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고려개혁 수양회 - 2005년

일반자료      
쓰기 일반 자료 초기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교회] 고려개혁 수양회 - 2005년


?2005년?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총회 교역자수련회?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교단의 정체성과 미래를 조망하며
송 용 조
시작하면서
이제까지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섭리와 큰 은혜로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성장해
왔다. 특별히 한국 장로교회는 세계 장로교회 가운데 가장 큰 교세를 이룰 정도로 크
게 성장하였고, 그만큼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장로교회는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그 신앙표준으로 삼고 있으며, 칼빈주의와 청교
도주의로 대표되는 개혁신앙의 터 위에 서 있는 교회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장로
교회 안에서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들이 얼마나 보존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때, 옛
장로교회와 그 유산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한국 개
신교회는 저마다 개혁교회라고 자처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교회를 찾아보기 어
렵고, 한국 장로교회는 저마다 정통장로교회임을 자처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장로
교회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장로교회의 교리표준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이지만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은 지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만 취급될 뿐, 신앙의 실제에 있어서는 교회의 물량주의와 성장지상주의, 사람 위주
의 프로그램과 문화적 코드가 가장 현실적인 교리표준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교단에 속한다는 것은 교단 안의 모든 목회자들이 삶과 신학, 신앙과 교리,
예배와 교육, 도덕적 판단과 권징 등 중요한 신앙의 실제에 있어서 같은 고백과 표준
과 실천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유가 없이는 교단의 정체성이 있을
수 없으며, 교단의 정체성이 없이는 아무도 교단의 미래와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 교단은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장로교회임을 자처하는
교단으로, 우리 교단의 이름도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개혁”이라 부르고 있기는 하나,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2
우리 교단 안의 목회자들은 신앙의 실제에 있어서 같은 신앙고백과 표준과 실천을
공유하지 못한 채 여러 해를 지나왔고, 이 문제를 놓고 심도있게 논의하며 우리 자신
을 성찰할 만한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금번 수련회를 기점으로
해서 우리 교단 목회자들이 교단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 있
기를 바라며, 이것이 단순히 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들이 하
나님이 기뻐하시며 귀히 쓰실 수 있는 교회로 거듭 날 수 있느냐 하는 중대하고도 아
주 실제적인 고민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교단은 개혁교회, 특별히 장로교회와 청교도들의 신앙전통을 소중하게 여
기는 교회이므로, 이번 기회에 개혁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들에서 우
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 하는 것을 성찰해 보는 동시에, 우리 교단이라도 시급
하게 먼저 회복해야할 신앙가치들과 유산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봄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이 땅의 그루터기와 같은 교회로 설 수 있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우
리의 온 힘을 기울이고 합하여 나아갈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물론 오늘날 교회가 소
중하게 생각하고 회복해야 하는 신앙유산들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요
성과 시급성 면에서 볼 때 우선적으로 언급해야 할 신앙유산 다섯 가지를 꼽아 생각
해 보고자 한다.
성경적 예배
첫째는 성경적 예배, 바른 예배의 회복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세상이 침투해 들
어오면서 먼저 예배가 변질되고 있다. 다양한 예배 전통과 요소들이 그때 그때의 편
의에 따라 원칙 없이 예배에 도입되고 있다. 예배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
기 위한 수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예배는 교회성장의 수단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 그 자체이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세상의 유행
이나 관습, 세상의 방식을 따라 예배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하셨다(신 12:29-32). 그
러므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무분별하게 비성경적인 요소를 예배의식에 도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도 있지만 열납되지 않는 예배도 있기
때문에(창 4:1-5; 히 11:4), 예배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무 검증도 필요없
다고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그 드리는 예배가 과연 성경적이고 바른 예배인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3
지 늘 성찰하고 개혁해야 한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교회의 사명 중에 가장 큰 사명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이 기뻐받으시는 바른 예배란 무엇인가? 첫째, 바른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리
는 예배이다. 사람에게 익숙하고 편하고 좋은 대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예배해야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 우
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 요소들은 언제나 성경의 승인과 인정을 받은 것이어야 한다.
