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고신의 합동과 환원 과정 - 한상동 비판
1960....................".........."............
....................
88)양 낙 흥*
1. 머리말
대한예수교장로회 세칭..고신측" 사람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한국 그
리스도인들은 현재의..고신" 교단이 1950년대 초 한국 장로교 제1차 분열
로 말미암아 생긴 교회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칭..합동측"이라는 교
단은 1959년 한국 장로교 제2차 분열의 결과로 생긴 두 교단1) 가운데 하
나인..승동측"의 후신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으
로부터 약 반 세기 전인 1960년..승동측"과..고신측"은 교단을 연합하여
한 교단을 이룬 적이 있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소위..합동" 교단은 1963
년까지 약 3년 간 존속되었다. 그러다가 그것은 1963년 구..고신측"의 상
당 부분이 재분리해 나감으로..합동측"이라는 속칭은 재분리해 나간 구
..고신측"의 상당 부분을 제외한 남은 그룹, 즉 구..승동측" 전부와 구..고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88)
1) 현재의..통합"측 장로교단의 전신인..연동측", 그리고 현재의..합동측" 장로
교단의 모태인..승동측"이 그것들이다.
1. 머리말
2. 합동의 배경
3. 합동의 성사
4. 고려신학교 복구와 고신측의 “환원”
5. “환원”에 대한 반대
6. 맺음말
140 연구논문
신측" 잔류파로 이루어진 집단에게 돌아갔다. 재분리해 나간 구..고신측"
상당 부분으로 이루어진 그룹은..고신측"이라는 명칭을 다시 찾아 사용하
면서 자신들이..합동" 이전의 고신측 교단을 그대로 회복했다는 의미에서
그 재분리가..환원"이라고 주장했다.
피상적이고 파편적이거나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진술들을 제외하고 이
‘합동"과 재분리의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자세한 진상은 거의 반 세기동
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2) 양측 다 별로 명예롭지 못한 과거를 가능한
한 기억하거나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한국교
회사에서 무려 3년이나 지속되었던 그..합동"의 사실은 대다수 한국 장로
교인들에 의해 마치 역사 속에 아예 존재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우리는 어언 반 세기 전에 있었던 이..합동"과..환원" 사건을 어
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허순길은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 자체를 부정
적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승동측 지도자들이 “정략적인 성향”의 소유자들
이며3) “신앙생활의 실상”이 고신측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신학과 교리가 같은 것은 사실이나 “삶이 다르며” 승동측의 “삶이 신앙고
백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양측이 교회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불가
능”하다는 것이었다.4) 허순길은 또..합동"으로부터 구 고신측의 “환원”을
축하한다. 교회 분열을 통해 또 하나의 장로교단이 형성된 것을 그는 주의
자비하신 섭리로 해석한다. 환원은 하나님께서 “교회[고신]와 [고려]신학교
를 없애려는 어두운 세력”을 이기시고 참된 교회와 가장 위대한 신학교를
다시 찾으신 사건이라 기뻐하는 것이다.5) 한편 남영환은 “합동은 바람직”
했고6) 환원도 그러했다는 입장에 서 있다. 구 고신측의 “환원”이 한국의
2) 이것에 대한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다소 일방적이기는 하나, 남영환,..한국
교회와 교단 : 고신 교단사를 중심으로.., 소망사, 1988, pp. 483~502 ; 허순
길,..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 1946~1996..,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1996, pp.
139~170이 있고, 주로 회의록, 선언문, 취지문, 해명서 등을 수집해 놓은 자료
집 성격의 것으로, 정규오,..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 교회사(상).., 한
국복음문서선교회, 1994, pp. 261~285가 있다.
3) 허순길,..50년사.., p. 145. 그러나..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를 통해 승동측
과의 합동에 임하는 고신측의 동기가 처음부터 불순했다는 사실을 가장 선
명하게 지적한 사람은 바로 허박사 자신이었다.
4) 허순길, 위의 책, p. 145ㆍ149ㆍ156.
5) 허순길, 위의 책, p. 170.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1
개혁주의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것이다.7) 과연 구
고신측의 “환원”은 빛의 세력의 회복이요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의 소생이
었는가? 아울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양 교단은 왜..합동"을
생각하게 되었는가? 구 고신측의 상당 부분은 왜..합동" 교단을 이탈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만들었는가?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 분열이었는가? 이
분열의 책임은 어느 측에 있는가? 본고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
고자 하는 시도이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장로교단들이 백 수십 개를 헤아릴 정도로 교회 분
열과 교단 난립이 극심하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분열을 극복하고 교회의 일치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
러한 상황 속에서, 1960년대..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과 재분리의 역사
를 고찰하는 것은 여러 점에서 시사적이다. 양 교단 합동과 재분리 사건의
발단과 진행 및 결말의 과정을 자세히 고찰할 때 우리는 어떤 경우에 교
단..합동"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지, 따라서 교회 일치를 시도할 때 그것
을 어떠한 동기에서 시도해야 하며 어떤 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게 된다.
2. 합동의 배경
1959년 제44차 대전 총회에서 연동측과 결별한 승동측은 내부 수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60년 8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한 승동측 목
사들이 고신측 목사들과 만나자는 제의를 해 왔다. 양측이 만난 자리에서
박형룡은 “눈물을 흘리면서 1947년에 한상동 목사와 헤어진 것은 자신이
크게 잘못 생각하였던 것”이라 토로하면서 양측이 힘을 합쳐 “개혁주의
보수 신학을 위해 새로이 출발하자고 간곡히 제의”했다.8) 두 교단의 “합
동”을 전격적으로 제의했던 것이다. 박형룡측과 헤어져 고신측 교회인 서
울중앙교회에 다시 모인 한상동 일행은 “오늘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그
6) 남영환, 앞의 책, pp. 490~491.
7) 남영환, 위의 책, p. 501.
8) 남영환, 앞의 책, pp. 470~471.
142 연구논문
들보다 무엇이 낫다고 하겠느냐는 소리에 모두가 동감”했다.9) 그때부터
합동은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양측 지도자들은 “신학과 신앙이 동일한” 두
교단이 나뉘어져 있을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합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강변하면서 추종자들을 교회 일치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불과 서
너 달만에 양 교단의 합동이 이루어졌다. 양측이 이처럼 합동을 서두른 이
면에는 각자가 처한 난감한 상황들이 작용했다.
(1) 승동측의 곤경
후에 승동측으로 불리게 된 복음주의연맹(NAE) 측의 대부 박형룡 박사
와 그의 추종자들은 삼천만환 사건으로 인해 도덕적 이미지에 상당한 타
격을 입었다. 비록 대외적으로는 연동측과 결별의 주된 이유가 세계교회협
의회(WCC) 가입을 둘러싼 신학적 문제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박
형룡의 삼천만환 사건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서로 정당성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측 사이에서 주한 외국 장로교 선교
부들이 한결같이 연동측을 지지하고 그 편으로 가 버렸다. 즉 한국 장로교
선교 초기인 19세기 말부터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
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그리고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승동측과 연동측
의 대립 속에서 일제히 연동측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선교사들과 그
들의 자금에 의해 운영되던 신학교, 대학교, 언론사 등 모든 교회 계통 기
관들이 연동측으로 넘어 갔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승동측으로서는 결정적
인 타격이었다. 당시까지 신학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한국 장로교회에 절대
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등 외국 장로교회들이 이제 대한예수
교장로회의 정통성이 승동측이 아닌 연동측에 있다고 선언하고 나섰던 것
이다. 국가든 교회든 정부의 합법성에 대한 국제적 인정이란 그 정통성과
관련하여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승동측은 이제 국제적 인정을 상
실하고 고립되어 버렸다.
선교사들이 승동측에 등을 돌린 것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박형룡에게 커
다란 심리적 타격을 안겨 주었다. 1948년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와 결별하고
상경했던 서너 가지 이유들 중 하나는 주한 4대 장로교 선교부(미남장로교,
9) 남영환, 위의 책, p. 471.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3
미북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들을 모
두 배제하고 오직 미정통 장로교회와만 관계를 가지자는 한상동의 주장에
대한 불만 때문에 그는 서울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
다. 주한 4대 장로교 선교부가 속한 본국의 교회들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지
도적 회원 교회들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1920~30년대에 있었
던 미장로교 내의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의 전말을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누구 못지않게 보수적 근
본주의 노선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은 시종일관 포용적인 국제
관계를 주장해 왔다. 그러한 포용적 국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그는 그들
로부터 막대한 재정 지원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에 의해 신학교 부지의
구입과 건축을 계획할 수 있었다.10) 그런데 자신과 그처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주한 외국 장로교 선교부들 전부가 1959년 총회 이후 승동측
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연동측의 손을 들어 주었다.
박형룡의 승동측으로서는 무언가 국면 전환을 위한 돌파구를 찾아낼 필
요가 절실했다. 집단의 세력을 보강하고 명분을 만회할 수단이 절실히 요
청되는 시점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고심 끝에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보수
대연합이었다. 즉 10년 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축출된 고신측을
회유하여 그들과 합침으로써 당면한 난국을 극복해 보자는 것이었다. 승동
측으로서는 고신측과의 합동을 통해 몇 가지를 기대할 수 있었다. 첫째,
승동측이 보수 신학의 선봉으로 알려진 고신측과 합하여 한국 장로교회를
“보수 대 진보”로 재편성함으로 일반 앞에 1959년 장로교회 분열의 일차
적 이유가 박형룡 삼천만환 사건 같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교회
협의회와 관련된 “신신학” 혹은 “에큐메니칼” 운동 등의 신학적인 것이었
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11) 그것을 통해 승동측 지도부는 연동측과의
분열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재결합에 대한 “청년들, 소장파 목사들, 부인
들” 등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12) 둘째, 순교적 전통을 가진 고신측과
의 합동은 박형룡의 삼천만환 사건으로 추락된 승동측의 도덕적 이미지를
10) 허순길,..50년사.., p. 143.
11) “사설 : 승동측은 왜 고신측과 합하려는가?,”..기독공보..1960년 11월 14일.
12) “사설 : 고신승동 양파의 합동은 가능한가?,”..기독공보..1960년 10월 24일
; “사설 : 승동측은 왜 고신측과 합하려는가?,”..기독공보..1960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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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시키는 효과가 있었을 뿐 아니라 연동측과의 정통성 경쟁에서 승동측
의 명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셋째,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신측은, 작은 교단이기는 하나 교리적 정통을 표방하는 미정통
장로교회(OPC)와 친선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승동측이 고신측과 합동
하게 될 때 그들은 최소한 하나의 외국 교회와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13)
미정통 장로교회와 교류함으로써 그들은 미국 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 연
동측 손을 들어준 주한 장로교 선교부들을 신학적 자유주의로 몰아 버리
고 전년도 한국 장로교 분열에 관한 그들의 판단을 무시해 버릴 수 있었
다.
