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설교와 성령 - 고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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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설교와 성령 - 고신...[9]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를 하라
동서울/서울 노회 수도권 신학포럼, 성황리에 마쳐







코닷





4월 22일(월) 고려신학대학원이 주최하는 동서울/서울 노회 수도권지역 신학포럼이 서울시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수도권지역 신학포럼은 4월 22일(월) 동서울/서울 노회, 4월 23일(화) 수도/수도남 노회(군포성안교회), 5월 2일(목) 경인/서경 노회(부천참빛교회)에서 각각 진행된다.

올해 신학포럼은 수도권지역 노회를 나누어서 시행되었음에도 동서울/서울 노회 지역 목회자들이 70여명 정도 참석하여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 신학포럼이 성황리에 진헹되고 잇다.

발표에 앞서 포럼 기획실장인 이성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는 인사를 통해 “신학포럼은 신대원과 교회와의 관계 증진이 목적”이라며, “말씀의 교제가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아울러 “신대원의 두 가지 중요한 임무가 신대원이 목회자를 찾아가는 신학포럼과 목회자가 신대원을 찾아가는 목회대학원인데 상호 유기적으로 진행되길 바란다”고도 전했다.

오전 시간은 최봉환 목사(준비위원장, 동서울노회장)의 사회로 권중신 목사(동서울노회 부노회장)가 기도한 후에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가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박 교수의 발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 / 박영돈 교수



▲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에 대해 발표하는 박영돈 교수

한국교회에 강해설교의 붐이 일어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만큼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에 대한 관심은 아직 미흡하다. 이 둘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 설교자는 성령을 도구화하려 해선 안 되고 오히려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강단은 신앙의 선진들이 가졌던 깊은 영성도, 신학적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자질도 부족하다. 강단에서 전파되는 메시지에 복음의 골자는 빠지고 신자의 헌신과 열심을 고취시키는 윤리적 지침과 권면으로 가득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마음에 비추는 성령의 조명과, 그 빛 가운데서 성경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현실을 총괄적으로 파악하는 신학적 통찰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된다.

성령 충만이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속에 사는 것을 뜻하며, 설교자는 삶의 모든 정황에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선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체질화되어야 한다. 강단 아래서 성령을 따라 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설교 시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은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큰 긍휼인 동시에 설교자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성도들은 복음이 설교자의 심령과 인격과 삶에 구체적으로 체화되어 전인격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듣기 원한다. 주일설교 준비는 설교를 작성하기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성령을 온전히 따르는 삶으로 해야 한다. 실제 설교를 준비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되는 일은 자신을 성찰하는 기도와 회개다.

설교자가 성령을 의존한다고 해서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스펄전은 “공부에 더 이상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설교자는 우선 본문에 충실해야 한다. 말씀의 저자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성령께 집중하지 못해서도 안 된다.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게으름과 과잉열심 사이에서의 중용의 묘를 터득해가야 한다.

설교는 인간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설교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의 행위다. 설교의 능력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라는 비천한 방법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설교의 위기는 인정욕구나 성취지향적 욕망에 사로잡히는 데서 온다. 설교자는 청중의 눈치를 보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한다.

설교자는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가운데 차분하고 온유하게 설교해야 한다. 전하는 메시지만큼 전하는 자의 자세와 호흡, 인상과 음성이 중요하다. 부드러운 음성에 성령의 은혜와 힘이 실릴 때 듣는 이들을 감화하여 강퍅함을 꺾는 역사가 일어난다. 설교는 이렇게 전인격적으로 나타난다.

아무리 좋은 원고를 작성해도 원고 자체에 사로잡혀서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선 곤란하다. 설교의 막중한 사명 앞에 자신의 무능을 절감한 사람만이 성령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설교자는 기도로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기도가 성령으로 충만하는 방편인 동시에 성령 충만의 증거이기도 하다.

능력 있는 말씀의 선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목사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동참해야 할 사역이다. 목사의 은사와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교인의 기도의 지원 없이 설교에 큰 권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마지막으로, 설교사역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다. 복음사역자들은 비록 복음의 열매가 빨리 나타나지 않고 교인들의 변화와 교회 성장이 지체될지라도 말씀과 성령의 원칙을 따라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은혜를 한없이 탕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탕자들을 설복하듯이, 자신의 청춘을 낭비하는 것 같은 설교자의 사역이 마침내 죄인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이키게 할 것이다.

논찬 및 질의응답



▲ 논찬하는 최한주 목사

논찬을 맡은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를 읽었을 때의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며, “내용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분은 없을 것이고, 이 내용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반성해야 한다”고 논찬하였다. 청중에서는 1) 성령 충만, 2) 과거와 오늘날의 설교의 차이, 3) 예화의 사용, 4) 신대원 차원에서의 목회자를 향한 실천신학적 도움 등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1) “이차적 세례에 대해서는 반대하나, 중생자의 마음에도 계속해서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죽여 나간다는 의미에서의 성령 충만이 필요하다”, 2) “과거 설교는 실은 신학적으로 탁월한 강해 설교가 아니었으나 설교자의 탁월한 경건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셨다. 오늘날은 신학적으로 활용할 도구가 많아서 낮은 수준의 설교에 대해 변명하기 어렵다”, 3) “적절한 예화는 설교의 맛을 돋운다는 것을 인정하나, 그런 예화를 구하기 매우 어렵다. 그리고 예화를 찾기 시작하면 설교작성이 예화에 얽매이기 쉬우므로 개인적으로는 절제하고 가장 기본적으로 본문 분석에 천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4) “각 분과 영역을 아우르는 통합적 작업이 필요하다. 다만 콘텍스트가 강조되는 다른 교단과 달리 고신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충실해서 이런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고 대답하였다.

오후 시간은 이장우 목사(서울노회장)의 인도로 안경환 목사(서울노회 부노회장)가 기도한 후 한진환 목사(서문교회)가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한 목사의 발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 한진환 목사



▲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에 대해 발표하는 한진환 목사

예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목적과 방법을 계시해 주셨고 예배하는 자리에 임재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렇게 우리를 섬겨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복된 교통이 예배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예배는 이러한 양 방향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다분히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오려 드리는 상향적 행위에 치중되어 있다. 예배는 신인 사이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상호적인 행위이지만 그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향적인 행위들에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예배로서의 입례의식, 설교, 성례, 축도의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 입례의식: 입례의식은 입당송, 예배부름, 축복인사, 기원, 영광송, 참회기도 및 사회의 확신 등으로 구성된다. 입례의식은 개개의 순서가 단편적인 별개의 순서들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가진 연결된 순서다. 즉 이 순서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표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예배를 위해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 설교: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인간 설교자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그 이면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설교자는 하나님이시다.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신 후에는 인간 설교자를 통해 "지금 여기"에 자리한 회중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입으로 세움 받았다고 해서 강단에서 쏟아내는 모든 언사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으로 부름받은 것이지 자신이 왕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왕의 말씀을 듣는 믿음과 겸비함이다. 설교 중에 복음 자체를 분명하게 증거하지 못하고 복음의 중요성과 유익에 대해서만 늘어놓는 "about" 설교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설교의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된 것은 설교자들의 지적 능력이나 커뮤니케이션 기법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설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확신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성례: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다.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구원과 신령한 복과 같은 영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성례를 통해 하나님은 그런 영적인 실체를 주신다. 성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세례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 사함과 거듭남에 대해 인 쳐주시는 것이다. 성찬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하나님께서 인 쳐주시는 의식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성례를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하는 의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례가 주는 풍성한 은혜를 상당 부분 놓치고 있다.

