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천국의 차등성 - 신학논단(목회갱신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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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논단
천국의 차등성
최영백 2008-02-05 08:00:08, 조회 : 2,687
성문계시(成文啓示)로 본 구원의 최종상태에 관한 소고
1. 서론
인류의 종말에 관한 교회의 관심은 시대마다 각별했다. 그 결과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수많은 이론과 변론들을 쏟아냈다. 아울러 잘못된 깨달음이 미친 영향은 교회에 심각한 부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세대주의 시한부 종말론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惹起)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마지막 종말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까지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왜곡된 가르침이 더욱더 득세하며 진리와 교회를 혼돈케 할 것이다. 종말이 다가올수록 교회의 세속과 타락이 급전직하(急轉直下)로 떨어질 것이라는 계시록의 보도와 함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는 주님의 염려에서도 그렇다는 정황(情況)은 충분하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과 심판을 넘어 그 이후의 세계는 과연 어떠할까? 물론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입은 택한 백성들은 영광스런 승리로 귀착(歸着)될 것이다. 반대로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형벌로 갈라질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인류의 심판이 끝나고 성도들이 맞게 될 영원무궁한 최종 구원의 상태는 과연 어떤 형태일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이론들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카톨릭이 주장하는 연옥설이 있지만 개혁교회에서는 받아드리지 않은 이론이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주님 재림과 함께 대 부활사건이 있을 때까지 모든 영혼들이 수면상태에 들어갈 것으로 이해하는 영혼 수면설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개혁교회에 미친 해악은 크지 않았다. 육신의 장막을 벗은 이후 성도들의 영혼은 그 즉시로 천국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개혁교회가 흔들림 없이 일치한 견해를 밝혀왔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택한 백성들은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모두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왔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에서도 너무나도 분명한 근거를 계시하고 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당신께 맡기신 자들에 대하여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말씀했고(요 6:39), 구원과 관계하여 당신의 백성들에 대하여는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눅 21:18)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즉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모두가 부활하여 무궁한 영광의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에 일치한 견해를 갖는다. 그러므로 본 논고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된 자들이 누리게 될 최종 구원의 상태와 관련해서다.
최종 구원의 상태에 대한 개혁주의 교회와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차등적 구원의 세계로 보는 견해이다. 행위에 따라 주어지는 상이 있기에 영광이 다르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누구에게나 똑 같은 구원, 동일한 영광에 이를 것이라는 견해이다. 현대 개혁신학은 후자의 견해로 이론이 고착되어가고 있다.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최종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문제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초대교회시대 무엇보다 교회가 이해해야 할 진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이신득의 원리였다. 그 당시는 율법주의자들의 득세로 말미암아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은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면 부딪칠 돌에 부딪힐 것(롬 9:32)임을 경고한바 있고, 또한 이신득의 원리를 부정하는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며 강력히 정죄하기도 했다(갈 1:8, 9).
바울이 이처럼 크게 격노하며 정죄했던 이유는 구원을 행위로 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은혜로 주신 것을 은혜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받겠다는 것은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진리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바울은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강력히 정죄했던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양상은 최종구원의 상태와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영광이냐? 아니면 차등이냐에 대한 견해 차이는 결국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와 더불어 삶의 향방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본론
천국이 차등이냐 동등의 세계냐는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살필 것은 역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다. 여타한 신학자들의 견해와 이해가 있겠으나 그 최종 답안은 오직 성경만이 그 확실성과 결론을 확보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이 두 가지 이론과 관련하여 어떤 말씀들이 계시되고 있는지? 짧은 글로 성경의 전체 내용을 살펴볼 수는 없을 것이다. 기록된 내용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교훈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A. 동등성과 관련한 계시
천국의 동등성과 관련한 보도는 그리 많은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신·구약 성경을 통 털어도 불과 몇몇의 사례와 비유가 있음이 발견된다. 가장 비슷한 표현으로 계시된 내용은 주로 바울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교훈의 핵심은 구원이 사람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님을 진술하는 내용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 되는 것이기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차등이 없다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중반부터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죄인임을 지적했다. 그 누구도 스스로의 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방법인 이신득의 원리를 진술하는 과정의 일련기사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최종 구원의 상태를 가르치는 교훈은 아니다. 구원의 결정적인 효력이 택한 백성 모두에게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르게 됨을 보도한 내용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0-13)
여기서도 구원과 관련하여 차별이 없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는 9장에서부터 시작하여 11장까지 계속되는 구속사와 관련한 일련기사이다. 9장에서는 과거 구약시대 구속사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그러나 민족 전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도 언급했다. 구원은 오직 약속의 자녀들만이 받는 은혜의 원리를 진술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장은 자기 민족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배타성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전 세계로 확장된 새로운 시대임을 설명하는 과정이었다. 이제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어느 민족이든 가능하다는 새로운 시대를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11장에서는 당시 모든 이스라엘이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 소수의 남겨놓은 자가 있음과 함께 구속사의 중심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갈 것을 진술한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통해 구원하기로 한 수가 충만히 차게 되면 이스라엘의 회복이 있을 것이란 교훈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을 것이라는 교훈은 구속사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과거 구약시대는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차이에 있어 큰 차등이 있었지만 이제 신약시대는 전혀 차별이 없다는 시대적 변화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시 최종 구원의 상태를 교훈하는 내용은 아니다.
