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무속화된 기독교
《한국교회허실》무속화된 기독교
이 글은「한국교회의 허와 실(Ⅰ)」(기독교신문 취재팀, 92.9월)
에서 발췌한 글로써, 기독교신문에서 연재되고 있는 '한국교회...
그 문제의 현장 집중취재'에 실린 기사를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 무속화(巫俗化)된 기독교
- 잘못된 신앙형태가 기복신앙으로 전락
한국 교회가 무속적인 성향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특히 무속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기복종교로 전락되며, 잘못
된 신앙행태를 전파하는 경우가 많다. 무속화된 기독교의 실태와 문제
점, 그리고 그 대응책 등을 알아본다.
-현실적(現實的)인 기복종교(祈福宗敎)-
무속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시베리아 등지에 넓게 퍼져
있는 하나의 종교적 신앙형태로, 인간세계를 초월하는 영계가 있어 인
간의 모든 길흉화복을 지배하고 영계와 인간과의 교통은 무당(Shaman)
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는, 하나의 종교적 현상이다.
무속은 그 신앙의 기초를 모든 사물에 정령(精靈)이 있다고 믿는 애
니미즘(정령숭배)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범신론적·다신론적 신
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속을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느
냐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우리가 중시해야 할 사실은 우리나라에 불교·유교·도교 등이 들어
온 시기가 4세기경이고 그 이전에 우리 민족을 지배해 왔던 신앙형태
는 무속이라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유교 등과 같은 외래종교
가 전래된 이후 무속과 결합돼 하나의 혼합주의적 양상을 보이는 경우
도 허다하게 발견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러 외래종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름대로 뿌리를
내리고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를 굳혔지만,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
에는 무속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같은 무속적 성향은 기층민중
으로 갈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무속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
사상은 기독교가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사상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속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기독교
선교를 용이하게 해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
은 무속적인 성향이 기독교에 가져다 준 이점보다는 폐해가 훨씬 크고
심각하다는 데 있다.
무속은 근본적으로 현실의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기(除災招福) 위
한 신앙형태이다. 무속에는 또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지금의
존재양식을 유지하면서 의타적인 복을 비는 정체된 신앙형태이다. 이
같은 무속의 속성은 한국의 기독교를 같은 속성을 가진 종교로 변화시
켜 버렸다.
즉, 한국의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통한 존재 자체의 궁극적인 변화와
변화를 통한 새로운 삶을 강조하기보다는 '예수 믿고 복 받는다'는 식
의 기복적이고 현실적인 종교로 전락하게 된 것은 이같은 무속의 속성
이 기독교에 그대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 기독교의 신앙행태에는 무속적인 요소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무속의 '사제(Priest)'라고 할 수 있는 샤만, 즉 무당에 대하여 살
펴 보면 오늘날 일부 목회자나 교인들의 행태와 유사한 점이 발견되기
고 한다.
무당은 황홀경(엑스타시)에 빠져 신적 존재와 자신이 합일됨을 경험
한다. 이처럼 황홀경에 빠진 무당은 미래를 예언하기도 하고 영계의
신을 불러들이거나 신들의 말을 대언(代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
은 황홀경의 목적은 윤리적 결단을 촉구하거나 역사를 바로잡는 데 있
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재앙을 멀리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다른 점이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이 정신 못차릴 정도로 시끄럽게 찬송가를 부
르게 하고 빠른 설교 등을 통해 청중들을 황홀경에 몰아넣고 '복'을
강조하는 것은 이같은 무속의 제의적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신앙적인 결단과 실천을 촉구하기보다는 타계적
인 안락과 현세적인 축복을 미끼로 교인들을 사로잡으려는 의도 자체
가 기독교적이기보다는 무속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속에는 역사 발전의 법칙이 없다. 따라서 무속이 성행하는 사회는
역사적으로 정체돼 있을 수밖에 없으며, 문화적·정치적으로도 배타적
이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제까지 발전적인 모습
을 보여주지 못하고 계속 같은 행태를 반복하는 정체된 모습만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과 뿌리깊은 보수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결국은 기독교에 파고들어가 있는 무속적인 성향 때문이라는 사실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토착화를 위해서 무속과의 관계를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
다. 그러나 뿌리깊은 무속적인 심성이 가져다 주는 폐해를 말하는 것
은 토착화와는 상관없는 일이며, 진정한 의미의 토착화는 기독교가 본
래적인 모습을 되찾은 뒤에 다시 논의해야 할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무속적인 행태,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본래적인 모습을 이
탈한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1백일 합격기도' 성행-
매년 입학시험을 앞두고 많은 교회들이 교회당 정면에 현수막을 내
걸고 입시생을 위한 '입학시험 합격 특별기도회'를 갖고 있다. 이 기
간에 교인들은 수험생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정답이 있는
곳으로 손을 움직여 달라'고 합격을 간구한다.
경기도 화성군 발안의 C교회와 종로구 Y교회는 매년 정기적으로 입
시생들을 위한 1백일 기도, 40일 기도를 드리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부
터 인간의 생사화복을 조절하는 무속적인 기능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
고 있다.
이러한 기복적인 작정기도는 많은 교회들이 신년초에 '축복성회'를
갖고, 이날을 중심으로 교인들은 1백일 작정기도에 들어가 소원을 빌
며, 가정의 평화와 경제적인 부와 무병을 빌고 복을 기원한다. 또 이
성회에서 교인들에게 '신년 소원 헌금'을 바치게 하여 복을 빌어주고
소원 성취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
서울시 마포구 Y교회 M모 목사는 매년 신년성회를 개최, 헌금봉투에
자신들의 소원을 적게 하여 한 사람씩 강단으로 불러 축복기도를 해준
다. 또한 상계동에 위치한 S교회는 교인들에게 1년 동안의 잘못을 종
이에 적게 하여 불로 태우는 의식을 갖고 있고, 구의동 M교회 P목사는
교인들의 소원을 종이쪽지에 적어 상자에 넣고 교인들로부터 추첨하게
하여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이 당신이 1년 동안 해야 할 일이라고 명령
한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예배학을 전공한 K모 목사는 '무당이 복채를
받고 굿을 해주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지적했다.
송파구에 교회를 개척한 S목사는 사업에 실패하고 찾아온 교인에게
"당신의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천만 원을 헌금해야 한다"고 명
령하고 "만약 이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심판이 있을 것이다"
라고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여, 위로를 받기 위해 찾아온 교인에게 실
망만 안겨주었다.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M기도원 S목사도 사업에 실패하고 기도원을
찾아온 K모 집사에게 "1억 원을 들여 나와 함께 교회를 개척해야만 사
업에 성공할 수 있고 내 주머니에 항상 50만 원을 채워 놓으라"고 명
령을 하였다. K집사는 S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을 저당잡혀 은행에서 5천만 원을 빌려 교회를 개척하고,
결국 K집사는 원금은 물론 이자도 못갚아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
나고 말았다.
S목사는 또 충북에 임야 2만 5천 평을 소유하고 있는 돈 많은 과부
집사를 유혹하여, 그곳에 기도원을 세워 함께 운영하기로 약속해 놓고
등기 이전을 마친 후 쫓아내기도 했다. 이 경우는 목회자가 교인들의
무속적인 기복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문제가 M기도원 S목사에만 한정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대한수도원에서 수도를 받고 내려온 이모 권사는 송파구 거여동에
'구국제단'이란 사설 가정제단을 차려놓고 교인들을 유혹하여, 점치듯
이 미래의 길흉을 예언해 주고, 안수를 하면서 몸에 십자가를 긋고 신
도들에게 '3일 동안 기도하라' '○백만 원을 헌금하라' 등의 명령을
한다.
이렇게 사설 가정제단을 차려놓고 예언과 신유의 역사 등으로 교인
들을 유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신도들로, 은혜를 받았다며 교회
조직에서 뛰쳐나와 교인들의 무속적인 종교심을 역이용하여 하나의 경
제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주지해야 할 것이다.
또 이들 사설 가정제단 원장들은 기도를 받으러 온 교인들과 함께
춤을 추며 손뼉치고 노래하며 의식을 잃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여 방언
을 하고 주문을 던지며 부적 같은 글씨까지 방필로 쓴다.
이 현상에 대해 K모 목사는 "무당의 푸닥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지적하고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이 주술적이며 무속화되어 가고 있다"
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잘돼도 하나님의
은혜, 안돼도 하나님의 은혜, 괴로워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고 한
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행태를 꼬집었다.
경기도 성남시 B교회 김모 목사의 부인은 기도하는 것도, 외국 나가
는 것도, 헌금하는 것도, 심방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움
직인다고 믿는다. 그녀는 또 교인들에게 "○○만 원을 헌금해야만 축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헌금을 강요하여, 결국 교회 내부문제로 번져
보따리를 싸야 할 형편에 놓여있다.
-신학 부재(不在)가 큰 요인-
앞에서 지적했듯이 한국 교회 안에서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농후하게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옛날 상고 때
부터 신비스럽거나 초월적인 문제로 인해 어떤 신의 존재를 인정하거
나 숭배하는 경향이 있어 왔고, 그것이 무속신앙으로 발전하면서 한국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 기복적인 신앙이 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이 한국 교회가 신령을 숭배하고 이러한 것들을 공대함으로 재
해를 면하고 복을 받는 등의 기복적인 신앙을 전통적으로 물려받다보
니 오늘날의 한국 교회 밑바탕에 샤머니즘적 요소가 짙게 깔릴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또한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일제 식민지치하, 6·25전
쟁 등 사회의 불안과 가난, 그리고 한많은 백성으로 열강의 틈바구니
에 시달려 오면서 그 무엇인가 의지하려고, 현실을 도피하려는 사상이
한국 교회 전반에 깔리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문상희 교수(연세대)는 "초기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
될 때는 미신타파 등을 구호로 무당종교와 치열한 투쟁을 벌였기 때문
에 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 교회 지
도자들이 한국 교회 안에 침투하고 있는 샤머니즘 요소와 정면 투쟁하
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둠으로써 오늘날 한국 교회가 견지해야 할 기
독교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문교수는 "해방, 6·25
전쟁, 산업화 등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신흥
종교, 사이비종교 교주들이 무당과 비슷한 신적 요소들로 사람들을 미
혹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을 한국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교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샤머니즘 요소의 원인에 대해 정치적
인 면, 역사적인 면, 문화적인 면 등 다양하게 지적될 수 있겠지만 앞
에서 언급한 것으로 축약하고, 여기에서는 한국 교회라는 울타리 내에
서 그 원인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통일성과 신학의 뒷받침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앙은 '지·정·의' 3대 요소가 상호작용하
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샤머니즘은 정서적인 면, 신앙의 기본적
인 종교성만을 강조한 결과 신앙의 지적 요소와 윤리적인 면이 부재상
태에 빠지게 되고 그로 인해 신앙의 통일성을 기할 수가 없게 만든다.
둘째로 한국 교회의 지도자, 목회자, 교사의 책임 문제이다. 하나님
께 순종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데 샤머니즘이 보여주는 신에
대한 태도는 신을 자기들의 기복을 위해 이용하려는 수단으로 여긴다
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 말씀의 토대에서 샤머니즘을 포함한 문화도 승화
시켜 나가야 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오히려 교인들의 요구에 끌려다니는, 아니
샤머니즘적 요소를 부추기는 언행들을 일삼아 왔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즉, 하나님의 진리와 윤리성을 무시하고 그저 교회 숫자가 많아지
고, 교회 재정이 많아지면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교회 지도자들
의 사고에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이는 곧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 부재
에서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신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선포하느냐를 점검하면서 시정해 왔어야 하는데 오늘의 교회
는 당장 지도자가 하고 싶은 성장, 교인들이 기뻐하는 데만 호응하여
그 방향으로만 나아감으로 신학의 사명을 도외시하게 됐다고 볼 수 있
다.
셋째, 교회가 교회 밖의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방향 제시를 이끌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
씀에 기초해서 복음을 바로 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다보니
기성 교회에 대한 반감, 불안 등이 작용하게 되고, 정치·경제가 불안
하고 사회가 안정되어 있지 못한 이유에서 샤머니즘 요소가 강한 이단
종교에 미혹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
로 현세적인 구원과 축복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교회가 치닫게 된 것이
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국 교회에 앙금처럼 깔려있는 샤머니즘적 요소를
걷어낼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문상희 교수는 "교회 안에서 제2의 미신타파 운동이 일어
나야 한다. 무당의 종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여 교회
안에 샤머니즘 요소를 척결해 나가야 하며, 무당의 종교를 비종교화
(非宗敎化)하여 민간 차원의 하나의 풍습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또한
기독교 본질에 대한 신학화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
다.
이제 한국 교회는 무속신앙의 유아기적 종교행태에서 벗어나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의 토대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
게 할 때만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환상속의 그대 °°
결코! 시간이 멈추어 줄 순 없다 요!
무엇을 망설이나 되는것은 단지 하나 뿐인데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
단지 그것 뿐인가 그대가 바라는 그것은
아무도 그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 둘 셋 렛츠고 그대는 새로와야 한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도전하자.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그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은 오직 꼭 잘될거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세상은 요! 빨리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환상속엔 그대가 있다!
모든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 서태지와 아이들
그게 바로 당신인가!
You!
기도만 하는 그대
멍하니 교회 의자에 앉아 있는 그대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대
모든 게 잘될거라는 환상에 빠져있는 그대
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인생을 얘기하는 그대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력한 그대
무너지고 있는 그대
무너지는 그대..
《한국교회허실》무분별한 안찰행위(상) 05/19 00:11 276 line
■ 무분별한 안찰행위(상)
- 기복적 측면만 강조, '미신화' 부채질
한국 교회만큼 '안찰'이 성행하는 교회도 없다. 물론 안찰은 치유사
역의 한 측면이라는 점에서 무턱대고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 그
러나 교회의 안찰행위에 대한 비난이 안팎으로 흘러 나오고 있는 현실
이다. 안찰행위의 신학적 근거, 그리고 현재 나타나는 현상과 반응 등
은 과연 어떤 것인가?
-원래는 '영적인 은혜'를 상징-
현재 교회 안팎으로 성행하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로 '안수' 문제를
들 수 있다. 특히 기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밖의 안수문제는 형태
적인 면으로나 내용적인 면으로나 지극히 남발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안수 인플레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안수가 남발되는 가운
데, 안수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개념적 의미를 다시금 되짚어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비성서적인 안수가 성행함으로
써, 다시 말하면 기복적이고 또는 미신적인 안수가 횡행함으로써 그
틈바구니로 이단과 사이비 신앙이 활개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
다.
먼저 '안수'라는 단어가 갖는 사전적인 의미는 기도를 받는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일, 목사나 장로가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일, 축복을 하는 의식 등으로 구분해서 나타낼 수 있다.
안수의 사전적 의미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전해주거나 이전시켜
계승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지가 안수하는 사람
을 통해서 안수받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
서 부각되는 문제점은 안수하는 사람의 직위와 관련된 안수의 본질문
제라고 하겠다.
안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수의 성서적 개념을 알아볼 필
요가 있다. 왜냐하면 '안수'가 성서를 기초로 발전되어 왔고, 사전적
인 의미 역시 성서를 토대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성서적인 개념을 살피기 전에 성서에 나타난 안수 형태를 보
면,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할 때(창 48:14∼20),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
함(레 4:14∼15), 레위인에게 안수함(민 8:10), 여호수아에게 안수함
(민 27:18∼23), 그리고 신약에 이르러서는 죽은 자를 살릴 경우(마
9:18), 집사를 임명할 경우(행 6:6), 그리고 장로의회에서 행할 때(딤
전 4:14)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안수를 사용할 경우 그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제물
과 바치는 제사장을 동일시'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안수에서 헌
신의 의미와 더불어 속죄의 수단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구약시대에서의 안수는 전하거나 계승시킬 경우, 제사를
드릴 경우, 헌신을 나타낼 경우에 각각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구약의 의미와 달리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 받
아들여지게 됐다. 즉, 세례받은 자가 성령의 경험을 하지 못할 때 안
수를 통해서 가능케 했으며(행 8:12, 19:6), 반대로 세례받지 않은 자
가 성령을 경험할 때 안수를 행하였던 예(행 10:44∼48)를 찾아볼 수
있다. 이외에도 교회의 직분을 맡을 자에게 행했고(딤전 4:14), 축복
할 경우(마 19:13∼15), 병 고칠 경우(막 16:18)에 각각 안수를 행했
다고 성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앞에서 나열한 것을 통해서 볼 때, 안수는 일정한 목적에 따라 다y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안수의식 자체가 하
나님의 은사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안수와
관계없이 성령이 임재했다는 성서의 기록을 통해서 안수란 단지 기도
자가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것을 진실된 마음으로 청한다는 외적 표
현, 다른 말로 종교적 의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y 결국 종합적으로 안수행위는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이나 권리를 계승
하고, 또 더 나아가서는 그가 주시는 이른바 공적인 영적 은혜의 전달
을 상징하는 외적 표현이라고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안수를 하는 행위자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안수행위를 통해 은사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부각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 여기서 지적해야 할 다른 하나는 안수행위가 특정한 영역에서 지
나치게 성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적으로 안수행위는 앞에서 열거
한 대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현대판 안수행위는 지
극히 '기복적인 형태'로 국한되고 있어 오히려 비성서적인 경향을 띠
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연말연시를 맞아 사업의 번창을 기원할 때든지, 입시철에 특히 성행
한다든지, 혹은 몇몇 기도원에서 무분별하게 남용한다든지 하는 경우
는 안수행위가 얼마나 기복적으로 흐르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안수를
개인이 사유화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특히 안수행위의 사
유화 내지 독점화 현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의 성격이 '공적'이라
고 했을 때, 안수 행위자y 은사간의 연속적인 부조화를 확연히 드러
내 준다고 하겠다.
-기도원에서 주로 발생-
안수 내지 안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기도원이
다.
구한말 쇄국정책에 이어 일제하에서 목회자들이 은밀한 산에 올라
가 기도하기 시작하여 수도원 형태를 지녔던 한국 기도원은 해방 후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해방 전에는 단 2개뿐이던 기도원이 1975년에 207개, 1978년 239개,
1988년 462개로, 최근에는 도심 지하 기도원까지 전국 5백여 개가 넘
는 수로 늘어났으며 기도원을 찾는 교인 또한 늘어나고 있는 추세
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원이 이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5백여 개가 넘는 많은 기도원 중 80% 이상이 무허가 기
도원이며, 아직까지도 이들 기도원이 기도원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병자를 치료하는 데 열중하거나 운영에 있어 수익성 위주로 헌금을 강
요하는 데 있다.
한국 기도원의 운영형태는 크게 장소 제공, 특별 부흥회 개최, 병자
치유 등을 꼽을 수 있다. 70,80년대 옥외 대형 부흥집회가 교인들의
무관심과 물량주의를 내세운다는 사회의 비난 속에 줄어들면서 나타난
현상 중 하나가 기도원 연합 부흥회였다.
이에 따라 기도원에서는 교회나 단체의 수양회는 물론 특별집회 등
의 장소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 대형교회들이 자기 교회 교인
들의 기도처를 위해 만든 몇몇의 기도원을 제외한 기도원은 개인이 운
영하고 있으며 상업화되어 있다. 심한 경우 장소 사용료 때문에 기도
원측과 사용자간에 마찰이 일기도 한다.
기도원이 한국 교회 성장에 기여한 면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런 경
우 기도원을 찾는 많은 교인들이 마음만 더 착잡해하며 산을 내려오기
일쑤다.
다음으로 기도원이 주최가 되거나 부흥 목사들이 주관하는 '특별 부
흥회' '성회' 등을 개최하는 경우다. 몇몇 기도원의 경우, 연중무휴
부흥회 등 특별 성회를 개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도원 혹은
부흥 단체들이 주최가 되어 개최하는 각종 부흥성회에는 인원 동원 능
력이 탁월한 전문부癤永湧 적게는 3∼4명, 많게는 10명 이상 참여하
고 있다.
이 경우 흔히 3·7제 또는 4·6제로 부흥성회에서 나온 헌금을 기도
원과 부흥사 양측이 분배하며, 유명도가 높은 부흥사일수록 헌금에서
차지하는 몫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헌금이 목표 액수
보다 적을 경우, '헌금짜내기'란 독특한 방법을 쓰고 있다는 말도 심
심찮게 산 밑으로 흘러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건전한 기도원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최근에는 부흥회보다 각종 세미나와 심포지엄 등을 냉例求 기도원이
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많은 기도원에서 값싼 은혜를
비는 기복 위주의 비성경적인 부흥회가 성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문제들 외에도 기도원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기도원이
란 이름 아래 정신질환자나 난치병환자를 집단 수용해 놓고 환자 보호
자로부터 응분의 대가를 받아내거나 심지어 사이비 의료행위로 금품을
갈취한다는 것이다.
지난 70년, 전국 유명 산속에 있던 기도원들이 자연을 훼손시키는
한편, 일부 탈선의 온상으로 지목되면서 대대적으로 기도원이 철거됐
다. 그렇지만 기도원의 정신병자 수용 및 사이비 의료행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지난 83년 8월부터 부산 B기도원 및 양평의 S기도원 등 12곳의 기도
원이 '노인 학대 표본'으로 실상이 낱낱이 공개됐다. 당시 수사를 맡
은 경찰당국은 "전국 111곳의 기도원에 8,540명의 정신질환자 및 노인
이 수용되어 있으며, 이들 중 전체 68%인 76개소가 보사부의 사회복지
법인 허가가 나지 않은 기도원이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대부분의 기
도원이 수용자를 불법 감금, 폭행 치사, 폭리, 지원금 횡령, 주변 산
림을 훼손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많은 기도원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까지도 많은 기도원이 이런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한국의 기도원은 운영 형태에 따라 혹은 성격에 따라 수양관 형식의
기도원, 기업화된 기도원, 요양원 형태의 기도원 등으로 구분할 수 있
다. 이들 기도원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문제는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도시 대형 교회들이 주축이 되어 조성하고 있는 최신 기도원과
는 달리 대부분의 기도원들은 개인이 운영하기 때문에 그 영세성을 면
치 못하고 있다. 이들 개인이 운영하면서 사유화된 기도원은 그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헌금을 짜내고 있
는 것이다.
이밖에도 이들 기도원이 안고 있는 문제는 지나친 신비주의에 개인
의 체험을 강조하여 복음을 변질시키고, 개인의 은사를 과대선전하여
성령의 역사를 그르치며, 샤머니즘적인 축복과 종말론을 강조하여 비
성서적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젊은층일수록 부정적-
이같은 기도원이나 일반 교회에서의 안찰문제에 대한 교회나 일반
사회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것
은 아마도 안찰이 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정
상적인 종교현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목회자들의 경우, 교인들이 무턱대고 기도원이나 신유집회 같은 곳
을 찾아다니는 것을 막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교인들이 '기도원 맛'
을 본 이후에 일반 교회의 예배 행위나 목회 형태를 '우습게' 여기는
현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행정국장을 맡고 있는 강창석 목사는 안찰이
나 신유에 대해 긍정·부정을 명확하게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여러번 병원치료 등을 시도하다가 '막판에 몰려' 기
도원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실제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목사는 기도원을 찾는 교인들에
게 담임교역자가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유집회를 찾는 교인들을 목회자가 방치할 경우, 자칫하면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많다. 그렇게 되면 일반 교회
의 예배는 예배로 느껴지지 않기 십상이다. 또한 무조건 막기만 할 경
우에 교인들이 담임교역자 몰래 그런 현장을 찾게 되고, 종국에는 신
앙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게 된다"는 것이 강목사의 주장
이다.
반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한마디로 기독교의 안찰행위를 '광
신적 행위'로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주위에 기독교인을 둔
사람일수록 더욱 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비기독교인들이 안찰
행위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이유는 행위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주위
를 생각하지 않고 너무 시끄럽게만 군다, 기도원의 비상식적인 행태가
혐오감을 준다는 것 등이다.
결혼 전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집에서 살았다는 오모 씨(32·사업)
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같은 집에 모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살았는데 아들이 뇌성마비였다.
교회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찾아와 울고불고 하며
기도를 하곤 했는데, 심한 경우 아이를 엎드리게 해놓고 마구 때리는
적도 있었다. 병을 고치기는커녕 저러다가 아이를 죽여버리지나 않을
까 걱정이 앞섰다"
그 당시의 기억이 너무 혐오스러웠기 때문에 지금도 교회라는 말만
들어도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긴다는 오씨는 "기독교가 스스로 자신의
권위와 중요성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혹평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젊은층일수록 안찰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
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안찰이 정상적인 신
앙형태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안찰행위를
'비신앙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기독교인들도 많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
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찰'에 대한 신학적인 개념 정립이나 어느 정도의 규정이 마련돼
야 한다는 논의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시해야
할 문제 중에 하나는 안찰문제가 기독교 내부와 외부를 막론하고 커다
란 문제 요소로 대두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정상적인 신유 은사의 활용이라는 차원을 떠나서 안찰 자체가
기독교의 모든 모습인 것처럼 알리면서 기존의 교회를 이탈, 밀의종파
(密義宗派)화 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나타나고 있어 교회 차원의 대책
마련과 입장 정립이 절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 교회는 이 문제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문제를 애써 도외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기껏해야
개교회 차원에서 단속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수수방관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안찰행위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역사
적인 요인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가? 교회 안팎으
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잘못된 안찰행위'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이에 대해 교회는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인가?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무분별한 안찰행위(하) 05/19 00:14 269 line
이 글은「한국교회의 허와 실(Ⅱ)」(기독교신문 취재팀, 93.5월)
에서 발췌한 글로써, 기독교신문에서 연재되고 있는 '한국교회...
그 문제의 현장 집중취재'에 실린 기사를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 무분별한 안찰행위(하)
- 병고침의 주체는 하나님
-신유의 은사 부인 못해-
최근 국내 모일간지에 안찰을 통해 고혈압 환자를 고친다고 환자를
마구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짤막하게 보도됐다. 그러나 안찰행위와
관련,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은 이외에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
곤 했으며, 앞으로도 안찰을 통한 병고침이 계속되는 한 끊이지 않고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안찰을 하다가 환자를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하는 일은 사실 안찰이
갖고 있는 문제점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안찰 자체가 갖고 있는
신앙적·신학적 문제는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훨씬
깊고 그 파장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 교회는 안찰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이념을 정립하지 못
한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으며, 단지 개교회 차원에서 안찰 집회를
좇아 다니지 못하게 막는 정도의 소극적인 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안찰'의 연원은 아무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가 '병든 사람과 죄인'을 위해 오셨
다고 공공연히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몸소 문둥병자·소경·앉은뱅
이 등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도 했다. 또 제자들에게 사역을 맡기실 때
도 "가서 병든 자를 만나면 고쳐 주어라" 하시며 '치유의 은사'를 내
려 주셨다. 이때부터 '신유의 은사'는 믿는 사람이 받는 여러 가지 은
사 중의 하나로 꼽히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0년대 초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부흥집회에서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기독교인
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신유의 기적이 '놀라운 현상'으로 인
식되기 시작하면서 신유집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됐고, 이같은
집회는 신비주의 부흥집회를 주도하는 그룹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
져 내려오고 있다. 60,70년대의 현신애 권사의 신유집회, 조용기 목사
의 이른바 '삼박자 구원'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병고침, 그리고 최근의
할렐루야 기도원 김계화 원장의 신유집회에 이르기까지 안찰을 통한
병고침은 한국 교회 1백여 년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최근에 들어서는 이같은 신유집회가 기도원이나 교회 등 공식적인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제단' 등 작은 규모의 '밀의
종파(密義宗派)'식 집회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한 기도원에 딸려 있는 '기도굴' 등 작은 장소에서도 개인적인 안찰행
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일반 교회의 담
임 목회자나 여전도사들도 '안수기도'의 한 주체로 나서고 있는 실정
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신유'라는 특별한 은사를 받아, 그것을 병든 이웃
을 위해 활용한다는 것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유'도 하나의 당당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유를 위한 안찰
을 무조건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신유의 은사가 은사로서 정당하게 행해지느냐 하는데
있다. 신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제대로 전달되고, 그것에 대해 감
사하는 신앙이 바르게 형성되는가, 그리고 신유 행위가 정상적이고 정
규적인 예배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 등을 통해 오늘날 한
국 교회에서 행해지는 안찰 및 신유 행위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다.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안찰행위의 가장 큰 문제는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에 있다. 신유 은사의 주체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이라
고 해야 할 것이다. 신유의 은사를 부여하신 분도, 그리고 병을 낫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여기에는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요즘 행해지고 있는 안찰행위는 하나님은 쏙 빠지고 인간이
신유의 주체가 되곤 한다. '××× 신유집회'니 '놀라운 능력의 종 ○
○○'니 하는 신유집회의 포스터 문구들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사람'이 병을 고친
것이 되고 만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사의 사유화(私有化)'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교만이요,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죄악
이라고 볼 수 있다. 요즘 행해지고 있는 안찰행위는 이처럼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해 버리는 일을 다반사로 저지르고 있다.
신유의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인간은 그것을 아무 대가도
없이 '거저' 받은 것이다. 또한 거저 받은 것이니만큼 필요한 사람에
게 '거저 베풀고' '거저 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반대급부 요구 다반사-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안찰행위는 대부분의 경우
그 '반대급부'를 요구한다. 어느 기도원에 가서 병을 고치려면 얼마를
내야 한다는 식으로 '선불제'를 요구하는 기도원도 있다는 소문이 심
심치 않게 떠돈다. 굳이 소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안찰 기도를 받고
많은 금액의 헌금을 했다는 교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은사를 '재물'과 맞바꾸려는, 지극히 비신앙적인 작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병고침을 얻고 나서 감사의 표시로 헌금을 한다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스러운 정성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
이다. 그러나 최근 신유집회를 내세우는 기도원들이나 집회가 보여주
는 모습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헌금이 아닌 '치료의 대가'로서
의 헌금을 요구한다. 이것은 세상적인 의미로 해석해도 일종의 '무면
허 의료행위'에 해당되는 것이다.
현행 우리나라의 법 체계로는 의료 면허를 갖지 않은 사람이 진료
등 의료행위를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진료의 대가를 요구할 수도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안찰행위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앞
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죄를 범하는 것이다.
안찰행위가 무분별하게 성행함으로써 나타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기
독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역사관을 무너뜨리고 신앙의 내용을 왜곡
한다는 데 있다.
기독교는 그 역사관의 궁극적인 목표를 '종말론'에 두고 있다. 그러
나 안찰행위가 무분별하게 행해질 경우, 마치 기독교의 목표가 세상적
인 병고침과 인생의 안락에 있는 것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실제로 이같은 오해는 기독교와 안찰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다.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한
환자에게 '기도원에나 가보라'고 권하는 것이 바로 그같은 오해에서
빚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믿지 않던 사람이 병원에서 포기한 질병을 가지고 있다가 안찰기도
를 통해 치유받게 됐을 때, 십중팔구 기독교를 믿게 되리라는 것은 쉽
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아무런 이해나 지식이 없이
불치의 환자에게 '기도원이나 가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기독
교인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안찰이나 신유집회가 기독교의
모든 것인 양 알려지게 한 책임을 신유집회를 이끄는 그룹들은 절실하
게 느껴야 할 것이다.
교회에 나가는 교인들에게도 무분별한 안찰행위는 큰 혼란을 야기시
킨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안찰기도를 받으러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교인들을 단속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그러나 교인들이 안찰
기도의 '맛'을 보았을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전에 나가던 교회에서
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른바 신유집회를 따라
돌아다니는 '철새'들이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신유집회를 이끄는 그룹들은 일반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인
식을 교인들에게 심어주는 경우가 많다. 일반 교회에는 뜨거움도 없고
병고치는 능력도 없으며, 믿음을 길러 주기는커녕 좋은 믿음도 오히려
약화시킨다는 식으로 교인들을 호도하곤 한다.
따라서 교인들은 자기 교회 담임 목사의 말보다 신유의 능력이 있다
는 종의 말을 더 잘 듣게 되고, 주위의 교인들을 신유집회의 현장으로
이끌어 간다. 결국 기존교회에 혼란과 불신을 가중시키게 되며 교회성
장이 둔화되는 현상을 낳는 것이다.
신유집회는 초기에는 기독교 부흥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교회의 성장
과 전도의 수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신유 및
안찰 행위가 너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바람에 성장이나 전도에 도
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교회에 가해지는 외부로부터 비난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처럼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신유집회를 어느 정도 통제할
필요성이 최근들어 제기되고 있으며, 신유집회 자체를 교회의 제도권
속으로 포함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 가지 문제의 온상이 되고 있는 신유집회의 폐해를 어느 정도
줄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도적이고 의식적인 개혁이 동시에 이루
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반드시 전제돼야 할 몇 가지 조
건들이 있다.
먼저 신유 자체가 '비기독교적'이거나 '비복음적'이라고 볼 수는 없
다는 점이 전제돼야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따라
서 무분별한 안찰행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은 반드시 신유
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려 나가는 방향에서 마련돼야 한다. 신유 자체
를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제거해 버리려 하다가는 기독교가 갖
고 있는 소중한 은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른바
'일반화의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전인적 치유'에 관심-
두 번째로 전제돼야 할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도원을 찾는 사
람들이나 그 가족들의 '정서'이다. 이들은 한마디로 가능한 모든 수단
을 다 써보다가 실패한 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유집회를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들은 병고침과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착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생명에 대한 애착으로 신유의 은사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
조건 '비신앙적'인 것으로 매도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의 육체적
인 질병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까지 치유해 주는 '전인적인 치유'
의 관점에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안찰행위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신유집회가 교회라는 제도의 영역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신유 은사가 기도원 등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
며, 우리나라에는 교회나 교단이 세우지 않은 사설기도원이 많다는 점
에서 신유집회의 남발을 막을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는 상황이
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유집회나 안찰행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기
도원이나 신유집회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
다.
신유집회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신유·안찰 행위 자
체를 교회 내에서 공식화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만하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갖고 있는 철야기도회 시간에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기도' 시간을 삽입한다든지, 예배 때 드리는 회중기도에
'병고침을 위한 기도'를 포함시키도록 유도하는 공식화의 과정이 필요
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신유의 능력이 있다는 사람'에 대한 철저한
비신화화(非神話化)가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신유의 능력 자체는 비
신화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신유의 은사가 특정 인물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당회장'에서부터 '일반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부여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
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더라도 사실 기도원에서 이루어지는 안찰행위의 문제점은
쉽게 제거되기는 어렵다. 사실 기도원 자체를 제도권 안에 포함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유 은사의 매매행위 등 부정적인 모습은 주로
사설 기도원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일선 목회자들은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원을 찾는 교
인들에게 담임교역자가 반드시 동행해 줄 것을 권한다. 담임교역자와
동행한 교인은 그만큼 기도원의 열광적인 분위기나 비정상적인 예배행
위 등에 쉽게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반면 교역자가 무
조건 기도원행(行)을 막는다면, 교인들은 교역자 몰래 기도원을 찾게
되고, 교인과 교역자간의 불신만 키우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기도원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편에서 지적한
'건전한 기도원운동'이 절실하다고 볼 수 있다. 기도원을 운영하는 사
람들의 신앙적 각성이 없이는 기도원에서 은밀하게 성행하고 있는 '개
별적 안찰기도'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것은 사실상 제도권 안에서의 대책이라고는 할 수 없어 가장 어려운
부분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안찰이나 신유집회에 대한 교단적·연합적 입장 표명이나 대책이 전
혀 없다는 것도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사실 중에 하나이다. 일반적으
로 개교회 차원을 넘어서 노회나 총회, 더 나아가 연합기관의 차원에
서는 기도원운동이나 신유집회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를 갖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각 교단 총회나 연
합체들은 문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기도원·안찰문제를 수수방관해
오기만 했다. 총회의 신학적 입장이나 연합체 차원의 개념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협의회 등이 하루속히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까지 무분별한 안찰행위의 문제점과 대책을 살펴보았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한 가지의 의문이 남는다. 과연
기도원에서 안수기도를 받으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아나느냐 하는 의문
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직도 '신유의
기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구심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예'나 '아니오'를 분명하게 대답할 사람
은 아무도 없다. 안수기도를 받은 후 고질적인 부상이 씻은 듯이 나았
다는 운동선수가 있는가 하면,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포기하고 기도
원에 들어갔으나 결국 숨지고 만 유명한 목사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신유의 은사'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
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은사의 사유화' 등 무분별한 안찰 행위
를 문제삼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좌지우지 하겠
다는 '불순한 의도'가 그 밑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 간증공해현상
- '체험의 나눔'없이 '은사의 내용'만 절대화
한국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간증집회는 간증자의 신앙체험을 함께
나눔으로써 신앙공동체를 돈독히 하는 데 의미를 두기보다는 다른 목
적에 이용되는 수단으로 전락해 그 본연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한
국 교회 간증의 문제점과 그 원인, 그리고 극복 방안을 살펴보겠다.