둘째, 바른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예배이다. 칼빈은 말씀의 선포
와 성례의 시행을 참된 교회의 표지로 보았다. 셋째,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과 은혜와 성품에 합당한 태도(manner)로 드려져야 한다. 우리의 온 마음과 뜻
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엄위하신 하나님 존전에 나아감을 알고 드리는 예배여야 한
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과 은혜로운 사역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하여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 넷째, 참된 예배는 그리
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구약의 모든 제사가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에 대한 모형이었
듯이, 오늘날의 예배도 우리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드러내고 찬미하여 이를 증거하는 예배여야 한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예
배는 예배의 본질을 상실한 예배이다.
바른 예배를 보수하지 못하면 우리의 예배는 곧 더럽혀지고 타락하게 된다. 예
배를 더럽히는 것은 곧 주의 이름을 더럽히고 멸시하는 것이요 주를 더럽게 하는 것
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말 1:6-7, 12). 그러므로 교회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예배의 오염과 타락이다. 예배의 본질이 상실된 예배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며,
이러한 예배의 타락은 예배자의 타락을 가져온다. 사람들이 위로 받으며, 치료받고,
즐거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마는 이것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것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의 부산물일 수는 있어도, 예배의 진정한 목적은 될 수 없다. 하
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
대로 예배해야 한다. 삶에서나 예배에서나 유일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배
가운데 있는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예배가 말씀에 기초한, 순결한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4
주일 성수
둘째는 주일성수이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시고 제 칠일에 안식하셨고 그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창 2:3).
성경에서 무엇을 거룩하게 했을 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곧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구별한 것이다. 마치 구약시대에 성막과 성전, 그
리고 그 성막 안의 여러 기구들이 예배를 위하여 구별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날
을 거룩한 날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구별하셨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거룩성
(sanctity)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 날의 우선순위가 예배에 있어야 함을 말해준
다.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함이 없다면 안식일은 그 빛을 잃게 되며, 우리의 안식은
방종과 불신앙과 패역함이 되고 말 것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합당하
고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을 멈추라는 것이다. 만일 안식일의 일차적 관심이
모든 활동들로부터 쉬는 무활동(inactivity, 휴식)에 있다고 한다면, 그날에 누구보다
도 열심히 일하였던 제사장들은 안식일을 가장 크게 훼손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사장들을 가리켜서 무죄하다고 하심으로써(마 12:5),
안식일의 본의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기에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 성회 곧 공예배로(레 23:21; 민 28:25) 모
였으며, 이 날에는 평일보다 더 많은 제사를 올려드렸다(민 28:9-10).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도 제4계명을 따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the
Lord"s Day)로 지켰던 것이다.
따라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바른 예배를 드리고 보수하자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안식일을 지키는 가장 우선되는
이유는 백성들이 자신들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참되고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데 있습
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모든 세속의 일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거룩한 모임에 참여
할 자유를 가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날을 잘 지키는 것은 이 목적(곧 예
배)과 관련해서 신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상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사랑했던
교회와 성도들은 모두 주일을 거룩하게 여기고 지켰다. 한국교회도 주일 성수의 아름
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주일을 성수하는 교회나 성도들을 찾아보
기 어렵게 되었다. 오히려 교회들이 나서서 주일 예배를 금요일 밤 또는 토요일 예배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5
로 대치하고 있으며, 휴가를 떠나는 교인들을 위해 산이나 바닷가에 수양관 겸 주말
교회를 마련하여 휴가지에서 예배드리도록 해준다고 한다. 사람들은 주일을 거룩한
날보다는 편히 쉬는 공휴일쯤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안식일을 제정하
신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교회가 사도 시대부터 지금까지 정해서 지
켜온 주일 예배를 자기 마음대로 다른 날 예배로 대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
지와 교만에서 나온 인본주의적이고 비신앙적인 발상이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는
주말 교회라는 이름이나 개념이 없다. 초대 교회와 청교도들은 주일을 지키기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생명을 바치면서 주일을 거룩히 지켰다. 기독교는 부활의 역사
적인 날을 기념하여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주일을 지키는 역사적
종교이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날일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셔서 우리로 지
키도록 친히 제정하신 날이다(창 2:3). 따라서 이날을 아무도 폐할 수 없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역사의 종국,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히 4:1-10).