▲ 축도: 하나님께서 족장이나 제사장을 통해 축복하는 것은 언약을 확실히 이루겠다는 약속이요 선언이다. 교회는 언약적 관습을 따라 예배의 마지막을 축도로 장식한다. 축도는 예배자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 편에서 올려 드리는 기도나 기원이 아니라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신적 행위이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또한 축도는 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끝말도 "있을지어다"가 되어야 한다. 축도에 수식어를 붙이기보다는 삼위의 이름으로 간결하게 하는 것이 좋다.

한국 교회 예배의 문제의 뿌리는 예배를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상향적인 행위로만 생각하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잘못된 예배 신학에 있다. 예배는 하나님과 회중 간에 상호 교통하는 행위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하향적인 행위들이라는 예배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해야 한다.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고만 계신 분이 아니다. 예배의 매 순서 가운데 친히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회중이 이같은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거룩하신 임재 앞에 서는 영광을 자각할 때 우리의 예배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논찬 및 토론



▲ 논찬하는 손덕현 목사

논찬을 맡은 손덕현 목사(보은교회)는 “하나님이 섬겨주시는 예배의 의미를 회복하게 한 훌륭한 강의”라며, “본질이 많이 파괴된 한국 교회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운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1) 예배 순서를 상향, 하향으로 나누었는데, 그럼에도 예배의 매 순서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교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2) 설교에서 하향적인 것을 강조하다가 목사가 자신을 교조화하는 경우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3) 대표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없는지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 한 목사는, 1)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 상/하향을 나누었지만, 매 순서마다 교류가 일어나는 것이 맞다”, 2) “설교자가 스스로 자신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설교행위가 타성에 젖어 잘못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선포라는 본질이 퇴색될 수는 없다”, 3) “기도는 말씀 선포자가 하는 것이 맞다고 보지만 모든 목회현장에 막바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바르게 세워진 사람이, 최대한 공적인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답변하였다.

최한주 목사는 1) 하향적 행위를 강조하면 로마 카톨릭의 우를 범하게 되지는 않는지, 2) 입례의식에서 현대적 감각과 트렌드를 가미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상향적 반응을 강조한 것 강닌지, 3) 성찬에서 한 떡과 한 잔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실제 성찬을 시행할 때 원활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 한 목사는, 1) “인간 편에서의 상향적 반응도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은 마치 그 반응만이 예배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예배는 하나님의 행위다. 다만,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면서도 개교회의 현장성을 살릴 수 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목회자의 고민이 필요하다”, 2) “인간은 전인적인 경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일반적인 형식을 사용해도 좋다고 본다”고 대답했다. 나머지 질문에 대해 이성호 교수는 “루터란처럼 예전이 잘 발달된 곳은 한 떡과 한 잔이라는 의미를 잘 살려 성찬을 수행할 수 있지만, 한국 교회가 바로 이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찬을 잘 수행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답변했다.