-본래의 의미 상실-
한국 교회 교인들은 '간증'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곳곳에서 행해지는 간증집회나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간증서적이 기
독교인들의 신앙성숙에 어느정도의 유익을 줄 것인가에 대해 선뜻 긍
정적인 대답을 내리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우리가 흔히 '간증'이라고 말하면 개인적 신앙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증언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을 그의 섭
리 가운데 부르시고, 그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또한 하
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나타내기를 원하신
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때 간증은 개인의 다양한 신앙체험을 나누는 가
운데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간증
이 기독교인의 신앙성숙에 유익을 주는 또 하나의 측면은 '간증의 자
리' 즉 서로의 신앙을 나누는 나눔의 공동체를 통해 기독교인의 신앙
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간증에 대한 이같은 긍정적인 입
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 간증의 형태를 살펴보면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한 안타까운 상황이라 할 것이다.
한국 교회 간증의 문제점은 첫째, 그 태도에 있어 대부분 인간중심
적인 간증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
떻게 구원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등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
만 '내가 어떻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시더라'는 형식
으로 인간의 행위를 더 강조하는 간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하
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사의 신앙고백보다는 인간 의지적 측면이 강조
되는 간증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 중심적인 간증의 태도는 그 내용이 개인이기주의와 기
복신앙으로 치닫게 된다. 즉 간증의 내용이 극도의 개인이기주의와 기
복신앙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선택받은 자로
서의 기쁨을 증거하기보다는 주택 마련을 위해 40일 기도를 드려 응답
받았다는 바알 종교적 기복신앙에 근거한 간증이 한국 교회에서 행해
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기주의와 기복신앙을 내용으로 하는 간증은 듣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즉 이러한 간증집회가 한국 교회
기독교인의 신앙풍토를 기복신앙, 개인신앙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다.
또한 이같은 간증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
문에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을 듣기보다는 간증집회만을 좇아다니게 하
는 잘못된 신앙행위를 유발하고 있다. 따라서 말씀의 권위보다 간증의
권위를 더 내세우게 되며, 이로 인해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을 변질시
키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간증과 관련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커다란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간증집회가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다. 부흥집회의 플래카드에는 으레 ○○○초청 간증집회라는 부제가
붙어 사람의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겠다. 특히나
연예인들의 간증집회를 통해 사람들을 모으려는 의도는 결과야 어떠하
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인 기독교의 모
습으로 세상에 비춰지고 있다. 교인수를 늘리려는 목적의 이같은 간증
집회는 개척교회 부흥집회에서 더 뚜렷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교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빠른 시일내에 교인수를 확보해야 한다는 얄팍한 논
리 앞에서 진정한 복음의 말씀을 담은 개인의 신앙고백은 찾아보기 힘
들 것이다.
간증집회가 정치적 목적을 배후에 깔고 열리는 경우는 앞에서 지적
한 것들보다도 더 불순한 의도로서 반기독교적 행위라고 해야 할 것이
다. 그러나 이같은 행위가 한국 교회 곳곳에서 은혜로운 간증집회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말씀의 권위보다 간증의 권위가 더 우위에 서 있는 경우는 보통 장
래가 불확실한 상태, 즉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교회의 권위
가 실추됐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오늘 한국 교회의 상황을 잘 반영
해 준다고 하겠다.
한국 교회에 나타나는 간증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형태들
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간증 홍수시대-
원주교도소에서 20여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임모 씨와 김모 씨는 서
로 내용이 같은 간증을 하면서, 교인들에게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
하고 있어 '금품'을 노린 간증집회가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더욱이 이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이야기가 옳다'며 상대를 비방하
고,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간증집회를 가질 수 있도록 요청하며, 자신
들의 은행구좌를 알려주고 선교헌금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대문구 Y교회 이목사는 "임모 씨와 김모 씨의 간증집회
는 예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사기행각"이라
고 비난하고 "교회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영적으로 보호하고 피해를
입지 않도록 무분별한 간증집회는 자제해야 한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탤런트 가수 등 인기연예인들을 '간증집회'강사
로 초청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 '연예인 간증 홍수시대'를 맞았다
는 여론이 높게 일어나고 있다.
대전시 비례동에 위치한 C교회는 월 2회에 걸쳐서 유명 인기연예인
을 강사로 초청해 간증집회를 열고 있어, 교인들이 강사의 신앙간증에
은혜를 받기보다는 이들의 '코메디스러운' 이야기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 인기연예인의 간증집회에 자주 참석하는 한모 집사는 "인기연
예인의 신앙간증에 관심이 있어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쇼'를
구경하기 위해서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고 말했다.
인기 부흥사들 중 상당수가 인기연예인과 가수들로 신앙간증팀 및
찬양팀을 조직, 흥미 위주의 집회를 개최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는 목소리가 교계에서 높게 일어나고 있다. 여의도 C
교회 C목사는 집회 1시간 전에 인기탤런트 및 가수들로 구성된 찬양간
증팀을 동원 '쇼'와 다를 바 없는 '간증'으로 교인들을 흥분시켜, 교
인들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저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간증
및 찬양을 녹음테이프에 담아 교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강매하고 있으
며, 실제적인 체험에서 나온 신앙간증보다 이를 선전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거여동 Y교회에서 열린 C모 권사의 간증집회에서 C권사는 자신
의 간증 내용을 '테이프'에 담아 이날 참석한 교인들에게 강매, 영리
를 목적으로 한 간증집회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중국교포 2세 박모 집사는 한국에 체류하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K모
전도사의 소개로 횃불선교회, 오산리 기도원 등지에서 간증집회를 갖
고 공산당을 비판, 주최측은 이 간증 내용을 테이프에 담아 교인들에
게 판매했다.
또 이 테이프가 중국 정부에까지 들어가 박집사를 귀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국 교계의 무분별한 간증으로 한 교포를 가족들과 생이별
시켰고, 현재 박집사는 한국에 불법체류중에 있다.
또한 한국 교회 및 선교단체들은 '월남 귀순용사' 초청 간증집회를
앞을 다투어 개최하고 있어, '반공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는 듯한 인상
을 교인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부산 모선교회는 김현희 초청 신
앙간증집회를 열었으나, 신앙간증집회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특정정당
특정후보 지지모임이 되어버려, 간증집회를 이용한 정치모임이라는 지
적을 받고 있다.
북한에서 월남하여 기독교인이 된 김만철 씨의 경우, 처음 신앙간증
은 매우 순수했으나 프로 간증자가 되면서 순수성을 찾아보기 힘들고,
과장해서 말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또한 부흥사들의 간증 내용이 대부분 같다는 지적도 있다. 의정부시
에서 교회를 개척한 H목사는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에 초청된 세 명의
강사 모두가 같은 간증 내용으로 부흥회를 인도했다"고 폭로했다.
-말씀의 역동성 제약-
간증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행동을 기독교공동체로 확산시킨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말씀(로고스)의 역동성을 제약하거나 간증자를
표준화한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김명혁 목사는 간증집회의 난무 현상을 '하나님
의 개인적 은사를 절대화'하는 추세로 파악하면서 복음보다는 간증 내
용을 선호하는 교인들의 신앙자세가 하루속히 교정되어야 한다고 밝히
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다양한 은사 중의 한부분을 경험자가
확대 해석해 하나님의 다양한 은사를 표준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말에는 은사 경험이 성서를 통해 재조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여
과 과정이 누락돼 있음도 포함돼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간증이 가지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정형
화(定型化)'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한국신학연구소 학술부장
강원돈 목사는 간증이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을 인간 경험으로 제약해
희석시킬 위험이 다분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강목사는 지금까지
간증집회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행동을 전하는데 사용되기보다는
개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 전용돼 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함께
목회자의 교회 안에서의 자리를 안정화하는 데도 심심치 않게 이용돼
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특수한 목적에 이용하
려 드는 수준 이하의 교회들이 많다는 것이다.
김명혁 목사와 강원돈 목사의 이같은 지적과 비판은 간증 자체를 문
제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간증집회의 내용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증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절대화·정형화 이외에도 '감정주의'나
'신비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간증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사가 개인에 의해 다시 해석돼 감정적으로 나타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간증자의 감정과 교인의 감정이 하
나로 이어져 교회공동체가 감정주의 혹은 더 나아가 신비주의적인 신
앙으로 전락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감정주의를 더욱 자극하기 위해서 개교회들은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을 특별히 초청해 간증집회를 열기도 한다. 이것은 신앙보다 유
명세를 앞세워 복음을 전하려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라고 김목사는 밝히
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강목사도 목회자의 요구에 의해 이런 현상이 두
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면서 결과적으로 이것은 교회의 상업주의를 매
개하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 이를 촉진시키는 센세이셔널리즘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말은 달리 말해서 정상적인 통로에 의한 신앙생활에 교인들이 식
상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매주 같은 형식의 기도와 예배로는 신
앙 성장을 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보다 특별한 형식과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을 마련, 예배의 효과를 거두게 하는 대체 프로그램의
하나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간증집회 혹은 간증의 문제점은 기존 예배에 대한 교
인들의 이탈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더 구체적으로 목회자들
에 의해 선포되는 메시지의 능력이 점차 약화되는 추세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메시지가 약화되는 경향 때문에 교인들은 보다 참신한
'그 무엇'을 찾게 되고, 반대로 목회자는 자신의 허약함을 가리기 위
해 간증과 같은 인기 품목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과제
는 결국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메시지를 성서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아야 할 것과 또한 그 속에서 선포로서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노력을 강구해야 한다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고 하겠다. 이를 통해서
간증은 메시지의 보조역할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간증 안에 간증자의 주관적 편견이 포함되는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
해 강원돈 목사는 간증이 '증언(證言)'이라는 단어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경험을 통해 느끼고 이해된 개인적인 하
나님이 아니라 성서 속에서 비추어진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그대로 드
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교회가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증언 내용을 각교인이 임의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앞에서 지적된 하나님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구원행동이 일정한
틀에 얽매이는 정형화 현상이 또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힘겨운 노력으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
심으로 고백하면서 양적으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교계 지도급 목회자들이나 학자들의 견해는 한국 교회의 질적 변화의
시기가 거의 지나고 있다는 데 모아지고 있다. 간증이라는 흥미위주의
신앙활동이 건전하게 정착되기 위해서는 목회자를 포함하는 전체 기독
교인들의 공동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 여유가 없는 여가생활
- 크리스찬은 갈 곳이 없다
-부족한 여가 시간과 공간-
크리스찬은 갈 곳이 없다.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교회의 제도적인
구조와 목회자들의 보수적인 성서해석으로 여가 시간과 공간을 빼앗겨
왔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성서가 가르쳐주고 있는 '쉼'에 대한 바른
이해를 내리고 크리스찬들이 즐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어
야 한다. 즉 교회의 부대시설을 최대한 활용하여 크리스찬들이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찬의 여가생활을 확대해석하여 교회 안에서의 놀이 문화라고
하는 말은 아직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그다지 친숙한 말은 아닌 듯하
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한국 교회의 풍토는 '신앙생활'이라는 것과 '여
가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상반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
이다. 또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곧 주일날 꽉 짜여진 프로그
램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으며, 함께 휴식을 통
해 공동체적으로 즐기는 것은 아직까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
다.
이러한 풍토로 인해 크리스찬의 여가생활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무
관심하게 되고, 여가생활을 누릴 만한 시간적 공간적 여건이 전무하다
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크리스찬이라고 해서 다른 특별한 여가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말보다
는 여가생활을 통해 어떻게 더 성숙된 신앙으로 발전시킬 것인가에 관
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일상생활의 바쁜 일정 속에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요즘 직장
인들에게는 여가생활을 즐길 만한 여유조차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
러함에도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주일날 교회에서 빡빡한 일정을 갖고
있어 특히 직장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주일날도 교회에서 '시달린다'
는 표현을 솔직히 털어놓게 된다.
또한 교회 안에서 휴식이나 여가생활을 위한 놀이를 단순히 노는 것
으로만 착각함으로 인해 학생회나 청년회에서 야외로 나가거나 운동경
기를 위해 오락시설을 찾는 것에도 무조건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는 형
편이다.
또한 교회에서 가족 단위의 여가와 놀이를 즐길 만한 조건도 마련되
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두 분 다 하루종일
교회에 가 있게 될 경우가 많아 가족 단위의 여가생활은 더더욱 어렵
게 된다. 결국 사회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크리스찬들은 이렇다할
여가생활을 즐길 만한 여유도 없고 교회의 무관심으로 인해 종교적 의
미의 여가생활을 함께 찾아보려는 교회의 노력도 전무한 형편이다.
이와 같이 성경공부, 교회 봉사에만 몰두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범인
것처럼 여겨지는 풍토에서는 평일은 물론 주일날 여가생활을 통한 영
적·육적 피로의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크리스찬에게 여가생활이 부족하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교회 내에 여
가생활을 누릴 만한 놀이문화가 부족하다는 점과 기독교적 여가생활을
누릴 공간의 부족, 즉 적당한 장소가 없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교회 내에서 휴식이나 공동체놀이를 즐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는 것은, 주일날 교회의 꽉 짜여진 프로그램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주일날 예배가 끝난 후 가족 단위나 청소년들이 함께 모여 놀이
를 하거나 휴식할 수 있는 캠프장 등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퇴폐적이거나 무질서한 여가활동이 아닌, 열심히 일한 후의 건전한
휴식을 위한 여가생활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여가생활을 어떻게 기독교적 생활로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서울시 서초구에 위치해 있는 S교회 청년회원인 이모(28·남) 씨에
게는 일주일 동안 여가생활을 즐길 만한 시간적 여유가 도무지 주어지
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아침 7시에 출근하여 밤 9시가
다 되어야 퇴근한다. 이러한 그의 평소의 생활은 피로를 풀어줄 수면
시간마저 제약받기 때문에 여가생활을 즐길 여유는 엄두도 못내는 형
편이다.
그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날은 그래도 주일
뿐이다. 하지만 요즈음 그는 주일날마저도 피로의 연속이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찬양하는 기쁨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평일에 쌓였던 피
로가 이중 삼중으로 겹쳐 다음날인 월요일의 출근만이 악몽처럼 다가
올 뿐이다.
주일날, 이씨는 평소보다 약간 늦게 일어나 8시 30분까지 유년주일
학교 교사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교사기도회가 끝나면
9시부터 유년주일학교 예배가 시작되고 9시 30분부터는 반아이들의 성
경공부를 지도하느라 정신이 없다.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을 돌려보
내면 여유를 되찾기도 전에 교사 모임이 있다고 부른다. 그 이후 오전
예배 성가를 위한 준비 모임을 갖고 11시 오전예배를 드린다.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주 성가연습을 끝낸 후 식사를 하고 나면 여태껏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물밀듯 밀려온다. 그러나 그는 휴식을 취할 수 없다.
오후 2시 유년주일학교 오후예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뒤섞
여 예배를 드린 후 그는 2부 프로그램으로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어야
한다. 여기서 이씨는 잠깐 멈칫한다. 그러나 오후 찬양예배를 맡아 인
도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금 피곤한 몸을 이끌고 3시 오후예배를 드린
다.
이쯤 되면 그의 정신은 몽롱해지고 눈은 빨갛게 충혈되기 시작한다.
오후 5시쯤 되면 같은 또래의 동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는 다시금 힘을 내어 청년회를 이끈다. 열띤 성경공부도 하고 때로
는 나름대로의 여가생활(?)일 수 있지만 청년회 단합을 위하여 마지못
해 탁구도 친다. 그리고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지친 몸을 이끌
고 내일의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주일날이 더 피곤-
위의 경우 이씨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의 하나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과다한 일상생활에서의 노동과 교회에서 부여하는 무리
한 프로그램 담당은 오히려 그의 신앙생활을 수동적이며 형식적인 종
교행위로 매몰되게끔 만든다. 이는 그의 신앙적 의지의 잘잘못을 논하
기 이전에 사회와 교회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특히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인 교회는 일주일 동안 생활에 지친 성
도들이 다함께 모여 예배와 사랑의 교제를 통해 영·육적 피로를 푸는
안식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 속에서 쌓이는
육체적·정신적 피로에 대해 교회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경우는 평신도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목회자
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목회자에게 현저하게 드러나는
세 가지 병이 있는데 첫째는 심장병, 둘째는 소화기 계통의 궤양, 셋
째는 고혈압이라고 한다. 이는 우리 한국의 목회자들도 비슷하게 나타
나는 증상이라고 하겠다. 스트레스로 인한 목회자들의 육체적 이상은
이외에도 무기력, 좌절감, 불안, 초조, 염려, 패배감, 절망감 등 다양
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의 스트레스는 교회라는 특수한
사회와 목사라는 특수 직종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목회자들은 특별히 영적인 문제를 많이 다루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 기독인들은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을 목회자에게 요구
하게 되고, 이는 곧 목회자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커다란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러한 목회자의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목회자 역시 여가생
활을 즐길 필요가 제기된다. 하지만 목회자가 낚시를 한다든지, 테니
스를 친다든지 하는 여가생활에 대해 교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목회자는 일반 기독교인과 구별되는 사람이며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설
혹 인정하더라도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또한 스트레스
역시 영적인 생활, 즉 말씀과 기도로 해결할 것을 요구하며 여가생활
을 통한 스트레스 해결 방법을 불경건하게 보고 있다.
목회자 사모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모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목사에 비해 사모들의 명이 더 짧다고 한다. 일반적 사회통념
에 비춰볼 때 부부 중 여자의 수명이 약 7년 정도 긴 것에 비하면 사
모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해 있는 J교회 최모(38·여) 집사는 오래간만
에 바깥 나들이를 다녀왔다. 그동안 아이들 때문에, 조그맣게 벌여 놓
은 일거리로 평일날 어디 놀러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
데 교회 차원에서 평일날 야유회를 간다고 하기에 가정생활에 매몰된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껏 놀아보자는 마음으로 참석을 했다고 한다.
즐거운 한때를 보낸 최집사는 돌아오는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짐을
느꼈다. 남편과 아이들이 생각난 것이었다. 최집사는 그동안 주일날
야외에 나가자는 남편과 아이들의 요구를 교회가야 한다는 이유로 거
절해왔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성서적 '쉼'의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
여가생활은 곧 휴식, 쉼을 뜻하는 것으로 이 휴식의 개념은 성서에
서도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신학자나 기독교인은 이 휴
식의 당위성을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안식하셨던' 일에서 찾고 있다. 이 '안식'의 개념은 평상시의
일과를 중단하고 쉬는 것과 동시에 성전에 모여 예배하는 것으로, 육
체적인 휴식과 영적인 예배, 즉 육적 피로의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져
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특히 안식하며 놀이를 즐기는 여가 시간은 현대의 산업기계문명이
발견해낸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 이미 내포
되어 있다는 해석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주일날 안
식하며 여가를 즐기는 것은 창조주의 각별한 의지, 곧 종교적 차원에
서 이해하고, 퇴폐적이 아닌 건전한 방향의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도
록 그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주일은 육체적 피로의 회복은 그다지 염두에 두
고 있지 않다는 데 재고의 여지가 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크리스찬의 여가생활을 누리기 위해 심창섭
교수(총신대)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먼저 주일에 교회 프로그
램이 한꺼번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가능한 한 주중으로 분산시켜 주일
에는 되도록 예배만 드리고 교회 내에서든 밖에서든 가족 단위로 휴식
을 즐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주일을 즐기고 휴식하는
방법은 각자의 취미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주일날 개인과 가족, 그 교회공동체가 속해있는 특성에
따라 휴식을 즐기고 공동체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교회가 방안을 제
시해 주도록 하는 일, 마지막으로 가족 단위로 주일을 지키고 오락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현대의 크리스찬에게 부족한 여가생활의 시간과 공간을 성서에
나오는 안식과 휴식의 올바른 개념 정립을 통해 적극적으로 그 방안을
찾아나가자는 요구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1년에 고작해야 교회 내에서 정기적
으로 실시하는 수련회와 기도회 등으로 '여가생활'을 보내고 있어 폐
쇄된 '틀'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비기독교인들과의 만
남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폐쇄된 교회 공간을 시민들에게 휴
식 공간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은 방대한 교회공간을 시민들에게 제공하여
오고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어 시민들로부터 좋은 호
응을 얻고 있다.
놀이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가혁명의 시대를 맞은 기독교인들
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늘 이 공동체에 참여해야 한다."면서 건전한
여가생활이 정착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효성성은교회 정재희 목사는 "기독교인들의 여름 휴가는 열심히 일
한 결과의 휴가가 되고, 미래를 계획한 휴가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휴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정목사는 "휴가는 노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전제하고,
"휴가기간을 통해서 그동안의 삶을 점검해 보는 뜻있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내 생활이 조급하지는 않았는지, 또는 내 삶이 잘
못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는 휴가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목원대학 학장 박봉배 목사는 "기독교가 말하는 '안식'과 '휴식'이
란 단어가 교인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상당히 제약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런 교회의 제한적인 틀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쉼'을
통해 정신적·육체적 자원을 회복하고 충전하여 새로운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날에 쉬고 안식일로 정하셨다."고 '쉼'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했
다.
또한 강남대학 심일섭 교수는 "참다운 여가의 놀이나 축제는 무분별
한 자기학대나 자기망각적인 쾌락 추구로부터 분리시켜야만 한다."면
서, "한정된 여가의 놀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이 훼손되
거나 오염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창조질서 보전'을 강조했다.
심교수는 또 "인간들의 유희와 노래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오
히려 자연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음소리를 발한다."고 지적하고 "하
나님의 모든 창조물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 없이 이기적이고 파괴적
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평화와 자유를 주신 이 하나님에 대한 반신적
이며 반인간적 행위임을 고백해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인간과 자연과
의 만남의 기본자세를 설명했다.
한편 인천소송교회 김상목 목사는 기독교인들의 건전한 놀이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적 상황에 알맞는 놀이문화를 개발해야 하
며, 교회의 공간을 쉼의 장소로 최대한 활용해야 하고, 기독교인들의
놀이공간 확보에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며, 우리의 놀이문화 찾기 운
동 등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쉼'의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가족들과 자연에 도
전하여 그동안 막혀있던 사랑의 대화를 나누면서 삶의 태도를 점검해
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창조의 신비를 다시 한번 마음속에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또한 한국 교회는 과소비적인 교회건축 등에 예산 낭비를 지양하고
교회 공간을 과감하게 개방하여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휴식 공간으로
제공해야 하며, 가족의 휴식처를 겸한 청소년들의 캠프장 건립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너는 언제나 겸손하게 예배하고 찬양했지.
너는 언제나 먼저 내 이름을 높였지.
너의 행한 일을 보면 내가 다시 이땅에
올 때에 나는 너에게 요청할 일이 많겠구나.
너는 어려운 일을 닥치면 기도하길 잊지않고
언제나 충실하게 성경말씀을 읽었지.
하지만 네가 그렇게 훌륭한 태도와 값진 생각을
갖고있다 하더라도 나는 너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줄게 있단다.
너는 내가 굶주릴 때에 내게 먹을 걸 주었느냐?
너는 내가 목말라 손을 내밀 때에 내 잔을 채워주었느냐?
너는 내가 집없이 헤맬 때에 따뜻하게 맞아주었느냐?
우리가 마주섰을 때에 누가 먼저 영접해주었느냐?
너는 내가 너를 불렀을 때에 응답했느냐?
너는 내가 가장 어려울 때에 나를 찾아주었느냐?
너는 내가 헐벗었을 때에 나를 입혀주었느냐?
이들 중 가장 작은 것이라도 행하는 것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라.
너는 교회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성가대에서
아름답게 찬양도 했지.
너는 언제나 올바른 십일조를 잘 드리기도 했지.
너는 남을 헐뜯거나 남에게 수군대지도 않았지.
그래서 너는 언제나 좋은 평판도 받았고
너는 또 세상의 취미와 유행을 따르지 않았고
오직 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따라왔지.
너의 목표는 값있는 것이였고
너의 의욕도 훌륭한 것이였지만
그래도 나는 너에게 여전히 해야할 말이 있단다.
너는 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걸 주었느냐?
너는 내가 목말라 손을 내밀 때에 내 잔을 채워주었느냐?
너는 내가 집없이 헤맬 때에 따뜻하게 맞아주었느냐?
우리가 마주섰을 때에 누가 먼저 영접해주었느냐?
너는 내가 너를 불렀을 때에 응답했느냐?
너는 내가 가장 어려울 때에 나를 찾아주었느냐?
너는 내가 헐벗었을 때에 나를 입혀주었느냐?
이들 중 가장 작은 것이라도 행하는 것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라.
- 웨인 왓슨의 노래
'The least of This'
여러분도 주님을 기쁘게 하셨습니까?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잘못된 헌금 풍토 05/19 00:31 349 line
■ 잘못된 헌금 풍토
- '감사의 표현'이 '복받기 위한 수단'으로 둔갑
-'십일조'에서 시작-
헌금이 가지고 있는 성서적·신학적 의미는 대단히 깊고, 그 역사
또한 구약성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길다. 따라서 기독교와
헌금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헌금'이 교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며 또 어떤 용도에
그 헌금이 사용되느냐 하는 것은 헌금이 원래 가지고 있는 의미나 역
사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오늘날의 헌금은 그 의미와 용도 면에서 많은 부분이
변질돼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헌금을
둘러싼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원래 헌금이 가지고 있는 의미
와 역사를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헌금(獻金)'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의미한다. 그
러나 '헌금'이라는 개념은 나중에 나타난 것이고 원래 의미는 '십일
조'의 개념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
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2)라는 야곱의 고백은 초기에는 십일조가
곧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
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이후에는 '십
일조'와는 별도로 '헌물(금)'의 개념이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구약에서는 또 '첫째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혹은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에서 헌금을 규정하는 구절이 많이 나타난다.
이같은 헌금의 의미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지
키는 관리인'이라는 정신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약시대에 들어오게 되면서 시장경제의 성장 등과 같은 사회적 변
천에 힘입어 헌금의 개념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
의 것'이라는 개념이 쇠퇴하고 '자기가 가진 것'의 일정액을 바친다는
의미가 강해지면서, 헌금을 드리는 사람의 신앙이나 마음가짐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된다.
그러나 신구약 시대를 합해서 변하지 않는 정신은 '헌금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헌금은 자기 희생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봉헌 행위'라는 것이다. 즉 헌금과 그 이후의 물질적 축복을 연결시킨
다든지, 헌금의 액수를 문제 삼는다든지 하는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
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더 중요하게 생각
했다.
초대교회에 와서는 헌금이 성직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수단으
로 활용됐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에는 헌금이 예배의식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주후 4세기경부터 예배에 쓰이는 빵
과 포도주를 비롯한 여러 비품을 봉헌하는 관례가 시작됐는데, 이때
헌금도 함께 봉헌하면서 '교회에 대한 기부'로서의 헌금의 형태가 나
타나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의 경우, 다른 어떤 나라의 교회보다도 헌금에 의해 신앙
을 표현하는 성향이 강했고, 이것이 아직도 하나의 전통으로 남아있
다. 초대교회 때 생겨나 최근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성미제도 등은 그
같은 '신앙표현으로서의 헌금'의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돈이나 쌀이
없어 전도사업 등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써 헌금을 대신하는 '날연보'
같은 제도 역시 신앙을 봉헌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척도로 오해-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한국 교회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헌금을 '신앙의 표현'이 아닌 '신앙의 척도'로 보려 하는 경향이다.
즉 헌금의 액수가 많고 적음을 통해 신앙의 크고 작음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헌금과 축복을 연결시키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늘나라의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아두면 몇십 배의
축복을 받는다'는 식의 가르침이 바로 그러한 '헌금'과 '축복'을 연관
시키는 경향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 교회의 이같은 흐름은 헌금이 본래 가지고 있는 '신앙의 표현'
으로서의 봉헌이라는 개념을 변질시킨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한
국 교회는 '표현'을 '척도'로 둔갑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
을 돌려드리는 행위'를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그것도 몇
배씩 부풀려 돌려받는다는 '기복신앙의 추잡한 장삿속'으로 대치해 버
리고만 것이다.
물론 이같은 혹독한 비판에 대해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헤
아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헌금의 종류와, 은연중에 헌금을 강요하는
듯한 교회의 분위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어느 정도는 귀
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초신자나 불신자들의 교회에 대
한 비판은 모두 이 '헌금문제'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한번쯤 되새
겨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교회의 헌금에 관해 언급함에 있어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점은
'헌금의 종류'이다. 개교회마다 다소간 차이는 있지만, 대표적으로 주
일헌금과 십일조헌금이 있다. 주일헌금은 십일조헌금과 마찬가지로 신
앙인이 지켜야 할 의무 중의 하나로 지켜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나
타난 헌금 관련 구절들은 대개 이 주일헌금과 관계된 것들이다.
십일조헌금은 신앙인이 사회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물질을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겸손의 표시로써 교회에 환원하는 방법이다.
이 헌금은 월수입이 가능한 교인들에 의해서 주로 지켜지고 있으며,
일정한 월수입이 없는 교인들은 대개 '월정헌금' 혹은 '주정헌금'이라
고 하여 한 달에 낼 수 있는 금액을 미리 책정하여 교회에 내고 있다.
결국 주일헌금과 십일조헌금(월정헌금)은 한국 교회가 공통적으로
분류하는 일반헌금에 속한다. 이것과 함께 교회는 특별헌금을 종류별
로 혹은 지출될 내역별로 세세하게 분류, 예배당 헌금통 주변에 헌금
이름 알리기 식으로 헌금 봉투를 진열해 놓고 있다.
특별헌금 중의 하나로 만들어 놓은 것은 '감사헌금'이다. 이 감사헌
금은 일정한 틀에 매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감사헌금이 절반-
건강 감사헌금, 휴가 감사헌금, 학위취득 감사헌금, 심방 감사헌금,
여행 감사헌금 등 실로 다양한 이름으로 분류 가능한 헌금이다. 일반
헌금인 주일헌금이나 십일조헌금을 제외하면, 교회재정의 절반 이상이
감사헌금으로 충당될 정도로 교인들의 지출 폭이 가장 많은 헌금이라
고 할 수 있다.
특별헌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른바 '절기헌금'이다. 기독교
를 대표할 만한 부활절, 추수감사절, 맥추감사절, 성탄절을 기념해서
드려지는 헌금이 절기헌금이다. 이와 비슷하게 신년헌금은 새해 1월 1
일 0시 예배를 드릴 때 내고 있으며, 또한 1개월에 두 번 이상 드려지
는 헌신예배 때에도 헌금을 내고 있는 상태이다.
이와 함께 매주 평일 중 하루를 택해서 드리는 구역예배 헌금도 빼
놓을 수 없는 특별헌금 중의 하나이다. 교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을 중심으로 교회가 정해준 구역에서 예배를 드리며, 교인들끼리 친교
를 나누는 좋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마저도 헌금을
거둠으로써 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주고 있다. 어떤 경우 '구역
헌금'을 낼 만한 여유가 없는 가정은 아예 구역예배 참석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헌금, 특별헌금 이외에도 교회 자체의 사정에 따라 임의로 정해
놓은 헌금, 즉 '부가헌금'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선교헌금, 장
학헌금, 구제헌금 그리고 건축헌금, 교회묘지부지마련 헌금 등 헌금이
지출돼 쓰이는 용도에 따라 헌금의 종류가 나뉘는 경우이다.
이른바 '부가헌금'은 일반헌금과 특별헌금에서 마땅히 사용돼야 할
항목들을 다시 헌금으로 책정, 교회가 재정적 수입원으로 중복해서 헌
금을 거두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십일조헌금이나 각
종 감사헌금, 절기헌금 및 구역헌금은 도대체 어디에 쓰이고 이와 별
도로 '부가헌금'을 따로 거두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런데 교인들에게
는 대개 교회에서 '돈'에 관한 한 언급을 회피하는 것이 미덕으로 남
아 있어 헌금 사용처에 대한 '알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실정
이다.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G교회는 헌금 종류에 '천번제'라는 것이 있
다. '천번제헌금'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는 표시로써, 혹은
일정한 소원을 이루어 달라는 각오의 표시로써 헌금을 천 번 드린다는
뜻이다. 천번 헌금을 내려면 1년 52주를 기준으로 약 20년간 헌금을
내게 되는 셈이다. 감사헌금, 십일조헌금 및 각종 선교비 등을 제외하
고 20년간 헌금을 내야 한다. 앞으로 1만번제나 10만번제가 생기지 말
라는 법이 있겠는가?
-"1천 번 헌금하라"-
교회의 지출은 전적으로 교인들의 헌금에 의존한다. 바꾸어 말하면,
헌금 수입이 적으면 적을수록 교회의 지출 폭(사업확대 폭)도 적어진
다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교회는 헌금 종류를 다양하게 구상, 수입
폭을 늘려나가는 추세이다. 특히 대형교회들은 자신들의 수입·지출
내역을 '대외비(對外秘)'로 분류, 공개를 꺼려하고 있다.
용산구에 있는 W교회는 교인 수 1천5백여 명이 한 주일에 내는 헌금
이 7백여 만원을 상회하고 있다. 특히 절기헌금이나 십일조헌금과 겹
치는 주일에는 1천6,7백만원이 헌금 수입으로 들어오고 있다. 연간 수
입 총액은 3억 8천6백82만 6천7백70원이다. 이중 십일조헌금은 2억 2
천7백여 만원으로 각종 감사헌금 총액 8천7백37만 5천60원보다 훨씬
웃돌고 있다.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S교회도 금년 5월 한 달 헌금 수입 1억 5천37
만 7천6백85원 중 십일조는 1천7백84만 2천8백원의 감사헌금과 함께 9
천2백만 6천90원으로 헌금 총수입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바꾸어 말
하면,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이미 교회에서 '고정 수입'으로 자리를 굳
혔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교회는 이런 일반헌금 외에 헌금 종류를 항
목별로 재분류하여,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다양
한 헌금을 마련해 재정 확보에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지난해 총회보고서에 의하면 1989년도
한 해 동안 1백70만 교인이 1천7백억여 원을 헌금, 1인당 연평균 10만
여원을 헌금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러한 사정은 기독교대한감리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추산해 보면 지난해 말 한국 교회 교인 수는 모
두 1천2백9만여 명으로, 한국 교회 전체 헌금은 '조'에 이르는 어마어
마한 금액이 되는 것이다.
-헌금의 용도가 문제-
앞에서 언급한 W교회는 이른바 전도비 및 선교비가 90년도 지출 총
액 기준 1천8백52만 7천9백20원으로 담임목사 사례 및 보조 2천3백20
만원을 훨씬 밑돌고 있다. 또한 S교회 역시 전도 및 선교 목적으로 지
출된 경비는 금년 5월 한 달 동안 목회 경비 1천13만6천원과 거의 비
슷한 1천2백91만 2천35원이었다.