(2) 고신측의 곤경
한편 당시, 공교롭게 고신측도 승동측 못지않게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
었다. 허순길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고신측이 “탈진 상태”에 놓이게 되었
던 첫번째 이유는 경기노회 문제 때문이었다. 고신측 경기노회는 일제 시
대 신사참배의 과오를 범한 사람들에 대해 교단이 좀더 관대한 태도를 취
할 것을 주장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뿐 아니라 그 노회의 주류는
교회당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한 세속 법정 소송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박
윤선과 견해를 같이 하고 있었다.14) 그리하여 충현교회 김창인, 동도교회
최훈, 내수동교회 박희천 목사 등 경기노회의 지도급 인사들을 비롯한 19
명의 경기노회 목사들이 교단으로부터 “행정 보류”를 선언하고 자신들을
“보류 노회”로 부르는 상태에 있었다.15)
고신측이 승동측의 합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두 번째 이유는 박윤선
13) 허순길,..50년사.., p. 144.
14) 그들과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고신측의 주류들 사이에는 지방색의 차이도
작용하고 있었다. 박윤선 교수의 소송 반대 주장에 동조하여 1950년 대 말
고신측으로부터 행정 보류를 선언함으로 경기노회..보류측"이라 불렸던 고신
측 경기노회 주류에 속했던 김창인, 최훈, 박이천 목사 등은 대부분 이북 출
신들이었던 반면 한상동을 위시한 주남선 등 고신측의 주류들은 대부분 경남
출신이었다.
15) Bong Rin Ro, “Division and Reunion in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1959~1968,” Th.D. dissertation, Concordia Theological Seminary, St, Louis, 1969.
p. 79.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5
교수의 이탈 후 교단의 여론이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식일 문제로
박윤선 교수를 떠나보낸 고려신학교는 학사 일정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는 등 학교 운영이 파행을 겪고 있었고 학생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박윤선을 추방하는 데 동참했던 교단의 일부 지도급 목사들을 제외한 대
다수 고려신학교 출신 목사들과 일선 교회의 중진 교우들 중 “박윤선 목
사를 지지하는 세력”은 과거의 자기들 스승을 사소한 사유로 교단과 신학
교에서 떠나게 만든 교단 지도부의 처사를 수긍하기 어려웠다.16) 박윤선
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상동은 외국에 유학 중인 고신 출신 교수 후보
자들, 즉 홍반식ㆍ오병세ㆍ이근삼 세 사람에게 신속한 귀국 가능성을 타진
했으나 그들은 당장, 혹은 조만간 귀국할 정도로 학위 취득 과정이 진척되
지 못했다고 회신해 왔다. 따라서 박윤선의 공백으로 인해 야기된 신학 교
육의 파행 상태는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될 길이 없어 보였다.17)
이처럼 고신측 지도부가 사면초가 상태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 무렵인 1960년 8월 승동측이 고신측에 양측의 합동을 제의해 왔
다.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승동측 지도자들이 “눈물로 호소하면서” 보수
대연합을 호소해 왔던 것이다. 자력으로 신학교를 운영하고 교단을 이끌어
가기에 역부족임을 실감하기 시작한 고신측 지도부로서는 박윤선 축출의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들에 대한 교단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그 난관을 극
복할 수 있는 기막힌 호재를 만난 셈이었다. 고신측이 승동측의 합동 제의
에 기꺼이, 그리고 그처럼 신속하게 응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이 처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는 말이다.18) 남영환이 지적하고 있듯
이, “한상동 목사가 승동측과의 합동을 성급하게 추진한 것은 박윤선 교장
16) 송상석,..법정 소송과 종교재판.., 경남법통노회, 1976, p. 71.
17) 남영환, 앞의 책, p. 379.
18) 남영환은 또 고려측이 승동측 제의를 수락하게 되었던 배경과 관련하여 본
래 고려측이 독자적 교단으로서의 존립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
다고 지적한다. “고신 교단도 내부적으로 몹시 시달렸고 박윤선 목사도 떠난
뒤라, 우리의 본래 목표가 교단 형성이 아니라 개혁주의 보수 신학을 이
땅에 확립하자는 데 있었던 만큼,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여타 지도자들이 과
거를 회상하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고 나와서 따로 앉았던 고신측 8명
의 목사들도 이 때는 한 사람도 이의가 없었다.”(남영환, 앞의 책, p. 476) 고
려측 지도자들 자신들조차 별개의 교단으로서의 고려파의 존립을 한국 교회
사 속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146 연구논문
의 고려신학교 사임 이후 야기된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처방”이었다는 것
이다.19) 송상석의 표현을 빌면, “신학교육기관인 고신 내에 본의 아닌 논
쟁이 표면화되어 고신 종래의 지도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될 무렵에 합동문
제가 대두되었으므로 조기 합동을 이루게 되었다.”20)
3. 합동의 성사
비록 조산이기는 했었지만 양측의 합동 과정에서 절차적 합법성은 온전
히 확보되었다. 1960년 9월 20일 부산 남교회에서 모인 고려파 제10회 총
회는 합동추진연구위원 9명을 선정하여 승동측과의 합동을 검토하도록 결
의했다.21) 총회가 파한지 약 한 달 뒤인 동년 10월 25일부터 26일까지 양
일 간 대전중앙교회에서 승동측 합동추진위원회 양화석 위원장 외 9인과
고려측 합동연구추진위원회 황철도 위원장 외 8인이 회합을 가지고 합동
원칙, 합동 방안, 합동 시일 등을 논의하고 확정했다.22) 먼저 “합동 취지
및 선서문”이 작성되었는데 그것을 통해 그들은 두 교단이 합동하는 이유,
혹은 합동해야 하는 당위성을 밝혔다. 한 마디로 말해, 양측은 “신앙과 신
학이 같으므로” 합동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감격적이고 시
적인 말들로 표현되었다.
때가 되매 친구는 찾아오다. 신앙의 동지, 보수 사상의 뜻 깊은 일꾼들 우
리는 큰 힘을 얻었고 큰 기쁨과 큰 위로의 선물을 담뿍 받게 되었다. 질이
같으면 서로 합하고 성이 같으면 서로 응하는 것이 물리학의 원리라면 신앙
이 같고 신학 체계가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똑 같은 두 총회가 함께 뭉치지
못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이제는 전진이 있을 뿐이고 후퇴는 없을 것이
다.……우리는 우리 겨레 앞에서도 솔선수범코자 주 안에서 진리로 하나되는
두 총회 합동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23)
19) 남영환, 앞의 책, p. 491..497.
20) 송상석,..법정 소송과 종교재판.., 경남법통노회, 1976, p. 74.
21)..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 제10회록.., p. 267. 합동추진연구위원은 황철도
..윤봉기..한상동..박손혁..송상석..추국원..전성도..조수완..남영환이었다.
22) Ibid., pp. 286~289.
23) 정규오, p. 270.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7
합동의 명분은 타당하고 거창했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들이 진
리 안에서 연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합동 취지 및 선서문”은 자신들의 “합동”된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유일한 집단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대한예수교장
로회 제45회 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제1회 총회로 창립된 총회
로부터 일본 교단과 신사참배를 제외한 동일성을 유지하고 그 전통을 계
승한 유일한 대한예수교장로회 법통 총회임을 선언한다.” 이것이 의미한
바는 물론, 연동측 총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정통성을 갖지 못한다는 말
이었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1952년부터 거의 10년에 걸쳐 대한 예장 주
류측 역사와 별개로 진행되었던 고신 교단의 역사를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이원적인 사실(史實)”로 수록한
다는 다소 어색한 방식으로 해결되었다.24) 당시로서는 그 이상 특별한 묘
안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합동 이전에 해결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
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950년대 초 한국 장로교 주류가 고신측을 총
회로부터 축출했던 과거사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양측의 합동추진위
원들은 “1951년 5월 25일 제36회 총회의 경남법통노회에 대한 결의와 총
회장의 포고문은 이를 취소한다”는 간단한 말로 처리하고 넘어가 버렸
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측은 그것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마도 합동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그것에 걸림돌이 될 까다로
운 태도를 취하는 것을 자제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와 관련하여 고신측이 자신들의 행위에 일관성을 가지고
자 했다면, 그리고 신사참배 죄에 대한 통회자복과 자숙을 그토록 집요하
게 요구했던 과거의 자신들의 처신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합동” 전에 꼭 짚고 넘어 갔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해방 직후부
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5년 간 고신측이 계속해서 문제시해 왔던
바 일제하 한국 장로교의 신사참배 죄과 청산에 관한 것이었다. 한상동을
필두로 한 고신측은 애초부터 신사참배의 과오를 범한 목사들이 두세 달
24) 정규오, p. 271.
25) Ibid.
148 연구논문
간 기도원에서 참회하면서 자숙하는 일종의 권징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고신측은 이제 승동측과의 합동 전에 그들의
신사참배 과거사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고신측은 이제 신사
참배의 과거사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천명한 셈
이 되었다.
당시 합동에 대해 공식적 반대를 표명한 개인이나 단체는 없었다. 양측
의 절대 다수 구성원들이 합동에 찬성했다. 고려측은 총회 정회 후 노회의
수의(遂意)를 거쳤는데 모든 노회가 그 연합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26) 합
동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강변하는 일에
있어서는 한상동 목사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해 11월 28일 부산대학교
학생신앙운동 주최로 부산 남교회에서 열린 합동강연회에서 한상동 목사
는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동해야 할 이유”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 자
리에서 그는 그 전 해 대전 총회에서 승동측과 연동측이 분열된 것을 “분
명히 하나님이 하신 일”로 단정했다. 장로교회의 대분열이 “한국에 정통
신앙을 그대로 전수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었다. “한국교회
의 신앙 보수를 위해서” 그는 고려측과 승동측 “양 진영이 합해야” 한다
고 역설했던 것이다.27) 합동은 불법이나 외부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
이 아니라 쌍방의 자발적 합의에 의해 성사된 것이었다. 신설된 세칭 “합
동” 교단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연합된 합법적 교단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28)
전술한 바와 같이, 12월에 고려측과 승동측이 최종적으로 합동 총회를
개최하기 전인 10월 양측 합동추진위원들이 대전에서 준비 모임을 가지고
“합동 서약과 원칙들”이라는 이름 하에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한 합의에 도
달한 바 있었다. 이른바 “합동 방안”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제3항에 있는
신학교 문제에 대한 합의였는데 그 본래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신학교
일원화: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로 하고 동수의 이사를 선출하
26)..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제10회록.., p. 293. 1960년 12월 13일 서울
북창동의 흥천교회당에서 열린 고려측 제10회 총회 속회에서 보고된 노회 수
의 결과는 총 6노회에서 합동에 찬성한 표가 178표, 반대표가 불과 8표, 기권
이 2표로 거의 만장일치였다.
