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여전도회 3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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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고신 여전도회 30년사


(표지)

백합동산 30년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3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출판정보)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30년사 편찬위원
위원장 조금주
위원 최성순, 박용주, 강순자, 오혜순, 박금순, 박경자, 김옥림, 안복희
간사 안복희 이영옥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30년사(1972-2001)
발행일 2002. 9. 20발행
발행인 조금주
편저자 이중구
엮은곳 총회출판국
발행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전국여전도회연합회
주소 경남 창녕군 장마면 서장가리846번지
전화 055)521-3200, 3201
FAX 055)521-6066
정가 15,000원
*판권소유-전국여전도회연합회









(차례)


3발간사-회장 조금주
5축사-교단총회 회장 박종수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한진환
고신대 총장 황창기
10축시-항도교회 목사 백성호
13화보
37전국여전도회연합회30년사
저자서문
39목차
제1부
전국여전도히연합회창립배경
45 I.한국 선교와 여성의 역할
45 1.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의 한국여성
47 2.초기 한국 선교의 특성
50 3.초기선교와 여성의 역할
54 II.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고신총회의 출범
54 1.한국장로교회의 부흥과 일제의 박해
55 2.한국교회 재건과 고려신학교 설립
56 3.고신 교단의 출범
57 4.고신 교단의 발전과 여성의 역할
61 III.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창립
61 1.창립의 여건
63 2.창립의 의의
제2부
정기총회중심의 30년의 발자취
68 I.초창기(1971~1976):창립부터 제6회 총회까지
80 II.성장기(1977~1981):제7회부터 제11회 총회까지
90 III.발전기(1982~1991):제12회부터 제21회 총회까지
112 IV.확장기(1992~1999):제22회부터 29회 총회까지
134 V.전망기(2000~2001):제30회부터 31회 총회까지
제3부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활동인물탐구
144 I.순교 정신 실천 인물 열전
1.조수옥 2.박인순3.임두연
158 II.진리전파의 여성부흥사 열전
1.박복달 2.우태숙 3.명향식 4.표자현
171 III.진리운동 계승 인물 열전
1.주경순 2.신정순 3.김계초 4.이점숙 5.차은희
191 IV.개혁주의 실천 인물 열전
1.최성순 2.박용주 3.강순자 4.오혜순 5.조금주
제4부
회고와 전망
211 I. 지나간 시대에 대한 회고
1.말씀중심 2.선교중심 3.봉사중심
215 II.다가올 시대에 대한 전망
1.순순 신앙 전통 계승 2.전국적 교세의 균형 발전
3.통일시대의 북한선교 4.기독교 문화 창달
219 참고문헌

부록
I.제규정
223 1.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회칙
226 2.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은급규정
II.각종명단
228 1.역대 총회 및 역대 임원 일람
232 2.역대 부서 조직 및 각연합회 현황
307 3.역대 대회 수상자 명단
321 4.정기 총회별 평생회원증 수여자 명단
III.각종 현황 및 보고
327 1.연도별 주요사업과 경비 지출 현황
332 2.연도별 선교비 현황
333 3.선교현황보고-교단 총회 선교부 이헌철 목사
347 4.회관 및 안나의 집 건립 경과보고-증경회장 강순자
349 5.회관과 안나의 집 운영 현황-관장 최성순
356 6. 30년사 발간 경위보고-교육부장 안복희
집필후기
잊지 못할 일들-저자 이중구
저자소개














(제1부)

전국 여전도회연합회 창립 배경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역사가 무엇인가의 문제는 역사가들의 시각에 따라 각기 말하여 지고 있지만, 그중의 한 관점으로서 흔히 말하기를“역사는살아있는과거”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 중에서 현대를 형성하는데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준 사건을 찾아 기술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가 1971년에 창립되었지만, 그 이전의 한국 역사와 한국 기독교의 여성 운동과 무관한 것이 아니고 직접 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그것은 고신 교단이 1952년에 새로이 출범하였으나 한국 개신교 역사의 참 전통을 그대로 이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의 여성상을 바탕으로 하여 그 이후의 여성상이 형성되었음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여성상을 살피는 것은 현대교회에서의 여성들의 연합운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에 복음이 전래된 이래 여성들이 교회 부흥에 크게 기여해 온 사실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 봉건사회에서 억압되었던 여성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여성들을 통하여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열심을 가지고 일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통해서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I 한국 선교와 여성의 역할

1.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의 한국 여성

오늘날의 한국 여성들은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오면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었지만 대체로 집안에서 자녀를 낳아 기르고 가르치며 살림을 꾸려 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삼국시대와 신라통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가부장적인 사상의 고정된 틀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옴으로써 여성해방의 새로운 시대를 맞아 남녀가 평등하다는 지위를 얻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놀라우신 은총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왔지만 오랜 인습에 찌든 여성들의 생활이 한꺼번에 변화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국 여전도회 30년의 역사를 살핌에 있어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의 여성상의 변천에 대하여 그 대강을 살펴본다.

①삼국시대
고대의 가족제도를 보면 모계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으며 혼인제도에 있어서도 남녀동등의 권리가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고구려의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에서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평강공주는 바보 온달을 만나 남편을 삼고 교화시켜 명장이 되게 했으며, 낙랑공주는 사랑을 위하여 자명고를 찢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고구려로 하여금 승리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등의 여왕이 등극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화랑제도의 초기에는 여성이 그 지도자였음을 역사에서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의 여성들은 남성 못지 않게 큰 일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②고려시대
고려시대는 대체로 남녀의 사교가 자유로웠으며 결혼도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맺어졌다. 그리고 여성생활 자체가 매우 자유분방하였다. 그런데 고려중기 이후 외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국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공녀제도가 생기면서 처녀들이 골방에 숨어산다든가 조혼을 하여 이를 피해보고자 하는데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약화되기 시작 했다. 이러한 공녀제도에서 벗어나는 한 방편으로 고려 말에는 축첩을 묵인하는 제도가 생기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더욱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③조선시대
고려 말에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조선의 유교사회에서는 주자가례에 따라 엄한 강령과 계율이 나오고 이것이 사회활동의 준칙이 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자연히 위축되고 말았다. 이 시대의 여성의 지위를 말하는 규범으로서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부창부수, 남녀유별 등이 있어 남존여비의 사상이 자리 잡히게 되었다. 허난설헌이 지었다고 전하는“규원가”의 내용을 예로 들어본다. 이 가사의 내용은 양반 가문에서 잘 교육받고 자라난 규수가 양반 가문에 무조건 시집가서 남편은 난봉꾼으로 돌아다니고 자신은 엄한 가풍에 갇혀 독수공방의 세월들을 보내면서 늙어가는 인생의 한을 읊은 것이다. 여자의 팔자는 두레박 팔자라 하여 좋은 남편을 만나면 잘 살고 못된 남편을 만나면 험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운명론이 어느 때부터인가 형성되어 그 잔재가 오날날까지도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남녀평등, 자유연애, 여성교육 등에 대한 계몽이 시작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중요시 되기 시작하였다.