이렇듯 교회들은 대개 선교·구제·전도 목적으로 헌금을 지출하기
보다 교회운영비, 행정비 및 사무비 심지어 목회자를 위한 지출에서는
목회자 활동을 세세하게 분류하여, '충분한' 경비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헌금문제는 헌금의 종류가 많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있다.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회장;김옥라)가 지난해 발표한 '한국
교회 사회봉사사업 조사연구'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교회 재정의 대
부분을 교역자 생활비, 건물 건축 등 개교회 운영에 사용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이웃돕기나 사회봉사의 비율은 가장 낮아 이웃 사랑의 실
천이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7백95개 교회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교회에서 가장 많은 재
정 지출을 하는 부분은 교역자 생활비로 20.65%를 지출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교회 유지비 17.13%, 건물 건축 및 시설 확장 16.61%, 선
교사업 15.06%, 교육 및 문화사업 11.28%, 예배 및 설교가 10.20%였
다. 반면 이웃돕기 및 사회봉사는 9.07%로 가장 낮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선교 1백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
구원에서 1982년에 실시한 '한국 교회 1백년 종합조사연구'의 결과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렇듯 한국 교회가 최근들어 교회 안팎으로부터 교회 헌금과 관련
하여,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는 대체적으로 "교인들이 교회에 낸 헌금
은 엄청난데, 이 헌금의 대부분이 개교회를 위해서 사용될 뿐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쓰이지 않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요인에 대해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
은 "한국 교회의 재정이 개교회 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
다."라고 풀이한다.
개교회 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 재정(헌금)은 많은 목회자
들의 지적대로, 교회 내의 권력 구조 혹은 영향력 구조에 심대한 영향
을 미치며, 재정의 확보와 신도 수에 대한 집착으로 기독교의 샤머니
즘화를 초래하며, 헌금에 대한 강조는 계급교회 형성의 주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또한 헌금 사용에 있어서 개교회 중심적인 경향은 교회로 하여금
'목적전도 현상'을 일으키게 할 가능성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하고 있
다.
-헌금 출처 신경써야-
또한 재정 확보를 위해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
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성경구절을 지나치게 기복적이고 현
세적 이기주의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교회에 들어
오고 있는 헌금 중 상당액이 기복적, 샤머니즘 동기에 의지하고 있
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장신대 이모(신학4) 군은 "한국 교회는 헌금의 출처에 대해 의식적
으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고 하며 "깨끗한 소득이 아닌 부정한
수입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이라면 기독교의 사회윤리는 어떻게
될 것이겠느냐."라고 반문한다.
최근들어 한국 교회 일각에서 교회의 헌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헌금을 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는 헌금을 맹목적이고 기복신앙적인 요
소와 연관시켜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헌금은 신앙과 감사를 통한
헌신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무조건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성숙한
신앙 생활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 2세기를 넘어서고 있는 한국 교회는 이제 바람직한 교회 재정
의 운영을 위해 중지를 모아야만 한다. 교회 헌금의 근본적인 문제 해
결을 위해서는 교회의 본래 사명을 재인식해야 한다.
근래들어 몇몇 교회들이 각종 사회복지관을 건립하는 등 사회봉사를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광림교회(김선도 목사)는 지난 5월 강원도 춘성군에 연건평 1천9백
38평의 대규모 복지타운을 건설하여, 무의탁 노인 및 임종을 앞둔 환
자들을 수용하고 있다. 광림교회가 세운 복지타운 '사랑의 집'은 본인
의 부담이나 국가의 보조 없이 이 교회의 헌금으로만 운영된다.
이처럼 교인들로부터 받은 헌금을 사회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나
눔'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를 극복할 수 있으
며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할 수 있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서도 '우리
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너희는 나에게 돌아올 십일조와 예물을
도둑질하였다. 너희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다."
(말라기 3:8-9,현대인의성경)
헌금은 누구 것?
하나님 것?
목회자 것?
교회건물 것?
누구 것이게???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윤리적 타락현상(상) 05/19 00:35 328 line
■ 윤리적 타락현상(상)
- 성서가 가르치는 최고선(最高善) '있으나 마나'
한국 교회의 윤리적 타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
다.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
상이 되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한국 교회의 윤리적인 현주소
는 어디이며, 그 원인과 대책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를 알아본다.
-"이러다간 망하고 만다"-
<기독교신문>은 '91년을 결산하는 취재 기자들의 방담(放談)을 통해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가 윤리적인 타락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해 있다
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같은 진단을 내리게 된 까닭은, 계속해서 제기
돼 왔던 교회의 내부적인 부패현상 이외에도 세상 사람들마저 고개를
흔들 정도의 비윤리적 행태들이 기독교인에 의해 저질러지곤 하기 때
문이다.
사실,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손가락질 당할 정도로 창피스
러운 일들이 이미 여러 차례 일반 언론에 보도됐다. 이같은 현상을 두
고 교계 일각에서는 한국 교회의 몰락이 이제 코앞에 닥쳐왔다고 주장
하기도 한다. 종교란 두말할 나위 없이 최고의 선(善)을 추구하는 진
리체계임에도 왜 이토록 기독교인의 윤리적 타락 현상이 빈번하게 발
생하는 것일까?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훌륭한 윤리적 가르침을 가지고 있
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역설적인 교훈이 있는가 하면, '왼뺨을 때리
거든 오른쪽 뺨도 돌려 대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남을 비판
하지 마라'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교훈도 있다. 기독교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철학자들도 이러한 교
훈들을 '황금률'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가장 소중한 가르침으로 취급하
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같은 가르침의 문자적인 의미나 가르침 그 자체
에 대한 집착보다는 '상황윤리'를 더 강조하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가르침 자체의 기본정신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윤리'의 진정한 의도는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세상에서 가르침의 기본정신을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초점을 맞추
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기독교는 윤리적 가르침이 결여된 종교는 아니다. 오히려 기
독교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은 누구나 윤리적 덕목들을 실천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
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윤리적으로 존경받는 것이 마땅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뒤에서 언급되겠지만, 여러 가지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가 하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행동
을 한 사람이 기독교인으로 밝혀져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
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실천은 없고 가르침만 있는 '공허한 메아
리'에 불과한 것인가?
한국 교회의 이같은 '윤리부재현상'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해
방 이후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 이전의 기독교는 민족의 수난
기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과 함께 성장했다. 따
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는 신앙의 이념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이 크게
유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기독교가 겪었던 분열과 반목의
역사로 신앙의 실천적 측면보다는 논쟁적 분위기에 편승한 이념적 측
면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는 애초에 지
녔던 활력과 실천적 의지를 잃어버리고 내세의 안위만을 좇는 바리새
적 종교로 변질돼 갔던 것이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사회 전체적으로 윤리의식이 희박해지면서 기독
교도 이 물결에 휩싸여 따라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앙과 실천이 완전히 유리된 채 시류를 따라 흘러 가면서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세속적
으로 말한다면 신앙의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교회의 운명을 예고하는 말씀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을 헐어 버려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고, 구약성서에서는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해진
다'고 경고하고 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바로 이러한 위기에 처해 있
다.
이제까지의 세계 교회사는 교회가 윤리적으로 타락했을 때 어떤 결
과가 오는지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로마제국의 교회나, 제정 러
시아의 교회, 그리고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선진국의 교
회들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이제는 그 길을 한
국 교회도 걸어가게 될 것인가. 이처럼 무서운 앞날을 걱정하면서 한
국의 기독교가 현재 윤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비신앙인의 기대에 못미쳐-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 비기독교인들이 기대하는 것만
큼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가 지난 1982년 비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
한 결과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 더 이기적이다'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이 31.7%인데 반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
한 사람은 17.5%에 불과했다. 이러한 조사결과가 나오고 3년이 지난
'85년 월간지 '신앙세계'가 통권 2백호 기념으로 자체 설문조사한 결
과를 보면,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다'가 31.4%,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가 22.9%, 심지어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가 18.6%로 나타
나 적신호를 보여준 바 있다.
앞에서 조사한 설문대상은 물론 비기독교인들이다. 교회 밖에서 비
춰진 모습이 기독교인들의 실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무
엇인가 문제는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신앙세계'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가 조사한 시기는 지금부터 근
10년 전이다. '옛날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
다'는 맹목적 교회옹호론자의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
정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흔히 '사회의 윤리, 과연 어디로 갔는가?'라는 윤리실종
문구는 비기독교인 '때문에' 지어진 글이 결코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으로 개입한 비윤리적인 사건은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순결' 문제는 기독교에서 지켜지는 중요한 윤리 부분 중의 하나이
다. 특히 결혼 전의 순결은 남·녀를 불문하고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교회 안팎의 목소리이다. 그러나 최근 실시된 설문조사 결과는 어쩐지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기독교인 대학생들의 74.3%가 '결혼 전의 순결은 꼭 지켜져야 한다'
고 조사에서 답했다. 교파별로 구분해서 보면, 44.2%만 여기에 동의하
는 교파도 있고, 94.3%가 동의하는 교파도 있다. 이 결과는 지금부터
3년전 이화여대 대학원에 다니는 Y씨가 서울지역 기독교대학생 2백84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다.
평균 74.3%가 혼전 성관계를 반대한다는 것은 반대로 25.7%는 '찬
성'에 가깝다는 말이다. 사회의 전반적인 추세를 볼 때, 이 비율은 점
차 증가하리라고 쉽게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 대학생들의 윤리의식은 차치하고라도 목사들을 상대로 한 조사
에서도 역시 심각한 우려를 나타낼 만한 결과가 나와 주목을 끌고 있
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H씨가 서울과 인근 중소도시 교회 목회자들을 대
상으로 조사한 '종교지도자의 보건의식·태도행위 및 강론경험에 관한
조사연구' 자료분석 결과, 목사 1백여명당 8명꼴로 '결혼 전 순결은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음이 나타났다.
기독교의 윤리적 규범을 지키도록 훈련을 받고, 또 규범윤리를 지켜
야 되는 직책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8%나 이를 용인하고 있는 것
이다. 이것은 다른 추론을 가능하게도 한다. 예컨대 성직자를 제외한
일반 평신도는 무방비상태로 비윤리지대인 사회 모서리에 그대로 방치
돼 있는 셈이다.
여러 통계자료는 설문의 내용에 따라 응답내용도 증감하는 것이 보
통이다. 가변적인 조사이기는 하지만 초교파적으로 조사된 것이니 만
큼 작금의 교회실태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들의 윤리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또 위선적인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마카오로 헌금을 가지고 간
몇명의 목사들이 그곳에서 도박을 한 사건은 일간지 사회면에 큼지막
하게 기사화까지 됐었다.
또다른 경우는 '외국출국문제'이다. 재작년 목사 50여명이 미국대사
관에 단체로 관광비자를 신청해 놓고 있다가 비자가 발급되자 모두 출
국, 아직까지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이들 목사들 덕
분에 한국 신학생의 미국 유학길은 이전보다 훨씬 더 좁아졌다. '위선
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그대로 증명해준 한 예이
다.
기독교인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치부를 더 이상 덮어둘 수 없다는 의
견이 교계에서 이따금씩 돌고 있다. 너무 오래 덮어둔 결과, 썩을대로
썩은 기독교 윤리만 남게 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기독교 윤리 실종
연구자료들은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
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여기저기서 기독교의 비윤리적
인 행각이 나타나는 것이다.
-실천되지 않는 신앙-
지난 '92년에는 교회의 여신도와 정을 통해 온 남편 김덕우 목사(44
·신향교회)를 전깃줄로 목졸라 숨지게 한 정명숙 씨(39)가 살인혐의
로 구속됐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9일 오후 3시 15분쯤 서울 송파구 문정동 45
번지 신향교회 지하실에서 남편이 지난달 초부터 이 교회 지하실 방에
서 지내오던 신학생 최모씨(37)와 정을 통해온 사실을 알고 이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던 중 김목사가 "차라리 나를 죽이라"며 지하실에 있던
전깃줄과 넥타이를 건네주자 김목사의 허리와 다리를 넥타이로 묶고
전깃줄로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사건발생 6시간만에
경찰에 자수했다.
또 같은 해 교회사택 등지에서 정을 통한 서울 대치동 강남B교회 김
모 목사(33)·김모 집사(30·여) 등 2명이 간통혐의로 구속되는 사건
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서울 강남구 C
교회 담임인 이모 목사, 이단·사이비종교 연구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탁모 소장 등이 여자문제로 곤혹을 치른 바 있다.
요즈음 들어 일간지 사회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교역자들의 이
같은 비윤리적인 성문제는 이 시대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교역
자의 윤리의식이 무너짐으로써 생겨난 한국 교회의 윤리적 타락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교역자들의 윤리의식 부재현상은 '성문제'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문
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서울 약수동 G교회 손모 목사는 교회부지를 형제들에게 매매하여 횡
령 및 사문서 위조, 대표자 도용 혐의로 구속됐다. 손모 목사는 형제
및 부모, 친인척들과 임시제직회를 열어 자기 임의대로 서류를 날조
지난해 2월 5일자로 K교단을 탈퇴해 I교단에 가입하고 곧바로 교회를
매매한 뒤 미국으로 도망치려다 교인들에게 잡혀 구속됐다.
수원 Y교회 목사 또한 교회 재정에서 자가용 할부금을 극비리에 지
출, 교인 1백32명이 서명 및 진정서를 노회에 제출함으로 노회 장소에
서 시위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91년 2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모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이모 목사(39·여)가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의 젊은 여자 신도 4명을
술집에 고용시키고, 이들로부터 모두 2천4백만원 상당의 돈을 뜯어 낸
혐의로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구속됐다.
조사 결과 이씨는 '83년 1월부터 '89년 1월까지 서울 은평구 응암동
Y교회에서 '89년 2월부터 S교회에서 목회하다가 '90년에 그만두고 같
은 교회 김모 집사를 통해 가출한 4명의 여자를 술집종업원으로 고용
시켜 '사회사업비' 명목으로 매달 이들이 번 돈의 절반을 뜯어왔다고
밝혔다.
금품에 눈이 어두워 신앙을 팔아버리는 이같은 행위는 교역자들뿐
아니라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 교수들에 의해서도 저질러지고 있
다.
지난해 고신대의 경우 대학 교수들의 부정입학허용 사실이 드러나
학생들이 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수업거부로 인해 진통을 겪었다.
발단은 기말고사에서 의학과 1학년 김모 군이 유급위기에 처하자 박
모 교수가 배점을 조작, 시험성적을 올려주는 등 성적을 조작한 데서
비롯됐다. 김모 군은 지난 '86년에 편입했으며, 시내 모병원 원장인
김군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이 학교 일부 교수들이 금품을 받고 부
정입학을 시켜준 데서 말썽을 빚었다.
최근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시험문제 유출과 서울신대의 시험지도난
사건 또한 해이해진 기독교의 윤리의식을 틈타 발생한 사건이라고 보
아야 할 것이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H선교회도 지난해 선
교회 재단비리에 대해 간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여 진통을 겪기도 했다.
이는 젊은 간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H선교회 개혁위원회가 사무국의 공
금횡령을 입증하는 자료를 입수, 2억9천만원의 차액에 대한 해명을 요
구하자 H선교회 대표인 김모 목사가 문제제기 간사들에 대한 보복성
인사조치로 맞서 말썽을 빚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모 간사가 사무
국장에게 폭행을 당해 대전지방 검찰청에 고소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러한 목회자 및 신학대학 교수들의 비윤리적인 행위는 평신도들에
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조·황경위, 이경장,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문경장, 범
양상선 박회장,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의 박원장 등이 모두 기독교인이
라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크다.
이같은 현상은 신앙이 사회적으로 윤리화·실천화되지 않고 각기 양
립하는 데서 빚어진 결과라 하겠다.
SIDE A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 (4:05)
눈을감고 걸어가는 그사람
아무말도 들으려고 않네
받은생명 거스리고 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네
무엇을 따라가나 의지하나
허무하게 모두 사라질걸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
그런일을 할수가 없어
이렇게 푸른하늘 있는데
어머닌 흐느끼고 있는데
그분은 기도하고 있는데
불을 쫓는 어린 나비와 같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네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건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네
누구를 따라가나 의지하나
안개처럼 모두 사라질걸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
그런일을 할수가 없어
내생명 나의것이 아닌데
세상은 우리뜻이 아닌데
그분은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
그런일을 할수가 없어
이렇게 푸른하늘 있는데
어머닌 흐느끼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
그런일은 할수가 없어
내생명 나의것이 아닌데
세상은 우리뜻이 아닌데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윤리적 타락현상(하) 05/19 00:38 268 line
■ 윤리적 타락현상(하)
- 사회의 부패에 편승, 갈 길 못찾고 방황
한국 교회 윤리문제가 적신호를 보이고 있다. 윤리부재현상에 대한
교계 인사들의 지적은 사회적 요인과 교회 내적 요인으로 압축돼 나타
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윤리회복을 위한 과제와 방향 등을 알아본다.
-이기적 신앙인 양산-
한국 교회의 윤리부재현상에 대한 각계의 견해는 '사회부패'와 밀접
한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데 모아지고 있다. 이러한 견해
는 교회 부패 혹은 비윤리적인 행태가 교회 테두리 안에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 사회윤리의 저질화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를 내용
으로 담고 있다. 다른 말로 사회 속에서 교회가 그 사명과 기능을 충
실히 이행하지 못할 때 교회 역시 사회 부패에 편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라고 부르고는 있지
만, 이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인
들은 대다수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상태이다. 물론 몇몇 단체들의 교
회갱신활동도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중심세력으로 힘을 나타내
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비윤리현상은 역시 인간의
'개별화'라고 하겠다. 봉건사회에서의 협업체제가 무너지고 기술과 기
계의 발달로 인해 분업체제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점차 '개인의 일'이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인중심주의 의식은 자본주의체제가 견
고해질수록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기독교인의 개인주
의 현상은 바로 이러한 사회변화체계와 맥을 같이하면서 더욱 심화돼
온 것이다. 개념상의 차이는 있지만 개인 구원의 강조라든지 개교회성
장주의 그리고 교회이기주의는 결국 사회비윤리체계의 한 부분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창천감리교회 박춘화 목사는 현재 우리 사회를 17∼18
세기 산업혁명 때의 영국사회와 비교하면서 산업은 발전했지만 영적,
정신적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육적인 부분까지 타락하고 있다고 우려
하고 있다. 또한 안동교회의 유경재 목사 역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개인주의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신앙체계 때문에 교회공동체의식은
약화되어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은 개인주의화에 국한돼서만 나타나지 않는
다. 우리 사회는 발전을 거듭할수록 외적인 측면을 상대적으로 강조해
왔다. 예컨대 동양최대의 빌딩이라는 표현은 내용보다는 형식을 강조
한 말이다. 교회의 크기가 얼마라든가 또 교인수가 몇명이라는 표현은
사회에서 즐겨 쓰는 성장의 기준인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러
한 성장기준을 교회 내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성장의
'수치화'와 '계량화'는 결국 질적 저하를 초래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비윤리적인 모습으로 변형된다고 각계에서 우려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김중기 교수(기독교윤리학)는 교회가 사회부
패를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시키고 있다면서 그 예로 교회의
물량주의 현상을 들고 있다. 많은 헌금, 많은 교인들 그리고 거대한
교회 강조 현상은 결국 밑바닥에 사회 가치관을 깔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교단'과 '연합단체'의 활동 역시 이 범주를 넘지 못하
고 있다. 각교단의 주요활동이 대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든지, 연
합단체활동이 대교단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 등은 계량화, 수치화라
는 사회 의식을 용인한 결과라고 하겠다.
교회의 개인주의화와 물량주의 그리고 수치화, 계량화 현상은 교회
가 사회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와 사회를 함께 병
들게 만들었다. 이런 형태는 사회분위기에 휩쓸려 더욱 가속화되고 있
는 실정이다. 비근한 예로 사회적으로 말썽이 되고 있는 부동산 투기
에 교회가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교
회성장을 위한 재정 마련 때문에 비윤리적인 과정을 수용하고 있는 것
이다.
아파트 분양권을 얻기 위해 빈민선교도 하지 않으면서 철거지역에서
목회를 한다든지, 다른 내용이지만 목사 명의로 주변 주택을 매입, 이
를 철거하고 교회당 확장공사를 하는 행위는 비윤리를 넘어 교회의 기
업화를 추구하는 반기독교적인 행태라고 하겠다. 이것이 비윤리적인
이유는 '마땅히 땀을 흘려 수고한 대가로서의 물질'이 아니라는 데 있
는 것이다. 이른바 불로소득은 다른 사람의 노동의 대가를 가로챈다는
말이 포함된 개념이다. 즉 한국 교회는 다른 사람의 노력을 빼앗아서
라도 성장을 계속하려는 욕구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외에도 사회풍조가 교회 내에 유입돼 부작용으로 나타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될 문제는 교회가 사회 악습을 그
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런 악습을 오히려 미덕으로 부
추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극단적으로 주식 가격의 상승을 위한 기
도라든지,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위한 기도 등은 앞의 맥락에서 볼 때
한번쯤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교회에 대한 악영향은 '교인'과 '지도자'의 모습에서 더 구
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목회자도 사회 구성원의 한 부류일
뿐만 아니라 교인도 실제 사회를 구성하는 혹은 사회를 움직이는 인물
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비윤리문제는 일차적으로 사회가치관의 무비판적 수
용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하겠다.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
지난 해 안수집사에다 남선교회 총무 등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개인택시 운전수 박태수(47) 씨가 84명의 여자승객에게 수면제를 탄
드링크류를 먹여 강제 추행하고 얼굴 사진을 찍은 뒤, 모두 1억여원대
의 금품을 빼앗은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발생해 세상을 또 한번 놀라
게 했다.
경찰조사에 의하면 박씨는 지난 2월 15일 저녁 8시쯤 서울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모 씨(35·주부)를 자신의 로얄프린스 개인택시
에 태우고 가다 감기에 걸린 척하며 인근 약국에서 드링크류 2병을 사
와 서씨에게 미리 신경안정제를 타 넣은 드링크를 마시게 해 혼수상태
에 빠뜨린 뒤 인적이 뜸한 곳에서 강제 추행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또 박씨가 90년 4월부터 최근까지 같은 방법으로 모두 84차
례에 걸쳐 범행해 왔으며, 상습적으로 여자승객의 돈을 빼앗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같은 윤리문제가 교인들에 의해 발생하는 것에 대해 합동신학교
교장인 김명혁 교수는 "급격한 산업사회의 발달로 인해 물량주의의 세
속적 가치가 교회에도 그대로 이식되어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이
기주의적인 경향에서 비롯됐다"며 "기독교인은 믿음의 한 표현으로써
윤리적인 생활을 해나가야 하며, 기독교윤리란 자기의 욕망과 편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한국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윤리적 타락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이와 더불어 이원론적 신앙관 역시 기독교인의 윤리부재 현
상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신앙과 실천을 분리해서 사고하려는 경향이라고 하겠다. 기독교
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에서 '믿
음'에 따른 실천적인 부분을 간과함으로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지만 사회에 나가면 세상 풍속에 따라 생활하는 이중적 삶의 구
조를 갖게 되는 신앙관에서 윤리의식의 부재현상이 기독교인들에게 나
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연세대 부총장 김찬국 교수는 "한국 교회 교인은 자신을 훌륭한 신
앙인이라 높이는 것에 만족하지만, 막상 사회생활을 할때 자기 한계를
벗어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말해 기독교인들의 이중성을 잘 말
해주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에 위치한 B교회 김모 집사(38)는 주일학교 교사, 성
가대 대원, 여전도회 회장 등 누구 못지않게 교회 봉사를 잘 하는 독
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집사는 시어머니인 이모 권
사와의 갈등으로 그를 잘 아는 교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어려운 시집살이를 시키지도 않는데 김집사는 이권사를 이유없이 싫어
해 끼니도 제대로 주지 않고 불평만 늘어 놓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이권사는 매일 밤 교회에 나와 눈물로 기도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다.
이같은 경우 겉으로 나타나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갖추었지만 참다운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은 결여되어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은 다르지만 우리 주위에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쉽게 발견함을 볼때 기독교인의 범죄행위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기독교인의 윤리의식 부재현상은 교회의 권위, 교회 지도자의 권위
상실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세우고 가르쳐야 할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 상실은 곧바로 기독
교인의 윤리적 혼돈을 가져오게 했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방
향을 잃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악한 행동
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장신대 맹용길 학장은 "질서의식이 상실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
은 남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행한다"며 "기독교인들
이 먼저 자연의 질서, 사회의 질서를 올바로 지켜나감으로 공동체의식
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동력화' 위한 교육을-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윤리적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삶과 신앙이 철저하게 분리된 잘못된 신앙행태에 있다고 보아
야 할 것 같다. 따라서 그 해결 방안도 올바른 신앙을 심어줄 수 있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신앙과 삶을 결합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로 이제까지의 모습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거듭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실천 없이 개인의 구원과 축복만
을 강조하는 편협한 성령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재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신학자와 목회자들도 여기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
다. 김중기 교수는 이제까지의 성령운동으로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전
체적인 통찰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역사의 경륜'과
'자연의 원리'를 창조적으로 배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역사의 경륜'이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윤리적 원리를, 그리고
'자연의 원리'란 인간의 실천적 이성을 말하는 것으로 각각 '빛'과
'소금'이라는 말로 대치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되고 두 가지가 창조적으로 결합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중기 교수의 설명이다.
유경재 목사는 신앙교육과 의식교육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현재 신학교의 교육 내용을 개편하여 의식의 개방이 이루어지도
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목회자의 의식수준이나 교
육철학을 신학교 시절부터 올바르게 이끌어 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
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맹용길 학장은 기독교의 윤리적 타락의 원인을 '이기심'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모든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교육과 운동만이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길임을 강조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사랑과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
는 질서란 '정의'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 두 가지가 회복돼야 진정한
평화가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이것이 참다운 기독교 윤리가 삶으로
내면화되는 길이라는 것이 맹용길 학장의 주장이다.
전문가들의 지적을 종합해 본다면, 한국 기독교는 '의식화'와 '동력
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해야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제까지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윤리적
가르침을 전달해 주는 '의식화'의 수준에 교육이 머물렀지만, 이것이
실천과 연결되지 못함으로 인해 타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
르침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동력을 불어 넣어 주는 작업, 즉 '동력
화'의 작업이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력화'를 엮어
내기 위해서는 지금의 편협된 영성운동이 실천까지를 포함하는 올바른
기독교적 영성을 회복하는 운동으로 바로 서야 한다는 점도 공통적으
로 지적되고 있다.
윤리의식의 부재문제를 '공동체의식'의 결여 때문인 것으로 보는 경
우도 많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제까지 한국 교회가
지나치게 개인의 축복과 구원만을 강조한 나머지 교인들에게 남을 돌
아보지 않는 이기심을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고 자기만 잘 되면 된다는 의식을 불어 넣음으로써 질서의식의
상실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의 회복을 위해서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공동체의식을 개발, 이것이 '공동체의 영성'으로 집합화 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일들이 모두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교회 지도자들의
진정한 각성과 자세 교정 없이는 완전한 회복이 힘들다는 것도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기독교의 윤리적 타락의
책임은 상당 부분이 지도자들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의 분열과 이권을 둘러싼 다툼 속에서 지도자들은 평
신도들에게 자신의 기득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
준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타락에는 이같은 지도자들의
윤리성 상실이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지도자
들의 각성과 회개야말로 한국 교회가 윤리적으로 바로 서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교계 일각에서는 윤리적 타락이 한국 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의 공통적인 현상임을 지적하면서, 서구 기독교가 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밟아온 과정을 백년 남짓한 역사를 지닌 한국 기독교가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좀더 인내를 가지고 지켜 보면 한국 교회가 자신의 길을 찾으리라
는 낙관론도 존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택시를 몰고다니며 여자 승객에게 신경안정제를 먹이고
폭행을 일삼던 '파렴치범'이 교회 집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
명해야 할 것인가?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한국 교회의 도덕성 05/19 00:45 318 line
■ 한국 교회의 도덕성
- 기독교인의 모습 잃고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
지금 우리 사회의 도덕적 타락은 인간적인 삶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다. 경제성장에 걸맞지 않는 도덕수준으로 사회 각 부문은 향락·퇴
폐 풍조가 만연돼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
가운데서도 '윤리 부재 현상'은 더이상 간과할 수 없는 위험 수위에
도달하고 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을 자처하던 기독교인의 윤리는 어
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일반인들에게 던져지는 거부감-
"크리스찬이 그럴 수 있느냐. 한국 교회는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한국 교회가 날
이 갈수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비기독교
인들만의 비판이 아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교
회의 본분을 다하기보다는 극도의 물량주의, 상업주의 등 세속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비판하며 안타까워한다. 특히 기독교인의
윤리문제를 말할 때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가 없다."고 거
리낌없이 말한다.
지난 1988년 9월 23일 서울지검은 '권총 살인'을 한 장모 목사(66·
당시 동부교회 담임)를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장목사는 경찰에서 "신도 30여 명으로 교회가 초라하여 운영이 안된
다고 생각하여 타인의 금품을 강취하여 교회를 재건할 것을 마음먹고
범행했다."고 자백했다. 이 사건으로 신모 씨(47·세무 공무원)는 숨
졌고 손아래 동서 방모 씨(53·부동산 소개업)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경찰은 장목사가 큰 교회를 지을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살인
을 계획하고 사체 처리 방법까지 결정한 후 범행한 것으로 수사를 종
결했다.
지난 2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모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이모
목사(39·여)가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의 젊은 여신도 4명을 술집에 고
용시키고, 이들로부터 모두 2천4백만 원 상당의 돈을 뜯어낸 혐의로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의해 구속됐다. 이씨는 지난 84년 S신학대를 졸
업하고 86년 K신학대 선교대학원을 졸업한 후 87년 목사안수를 받았
다.
경찰 조사 결과 이씨는 83년 1월부터 89년 1월까지 서울 은평구 응
암동 둁교회에서, 89년 2월부터는 걁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지난해 목
회를 그만둔 이씨는 가출한 4명의 여자들을 같은 교회 김모 집사를 통
해 술집 종업원으로 취업시킨 뒤 "버는 대로 돈을 보내주면 너희들처
럼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나 혼자 사는 여성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할테
니 도와달라."며 매달 이들이 번 돈의 절반씩을 뜯어왔다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장목사와 이목사의 경우는 어떤 논리
나 이유로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비윤리적인 행위·비인간적인 행
위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크리스찬이 그럴 수 있느냐."는 기
본적인 기대마저 짓밟아 버렸고 한국 교회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
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를 '윤리 부재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돈이면
윤리도 뛰어넘는다는 생각이 팽배한 황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어 살아
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라는 것이다.
빛과 소금으로서의 크리스찬의 삶은 항상 윤리적이어야 한다. 크리
스찬에게는 이 사회가 기대하는 일반적이고도 상식적인 삶의 수준이
있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혹은 이 기대를
저버렸을 경우, 이 사회는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 비기독교인들이 기대하는 것만큼의 삶을 살
고 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기독교인을 대상으로 기독교 사회문제연구소가 지난 1982년 여론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 더 이기적인가?'라
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이 31.7%인데 반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은 17.5%에 불과했다. 또한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
양심적인가?'라는 물음에 24.8%가 기독교인이 더 양심적이지 않을 뿐
만 아니라 22.7%는 기독교인이 더 '구두쇠'라고 답했다. 이는 한국 교
회와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비기독교인들의 거부감은 이 조사가 있은 지 3년 뒤인 지난
85년 모월간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더 잘 나타나 있다. 비기독교인의
대부분이 교회와 기독교인에 대해 갖고 있는 거부감은 "종교를 믿는
건 좋지만 교회가 너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교회가 자기 과시·전도
에만 열을 올리는 것 같아 싫다."는 것이었다.
목회자(38명), 평신도(63명), 비기독교인(6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모두가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대형화에
따른 물량적 팽창주의였다. 그 다음으로 지적된 문제점은 교파 분열,
기복신앙, 목회자 자질 순이었다. 특이한 것은 목회자의 자질이 평신
도(52.4%)는 물론 목회자 자신들까지도(50%) '실력과 인격이 부족하
다'고 응답했다. 역시 이 조사에서 주목할 것은 비기독교인들이 교회
를 바라보는 '눈'이다. 비기독교인들의 신자에 대한 느낌은 31%가 '이
기적인 경우가 많다' 23%가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다' 19%가 '위선적
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인다'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에 반해
'모범적인 생활태도와 인격에 끌려 사귀고 싶었다'는 긍정적 반응은
1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가 갈수록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눈은 부정적이다.
이 조사 결과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평신도의 21%가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낙태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람
도 13%나 됐다. 우리 사회가 그나마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만큼이라도
정제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덕택'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
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교회의 한쪽 모서리가 썩어가고 있었다. 비
윤리적인 성문제는 평신도뿐만 아니라 교역자에게까지 오염되어 때때
로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하면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성적 타락 위험 수위에-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직자는 물론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성문제의
심각한 위협 속에 있다. 성경은 "마지막으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
르면 사람들이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디모데후서
3:1∼4)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바로 이러하다.
지난 86년 5월 22일부터 24일까지 '현대와 크리스찬의 윤리'라는 주
제로 남서울교회당에서 개최되었던 제10회 강남지역 연합 신앙강좌에
서 옥한흠 목사는 "언젠가 어느 신학도와 만나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
는데 그 학생은 자신의 이성문제를 상담하는 가운데 '목사님, 우리 학
교 학생들을 보면 교수님은 눈치를 못채시지만 남녀학생이 마음만 맞
으면 동거하는 경우가 한두 건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더군요."라고 하
였다. "그 학생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참동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고 말한 옥한흠 목사는 "그렇게 비윤
리적인 학생들이 신학생 대우를 받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까?"를 묻고, 문제는 신학생뿐만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지난 20일 인천에 사는 이모 씨(46)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김모
목사가 자신의 아내를 폭행하여, 아내의 정신이 돌았다."며 "김모 목
사의 거처를 알 수 없겠느냐."고 문의해왔다. 이씨는 김목사를 가정을
파괴한 '마귀'라며 끝까지 찾아내 혼내 주겠다고 말했다. 현재 김목사
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피해 다니고 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성문제로
'마귀' 앞에 굴복한 목회자는 몇이나 되는가. 어린 양들을 돌보는 목
회자들이 이러할진대, '전선'이 없다는 향락산업 사회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사는 일반 신자들은 어떠할까. 평신도 중 21%가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설문조사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가.
이러한 수치는 이 설문조사가 있은 다음 해인 지난 86년 서울 성신
여대에서 전국의 남녀 대학생 3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와는 다
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이는 성적 타락이 교회까지 침투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폭발적인 성문제의 범람을 막
아내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 사회의 성적인 타락 현상에 대해서 교회가 공적으로 경고를 한
다든지 도전한 예는 없다. 다만 YMCA 시민자구운동본부(이하Y), 기독
교윤리실천운동본부 등이 지난 88년부터 향락문화 추방운동을 벌이고
있다. 향락산업이 번창하게 된 그 원인 등을 분석한 Y는 한국에서 향
락산업이 급성장하게 된 근본원인을 60년대 이후 고도성장만을 추구해
온 우리 자본주의 경제의 파행적 구조 때문이라고 규명했다.