27)..파수군..105호, 1960년 12월호, pp. 61~62.
28) 박응규,..한부선 평전.., 그리심, 2004, p. 424.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9
여 경영케 한다.” 그리하여 합동 총회가 개최되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양측은 총회 밑에 단 하나의 신학교를 두는 데 합의하고 있었다. 그 합의
를 볼 때 고신측은 고려신학교를 포기할 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
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신학교 설립자로서 사실상 고신측의 절대적 지도
자였던 한상동 목사는 합동에 임하면서 고려신학교의 존재를 절대적인 것
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합동의 마지막 순간, 정략적 계산이 빨랐던 송상석 목사가 신학
교 단일화 합의에 제동을 걸었다. 양측의 합동 총회가 열리기 몇 시간 전
인 1960년 12월 13일 오후, 고신측 10회 총회의 2차 속회가 서울 흥천교회
당에서 열려 그 날 저녁에 있을 합동 총회를 위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
었다. 합동추진위원회가 제시한 “취지 및 선서문”을 검토하던 송상석을 비
롯한 일부 고신측 인사들이 그 중 신학교에 대한 합의 부분에 주목했다.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를 운영한다는 문구가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
교에 폐합한다는 의미임을 간파한 그들은 그것을 총회 직영으로 “일원화”
한다는 문구로 수정하여 제출했다.29) 합동 이후 구 승동측이 고려신학교
의 폐쇄를 시도할 경우, 합동 서약에 명시되어 있는 신학교 “일원화”란 용
어의 의미는 총회가 한 이사회 하에서 서울 총신과 부산 고신 양자를 모
두 운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고려신학교의 존립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양측이 부랴부랴 서둔 결과 드디어 합동이 공식화되는 날이 왔다. 1960
년 12월 13일 오후 5시 30분 서울승동교회에서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
총회가 열렸다. 그리하여 승동측이라는 교단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
다. 마찬가지로, 고신측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단도 이 땅 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8월에 승동측이 고려측에 교회 연합을 제안한지 불과 넉 달만의
일이었다. 양측은 각자의 독자성을 기꺼이 포기함으로써 세칭 “합동”이라
는 하나의 새로운 교단을 만든 것이었다. 합동 총회 임원으로는 총회장 한
상동, 부회장 김윤찬 목사가 당선되었다. 서기, 회록 서기, 회계로서 정(正)
은 승동측 임원을, 부(副)는 전 고신측 임원을 추대키로 했다. 신학교 이사
장에는 노진현, 부이사장은 한상동이 선출되고 양측에서 각각 12명의 이사
29)..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총회 제10회록.., p. 294.
150 연구논문
를 인준했다.30)
4. 고려신학교 복구와 고신측의 “환원”
박형룡은 한 교단 내에 하나 이상의 신학교가 존재할 때 그것이 교단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한국교회의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신학교가 단일화되지 않으면 교단
의 화합이 어렵습니다.”31) 그리하여 호남노회와 충청노회를 비롯한 9개 노
회는 1961년 9월에 소집될 총회에 신학교 단일화의 시행을 촉구하는 헌의
안을 제출해 두고 있었다. 합동 후 1년 만에 열린 제46회 총회에서 한상동
목사는 전년도에 이어 총회장으로 2년째 연임되는 예외적 대접을 받았다.
반면 총회 나머지 임원 선출에서는 구 고려측 인사들 중 오직 전성도 목
사만이 회록 서기로 선출되었을 뿐 다른 자리는 모두 구 승동측 인사들에
게 돌아갔다.32) 공천부 보고는 구 고신측 총대들의 맹렬한 반대로 공천부
로 회부되었는데, 상비부 총 15부 192명 위원들 중 구 고신측 출신은 21명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서로 알려진 정치부에 구 고신측 인
물은 단 한 명이 들어가 있었고 고시부에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33)
그것은, 허순길이 지적했듯이, 구 승동측 총대 수가 구 고신측 총대 수보
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니 어느 정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었
다.34) 그러나 이 때부터 고신측의 불만이 고조되어 경남노회의 정 모 목
사는 “불법한 총회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퇴장해 버렸다.35) 고신측
인사들 사이에서 “합동 후회론”이 터져 나왔다.36) 총회가 “신학교를 연내
30)..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합동) 제45회 속회록.., p. 68.
31) 1962. 4. 20. 박형룡과 명신홍이 정통장로교 한국 선교부에 보낸 편지. 박응
규,..한부선 평전.., p. 422에서 재인용.
32)..대한예수교장로회 제46회 총회록.., pp. 6~7.
33) “고승측 총회 일대 소란 : 합동 후회론 등 제기되며 회무 진행,”..기독공
보..1961년 10월 2일.
34) 허순길,..한국장로교회사.., p. 454.
35) “고승측 총회 일대 소란 : 합동 후회론 등 제기되며 회무 진행,”..기독공
보..1961년 10월 2일.
36) Ibid. ; “부산총회 스냅: 합동 후회론,”..기독공보..1961년 10월 2일.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1
로 단일화”하기로 가결하자 구 고신측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 해 12월 28일 신학교 이사회는 고려신학교의 단계적 폐쇄를 통한 신
학교 단일화를 명령했다. 사립 고려신학교를 서울의 총회신학교에 흡수 통
합시키라는 이사회의 지시에 순응하여 부산 고려신학교와 서울 총회신학
교 교수들은 서울에서 연합 교수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합의했
다. 첫째, 서울 총신은 본교로 하고 부산 고신은 분교로 한다. 둘째, 부산
분교에서는 더 이상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으며 고신에 재학 중인 졸업반
학생들은 서울 총신으로 올라가서 공부하고 거기서 졸업하게 한다(부산 고
신의 즉각적 폐쇄가 아니라 당시 재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그 존속을 인정함으로
써 경남노회의 요청을 상당 부분 들어주었던 것이다). 셋째, 교장 제도를 윤번
제 교수 회장제로 바꾼다. 연합 교수회의 이러한 결정에 따라 박형룡 박사
가 먼저 1년간 교수회장을 맡았고 부산 분교장에는 박손혁 목사가 취임했
다. 그리고 새해부터 안용준, 오병세 교수는 서울 본교에서, 홍반식, 이상
근 교수는 부산에서, 그리고 한상동 목사는 서울, 부산 두 곳 모두에서 가
르치도록 결정했다.
고려신학교 재학생들 대부분은 신학교 폐합에 반발했다.37) 1962년 3월
신학기를 맞아 등교한 이들은 교문에 고려신학교라는 간판이 제거되고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라는 새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상동
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총회장으로, 그리고 동시에 신학교 이사회 부이
사장으로 있었던 그가 “학생들의 간절한 호소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
신학교 폐교를 통한 신학교 단일화를 앞장서서 추진했기 때문이었다.38)
그러나 이미 이루어진 총회, 이사회, 합동교수회의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
었다.
(1) 한상동 목사의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
1962년 9월 20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합동 후 두번째 총회(제47회)가
37) 그 해 가을 한상동 목사가 전격적인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을 한 후 찬반 의
견이 분분해지자 학생들은 여론 조사를 했다. 결과는 복교 찬성 53명, 반대 6
명, 중립 65명이었다. 허순길,..한국장로교회사.., p. 464.
38) 허순길,..한국장로교회사.., p. 461.
152 연구논문
개최되었다. 임원 선거 결과 한상동 목사는 총회장 직에서 물러나고 구 승
동측 인사들인 이환수ㆍ박찬목ㆍ정규오 목사 등이 각각 총회장, 서기, 부
서기 등의 요직을 석권하게 되었다. 구 고려측 인사로 임원에 선출된 사람
은 회록 서기 전성도 목사뿐이었다.39) 총회가 파한 후 한상동 목사는 “고
려파 총회를 복구 환원하겠다”는 말을 측근에게 흘리고는 부산으로 내려
가 버렸다.40) 총회가 폐회된 지 보름 쯤 지난 1962년 10월 13일 경 한상
동은 부산 시내에 있는 몇몇 목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느닷없이 고려신학
교를 복구하겠다고 선언했다.41) 전혀 뜻밖의 발표에 충격을 받은 대다수
참석자들은 그것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42) 그것은 이미 가능하지도 적
법하지도 그리고 순리적이지도 않은 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나흘 후인 17일, 한상동 목사는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구 고려신학교) 경건회를 마친 자리에서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시절
을 마감하고 합동 전의 고려신학교로의 복귀한다고 선언하면서 한 주일
후인 23일부터 모든 학생들은 고려신학교 학생으로 등교하라고 지시했
다.43)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단지 고려신학교의 복구만이 아니라 “승동측으로
부터 고신측의 환원을 의미하는 첫 신호”로 받아들여졌다.44) 고려신학교
복구를 선언한 바로 다음 날인 10월 18일, 한상동은 부산 시내에 있는 구
고신측 교역자들과 장로들을 부산 송도교회당에 소집하고 고려신학교를
복구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총회와 총회신학교가 부
패하여 “우리,” 즉 구 고신측도 동화 속화될 터이니 정화의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예로서 그는, 총회신학교 시험에 부정 행위자가 있었
으며 기숙사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둘째, 총회신학교의 교수회장 윤번제가 교장제로 번복될 우려가 있다. 셋
39)..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록 11-2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부,
1971, p. 25.
40) 정규오, p. 275.
41) “고신 복교 계획을 포기 : 대의 명분 없다고 판단,”..크리스챤신문..1962년
11월 5일.
42) 김상도, “고려신학교 복교 운동의 전망,”..파수군..제129호, 1963년 4..5..6
월호, pp. 14~15.
43)..크리스챤신문..위의 글 ; 김상도, 위의 글.
44) 남영환, pp. 494~495 ; 허순길,..50년사.., p. 159.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3
째, 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의 삼천만환 사건에 대한 해명이 없다.45) 그
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구 고신측 지도자들은 그 세 가지 전부를 전혀 설
득력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장시간 논의 끝에 그들은, 한상동 목사의
제안이 “교파 분열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사설 신학교” 설립에 관한 것으
로서 고려신학교 복구의 “정당한 대의명분”이 없다고 결론지었다.46) 그들
은 대신 세 가지를 결의했다. ① 부산에 총회신학교 분교를 설립해 줄 것
을 총신 이사회에 건의한다. ② 고신 복구를 반대한다. ③ 교리 진리 문제
가 아닌 어떤 교회 분열도 반대한다.47) 심지어 구 고신측 목사와 장로들
다수조차 고신 복구가 순리적인 일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들은 그것을 시도하는 한목사에게서 “교회 분열” 시작의 조짐을 느끼고
있었다.