동일성을 의미를 함축한 교훈은 마태복음 20:8-10에서 주님께서 주신 포도원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유에는 아침에 일찍 포도원에 들어와 일을 한자와 일이 다 끝날 때쯤 들어와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고 말씀했다. 이 비유에서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저녁 늦게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의 시차를 보면 대략 9시간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주인은 같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이다. 때문에 이를 근거로 천국의 영광은 동일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비유의 서두를 ‘천국은 마치’로 시작하셨기에 이 교훈이 최종구원과 관련한 해석은 매우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 비유가 천국의 동일성을 교훈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은 비유의 최종 결론에서는 차등을 뜻하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비유의 결론적 의미는 동일함이 아니라 차등을 말씀했다. 나중 온 자가 더 많이 받았음을 시사(示唆)했기 때문이다. 한 데나리온이란 측면에서는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을 한 시간에서 계산한다면 큰 차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제일 좋다’ ‘가장 높다’ 또는 ‘먼저’라는 뜻의 기본어 prw"to"(프로토스)의 형용 대명사인 prw"toi(프로토이)다. 이는 단순히 시간성의 차원을 뜻한 표현이 아니다.
행 28:7에서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했을 때는 ‘제일 높다’는 말로 번역 되었다. 눅 15:22에서는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했을 때 ‘제일 좋은’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눅 19:47에서는 백성들의 ‘두목’으로 번역되었고, 마 21:28에서는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할 때 ‘맏아들’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먼저 된 자’란 뜻은 단순한 시간성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중 된 자’란 말에서 ‘나중’으로 번역된 e[scatoi(에스카토이)는 ‘가장 낮은’ ‘맨 끝’을 나타내는 형용사다. 고전 4:9에서는 ‘미말’이라고 번역되었고, 눅 14:9,10에서는 ‘말석’이란 말로 번역되었고, 막 9:35에서는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라고 답하셨을 때 ‘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비유의 결론은 동일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로 차등이 있다는 것이고, 그 차등은 일을 한 시간이나 업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중심으로 일을 했느냐에 따라 보상이 크게 다를 것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다는 것은 동일성과 연관하여 해석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이를 동일성의 의미로 보려 한다면 로마서 3장과 10장에서 언급된 이신득의 즉, 그리스도의 은혜로 택한 백성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구원과만 관련지을 수 있다. 포도원에 들어와 일을 한 것은 주인의 주권적 선택과 약속에 의한 것이라는 측면에서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럼에도 비유의 결론은 동일성을 말씀하지 않았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란 표현으로 같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구원의 이중적 요소를 밝혀주신 것이다.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전체적인 구원의 원리와도 합당하다. 성경은 믿음에도 두 가지 형태의 믿음을 제시한다. 하나는 근원적인 믿음으로 ejk pivstew"(에크 피스테오스)다.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뜻한다. 또 다른 믿음은 eij" pivsti"(에이스 피스티스)다. 이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믿음 즉, 궁극적인 믿음을 말한다. ‘에크 피스테오스’는 택한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는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에이스 피스티스’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 각자의 행위에 따라 자라가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신 것은 바로 이 믿음의 경우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믿음만이 두 가지가 아니다. 구원도 이중적 요소로 계시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값없이 받게 되는 구원이다. 이는 택한 백성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차등 없이 주어지는 구원이다. 이것은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9:16에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는 정 반대로 이렇게 진술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기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행위를 요구하고 있다. 즉 구원에도 두 종류로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이 각자의 행위에 따라 성장해가는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다음의 말씀에서 좀 더 명확해진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여기서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이란 표현은 이미 구원을 얻은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구원을 얻은 그들에게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도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은 이미 구원이 확정된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화목 된 자들에게 구원을 얻을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과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은 은혜로 받는 구원을 뜻한다. 의롭다하심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결정적 근거를 그리스도의 대속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등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의롭다하심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자들에게 다시 구원이 명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의 각자의 행위와 연관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상급과 관련한 차등성을 의미한다.