Y는 이에 대한 이유로 첫째, 해방 이후 누적되어온 가치 문화의 황
폐, 둘째, 천박한 상업자본주의 시대상, 셋째, 산업구조의 불균형으로
인한 서비스 산업의 이상 비대, 넷째, 건전한 직장문화의 부재를 들었
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윤리부재 현상은 성문제뿐만 아니라 '돈문제'에
서 그 모습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앞서 모월간지에서 조사한 설
문에 따르면 교회의 직분(장로·권사·집사)에는 응답자의 43%가 '금
전 등과 관계되어 권위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일이 많아 염려스럽다'고
답하였다. 또한 73%의 평신도와 60%의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대접을 받는다'고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더 대접을 받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단 한 명
도 없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사는 박모 집사(56)는 입교한 지 10년이 넘었
지만 아직 장로가 되지 못했다. 그는 주위사람 눈치볼 것 없다는 듯
이, 여러 사람 앞에서 "돈이 없어 장로가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에서(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장로를 선정하는
기준은 신앙이나 봉사, 식견 등에 두지 않고 오직 풍부한 재물"이라는
것이다. 입교한 지 1,2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교회 건축에 몇십, 몇
백만 원을 헌금하고, 피아노·오르간 등 교회 비품을 헌납만 하면 장
로를 준다는 설명이다.
서울 은평구 응암동 큁교회 담임 김모 목사는 지난 1984년 교육관
증축헌금을 교인들로부터 받아 은행에 예치했다. 김목사는 여기에서
나온 이자 약 7천만 원을 유용, 자신의 개인주택을 사는 데 사용했다.
김목사는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교인들로부터 노회에 제소되어 한때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금전의 노예로 전락-
오늘날 돈이 원인이 되어 교회 내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
하다. 교단의 신학교나 그외의 부설기관에 속한 재산으로 인한 분쟁
또한 자주 목격한다. 오늘 한국 교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맘몬주의에
물든 한국 교회의 현실을 개탄한다.
"오늘 한국 교회의 대다수의 장로, 집사는 너무 돈을 사랑한다. 돈
을 숭배한다. 돈으로 무엇이든 하려 한다."는 지적이다. 1천만 명이
넘는 신자를 확보했다고 신자 수를 자랑할 때부터 한국 교회는 대교회
주의와 개교회주의에 치중하는 물량주의와 상업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는 지탄을 벌써부터 받아왔다. 농민교회, 빈민교회, 노동자교회 등 작
은 교회들이 지금 곳곳에서 세워지고 있다. 이것은 물량주의 유입을
반대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오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윤리부재 현상 중 또
다른 하나는 물량주의 등 세속화에 따른 교회의 집단적 이기주의이다.
교파의 난립이나 신학교의 난립은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집단적 이기
주의의 한 표본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난 87년 말 당시 문공부가 집계한 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국내 각
종교단체의 교직자 수는 11만 2천32명이었다. 여기서 신도 수가 1백만
명을 넘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의 교직자 수는 7만 7천44명이었다.
이중 기독교의 목회자가 4만 8천3백34명으로 63%나 됐다(전도사를 뺀
목사는 2만 4천6백23명).
교직자를 배출하는 교육기관도 기독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불교가
전통적인 방식의 수행에 의해, 천주교가 4개 신학대학을 통해 교직자
를 배출하는 데 반해 기독교는 12개 신학대학과 25개 신학교에서 교직
자를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각 종교 단체의 교파는 천
주교가 단일 교단인데 비해 불교가 14개, 기독교가 74개의 교파로 나
뉘어 있다.
교파의 난립과 신학교의 난립이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집단적 이기
주의에 의한 것임을 그대로 나타내 보인 통계이다. 이뿐인가. 한국 교
회는 교회연합에 있어서도 똑같은 집단적 이기심만을 앞세우고 있다.
더욱이 오늘 한국 교회가 카톨릭이나 불교 등 다른 종교나 종파보다
더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
가 집단적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지난해 현대사회연구소에서는 전국의 목사(178명), 신부(135명), 승
려(136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종교 지도자들의 의식에 대한 조사
연구」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승려 81.7%와 신부의 85.7%가 타종교
에 대해 '인류사회를 위해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반면, 목사들
은 5%가 '철저히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29.9%가 '공존해야 할 대상'
이라고 응답하여,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것으로 나타
났다.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해 배타성이 강하다는 결과는 비단 이번
연구 조사뿐만이 아니다.
이처럼 배타성이 강한 기독교는 타종교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 내
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결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강한 집단적 이기주의로 표출, 오직 '내 교회' '나의 하나님'만을 찾
게 만든다. '주님의 교회'라는 말보다는 '내 교회'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보다는 내 교회를
믿는다는 신앙으로 변질된다. 급기야 집단적 이기주의로 인한 개교회
주의 신앙은 현세주의 신앙으로 추락하게 되고 만다.
기독교 윤리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대부분의 한국 교회 교인들은
윤리적 문제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일주일 중 엿새 동안을 세상에
나가 살다가 주일날 하루 교회에 나와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는 신
자들 대부분이 도덕적 이중 구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이중
구조는 믿음을 생활화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윤리부재 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많은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걱정한다. 이러한 때 최근들어
기독교 각 단체에서 벌이고 있는 '바른 삶 실천 운동' 및 '기독교윤리
실천 운동' 등이 다 허물어진 기독교윤리의 집을 재건하는 데 주춧돌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기독교윤리 실천 운동 제창자들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서 한국 기독교는 다른 아무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으며, 사회와
국가의 모든 부조리는 기독교인들 자신의 불의 때문에 비롯됐다."고
자책적인 고백을 하고 있다. 이들은 또 "그동안 한국 기독교가 교세
확장에는 많은 힘을 기울였으나, 올바른 생활 추구에는 등한시했고 물
질주의를 극복치 못한 난맥이 없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 속에서 나날이 황폐해져
가는 사회·문화·환경의 개선을 위해 YWCA 연합회는 '나부터 시작하
자'라는 구호로써 '바른 삶 실천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지난해 6월,
밝은 가정, 바른 사회를 위한 11개 항목과 절제와 분수에 맞는 생활을
위한 18개 항목, 퇴폐·향락을 고치기 위한 9개 항목 등 총 38개 항목
으로 된 지침을 마련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가 별로 중하지 않은 것
처럼 그것을 어루만지며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고 말하지만 사실 평안은 없다. 그들이 자기들
의 더러운 행위를 부끄럽게 여겼느냐? 아니다.
그들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 하나 붉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꾸러질 것이니 내가 벌을 내릴
때에 그들은 파멸될 것이다. 이것은 나 여호와의
말이다."
(예레미야 6:14-15,현대인의성경)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총회-과열타락 선거풍토 05/19 01:03 274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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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한국교회의 허와 실(Ⅲ)」(기독교신문 취재팀, 93.12월)
에서 발췌한 글로써, 기독교신문에서 연재되고 있는 '한국교회...
그 문제의 현장 집중취재'에 실린 기사를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 과열·타락 선거 풍토
- '감투욕심'과 '기대심리' 맞물려 상승작용
국내 각 장로교단의 총회 시즌이 다가왔다. 교단의 가장 큰 축제라
고 할 수 있는 총회가 최근들어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총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몇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그 첫번
째로 총회장 선거의 타락 과열상의 문제점을 알아본다.
-오래 전부터 문제제기-
각 교단 총회 임원 선거에서 입후보자들 간의 과열경쟁은 어제 오늘
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지난해에는 모교단의 부총회장 입후보자가 10억 원 이상의 돈을 뿌
리며 선거운동을 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각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물의
를 빚었다.
이러한 가운데 각 교단의 젊은 목회자들은 물론 노회에서까지도 이
문제를 거론하기에 이르렀으며, 이같은 풍토 속에서 이루어진 임원선
거는 무효이고 당선자는 당연히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교단의 젊은 목회자들의 모임에서는 지난해 총회가 끝나자 '교단
정화와 교단의 갱신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면서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운동 규제조항 및 처벌에 관한 규정을 이행할 것과 타락선거의 당
사자들은 사퇴할 것 등을 밝힌 바 있고, 또 이 일을 주도했다는 이유
로 정화를 추진한 당사자를 노회 임원에서 떨어뜨리는 등의 교권적 대
처를 하기도 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편 오는 9월 각 장로교단 총회를 앞두고 기독교 18개 단체는 각
교단 앞으로 호소문을 보내 교계지도자들의 선거양상이 과열, 타락으
로 기울어지지 않기를 기대했으나 올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변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불법적이며 비신사적인 선거운
동을 하는 후보자들은 교회의 대표자로 뽑지 않음으로써 교회의 명예
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또한 교단 총회에서의 임원선거가 계속해서 타락양상을 보임에 따라
교단마다 선거법을 재검토하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경우는 올
해부터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임원 선거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러한 타락선거는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지적이 일반
적이다. 교단의 임원은 곧 목회의 성공 내지는 교단의 지도자로서 추
앙을 받게 된다는 등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고 임원에 당선되고자 노력한다.
그렇다면 총회장 선거의 과열, 타락 사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가?
대한예수교장로회 H교단 제75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로 출마한 이모
목사는 총회가 개회되기 전날, 전주 모아호텔에서 450여 명의 총대들
을 모아 놓고 향응을 베풀며 '표'의 이탈을 단속했고, K후보도 180여
명의 총대를 대전 모호텔로 초청하여 2만원 이상가는 음식을 대접하며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 과열선거에 직접 개입했던 이후보의 아들 이목사는 전주 모아호
텔에서 총대들에게 숙식비를 제외하고 거마비로 지출된 '돈'이 1천8백
여만 원에 이른다고 이 총회에 참석한 한 총대에게 밝혔다.
이 교단의 부총회장의 당락이 총회 개회 전날 숙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각 후보는 많은 총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총회 장소 주변에
위치한 숙소잡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교단 제76회 총회 장로 부총
회장 후보로 출마한 Y장로는 총회 장소 근처에 자리한 숙소를 많이 확
보하여 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이런 혼탁한 선거풍토에 눌려, 부산의 P목사는 제75회 총회 부총회
장 후보로 나섰다가 후보등록을 취소했다. P목사는 K장로가 3천만원을
요구해 오자 "목사가 무슨 돈이 있느냐?"라고 하며 거절하고 두 번에
걸쳐 총대들에게 깨끗한 선거풍토에 앞장서 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고 출마를 포기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T교단 부흥협의회는 금전타락 선거의 틈을 이용하
여 부총회장 후보로 출마한 한모 장로를 E호텔 세미나 장소로 불러 식
사대접을 융숭하게 받아내는가 하면, 각 연합회도 한모 후보에게 노골
적으로 금전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한 후보가 지출한 선거
자금이 10억원 이상 된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얼마만큼 부패해져가고
있는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각 교단 후보들은 수십개나
되는 노회, 지방회를 순회하며, 총회 총대들에게 값비싼 음식을 대접
하고 거마비(교통비)를 주는 행위가 하나의 관례로 되어버린 지 오래
다.
이런 융숭한 대접에 매력을 느껴 정치력을 가진 목사, 장로들은 총
회 총대로 선출되기 위해서 노회원 또는 지방회원들을 대상으로 선거
운동을 벌인다. K교단 C노회는 총대 선출 문제로 노회가 분열될 위기
에 직면, 총대로 선출된 증경노회장단이 총대를 포기함에 따라 사태가
수습되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금전에 의해서 선거풍토가 흐려지는 경우이다. 또한 지
연, 학연 등에 따라 선거운동이 과열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도 시급
하게 요청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H교단은 교단장 선거로 인해 S측, J측, H측으로
분열되었으며, D교단은 교단장 선거만 끝나면 K목사측과 C목사측으로
양분되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역감정까지 가세-
예장 통합측과 합동측은 총회장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지역간의 갈
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매년 돌아가면서 지역별로 후보를 내게 하여 교
단장을 선출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는 지역감정을 타파한다는 데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으나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인물 중심보다는
지역안배에 우선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으며 이는 교단 내의 지역
감정이 얼마만큼 팽배해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감독선거 및 감리사 선거 때마다 대전목원대 출
신과 서울감신대 출신, 호헌과 신호헌 등이 팽팽히 맞서 계파간, 학연
간의 선거를 치르는 인상을 받고 있다.
이 교단 서울남연회는 과열선거를 방지하고 학연간의 갈등을 극복하
며y
깨끗한 선거풍토를 조성하기 위해서 목원대학 출신, 감신대학 출
신, 기타 신학교 출신이 돌아가며 후보를 내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제
20회 총회에 감신대학 출신인 이종수 목사와 안행래 목사가 출마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의 임원선거는 총회장의 경우 현직 부
회장만이 입후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총회장과 부총회장에 y입후
보 하기 위해서는 소속 노회의 추천을 받아 기일 내에 선거관리위원회
에 등록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선거법에 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공정한 선거를 해치는
체의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되며, 총회 부서 기관들은 지지 또는 반대를
위한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전국을 5개 지역
으로 나누어 지역안배에 따y 순서대로 입후보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제76회 총회는 총회장단 및 총무 후보의 인선을
위한 인선위원회를 구성, 부총회장과 총무를 3배수로 인선하여
선출하
는 새로운 선거법을 통과시켰다.
이 선거법에 따르면 총회장은 전 회기년도 부총회장을 총회에서 신
임투표로 선출하고, 부총회장과 총무는 총회 공천위원회가 총회 당일
조직한 부총회장 및 총무인선위원회가 총회 개회 당일 밀실에 모여 각
후보에 대해서 3배수로 인선하여 총회에 보고하게 되며, 총회는 3명의
후보를 놓고 투표y
로 선출해야 한다.
이 인선위원회는 증경총회장 3인, 목사 총대 6인, 장로 총대 6인 등
15명으로 구성된다.
이 총회가 새 선거법을 내놓게 된 데에는 후보 등록비y
의 전면 폐지
에 대한 문제, 후보 추천제의 모순, 공고 및 등록 이전의 사전선거운
동 및 등록 후의 선거운동규제법 등 선거운동 규제조항의 모순, 선거
과열로 인한 금전의 과다지출, 지방파당의 출현 등을 미리 방지하고
총회적 화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선거규정 없는 교단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감리교,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이 선거공
영제를 실시하는 것과는 달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이렇다할 선
거법이 없다.
다만 총회 규칙 제2조에서 선거방법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이
에 따른 선거방법은, 회장과 부회장은 출석회원 투표 과반수로 선거하
고 그외 임원은 2회까지 투표하여 과반수 득점자가 없을 때에는 제2회
투표의 최다점수로 원을 정하고 그 차점으로 부를 정한다. 계표 위원
은 회원 중에서 10인 이내를 회장이 지명하되 최선 지명자가 위원장으
로 투표를 시행한다. 이상 모든 임원은 임원직에서 2y
선을 초과하지 못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규칙 선거방법에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합동측 또한 다른 교단
과 같이 임원선거의 과열을 막기 위해 지역윤번제를 채택하고 있다.
즉 이북·영남·호남 등 3지역으로 나눠 해마다 번갈아 가며 총회장을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 2년 전부터 장로부총회장제를 도입한 합동측은 총회장이 지
역윤번제를 실시하는데 반해, 장로부총회장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이때문에 올 총회의 경우 벌써부터 장로부총회장 선거를 앞두고
혼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은 지난번 총회부터 실질적인 '공영제'를
실시하고 있다. 고신측은 원래 입후보등록 등 절차없이 총회장소에서
곧바로 선거를 통해 총회장 등을 선출하곤 했으나, 이 방법에 문제점
이 너무 많이 표출되어 몇가지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고신측 선거제도의 핵심은 '후보자의 자격 제한'이다. 즉 총회장과
제1부총회장(목사)의 경우는 만 60세 이상으로서 목사임직 20년 이상
인 사람만이 후보로 나설 수 있으며, 제2부총회장(장로)은 만 55세 이
상으로 장로임직 20년 이상인 사람만 입후보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
다. 또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아무나 마음대로 출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회 운영위원회가 선출하는 9인의 공천위원이 5배수를 추천
해 입후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총회장은 '업무의 지속성을
감안하여' 제1부총회장이 투표를 통해 승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고신측의 이같은 선거규정은 선거의 과열과 타락을 막는다는 의도도
있지만, 사실상 교단 내의 위계질서를 깨는 입후보자의 돌출을 막으려
는 시도로 풀이될 수 있다. 그것은 이 선거규정이, 선배들을 제치고
부총회장까지는 무난히 진출했으나, 총회장 선거에서 낙선한 이모 목
사의 경우가 발생한 직후 제기되어 법제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사정이야 어쨌건, 위계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교계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독교한국침례회의 경우는, 선거공영제를 실시해 왔지만 사실상 무
제한의 선거운동을 허용해 왔었다. 그러나 지난번 총회부터 선거관리
위원회가 "총회 개회 이후에는 일체의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는 제한
규정을 마련했다. 이 규정은 작년 총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앞
으로도 계속 적용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각 교단의 과열·타락 선거 방지 운동은 처음에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총대들에게 생소하게 보였으나 갈수록 그 취지에 동감
하는 경우가 많아 점점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과열·타락 선거의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권좌'에 오르고자 하
는 후보자들의 과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따라서 타락선거를 진정
시키기 위한 방안은 우선적으로 후보자들과 총대들의 의식개혁에서부
터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후보자의 과욕은 불법적인 선거운동을 낳게 되고, 여기에 길이 든
총대들은 '보다 좋은 대우'를 찾아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게 되는 것이
다. 이제까지 '총대들에 대한 향응제공'이나 '금품살포' 등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났던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요인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
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교단이 정하고 있는 선거제도에 따라 공정
한 방법으로 자신을 알리려는 페어플레이 정신과 선거를 미끼로 각종
'접대'를 바라는 총대들의 그릇된 정신자세를 바로잡는 일이 선거풍토
개선의 첫걸음이라는 얘기다.
두번째로 제도상의 문제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대교단의 경
우, 총회의 규모가 워낙 비대해져, 후보자간의 정책대결 등 '조용한
게임'으로는 도저히 후보자를 알릴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는 것이다. 따라서 후보자의 얼굴을 알리기 위한 지역별·노회별 모임
과 식사제공 정도는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등 일부 대교단에서 '대
회제'를 채택한다거나 총대 수를 줄이는 방안을 내놓았다가 결국 수포
로 돌아가고 만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제도상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적인 선거운동을 통
해 누구라도 총회장이 될 수 있다"는 일반적인 선거논리를 불식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부 교단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지역
윤번제'나 '서열에 따른 추대방식'이 도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
해도 나오고 있다. 또한 다음 회기의 총회장을 그 직전 총회에서 선출
하는 것이 아니라, 2년 내지 3년 전에 미리 선출해 놓는 방식도 일부
에서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시행되기에는 이른 감이 있는 것도 사
실이다. 또한 선거과정에 대한 상설 감시기구가 없는 것도 문제로 지
적돼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같은 '윤번제'나 '추대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교단 내
의 위계질서가 명확하게 세워져야만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
교계에는 이러한 풍토가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다.
교단의 위계질서가 특정 후보의 돌출로 깨진다는 것은 결국 교단의
단합에 구멍이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문제뿐만 아니
라 교단 자체를 위해서도 명확한 위계질서를 수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 비효율적 의사 진행
- 안건처리 제대로 못한 채 폐회하기 일쑤
우리 나라 각 교단 총회는 그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 지극히 비효율
적이다.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가 하면 어떤 안건들은 다
루지도 않은 채 하급기관에 넘겨버리기도 한다. 우리 나라 교단들의
총회가 보여주는 비효율적인 의사진행의 문제점을 살펴본다.
-"고어(古語) 써야 권위 선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도 1백년이 넘었다. 그동안 기독교
가 한국 사회에 기여한 공로 중 하나는 민주적인 회의제도를 시행, 사
회의 민주적인 분위기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공동의회→노회(연회·지방회)→총회로 연결되는 교회의 독
특한 의사 결정 구조로 인한 것이다. 이중에서도 총회는 교회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로서 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로부터도 큰 관심의 대
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와 각 교단의 총회가 지나치게 소모적이고 유익
이 별로 없다는 비난을 많이 받고 있다. 그것은 총회마다 예외없이 총
회장을 비롯한 임원선거에만 관심을 둘 뿐, 정작 중요한 각종 안건의
심의나 의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
다. 더불어 첨예한 한 가지 문제에 집착, 시간을 낭비하다가 다른 안
건들은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교단 실행위원회나 임원회에 떠넘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의사 결정 과정이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단마다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닷새에 이르는 총회 기간을 설정하
고 있지만 이중에서 진지하게 안건을 다루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
다.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일부 총대들은 임원 선거가 끝나면 총회
장소를 빠져나가 개인적인 일을 보기도 한다.
총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비효율적 요소 중 하나는 현실
에 맞지 않는 언어 사용이다. 예를 들어 헌의안심의부에서 헌의안을
교통 정리한 결과를 보고할 때는 "×××안건은 공천부로 보내심이 가
한 줄 아오며, ○○○안건은 심의 후 허락하심이 가한 줄 아오며…
…."하는 식으로 오늘의 어법과는 다른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의장의 의사 진행에 있어서도 가부를 묻는 질문을 할 때 "가하
시면 예 하시오."라든지 "개의에 가하시는 분은 거수하시오."라는 식
의 표현도 많이 사용한다. 법원의 판결문도 현대어와 한글을 사용하는
시대에 교단 총회의 언어는 아직까지도 고어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총회의 의사언어가 이처럼 고어로 사용되는 이유는 총대 및 교역자
들의 권위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거룩해야 할 '성총
회'에서 어떻게 가볍고 쉬운 말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당연히 어려운 말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총회의 언어도 쉬운 현대어로 바꾸어 사용해야 한
다. 총회의 권위는 총회가 어떤 안건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의해 결정
될 일이지, 얼마나 어렵고 고풍스러운 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
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단 총회는 이같은 구시대적
이고 그렇다고 해서 현학적이지도 못한 언어들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
는 실정이다.
-"법이요"로 일사천리-
총회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회원들은 회의 진행 방법과 총회 헌법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법이요"란 말 한마디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안
건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총회를 폐회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
'법'임을 내세워 중요한 안건을 다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총회원은
다른 총회원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고 내세우며, 과
시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편견과 아집, 고집만을 내세운다.
또 이들은 총회원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총회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갖
고 있는 사람들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법'을
내세워 다수의 의견을 제지시킨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편 총회는 발언을 많이 하는 몇명의 '정치목사'에 의해서 이끌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정치목사'는 총회석상에서 발언을 많
이 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압력 단체를 만들며, 지방회까지
조직, 총회를 부패하게 만든다.
또한 정치목사들은 총회석상에서 조직의 회원끼리 마이크를 돌려가
며 장악하여 자신이 소속해 있는 단체의 세력을 과시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안건들을 처리하며, 심지어는 이런 정치력을 이용하여 정
·부총회장에 입후보한 후보자들에게 금품을 요구하고, 총회의 분위기
를 혼탁하게 만드는 경우가 태반이다.
회의를 진행하는 총회장도 회원들에게 발언권을 균등하게 주어서 폭
넓은 의견을 수렴하기보다는, 자신의 편에 선 회원의 발언권은 많이
주고 반대편에 선 회원에게는 발언권을 제약하여 총회를 파국으로 이
끌어 가는 경우가 각 교단 총회 때마다 나타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68년도 총회에서 회의 진행을 맡은 총회장이 자
신의 편에 선 총회원에게만 발언권을 주자 반대편에 선 회원들이 반
격, 이로 인해 양편의 '정치목사'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서로 모함
하며, 총회장의 멱살을 잡아 의장석에서 끌어내리는 폭력이 난무, 이
를 지켜보던 이 총회가 열린 J교회 교인들이 똥물을 총회 장소에 뿌
린,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여 한국 교회 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H교단 '79년도 대구 총회에서는 영남권을 중심으로 뭉친 총회원들이
경찰을 동원하여 "모세오경이 '함무라비법전'에서 유래되었다."고 주
장한 학설에 대해서 제동을 건 J모 목사를 중심으로 뭉친 호남출신 총
회원들의 총회장소 출입을 통제하고 입맛이 맞는 총회원들끼리 총회를
개회, 이로인해 H교단은 주류와 비주류로 분열되었으며, 이때부터 한
국 장로교단은 사분 오열하기 시작했다고 많은 목회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H교단의 대구 총회는 한마디로 총회를 시끄럽게 만들 수 있는 요소
를 미리 제거하여 편안한 가운데 총회를 개회할 계산에서 이러한 행동
을 취했으나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는 큰
오점을 남겼다.
제77회 총회를 앞두고 장로교 각 교단은 있는 세력간의 싸움이 아닌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총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소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며, 많은 의견을
수용하여 중요한 안건들을 처리하는 '성총회'가 되어야 하고, 깨끗하
고 질서있는 총회가 될 수 있도록 총회원들은 각자가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될 것으로 여겨진다.
-시간 낭비하기 일쑤-
장로교 총회는 대개 매년 9월 셋째 주일 후 월요일 혹은 화요일부터
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원칙을 따른다면 올해 장로교
총회가 앞으로 한 달 남짓 남았다. 이미 각 교단의 총회 공천부는 총
회 상비부 조직을 마친 상태이다.
장로교의 총회는 교단의 최고 치리기관으로 '성회'라 부르기도 한
다. 그러나 해마다 각 교단이 총회를 치르는 모습을 보면, 이 말에 강
한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회예배를 마치고 이어지는 사
무처리 시간은 이같은 의구심을 더하게 한다.
총회 사무처리에 앞서 한국의 장로교 각 교단은 개회예배를 드리고
성찬예식을 거행한다. 그러나 성찬예식이 끝나고 총회 서기가 회원 호
명을 하면서부터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한국 장로교 총회의 또
다른 순서이다. 서기 호명에서 말썽이 일어난 총회는 장시간 회장의
개회선언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움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심한 경우 회장은
정회를 선포하게 되고 총회는 마치 세상 국회처럼 공전상태로 돌입하
게 된다. 이러한 일은 보통 총회가 열리기 전 노회 혹은 개교회(보통
은 총회재판국) 등에서 어떠한 일이 공명정대하게 처리되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전주곡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와 개혁측 총회에서 이와
똑같은 일이 발생, 방청나온 교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구 동신교회당에서 열린 합동측의 경우 십계명 변칙 강해 시비와
관련, 둘로 갈라진 군산노회의 총대권 시비가 발단이었다. 개혁측 총
회의 경우는 임원 선거와 맞물려 있어, 이튿날까지 총회가 공전되는
심각한 상황을 야기시켰다.
총대권 시비로 총회가 제 시간에 개회하지 못한 것은 비단 이 둘뿐
만 아니다. 일찍이 1959년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소집된 제44회 대한예
수교장로회 총회는, 5일간의 시간을 허비하고도 개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총회가 둘로 갈라지고마는 오점을 남겼다.
이처럼 총회 개회 벽두부터 시작된 불미스런 사태는 사무처리에 들
어가면서 더욱 심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임원선거에서 자파가 당
선이 되지 않은 경우 고의적으로 회의를 방해하거나, 회의장을 아수라
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 회장은 정치문제와 관련된 안건을 다룰 경우, 자파의 이익이 되
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묵살하곤 한다. 즉 손을 들어 찬
반을 가려야 할 첨예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회장은 구두로 찬반을 묻
고, 반대 목소리가 큼에도 불구하고 통과시켜 말썽이 되는 경우도 자
주 볼 수 있는 것이 한국 장로교의 총회이다.
-총대없는 총회-
대부분의 교단은 총회의 초점을 임원선거에 맞추고 있으며, 다른 안
건 등에 대해서는 관심밖으로 돌리고 있다.
총회의 시작과 함께 총회장, 부총회장 선거로 이어지고 다른 임원선
거 순으로 진행되며 이를 마치면 많은 총대들이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결과로 정치적인 중요안건은 뒤로 미루어져 남아 있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졸속 처리되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임원선거 혹은 회의 기간의 앞부분에서 다루어지는
안건 때문에 시간이 초과되어 뒤의 안건은 임원회나 실행위원회로 넘
겨져 처리되기도 한다.
'90년에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한 교단 총회는 개회 벽두부터
임원 선거를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에는 임원 구성문제만 매듭짓고
폐회하기도 했다.
이러한 맹점을 이용해서 안건처리를 하는데 있어서도 주요 안건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 대부분이 임원회에 안건처리
가 넘어가 통과 혹은 부결됨으로써 나중에 개교회에 혼란을 주는 경우
가 있다.
이러한 경우 총회석상에서 안건이 처리된다고 하더라도 임원선거를
마치고 총회 참석자들이 자리를 떠 회의를 주도하는 몇몇 사람의 의도
대로 안건이 통과되는 경우가 있어 전체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보기
힘든 경우도 있다.
특히 자리를 뜨는 경우에 있어 일어나는 문제의 심각성은 더 하다.
최근에 장로교의 한 교단에서 똑같은 안건을 놓고 매년 부결된 경우가
있었다. '89년도 서울에서 열린 총회에서 이 안건에 대해 찬성이 반대
보다 앞섰으나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부결로 끝났으며, 다음해에 지방
에서 열린 총회에서는 압도적인 표차이로 부결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총회에서는 그 표차이가 한층 줄어들었다. 이러
한 결과를 놓고 사안이 처리될 때 총회 참석자들이 얼마나 참여했느냐
에 따라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서울에서 총회가 개최될 때에는 총대들
이 총회 내용보다 개인의 사무에 치중해서 총회 참석이 적었으며, 지
방에서는 고립된 상태로 비교적 총회에 많은 인원이 참석해 안건처리
의 결과가 달라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경우 목사보다 장로의
자리 이동이 많음이 지적된다.
지난해 감리교의 총회에서도 종교 다원주의 등으로 문제가 되었던
두 교수에 대한 처리가 많은 수의 총대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처리
되어 또 하나의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총회에서 결의된 헌법수정안 등이 노회와 노회원들의 재차 심의를
거쳐 안건을 처리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총회석상의
폐단을 보완하는 경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총회에 참석하는 총대들
의 자세가 중요하며, 임원선거 등으로 인한 소모전적인 회의 진행 방
법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몇몇 사람들에 의한 회의의
진행 등은 많은 총대들의 참여율을 점점 떨어지게 할 것이며, 이로 인
해 회의 자체가 개인에 의해 독점되는 경향도 있다.
또한 타이트하게 짜여진 회의 순서가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
루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좀더 탄
력적인 회의 진행방법으로 회원들을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한 목회자는 "바른 총회를 위해 다각에서 노력하고 있는 이때에 교
단을 대표하는 총회가 개인의 목적이나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독점되
는 일은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총회의 내용을
바꾸어 흩어져 있는 전국 교회가 한자리에 참여해서 축제분위기 속에
총회가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예루살렘도 술독에 빠졌구나. 제
사장들과 예언자들까지도 흥청망청 술을 퍼마시고
정신 없이 비틀거리며 어리석은 과오와 실수를 범
하고 있다. 그들이 앉은 상에는 온통 토한 것으로
범벅이 되어 깨끗한 곳이 한군데도 없구나.
(이사야 28:7-8,현대인의성경)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다 소경이요 무지하여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와 같으며 누워서 꿈이나 꾸
고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욕심꾸러
기 개처럼 만족할 줄 모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몰지각한 목자들이다.
그들은 '오너라. 내가 술을 가져오겠다. 자, 독주
를 실컷 마시자. 내일은 오늘보다 더 풍성할 것이
다' 하고 서로 말한다."
(이사야 56:10-12,현대인의성경)
"너희 제사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에게 더 많이
범죄하니 내가 너희 영광을 수치로 바꿀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의 죄를 먹고 살면서 그들이 죄를
더 많이 짓기를 바라고 있다."
(호세아 4:7-8,현대인의성경)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위선자
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하늘 나라 문
을 가로막고 서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는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위선자
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다가 얻으면 너
희보다 배나 더 악한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
(마태 23:13-15,현대인의성경)
너희 목자들아, 슬퍼하고 통곡하라. 너희 지도자
들아, 잿더미에서 뒹굴어라. 너희가 무참하게 죽임
을 당할 날이 왔다. 너희는 귀한 그릇이 떨어져 깨
어지듯 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너희가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목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 지도자들이 통곡하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
(예레미야 25:34-36,현대인의성경)
■ 총회(總會)의 의미 상실
- 소수의 이기심에 밀려 '축제'의 의미 퇴색
매년 열리는 교단 총회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단순한 연례행사로
임원만 선출하고 마는 것인가? 총회가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살펴
보고 그 의미를 드러내어 함께 경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본다.
총회는 결국 흩어져 있는 형제들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자리여야 하
기 때문이다.
-'하나됨'을 확인해야-
교단 총회가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아무래도 흩어졌던 형제들이 한자
리에 모여 교단 선교의 방향을 점검하고 앞으로 더욱 효율적인 선교와
목회를 위한 방안을 결정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총
회의 의미는 '모임'과 '방향설정'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총회가 갖는 '축제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년 동
안 각자 맡은 곳에서 사역하던 형제들이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한자리
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축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다. 이에 따라 각 교단 총회는 그 '축제적 성격'을 살려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총회의 모습은 '축제'와는 거리가 먼 경쟁으로
가득 찬 모습이다. 임원으로 선출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경쟁에서 이기려 하고, 자파(自派)에 유리한 결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의사 진행 방해나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 등, 한마디로 추한
'싸움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요즘 각 교단 총회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총회에 '유람삼아' 나오는 모습도 발견된다. 임원선거
등 중요한 안건이 지나간 다음, 총회 장소를 빠져나가는 모습에서 총
회에 참석하는 총대들의 의식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모교단 총회의 경
우, 총무 선거 결과가 2차투표에서 뒤집히자 "1차투표의 우세를 믿고
결과를 낙관한 우리편 일부가 프로야구를 보러 갔기 때문이다."라는
분석을 해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총회가 갖는 축제적 성격을 살려나가자는 주장이 최근 몇몇 교단에
서 제기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러한 교단들은 선거의 과열을 막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하고, 중요 안건들을 교단 실행위원회(임원회) 등
에서 우선적으로 심의한 뒤 총회에 상정하는 등 의사결정구조를 바꾸
는 등의 방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제도상의 개편에 앞
서서 총대들이 총회에 임하는 태도가 먼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
어야 원래의 의도가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교단 총회를 하나의 '축제'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
른바 '성만찬'이 지닌 '공동체성'의 신학적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각 교단마다 총회 개회예배시 성만찬을 시행하고 있지만, 이것은 각
교회의 성만찬을 총회로 옮긴 것에 불과하며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성만찬의 의미를 살리고 '교단의 하나
됨'을 강조할 수 있는 신학적 개념의 정립과 예식문의 제정이 시급한
과제라고 하겠다.
성만찬을 비롯한 예식문이 강조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교단
의 차원을 넘어 '교회의 일치'라는 거시적인 방향성을 암시해 주고 있
기 때문이다. 즉 성만찬이 지닌 '하나됨'의 의미를 모든 기독교 공동
체로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성만찬과 예식의 중요성
을 강조하는 것이다.
비록 모든 교단이 하나의 총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
능하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절박하지 않지만 서로 다른 전통과 체질
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하는 '공동
예식문'을 만들어 내는 단계까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성만찬과 예식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비만증'에 걸린 총회-
장로교 총회의 문제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총회가 총회로서의 의미
와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총회 제도부터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
되고 있다. 즉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을 비롯한 각 교단은 노
회만도 수십 개에 이르고 또 해마다 늘어나는 총대수로 인해 마땅한
총회 장소가 없으며, 더욱이 효과적인 총회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다. 그러므로 합동측의 경우 현재 '총회-노회-당회'로 되어 있는 것을
'총회-대회-노회-당회'로 하자는 헌의안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올라
와 있다.
지난해 통합측 총회기구개혁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대회제도는 노회
기능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으며, 대회지역간 선의의 경쟁을 통
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으며, 통일에 대비한 제도로 적합하며, 총회
총대수를 줄이지 않되 회기를 줄여서 축제분위기를 고양할 수 있다고
지적, 대회제 도입의 필요성을 밝혔다.