이 날은 거룩한 예배의 날이며 복된 은혜와 안식의 날이요 사랑과 섬김을 실천
하는 봉사의 날인 것이다. 주일이 훼손되면 주일에 드리는 공예배가 훼손되고 공예배
가 훼손되면 성도들의 가정과 영적 건강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 주일 성수를 포기하
면 공예배가 무너지고, 예배가 무너지면 성도들의 가정이 믿음 위에 설 수 없고, 가
정이 깨어지고 무너지면 개인도 넘어지며, 무너진 개인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결국 교회가 나서서 주일 성수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은 교회의 영적
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에 불과하다. 주의 날까지도 자기 생각과 편리대로 움
직이려는 것은 창조주이시자 생명의 주시며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이다. 하나님께서 공적 예배의 날로 정해주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이날에 하나님
을 바르게 예배하며 안식해야 한다(소요리문답 제60문).엿새 동안에는 힘써 일하며,
주일에는 세상 일과 오락을 그치고,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대한 공적 사적 예배와 심
신의 안식과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며 자비를 행하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웨스트민스
터 신앙고백 21장 6절).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신자의 마땅한 삶이며, 영원한 안식을 대망하는 교회에 합당한 태도이다.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6
가정 예배
셋째는 가정예배의 회복이다. 가정예배 전통은 주일성수 전통과 함께 개혁주의
교회로부터 한국교회가 물려받아 소중하게 간직해 온 신앙의 유산이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우리의 가정에서 찬송과 기도와 성경을 읽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철저한 개인 신앙, 개인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소위
큐티(Quiet Time)라 하여 개인 경건과 묵상 시간을 통한 하나님과의 일대일 만남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부모로부터 신앙을 전수받고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혼자 큐티하는 일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제
는 가족과 함께 거실에 둘러앉아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나누는 것
이 오히려 어색한 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산업화되고 도시화
되면서 우리의 생활 습관은 불규칙하게 되었고 가족간의 유대관계도 느슨하게 되었
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에서 지나쳐 우상처럼 떠받들며, 자녀들
은 부모 공경의 의미도 모르고 실천도 모르며, 부부 간의 대의와 정절은 표류하고 있
으며, 형제자매의 우애와 동기 간 사랑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를 볼 때, 인류 역사상 오늘날처럼
가정이 심하게 깨어지고 붕괴되었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하는 서글프고 두려운 생각
까지 가지게 된다.
대중매체에서나 학교에서 그리고 각종 연구소에서 저마다 가정의 치유책을 찾아
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가정과 결혼생활의 위기와 갈등을 해소시켜 준다고 하는 수
많은 결혼 관련 세미나, 가정생활 특강, 부부 및 자녀 상담 프로그램 등이 소개되고
있다. 가정에 관한 많은 저술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가정의 가치를
보호하려고 최신의 심리학 이론이나 상담 기법들을 사용해서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
시하고는 있으나, 가정문제의 핵심이 영적인 것임을 진정으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이
를 영적으로 풀어가려고 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가정에 대한 잘못된 믿
음과 가치로부터 나오는 갖가지 기현상들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영적 기관이므로 가정문제는 영적으로 풀어야 한다.
가정은 영적 기관이자 또한 언약 공동체이다. 우리의 결혼은 언약의 결혼이며,
우리의 자녀는 언약의 자녀들이다. 가정이 언약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기에, 모든 가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7
정사는 믿음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부부관계에 비유하면서, 부부는 맹약(beriyth) 곧 언약(covenant)의 관계에 있으므로
서로에게 궤사를 행치 말고 신실하게 행해야 할 것을 밝히 교훈하고 있다(말 2:14).
