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한국장로교에 영향을 미친 미국장로교와 선교사 성향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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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한국장로교에 영향을 미친 미국장로교와 선교사 성향 분석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에 대한 논쟁들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 기획(6)

2012년 05월 01일 (화) 22:02:49 교회와신앙


김홍만 / 국제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1. 들어가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총회 설립이 100주년을 맞았다. 이러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에 대한 논고들도 계속 있어왔다.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정체성을 보다 분명하게 하기위한 시도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논고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다.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이 이식된 것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장로교회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남장로교 선교부, 호주장로교 선교부와 카나다 장로교회 선교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북장로교 선교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북장로교 선교부의 선교사들의 숫자가 다른 장로교 선교부보다 많았으며, 그것에 따른 그들의 사역의 범위가 넓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에 대한 논거를 위해서는 북장로교의 선교부에 대한 신학과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렇게 북장로교의 신학을 살피는 대부분의 논거들은 자연스럽게 그 주장과 관점에 따라서 몇 가지 관점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뿌리가 근본주의라는 주장이 있으며, 보수적 복음주의의 관점이 있다. 그리고 미국장로교회의 19세기 역사에서 중요한 신학적 사건인 구학파와 신학파의 신학의 관점에서 분석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북장로교의 선교부 총무이었던 브라운의 언급이래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뿌리를 청교도 개혁신학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이러한 논거들 가운데는 같은 신학교의 교수들로부터 여러 차례 논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렇게 여러 관점으로 보며 때로는 서로 충돌되기도 하는 이유들이 있다. 논술자들의 자신의 신학에 가장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논문들에서 사용하는 역사적 자료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자료들 (original resources)올 사용하지 않거나 무시하여서 그 당시 역사와 신학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따라서 본 논문은 지금까지 논의되어온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뿌리에 대한 논문들을 원자료와 이미 발표된 논문들을 비교함으로 평가하고, 논문들 가운데 객관적인 관점에 대한 것에 더욱 역사적 자료들을 추가해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에 대해서 분명히 하고자 한다.

2. 근본주의

김재준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형성되었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신학은 미국의 근본주의라고 말하였다. 그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의 교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교리 제일주의를 강조하였는데,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믿으려면 무엇보다도 교리, 신조를 시인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본주의 교리로서 ①예수의 동정녀 탄생 ②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 ③피로써의 속죄 ④성경의 절대무오성이라고 하였다. 김재준은 선교사들의 신학을 근본주의로 보았으며, 그리고 그들의 신학적 태도는 일방적이었으며, 이것은 근시안적이었다는 것을 개탄하는 것이다.

이러한 김재준의 신학적 평가에 대해서 서정운은 근본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의 이면에는 한국장로교회를 편협적이며 고집스럽고 반계몽적이고 교파주의로 돌리려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정운은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하여 활동한 이후부터 사용한 것으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더욱이 “초기 선교사들의 진정한 관심은 신학사상 논쟁에 있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의 근본적인 관심은 한국의 복음화”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 을 근본주의로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하였다. 사실 미국에서의 근본주의 운동은 1909년부터 The Fundamentals 라고 하는 소책자를 발행하면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5개의 교리를 변호하였는데, 미국장로교는 1910년과 1916년, 그리고 1923년의 총회에서 5개의 교리를 근본적인 교리라고 하였다. 따라서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1910년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는데, 그 신학을 근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시간 순서상 맞지 않는다.