포도원의 비유 역시 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값없이 받은 구원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결론적 교훈은 다르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 어떤 중심으로 주님의 일에 충성을 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는 차등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포도원이 비유는 동일성과 함께 차등성을 동시에 강조한 교훈으로 보아야 한다.
행 15:11에서는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라고 진술한 내용이 있다. 이는 이방인 출신 성도들의 할례 문제를 이유로 열렸던 소위 예루살렘 공의회(Jerusalem Council)에서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구원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됨을 밝힌 내용이다. 구원의 최종상태가 동일하다는 뜻에서 했던 말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구원의 최종상태와 관련하여 동일성의 개념으로서 보도된 교훈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B. 차등성과 관련된 계시
구원의 최종상태가 차등적일 것이라는 교훈은 성경에 수도 없이 많이 나열되어 있다. 그것을 종별 적으로 구분해 보면 크게 네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1) 신분의 차등
천국에 이르게 되면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일한 신분일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들도 맏아들과 말째가 있듯이 그 신분에 있어서 차등이 있을 것을 의미한 내용들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여기서 ‘지극히 작다’란 표현은 ‘가장 작은’ ‘가장 사소한’ ‘가장 천한’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ejlavcisto"(엘라키스토스)다. 이는 ‘작다’ ‘어리다’ ‘짧다’라는 기본어 m i k r o v"(미크로스)와 동의어다. 즉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행치 않으면 천국에서는 가장 작고 천한 신분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크다’라는 말은 ‘매우 많은’ ‘능력이 탁월한’ ‘가장 높은’ ‘가장 위대한’ ‘웅대한’ ‘당당한’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 형용사 mevga"(메가스)다. 곧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행하는 사람은 그에 비례하여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본문의 문맥에서 드러나는 차등성은 신분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 다른 것보다 신분고하(身分高下)의 의미가 강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 20장에서의 포도원비유의 결론에서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란 의미 역시 신분의 차이가 선명하다.
이러한 의미는 주님의 직접적인 교훈에서도 드러난다. 제자들 가운데 천국에서는 과연 누가 클 것인가에 대한 쟁론이 일어났을 때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천국은 다 같지 않다는 것이다.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교훈도 주셨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8-11)
본문의 잔치 비유는 분명 이 세상의 원리를 말씀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최종적 상태를 비유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세계는 자기를 높이는 자가 도리어 낮아지는 세상이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역으로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역시 신분과 관련한 높낮이의 의미가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천국의 차등과 관련한 교훈에는 이처럼 신분의 차등을 뜻하는 말씀들이 중복되어 계시되고 있다.
2) 소유의 차등
세상은 신분의 차등이 극명하다. 소유의 차등은 더욱더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에서도 소유의 차등이 있을 것을 뜻하는 말씀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이는 연보에 대한 교훈을 하면서 비유된 내용이다. 그렇다하여 이것이 헌금을 많이 하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것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행한 것은 결국 천국에서 거둘 것이란 사실을 씨 뿌리는 비유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이런 말씀도 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 15:42, 43)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교훈에서 심는 원리를 비유로 대입시키고 있다. 이 땅에서 심어 영생의 부활로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천국은 차등의 세계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은 누구나 동일하게 심을 수는 없는 이치를 전제(前提)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적 개념의 차등과 관련된 성구(聖句)는 많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것은 그곳에 보물을 쌓은 것만큼 그 나라에서 자기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만약 천국이 차등이 없고 동일한 신분, 동일한 소유라면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은 전혀 의미가 없는 교훈일 것이다. 또한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한다는 것 역시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쌓든 안 쌓든 그 결과는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이런 교훈을 주시기도 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주님을 위해 희생을 당한 자는 영생을 상속하되 희생당한 분량과 비례하여 여러 배를 받게 된다는 언약이다. 역시 이 말씀도 최종적 구원의 세계가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도 개념상 소유에 대한 차등적 의미를 뚜렷하게 부각시켜주는 특징을 갖는다.