또한 하나님께서 언약의 부부들에게 주신 자녀들은 언약의 자녀들이므로 그 가정을
통하여 양육되는 자녀들이 경건한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말 2:15).
이것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임을 알았기에, 기독교회는 그 처음부터 가정
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훈련과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하여 경건한 부모, 경
건한 자녀를 얻고자 힘써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예배를 회복하자는 것은 우리
각 가정이 교회임을 인식하자는 것이며,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맺은 결혼의 언약을
믿음으로 지킬 것과 언약의 자손들을 경건하게 양육하는 일이 우리 가정사에 있어서
가장 큰 우선순위에 있음을 고백하자는 것이며, 우리 가정이 교회로서 바로 서며 믿
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 가정에 말씀과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이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함에 있
는 것처럼(소요리문답 1문답), 가정의 존재 의의 역시 하나님을 바로 예배함에 있다.
가정은 개인과 사회의 출발이며 기초이다.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바로 설 수 없다. 가정은 교회를 이루는 근간(根幹)이다. 개교회는 성도들의
가정들로 구성되므로, 교회를 구성하는 가정들이 굳게 서지 못하면 교회 역시 굳게
서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가정의 영적 실패는 그 가정의 총체적 실패를 의미하
는 동시에 그 가정과 관련된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의 실패를 의미한다. 이 시대
가 한편으로 가정예배를 드리기 가장 어려운 때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 가정이
가장 심하게 붕괴되어가고 있는 때이기도 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
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회복은 영적 회복에 달려 있고 가정의 영적 회복은 가정예배
의 회복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예배야말로 가정을 영적으로 회
복시키며 치유시킬 수 있는 양약이 될 것이다. 가정과 교회의 담이 많이 허물어진 이
시대에, 우리 교회는 허물어진 성전의 담을 재건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였던 이스라
엘 백성들의 심정을 가지고 허물어진 가정의 담이 재건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
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재건되지 못하면 우리 개인과 이 사회와 나라와 우리 교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8
회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 어두운 때, 우리는 모든 성도들의 가정에서 ‘복된
소리, 구원의 소리’(시 118:15)가 아침, 저녁마다 흘러나오게 되기를, 그리고 그런 신
실한 가정들로 구성된 교회들이 이 나라 가운데 많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교리 교육
넷째는 교리교육의 회복이다. 교리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경
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산물인 교리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교리는 딱딱한 것이며
관념적인 것이기에 실생활에 큰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리
적인 바탕이 없는 신자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성경만
이 진리의 유일한 원천인 것은 틀림없으나 교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도리를
잘 요약하는 동시에 올바른 성경 해석의 지침을 주는 교회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교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성
경적 교리는 거짓된 교훈을 분별하고 막아주는 방패와도 같아서 진리를 보수하며 교
회를 순결하게 지켜 준다. 이단적인 사상이 교회 안에 침투했을 때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는 것, 우리의 믿는 바를 설명하고 변증하는 것도 교리의 바탕이 없이는 제대
로 이루어질 수 없다. 교리교육의 쇠퇴는 영적-교리적 질서와 기준을 상실하게 하여
교회로서의 본질적 사명 수행에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또한 바로 예배하고
믿음의 도를 바로 아는 자라야 바로 전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의 사명은 전도의
사명보다도 더 우선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를 어릴 때부터 교회와 가정에서 교
육하고 영적 골격이 튼튼한 성도를 양육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성경은 교리교육과 성경교육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아담 이후 모세 때까지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받아 이를 후대에 가르쳤
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이후에는, 제사장들과(레 10:11) 레위인들이(신
33:10) 교사가 되어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가르쳤다. 부모들도 날마다 언
약의 자녀들을 율법으로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아 이를 실천하였다(신
6:4-9). 신약성경에도 교사의 직분은 목사의 직분과 함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
고 있었다(엡 4:11-12; 고전 12:28-29 참조). 신약성경은 초대교회 안에 목사의 직분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9
과 구분되는 교사(고전 12:28-29) 혹은 율법교사(딛 3:13, 교법사, nomikos)의 직분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가르치는 사역은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고귀한 사명이다
(마 28:18-20). 물론 신약시대에나 오늘날이나 목회자에게 반포자(설교자, kerux)와
교사(didaskalos)의 기능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나(딤후 1:11 참조), 교회에는
언제나 믿음의 도를 가르치는 교사가 있어왔고 또 있어야 함을 말해준다.
