리로 한 것은 정통신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초빙하려는 데 있었다. 설립자들은 고려신학교를 평양장로회 신학교의 전통을 이어가는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지난날 그 학교의 교수였던 정통신학의 거장 박형룡을 교장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로써 이제 한 달 전에 마친 진해 신학강좌는 고려신학교 개교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때 참석한 분들의 상당수가 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려신학교를 개교했을 때 전임교수로 봉사한 신학자는 박윤선뿐이었다. 목회자들인 한상동, 한명동, 이상근, 박손혁 목사가 시간 강사로 도왔다. 이때 박윤선 교수는 주경신학, 조직신학, 성경신학, 심지어 성경원어 과목까지 가르쳤다. 대부분의 중요한 과목을 혼자 가르쳤다. 그러니 고려신학교 초기에 그는 온 종일 강의를 했던 것이다. 그 후 10월 초에 미 정통장로교회 선교사 한부선(“B.F.Hunt)이 내한하여 돕기를 시작했고, 이어 미 성경장로교회 선교사 마두원, 최의손, 함일돈이 내한하여 도움을 주었다.
이로 보건대 고려신학교는 박윤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실제 고려신학교의 설립자 중 한 분이었으며, 고려신학교의 신학의 터를 놓았을 뿐 아니라, 고신신학을 주조한 분이었다.
2. 고신 초기 칼빈주의를 주도한 박윤선
박윤선은 그 시대의 한국의 신학자들 중에 두드러진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특별히 칼빈주의와 칼빈주의 신학을 강조한 데 있다.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두 번 유학하여(1934-36, 1938-39) 메췐 박사(G. Machen)와 밴틸 박사(C. Van Til)의 지도 아래서 신약과 변증학을 전공하면서 비로소 칼빈주의가 무엇인 것을 깨달았고 거기 매료되었던 것이다.
박윤선은 ‘성경과 나의 생애’라는 자서전에서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그를 가르쳤던 외국인 교수 일곱 분(마포삼열, 라부열, 이율서, 어도만, 업아력, 곽안련, 왕길지)과 본국인 교수 세분(남궁혁, 이성휘, 박형룡)에 관하여 한 사람씩 다 소개하고 난 다음 그들의 일반적인 신학적 입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상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적 보수의 입장을 간단히 기술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개혁주의(Reformed) 신학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하였다.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으며, 교수들로부터 ‘성경신학’이란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성경신학이 없었던 그 시대에 교리들을 성경적으로 단 맛있게 가르쳤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 그때의 신학생들이 교수들로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는 못하였다.”(2)
펑양신학교 졸업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와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평양신학교 시절에는 보수주의이면서 주관적 체험을 탐구하는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평양신학을 마친 후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연구한 후부터는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 신학을 재정비하게 되었다.”라고 했다.(3)
이후 박윤선의 신학은 그의 교수였고 동역자였던 박형룡의 신학과는 개혁주의 신학을 강조함에 있어서 약간 다름이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물론 교의학자인 박형룡과 주경학자인 박윤선이 신학적 강조점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두 분에게서 강조가 달리 나타난 사실을 쉽게 느끼게 된다.
박형룡은 그가 1970년에 발표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전통’에서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유럽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라고 하고, 이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란 이 웨스트민스터표준에 구현된 영미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교의신학’ 머리말에서 “팔십년 전 이 땅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전해여 준 그대로의 바른 신학을 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필자의 염원”이라고 밝혔다. 곧 박형룡은 한국 초대 선교사들이 전해 준 신학을 영미장로교회의 청도교 사상이 가미된 개혁주의 신학이라 보고 이를 새 세대에게 전달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박윤선은 초대 선교사들의 신학에서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보다 근본주의 신학이 짙게 나타난 것을 보았고, 그는 이보다 네덜란드를 중심한 구라파 대륙의 칼빈주의 신학에 매혹되고 이를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메췌과 밴틸 아래서 칼빈주의 신학을 재정비하고, 곧 네덜란드어를 익혀 카이퍼, 바빙크, 스킬더의 교의학 책들과 흐로솨이데, 흐레이다너스 등의 주경을 접한 결과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윤선은 어떤 수식어가 붙은 개혁주의를 말한 일이 전혀 없고 언제나 칼빈주의(개혁주의)라는 말만을 사용했다.