2.초기 한국 선교의 특성

①말씀 존중의 전통 형성
오늘날 우리는 한국 교회사에서 최초의 한국 개신교 선교가 성경에 의해서 였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의 쇄국 정책으로 인하여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한국 주변에서 맴돌고 있던 선교사들이 성서번역과 보급을 통하여 한국의 선교를 실현하려고 그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한 자들로서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서상륜 등의 한국인 청년 신자들의 도움으로 성경을 번역 출한하게 되었는데. 1882년에 중국에서 누가 복음서가 번역되어 인쇄되었고, 1884년에 대영 성서공회에 의하여 로스 목사가 번역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그리고 1887년에는 신약전서가 각각 간행되었다. 한편 이수정이라는 한 한국 청년은 일본에 건너가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은 후 한문성경과 일본어성경을 대본으로 하여[신약전서 마가복음 언해]라는 표제의 한글판 마가 복음을 번역하였다. 만주와 일본에서의 이러한 성경번역 사업이 선교사들이 이 땅에 첫발을 내딛기 전에,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는 책을 파는 장사꾼들을 통하여 이미 우리 민족에게 전도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으며 이 땅에 발을 내딛는 선교사들이 한글로 된 성경응ㄹ 들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전통으로 그대로 이어여 내려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여전도회 연합회 30년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중심의 역사였다고 하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 선교사로서 우리 나라에 최초로 찾아온 선교사는 독일 출신의 귀츨라프였다. 그는 1803년에 프러시아에서 출생하여 경건주의의 요람지로서 선교사들을 대량 배출한 할레(Halle)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에 건너가 모리슨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중국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동양에 눈길을 돌렸던 선교사다. 그는 1826년에 네델란드 선교회 파송으로 사이암에 도착하여 선교에 종사했으며, 어학에 재간이 있어서 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했고 또 의술까지 겸비한 선교사 였다. 1882년 7월 17일에는 황해도 백령도에 도착하였고,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군산만 북편 창선도에 정박하자, 상륙하여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다. 그는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하여 국왕 순조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헌상하였으며,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한국인에게 한문성경을 배포했으며, 의약품을 나누어 줌으로써 전도에 착수하였다. 그는 선박의 사정 때문에 한국에 한달 남짓 머물다가 이 나라에 복음의 불빛이 인도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떠나갔다. 귀츨라프 선교사가 한국을 다녀간 후, 33년이 지난 1886년에 제너럴 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을 타고 평양을 방문하였다가 대동강 상에서 자신을 칼로 치는 한국인 병사에게 성경책을 주면서 목숨을 버린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의 순교자였다. 그는 1840년 영국 웨일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를 졸업하고 철저한 신앙과 선교의 사명감을 가지고 그의 고향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에 와서 한국에 오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한국말을 배웠고 마침 미국 상선 제너렬 셔먼호가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배에 동승하였던 것이다. 그는 큰 상자에 성경책을 가득 넣어 배에 실었고 대동강에서 싸움이 일어나 배에 불이 붙자, 먼저 성경책을 침착하게 꺼내어 육지로 던졌으나 대부분 물 속에 빠졌다. 그가 체포되어 참수 당할 때, 칼로 친 박춘권은 후에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초대교인이 되었다. 토마스 목사를 치려는 병사에게 성경을 주었는데 받지 않고 있다가 주워 가지고 집에 간 일이 있는데, 그의 조카가 성경을 읽고 후에 평양 숭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성경 번역사업에 종사했던 이영태 씨다. 당시에 토마스 목사로부터 성경을 받은 사람 중에는 신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②의료선교의 성과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린 후 첫발을 디딘 선교사는 미국 북 장로교가 파송한 의사 알렌 (Horace N AIIen)이었다. 1884년 9월 22일에 인천에 도착함으로써 그는 한국 선교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에 칼을 맞고 중태에 빠진 민영익을 치료하여 생명을 구해준 일로 고종황제와 황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때마침 한국선교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가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한국 개신교의 출발은 비교적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주축이 되어 순수한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정통신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3.초기선교와 여성들의 역할

①여선교사 스크랜턴 부인
여성교육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였던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최초로 여학교를 세워서 신 여성을 길러낸 여선교사는 스크랜턴 부인이다. 그녀는 1885. 6월에 입국하여 한국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1886년 여학생 하나를 상대로 학교를 시작한 것이 1887년에는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났을 때. 고종황제의 왕비인 민비는“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격려했다고 한다.
스크랜턴 부인은 1888. 1월에 이화학당 안에 주일학교를 조직했는데, 학생 외에 30여명이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하였고 1889년에는 학생3명과 교사 1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을 보면 학교를 세우는 것은 선교의 가장 좋은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선교사들이 선교사업을 목표로 많은 학교들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화학당 이후 수 많은 미션스쿨이 설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선교사들의 선교를 목표로 한 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무지와 사회적 불평등과 가정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②초기 교회 여성들의 신앙과 교회 부흥
남녀7세 부동석이라는 사회적 계율이 지배하고 있던 사회에서 여성들이 교회에 나와 남성들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것은 전통적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믿기로 한 가정에서는 일종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는 투쟁과 여성에 대한 핍박이 심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들은 절박하고 고달픈 삶 속에서 신앙이라는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소망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여성들이 이렇게 기독교적 신앙을 갖게 된 동기는 과거의 남성 위주의 억압된 삶속에서 자신들의 존제에 대한 자각이 싹텄기 때문이며, 그것은 첫째, 망국의 처지에서 자신들의 무지에 대한 자각이었으며, 둘째, 우상숭배로부터 참신인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죄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신앙은 1900년대에 들어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을 가져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③오순절 성령 운동
1885년 무렵 한국 교회는 이전부터 이미 설립되어 있었던 황해도 송천교회를 시작으로 부흥되기 시작하였고, 1903년에는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7년에는 한국인 목사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해는 한국교회 부흥의 계기가 된 소위 오순절 성령 운동이 일어난 해인데, 이 운동은 평양 장대현교회로부터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진 해이다. 김양선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 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국법에 의하면 처벌을 받는다든가 또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1910년 경에는 전국의 교회수가 500이 넘었고 신도수가 25만명, 교회학교수가 823개나 되었다고 한다.

④여전도사 제도‘
여전도사란 한국에만 있는 특유한 여교역자 제도이다. 한국교회의 실질적인 여성지도자들은 여전도사로부터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이 여전도사를 전도부인(bible woman)이라고 했다. 당시 한국은 남녀가 서로 만나는 것을 꺼리는 풍습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게 그들이 익숙지 못한 풍습과 말을 가르쳐 주며 여선교사들이 순회전도를 나갈 때 도울 수 있는 여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생긴 제도였다. 그런데 전도부인들을 채용했던 외국 선교부에서는 초기에는 소책자를 파는 일을 겸했기 때문에 매서 부인이라고도 했으며 차츰 선교사들이 해야 했던 가르치는 일이나 심방의 일 등의 다양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도부인들의 유능함에 대하여 차츰 인식하게 되었고 여전도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⑤여전도회의 조직
한국초기선교에 있어서의 여성들은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과 배우고자 하는 열의에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있어서도 물심양면으로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어두운 자리에서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하고 우상숭배와 체념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기독)앞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여전도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전도회 조직은 1898년에 평양 널다리 교회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여전도회는 마포삼열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신행, 신반석, 박관선, 김신행 등 4명의 여신도들이 발기하여 63명이 참여하였다. 이신행 할머니는 이 여전도회에서 25년간 회장을 역임하면서 회를 발전시킨 여성으로서 특별한 지도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회원들이 엽전 한 푼씩 모아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던 지역에 전도사를 파송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1907년에는 파송되었던 이기풍 목사의 선교를 돕기 위하여 1908년에 이선광 여전도사를 제주도에 파송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II.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고신 교단의 출범


1.한국 장로교회의 부흐오가 일제의 박해

①한국 장로교 노회 결성
한국 교회가 부흥되어 가자 서서히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한국 탄압과 교회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나날이 부흥해갔다. 한국 장로교회는 노회가 결성되고 1912년에는 각 노회 총대들이 참석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평양에서 모이게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가 초대 총회장에, 길선주 목사가 초대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이리하여 한국 장로회 교단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②일제의 박해와 신사참배 강요
1911년부터 일제는 군국주의 무단정치로써 한국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치하의 40여년 동안 무수한 박해를 받아왔다.193O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에도 자유주의적 신학이 대두하기시작하였고 일제는다시 한민족말살 수단으로 창씨개명과 황민화(皇(황)民(민)化(화))政策(정책)을 감행했는데, 교회에 최후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③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여성의 참여
1938년 9월 9일은 한국장로교회 치욕의 날이었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3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이 가결되었다. 이에 적극 반대한 선교사들은 제지를 당했고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는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고 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받으면서도 1940년1월부터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전도사, 선교사 등과 더불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벌였는데 여성으로서는 조수옥, 박인순 등이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로 인해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 조수옥 전도사는 검거되어 평양 감옥에서, 그리고 손양원 목사는 청주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갖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2.한국 교회 재건과 고려신학교의 설립