3. 보수주의적 복음주의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보수주의적 복음주의로 해석하는 신학자들은 여럿이 있다. 먼저 간하배를 들 수 있다. 간하배는 보수주의라는 단어를 자유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구체적으로 간하배는 그래샴 메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에서 사용하는 개념에서의 보수주의를 말한다. 따라서 그는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을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하였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천년 견해를 없어서는 안 될 진리로 여겼다고 주장하였다. 간하배는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보수적이면서 한편으로 복음적이었는데, 선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열렬한 복음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간하배는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보수주의적이면서 복음적이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로서 네비우스 원리를 채택한 것을 말한다. 네비우스 원리는 한국 복음화를 위한 신학적 방법이었으며, 이것의 중점은 자립도 아니며 자치도 아니고, 성경을 모든 기독교인적 사업의 근본을 삼고 신자의 마음에 적용될 수 있는 성경반의 세밀한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네비우스 원리는 성경에 대해서 중심적으로 강조를 하고 있으며, 한국복음화를 목표로 두고 있기 때문에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적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간하배는 한국장로교회 신학의 뿌리가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로서 사무엘 마펫의 말을 인용하여서, 한국선교의 복음주의적 메시지와 성경을 굳게 믿으며,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에 대해서 보수주의적 복음주의로 보는 견해는 홍치모에 의해서 계속되어졌다. 홍치모도 간하배와 같이 메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에 근거해서 보수주의적 복음주의 견해를 갖는데, “복음주의라는 광의적인 용어 속에는 근본주의 신학사상과 칼빈주의 신학사상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 근거로서 간하배와 같이 브라운 총무의 말을 언급한다. 그들이 청교도적인 선교사들이었으며, 춤이나 담배, 카드놀이를 죄악시 하였고, 전천년설을 믿었으며,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을 이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홍치모는 간하배와 같이 네비우스 원리와 사무엘 마펫의 말을 들어서, 전도와 교회 육성책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과 확고부동한 성경관이 바로 보수주의적 복음주의라고 하였다. 홍치모의 보수주의적 복음주의 견해는 칼빈주의와 근본주의 사상이 내포된 것이라고 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간하배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더욱이 논문의 결론에서는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은 칼빈주의적이었다기 보다는 근본주의적인 것이 더 짙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보수주의적 복음주의 견해는 박용규에 의해서 계속 이어졌다. 박용규는 앞에서의 선행 연구와 같이 브라운 박사의 말을 인용하고, 마펫 선교사의 50년 선교대회 보고서도 역시 인용하며 또한 곽안련 선교사의 보고를 인용하여서 신학에 있어서 현저하게 보수적인 관점을 견지하였다고 하였다. 간하배의 말을 언급하면서 보수적 복음주의 입장이었다는 것을 말하며, 덧붙여서 민경배의 말을 인용하여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었다고 하였다. 박용규는 간하배, 홍치모가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다시 강조하였다. 그러나 선행 연구들보다 부연하여 설명한 것은 개혁파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개혁파 복음주의에 대한 설명에서는 선교사들이 구학파의 칼빈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서있었던 자들이며, 그러나 한편으로 부흥운동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시 구학파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구학파의 전통에 있으면서 19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19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으로서 무디와 그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된 학생자원운동이라고 하였다.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에 대한 견해로서 마지막으로 김의환을 들 수 있다.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보수주의적이면서 복음주의자들인 증거로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을 견지하였던 증거로서 1907년 한국장로교회가 12신조를 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의환은 김영재의 주장을 따라서 12신조는 칼빈주의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적 영향 때문에 개혁주의적 내용이 다분히 희석되어 있고, 이것은 19세기 말에 미국 장로교회가 복음주의와 부흥운동의 힘을 입어서 수정 칼빈주의 경향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적 복음주의라는 주장들 속에서 몇 가지 정리될 수 있는 신학사상들이 있다. 우선 보수주의라는 단어를 그래샴 메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개념을 가지고 온다. 이것은 근본주의에 대한 논쟁과 같이 신학사조를 거슬러 올라가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자유주의 신학 사조에 대항하면서 선교사역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복음주의에 대한 용어이다. 장로교 선교사들의 19세기 복음주의 운동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서정운의 주장을 볼 때,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개혁신학과 칼빈주의가 희석된 보수적 복음주의로 보기에는 피상적이다. 그는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은 워필드와 핫지형 신학(Warfield-Hodge type of Theology)로 대변되는 프린스톤 신학(the Princeton Theology)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서정운의 주장과 같이 초기 한국 장로교회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신학교들과 그것의 신학에 따라서 단지 보수적 복음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교사들의 복음을 전하였던 방식이라든가 초기 한국장로교회에서 사용하였던 전도책자들과 초기 한국장로교회 신자들의 신앙고백을 보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장로교회의 회심에 대한 기록과 그것에 대한 신학은 매우 독특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민경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차재명 (1887~1947) 편찬의 朝鮮예수교長老會史記 상편에 첫날 교회 개종의 양상을 단편적으로 기록하되, 왈 〈속죄설을得聞> 했다든가, <성령의 감화>, <信心發生>, 〈성경전심연구>, <心中에 이상한 감동>, <진리의 약해>, <從而歸主>, 혹은 <그 죄를 자복하고 통곡> 운운의 글이 있을 따름이라, 그 개심의 경로나 영적 변화의 심오한 체험 같은 것을 분석하기가 쉽지 아니하다.”

민경배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언급했던 내용들은 청교도의 회심신학이다. 즉 미국 장로교회에서 신학적 전통으로 내려온 신학용어들이다. 특히 구학파와 프린스톤 신학과 직접적 관련이 있으며, 개혁신학의 언약신학에 근거한 용어들이다. 민경배의 언급은 한국 초기장로교회의 전도 책자들과 한국초기장로교회의 신자들의 신앙고백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한국장로교회에서 사용하였던 많은 전도 책자들 가운데서, 이러한 회심에 대해서 다룬 대표적인 베스트셀러들이 있었는데, 중생지도(1893), 장원량 우상론(1894), 천로역정(1895년)이었다. 이러한 전도 책자들은 그 분량에 있어서도 적지 않았고 신학적으로도 심오한 것들이다.