박윤선은 이제 칼빈주의에 매혹이 되고 칼빈주의에 집착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는 이제 한국에서 칼빈주의를 강조하고 전하는 전도사가 된 셈이다. 고려신학교의 개교를 말하면서 “이 학교의 신학노선은 칼빈주의이다.”라고 하였고,(4) 지난날의 그의 교수 생활을 돌아보면서 “나의 교수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불타는 가슴으로 학생에게 주고자 한 것은 칼빈주의 신학이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 신학이야 말로 성경을 그대로 믿는 말씀의 신학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5)
결과 고려신학교에서는 처음부터 칼빈주의가 자연스럽게 강조되었고, 고신교회에서도 일반신자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라는 신학적 어휘가 유행이 되고 자리를 잡았다.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는 고려신학교와 고려파교회 안에서 동의어로 쓰였다. 이때 고신신학은 칼빈주의였다. 고신의 칼빈주의 신학은 박윤선이 주조한 것이었다. 고신 초기에 칼빈주의라는 말은 한국교계에서 고신의 독점용어처럼 여겨지고 사용되었다. 박윤선은 고신초기 고신을 칼빈주의 교회로 만들기 위해 온 정렬을 기울였다.
3. 순수한 개혁교회를 지향한 박윤선
고신 초기 박윤선은 순수한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해 봉사를 했다. 이는 특별히 1947년 10월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던 박형룡 박사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듬해 5월에 지난날 함께 했던 네 외국 선교부(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캐나다연합교회)와 협력하고 장로교회 총회를 배경하여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떠나게 되었을 때 그를 따르지 않고 고려신학교에 그대로 머문 데에서 나타났다.
박형룡은 고신을 떠나기 전 그를 불러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박윤선이 이 청을 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평양신학교 3년간 그의 교수였고, 그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도록 추천해 준분이었으며, 일제 시 만주 봉천에 있는 신학교에서 동역자로 봉사한 적이 있었던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있었을 때 총회 표준성경 주석 편집부장이었던 박형룡 아래서 편집부의 일을 맡아 일한 적도 있었다. 그는 박형룡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제자의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윤선은 그의 권유와 요청을 거절하고 고려신학교에 머물렀다.
물론 박윤선은 박형룡과 달리 고려신학교의 설립 초부터 관련한 처지에 있음으로 고려신학교에 대한 애착이 그와는 전혀 다를 수 있었다. 그는 실상 주남선, 한상동과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총회를 배경하고 신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박형룡과는 달리 그의 스승인 메췐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처럼 당시 한국교회의 정치적 정항을 고려했을 때 얼마 동안 총회의 조직과 교권을 벗어난 신학교의 독립적 운영을 원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당시 박형룡을 따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이보다 다른 데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밝힌 일은 없다. 하지만 그가 평생 순수한 교회 건설을 바라고 노력해 온 것을 생각할 때 이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한국에서 대세를 이루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선교사들은 미북장로교회(당시 연합장로교회)에 속한 분들이었다. 그들을 파송한 북장로교회는 이미 자유주의를 수용하였고 그 교회 신학교육의 중심인 프린스톤 신학교가 1929년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재편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메췐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신학 교수들이 장로교신학의 보수적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와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박윤선은 바로 그 신학교에 유학을 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이 1936년에는 북장로교회(연합장로교회)를 떠나 미정통장로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박윤선은 누구보다 이 역사와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박형룡이 프린스톤 신학교에 유학하여 메췐에게서 배우고 그의 정통성을 잘 알고 있었음으로 박윤선을 뭬첸의 웨스트민스터에 추천했지만, 그는 뭬첸이 1929년 프린스톤신학교에서 나오기 전 프린스톤에서 공부했으므로(1933-6) 역사적 현실을 보는 시각이 박윤선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었다.
나아가 1946년 10월 초 한국에 와서 고려신학교에서 그와 동역하는 한부선 선교사는 그의 유학 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동급생 친구였다. 한부선의 정통신학과 정통교회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 그는 북장로교가 자유주의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그의 부모와 장부모가 속한 북장로교회를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했고, 이 신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로 조직된 미 정통장로교회에 가담하여 이 교회의 선교사로 한국에 나와 고려신학교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한부선은 박윤선의 귀한 친구였고 이제 고려신학교에서 그의 동역자였다. 그러니 박윤선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과 협력하는 것은 한국의 정통적 장로교회 건설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어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가 박형룡을 따라가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여기기 있었다고 보게 된다.