2013년 04월 23일











>> (정성구)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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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 목사님에 대해 예사롭지 않고 중요한 면을 소개한 글입니다. 공회에서는 상식적인 글입니다. 한종희 목사님이 소개한 내용과 나란히 놓고 검토해 볼 내용입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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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록열기청교도 인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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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연구원 정성구박사님의 박윤선목사님에 대한 세미나글을 읽고 ..청교도 인물 / 개혁교회 독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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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2/0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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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log.naver.com/donghain/1401744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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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용뷰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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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정성구 박사님이 전하는 박윤선목사님 글을 읽었다. 정성구 박사님은 은퇴후 자택을 칼빈박물관을 세워서 칼빈주의 사상을 알리는 일은 은퇴라는것이 없음을 보여주신다. 칼빈박물관 한번 가볼려는게 쉽게 되지 않는다. 올해는 가기전에 한번 가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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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박윤선박사님에 대한 이야기 정성구 박사님은 신학생사역때 부터 박윤선목사님으로 부터 칼빈신학을 전수받은 제자이면서 박윤선목사님을 도와 함께 동역자이기도 한분이다. 박윤선목사님이 따로 회고록은 남긴건 없지만 가까이서 오랫동안 모셔왔고 일해오신 정성구박사님이 전하는 박윤선목사님 이야기글중에서 몰랏던 사실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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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에 글을 읽어보면 되겠지만 그중에서 박윤선목사님의 목회에 전념했을당시 동산교회에서 교회제도무엇보다 직분제도가 아주 반가운 소식처럼 들린다. 직분자를 세우고 새로 선출되면 전년도 직분자는 1년동안 쉬게 했다는것 .. 한번 직분 = 평생 직분이라는 잘못된 관념이 박힌 한국교회에 박윤선목사님 목회처럼 그렇게 적용하면 교회에 사람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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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장 채워줘야 붙어 있는 잘못된 교회체질을 그때 박윤선목사님 목회처럼 개혁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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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을 쉬게 하는것 좋은제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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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박사님 목회가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 말씀중심으로 양육되고 훈련된 성도들이 직분자로 사역을 1~2년하다보면 힘들다..경건에 약간은 소흘해질수 밖에 없다. 그땐 잠시 내려놓고 경건의 시간을 갖고 무직분 상태에서 해야할일을 하면서 다시 다음에 직분자로 세워졌을때 감당할수 있는 준비의 시간을 갖게 하는것 이것을 철저한 진리 말씀으로 교회질서가 잡히지 않고선 실현불가능한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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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제도를 보면 다른것도 알수 있다. 회중들을 설득하지 않고선 불가능한일이다. 여기서 설득이란 변화이다. 말씀을 가지고 강단에서의 진리를 확신을 심어주는 살아있는 말씀에서 시작되엇다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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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박윤선목사님사역 당시 동산교회가 얼마나 전투하는 교회인가를 볼수 있는 대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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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화페개혁이다. 물질적 손해 돈과 예배를 바꿔야하는 이런 시험이다. 사실 주일날 화폐개혁을 단행했다는것도 교회가 세상과 싸워서 찾아와야할 부분이다. 동산교회는 충분이 역적 전쟁을 치루는 군대같은 교회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지금은 동산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 없지만..짐작컨데 예전의 박윤선목사님 처럼 하지 못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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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구 박사님이 전하는 박윤선목사님 이야길 읽고 한국교회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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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자로서 박윤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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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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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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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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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10년전 정암 신학 강좌에 초대되어 ? 박윤선 목사의 설교 ?라는 주제로 발표한 바 있다.1) 그간도 정암 박윤선 목사에 대해서 여러 모양으로 연구되어진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박윤선 목사님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교회에 끼친 영항은 어느 교단 어느 교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는 목회자들의 사표이자 칼빈주의 신학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런데 역사적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완전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 본다. 특히 박윤선 목사님의 경우 성경 주석 전집을 완간하고 몇 귄의 설교집을 내긴 했어도 본인 자신에 대한 회고록은 없고 다만 신앙고백 정도가 있을 뿐이다. 2) 그렇다면 목회자로서의 박윤선 목사를 연구하려고 할 때 자연스럽게 자료에 의하기 보다는 직접 박목사님과 더불어 사역을 해본 사람들의 증언과 경험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필자는 어느 정도 이 글의 주제에 대해서 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필자의 이전 글에서는 이렇게 썼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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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나이 20대에 신학에 입문하던 날부터 30여년 간 그와 관련을 가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에 필자가 총신대학 일학년에 입학하자 말자 그분과 함께 동산교회를 개척하면서 담임목사로 모셔왔고 필자는 전도사로 도왔다. 당시 박 목사님의 나이는 50을 조금 넘긴 가장 뜨겁고 왕성하던 연구와 설교의 전성기였다. 그 당시 3년 동안 일주일에 세 번의 외침은 필자의 신학과 신앙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에 몰입하게 된 동기를 주었고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었다. 그 후에 필자는 그의 조수가 되었고 그의 주석 교정을 도우며 설교와 강의안을 필기하면서 그의 사상을 배울 수 가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례 아래 결혼을 하고 그의 추천으로 화란 뿌라야 대학교에 유학을 하게 되었고 그의 배려로 신학교에 가르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지극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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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했다. 30여 년간 박 목사님의 가까이에서 있던 사람으로 객관성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지 않으나, 자료의 빈곤을 감안하면서 신학자와 성경 주석가로서 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의 박윤선 목사님의 면모를 살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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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윤선 목사의 목회적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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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 목사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증경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설교중에 말하기를 “루터가 성경번역의 왕이라면 칼빈은 성경주석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윤선 목사님은 우리나라에 성경주석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4)고 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의 주석은 언제나 한국교회의 교역자들의 강단을 의식한 것이었고 주석에서 깨달은 진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외쳤다. 박윤선 목사님의 관심은 언제나 목회의 일선 목사를 염두에 두고 주석을 썼다. 혹자는 평하기를 박윤선 목사의 주석은 학문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사람이 있으나, 박 목사님의 관심은 주석을 쓸 때 번쇄한 이론을 생략하고 목회의 유익을 주는 것이 무엇이며 신령한 은혜를 받는데 좀더 실제적인 것이 무엇이냐에 초점이 맞추어 있었다. 그는 주석을 쓰면서 늘 가슴이 뜨거워졌고, 뜨거운 가슴으로 깨달은 진리를 생명력 있게 증거하고 싶었던 것이 곧 그의 목회의 관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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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 목사님은 주석 쓰는 일과 교수 사역이 평생의 업이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는 목회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박 목사님은 1940년 3월 만주 한인 예수교 장로회 신경 노회에서 목사로 장립 받는다. 