북장로교의 선교부 주축으로 발행하였던 그리스도 신문에서는 그 당시 한국장로교회 신자들의 신앙고백이 넘치고 있다. 이러한 전도책자와 신앙고백은 19세기 말에 유행하였던 복음주의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즉, 보수주의적 복음주의 견해에서 두드러진 신학적 성격은 한국초기장로교회에 뚜렷하게 두러난 청교도의 개혁신학과 언약신학이 무시되거나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 개혁신학과 그 당시의 복음주의가 뚜렷하게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사업적으로 연합은 하였지만, 자신들의 신학적 특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장로교회가 사용하였던 전도 책자들과 장로교회가 사용하였던 전도 책자들이 분명하게 구별되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보수적 복음주의인 근거로 내세우는 네비우스 원리는 어떤 것인가? 간하배가 주장한 것처럼 네비우스 원리가 자립이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네비우스 원리의 중심은 교회 회원권을 설명하는 것에 있어서 위선자들을 배제하고, 진정한 회심한 자들로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회심자들을 얻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예를 든다면, “낡은 제도로는 그가 설교자로서 참된지 거짓된지 혹은 교회 회원으로서 참된지 거짓된지 판단하기 어렵다”이다. 더욱이 네비우스 원리 속에서 학습, 세례반 제도는 단지 신앙고백이 있다고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구제척인 회심의 증거를 철저히 살피는 것으로서 이것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그 당시 복음주의와는 뚜렷하게 구별시켜 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사무엘 마펫의 언급이 단지 보수적 복음주의인가? 마펫의 언급을 단지 보수주의적 복음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며, 피상적인 것이다. 그가 한국교회에서 설교의 중요성을 말하고, 복음 전도를 강조하였지만 이렇게 강조할 때 언제든지 함께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령의 나타남 혹은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로 인하여 보수주의적 복음주의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마펫은 말씀 위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즉, 성령의 회심의 역사에 강조를 두었다. 50주년 기념대회에서도 이러한 회심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리고 함께 통역하였던 라부열은 마포 삼열의 선교원리에 대해서 7가지로 설명하였다. 특히 그것의 7번째에 대한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성령의 감화에 의지하여 개인의 중생과 교회의 지도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성령의 중생 역사를 강조한 것으로서 소위 복음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여기서 얻는 결론은 한국교회의 복음전도는 성령의 나타나심을 추구하는 즉, 중생과 회심에 초점을 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개혁신학이며, 언약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단지 복음주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더욱이 19세기의 미국 장로교회 역사 문맥에서 볼 때 복음주의(Evangelicalism)은 찰스 피니(Charles Finney)로 시작한 것이며, 복음주의라는 것은 신학파에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라는 단어보다는 신학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한국장로교회는 찰스 피니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방식들을 배격하였다. 1890년 번역되어 출판된 <성교촬리>라는 전도책자의 마지막 부분은 믿겠다고 하는 결심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리의 도를 더욱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교회의 성경공부로 나가라는 권면으로 끝나고 있 다. 그리고 1898년 l월 27일자 그리스도 신문에는 성급하게 믿겠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우선 성경을 보고 그 뜻을 깊히 깨달아야 하며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성령의 감화가 있기까지 기다리는 것과 반드시 성령의 감화가 있어야 회개와 믿음이 있다고 하는 주장들은 찰스 피니의 주장과 정반대의 것들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행하였던 복음 전도에 초점을 두고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복음주의 혹은 신학파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4. 신학파와 신학파적인 구학파

