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총회목회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 윤동혁목사님 (2004년)
牧會學碩士學位請求論文
指導敎授 劉 載 元
牧會者로서 牧師의 靈性과
그 影響에 關한 硏究
總會 牧會大學院
牧會神學 專攻
尹 東 赫
牧會者로서 牧師의 靈性과
그 影響에 關한 硏究
指導敎授 劉 載 元
이 論文을 牧會神學碩士學位 請求論文으로 提出함
2004年 1月 10日
總會 牧會大學院
牧會神學 專攻
尹 東 赫
尹 東 赫의 牧會神學 碩士學位 請求論文을 認准함.
指導敎授 印
審査委員 印
審査委員 印
2004年 1月 10日
總會 牧會大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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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Ⅰ.序論
1, 問題 提起 -------------------------------------------- 1
2, 硏究의 目的 ------------------------------------------ 3
3, 硏究의 方法과 範圍 ------------------------------------ 5
Ⅱ. 本論
제1장 牧會者의 靈性에 대한 理解
1, 牧會者에 대한 理解 ------------------------------------ 7
(1) 牧師의 語原 --------------------------------------- 7
(2) 牧師의 用語 --------------------------------------- 7
2, 說敎에 대한 理解 -------------------------------------- 8
(1) 說敎의 定意 --------------------------------------- 9
(2) 說敎의 目的 --------------------------------------- 10
3, 靈性에 대한 理解 ------------------------------------- 11
(1) 靈性의 定意 --------------------------------------- 11
(2) 靈性의 聖經的 理解 -------------------------------- 14
① 舊約에서 본 靈의 槪念 ---------------------------- 14
② 新約에서 본 靈의 槪念 ---------------------------- 18
(3) 靈性의 歷史的 理解 -------------------------------- 21
① 初代敎會의 靈性 理解 ----------------------------- 21
② 中世基督敎의 靈性 理解 ---------------------------- 23 ③ 프로테스탄트의 靈性 ------------------------------ 27
㉠ 칼빈의 靈性 ----------------------------------- 28
ⓐ 回心 -------------------------------------- 28
ⓑ 敬虔한 삶 ---------------------------------- 30
ⓒ 칼빈의 聖禮 -------------------------------- 33
㉡ 루터의 靈性 ---------------------------------- 34
ⓐ 義人化 思想 -------------------------------- 34
ⓑ 十字架 神學 -------------------------------- 36
ⓒ 善한 行爲 ---------------------------------- 38
제2장 牧會者의 靈性과 靈性訓練
1, 靈性과 牧會와 關係 ----------------------------------- 40
(1) 牧會者의 靈性 -------------------------------------- 40
(2) 牧師의 靈性과 說敎 --------------------------------- 41
2, 牧會者의 靈性 訓練 ----------------------------------- 43
(1) 內面訓練 ------------------------------------------ 46
① 祈禱訓練 ----------------------------------------- 47
② 主祈禱文을 痛恨 靈性 訓練 -------------------------- 52
③ 말씀묵상 訓練 ------------------------------------ 56
㉠ 古典的인 方法 --------------------------------- 58
㉡ 이냐시오 로욜라의 黙想 ------------------------- 59
④ 큐티 -------------------------------------------- 62
(2) 外面訓練 ------------------------------------------ 64
① 單純化訓練 --------------------------------------- 65
㉠ 單純化 訓練이란? ------------------------------ 65
㉡ 單純化의 內的表現 ----------------------------- 67
㉢ 單純化의 外的表現 ----------------------------- 68
② 섬김 訓練 ---------------------------------------- 69
㉠ 섬김에 대한 예수님의 敎訓 ---------------------- 69
㉡ 섬김의 實題 ----------------------------------- 70
③ 順從訓練 ----------------------------------------- 72
㉠ 順從이란 무엇인가? ---------------------------- 72
㉡ 順從 訓練의 實題 ------------------------------ 73
④ 沈黙과 孤獨 訓練 ---------------------------------- 74
㉠ 沈黙과 孤獨이란? ------------------------------ 75
㉡ 沈黙과 孤獨으로 가는 節次 ---------------------- 77
(3) 共同體訓練 ---------------------------------------- 78
① 禮拜訓練 ----------------------------------------- 78
② 告白과 容恕의 訓練 -------------------------------- 81
③ 參與의 訓練 -------------------------------------- 82
제3장 牧會者의 靈性이 會衆들에게 미치는 影響
1, 사도 바울의 靈性과 그 影響 ---------------------------- 86
(1) 바울의 靈性生活 ----------------------------------- 86
① 바울의 聖經硏究 --------------------------------- 87
② 바울의 祈禱生活 --------------------------------- 88
③ 바울의 靈性에 대한 觀心 -------------------------- 89
(2) 바울의 說敎(행17:16-34) ---------------------------- 90
2, 로이드 존스의 靈性과 그 影響 ------------------------- 93
(1) 思想的 背景 -------------------------------------- 93
(2) 說敎의 靈的 原理 ---------------------------------- 95
(3) 說敎의 影響 -------------------------------------- 96
Ⅲ. 結論 ------------------------------------------------- 100
* 參考文獻 -----------------------------------------------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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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 論
1, 問題提起
韓國 敎會 成長의 背景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특별히 禮拜와 祈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365일 계속 행해지고 있는 새벽 祈禱와 매주의 금요철야기도회, 主日 오전, 오후와 수요일 禮拜를 强調하는 信仰의 분위기, 각종 구역 禮拜와 聖經공부 모임 그리고 復興會 등. 한 敎會 내에서 1년에 들을 수 있는 說敎가 약 600여 편에 이른다. 이 같은 狀況 속에서 단독 牧會를 하고 있는 敎役者들에게 說敎 準備는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 大形 敎會는 여러 副敎役者들이 분할하여 說敎를 하지만 홀로 담임牧會를 하고 있는 牧會者들은 그처럼 많은 說敎를 홀로 부담하다 보니 靈力있고 힘있는 說敎를 하지 못한 채 書店이나 圖書館에 있는 說敎集들을 그대로 읽거나, 自身의 이야기를 넋두리 삼아 說敎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通信․郵便 販賣의 形式으로 매 달 일정한 金額을 지불하면 한달 분의 說敎가 家庭으로 배달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狀況 속에서 牧師의 說敎를 듣고 聖徒들이 變化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너무도 쉽게 說敎가 만들어지다 보니 牧師들의 說敎에 대한 硏究도 부실해지고, 說敎에 동반한 삶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뿐 아니라 說敎에 관한 많은 세미나들이 지금도 각종 기관들에서 무수히 행해지고 있으며, 여기에 참여하는 牧會者들의 수도 나날이 늘고 있다. 說敎를 準備하기 위한 牧會者들의 觀心은 당연히 지대할 수밖에 없으며, 한편의 說敎를 準備하기 위한 牧會者들의 수고와 勞力 또한 대단하다. 그러나, 이렇듯 수고와 勞力으로 準備되어 宣布된 말씀이 聖徒들의 심령에 影響을 미친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불행히도 1천만 信徒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信仰과 生活이 별개인 聖徒들로 洪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靈性있는 說敎로 사람을 治療하고 變化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1세기 동안 韓國敎會는 質的 量的으로 많은 成長을 했다. 1997년 11월 國民日報 부설 敎會成長 硏究소가 발표한 敎會成長 內用을 보면 韓國 敎會가 1960-70年에는 年平均 증가율이 41.2%에 달했으나, 1970-80년에는 12.5%, 1980-90년대에는 연 4.4%로 되었으며, 1991연부터는 成長 自體가 鈍化되었다. 경이로운 成長에 대해 國際的으로 注目을 받던 韓國敎會가 피터 와그너(C. P. Wagner)의 예측과는 달리 1990연대에 들어와서 成長이 限界에 이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時代에 復興하지 못하는 說敎, 會衆에 感動을 주지 못하는 說敎, 敎會 내에 長老와 牧師간의 葛藤, 聖殿第一主義에 따른 부실 敎會의 建立, 난립하는 군소 神學校와 부적절한 牧會者 양성, 이에 따른 倫理的 타락 등 수많은 問題점들이 聖徒들을 敎會에서 떠나게 하고 있다.
오늘날 韓國 敎會에 찾아들고 있는 커다란 問題 중 하나는 敎會의 生命力 퇴조와 공동화 現想, 교인 수의 減少, 信仰의 形式化, 救靈의 熱情에 대한 상실, 回心의 급격한 減少, 形式的인 禮拜, 이에 따른 倫理的 타락, 現實에 민감한 젊은 世代가 가지는 敎會 生活에 대한 回議 등을 주요한 증상으로 하는 이 基督敎的인 病廢는 傳染病처럼 만연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牧會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牧會의 技術이나 方法이 아니다. 김남준은 “오늘날 韓國 敎會의 講壇이 직면하고 있는 중대한 어려움은 靈的인 싸움에 대한 說敎者의 긴박한 危機意識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많은 說敎者들이 說敎를 靈的인 싸움이 수반되는 긴박한 영의 일로 생각하지 못하고, 說敎에 있어서 하나님이 能力을 부어주셔야 함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自己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靈的으로 무장된 說敎者로서의 牧師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聖經的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또한 牧師의 靈性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靈性이 수반되지 않는 說敎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과리에 불과하며(고전13:1), 빈 수레와 같이 소리만 요란할 뿐이며, 聖徒들의 삶에 아무런 感化도 줄 수 없다. 說敎의 技術만으로는 會衆을 變化시킬 수 없다. 說敎者의 靈性은 說敎를 힘있게 하는 도구이며, 牧師에게 힘을 실어주는 根源이 된다.
지금 韓國 講壇에 시급히 要求되는 것은 社會 저변에 검게 흐르고 있는 惡의 勢力에 대한 對敵이다. 18-19세기에 일어났던 영국과 美國의 復興運動과 같이 만연된 부정과 腐敗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倫理的․道德的 타락에 따른 悔改를 促求하며, 술 취함과 방탕함에서 信仰으로의 回復을 促求하여야 할 때다. 생기 없는 說敎, 靈的 問題를 보면서도 處方전을 내리지 못하는 無能한 祭壇에서 사람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른 信仰을 지키는 사람들이 비웃음을 받는 안타까운 現實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1천만 基督敎人을 깨울 牧會者들의 靈性이 먼저 回復되어야 할 것이다.
2. 硏究의 目的
硏究의 目的은 說敎者로서 牧師의 靈性이 說敎에 어떠한 影響을 미치는가를 살펴보기 위하여 牧師가 무엇을 어떻게 說敎할 것인가 보다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重點을 두고 살피며, 또한 牧師의 靈性 있는 삶과 說敎가 會衆들의 삶 속에 어떠한 影響을 줄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問答은 改革主意 靈性의 實踐을 묘사하는 훌륭한 方法을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靈性의 참 目的은 어떻게 우리들 自身을 超越하고 하나님의 威嚴과 사랑을 證據하는가 이다. 하나님 中心의 靈性은 하나님께 榮光을 돌린다. 우리의 일상적인 生活 가운데서 믿음으로,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또한 改革主意 靈性이 가져다주는 挑戰은 順從旳인 弟子道의 기쁨을 發見하는 것이다. 最上의 改革主意 傳統은 우리가 創造된 秩序에 感謝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으며, 따라서 이 땅의 삶에서 주어진 膳物들에 기뻐하며, 삶과 그 즐거움에 대한 적절한 香油는 改革主意 경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靈性은 이원론적인 구조 속에서 파악할 것이 아니라 總體積이고도 유기적인 관계성 속에서 파악해야만 한다. 그 관계성이라는 것은 人間과 하나님, 그리고 人間과 人間이라는 垂直的인 관계와 水平的인 관계를 동시에 포함하는 총체적 관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基督敎 靈性이라는 것은 단편적으로 한 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것만을 意味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름을 받은 信仰 共同體라는 有機的인 관계성 속에서 참다운 意味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靈性에 대한 올바른 理解를 가지기 위해서는 관계성 形成이라는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하며 먼저 그것은 하나님과 人間과의 生命力 있는 관계성을 다루고 그 다음 하나님과의 관계를 基礎로 하여 횡적인 共同體 관계성 즉 나와 이웃과 社會, 그리고 우주와의 관계 形成을 다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人間의 靈性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垂直的인 관계성 속에서 그 본래의 참된 屬性과 生命力을 回復하며 또한 그와 같은 개인 靈性의 참된 속성과 生命力은 共同體와의 관계성 속에서 그 진정성이 確因되고 成熟됨으로써 相互 有機的인 의존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개인 靈性은 共同體 靈性에 대하여 참된 속성과 靈的 生命力을 부여하게 되고 또한 健全한 共同體 靈性은 개인 靈性에 대하여 그 진정성을 檢證시켜주고 그것을 더욱 成長시켜주는 成熟의 장을 제공하여 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硏究 方法과 範圍
說敎에 있어서 說敎의 技術적인 問題들은 많이 硏究되어 왔고, 또한 硏究되고 있다. 하지만 說敎者의 靈性에 관하여는 별반 觀心이 없는 것이 現實이다. 韓國 敎會가 靈性에 대해 觀心을 갖기 시작한 이때에 說敎者로서 牧師의 靈性에 대한 硏究는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靈性에 관한 것이 실천적인 것인 만큼 본 硏究는 具體的이고도 體系的으로 硏究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說敎란 어떤 말의 技術만을 가지고 會衆을 變化시킬 수 없는 것이다. 說敎者의 靈性이 說敎를 뒷받침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說敎者로서 牧師의 靈性이 살아 있어야 진정한 靈的인 說敎를 할 수 있고, 會衆들에게도 變化를 줄 수 있을 것이다.
靈性과 說敎는 삶이다. 삶의 問題를 살피는데 있어서는 理解와 知識, 그리고 現場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問題를 解決하기 위한 方案으로 여러 文獻들을 參考하였다. 국외의 文獻은 번역서를 주로 參考하였다. 硏究의 範圍는 說敎와 靈性의 일반적인 文獻들에서 參考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하였다.
본 硏究는 다음과 같이 구성하고자 한다.
제1장에서는 牧會者의 靈性에 대한 理解를 살펴본다. 먼저 牧會者에 대한 理解로서, 牧會者의 語原과 用語에 理解를 돕고, 두 번째로 說敎에 대한 理解로서 說敎의 定意와 目的을 살펴본다. 세 번째로는 靈性에 대한 理解로. 먼저 靈性에 대한 定意를 내리고, 靈性에 대한 聖經적 理解와, 靈性의 역사적 理解를 살펴본다.
제2장에서는 牧會者의 靈性과 靈性訓練에 대해 살펴본다. 먼저 靈性과 牧會와 관계로서 牧會者의 靈性과 그리고 牧會者의 靈性과 說敎에 대해서, 두 번째로는 牧會者의 靈性 訓練에 대해서, 內面 訓練, 그리고 외면訓練, 그리고 共同體 訓練에 대해서 살펴본다.
제3장에서는 牧會者의 靈性이 會衆들에게 미치는 影響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사도바울의 靈性과 미치는 影響, 두 번째로는 마틴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 1899-1981)의 靈性과 그 影響으로 그의 思想的 背景과, 說敎의 靈的 原理와, 說敎의 影響을 살펴보며,
마지막 나가는 말로 牧會者의 靈性이 宣布된 말씀을 통하여 聖徒들에게 미칠 수 있는 影響들과 지금까지 論意했던 것을 정리하고 題言하고자 한다.
Ⅱ. 本 論
제1장 牧會者와 靈性에 대한 理解
1. 牧會者(牧師)에 대한 理解
(1) 牧師의 어원
牧師(Pastor)란 말은 헬라어 ‘포이멘’(ποιμηυ)이란 단어에서 발생된 것으로서 어원의 뜻은 “보호한다”는 뜻으로 번역되며 이것은 근본적으로 ‘牧者’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牧師라는 용어는 헬라어의 ποιμηυ과 같은 뜻을 가진 라틴어 Pastores에서 생겼다. 라틴어 Pastores에는 세 가지의 뜻이 담겨져 있는데 “양치는 자”, “선한 牧者 예수 그리스도”(요10:11), “敎會의 지도자”를 의미하고 있다. 牧會者는 敎會의 傳統的 유산을 전승하고 부여하는 사람이요, 또한 福音의 使役者로서 부름을 받은 者이다.
(2) 牧師의 용어
우리는 牧師를 호칭할 때 牧師(Pastor)와 敎役者(Minister)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 어원은 서로 다르며, 사용하는 곳도 서로 다르다. 차이점으로는 Pastor는 敎會의 직원으로 분명히 聖經에 언급된 직분이나(엡4:11), Minister는 직원으로 언급된 직분이 아니라 敎會의 직원이나 직분자는 누구나 Minister여야 한다는 의미로서 직능이나 기능으로 언급하고 있다. 新約 聖經에 나타난 敎役者(Minister)를 살펴보면 3가지로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첫 번째는 디아코노스(διακονοꐠ)인데 이 단어는 집사, 종, 봉사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福音書에는 종으로, 바울 書信에는 섬기는 자로 언급되어 있다(눅10:4, 딤후 4:11, 엡 4:12, 고후 3:17-19). 이 단어가 牧師의 어원이 되는 가장 직접적인 原因은 왕의 종이라는 의미에서이다. 두 번째는 레이투르고스(λειτουργοꐠ)인데 이 단어는 대중의 종, 또는 祭壇에서 수종드는 聖職者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新約 聖經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공적인 任務를 지닌 자(롬13:4, 6)로 또는 제사장 직분(히 8:2)을 의미하며, 이 단어는 공중 禮拜나 福音의 公的인 宣布를 집행하는 이중적 槪念을 지니고 있다. 세 번째는 휘페레테스(υπηρετηꐠ)인데 이 단어는 노를 젓는 사람, 또는 補助者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분이 낮은 관리들이나 남의 밑에서 섬기는 종들을 일컫는 데서 따온 말이다(마5:25, 26:28).