한목사가 고신 복구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접한 총회신학교 이사회는 부
산에서 긴급히 모임을 가졌다. 마침 한상동 목사가 대구에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회의 장소를 대구로 옮겨 한상동 목사를 초청한 가운데 황
철도 목사 사택에서 속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이사회는 그 전 해 12월
18일의 이사회 결정을 번복하여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를 폐지하지 않고
영구히 존속시키기로 결의하여 한상동 목사를 달래려 했다.48) 그러나 한
목사는 그 제안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1962년 10월 22일, 한상동은 옛 고
려신학교 이사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고신 복구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어
내려 했다. 그러나 심지어 전 고려신학교 이사들조차 한목사의 제안에 동
의하지 않았다.49) 실망한 한상동은 그 다음 날인 23일 전 고신 이사들을
앞장 세워 다시 부산 시내에 있는 구 고신측 교역자들을 삼일교회당에 긴
급 초청했다. 모임에 참석한 자들이 고신 복구안을 두고 투표한 결과는 찬
성 7표, 반대 21표로 반대가 찬성의 무려 3배에 달했다.50) 구 고신측 목회
자들의 의향을 확인한 바로 그날 밤 과거의 고신 운영 주체였던 구 고신
이사회가 다시 자체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고신 복구 반대 7, 찬성 2로
45) 김상도, “고려신학교 복교 운동의 전망,” p. 15 ;..크리스챤신문..위의 글.
46)..크리스챤신문..위의 글.
47) Ibid., pp. 16~17 ;.... 크리스챤신문..위의 글.
48) Ibid., p. 17.
49) Ibid., p. 17.
50) Ibid ;..크리스챤신문..위의 글.
154 연구논문
반대가 압도적이었다.51) 그러나 그들은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의 유지에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정하고 해산했다.
구 고신측 목사 장로들 뿐 아니라 심지어 구 고신 이사들 절대 다수가
고려신학교 복구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상
동 목사는 신학생들이 고신 복구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내었다52)는 사실을
근거로 자기 의사의 관철을 강행했다.53) 한번 “뺀 칼을 다시 꽂을 수 없
다”는 명분 하에 한상동은 11월 5일 신학교 정문에 걸려 있던 “총회신학
교 부산 분교” 현판을 떼어 내고 “고려신학교” 현판을 걸었다.54) 다음날인
11월 6일 한상동 목사는 자신의 사회 하에 고려신학교 복교 예배를 인도
하면서 11월 20일부터 수업을 시작한다고 공포했다.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에서는 이상근.홍반식 두 교수가 수업을 진행 중이었으나 학생들은 자기
들 중 고신 복구를 지지하는 이들이 다수라는 사실을 근거로 두 교수의
수업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면서55)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와 고신 복구 반대
파들을 건물로부터 축출하려 했다. 한상동의 노선에 찬성하는 이들은 11월
5일 부로 학교 건물을 한상동 개인 명의로 등기 완료해 놓고 학교 건물이
한상동의 재산이니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는 건물에서 나가라고 요구했
51)..크리스챤신문..위의 글.
52) 1962년 10월 31일 고려신학교 학우회 이름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는데 5개 항
으로 된 그 성명서의 핵심은 “합동”이 유지되어야 하며 고려신학교는 복구되
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 본 장로교의 합동을 재확인하고 이를 고수한다. 2.
합동 원칙을 준수하며 신학교의 일원화를 재확인한다.” 즉 “합동을 재강조하
기 위하여” 부산 고려신학교를 폐쇄하지 말고 총회신학교와 “동등한 입장”에
두고 운영하는 것이 합동 당시 “일원화”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성명서에도 모순이 있다. 학생들은, “구 고신 이사회는
고신 폐합 조치에 선봉이 되어 오늘의 결과를 초래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본교 (고신)를 완전 복구시켜 놓고 새로운 이사를 구성, 일체를 인계하시고
은퇴하실 것”을 요구함으로써 구 고신 지도자들인 고려신학교 전 이사들이
승동측과의 합동 시 고려신학교의 폐쇄에 동의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학생들은 또 박윤선을 다시 교수로 채용할 것을 요구했다. 총신대학교 100년
사 편찬위원회,..총신대학교 100년사.., 총신대학교, 2003, pp. 624~625. 한편
허순길은 학생들이 합동의 유지를 주문한 부분은 삭제한 채 고신 복구를 주
장하는 부분만 인용하고 있다, 허순길,..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p. 495.
53) 김상도, “고려신학교 복교 운동의 전망,” p. 17.
54)..크리스챤신문..위의 글.
55) 김상도, p. 17.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5
다.56)
부산 분교에서의 정상 수업 진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총회신학교 이사
장,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교수 및 교사(校舍)대책 위원들은 긴급 연석 회
의를 열고서 성명을 발표했다. 요지는 첫째, 합동 이후 양 교단의 재산은
합동된 총회의 소유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그러한 마당에 구 고
신 이사 몇 사람이 과거 고신 재산인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건물의 소유
권을 주장하여 부산 분교의 교수와 학생들을 폭력으로 추방한 것은 비양
심적일 뿐 아니라 불법적이라는 것,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당
한 처사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부덕한 일이므로 수업을 잠정적으로 미
정통장로교 선교사들의 부산 사무소 건물에서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미 정
통장로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건물을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를 위해 빌려
주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 사태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부산노회였다. 임시 노회로 모인 부산노회는 장시간 토론 끝에 고려신학교
가 불법이라고 규정했다.57) 한편 구 고신측 지도자들 중에 고려신학교 복
구에 반대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김상도는 파숫군에 쓴 글에서 고신 복
교의 부당성을 네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명분이 없다. 학교 문제는 교리
가 아닌 행정에 관한 일이다. 둘째, 복교 방법이 “불법적”이다. 셋째, 성경
적 원리에서 떠난 지도이다. 넷째, 고려신학교 복구는 “그 귀결점이 교회
분열”이다. 그는 칼빈의 교회론을 따라, 교리나 진리 문제가 아닌 교회 분
열은 “성경이 절대로 용납하지 아니하는 큰 죄”라고 지적했다.58)
한상동 목사는 이 때 이미 합동을 파기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던 것
으로 보인다. 그 무렵 부산노회 교섭위원과 총회신학교 이사 두 명이 한상
동 목사를 방문하여 합동 원칙인 신학교 “일원화”에 의하여 신학교 문제
를 해결함으로써 비극적 교회 분열을 막자고 권유했다. 그러자 한상동은
56) Ibid., pp. 17~18.
57) Ibid., p. 18.
58) Ibid., p. 21. 그러나 이 성명서를 발표한 지 7개월이 지난 1963년 6월에도
한상동 목사는 여전히 고신 이사직에 머물러 있었을 뿐 아니라 고신에서 교
수까지 하고 있었다. 김상도는 그것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전국 교회와 교인
들 앞에 책임있게 공표한 결의와 성명을 이렇게 휴지화하고 식언하면서도 진
리 운동이니 총회 부패 운운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한상동 목사만이 아니라
구 고신 이사 전원도 학생들의 성명서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대로 이사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156 연구논문
구 고신 이사회가 신학교 일원화 방식을 거부하기로 이미 결의했다고 말
하면서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인준해 주도록 노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즉
총신 이사회와 구별된 별도의 이사회 밑에서 고려신학교가 완전히 따로
운영될 수 있도록 총회의 인준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합동 시
“일원화”란 용어를 통해 구 고신측이 신학교에 관해 관철하고자 했던 목
표보다 더 나간 것이었다. 합동 시에 송상석을 위시한 구 고신측이 신학교
의 “일원화”란 말로 의도했던 것은 한 이사회 관할 하에 총신과 고신 두
신학교가 존속하는 것이다.
한편, 학생들이 성명을 발표한 며칠 후인 11월 한상동 목사는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다음의 문구가 포함된 성명서를 전국 교회 앞으로
발송한 바 있었다.
敎弟는 이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실책을 인정하고 고려신학교를 도로 찾
아 놓고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앉을 것을 당초부터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 앞에서 그들의 성명서를 환영하여 이 사실을 공언한 바 있고 고신 이
사회에는 정식으로 사표까지 제출해 두었으니 곧 수리될 것으로 믿고…….
또 수리되지 않는다 해도 敎弟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결심이니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한상동이 사실상의 교회 분열을 의미하는 고려신학교 복구를 선언한 이
유는 무엇이었을까? 불과 2년 전에 합동을 결심했던 그가 마음을 바꾸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상황이 바뀌었다는 한상동
의 인식이 작용했다는 설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상동이 승동측과의 합
동을 결심했던 결정적 요인은 박윤선의 고신 이탈로 말미암아 신학교 운
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고신 출신 세 사람이 유학을 마치고 학위를 받아 돌아왔다. 홍반식과 오병
세가 1961년에 귀국하여 각각 서울 총회신학교와 부산 분교 교수로 일하
고 있었고 이근삼도 1962년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다. 말하자면, 이제 고
신 출신 교수들이 확보되었으니 다시 고려파들이 모여 독자적으로 신학교
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59)
둘째는 교권에 대한 애착설이다.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당시 고신 복구
59) 남영환도 그러한 사실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남영환, p. 498.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7
에 반대했던 어떤 목사는 한상동이 고신 복구를 원했던 이유들 중 첫 번
째는 “주도권”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즉 합동 초기에는 신학교 이사가 양
측 동수였으나 얼마 후 이사 구성 비율에 불균형이 나타났고 특히 한상동
ㆍ한명동 형제가 이사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다.60)
한상동이 고신 복구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로 여러
관측자들에 의해 지적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1962년에 화란 유학을 마
치고 귀국한 한상동의 양자 이근삼 박사의 총신 교수 임용이 박형룡 교장
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사실이다. 남영환은 이근삼에게 총신 교수직이 부여
되지 않았던 것이 고려신학교 복구를 출발점으로 구 고신측 교회 다수가
재분리하게 된 “실제적 동기”들 중 하나였다고 적고 있다.61) 송상석도 동
일한 견해를 피력한다. 이근삼 목사를 총회신학교 교수로 채용해 달라는
제청이 이사회에서 거부당하자 한상동은 “느닷없이” 총신이 세속화되었다
는 구실을 제시하면서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62)
한상동 본인으로서는 정당성이 충분한 일이라 여겨 결행했을지 모르나
이근삼의 교수 채용 여부에 대해 그와 같은 깊은 관심이 없었던 다른 모
든 이들에게 있어 그의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은 돌연했을 뿐 아니라 상식
과 법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이루어진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개혁
주의 정통 신앙과 생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합리한 방법”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었다.63) 그것의 불법성은 당시 홍반식ㆍ이상근을 비롯하여 그
직후에 있게 될 구 고신측 재분리에 가담하지 않고 합동된 교단에 잔류했
던 많은 구 고신측 목사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홍반식 교수는, 결국 최종
순간에 복교 대열에 합류하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그것을 “돌발적이고 비
합법적”이라 보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복교에의 동참을 주저했다.64) 그러나
60)..크리스챤신문..위의 글.