사실 보수주의와 복음주의라는 말을 가지고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 한철하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규명하기 위해서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로 돌아가서 구학파와 신학파의 신학적 차이를 살피고,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구파와 신파의 신학적 차이들을 살핀다. 한철하는 한국장로교회의 신앙이 신파(New Side)와 신학파(New School)의 경향이 짙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한국교회가 부흥주의를 귀중히 여겼던 일이나 목사의 교육수준문제도 반드시 선교사의 경우와 같은 요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태도 등이 미국에 있어서의 구학파 전통과는 너무나 어긋난다”고 하였다. 한철하는 구파가 부흥을 반대하였으며, 구학파는 목사들의 교육수준을 대학교육 수준으로 요구하였기 때문에 한국장로교회는 구파와 구학파의 신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철하의 지적 가운데 맞는 부분도 있으며 틀린 부분도 있다. 우선 구파가 부흥을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목사들의 교육수준에 대한 것으로 구학파를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구학파가 아니라 구파의 주장이다. 구학파와 신학파의 대립에서의 논쟁주제들 가운데 목사의 학력수준에 대한 것은 없다. 신파와 구파의 분열 속에서 논쟁되어진 주제이다. 더욱이 한철하는 신파와 신학파를 연속성을 가지고 연결하였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구파는 부흥을 반대하면서 청교도의 언약신학과 회심신학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구파는 한철하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통적 칼빈주의가 아니다. 더욱이 부흥을 지지했던 신파는 뉴저지대학을 세웠다. 1758년 재결합되었지만 신파가 우세하였다. 그리고 1812년 뉴저지 대학 내에 프린스톤 신학교를 세웠다. 즉 구학파의 뿌리는 신파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신학파와 구학 파의 분열에 있어서 교리적 논쟁은 구파와 신파의 논쟁과 전혀 다른 것이다. 구학파는 신파의 신학적 유산 가운데 칼빈주의를 견지하였으나 신학파는 펠라기우스 사상에 기울어진 신학이었다. 따라서 구학파의 출신 선교사들이 다수 이었던 한국장로교회를 신학파로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보수주의적 복음주의라고 한국교회의 신학적 뿌리로 설명하였던 흥치모와 박용규는 그 용어의 한계성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구학파와 신학파의 신학적 차이를 살피고 그것을 다시 적용하는 시도를 한다. 왜냐하면, 홍치모와 박용규 모두가 말하였던 것과 같이 한국 장로교회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거의 구학파 출신들이다. 북장로교 선교 25주년을 맞는 1909년 당시 안수 받은 선교사는 40명이었다. 그리고 40명 가운데 16명은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이었으며, 맥코믹신학교 출신은 11명이었다. 구체적으로 1888년에서부터 1902년까지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14명이었다. 그런데 프린스톤신학교와 맥코믹신학교는 구학파의 중요한 신학교들이었다. 따라서 구학파와 신학파의 신학적 특징을 살피면서 홍치모는 신학파적인 구학파라고 말하였으며, 박용규는 구학파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홍치모는 구학파의 특징을 “심오한 칼빈주의 신학과 철저한 장로교회 정치 원리를 실천한 것을 강조한 것”에 있다고 하고, 신학파의 특징을 “부흥운동과 전도에 역점을 두었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로 볼 때 구학파에만 둔다는 것은 일방적 해석이며, 구학파와 신학파의 전통이 동시에 조화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이호우는 한국장로교회의 형성에 공헌을 한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의 사역과 그 신학의 특정을 설명하였다. 이호우는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구학파적이지만 신학파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서 한국에서 사역하였던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진보주의적 사상을 추구하는 교수들과 구학파의 신학을 변호하는 교수들 사이에서 수업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맥코믹신학교에 있을 때 무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맥코믹신학교의 전통적 입장인 구학파의 신학의 영향을 더 받았지만 그들은 신학파의 전도열정과 부흥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호우는 곽안련이 1925년 집필한 목회학에서 찰스 피니의 부흥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언급하였다.

홍철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 작업을 위해서 미국장로교의 구학파와 신학파의 논쟁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특히 구학파와 신학파의 분열의 이슈에서 부흥운동에 대해서 신학적 차이를 설명한다. 부흥운동에 대한 찬반 문제였다. 즉 2차대각성운동이라는 거대한 부흥운동에 대하여 구학파측은 반대하였고, 신학파측은 찬성하였다고 보았다. 2차대각성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부흥사들의 설교의 신학적 성향은 알미니우스주의이며 이런 면에서 1차대각성운동과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더욱이 홍철은 찰스 피니의 신학을 지지한 신학파의 신학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찰스 피니의 신학도 테일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펠라기우스주의였다”라고 이안 머레이의 말을 인용하였다. 신학파의 이러한 신학을 “복음전도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시대 조류에 맞게 칼빈주의를 수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렇게 미국장로교회의 신학파와 구학파의 신학적 차이를 설명한 후에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는 신학파와 구학파가 혼합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의 근거로는 구학파가 부흥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찰스 피니의 부흥 방법을 반대한 것이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학파 출신의 선교사들의 부흥론이 신학파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상의 논의들 속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언급할 때, 비록 선교사들의 출신이 구학파의 신학교들 출신이지만 신학파적인 특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할 때, 그들의 신학적 전제는 구학파는 부흥을 반대하거나 혹은 단지 피니의 방식을 반대한 반면에 신학파는 부흥에 적극적이었으며, 또한 부흥을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구학파의 신학에 대해서 역사적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 판단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먼저 구학파의 신학은 철두철미하게 신파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초대 교장인 알치발드 알렉산더는 Log College 출신의 사역자들의 신학과 활동에 대해서 구학파의 출판부를 통해서 책을 출판하였다. 즉, 구학파는 분명히 개혁신학에 근거하고 있는 부흥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오늘날 구학파가 부흥을 반대하였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그러한 오해들이 있었는데, 이것에 대해서 존 로드(John Lord)는 “구학파 장로교에 대해서 널리 퍼져있는 인상들은 그들의 신앙의 부흥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학파와 신학파의 차이는 부흥의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참된 증거들이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구학파의 부흥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구학파의 신학자들의 글들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프린스톤 신학교 초대교장인 알치발드 알렉산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부흥에는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는데, 교리적 가르침이 반드시 있어야하며, 그것위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반드시 죄인을 질책하고 책망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죄를 깨닫는 정도가 깊어져서 죄인들이 겸손하여지며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고, 결국 그리스도 외에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과 확신에 차는 것이 크게 일어나는데, 이것은 마지막 날의 영광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회심의 역사가 성령의 쏟아부어주심으로 인하여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였으며,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소나기로 교회를 향하여 물을 공급하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사무엘 밀러 (Samuel Miller) 역시 부흥에 대한 신학적 서술을 하였다.