이러한 용어들은 각각 敎役者나 牧會者로서의 職能과 그 機能의 本質的인 性格을 表現한 것이다. 결국 敎役이란 牧師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일이고 敎役者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人類의 救贖의 役事를 成就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임받아 수행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행 20:24). 牧會者는 하나님과 敎會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按手를 받아 敎會를 代表하여 말씀을 宣布하고 聖禮傳을 集禮하며 하나님의 啓示에 완전한 應答을 하도록 基督敎 共同體를 引導하고 養育하기 위하여 區別된 者이다.
2. 說敎에 대한 理解
(1) 說敎의 정의
說敎란 무엇인가 하는 問題는 대단히 중요한 問題이다. 說敎에 대한 정의가 올바르게 내려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고 自身의 하고 싶은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이야기하거나, 倫理的 訓戒, 또는 하나의 宗敎 講演으로 대치될 危險이 높기 때문이다.
박희천은 說敎란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있게 잘 표현하여 聖經에 啓示된 그의 救援의 뜻을 백성에게 나아가 공적으로 宣布하는 奉事이다. 그래서 改革主義 世界에서는 說敎를 사도들이 사용한 말 그대로 ‘말씀의 봉사’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라고 정의한다.
정성구는 “說敎는 한마디로 만남이다. 즉 說敎란 救贖主인 하나님과 罪人인 人間을 만나도록 해주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존 스토트(J. R. W. Stott)는 “참된 說敎는 聖經의 世界와 現實 世界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리는 반드시 두 世界 속에 동등하게 접지되어 있어야 한다”고 정의한다.
켐벨 몰간(G. Cam-bell Morgan, 1863-1945)은 “說敎는 이론의 宣布나 의심나는 점에 대한 討論이 아니다. 說敎는 말씀의 宣布이며, 啓示된 그대로의 眞理를 宣言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說敎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에게 傳達하는 것을 의미한다. 說敎에 대한 어떤 참된 정의도(강대상에 서서)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에 관해서(청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傳達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메시지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이상의 정의에서 우리는 說敎의 요소에 항상 포함되어져야 하는 것을 包括的으로 發見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宣布하는 說敎者요,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聽衆이요, 넷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說敎者와 聽衆에게 連結시켜주시는 聖靈이요, 다섯째는 그 結果로 일어나는 靈的인 反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說敎란 “敎會에서 인정받은 그리스도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解釋하고 宣布하는 것으로서, 聖靈의 能力으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중심으로부터 忠誠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說敎의 目的
說敎에서 진정으로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은 說敎者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說敎의 目的은 하나님의 榮光이요, 說敎의 根據는 그리스도의 十字架이며, 說敎의 은사는 聖靈의 權能이다. 성부, 성자, 聖靈은 說敎사역의 시작이고, 과정이며 끝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스튜어트, 제임스 스튜어트(Stewart, James Stuart :1896-1990)는 진정한 說敎의 目標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으로 인해 人間의 良心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眞理로 心靈을 채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絶對性으로 그 심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여는 것이고, 하나님의 目的에 自身의 意志를 屈服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說敎의 目標이며, 하나님만이 說敎의 근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수단은 聖靈에 의해서 주어진다. 따라서 說敎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權能이 나타나야 한다.
說敎의 目的은 하나님과 說敎를 듣는 聽衆들의 영혼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協力하는 것이다. 說敎者는 반드시 聽衆들이 自身의 삶에 스며드는 하나님의 臨齋를 피할 수 없도록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다. 說敎의 目的은 첫째는 罪人인 人間이 구속주인 하나님을 만남으로 救援을 얻도록 설득하는 것이며, 둘째는 救援 얻은 聖徒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계속적인 만남을 가짐으로 信仰의 成熟에 이르도록 하여 하나님의 榮光을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3, 靈性에 대한 理解
(1) 靈性의 정의
‘靈性’(Spirituality)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宗敎旳인 가치에 붙잡혀 사는 靈的인 삶의 形態”를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이 용어와 혼동하는 다른 한 표현인 ‘敬虔’이라는 말은 ‘宗敎旳인 의무에 충실함’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靈性’과 ‘敬虔’은 같은 宗敎 生活의 내용을 표시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基督敎의 靈性이란 무엇일까? 基督敎 靈性에 관한 정의는 학자마다 조금씩 見解를 달리한다.
U.T.홈즈는 “靈性이란 人間의 관계성 形成 能力이며, 그 관계성의 대상은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存在이며, 이 관계는 主體의 勞力과는 別個의 것으로, 擴張된 또는 고양된 의식으로서 主體에 의해 인식되며, 역사적 狀況 속에서 本質을 받고, 世界 속에서 創造的 行爲를 통하여 自身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칼 라너(Karl Rahner)는 “人間의 靈性은 人間이 創造 때부터 創造主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초자연적 生命이며, 洗禮로 말미암아 죽었던 속사람의 生命이 다시 소생하여 살아난 은총의 生命으로 성체 성사를 통해 끊임없이 成長, 성숙하는 실제적인 초자연적 不滅的 生命이다”라고 하였다.
췌이퍼(L.S. Chafer)는 “참된 靈性이란 聖靈 충만한 자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해 나타나는 聖靈의 발현이다”라고 하므로 人間의 靈的 存在의 價値를 聖靈과의 관계에서 强調했다.
김경재는 “靈性은 지(知), 정(情), 의(義)를 통합 총괄하는 人間 존재의 바탕이며 人間性 안에 있는 無限한 可能性이며, 마음이 自身의 存在의 근거인 하나님과의 교류, 합일, 동역을 체험하는 영혼의 핵이요, 靈性 訓練은 本質적으로 성화의 과정이며, 靈性은 人間 영혼이 독거하는 독백이 아니라 삶의 現實과 역사 現實을 포괄하여야 하며 靈性의 社會的 차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오성춘은 “靈性은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性品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交際하는 삶의 과정이요, 하나님의 聖靈께서 우리를 고쳐나가는 과정이요, 聖靈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形象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自己 十字架를 지고 苦難받는 형제, 자매들 속에 나아가 그들의 삶에 參與하고 그들을 救援하시는 하나님의 救援에 同參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병욱은 “靈性은 성육신에 근거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生命 現像으로 敎會 안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으로, 世上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응답으로서, 敎會의 使命을 完成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황화자는 “그리스도의 精神이 사랑(요3:16)인 고로 基督敎 靈性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바 되어 그 넓고, 깊고, 높은, 그리고 긴 그의 사랑을 우리의 삶의 現場에 具體化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길(행9:12)을 부단히 추구하여 世上에서 빛과 소금의 役割을 감당하며 사는 삶의 과정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은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사는 삶이다”라고 말했다.
엄세천은 靈性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믿음 안에서 나타난 人格을 닮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는 일이요 예수님을 따르며 닮아 가는 삶이다. 靈性은 예수님의 形象을 본받는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形象을 우리 속에 이루는 것이다. 이는 聖靈의 역사이다. 우리는 祈禱와 黙想과 말씀과 禮拜 등등을 통하여 訓練을 쌓아서 새로운 性品을 創造하며 十字架를 지고 自身을 否認하며 주님을 따르는 삶이다. 우리는 靈性이란 말에 다음 세 가지를 포함한다. 첫째로 靈性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둘째로, 靈性이란 生命의 의미와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셋째로 靈性이란 福音에 합당하게 사는 길이다.
이상에서 학자들이 强調하고 있는 基督敎 靈性(Christian Spirituality)의 特徵을 綜合하여 정리해 보면, 基督敎적 靈性은 人間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성품이 아니라 聖靈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形象이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交際의 과정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人格을 닮아 가는 과정이며 人間理解, 즉 聖經旳 人間理解이다. 그러므로 基督敎旳 靈性은 하나님을 啓示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의 人格을 본받아 예수님의 성품을 形成하는 것으로 많은 勞力과 訓練을 필요로 한다. 靈性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福音을 들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새 生命을 얻은 사람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예수와 聖靈 안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며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2) 靈性의 聖經적 理解
① 구약에서 본 영의 槪念
구약의 靈性 理解를 위해서는 우리와의 관계성 차원에서 主導權 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理解가 구약 靈性 理解의 出發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靈性”이라는 용어는 聖經에서 찾아보기 어렵지만 영(spirit)이라는 용어는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창1:2의 말씀은 聖靈의 活動에 의해 혼돈이 극복되고 世上이 創造되는 역동적인 事件의 序頭이다
舊約聖經의 히브리적 영 理解는 보다 더 包括的인 것으로 生命의 원리로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 부여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야훼宗敎의 구성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人間에 대한 靈的인 考察은 창1:26-28과 2:7에 나오는 人間創造의 기사를 살펴보는 데서 출발한다. 舊約學者 볼프(H.W.Woff)는 창1:26-28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形象에서 세 가지 靈的인 차원을 지적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形象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첫째로는, 하나님과의 근친성의 차원을 우리가 우리의 形象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 에서 찾아내며
둘째로는, 인류의 共同體성을 發見하는 次元을 “우리가 아담을 만들어 그들이 다스리게 하자”에서 찾아내고
마지막으로, 人間은 하나님과 이웃과 被造物 世界와의 관계 속에 놓여진 靈的 存在의 차원으로 이것은 “생육하고 蕃盛하여 땅에 充滿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生物을 다스리라”라는 말씀에서 기인한다. 이와 같이 人間은 관계 속에 놓여진 靈的 존재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生靈이 된지라”(창2:7)
舊約聖經에서 “靈”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루아흐”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136회) 人間 자연과 연관되어 통용되고 있다. 즉 이것은 자연의 바람(113회) 숨결(33회) 사람의 영, 감정(76회) 신적 영감과 능력(136회) 등을 지칭하는 낱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영 理解에 基礎한 舊約聖經의 靈性은 영 육의 합일체로서 人間이 하나님과의 만남 등으로 舊約聖經 속에 표현되어 나타난다. 이 槪念을 우리가 좀 더 具體的으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하나님의 選擇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의 救援者이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交際로 볼 수 있고, 이를 神學的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被造物인 人間이 創造主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理解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은 人間世界에 임하여 生命을 소생시키고 공의와 자비를 베풀며 人間을 變化시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理解를 하게 만들며 또한 能力을 제공하는 본체로서 소개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또 구약에서의 영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하였다는 면에 있어서 超越性을 强調한다. 그리고 이 超越的 영은 하나님의 代行者로서 人間의 삶 속에 개입하는 내재적 영임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한 人間의 모든 영역에 影響을 미친다는 면에 있어서 영의 통합적 特性을 들 수 있다.
舊約에서의 靈性 生活의 단면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들에 나가 黙想하는 이삭(창24:63), 聖靈의 능력으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는 다니엘(단4:19-27), 사사기에 나오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들, 하나님의 명령에 압도되어 順從하였던 예언자들, 그리고 시편기자를 통한 黙想의 시에서(시1:2 63:6 19:14) 나타난다
또한 聖經은 하나님께서 모든 靈性旳 사색을 시행하는 人間의 영 자체를 새롭게 할뿐만 아니라 도덕성까지 부여해 주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主權者로서 하나님은 출애굽, 바벨론에서의 해방 등의 事件에서 救援者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 救援者로서의 하나님 인식이 구약성서의 하나님 理解의 基礎가 되어 구약성서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한편 舊約聖經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실재와 活動을 항상 전재로 하여 하나님을 유일무이한 우주의 주이시며 救援者와 創造者로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自身을 드러내시는 啓示의 신인 동시에 自身을 숨기시는 감추어져있는 신이라고 함으로서 人間의 이성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실재로 나타난다.
하나님 自身의 드러냄과 감추심에 대한 언급은 출33:17-23, 34:5-7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구절들은 바로 하나님 自身의 드러냄과 감추심의 존재적 특성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로서 그 양면성이 서로 대조적인 표현으로 잘 나타나 있고, 아울러 그 속성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存在樣式과 啓示樣式의 特性을 나타내주는 表現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舊約聖經이 보여주는 靈性의 분명한 한 면은 人間과 하나님과의 交際旳인 측면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 交際의 주도성은 항상 하나님께 있으며 그의 계획과 용서와 回復으로 이루어지는 交際이다. 그러므로 舊約聖經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人間역사의 삶의 現場에서 만남을 통해 具體的으로 經驗되어짐을 보여준다. 김이곤 교수는 舊約이 말하는 靈性 槪念은 어디까지나 역사지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스라엘 靈性의 출발점은 포착키 어려운 實際로서의 야훼인식이고 이스라엘 靈性 理解의 장소는 야훼의 이스라엘 해방역사에 있으며, 이스라엘 靈性의 目標는 신의 形象을 지닌 평등 共同體의 建設에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성과 意志와 뜻을 역사무대 위에서 具體的 行動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具體的 行動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事件이 출애굽 事件과 제2의 출애굽 事件이라고 할 수 있는 바벨론에서 귀향이다.
그러므로 舊約聖經이 보여주는 이스라엘백성들의 靈性은 생각으로만 머무는 神秘的 합일의 靈性이 아니라 그들의 歷史的 삶의 現場 속에서 주권자로 그리고 救援者로 役事하시는 하나님의 體驗에서 비롯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② 新約에서 본 영의 槪念
新約에서도 舊約과 거의 같이 靈性을 이야기한다고 보여 진다. 主人公은 예수시며 그 분을 중심으로 영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그의 정체, 그의 죽음, 부활과 관련된 역사적 계시적 知識에 근거한 自己 理解와 관련되어 그 의미를 發見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영은 自身의 말씀인 福音에 基礎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삶과 그의 깊은 靈的 체험에 基礎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基督敎 靈性의 원천이며 또한 窮極的 모범이요 모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의 철저한 自己 부정과 自己 포기, 한없는 겸허, 無所有의 실천과 나눔의 삶, 하나님께의 절대적 신뢰와 順從 및 철저한 사랑의 실천 등은 基督敎 靈性의 뿌리이며 最高의 모범이 된다.
福音書들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를 예수님의 洗禮 받으신 事件 속에서 찾는다. 마가福音의 첫 장의 內用의 核心을 다른 福音書들 또한 반복하여 紀錄하고 있는데 즉 예수께서 洗禮를 받고 물에서 나오셨을 때 聖靈의 臨齋를 친히 보셨다는(막1:10) 내용이다. 또한 變化事件에서도(막9:2-8)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事件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예수는 영의 인도를 받아 사신 분이었으며, 하나님의 영으로 靈感과 能力을 받아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한 분이셨다.
聖靈 안에서의 삶에 대한 感動旳인 표현은 다락방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說敎에 대한 요한의 기사에서 볼 수 있다.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라는 槪念으로 그리스도와 영의 관계를 표현하였다. 이 파라클레토스는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는 狀況에서 예수께서 弟子들에게 靈的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예수께서 弟子들과 함께 하듯이 파라클레토스는 弟子들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이다.(요14:16 20 23 15:5-5 17:23 26) 이렇듯 福音書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과의 관계를 통한 그분의 삶의 자취를 보여주며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기 위한 靈性의 訓練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본받는 일이 우리의 성화를 위한 유일한 方法임을 제시한다.
사도행전은 聖靈께서 能力을 부어주신 信仰共同體에 대한 記錄이다. 거기에서 스데반(Stephanos)은 聖靈의 사람으로 묘사되었으며(행6:8-7:60), 빌립(Philip)은 聖靈에 의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福音을 담대히 證據하였고(행8:26-40), 이방인 고넬료(Cornelius)의 家庭까지 베드로를 통해 聖靈께서 역사하시는 내용이 그려지고 있다(행10:1-48). 또한 사도행전은 예수가 권능을 받은 敎會를 통해서 계속해서 活動하시면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다루고 있는데 특별히 이방 世界를 향한 聖靈의 活動에 대해 언급한다.
新約聖經의 靈性은 이성적 人間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구주로 영접하려는 결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 속에 형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의 삶을 통하여 다시 具體化 되도록 하는 弟子訓練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新約聖經은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보다 具體的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오순절 聖靈강림을 통해 人間의 靈性은 聖靈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眞理의 영이시며 보혜사 이신 聖靈은 人間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며 깨닫게 하신다. 新約에서는 이러한 聖靈과 人間간의 긴밀한 관계, 그것의 訓練을 통한 結果가 무엇인지도 언급한다. 聖靈의 은총의 熱媒로는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절제 등의 靈性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더 具體的이고 實踐的인 은사로서 지혜와 知識, 믿음, 영 분별, 예언, 방언, 방언통역, 능력 행함, 등의 靈性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基督敎 靈性 生活에 관한 핵심적인 질문은 무슨 초자연적인 體驗이나 肉體旳인 疾病이 없다거나 試鍊을 받지 않는다거나 世上旳인 오락을 하지 않는다는 등의 상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聖靈 안에서 행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있다. 특히 新約에서의 靈性 生活의 차원이 “聖靈 안에서” 라는 점과 더불어 “하늘에 있는 영들과의 싸움” 이라는 靈的 차원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의 全身甲冑를 취해야 하는 점이 깊이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新約성서는 우리에게 은총의 선물로 주신 “聖靈 안에서의 삶”을 위해 행해야 할 “訓練”이 필요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 訓練 성과에 따라서 靈的인 人間과 육적인 人間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영과 육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靈的인 것을 말할 때는 聖靈을 따르는 것을 말하고, 육적인 것은 聖靈을 거스리는 人間 自身의 욕심이나 의지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갈5:16-18)
그러므로 그의 靈性은 하나님의 아가페에 붙들림을 당한 자로서의 삶을 의미하며 이 삶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양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철저한 自己犧牲의 存在樣式을 의미한다.
(3) 靈性의 역사적 理解
① 初代敎會의 靈性 理解
初代基督敎란 외형적인 기간을 中心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誕生하던 주전 4년부터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가 폐위되어 로마제국이 滅亡하던 476년까지로 잡는다. 內面的인 敎會 歷史를 中心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부터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의 期間을 말한다. 初代敎會는 靈性의 訓練과 生活이 조화를 이루었다. 祈禱와 聖經硏究 그리고 함께 나누는 사랑의 共同體였음을 보여준다.