그 때부터 만주 봉천의 오가황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가 된다. 해방 후인 1946년 6월부터는 경남 진해 경화동 교회를 시무하면서 신학 강좌를 개설한다. 1960년 고려 신학교의 교장직에서 물러나와 부산 금정산에서 기도하던 중 1961년 1월에 서울 동산교회로 부름을 받는다. 당시 이능전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5) 이능전 권사가 금정산에 기도하고 계시던 박윤선 목사님을 초대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새문안 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신학을 반대하고 순수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더니 박윤선 목사님의 대답이 “그것 참 잘 됐습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을 듣기를 소원하고 나는 오직 말씀만을 외치고 싶으니 잘 되었습니다.”라고 허락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박윤선 목사는 목회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 후 동산교회를 개척 시무해서 큰 교회로 발전시키고 1968년에는 다시 서울 상도동에 한성교회를 개척하고 담임목사로 5년 동안 시무했다. 주경신학자로서 박윤선 목사는 그가 주석한 성경의 진리를 구체적인 목양의 현장에서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방지일 목사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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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때마다 千金 같은 말이 한마디씩은 꼭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교회 장로들도 이 점을 포착하기에 필자는 매우 기뻤다. 나는 실업계에 종사하면서 또 신앙적인 숭대동 창 장로들 몇 분을 청하기로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 보자는 것이다. 모두들 찬 성하고 박 목사님께 “ 집필에만 전념하십시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여 주실 것 입니 다.”라고 하였더니 박 목사님 말씀이 목사는 강단이 없이는 죽은 목숨이라고 하면서 도 리어 필자에게 교회 강단 소개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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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했다. 동산 교회를 목회하다가 중립교회에서 경기 노회로 가입하면서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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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중립도 좋으나 목사는 소속이 없으면 치리회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안 된다. 목사는 반드시 치리회에 소속되어야 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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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했다. 박윤선 목사는 신학자로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에 평생을 보냈지만 그 자신이 목회에 대한 불타는 심정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목회 일을 감당함으로써 그의 신학은 냉랭한 이론이 아니고 뜨겁고 확신에 찬 기쁨의 신학이 되게 했으며, 그것을 또한 학생들에게 힘 있게 가르친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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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박윤선 목사의 목회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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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 목사가 앞서 말한 대로 목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있기는 했으나 실제로 그가 목회를 해 본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선 그는 1940년 4월에서 이듬해인 1941년 4월까지 1년 동안 오가황 교회를 시무했다. 9) 그리고는 그는 1946년 6월에서 9월까지 경남 진해 경화동 교회를 3개월 목회했다. 그나마도 그 3개월 동안 그 교회에서 신학강좌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려신학교의 시작이었으며 그 강좌를 마치고 바로 고려신학교 교장 서리를 지내다가1948년 4월부터 1960년 10월까지 12년 동안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그러므로 실제로 경화동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후 한상동 목사님의 그룹과의 갈등으로 빚어진 이른바 박윤선 목사의 주일날 선교사 환송예배를 빌미로 고려신학교에서 물러나서 부산 금정산에서 기도하던 중 서울 동산교회의 초대목사로 부름을 받게 된다. 즉 1961년 2월에서 1964년 4월까지 3년 2개월 동안의 목회가 일생동안 처음 맛보는 것이었을 것이다. 사실 필자는 그 기간 동안 총신대학교 학생으로 동산교회의 교육전도사로서 박윤선 목사를 섬길 수 있었다. 그 후 박윤선 목사님은 다시 총신 교수로 부름 받는다. 박 목사님이 이 총신에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의 불평이 일어났다. 박 목사님은 이 중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당시 총신 원우회 회장이었던 김채현 전도사가10)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박 목사님을 향해 “박 목사님은 신학교 교수이므로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십시오”라고 다소 건방지게 따지고 들자 박윤선 목사님은 말하기를 “도대체 자네 나이가 몇이기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라고 말하면서 목회를 그만 두는 것에 대한 섭섭함을 숨기지 아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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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 목사는 1965년 3월부터 1967년 2월까지 부산의 총신분교장과 교수 일을 보면서 부산 성산교회를 돌보았다고 하나 목회를 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다가 1968년에서 1973년 까지 다시 총신대학교 신대원 교수 일을 하면서 서울 상도동 한성교회를 개척했다. 한성교회 설립에는 필자도 군목의 신분으로서 목사님을 도와 가끔 저녁 설교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한성교회도 그냥 말씀을 증거 하는 설교자의 역할을 했을 뿐이고 엄밀한 의미의 목회를 했다고 볼 수 없다. 박윤선 목사님은 어디를 가든지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말씀을 듣기를 원함으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박윤선 목사가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주석을 하면서 그가 깨달은 진리를 증거 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목회자처럼 심방을 하거나 교회행정을 하거나 기타 목회적 돌봄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가 목회를 했던 기간은 요즘 식 개념으로는 겸임교수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윤선 목사는 기도의 사람에다 영혼 사랑에 대한 타는 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박윤선 목사는 반세기를 목사로 있었지만 그는 교수요 신학자요 주석가로서 일했고 목회자로서는 극히 적은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동산교회에서의 3년간 목회, 즉 당회장으로서의 목회가 그래도 목회다운 목회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신학교에서 교수하는 일이 없이 목회에 주력했기 때문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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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牧會者로서의 朴允善 牧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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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 교회 담임목사 시절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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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교회는12) 박윤선 목사를 초대 담임 목사로 모시고 개척하게 된 것을 늘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성도들은 한국의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새 문안교회에서 나왔지만 순수한 복음적 신앙, 정통신앙,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한다는데 크나큰 자부심을 가졌다. 그래서 박 목사님의 설교 시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노트에 설교를 받아쓰고 정리하는 광경은 다른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장면이었다. 초대 동산 교회 부목사였고 박윤선 목사의 목회의 실제적 일과 행정을 도왔던 고응보 목사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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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예배 장소를 “여호와 이래”로 주시던 주님께서 첫 목자를 주경 신학의 동양의 일인 자요, 기도의 사람, 능력의 사람, 복음전도의 열로 불타는 종 박윤선 목사님을 보내주셨 다. 이 사건은 예배 처소를 주신 일 이상의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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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했다. 또 1961년 2월 5일 박윤선 목사님을 모신 동산 교회는 남자 7인, 여자 17인 위원회로 교회의 제반 업무를 수행케 했다. 당시 교회의 모든 일처리는 법보다 은혜가 먼저 였고 모든 의견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빈손으로 시작한 교회이므로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산 교회는 초대교회에 가장 가까운 교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박윤선 목사라는 큰 산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의 말씀의 권위 앞에 누가 감히 아니오 할 자가 없었다. 필자도 1968년 동산 교회를 떠나 동산 교회 여전도회 개척교회인 샘내 교회를 담임할 때 <동산>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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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 중심’에서 시작한 교회라고 생각하고 늘 자랑으 로 여겼다. 그래서 말씀으로 자라왔다는 것이 자랑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성도들이 말 씀을 갈구했고 또 목사님으로서 박윤선 박사를 모시고 그야말로 ‘성경의 맛’을 알았던 시기였다. 나는 동산 교회를 어머니 교회로 삼았던 것이 다행한 일이었으며, 귀한 목사 님으로부터 바른 진리 체계를 배웠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또 저의 스승으로서 강의실에서 만나 뵐 적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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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했다. <동산>지 창간호의 앙케이트에서 “귀하가 동산교회에 오게 된 동기를 묻는 물음에도 이재원 장로는 “창립된 여름에 박윤선 목사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좀 더 받고져”라 했고, 당시 여전도회 부회장 김민자 집사는 “설교 말씀이 너무도 좋아서” 또 최신덕 집사15)는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하여”라고 대답했다.