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고신의 분열 배경 세미나 - 총회6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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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선이 고신 태동의 주역인가?
고신 60회 총회기념 역사포럼에서 송현강 교수 논찬에서 반격
코닷
▲ 포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참석자들의 열기가 한층 뜨거웠다.
고려신학대학원(원장 한정건 박사)이 고신 60회 총회기념으로 주최한 ‘한국 장로교회 분열과 일치’라는 주제로 개최한 역사포럼은 8명의 쟁쟁한 교수들이 열띤 주제발표와 논찬을 풀어놓아 시종일관 분위기를 달구었다.
특히 고려신학대학원 양낙흥 교수가 박형룡의 고신 이탈에 대해 발제하면서 한부선의 역할이 있었음을 발표하자 논찬에 나선 한남대 인돈학술원 송현강 교수가 “양낙흥 교수의 발제문은 마치 한부선 선교사가 고신의 장래를 혼자 결정한 것 같기도 하다”고 반박하고 나서 두 학자간의 양보 없는 약간의 실랑이가 계속돼 폭소와 박수를 이끌어냈다.
고신신학의 두 교수, 이상규 교수와 양낙흥 교수는 장로교 분열의 첫 주자인 고신의 분열에 대해 쫓겨났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분리주의자가 아님을 강조했는데 이상규 교수는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 그리고 총회간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방향으로, 양낙흥 교수는 한상동과 박형룡, 그리고 한부선과 메첸 사이의 관계에서 분열의 원인을 찾으려 하였다.
해방 후의 상황과 고신 교회의 형성
▲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교수
첫 발표자로 나선 고신대학교의 이상규 교수는 “한국장로교 36회 총회를 앞두고 김길창을 중심으로 한 경남노회 1/3에 해당하는 목사 장로들이 별도의 노회를 조직하였으나 경남(법통)노회의 진정서로 인해 1950년 4월에 열린 36회 총회가 9월로 연기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6.25 동란으로 속회하지 못하였고 51년 5월에서야 부산중앙교회당에서 속회하게 되었는데 이 총회에서 경남노회는 회원권이 없었고 입장도 거부되었다. 그런 가운데 별 위원회가 조직한 별노회가 받아졌고 김길창을 위시한 총대들이 총회에 들어가게 되어 경남 (법통)노회는 총회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경남(법통)노회는 다음 회기인 37회 총회(1952년 6월)까지 관계 정상화를 시도했지만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 단체와 총회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재언명함으로서 경남(법통)노회는 완전히 축출 당했다. 당시 경남노회는 344개 교회가 있었는데 별노회에는 58개 교회가 그 외 85%의 교회가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했다. 그리하여 1952년 9월에 진주성남교회당에서 총노회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고신총회가 탄생하는 역사인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 김승태 목사
세움교회 담임
장신대 강사
이상규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신사참배를 했던 김길창을 위시한 목사들의 한상동에 대한 거부감, 고려신학교에 대한 총회의 거부감 등이 한상동 목사를 주축으로 하는 경남(법통)노회를 쫓아내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논찬에 나선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김승태 목사는 “김길창의 사조 경남노회(별노회)가 조직되지 않았으면 고신이 분립되지 않았을까? 분립과정이 더 복잡하고 더 시간을 끌었겠지만 결국은 고려신학교를 포기하지 않는 한 분립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조선신학교를 포기하지 않아 분립된 기장의 경우가 입증하고 있다.”라고 말해 신학교가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고 반박했다.