“신앙부흥이 일어나는 때에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여러 은혜들을 받는다. 죄 가운데 오랫동안 빠져 있던 많은 사람들이 각성을 받아 자기들의 죄인 됨과 자기들의 처한 위험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또한 전에는 영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의 실재들이 계시되기 시작한다. …부흥의 기간이야말로 모든 경건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시온의 부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마다 그런 기간을 얼마나 소원하는지요?”

한편으로 밀러는 제 l차영적대각성의 신파의 테넨트 사람들과 에드워즈를 언급하면서 그것은 복음의 승리이며, 부흥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나라로 인도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뉴저지 대학의 학장인 얘쉬벨 그린은 1차 영적대각성의 지도자들이며 신파의 지도자들이었던 뉴저지 대학의 학장들이었던 조나단 디킨슨(Jonathan Dickinson), 아론 버 (Aron Burr),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사무엘 데비스(Samuel Davis), 사무엘 핀리 (Samuel Finley)를 언급하면서 그들의 사역 가운데 일어난 부흥은 매우 교리적이며, 복음의 위대한 교리들을 강조하는 가운데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부흥에는 진정한 복음의 교리들의 강론이 있는데, 그것은 중생의 진정한 성질, 믿음, 회개에 대한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부흥은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여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알치발드 알렉산더는 1844년 부흥을 경험하면서, 부흥에 대해서 찰스 피니의 방법과 같은 것이 없이 은혜의 소낙비를 경험하였다고 말하였다. 즉 신학파와 구학파로 분리된 후 프린스톤 신학교는 찰스 피니와 신학을 분명하게 반대하였지만 개혁신학과 에드워즈 신학에 근거를 둔 전통적인 부흥에 대해서 지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1857~58년의 대부흥 가운데 구학파의 수백 명의 목회자들은 1857년 12월 l일 피프버그에서 부흥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고, 나중에 신시내티에서 한 번 더 회의를 가졌는데, 이것은 구학파가 부흥에 대한 신학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더욱이 대부흥 가운데 부흥에 대해서 구학파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책자가 제임스 알렉산더(James Alexander)에 의해서 출판되어지는데, 제 l차영적대각성의 신파의 테넨트 사람들과 에드워즈를 언급하면서 신파의 신학에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찰스 핫지 역시 부흥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다루었다. 부흥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서 이것은 많은 영혼을 회심시키는 것인데, 성령의 사역에 일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교회의 경건이 증진된다고 하였다. 더욱이 핫지는 종교개혁도 부흥의 종류이었으며, 제 l차영적대각성의 신파에 속해있는 테넨트 사람들 (Log College 졸업자들)과 조나단 에드워즈를 언급하면서 이들이 부흥의 표준이며,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으로 한국교회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신학적 언급에서 항상 언급되는 것이 무디와 학생자원운동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신학적 성격을 복음주의 (Evangelicals)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을 복음주의로 해석하는 이유는 미국장로교의 구학파의 신학보다는 신학파의 신학에 가까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무디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들의 지도를 받았다. 실제로 무디는 1876년 맥코쉬 (McCosh)와 찰스 핫지의 초청으로 프린스톤 신학교에 와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구학파의 신학 아래에서 사역을 하였던 것이다. 무디와 피니 방식은 구별이 되어진다. 무디는 인간의 죄의 부패성과 중생이 오직 하나님의 역사인 것과 신자의 구원은 확실하며 취소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무디는 많은 대중에게 압력을 주는 방식을 피하였으며, 갈망의 화석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회심자의 숫자를 세는 것을 반대하였다. 따라서 무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신학파적이거나 혹은 복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러한 논고들 가운데서 드러난 것은 구학파의 신학을 오해하고 신학파적 구학파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에서의 구학파 출신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부흥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보면 구학파의 부흥에 대한 신학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존 네비우스는 구학파가 가지고 있는 개혁신학에 근거한 부흥의 원리를 선교 방법에서 설명 하였다. 네비우스는 선교사가 자신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쏟아부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사역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역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기를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의 수고를 기꺼이 축복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모습이 어디에나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중국인에게 잘 적응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드러난 말씀을 믿고 거룩한 성령의 능력을 분명히 의지하고 새로운 열심과 신실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해나가자. 또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자.”