수년 후 박형룡은 외국인 선교사 단체들(미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캐나다 연합교회)과의 협력 추구가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 때를 맞게 되었다. 박형룡은 서울에 가서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신학적으로 포괄주의적인 네 외국인 선교단체와 협력하며 도움을 받고 지났으나 그들과의 동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침내 교회 내부에서 WCC에 대한 견해 차이로 수년간 싸우다 1959년 총회가 WCC 찬동 측인 연동, 반대 측인 승동 측으로 분열되었을 때 그가 협력을 받아 온 선교사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물러서게 되었던 것이다.
박윤선은 신학적으로 포괄주의적 입장에 선 외국 선교단체들과 협력을 하고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교회에 자유주의 세력을 수용하는 길이 되고, 순수한 개혁주의 교회를 건설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것이다. 그는 고려신학교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같은 정통신학교가 되기를 원하고,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에 자리 잡은 순수한 이 나라 장로 교회 건설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박윤선은 교회관에 있어서 그의 입장이 분명했다. 그는 교회의 WCC적 혼합주의, 포괄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50년에 그가 써 낸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어디로 가나?’하는 펨프렛에서 세계교회협의회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 “우리 장로회는 세계기독교연합회(WCC=세계교회협의회-필자 주)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장로교 교리에 위반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의 세계기독교연합회의 움직임이 전통적인 정통주의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통주의가 아닌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우리 장로교회더러 그 옳지 않은 회(세계기독교연합회)와 보조를 같이 하며 합류하라고 가르치는 분들도 그것을 자증하고 있습니다.”(6) 이 글을 낸 때는 고신이 총회로부터 축출을 당하기 바로 전이었고, 당시 장로교회 총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WCC 창립대회에 김관석 목사를 대표로 파송하여 참가함으로 회원교회가 되어 있었다.
박윤선이 고신 교회생활에 중심이 되어 온 때, 고신 교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고 정통의 순수성을 지켰었다. 고신은 1948년에 창립된 WCC에 반대하여 같은 해에 창립된 보수적 국제기구인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 협의회의 회장인 맥인타이어(C. McIntire)가 고신을 여러분 방문하고 회원 가입해 주기를 바랐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국제기구가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이외에 침례교를 위시한 여러 종류의 교파 교회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가 동서 냉전 시대였다 해도 지나치게 정치적인 기구로 나타나 수수한 교회적 국제기구로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초기 고신은 박윤선의 신앙적 지도 아래 신학적인 포괄주의를 멀리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교회적인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4. ‘오직 성경’의 원리에 선 박윤선
박윤선은 “오직 성경만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줄 확신하고, 성경을 바로 알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도적 전도라고 믿으며 살았다.”라고 했다.(7) 그는 모든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어떤 신학자들이 어떤 성경의 부분을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여(예 창19:30-38) 그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성경 저자의 진실성을 거기서 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고 한다.(8) 그는 성경의 무오를 믿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절대 진리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과 그는 자율주의를 반대하고 타율주의를 제창하며, 계시의존사색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학자들은 성경의 교훈대로 순타율주의(純他律主義)에서 말해야 된다. 신학자에게도 ‘내가 말 한다’는 위치가 전혀 부여되어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 들어야할 위치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만이 그의 지켜나갈 궤도이다.”라고 했다.(9)
그는 이렇게 개혁주의 핵심 모토의 하나인 ‘오직 성경’의 진리를 강의실에서 경건회에서 계속 강력하게 전했다. 그래서 초기 고신교회는 객관적인 성경말씀의 진리를 떠난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주장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이 고신 초기 교회 생활의 순수성을 보존하게 했다.