初代敎會의 靈性 運動은 聖靈의 놀라운 직접적 사역으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敎會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復活을 目擊한 사도들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福音을 傳播함으로 세워졌는데 그 福音傳播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오순절 事件이었다. 특히 이 오순절 事件에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행2:3) 聖靈의 역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 홍치모 교수는 “聖靈이 證據하는 말씀 때문에 불같이 뜨겁게 온 世上을 점령해야 할 것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여하튼 이렇게 시작된 初代敎會의 靈性 運動은 예수의 行蹟과 죽으심과 復活을 알고 믿게 하는데 焦點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聖經을 考察해 보면 初代敎會는 靈性의 訓練과 生活이 조화가 되었다. 祈禱와 聖經硏究 그리고 함께 나누는 사랑의 共同體였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靈性 訓練은 포로기 이후부터 전래되어온 회당 중심의 禮拜訓練과 연관된다. 따라서 이들의 靈的 成長을 위한 訓練을 살펴보면 어떤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計劃을 分別하는 知識의 습득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共同體와 함께 함을 理解하는 知識 등이다.
初代敎會의 靈性을 살펴봄에 있어서 바울과 요한을 간과 할 수 있는데 바울의 靈性을 交際의 신비로 표현한다. “交際의 신비”는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나타내는 合一의 神秘를 추구한다.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交際의 신비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 있는 형태로서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에 대한 僕從과 그와의 交際를 관계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靈性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救援의 역사에 대한 人間의 응답으로 交際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면 이 응답, 즉 交際는 救援 事件을 나를 위한 事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事件을 내 것으로 하는 事件이며 이것은 바로 이웃을 위해 實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靈性은 내가 너를 위해 만물의 찌끼같이 되는 “自己 포기의 靈性”이다. 그리하여 바울의 靈性은 實際的이며 實踐的인 特性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苦難에 동참하는 能動的이며 倫理的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요한에게 서는 빛과 어두움 가운데서 빛이요, 生命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十字架 안에서 그 靈性이 나타나고 있다.
바울에 비해 요한의 靈性은 “하나님의 신비주의” 혹은 “聖靈의 신비주의”로 표현된다. 요한의 靈性에 있어 중요한 술어는 “거한다”라는 단어인데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처럼 요한의 靈性의 특징은 정적이다. 이러한 요한의 見解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祈禱에 대한 요한의 記錄에 잘 나타나고 있다.(요17:20-23)
② 중세 基督敎의 靈性 理解
중세기의 靈性旳 특성은 思想的이고 感情的이다. 이 시대에는 점차 靈性 이론이 조직적인 段階로 發展해 나가면서 敎理를 보다 깊이 理解하는 性格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시대의 靈性 生活은 그 出發點을 修道院 運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靈性은 修道院 제도를 통해 歷史的으로 基督敎 世界에 보존되어 왔다.
修道院은 4세기부터 그 형체가 드러났다. 콘스탄틴(Constantin)에 의해 基督敎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宗敎로 인정받아 가던 시대에 基督敎는 물량주의, 세속적인 권력의 결탁, 해이한 信仰의 問題, 그리고 基督敎인은 늘어나지만 참된 基督敎인이 점점 줄어드는 靈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殉敎의 信仰, 殉敎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殉敎할만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殉敎는 信仰의 최고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제는 외적인 殉敎가 허락되지 않는 시대에 靈的인 殉敎로서의 수도적인 삶에 뛰어 들려고 했던 소명이 시작되었는데 그러므로 광야, 또는 사막을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처음에 그들은 은둔生活을 했었고 共同體도 없이 홀로 사막에 들어갔다. 동서 宗敎史에서 일찍부터 거친 광야나 심산유곡이나 강가나 동굴 속에서 은거하면서 철저한 금욕, 自己부정, 克己, 명상을 통해서 우주의 근원적 실재, 그 자체의 일치 또는 우주 신비와의 합일 및 통달을 目標로 하는 수많은 수사들이 있었다. 이들의 靈性에는 몇 가지의 特性이 있는데
첫째, 명상이다. 이것은 명상의 자세와 方法뿐만 아니라 基督敎의 窮極的인 目標인 하나님을 보는 그 상태까지를 말한다. 명상은 복합적인 세 段階가 있는데 첫 段階는 정화, 둘째 段階는 계몽 혹은 조명, 셋째 段階는 結合이다. 그리고 靈性의 또 다른 요소로는 봉사와 빈곤이었다.
이 정신은 중세의 중요한 靈性 運動이었는데 이 運動의 정신은 성 프란시스(St. Francis)가 잘 대변해 준다. 그는 自身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한 벌 옷으로 살았다. 이 정신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부정한다. 그 대신 사랑으로 이 世上을 포용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에 있어서 독특한 靈性 訓練의 요소였다.
이러한 독특성이 왜 생겨났느냐 하면 중세의 중반기는 교황좌을 중심으로 한 정치싸움과 성직 매매 등 교권이 극도로 타락하였던 때였다. 그러므로 의식있는 사람들은 그런 와중에서 修道院의 改革을 渴望하게 되었으며 당연히 修道院의 改革이 전사회적으로 요구되어졌다.
이 改革의 불씨는 아니안느의 베네딕트(Benedict)(750-821)와 그가 창시한 修道院 출신의 수많은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實現되었다. 베네딕트는 원래 황제의 잔을 맡은 관원이었다. 그가 극적인 宗敎的 回心을 體驗하고 지상의 왕에게 忠誠하는 대신에 천국의 왕에게 봉사할 決心을 하게 되었다. 그는 779년 랭구애독에 있던 그의 사유지에 修道院을 設立하였으니, 이곳은 곧 修道院 改革과 프랑스 전체 復興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베네딕트 규율을 체계화 할 당시에 알려진 모든 修道院 規律들을 수집하였다.
그의 수도 규칙은 8-13세까지의 서방 修道生活을 거의 獨占的으로 지배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그의 규칙은 엄격성을 피하고 분별력과 중용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요소인 은세와 청빈 謙遜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넉넉한 수면과 음식을 허락하였으며 공동所有와 청빈 謙遜을 요구하였으며 그들의 하루 일과는 세 가지 성무일도, 靈的 독서, 勞動이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기에 修道院이 엘리트 단체로 유럽 사회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중세는 11세기 알렉산더 할레스의 이론에 따라서 平信徒에게는 점차적으로 빵만을 공급하는 일종성찬으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제도의 變化는 平信徒에게는 救援의 지연을 의미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平信徒들은 말년이 되면 수도사 서약을 함과 동시에 사유재산을 修道院에 獻納함으로서 빵과 포도주를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이종성찬의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修道院 측으로는 이것이 막대한 財産을 가진다는 意味였다.
이렇게 해서 修道院들을 점점 많은 재산을 가진 독립기관으로 成長해 가자 탐욕스러운 중세 황제들이 修道院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황제는 自身의 권한을 가지고 修道院 원장을 自身의 사람으로 임명함으로 막대한 재산을 착복하였다. 이것이 修道院을 둘러싼 성직 매매를 가능케 하는 원인이었으며 평신도 논쟁과도 긴밀한 연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宗敎改革가들은 改革과 더불어서 修道院을 撤廢시키는 일을 최우선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런 現實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부르군디 지방의 클루니 修道院에서 11세기에 改革運動이 일어나게 된다.
처음에 클루니 수도사들이 추구하였던 바는 단지 베네딕트의 (규율)을 온전히 따르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클루니 수도원장들은 초대원장인 베르노의 模範에 따라 다른 修道院들에 대한 改革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주된 작업은 베네딕트의 (규율집)이 지시한 바대로 경건회, 즉 祈禱와 聖經 강독으로 구성된 禮拜의 모임이었다.
전성기에 있어서 클루니인들의 改革 의지는 한이 없었다. 이들은 수 백 개의 修道院 改革이 어느 정도 진척되자 이번에는 전체敎會의 改革에 눈을 돌렸다. 이런 클루니 運動은 말 그대로 하나의 기적, 새로운 새벽을 가져다 줄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런 기적적인 클루니 運動 역시 거대한 財産이 끼여들므로 말미암아 改革의 정신은 희석되기 시작했다.
클루니의 改革 運動은 전 유럽으로 파급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改革의 당위성을 천명하는 데에 일조를 했으며 뒤이어 “클레르보의 버나드”로 대표되는 시스터시안 運動을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③ 프로테스탄트의 靈性
프로테스탄트의 活動기인 16세기는 어느 時代보다 더 강력한 宗敎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時代이다. 이때 活動하였던 宗敎改革자들의 靈性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상호 간에도 적지 않은 긴장과 葛藤이 연속되었으며 각기 다른 主張들을 中心으로 여러 학파와 주의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표적인 인물들인 존 칼빈(Calvin, 1509-1564)과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靈性을 살펴보고자 한다.
㉠ 칼빈(Calvin)의 靈性
ⓐ 회심
칼빈(Calvin)은 1905년 출생인데 이 당시에 프랑스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카톨릭의 굴레를 벗고 福音적인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카톨릭 성직자로서 訓練을 받던 칼빈(Calvin)이 카톨릭이 주는 혜택과 위로를 벗어버린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없었다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宗敎 改革자로서의 칼빈(Calvin)의 삶과 神學의 發展과정에서 그의 回心이 언제 어떻게 어떤 內用으로 일어났는지에 관해 그 스스로는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悔心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1557년의 시편 註釋의 序文에서 그는 自身의 회심에 대해 “처음에 내가 교황권이라는 미신에 아주 완고하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돌연한 회심으로는 그 같은 깊은 수렁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이에 비해 너무 굳어버린 나의 마음을 꺾으시고 유순하게 만드셨다. 이같이 참된 信仰에 대해 약간의 맛을 미리 보고 어느 정도 知識을 취하고 나서 나는 바로 信仰에 의해 유익을 얻고자 하는 강한 慾望에 불타있었다. 그래서 다른 학문들을 포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가능한대로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을 공부하려고 애썼다. 해가 가도 나는 거의 初心者에 불과했지만 어느 정도 참된 교리에 대한 지적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배우기 위해 내 主位에 모여들고 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편 서문 외에 칼빈(Calvin)이 自身의 회심을 묘사하는 글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글이 “사도레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그래도 그의 회심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곳은 여기 시편 서문뿐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政況을 살펴보건대 1532년까지는 칼빈(Calvin)은 인문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칼빈(Calvin)의 회심의 시점을 제일 늦게 잡는 가노치는 1539년 基督敎 강요 제2판이 나올 때라야 완전히 루터(Martin Luther)에게서 시작된 改革사상을 완전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 경건한 삶.
基督敎 강요에 나타나고 있는 칼빈(Calvin)의 神學은 신성과 인성을 가진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중심의 神學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祝福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서 이 모든 祝福을 주시는데 그 속에는 罪에 대한 값없는 용서, 하나님에 대한 平和와 和睦, 聖靈의 은혜와 선물들이 있다.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맛보게 하는 믿음은 우리 自身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선함과 자비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는 것이다. 오히려 거짓 없는 悔改로 우리를 인도해서 우리 自身에 대한 知識을 갖게 하도록 요청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즉 확실한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해서 그 분의 온유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知識을 갖게 하시는데 그 까닭은 우리를 영원한 祝福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충분한 분, 그 이상이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결코 아니고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되어진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 自身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말씀이 모든 眞理와 정의의 규정이며 기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世上의 기준이고 規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Calvin)의 靈性旳 觀心이 무엇인가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自身의 삶의 目的을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림”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靈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라는 칼빈(Calvin)의 이 주장 속에 칼빈(Calvin)의 基督敎的 靈性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敬虔”과 하나님을 아는 “知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Calvin)의 靈性은 처음부터 “敬虔과 知識”이라는 用語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칼빈(Calvin)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知識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최고의 敬虔이야 말로 최고의 靈性인 것이다. 그리고 최고로 敬虔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絶對的으로 하나님의 主權에 사로잡힌 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主權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과의 神秘的 合一에 다다를 수 있다. 이 神秘的 合一은 모든 基督敎人들에게 “믿음”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聯合하여 사는 신비가이다. 新約聖經에서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라고 표현하면서 具體的으로 聖徒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罪에서 解放되어지고, 성숙하게 되며, 兄弟가 하나 되어진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와 神秘的 合一이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있어야 될 것임을 수도 없이 强調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은 “하나님의 主權”에 사로잡힌 聖徒와 그리스도와의 神秘的 合一을 일컫는 것이다.
칼빈(Calvin)의 靈性은 우선 그의 신인식과 人間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칼빈(Calvin)은 하나님을 참되게 알려면 동시에 우리 自身의 실존적 모습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人間은 그 스스로가 처해있는 상태가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主權者요 영원한 福의 根源이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人間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깨닫게 될 때 人間이 유한할 뿐만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식은 聖靈의 役事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聖靈은 말씀으로 역사하신다. 즉 하나님이 도성인신하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聖靈님이 眞理에 대하여 證據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이 때 人間은 비로소 罪人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人間은 본래 하나님의 形象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罪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상실하였다. 우리는 그 形象을 그리스도에서 發見하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Calvin)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靈性的 삶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形象을 인식하고 回復하는 삶 즉 그리스도를 본받는 生活을 영위하는 것이다. 결국 그 삶은 “경건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칼빈(Calvin)에 있어서 靈性은 “경건한 삶”을 意味한다.
칼빈(Calvin)이 그리스도인의 生活을 말함에 있어서 敬虔하고 의로운 삶은 곧 성화된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루터(Martin Luther)가 强調한 칭의에다 성화를 첨부하였다. 칼빈(Calvin)에 따르면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聯合과 合一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는 하나님과의 聯合도 不可能하다는 것이다. 칼빈(Calvin)은 성화의 窮極的 目的을 하나님과의 완전한 聯合에 두었는데 완전한 성화인 하나님과의 聯合을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와의 聯合이 先行되어야 한다.
또한 칼빈(Calvin)에 의하면, 성화는 우리 人間 안에 파괴된 하나님의 形象의 온전한 回復을 의미하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形象이 回復되려면 먼저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그의 인격의 模樣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그와의 연합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自己 부정과 自己 포기, 즉 自己 죽음이 있어야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自己를 부정하고 포기함은 하나님의 主權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主權을 앞세우는 사람의 삶은 敬虔한 삶이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知識이 풍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Calvin)의 靈性의 원천은 하나님 앞에서 敬虔과 말씀에 대한 知識이다.
ⓒ 칼빈(Calvin)의 聖禮
칼빈(Calvin)에게 있어서 靈性의 또 다른 원천은 聖禮였다. “聖禮는 주께서 우리 信仰의 약함을 도와주기 위해 우리를 향한 그의 선의의 約束들을 우리 良心에 인치는 외적 標示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우리에게 은총을 주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 人間의 약함 때문에 말씀과 함께 聖禮를 주신 것이다. 칼빈(Calvin)은 루터(Martin Luther)를 따라 敎會의 영구적인 聖禮로 洗禮와 성찬을 들었다. 洗禮는 첫째로, 우리의 모든 罪가 도말되었음을 우리에게 확증해 주며, 둘째로, 洗禮는 罪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다. 敎會의 두 번째 聖禮는 聖餐인데 첫째로, 聖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結合된 것을 나타내는 상징인 동시에 보증이며, 둘째로, 聖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내는 象徵인 동시에 保證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의 敬虔과 말씀에 대한 知識과 聖禮를 통하여 성화되어 가는 삶의 연속이 되어야 하며, 그리고 그 성화 되어 가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主權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칼빈(Calvin)은 말한다. 이것이 칼빈(Calvin)의 思想에 있어서 靈性의 核心이다.
㉡ 루터(Martin Luther)의 靈性.
ⓐ 의인화 思想.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宗敎改革을 일어 킨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카톨릭이 그 동안 저질러 온 靈的인 問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宗敎改革을 일어 킨 것이다.
중세시대의 靈性은 지옥, 연옥, 罪責과 형벌, 죽음, 그리고 律法과 공로주의로 특징 지워진다. 그런 것들에 얽매여 있던 루터(Martin Luther)였으므로 그의 삶 속에는 참 기쁨, 참 自由가 없었다.
루터(Martin Luther)의 사상에 있어서 中心이 되는 것은 로마서1:17절에 근거하는 의인화 思想이다. 루터(Martin Luther)에게 있어서 의롭다 하시는 은혜는 첫째, 人間의 선행적 勞力과 수고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믿음을 통한 의인화이며,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본다. 즉 믿음은 하나님에게 나를 전적으로 맡기는 信賴로서의 믿음이다. 뿐만 아니라 이 義人은 人間의 체험과 이상적 사변과는 상관없이 오직 恩寵 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의이며, 당시의 敎會의 권위나 敎會의 전통 그리고 개인적인 聖靈體驗보다 말씀을 强調한 그래서 말씀 중심의 의롭다 하심을 强調한다. 즉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따라서 그 말씀과 믿음은 언제나 서로 의존하여 같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신다. 여기서 믿음이나 말씀은 어느 것이나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오직 믿음을 自身 있게 證據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Martin Luther)는 이 양자의 관계를 結婚한 남녀의 관계와 비교하여 서로 갈라질 수 없음을 强調하였다.
믿음은 하나님의 役事이다. 보이는 現象界에 나타나 있지 않는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취급하는 것이 믿음의 特徵이다. 믿음을 말하는 이유는 現象界를 초월하여 實存해 있는 어떤 實在를 마음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역할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만이 救援한다.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慈悲를 받고 수락하고 얻으려고 勞力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우리의 것으로 돌려지기 때문에 믿음은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유용한 義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의 表現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恩惠인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Martin Luther)에게 있어서 聖經의 核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救贖의 恩惠와 사랑의 眞理가 담겨진 “福音”이며 그리고 이 福音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自身이다. 따라서 루터(Martin Luther)의 聖經 중심적인 福音旳 靈性은 곧 그리스도 중심적 靈性을 意味한다고 말할 수 있다.
ⓑ 十字架 神學
루터(Martin Luther)는 “十字架의 神學”과 “十字架의 靈性”을 요구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와 중세시대의 神學者들이 주장했던 “영광의 神學”에 반하는 것이다.