선교사들의 사역위에 하나님의 축복은 성령의 역사로 유효하게 하는 것인데, 성령의 부어주심이 비상한 추수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전형적인 개혁신학의 부흥론이다. 비록 곽안련이 피니 방식의 부흥론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역시 맥코믹신학교 출신이며 곽안련 보다 훨씬 이전에 입국하여 한국장로교회의 형성과 평양대부흥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사무엘 마펫은 개혁신학에 근거한 부흥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북장로교 선교 25주년 기념보고에서 마펫은 평양대부흥에 대해서 보고를 하였는데, 그것에서 사용한 용어들은 개혁신학에 근거한 부흥에 대한 서술이다.

“1906년 가을에 기도의 영이 선교사들 자신들 위에 오셔서 다가오는 겨울의 성경연구반 위에 보다 깊고 부요한 축복을 위해 간절하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1907년 l월 성경훈련 반의 마지막 날들 동안 저녁에 전도 집회에서 성령의 임재의 공적 나타나심이 있었다. 이러한 집회들에서 사람들은 죄의 무서운 결과들을 깨달았으며, 죄가 죄 없는 그리스도를 고통으로 몰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영은 자신을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내셨다. 이것은 교회를 정화시켰으며 그리고 수천의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헌신과 새로운 능력과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마펫의 보고서로부터 기도의 영, 성령의 공적인 나타나심, 죄의 질책과 책망, 교회의 정화 및 회심의 체험들이라는 용어는 전형적인 미국 장로교회의 구학파의 부흥에 대한 용어와 서술들이다. 더욱이 마펫은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일어난 부흥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스스로의 지혜로우신 계획들과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한국 사람들 위에 쏟아부어주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은 정해진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부흥이 만들어진다는 찰스 피니의 부흥론과는 거리가 먼 서술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성령을 쏟아부어주신다고 하는 개혁신학에 근거 한 부흥의 서술이다.

사무엘 마펫 뿐만 아니다. 같은 맥코믹신학교 출신으로서 곽안련 보다 앞서서 입국하여 사역하였던 윌리엄 베어드(1891년 2월 입국), 이길함(1892년 9월 입국), 소안론(1892 년 11월 입국), 번하이셀(1900년 10월 입국)은 구학파의 부흥신학을 견지하고 있었던 선교사들이다. 윌리엄 베어드는 성령을 예외적으로 쏟아부어주시는 부흥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흥의 목적은 숫자적인 교회 성장이 아니라 각각의 영혼이 회심하며 강력한 한국교회가 설립되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길함 선교사는 평양에 일어난 부흥에 대한 보고에서 1857~1858년의 뉴욕에서 시작한 대부흥 때처럼 매일 정오 기도모임을 시작하였는데 기도제목은 대부흥을 위한 것이었으며, 특별히 1907년 정월에 있는 겨울 성경공부에 성령의 쏟아부어주 심이 있기를 기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구학파의 부흥신학에 근거한 서술이다. 소안론 선교사의 평양대부흥에 대한 보고도 구학파의 부흥신학의 서술이다.

“죄의 질책과 그에 따른 고백들이 첫째 날부터 시작해서 매 저녁마다 가면 갈수록 숫자적으로나 그 질책의 정도가 증가되었습니다. 그들의 체험은 l월에 있었던 여자 성경공부반의 성령의 나타나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울고 흐느끼며 가슴을 치고 또 어느 때는 죄의 무게로 인해 마루 바닥에 가라앉은 것과 같아 그 심령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온 회중이 흐느끼면서 자비를 내려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소안론 선교사는 성령의 역사를 자세히 기술하였는데, 이것 역시 개혁신학에 근거한 부흥에 대한 설명이다.

“샅샅이 비추는 진리의 빛이 성령의 능력 아래서 사람들의 영혼 위에 비출 때 그의 진정한 특성으로 죄가 보이게 됩니다. 성령의 조명 아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너무 더럽고 몰락한, 그리고 무가치한 죄인임을 깨달으면서 자비를 구하기 위해 울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번하이젤 선교사도 부흥에 있어서 성령의 죄에 대한 책망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개혁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평양대부흥에서의 죄의 책망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들의 죄는 십계명에 있는 모든 죄들이었다. 그들은 그 죄들을 수년간 양심에 큰 부담을 가진 채 가지고 다니다가 결국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하고 그 짐을 제거하였다.”