3) 영광의 차등이다.
신분과 소유의 차등과 같이 영광의 차등도 천차만별일 것이란 의미도 여러 교훈들에서 발견된다. 이문제와 관련해서는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한바 있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바울은 부활에 대한 교훈에서 땅에 속한 형체와 하늘에 속한 형체가 다를 것임을 진술하는 가운데 각자 나타날 영광 또한 다를 것임을 보도한다. 챨스 핫지는 ‘어떤 부활한 신자가 다른 부활한 시자가 다를 것이라는 뜻을 사도는 의미하고 있지 않다.’ 고 주석했다. 대다수의 주석들도 같은 견해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 해석해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각기 다른 영광의 형체가 어떻게 심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행위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42, 43절에서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으로 심을 것을 말씀했다. 그에 따라 썩지 않을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부활의 모습 즉, 부활의 영광은 어떻게 심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시사(示唆)함이 강하다.
이것이 단순히 육신의 모습과 부활의 형체가 다를 것임을 교훈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이유는 심는 행위를 전제(前提)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를 전제로 한 것을 영광의 차등이 아닌 영생의 부활로 이해하게 되면 부활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영생의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진 은혜의 범위 안에 속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별과별의 영광이 다른 것처럼 부활의 영광이 다를 것임을 언급하면서 그 근거를 심는 원리 즉, 성도들의 행위를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이는 믿음생활의 과정 즉, 희생의 분량에 따라 달라질 영광으로 해석되어져야 합당하다. 부활의 영광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다음의 말씀에서 좀 더 선명해 진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히 11:35)
부활을 말하면서 더 좋은 부활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더 좋은’이란 원어는 ‘귀족’이란 의미와 함께 ‘가장 좋은’ 또는 ‘더 유용하고 우수한’이란 비교급 형용사k r eivttono"(크레잇토노스)다. 즉 부활은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더 좋은 부활을 소원했기에 돌에 맞아죽고, 톱에 켜 죽임을 당하는 악형을 받으면서도 구차히 그러한 죽음을 면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부활시의 영광과 관련해서는 주님의 교훈에서도 나타난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 14:12-14)
여기서 ‘갚음을 받겠음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에서는 ‘보답한다’는 뜻으로, 반대로 나쁜 의미에서는 ‘벌과 복수’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ajntapodivdwmi(안타포디도미)의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형의 ajntapodoqhvsetai(앝타포디데세타이)다. 즉 행한 대로 보상과 보응이 뒤 따를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것이 부활시에 주어질 보상과 보응임을 말씀했다. 그러므로 부활이후 최종 구원의 상태는 같은 영광일 수 없다. 진리를 깨닫고 순종한 분량과 주님을 위한 성도들의 섬김과 희생이 각기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광의 차등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측면의 교훈들이 성경에 가득 차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썩지 않을 면류관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그 면류관을 얻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도들 모두가 원해야 할 믿음의 푯대임을 바로 앞 절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달음질한다 해서 다 상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일등을 한 사람만이 면류관을 얻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이러한 비유는 행위에 따라 주어질 영광이 있기에 주시는 교훈임이 분명하다. 특히 ‘면류관’을 뜻하는 기본어 Stevfano"(스텝하노스)는 ‘화관’이나 ‘왕관’을 의미하는 명사로서 영광과 직결된다. 즉 구원의 세계는 일률적((一律的)으로 같은 영광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달음질을 했느냐에 따라 면류관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후 최종적 심판에 대한 기사에서도 나타난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생명책에 죽은 자들의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었다는 것이고, 그 기록된 행위를 따라 심판이 있게 될 것이라는 보도이다. 성경은 천국에 이르는 구원에 대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거저 받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심판이 행위에 따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성경이 행위를 요구할 때는 언제나 상급과 연관되어 있음에서 보면 이 역시 최종 구원의 세계가 다 같을 수 없음을 함축한다. 행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4) 누림의 차등이다.