교회의 역사도 교리교육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임을 잘 보여준다. 교부시대에 들
어오면서부터 세례문답학교를 통하여 교리와 예배, 기도와 생활 전반에 관한 체계적
인 교육을 하였다. 또한 이단 사설에 대항하여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 니케아
신경 같은 신앙고백서들을 작성하여 교회의 교리적 순결을 지켜왔다. 그러나 중세로
넘어오면서 교리교육은 수도원과 성직자 그룹의 전유물이 되었고, 평신도들에게는
교리교육이나 성경교육 대신 미사와 성사, 그리고 형식적인 신앙고백과 신비주의적
신앙관습들만이 남게 되었다. 성경과 교리로부터 멀어진 중세기의 평신도들은 영적
무지와 암흑 속에 남겨졌다. 성경교육과 교리교육을 소홀히 하였을 때 교회가 어떻게
영적으로 급속하게 쇠퇴하고 어둡게 되는지, 교회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워야 했
다. 종교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은 교리교육의 회복을 위해 가정과 교회에서 요리문답
(Catechism)을 가르치고 배울 것을 강조하였다. 루터의 대소요리문답(1529), 아우크
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 칼빈의 제네바교회 신앙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1537),
제네바교회의 요리문답(1541/2), 제1,2스위스신앙고백(1536/1566),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1560), 벨직신앙고백(156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과 도르트신경(161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1643-8)이 16-17세기에 쏟아져 나온 것만 보
더라도 종교개혁가들이 얼마나 교리교육에 큰 비중을 두었는가를 알 수 있다.
칼빈은 그의 2차 교리교육서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교회는 언제나 어린
아이들을 기독교 신앙교리 안에서 양육하라는 특별한 권면을 받아왔다. 이를 수행하
기 위해 교회는 옛적에 학교들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신도 개개인에게 각자의 가
족을 잘 가르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주요
교리에 대해 어린아이들이 잘 알고 있는지의 여부를 심사할 수 있는 공적 규정도 소
유하고 있었다. 이를 규모있게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요리문답이라고 하는 어떤 특정
한 식서(formula)를 사용하였다.” 청교도들도 요리문답 교육을 부지런히 실시하여, 리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10
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청교도 목사는 일주일에 이틀은 교구민들의 집
을 방문하여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데에 온종일을 사용하였다 한다. 청교도들의 이상
(理想)은 학교를 “소교회(小敎會)”로 만드는 것이었고, 교사들을 “개인 요리문답 교사”
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개혁교회는 교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교회의 중대한 사명
가운데 하나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19세기부터 성경신학이 발전하면서 교리교육은 점점 성경공부를 중심으
로 하는 계단공과교육으로 대치되었다. 동시에 성경교육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부정
적인 입장을 취하는 고등비평이 지배하는 성경관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게 되었다.