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가 설교학적 평가는 다를 수 있겠으나 그의 감화력은 당시 참된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와 같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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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박윤선 목사의 목회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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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 목사가 동산교회를 목회 할 때, 주일 오전, 주일 밤, 수요일 밤은 어김없이 박목사님의 설교였다. 손님 목사에게 설교를 부탁한 일도 없거니와 부교역자였던 유영빈, 고응보 목사가 설교한 일도 없었다. 교회마다 그 흔한 헌신예배나 특별 예배도 없었다. 예배는 반드시 자신이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박 목사님이 교회를 말씀중심 곧 설교중심의 교회로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굶주렸던 성도들이 단 한 시간도 빠짐없이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은 감히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설교 할 기회가 없었다.17)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일반 교회의 목회자의 설교와는 달랐다. 당시 박 복사는 일반 목회자들의 방법대로 성도들의 필요를 감안하거나, 교회의 행사나 교회의 방향에 맞추거나 또한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성경본문을 택하거나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박윤선 목사는 동산교회를 목회하는 중에도 심방이나 교회행정은 온전히 부교역자인 고응보 목사나 유영빈 목사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기도와 말씀연구에 주력했다. 즉 주석 쓰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의 목회가 일반 목회자들의 목회와 비슷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그가 목회하던 시기는 50대 초반으로 인생의 가장 황금기인 데다 가장 뜨겁게 열정적으로 설교했을 때이다. 그때 그는 이사야서를 주석하고 있었고 요한복음을 증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석이나 설교준비를 하는 중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확실 할 때 진리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이 있기까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칭얼대고 애걸복걸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음이 있으면 큰 소리로 고함치며 기뻐했다. 그러므로 그는 목회자이기는 해도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그런 설교가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 깨달은 진리를 힘 있게 증거 했다. 필자는 회고록에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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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동산교회에서 박 목사님으로부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설교를 들었는데 그의 메세 지를 통해서 나의 신학과 신앙이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즉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 의 신학과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어느 시간에나 감격과 감동으로 은혜를 받았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웬 은혜인지 웬 축복인지 박윤선 목사님아래서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 당시 박 목사님은 50대를 막 넘 긴, 저술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가장 힘 있게 설교할 때인데, 주로 요한복음과 이사야서 강해 설교를 많이 했다. 당시 박 목사님은 이사야서를 집필하고 계셨기 때문에 서재에서 주석을 쓰시다가 막 쪄낸 찐빵처럼 따끈따끈하고 신선한 메시지를 온 몸을 던져 외치실 때는 실로 간장이 녹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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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했다. 사실 박윤선 목사는 말이 목회이지 일반적 의미의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대로 쏟아 붓는 형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날마다 부흥되었으며 뜻있는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단순히 설교학적으로는 평가가 되지 않는다. 박 목사의 설교는 매우 딱딱하고 절제된 표현에다가 문학적이지도 않고 대중적이지도 않다. 유머도 별로 없고 그저 성경진리를 깨닫는 대로 증거 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기도 하고 잔기침을 많이 하는데다 목소리는 톤을 높일 때 쇠소리가 나서 부드럽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었고 한편의 설교에 생명을 걸었다. 앞서 언급했던 이화대학교의 최신덕 교수는 사회학을 전공한 교수답게 아주 합리적이고 냉철한 학자였다. 이단에 시달리다가 거창 고등학교 전영창 교장의 추천으로 동산교회에 왔었다. 몇 주일 박 목사의 설교를 들은 그는 말하기를 “아직 저분의 설교를 다 받을 수는 없지만 그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면 박 목사님이 생명을 걸고 설교 할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반응을 보였다. 19)그만큼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는 열정 그 자체였다. 설교의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는 온 몸 전부를 드려 혼신의 힘을 쏟아 진리를 외칠 때는 모든 성도들의 간장이 녹는 듯 했다. 그의 설교와 주석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항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성경주석을 하다가 설교가 나오고 설교를 하면서 그의 주석의 깊이가 더해 갔다. 그는 자신의 간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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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40년 동안 주석을 집필하면서 펜을 들 수 없는 심적 고통도 많았다. 그런데도 집 필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주석을 하면서 어려운 난 제를 만나면 이 구절에도 남들을 가르칠만한 진리가 나올 수 있는가?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생각하면 그곳에서도 설교할만한 단 맛 있는 진리 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 그 뿐 아니라 밤중에 잠을 자다가 깨어 고요히 성경말씀을 생각 하는 가운데 진리가 생각나면 메모를 해 놓고 잠을 자기도 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체험했다. 설교로 깨달은 것은 나의 주석에 많이 기록한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하나님의 말씀은 건조한 이론이 아니라 생명과 기쁨을 내포하고 있다 고 나는 믿는다. 나는 성경을 주석할 마음으로 늘 뜨겁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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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썼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대로 그에게는 설교와 주석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늘 하나였다. 그는 주일 아침 설교 시간에 400자 원고지 위에 설교를 기록해서 가지고 강단에 섰다. 물론 설교시간에 원고를 전부 읽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대로 말씀을 증거 했다. 그리고 그 원고는 바로 그의 주석의 설교 부분에 들어갔다. 그는 단순한 이론가가 아니고 언제나 뜨겁게 영적으로 달구어져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후학들에게 지적인 것 보다 영력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21) 결국 박윤선 목사님의 목회 설교도 그의 성경주석 집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나 박윤선 목사는 주일과 수요일 설교 외에도 연합 구역 예배 시에도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 때도 그는 예외 없이 일반적 의미의 목회설교가 아니고 성경해석을 주로 했다. 성도들은 그런 형식의 설교를 좋아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박 목사님은 동산 교회 연합구역 예배 설교 시에 제목을 <신비주의(神秘主義)>라고 잡고 화란의 변증 신학자인 스킬더(Klaas Schilder)22)의 신비주의에 대한 비판을 인용하면서 참된 신비주의와 거짓된 신비주의를 날카롭게 비교 분석하여 참된 신비주의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23)이 설교에서 시편 51편을 해석해 나간다. 그런데 이 설교와 강의는 신학생들이 들어야 할 내용이나 연합구역 예배 시에 긴 설교를 했다. 설교라기보다는 신학강의였다. 설교는 본래 청중들의 수준과 그 당시의 상황을 참고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 함에도 그에게는 설교와 신학강의 구별이 어려웠다. 이것이 그가 비록 교회의 목회자라고는 하나 분명히 신학자요 주석가라는 한계를 벗어 날수는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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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 목사의 설교에는 어떤 틀이 없었다. 가령 위에서 말한 <신비주의>란 설교에서 “이제는 결론을 맺으려 한다.”고 말해 놓고 거의 10분 이상을 설교를 계속 했다. 이런 일들은 그의 주일 설교나 밤 설교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성령께서 은혜주시는 데로 또 성경진리가 깨달아지는 대로 사력을 다해 설교하기 때문에 반복이 많았고 어떤 틀에나 시간에 매이지를 않았다. 가령 박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하나있다. 즉 설교란 마치 큰 나무에 대못을 박듯이 처음에는 가볍게 두들기다가 중간 쯤 못이 들어갔다 싶으면 사정없이 그 못이 나무에 박히도록 힘껏 내리쳐야 한다고 했다. 과연 그의 이론처럼 처음에는 조용조용히 말씀하다가 어느 정도 진리가 들어갔다 싶으면 마치 굵은 대 못을 박듯이 사정없이 망치로 두들겨 때리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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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박 목사님의 설교이해는 설교 준비 없이 강단에 서는 것은 마치 소를 유기 그릇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24) 즉 준비 없는 설교는 청중들에게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심령들을 헝클어 놓는 것 밖에 안 된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는 신학자이면서 항상 설교를 생명처럼 귀히 여겼다. 그러면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관을 좀 더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박윤선 목사는 그의 설교관은 곧 그의 성경관에 나오고 그것은 바로 칼빈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트리니티 대학교(Trinity Evangelical University)의 랄센(David L.Larsen)교수는 박윤선 목사의 설교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설교란 강의도 아니고 변증적인 말도 아니다. 설교란 영적 삶에서 생산된다.”고 했다.25) 흔히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들어야 제 맛이 나는 설교라고 한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아주 힘들어 보이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대중적인 기교도 없고 유머도 없고 전형적인 평안도 엑센트에다 음성도 짖눌려 나오는 쇠소리 같았었고 말을 반복하는 유형이었으나 진리에 대한 열정 하나가 청중들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 자신이 설교에 대한 이해를 그의 고백에서 들어보면 이렇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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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설교의 제목을 정함에 있어서 그때의 교회 실정에 맞도록 정하기도하고, 또는 영 적 깨달음을 가지고 제목으로 삼기도 한다. 