1)한국 교회 재건 운동과 고려신학교의 설립

①한국 교회 재건운동
해방과 더불어 출옥한 성도들은 옥고로 인하여 피골이 상접하고 초췌한 모습이었으나 승리의 기쁨으로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출옥 성도 중의 한 사람인 한상동 목사는 고 주기철 목사가 始務(시무)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한국 교회 재건 5개 조항을 발표하였으나, 신사참배에 참석하였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반발하여 재건 계획은 벽에 부딪쳤고 개혁주의 보수신학교 설립의 여건도 쉽사리 마련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다가 1946년3월에 모친 별세로 귀향하였던 것이 동기가 되어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②고려신학교 설립
1946. 4월에 한상동 목사는 정통 신학교를 세울 뜻을 가진 서울의 박윤선 목사를 만나, 주남선 목사를 모시고, 이해6월에 진해에서 해군 하사관 수련관에서 신학 강좌를 열었다. 이것이 고려신학교, 즉 오늘날의 고신대학교의 창설 동기가 되었다. 이리하여 이해9월에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한국에 개혁주의 신학의 정초를 놓았고, 그가 고려신학교에 교수와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고려신학교는 많은 경건한 목사들을 배출시킴으로써 교회들은 신앙의 순수성과 전통성 그리고 성경에 기초한 신앙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3.고신 교단의 출범

①신사참배의 딜레마
해방 후 주남선 목사는 한상동 목사보다 1년 먼저 월남하여, 일제에게 지조를 유린당했던 교회지도자들이 회개할 것을 권고하였다. 신사참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 것을 고백하고 2개월 간 자숙할 것을 골자로 하는 소위‘自肅(자숙)案(안)’을 교역자 회의에서 의결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결의 내용을 지키지 않았고 출옥성도들의 제의를 일축하고 이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만 해도 성경에 밝지 못한 많은 성도들이 신사참배가 죄인가 아닌가의 딜레마에 빠져 혼란을 겪고 있었다. 1946년 12월 13일 진주에서 48회 경남노회가 개최되었다. 신사참배가 죄라는 것이 공포되어‘신사참배의문제’가 일단락되기를 기대하면서 이 노회에 참석한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모두 회장과 임원에 당선되는 것을 보고 죄 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였으나 이를 죄라고 표명하지 않는 것을 보고 노회가 정상화 될 때까지‘일시탈퇴’를 선언하고 퇴장한 일이 있었다. 퇴장 후 곧 탈퇴성명서를 내자, 67개 교회가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신도대회를 열어 주상수 장로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회개운동을 강조했다. 이에 아연실색한 노회임원들은1974년3월7일釜山(부산)구포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열고 신사참배가 죄임을 표명하였으나, 이는 진심에서 나온 일이 아니고 경남노회에 소속된 대부분의 교회가 탈퇴성명에 가담함으로써 난처해진 입장을 모면하고자 한 표명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②경남법통노회
1950년4월25일36회 총회가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會集(회집)되어 개회되었으나, 총대자격인정 논란으로 소란하고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流會(유회)되고 1951년5월25일에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36회 총회 속회가 열렸다. 경남지방 특별위원의 보고가 낭독되었고 그 일방적인 보고서가 채택되어 경남(법통)老會(노회)의 총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경남(법통) 老會(노회)는 총회와 무관한 것으로 선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김양선 목사는 해방 10년 사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교회의 주권을 의식적으로 교권주의자에게 바친 불상사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③개혁주의 신앙 노선
1952년 4월 24일 37회 총회가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렸는데,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 단체는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총회 측의 재 언명이 있었다. 이로써 경남(법통)老會(노회)는 총회와 결별하고 같은 해 9월11일에 진주 성남교회에서 제1회總(총)노회가 會集(회집)되어 정통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정신을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통합하여 개혁주의 신앙운동으로써 법통총회를 계승키로 했다.10월 14-16일의 자숙 기간으로 정하여 자숙한 다음 선포문을 공포하였다. 그 뒤로 진리운동의 산실이 된 고신 교단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여 한국교회에 성경중심의 정통신앙의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쳐 온 것이다.



4.고신 교단의 발전과 여성의 역할

①여성 신앙운동의 모범
여성들의 신앙운동의 모체는 교회이다. 또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표면에 들어나지 않으면서도 큰 힘이 되어주는 것도 여성들이다. 이러한 교회 신앙운동의 모범을 보여준 교회로서 고신교단 출범의 초창기에 부산삼일교회와 대구서문로교회가 있다. 이 두 교회에서 초창기에 순수한 신앙운동을 벌였던 청년 여성들이 그로부터 약20년 후에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를 결성한 회원들과 임원들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고신 총회 창립 초창기부터 회개의 신앙, 장로교 정통신학, 생활의 순결 등의 진리운동에 앞장섰던 여성신앙운동가들이다. 물론 이 여성들의 활동은 교회중심, 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이라는 고려신학교 설립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②개혁주의 신앙의 실천가들
당시의 “고려파 운동”이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야 한다는 신앙이 투철한 성도들의 염원이었고 자발적 운동이라는 데에 큰의의가 있다. 물론 이들 신앙 운동의 배경이 된 것은 고신 교단의 새로운 출발로 세워진 교회의 신앙 운동이었다. 이러한 신앙운동의 실천에 앞장선 것은 여성들의 전도활동이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전도활동이 없이는 새로운 교회의 설립이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사실이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신자의 60%이상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고신 총회의 출범 초기에는 여성들의 지지가 그 기반이 된 것도 사실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부르짖은 것은 남성들이지만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③고신의 신앙노선을 지지한 여성들
한상동 목사가 부산초량교회를 양도하고 나왔을 때 함께 나온 성도들이 주영문 장로의 집 뜰에서 순수한 믿음을 지키려는 심정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므로써 부산삼일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대구에서는 대구서문교회 당회의 결정에 따라 교회에서 축출 당한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므로써 대구서문로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뜻있는 성도들이 회개운동을 벌임으로써 고초와 어려움을 이겨 나가면서 바른 신앙생활을 목표로 모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므로써 고신의 신앙노선인 진리운동은 펼쳐나갔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로 세워진 교회로서 부흥하는 교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대구서문로교회는 좋은 사례가 된다. 대구서문교회에서 고신 신앙 노선을 따르는 신앙운동이 청년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다가, 1951년7월11일에 열렸던48회 노회에서 이를 저지하라는 가결에 따라 서문교회 당회가 고신의 신앙노선을 지지하는 성도들을 축출하자, 1951년 8월26일에 서문교회의 당회가 압력을 가함으로써 축출당한 김주오, 오병식 장로와 손만윤, 최만술, 오상용, 이말순, 박복달, 신정순, 김계초, 신경생, 박혜운 제씨들이 교회설립위원이 되어 大邱(대구)서문로교회가 설립되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48회 경북 노회가 1951년 7월11일 대구 제일 교회당에서 회집되어 경남 법통 노회의 정치노선과 고려신학교 신앙을 지지하며 관계하는 자는 1951년 8월25일까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제명키로 결정하였다. 그 방법에 있어서는 권면받고도 돌아오지 않는 교역자는 해당 시찰에서, 교인은 해당교회 당회에서 적당히 처리하도록 가결하였다. 그러나 고려신학 교단의 신앙노선이 진리의 노선임을 확인하고 이를 지지한 성도들은 결코 신앙의 지조를 굽힐 수가 없었다.1951년 8월19일 김주오, 박복달, 신정순, 김계초, 서옥련, 서경애 등은 서문교회 당회의 최종 심문을 받고 제명을 당하였다. 1951년 8월26일 대구서문로교회가 설립되고 그 해 9월24일 대구서문로교회 여전도회가 조직되었다.