비록 성경교육을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그 성경관에 따라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침투
해 들어올 때에 이를 적절하게 막을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난 2-30년 동안 교리교육에 등한시해 온 결과를 오늘 우리는 목회현장에서 그대로
목격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교사로서의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망
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
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관하여는 거의 전적으로 교회학교나 목회자들에게 일임하
고 오히려 자녀의 신앙문제의 책임을 교회에 물으려고 하는 태세이다. 교회가 신학적
으로 견실하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교리교육을 부담스러워하고, 신학적 배경이 충분
히 검증되지 않은 성경교육교재들과 교육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교회교육
의 사명을 포기해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당장 눈에 띄는 결과들을 얻
기를 원하지만 교육의 진정한 효과는 오랜 시간을 두고 나타난다는 점을 알고 인내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교단에서도 교리교육을 위한 커리큘럼과 교육교재 개발이 필요
하다 하겠다. 교리교육을 위한 교육환경과 체계를 갖추고, 교사를 훈련시키고 격려하
며, 교리교육 교재를 개발하는 일은 예배나 전도의 사명만큼이나 필요한 교회의 본질
적 사명이다. 어린 아이부터 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배울 수 있는 교회학교 조직과
교육체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교회학교에서의 교리교육 쇠퇴는 결국 교회의 쇠퇴
와 개인 신앙의 위기를 불러오게 될 것이고,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부모 세대들은
자녀 세대들의 영적 황폐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 우리 자녀들과 다음 세
대의 영적 부흥에 관심이 있다면 교리교육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며 배전(倍前)의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11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개인 경건
다섯째는 개인 경건의 회복이다. 칼빈은 그의 신앙교육 요강에서 가르치기를,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Father)로서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님(Lord)으로서 경
외하고 두려워하며, 그분의 공의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반역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하는 순수하고 참된 열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개인 경건은 곧 신자의 성화
(聖化)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경건의 실천이 되어야 한
다(The whole life of Christian ought to be a sort of practice of godliness)”(기독교
강요 3.19.2). 신자의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믿음과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 자
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 있는 우리들에게는 세상과 죄에 대
해서는 죽고 하나님과 의(義)에 대해서는 살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
생활의 최종 목표이다. 그것은 곧 성령을 힘입어 죽는 날까지 육신과 옛사람을 죽여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신앙생
활을 오래 했다고 하면서도 개인의 신앙 인격과 삶이 성숙하지 못하다면 이것은 곧
신앙생활에 있어서 큰 오류와 손실과 불행이라 할 것이다. 칼빈은 그의 요한복음
7:39 주석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영적으로 가난하고 아사(餓死) 상태에 있으며 영적
축복들을 거의 다 빼앗긴 상태에 있는 것은 우리의 게으름과 우리의 믿음의 부족 때
문이다”라고 하여 경건한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책망한 바
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뜨겁게 신앙생활하고, 특별히 열심히 기도하는 것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왔다. 새벽기도와 산기도, 기도원과 철야기도회는 한국교회의 대명사
처럼 알려져 있다. 또한 한국교회 성도들은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각종 구역모임, 성
경공부모임, 금요철야, 리더훈련, 대심방, 전도대회, 봉사모임, 친목모임, 부서별 회
의, 새신자모임 등 여러 모임들을 만들어놓고 주중에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
심히 교회에 나와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인격과 생활
의 면면을 살펴볼 때,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채 분주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우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실제로 우리의 경건의 실력이 자라지도 못했으면서 이런 저런 활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12
동을 분주하게 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성숙해지고 있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스스
로 속는 것이다.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건
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
운데 거하고 있다면 그 은혜로 인한 삶과 인격의 변화가 생활 속에서 능력으로 드러
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지 날마
다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의와 거룩함과 주와 복음을 위해 복
종하고 헌신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라가려면 이를 도와주는 귀한 방편들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 먼저 개인적으로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묵상(meditation)은 한때 기도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
졌으나 오늘날 묵상이라는 단어가 비성경적인 뉴에이지 영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성숙에 필수
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것을 명령하셨다(신 6:7;
32:46; 시 19:14; 49:3; 63:3; 94:19; 119:11, 15, 23, 28, 93, 99; 143:5). 복있는 사람
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시 1:2).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시 119:48). 하나
님의 말씀은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된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과 원칙이다.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등
한히 하면서 개인적인 신앙 성숙을 이룰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하나
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경건한 말씀의 교사들이자 믿음의 사람들의 글들을 읽고 묵상