루터(Martin Luther)의 十字架 神學은 그가 소속된 어거스틴(Augustin) 수도회 동료들에게 그의 神學的 입장을 변증하는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論爭”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다. 이 論爭에서 루터(Martin Luther)는 오직 바울의 사상과 바울의 誠實한 解釋者 어거스틴(Augustin) 이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영광의 神學은 惡을 善이라 하고 善을 惡이라 부른다. 그러나 十字架의 神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苦難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苦難보다는 行爲를, 十字架보다는 榮光을, 軟弱함보다는 강함을, 어리석음보다는 智慧를, 그리고 일반적으로 惡보다는 善을 더 좋아한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원수”(빌3:18)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十字架와 苦難을 싫어하고 行爲와 일을 행함으로 얻어지는 영광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十字架의 선함을 惡이라 부르며 惡한 行爲를 善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은 苦難과 十字架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十字架의 친구들은 十字架는 善하고 일은 惡하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十字架를 통해서 行爲는 한쪽으로 밀려나고, 특히 첫째 아담은 行爲를 통해서 크게 名聲을 날렸으나 十字架에 못 박혀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自身의 일이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고서 自身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알게 되면, 그때 가서 하나님의 苦難을 생각하면서 自身의 부풀어 있던 驕慢을 깨뜨려 버리게 되고, 自身의 善行이 얼마나 거만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그는 이 論爭에서 중세 스콜라의 神學을 “영광의 神學”이라고 비판했다. 곧 人間의 智慧와 이성, 人間의 선행과 勞力을 强調함으로서 하나님이 아닌 人間에게 영광을 돌리는 神學이라고 批判하는 것이다. 루터(Martin Luther)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十字架는 곧 전적인 自己포기, 自己 부정 즉 自己의 죽음, 그리고 끝없는 自己 비움과 謙虛와 犧牲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信仰과 靈性의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에 담긴 苦難과 죽음의 의미와 神秘를 바로 깨달아 아는 데에 있다. 이런 점에서 루터(Martin Luther)의 靈性은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靈性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Martin Luther)의 福音주의 靈性은 바로 그의 3대 중심주의, 즉 하나님 말씀 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그리고 十字架 중심의 靈性임을 알 수 있다.
ⓒ 善한 行爲.
여기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誤解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오직 말씀과 十字架 그리고 하나님만을 强調한다고 해서 루터(Martin Luther)가 善行을 거부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善行을 거부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오직 義人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한 루터(Martin Luther)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성립시키는 根源的 방편임과 동시에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原理이며 方便인 것이다. 그러므로 信仰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德行, 즉 사랑과 선한 行爲를 낳게 하는 母體가 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화된 信仰人의 삶 속에는 성화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루터(Martin Luther)가 끝까지 거부한 것은 선행이 아니라 “선행 의인화”였다. 그러므로 루터(Martin Luther)의 만인 제사장 思想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本質的인 平等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모든 罪人들을 위해 自己 生命까지 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위해 祈禱하고, 염려하며, 돌보며, 섬기며, 自己 自身까지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루터(Martin Luther)의 靈性의 강한 “實踐成”을 發見하게 되며, 동시에 우리는 루터(Martin Luther)의 靈性을 통해서 改新敎의 靈性의 한 特徵을 理解 할 수 있는 것이다.
제2장 牧會者의 靈性과 靈性訓練
1. 靈性과 牧會와 관계
(1). 牧會者의 靈性.
基督敎 靈性의 核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牧師가 이어받아야 하고 본 받아야 하는 靈性의 本이다. 그러므로 牧師의 靈性은 예수 그리스도의 靈性을 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靈性이어야 한다. 오성춘은 靈性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로서 基督敎 靈性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說敎者로서 牧師의 靈性은 會衆들이 보고 體驗하고 느낄 수 있는 靈性이어야 한다. 牧師의 靈性은 信者의 靈性과 다른 것이 아니다. 牧師의 靈性은 하나님께서 敎役者로서 또 說敎者로서 세운 職分에 충실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牧師의 靈性은 敎役者의 靈性과 다른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이다. 牧師로서의 靈性은 넓은 의미에서는 基督敎 靈性이면서도 敎役者로서의 說敎者로서의 靈性을 가져야 할 것이다. 牧師의 靈性은 살아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삶이다. 그분 안에 具體化된 하나님의 形象을 본 받는 삶이다. 그러므로 牧師의 靈性은 성육신하여 世上에 오셔서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의 方式을 따르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고 自身을 버리고 十字架를 지시고 世上을 救援하시는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삶이다. 世上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그리스도와 지속적으로 交際하며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救援하시고자 하는 역사 속에 들어가서 苦難당하는 사람들의 삶에 함께 參與하여 그들을 苦難 가운데서 救援하는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牧師의 靈性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十字架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肉體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自己 몸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告白한 말과 같다고 할 것이다.
(2). 牧師의 靈性과 說敎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使役을 위하여 牧師를 選擇하셨다고 해서 牧師가 靈的으로 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牧師에게 원하시는 최우선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弟子들을 불러 가장 먼저 하게 하셨던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使役을 하는 牧師들이 늘 받는 유혹은 그리스도와 人格的으로 同行하는 것보다 使役에 優先權을 두려는 것이다. 牧師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壓迫感을 언제나 意識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正當化된다. 이런 牧師들에게 가장 흔한 問題는 그들이 한때 느꼈던 臨齋를 이제는 잃었다는 사실이다. 使役의 기쁨, 흥분, 效果가 없어진지 오래 되었는데 그 까닭은 일이라는 壓迫 속에서 그리스도의 臨齋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靈性과 교역의 問題를 말하고 있으나 牧師의 靈性과 說敎의 問題와 맥을 같이한다. 說敎者로서 牧師는 그가 해야 할 일에 觀心을 가지다 보면 靈的인 說敎를 하지 못하게 되고 敎役에 신경을 쓰게 되며 결국 靈性 없는 說敎를 하게 되는 것이다. 聖靈은 그리스도를 尊貴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다. 使役者의 영리, 명석, 또는 能力에 注意를 끌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窮極的으로 메마른 것이다. 그러므로 牧師는 그분과 함께 일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恒常 기억해야 한다. 聖靈은 說敎者로 하여금 理解를 촉진시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의 차이를 보게 한다. 성결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에 긍지를 느끼며 ‘내가 그분을 위해 한 것을 보라’고 자랑하는 京鄕이 있다. 聖潔한 삶이란 잘못을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삶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잘못에 대해 민감해진 삶이다. 說敎者가 깨끗한 도구라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더 效果的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分明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간에 說敎者가 그리스도에 대한 한 眞理를 알고 있다면 그는 그 眞理를 사람들에게 宣布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사람들이 眞理를 들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가 說敎者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說敎者의 召命은 그가 資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는 救援해야할 世上이 있는데 說敎者 외에는 그 분을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說敎者로서 牧師는 강단에 설 때 自身의 美德이 아니라, 그 분의 救援하는 能力과 使役에 대한 그분의 부르심을 힘입고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現代의 牧師들은 ‘하나님께서 敎會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고 싶어하는가’에 너무 지나친 觀心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에는 지나치게 소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재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 있는가? - 基督敎 靈性>와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 基督敎 교역>는 하나의 삶의 兩面이라고 한다. 基督敎 교역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 교역과 靈性의 問題는 說敎와 靈性의 問題와 같다. 說敎와 靈性은 어느 하나를 앞세우기보다는 밀접한 牧師의 전인적인 삶이어야 한다.
牧會者는 인위적인 技術이나 方法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 自己의 순수한 靈性을 살리도록 애써야 한다. 그의 祈禱, 禮拜, 說敎 전체에 聖靈안에서 충만해야 한다. 說敎者가 사용하는 모든 用語에서 靈性을 살려서 참으로 부르짖어야 한다. 그것을 못하면 죽은 말이다. 죽은 敎理는 남의 영혼을 살리지 못한다. 靈的 生活을 하기 위해서는 靈的 싸움의 戰略을 세워야 한다. 그것은 自身의 깊은 영혼의 內面에서부터의 싸움이다. 說敎者로서 牧師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온전히 聖靈 안에서 說敎하기 위해서는 靈的으로 準備되어야 한다. 靈的으로 準備되어 하나님과 함께 同域하는 자로서 說敎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自身을 訓練시키고 다스려야 한다. 靈性을 개발하는 靈性 訓練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래 지속적으로 체계적인 生活을 해왔다고 해도 방심하고 驕慢해지면 쉽게 잃기 쉬운 것이다. 靈性 개발을 통해서 說敎者로서 牧師는 自己 自身을 신뢰하고 驕慢해지지 않고 謙遜하게 주님의 나라와 義를 위해서 說敎하여야 할 것이다. 牧師의 說敎는 講壇에서 만의 說敎가 아니다. 牧師의 삶 자체가 說敎가 된다. 그러므로 牧師는 說敎者로서 自身의 모든 삶으로 說敎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 靈性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2. 牧會者의 靈性訓練
本 장에서는 牧會者가 自身의 牧會사역 가운데서 실행할 수 있는 靈性 訓練 方法을 살펴보고자 한다. 靈性訓練은 牧會者 自身의 전 牧會사역 가운데 끊임없이 지속되어져야만 하는 필수적인 科程이다. 왜냐하면 靈性訓練은 어느 訓練과 같이 특정한 분야의 技術을 숙달함으로서 專門家가 되려는 것이나, 어떤 目標를 정하고 그 目標에 도달하기 위한 訓練方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靈性이라는 것은 어느 한 境地에 올라서서 그대로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成長하기도 하고, 퇴보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基督敎 靈性에서 정체는 곧 퇴보라는 것을 銘心하고 날마다 自身을 채찍질하여 靈性 함양에 정진하는 牧會者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특수성을 감안하여 리처드 포스터가 제시하는 세 가지 유형의 訓練, 즉 內面的 訓練, 외면적 訓練, 共同體적 訓練으로 구분하여 제시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구분이 어느 한 분야만의 訓練으로 인하여 靈性 형성의 완성을 기대 할 수 있는 구분은 아니라는 것을 銘心해야 한다. 이 구분은 단지 訓練方法상의 구분이라는 것과 이러한 方法은 동시적으로 進行되고 訓練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靈性 형성을 위한 方法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은 개인적인 것이고, 또 어떤 것은 信者들의 相互作用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靈的 成長에 도움을 주는 方法들 가운데는 장소에 기인되는가 하면 사람에 의존하기도 하고 말씀에 의존하기도 한다. 또는 예전들로부터 그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러한 多樣性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여러 길을 통해서 만나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 유효한 可能性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靈的인 삶의 成長을 위한 보다 더 근접할 길을 發見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靈性 訓練에 임함에 있어서 注意해야 할 것은 靈性 訓練의 槪念을 단지 외면적으로 특정의 行動을 수행하는 것, 혹은 苦難을 통해 공로를 얻는 것, 혹은 自己혐오의 表現으로 보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靈性 訓練은 어느 특정한 분야의 訓練을 통해서만 완성되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靈性 訓練에 있어서 身體的 行動들을 무시하고 神秘的이고 靈的인 行動들만 중요시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靈的 行動을 포함해서 모든 삶의 行動들을 위한 準備에는 本質的으로 신체적 行動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철야기도는 肉體的 活動이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肉體的인 活動만은 아니다. 그러나 現代 文化 속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가장 큰 問題는 그것이 순수하게 “靈的” 이거나 “精神的”인 것만은 아니며 순수하게 精神的인 것만으로는 절대로 자아를 變化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둘의 적당한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靈性 訓練은 시간이 갈수록 큰 結實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靈性 訓練은 수학공식을 適用하여 解答을 얻어내는 것처럼 일정한 형식 속에서 꽉 짜인 틀을 가지고 適用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유익한 訓練이 될 수 있지만 같은 내용일지라도 어떤 사람한테는 별 효과 없이 아주 고행인 訓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靈性 訓練에 참여하는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 성결, 나이 등 많은 條件과 狀況에 따라서 어떠한 訓練을 실행할 것인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예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에서 牧會者의 마음을 차분하고 평화롭게 하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따뜻한 音聲을 들을 수 있는 訓練인 內面旳 訓練方法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1) 內面訓練
內面的 靈性 訓練은 개인적 敬虔에 重點을 두는 訓練이다. 內面的 경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개인祈禱生活, 聖經공부와 말씀黙想, 救援의 확신, 그리고 실천적 믿음의 生活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靈性이다.
그러나 잘못된 內的 靈性은 自己 스스로를 超越하는 것보다 自己 保存에 사로잡혀 超越의 幾回를 도리어 상실해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內的 靈性 訓練은 自己를 초월하여 거듭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銘心해야 한다.
우리 人間의 욕망은 行動하는데 있어서 자유롭지만 아무런 한계와 속박이 전혀 없이 絶對的으로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人間이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人間의 본성을 새롭게 해야만 하는 訓練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人間의 한계와 제약을 실감하면서도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피조된 그리스도인으로 타락한 옛사람의 가치에 종속되어 行動하지 말 것을 訓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靈性 生活을 해야만 하는 타당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① 祈禱訓練
칼빈(Calvin)은 祈禱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는.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뜨거움으로 불타게 된다. 둘째는, 우리의 모든 소원과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쏟아 놓기를 배우게 된다. 셋째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恩惠를 믿게 된다. 즉 祈禱함으로서 恩惠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시145:15-16) 넷째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祈禱를 응답해 주셨다는 確信을 얻고 하나님의 慈悲를 더욱 뜨겁게 黙想하게 된다. 다섯째로, 우리가 이미 祈禱해서 얻은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여섯째로, 우리가 연약할 때일수록 祈禱 生活로 경험을 쌓게 하며 하나님의 攝理가 넘치심을 확증케 하신다.
牧會者의 祈禱에 대해서 스펄전(Spurgen)은 “비록 그가 祈禱하는 仔細를 취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祈禱하는 정신 속에 젖어 있어야 한다. 이 하늘 아래 ”쉬지 말고 祈禱하라“는 권고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牧會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祈禱는 우리들로 하여금 靈的 生活의 최전방에 서게 하며 人間 심령의 가장 깊고 가장 높은 行爲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訓練 그 자체이다. 진정한 祈禱는 生活을 變化시키는 것이고 또한 生活을 創造하는 것이다.
祈禱는 우리들 世上의 불안과 기쁨에 대하여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다. 이 일은 敎會 안에서 敎會와 함께 敎會를 위하여, 그리고 때로는 혼자 할 수도 있다.
믿음의 최전방에서 探險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祈禱는 그들의 삶의 변두리에 덧붙은 작은 習慣이 아니라 그들의 삶 自體이며 그들의 가장 生産的인 시기의 진지한 일이었다.
우리는 祈禱 할 때 소리를 내거나 생각을 통해 하나님께 말한다. 本質상 祈禱는 다른 靈的 活動과 訓練, 특별히 聖經硏究, 명상, 禮拜, 때로는 독거와 금식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자주 祈禱함으로서 순간순간 요구 될 때마다 祈禱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자주 祈禱할수록 그 만큼 더 祈禱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祈禱의 應答- 우리의 要求에 대한 하나님의 反應을 체험할 때, 하나님의 能力에 대한 確信이 다른 삶의 영역 속으로 넘쳐흐르게 됨을 느낀다.
訓練으로서의 祈禱는 우리가 쉬지 않고 祈禱하기를 배울 때에만 靈性生活을 강화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살전5:17 ; 빌4:6) 이러한 훌륭한 祈禱를 고독, 금식, 철야와 같은 다른 訓練과 병행한다면 그 效果는 매우 높아질 것이며 우리의 삶 속에 뿌리 깊이 스며들 것이다.
祈禱는 靈的 生活의 미개척지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祈禱는 삶의 創造요, 變化이다. 弟子들은 祈禱訓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께 드리며, 나의 問題들을 낱낱이 아뢰며, 중보의 祈禱를 드리며, 끊임없이 내 自身을 돌이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祈禱는 독백이나 명상과는 다르다. 祈禱는 하나님의 主權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行爲이며, 하나님의 전능하신 能力을 인정하고 그 能力에 힘입기를 간구하는 行爲이며, 人間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告白하는 行爲이며, 하나님의 約束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行爲이며, 自己를 否認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行爲이다.
祈禱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變化시키는데 사용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祈禱의 目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이처럼 弟子들의 靈性 개발에서 祈禱는 가장 중요한 方法으로서 쉬지 말고 祈禱하라는 聖經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祈禱는 어느 곳에서나 독방에서처럼 오직 하나님 中心으로 祈禱를 드려야 한다. 祈禱하지 않으면 自身을 모르게 되며 自身을 모르면 하나님과 이웃을 發見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참다운 진정한 祈禱를 드리려면 訓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祈禱는 가장 하기가 어려운 靈性 生活이다. 祈禱가 가장 하기 어려운 靈的 慣習이라는 것을 强調하는 존 맥아더는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첫째로, 祈禱는 獻身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주祈禱문에 “나”라는 말이 없으면 오로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祈禱만이 나타난다고 한다. 즉 祈禱는 獻身的인 것이며, 利己的이지 않은 사람만이 祈禱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祈禱하기가 어려운 것은 祈禱가 은밀한 것이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는 說敎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準備하면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祈禱는 하지 않기가 쉽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祈禱는 聖經이나 敎會의 歷史를 통하여 基督敎 안에서 수많은 형태들이 실천되어져 왔다. 시기와 장소, 모습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음성祈禱, 黙想祈禱, 정감祈禱, 단순祈禱, 관상祈禱, 예수祈禱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黙想祈禱(meditation) : 이 祈禱는 한 개인이 自身의 전 존재를 기울여 하나님을 찾아 느끼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 안에 머물며, 그 분 뜻을 행하기 위해 투신하는 전인적이며 존재론적인 祈禱이다. 이 祈禱는 조용한 곳을 택하여 가장 집중이 잘되는 시간에 편안한 仔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黙想의 種類는 상상력을 통해 聖經의 말씀을 추리하면서 그 眞理를 파악하는 추리黙想과 마음의 비움을 통한 黙想, 시사성 있는 事件을 통한 黙想 등이 있다.