이렇게 사무엘 마펫을 비롯한 여러 멕코믹신학교 출신들뿐만 아니라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부흥에 대한 서술들은 구학파의 부흥에 대한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1898년 북장로교 해외선교 연례보고서에는 부흥이 임박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그 힘과 범위에 있어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복된 에너지가 보다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다. 복음의 효과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이며 빠르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 안에서 보여 지고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더 든다면 1902년 서울의 도티 선교사는 서울 여자성경공부반에서 부흥을 위한 기도를 하도록 가르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추수의 주인 되신 주께서는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백성들을 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도시의 하나님의 자녀들, 즉 지도자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또한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수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도록,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방해받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부흥을 위한 기도는 미국장로교회가 제2차영적대각성 직전에 교회를 향해서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고 목회서신으로 보낸 내용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논거로부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는 진정한 부흥을 추구하고 그것에 대한 뚜렷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구학파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구학파의 부흥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구학파 신학은 진정한 부흥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복음의 교리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성령의 쏟아부어주심으로 부흥이 일어난다고 하는 구학파의 뚜렷한 개혁신학이 한국교회의 신학적 뿌리이다.

5. 청교도 신학 유산아래에서의 개혁신학

브라운 총무의 “나라를 개방한 이후 처음 25년간의 전형적인 선교사는 퓨리탄형의 사람이었다”라는 언급이래로 초기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청교도 개혁신학이라는 주장은 계속 되어 왔다. 이렇게 청교도 신학에 뿌리를 둔 것으로 말하였던 브라운 총무는 실제적으로 청교도 신학의 특징으로서 회개와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회심의 증거들과 교회 회원권(Church Membership)을 말하였다. 그 다음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로서 청교도 개혁신학을 주장하는 이는 박형룡을 들 수 있다. 청교도 개혁신학인 증거로서 ①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신념 ②하나님 주권에의 확신 ③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 ④성실한 실천 ⑤천년기전 재림론을 언급하였다. 이렇게 5가지 특징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지만, 역사적인 증거로서는 한국장로교회의 독노회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채택한 것을 증거로 들었다. 물론 박형룡이 언급한 5가지 특징 중 5번째로 언급한 천년기전 재림설은 청교도 신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와 전도의 메시지와 방법과 주일 성수는 분명히 청교도 신학으로 온 것이며, 미국 장로교회의 구학파의 신학적 전통이다. 특히 2번째 항목과 4번째 항목은 청교도 전도로서 설명하는데 다음과 같다.

“한국초대 장로교회가 연합 부흥전도보다도 각종 사경회에 치중한 것은 죄인의 회심을 성령의 주권적 유효적 소명에 기대하는 청교도 전도의 방식에 따름인 듯하였다. …초기 청교도형의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메시지를 가지고 교회와 학교에서, 도시와 촌락에서 말과 글로, 행위와 사업으로 전도하는 것을 전무하는 복음의 사자들이었으니 그들이 전하는 신학이야말로 옛 청교도의 확신 있는 전도의 실천신학이었다.”

그리고 안식일 성수에 대해서는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안식일을 성수하며 기도와 예배의 경건생활에 치중하였다”고 하였다. 박형룡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에 대해서 특별히 전도와 주일 성수에 초점을 두면서 청교도 개혁신학이라고 주장한 것은 맞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장로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전도책자 가운데 천로역정은 청교도의 직접적인 작품이었다. 전도책자들 가운데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이었던 <장원량우상론>은 청교도 전도의 메시지와 방법들이 그대로 전수된 것이었다. 물론 주일 성수의 강조가 청교도 신학으로부터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박형룡에 이어서 김인수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청교도 개혁신학으로 본다. 그는 한국형성에 영향을 준 청교도 운동으로서 ①성경제일주의 정신 ②사회개혁의 정신 ③안식일 성수 ④결혼의 순수성 강조 ⑤금주운동 ⑥금연운동 ⑦도박과 노름 금지 ⑧노예 사용금지 ⑨엄격한 세례교인 자격 ⑩국가와 교회의 분립정신을 들었다. 김인수는 선교사들의 신학으로 인한 한국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신학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서 그 당시의 역사적 사료들을 인용함으로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것들 모두 다 청교도 개혁신학에 근거한 것은 맞다.

또한 청교도 개혁신학을 존 네비우스 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존 네비우스는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으로서 신학교에서 받은 청교도 신학을 자신의 선교원리에 적용한 것이다. 네비우스 원리는 우선 교회에 위선자들이 많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때로는 선교사역 가운데 세상적 이득을 위해서 교회에 오는 자들이 있으며 또한 기회주의자들이 외형적으로 열심히 봉사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이 교회에 많아지게 되면 결국 경건의 능력을 잃게 되는데 바로 그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 네비우스 원리 가운데 세례를 받기 전에 교인들로 훈련하고 결국 구원의 은혜를 확인하는 학습제도가 있다. 이것은 청교도의 교회회원권(church membership) 원리에서 온 것이다. 더욱이 네비우스 원리는 참된 신앙으로 교회가 세워지며 확장되어지는 원리를 강조한다. 여기에서도 청교도의 구원의 은혜가 눈에 드러나는 가견적 성도들(visible saints)의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네비우스 원리가 한국장로교회의 형성에 미친 영향 가운데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주일성수에 대한 강조이다. 이것은 청교도의 율법에 대한 태도가 그대로 담겨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안식일을 유대인의 관계로서가 모든 곳의 연령을 불문한 모든 이의 관례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다른 십계명과 마찬가지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즉 하루를 거룩히 지키는 것은 다른 계명에 부과된 의무와 마찬가지로 십계명의 실행을 재촉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십계명은 만민의 영원한 법을 하나님께서 포고하고 공포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폐기할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교회의 성장과 관계가 있고 교회의 영적상태의 척도라고 주장한다.”