함으로써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
3:18) 갈 수 있다. 우리에게 위대한 신학자들과 경건한 목회자들의 신앙저작들이 있
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리는 마음먹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풍부한 보고(寶
庫)를 열고 영혼의 양분을 마음껏 빨아들이며 우리의 영혼을 살지게 할 수 있는 것이
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탐색하여 죄의 동기들을 찾아 죄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
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신자의 성화 곧
영적 성장과 변화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성화를 위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13
해 더욱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사귐과 의논이 가능하다. 기도 없이 영적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위인들은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친
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으며 또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교회사를 보아도 하나님께 귀
히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
께 귀히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는 개인 경건을 시발시키는
출발점이자 유지시키는 핵심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일을 세상의 분주한
일들과 바꾸어버리고 있다. 그러기에 개인 경건의 회복은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운
동인 것이다. 우리는 개인 경건이 말씀과 기도 속에 그 좌소(座所)를 두고 있음을 의
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기도와 말씀 묵상의
실력이 자라며 이로써 생활과 인격이 변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개인경건의 회
복은 바른 예배와 주일성수, 가정예배와 교리교육의 회복과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
어 있다. 바른 예배와 주일성수, 가정예배와 교리교육은 모두 궁극적으로 개인 경건
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으며, 개인경건의 회복을 회복할 때 교회가 보다 더 건강한 신
앙공동체가 되어 믿음 위에 든든하게 설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삶과 인격과 신앙이
변하고 성숙하여 자라지 않는다면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성도들을 양산하는 일을 죽기
보다 더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약 2:17)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 개개인의 신앙인격과 순종의 실력
이 자라날 수 있도록 돕고 양육하고 지도하며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목회자들의
우선되는 관심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맺으면서
이상에서 언급한 개혁교회의 소중한 유산들은 어떻게 보면 오늘날에는 케케묵은
‘옛 것’ 취급을 받는 것들이다. 교회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목사들과 장로들도 이러
한 신앙가치들에 대해서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유산들은 옛날에는 통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늘 21세기에는 맞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옳다고 말할는지는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14
모르나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방법일 수는 있으나 사람의 방법으로 쓰
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불신자를 전도하거나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교회 안의 젊은이들에게 반발을 살
수 있는 ‘위험한 금기사항’ 정도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의 방법,
하나님의 방법,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방법을 폐기처분하려고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
고 있기 때문에, 이 “옛 것”들이 그 어느 시대보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
이다. 옛 것들을 버리고 옛 길에서 떠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뿌리깊은 유혹이자 죄악된 습성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
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하나
님께서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면 심령이 평강을 얻
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고 말한
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주님께서 세워나가시는 교회이다(마 16:18). 그러기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수종드는 우리들에게 주님의 방법, 성경의 방법은 유일의 그리고
최선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이것을 등한히 하고 포기해 버린다면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기준과 거룩한 요구를 이 땅의 누가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교회의 주인이
시며 머리이신 주님께서 오늘도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기에 이 신앙유산들은 결코 소
용없는 옛 가치가 아니라 속히 돌아가고 회복해야 할 귀한 보배들이다.
우리가 이 신앙유산들을 교회 안에서 회복하고 갱신시키려면 길고도 험난한 갈
등과 싸움의 시간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그루터기처럼 끝까지 성경의 교
훈과 교회의 신앙유산을 간직하면서 버티고 서 있으려면 영적 외로움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어려움만 있는 길은 아니다. 그 길에는 신실함으로 가는 자
들에게 교회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회복과 부흥, 이로 인한 감사와 기쁨도
기다리고 있다. 혼자만 외롭게 가는 길도 아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칠천 인’(왕상 19:18)이 처처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주님의 교회를 섬기
는 일에 세상과의 타협, 실리와의 타협은 있을 수 없다. 진리의 편에 서서 진리를 따
라 진리를 보수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우리 교단의 정체성이 있다고 할진대, 성
회복해야 할 개혁신앙의 소중한 유산 ? 15
경이 가르치고 개혁교회가 물려준 이 다섯 가지 신앙유산을 회복하느냐 저버리느냐
하는 것은 개혁 장로교회로서의 우리 교단 미래와 비전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교단 산하 모든 교회들과 속한 성도들의 가정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 인”의 무리에 들어가며 끝까지 그 무리 가운데에 남겨지는 은
혜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
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긴요한 시대적 사명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