※정감祈禱 : 오먼은 이 祈禱에 대하여 “의지 작용이 지성의 추리 작용보다 우세한 형태의 祈禱이며 그 方法이 黙想祈禱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 祈禱를 사랑이 우세한 單純化된 黙想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 祈禱의 위험에 대하여 억지로 애정과 의지작용을 불러일으키지 말아야 하며 너무 감각적 위로에만 사로잡히지 말 것을 警告하고 있다.
※ 단순祈禱 : 단순祈禱는 하나님과 관계된 대상(하나님 自身이거나 하나님의 어떤 완전성, 그리스도나 그 분의 신비, 또는 그리스도적 眞理)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단순히 바라봄을 뜻한다. 단순祈禱의 가장 아름다운 熱媒는 生活의 單純化이다. 이 祈禱에 임하는 자는 바쁘고 복잡한 일과 속에서도 內的으로는 하나님을 응시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공적, 사적 음성 祈禱를 드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현존에 잠길 수 있어야 한다.
※ 관상祈禱(Contemplation) 관상은 하나님과 人間 사이의 중계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祈禱門, 언어, 상상 등을 最小限으로 줄이거나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히 사귀는 마음의 祈禱이다.
② 주기도문을 통한 靈性訓練
이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대표적인 祈禱인 주기도문을 통한 祈禱訓練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중언부언하지 않고 바른 祈禱를 하기 위해서는 그 모델이 바로 주기도문임을 알아야 한다.
주기도문은 聖經이나 敎會 전통을 통해 우리에게 전수된 훌륭한 기도문이다. 우리는 이 祈禱를 통하여 시공을 초월한 그리스도인들의 祈禱에 동참할 수 있으며 정해진 기도문을 깨어 있는 마음으로 드림으로 知性이나 意志의 活動을 넘어 더 깊은 祈禱의 世界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유상섭 교수는 바른 祈禱를 알기 위해서는 주기도문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주기도문을 통해서 祈禱자는
첫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겨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닮은 삶을 통해서 世上 사람들 앞에 거룩하게 인정받고 높임 받는 것을 말한다. 즉 자녀들의 바른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말한다. 世上사람들이 信者들의 삶과 行實을 보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욕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榮光과 尊貴를 돌리는 것이다. 이 첫 번째 祈禱는 나를 물리치고 하나님을 높이는 訓練이라고 할 수 있다. 自己중심으로 운영되는 이 世上에서 이것은 날마다의 告白訓練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
여기서 나의 祈禱는 이렇다. “하나님이시여, 우리 가운데(家庭, 敎會, 사회) 臨齋하셔서 하나님의 權能을 베푸셔서 우리를 救援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우리도 거룩하게 만들어 주소서”
둘째 내용은 첫 번째와 관련이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하는 祈禱이다. 이 祈禱는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나타내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자녀들의 삶을 떠나서 도래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하나님 子女들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子女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임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사탄나라의 세력을 꺾고 무너뜨린다. 사탄나라의 세력을 꺾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눅11:21 22) 그리고 사탄의 부하인 악령들이 다스리던 자리를 하나님의 聖靈이 차지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 개인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눅11:25 26) 우리는 이 예수님의 祈禱를 통해서 나와 내 家庭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온 世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려는 책임의식을 부여받아야 한다. 이것 또한 訓練이다.
여기서 나의 祈禱는 이렇다. “하나님 우리의 疾病과 약함과 苦難을 고치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주님께 전적으로 順從하여 獻身하여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셋째, “일용할 糧食을 주옵시고”(마6:11) 오늘 하루 사는데 필요한 糧食을 그 날에 달라는 것이다.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祈禱하고 그 다음 우리의 필요한 糧食을 위해서 祈禱하는 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의 實踐방안이다(마6:33)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추구 할 수 없다. 하나님의 靈的인 事業에 전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삶을 責任져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責任져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實現을 위해서 힘과 정성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生命을 유지하기 위한 具體的인 실천방안 糧食을 날마다 하나님께 구하는 祈禱이다. 우리는 이 祈禱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確信하는 訓練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祈禱는 이렇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우리의 肉體의 糧食과 심령의 糧食과 영혼의 糧食을 풍족하게 채우사 시험에 들지 않게 도우소서”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해서만 살고자 하오니 우리 약함을 도우소서”
넷째, 우리의 罪를 용서해 달라는 祈禱이다. 이 祈禱는 말 그대로 우리의 罪를 용서해 달라는 祈禱이다. 하나님께 罪 용서를 구하는 우리들은 어떤 자들임을 우리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이 祈禱는 自己에게 罪를 지은 자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나타내고 있다. 주님은 이 祈禱를 통해서 人間관계의 生存은 罪용서 없이는 不可能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 자녀들의 삶에서 罪容恕의 삶이 應答 받는 祈禱의 전제 조건임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容恕했다는 것은 우리 自身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事件에 동참했다는 것을 뜻하며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구별된 聖徒로서의 자부심을 더욱 더 확실히 所有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祈禱는 이렇다.
제1段階 : 告白의 祈禱.. “하나님 나는 그를 容恕해야 되는 줄 아오나 그를 容恕 할 수 없나이다. 나는 罪人이로소이다”
제2段階 : “하나님, 나는 그를 용서 할 수 없으나 주님은 그를 容恕하는 줄 믿습니다”
제3段階 : 간구의 祈禱..“하나님 나를 대신해서 그를 容恕하시고 받아주옵소서”
다섯 번째, 우리를 試驗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祈禱이다. 여기서 試驗은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試驗하고 罪를 범하게 하는 각종 음모를 말한다. 마태는 “試驗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바로 다음에 긍정적으로 “다만 악에서 救援 하옵소서”라는 항목을 덧붙였다.
우리를 試驗하는 자들은 사탄이요, 世上이요, 정욕들인데 이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를 試驗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眞理의 말씀을 따라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삶을 집중시켜야만 試驗을 이길 수 있다.
여기서 우리의 祈禱는 이렇다. “하나님이시여, 사탄과 世上과 정욕은 끊임없이 우리를 試驗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어 놓으려고 하고 있나이다 우리를 도와 試驗에 들게 하지 마소서,” “주여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權能만을 의지하여 살고자 作定하오니 우리를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시켜주셔서 이 試驗을 이기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結論은 하나님께 드리는 송영이 되겠다. “대개 나라와 權勢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 최종 目標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삶의 모든 目標는 하나님께 영광과 尊貴를 돌리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祈禱의 本質 또한 하나님께만 영광으로 종결지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祈禱는 이렇다. “하나님 나의 모든 祈禱와 삶으로 하나님께 榮光과 尊貴와 讚揚을 드리고자 하오니 오직 홀로 榮光 받으소서.” “하나님 우리가 주께 全的으로 順從하며 주님의 權能만 의지하여 하나님의 榮光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자 하오니 우리를 도우소서”
칼빈(Calvin)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가장 완벽한 祈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祈禱 訓練으로 이것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 祈禱를 통해 주님은 가치 있는 것,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주님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신다.
주기도문은 모든 聖徒의 祈禱의 모범이다. 단지 禮拜의 폐회 순서에만 사용하기 위해 외우는 祈禱가 아니다. 주기도문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 무궁히 모든 그리스도인이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찾도록 우리를 내몰아가고 있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우리를 결단하게 하고 헌신하게 하는 주기도문은 靈性 訓練 중 가장 효과적인 祈禱 訓練 方法 중에 하나이다.
③ 말씀 黙想 訓練
黙想은 하나님과 개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祈禱의 한 형태이다. 黙想은 한 개인의 自身의 전 존재를 기울여 하나님을 찾아 느끼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 안에 머물며 그 분 뜻을 행하기 위해 투신하는 전인적이며 존재론적인 祈禱이다.
黙想祈禱는 마치 하나의 靈性的 삶의 나무와 같아서 黙想하는 동안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흡수하여 成長하게 하는 기반을 조성시킨다(엡5:26) 따라서 黙想 祈禱하는 동안에 自己 영혼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흡수하는 것은 黙想祈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課題이다.
이러한 黙想이 불교와 힌두교의 그것과 다른 점은 基督敎 黙想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交際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찌꺼기와 混亂으로부터 脫出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는 시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黙想에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반드시 있지만 이방 宗敎的 黙想에는 이것이 없다는 것이다. 基督敎人들의 黙想은 초월명상이나 불교의 선이나 금욕주의적인 自己 修練이나 범신론적인 마음의 평정 自己최면 또는 마음을 비워서 해탈을 얻고자하는 수도 仔細 등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기준은 그리스도인들의 참 黙想을 理解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基礎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黙想은 하나님의 역사나 말씀, 섭리, 등을 기억하고 사색하고 곰곰이 생각하여 自身에게 適用해 보는 거룩한 사고활동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이것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黙想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활동 즉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黙想은 그 感動이 우리의 심령에서 출발되는 것이지만 반드시 “내 現實에의 適用“ 이라는 勞力과 順從을 통해 現實에서 表現되는 것이다.
그러면 黙想 訓練의 方法과 절차를 살펴보면,
㉠ 古典的인 方法(거룩한 讀書를 통한 祈禱法)
이 祈禱法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交際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 온 方法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가 마치 그리스도와 對話를 나누듯이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대화의 論題를 제시하듯이 주어진 聖經의 本文에 귀를 기울이는 方法이다. 말씀에 대한 반추를 통한 주님과의 매일의 만남은 그 분을 향한 친교와 사랑과 신뢰를 더욱 공교히 한다. 方法과 節次는 다음과 같다.
첫째, 祈禱하고자 하는 本文을 선정한다.
初步者에게는 공관 福音書가 좋다. 聖經이 아닌 敬虔에 관한 책도 可能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본받아” 같은 책도 “거룩한 讀書를 통한 祈禱”의 좋은 資料가 될 수 있다.
둘째,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場所를 택한다.
몇 분 동안 肉體的이고 심리적인 평정을 되찾고 마음의 중심에 焦點을 맞춘다. 聖靈의 도움을 구하는 內的인 仔細로 조용히 準備를 한다.
셋째, 內面的으로 焦點이 맞추어졌으면 천천히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선택한 말씀을 읽는다. 어떤 특정한 단어나 구가 떠오르면 그것을 평화로운 목소리로 천천히 반복한다. 그러는 동안 주어진 말씀을 감각과 지성과 감성을 통하여 內面 깊이로 끌어들인다. 마음에 부딪힘이 오는 어떤 것이 있으면 그것을 中心으로 주님과 對話를 시작한다. 상상력으로 혹은 정신력으로 혹은 口頭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作業을 하는 동안 정신이 산란하여지고 불필요한 생각이나 염려나 잡념 등이 떠오르면 처음 시작했던 말씀으로 거듭 거듭 돌아가서 中心을 잃지 않도록 한다.
넷째, 끝날 때는 祈禱 동안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祈禱 밖으로 나온다. 이 段階의 체험은 기쁨, 평안, 확신, 만족, 충만, 불안, 분노, 혼란, 당황, 항거 등의 감성적인 用語로 表現된다.
다섯째, 祈禱 후에는 반드시 祈禱가 어떻게 進行되었는지 반추한다. 이것은 祈禱동안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를 인식하기 위함이다. 이 祈禱에 대한 반추에서 특히 觀心을 기울일 부분은 나의 心靈狀態가 어떻게 움직여가고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祈禱를 시작할 때 얻고자 하는 恩寵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는지를 確認하는 기회이기도하다. 반추한 내용을 紀錄한다. 祈禱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또는 聖靈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變化시키는지를 점점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결단하고 行動해야 하는가에 대한 식별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 紀錄은 나의 靈的 여행이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를 確認하는 귀한 資料가 된다. 지도를 받는 입장이라면 靈性 지도자와 面談을 할 때 祈禱상태를 點檢하는데 필요한 資料가 된다.
㉡ 이냐시오 로욜라의 黙想.
이냐시오의 黙想은 聖經 속의 事件에 自身을 몰입시키는 몰입方法과 다섯 가지 감각을 사용하여 狀況을 최대한으로 상상해 보는 상상의 方法이 있다.
여기에서는 想像力을 통해 어떤 풍경이나 역사적인 장소, 또는 그 장면들을 具體的으로 그려보는 活動方法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때에는 人間의 다섯 가지 감각(눈, 코, 입, 귀, 손발)을 사용해 본다. 福音書의 事件들을 그려보면서 다섯 가지 감각 전체를 활용해서 理解하려는 勞力이다.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기사(눅16:19-31)을 黙想하면서 다음과 같은 活動이 가능하다.
* 지옥의 장소로 가서 상상의 눈으로 맹렬한 불 속에서 영혼들이 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 상상의 귀로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의 고통스러워하는 통곡의 소리를 듣는다.
* 상상의 코로 매캐한 연기 냄새와 더럽고 부패한 물건이 썩는 냄새를 맡는다.
* 상상의 눈으로 눈물이나 슬픔, 良心을 좀먹는 벌레와 같이 소름끼치는 쓴맛을 본다. 또한 지옥에서 죽어 가는 저 영혼들을 위해 들려줄 말을 기록해 본다.
* 상상의 손발을 통하여 영혼들을 태우는 무서운 불꽃의 열기를 피부로 느껴본다.
이러한 黙想이 끝나면 얼마나 成功을 거두었는가. 아니며 失敗를 經驗하였는가의 평가를 해야 한다.
祈禱가 잘 되었는가? 빠르게, 평화롭게, 왜, 어떤 것이 나를 특별히 感動시켰는가?
신비에로 들어가는 恩寵이 내게 주어졌는가? 거기에 나는 어떻게 응답했는가?
위치, 자세, 혹은 접근方法이 祈禱에 도움이 된 듯한가?
지난번 祈禱의 평가에서 얻어진 어떤 것이나 혹은 祈禱 시간들 사이에 내가 행했던 것이나 읽었던 혹은 體驗했던 것에서 얻어진 어떤 것이 도움이 된 듯 한가?
나는 祈禱 사이의 그러한 시간들 안에서 祈禱와 그 날 하루의 분위기에 조화를 이루어 나가려고 勞力했었나? 內的으로나 외적으로 침묵을 지켰는가?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산만하게 하는 行動을 피해 갔는가? 필요하다면 내게는 긴장을 풀어주는 行動들과 그 날의 분위기를 유지시켜주는 行動들을 이용했는가? 어둠과 빛을 이용하면서 내가 그 날 찾고자 하는 선물에 의지하면서 얼마나 勞力했나.
祈禱가 잘 안되었는가? .... 천천히, 어렵게, 왜?
나는 적절히 準備했었나?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어떤 方法으로 내가 準備했던 것을 사용했었나? 특히 불건전한 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가? 나는 祈禱를 개선하기 위하여 다른 자세 위치 접근방식들을 시도했었나.
나는 너무 많은 資料들을 해치우려 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기쁘고 평화스러운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당황스러워 혹은 어지러운 부분에서도 충분히 멈추었었나? 혹은 내가 건전한 불안을 피하려고 하지는 않았었나?
분심들... 어디서, 몇 번이나? 그들의 源泉은 무엇이었나? 自身에 의한 內的인 것이었느냐? 혹은 외적인 어떤 것이었나. 과거, 現在, 未來에 관한 것이었나? 나는 그 분심들에 대하여 무엇을 행했었나? 여러 祈禱 기간들 사이의 시간 중에 祈禱를 방해할 만한 어떤 것이 있지는 않았는가? 예를 들어 피로, 건강, 침묵의 결여 등등..
黙想에 임함에 있어서 注意해야 할 것은 黙想의 經驗은 어디까지나 聖經을 깊이 느껴보려는 것이지 그것에 너무 깊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自身의 깊은 內面의 世界와 심오한 하나님의 말씀의 만남이 均衡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어느 특정한 힘의 均衡 파괴로 인해 어느 한쪽만으로 급속히 치우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④ 큐티(Quiet Time)
큐티(Quiet Time)는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조용한 時間”을 의미한다. 여기에 하나님과 나를 適用하면 곧 “하나님과 나만의 交際의 時間” 또는 “하나님과 실제 生活 안에서의 行動과 交際”라고 풀이 할 수 있다. 큐티(Quiet Time) 生活은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드리는 무형의 제사이지만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몇 가지 요소를 잘 지킴으로서 유익이 된다.
큐티(Quiet Time) 生活의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요소를 살펴보자.
첫째로, 時間은 조용한 時間을 택하되 가급적이면 하루 중에서 일정한 時間을 정해서 規則的으로 訓練에 임하는 것이 좋다.
둘째로, 장소는 조용한 장소로서 사람의 방해가 없는 하나님과 약속된 곳을 택하는 것이 좋다. 이것도 時間과 마찬가지로 일정하고 規則的인 장소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聖經 말씀은 可及的이면 案內書를 따라서 하는 것이 좋으며 본문은 黙想의 양, 어려운 정도 등을 생각해서 하루에 보통 10절-20절정도 분량을 생각하면 적당하다. 물론 聖經은 마음으로 읽도록 勞力해야 한다.
넷째로, 큐티(Quiet Time)의 祈禱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알았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게 해 달라는 懇求로 끝나는 祈禱여야 한다. 그 날 큐티 중의 祈禱는 본문 말씀 중심의 간략한 祈禱로 끝내고 저녁 祈禱 時間을 따로 내어서 간구 祈禱와 중보 祈禱를 하는 것이 좋다.
* 큐티(Quiet Time)의 실제.
㈀ Pray for a moment(잠깐 祈禱하십시오) : 하나님의 임재의 祈禱를 드린다. 찬양을 해도 좋다.
㈁ Read His Word(말씀을 읽으십시오) : 보통 3회 정도 뜻이 잘 통할 때까지 읽는다.
㈂ Examine His Word(말씀을 黙想하십시오) : 자유로이 노트를 紀錄해 나가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말씀 위로 경고 소망 책망 아이디어 등을 신중히 다듬어 간다.
* SPACE 方法을 응용하는 것도 좋은 方法이다.
.- Sins to confess(자백을 해야 할 罪)
- Promises to claim(붙잡을 약속)
- Action to avoid(피해야 할 行動)
- Commands to obey(順從해야 할 命令)
- Examples to follow(따라야 할 模範)
㈃ Say back to god(말씀의 結果를 가지고 다시 祈禱하십시오) : 주어진 黙想의 結果나 깨달아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뜻, 실행하기 어려운 適用,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適用 등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힘과 能力과 知慧를 구하고 하루 전체의 인도를 의탁하는 祈禱를 한다.