이 위원회 보고는 "총회는 교리와 정책을 수립하는 기관으로 하고,
대회를 중심으로 지역특성에 적합한 전도, 교육, 봉사에 이르는 다양
하고 활발한 사업을 실시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를 더 구
체적으로 살펴보면 총회에서는 교리와 예식 정립 목회자 교육, 헌법·
규칙 등 법규의 제정과 개정, 교육정책 수립 및 교재 출판, 신학교육
정책 수립 및 교육관장, 사회문제에 대한 대응, 국제선교 등의 업무를
관장하며, 대회에서는 총회의 정책에 의한 지역사회와 교회에 적합한
사업개발과 수행, 총회의 행정권 이관(치리권 제외), 전도 및 교회성
장운동, 지역봉사사업, 교회학교 교육활성화를 위한 연합활동 등 다양
한 사업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원회 보고서는, 문제점으로 "대회간 인사교류에 난점이
있을 염려가 있으며, 또 축제 분위기가 저하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통합측과 합동측 총회 등에서 이 대회
제가 헌의되는 이유는 "총회만으로는 많은 교회와 교인들을 지도할 수
없으며,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는 이 때에 교회도 분권해서 선교하는 것
이 효율적이다."라는 지적 때문이다.
사실 대회제는 한국 장로교회의 오랜 숙제였으며, 그 역사는 1929년
제18회 총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찍이 제18회 총회에서는
대회제 실시를 결의하고 노회수의에 부쳤으나 부결된 적이 있다.
그후 196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제46회 총회에서는 또다시 헌
법 수정안이 받아들여져 대회에 대한 조문(정치 제11장)이 편입되었
다. 합동측에서는 이를 근거로 계속해서 몇차례에 걸쳐 대회제를 실시
하자는 노회 헌의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부결되었다.
이처럼 총회에서 계속 부결되던 대회제는 1967년 제52회 총회에서
비로소 대회제 실시가 결의되었으며, 제53회 총회(1968)에서 헌법수정
안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5개 대회제가 확정되었다. 또한 이듬해(1969)
에는 영남대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회제는 무지역노회 및 신학교 등 자체 내 갈등으로 말
미암아 지방교권의 분산과 대립만 증폭시킨 채 시행 3년만인 1972년
제57회 총회때 폐지되고 말았다.
당시 5개 대회는 중부대회(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대회(충청남북
도), 호남대회(전라남북도), 영남대회(경상남북도), 서북대회(무지역
노회) 등이었다.
-정치색 짙은 총대 선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은 세례교인 1천명당 장로·목사 총대 각각
1명, 합동측은 7당회당 목사·장로 총대 각각 1명, 한국기독교장로회
는 3백명당 목사·장로 총대 각각 1명을 선출하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정회원 10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총회에
참석할 수 있는 총대가 되며, 기독교한국침례회, 한국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한국그리스도의 교회 총회 등은 목사·전도사가 회비를 내고
등록만 하면 총대가 될 수 있다.
각 장로교단의 총대를 선출하는 노회는 교단의 발전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인물을 선출하여 총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말장난을
잘하는 목사·장로를 총대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지적이 높게
일어나고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목사·장로들은 총대로 선
출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표 긁어 모으기'에 안간힘을 쓰
고 있으며, 심지어는 교회에 책정된 선교비를 총대 선출과 관련된 일
에 사용하고, 또는 총대로 선출되기 위해서 일년 내내 운동을 하는 등
사회에서 보여주는 타락 선거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총대만을 목표로 살아가는 노회원들 때문에 30년 이상 노회에 참석
한 목사·장로들이 한번도 총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은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모든 노회원들이 총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통합측 영등포노회의 한
시찰회는 3년 이상 연속 총회에 가지 못하도록 목회자들끼리 규정해
놓았는가 하면,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는 장로·목사 총대 각각 9
명 중, 당연직 각각 1명을 제외하고, 서열로 각각 4명을 선출하며, 나
머지 4명은 노회에서 투표로 선출하여 총회에 보내는 제도를 채택했
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총대로 선출된 목사·장로 총대는 총회에 나
가 교단의 발전과 노회의 발전을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정치서클'의 이익을 대변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없는
안건들에 대해서는 졸속으로 처리한 후 총회를 폐회하고 돌아오는 경
우가 대부분이다.
노회원들이 총대로 선출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데에는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안건을 관철시키고, 자기 과시 또는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며, 정·부총회장 후보로부터 융숭한 대접
을 받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는 등의 이유 때문
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전체 교인 중 60%이상이
여자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대표가 총회에 대표로 참석하지 못하
도록 법제화시킨 총회의 제도적인 모순이 지적되고 있으며, 청년들에
게도 총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아지고 있다.
여성 대표와 청년 대표가 총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총회법으로 규
정한 것은 전근대적이며, 봉건적인 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이며,
목사, 장로 총대들이 총회를 자신들만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한 장으
로 만들기 위해서 잘못된 제도를 고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
다.
각 장로교 제77회 총회에 참석하는 총대들은 제도적으로 잘못된 법
들은 과감하게 뜯어고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여성 대표, 청년
대표들에게도 총대권을 주어 한국 교회 전체 교인이 총회에 참석하여
축제 분위기에서 총회가 개회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
다.
또한 총대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안건들에만 관심을 보일 것
이 아니라, 교단의 발전과 한국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온 힘을 기울여
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모두가 참여하는 총회-
총회석상에 있어서 안건처리는 정치적인 문제와 맞물려 졸속, 혹은
심도있는 논의로 처리된다.
각 노회 또는 각 개인간의 이해 관계에 따라 회의가 운영되고 있으
며, 이는 곧 대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둔갑해서 회의에 참여한 총대들
로 하여금 빈축을 사기도 한다.
지난해 모총회에서 기념관 건립을 놓고 몇년째 위원회를 구성하고
연구 검토해 왔으나 부결될 기미를 보이며 지역의 총대가 총회에 불참
을 선언하고 자리를 뜨면서 "일개 노회에서 이를 관리하고 이익을 보
기 위함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기념비적인 사업으로 총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해 총회가 얼마나 이권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반증했다.
또한 노회, 개인, 집단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강단을 점령하고
회의 진행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90년도에 열린 한 장로교단 총회 임원선거 과정에서 미리 짜여진
조각 명단 쪽지가 총회석상에 돌아 이를 반대하는 측의 총대가 문제로
들고 나와서 회의 진행이 계속되지 못한 경우가 있다. 후보등록제를
택하지 않고 총회석상에서 총대들이 투표를 통해 바로 결정하도록 되
어 있는 제도에 따라, 총회의 분위기를 잘 모르는 총대들에게 선심(?)
을 베푸는 작업으로 지난날에도 꾸준히 있어 왔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날 총회에서 반대측 총대가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 일로 결국에는
첫날에 마치기로 했던 임원선거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다음날로 넘어
가 회의가 진행되었으며, 총회가 끝나는 날까지 이 문제를 놓고 옥신
각신하기도 했다.
또 다른 총회에서는 이단 세력 관련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하
며, 총대원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회의 진행을 방해하여 결국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이기적인 의사 관철을 위한 행위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
라는 것을 행위자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로 수많은 총대
들이 총회에 회의를 느끼고 총회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질 것이
다. 특히 총회가 개최되는 교회의 평신도들은 쉽게 접하지 못했던 목
회자들의 행위에 회의를 느껴 신앙마저 잃어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총회가 열렸던 교회의 교인들이 총회 석상에 오물을 붓는가 하면 총회
를 마치고 나서 급격히 교인수가 줄기도 했다.
바람직한 총회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축제여야 한다. 특히 사랑의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흩어졌던 동역자들 간의 만남을 통해 목회의 현
장을 논의하고 친교를 나누는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사 결정은 지금과 같이 총회석상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될
바에야 좀더 전문적인 기관에서 심의 검토한 후 실행하는 것이 더 바
람직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총회가 점점 비대해짐에 따라 그에 대한 대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며, 총회에 참여하는 총대들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각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회나 혹은 기관 등에서 건의되는 내용도 지협적인 면에서 벗어나
모든 회의 참석자들이 공감하고 함께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 개혁을 외면하는 교회(상)
- 보수성과 정체성(停滯性)에 빠져 변화 외면
-'안나가'는 한국 교회-
이제는 고인이 된 함석헌 선생은 한국 교회는 '안나가'는 교회라고
질타한 바 있다. 이 말은 기독교인들이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있는
'가나안'이라는 지명을 뒤집은 말이다. 즉 한국 교회는 늘 '가나안'을
동경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교회의 갱신이나 개혁이 없이 정체된
상태의 '안나가'는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외치는 흔한 말이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이내 썩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
회도 개혁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면 결국 썩어버린다는 뜻
을 지닌 말이다. 한마디로 '교회 갱신·개혁'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는 진정한 의미의 갱신과 개혁이 없다. 입으로는
항상 '교회 갱신'을 부르짖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곧 그 이
상을 잊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한국 교회는 뿌리깊은 보수성과 정체성(停滯性) 속에 빠져 있다는 것
이다. 이것을 두고 함석헌 선생은 '안나가'는 한국 교회라고 평가했
다.
개신교를 뜻하는 영어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항의하다'라는 말
에서 유래한다. 즉,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가 교회의 부패와 타락
상, 그리고 극도의 권위주의에 '항의'하여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켰
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개혁주의'의 연원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는 '개혁'을 통해 태어났고, 과거와 현재 그
리고 미래를 불문하고 계속해서 개혁되어 그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을 뒤집어 말한다면, 한국 교회는 전혀 개혁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주위에서 쉽게 발
견하는 교회의 문제점들은 모두 고쳐져야 할 대상인 동시에, 현재 한
국 교회가 빠져있는 보수성과 정체성의 외면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
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한국 교회의 잘못된 모습이
단순히 현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조적으로 깊은 뿌리
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의 갱신이나 개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현상뿐만 아니라 보수성을 가져온 역사적·구조
적 '뿌리'를 찾는 일도 병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뿌리 깊어-
한국 교회는 그 신앙과 신학을 서구 교회로부터 그대로 전해 받았
다. 피선교지의 교회로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나, 이
것이 곧바로 '서양에 대한 무조건적 선호'로 발전하면서 한국 교회 고
유의 신앙풍토나 신학을 거의 창출해내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이라는 토양 속에 심어진 서양의 신앙이 1백년이 넘도록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정체성의 뿌리가 됐다. 변화를 위한 활력이나 동력
이 없이,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해주고 전달받는 풍토가 정착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 교회의 보수성은 기득권을 향한 집착에서 왔다. 백여 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온 분열의 역사는 한국 교회가 얼마나 기득권에
집착하는가를 보여주는 실례인 동시에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불러온
요인이기도 하다. 이같은 기득권에 대한 집착은 곧바로 '권위'에 대한
맹종을 가져왔고, 이로써 한국 교회는 사회와 세상을 향한 사명을 전
혀 감당하지 못하는 '껍데기 교회'로 남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빠져있는 보수성과 정체성은 어떤 형태로 나
타나는가?
한국 교회의 갱신문제는 먼저 '구조'라는 거대한 틀을 분석함으로써
해결 가능하다고 지적되고 있다. 이런 지적들을 종합해 보면, 지금까
지 우리 신앙인들이 염려했던 교회문제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한국 교회의 물량주의 팽배 현상은 수년 전부터 지적
돼 온 교회문제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그와 더불어 자기중심성의 이
기주의화라든지 개교회에서 나타나는 권위주의 현상 역시 교회 갱신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제기된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여전히 물질
중심적 발전을 축복과 동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발전의 왜곡 현
상은 사회·정치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60년대 말부터 정책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사회 가치관은 '물질중심적 성장'으로 변절되어 갔다. 이러한 가치관
전도 현상은 기독교계에도 급속도로 파급되면서 '교회 넓히기 운동'으
로 나타난다.
-가치관 전도 현상-
이러한 물량주의 현상으로 인해 도시로의 인구집중 현상이 나타났으
며 동시에 교회 역시 도시집중화 현상을 맞게 됐다. 결국 물량주의로
인해 도·농교회간 위화감이 급속도로 심화되어 갔다고 하겠다.
이러한 교회 물량주의의 극복을 위해 한국신학연구소 학술부장 강원
돈 목사는 개교회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교회의 물적 기반이 교회들
의 공동체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재편돼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강
목사의 이러한 제안의 기초에는 물량주의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 그것
때문에 나타나는 교회 분열 현상을 막아보자는 데 의도가 있다.
사회적으로 자본주의가 개인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한국 교회의 개교회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 현상
의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때문에 종교개혁 정신에 기초한 한국
교회 갱신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한국 교회의 구조적 문제들 중 다른 하나는 교회의 '기구화' 현상이
다. 변화를 싫어하는 배타적 보수주의의 심화가 결국 오늘날과 같은
기구화 현상을 초래했다고 서정운 교수는 밝히고 있다. 서교수는 교회
의 기구화 현상의 한 예로,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차별과 경직된 직
분의식, 전통과 교리에 대한 형식적이고 무반성적인 맹종과 변화에 대
한 폐쇄성, 그리고 정교유착 현상 및 교회 내 사회계층간의 위화감 등
을 들고 있다.
특히 교회의 기구화 현상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로 '교회'
위상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인격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에서부터 유능한 사무적인 관리와 업무 처리가 중요시되는
기구로 변형돼감에 따라, 목회자의 성실성보다 효율성이 높이 평가되
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사회분위기에 동
화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중심적 성향-
물량주의, 기구화 현상과 함께 또 지적할 수 있는 교회 갱신의 장애
물은 교회의 '자기중심성'이라 하겠다. 종교개혁 정신에서 가장 으뜸
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만물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소
유물로서 그 누구에 의해서도 사유화되거나 독점될 수 없다는 의미이
다. 이런 점에서 현재 나타나는 '개교회주의'나 '신앙이기주의'는 교
회 갱신의 장애물이라 할 수 있다. 내 교회만을 위한 기도, 내 가족을
중심으로 한 교회활동 등은 거시적으로 교회정치의 세속화 현상을 부
추기는 기본 요인이 된다. 여기에는 교회의 양적 팽창도 포함될 것이
다. 종교개혁 정신이 교회의 물질 사유화와 교회 권력의 독점현상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는 학자들의 지적은 의미심장
하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문제는 개교회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특히 목회자와 시무장로로 구성되는 당회의 권한이 기형적으로
확대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이와 달리 공동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
로 약화되고 있다.
교회를 구성하는 세례교인들은 공동의회를 구성하고 대의원(장로,
집사)을 선출해 교회의 치리를 맡기고 있다. 대의원들은 교회의 치리
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진다. 대의원의 임기를 부여하고 소환하는 것
은 당연히 공동의회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당회의 권한에 공동의회의 권한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
에 공동의회는 껍질만 남고 공동의회가 뽑은 대의원의 모임인 당회가
모든 치리를 독점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는 제안으로 일부 학자들은 교회 내의 직위와 직
책을 교회정치의 기능으로 이해할 것을 내놓고 있다. 더불어 '안수'
역시 종신직이 아니라 '임시제'로 바꿀 것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실질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기 십상인 여성들과 청
년들의 의견이 수렴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 마련을 근간으로 하는
제안이다.
앞에서 열거한 문제들은 교회 갱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임과 동시에
갱신의 출발점이다. 중세 교회의 절대화에 대항한 종교개혁 정신을 오
늘날로 소급하면, 앞에서 지적한 교회구조 모순은 당연히 제거돼야 한
다는 것이 중론이다. 교회의 물량주의, 기구화 현상, 자기중심성 그리
고 당회 권한 강화 현상을 하나로 꿰뚫는 것은 '권위주의'이다. 대형
교회의 웅장함, 교계 고위직분자의 기득권 옹호주의 등은 천박한 권위
주의에서 파생된 분비물들이다.
한국 교회의 제도와 구조의 문제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해 갱신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먼저 교인들과 개교회들이 갱신 필요성을 절감
하는 의식변화가 있을 때, 한국 교회의 구조 개혁이 가능해질 것이다.
-의식·구조 변화 동반돼야-
종합적으로 한국 교회 제도 내지 구조적 왜곡현상을 바로잡는 길은
도·농교회의 균형적 발전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 하며, 이와
비례적으로 의식의 변화도 수반돼야 할 것이다. 교회 직분의 임기제라
든가, 진일보하여 목회자 사례비의 호봉제 도입은 교회 갱신의 가시적
성과 이후에 진행시킬 갱신의 한 예이다.
결국 교회 갱신은 구조변화와 의식변화가 서로 맞물려 진행돼야 하
며, 또한 선·후를 구분해서 진행돼야 할 난제라고 하겠다.
한국 교회가 1백여 년 역사의 전통과 한국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
는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이면에서는 부패하여 썩어들어간 상처투성이
인 한국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기복신앙, 물량주의, 개인주의, 무지적 성령주의, 허황된 종말론,
교회의 세속화 현상 등은 오늘날 거대한 한국 교회 속에 교묘하게 포
장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부패한 신앙 행태들이다. 이러한 신앙 행태
들이 한국 교회상을 결정짓는 원인을 신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신
학'의 현상황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신학은 선교 초기부터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외국 선교
사들의 노력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서구 신학을 받아들일 당시 봉건적 요소를 극복하여 민족의 새
운명을 개척하는 데 개혁의 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나아가서는 일제의
침략과 지배 아래서 신음하던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과 인내를 주며,
민족의 운명에 동참하는 역동적인 힘을 가진 신학으로 자리를 잡아나
갔다. 그러나 일제의 박해가 심해지고, 민족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한
국 교회는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을 그대로 수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꺼려했다.
-근본적 보수신앙만 강요-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은 곧 '신앙의 자기 동일성을 견지
하려는 노력' 즉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 보수'에서 보수하고자 하는 것은 곧 '복음'을 의미한다.
복음의 개념에 대한 논란이 다시 제기되겠지만 보수신학은 성경과 웨
스트민스터의 신앙을 고수하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정작 보수를 부
르짖는 보수신학은 현재 원래의 '칼빈주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즉 성경의 형식적 권위만을 고수하여 성경에 나타난 참된 해방의 영
성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교리를 성서 해석의 결과로 보고
교리적인 견해만을 소개하여 성령의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을 차단케
했다.
이러한 결과,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은 복음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
킨다고는 하지만 사회문제로부터 도피하면서 탈정치적이고 비성서적인
것만을 강조하여 시대적 요청에 긴박하게 대응해 내지 못하는 몰역사
성을 초래하게 됐다. 이러한 보수신학은 전통 무속신앙과 결부되어 기
복신앙화로 나타나면서 한국 교회의 물량주의적 병폐를 더욱 부채질하
고 있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목사들에 의해 선포되는 메시지 또한 오늘의 한
국 교회 실상을 잘 설명해 준다. '개인구원'에 국한된 빈약한 설교 내
용은 교인들로 하여금 개인주의적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한다. 개인주
의적 신앙 형태는 남이야 어떻게 되었든지간에 자기 구원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사회와 국가와 인류에 대한 봉사의 사명은 없고, 개인만
구원을 얻으면 된다는 이기주의적 신앙형태를 교인들에게 주입시킨다.
이러한 설교는 사회문제나 교회에서 나타난 은혜스럽지 못한 일에
대한 설교 내용보다는 소위 신령스럽고 은혜스러운 말씀만 전하므로
이 땅 사람들의 절박한 삶의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
교인들을 개인주의화하는 설교 행태에 덧붙여 기복주의적 설교 행태
또한 교인들의 신앙을 올바르게 성숙시키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로
부터 받는 신령한 복은 현세의 물질적인 축복으로만 해석하며, 축복을
받은 비결을 교회 출석, 헌금, 봉사 등의 외형적인 신앙상태에 따라서
규정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 부를 축적했든지 제단 앞
에 많은 양의 헌금을 바치면 곧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은혜와 복을
받는다는 미신적 신앙양태를 심는다.
한 예로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한 G교회 P목사는 교회 교육관
을 짓기 위하여 몇 해 전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안양에 땅을 사놓
고 부동산 투기에 손을 댔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 없이 교육관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이 마련된 P목사는 주일날 강단에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란 설교 제목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어떠한 방법
으로든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며 사회에서 지탄받고 있는 부동산 투
기를 '하나님의 일'로 정당화시켰다. 또한 P목사는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K집사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매도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 외면-
이렇듯 잘못된 신학사상과 신앙교육에 빠져있는 교인들은 자기들의
문제에만 몰입하여 기독교의 본질인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신앙
적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진리를 외면하고 있다.
그로 인해 사회에서 고난받고 소외당하는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선교적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자연히 교회 내에서 위
로받지 못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 이
들이 떠난 교회는 중류층 이상의 '영혼의 쉼터'가 될 뿐 다른 사람에
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이러한 교회는 개혁과 변화를 싫어한다. 현
상 유지와 자기 만족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들의 역사의식은 역사
는 변동이 없다고 생각하여 변화를 싫어하고 개혁적이고 창조적인 일
에 함께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신앙형태는 개인주
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이며 안일과 타성에 깊이 빠져 있다.
따라서 이들은 어떤 문제의식이나 역사의식을 가지고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고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야겠다는 의욕이나 정열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 신앙 형태는 가능하
면 쉽고도 편안하게 교회생활을 하려고 한다. 무거운 십자가의 짐을
자기가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십자가의 짐을
남에게 맡겨놓고 자기는 안일하게 예수를 멀리서 따라가려고 한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선교에 대한 한국 교회의 태도이다. 선
교사들로부터 전해받은 복음화의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복
음을 뿌리는 '전도'에만 치우쳐 이를 키우고 돌보는 역할을 등한시한
결과 양적인 팽창을 가져오긴 했지만 신앙의 내면화를 이루어내지 못
했다.
한국 교회의 발전에 중대한 문제점을 야기시킨 요인들로 보수 신학
의 고집, 현실과 유리된 메시지 선포, 선교의 포괄적 의미 약화, 기독
교 신앙의 내면화 부재 등을 지적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철저히 규명
되고 논의되어 한국 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입각해 자기 개혁을 항
상 시도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보는가?
저 모든 사람들이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을...
당신은 왜 그들을 돌보지 않는가?
그들을 그대로 빠져죽게 만들 작정인가?
그들이 구원을 요청해 오는데도
어떻게 그토록 침묵할 수가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사역이 다 끝난 것처럼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암흑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교회는 대적하지 못하고 있구나.
교회가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잠들어 있구나.
그동안 그토록 많은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어떻게 죽은 자처럼 침묵할 수가 있는가?
- 키스 그린의 노래
'A sleep in the Light'
■ 개혁을 외면하는 교회(하)
- '하나님의 주권'에 바탕을 둔 개혁운동 시급
-'총체적 타락' 양상-
최근 한 일간지는 기독교의 물량주의적 타락이 극심하다는 내용의
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보도하여 기독교인들을 부끄럽게 만든 적이 있
다.
이 신문은 총신대 재단 이사장이 교수직을 준다는 명목으로 거액의
부동산을 어느 목사로부터 증여받았다는 사실과 모교단 부총회장 선거
에서 한 후보가 엄청난 금품을 살포해 당선됐다는 내용을 예로 들어가
며 교회의 타락을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독교인 누구
하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오히려 교회의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교회의 타락이
단순히 '물질'과 관련된 부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라는 C교회 담임
목사의 '섹스 스캔들'이 원로목사와의 갈등을 기화로 폭로돼 교인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놀라게 했다. 또한 해외를 돌아다니며 도박판을
벌이다가 붙들린 목사, 사치성 해외여행을 다니다가 세금을 추징당한
목사 등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한국 교회의 도덕성마저 땅에
떨어져 있다는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회 본연의 임무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에 대해서도 한국 교회는 올
바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너나없이 시류에 편승, 중
국선교를 한다고 나서다가 급기야는 '선교활동을 자제해 달라'는 중국
정부의 경고성 요청을 받고 말았다.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교회 주위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구제품 몇 점과 돈 몇 푼을 부정기적으로
던져주고 '구제사업 했다'고 생색을 낸다.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애정
이 있는지 없는지, 강제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앞장서서
'불순분자'로 매도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모습들은 모두 몇몇 개체교회나 소수의 잘못된 목회자들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교단이 운영하는 대학에서는 부정입학 사실이 드러나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는가 하면, 어느 교단은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교단 총
회를 제대로 개최하지 못하고 공전시키기까지 했다. 이런 모습들을 어
떻게 개교회 탓으로, 몇몇 목회자의 개인적인 도덕성의 차원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 성전을 헐라"-
한마디로 한국 교회는 지금 '더이상 타락할 수 없는' 타락의 끝까지
와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갖가지 부정적인 모습들은 교
회의 타락이 밖으로 드러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타락한 교회에 대해 "이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한국 교회는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
아 무너져 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그같은 심판을 면하기 위해 교회의
개혁과 갱신은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과제로 요구된다.
그러나 여기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하
나의 현상에 대한 반대개념으로서 제시되는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
냐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현상은 교회만의 변질과 타락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와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각종 가치관과 이
념의 변화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타
락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에는 현상적 측면과 사회·구조적 측면
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의 물량주의는 자본주의의 타
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가 그 도덕적 기반을 상실하고 무
제한적인 부의 추구로 일관할 때, 부의 편중 현상과 독점 현상은 갈수
록 심화된다. 이같은 사회적 조류에 휩싸인 교회는 하나님보다 물질과
부를 숭상하는 물신주의(物神主義)로 나가게 된다.
따라서 교회가 물량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에 대한 지
나친 집착을 떨쳐버린다는 현상적·개체적 변화 운동과 함께 타락한
자본주의라는 구조악을 바로잡는 구조 개혁을 동시에 요구한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 교회가 여성 안수를 거부한다거나 청년·장애자 등 '소외
계층'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막아온 것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
주의적 속성과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개혁돼야 할 문제의 하나로 참
여를 거부하는 '비민주성'을 상정할 때 우리 사회 전체를 민주적인 구
조로 바꿔나가는 과제가 함께 상정돼야 한다.
-사회 구조적 측면 포함-
이같은 사실은 루터의 종교개혁 때부터 이미 그 단초를 보여주고 있
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집단은
바로 신흥 자본가계급 즉, 시민계급이었다.
이들은 당시 교회의 권위주의적인 모습과 타락상에 대한 거부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의 개혁 이념에 동조했고, 이것이 루터의
개혁운동을 성공시킨 사회적 기반이 됐던 것이다. 여기서 루터의 종교
개혁이 지닌 사회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종교개혁이 새로운 시민사회
의 도래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근거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펼쳐야 할 '개혁운동'의 방향은 무엇
인가? 본지 취재팀은 목회자와 평신도들로부터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의견을 들어 보았다. 그
결과, 가장 공통적으로 지적된 문제는 기복신앙과 물량주의, 권위주의
적 비민주성, 분열성, 그리고 잘못된 선교행태 등이었다. 물론 이 문
제들은 하나하나가 독립된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기본적인 문제점을 제기, 이
를 통해 개혁운동의 방향을 짚어 나가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으로 판
단됐다.
먼저, 한국 교회의 신앙관이 갖고 있는 문제로서 김윤옥 원장(기독
교 여성평화연구원)은 '이원론'을 들었다. 즉 하늘과 땅,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남성과 여성 등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뿐만 아니라
그중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열등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근본주의적이고 정통주의적인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임
으로써 생겨난 문제로,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현실을 도외
시하며 역사의식이 결여된 채 '정체된 교회'로 남게 되었고, 인간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차별하는 전통을 쌓게 되었다는 것이 김
윤옥 원장의 주장이다.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정체성과 보수성, 그리고 권위주의적 속성은
바로 이같은 이원론적 사고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우리 사회의 타락한 자본주의가 교회 내에 침투됨으로써
교회 전체의 기조를 물량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손삼권 목사(대
한기독교교육협회 출판·편집부장)의 지적이다. 그 결과 신앙 자체가
수치화됨으로써 신앙의 연조나 헌금의 액수로 신앙의 크기를 정의하고
그에 따른 계층과 파벌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교 자체도 상업주의화됨으로써 전도한 사람의 수에
따라 차등적으로 시상을 한다든지, 과시적인 총동원 전도대회 등이
'필수품목'으로 등장했다. 이것은 선교까지도 계량적으로 판단하려 하
는 잘못된 선교행태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계량화된 신앙-
오형국 강도사(총신대 한국교회문제연구소)는 교회의 수직적인 구조
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교회 내의 직제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구
조가 수직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그 권력을 차등적으로 분배받아 행사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수직적인 구조와 권력의 차등적인 분배는 권력을 좀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상승욕구를 부채질했고 동시에 이미 차지한 권력에 대
한 집착을 낳음으로써 한국 교회 전체를 거대한 권력투쟁의 싸움터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한국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부분의 갈등과 분
쟁, 그리고 분열이 바로 '권력'을 둘러싸고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를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결국 한국 교회의 분쟁·분열의 역사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집단과 보다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는 집단과의 '기득권 경쟁'의 역사
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같은 '권력추구'의 성향은 또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으로까
지 발전됐다. 일제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는 작게는
국가권력, 크게는 세계 권력이라고 여겨지는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추
종으로 일관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
를, 그리고 소외된 사람보다는 권력을 많이 쥔 사람을 중심으로 교회
가 움직여 왔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결국 국민의 4분의 1이나
되는 기독교인의 정치문화를 왜곡시켰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와 역사
에 역행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한국 교회의 개혁운동의 방향을 생각
해 보면 몇 가지의 논리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전반적인 신앙의식의 문제로서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 의식을
확립하기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 강원돈 목사(한국신학연구소
학술부장)의 지적이다. 이것은 다시 몇 가지 작은 갈래로 나누어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교회와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것'이지 사람이나 교회
의 것이 아니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 아
래서 세상의 모든 권력을 '상대화'시키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권을 억압하는 정치 권력도, 여성과 청년의 민주적인 참여를 억누르
는 교회의 권위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는 한낱 '헛된 것'에 불
과하다는 의식이 확립돼야 한국 교회의 맹목적인 권력 지향성이나, 기
득권을 둘러싼 갈등과 분열이 치유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 주권' 인식해야-
또 하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을 세움으로써 물질
의 '사유화'가 갖는 허점을 파헤치기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소유와 이윤의 확대를 추구하는 자본주
의의 속성은 교회까지도 '소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모든
부는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거기에 더부살이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는 의식을 세워나갈 때 오늘날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물량주의라는 악
령을 몰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문제는 '선교'
의 주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즉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인간이나
교회는 그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회들은 스스로가 선교의 주
체인 듯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선교의 목적이 단순히 교회
의 확장에 있는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선교마저도 계량주의적이고 물량
주의적인 측면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세상을 연결하는 분명한
선교의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더불어 중시돼야 할 것은 '생명에 대한 중시'이
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생명파괴 현상이나 우리 사
회의 생명경시 풍조에 대응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
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한다는 대의적인 측면에서의 '생명에 대한 중
시' 사상으로 교회를 무장시킬 필요가 있다(김윤옥 원장·손삼권 목
사). 이것은 교회갱신운동이 총체적인 '생명운동'으로 활성화되고 전
개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생명'의 개념이란, 단순한 삶과 죽음의 차이에
서 생겨나는 개념을 넘어서서 환경문제, 공해문제, 핵문제, 인권문제,
더 나아가 종교적인 구원의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총괄적인 '인간회복'
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갖가지 구조악에
대한 분석과 비판, 개혁운동까지도 교회 갱신운동에 포함시켜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교회개혁운동이 갖고 있는
사회·구조적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일치 향한 개혁운동을 펼칠 때-
교회개혁운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의 세 번째로서 '교회일치운동'을
들 수 있다. 원래 '교회일치운동' 자체가 교회의 갱신과 선교적 사명
의 수행을 위해 시작된 것이니만큼, 교회개혁운동과 일치운동은 사실
상 동전의 양면과 뒷면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교
적 사명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개혁이 필수적이고, 교
회의 개혁 없이는 지금의 분열상을 극복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교회 개혁의 가시적인 성과들이
표출될 때 교회일치운동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지적
한 개혁운동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마련
돼야 한다고 채수일 소장(한국신학연구소)은 지적한다.
반면, 그러한 가시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 역시 교회
일치운동을 통하는 방법이 가장 쉽고 또 가장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
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번 교회개혁운동과 교회일치운동의 상관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지적한 교회갱신의 방향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
도 '해방'이라고 할 것이다. 생명을 파괴하는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
방, 자유와 참여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권위주의와 권력추구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참된 신앙을 왜곡하는 물신주의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교
회개혁운동이 추구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교회가 갖고 있는 영적인 힘, 다시 말
해서 '영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이란 개인적 차원의 신앙심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의 동력으로 승화할 수 있는 공동체의
힘, 실천의 정신적 기반을 말한다.
따라서 교회개혁운동의 첫 단계는 이 '해방의 영성'을 어떻게 형성
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된다. 먼저 교인 하나하나를
'의식화'하고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 '동력화' 작
업이 병행될 때 '해방의 영성'은 한국 기독교의 '개혁의 힘'으로 활성
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는 '성령'의 역할과 힘에 대한 새
로운 신학화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이같은 개혁운동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
음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김기달 교수(영남신학교)는 종교개혁 자체
가 중단된 것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즉 현상적으로
부정적인 모습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나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흐
름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필요한 개혁운동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성령회복운동'이라고 김기달 교수는 지적
한다.
홍치모 교수(총신대) 역시 이와 비슷한 견해를 제시했다. 홍교수는
현실이 요구하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
면서, 특히 일치운동을 통한 갱신은 비성서적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
으므로 경계할 부분이 많다고 경고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원칙으로 '오직 믿음''오직 은혜''오직 성경'이
라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 세 가지 원칙에 따라 '하나님 주권'과 '생명중
시'라는 두 가지를 제시하면서 '해방의 영성'을 찾는 운동을 펼쳐나가
야 할 것이다.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잘못된 과거'의 청산(상) 05/01 13:15 317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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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교회의 허와 실(Ⅰ)'(저자:기독교신문 취재팀, 92.9
월)에서 발췌한 글로써, 기독교신문에서 계속 연재되고 있는 '한국
교회...그 문제의 현장 집중취재'에 실린 기사를 모아서 엮은 책입
니다.
■ '잘못된 과거'의 청산(상)
- 반성 없이 지나간 역사에 악순환만 계속
-영욕(榮辱)이 교차한 역사-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는 한마디로 '소용돌이 치는 격동의 시대'였
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외세의 침략이 시작되는 시기에 이 땅에 씨
를 뿌린 이후 그 격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성장해 왔다.
얼핏 큰 줄기만 잡아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외세의 침략 → 주권
의 상실 → 해방과 동시에 맞이한 분단 → 동족 상잔의 비극 등 불과
1백여 년 사이에 민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비극과 환희를
거듭해서 경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민주화와 통일을 향해 가는 길목에
서 역사적인 진통을 계속하고 있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한국땅에 씨를 뿌린 기독교의 모습이란 한마디
로 '역사 속에 던져진 존재' 그 자체였다. 따라서 역사의 전개상황과
더불어 기독교의 영광과 수치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한말(韓末), 국운이 쇠퇴해 가는 시기에는 이 땅의 민초들을 일깨우고
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했으나, 주권을 상실한 다
음에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그 우상숭배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치욕적
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동족 상잔의 와중에서는 기독교가 스스로 '반기독교적 집단'이
라고 규정했던 공산집단을 위해 기도하기까지 했다. 과연 이같은 슬픈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여기에는 아마도 두 가지의 상반된 견해가 공존하는 듯이 보인다.