④고신 여성들의 활동과 교회의 발전
1950-1960년대의 한국 장로교단은 지도자들의 시각의 차이로 말미암아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 성도들은 아픔을 체험했고 그러한 와중에서도 비록 소수이지만 바른 신앙을 찾아 결집한 것이 고신교단이라고 자부했다. 당시의 고신 교단의 교회들은 기존 교단의 교회들과 비교해볼 때, 수적으로 열세였고 조직적인 힘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정치적, 재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조건이 역설적으로 작용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일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투철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 정신에 힘입어 고신 교단의 교회들이 새로이 세워지고 날로 부흥해 갔다. 이미 오랜 전통을 이어온 마산 문창교회, 거창교회, 여수충무동교회 등의 교회들이 발전해갔고 부산의 제일영도교회, 경주의 경주교회, 서울의 서울중앙교회, 서울성원교회, 서울 서문교회 등 전국의 크고 작은 많은 교회들이 가정집에서 시작된 예배로부터 교회로 발전해갔다. 이러한 교회들이 세워지는 데는 특히 여전도회 회원들의 기도와눈물과 땀 흘리는 수고가 있었다. 여전도회 회원들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은 고신 교단 교회의 부흥에 주축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소명감을 의식하고 성령의 감화에 따라, 그들은 순수한 신앙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교회와 노회의 여전도회 연합회로 모여 뜻을 함께 하고 눈물과 땀 흘리는 수고가 있었다. 여전도회 회원들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은 고신 교단 교회의 부흥에 주축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소명감을 의식하고 성령의 감화에 따라, 그들은 순수한 신앙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교회와 노회의 여전도회 연합회로 모여 뜻을 함께 하고 눈물과 땀으로 봉사하였다. 가정의 일을 성실히 하면서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배의 일을 해야 했다. 이들은 자기교회나 노회의 여전도회 연합회를 초월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여성들의 신앙 운동에 힘써야 겠다는 각오가 뚜렷한 분들이었다. 전국적인 연합회를 모이기 위해서는 며칠씩 가족과도 헤어져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족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신임을 얻어내야 했던가? 이러한 고신 교회의 영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 여성 인재들이 전국 여전도회의 일꾼으로서 준비되어 있었으니 이는 여호와이레요, 기드온의 용사가 선발됨과 같았다. 부산 3. 1교회의 박인순, 마산 의 조수옥, 부산의 김차숙, 김현숙, 경남의 조수옥, 주경순, 경북의 박복달, 신정순, 김계초 서울의 표지현, 차은희 씨 등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여성도들이 전도와 봉사로써, 모범을 보였으며, 고려신학교 신앙을 지지하므로써 기존교회 당회의 결정에 따라 축출되는 등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새로운 고신 교단의 교회를 세우거나 발전시키는 데 앞장을 서 나갔으니 이들 여성들의 활동이야 말로 고신 신앙운동의 보이지 않는 밑거름으로서 골짜기마다 피어나는 백합화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III 전국 여전도회연합회 창립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12)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역사로 시작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므로써 가나안 복지를 향한 역사도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1971년 고신 교단의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출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을 믿는다. 이 때는 고신 교단이 새로이 출발한지 20년의 세월이 흘러간 시점이었다.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가 교단 창단 20년이 지난 후에야 새로이 출발한 것은, 그 20년이 고신 교단이 전국적으로 전도 무대를 확장하는 데 걸린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성년이 된 교단은 산하에 실질적인 전도 무대를 확장하는 데 걸린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성년이 된 교단은 산하에 실질적인 전도단체인 전국여전도회 연합회가 발족되어 나이는 20년 차이 이지만 발전의 길을 함께 가게 되었다. 그 동안 고신 교단은 사람이 보기에 외로우누 것 같고 기존의 교단에서 보면 경남이나 경북 일부지역에서 일시적인 적은 숫자의 교단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유명무실하게 사라질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네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창립의 여건

1)말씀 중심의 진리 운동
처음에는 경남, 부산, 전남 등에서 그리고 경북에서 서울에서 그 진리운동과 아울러 교세가 확장되어가던 당시에 전국여전도회 연합회가 창립되었다는 것은 고신 교단이 그 이름으로만 전국을 무대로 한 교단이 아니고, 이제는 실질적인 전국 무대의 교단으로 자랐음을 의미하는 출발이기도 하다. 고신 교단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전국 여전도회연합회의 결성도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1952년에 하나님 앞에서 새로이 출발한 고신 교단이 2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순탄한 길 만을 걷지는 못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운동을 펼쳐 가는 일이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은 법이다. 허울 좋은 합동의 명분에서 진리노선의 혼선을 가져올 수도 있다. 교단 합동과 환원의 과정에서 많은 교회와 인물들을 잃고 한때 낙망한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고신 교단에 새로운 신앙 운동을 펴나가게 하셨다. 개혁주의 신앙운동의 계기를 주시고 학생신앙운동 등의 구체적 실천운동이 일어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고신 교단을 사랑하신 증거다. 교단이 창립된 지 약20년이 경과한 무렵에 각 지역의 연합회로서 활동하던 여성신앙운동이 하나로 뭉쳐서 일하게 된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산업사회의 소용돌이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산업화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시작한 때이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영남지방과 수도권과의 왕래를 편리하게 했고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도시화로 인하여 인구의 이동이 활발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내면세계인 신앙보다는 외면세계의 부를 누리기 위한 물질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발돋움이 바로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창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새로운 출발은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값진 것이다. 고신 교단의 여성들이 개혁주의 신앙의 뿌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각성이 주어졌던 것이다.

3)연합활동 의욕의 성숙
세상의 모임들은 모였다가 쪼개지고 흩어지는 것이 상투적인 존재양상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연합하여 일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하나님께서 연합을 귀히 여기시는 말씀이다. 각 교회에서 열심히 일한 여성들이 한 지역의 교회가 연합하여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으므로 해서 노회별 연합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것이 창립전의 분위기였다. 이제는 더 크게 연합하여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성숙되어 전국의 교회가 연합하여 일하는 것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연합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숙된 의욕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전국여전도회연합회를 창립케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을 통하여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전국에 흩어져 제각기 일하고 있는 各(각)여전도회 연합회의 인물들을 모여 일하게 하신 것이 바로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창립이다. 그리하여 할 일 많은 이 강산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일꾼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연합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질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며, 상호존중과 협동으로 일하게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각 교회에서 연합되고, 각 老會(노회)에서 연합되고, 이제는 전국적으로 연합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더 크게 연합할 수록 더 큰 감사의 제목이 자꾸만 생기게 되는 것이다. 같은 신앙의 전통을 가진 신앙의 동지들이 모일 때 기쁨을 느끼고 일하는 보람을 얻게 되는 것 이상의 다른 이득을 챙기지 않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기독)인의 연합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하기 때문에 총회의 집회 때마다 부흥집회를 여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여전도회 연합회가 결성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일하도록 말씀으로 무장한다는 의미가 있다.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의 출발부터 이러한 부흥 집회를 개최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확고히 확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이렇게 총회집회와 부흥집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은 전국의 총대 회원들은 각 지회 여전도회 연합회와 각 교회 여전도회에 돌아가 일함으로써 전국여전도회는 실질적으로 하나가 되어지는 것이다.