61) 그러면서도, 남영환은 구 고신측의 공식적 주장에 동조하여, “보다 근본 문
제”는 승동측의 “다수의 횡포”였다고 지적한다.
62) 송상석,..법정 소송과 종교재판.., 경남법통노회, 1976, p. 72.
63) 허순길,..50년사.., p. 147.
64) 홍박사가 고려신학교에 합세한 것은 복교 선언 후 여러 달이 지난 1963년 2
월 25일의 일이었다. 남영환, p. 497. 오병세, 박손혁, 이근삼 세 사람이 복교
에 합류한 것도 1962년 12월 17일이었으므로 고려신학교는 약 두 달 동안 교
수 없이 표류한 셈이었다. 그 학기는 거의 파행으로 끝났던 것이다.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p. 465.
158 연구논문
김상도가 지적했듯, “과거 십 수년 한 솥 밥을 먹었던” 고신 출신들의 “그
친밀감, 우정, 동지 의식”은 하루 아침에 변할 수 없는 뿌리깊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객관적인 판단에 입각하여 냉정하게 자신의 길을 택하기보
다는 단지 구 고신측이 다시 뭉쳐야 한다는 감정적 호소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65) 한상동 이후 고신의 제2 세대 지도자가 되었던 오병세ㆍ이근삼
ㆍ홍반식 세 박사는 한상동의 복교 선언이 있은 몇 달 후인 1963년 2월
25일 복교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성명했다. “우리는 고려신학교의 복구 방
법은 가하지 않았다고 하겠으나 그 동기는 순수하고 그 정신이 한국교회
를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66)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고신 복
구가 “순수”한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어떤 식으로 한국 교회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되는지에 대한 언급은 그 성명 속에 없었다.
한상동 목사에 의한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은 모든 이들에게 구 고신측
의 “환원”의 전주곡으로 받아들여졌다.67) 특히 당시 부산노회 내의 구 고
신측 목회자들 사이에서 분열의 움직임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고려신학교 복구주의자들은 교회 분열만큼은 절대로 시도하
지 않는다고 장담하고 있었다.68) 1963년 2월 5일 대전중앙교회당에서 회
집된 전국 노회장과 증경 총회장 및 총회 임원회 연석 회의에서 모 목사
는 고려신학교 복구가 “총회 분열”을 목적으로 한 행동이라 비난했다. 송
상석은 그것을 부인했다. 고려신학교 복구를 기점으로 구고려파가 재분리
함으로 구승동측을 “낭패케” 하는 것은 “도의상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행동 원리에도 맞지 않는 일”이므로, 그러한 “고의적
분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69)
한편, “합동된” 부산노회는 교회 분열을 막기 위해 부심했다. 그들은 불
법적 방식으로 이루어진 고신 복구를 합법화하는 동시에 교회 분열을 막
는 방안을 강구하여 그것을 1963년 3월 정기노회에 제시했다. 그 방안이
란, 양측의 합동 시부터 송상석을 비롯한 구 고신측 일부가 요구했던 대
65) 김상도, “고려신학교 복교 운동의 전망,”..파수군..제129호, p. 22.
66) 성명서의 제 2항, 남영환, p. 496.
67) Ibid., p. 159.
68) Ibid.
69) 송상석,..법정 소송과 종교재판.., 경남법통노회, 1976, p. 72.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9
로, 단일 이사회가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 두 학교를 운영한다는 의미의
“일원화”를 기하는 것이었다. 총신 이사회에서도 그러한 방법에 의한 신학
교 문제 해결을 한상동에게 제안한 바 있었고 진주노회도 그러한 해결책
을 총회에 건의하기로 가결했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의 복교 선언 이후
구 고신 이사회는 이제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총회신학교
이사회와 상관없는 완전 별개의 이사회 하에서 운영되는 고려신학교를 인
정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70)
(2) 부산노회 구 고신측 일부의 환원과 그 “취지문”
그러던 중 1963년 6월, 합동 총회의 고시부는 1963년 2월에 고려신학교
를 졸업한 5명71)이 강도사 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
다. 그들은 총회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한상동 목사의 복교 선언을 듣고
1962년 12월 18일 총신을 이탈하여 부산으로 내려가 고려신학교를 17회로
졸업한 이들이었다. 남영환에 의하면, 이 일이 “고신측 환원 운동에 결정
적인 동기가 되었다.” 구 고려측 인사들 사이에서 그것을 두고 총회에 가
서 왈가왈부하지 말고 조용히 “환원하자”는 견해가 득세하게 되었다는 것
이다. 그리하여 각 노회의 구 고신측 교회들은 이른바 “환원”을 시작했
다.72)
그리하여 각 노회의 구 고신측 교회들은 이른바 “환원”을 시작했다. 선
두에 선 것은 부산노회 내의 구 고신측 교역자들이었다. 1963년 7월 29일
그들은 이른바 “환원 발기회”를 조직하고 “노회 환원 취지문”을 발표했다.
그 글은 합동한지 3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그들이 여전히 자신들
의 과거 소속 집단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론에서, 합동
후 승동측이 “합동 서약을 위반하고 합동 정신과 이념을 무참하게 짓밟
고” 있다는 비난으로 포문을 연 그들은, 그 상태가 계속되면 구 고신측 출
신들의 “장래가 심히 암담하고 비참할 것”이라 전망했다. 구 고신측이 지
적한 구 승동측의 “합동 서약 위반”이란, 뒤에 상술하겠지만, 주로 교회의
70) 김상도, pp. 19~20.
71) 남영희, 이지영, 진학일, 최만술, 최진교.
72) 남영환, p. 498.
160 연구논문
주도권이나 교권에 관련된 것들에서 자신들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불만이
었다. 그러한 요인들이 자신들의 “장래”를 “심히 암담하고 비참”하게 만들
것이라 분개하는 표현들은 이들이 교권과 주도권 문제에 얼마나 깊은 관
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취지문”은 또 그 실체를 지적함이 없
이 새 교회에 마치 신학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언급했다. “해방 후” 구 고
신측이 견지하던 “신앙 노선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를 이 암흑으로부터 구출해내고” “정통 신학 교육”과 “진정한” 칼빈주의
교회 건설, “경건 생활의 재건설”을 위해 환원한다는 명분을 제시하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합동으로 인해서 어떤 “암흑”이 교회에 임했으며, 정통
신학 교육, 칼빈주의 교회 건설, 그리고 경건 생활에 어떻게 지장이 초래
되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취지문은 아무런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본론에서 “노회 환원 취지문”은 승동측이 위반한 합동 서약의 구체적
사항들을 열거했다. 그것은 주로 파당적 이해 관계에 대한 쟁점들이었다.
첫째로 신학교 문제를 언급했는데 그것과 관련된 그들의 불만 사항은 ①
신학교의 “일원화” 결정을 일 년도 못 가서 “단일화”로 바꾸었다는 것, ②
이사회 구성에 있어 양측 동수제를 폐지했다는 것, ③ 신학교육에 있어
“질보다 양”에 치우쳤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정치” 문제라고 취지문은 지
적했다. 거기에는 다시 당파적 이익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두 가지가 포
함되었다. ① 다수의 횡포가 자행되는 것, 즉 부산노회가 합동 원칙을 어
기고 노회 명칭과 회수를 다수결로 결정한 것, ② “고신에 협조하는 교회
와 교역자를 탄압한 것”, 즉 동일교회의 교역자 청빙을 방해했고 제2 영도
교회에 전권위원을 보내어 고신을 지지하는 교역자와 교인을 탄압했다는
것, 또 고신 교수들을 강사로 청했다 하여 학생신앙운동(SFC) 전국대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신앙 노선 문제에 대한 지적이었다.
“합동된” 교단이 칼빈주의를 버리고 “세속주의, 타협주의, 편리주의”로 나
갔다는 것이었는데 역시 그러한 비판의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환원 취
지문에는 교권에 대한 관심과 소수파로서의 구 고신측 인사들의 피해 의
식이 동시에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합동 노회와 총회가 “고신측 지도자들
을 제거함으로써 완전히 교권을 장악”하려 하고 있으며 “고신측의 그림자
까지라도 한국교회에서 지워 버리려” 하고 있다고 그들은 불평했다. 그러
나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합동 총회의 총회장은 한상동 목사였다.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61
결론에서 취지문은 “우리는 합동 전 노회와 총회로 돌아간다”고 선언하
면서 합동 시의 고신측 총회장(송상석 목사)에게 환원 총회 소집과 환원 선
언과 교단의 재조직을 요청했다. 아울러 부산노회의 환원은 8월 8일 부산
남교회에서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공고되었다. 노회 차원의 선언이었지
만 합동 전 “총회”로 돌아간다고 확언한 것을 보면 단지 부산노회만이 아
니라 이미 전국의 구 고신측 교회들과 지도자들 사이에 재분리에 대한 합
의가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 “환원”에 대한 반대
구 고신측의 이러한 전반적 재분리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구 고
신측 인사들, 특히 중견급 목사들 사이에서 한목사의 교단 “환원” 혹은 재
분리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저항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1963년 8월 5일 부
산노회에 속한 구 고신측 교역자 23명의 명의로「노회 환원 취지문에 대
한 해명」이라는 성명이 발표되었다.73) 구 고신측 교역자들로서 고려신학
교 복구와 교단 환원에 대한 반대자들에 의해 작성된 그 성명서는 한상동
목사의 행보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 성명에 의하면, 그들은
고려신학교 복구가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며 그것이 필연적으로 “비
극적 교회 분열”로 연결될 것이라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1962년 가을
총회에서 총회장에 세 번 연임하는 데 실패한 한상동 목사가 갑자기 총회
와 신학교가 부패되었다는 구실을 내세우면서 고려신학교 복구를 선언했
다고 그들은 비판했다.
성명자들은 한상동을 비롯한 구 고신측 지도부의 비일관성을 지적했다.
3년 전인 1960년 12월 13일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할 때 한상동을 비롯
한 구 고신측 지도자들은 “합동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그
것에 공감한 그들은 그 “지도를 받아 감격과 감사를 가지고 순종”했다. 그
73) 정규오,..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 교회사(상).., 한국복음문서협회,
1983, pp. 278~283. 여기에 서명한 목사들은 김장원, 황보연준, 이제만, 최대
연, 김경연, 차문제, 최천구, 한대식, 김덕곤, 최진수, 이상근, 김원주, 최종린,
김을길, 김성환, 황종운, 박유생, 정해동, 이갑득, 김상도, 우하섭, 김갑석 23명
이었고, 강도사는 이근신, 김의장, 박윤성 3인이었다.