천국은 본래 누림의 세계이다. 때문에 창세전에 구원의 목적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목적도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고 말씀했다. 계 22:5에서는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라고 말씀한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택하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다 왕의 신분으로서 그 세계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 누림에는 역시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신분의 높낮이와 관련한 말씀들을 살펴보았다. 소유의 차등에 관한 말씀도 찾아보았다. 아울러 영광에도 차등이 있음도 살펴보았다. 때문에 누림의 문제도 역시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눅19:17-19)
이는 달란트의 비유와 비슷한 개념에서 주신 교훈이다. 각기 충성의 분량에 따라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와 다섯 고을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질 것이라고 진술되고 있다. 그리고 한 므나를 받았던 사람은 한 고을도 다스릴 수 없음을 말씀한다.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와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 그리고 한 고을도 다스릴 수 없는 경우의 차이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림의 차이 역시 당연할 수밖에 없다. 만약 모두가 동일한 영광, 동일한 권세, 동일한 누림이라면 이러한 말씀들은 공연히 오해만을 불러올 의미 없는 말씀을 하신 것이 된다. 구원은 100%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이 동일하다면 열 므나를 남기든, 아니면 하나도 남기지 못하든 결과가 동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차등성을 배제(排除)하고는 이러한 말씀들의 올바른 해석은 불가능하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다양한 표현의 차등을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차등적 교훈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천국이 차등이 없다는 주장을 하려 한다면 이러한 말씀들은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의미와 원인을 모두 밝혀야 한다. 왜 값없이 주신 은혜의 구원을 말씀하시고는 다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행위를 요구하시는지? 동일한 천국인데 무엇 때문에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것인지, 똑 같은 영광을 주실 것이면서 왜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고 말씀하셨는지 명명백백하게 성경을 근거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물론 신분이나 소유, 그리고 영광과 누림의 차등이 실제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 천상의 세계, 최종구원의 세계가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올지 현재 육신을 갖고 있는 지상의 성도들로서는 가늠하기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을 직접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 세계를 우리들의 언어로 표현한다고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그 세계는 형체나 형상에 있어서 이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3층천에 올라갔음을 밝히고는 ‘가히 사람이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언급한바 있다(고후 12:4).
입신을 통해 천국을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여러 증언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자 성경의 보증이 없기 때문에 개혁신학에서 받아드릴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많은 말씀들을 제외하고도 성도들의 행위와 관련하여 구원의 최종 상태와 관련하여 차등이 있을 것이란 교훈은 다양하게 발견된다. 그러므로 어떤 면으로든 성도들의 행위에 따라 최종구원의 상태가 다를 것만은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신학에서 천국의 차등성이나 상급을 주장하는 이론에 대하여 우려하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우선 상급이 있음을 믿게 되면 욕심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신앙생활이 더 많은 상급을 받기를 원하는 욕심으로 점철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염려는 기우(杞憂)다. 왜냐하면 천국의 상급은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로 자기 욕심을 포기하지 않고는 바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히브리 기자는 모세가 공주의 아들이란 이름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삶을 자처했던 이유를 밝혀준다. 모세가 그리할 수 있었던 근거에 대하여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보도한다. 여기서 모세가 상을 바라고 취한 행동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가치관의 변화다. 이에 대하여 26절에서 ‘애굽의 모든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 받는 것을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한다. 하늘의 상을 바란 사람에게서 나타난 특징이 세상의 부귀 권세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능욕을 더 큰 가치로 여겼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천국의 상의 가치가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것임을 깨달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마치 밭에서 일을 하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음같이 천국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은 온 세상이 다 포기 된다 하더라도 그 보다 주님을 위한 능욕을 더 큰 가치임을 아는 것이다.
또 하나 상을 바란 사람에게서 나타난 특징은 추구하는 삶의 변화이다. 삶 자체가 욕심이 아니라 오히려 욕심을 다 던져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역현상이 나타났음을 밝힌다. 모세는 상을 바랐기에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란 이름을 버리고 도리어 하나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 했다고 보도한다. 즉 하늘의 상을 바라본 모세에게서 나타난 행위는 세상에서 낙을 누리고자 함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난을 선택했음을 말한다.