주일 성수를 강조한 것은 결국 도덕법을 강조하는 것이며, 그것은 아직 죄인인 자들에게 죄를 깨우치고, 회심한 자에게는 거룩하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원리를 네비우스가 설명하였다. 그리고 주일 성수가 교회의 영적 상태를 측량하는 기능은 청교도 신학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 장로교회(구학파)의 독특한 이해이다.

그렇다면 북장로교의 선교사들의 이러한 청교도 개혁신학이 어떠한 경로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형성하였는지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미국장로교회의 역사를 확인해보아야 한다. 맥코믹신학교의 교회사 교수이었던 레오나드 트린터루드(Leonard Trinterud)는 미국장로교회가 독노회를 구성할 때 청교도 신학으로 출발하였으며 청교도 신학은 영적대각성 당시에 Log College와 신파에 있었다고 논증하였다. 이러한 청교도 신학은 19세기에 미국장로교회 내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청교도 신학을 구학파가 계속 이어서 강조하였다. 그 증거로는 1838년 구학파로 분리된 직후 교단 출판부를 구성하고 교회들로 필독서를 추천하였는데, 특히 전도문서들로서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의 작품과 조셉 얼레인(Joseph Alleine)의 작품을 사용하는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추가의 증거로서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으로서 해외선교사로 나가는 경우 그들의 짐에는 청교도 작품들이 들어 있었는데, 존 오웬 (John Owen) 스테판 촬녹(Stephen Charnock) 존 플라블(John Flavel)의 작품들이었으며, 이 가운데 존 플라블의 <은혜의 수단>이라는 작품이 특히 필수적이었다. 존 네비우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실제적인 신앙을 다룬 청교도들의 작품인 리차드 박스터의 <성도의 안식>과 필립 닷드리지(Phillip Doddridge)의 <영혼의 일어남>과 <회심의 과정>, 그리고 존 플라블의 작품들을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긴다”고 네비우스는 말하였다. 따라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형성하였던 미국 북장로교회는 청교도 신학을 독노회가 구성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영적대각성들을 통하여 계속 유지될 수 있었고 그것은 구학파가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또한 선교사들로 인하여 전수될 수 있었다.

6. 나가는 말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에 대한 논쟁들 가운데서 근본주의라는 평가는 미국 장로교내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과는 시간적으로 거리가 있다. 그리고 단순히 근본적인 교리의 강조와 태도로 인하여 근본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으로는 초기 한국장로교회에서 일어났던 부흥과 같은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보수적 복음주의로 평가하는 것 역시 용어의 정밀성이 없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장로교회가 어떻게 교리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그 당시의 전도책자들과 그리스도 신문 지상에 실린 한국장로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들은 개혁신학과 언약신학의 특징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보수적 복음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신학적 모호성을 더하는 것이다.

또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부흥에 대한 태도와 부흥이 일어났던 한국교회의 특징들로부터 신학파 혹은 신학파적인 구학파라고 평가한 것은 구학파와 신학파의 신학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며, 특별히 구학파의 부흥에 대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내려진 평가이다. 부흥에 대한 선교사들의 신학은 외적증거와 내적증거 모두 구학파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부흥에 대한 태도로 인하여 신학파 혹은 신학파적 구학파라는 평가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청교도로 본 것은 브라운 박사를 비롯해서 정확한 평가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청교도 신학이 구학파와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청교도 신학과 부흥과의 신학적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미약하였다. 그것은 미국 장로교회가 청교도 신학으로 더불어 출발하였으며, 신파가 청교도 신학의 회심을 강조하면서 부흥을 경험하였다. 부흥을 경험한 신파는 뉴저지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812년 뉴저지 대학 내에 프린스톤 신학교를 세웠으며 프린스톤 신학교는 청교도 신학과 함께 신파의 부흥신학을 함께 전수 받아서 구학파의 신학적 전통을 구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구학파 출신의 선교사들은 청교도 신학과 개혁신학에 근거한 복음전도와 부흥을 한국장로교회에 이식하였던 것이다. 결론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는 미국장로교회의 구학파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