2.창립의 의의

1)여성지도자들의 시대적 사명 자각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장10절 말씀)
이 중에“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권면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잘 기억되는 것임을 누구나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말씀이 김상철 목사를 통하여 창립총회 예배시에 전국에서 연합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회집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여성들이 그저 가정에서 가사에 열중하면서 교회나 각 지역의 여전도회에서 습관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소극적이고도 소규모의 일만을 할 것이 아니라, 전국을 무대로 하여 하나의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일하여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자각했던 것이다. 여전도회연합회를 창립했다는 것은 당시의 한국사회가 전통적인 사회로부터 새로운 근대사회로 탈바꿈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어 변해서는 안 될 신앙의 유산을 지키겠다는 자작이 일어나고 이를 실천하겠다는 시대적 사명을 깨닫는 데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된 이래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일관된 목적에 따라서 전국의 회원들이 하나다.









제3부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활동 인물탐구

I. 순교정신 실천 인물 열전
II.진리전파의 여성부흥사 열전
III.진리운동 계승 인물 열전
IV.개혁주의 실천 인물 열전

때를 따라 적절한 인물을 세우시는 하나님
20세기의 민족의 수난과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혼신을 다한 여성들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새 천년을 시작하는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에도 갖가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기독)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기도와 눈물과 피땀을 바치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며 오늘도 우리는 목메이고 가슴 뿌듯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 30년간은 일찍이 하나님 앞에서 시대적 사명을 자각한 여성신앙운동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살아있는 역사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혼란기를 통하여 이 땅의 어느 여성들보다도 바른 신앙의 노선을 걸어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동안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있어서 실천적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었고, 특히1970년대의 산업화로 인하여 이 땅에서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해체되고 가치관이 혼란하여 신앙이 해애해질 때를 당하여 의연히 일어나 전국여전도회연합회를 결성하고 고신교단의 바른 신앙을 더욱 확고히 전국에 뿌리르르 내리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첫째, 일제시대 기독교 박해의 일환인 신사참배 강요의 상황에서 끝까지 이를 거절하고 절조를 지킨 인물들,

둘째, 해방 전후 말씀에 대한 진리 운동의 여성선구자로서 활동한 인물들,

셋째, 가치관이 혼란한 시대를 당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 사회봉사활동이나 개척교회 설립하는 일 등에 힘쓴 인물들,

넷째,1980년대 이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의 구태의연한 삶의 태도를 개혁하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열어가기 위해서 신앙선배들의 뒤를 이어 전국여전도회연합회를 활성화하는 데 노력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우리는“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적절한 인물을 세우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I.순교정신 실천 인물 열전

우상을 숭배하면서 생명을 부지하고 세속적 권력과 부를 누리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이들의 신앙고백
예로부터 “겨울 추위가 지난 연후에야 송죽이 푸른 것을 안다.”는 말이 있어 일반 사회에서도 절조를 중히 여김을 가르치고 있다. 이민족의 재배 하에 있었던 일제시대는 민족적으로 불행한 시대였음은 물론이요,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나무에 비유한다면 겨울 추위와 같은 신앙의 역경이었다. 성경은 이러한 신앙의 역경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니엘서를 통하여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바벨론의 통치시대에 유다의 자손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등은 바벨론왕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절조를 끝까지 지켰다. 우상을 숭배하면서 생명을 부지하고 세속적 권력과 부를 누리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이들의 신앙고백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과 신앙양심을 저버릴 수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전인격적인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창립 초기부터 계속하여 참여하고 활동한 여성 중 일제시대 신사참배 강요의 상황에서 순교정신을 실천한 인물로서 조수옥, 박인순, 임두연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들 인물들을 중심으로 일제시대 신사참배가 강요되는 상황에서 이를 거부하거나 그러한 인물들을 끝까지 도움으로써 순교정신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인물들의 사적들을 간략하게 실어 후대의 신앙 모범으로 삼고자 한다.




1.조수옥(1914-)

25세 때 삼천포교회 여전도사로 부임하여 신사참배반대운동에 가담하고 와룡산 철야기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여성을 통항 온갖 참기 어려운 고난과 모욕과 시련 속에서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높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신앙을 굴복하지 않게 하셨다. 해바오가 더불어 평양감옥에서 출옥한 이후 그 정신으로 평생을 불우한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어 전적으로 이들을 보살피는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는 창립 때부터 부회장으로 일해 오다가 회장으로 일했으며, 은퇴여교역자 생활관과 회관 건립위원장으로 일했다.