첫째는 역사가 가지고 있는 인과법칙을 고려할 때, 지금의 모든 문제
는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과거에 대한 완벽한 청산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역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이 견해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을 오늘에 재
론한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갖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두 번째로는 과거보다 현실에, 그리고 결과보다 상황에 더 비중을
두는 입장이다. 즉 당사자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인정
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는 덮어두자는 견해이다. 물론 이는 당사자들의
반성과 새로운 모습의 역사참여가 전제돼야 한다. 결국 앞으로 전개될
역사를 문제 삼아야지 과거에 연연한다는 것은 당사자들을 오늘에 와
서 뒤늦게 '단죄'하는 의미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들은 모두 한가지 측면에서는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평
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당사자들이 과거의 잘못을 철저하게 반성했느냐 하는 사실과, 어두운
시절이 지나간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역사가 발전하도록 바람직한 역
사참여를 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당사자들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로 짚고 넘어갈 필요
가 있다. 즉, 한 부류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으로 역사의 무대
에서 완전히 벗어나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면, 또하나의 부류는
어두웠던 과거를 은폐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같은 두 가지의 태도는 모두 과거의 잘못된 역사와 행동의
의미보다는 '은폐'에 더 중점을 둔 것이라는 사실이 지적돼야 할 것
같다. 오늘 우리가 새삼스럽게 '과거 청산' 문제를 제기하곤 하는 것
도 과거에 대한 은폐보다는 그에 대한 반성과 올바른 역사발전 및 참
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과거 청산 문제를 제기하는 첫번째 이유는 과거의 어두웠던 모습에
대한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지나감으로써 이후에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잘못된 역사의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을 낳
게 한 원인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권력 편향적 속성, 변화를 두려워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역사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정체적인 속성),
그리고 외세 의존적인 성향 등은 모두 이전의 슬픈 역사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를 낱낱이 밝히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지나가
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반드시 있어야 함에도 아직까지 한국 기
독교는 이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과거 청산'의 첫번째
이유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 전혀 없어-
두 번째로는 앞으로 밝혀질 사실이지만, 일제시대부터 오늘날에 이
르기까지 '어두운 역사'의 주체세력들이 변하지 않은 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대판 '꺼삐딴 리'처럼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
하면서 계속해서 회색적인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더욱 슬픈 사실은
이들이 한국 교회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올바른 발전 방향으로 흐르지 못
하고, 계속해서 과거의 행태를 답습해 왔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올
바른 역사발전과 역사참여를 위해서도 '과거 청산' 문제는 반드시 제
기돼야 한다.
한국 기독교의 어y恝 역사를 주도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그들의 행적을 다시 문제 삼
는 것은 그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
y
태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행동을 가다듬고자 하는 데 그 의도가 있다. 따라서 한
국 교회의 '과거 청산' 문제는 특별한 계기에 간헐적으로 돌출될 문제
가 아니y
라, 끊임없이 반성과 전망을 계속해 나가는 연속적인 과정이어
야 한다.
기독교의 일제에 대한 부역은 대체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
나는 자진협력이고 또 하y
y나는 일제의 위협과 압력에 의한 피동협력이
다.
전자는 그 시기가 민족의 수난과 위기라는 중차대한 시점임에도 불
구하고 기독교의 시대적 역할을 외면한 채 안정
岵 출세를 지향한 기
회주의적인 행동양식이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일제의 위협
속에서 어쩌면 말살당할지도 모르는 교회를 그대로 보존하고자 일제에
마지못해 협력한 형태이다.
부일협력의 행태가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기독
교의 부일협력을 대략적으로 구분한 것에 불과하며 구체적인 인물들에
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사 연구가들의 한결같은 전언(傳言)
이다. 역사적으로 끝까지 항일의 대열에 섰던 무수한 신앙인들과 비교
해 볼 때 자진협력 및 피동협력은 기독교가 부끄러워해야 할 과오임에
틀림없다.
한국 교회의 일제 협력은 대체로 신사참배 문제와 징용 및 학병 문
제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문제로 부각되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일본제국주의를 이롭게 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는 국가의식"-
먼저 신사참배에 관해 일제 총독부가 교회에 직접적으로 참배를 강
요y
한 것은 1938년부터였다. 그 당시 일제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
을 세워 일선 경찰력까지 동원, 개교회로부터 시작해 노회, 총회까지
압력을 행사하였다.
일제의y
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되기 2년 전, 감리교는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1936년 6월 당시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
목사가 총독부 초청 좌담회에 참석, 신사참배에 순응할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감리교 내부에서 문제로 대두되자 동년 9월에 이를 재
확인하는 성명서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신사참배는 국민이 반드시 봉행할 국가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잘 인식하셨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구애됨이 추호도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에 앞서 양주삼 목사는 1936년 1월 29일 윤치호 등과 함께 총독부
학무국에 들어가 신사 문제에 대해 간담을 갖고 4월 10일자 「감리회
보」에 총독부로부터 받은 <신사에 대한 통첩>을 번역, 게재하여 신사
참배 순응의 뜻을 비춘 바 있다.
감리교의 굴복 이후 장로회도 1938년 9월 제27차 총회(총회장;홍택
기 목사)에서 당시 평양노회장 박응윌 목사가 신사참배를 제안하고 평
서노회장 박임현 목사의 동의, 안주 노회장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말미암아 신사참배 문제가 가결됐다. 이때 서기 곽진근 목사에 의해
발표된 신사참배 결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신사가 종교가 아니오......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
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히 국민정신 동원에 참
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
하기로 기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된 후, 각 노회장들은 본총회를 대
표하여 즉시 신사참배를 실행하기로 결정,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
내로 평양신사에 가서 참배하기까지 했다. 특히 장로교회의 홍택기,
김길창 목사와 감리교회의 양주삼, 김종우 목사 그리고 성결교회의 이
명직 목사 등은 조선총독부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 '가시
하라신궁'에 참배했으며, 이때 홍병선 목사는 "황국 신민으로서......
신사참배는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언급했다.
-각 교단 잇따라 결의-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의 일제에 대한 굴복 이후 장로교회
의 잇따른 굴복으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일제에 순
응하는 양태를 보여주었다.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결의는 교단만의 문
제로 그치지 않고 이제 기독교 학교와 기타 기독교 기관으로 확산되어
종교 전반에 대한 변질을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당한 평양신학교는 앞서 언급한 장로회
총회 후 다시 총독부의 허가를 맡아 채필근 목사를 교장으로 개교했
다.
또한 1940년에는 차재명 목사가 담임하던 승동교회에 '조선신학원'
을 개설,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들을 양성'하려
는 목적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감리교단은 1941년 10월 지방교역자 1백여 명을 감리교
신학교에 합숙시키면서 종교 보국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강연회와 궁
성요배, 호국신사 건립지 근로봉사 등을 시켰다고 당시 신문인 「매일
신보」가 전하고 있다.
특히 1939년 제28차 장로교회에서 결성하기로 의결한 '국민정신 총
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은 이듬해 이사장 윤하영 목사와 총간사
정인과 목사의 사업보고에서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
다 먼저......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사병 위문금, 국방 헌
금, 전상자 위문 등을 사적으로 공동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만 하면'하는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쓰고 있어 부일협력에
각 교파가 얼마나 경쟁적으로 앞장서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신사참배에 대한 각 교단의 결의 이후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은 이제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라는 물음에서 '어떻
게 하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교회를 온존 내지 확장시킬 수 있
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는 신사참배 수준을 넘어 학병 및 징병 지지
강연, 전시물자 동원협력, 예배당 건축양식의 일본화, 말세 내지 심판
·재림 등을 물질적 해석으로 고쳐 종교적 심령적으로 해석하는 데까
지 변질되고 말았다.
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즈음인 1937년 9월, 총독부가 주관한 각
도 순회 시국 강연에 신흥우, 유형기, 윤치호, 박희도, 차재명 등 유
수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석, 황국신민으로서 부일협력에 노력할 것
을 강조하고 나섰다. 특히 박희도 목사는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
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후 친일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을 발간,
1942년 2월호에는 영·미 타도 관련 부일협력 논설을 실었다.
여기에는 백낙준, 전필순, 정춘수, 정인과, 양주삼, 신흥우 등이 기
독교 지도자로 자신의 논문을 게재했다.
-친일(親日)사상 강연에 참여한 교계 지도자들-
이와 관련, 1912년 YMCA 총무로 일하던 신흥우 목사가 1939년 <동양
지광> 2월호에 게재한 '조선기독교의 국가적 사명'이란 논설은 기독교
가 어느 정도나 친일행각을 벌였는지 잘 드러내주고 있다.
"...... 조선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
며... 금일 우리는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천황 폐하의 충성스런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제국의 국책에 순응, 협력, 돌진하라...... 이것이 조
선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이다."
특히 신흥우와 같은 인물이 해방 이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
령 선거에 출마했다고 하는 사실은 교회가 얼마나 일제 협력 사실을
경솔히 여겼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후술하게 될 여성 교계 지도자들의 부일협력사실을 포함해 한국 교
회의 일제협력사실은 현재 남아있는 자료만 해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
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1938년 5월말까지 기독교 관계자의 일제협력
은 교회당에 국기(일장기) 게양탑 건설 88%, 국기에 대한 경례 96%,
동방요배 실시 96%, 황국신민 서사 제창 93% 등 높은 비율로 나타나
있다.
그밖에도 장로교에서 조직된 '조선야소교장로교도 애국기(전투기)
헌납 기성회'를 통해 일본 육해군에 비행기 1대와 기관총 7정분인 15
만3백17원50전을 헌납했으며, 교회종(鍾)도 1천5백40개로 총 11만9천8
백32만 원을 헌납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이후 부일협력에 앞장섰던 교계 지도자들, 즉 감리교의 정춘수, 김
인선, 양주삼, 김동안 목사와 장로교의 정인과, 김길창, 차재명, 홍변
선, 정남영, 신흥우, 박희도, 윤치호, 김활란 등은 1948년 제정된 '반
민족행위 처벌법'에 저촉되는 것이 인정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
회'(반민특위)의 조사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한국 기독교가 1938년을 고비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 부일협력에
앞장서자 그 당시 기독교 여학교와 여성단체를 이끌고 있던 기독교 여
성지도자들도 이에 협력, 일제가 주장하던 내선일체를 대변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주로 일본정책에 동조하도록 만든 '조선부인문제연구회' 등
을 통해 친일단체의 실무 역할이나 신사참배 및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강연회의 강사로 나섰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화여대 초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을 비롯 시인 모윤숙, 초대 YMCA 회장 유각경, 당시 기독
교여자절제회 총무 장정심, 고황경, 서은숙 등이 포함돼 있다.
-'정신대 참여하라' 호소-
1938년 6월 YWCA가 일본 YWCA에 합류되면서 당시 YWCA 회장이던 김
활란은 매일신보 6월 9일자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 청년들은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 모이
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시국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 금번 제네바동맹을 탈퇴하고
동경에 있는 기독교 여자 청년회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대세에 순응하는 것이니 금번 우리 청년회가 제네바에 있는 여자 기청
연합을 탈퇴하고 일본 여자 기독연맹에 가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
다."
기독교인이면서 시인인 모윤숙은 해군기념일을 맞이하여 '아가야 너
는'이라는 논문을 발표, "...... 대동아를 메고 가란 힘찬 사명이 넓
은 바다 한가운데서 너를 부른다. 사나운 파도 높이 네 원수를 물리치
라. 너는 아세아의 아들, 대양의 용사란다."라고 쓰면서 일제의 용병
됨을 칭송하고 있다.
일제는 대륙침략 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여성들을 <애국자녀
단>(매일신보 1938.6.20), <총회부인부대>(매일신보 1938.6.12) 등 각
단체를 조직하고, 이들 기독교 여성지도자들로 하여금 '가정보국운동'
이란 기치 아래 일본의 수족역할을 하도록 강요하고 각종 강연에 나서
게 했다.
매일신보 1938년 1월 4일자 신년도 첫 지면에 실린 '비상시의 가정
경제 - 총후의 후방 수호'라는 글에서 당시 배화여고 교장인 서은숙은
'대전시(大戰時) 구주(歐洲) 부녀들의 고행을 본떠 실천하자'란 제목
으로, 모윤숙은 '기분내는 생활로 후회하는 때가 많다'라는 제목으로
각각 여성들에게 전쟁을 위한 보조자 역할을 기꺼이 감내해 낼 것을
강조하였다.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잘못된 과거'의 청산(하) 05/01 13:17 324 line
■ '잘못된 과거'의 청산(하)
- 친일·우익 성향 고착, 역사의식은 불투명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 기도-
해방이 되자 한국 기독교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일제 36년 동안 '저항'과 '굴종'이라는 상반된 대응을 보인 것
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이 시기부터 한국 기독교가 기독교 본연의 예언자적 사명을 잊
어 버리고 시류와 권력의 변화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려 가기 시작한 사
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에 와서 지적되곤 하는
갖가지 부정적인 측면들의 단초가 모두 이 시기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진단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異論)과 나름대로의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해방 이후를 보면 한두 가지의 잘못된 역사가 후대에 얼마
나 엄청난 후유증을 가져다 주는지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가 맞게 된 가장 큰 문제는 일제시대에 있었던
'신사참배' 등 굴욕의 역사에 대한 해석 내지 반성의 문제였고 이것은
곧바로 기독교의 분열로 이어졌다.
비극의 시작은 신사참배를 용인했던 그룹과 이를 거부한 채 순교,
투옥 등 고난의 길을 걸었던 그룹의 충돌이 불가피했다는 사실에 있었
다. 고난의 길을 갔던 그룹들은 굴종의 길을 갔던 그룹들에 대해 해명
과 회개를 요구했지만, 굴종의 길을 갔던 그룹들은 '교회를 지켜내지
않았느냐'라는 논리로 이것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장로교는 '고려파'가 분열되어 나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
고, 이 분열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해방과 함께 시작된 민족의 분단은 한국 기독교가 새로운 문제에 직
면하도록 강요했다. 그것은 이른바 공산주의 집단에 의해 지배를 받는
북한 지역으로부터 성직자와 교인들이 대규모로 '탈출'하는 한국판
'엑소더스' 현상이다.
이것은 북한 정권이 수립될 당시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지배 이데
올로기를 심어 나가기 위해 또다른 이데올로기, 즉 기독교를 하나의
타도 대상으로 삼고 기독교를 박해한 데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의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에 의해 북한 지역
에서의 기독교 박해가 전해지자 남한의 기독교는 북한 정권에 대한 분
노와 적개심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고, 이후 한국 기독교는 '반공'의
최전위부대로서 남한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
면 해방 이후 남한 사회를 지배했던 '매카시즘'적인 반공 이데올로기
는 기독교로 인해 더욱 그 세력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의
해 유지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북한 지역에서는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이 공산주의 정부 수립
에 참여하면서 이른바 '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그
러나 이 단체는 아직까지도 남한의 기독교로부터 '어용'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즉 북한의 기독교는 아직도 남한 교회의 '인정'
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공의 보루로 득세-
반면, 남한의 기독교는 해방 이후 있었던 미군의 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권력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새로운 '전성
기'를 구가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해방
을 맞기까지 민족 교육의 대부분을 기독교와 관련된 집단에서 담당함
으로써 사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교계 인물이었다는 사실과, 일제시대를 통해 미미하나마
부를 축적해 온 이른바 '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주역'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적인 정서로 무장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지적 능력과 경제적 능력을 겸비한 초대 정부의 권력 엘리트들은 직
접·간접적으로 기독교와 연결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로 인해
이들은 기독교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시기부터 기독교는 권
력과 항상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었고 '권력 지향적'인 한국 기독교
의 또다른 특징이 이 시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기독교가 권력과 가까운 곳에서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권력의 부산
물을 향유하고 있었던 데에는 '반공'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 받
은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즉 기독교는 권력 엘리트로부터 든든한
'반공의 보루'로 평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반공 이
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역할을 스스로 맡아 해냈던 것이다.
결국 '반공'이라는 기치 아래 권력과 기독교는 하나의 '밀월관계'를
형성했고, 이것은 80년까지 이어져 내려온 기독교의 새로운 '전통'으
로 자리를 잡았다.
권력 엘리트들과의 관계에서 기독교가 수립한 또하나의 전통은 '친
미(親美)'적인 성향이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
해 전래되고 키워졌다는 점에서 이미 예견되었지만, 해방 후 3년간의
군정을 겪으면서 기독교계 인사들이 군정 당국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
하는 동안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
결국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의 전통은 '반공'과 '친미'라는 두 가지
경향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국민에게 끼친 상처-
'친미'와 '반공'으로 새롭게 무장한 한국 기독교는 해방 후에 있었
던 이념적인 충돌에서 철저하게 '우익'의 위치를 지켜 나간다. 그러나
이같은 우익적인 행동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발생
하곤 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제주도 4·3사건 같은 경우이다.
서굉일 교수(한신대) 같은 이는 아직도 제주도 지역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선교가 어려운 이유는 4·3사건에 돌리고 있다.
즉 4·3사건 당시 진압부대에 의해 진압작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주
민을 분류한 기준은 그가 '기독교인'이었느냐, 그리고 '그가 기독교
성직자를 아느냐'의 여부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압
부대는 당시 기독교와 우익을 동일시하고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좌익'으로 몰아 단죄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제주도 지역 주민들에게는 기독교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인상이 심어졌고, 아직까지도 제주도 사람들은 당시를 생각하
며 선뜻 기독교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 서굉일 교수의 설
명이다.
이처럼 '반공·친미·우익'을 대변하던 기독교는 6·25를 통해 새로
운 시련을 맞게 된다. 6·25 자체가 '우익집단 기독교'가 항상 '적'으
로 지목해 왔던 '공산주의 집단'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25 과정을 통해 기독교는 일제시대와 같은 '이중적인 대
응'을 보여주게 된다. 이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치부하기에는 너
무도 굴절된 모습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독교는 애써 이 부분을 지
워버리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가 8·15를 기점으로 끝나자, 한국 교회는 다시
6·25전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일제시대에도 부역한 목
사가 있었지만, 6·25가 발발한 이후 잠시 동안이나마 이른바 공산정
권에 부역한 목사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자료가 역사적 사실로 남
아있다.
물론 교회가 공산정권에 협력 내지 부역한 사실은 일본 제국주의에
교회가 부역한 성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사료(史料)의 전반적
인 증언이다. 다시 말하면, 공산 정권에 자진협력한 목사나 기독교인
이 있는가 하면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협력한 피동협력자도 있었
다는 말이다.
원칙론으로는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공산정권에 대한 한국 교회의
부역 성격이 나누어지지만, 결과론적으로 볼 때에는 이 두 가지 구분
이 무의미해진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자진협력자나 피동협력자나 공
산정권에 협력한 것이 사실이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초래된 결과도 무
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민위원회'에 참여-
1950년이 되기 몇 해 전에 이승만 정권과 경합을 벌이고 있던 박헌
영의 남로당은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 세력 기반을 구축하
고 있었다. 이때 일부 기독교계에서 나타난 현상은 목사가 인민위원회
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국적인 기반을 가진 이 조직에
는 상당수의 목사가 각 지부위원회의 '장(長)'을 맡고 있었다는 기록
이 있다.
강원도 평창군 인민위원회장으로는 황회수 목사가, 그리고 경상북도
대구에서는 과거 평양에서 「신학지남지(神學指南誌)」를 출간했던 최
문식 목사와 이재복 목사가, 경기도 수원시에는 이하영 목사가, 또한
강원도 가평에는 김광호 목사가 각각 인민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공
산정권에 부역했다.
이외에도 전라남도 일대에서 인민위원회에 협조한 다수의 기독교인
및 교회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발족된
'기독교도연맹'이란 조직이 있는데 이 조직 역시 공산정권 소속 단체
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기독교도연맹'은 함경도 출신의 조회렴 목사를 발기인으로 하여
1946년에 창립되었다. 이 조직은 평양에 중앙본부를 두고 교역자라면
누구나 가입을 환영했다. 지역적으로는 황해도 위원장에 조응순 목사
그리고 후임에 박상순 목사와 함경도 위원장에 조회렴 목사, 평안도에
는 김치근 목사가 각각 추천받아 활동하였다.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한 목사 인원에 대해 북한이 발간한 「조선 중
앙연감」에 의하면 1948년 9월 1일 현재 '맹원 수 8만 5천1백18명'으
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많은 목사가 가입한 것은 당시 유명한 김익두 목사가 가입을
각 목회자들에게 권고했기 때문이라고 기록은 증언하고 있다. 최초의
가입 권유 예배가 열린 곳은 5도(道) 연합노회 주최로 서문밖교회에서
였다. 이때 김익두 목사가 사회자로 나섰고 기독교인 강양욱이 설교를
했다.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도 '기독교도민주동맹'이라는 단체가 1947
년 2월 24일 결성됐다. 이때 위원장에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의 한 사람인 김창준 목사가 됐고, 총무에는 박성산 목사가, 그리고
연맹의 조직 강령을 초안한 인물로는 갈홍기 목사가 있었다. 또한 이
단체의 고문 역할은 일제시대에도 황국신민화 강연을 주로 했던 신흥
우 목사가 맡았다. 이에 더하여 당시 YMCA 현동완 총무도 '기독교도민
주연맹' 설립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이 단체는 1950년에 이르러 6·25 이후 새롭게 단장, 김창준
목사가 회장으로 재추대되는 한편 새인물로 감리교의 심명섭 목사와
이만규 목사가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였다.
-인민군 환영대회 열기도-
1950년 6월 이후 남한 지역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는 현상은 이른바
'인민군 환영대회'라는 것이었다. 정계인사를 비롯 언론인, 경제인사
들이 대거 참여해 인민군의 승리를 기원하곤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인민군 환영대회'에 참가한 또다른 부류는 기독교계 인물들
이다.
같은 해 7월초, '기독교도민주연맹'은 환영대회를 준비하기로 결정
하고 위원장인 김창준 목사를 비롯하여 총무 박성채 목사, 장로교의
최문식 목사, 감리교의 최택 목사 등을 각 교단별 대표로 뽑아 숙의토
록 했다.
이때 장로교에서는 유호준 목사, 김종대 목사, 감리교에서는 박만춘
목사, 심명섭 목사, 구세군의 황종율 목사, 성결교 1인 등이 각각 뽑
혀 일정계획을 세우게 됐다.
그렇게 해서 1950년 7월 10일 YMCA에서는 교역자 및 장로 3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사회에 유호준 목사, 환영사는 김종대 목사, 그리고 환영
문 낭독을 임영빈 목사가 각각 맡아 진행하였다.
이러한 환영대회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에
의해서 강압적인 형태로 진행됐다는 연구가들의 전언(傳言)을 모두 받
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일제
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는 비일비재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반대
를 했던 것과는 달리 환영대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저항이나 이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일제시대에 나타난 교회 보전을 위한 타협 명분
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의식 자체가 종교성을 짙
게 가진 것인 반면 환영대회는 의례적인 행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환영대회 거부시 교회폐쇄라는 극한 대립은 없었던 때였
다.
-권력 지향적 속성 배태-
문제는 신흥우 목사와 같은 몇몇 교계 인물에 의해 교회가 왜곡된
점이다. 신흥우 목사는 일제 때의 황국신민화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강조한 친일주의자이면서, 6·25가 일어나 남한 지역이 수세에 몰리자
다시 기독교도민주연맹의 고문직을 맡아 공산정권에 협력하였고, 전쟁
후 이승만 정권의 기반인 자유당에 소속하여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가히 기회주의적이면서 카멜레온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
다.
서울에서의 인민군 환영대회 이외에도 원산에서 기독교인을 주축으
로 '서울 함락 경축 예배'가 있었다. 1950년 6월 29일 중앙교회에서 6
백여 명의 신도가 참여한 경축 예배는 한준명 목사(중앙신학교 교수)
의 사회와 조회렴 목사의 설교 등으로 진행됐다. 이때 조목사는 다음
과 같은 설교를 했다.
"서울 함락은...... 김일성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성과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줄 것을 믿으며 신은 우리 편에서
싸움을 독려해주실 것이다."
한국 교회가 일제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행태는 전반적
인 사실에서 보듯이 부정적인 경향이 없지 않다. 친일파가 곧바로 공
산주의자가 되고 또 곧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계 인물로 변신하
는 모양 속에서 한국 교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권력추구형 내지 권력의존형 또는 권력지향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한국 교회의 행태는 반드시 지적되고 또한 청산해야 할 무거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에 와서 해방 이후 기독교의 모습을 증명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
성을 갖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냉전시대가
지나가고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버린 오늘,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인해 겪어야 했던 역사의 질곡을 꼭 되새길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 제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북통일을 위해 교회가 노력해야 한다는 공동인식이 마련되
고 있는 현실에서 그같은 행위를 문제삼는 것은 또한번 '냉전의식'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느냐는 반문도 역시 가능하다.
-온갖 문제의 원인 제공-
그러나 해방 이후에 있었던 '잘못된 행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꼭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접근할 문제는 아니라는 데 보다 관심이 모아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해 있을 시기
동안 나타났던 '어두운 모습' 역시 '이데올로기에 대한 배신'이라는
측면에서 판단될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이 먼저 지적돼야 할 것 같다.
오히려 문제는 해방 이후 기독교가 보여주었던 친미 우익적이며 권
력 지향적이라는 속성을 불식하고 청산한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가 제
기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갖
고 있는 '친정부적' '외세 의존적' 그리고 '반통일적' 속성의 원인이
바로 그러한 잘못된 과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오
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로서 과거의 잘못된 행태에 대
한 비판과 반성이 제기돼야 한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굴절된 모습은 한마디로 해방
이후 줄곧 보여주었던 속성들의 '확대 재생산'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 가해지고 있는 여러 비판들을 발전
적으로 수용하고,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독교로 바로 서기 위해
서는 과거의 모습을 반성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이번 기획을
마련한 의도이기도 하다.
기획을 마치면서 다시금 현재의 기독교가 갖고 있는 문제들을 정리
해 본다면 무비판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수용함으로써 통일운동에 제
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정교 분리'라는 이상을 '편파적으
로' 적용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올바른 비판을 가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의한 정권의 편에 서 있다는 점, 지나치게 외세 특히 미국에 대한
선호사상 내지 사대적인 사상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상황변화를 올바
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체에 빠져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같은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힘으로써
분열과 분쟁을 계속해 왔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이 문제의 뿌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독교 스스로가
과거 40여 년간 보여준 모습 속에 있다. 이제 그 뿌리에 대한 뼈를 깎
는 반성과 새출발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교권 장악 위한 파벌 싸움 05/01 13:22 356 line
■ 교권 장악 위한 파벌 싸움
- 파쟁(派爭)으로 얼룩진 교회사
-파벌이 교단 분열 초래-
한국 교회만큼 분열을 계속한 교회는 아마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최근 문화부가 집계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의 간판을 내건
교단이 무려 1백개가 넘는다고 한다. 세계의 교회들이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연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하면서 여러 가지 가시적인 연합의 실
례를 이끌어낸 것에 비하면 한국 교회의 이같은 '분열증후군'은 이제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와있다.
분열은 파벌에서 온다. 한국 교회가 1백년 남짓한 역사 속에서 그토
록 많은 분열을 기록했다는 것은 곧 그만큼 많은 수의 파벌이 존재했
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교단 내부에도 여러 갈래의 파벌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파벌들 사이에
교권과 이권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한국 교회 분열의 역사는 앞으로
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에 파벌이 생겨나고, 이에 따른 분열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선교 초기에 있었던 지역별 분할선교 정책 등으로 인해 노정
된 지방색, 둘째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교권을 둘러싼 갈등, 셋째
잘못 이식된 근본주의 신학, 넷째 일제 식민치하에서의 상처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오류 등이 그것이다. 물론 편을 가를 때마다
'신학적인 견해차'를 내세우긴 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표면적인 이
유'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거쳐 왔던 분열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같은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장로교단에서 가장 먼저 갈라져 나간 교단은 해방 직후 분열된 '고
려파'였다. 대부분의 교회가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동안 여기에 끝까지
반대해 옥고를 치렀던 부산·경남지역의 교회들이 한상동·송상석 목
사를 주축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교단을 형성한
것이다.
그 이후에는 이른바 '신신학' 논쟁으로 인해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된 '기장측'이 분리돼 또 하나의 장로교단이 탄생한다. 이때 기장의
주축을 이룬 세력들은 대부분 함경도 지역과 호남 지역 출신들로, 신
학논쟁의 이면에는 분할선교 정책으로 인한 지역색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장·기장·고려파의 세 교단 체제가 약 10년 동안 계속된 후, 예
장은 또한번 분열의 홍역을 치르게 된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로 논란끝에 비상정회 한 후, 둘로 갈려 양측이 연동교회와 승동
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속회함으로써 완전히 두 교단으로 갈라진 것이
다. 이때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한경직 목사를 주축으로 '장
로교는 통합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고 해서 '통합측'이라고
불리게 됐다. 또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이전에 갈라진 고려
파와 다시 합동했다고 해서 '합동측'이라고 일컬어지게 됐다.
예장의 일부와 고려파가 연합해 구성된 합동측은 이후 교권과 지방
색을 둘러싼 분열을 계속한다. 먼저 갈라져 나갔다가 돌아온 고려파가
고려신학교의 인정문제를 놓고 다시 교단을 이탈, 본래의 고려파로 환
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고신측'이 됐으며, 고신측을 '환원파'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문제 이면에는 고려파의 거두인 한상동 목사가 3
년 연속 총회장을 맡는 문제, 다시 말해서 교권문제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파가 환원한 후 합동측의 교권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과
호남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 그룹의 거두는 정규오 목사였다.
이 그룹은 고려파 환원 이후 12년 동안 합동측을 지배해 왔다.
이 과정에서 소외됐던 중부·영남 출신들은 절치부심 끝에 이영수
목사를 중심으로 뭉쳐 드디어 교권 장악에 성공, 무려 17년 동안 합동
측의 교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두 그룹의 교권 다툼으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 이른바 1979년 64회 총회에서 발생한 합동측 주류·비주류의
분열사건이다.
당시 이영수 목사 계열, 즉 중부·영남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교권
에서 소외돼 있던 비주류측(황해·평안·호남 계열)은 64회 총회에서
교단탈퇴를 선언하고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합동보수'라는 교단을
세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이 '합동보수'는 호남세를 중심으로
한 '개혁측'과 이북 출신과 호남측 일부로 구성된 '합동보수측(현재
홍은동 소재 총회)'으로 양분된다.
그후 이 합동 비주류계열은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해 오늘날 80개가
넘는 수많은 장로교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합동 비주
류 계열의 분열은 철저하게 지방색과 교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인해 분
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합동측은 1979년 9월 대구에서 열린 제64회 총회에서 정규오 목사를
주축으로 했던 비주류계열측과 분열 이후, 주류계열을 형성했던 이영
수 목사가 교단을 이끌어 왔다. 이목사의 독주는 85년 70회 총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17년간 교권을 손에 넣고 교단을 좌지우지했던 이목사는 이
총회에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
을 그대로 보여준 총회였다.
이 총회에서는 그동안의 재산유용문제, 총신대 불법운용문제, 지도
자 비리문제 등이 긴급동의, 이 동의안 제출로 이영수 목사의 모든 공
직 해임과 「기독신보」의 배태준 사장 해임을 결의했다.
이후 합동측은 87년 제72회 총회를 계기로 '교단 정화'의 기치를 내
걸고 이영수 목사를 무너뜨리고 교권을 장악한 김현중 목사를 주축으
로 한 강경파가 비주류계열인 개혁파에 의해 또다시 무너지면서 극심
한 파벌간의 다툼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주류와 비주류로 갈라진 총회는 해마다 서로 교권을 장악하
기 위해 총회장을 비롯해 전임원 선거에 막대한 소모전을 전개한다.
비근한 예로 지난 88년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열린 제73회 총회는, 그
전해에 열린 72회 총회보다도 더 극심하게 개혁파와 강경파간의 주도
권 싸움으로 점철됐다. 당시 개혁파의 경우에는 이성헌 목사와 이봉학
목사, 한명수 목사와 김동권 목사, 김인득 장로가 주축이 돼 72회 총
회에서 장악하지 못한 기독신보사 이사진 개편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
켰다. 또 강경파의 경우에는 김현중 목사와 임태덕 목사, 김만규 목사
와 서기행 목사, 윤재동 장로 등이 중심이 되어 지난 총회에서 실패한
임원진 구성에 총력을 다했다.
73회 총회에서 개혁파가 교단을 장악한 이후 합동총회는 평온한 분
위기를 유지하며 정책교단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교단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교권 위한 싸움만 계속-
한편 원래의 교단으로 환원한 고신측에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부산측과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마산측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
었다. 한목사는 명실공히 고려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데에 반해 법리해
석과 행정절차에 밝았던 송상석 목사는 교단의 행정적 지도자였으며,
두사람 휘하에는 제각기 빼어난 후배와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두 그룹의 갈등이 교단의 분열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한목사
후예들은 '돼지파'로 그리고 송목사 후배들은 '부곡사단'으로 아직까
지 교단을 양분하고 있다. 두 그룹이 이같은 명칭을 갖게 된 데에도
재미있는 뒷얘기가 있다.
한편 두 그룹의 갈등으로 인해 교단의 일부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하
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경기노회를 주축으로 한 일부 세력
과 이전에 고려파를 탈퇴한 바 있는 이기진 목사 등이 이 고소에 반대
하면서, 교단을 탈퇴해 새 교단을 세웠다.
이때 탈퇴한 그룹의 우두머리가 바로 석원태 목사였으며, 이 그룹이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으로 발전했다. 이 교단을 '반고소
고려측'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같은 '파벌'과 '파벌로 인한 분열'이 장로교단, 혹은 보수를 표방
하는 집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리교와 성결교, 그리고 침례교 등
에도 파벌로 인한 갈등과 진통이 역시 도사리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한국 교회 교세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
단의 행태는 한국 교회 전체를 좌우했다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
니다. 그러나 장로교단과 함께 한국 교회 3대 교단 중의 하나인 감리
교와 성결교는 어떤가.
감리교도 여느 교단과 마찬가지로 미국 감리교에 의해 선교가 시작
되었다. 한국 선교 당시 미감리교회는 현재와 같은 하나의 교단이 아
니라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한국 선교도 따로 하게 되었다. 먼저 들
어온 북감리교회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충청지역 등 남쪽에서, 좀 늦
게 들어온 남감리교회는 평양·개성·철원 등을 중심해 북쪽으로 선교
지역을 나누어 가지고 선교에 임했다. 그러나 1930년 남·북 감리교회
가 한국땅에서 역사적으로 합동해 '미국연합감리교회'란 하나 된 교단
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때 미국 연회에 속해 있던 한국감리교회도 미국 교회로부터 독립
하여, 조선기독교감리회로 출발하게 되었고 초대 총리사(현재의 감독)
로 남감리회에 속해 있던 양주삼 목사가 뽑혔다. 그러니까 세가 단연
컸던 북감리교회측인 서울세가 약세였던 남감리교회측 평양세에게 패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따라 평양세와 서울세가 그의 재임 8년
동안 대립하는 양상에 빠졌으나, 드디어 1939년에는 북감리교회측이
김종우 목사를 앞세워 양주삼 목사를 밀어내고 대권을 잡게 됐다.
이렇게 되자 남감리교회측은 평양에 성화신학교를 세우고 힘을 양성
하게 됐고 이때부터 감리교의 파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양
측은 대단한 대립을 보여왔으나 일제에 의해 국내의 전교파가 해산되
고 일제의 작품인 조선기독교회로 단일화되면서 친일과 비친일로 서로
다투던 양상은 다른 교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감리교가 파벌싸
움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부흥파와 재건파로 갈라져 싸움
을 벌인 데서 비롯한다.
부흥파는 일제하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형성된 것
으로 선교 초기로 돌아가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후에 성화파의
모체가 됨). 또 재건파는 해방 직전의 양태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주
축이 된 것으로 후에 호헌파의 모체가 되었다.
-계파간 선거전 치열-
이들 두 파의 싸움은 일제치하에서 입은 피해를 염두에 두고 벌인
싸움인 탓으로 매우 치열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일어나고 북에서
많은 사람이 월남하면서 부흥파로 집결되어 성화파가 탄생됐다.