다음에는 그 정한 제목과 잘 통하는 성경 본 문을 찾아서 그 본문을 해석한다. 그런데 이 해석 작업에 있어서 나는 단편적 (Atomistic)으로 하지 않고 구속사적으로 그 본문의 뜻을 찾는다. 그리 할 때에 거기서 굵고 심도하고, 영적인력(?的引力)이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언제나 본문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요소들을 찾는다. 그 이유는 성경을 그 어느 부분이든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경의 윤리적 부분들이나 성도들 의 믿음의 덕행까지도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을 배경하고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단순한 윤리 문제나 모범적 훈화로 취급하지 않고 그런 기사도 구속사적 관련으 로 해석한다. 그와 동시에 그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지 생각하면 현실적 의의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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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했다. 박윤선 목사의 고백적 설교론은 칼빈주의적인 구속사적 설교를 압축해 놓은 듯하다. 이와 같은 구속사적 설교 (Redemptive-historical preching)의 방법은 본래 사도들의 설교 방법이 있으나 1930년대 화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부활되었다.27)박윤선 목사는 구속사적 설교를 하면서도 오늘의 상황(Context)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주석적, 구속사적으로 연구하면서 기도로 뜨거워진 설교였기에 그의 감화력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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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위에서 박윤선 목사는 칼빈주의적인 설교 또는 구속사적 설교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는 몇 가지 구체적인 특징이 있다고 본다. 즉, 그의 설교는 일찍이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설교 방식과 다르지 않다. ①그의 설교에는 늘 하나님 중심 또는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드러내는 것이다. ②그의 설교에는 오직 성경(Sola Soriptus)만을 힘 있게 주장하고 ③그의 설교에는 오직 은혜(Sola Gratia)의 사상이 보이며 ④그의 설교에는 오직 신앙(Sola Fide)을 엿볼 수 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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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朴允善 牧師의 牧會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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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말했지만 박윤선 목사의 목회 활동은 오직 설교뿐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것마저도 그의 성경 주석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만큼 그의 주석 사역과 설교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목회 활동 전반에 걸쳐서 모든 것을 부목들과 당회원들에게 맡긴 체 오직 말씀 증거 하는 것에만 주력했다. 박 목사님의 뜻도 그러하지만 교인들의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새문안 교회에서는 여러해 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전장이 되었고 정치적 이야기로 매워진 것에 대한 염증이 일어났으며, 갈라져 나온 성도들은 순정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듣기만을 소원했기에 목회자인 박 목사님과 성도들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래서 박목사는 설교이외의 방면에서는 목회자다운 역할을 해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의 목회의 개념은 설교 뿐만 아니라 상담, 교육, 행정, 심방,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서 통합적 목회의 개념이 주된 관심이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오직 설교에만 매달릴 뿐 다른 방면에는 무심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의 삶 속에서 그 모든 목회 활동을 하기는 불가능 했다. 그런 중에서도 몇 가지 그의 목회에 특이한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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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주일 낮 시간의 공기도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관행은 주일 오전 대 예배시간에 으례히 당회원들 곧 장로들이 대표기도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박윤선 목사가 3년 동안 장로의 대표기도 하는 것을 거의 본 일이 없다. 박 목사의 주장은 주일 낮 예배의 기도는 제사장적 기도로서 목사가 대표로 기도하는 것을 옳다고 주장했다. 29) 사실 그것이 화란이나 미국 개혁파 교회들의 원칙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장로가 기도 하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예배에 동참하는 데는 의의가 있으나 문제는 일주일 동안 전혀 준비가 안 된 장로들이 증언부언하기 쉽고, 교리적으로 맞지 않는 기도도 많으며,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 기도함으로 성의가 없고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님의 주일 낮 예배 기도는 목회자가 하는 것으로 굳어지므로 그것은 전통이 되었다. 오늘 날 한국교회의 관행과 비교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30) 사실 개혁교회의 전통은 목사이외의 사람이 대 예배 시에 기도하는 법은 없다. 추측컨대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목회하면서 기도를 잘 못하니, 장로, 영수, 집사 등에게 기도를 대신 하도록 한 것이 그 전통이 된듯하다. 또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대게가 이른 바 의식과 예식에 자유로운 이른 바 자유교회(Free Church)의 개념을 가진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 온 것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박윤선 목사가 주일 낮 예배에 장로들의 대표기도를 시키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처음 교회를 시작 할 때 상회가 없는 중립교회라는 이유도 있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여럿 있었지만 상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후에 장로 취임 예배를 드렸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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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말할 필요 없이 박윤선 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서재와 골방은 큰 소리로 외치는 기도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고 총신의 재임 시에도 담요 한 장을 들고 기도 굴에서 고함치며 기도하던 분이다. 그래서 그가 강단에 서기까지 설교를 지적(知的)으로 준비하고 그것을 기도로 불붙이는 일을 했다. 기도로 준비하지 않는 설교는 없다고 했다. 따라서 그런 기도는 심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나 자신이 제물이 될 정도여야 하며, 이런 헌신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참 기도에 이르기 어렵다고 말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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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의 대표기도에서 보는 대로 박윤선 목사의 목회는 곧 기도의 목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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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다음 박윤선 목사의 목회 행정과 정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데로 그는 신학자이며 성경 주석가이지 전문 목회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목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졌다는 것은 그는 말씀으로 증거 하는 설교에 대한 타는 듯한 열정을 가졌다는 것이지 목회다운 목회를 하지는 않았다. 또 그는 건망증이 너무 많았다. 그 건망증이란 바로 오직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하는 일에 모든 신경과 정성을 한 곳에 쏟았기에 심지어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즉 어떤 때는 반찬만 계속 먹다가 또 어떤 때는 밥만 계속 먹는 등 일반 사람으로서 거의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많았다. 우산을 들고 나가면 가져오는 법이 없고 모자를 거꾸로 쓰는 것도 보통이었다. 하여간 일반인들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전력투구하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분이었다. 그러니 그런 분이 목회 행정이나 정치를 옳게 하리 만무했다. 하루는 주일 예배를 마치고 급히 나를 불렀다. “정 전도사 대구 제일 교회 목사님 이름을 아는가” 라고 했다. 내가 아는 데로 “이상근 목사님 아닙니까”했더니 박 목사님은 “아참 그렇구나”라고 했다. 자세히 알아봤더니 박 목사님의 사돈이면서 평생 고려신학교 조직 신학 교수로 함께 일하던 친구인 이상근 목사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한 가지 아는 것은 대구 제일 교회 목사님 이름과 똑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대구 제일 교회 목사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그런 정도이니 체계적인 목회 행정이나 정치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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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중에도 특이한 몇 가지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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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그의 목회는 그의 주석의 원리와 설교의 원리처럼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목회였다. 1962년 6월 10일 정부는 화폐개혁을 주일 날 단행했다. 그러므로 주일 날 교회의 모든 재정을 정리하고 돈을 바꾸지 않으면 옛날 돈은 한 낱 휴지에 불과 하게 되었다. 이 때 박윤선 목사와 제직회는 교회의 사명과 주일 성수를 지키기 위해서 교회의 모든 돈을 포기해 버렸다.33) 필자는 그 후에도 그전에도 화폐개혁 하던 날 어느 교회가 교회의 모든 제정을 포기 하면서까지 주일 성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환난 때 도리어 신앙의 진수를 알 수 있듯이 박 목사님과 동산교회가 보여 준 신앙적 태도는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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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로,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한 번 제직으로 세우면 특별한 권징을 받지 않는 한 언제나 서리 집사로 재임명하는 것이 관계였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는 1963년 특단의 조취를 내렸다. 1963년에 재직을 임명하면서 전년도의 재직을 하나도 임명하지 않고 일년동안 쉬게 했다. 