㈄ Share with other what you have found(발견한 사실을 다른 분과 나누십시오): 黙想된 말씀, 適用된 말씀이나 그 結果 또는 체험 등을 다른 사람에게 告白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告白을 듣는다. “큐티(Quiet Time)”의 꽃은 “나눔”이기 때문이다.
(2) 외면訓練
외면적 靈性 訓練은 現代 物質 문명의 혼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訓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믿음과 行動이 일치되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物質의 誘惑으로부터 빠져나와 生命의 말씀을 읽고 黙想하여 하나님과의 靈的 交通을 하는 祈禱를 잊지 말아야 한다.
헨리 나우웬(Henri J M.Nouwen, 1932-1996)은 하나님을 향해 다가가기 위해 발돋움하는 작업이 또 다른 측면의 靈性 生活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러기 위해 미리 마음에 채워진 망상, 感傷主義, 폭력, 꿈의 偶像崇拜 等을 祈禱로 轉換시키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단 하루가 아닌 매일 매일의 敬虔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勞力과 땀은 그의 외면적 靈性을 더욱 풍부하게 향상시킬 것이다.
① 單純化訓練
㉠ 單純化 訓練이란?
“단순”이라는 의미는 간단, 단일, 순진, 천진으로 聖經에서 사용될 때는 한 가지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는 態度를 말한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삶의 모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찾을 수 있다. “나의 糧食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당신의 일생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만을 위해 사셨으며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악의 勢力들과 싸우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單純化의 삶은 廣野에서 사탄에게 받은 세 가지 試驗을 물리치는 장면에서 絶頂을 이룬다. 그 單純化란 무엇이었을까? 바로 “말씀” 하나였다. 그럼 과연 우리 人間의 單純化의 삶, 특히 牧會者의 單純化의 삶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 대답 또한 聖經에서 찾을 수 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의 식 주 그의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단순하게 사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物質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改革主義 靈性에 있어서 칼빈(Calvin)은 그리스도인의 “所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世上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편리하고 즐겁게 살아가도록 허락하셨지만 우리가 世上에서 너무 편리하게 살려고 所有에 지나치게 얽매인다면 그것은 바로 偶像崇拜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칼빈(Calvin)의 주장은 牧會者의 單純化(청빈) 訓練의 관점에서 본다면 所有에 있어서 偶像崇拜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가차없이 所有를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칼빈(Calvin)이 경고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거룩한 중심이 없기 때문에 안전을 위한 우리의 욕구로 인하여 物質에 집요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現代社會의 풍요에 대한 慾心은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진실과의 連結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요하지도 않고 기쁨을 주지도 못하는 物質에 매달린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物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기 위해 그것을 사기까지 한다. 計劃에 의한 소모가 사라진 곳에는 심리학적 소모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 속에서 牧會者는 最大限으로 生活의 簡素化를 추구함으로써 하나님과의 交際에 있어서 방해되는 모든 내외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單純化 訓練의 중심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라는데 있다. 우리는 이러한 單純化 訓練에 임함에 있어서 內的인 仔細와 外的인 表出에 대하여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 單純化의 內的 표현
단순한 生活의 모범이신 예수님의 삶과 그 의미도 단순한 生活에 대해서 가르치신 敎訓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이 世上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그리스도로서의 地上生活을 일관하셨다. 이러한 상태의 根據는 그가 사람과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피조물들로 놓고 평가하고 취급한데에 있다. 아무도 절대시 않고, 하나님의 榮光을 위하여 그들을 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라면 언제 누구와도 무엇이라도 포기할 마음의 仔細로 사셨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聖徒들에게 있어서는 돈과 財物의 慾心을 먼저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가난에 참여하여 그 가난을 그대로 聖徒의 삶에 옮겨 사는 것을 말하며, 謙遜한 마음을 가지고 이 世上에 속한 고귀한 것들을 아무 쓸데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그리스도 한 분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二次的으로 생각하는 삶을 의미한다.
單純化 訓練의 內的인 자세로는
첫째, 우리는 우리의 所有物을 膳物로 받았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둘째, 우리의 所有物은 하나님께서 돌보셔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의 所有物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해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세 가지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근심으로부터 自由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외적인 表出은 한결 쉬워진다.
㉢ 單純化의 외적 표현
단순성을 內的 실재로만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內的 실재는 외적 표출이 있기 전에는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순성의 외적 특정 사항을 논의하기를 거부하는 일은 단순성의 訓練을 단순한 이론적인 공론으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포스터는 단순성의 외적 표출을 위한 주요 원리 10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로, 물품은 체면이 아니라 유용성을 보고 사도록 하라.
둘째로, 중독을 일으키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배격하라.
셋째로, 物質을 나누어주는 習慣을 기르도록 하라.
넷째로, 現代 가전 기구 업자들의 선전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라.(광고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
다섯째로, 物質을 所有하지 않고서는 그 物質을 즐기는 법을 배우라. (所有보다 즐기는 習慣을 길러라)
여섯째로, 創造物에 대하여 깊은 感謝를 느끼도록 하자(자연과 가까이 하라)
일곱째, “지금 구입하고 나중에 갚는다는” 전략에 대해 건전한 의심을 가지고 보기를 바란다.(즉 외상거래를 하지 말라)
여덟째, 명백하고 정직한 말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에 順從하자.(정직한 말을 하는 것)
아홉째, 다른 사람에게 抑壓을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거부하라.(남을 억압하게 될 일을 모두 물리치라는 것)
열 번째,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라.(나의 중요 目標에서 다른 곳으로 마음을 팔리게 하는 것을 모두 물리치라는 것)
單純化 訓練의 중심점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287?~BC212)가 “나에게 받침점을 달라. 그러면 내가 지구를 움직이겠노라” 선언했듯이 이 받침점은 單純化된 마음의 중심적인 能力을 의미한다.
20세기 靈性 訓練 神學자 리쳐드 포스터는 單純化의 기본적인 마음으로서 첫째, 우리 所有를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아들이는 것. 둘째, 우리 所有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님을 아는 것, 셋째, 우리 所有를 남들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② 섬김訓練
㉠ 섬김에 대한 예수님의 敎訓.
크리스챤 靈性의 외적 표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섬김”이다. 이는 예수님을 구주로 告白하는 크리스챤의 삶의 특징이 “自己 중심에서” 떠나 “주님중심” “타인중심”으로 變化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十字架 順從의 표상이라면 수건은 섬김의 표상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드시기 위하여 弟子들과 함께 모였을 때 수건과 대야를 가져오라고 하셔서 弟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섬김이 무엇인가에 대해 본을 보여 주셨다.
섬김에는 “독선적인 섬김”과 “참다운 섬김”이 있다. 독선적인 섬김은 人間의 勞力에 의해 오는 것이다. 봉사할 대상을 뽑아내어 고르고 봉사할 方法을 계산하고, 그 結果에 대해 크게 觀心을 갖는다. 그러나 “참다운 봉사”는 마음 속 깊은 곳, 거룩한 다른 분과의 관계에서 온다. 따라서 世上 모든 사람이 봉사의 대상이 되고, 봉사의 結果의 계산하려는 욕망이 없다. 다만 봉사자체를 기뻐 할 뿐이다. 독선적인 봉사는 共同社會를 파괴하는 結果를 가져온다. 그것은 개인의 榮光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참다운 봉사는 共同體를 건설한다. 조용히, 그리고 꾸밈없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성을 돌보며 다닌다. 그래서 참된 奉事는 기쁨과 평화와 生命力이 있는 봉사이다.
㉡ 섬김 訓練의 실제.
섬김이란 倫理學의 法典이 아니라 하나의 生活方式이다. 특별히 奉事活動을 한다는 것과 섬김 訓練 속에서 산다는 것은 같지 않다. 본 훼퍼(Bonhoeffer)는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첫째, 말없이 귀를 기울이는 섬김이 있다.(경청) 함께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해야 할 첫 번째 봉사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시작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듯 이웃 사랑의 시작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돕는 섬김이 있다. 基督敎 共同體에서 이웃을 위한 섬김의 두 번째는 적극적인 도움이 있다. 이것은 우선 눈에 보이는 사소한 일을 그저 돕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 같은 일은 얼마든지 있으며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아무리 사소한 奉事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할 겨를이 없어서 못한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다. 만일 눈에 보이는 그 같은 사소한 일을 도와주느라고 自己의 귀중한 時間을 공연히 허송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自己 自身의 일을 지나치게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셋째, 서로 짐을 지는 섬김이 있다. 사도 바울은 서로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갈6:2)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의 법이며, 야고보가 말하는 최고의 法이다(약2:8) 서로 서로의 상처와 苦難을 감당해 주며 우는 이들과 함께 울 때 사랑은 가장 완벽하게 완성된다.
넷째, 生命의 말씀을 나누는 것도 봉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사노라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證據해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진정으로 은혜로운 봉사인 것이다. 우리가 서로 서로 해야 할 말씀의 봉사를 알면서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일이 아니다.
참고로 섬김을 위한 3가지 질문을 보면,
첫째, 하나님께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로 이끄신다면 예수님과 같이 自身의 관심사를 제쳐놓고 그의 要求를 기꺼이 들어 줄 수 있는가?
둘째,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정서와 感情을 예민하게 잘 파악하고 있는가?
셋째, 당신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形便을 잘 파악하고 있는가?
③ 順從訓練
㉠ 順從이란 무엇인가?
順從 訓練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順從하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과 가족 이웃 그리고 敎會 共同體에 대한 順從을 말한다.
리차드 포스터는 “모든 靈的 訓練가운데서 ” 順從의 訓練“만큼 오용되고 있는 訓練도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人間은 가장 좋은 교훈을 가장 나쁜 結果로 바꾸어 놓는 교묘한 技術을 가지고 있다. 宗敎에 대한 그릇된 생각만큼 人間을 노예로 만드는 것도 없다. 宗敎만큼 人間을 속박하는 것은 없으며, 宗敎 중에서도 順從에 대한 가르침만큼 人間을 파괴시키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 동안 順從처럼 오용되어 온 것은 없으므로 주의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이 訓練을 수행하여 나가야 한다.
順從에 대한 新約聖經의 원어 “휘파쿠오”로 고대 世界에서 문지기가 수행하던 일을 뜻하는 것으로 “서로 僕從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즉 남을 대하는 마음 가짐을 우선 强調하고 있다. 聖經은 상.하 主從관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僕從하는 마음을 가르치고 있다. 토마스 아 켐파스는 順從이란 ”하나님의 사랑 아래 自己 自身을 온전히 맡기는 것“으로 順從 없이는 누구나 진정한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靈性 訓練은 目的이 자유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順從訓練의 目的도 자유 함에 있다. 順從訓練에 따르는 자유는 늘 우리를 가로막는 무서운 짐들을 내려놓는 능력이다. 우리 마음대로 모든 일이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망상은 오늘날 인류사회의 가장 큰 束縛이다. 順從訓練 속에서 우리는 그 問題를 내려놓고 잊을 수 있게 된다. 順從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이 이웃을 소중히 여길 수 있고 自己 권리를 포기하고 順從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이 이웃을 소중히 여길 수 있고 自己 權利를 포기하고 順從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自己를 否認하고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막8:34) 여기서 自己 부정은 主體意識의 상실이나 自己 경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自己 부정은 타인에게 양보하는 자유를 의미하며 우리가 自身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方法이다. 예수님은 일생을 順從과 섬김으로 사셨다. 十字架의 삶이란 자발적인 順從의 삶이다.
사도 바울은 빌2장에서 自己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고 命令하였다. 順從은 新約 全體를 뚫고 흐르는 윤리의 主題이다. 順從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자세이다. 順從의 訓練은 謙遜함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世界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順從을 통한 靈的 권위를 증가시키도록 自身을 訓練해야 한다.
㉡ 順從 訓練의 실제.
포스터에 따르면 順從하는 行動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 順從하는 행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몸과 영혼과 마음을 그분의 의도에 맡기는 것이다. 아침의 첫마디가 順從의 말이듯 이 밤의 마지막 말도 順從의 말이어야 한다.
둘째, 順從하는 行動은 聖經에 대한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예수님)께 順從하듯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에(聖經) 僕從하는 것이다. 먼저 말씀을 듣고 둘째로 받아들이고 셋째로 그 말씀에 따른다.
셋째, 順從의 行動은 가족을 향한 것이다. 가족에 대해서는 “각각 自己의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빌2:4)라는 말씀에 명시하여 너그럽게 그리고 상냥하게 가족 일원들을 존중해야 한다.
넷째, 順從의 行動은 이웃 사람들 그리고 살다보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 앞에서 소박하고 선량한 生活을 하며 그들이 곤경에 빠지면 도와주어라. 그리고 친절을 베풀고 별스럽지 않는 일들에 觀心을 가져 주어라.
다섯 번째, 順從해야 할 믿음의 共同體이다. 즉 그리스도의 交際이다. 채워야 할 직책,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그것이 혹시 十字架의 삶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초대가 아닌지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라.
여섯 번째, 상처받은 사람들이나 혹은 멸시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다. 어느 文化圈이나 “寡婦와 孤兒”가 있다. 즉 힘없고 방어 못하는 자들이다(약1:27) 우리의 責任은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둘러싼 世界의 아픔, 환경에 대하여 우리가 責任을 지느냐 않느냐 하는 問題는 온 世界사람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에게도 影響을 미친다. 順從해야 할 우리의 行動은 날로 무책임해져 가는 世界에서 책임감 있는 市民으로 살겠다는 結團이다.
④ 침묵과 고독訓練(홀로 있기 訓練)
㉠ 침묵과 孤獨이란?
침묵과 孤獨 訓練은 靈性訓練 중 가장 깊숙한 것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침묵과 고독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內面의 孤獨을 所有하기만 하면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內面의 孤獨과 외부의 고독 중에 사셨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혼자 계시며 공생애를 準備하셨다.(마4:1-11) 12弟子를 선택할 때도(눅6:12)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도(마14:26)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가셔서 혼자 內面과 외면의 孤獨을 즐기셨다. 또한 가장 고귀한 일을 準備하실 때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孤獨을 찾으셨다(마26:36-46).
본 훼퍼는(Bonhoeffer 1906-1945) 그의 저서 “信徒의 公同生活”(gemeinames leben 1938,1983)에서 사귐 안에 서 있을 때에만 우리는 홀로 있을 수 있고 또한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귐 안에서 살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사귐 속에서만 우리는 어떻게 바로 홀로 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배우고 홀로 있음으로서만 우리는 어떻게 사귐 안에 서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배웁니다. 이 둘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앞서는 것 같은 關係가 아니라 동시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둘은 각기 깊은 심연과 심각한 위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홀로 있음 없이 사귐을 바라는 사람은 虛榮心이라는 심연에 빠지고 自身에게 현혹되어 절망의 심연에 떨어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라고 우리에게 지적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의 뜻 있는 사귐을 원한다면 孤獨의 정적을 찾아 나가야 하며, 홀로 있기를 원한다면 남들과의 사귐과 責任感을 추구해야 한다.
침묵과 고독의 目的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자 함이다. 소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다스리는 것이 침묵의 열쇠다.
토마스 아켐파스(Thomas Aquinas) [1225?~1274.3.7] 는 “완전히 침묵하는 것은 절도 있게 말하는 것보다 쉽다.”고 썼고, 傳道書의 지혜로운 說敎者는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전3:7)라고 했다.
또한 김경재는 “沈黙은 말을 하기 위해 참 말이 아닌 소리의 잔가지를 모두 잘라내어 불에 태워 버림이다”라고 했다.
침묵과 고독에 訓練된 사람은 필요할 때 필요한 行動을 하는 사람이다. 말을 해야 할 때 잠잠 한다면 또한 잠잠해야 할 때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沈黙과 孤獨의 訓練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沈黙과 孤獨을 잘 지키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는 남들을 움직이고 다루는데 말에 의존하는 習慣이 붙어 있다. 沈黙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다스린다. 沈黙은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고독 안에서 하나님의 沈黙을 體驗하게 되고 우리 마음이 內的 沈黙에 이르게 된다.
㉡ 沈黙과 孤獨으로 가는 節次
심령의 孤獨에 대해 아무리 敬虔하게 말한다 해도 體驗 속에서 어떻게든 작용하지 못한다면 訓練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訓練에 成功하기 위해서는 이론을 지나 現場으로 가야 한다.
孤獨으로 가는 첫 段階는 우선 우리의 삶 속에 섞인 “작은 고독”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잠에서 깨기 전, 잠자리에서 맞는 저 이른 아침은 孤獨을 생각할 수 있고,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 한 잔의 커피의 孤獨을 생각할 수 있고, 식사 전 祈禱하는 대신 모두 함께 잠깐 동안 沈黙할 수도 있다.
그밖에 沈黙과 孤獨을 위하여 설계된 “한적한 處所”를 發見하거나 개발 할 수 있다. 가족들이 누구나 혼자 들어가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조그만 祈禱室을 설계할 수도 있고, 그럴 경우가 못되는 경우는 공원의 어느 지점, 敎會, 기도소 심지어 조용한 곳이라면 倉庫도 좋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도록 해 본다. 이것은 律法이 아니라 하나의 實驗으로서 행해 보는 것이다. 무력함과 아울러 의사소통의 手段으로 지나치게 말에만 의존해 왔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平信徒의 경우에 홀로 있는 時間은 하루 20-30분, 한 달에 1일, 일년에 3-4일을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매일 하나님과 만남의 時間을 갖고 그 날 그 날을 하나님께 바치며, 하나님의 뜻을 받으며, 하나님의 능력의 臨齋를 懇求하며, 그분과 交際를 나누는 것은 하루 24時間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榮光으로 가득 채우려는 것이다.