주로 조선기독교회에서 활동했던 이들로 구성된 재건파가 피난중 충
청도세와 천안에서 호헌파를 형성해, 이후로 양파는 피나는 싸움을 벌
였고, 이로 인해 교단은 50년부터 58년까지 분열된 상태로 보내다가
다시 합동이 되었다. 비록 합동은 되었으나 양 계파의 골이 얼마나 깊
었던지 당시의 감독 선출을 위한 투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김종필
감독이 약 80번, 이환신 감독이 1백14번, 윤창덕 감독이 27번의 투표
끝에 뽑힌 기록을 남겼다.
이같은 양 계파의 싸움과 횡포 속에 소외됐던 이들이 정동파를, 정
동파에 대전출신들을 규합하여, 복음동지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 계
파는 한때 기세 등등해 감독까지 배출했으나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는
미약한 상태이다.
호헌파는 70년대 약관의 김창희 목사가 교단의 상징적 인물인 원로
홍현설 목사를 물리치고 감독에 당선됨으로써 교단이 다시 분열, 합동
하는 과정에서 신구계열로 갈라졌다.
그 원인은 김창희 목사의 당선에 반발한 마경일 목사 등이 교단갱신
의 기치를 내걸고 중앙연회(일명 갱신총회)를 따로 조직해 3년을 보내
다가 호헌의 일부와 합의해 교단이 다시 하나가 된 데 있다. 이 와중
에서 성화는 쇠퇴일로를 걷다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또 성화쪽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갱신도 오래가지 못하고 지금은 사라졌으나
현직 감독 7명 중에 3명 정도가 이 계파 출신이지만 이는 엄격히 말해
학연이 낳은 결과이다.
그러면 이 교단의 최근 정치판도를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대로 현존
하는 계파는 소위 박라인으로 불리우는 호헌 구파와 김 또는 K라인으
로 불리우는 호헌 신파가 교단정치의 정상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복음동지회가 이 틈바구니에 간간이 끼어드나 명분뿐이고 별
영향력은 미치지 못해 한계에 달했다는 여론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들 계파 외에 서울 감신 출신과 대전 목원 출신
을 중심으로 한 학연이 급속히 머리를 들고 기세가 확대되는 과정에
있어 앞으로 교단정치의 판도에 커다란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이것은
지금의 감독수가 잘 말해주고 있다.
한국땅에서 자생했다고 주장하는 성결교는 60년대 교리해석 문제와
현실참여 문제 등으로 교권싸움을 벌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
교대한성결교회로 양분되었다.
예성은 다시 연합측으로 분열되었으나 지금은 다시 합해져 하나가
됐다. 예성은 지금 교단이 별 잡음 없이 조용한 편이고 기성은 원로와
부흥사들로 선이 그어져 있는 상태이지만 심각한 편은 아니다. 다만
지나친 원로정치에 반발하는 유인물이 작년 총회 때 나오기도 해 교단
의 정치판도에 변화가 오리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통합측은 합동측과 분열된 후로 획을 그어 말할 수 있는 확고한 계
파는 없다. 다만 영남과 호남, 이북, 서울세로 암암리에 나누어져 교
권을 향해 쟁탈전을 전개해 오면서 어느 지역이 어느 지역과 손을 잡
느냐가 그때 그때 교권 행방을 결정하곤 했다. 그나마 지금은 4개 지
역 5윤번제에 의한 부총회장 선출 방식이 도입돼 지역 내에서만 학연
또는 인맥이 작용하는 정도이며 교단 내 진보·보수 세력이나 젊은층
등은 목소리만 있는 압력단체일 뿐이다.
기독교한국침례회의 경우 크게 '대전침신출신'과 '수도침신출신'의
양대 세력들이 제각기 파벌을 형성하여, 갈등을 빚기도 한다. 특히 수
도침신 출신들은 교단의 신학교육 정책과 권력배분에서 항상 소외돼
왔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총회 때마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수도침신파들에 대한 대전침신파의 공격으로 인한 사건 중 가장 커
다란 사건은 아마도 '귀신론'으로 이단시비를 일으켰던 김기동 목사의
교단 탈퇴 사건이었다.
수도침신 출신의 김기동 목사는 침례교에 입성한 뒤 문제의 '귀신
론'을 통해 교단 최대의 교회 목회자로 급성장했고, 이에 따라 그에
대한 '이단 시비'도 강화돼 급기야 교단을 떠나 '기독교남침례회'라는
새 교단을 세운 것이다.
이번 총회를 앞두고 발생한 이른바 '괴문서사건'도 교단 내의 파벌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다. '괴문서'를 통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수도침신 출신들이며, 더구나 그들의 명단을 다
른 문서에서 떼어내 괴문서에 첨부시켰다는 사실이 조사 과정에서 밝
혀졌기 때문이다.
기독교운동권 내부에도 파벌은 존재한다. 특히 운동노선이나 이념을
둘러싼 이견이 파벌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것은 80년대
있었던 '운동권의 좌절'과 지난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운동
권의 분열'을 통해 더욱 심화됐다. 특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두 명의
야당 후보를 놓고 겪어야 했던 운동권의 분열은 기독교운동권에도 큰
상처를 남겼으며, 그 상처는 아직까지도 치유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사회든지 견해의 차이와 그 차이로 인한 집단화, 즉 파벌형성
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파벌간의 긴장관계가 건전한 경쟁을
통해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의
파벌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따지고 보면 한국 기독교의 파벌 자체가 교회의 갱신과 선교사명 완
수라는 발전적인 명제로 인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한국 교회는 파벌간의 교권 다툼과 그로 인한 분열의 악순환을
계속해 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답답한 상황을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가?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이 파벌 싸움을 하는 동안 등이 터지는 괴로움
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은 일반 교인이라는 사실이다.
"...거룩하신 아버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시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요한 17:11,현대인의성경)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십니다.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하소서..."
(요한 17:21-23,현대인의성경)
과연 성경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본 것일까?
과연 신학교 들어가서 신학공부를 제대로 한 것일까 안한 것일까?
애기가 봐도 알 수 있는 구절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도 제대로 지킬려고 하지 않으면서
무슨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가?
그건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너희가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8:47,현대인의성경)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청소년교인의 감소현상(1) 04/11 04:42 292 line
■ 청소년 교인의 감소현상(1)
-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 의외로 심각
교회 청소년층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목회자들과 일
반 교인들 사이에서는 이같은 위기의식이 점차 강하게 자리잡아 가기
시작했다. 물론 연령별 기독교인 통계같은 정확한 수치나 근거는 없
다. 다만 피부로 느끼기에 젊은층은 날이 갈수록 교회로부터 발길을
돌리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정확한 통계 없어-
두말할 나위 없이 청년층은 앞으로 다가올 세대를 책임질 기둥들이
다. 따라서 이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한국
교회의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그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한국 교회의 성장뿐만 아니라 활력이라는 측면에서도 엄청난 악영향을
몰고 오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같은 판단에 따라 본보는 과연 그러한 위기 의식이 사실인가를 확
인하기로 했다. 동시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그 이유는 어디에 있
으며, 젊은층의 이탈을 막아낼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도 함께 찾아
보기로 했다.
하지만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연령별 종교인 통계 등 구
체적인 자료가 나와 있지 않아 정확한 통계를 파악한다는 것이 현실적
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본보 취재진은, 대학 등 특정집단 내의 종교
통계 자료, 일반 여론조사기관의 최근 연구 동향 등을 통해 청년층이
갖고 있는 종교적 성향을 파악해 이들의 종교간 이동실태를 추론해 보
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이같은 '추론의 방법'이 궁극적으로 정확성
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개교회 목회자들의 입을 통해 그
들이 목회현장에서 직접 느끼는 바를 들어보는 방법도 병행하기로 했
다.
현재 국내 대학들 중에서 재학생들의 종교별 통계를 갖고있는 학교
는 기독교계통의 몇몇 학교들밖에 없다. 연세대학교의 경우, 매년 열
리는 각 교단총회에 제출할 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신입생들을 대상으
로 종교상황을 조사하곤 한다.
연세대학교 교목실의 자료에 의하면 1989년부터 1992년까지의 기간
동안 이 학교 학부 재학생 중 기독교(개신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
각 38.1%, 39.0%, 39.4%, 37.5%로 급격한 증감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또한 다른 종교에 비해 기독교인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나타
내 주고 있다(표1 참조).
그러나 문제는 이 통계가 청년층의 움직임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
라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이 자료는 해마다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종교분포를 누가해서 작성했기 때문이다. 즉 입학 당시 기독교
인이었다가 후에 기독교를 떠난 사람의 수는 이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
다. 따라서 이 통계상의 기독교인의 수에는 상당한 허수(虛數)가 포함
되어 있으리라는 점을 교목실 관계자도 인정하고 있다.
한편 연세대학교 내 여론조사 전문서클인 '연세서베이 연구회'는
'86년과 '90년 두 차례에 걸쳐 종교와 관련된 재학생들의 의식을 조사
한 바 있다. 이 조사에 의하면 '86년의 경우 재학생중 기독교인의 비
율은 26.2%였으며, '90년의 경우는 29.2%로 나타났다. '90년 조사에서
는 기타종교 및 무종교가 51.5%로 나타나 교목실의 자료와 거의 일치
하고 있는 반면, 유독 기독교인의 수만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표2 참
조). 이것은 결국 두 통계간의 차이만큼의 숫자가 입학 이후 기독교를
떠났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베이연구회의 조사결과 중 또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86년의 조사
에서 '종교생활에 회의를 느끼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 질문에 대해 조사대상 학생들은 '현실과 종교적 이상이 다르기 때
문'(35.2%), '종교의 타락'(30.8%),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27.3%)라고 각각 응답했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가 개신교라고 대
답한 학생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종교의 타락'(33.5%)과 '현실과 종교
적 이상의 괴리'(31.9%)가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여
기서 우리는 두 통계 자료의 편차, 즉 기독교를 떠난 사람들이 기독교
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으며, 청년층 기독교인의
수가 줄어드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연세대 재학생 종교 통계>
+------+--------+----------+--------+---------+
| 연도 | 학생수 | 종 교 | 인 원 | 비율(%) |
+------+--------+----------+--------+---------+
| 1989 | 24,682 | 기 독 교 | 9,403 | 38.1 |
| | | 천 주 교 | 2,592 | 10.5 |
| | | 기타종교 | 2,296 | 9.3 |
| | | 무 종 교 | 10,391 | 42.1 |
+------+--------+----------+--------+---------+
| 1990 | 24,951 | 기 독 교 | 9,481 | 39.0 |
| | | 천 주 교 | 2,720 | 10.9 |
| | | 기타종교 | 2,370 | 9.5 |
| | | 무 종 교 | 10,380 | 41.6 |
+------+--------+----------+--------+---------+
| 1991 | 25,232 | 기 독 교 | 9,941 | 39.4 |
| | | 천 주 교 | 2,624 | 10.4 |
| | | 기타종교 | 2,271 | 9.0 |
| | | 무 종 교 | 10,396 | 41.2 |
+------+--------+----------+--------+---------+
| 1992 | 25,970 | 기 독 교 | 9,739 | 37.5 |
| | | 천 주 교 | 3,246 | 12.5 |
| | | 기타종교 | 2,545 | 9.8 |
| | | 무 종 교 | 10,440 | 40.2 |
+------+--------+----------+--------+---------+
자료제공:연세대학교교목실(표1)
+------+----------------+---------+
| 연도 | 종 교 | 비율(%) |
+------+----------------+---------+
| 1986 | 개신교 | 26.2 |
| | 천주교 | 11.1 |
| | 불교 | 4.9 |
| | 기타 및 무종교 | 55.4 |
+------+----------------+---------+
| 1990 | 개신교 | 29.2 |
| | 천주교 | 14.5 |
| | 불교 | 4.9 |
| | 기타 및 무종교 | 51.5 |
+------+----------------+---------+
자료제공:연세서베이연구회(표2)
-입시 부담감도 작용-
최근 몇년 동안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청소년 및 대학부 감소 현상
때문에 상당한 부담감을 느껴오고 있다. 나름대로 떨어져 나간 학생층
을 불러모으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증가현상은 순간적일
뿐 유지책으로는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교회 밖으로 나가도록 밀어내고 있는가?
'무엇'의 정체를 알기 위해 정부측 조사자료와 연구소 등 기관자료
를 둘러봤지만 '무엇'의 정체로 규정하기에는 그 내용들이 사뭇 달랐
다. 지난 '85년에 문화부와 경제기획원이 공동주관해 실시한 '인구센
서스' 조사내용 중 '종교항목'에는 단순히 해당종교를 표시하도록 하
고 있어 기독교, 불교, 유교 등 종교인 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었다. 또한 조만간 출간예정인 '종교연감'을 준비하고 있는 종교
사회연구소(소장=윤이흠 교수) 측에서도 기독교 내 청소년 및 대학부
인원 변동 조사표를 갖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아울러 기독교인의
연령층 조사도 아예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짤막한 대답을 했
다.
이와 관련해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지난 '84년 발행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이라는 책에도 종교현황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범
위에서 조사결과를 다루고 있었다. "일반기관에서 특정 종교의 연령층
인구를 조사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겠느냐?"는 한 관계자의 말을 되
짚어 볼 때, 선교 2세기를 넘어선 한국 교회 안에 전체적인 연령층 신
앙인 수가 조사되지 않았다는 점은 반성하고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
을 것 같다. 끌어 모으는 대로 교회 증축에 성의를 보였던 것과 병행
하는 '신앙인 증감 조사와 감소 요인 파악'이 진행되었어야 옳다는 말
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한 목회자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교인의
감소현상과 그 요인'을 세부항목으로 다루어 놓아 어느 정도의 진단을
가능케 하고 있다. "제2세 기독교인의 신앙교육에 관한 연구"라는 제
목으로 지난 '91년 목회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최복규 목사(한국중앙교
회 담임)는 13세부터 30세에 이르는 연령층을 대상으로 교회출석을 꺼
리거나 결석하게 된 요인을 집중적으로 질문했다. 그 조사 대상이 대
부분 최목사 자신이 시무하는 한국중앙교회 청소년 및 대학부층이지만
결과는 특정교회 내의 문제를 벗어나 일반적인 사항이 주로 지적되었
기 때문에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은 상급학교 진학에 상당한 부담감을 갖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중3과 고3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입시
문제'와 관련해 교회기피현상을 나타냈겠지만 총 응답자수 73명 중
53%에 해당하는 39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또한 오락프로그램과 대중
오락시설과 관련해서는 39%가 '주일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교회출석을
못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늦잠과 같은 편리주의 때문이라고 응답한 학
생은 대상자 104명 중 20%인 21명이었다.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교회 내적인 요인에 관한 조사였다. 총
112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계한 조사에서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무
관심, 장년 중심의 교회 운영이 각각 19%로 가장 많았고, 연속적 훈련
체계의 미비(18%), 전문지도자 부재(16%), 교육시설 부재, 교사의 자
질문제, 새로운 행사 미비가 각각 8%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점은 현재 청소년층이 학교에서 입시전쟁을 치
르는 등 갈등상황을 맞고는 있지만 이것이 교회 출석을 저해하는 요인
으로는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꿔말해서 학생들 개개인
에 대한 상황 고려가 관심으로 표현될 때, 혹은 교회적으로 청소년층
을 포용하는 노력이 나타날 때, 이들은 교회 밖으로 쉽게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의 자질론이 대두되며 청소년 전
문지도자 양성훈련 프로그램 개발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대학부 및 청년층도 청소년층의 응답내용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논리적 이성 추구에 따른 신앙기피
(35%), 부모의 불신앙(34%) 등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이성추
구'가 신앙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대학생층의 두뇌활동 강
화라는 자연현상을 들 수 있겠지만 유초등부와 중고등부 시기에 신앙
교육을 '믿음'이라는 범주에서 '맹목'과 혼돈하여 교육을 시킨 결과라
고 하겠다. 이 결과는 감소현상의 교회적 요인에서 응답자 총 1백명
중 31명이 '연속적 훈련체계 미비'(31%)라고 답해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된 부모의 불신앙에 따른 교회 포기현상(34%)은 청
소년층의 11%와 비교해 볼 때 간과할 수 없는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
다. 이것은 학생이 성장할수록 가정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반영
하는 결과로서 중고등부 시기에 가정전도를 실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몇가지 통계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교회 내의 청년층 감소현
상은, 이들이 처해있는 환경의 독특성과 교회 내의 열악한 교육환경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요소 중 교회 내의 신앙훈
련과 개인에 대한 관심 고양은 이들 젊은층의 독특한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심축이 됨도 아울러 알 수 있다.
-교육 프로그램 중요-
교회 내의 청소년 감소현상은 몇해 전부터 나타나던 현상이라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 내에서 청소년의 감소현상을 간파하고 이
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적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교회는 점차 청소년들
이 다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와 같은 현상은 대형 교회를 중심으
로 교육적 대안이 확실한 몇몇 교회들에 국한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
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한 G교회는 3,4년 전과 비교해 볼 때 1백여명
정도 청소년들이 감소했다. 이 교회 교육목사인 L목사는 청소년들이
교회에서 줄어들고 있는 현상은 비단 G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
적인 문제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요즈음 청소년들이 입시경
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교적 관심이나 사고보다는 '공부'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반 사
회 청소년 단체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고 그들의 흥미와 요구에 부
응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교회라는 공간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다.
이에 반해 교회는 청소년들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갖지 못한 채 몇
십년 전 교회 청소년 프로그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고
L목사는 교회 외부적 문제와 더불어 청소년에 대한 교육정책의 부재
현상을 꼬집었다.
서울시 구로구에 위치한 S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7년 전만 하
더라도 150여 명이 참석하던 학생회가 현재는 겨우 20여 명이 모여 예
배를 드리고 있다. 이 교회의 경우 가장 큰 문제점은 교회 차원에서의
학생회에 대한 교육적 사고가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교회는 7년
동안 학생회 담당 교육전도사가 무려 열 번이나 바뀌었다. 이중 자질
면에서 크게 문제가 있었던 전도사도 몇명 있었지만 대부분 "S교회에
적합하지 않다." "학생회를 이끌어 나갈 만한 지도력이 없다."라고 생
각되었을 때는 사임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교육전도사에게
학생회의 모든 것을 맡겨놓고,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때는
새로운 전도사로 대치하는 일이 몇해 동안 반복되는 속에서 청소년들
이 점점 감소하게 된 것이다. '유능하고 능력있는 전도사만 들어오면
학생회는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청소년들의 가슴에 상처만 안겨
준 셈이다.
이와는 반대로 교회가 정책적으로 청소년 교육에 관심을 갖고 투자
하고 있는 교회도 없지 않다.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영락교회는 교육국이 따로 편성되어 있어 교
회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기획이 이곳에서 마련된다. 청년,대학부의 경
우 나이별, 취미별로 나누어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세부적으로 부
서가 나뉘어져 있다. 취미반으로서는 영어성경반, 일어성경반, 부부성
경반, 금요성경반 등으로 나뉘어 자신이 원하는 부서에서 성경을 공부
할 수 있도록 선택의 기회를 주어, 적극적인 교회활동의 장을 마련해
주고 있다. 특히 각 부서마다 담당 목사, 전도사, 간사를 두어 부서를
책임지고 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왕성교회(담임=길자연 목사)는 교사들의 열심과,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 적극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줌으로
써 청소년들이 증가하고 있는 경우다.
고등부 부서활동으로 찬양부, 문예부 등을 조직해 찬양부의 경우 예
배 시작 전 20여 명으로 구성된 찬양팀이 경배와 찬양으로 예배를 이
끌며, 문예부의 경우 10명으로 구성된 '예닮사' 주보팀이 매주일 주보
를 발행,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교회 내 청소년들의 감소현상은 교회 내외적인
요인이 함께 맞물려 작용함으로써 나타나고 있다. 교회 외적인 요인으
로는 입시경쟁 위주의 학교교육, 사회 청소년단체의 증가, 산업사회에
서의 개인주의 팽배 등을 들 수 있으며, 교회 내적인 요인으로는 교육
정책의 부족, 프로그램의 빈곤, 교회 교육의 비전문화 등을 들 수 있
다.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청소년교인의 감소현상(2) 04/11 04:45 294 line
■ 청소년 교인의 감소현상(2)
- 감동도 재미도 없어 밖으로만 맴돈다
청소년 교인이 감소하는 것은 교회의 교육 등 프로그램상의 문제와
사회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
는 교회 내의 청소년 감소원인을 집중적으로 찾아내 그 문제점과 이에
따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시대착오적 프로그램-
청소년 교인 감소의 교회 내적인 원인은 주로 교회의 프로그램 및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사회의 여러 측면이 발달하면서 청소년들
이 흥미를 느끼는 대상이 엄청나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아
직까지 구태의연한 프로그램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 같다. 한마디로 21세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청소년
들에게 19세기의 방법으로 짜여진 내용을 전달하려 하다 보니 흥미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시대착오적인 프로
그램이 계속되는 한, 청소년 교인들의 감소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
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한 집단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형식,
내용, 이념, 그리고 교육자와 피교육자라는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하면, 가장 먼저 피교육자가 교육 외적인 요인으
로 인해 변화한다. 이 경우 교육은 그 이념을 살려 나가면서 교육 효
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형식, 내용 등을 변화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피교육자인 청소년층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
는 상황에서 다른 분야의 변화를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교회의 교육 이념이 일정하게 세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한국 교회의 교육 이념이 올바르게 수
립되어 있다거나 아니면 이것이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전달된다는 징후
는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소년들은 '배울 것이
없는'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의식과 구조도 청소년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 교회의 어른들에게 있어서 청소년들은 '공부 잘하
고 말만 잘 들으면 되는 존재' 정도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틀에서 벗
어난 청소년들은 단번에 '문제아'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자신의 의
견을 분명히 밝힌다든지, 자신이 가진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재능이 허용된다면 성가에 필요한 목소리나 피아노 등 악
기를 다루는 재주 정도이다. 한마디로 교회 전반적으로 청소년들이 소
외되고 있는 현실이 청소년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 교회는 교육적 측면에서나 의식적,구조적 측면에서나 청
소년들을 감싸주기보다는 소외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교회가 청소년들을 소외시켰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살펴보
자.
서울시 성동구 G교회에 다니는 고2 김모 양은 요즈음 교회에 나가는
것에 싫증이 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김양은 어렸을 때
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열심파'에 속했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
다. 자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거두어내고 싶은
충동이 자주 생기는 것이었다. 김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제목만 바뀌었지 매년 똑같이 반복되어
서 흥미를 잃었어요. 국민학교 때부터 배웠던 공과는 수준만 조금 높
아졌을 뿐 내용은 변함이 없고요, 학생회 2부순서도 찬양경연대회, 성
경퀴즈대회, 기도회, 친목회 등 내용이 정해져 있어요. 임원회에서 무
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 봤자 결과는 뻔하죠. 저희들이 참신한 아이디
어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면 신앙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있고, 간혹 학생회 자체 프로그램을 가졌더라도 내용
이 신앙적이지 못하면 교회 어른들로부터 안좋은 소리를 들으니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정말 요즘 같아선 이런 고민 안하고 교회를 떠나
버리고 싶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교회 집사님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죠."
김양의 이야기는 자못 심각하다. 학생회 임원으로서 교회에서 나름
대로 열심파에 속했던 그녀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오는 일시적 권태기 현상으로 넘기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경기도 성남시 K교회에 다니는 고1 이모 군은
교회만 나오면 평소에는 얌전했던 성격이 반항적인 기질로 변한다. 그
렇다고 학생들이 말하는 '날나리','비행소년'은 아니다. 이모 군이 교
회만 나오면 반항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교회가 학생들의 자유와 인격
을 강제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특히 중,고등부 부장 장로님의 강
압적인 태도는 이모 군이 반항적으로 나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교회만 나오면 듣는 잔소리 "교회 오면 꼭 기도를 해야 돼요." "예
배시간에 이 친구, 저 친구 보면서 '히득히득' 웃으며 장난쳐도 안돼
고요, 예배는 경건하게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찬송은 크
게, 온 마음을 다해 드려야지, 점심 굶고 왔어요?"
예배시간이 부장 장로님의 잔소리로 가득 차 짜증이 난 것뿐 아니라
모든 프로그램이 부장 장로님과 전도사님, 교사 중심으로 계획되기 때
문에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꾸 '꼭둑각시'가 되
어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 내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빈곤은
어제 오늘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보통 중,고등부의 경우 부장, 지
도전도사, 교사들이 프로그램 기획과 진행을 독점해 학생들의 자발적
인 참여를 막는다든가 아니면 전도사의 지도와 부장의 승인 하에 프로
그램이 기획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모두 '신앙'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자칫 프로그램 자체가
구태의연한 면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겠다.
-연속적인 훈련체계 미비-
또한 교회 청소년 감소의 원인에는 연속적인 훈련체계가 미비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교육을 담당하는 전도사, 교사들의 훈련이 제대
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교사가 제대로 수급이 되지 않아 중,고등부
를 갓 졸업한 자가 중,고등부 교사를 맡는가 하면 중,고등부 교사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중,고등부 교사로
임명되는 경우를 우리는 교회에서 많이 보아왔다.
이처럼 중,고등부 교사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연속적인 교육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 교육의 효과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고 하겠다.
이와 더불어 청소년층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지도전도사의 문
제점도 청소년 교인 감소의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교육전도사의 경우
임시직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건 바뀔 우려가 대단히 높아 불안정
하다. 또한 교회의 교육 이념과 전도사 개인의 교육 이념의 차이, 또
한 전도사와 교사와의 관계 등이 원만하지 못할 때 올바른 청소년 교
육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교회와 지도전도사, 교사가 의견을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창구와 더불어 연속적인 교육 훈련을 통해 교육 이념을 일치시켜나가
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교회 내 청소년의 감소를 부채질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교육이념의
이중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교회는 청소년들에게 '신앙'만이 최고의
가치임을 역설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나 노골적으로 이세
상 가치인 '출세','성공' 등을 요구한다. 즉, 아무리 교회활동을 열심
히 해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며, 청소년기 교회생
활이나 개인생활이 성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출세지향주의에 교회가 매몰되어 있다는 말이다.
올해 대학에 떨어진 서울시 관악구 L교회에 다니는 전모 양의 이야
기를 들어보자.
"제 나름대로 신앙을 지키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교회생활뿐 아니라
학교나 가정에서도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애썼
고요. 교회 어른들도 저의 행동을 보며 항상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칭찬했죠. 하지만 제가 이번 대학입시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뒤
저에게 들려오는 소문은 '거봐, 교회생활만 열심히 하니까 저렇게 됐
지' '저렇게 될 줄 알았지. 뭐든지 적당히 해야 되는 법이야.' 하는
말이었어요. 그 이후 저는 제 행동을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 요즈음은
교회 나가기가 두려워져요."
이처럼 신앙과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요구하는 교회교육의 이념으로
청소년들의 방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 내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청년 및 청소년 관련 신앙 프로그
램의 부재와 빈곤현상은 중,고등부 지도교사의 자질부족과 맞물려 젊
은층 교인 감소현상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감소현
상을 조금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훨씬 방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즉 교회교육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표가 일반 사회교육, 달리 말하면
학교교육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사실과 알게 된다.
극단적인 표현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른바 제도교육을 '성공을 위한
교육' '출세지향 교육' 혹은 '처세요령 교육'이라고 흔히 비판하고 있
는 현상을 감안할 때 현재 교회교육이 강조하는 중심내용과 어떻게 다
른지 한번쯤 재고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흔히 목회자를 포함해 일선 교회학교 교사들은 교육대상자인 학생들
에게 "순종→믿음→신앙인→순종"이라는 도식을 주요 성서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순종하면 믿음이 있는 자'
'불순종하면 믿음이 없는 자'로 구별할 수 있는 근거를 암암리에 주입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이삭을 바치다" "모세의 순종-애굽으로 되돌아 가
다" "그리스도의 순종-십자가에 달리다"라는 표현들은 가까운 교회의
성서교재에서 흔히 발견되는 제목들일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들이 과거
에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내용들이기도 하다. 특히 설교자의 설교내용
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이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모범학생으로 주목받는 경우는 일단 출석을
잘하고, 요절 암송을 열심히 하고, 성경지식이 많은 학생에 국한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인 가치관을 기준으로 할 때 너무나도 당연
한 사실이지만 바로 이런 가치관의 교회 유입 때문에 젊은층은 이중의
부담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런 현상 때문에 학교에서 모
범인 학생이 교회에서도 모범생이 되고, 학교에서 문제아가 교회에서
도 문제아가 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사회적인 성공'이라는 부담
위에 '모범 신앙인 추구'라는 부담을 더 얹은 격이 되기 때문에 교회
안의 젊은층은 차츰차츰 교회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
다. 교회교육의 정체성 확립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되는 대목
이다.
-순종적 인간상만 강조-
청소년층의 감소를 교회교육의 본질 내용이 굴절된 데서 찾을 수 있
다는 사실은, 더 소급해서 구조적인 측면으로까지 발전됨을 의미한다.
한국 교회는 최근 몇년 동안 권위주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큰
교회 선호 경향과 이에 발맞춘 대형교회 건축 현상 등은 권위주의가
겉으로 드러난 한 단면에 불과하다. 앞에서 지적한 순종적인 인간상
구현이라는 교회교육의 역기능도 알고 보면 권위주의가 만들어낸 작품
인 것이다. 교회 안에 팽배한 권위주의는 세속적인 가치관의 유입이라
기보다 목회자 및 평신도 지도자들의 우월의식이 빚어낸 또 다른 사고
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자에 대한 존경이 인간에게 제대로 적용되
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아무튼 교회 안의 권위주의는 교회 운영면에서 '장년 중심의 목회'
라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즉, 청소년들은 목회라는 전반체계 밖으
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니지만, 교회운영을 담당하는 이른바 장로,
권사, 집사 등 제직들의 구성이 그렇다. 젊은층의 요청을 수용할 수
있는 창구가 아예 봉쇄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일한 창구가 있다
면, 담당부서 교육부장이나 전도사가 고작이다. 그러나 교육부장은 당
회에서 임명하고 있어 당회나 제직회 결정에 따라야 할 위치에 있으며
전도사 역시 담임목회자의 목회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청소
년층의 욕구불만을 제도적을 흡수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지 못하다.
청소년층은 자신들이 원하는 어른을 교육부장으로 요청할 수도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장년 중심의 교회 운영은, 극단적으로 예배시간 배정에서도 나타난
다. 어른예배, 이른바 '대예배'라는 시간이 오전 11시경으로 맞춰진
상태라고 하더라도 어린이를 포함한 청소년들의 예배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간조절을 마음대로 하고 있다. 주로 토요일 초저녁쯤 시작하는
학생예배는 어수선한 때가 더 많다. 대부분의 교회라고는 할 수 없지
만, 주일예배를 준비하기 위한 청소담당 집사들이 학생예배 때에 맞춰
청소를 시작하는 예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이래도 저래도
된다"는 식의 가벼운 마음이 기성세대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다. 특히 가정적으로 볼 때 아버지, 어머니 격이 되는 어른들이 활보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의기소침해 할 뿐 아무런 요청도 할 수 없는 것
이다.
교회의 교육정신 왜곡과 더불어 교회의 권위주의 만연은 청소년층을
지금과 같은 소수정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한가지 더 짚
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교회 외적인 문제로 최근 교회적인 대회가 있
었던 '선교단체의 활동'에 관련된 내용이다. 여기서 그 이름까지 구체
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상당수의 선교회들은 기존교회에 출석하는
청소년층 및 대학부층을 자신의 선교회로 나오게 하며 활동을 하고 있
다. 활동 자체에는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선교회에
다니는 젊은층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 활동에 소극
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이다. 선교회의 프로그램이 더 매력적이고 마음
에 든다는 것 때문에 교회를 이탈, 주일에 따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대학 등 캠퍼스 선교에 전념하는 것이다. 교회활성화를 도와주어야 하
는 선교회가 오히려 교인을 빼가는 역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짚어본 청소년과 대학청년층 감소의 교회 내적 요인들은 전
혀 특별한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갱신에 대한 최소한
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기
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교회라는 범주
밖에 있는 청소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전제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취재 결과였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가뜩이나 고민과 갈등이 많은 청소
년들이 현재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총체적인 이해가 절실히
요청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런 이해의 바
탕에서 교회 프로그램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신앙훈련을
포함한 각종 연속훈련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청소
년층 전반에 대한 이해와 개인에 대한 이해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
을 경우, 교회 프로그램을 포함한 구조 변화 문제는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할 것임을 쉽게 예견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청소년층을 포용
하는 의식전환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하겠다.
민아의 일기
월말이면 성적표를 기대하시는 어머니
아침이면 신문을 찾아 헤메이는 아버지
작은 내게 많은 것들을 원하시는 부모님
아주 흔한 관념에 젖은 한심함을 왜 몰라
매일쓰는 가계부의 지출 잔고 만큼
우리 어머니는 나의 마음을 몰라
조간신문 경제란에 주식시세 만큼
우리 아버지는 Rock'N Roll을 몰라
옆집 성아와 나를 자꾸 비교하시는 어머니
단 한번의 실수로 나를 평가하시는 아버지
20년전 부모님들의 그런 모습을 왜 몰라
아주 흔한 관념에 젖은 한심함을 왜 몰라
매일쓰는 가계부의 지출 잔고 만큼
우리 어머니는 나의 마음을 몰라
조간신문 경제란에 주식시세 만큼
우리 아버지는 Rock'N Roll을 몰라
- 신성우 2집에서...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청소년교인의 감소현상(3) 04/11 04:48 282 line
■ 청소년 교인의 감소현상(3)
- 입시와 출세에 밀려 신앙생활은 '뒷전'
이번에는 갈수록 심각해져가는 우리 사회의 출세,성공지향적인 풍
토, 개인이기주의, 향락,쾌락 문화의 만연이 어떻게 청소년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교회 청소년의 감소 현상을 나름대
로 극복하며 착실하게 교회 교육을 이루어나가는 개교회의 예를 통해
올바른 청소년 교육을 전망해 본다.
-출세지향적 풍토 원인-
청소년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요인은 한마디로 '교회의 요구'와
'사회의 요구'가 다르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중 가장 문제
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출세,성공지향의 풍토라고 할 수 있
다.
한 생명이 태어나면 사람들은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지만, 동시에
그 생명에게는 사회 속에서 번듯한 인간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부담이
주어진다. 그 부담의 일부는 부모들에게 주어지긴 하지만 아무래도 남
들보다 뛰어난 존재로 커나가야 한다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이 부담
을 안고 자라나는 청소년들, 특히 진학을 위해 정진해야 하는 입시생
들에게 있어서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형편이다. 이들에게 누가 감히 교
회의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학생들뿐만 아니라 부모들, 더구나 믿지 않는 부모들에게 있어서 교
회에서 보내는 시간은 '쓸데없이 낭비되는 시간'에 불과하다. 그 시간
에 교회에 가지 않고 독서실이나 학원에 가는 남의 자식들이 자기 자
식을 제치고 입시와 출세의 가도를 먼저 달려갈 것 같은 불안감에 휩
싸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부모가 "교회에 가서 사랑을 배우라."
고 권하겠는가?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갈수록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적인 경향이 깊
어진다는 사실도 청소년 교인 감소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가족중
심의 사회분위기가 청소년들이 교회보다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중시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되었다.