하늘의 상을 바라는 사람은 절대 자기를 위한 욕심을 가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도리어 주님을 위해 세상을 버리고 희생의 삶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는 진술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천국의 가치가 그만큼 세상과 비교할 때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실제 성경이 천국의 상급과 관련한 모든 교훈에서 자기 세상의 포기와 희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면류관에 대해서는 죽도록 충성(계 2:10)하는 희생을 요구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필히 함께 받아야 함을 말씀한다(롬 8:17). 주님은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와 비례하여 하늘의 상이 크다는 것을 말씀하셨다(마 5:12). 마 5:46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행위로는 상이 없다는 의미에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하셨다. 마 6:16에서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면 천국에서는 도리어 상이 없을 것임을 경고하기도 하셨다. 그러므로 구제하는 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을 권고 하셨다. 그러니까 천국의 상급은 우리가 생각하는 욕심으로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인 것이다.
특히 이 문제를 욕심으로 치부해선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천국의 상은 하나님의 명하심이기 때문이다. 히 11:6에서‘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믿고 바랄 것을 명했음에도 그것을 욕심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말씀을 부정하는 치명적인 우(愚)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우려는 하늘의 상을 바라게 되면 자기 공적에 치우치게 되고 은혜보다 행위를 강조하여 잘못된 신앙생활을 조장(助長)한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혹자는 상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신 알미니안주의’로 심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기우에 불과하다.
자기 공적을 나타내고 자기 행위를 자랑할 수 없는 이유는 먼저 받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거저주신 구원의 은혜 하나만을 가지고도 우리는 오직 주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함이 마땅하다. 아울러 우리가 평생을 주님을 위해 산다 하더라도 받은 은혜의 분량에 비하면 억만 분의 일의 분량도 갚을 수 없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하고 충성한 분량만큼 상을 주실 것임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상급에 대한 부분은 더욱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대속의 은혜만도 갚을 길이 없는데 거기에다 상까지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속의 은혜를 초월해서 상을 주신다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절대 자기 공적이나 자기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 엄격히 구분해 보면 실제 상 역시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범주(範疇)이지 사람의 행위의 값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희생과 충성도 실제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희생과 충성의 양이 크면 클수록 더더욱 자신의 행위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며 감격하게 되어 있다. 바울이 그렇게 주님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면서도 더 낮아질 수 있었고 더 하나님께 감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내어 놓으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비유이지 실제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는데 보따리 내어 놓으라고 채근(採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물에서 구해주고, 보따리까지 건져주고, 거기에다 젖은 옷까지 새 옷으로 갈아 입혀 주었다면 더더욱 백배의 사례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대속해 주셨음을 말씀한다. 거기에다 우리의 자그마한 냉수 한 그릇의 행위에도 상을 주실 것임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에 빠진 사람 보따리 챙겨주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놀라운 은혜이다. 결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상을 바라게 되면 자기 공로와 자기 의를 나타나게 될 것이란 생각은 그 역시 기우에 불과하다.
차등이 있다면 천국에서도 시기와 질투가 생겨질 것이란 지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현재의 인간의 모습에서 판단하는 잘못된 염려이다. 그 세상은 죄가 없기에 차등으로 인한 불만족은 전혀 있을 수 없다. 자신이 받은 분량에 100%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위에 비하면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분량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공의는 차등의 이유에 대하여 충분히 충족시켜줄 것이다. 거지 나사로와 달리 음부에 떨어진 부자가 그 현실을 마땅히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듯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불만이란 있을 수가 없다. 아울러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죄의 속성을 갖고 있는 세상에서도 형제가 잘되면 함께 기뻐하고 더불어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의 예다. 하물며 죄의 성향이 전혀 없는 그곳에서 더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로서 시기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부분 역시 천국을 현세적 관점에서 판단한 잘못된 염려다.
3. 결론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강력히 정죄했다. 거기서 바울이 지적하는 다른복음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부분에 대하여 핸드릭슨은 이렇게 주해를 했다.