해방 후 한국에는 각종 신비주의적 종교혼합주의적 이단 운동이 나타나 교계에 혼란을 가져왔다. 박태선 이단은 주관주의적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었으며, 나운몽 문선명 이단은 종교혼합주의적 색채가 분명했다. 박태선은 김치선 박사가 시무하던 서울 남산장로교회 출신이었음으로 그로 말미암아 장로교회가 입은 피해는 더욱 컸다. 1955년 박태선이 혜성처럼 나타나 서울 남산 옥외집회를 시작으로 전국을 다니며 옥외집회를 인도했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장로교회 상당수 지도자들이 그를 도왔고, 소위 장로교회 총회장을 지난 권연호 목사를 위시한 1백여 명의 목사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안찰기도까지 받았다. 이로 인해 교회지도자들이 이 이단 운동의 출발을 돕게 되었다. 1957년 6월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수가 10만이 된다고 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을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라 일컬으며 이단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경기도 소사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 신앙촌을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의 재산을 착복했다. 그의 등장으로 많은 신자들이 그를 따르고 많은 교회들이 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 때 고신교회와 성도들은 전혀 그의 형향을 받지 않았고 동요 되지 않았다. 이는 고려신학교를 중심하여 모든 고신 교회 안에는 ‘오직 말씀’의 생활이 강조되고 정착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윤선은 ‘오직 성경’의 원리가 교회의 모든 생활에 정착되기를 원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의 어떤 위치나 정치적인 고려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부터 예배당 확보를 위한 소송을 반대한데도 ‘오직 성경’의 생활의 원리를 따른 때문이었다. 소송을 하는 분들은 여러 가지 법적 합리적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박윤선은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원했다. 그는 1957년 3월 파수군지에 ‘우리의 갈 길’이라는 글과 ‘나의 갈 길’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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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은 초기 고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전국미래교회포럼에서 양낙흥 교수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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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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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이 주최한 ‘고신교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대전 총회선교센터의 포럼에서 고려신학대학원 양낙흥 교수가 “고신 초기와 박형룡”이라는 제하의 발표를 했다. 여기서는 고려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가 부임하는 과정, 고신을 떠나는 과정, 떠난 뒤의 고신의 처지에 대해 나누어 요약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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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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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의 고려신학교 교장 부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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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은 1920년 숭실대학, 1923년에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을 졸업한 후 도미,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3년간 수학하여 신학 석사를 취득하고, 1927년 9월부터 켄트키 루이빌의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9개월 하고 28년에 귀국, 산정현 교회에서 잠시 목회를 하다가 1930년 부터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교수직을 하면서 논문을 완성, 루이빌 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38년 학교가 폐교되자 만주로 건너가 봉천신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봉천신학교는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박형룡, 박윤선 두 사람에 대해서만은 대리인을 보냈고 당국도 이를 묵인하는 “묵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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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봉천에 계속 머물고 있는 그를 1947년 고려신학교에서 송상석 목사를 파송하여 9월 23일 경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그는 구 평양신학교 복교를 제안 받고 고민하면서 일주일을 머물고 있었다. 송상석은 부랴부랴 부산에 내려가 상황을 보고했고 한상동은 9월 30일에 상경해 박형룡을 만났다. 박형룡은 자신이 들은 “고려신학교가 교회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염려를 전했고 한상동은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한국교회의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니 거취를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한상동이 말한 혁명은 신사참배자들에 대한 권징, 자유주의자들의 척결이었다. 박형룡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 10월 2일 부산으로 내려가 교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박형룡도 한상동에게서 전국 장로교 배경의 총회신학교가 되게 한다는 전제조건을 동의를 받았다. 그것은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한다는 복안이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서울에서 따로 신학교를 설립할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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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신 초기의 박형룡에 대해 발표하는 양낙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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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신을 떠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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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의 고려신학교 교장 부임으로 인하여 고신의 위상은 달라졌다. 함께 교수로 취임한 한부선과 함께 120여명의 학생들이 평양신학교 전통을 잇는 학교로 활기를 띄었다. 47년 12월의 제49회 경남정기노회에서는 신사참배자들의 자숙결의안에 불복한 목사들로부터 “사과서”를 받았고, 고려신학교를 인준하고 원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46년 12월에 고신 인준을 취소했던 진주에서의 48회 결정을 뒤집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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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48년이 되면서 박형룡과 한상동 사이에 마찰이 일었다. 그것은 4대 장로교(미남장로교, 북장로교, 호주, 캐나다) 주한 선교부와 협력한다는 박형룡의 구상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한부선을 비롯한 메첸파 선교사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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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한부선과 메이첸 선교사들은 왜 미남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협력하기를 꺼려했을까? 한부선은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가을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한다. 이때 이미 신학적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양분된 프린스턴 교수들 사이에서 한부선은 메이첸 편에 섰다. 28년 한부선은 4년만에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미 북장로교 뉴 브룬즈윅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 28년 9월 한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왔고 35년 한부선은 첫 안식년을 맞아 규정에 따라 신학연구를 해야 했는데 그는 프린스턴으로 가지 않고 메이첸이 설립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갔다. 