162 연구논문
러나 불과 3년이 채 되지 않은 지금 한상동 등은 구 고신측 교회들과 목
사들을 향해 교회 분열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상동 목사, 기타 목사들은 여출일구로 노회 석상에서나 또 교인들에게나
“교회 분열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총회 산하 2천 교회라는 무대를 두
고 왜 나갈 것인가?” 등등의 말을 몇 십번 몇 백번 하였던가? 목사의 생명은
양심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이렇게 비양심적인 거짓말을 거침없이
하여야 하는가? 한국교회의 정통 신학 교육과 경건 생활의 재건설을 위하여
서는 거짓말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가?74)
성명자들은 “환원 취지문”이 “전부 거짓”이며 “순진한 교인들을 기만하
기 위하여 조작한 것”이라 비난하면서 이른바 구 승동측이 행한 “합동 서
약 위반”이라는 구 고신측 환원파의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들은
먼저 신학교 “일원화”의 약속을 “단일화”로 바꾸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그것은 한상동 목사가 총회장으로 있을 때 그가 앞장서서 이룬 일이다. 그
래서 당시 고신측 인사들 사이에서는 “불평이 적지 않게 있었다.”75) 한상
동 목사 자신이 주도해서, 혹은 최소한 그의 동의와 묵인 하에 그 일이 이
루어졌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구실로 교회를 분열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이사회 구성에 있어 양측 동수제(同數制) 약속이 폐기되었다는 불
평에 대한 반박이었다. 이사 동수제 폐지는 총회가 아니라 이사전형위원인
한상동ㆍ황철도ㆍ노진현ㆍ박순룡 4인이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것이 이사
회를 경유하여 인준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일에 대한 책임은 전형위
원인 한상동, 황철도 두 사람에게도 있다.76) 셋째, 총회신학교가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신학 교육을 행한다는 비판에 대한 것이었다. 성명자들은
“신학 교육의 우열은 장차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라고 자신감을 표명했
다. 부산노회가 합동 원칙을 어기고 노회 명칭과 횟수를 다수의 횡포로 결
정했다는 환원파들의 비난에 대해, 그러한 결정은 단지 다수결의 결과일
뿐이라고 환원 반대자들은 반박했다. “노회 유익을 위하여 다수의 의견을
따라 합동 원칙을 몇 노회 연기하여 시행하였다”는 것이었다.77) 교리나 진
74) Ibid., p. 279.
75) Ibid.
76) Ibid., pp. 279~280.
77) Ibid., p. 280.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63
리 문제가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그 단체의 유익이 되도록 행하는 것이
현명한 일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합동 원칙에 따르면, “일반 교회 행정
은 과반수로 가결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노회 명칭과 회수에 관한 문제는
“일반 교회 행정”에 속하므로 다수결이 합법적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성명서는 두 가지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첫째, 구 고신측 인사들의 소
위 “환원” 움직임은 “환원이 아니라 분열이다.”78) 이유는 구 고신측 부산
노회의 목사와 총대 장로의 “다수”가 환원에 반대하고 고려신학교 복구를
“불법”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79) 둘째, 소위 “환원”이라는 것은 단지 “교
권 운동”일 뿐이다.80) 구 고신측 “몇몇 목사”들이 교권을 누리기 위해 “식
언과 거짓말을 떡먹듯”하면서 “순진한 어린 양떼들을 기만하여 비극적인
교회 분규”를 감행한 것이다.81)
이 환원 반대 성명이 발표된 얼마 후인 8월 29일에도 구 고신측 목사
49명이 환원을 반대하는 또 다른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부산노회의
구 고신측 이탈 그룹은 “환원 노회”가 아니라 “분열 노회”라고 비판하면
서82) 그 분열이 얼마나 근거 없고 명분 없는 것인가를 지적했다. “교리와
성경상의 진리 문제가 아닌 교회 행정상의 의견 차이로 교회가 분열하는
것”도 잘못인데 하물며 “생리가 맞지 않기 때문에 분열하지 않을 수 없
다”는 것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생리를 더 중하게 생각하는” 인본주의이다. 그들은 그것이 “환원”
이라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라 단정했다. “합동”에 참여했던 구성원들 “대부
분”이 합동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환원”이라 부를 수 없을 터
인데 하물며 “과반수”가 합동을 견지하고 있고 단지 일부가 분열해 나가
면서 그것을 “환원”이라 부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83)
78) Ibid., p. 282.
79) 실제로 구 고신측 부산노회 소속 교회들 중 거의 절반이 “환원”에 동참하지
않았다.
80) Ibid.
81) Ibid.
82) Ibid., p. 283. 경북 지구 18명, 경기 지구 5명, 전라 지구 4명, 부산 지구 22
명으로 이 중에는 안용준..이인재..황보연준..박유생..강유중 같은 비중 있
는 구 고신측 목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83) Ibid., pp. 284~285.
164 연구논문
(1) 결국 재분리되다!
성명서를 통한 반대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미 “환원”은 기정사실
화되어 가고 있었다. 8월 8일, 구 고신측 목사 23명과 장로 21명 등 44명
은 부산 남교회에서 구 고신측 부산노회의 환원을 감행, 김영진 목사를 노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어서 전라노회가 환원했고 9월 3일에는 경북노회, 4
일에는 경기노회, 10일에는 경남노회, 이어서 진주노회, 그리고 새로 조직
된 경동노회가 환원했다. 그리하여 1963년 9월 17일에서 20일까지 부산 남
교회에서 목사 36명, 장로 36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신 제13회 “환원 총회”
가 조직되었고 송상석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승동측과 합동하여
세칭 “합동파”로 불린 지 34개월, 거의 만 3년만의 일이었다.
합동 당시 고신측 총회장이었던 송상석 목사를 비롯하여 합동추진위원
들이었던 한상동, 황철도 목사는 합동을 주도했던 것이 “하나님과 교회 앞
에 잘못되었던 것”이라 교단 앞에 사과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고
신) 회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합동 위원 사과: 하나님의 뜻인줄 믿고 1960년 12월 13일 승동측과 합동
함으로 우리에게 부닥쳐진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그 당시 합동 위원 대
표로 선정된 회장 송상석 목사와 부회장 황철도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각각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뼈아프게 사과할 때, 이 일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인 줄 알고 온 회중이 함께 회개와 감사의 마음으로 이 사과를 받고 회무
를 진행하기로 가결하다.84)
불과 3년 전에 신학과 신앙이 승동측과 동일하므로 합동하는 것이 “하
나님의 뜻”이라 강변했던 바로 그 당사자들이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승동
측과의 합동이 알고 보니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밝히면서 이제는
헤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라 천명한 것이었다. 그 3년 사
이에 승동측이든 고신측이든 한 쪽에 어떤 신학적 입장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과문에 나타난 바 그들에게 “부닥친 불미스러운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한편,
84)..대한예수교 장로회 제13회 총회(고신) 회록.., p. 33.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65
한상동 목사는 “전국 교회를 소란케 한 책임을 절감하고 사죄하는 의미에
서 은퇴 의사를 표명”했다.85) 아울러 일반 목사들과 장로들도 일주일간 자
숙하기로 결의했다.86) 단지 “합동”이 잘못된 일이었다고 규정함으로써 “환
원”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한편, 본래의 승동측 및 “환원” 반대파 구 고신측 일부로 이루어진 “합
동측”87)은 1963년 9월 19일 목사 97명, 장로 95명, 선교사 3명88) 도합 195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48회 총회를 열고 이수현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
했다. 이로써 1960년에 만들어졌던 세칭 “합동” 교단은 구 승동측 전부와
구 고신측 일부로 이루어진 다수파, 구 고신측 일부로 이루어진 소수파 두
쪽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2) 구 고신측의 손실
“환원” 후 고신측의 교세는 합동 전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었다.89) 합동
85) 허순길,..50년사.., p. 170. 한상동은 그 후에도 70대 중반 소천할 때까지 고
려신학교 교장, 이사장, 고려신학대학 학장,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삼일교
회 담임 목사직을 수행했으므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셈이었다..
86)..대한예수교 장로회 제13회 총회(고신) 회록.., p. 33. “목사 장로 자숙: 합
동에 대한 모든 잘못되게 지도한 일을 심각하게 느껴 주 앞에서 깊이 회개
하는 마음으로 목사와 장로는 1963년 9월 23일부터 동 29일까지 자숙하기로
가결하다.”(단 특별한 경우에는 자숙 시일을 변경하여 실행해도 무방함).
87) 이 때부터 이들이 “합동측”이라는 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88) 이들은 미정통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한부선 선교사 등 구 “고신측”
의 전통적 혈맹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이 “환원”을 부당한 것으로 판단, 그것
에 동참을 거부하고 “합동측”에 잔류함으로써 고신은 국제적 교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부산 경남 경북 진주 경기 경동 전라 계
교회 수 69(100) 143(161) 70(121) 85(148) 21(23) 27 20(30) 445
당회 수 24 42 32 16
목사 수 32 35 38 17 7 7 5 116
장로 수 40 57 48 38 6 7 5 192
세례 교인 2900 3000 1100 1100 623 623 500 10246
89) 환원 당시의 고신측 교세는 다음과 같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제13회 총회록..부록 44-47 (괄호 안은 합동 이전의
숫자).
166 연구논문
당시 590개였던 고신측 교회 수는 “환원” 후 445개로 줄어 150여 교회를
잃어 버렸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그것이 본래 교회 수의 1/4이었지만 내용
상으로는 부산, 경남을 제외하고 지역마다 규모있고 비중있는 교회들은 대
개 환원에 동참하지 않고 합동측에 잔류했다. 한부선은 “당시 환원한 교회
들이 대부분 경남 지역에 소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전에 고신측이 지
녔던 한국 교회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약화시킨 반면 “지역성을 더 강화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90)
“환원”이 새 고신측의 장래에 미친 가장 큰 손실은 차세대 한국 교회와
교단의 지도자가 될 만한 그릇들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구
고신측의 유능한 중견 목사들 상당수가 “합동”된 교단에 잔류했다.91) 그리
하여 한부선 선교사는 “고신측이 무리하게 환원함으로 예전에 고신에 속
했던 많은 교회들과 훌륭한 지도자들을 상실했다”고 평가했다.92) “합동”
이전까지 고려신학교에서 봉사했던 교수들이 전원 총신에 잔류했다. 전 조
직신학 교수 이상근, 총무요 교수였던 안용준뿐 아니라 합동 이전에 이미
고신에서 사실상 축출되었던 박윤선도 “환원” 이후 총신 교수로 남게 되
었다. 고신의 혈맹과 같았던 한부선 선교사를 비롯한 간하배 등의 미정통
장로교 선교사들도 이제 새 고신측보다 주로 합동측을 위해 일하게 되었
다.93) 한 마디로, “환원”으로 인해 고신측은 실리도 명분도 다 잃어 버렸
던 반면 구 승동측은 합동을 통해 명분과 실리 모두를 강화했다.