한국 장로교 분열과정을 통해 조명하는 화해와 신학적 방향
▲ 안인섭 교수
총신대학교 교수
한국칼빈학회회장
기독교통일학회총무
두 번째 발표자인 안인섭 교수는 “고려파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다 쫓겨나 결국 분열을 하고 말았지만 교회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교회의 연합을 희생시켜왔던 교회론은 칼빈의 교회론에 부합하지 않다.”고 하면서 “고려파의 분열은 한국교회가 과거 역사에 대해서 명확한 진실을 밝혀 회개한 후에 역사와 화해하는 작업이 미흡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칼빈의 교회론을 따라 근본적인 신앙고백에 차이가 없는 그룹끼리는 교회의 하나 됨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 장동민 교수
백석대학교 교수
이에 대해 논찬에 나선 백석대학교 장동민 교수는 “현재 당면한 문재해결을 위해 어거스틴과 칼빈에게 호소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1,600년 전과 500년 전의 어거스틴과 킬빈의 교회론이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 장로교회의 상황에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 되어야 한다든지 같은 신학이라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영속적인 진리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덧붙여야 한다고 믿는다. 1600년 전 어거스틴이 교회의 연합을 강조하였지만 로마 가톨릭의 교리적 이탈이라는 현실에 접하게 된 칼빈은 분리를 택하였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연합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바라기 보다는 연대부터 시작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화해, 화해의 역사: 한국장로교역사의 새로운 이해
▲ 안교성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세 번째 발표자인 장로회신학대학교 안교성 교수는 “각 교단의 분열담론 자체보다는 분열담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 분열담론은 긍정적인지를 살펴보겠다. 분열담론의 핵심을 살펴보면 고신은 교회의 치리에 관한 문제이고, 기장측은 신학, 특히 성서론에 관한 문제이고, 합동측과 통합측은 에큐메니칼 운동 및 교회의 중심인물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면서 고신측의 신앙적 차원(출옥성도의 신앙의 절개), 목회적 차원(교회의 순수성), 교회정치적 차원(교회재건의 주체)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던지면서 신학적 평가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 박응규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이에 대해 논찬에 나선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박응규 교수는 “한국장로교회의 분열담론의 핵심적인 내용으로서 교회의 치리에 관한 문제, 성서론, 에큐메니칼 운동 및 교회의 중심인물에 관한 문제 등을 개별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전체를 통괄하는 주제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또한 분열의 요인을 신학적인 이유 외에도 교권과의 연관성이 있는데, 그래서 더욱 교회론적 정립이 시급하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미국 장로교회 갈등 구도가 한국 장로교회에 미친 영향
▲ 양낙흥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고려신학대학원의 양낙흥 교수는 “박형룡의 고신 이탈은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부정하는데 큰 빌미를 제공하였다. 교장으로 부임한지 몇 달 만에 자신도 고려신학교에도 큰 상처를 줄 것이라는 예상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왜 이탈을 하였을까? 세 가지 대답들이 있는데, 김양선, 김요나, 정규오 등은 한상동과 박형룡 사이의 신앙노선의 차이라고 했고, 허순길은 신학교 운영의 구체적 방법의 견해차이라고 했고, 허순길, 남영환의 신사참배 범과자들에 대한 권징문제에 대한 이견이라고 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양선의 진술은 조금 다르다. 1947년 12월 중순에 열린 경남노회가 폐회한 후 얼마동안 박형룡과 한상동 사이에 별다른 의견 충돌이 없었지만 1948년 봄이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양선은 그 이유를 고려신학교측의 돌변한 태도 때문이었다고 쓰고 있다. 김양선의 관측에 의하면 한상동이 태도를 바꾼 배경에는 한부선을 비롯한 메첸파 선교사들의 영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박형룡에게 신앙노선의 전향을 요구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현 총회를 떠나 신 총회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그를 만난 보수적 목사들의 총회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 신학교를 설립하자는 쪽에 마음을 둔 박형룡은 과감히 고려신학교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결국 이런 사정으로 이탈한 박형룡의 행동은 김길창을 위시한 반대파들의 고려신학교 축출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 송현강 교수
인돈학술원 전임연구원
이에 대해 논찬을 한 한남대 인돈학술원 송현강 교수는 고신측의 분열에 한부선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한부선 독자적인 행동 보다는 OPC(독립선교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을 것으로 본다면 그것이 OPC의 입장인지 한부선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주한북장로교 선교부를 염두에 둔 OPC의 對한국선교전략 같은 것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발표자는 자료의 빈곤으로 유추적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관적 판단이 과도하게 개입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사가들은 고신을 분열의 첫주자라고 진단하는데 그렇다면 연합과 일치에서도 첫 주자가 되는 것도 의미가 있는 듯 하여 이런 포럼을 개최하여 작은 힘이라도 되고자 한다. 계속하여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는 오후 좌장 신원하 교수의 마무리는 의미있게 다가왔다. 발표자들과 논평의 발제문들이 도착하는 데로 논문방에 게재할 것이다.
이모저모
▲ 마지막 시간까지 남은 발표참가자들의 단체사진
▲ 오전좌장 양낙흥 교수 ▲ 오후좌장 신원하 교수 ▲ 질문 이성구 목사
▲ 질의응답 이상규, 김승태 교수
▲ 질의응답 안인섭, 장동민 교수
▲ 질의응답 안교성, 박응규 교수
▲ 질의응답 양낙흥, 송현강 교수
2010년 04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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