1)출생과 성장 배경
조수옥은 1914년 12월 1일 경남 하동군 하동읍에서 부 조원희, 모 김태진의1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에 양반의 법도를 지키는 가풍에서 외가가 복음이 들어온 초기부터 교인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에 다녔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얼마간은 주일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당시에 하동만 해도 큰 도시가 아닌 시골이어서 주위 사람들이“큰 아이들이 교회다닌다.”고 말들이 많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2)예수를 믿게 된 동기
조수옥은 20세에 결혼이라고 해서 시집에 갔다. 당시만 해도 신랑 신부가 서로 잘 알지 못한 가운데 부모끼리의 약혼에 의하여 무조건 결혼하던 시대다. 첫날밤에 신랑이 늦게야 들어와“딴 사람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는데,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결혼했다.”는 고백과 함께 그 밤으로 시부모 앞에 나아갔다. 그 자리에는 이미 신랑이 사귀던 일본여자도 와 있었다. 그래서 여기 희망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친정으로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때 주일학교에 함께 다니던 친구가 와서 교회에 가자고 해서 갔다. 어릴 때 교회에 다니다가 오랜만에 교회에 갔는데도 아는 사람도 있고 그저 천국에 가면 돌아가신 어머니나 만나볼까 하는 생각에 계속 교회에 다녔다. 교회에 다니다 보니 말씀을 듣는 것이 좋았고 차츰 하나님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3)삼천포교회 전도사로 부임하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니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결혼을 포기하고 다시 교회생활을 시작한 조수옥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며 성경을 읽었으나 실제로 믿음에 대한 체험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좀더 알고 믿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런데 그때 어느 지방에서 성경학교를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 마산에 갔다. 마산에는 선교사들이 와서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 있었다. 거기서 성경을 조금배우다가 “이왕 배울 바에야 성경이 무엇인가 알아나 보자.”하고 진주성경학교에 갔다. 거기서 박인순 전도사도 만났고 해서 성경학교에 계속 다녔다. 그런데 25세 때 성경학교를 마칠 무렵 삼천포교회에서 전도사로 초청이 왔다. 조수옥은 깜작 놀라 이를 거절하였다. 실제로 전도사가 되기 위해서 성경학교에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때 추천한 최 선생(최덕지 전도사)이라는 철두철미한 신앙가가 말하기를“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조수옥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거절했으나, 마음속에는‘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의 뜻은 거절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1938년 6월에 삼천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4)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믿음
삼천포 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던 조 권사는 1938년 9월27일에 장로회 총회가 평양에서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 조수옥은 신참 전도사로서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는 가운데 오히려 신사참배를 반대해야 된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왜 많은 목사들이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안해야 된다고 해 놓고 이제와서 해도 된다고 하는가? 신사참배를 한다는 것은 와서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말이 아닌가? 조수옥은 아무리 신참 여전도사라 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이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일본 신을 섬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첫째, 마음속에 7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였고
둘째, 결혼을 포기할 때부터 자신의 삶보다 민족을 위하는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끌려가서 죽으면 그만이지 내가 뭐 구차하게 살려고 신사에다 절하고 일본하고 타협하다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꽉 박혔다. 성경학교 있을 때도 그랬고 최 선생도 그랬다. “신사참배 만약에 강제로 시키면 잡혀 들어갈 준비하자. 신사참배는 하기 싫다. 신사참배 하지 않고 죽이면 죽는다. 죽는 거 무서울 것 하나도 없다”고. 여기 독립 운동 하다가 죽은 사람 내 앞에서도 얼마든지 있었는데 이걸 어째서 신사참배를 하다니 말도 아니다 싶은 생각에 어떤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5)죽음에 대한 두려움
삼천포교회의 전도사로 간 것은1938년 6월인데 어느새8월이 되고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하기로 각본이 다 짜여져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결의만 되면 잡혀 들어가겠다고 각오가 다 되어 있는 조수옥 전도사였지만 9월이 거의 다가올 무렵에“내일 모레 결의가 나면 나는 잡혀들어 가서 순사한테 끌려 다니면서 맞고 죽인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깜짝 놀라게 되었다.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마음 속에 일어나 그것을 지워버리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기도하면 된다고 하는데 기도의 체험이 없어서 그런지 “하나님 만약 살아 계신다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것이 무섭지 않게만 해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지만 무엇이 뒤에서 날 잡아 당기는 것 같이 겁이 나고 몸이 오그라들고 했다. 이왕 죽을 바에야 큰 소리 딱 하고 죽지 끌려 다니면서 벌벌 떨기 싫었다.“담대한 마음을 주셔서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해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죽게 해 달라.”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안 되어, 산기도 잘 다니는 할머니를 따라 산 기도를 가려고 했다. 교회의 중년 여집사 한 분이 따라간다기에 셋이서 홑이불 하나씩 준비하고 보릿가루 좀 준비하여 일 주일 동안을 기도하려고 새벽밥 먹고 산을 향하여 올라갔다. 올라갈 때“올라가면 하나님께서 ‘잘 왔다.’하고 은혜를 풍성히 주시겠지.”하고 희망을 가지고 올라가는 데도 으슬 으슬하니 무서웠다. 그래도 죽어라 하고 올라가는데 어쩌다 보니 그 할머니가 딴 데로 가고 없었다. 그 할머니 찾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되겠다 싶어서 둘이서 무조건 산꼭대기에 가서 기도를 하려고 하니 온 전신이 떨리고 겁이 나서“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불러도 대답이 없으셨다. 그때는 초승이라 하늘을 쳐다보니 달하고 구름하고 어울리는데, 바람은 씽씽 불고 구름은 용과 같고 뱀과 같아서 모두 나한테 달려드는 것 같았다. 앞을 보니 층암절벽이라 그 큰 바위들이 전부 호랑이 같고 곰 같이 달려드는 것 같아 무서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조 전도사가 떨게 되니 여집사도 떨게 되었다. 결국 순사한테 잡혀 죽을까봐 두려움이 생겨 그 두려움을 지워버리려고 산에와서 기도해도 안 되니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했는데 막상 죽으려고 하니 더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심한 두려움이 생긴 것은 조수옥의 마음속에 이미 죽음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6)하나님의 은혜 체험
당시의 조수옥 전도사는 신사참배 결의만 되면 죽게 될 것을 각오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리려고 한 주간 산 기도를 와서 첫째 날 밤부터 오히려 더 무서움을 느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사람의 노력으로 제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이 밤새도록 기도해도 소용 없는 일이었다. 조수옥 전도사는 여기서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하던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고 울며, 또 무엇이 감사해서 감사하다고 하는지를 모르고 지내온 자신을 생각했다. 그리고 일류 박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고 하고 신사에 절하는데 내가 무엇이 기에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생각하니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이 한 없이 불쌍해 보였다. 디만“성경ㅇ서 그것이 죄라고 한다고 하니 내가 믿는 것 뿐이지 내 자신이 체험이 없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하나?”하고 절벽으로 몸을 구부려 떨어지려고 하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 안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고 찬송을 부르고 소리를 질러도 그 소리들이 모두 자신을 두드리는 소리 같이 들렸다. 그때 마침 같이 간 여집사가“우리 이렇게 앉아 있지만 말고 한번 따로 갈라져 기도해 보입시다.”하여 둘이는 삼베 홑이불 하나씩을 가지고 온 몸을 돌돌 말아 가지고 좀 거리를 두고 앉아 있는데, 덜덜 떨리고 더 겁이 나서 어찌할까 싶어 하다가 한참 있다가 스스로를 바라보니 너무 불쌍했다.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이걸 어쩌겠나 싶어 거기서 막 통곡이 나와 울다 울다가 얼마나 울었는지 나중에 한참 우는 가운데서“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 기회에 내가 옳은 길에서 죽도록 해 주시오.”하는 이런 어떤 무엇이 조수옥 전도사의 마음에 쓰윽 다가왔다. 그러는 가운ㄷ서 성경말씀 중 야곱을 택하셨다는 말씀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여기서 조수옥 전도사는“하나님이 야곱을 불러 택한 자로서 은혜를 주셨으니, 나도 하나님이 부르신 택한 자라면 나에게도 기도의 은혜를 주옵소서.”하는 기도 제목으로 바꾸고 한참 울다가 나중에 어쩌다가 찬송이 나오고 어쩌다가 기도가 나와“하나님 불쌍히 보시옵소서.”하고 밤새도록 그렇게 했다. 이렇게 하기를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하였다. 그런 중에 무엇이 등에 떳떳하여 그 때부터는 기도가 나와서 찬송도 하게 되었는데, 일어나도 또 찬송이 나오고 기도의 문이 열렸다. 그런 뒤로 계속 이렇게 기도와 찬송이 터져 나왔다. 이것이 은혜였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거저 주시는데, 사람이 그것을 모르고 허덕거리던 것이 너무 우습기만 했다. 창조의 하나님, 자신을 새롭게 하신 하나님이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조수옥 전도사에게 내린 은총이었다. 이 은총이 조수옥 전도사로 하여금 그렇게도 변함 없는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된 것이다. 조수옥 권사는 최근의 신앙간증을 통하여 그때의 감사했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게 무섭던 것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이제 부터는 모든 것이 감사하고 어제 불던 바람이 이제는 오히려 시원하고 벌레 우는 소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둣하였으니 하나님이 날 새롭게 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죄라는 것이 하나님을 이탈하는 것으로 믿어졌지요. 하룻밤을 벌벌 떨고 무서웠던 그것이 그렇게 변화되어 새 힘을 주셔서 한 주간을 기도하고 내려왔던 일을 오늘날까지 내내 감사하게 되었어요. 일본천황이 신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부터였지요. 우리 인간이 화목하는 것은 내 힘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라. 은혜 받으면 저 사람이 나를 때리든지 욕하든지 원수라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나를 무섭게 하고 조롱하는 것 같이 보이던 구름과 바위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만물과 하나 되고 나를 욕하는 자를 위항 기도하고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내가 성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옳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기도해야 되고 거듭나야 되며 새로 지음 받아야 된다는 것을 그 때에 깨닫게 되었지요.

7)삼천포 교회에서 쫓겨남
1938년 9월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된 후 당시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던 주남선, 한상동 등의 목사들과 여성도들이 연대가 되어 열심히 기도하고 심방을 하였다. 당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담했던 전도부인이라고 했던 여전도사를 중심으로 한 여성도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들과 뜻이 통하였으므로 함께 기도해 오다가 들어오는 소식에 “안이숙 선생이 가서 어떤 일을 했단다.”하면 그를 위해 기도하고“어떤 사람은 반대하다가 넘어갔다.”하면 그를 위해 기도했다. 밤으로 산에 가서 기도하고 아침으로 내려오면 다리가 아파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낮에는 심방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에 시무하시다가 체포되어 쫓겨나왔고, 조수옥 전도사도 그 무렵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삼천포교회에서 쫓겨나왔다.