거기서 그는 유학온 박윤선을 만났고 지분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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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 미 장로교 총회는 메이첸을 비롯한 독립선교부 관계자들 모두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고 메이첸은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게 되며 한부선은 이에 합류하여 창립맴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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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메이첸의 독립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받아 만주 하얼빈으로 간다. 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7차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한부선은 회의장에서 강력한 반대를 외치다가 일경에게 끌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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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9월 서울로 들어온 한부선은 존 베촐트의 소개로 한상동을 만난다. 한상동의 권유로 고려신학교 교수로 재직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한부선과 메첸파 선교사들은 고려신학교가 주한 4대 선교부 및 기존 장로교 총회와 제휴하는 것에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본국에서는 동거할 수 없다고 선언했던 자들과 피선교지에서 동거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한상동이 한부선과 메첸파 선교사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날 박형룡은 고려신학교에 남아있을 의욕을 상실했음은 자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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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동은 메첸파 선교사들과는 여러 가지로 통했다. 신사참배문제로 박해 받은 일, 신학적으로 극히 보수적인 공통점,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 그리고 다수파에 의해 따돌림 당하는 “소수파”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한상동은 박형룡 보다는 한부선에 대해 훨씬 더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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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 무렵 서울에서는 장로회 신학교의 재건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인식 등의 월남한 원로목사들이 고신측의 태도변화에 관한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이들은 고신이 총회 배경의 전국적 신학교로 변신을 시도할 때 자신들과 협력하게 될 것을 기대하다가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박형룡에게 고신을 떠나 서울에서 조선신학교에 대항할 보수적이고 전국적인 신학교를 설립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박형룡은 고신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교장으로 취임한지 6개월 만에 사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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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이 떠난 뒤의 고신의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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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월 밖에 있지 않았던 그가 고신에 무슨 영향을 미쳤을까 하겠지만 그의 떠남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구제불능의 독선적 소수” “몇몇 개인의 야심에서 출발한 분파”라는 의심이 야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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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박형룡의 고신 이탈은 고려신학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노회와 총회의 교권주의자들에게 고신을 매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제공했다. 1947년 12월에는 고신인준을 결의했던 경남노회가 박형룡이 떠나자마자 김길창을 선두로 고려신학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8년 4월 말 개최된 장로회 총회는 공식적으로 고려신학교를 부정했다.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학교이므로 고신에 추천서를 주지 말라”는 결의가 총회에서 이루어졌다. 동년 9월에 열린 경남임시노회에서 다시 고신인준을 취소하였고, 12월의 경남 제50회 정기노회도 고신취소를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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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한상동과 박형룡 사이에 어떤 견해차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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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학교와 총회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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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은 고려신학교를 가능한 빨리 총회 인준 신학교로 만들고 싶었다. 전국 장로교회를 장악하는 신학교로 만들어 자신의 보수신학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상동은 고신이 총회에 들어가면 한국 신학계의 대세를 장악할 자신이 없었다. 교권의 간섭하에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한 생각은 한부선과 박윤선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선례를 소개 받은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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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학교의 위치에 관한 견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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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은 신학교를 서울로 옮기자고 주장했지만 한상동은 그대로 두자고 했다. 중앙으로 진출해야 전국을 망라하는 학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박형룡의 주장에 평양신학교도 서울에 있지 않았으나 전국 장로교회에 영향을 끼치는 신학교가 될 수 있었다고 한상동은 서울 이전을 반대했다. 한상동의 생각에는 서울로 옮겨 총회직영 신학교가 되면 자유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고, 특히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자숙하지 않은 목사들과 공조하는 것은 심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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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외부 선교부와의 협력에 대한 견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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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동은 미 정통 장로회 선교부와만 관계를 갖고 싶어 하는 반면 박형룡은 보다 포괄적이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나 중국의 남경 대학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연합하여 설립한 학교인데 그는 이 학교를 졸업했다. 평양신학교 교수 시절인 1930년 대부터 미 남북장로교를 비롯한 4대 선교부 출신 선교사들과 동역한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도 협력관계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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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권징에 대한 견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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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동은 신사참배한 교회 지도자들이 “자숙안”의 이행에 의해 권징을 받아야만 교회의 재건에 동참할 자격을 회복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회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신사참배에 대한 권징문제에 발목이 잡혀 보수신학교육과 복음전도에 결집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신학생들 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고 박형룡이 고신을 떠날 때 상당한 수의 학생들도 이탈했다.(논문은 도착하는대로 포럼발표논문에 게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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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05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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