(3) 共同體 訓練
共同體 靈性 訓練은 그리스도교 信仰 共同體의 삶을 사회 속에서 나타내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주는 것에 特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敎會는 그리스도를 信仰으로 告白하고 그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共同體이다. 어느 한 개인의 信仰에 의해서 이 共同體는 형성된 것이 아니다. 각자마다의 信仰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共同體적 信仰은 世上 또는 社會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불의한 社會에 대하여는 당연한 責任意識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信仰 共同體는 禮拜를 통하여 서로의 信仰을 確認하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共同體로서의 覺悟를 새롭게 한다.
① 禮拜訓練
基督敎의 禮拜란 그 낱말적 의미가 말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를 경배하며 그를 섬기는 봉사적 行爲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禮拜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하여 良心을 살리는 것이며, 마음에 하나님의 眞理를 공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의하여 더러운 상상을 정결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여는 것이고, 하나님의 目的에 의지를 바치는 것이다.
基督敎의 禮拜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요,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 禮拜는 철저히 하나님 한 분을 대상으로 드려져야 하며 한 신앙共同體가 함께 모여서 禮拜를 드릴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榮光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禮拜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救援 事件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곧 “救援의 축제” 그 자체를 말한다.쉽게 풀어서 말하면 禮拜는 그 救援事件의 반복이며 그것에 대한 人間들의 응답행위이다. 그 救援 事件은 福音 宣布와 성만찬으로서 반복된다. 이 반복되는 救援事件에 대한 人間의 응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感謝와 찬양과 悔改와 결단이다. 人間의 사고나 理解의 테두리를 초월한 聖靈 안에서 親交에 참여함이요, 그래도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宣布요, 그 神秘에 열린 몸짓을 가지는 것이 곧 禮拜이다. 禮拜訓練은 하나님의 臨齋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自身을 드리며,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함께 하나님의 使命을 받으며, 하나님의 교역을 위하여 함께 世上으로 나가 世上을 救援하는 하나님의 創造사역에 동참하는 訓練이다.
禮拜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信仰生活 가운데 가장 優先權을 두어야 한다. 禮拜 없는 섬김은 偶像崇拜가 되기 쉽다. 진정한 禮拜의 인도자는 살아 계신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禮拜를 통하여 영원히 거룩하신 분 앞에서 變化를 받게 된다. 禮拜의 시작이 거룩한 기대이듯이 그 끝은 거룩한 順從이다. 그리고 진정한 禮拜는 개인적인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어디서나 모든 악의 세력을 거부하도록 한다.
진정으로 禮拜를 인도하시는 분은 長老나 牧師나 傳道師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은 禮拜 중에 임재하셔서 聖徒들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며 그들의 禮拜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牧會者는 다만 그 분을 도와서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할뿐이다.
예수님을 도와서 禮拜를 보조해 주는 牧會者는 自身의 사역을 다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準備를 해야 한다.
첫째, 靈的인 生命力을 갖추어야 한다. 靈的인 生命力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면 聖靈께서 임재하셔서 역사 하시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禮拜를 技術的으로 이끌어 가는 개인적인 資質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資質은 牧會者가 끊임없는 自己 개발을 통하여 修練해야 한다.
셋째, 禮拜의 본질적인 의미를 항상 理解하고 실천해야 한다. 敎會 信仰 共同體가 하나님의 救援使役에 참여하는 기쁨의 祝祭라는 것을 銘心해야 한다.
넷째, 訓練된 솜씨가 있어야 한다. 牧會者는 禮拜를 인도하는 自己 自身과 그리고 自身이 하고 있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의식해서는 안 된다.
牧會者는 이런 資質을 갖추고 精神的으로 무장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祈禱하고 訓練에 임해야 한다. 또한 牧會者는 禮拜를 인도함에 있어서 모든 聖徒들이 진정으로 禮拜에 들어올 수 있도록 人間 주도적인 모든 活動을 잠잠케 해야 한다. 이것은 곧 聖靈의 活動이 우리의 生活方式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육신의 活動을 잠잠케 하는 것이다.
牧會者는 실제적으로 禮拜를 인도하는 동시에 말씀을 宣布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러나 보다 정작 自身은 禮拜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禮拜에서의 기쁨과 은총을 맘껏 누리지 못할 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타성에 젖기 쉽다.
牧會者가 禮拜를 그저 規則的인 날짜에 해야 할 통과 의례쯤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은 그 牧會者의 靈性이 바닥이 드러났다는 직접적인 證據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 牧會者는 언제나 自身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禮拜라는 것을 인식하고 날마다 그 분 앞에 산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靈的인 交際를 生活化해야 할 것이다.
② 告白과 容恕의 訓練
告白과 容恕 訓練은 하나님 안에서 나와 너를 새롭게 하는 共同體 형성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따라서 이러한 訓練은 家庭, 직장, 敎會, 그리고 모든 共同體에서 일어날 수 있으며, 自身의 치유와 함께 共同體의 성숙을 도모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罪의 告白을 받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罪를 容恕 할 수 있는 權威를 부여받았다. “너희가 누구 罪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 罪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이러한 特權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성 알폰소스 루구오리는 “훌륭한 告白을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는 첫째, 양심의 성찰, 둘째, 슬픔, 셋째는, 罪를 멀리하겠다는 결단을 말한다. 良心의 성찰이란? 하나님과 말씀 그리고 聖靈의 역사 아래 우리의 이웃에 대한 잘못들을 具體的으로 깨닫는 것이다. 어떤 이는 우리가 지은 罪에 대하여 十誡命을 바탕으로 自身을 성찰하는 方法을 말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은 靈性的, 精神的인 疾病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 영성적 아픔(병) : 교만, 인색, 색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 등
- 精神的 아픔(병) : 도벽, 거짓말, 허영심, 의타심, 위선, 사치병, 自己과장, 自己비하, 과다흡연, 알콜 중독 등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 앞에서 우리 自身의 마음의 문을 여는 그 체험 가운데서 우리의 具體的인 罪를 告白하고 철할 覺悟를 해야 한다.
告白을 잘 하려면, “슬픔”이 따라야 한다. 이 슬픔은 罪를 범하였다는데 대한 혐오이며, 이웃에게 傷處를 준 것에 대한 아픔이며 아버지의 마음을 거스렸다는 데 대한 깊은 뉘우침이다. 이 슬픔은 하나의 감정의 問題이기 이전에 하나의 의지의 問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罪를 멀리하겠다는 決斷이다. 告白訓練을 하면서 거룩한 삶을 사모하고 속된 삶을 미워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祈禱 드리며 결단하는 것이다. 그 후 우리는 형제에 容恕를 구한다. 그때 반드시 둘 사이에 하나님이 계심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牧會者는 날마다 自身의 罪를 하나님께 告白하고 容恕를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自身도 누군가를 容恕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自身이 먼저 하나님께 自身의 罪에 대하여 상세히 告白하고 容恕를 經驗하게 되어야 남의 告白을 들어주고 容恕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③ 參與의 訓練
基督敎 靈性은 초월하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체험되고 확장된 우리의 인식과 삶이 具體的인 역사현장에서 行動實踐을 통해 具體化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과 사회에 대한 參與와 봉사의 장이 되는 것이다.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敎會는 世上의 救援에 참여하고 유일한 빛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敎會는 빛을 비추고 행복과 救援에의 길을 제시한다. 敎會를 지켜봄으로서 世上 사람들은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길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牧會者는 특별히 하나님의 子女들을 靈的으로 격려하고 지도하며, 모든 聖徒들을 충분히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에 召命을 받은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즉 영혼을 돌보는 일은 牧會者의 생애와 전체업무에 부차적인 일이 아니라 바로 牧會者의 전 생애에 걸친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만일 牧會者가 사회의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게 觀心을 갖기보다는 敎會 자체 내의 소모적인 일에만 몰두한다면 이것은 世上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敎會 共同體의 사명을 방기하는 牧會者의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基督敎의 靈性은 초월과 내재가 만나는 자리에서 考察되어야 한다. 즉 基督敎 靈性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力動的 관계성 속에서 수직적인 靈性과 수평적인 靈性이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크리스챤의 靈性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떠나서는 온전한 靈性으로서의 제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다른 말로 表現한다면 진정한 사회 참여는 올바른 靈性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말과 같다. 즉 이것은 自己 부정과 더 나아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영혼의 어둔 밤을 사회 참여의 行動 속에서 經驗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가능성 앞에서 나의 가능성이 죽지 않고는 진정한 사회 참여를 할 수 없다. 즉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는 經驗이 없이는 이웃을 향한 개방적 사랑의 仔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參與와 봉사에 임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基督敎的인 人間理解의 바탕 위에서 베풀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참여와 봉사에 대한 基督敎的인 理解와 지침 몇 가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여기에 대한 확실한 理解가 설 것이다.
첫째, 參與와 봉사는 根本的으로 自己의 의와 優越省을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人格과 能力을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봉사와 참여는 예언자적인 그리스도인의 임무이다. 이것은 억압하는 사회구조, 비인간화시키는 사회적 장애 요소에 과감히 투쟁하려고 할 뿐 아니라 自己를 비하시키고 무기력에 빠진 자들의 心靈을 깨우고 悔改시켜 스스로에 대한 존중을 回復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려는 勞力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셋째, 基督敎의 참여와 봉사는 전애주의와 온정주의적인 實踐을 지향한다. 그리스도인의 구제는 의존심이나 게으름을 조장하기보다는 自身感을 격려해 주고 스스로 일어 설 수 있게 하는 靈的인 目的이 분명해야 한다.
넷째, 가난한 자나 결함이 있는 자에 대한 참여와 봉사는 “결함의 아픔에 수치의 아픔을 더하는 식”으로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참여와 봉사는 빈곤에 이르는 罪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이러한 罪들을 부당하게 취하는 이득, 교만, 탐식, 술 취함, 태만, 놀기 좋아함, 이기주의 등이다.
여섯째, 가난한 자들은 自身들의 缺乏을 채우기 위하여 불법적인 手段들을 사용할 유혹을 받는다. 이들이 이러한 試驗과 싸워 진실한 人格 위에 삶을 세우도록 도우는 것이 참여와 奉事의 일이다.
일곱째, 參與와 봉사의 삶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貧困과 淸貧의 삶을 요구한다. 이러한 삶은 예수님의 삶이요, 버림의 삶이요, 罪인들을 위하여 十字架를 지는 삶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현존을 發見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行爲는 곧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敬虔한 靈的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웃과 사랑하게 되는 能力은 다시 원수를 사랑하고 善으로 惡을 갚는 참 사랑의 역사를 나타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와 人間의 生命을 경시하는 세대에 變化의 바람을 일으키기를 바란다면 제일 첫 걸음으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도전일 것이다.
제3장. 牧會者의 靈性이 會衆들에게 미치는 影響
1. 사도 바울의 靈性과 그 影響
(1). 바울의 靈性生活
바울의 주요 觀心은 自身의 靈性 관리와 福音 傳播였다. 이 점은 “내가 내 몸을 쳐 僕從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自己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9:27)고 한 그의 서신에 나타난 告白 때문이다. 바울은 福音 傳播를 위해 生命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고(행20:24), 동시에 自身의 몸을 쳐 僕從하게 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 그가 믿고 傳播한 原則들을 自身의 生涯에 適用시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의 勞力은 헛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惡에 대한 그의 투쟁은 生命이 지속하는 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바울은 世俗的 慾望이 靈的 熱心을 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自身을 항상 엄격히 경계해야 할 필요를 깨닫고 그의 말과 行實과 情慾 이 모든 것을 항상 하나님의 聖靈의 지배 아래 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自身의 態度와 마음가짐은 그대로 젊은 牧師인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주는 勸勉에도 나타나는데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傳播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1-2)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敬虔에 이르기를 練習하라 肉體의 練習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敬虔은 범사에 유익하니 今生과 내생에 約束이 있느니라”(딤전 4:7-8)가 그것이다.
①. 바울의 聖經硏究
바울이 靈的 訓練으로 聖經硏究를 꾸준히 한 것을 짐작케 하는 성경상 대목은 젊은 牧師 디모데에게 주는 便紙의 내용에서 “네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4:13)와 “네가 眞理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自身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라”(딤후2:15)는 勸勉을 한 대목이다. 그리고 그가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감옥에 갇혀 있는 내게로 오라고 당부하면서 가죽종이에 쓴 책을 가져올 것을 특별히 부탁한 점(딤후4:9, 13)은 그가 평생 해온 聖經硏究의 일단을 보게 한다.
또한 바울이 본래 유대인으로서, 후에 랍비로서 또한 바리새인으로서 구약에 익숙한 專門家였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고린도 교인에게 편지하면서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手巾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4)고 한 것을 보아서 바울은 平素에 익숙한 舊約을 읽고 硏究하면서 그리스도 中心的으로 파악하려는 態度가 분명했다. 바울은 靈的 訓練의 方便으로 繼續的으로 聖經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發見하고 그를 신실히 믿었고 예수께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聖經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生水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聖靈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6:37-39)고 한 보증대로 계속해서 聖靈을 받아 靈性이 향상되고 충만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聖靈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에 근거해서 現代의 牧師들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벗으로 삼아 말씀을 들으므로 언제나 그리스도의 聖靈이 그 위에 降臨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그를 통하여 일하도록 할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②. 바울의 祈禱生活
리챠드 포스터는 “祈禱는 우리들로 하여금 靈的 生活의 최전방에 서게 한다”고 했고, E. M. 바운즈(E. M. Bounds, 1836-1913)는 그의 책 ‘祈禱의 能力’에서 캐리 형제단의 글을 인용하여 “祈禱(은밀하고, 간절하고, 믿음 있는 祈禱)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敬虔의 밑뿌리에 있다”고 기록함으로 靈的 향상과 성숙을 위한 靈的 訓練으로서 祈禱生活의 위치와 重要性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쉬지 말고 祈禱하라”(살전 5:1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祈禱와 懇求로 너희 구할 것을 感謝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모든 祈禱와 懇求로 하되 무시로 聖靈 안에서 祈禱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聖徒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엡 6:18-19), “祈禱를 항상 힘쓰고 祈禱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患難 중에 참으며 祈禱에 항상 힘쓰며”(롬12:12)라는 내용으로 편지함으로 데살로니가 敎會, 빌립보 敎會, 에베소 敎會, 골로새 敎會, 로마 敎會를 향해 時間的으로 항상, 內容的으로 모든 것을 위하여 祈禱할 것을 命令했다.
또한 自身의 祈禱 生活에 대해서도 “내가 그의 아들의 福音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證人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祈禱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10),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祈禱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살전1:2),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祈禱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役事를 能力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1:11), “이로써 듣는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祈禱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智慧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1:9),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祈禱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몬1:4)의 告白을 보아 여러 敎會와 개인을 위해 쉬지 않는 祈禱 生活을 함으로 靈的으로 성숙되어 있고 祈禱生活에 따른 자연스런 結果인 聖靈 충만을 體驗한 것이었다(눅1:13)
화이트(White)는 바울의 이런 면에 대해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가 열렬하고 효력있는 祈禱로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렸음을 안다. 聖靈은 그에게 임하셨고 그의 영혼은 활력 있는 하늘의 불을 느꼈으며 그는 신령한 사물을 신령한 것으로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③. 바울의 靈性에 대한 觀心
바울은 그의 聖經硏究, 祈禱生活과 더불어 聖靈의 필요를 절실히 느꼈으므로 靈的으로 향상되고 成熟해지며 充滿해졌다. 이는 그가 꾸준히 실행한 訓練의 한 方便이었다. “만일 모든 사람이 원하였다면 모두 聖靈의 充滿을 받았을 것이다. 聖靈의 필요가 중요한 問題로 여김을 받지 않은 곳은 어디서든지 靈的 결핍, 靈的 암흑, 靈的 타락과 죽음이 보인다. 작은 問題들에 주목을 집중시킬 때에는 언제든지 敎會의 成長과 번영을 위하여 필요되고 거기서 연속하여 다른 모든 祝福을 가져올 하나님의 能力이 무한히 풍부히 제공되었을지라도 부족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能力을 받을 수 있는 方法인데도 왜 우리는 聖靈의 膳物을 渴望하지 아니하는가? 왜 우리는 聖靈의 膳物에 대하여 말하지도 이것을 위하여 祈禱하지도, 이것에 관하여 說敎하지도 아니하는가”라고 말한 화이트의 지적과 같이 바울은 깊은 觀心을 가지고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12:1), “너희는 더욱 큰 恩賜를 思慕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聖靈의 충만을 받으라”,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聖靈을 받았느냐...”(행19:2), “너희가 하나님의 聖殿인 것과 하나님의 聖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聖靈을 좇아 행하라”(갈5:16), “하나님의 聖靈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4:30), “하나님의 聖靈으로 봉사하라”(빌3:3) 등에 나타난 것처럼 命令하고 勸勉하고 質問하고 呼訴하였다.
바울은 이 진지한 觀心에 따라 自身이 먼저 聖靈 充滿하였고 自身의 牧會 現場도 함께 聖靈 充滿하였다. 한 개인의 觀心은 한 개인을 만들 듯이 당연히 개인의 靈的인 觀心은 그 개인을 靈的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바울의 높은 靈的인 觀心은 그를 靈的인 사람으로 만들어 갔듯이 現代 牧師들도 함께 끊임없이 靈的인 觀心을 訓練함으로 靈的인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바울의 아테네 아레오바고 說敎(행17:16-34)
사도 바울은 다메섹 事件이후 주께로부터 받은 그의 牧會的 使命을 감당하게 될 때에 그는 무엇보다도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사도 바울의 公衆說敎는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牧會書信은 說敎를 命令한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의 說敎가 9편이 실려 있다. 즉, 비시디아 안디옥 會堂에서 행한 說敎(행13:16-41)로부터 시작하여 로마에서 그의 우거하는 집에 온 이들에게 행한 說敎(행28:25-28)에 이르기까지의 9편이며, 그 대상은 에베소 長老들, 흩어진 유대인들, 산헤드린 의원, 유대인 관원인 아그립바 왕,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루스드라의 농민, 스토익과 에피큐리안 철학자,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그 외에 그의 便紙를 받은 모든 자들, 이처럼 그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믿든지, 안 믿든지 福音을 전했다.