6. 맺음말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하나됨의 가치에 대한 깊
90) Bruce and Katherine Hunt, Personal Annual Report, 1964(1964. 12. 31), p. 2.
91) 한국 장로교회의 가장 탁월한 목회자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를 비롯하여 내수동교회 박이천 목사, 동도교회 최훈 목사 등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92) Bruce and Katherine Hunt, Personal Annual Report, 1964(1964. 12. 31), p. 2.
93) 김영재, “고신 신학과 개혁주의 전통,”..기독교사상 연구.., 고신대학교 부
설 기독교사상 연구소, 도서출판 영문, 1996, pp. 121~122. 허순길에 의하면,
한부선은 구 고신측의 “환원”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발견할 수 없어 “승동측
에 속해 있었다.” 허순길,..50년사.., pp. 190~191.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67
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각 교단이 당면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선택된 임시변통, 혹은 임기응변일
뿐이었다. 두 교단이 합동한 후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그 합동이 무산되었
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정략적 이해 타산이 일차적 동기가 된 연합
은 당연히 오래 갈 수 없다. 합동이 기대했던 만큼의 이익을 자신과 자파
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측은 바로 그 순간부터
합동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려하게 된다.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에
서 바로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국 교회에서 합동과 연
합을 시도하는 교단들 사이에서 언제든지 그러한 일이 재연될 수 있다. 그
런 의미에서 앞으로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교단들은 1960년대 초에 있
었던 이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의 역사를 주의 깊게 연구, 관찰하여 타산
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환원”이라는 말은 합동 이전의 구 고신측을 온전히 회복한다는 의미이
다. 그러나 1963년 구 고신측 일부의 재분리를 “환원”이라 부르기는 곤란
한 것 같다. 합동 후 두 교단의 속성은 서로 혼합되어 완전히 새로운 속성
을 가진 제3의 교단이 된다. 고신측, 승동측 양측이 합동하여 이루어진 새
교단은 이제 고신측도 승동측도 아닌 제3의 집단이었다. 그 새 교단에서
한 무리가 떨어져 나온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이전의 두 교단들 중 어느
하나와 온전히 동일시될 수는 없다. 노봉린은 1963년 고신측의 “환원”을
“한국 장로교회 역사상 교리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혹은 심지어 교리
상의 이유를 가장하지도 않은 첫번째 대분열”이었다고 지적했다.94) 그러므
로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분리했다는 남영환의 주장
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재분리된 “고신측”이 개혁주의 전통을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으로 표
방한다면 적어도 교회론에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칼빈이 교회 분리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는 유일한 경우는 기독교의 사활을 좌우하는 근본적
교리가 부정당할 때이다. 그 외의 어떤 사유에 의한 교회 분리도 칼빈은
가차없이 정죄했다.95) 그러나 “합동”된 교단으로부터 구 고신측 일부가 재
분리할 때 그들은 기독교의 중추적 교리는 고사하고 사소한 교리적 차이
94) Bong Rin Roh, “Division and Reunion,” p. 41. 91f. 서영일, p. 291에서 재인용.
95) 칼빈,..기독교 강요..제4권 1-2장을 보라.
168 연구논문
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사 구 승동측이 “합동 서약”을 어기고
신학교 이사직을 비롯한 교회의 “감투들”을 부당하게 독식했다 하더라도,
혹은 몇 사람의 신학교 졸업생에게 강도사 고시 응시 기회를 당장 거부했
다 하더라도, 심지어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교에 폐합하려 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모두 기독교의 생사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 교리 문제가 아니라
는 점에서 개혁주의 교회의 분열을 정당화시켜 줄 사유는 되지 못할 것이
다. 한 교단 안에 몇 개의 신학교를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목회자 양성
행정에 관련된 사안일 뿐이므로 교회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될 문제에 불과하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제10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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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ㆍ접수일 : 2007년 7월 10일 / 심사완료일 : 2007년 8월 30일)
........
거의 누구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
어 버렸으나 사실은 무려 3년간이나 한국 교회사 속에 실재했던 대단히 중요한 사
건이 있다. 그것은 1960년대 초 고려파와 소위 “승동측”이라는 두 장로교단들이 합
동했다가 재결별한 사실이다. 수 백개의 교단이 난립하여 무수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한국 장로교단들의 재결합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무려
반 세기 전에 있었던 장로교 연합을 위한 시도와 그 결과를 회고하는 것은 이 시
대 한국 장로교회에 중요한 시사를 줄 것이다. 양 교단은 왜 연합했다가 불과 3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는가? 장로교단들의 연합과 일치는 불가능한 일인가?
여러 정황과 진술들을 미루어 볼 때 1960년 당시 고신, 승동 양 교단의 합동은
같은 신앙과 신학을 가진 교회들 사이의 일치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순수한 연
합이라는 성격보다 각 집단 지도자들의 개인적 형편과 파당적 이익에 대한 고려에
서 비롯된 불순한 결합이었다는 성격이 짙다. 고려측은 당시 교단 지도부에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던 환경들, 즉 예배당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의 부당성에 대한 경
기노회 주류의 반발과 이탈, 박윤선 교수의 고려신학교 이탈 등으로 인한 교단 내
부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으로 합동을 추진했던 측면이 강하다. 한
국 장로교 내의 소수파로서 홀로 서기가 한계에 도달한 가운데 다른 집단과의 연
합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편, 승동측은 그들 나름대로 못
지않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연동측과의 결별 과정에서 주한 외국 장로교 선교
부 전부가 연동측의 정당성을 인정함으로 자파의 도덕적 명분의 약화, 국제적 고
립, 국내외 교회들의 부정적 시각, 주요한 교회 기관들의 상실 등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집단이라는 당당한 전통과 강경 보수라는 신학적 입
장을 가진 고려파와 합침으로 도덕적 명분을 강화하는 한편 장로교 분열이 연동측
의 신학적 자유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연동측과의 분열을 신학
적 정통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몰아가고자 했다.
합동을 통한 국면 타개에 급했던 고려파는 해방 후 그들이 일관되게 주장해 오
던 바, 신사참배 가담자들의 공적 참회고백, 자숙을 통한 정화 내지 권징 시행에
대한 일절의 언급 없이 승동측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교회 일치를 이루었
170 연구논문
다. 동시에 한상동은 신학교의 단일화 내지 일원화라는 합동 원칙에도 동의함으로
자신이 설립하고 애지중지했던 고려신학교의 독자적 존속조차도 합동을 위해 포기
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막상 합동한 후 고려측 인사들은 총회, 노
회, 신학교 이사회에서의 정치적 열세로 인한 교권적 소외감에 시달리면서 합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한상동 목사의 양자인 이근삼 박사의 총신 교수 채용이 박형
룡 교장의 거부로 무산되자 그러한 고려측의 소외감은 극에 달했다. 한상동은 결
국 돌발적이고 독단적으로 고려신학교 복구를 시도했고 불만에 가득하던 많은 구
고려측 인사들이 그것에 호응했다. 한상동의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은 재분리, 혹은
소위 “환원”의 첫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합동된 부산노회의 여러 구 고려파 인사들이 구 고려파 교단 “환원”을 선도했
다. 그러나 같은 부산노회 안에 있는 상당수 구 고려파 인사들은 그것을 “환원”이
아닌 “분리”라고 비판하면서 그 분리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합동된 교단에 잔류
했다. 그러한 수는 전국적으로 구 고려측 수의 1/3-1/4에 달했다. 그 결과 고려파는
여러 교수들 및 중견 목사들 상당수를 포함한 수도권 및 전국의 150개 교회를 상
실하고 주로 경남에 편중된 지역 교단이 되었다. 그들은 주로 신학교 문제, 이사의
수 반분 등 교회의 “자리들”에 합동 당시의 약속을 승동측이 “다수의 횡포”에 의
해 위반했기 때문에 환원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교회 분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사유로서 기독교의 사활을 좌우하는 근
본적 교리가 부정당할 때라고 못박았다. 그러한 개혁주의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고려측의 “환원”에는 어떠한 주요한 교리적 신학적 이유도 제시된 것이 없고 주로
교권적, 개인적, 감정적 사유들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측이 제기
했던 불만들, 즉 교권에 대한 합동시 약속들에 대한 승동측의 위반이 사실이라 하
더라도, 개혁주의 교회론의 관점에서, 그러한 사유들이 교회 분열을 정당화해 주지
는 못한다는 것이다. 1960년대 고려측과 승동측의 “합동-환원” 사건을 통해 우리는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그리스도 집단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하나됨과 형제
사이의 교제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추진하는 순수한 교회 일치가 아니고 파
당주의적 고려에서 추진하는 교회연합운동은 지속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
는다.
주제어 : 한국 장로교회, 교단, 합동, 환원, 재분리, 승동측, 고신측, 한상동, 고려
신학교, 총회신학교, 박형룡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71
Abstract
The Reunion and Schism of the “Seungdong” Group and the “Koryo”
Group in the 1960s
Yang Nak-Heong
Very few Korean Christians know that there was a period in the Korean church
history when the so called “Koryopa” and “Seungdong” group were reunited and then
split again. In the year 1960 they promptly reached the reunion and after less than
three years were separated. What was the reason that the church reunion was so
quickly broken. What led those two churches to be willing to the reunion? and Why
did they departed from each other? Now that many words are uttered about the church
unity and the reunion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es, learning about the history
of the church reunion and re-split would be a great help for the Korean churches to
prepare the reunion. In addition, the study of its process would reveal which party was
responsible for the church split.
The two churches were willing to the reunion in the thought that it would help
them to get out of the troubles they were in at that time. “Seungdong” group was in
trouble after their split from “Yeundong” group. All the missionaries in Korea sided
with the latter, so they were deprived of all the international support and fellowship.
Moreover, they were morally damaged because of the president Park Hyong Ryong"s
financial scandal. Actually the split from “Yeundong” group began from that. So they
wanted to restore their lost reputation by the reunion with the “Koryopa.”
On the other hand, “Koryopa” was in their own trouble at that time. After the
actual dismissal of professor Yoonseun Park, Korea Theological Seminary was not
functioning properly. Furthermore, they were going through an internal dispute and
conflict on the issue of legal contest among Christians. Some significant group in the
Kyonggi presbytery were in the state of actual split with the mainstream of “Koryopa.”