8)수영해수욕장 모임
삼천포교회에서 쫓겨난 조수옥 전도사는 부산으로 갔다. 초량교회는 신사참배 안 한다는 소문을 듣고 갔던 것이다. 초량교회에서 1938년11월부터 전도사로1년간 시무했는데, 그 때는 초량교회가 신사참배를 안 했으며 신사참배를 승인하는 사람들은 교단에 서지 못하도록 했던 때였다. 그런데 예배시간에는 약50명가량의 순사들이 예배를 감시했다. 그리고 신사참배 안 하는 사람들이 딴데서는 모일 수가 없기 때문에 해수욕하러 가는 것처럼 가서 낮에는 해수욕을 하고 밤에는 모여서 기도를 했다. 조수옥 권사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그 때가 1939년 8월이었어요. 수영해수욕장에서 한상동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신사참배가 제1계명을 범하고도 죄가 아니라는 이런 식으로 교인들의 영을 다 죽이는데,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내일 죽더라도 죄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신사참배 하는 목사들이 축도를 한다든지 집례하는 곳에는 참여하지 말자고 하고 따로 모였고 연보도 모인 사람들이 모아서 교역자들의 생활비를 조금이나마 드렸지요. 당시에 신사참배 반대자는 직업도 다 뺐기고 그런 목사님들은 먹고 살 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은 학교도 전부 못 보낼 정도였지요. 조수옥 전도사는 그 이후 1940. 1월에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호주 선교부 순회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40. 2월에 한상도, 이인재 목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운동 자금 24원을 지원하였다.
1940. 9월 20일에 검거되어 북부산 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1941. 7. 11일에 평양 종로경찰서로 이송되었다가, 1941. 8. 25일에 평양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 당시 주남선, 주기철, 최봉석, 한상동, 이인재, 최상림, 방계성, 안이숙,이광록 등이 함께 구속되었다. 연약한 여성으로서 모진 고문과 취조를 견뎌 내면서도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을 끝까지 지켰다. 이 일에 대하여 조권사는 항상“내가 뭐 특별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일본이 진 것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것이라.”고 했다.

9)출옥성도 조수옥 권사
1945. 8. 17일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여 1945. 12월에 마산 인애원을 설립하여 오늘날까지 원장으로 봉사함으로써 불행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역사 바로 알리기 강연을 통하여 바른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힘쓰고 있다.
1962. 9월-1982. 9월의 20년 동안 경남여전도회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고문이며, 1971년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창립 회원으로서 초대 부회장을 역임한 이래 계속 임원으로 활동해 오다가 1982. 10월-1984. 10월의 2년 동안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제 22회 정기 총회에서 은퇴여교역자 생활관과 회관 건립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완공될 때까지 기금을 모집하고 대지를 확보하며 완공하기까지 혼신을 다하였고 그 운영에 관하여도 관심을 많이 기울여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산하의 모든 회원들에게 신앙의 실천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은혜를 끼치고 있다. 1997. 9월에 이락기념재단으로부터 일가상을 수상하였고,1997. 9월 한국여성단체협의회로부터 용신 봉사상을 수상하였으며,2002.3월29일 유관순상 위원회로부터 제1회 유관순상으르 수상하였다. 그리고2002. 4. 11일에 조수옥 권사 증언출판기념예배가 있었다. 이 자리는 일본이 진정으로 사과하고 서로 용서함으로써 화해하여 앞으로 한국과 일본이 그리스도(기독)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늦게나마 조수옥 권사가 한 일에 대하여 교계에서 혹은 사회에서 더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관심을 갖게 되고 이런 기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2.박인순(1915-1999)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제에 항거한 일로 옥중에서 금식하다가 쓰러져 보석되고 만주로 가서 옥중성도들을 뒷바라지 했다. 해방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부흥강사로 활약하였다. 고신의 신앙노선을 전국의 교회들에게 알림으로써 고신교회들이 부흥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출생과 신앙 배경
박인순 전도사는 1915. 7. 15일에 경남 부산 기장에서 부 박재해, 모 김봉경의 1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오빠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하고 공산주의 가정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1937년에는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수영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2)예배를 방해하는 일본 형사에게 항의
39년 8월 수영백사장에서 연합예배를 드리는 중 예배를 방해하던 일본 형사에게 항의하여 동래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매일 같이 고문과 취조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해 10월 경남도경에 압송되어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조수옥 전도사를 만났다. 신앙의 동지를 만난 박전도사의 가슴 속엔 기쁨과 위로로 가득 찼다. 그러나 거기서는 더욱 고문과 취조가 심했다. 그런 중에 두 주간 목표로 금식에 들어갔다. 그해12월의 날씨는 유난히 차가웠다. 한 주간 동안 금식이 진행되던 어느 날 취조를 받기 위해 철 난간을 잡고 간신히 올라가다가 벽돌에 부딪쳐 의식을 잃고 시멘트 바닥에 졸도하였다. 간수의 입에서“박인순 죽었다,”는 말이 튀어나왔고 누구의 입에선지“신사참배 반대운동 첫 순교자가 부산에서 났다.”는 말이 나와 그 소문이 퍼졋다. 그러나 가족에게 인계된 박전도사는 소생되었고 구금된 지3개월10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이경석 목사 (임두연사모)부부와 함께 만주에 가서 옥중 성도들을 뒷바라지 하는 등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45년8월15일에 임박하여 귀국하였다.

3)고려신학교 시절,“기도하는 학생”
해방 후 고려신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입학하여 제3회로 졸업하였다. 학교 다닐 때부터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한번 기도의 불이 붙으면 꺼질 줄 모르는 성령에 사로 잡혔다.1948년 당시 광복동에서 신학교 다닐 때 박윤선 목사는 경건회 시간이 되면,“여학생 가운데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십시오.”하셨는데, 다른 학생들은 박인순 전도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박인순 전도사가 기도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길게 하는지30분 경건회 시간이 다 지나고 딸랑 딸랑 두부종이 울려 다 끝났다는 신호가 있어도 그냥 기도를 계속했다고 한다.
한 번은 손명복 목사가 어느 집회서 박인순 전도사에게 기도를 인도하라고 했는데, 폐회할 때까지 기도가 끝나지 않아 하나 둘씩 모두 갔고 남은 사람도 있었는데 새벽기도에 참석하려고 좀 일찍 왔더니 그 때까지 기도하고 있더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4)전도사 생활
졸업 후19년 동안 제1영도교회에서,10년 동안 삼일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고,1972년에 전국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되었을 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한평생 결혼할 뜻을 포기하고 한 평생 전도사로 헌신하였으니 전 생애를 주님께 바친 아름다운 생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셈이다. 1985년 제일영도교회 시무 중에 병약하여 도미하였다. 그의 동생(이명재목사사모)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 후 건강이 회복되어 84세까지 장수하였다. 생애에 마지막 고향을 방문하여 1999년10월31일에 제일영도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잘 드리고 그 다음날인 월요일에 건강에 이상이 있어서 고신의료원에서 입원치료 중1999년11월3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5)여성 진리운동의 선구자
박인순 전도사는 예수밖에 모르는 철저한 신앙 여성으로서 일생 동안 처녀의 몸으로 주를 섬기다가 가셨다. 고신 교단의 초기 여성 진리 운동가로 수 많은 부흥집회를 통하여 개혁주의 신앙을 가르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리운동은 경남과 경북 지방을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여기저기서 고신 교단의 교회로 새 출발하는 교회와 새로 설립되는 교회들이 많았는데, 이는 이러한 여성 진리운동가들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박인순 전도사는 경주교회가 세워질 때도, 신앙부흥집회를 통하여 많은 성도들을 감화시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창립 때1년간 초대회장을 역임하고 그 후 계속 임원으로서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의 발전을 위하여 헌실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3.임두연(1919-)

임두연은 자신이 직접 옥에 갇힌 일은 없으나 신사참배 반대로 인하여 옥에 갇힌 성도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다니다가 남편 이경석 목사와 만주로 피하여 가서 거기서도 옥중 성도 뒷바라지 일을 했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초창기부터 임, 부원으로 꾸준히 참가, 기도로써 봉사해 왔으며 현재 고문으로 추대되어 일하고 있다.