使徒행전에 나타난 그의 說敎의 目的은 單純하다. 예수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紹介하고, 迎接하도록 재촉한 것이 그의 說敎의 일차적인 目的이다. 또한 이미 救贖함을 받은 무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게 하고 그의 삶 全體가 말씀 속에 머물도록 敎訓하는 일이었다. 또한 生活 現場 속에서 일어난 모든 問題로부터 苦痛 받는 무리들을 激勵하고 위로해 주는 일이었다. 더 나아가서 그는 聖徒들이 世上으로 가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확장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說敎를 통하여 現場化 시키는 일이었다.
사도행전 17:16~34절의 아레오바고 說敎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아테네 傳道 사역은 바울의 끝없는 熱情과 知識을 중시하는 그들의 性向에 맞춘 효율적 傳道 方法의 시도를 보여준다. 아테네는 헬레니즘의 발원지요, 中心地였다. 이들은 특히 哲學을 위시한 각종 이론과학에 심취하여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世俗的 虛榮과 知的 驕慢에 잡힌 아테네에서 바울의 福音 傳道는 이러한 아테네 사람들의 모습을 분개하며 그들에게 福音을 理解시키기 위해 哲學的이고 사변적인 論爭을 벌이는 부분(22-25절)과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밝히는 부분(26-28절) 하나님과 人間과의 관계를 밝히는 부분(26-28절), 그리고 悔改에의 促求(29-31절)를 말하지만 결국 그들의 지적 驕慢으로 인해 復活을 인정하지 않는 헬라인들의 배타적인 態度로 말미암아 소수의 사람에게만 感動을 주어 福音을 받아들이게 하였을 뿐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던 부분(32-34절)으로 되어져 있다.
그러나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바울의 說敎는 어떠한 結果를 가져왔는가? 會衆들은 復活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이들은 조롱하였으며 또 다른 이들은 그것에 대하여 바울의 말을 다시 듣겠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바울의 說敎에 대해 비웃음도 있었으나, 信者가 된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가 있었고 다마리라는 婦人도 있었다(행17:34).
아테네 사람들이 조롱을 시작하거나 또는 결단을 미루기 시작한 것은 바울이 그의 說敎에서 도덕적인 適用을 이끌어낼 때였다. 그가 그들의 단 옆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논하거나 基督敎的 思想을 宣布할 때에는, 비록 基督敎的 思想이 그들의 哲學과 상충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묵묵히 들었다. 그러나 그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悔改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公儀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행17:30-31)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조롱했다. 하나님께서 人間들에게 道德性을 요구하실 때 종종 그들은 이론적인(지적인) 구실을 내세우면서 그 요구를 거부한다. 바울의 단과 신관에 대하여 논하면서 만일 “이제는 … 悔改하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그의 說敎는 실패작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悔改하라”는 요구에 직면할 때 조롱하기도 하고 結團을 미루기도 한다.
또 다른 結果는 무엇인가? 디오누시오(Dionysius)와 다마리(Damatus) 및 그 외 몇 사람들이 믿었다. 敎會史를 볼 때 우리는 아테네에서 큰 熱媒를 맺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세기에 아테네의 敎會에서는 부플리우스(Publius), 콰드라투스(Quadratus),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등 감독과 殉敎者가 나왔다. 제3세기에 아테네의 敎會는 평안을 누렸으며 순수했다. 제4세기에 아테네의 基督敎 學校들은 바실(Basil)과 그레고리(Gregory)를 배출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의 사역을 마치고 떠났지만 그는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를 남겼다.
2.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靈性과 그 影響
(1). 사상적 背景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핵심 思想을 살펴보면 人間의 정황은 과거나 오늘이나 同一하게 죄성을 가지고 사람의 問題는 罪의 특정한 발현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보며 그리하여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기 전에 그 自身의 필요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따라서 說敎者의 첫째 任務는 罪의 교리를 說敎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福音은 항상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人間 정황에 대한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확신은 그를 十字架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해결책으로 인도한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반역한 채로 남아 있는 한 모든 비참함이 늘어날 것이고 어떤 人間적인 방책도 무서운 실패로 끝난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人間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한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기에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바울과 함께 福音을 자랑한다. 셋째로 이것에 대한 解決책으로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예수그리스도의 十字架에 못 박히심만이 能力을 발휘하는 유일한 것으로 믿고 人間의 問題를 다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智慧만 아니라 하나님의 能力의 必要性을 强調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思想의 核心은 하나님은 단지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직접 개입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에 가장 影響力을 끼친 것은 聖經이다. 그에게 聖經은 生命의 떡이요 그의 영혼의 만나로서 그를 형성하고 그의 삶에 지침서가 된 것은 17세 때부터 聖經을 가까이 하여 그 생애에 적어도 新約 110번, 구약 55번 이상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에게 가장 많은 影響을 주 사상은 淸敎徒 思想이다. 그는 1917년 웨스트민스터 淸敎徒 硏究會에서 행한 ‘淸敎徒主義와 그 기원’이라는 연설에서 “저는 웨일즈의 칼빈파 감리敎會에서 자라났고, 그들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925년 우연히 리차드 백스터(Baxter, Richard , 1615.11.12~1691.12.8)의 최신판 傳記를 읽은 후부터 청교도와 청교도 저작에 대한 觀心과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사역 전체가 이것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솔직히 告白하는 바입니다.”라고 告白했다.
(2). 說敎의 靈的 원리
모든 說敎者는 影響력 있는 說敎를 하기 원하며, 自己 說敎를 듣고 理解하며 信仰과 僕從으로써 응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이런 효과를 위하여 의존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 중에는 自己의 예리한 지성을 의존할 지도 모른다. 또는 自己의 능변이나 달변 등의 여러 가지 才能을 자랑하고 의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才能과 恩賜들을 잘 관리하고 發展시켜야 할 責任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才能으로도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이 問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說敎자에게 한마디 質問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說敎하기 전에 이 聖靈의 기름 부으심과 感動을 기다리며 간구합니까? 說敎者에게 이 보다 더 철저하고 근본적인 시금석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聖靈께서 說敎者에게 특별한 方式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說敎者가 사람의 勞力과 열심을 초월하여 聖靈에 의해 쓰임을 당해 그를 통해 聖靈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위치에서 說敎사역을 수행하도록 주어지는 하나님의 能力과 權能입니다.”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聖靈의 感動이 없이는 아무런 能力도 가질 수 없고, 說敎한 것은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한다고 聖靈의 能力을 强調하고 있다. 이와 같은 信念을 가지고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說敎의 仔細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는 매 주일마다 講壇에 오른다.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나는 여러 이유 때문에 아무 것도 바라지 못할 때가 있음을 솔직히 告白한다. 그러나 갑자기 能力이 주어진다. 그렇게 役事하시는 하나님께 感謝한다.”
說敎者가 最善을 다하지만 能力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能力을 하나님께 달라고 渴望하는 祈禱를 하면서 그 분과 黙想하며 함께 時間을 보낼 때 이런 役事를 나타낼 수 있다고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말한다. 스펄전(Spurgen,1834-1892)은 한때 ‘聖靈의 도움이 없이 70년을 說敎하는 것 보다 聖靈의 能力으로 여섯 마디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다.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說敎者가 聖靈의 能力을 간절히 갈망하고, 聖靈에게 僕從하고, 聖靈의 인도하심이 맡길 때 聖靈께서 모든 것에 넘치도록 豊盛하게 役事하신다고 말하면서 聖靈이 充滿한 靈的 說敎를 强調하고 있다.
(3). 說敎의 影響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說敎의 사람이요 前導者이다. 그는 20세기의 청교도 후예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敎會에서 주로 말씀을 외쳤다.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의 說敎 時間에는 聖靈께서 임재하시사 會衆들을 움직였다.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는 전적으로 獻身한 설교가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위대하게 들어 써 많은 影響을 그 時代에 남겼다.
1929년 당시 그리피스 존스(Jones)라는 특파원의 「영혼의 의사」라는 題目의 글을 통해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說敎의 影響을 엿 볼 수가 있다. “그 당시 영혼의 의사는 웨일즈 전역에 걸쳐 수 천명식이나 메시지를 듣도록 끌어들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카드놀이도 없고, 바자회도 없으며, 世上적인 유흥도 없었다.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영혼 救援을 위한 熱情은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의사의 說敎는 心腸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그래서 그 중에 어떤 이들은 說敎를 듣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모두 說敎대로 살아야 하지만 너무나 두려워, 그것은 힘든 일이고, 철저한 改革이라고 생각해’”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說敎는 그야말로 ‘큰 能力의 感動’으로 그들에게 임했던 것이다.
敎會 傳道부는 전례 없는 교인 수의 增加 때문에 하나의 奇蹟 같은 狀況에 직면했다. 1930년대 초에 샌드필드의 새로운 現想은 사람들 사이에 相互 의존적이고, 놀라울 정도의 和睦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初信者 들이었지만 그들 각자의 신분이나 위치를 떠나서 즉석에서 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의 흥미는 매 주마다 달라지는 敎會의 成長하는 모습과 恩惠의 證據들을 보는데 있었다.
엘리세우스 호웰즈는 샌드필드의 祈禱會와 交際 모임에 참석한 후 이렇게 소감을 新聞에 기재하였다. “이 모임들은 時間이 길기로 유명하였다. 그 모임들 가운데 두 時間 이내에 마치는 모임이 있는 적이 없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아주 추운 겨울이었지만 적어도 200명 이상 出席하였다. 그들의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 그것이었다. 때때로 15내지 20그룹으로 나누어 罪에 대해서 苦悶하고 僞善을 벗어버리는 律法主義者들에게 恩惠가 充滿한 모습이 역력히 보였다.” 牧者와 양의 結合된 모습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으며, 샌드필드의 베들레헴 敎會의 자랑은 교우들 全體의 하나 됨에 있었다. 어떤 背景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出身을 超越하여 한가족이 되었다. 사도행전 4장 32절이 이론이 아니라 실재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에 샌드필드와 初代 예루살렘 敎會는 너무도 흡사했다.
사회학자 캐더우드는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라는 說敎者에게서 영감을 받아 그 책을 썼던 것이다. 그는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說敎를 통하여 도전과 지도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모든 것의 제일 첫째 자리에 놓았으며, 그런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世界에 대한 것을 더욱 事實的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언급해야 할 사실은 이천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禮拜堂에 운집하여 禮拜와 說敎에 열중한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젊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聖經과 노트를 들고 그 敎會堂으로 모여들었다. 1,200명의 사람들이 매 금요일 모여들었다. 聖經學校에 참석하였다. 주목할 만한 일은 대다수의 젊은 남녀들이었다는 것이다. 의학도들이나 다른 학문을 硏究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단순하고 강해적인 聖經 공부에 끌려 웨스트민스터 敎會堂으로 오곤 하였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說敎는 18, 19세기의 스펄전(Spurgen), 라일(J.C.Ryle) 등에 이어서 20세기의 대 說敎가로 오늘의 影響力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韓國과 世界에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저술들이 소개되자 眞理에 목마른 聖徒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마시듯 그를 통해서 전승된 眞理의 샘물을 마셨다. 그의 「牧師의 說敎」, 「산상 說敎集」, 「로마서 강해 시리즈」, 「에베소서 강해 시리즈」등은 眞理와 靈鑑과 聖潔과 敬畏의 바다로서 모든 사람을 해갈시켰고, 비 眞理에 오도되어 중독된 영혼들에게 완전하고 시원한 해독제가 되고 있다.
Ⅲ. 結 論
지금까지 본 論文은 牧會者로서 牧師의 靈性과 그 影響에 대하여 硏究하면서. 牧會者의 靈性에 대한 理解와, 牧會者의 靈性과 靈性訓練, 그리고 牧會者의 靈性이 會衆들에게 미치는 影響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본 硏究의 전체적인 要約과 結論을 제시하려고 한다.
제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牧會者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자로서, 牧會者는 하나님 앞에서 自身을 완전한 말씀의 도구로 獻身하고, 聖靈께서 牧會者 개인의 靈性을 도구화하여 사용할 때 說敎에 있어서 이것이 適用되어 會衆들에게 影響을 줄 수 있다.
또한 ‘說敎’라는 사역이 “敎會에서 인정받은 그리스도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해석하고 宣布하는 것으로서 聖靈의 能力으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中心으로부터 忠誠되게 하는 것”이라고 할 때, 說敎者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主權과 榮光이 復興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勞力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說敎者는 自身의 生活을 돌아보아 하나님의 거룩에 同參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님과의 交際 속에서 하나님의 恩惠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說敎者에게 第一 중요한 것은 說敎의 내용보다 說敎者 自身을 準備하는 것으로 自身이 말씀에 順從하려는 자세를 분명하게 가질 때 그러한 삶이 會衆들에게 影響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說敎者는 하나님과 交際하는 靈的인 生活을 계속하기 위해서 祈禱하지 않는 罪를 범치 말아야 한다(삼상 12:23). 이와 더불어서 說敎가 ‘하나님의 말씀’위에 基礎를 둔 것이라고 할 때, 說敎者는 聖經 말씀을 읽고 硏究하는데 게으름을 피워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칼빈(Calvin)은 聖經이 없이는 모두 誤謬에 빠진다고 했다. 따라서 說敎者는 聖經과 一心同體가 되어야 하고 最大의 敬畏心을 가지고 聖經을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準備의 과정이 중요하지만 聖靈의 도우심이 없다면 효과적인 說敎의 사역은 기대할 수 없다. 聖靈은 說敎를 準備할 때, 宣布할 때, 그리고 說敎를 듣는 會衆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說敎를 準備하는 과정에서는 說敎者에게 知識과 지혜를 주시며, 그의 祈禱를 통해 역사하시고, 말씀을 宣布하는 과정에서는 說敎者에게 靈的인 자유와 敬虔함을 주신다. 會衆들을 향하여는 罪를 깨닫게 하시며 赦罪의 確信을 주시고, 信者들이 의에 대해서 알게 하므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2장에서는 牧會者의 靈性과 靈性 訓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靈性이란 人間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성품이 아니라 聖靈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形象이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交際의 과정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靈性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福音을 들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새 生命을 얻은 사람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예수와 聖靈 안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며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牧師에게 있어서 이러한 靈性이 중요한 것은 牧師의 靈性은 會衆들이 보고, 體驗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會衆들은 牧師에게서 自身들이 지향하는 모델을 보고 싶어한다. 따라서 牧師가 예수님의 삶의 方式을 따르고, 예수의 정신을 本받지 않는다면 會衆들은 牧師를 통하여 어떠한 가르침도 받기를 거부할 것이다. 이러한 靈性을 위하여 牧師는 끊임없는 靈性 訓練을 해야 한다. 牧會者는 內面적으로 祈禱와 말씀黙想과 큐티를 訓練하며 외면적으로는 單純化 訓練과 예수님처럼 섬기는 訓練과 順從生活 訓練을 해야하며 沈黙과 孤獨 訓練도 끊임없이 해야하며 더 나아가서 共同體訓練을 많이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참예하는 禮拜訓練과, 告白과 容恕의 訓練과, 參與의 訓練을 계속하여 하나님의 形象을 덧입고 온전한데 나아가야 한다
3장에서는 牧會者의 靈性이 會衆들에게 미치는 影響으로서 사도 바울의 靈性과 그의 아테네 아레오바고 說敎와, 로이드 존스(Llion T. Jones)의 靈性있는 說敎의 影響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사도 바울은 그 自身이 福音 전파를 위해서 自己의 生命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고(행20:24), 동시에 自身의 몸을 쳐 僕從시키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 그가 믿고 전파한 原則들은 自身의 생애에서 適用시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의 勞力이 헛된 것이라(고전 9:27)는 것을 깨달았기에 聖經 硏究와 祈禱生活을 그의 일생동안 계속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聖靈의 필요를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靈的으로 향상되고 성숙해지며 充滿해졌고, 이 진지한 觀心에 따라 自身이 먼저 聖靈에 充滿했고 그의 牧會 현장도 함께 聖靈에 充滿했다. 한 개인의 觀心이 한 개인을 만들어 가듯이 바울의 높은 靈的인 觀心은 바울을 靈的인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이처럼 現代의 牧會者들도 끊임없이 靈的인 觀心을 가지고 自身을 訓練함으로 靈的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靈的으로 무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狀況에 따라서는(바울의 아테네 아레오바고 說敎) 回心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비난의 소리도 들을 수 있지만, 그 속에서 役事하시는 聖靈은 반드시 믿음을 이어받을 사람을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위대한 信仰의 指導者로, 또한 福音 傳播者로 세우시는 분이시기에 눈에 보이는 나타나는 結果만 가지고 平價할 것이 아니라 窮極的인 하나님의 나라의 擴張을 위해서 언제나 準備해야 할 것이다.
영국과 美國의 경우처럼 계몽주의, 합리주의 哲學과 科學의 發達로 인한 人間들의 교만, 방탕, 술 취함, 부정과 부패, 인권 유린, 교육의 부재 등이 만연한 사회도 靈的으로 무장 準備된 牧師들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도구로 삼아 잠자던 믿는 자들을 悔改시키며, 그들로 분연히 일어나 敎會를 聖潔하게 하고 社會를 改革하며 宣敎의 열기를 擴張시키고 奴隸制度 등을 폐지시키며, 개인 영혼에 대한 觀心을 집중시키게 하는 놀라운 奇籍의 役事들이 많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일들은 비단 基督敎 종주국들뿐만 아니라 宣敎地에서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물론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지만 훌륭히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졌던 靈的으로 깨어있고, 自身들을 訓練시켜 충분히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자들로 準備되어 있었던 많은 靈性있는 牧師들이 있었다고 할 때 오늘을 이끌고, 時代를 향해 말씀을 準備하며 宣布하는 說敎者로서 牧師들이 自身의 靈的 狀況에 觀心을 가지고 꾸준히 自身을 準備하여 하나님께서 신자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루시길 원하는 뜻을 修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험악한 時代를 감당할 牧會者들은 靈性에 觀心을 가지고 繼續的으로 靈性 訓練에 땀을 흘리며 이 時代에 病들고 苦渴되어 쓰러져 가는 心靈들을 소생시키며 주의 온전하신 形象을 이루어 나가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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