그 이유는 자칫 집사의 직분이 마치 세상에 명예직인 듯이 생각하는 폐단을 방지하고 고요히 아무 직분이 없는 평신도로서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성실히 봉사하는 훈련을 받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그 결단은 교회의 시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런 특단의 조치는 박윤선 목사니까 가능했을 터이고 만에 하나 다른 목회자가 그리했다가는 교회에 큰 환난과 시험이 와서 교회의 존립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는 박윤선 목사의 목회에 아주 특이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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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로 박윤선 목사님의 목회는 철저한 위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지만 박 목사님은 성경주석 쓰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고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성경연구에 주력하였기에 실제로 일반적 의미의 목회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목회의 모든 것을 부 목사에게 맡기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목회자가 부 교역자에게 위임하는 것이 오늘의 목회학 이론에 가장 중요하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관리 감독하고 참여 하는 것은 불가능 할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현재 목회 이론이다. 그리고 박윤선 목사의 목회는 일종의 역할 분담을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목회에 있어서 프로그램 개발, 전도, 새가족 사역, 교회 교육, 심방, 교회 행정, 구역관리, 제자훈련 등 중요한 것이 많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부흥은 설교가 결정적이다.34)이는 최근의 성공적인 목회자들의 일반적인 증언이다. 소강석 목사는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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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에 있어서 설교가 거의 결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아니 설교가 절대 결정적이라고 까 지 말 할 수 있다. 아무리 신도시 문화와 상황에 대한 연구가 완벽하고, 교회와 홍보와 이미지 메이킹을 잘 하며, 목회 철학과 비전이 훌륭하고, 열린 예배를 잘 드린다 하더라 도, 설교가 허공만 친다면 누구도 교회에 머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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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했다. 옳은 말이다. 박윤선 목사는 동산 교회를 개척해서 비록 3년의 짧은 기간이기는 해도 교육, 행정, 심방 등은 부목에게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하나만으로도 성공한 모델이 되었다. 일찍이 대 설교학자 포사이드 (P.T.Forsyth)는 “설교는 복음의 연장이고 복음의 선포이다. 설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중단 없는 행위로서 그것이 계속되고 반복되어 선언되는 것이라”고 했다. 35)또 로이드 존스(D.M.Lloyd-Jones)의 말처럼 “설교 사역이란 내게 있어서 어떤 소명보다 가장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런 소명”이라고 말했다.36) 그와 같이 박윤선 목사는 비록 목회 전반에 걸쳐서 대부분을 부교역자에게 위임하고 말씀증거에 생사를 걸었다. 그래서 교회의 모습을 제대로 이루었고 교회가 부흥되었다. 아마도 이런 목회 스타일도 오늘은 귀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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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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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박윤선 목사는 목회자가 되었는가?>라고 제목을 달았다. 위에서 필자의 논의를 종합하면 그는 칼빈주의 신학자이며 성경 주석가이지만 또한 진실 된 목회자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너무 사랑한 나머지 평생토록 말씀을 해설 하는 일에 40년을 보냈다. 그리고 깨달은 진리를 설교로 증거 하려고 가슴에 불이 탔다. 그리고 그는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 울며 기도하고 말씀을 받는 영혼들을 위해서 사력을 다해 기도했다. 말하자면 그는 현대 목회학 이론을 뛰어넘은 참된 목자 상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37) 그는 성격 주석 외에는 다른 일에 관심이 없는 듯 했으나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의 목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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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 목사님이 비록 한 교회에 전적으로 매달려 목회한 목사는 아니었지만,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의 목회를 잘 감당한 목사였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성장하면서 교회 안에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긴장이 고조되고 교회분열의 직전까지 갔을 때 사도들이 모여 진지하게 회의를 했다. 그 때 얻은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6:2)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6:4)고 했다. 현대 목회가 너무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리고 인본주의적인 발상이 판을 치는 때에,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겠다는 사도들의 고백과 결심은 교회를 교회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은혜를 은혜 되게 했다. 그렇게 볼 때 박윤선 목사님의 목회는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는 가장 성경적 목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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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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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96년 11월 11일 충현 교회 갈릴리 홀에서 제 8회 정암 신학강좌가 열렸는데, 당시 강의의 주제는 ?박윤선과 목회?였다. 발표자는 김명혁 박사, <박윤선의 기도>, 황창기 박사, <박윤선의 성령론>, 그리고 필자의 <박윤선의 설교>였다. 당시 초대장에는 “말씀과 기도에 붙잡혀 평생토록 진실과 겸손과 충성으로 주님과 한국교회를 섬기시던 정암 박윤선 목사님께서 영광스런 주님의 품으로 가신지 어언 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고인의 신앙의 유덕을 마음속에 귀하게 간직하고 흠모하는 우리 남아있는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축복으로 주신 고 박윤선 목사님의 생애와 사상을 다시 한번 깊이 되새기고자 아래와 같이 제 8회 정암 신학 강좌를 개최하려고 하오니 많이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 8회 정암신학 강좌 팜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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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박윤선, “나의 신학과 나의 설교” 神學正論, 제 7집 (合同神學校,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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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정성구, 박윤선 목사의 신학과 설교연구,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발행,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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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988년 6월 3일 합동신학교의 장례식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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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능전 권사는 새문안 교회에서 분립하여 나온 성도들 중에 대표인 고웅진 장로의 부인으로서 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하고 연합회 회장등 역임하는 등 매우 활동적이었다. 초기 동산교회의 건설에 숨은 공로자였고 박윤선 목사님을 모셔 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증언은 필자가 미국 텍사스주의 오스틴(Austin)교회에 부흥회에 갔을 때 이능전 권사의 딸 고혜련씨와 만나 간증하는 중에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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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방지일, “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 敬虔과 學問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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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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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정성구, op. cit. cf.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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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박윤선 목사는 1934년 3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바로 목사 안수를 받지 않고 1934년 9월에서 1936년 5월까지 Westminster 신학교를 수학하고 석사 학위(Th.M)를 받는다. 귀국 후 1936년 8월부터 1938년 6월까지 평양신학교 원어 강사와 총회 교육부 표준 성경 주석 편집부에 근무하고 고린도후서 주석을 썼다. 그는 다시 1938년 9월에서 1939년 11월까지 Westminster 신학교에서 변증학과 고대 언어를 연구 했다. 그리고 1940년 3월에 목사 인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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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당시 용산에 있던 총회신학교의 분위기는 이른바 3박사 사건의 분위로 어수선했고 이런 때 원우회의 입김이 세었다. 그래서 원우회장이 대표로 와서 박윤선 목사는 목회를 그만 두고 오직 교수하는 일에 주력하도록 의견을 모았다. 왜냐하면 1964년 1월부터 1년 동안 이른바 윤번제 교장제도로 박윤선 목사는 총신의 교장이 되었다. 김채현 목사는 개혁 측의 교회의 지도자였고 총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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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이 기간에도 교계는 박윤선 목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당시 동산교회의 가건물에서 이른바 칼빈 성경 연구원이 생겨나서 박목사의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으로 몰려들었다. 당시의 기억으로 김진홍 목사, 최 훈 목사, 홍근섭 목사, 전칠홍 목사 등이 함께 가담했고 삼각산 기도원에 몇 차례 여름 수련회도 가졌는데 당시 필자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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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창립 예배 때 선언문에서 밝힌 대로 <동산>은 주님만이 출입하시는 오직 십자가의 빗장으로 단단히 잠근 <동산>, 복음의 말씀의 우물과 다함이 없는 신선한 진리의 샘이 항상 솟아오르고 있는 <동산> 신령하고 향기로운 오곡백과가 사시장춘(四時長春) 결실하여 있는 동산, 성도들과 더불어 주님 모시고 길이 즐길 수 있는 <동산>이 되기를 원한 데서 동산교회로 이름 지었다. 