That was the reason that they were so positive to the suggestion of reunion from
“Seungdong.” group.
Unfortunately, however, Koryopa found out soon that the reunion was very
unfavorable for them in terms of the ecclesiastical power. Within two years, most of
important positions in the presbytery and the general assembly were taken by the
majority group “Seungdong.” The crucial incident was the president Hyongryong Park"s
denial of Dr. Keunsam Lee as the professor at Chongshin Seminary. Infuriated and
feeling humiliated, Sangdong Han decided to restore Korea Theological Seminary which
was originally founded by himself but were being incorporated into Chongshin
172 연구논문
Seminary after the reunion. The restoration of the Korea Seminary was the beginning
of the re-split of “Koryopa” and “Seungdong” group. Three years after the reunion, 2/3
or 3/4 of the original “Koryopa” claimed to have restored their original organization.
Key-words : Korean Presbyterian Church, denomination, union, schism, unity,
Seungdong, Kosin, Sangdong Han, Korea Theological Seminary, Chongsin
Seminary, Hyung Ryo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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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고신의 현대판 "분서갱유" 地域 敎會史 2011/08/06 16:37
:
: http://blog.naver.com/kjyoun24/60136573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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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장고신의 현대판 "분서갱유"
: 양낙흥 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 회수·폐기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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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장고신이 교단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며 회수·폐기하기로 결정한 양낙흥 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 (생명의말씀사 홈페이지 갈무리)
:
:
: 한 권의 교회사 서적이 출판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예장고신(총회장 윤현주 목사)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이유다. 문제의 서적은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양낙흥 교수가 쓴 <한국장로교회사>다. 양 교수는 일종의 "분서갱유"라며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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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사태는 부산노회가 2010년 제60회 총회에 헌의한 안건이 발단이 됐다. 부산노회는 양낙흥 교수가 교단의 정체성을 훼손했으며 교단의 기존 입장을 벗어나 WCC 운동을 옹호했다며, 양 교수의 신학을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산노회가 근거로 제시한 것이 양 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다. 논란 끝에 총대들은 특별위원회(위원장 이용호 목사)를 구성해 조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처분을 노회 임원들로 구성된 총회 운영위원회(운영위)에 맡기기로 했다. (관련 기사 : 학자, 교단에 충성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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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위원회는 지난 6월 14일에 조사를 마무리하고 운영위에 4개항을 건의했다. 첫 번째가 양 교수로 하여금 <한국장로교회사>를 회수해서 폐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한국장로교회사>를 고신대학원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관계 기관에 양낙흥 교수의 순환 보직을 지시하고, 양 교수가 운영위에 사과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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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위원회는 징계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 양 교수가 교단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를 분리주의자로 매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별위원회는 운영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양 교수의 집필 의도가 설립자도 범죄하고 실수하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치중됐다. 그 결과 교단 소속 목회자나 교인들의 자긍심에 손상을 줬다"고 했다. 그리고 WCC에 대한 양 교수의 입장이 WCC와 2013년 WCC 부산 총회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교단의 의견에 역행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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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교수는 특별위원회의 조사에 대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발해 왔다. 이에 대해 특별위원회는 "학문은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유익하게 하는 범위를 지킬 때 허용되는 것이다. 양 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는 교단의 권위와 정신을 침해했다. (양 교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원 교수로는 부적합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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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교수는 징계보다 학문적인 검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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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양낙흥 교수는 학문적 연구 결과는 치리회의 징계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연구물은 먼저 그 분야의 학자들의 토론과 논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한국장로교회사>에 대한 학술 토론이나 논문 등 학문적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연구에 오류가 있다면 먼저 정확한 사료를 제시하고 객관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 처벌받아야 할 일인지 의문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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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양 교수는 위원회가 자신을 징계하려는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라 할지라도 교단 역사 가운데 잘못된 부분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징계 결정을 내린 것 같다. 그런 경우 학자에 대한 정당한 징계가 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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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운영위는 지난 7월 회의를 열고 특별위원회가 양 교수에 대해 건의한 사항을 이행하기로 했다. 한 운영위원은 "서적을 회수·폐기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지 미지수다. 양 교수 스스로 조치를 취하게 해야 하는데 어려울 것 같다. 관계 기관이 나머지 사항을 언제 이행하도록 지시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2011.8.6. 뉴스앤조이 / 백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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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장고신 60회 총회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부산노회가 제기한 양낙흥 교수의 "교단 정체성 훼손"과 "WCC 옹호" 혐의를 조사하기로 했다. ⓒ뉴스앤조이 백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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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자, 교단에 충성하라?
: 부산노회 "양낙흥 교수 고신 정체성 훼손"…양 교수 "학문적인 검증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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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장고신(총회장 윤현주 목사) 제60회 총회 마지막 날인 10월 1일, 폐회 시간을 맞추기 위해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런데 부산노회가 헌의한 한 가지 안건이 논란이 됐다. 안건을 두고 총대들의 찬반 발언이 이어졌다. 지리한 공방 끝에 총대들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처분을 운영위원회에 맡기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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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건은 고신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양낙흥 교수에 관한 것이다. 부산노회는 △양 교수가 교단의 역사를 왜곡하고 정체성을 훼손했다 △교단의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WCC 운동을 옹호했다며, 양 교수의 신학을 검증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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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초 합동과 고신의 "분리"에 관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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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노회는 교단의 정체성을 훼손한 근거로 양 교수가 지난 2008년에 쓴 <한국장로교회사>를 제시했다. 고신은 1960년대 초에 예장합동 교단과 통합했다가 3년 만에 갈라져 나왔다. 양 교수는 <한국장로교회사>에서 고신이 합동에서 다시 분리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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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동이 승동 측과의 합동을 결심했던 결정적 요인은 박윤선의 고신 이탈로 말미암아 신학교 운영이 치명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된 상황이었다. (중략) 고신 출신 교수들이 확보되었으니 한상동으로서는 다시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다. (중략) 둘째는 교권에 대한 애착설이다.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당시 고신 복구에 반대했던 어떤 목사는 한상동이 고신 복구를 원했던 첫째 이유는 "주도권"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중략) 한상동이 고신 복구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로 여러 관측자들에 의해 지적되는 사실이 있다. (중략) 박형룡 총신 교장이 1962년에 화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한상동 목사의 양자 이근삼 박사의 총신 교수 채용을 조직신학 교수가 많다는 이유로 거부했다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사>, pp.660 ~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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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부산노회는 "양 교수가 고신 총회를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명분 없이 분리주의자(한상동 목사)에 의해 세워진 분파주의 총회라고 규정했다"고 주장했다.
:
:
: 하지만 양낙흥 교수는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자신이 쓴 글의 핵심은 교단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양 교수는 "합동과 합쳤다가 다시 분리한 사건이 명분 없는 분열이었다고 지적했을 뿐이다. 교단의 근간이 되는 신학·교리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양 교수는 "고신의 과거에서 회개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다른 교단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손가락질만 할 것이 아니라, 고신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서도 겸손하게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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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CC 옹호? 자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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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노회는 양 교수가 지난 6월 한국기독교학술원 공개강좌에서 발표한 논문도 문제 삼았다. "한국교회와 WCC"라는 주제로 개최된 강좌에서 양 교수는 당시 "제10차 WCC 부산 총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그는 WCC가 종교다원주의에 열려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진 한국교회의 상황과 WCC가 세계 최대의 기독교 연합 단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참여를 통한 개혁도 고려해야 할 방법 중 하나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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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 선언을 통해)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본격적으로 신학화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 (타종교에는) 왜 구원이 없는지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연구들을 살피고 그 문제점과 약점들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WCC는 설령 그것에 다소 교리적,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볍게 포기해서는 안 될 가치 있는 단체이다. (중략) 밖에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주도력을 발휘함으로 그것을 올바른 신학 노선으로 선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다" ("제10차 WCC 부산 총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pp.19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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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노회는 WCC에 참여하자는 양 교수의 주장은 교단의 기존 입장에 반하는 것이라며,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양 교수의 신학적 입장에 의문을 표했다. 이들은 "WCC는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운동을 하는 단체다. WCC를 옹호하는 양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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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노회의 비판에 대해 양 교수는 WCC를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논문을 쓰기 위해 6개월 동안 WCC에서 발행한 문서와 관련 서적을 읽고 연구했다"며, "이번 연구는 WCC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였다"고 했다. 또 자신의 신학을 검증하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맹목적으로 WCC의 신학적 입장을 찬양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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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의 자유 침해 VS 학문 연구는 교단 입장 고려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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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낙흥 교수의 "교단 정체성 훼손"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년 10월 고신대학원 개교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양 교수는 합동에서 재분리한 것을 고신 교단이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부산노회·북부산노회가 57회 총회에서 "교단 출범의 정당성을 부정했다"며 양 교수의 징계를 요구했다. 하지만 2년간의 연구 끝에 59회 총회는 "혐의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부산노회가 또다시 헌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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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노회 김종선 목사(초장동교회)는 지난 총회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그는 "신학위원회가 양 교수를 조사할 때 우리 노회가 관련 자료를 제대로 제출하지 못해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헌의안은 57회 총회에 제출한 것과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김 목사는 "양 교수의 주장이 옳다고 할 때 목회 현장에서 교단의 역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번 헌의안은 이에 대한 대책을 총회에 요구한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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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성은 목사(부산삼일교회)는 교단 소속의 학자라면 교단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손 목사는 "양 교수가 학문적인 양심에 따라 연구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교단 신학교에서 일하는 교수는 일차적으로 교단의 정신과 정체성을 계승하고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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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낙흥 교수는 지난 총회에서 결론이 난 사안을 다시 문제 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연구 결과에 대해 학문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곧바로 총회에서 검증하려는 시도를 우려했다. 그는 "우선 연구 결과를 학문적으로 검토하고 토론해야 한다"며, "기존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징계부터 하려 드는 것은 학문 연구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했다. 양 교수는 "과거를 정직하게 직면해야 교단이 발전할 수 있다. 교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과거의 잘못을 지적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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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 임원회는 지난 10월 7일 양 교수 건을 다룰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 9명을 선임했다. 정근두 부총회장(울산교회)은 "11월 19일에 열리는 운영위원회에서 위원을 승인하면 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다. 위원회의 활동 과정을 지켜봐 달라"고 했다. (2010.11.16. 뉴스앤조이 / 배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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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성은 목사가 기사에 대해 반론을 게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손 목사는 자신의 논지가 "양낙흥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 고신 총회에서 의견을 교환하는 사람들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선 목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노회를 통해 총회에 질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양 교수의 연구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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