[이러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바울의 비난이나 책망은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유대주의 자들이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조건으로 믿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그들과 바울과의 유일한 차이점은 유대주의자가 기본적 요구인 믿음 위에 몇 가지 모세의 규례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덧 붙였다는 것 밖에 않은가”]
핸드릭슨의 지적과 같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바울이 정죄했던 다른 복음과의 차이는 그리 큰 차이가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인정하면서도 구원을 위해서는 몇 가지 조항의 율법을 지켜야 함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토록 격분하여 정죄한 이유는 그들이 주장한 율법의 행위가 결국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구원은 100%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는 것인데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은혜를 삭감하고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역시 상급의 문제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먼저는 성도들에게 자칫 믿음의 향방을 잃게 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말을 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고전 9:25, 26)
썩지 않을 면류관, 바울은 바로 하늘의 상급을 바라고 달음질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것은 향방 없는 달음질과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달리기 선수가 목적지와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는가? 또 격투기 선수가 허공을 향해서 주먹을 날린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는가? 하나님은 충성한 자들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향방을 잘못 택할 여지가 있음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이 문제가 심히 중요한 것은 천국이 동일하다고 생각할 때 이어질 다음의 문제이다. 성경에는 성도들의 행위와 관련하여 약속된 많은 은혜와 축복들이 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여기서의 ‘상’의 헬라어는 ‘보상’이나 ‘급료’ 또는 ‘삯’을 뜻하는 명사 misqov"(미스도스)의 목적격 misqo;n(미스돈)이다. 지극히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필시 하나님의 약속된 보상이 있다는 것이다.
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 10:41)’라고 말씀했다. 고전 3:8에서는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라고 했고, 13, 14절에서는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히 10:34, 35에서는 성도들에게 영구한 상급이 있음을 말씀하면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천국이 동등하다면 이와 같은 모든 약속들은 세상에서 주실 축복과 연관하여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경 성경은 행위에 따른 보상을 수도 없이 말씀하고 있는데 천국이 동일한 구원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온통 세상 것으로 치우쳐 믿음의 목적을 세상을 얻는 수단으로 알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냐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천국에 상이 없다는 것 자체보다 믿음의 목적이 세상 것으로 크게 왜곡될 우려가 심대(甚大)하고, 포기해야할 세상인데 오히려 육신의 것을 잔뜩 욕심나게 해서 세상 축복만을 추구하는 심각한 굴절현상으로 나타날 소지(素地)가 다분하다.
또 하나 우려되는 결정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삭감하고 부정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심을 약속하고 있는데 상이 없다고 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삭감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되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유대인 교사들에 대하여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정죄했던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부정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상을 주신다는 은혜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은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상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데 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삭제하고 부정하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신학이 천국의 차등성을 염려하는 것은 성경을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원리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성경에서 동등성과 관련한 교훈을 찾을 수 없고, 아울러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개혁주의’나 ‘개혁신학’이란 개혁자들이 그들 시대에 행했던 제도와 관습을 쫓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시 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을 앵무새처럼 되 뇌이며 답습해 가는 것을 개혁신학이라 말할 수는 없다. 개혁자들이 하늘의 상에 대해 의도적으로 언급을 자제한 것은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공로신학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은 수많은 날과 제도들을 만들어놓고 행위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성도들을 옥죄었다. 심지어 연옥설과 면제증을 만들어 죽은 자들을 위한 예배와 공적까지 요구했다. 그러한 타락한 시대에서 교회를 개혁해 냄에 있어서 개혁자들이 천국의 상급을 주장할만한 여유를 갖지 못할 여지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은혜의 구원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도 바로 그 시대의 타락한 공로신학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혁주의와 개혁신학에는 ‘오직 성경’이란 대전제(大前提)가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아울러 모든 신학은 그것이 목적일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을 밝히는 하나의 수단이며 도구일 뿐이다.
실제 개혁자들은 성경이 명백하게 밝히거나 거기에서 추론되는 진리가 아닌 것에는 그 어떤 것에도 교회가 거기에 매이기를 원치 않았다. 때문에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이 교회에 지운 멍에들을 단호하게 거부했고, 오직 기록된 성경의 권위에만 그들의 양심이 매이기를 소원했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 진정한 ‘개혁주의’ ‘개혁신학’이란 개혁자들의 신학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근거로 끊임없이 자아(自我)와 교회를 개혁함으로 비로소 지켜질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필자는 어떤 신학적 저서나 논문이든 가장 많이 인용(引用)되고 인유(引喩)되어야 할 각주(脚註)역시 성경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신학의 궁극적 답은 오직 성경만이 그 정답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