선언문, 敎會創立禮拜에 除하여,「동산」창간호, 196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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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고응보,, “동산교회 7년 회고” 동산, 창간호(1968)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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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정성구, “개척 교회를 맡고서” 동산 창간호(1968)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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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당시 이화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였던 최신덕 집사는 시카고 대학에 유학을 하고 왔으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 할 줄 아는 인테리였다. 한때 문선명 집단에 소속했으나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되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문집단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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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동산, pp7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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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박윤선 목사의 설교에 길들여진 동산교회 성도들은 다른 목사들의 설교에 별로 큰 은혜를 받지 못했다. 그로 말미암아 2대 김성환 목사나 3대 한재호 목사님의 목회와 설교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왜냐하면 교리체계가 다르거나 좀 특별한 메시지를 할 경우 즉각 이는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과 설교와는 다르다는 반응이 나와서 교역자를 곤혹스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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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정성구, 賢岩 鄭聖久 博士 회고록, 은총의 포로(도서출판 한빛, 2006)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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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이는 필자가 당시 부목사였던 고응보 목사에게 들은 말이다. 물론 필자도 그 가정과 사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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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박윤선, “나의 生涯와 神學” (크리스챤신문, 1980년 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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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1976년 3월 필자가 화란 Vrije Universiteit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려 했을 때 박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즉 “貴下께서 귀국하신다니 감사합니다. 모쪼록 귀국하셔서 잘 해 보시기 바랍니다. 벌써 알았다면 힘써 몰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가셔서 小에서부터 쌓아 올리는 것이 有利합니다. 젊어서 일해야 됩니다.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 더 큽니다. 더욱이 우리 한국 敎界는 참된 일군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제부터는 공부를 해도 겸하여 한국 교회의 유일이 同時에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젊어서 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력(靈力)이 귀합니다 .... 박윤선 목사의 신학과 설교 연구, p.108.박윤선 목사는 생전에 필자에게 약40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거의 주석을 쓰면서 만난 느낌을 적고 자료를 찾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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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스킬더 박사(1890~1952)는 개혁주의 변증신학자이자 대 설교가이며 문필가였다. 1933년 독일의 엘랑겐 대학에서 「역설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란 제목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John Calvin과 Kierkegaard의 역설에 대해서 고찰했다. 이 논문에서 K. Barth의 변증법 신학에 도전했다. 그는 같은 해에 화란의 Kampen Theologische Hoogeschool를 설립하고 교의학 교수가 되었다. 「Heiderberg Catechismus.」해설서와 「Cultuur en Christus」등 대작이 많다. 칼빈주의적 변증학의 독보적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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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박윤선, 신비주의 「동산」 창간호. pp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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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이 말들은 모두가 동산교회 강단에서 자주 쓰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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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David L.Larsen, The company of the preachers (Kregel, 1998) p.789. "The Bible is the word of God. Therefore, when we understand The truth of Bible Through the Holy Spirit. We can feel the power of life in the Bible. Preching is not a Lecture or an apolagetic speech, preaching in the product of a spiritual life.- Yune-Su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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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朴允善, ‘나의 신학과 나의 설교’ 神學正論, 제 4권 제 7집(1986)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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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구속사적 설교 방법은 칼빈주의자들의 설교방법인데, B. Holwerda, K.Schilder, H,Spier, D.Van Dijk, C.Veenhof등이 대표자이다. 이들은 모두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로 ①하나님 중심사상 ②역사적 점진성의 원리 ③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역사의 축으로 보면서 설교한다. cf, 졸저, 개혁주의 설교학(총신출판부, 1991) pp36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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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이는 필자의 박윤선 목사의 神學과 說敎硏究,pp37~54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영어로 Korean Church and Reformed Faith - Focusing on the historical study of preaching in the Korean church (Time Printing, 1996) pp211~226에 번역 되었으며, 일본어, 대만어, 중국어, 러시아어, 포르투칼어,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킨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박형룡, 한상동 등과 더불어 박윤선의 신학자와 설교자로서의 변모가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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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당시에는 고응진, 김지호, 김익보 장로등이 있었으나 박윤선 목사의 목회 방침에 의의를 다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주일날 목회기도는 당연히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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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필자는 당시 박윤선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서 총신대학교회를 13년간 목회하면서 단 한번도 장로나 집사에게 대표기도를 시켜 본 일이 없다. 다만 헌금에 앞서서 헌금 기도와 헌신기도를 동시에 하는데 그들에게 기도를 맡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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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방지일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상회 없이 장로 취임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방지일 목사는 그 자리에서 축사를 했다. 방지일, ‘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 敬虔과 學問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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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박윤선, ‘나의 신학과 나의 설교 ’ 神學正論,(1986) p.18. 박윤선 목사는 임종하기 일년 전 필자의 집에 와서 써 준 마지막 휘호는 祈禱一貫 이었다. 아마 이는 박윤선 목사의 일생동안 걸어온 삶의 모습이며 후학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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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박윤선 목사의 神學과 說敎硏究,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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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소강석, 신도시 목회의 성고 키를 잡아라, (쿰란출판사. 2004).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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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P.T.Porsyth, Positive Preaching and the Modern Mind (Independent press.1907).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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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D.M.Lloyd-Jones, Preaching & Preacher, 서문 간역 (CLC,1977)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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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牧會란 말은 종교개혁자들은 Seelsorge(독일어), Zielzorge(화란어)로 이해했다. 즉 영혼을 돌본다는 뜻이다. 간호사가 또는 어머니 갓난아이를 돌보는 듯 하는 것이 목회란 뜻이다. 졸저, 實踐神學槪論(총신대학출판부,1980).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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