이기주의로 인해 공동체의식이 희석되었다는 것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학생들끼리 서로 노트를 빌려주지 않는다든지 모르는 것을
서로 물어보는 관행이 사라지는 등의 세태는 이기주의의 또다른 표현
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 자식만'을 강조하는 부모들의 태도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독교인 부모들까지도 '우리 자식만
1등하고 일류대에 가면 된다'는 식의 사고에 젖어 자기 자식만을 위한
기도를 서슴지 않는다. 말하자면 부모들이 먼저 나서서 이기주의를 조
장하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들 스스로가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문화와 향락 분위기에 젖어
있다는 점은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일 것이다. '뉴키즈 온더
블럭'이나 '서태지'류의 강렬한 비트음악, 그리고 현란한 조명에 한껏
심취해 있는 그들에게 교회의 찬송가나 복음성가는 욕망의 대리 분출
을 위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예수가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개의 떡으로 수천명의 배를 채웠다는 이야기보다는 연예인 최모 군이
또다른 연예인 누구와 결혼한다는 사실이 더 관심거리가 된다. 또 주
말의 황금시간에 교회에 나가 따분한 설교를 들으며 졸고 있는 것보다
는 TV에서 나오는 쇼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거리는 것을 더
즐거워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사실은, 그들이 감각적 대중문화
에 젖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그들의 분위기를 기성세대가 이
해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한국의 교회처럼 구태의연하고 권
위주의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집단은 청소년들에게 기성세대와 같은
부류로 취급되곤 한다. 따라서 교회 역시 청소년들의 눈에는 하나의
'벽'으로 여겨질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제발로 교회에 찾아
오기를 기다린다거나 고리타분한 교회에 발붙이고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지적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청소년 문화
가 감각적이고 향락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기
성세대들에게 있다는 점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건전한 의견 제시나 참
여의 길이 봉쇄되어 있고, 게다가 청소년들은 향락적인 사회 분위기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다. 학교 주변에 유흥업소가 들어서 있는
가 하면, 지방자치단체조차 담배 자판기 등 위해시설들을 묵인하고 있
는 현실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들을 '교회의 분위기에 젖
어들게'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청소년 교인 감소로 위기를 맞고 있는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해진다. 우선 청소년들을 그들만의 문화로부터 자꾸 분
리시키려 하고 그들의 삶과 고민과는 관계없는 '복음'만을 강조, 그들
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부터 해야 할 것
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도 문제-
한국 교회 청소년 및 청년층 감소원인 중 교회 밖의 요인은 대체로
학교 중심적인 생활 패턴이 신앙과 갈등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공부해야 한다는 학생층의 부
담을 교회가 아예 도외시하거나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키는 기능을 하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교교육이 전인교육의 장(場)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사회 일각의
주장이 상당한 호소력이 있어 분위기를 바꾸고는 있지만 '대학입학이
곧 출세'라는 공식이 기성세대에게는 물론 청소년층에까지 깊숙이 뿌
리내려 의식전환을 이루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문가
들은 내다보고 있다. 더구나 사회에서도 '대학을 나와야 인정받는다'
는 식의 통념이 만연돼 있어 사회구조 자체의 체질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 청소년들은 대부분 과외학습, 즉 속셈학원 등에
등록해 학교 수업 후 따로 학습을 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집에 돌아
오면 저녁 9시에서 10시경,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을 기다리는 희망도
이제는 옛날 얘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림은
물론, 연초에 잡아놓은 교회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험기간과 교회 프로그램이 겹칠 때 교회 참석은 형
식적일 뿐 온통 생각은 교과서 내용에 몰두해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빽빽하게 마련된 교회 프로그램이 청소년의 부담을
가중시키거나 혹은 정신적인 휴식과 희망을 동시에 주는 삶의 활력소
가 교회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 학생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B교회 학생인 김모 군(중학교 3년)
의 경우, 학교 수업과 학원 수업을 동시에 하느라 매일매일 숨가쁘다
고 말하고, "교회에 나와도 요절암송과 분반공부 등으로 짜여진 행사
때문에 집에 돌아가면 피로감만 더 가중된다."고 말하고 있다. 학교수
업 방식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교회 성서 공부 방식이 정신적인 스트
레스를 가중시키는 한 예라고 하겠다. 같은 학년인 성모 군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 반응을 나타냈다.
청소년층 감소 원인이 꼭 입시 위주의 교육 체계에만 있는 것은 아
니다. 시대의 변화에 교회의 대처가 너무 미온적이었다는 교회책임론
을 드는 경우도 적지 않은 상태이다. 즉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
분위기에 학생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일주일에 고작 한두 번 모여 노
래나 부르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으로 교회의 역할을 했다고 자위한다
는 지적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굳이 교회에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오는 학생도 신앙생활을 학교에까지 끌고
나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교회끼리 빚어지는 과다경
쟁과 이에 따른 대형화 현상, 그리고 학교에서 암암리에 진행되는 공
부경쟁(이것은 학교측이나 교회측에서 선의의 경쟁이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속에서 학생들은 '사랑'과 '양보','겸손'과 같은 종교적 덕목과
갈등,긴장관계를 표출하는 것이다.
한가지 더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이성 문제다. 남녀 학생들이 자유로
이 교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흔히 종교시설을 꼽는다. 여기서 교회공
간은 대표적인 예로 줄곧 부모들의 관심과 주시를 한꺼번에 받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건전한 이성교제가 좋은 결과를 나타낼 수만 있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남녀 중 어느 한쪽이 부정 반응을 나타냈다면 교회쪽
으로서는 청소년 감소의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한
명을 두고 여러 이성이 호감을 갖게 될 경우, 이같은 결과는 더 쉽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E교회 청년 중 박모 군(23)은 동갑내기 여자
청년에게 사랑을 고백, 교제할 것을 제의했으나 여자측에서 끝내 거절
해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주변의 친구들을 통해 알아
본 결과 아무 교회에도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선언했다는 것이
다. 물론 이같은 현상이 전국교회 내에서 벌어진다고는 할 수 없겠지
만 정신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이성 문제를 교회가 소홀히 다룸으로써
민물고기를 바다에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숙하
지 못한 신앙인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끌어올리는 책임이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산업화에 따른 잦은 이동, 즉 이사로 인한 인구감소, 취업
에 따른 인구감소 등 교회가 미쳐 손쓸 수 없는 감소 요인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청소년들이 줄어드는 요인으로는 가정적인 문제도 짚고 넘
어갈 필요가 있다. 크리스찬 가정이라고 할지라도 기독교적 교육 이념
을 부모 스스로 갖고 있지 못할 때 교회 청소년들로 하여금 더 큰 상
처를 입힐 수 있다.
즉, 앞에서 지적한 교회 내외적인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근시안적 안
목으로 부모가 자녀의 교회 활동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녀가 입시경쟁 위주의 학교교육에 뒤질세라 부모는 교회교육에 관심
을 둘 여유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늘 크리스찬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서울시 송파구 G교회에 다니는 고2 B군은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
기를 원한다. 교회공동체 속에서 성경공부도 자유롭게 하고, 무엇보다
도 또래 학생들과 어울려 아무런 부담없이 지낼 수 있는 교회공간이
참 좋았다. 그래서 B군은 평일은 힘들지만 주일날이면 될 수 있는 한
교회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가졌으며, 학생회 프로그램에도 열심히 참
여했다. 그러나 B군의 어머니인 L집사는 걱정이 앞섰다. '저러다 대학
도 못가면 어쩌나.' 조바심이 난 L집사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호되게
마음을 먹기로 결심했다. L집사는 B군의 교회활동을 전면 제한하고,
학생회 공식 예배만 참석하도록 했다.
이처럼 교회 내외적인 영향이 크리스찬 부모에게도 미처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교회 활동을 막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와 더불어 불신 가정 부모들의 반기독교적 사고는 교회 청소년들이 지
속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 왔다. 청소년기의
경우, 친구 소개로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초
신자인 청소년들이 교회에 지속해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부모
의 불신앙이라는 점 때문이다.
부모의 불신앙이 요즈음 들어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핵가족
화, 가족이기주의, 가족동반 외출 등 현대적인 가족 형태가 우리 사회
에 자리잡혀 가면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관심이 고조되었다는 측면과
이와는 반대로 입시위주의 교육, 부모의 과잉보호로 청소년의 자아확
립의 의지가 약화되었다는 점이 맞물려 교회 청소년의 감소를 부채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청소년의 감소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참신한 프로그램 개발 시급-
청소년 사역의 현장에서 일하는 김낙균 전도사(영락교회)는 "교회
지도부를 비롯해 교인 전체가 교육적 사고를 지니지 않으면 이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앞으로 교인이 될 청
소년을 교회에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자체를 기독교적으로
양육하는 교육적 사고가 교회 전반적인 분위기로 정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지도부와 교인들이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
의 대교정, 권위의식의 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는 교회 내에서
기독교교육에 대한 끊임없는 재교육이 이루어짐으로써 가능하다고 김
낙균 전도사는 설명한다. 이와 더불어 목회 현장에서 청소년을 직접
지도하는 지도목사(전도사)나 교사들의 의견이 교육 정책에 반영되고,
이들의 고충을 나눌 수 있는 교육위원회의 실질적인 가동이 무엇보다
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청소년기의 성장발달에 적합한 다양하고 참신한 교회교육 프로
그램을 개발,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꾀하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
다.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한 교회는 청소년기의 발달 과정에 맞게 독
특한 신앙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교회다. 이 교회는 청소년의
성장발달과정에 따라 사춘기 초기의 급격한 신체적 변화를 경험하는
중1,2학년을 한데 묶어 학생 1부, 사춘기의 폭발기인 중3,고1 중심의
학생 2부, 사춘기의 정체기인 고2,고3 학생을 학생 3부로 나눠 학생들
의 독특한 특징에 따라 신앙교육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학생 1부는 사춘기에 잘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공
동체훈련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며, 아직까지 부모의 영향력이 큰 점을
고려, 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마련해 놓고 있다. 또한 갑작스
런 사춘기 증세로 인해 갈등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청소년상담실을 운
영, 이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는 장치도 마련해 놓고
있다.
미국 교회 청소년교육의 실패 원인이 흥미본위의 교육임을 감안, 학
생 2부에서는 성령운동, 영성훈련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
다. 그리하여 새벽기도회에도 학생 2부의 20%인 50여 명이 참석, Q.T
훈련을 받고 있으며 수련회도 3번 기획, 이중 겨울수련회에 중점을 두
어 실시한다. 그 이유는 서울YMCA 설문조사 결과 겨울방학을 지나 새
학기에 적응하지 못해 가출하는 청소년들의 비율이 높다는 통계에 근
거한 프로그램 입안이다. 학생 3부의 경우 차분한 분위기에서 자아발
견, 삶의 의미, 사회 적응 훈련에 입각해 교육하고 있다.
서울시 구로구 W교회는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돋보이는 교회
이다. 학생회 부서활동 중 20명 정도로 구성된 찬양경배팀이 예배 시
작 전 찬양 인도로 예배를 도우며, 신앙부의 경우, 지도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후원팀을 조직,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회원들의 기도
제목을 받아 중보기도를 하는 열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대중예술부를
두어 영화평, 서평, TV프로그램평을 기독교적으로 조명한 후 월간지
형식으로 결과를 발표하기도 한다.
이처럼 청소년교육은 교회 차원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 실질적인
교육위원회의 제도적 장치 마련, 청소년들의 특징에 맞는 적절한 프로
그램 개발, 교사로서의 자질 향상과 더불어 뜨거운 열정이 한데 모일
때 교회 청소년 교육의 미래는 밝다고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가장 위대하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한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바로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누가복음 9:46-48,현대인의성경)
우리는 이것을 생각은 하고나 있는 것일까............?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교회의 귀족화 현상(1) 04/14 17:35 284 line
■ 교회의 귀족화 현상(1)
- '하나님의 영광'내세우며 절제생활 외면
한국 교회의 대형화, 귀족화 현상은 교회 유지 비용의 과다지출로
인한 과소비 조장 및 교회간 빈부격차 심화 등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
키고 있다. 한국 교회 대형화, 귀족화 현상에 따른 문제점과 원인을
규명해 보고 그 대안에 대해 알아본다.
-높이 솟은 십자가 탑-
한국 교회의 십자가 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이것은
정성스럽게 교인들이 드린 헌금을 교회당 치장에 낭비하고 있음을 단
적으로 드러낸 것이며, 한국 교회가 소비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동네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십자가 탑이 높게 치솟은 교회당을 볼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의 교회당은 그 지역에서 가장 잘 지어진 건물이
며, 가장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교회가 세속으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교회들은 일주일에 몇번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수억 원 또는
수십억 원, 수백억 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초호화판으로 교회당을 건
축하고, 교회들간에 초호화판으로 건축하기 경쟁을 벌인다.
B시의 경우, D교회가 48억 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9층의 초호화
판으로 교회당을 건축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M교회, P교회 등은 더 많
은 예산을 들여 맘모스 교회당을 건축,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
다. 이들 세 교회는 직경 5백미터 내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은 더욱 매섭기만 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한 택시 기사는 "교회당을 초호화판으로 건축하는
것은 교인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교회 건축 비용
을 불우한 이웃과 선교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어떠냐?"고 반문하였
다. 그리고 "교회당을 지역 사회에 개방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
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해야 한다."고 교회의 사명을 나름
대로 강조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 교회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농촌, 어촌,
광산촌 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강원도 태백시 A교회는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인해 중,소 탄광
들의 폐광과 함께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수억 원의 예산을
들여 새 교회당을 건축, 지역주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경우는 교회들이 지역 사회와 주민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교회당을 건축하는 행위로, 목회자들의 "하나님께서 함
께 하시면 안되는 일이 없다." "교회당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가
장 아름답게 건축해야 한다."는 등의 보수적인 사고 때문에 초호화판
교회당 건축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교회 건축의 예산낭비는 건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수억
원짜리 머릿돌, 2백만 원 이상 하는 강대의자, 대리석으로 만든 강대
상 등등 도저히 일반 사람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같은 과소비적인 교회당의 치장은 교회가 세속에 편승, 물량주의에 따
르고, 성경말씀을 잘못 이해한 보수적인 신앙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
인 견해이다.
이밖에도 교회들은 '신앙'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교인들의 심
리를 이용하여 초호화판으로 '기도원'을 건축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
다. 요즘 새롭게 건축된 기도원,수양관 등은 호텔 못지않은 숙소를 갖
추고 있다.
A수양관, B수도원, C기도원, D기도원 등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휴
양소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나, 초호화판으로 건축되어 가난한
교인들이 기도하는 장소로는 알맞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이들 시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자연을 교회가 앞
장서서 파괴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교회이기주의, 목회자의 개인이기
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더욱이 이들 시설들 상당수가 정부의 법망을
피해 무허가로 시설을 갖추어, 행정당국과 자주 마찰을 빚기도 하며,
심지어는 법정까지 가서 싸움을 벌였다.
경기도 Y군의 한 직원은 "교회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창조질서를 보
전해야 할텐데,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교회당
건축, 기도원 건축 등 교회당 신개축시 교회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법
을 어기고, 교회당을 너무 호화롭게 건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교회의 이러한 호화로운 건축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부 반응을 일
으키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증명이라도 하듯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지역의 호화로운 교회들은 계속해서 교인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반면
에 저소득층들이 모여 사는 지역의 교회들은 교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
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회당을 호화롭게 건축하여 선교활동을 벌일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사고는 이제 막 신학교를 입학
한 신학생이나, 신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중,고등학교 학생에게까지 영
향을 미치고 있다.
Y교회에 다닌다고 밝힌 박모 군은 "목사님들은 교회에서 대접을 받
고, 흡족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입시시험이 어려운 일반대학보다
는 입시문이 넓은 신학교에 입학하려고 한다."고 자신이 신학교에 지
원하려는 이유를 밝혔다.
-물량주의 심각한 위기-
지난 해 감리교신학대학 이원규 교수가 서울 지역 40개 교회 교인
355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의식을 조사, 월간 <<기독교사상>>에 발표한
적이 있다. 이때 이교수가 조사한 내용 중에는 '교회의 문제'에 대해
묻는 문항이 있었다.
그런데 응답자들은 물량주의를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
적하고 있다(25.8%). 이것은 물질만능주의 풍토의 영향을 받아 물질적
인 것(예컨대 물질적 축복이나 헌금의 지나친 강조, 교회의 거대화 추
구 경향 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
이라고 그는 분석하고 있다. 특히 젊은층일수록 물량주의를 한국교회
의 병폐로 지적했다.
이러한 물량주의의 결과 교회는 점점 대형화되어 가고 또 귀족화되
어 가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 추세는 날로 늘어나는 교인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기 위한 교회가 무슨 궁전처럼 호사스럽고 '권
위'를 가져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고 있다.
초대교회는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성만찬의 예배의식이 진행되었고
개인주택이 예배 처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12세기 이후에는 교회건축 양식의 가장 세계적인 역사
성을 지닌 고딕 양식이 생성, 종교적인 신비성을 강조하고 경건의 깊
이를 특징으로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 건축 양식은 서구 건
축 양식의 교회 '고딕,로마네스크,바로크'풍 등 서구적 건축사조를 그
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 건축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건축양식이 아니라, 교회가 너
무 호화스럽고 권위적으로 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최대의 성전', '동양 최대의 성전' 혹은 '한국 최대의 성전'
이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한국 교회 목회자나 교인들은 큰 것, 호화스
런 것을 너무 좋아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 한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서 교인 1천 명 이상 출석하는
이른바 대형 교회는 전체 교회 5%에 해당하는 2천3백여 교회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처럼 대형교회가 늘어나게 된 원인은 대부분 교인들이 작은 교회
보다는 큰 교회를 선호하는 경향, 기독교인들의 신앙이기주의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대형 교회는 대부분 물량주의, 열광주의적인 비
신앙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즉 기업이나 돈많은 개인에 의해 교회가 개척되는데, 이들 교회는
대부분 처음부터 큰 교회당을 짓고 교인들을 유입하고 있다. 또 열광
주의에 의해 형성된 대형 교회는 개인 신앙, 특히 기복신앙으로 잘못
흐르는 경향이 많다.
아무튼 지금까지 나타난 대형 교회의 문제점으로는 교회의 기업화
현상, 대형 건물 건축 등으로 인한 사치,과소비 조장, 개교회 중심주
의로 전락, 목회자 자신에 대한 개인 우상화 현실, 교회재산의 증식,
교인 쟁탈전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대형 건물 건축 등으로 인한 사치,과소비 현상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
들은 결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기독교 교인들의 모임"임을 주지,
교회 건물의 대형화 추세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성장제일주의, 대형화 추세에 대한 대안으로 '작은 교회',
'열린 교회'를 표방하는 움직임이 교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정
이다.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한국 교회는 장차 '공룡'의 운명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자들의 한결같은 지적
이다. 공룡처럼 너무 커져버린 대형 교회는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경
향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교회간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며, 교회 유지
비용을 과다지출하게 되어 교회의 사명인 선교, 교육, 구제, 봉사에
인색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절제의 교회상 정립-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면 어
떻게 하셨을까?'란 물음을 매순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비단
교회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전체의 삶에서 질문되어져야 할 것으로 생
각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절제'의 삶이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갖고 싶은 것 다 갖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믿음과 절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절제란 수도원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
체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공동체가 함께 할 수 있
도록 돕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절제된 삶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을 살펴볼 때 점점 귀족
화 되어 가는 경향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전국 곳곳에 치솟고 있는
교회는 '이곳이 한국인가'란 의심마저 들 정도로 호화롭게 지어진다.
우리 나라에서 최고, 아시아에서 최고, 세계에서 최고의 교회를 짓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교회들의 모습은 이미 교회로서의 의미를 상실했다
고 볼 수 있다.
교회란 모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에클레시아' 즉, 거룩한 성도들
의 무리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쯤은 기독교인이라면 거의 모두가 알
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교회의 겉모양을 꾸미기
위해 성도들의 헌금을 헛되이 사용하는 것은 복음 전파의 본질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자아내게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은 교회라면, '과연 하나님은 이 교회를 보면서 흡족히 받으실
까?'란 묵상의 기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매년 여름, 겨울 두 차례씩 열리는 학생,청년,장년
수련회에서도 호화판 수련회라는 지적이 많다. 서울의 모교회는 청년
회 수련회 장소를 베트남으로 선정, 수련회 기금마련을 위해 분주한
것을 보았다. 목적은 베트남 선교의 현장을 둘러보며 선교의 사명을
재다짐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뜻에서다.
이러한 목적에서라면 교회의 예산을 낭비하는 전체 수련회보다는 특
별히 베트남 선교여행팀을 만들어 효과적으로 다녀오는 것이 더욱 바
람직할 것이다.
또한 주일 하루를 위해 강대상 꽃꽂이를 하는 것은 검소한 교회의
모습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순수한 마음에
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겠지만, 꽃꽂이 비용에 드는 돈을 더 가치있는
일에 사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아름다운 결과가 되리라고 생각된
다.
한 번 꽂은 후 시드는 꽃보다는 싱싱한 화분으로 교회를 장식하려는
의식있는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교회 선물비 역시 교회 예산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선물 정도는 당연히
교회 예산에서 집행되어야 할 일이지만 수련회, 여름성경학교 후 교사
위로회 등으로 흥청망청 써버리는 돈은 결국 성도들이 아낌없이 바친
헌금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 직원 이외에 교회 봉사자에게 사례금을 지급하는 일도 심
사숙고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목회자, 부교역자, 사찰, 운전기사
등은 당연히 사례금이 지급되어야겠지만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성가
대원, 교사 등에게 사례금을 지급하는 것은 '봉사'로서의 의미가 퇴색
되어가고, 교회가 점점 기업화되어가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더불어 교회 행사에 있어서도 호화판 행사를 치르는 경향이 한
국 교회 내에 편만되어 있다. 호화스럽고 그럴듯하게 치러야만 무엇인
가 '만족스러운' 느낌을 갖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의식수준이다. 일년
동안의 사업 계획을 짤 때에도 행사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도간의
교제가 어느 만큼 녹아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도 세련되고 완
벽하게 행사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인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우리가 알게 모르게 행하는 일들이 교회를 귀족화시켜 나가
고 있는 경우가 무수히 많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검소한 교회로서
나눔과 섬김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교회, 참된 교회상을 정립하기 위해 끊임없는 실천이 무엇보
다도 중요하겠다.
또한 교회 정책기구 내에서 교회의 귀족화 현상을 막기 위해 검소한
교회로서의 교회상을 실천하기 위해 실천 덕목을 정하고 이를 교인들
과 공유하는 속에서 검소한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중요하
다고 하겠다.
한국 교회가 귀족화되어 가는 모습은 이 땅의 가난한 자와 병든 자,
고통받는 자, 소외된 자들에게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상실하게 한다.
그럴 때 교회는 돈 있고 여유있는 사람들만 정신적 위로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휴양처, 안식처로 덩그러니 남아 있을 것이다.
문영훈 (bubdl1 )
《한국교회허실》교회의 귀족화 현상(2) 04/14 17:55 328 line
■ 교회의 귀족화 현상(2)
- '화려함'뒤에 감춰진 '허위의식'이 주범
한국 교회가 점점 귀족화되어 가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십자가 탑, 호화판 호텔에서의 교회 행사, 목회자를
비롯 일반 교인들의 과소비 행태 등 교회 곳곳에서 이러한 현상이 발
견된다. 목회자와 일반 교인들이 귀족화되어 가는 원인과 그 대책에
대해 알아본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기도회 및 여러 가지 형태의 모
임을 교회당 아닌 호텔 등 교회 밖에서 갖고 있어, 헌금으로 건축한
교회당을 사치품으로 만들고, '교회가 소비지향적'이라는 비판의 소리
를 듣고 있다. 이런 지도자들의 호텔 모임에 대해, 교인들은 자신들이
드린 헌금을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호화로운 호텔 모임-
지난달 22일 S단체가 주관한 독일 출신의 부흥사인 B목사의 환영예
배가 가든 호텔 무궁화홀에서 국내외 유명 부흥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드려져, 꼭 이런 모임을 교회 아닌 호텔에서 많은 경비를 들여가며 가
져야만 되느냐는(?) 지적을 받았다.
주최측은 교회당에서 모일 수도 있지만 서울의 교통 상황, 아침 식
사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호텔에서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상
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이 모임은 한 사람의 편의와 호텔
아니면 모이지 않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의식구조 때문임이 분명하
다.
지난달 15일 하얏트 호텔에서 드린 국가조찬기도회도 마찬가지이다.
호텔 이상의 예배시설을 갖춘 교회당이 서울시 안에 많이 있다. 이 기
도회가 교회당 안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1천2백만 명의 교인들이 나라
와 민족,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기도회를 가졌다면 더욱 의미가 있었
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한국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내세우고 연합사업에 앞장서 온 N단체 K
모 목사의 총무 취임 예배를 H호텔에서 드려, 많은 교인들로부터 '이
럴수가(?)'란 짤막한 말로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이 단체에는 6개 교단에서 8천여 교회가 가입하고 있다. 이들 8천여
교회당은 하나의 사치품으로 전락했으며, 주 몇 번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수억 원 또는 수백억 원의 비용을 들여 건축했다.
이런 경우는 S단체, N단체만의 경우가 아니다. H대학교 J총장은 자
신의 취임만찬회를 라마다르네상스 호텔에서 가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특히 이날 만찬은 경비가 많이 나올 것을 염려하여 초
청 대상자를 한정시켰다는 후문도 있다.
호텔 모임을 자주 갖는 A교단과 H단체, 그리고 G단체는 코리아나 호
텔, B단체와 C단체는 엠버서더 호텔, D단체와 E단체, 그리고 B단체는
하얏트 호텔, F단체와 E단체는 가든 호텔, B단체와 K단체는 힐튼 호
텔, F선교회는 서교 호텔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러한 교회 지도자들의 호텔 모임은 시골 교회 목회자들과 가난한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부담을 안겨주고, 이들의 설 자리를 잃어버리
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국 교회는 교회당이 아니면 모임을 갖지 않
았다. 이때 장소를 제공하는 교회는 이웃 교회 교인들까지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나누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
제 자매임을 확인하며 축제를 나누었다. 또 이런 모임은 축제적인 분
위기 속에서 가졌다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
농촌 교회의 한 목회자는 "말하기 좋아하는 목회자들은 호텔 모임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현실'이라고 합리화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현실'
이전에 비기독교적인, 형태"라고 호텔 모임을 꼬집고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들도 부담없이 참석할 수 있는 교회당 및 교회 시설을 이용하여
모임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호텔 모임은 평신도 단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C단체는
정기총회 및 여름수련회를 해마다 호텔에서 개최하고 있으며, 각 교단
장로회 및 평신도 단체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총회 및 수련회를 호
텔에서 개최하고, 교단의 정치적인 인사를 초청하여, 최고급으로 식사
를 대접받고 정치적 압력 단체 구실을 한다. A교단의 부총회장 후보가
장로회수련회에 참석, 2만 원짜리 뷔페로 점심식사를 대접한 것이 그
사례 중의 하나이다.
-목회자들의 승용차 경쟁-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귀족화 현상은 호텔 모임 등에서만 볼 수 있
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의 승용차와 서적, 일상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전 C시의 A교회 Y목사는 로얄살롱 승용차를 구입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S교회 P목사는 슈퍼살롱 승용차를 구입했다. Y목사의 승
용차 구입은 C시 전체에 영향을 미쳐, 자가용 구입하기 경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외부로 나타나는 과소비적인 행태는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고
있으며, '도미노 현상'처럼 이웃 교회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
다.
교회의 과소비 현상은 목회자의 서재에서 누구나 대할 수 있는 각종
서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서적들이 목회하는 데 도움이
되는 참고서적이라고 보기보다는 장식품에 불과한 서적들로 진열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볼 줄도 모르는 외국 서적까지 진열되어 있다.
경상북도 Y군의 최모 목사는 수개월 전에 성서주석을 구입하고도 자
신이 무슨 책을 구입했는지도 몰라, 이 책을 다시 구입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목회자가 책은 보지 않고 구입에 대해서만 욕
심을 낸 나머지 일어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요즈음 많은 교회들은 교회당을 새로 건축하면서 목회자의 수면실을
마련하고 있다. 이 수면실은 일류 호텔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탄
자,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콘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이 시설들
은 가난한 교인들에게 위화감을 주고 있다.
과연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선교사업을 위해서 정성스
럽게 드린 헌금을 이렇게 사용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또 호화로운 사치 생활을 하는 목회자들은 최고급 승용차를 구입하
고, 거기에다 양털 시트 커버 등 승용차 값 이상의 장식품으로 치장한
다.
서울 D교회 L목사의 부인은 목욕통에 우유를 풀어 전신을 마사지하
는가 하면, E교회의 K목사 부인은 미장원에서 살다시피 하여 교인들로
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부인의 이런 과소비로 인해 K교회 T목사
는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를 사임했다.
이밖에도 목회자들의 잦은 해외 나들이는 '과소비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이들은 해외에서 구입해온 물건들을 장식장에 진열해
놓고, 방문하는 교인들에게 쉬지 않고 자랑을 해 빈축을 사기도 한다.
오늘 한국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해외선교'
라는 명분을 내세워 해외에 자주 나간다. 이런 해외 나들이는 피선교
국에서 선교에 대한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고, 좋지 못한 선교 사례
만을 남겼다.
B모 선교 단체가 해마다 여름수련회 후 수백 명이 집단으로 떠나는
해외 단기 선교는 학생의 입장에서 많은 경비를 들여 꼭 이렇게 해야
만 하느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기복주의 신앙이 원인-
한국 교회의 귀족화 현상은 고삐를 늦출 줄 모르고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 교회의 귀족화 현상의 예는 어쩌면 교계에
널리 알려진 일부분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국 교회 곳곳에
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나 목회자를 비롯 교인들의 생활방식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크리스찬의 경건과 절제적 삶을 무시한
채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 귀족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1970년대 부
흥집회의 인기와 더불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이 현상은 오늘에 와서
는 한국 교회의 본질이 그러한 양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
다. 대형 교회, 겉치레적인 행사 위주의 프로그램 선호는 이제 한국
교회를 곳곳에서 병들게 하며, 대수술을 해야만 할 위기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귀족화로 치닫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먼저 지적되어야 할 점은 기독교의 기복주의적 신앙관에 자본주의 논
리가 편승해 만들어 놓은 신학적 오류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십일조를 잘 드리면 현세에서도 복을 받는다', '새벽기도에
열심히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 가정이 복을 받는다' 등 그리스
도인이 되면 마땅히 행해야 할 신앙생활이 현세의 복을 받는 도구로
전락된 오늘의 교회 모습에서 '복'이 곧 세속적 가치로서 평가되어 왔
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복주의적 신앙은 자본주의의 흐름에 편승,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려 하고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려 하는 자본논리가 기독
교인들 사이에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이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기복주의 신앙은 곧 '돈 있는 사람만 교회에 간
다'란 말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이같은 현상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이
들을 양육한 목회자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서가 교훈해주고
있는 크리스찬으로서의 공동체적 삶, 섬김과 나눔의 삶, 경건과 절제,
금욕의 삶을 가르치기보다는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란 단편적인 유아
기적 신앙 상태에 머물게 만든 한국 교회 목회자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가 점점 귀족화되어 가는 현상의 원인으로는 개인주의에서
비롯된 자기과시적 욕망이 한몫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종교이며, 개인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인 종교이다. 한 하나님
을 섬기는 무리는 한 장소에 모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삶을 서로 나누
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어느새 한국 교
회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만 잘 유지하면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해버리는 습성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주일날도 오전예배만 드리면 끝이 난다. 성도
와의 신실한 교제, 봉사는 오히려 귀찮은 일로 치부되어 버리며 그 중
요성을 깨닫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이처럼 개인주의적 신앙 형태는 오히려 신앙이라고 말하기조차 어려
울 정도의 비성서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신앙은 교회에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최고급의 한복을 뽐내기 위해 몇십만 원의 고가 한복을 맞춰 입고 주
일날 예배드리러 온다. 예배드리러 온다기보다는 한복 자랑을 하러 온
다. 패물상자에 고이 보관해둔 번쩍번쩍한 보석이 이날만큼은 세상빛
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른바 '선데이 베스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다.
-경건의 능력 상실-
서울시 C교회 K권사는 주일날이면 장가간 아들, 며느리, 시집간 딸
이 선물해준 반지, 목걸이, 귀걸이를 걸치고 값비싼 옷을 입고 교회에
나온다. 예배가 다 끝난 후 여러 집사님과 권사님들이 "어머! 이거 너
무 예쁘네요. 누가 해준 거예요? 권사님은 참 복도 많네요. 하나님이
권사님을 무척 사랑하시나봐."란 애교에 부러움까지 섞인 말 한마디씩
던져주고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K권사는 주일
날이면 뭔가 새롭고 고상해보이는 보석이나 옷으로 치장하기 위해 일
주일간 고심하고 있다.
비단 K권사의 예만이 아니다. 교회 내에서 교인들끼리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이 도사리고 있으며 심지어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현상
이 비일비재하다.
기복주의적 신앙 및 개인주의적 신앙과 더불어 한국 교회의 귀족화
를 부채질하는 원인이 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지 할 수 있다."란 기독교적 역사의식의 결여 또한 짚고 넘어갈 필요
가 있다. 하나님의 종을 위해서 최상의 선물을 해주는 것이야말로 하
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자가용
을 마련해주는 일 등은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 상태를 다시한번 재
고케 하는 일이라 하겠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역사의식 결여는 당장 눈앞의 이득이나 영광만
을 위해 통전적 성서해석에 따른 신앙을 거부한 채 단편적인 성서해석
에 따라 행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이 사회를 변화시킬, 교회
를 갱신할 경건의 능력은 상실하고 말았다. 교회의 종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으며, 목회자나 일반 교인들까지도 자본주의의 거
센 물줄기에 휩싸여 떠내려가고 있다.
-공동체적 교회상 정립-
이러한 한국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적 교회상을 정립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일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부정함으로 많은 이들이
이익을 얻는 '내어줌'의 신앙을 교회 내에 정착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복주의 신앙, 개인주의적 신앙을 가능하게 했
던 전통주의 신학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
질을 올바로 담을 수 있는 신학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이 진정으로 이웃을 돌아보고 공동
체를 살피는 말씀으로 선포되어질 수 있도록 목회자들의 자성 또한 중
요하다고 본다.
요즈음 교계에서는 생태학적 신학에 근거한 말씀이 전통적 신학에
근거한 말씀의 대안으로 강하게 제시되고 있다. 생태학적 신학에 근거
한 말씀 선포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생존할 수 있는
우주적인 신학에 근거한 말씀이다. 생태학적 신학에 근거한 말씀에는
결코 '나' 혼자만 잘살고 축복받는 기복주의 말씀 선포와는 다른 우주
와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삶을 강조하는 말씀 선포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교인들 스스로가 감시자가 되어 교회 행사나 교회 비품
을 구입할 때 '교회되게 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교회
예산을 지출해야 할 것이며, 지출한 예산에 대한 올바른 비판도 겸해
야 할 것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을 부정한 것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십
자가를 지고 고난을 자초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거듭나야 하
며,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자족할 줄 아는 삶을 배워야 할 것이다.
교회에 가면 슬프다.
"대학도 안 나온 주제에... 하하하......"
"가난한 주제에... 우리가 사준다 사줘... 하하하......"
"교회도 잘 안나오는 주제에 얼굴을 들고 다니냐... 하하하......"
"헌금도 잘 안내는 주제에 나같이 좀 내라... 하하하......"
"봉사도 잘 안하는 주제에... 하하하......"
"네 주제에........................................하하하......"
나는 다만 사랑을 찾고 싶었는데........
교회에 안가면 슬프다.
"교회도 안나오는 주제에 뭘 잘났다고 사냐... 하하하......"
"교회도 안가는 주제에 나하고 사귄다고... 하하하......"
"교회도 안가는 주제에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하하......"
"교회도 안가는 주제에 교회가 나쁘다고... 하하하......"
"교회도 안가는 주제에 네 자신을 찾는다고... 하하하......"
"교회도 안가는 주제에.............................하하하......"
나는 다만 사랑을 찾고 싶었는데........
"네 주제에 사랑을 찾는다고 어림없다!..........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