1)예수 믿고 사는 것이 가장 큰 소원
임두연은 1919. 12. 5일 울산에서 부 임관중, 모 박화이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 않으시는 가정에서9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공부하겠다고 오빠 따라서 일본에 갔으나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14살 때부터“예수 믿고 사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지만 막상 결혼한 남편은 불신자였다. 일본에서 공부를 좀 하는 동안 키가 유달리 크고 학교에 가면 작은 아이들과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민족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한국으로 오려고 하는데 오빠로부터 이경석이라는 강서대학에 다니는 청년을 소개 받고 이모의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모의 말로는“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했는데 막상 시집에 가 보니까 불교를 심하게 믿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한번 부모가 짝지어 주셨는데 죽지도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2)남편이 예수 믿고 목사가 됨
당시의 남편 이경석은 강서대학 학생으로서 학교에 갔다 오면 일본 학생으로부터 들었던 “너는조센징이다.”라는 말에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녁마다 유도를 배우러 다녔다. “유도 고단자가 되어 누가 ‘조센징’이라고 놀리기만 하면 나가서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더니 결국 싸움쟁이가 되었다. 이러한 남편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무서워서 그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남편이 변화되어 찬송가를 따라서 부르게 되고, 주일날 교회에 같이 가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나중에 목사가 된 남편 이경석이지만 그 당시에는 민족성이 매우 강한 청년으로서 기분파였으니 또 무슨 사고를 낼지 모르는 일이었다. 일본에서 늘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결국 사고를 내고 옥에 갇혔다가 나왔다. 그러다가 한국에 왔다. 남편인 이경석은 학습,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 교사가 되고 부장이 되었다.

3)신사참배 강요 떼 십계명을 가르친 주일학교 교사
당시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주일날에는 몇 몇 교회가 모여서 야외예배를 드렸다. 당시의 임두연은 주일학교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신사참배가 죄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였지만 좀처럼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해 여름에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뛰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십계명을 가르쳐 신사참배와 동방요배가 죄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마음먹고 제1계명을 가르쳤다. 여름 성경학교 때라 전도사가‘사랑’에 대한 교안을 나누어 주었다. 이 때 어떻게 해서든지“십계명”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가겡 교안의 내용을 가르치지 않고 제일 계명을 가르쳤다. 마침 전도사가 둘러보다가 임두연 선생을 불러“당신이 뭔 데 교안대로 가르치지 않고 마음대로 가르치느냐?”고 나무랬다. 그 뒤로 마음이 상해서 그 고장을 떠나 해운대 교회로 왔다.

4)심방 가서 귀신 단지를 집어던진 용기
임두연 사모가 당시에 해운대 교회로 오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목사되기 전에 남편이 ‘해운대-부산’의 버스 운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예배당에 가면 잘 믿는 성도들은 예배를 마치기 전에 살짝 먼저 나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신사참배한 목사로부터 축도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해운대교회에 왔을 때 이러한 신앙을 본받으면서부터 조수옥 전도사가 생각나서 찾아갔지만 옥에 갇힌 뒤였다. 그 인연으로 조수옥 전도사 친구인 문말례 전도사를 만났다. 문말례 전도사와 함께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찬송가 위에 귀신 단지를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문말례 전도사는 그것을 깨트렸고 임두연은 겁이 나서 그것을 구석에 던져버렸다. 그 뒤로 경찰서에서 문말례 전도사와 임두연을 찾았다. 이리 저리 피신하다가 문 전도사는 금강산에 아는 집이 있어 보내고 자신은 남편 이경석 목사와 함께 만주로 피했다. 그때 감옥에서 나온 친구 박인순 전도사도 함께 갔다.

5)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나.
해방 전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나던 초기에는 차은희 권사의 모친 백영옥 등과 옥중 성도를 뒷바라지 하는 일을 하였고 남편과 함께 만주에 가서도 박인순 전도사와 함께 그 일을 계속하였다. 임두연 사모는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어떠한 처지에서도 “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나?”하고 그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았으며,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결성된 뒤에는 초창기부터 계속 부장이나 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제21회 총회 때부터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변함 없이 여전도회연합회에 참여하면서 기도로써 봉사하는 삶은 여전도회연합회를 이어갈 신앙후배들에게 모범이 될만하다.






II.진리 전파의 여성 부흥사 열전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해방 후의 믿음의 혼돈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성 부흥사들의 입을 열게 하셨다.
박복달, 우태숙, 명향식, 표지현 등은 해방 전후의 말씀에 대한 바른 증거를 통한 회개 운동을 벌여 먼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큰 변화를 받고 나아가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켜 교회를 부흥케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며 주의 일꾼들이 일어나게 한 분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회개시키던 중 중심으로 일어난 진리 운동을 계승한 인물들로서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결성되자 신앙선배들과 함께 주로 연합회 활동을 통하여 고신의 진리운동을 널리 펼쳐가는 데 주역이 된 분들이다. 그 삶들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데 힘쓰고 애써 왔는지에 주안점을 두고 그들의 삶을 살핀다.


1.박복달(1917-1933)

박복달 권사는 일제 말기에 최일출 목사로부터 은혜를 받고 해방 후 고신의 진리운동이 일어날 때 여성 신앙부흥사로서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여 많은 심령을 주께로 인도함은 물론 고신의 신앙노선을 지지하고 널리 펴서 고신 교회의 부흥에 앞장섰던 여성지도자였다. 그리고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초창기에10년 동안 회장을 역임하면서 강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그 기틀을 세웠다.

1)독실한 어머니의 신앙
박복달 권사는 1917년 12월 21일 대구에서 부 박상준, 모 김길문의 4녀 중 2녀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고향이 광주였고 한의사였다. 그 시대에 하와이에 다녀올 정도로 명사이셨다. 모친 김길분 여사는 오로지 주님밖에 모르는 독실한 신자로서“신사참배하면지옥간다.”고 항상 전하는 분이었다. 박복달 권사는 어렸을 때 교회에 출석하여 1931년에 학습을 받고 1938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1936년3월에 경북여고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 당시 대구 남산교회에서 세운 명도학원 선생으로 근무하였다. 그 학원에서 공부한 분으로 은퇴전도사인 권임규, 양소선 두 분 전도사님이 계신다.1946년 고려신학교가 진해에서 강좌를 시작했을 때부터 신학교 공부를 하다가 몸이 약하여 잠간 쉬었다가 다시 계속하여 1955년5월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2)은혜받고 청·장년신앙 지도자로 활동하다.
1945년 해방되던 20일쯤 전에 청년 박복달은 그 당시 신사참배 반대로 인하여 피해 다니시던 유명한 최일출 목사님으로부터 우태숙 선생 댁에서 형님과 함께 부름을 받았다. 거기서 목사님이 성경 공부를 가르치셨는데. 목사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불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때는 신사참배를 하고 국기배례를 하고 뒤로 돌아서 일본 천황 있는 곳을 향하여 동방요배라고 하는 절을 하던 때였다. 그 당시 박복달 선생은 최일출 목사님의 가르침에 은혜 받고 눈물로써 회개하여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20일 후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에 교회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어 대구서문교회의 집사가 되고 장년 주일학교 교사로서 열심히 가르쳤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분반을 하여 가르쳐도 반이 꽉꽉 찼고 가르치는 말씀에 따라 통회자복하고 큰 역사가 일어났다. 사람이 많아지자 교회에서 청년여전도회를 따로 편성하여 가르치도록 분립시켜 주었다. 여기서 박복달 권사는 청년지도자로서 위치를 굳혀가고 있었다. 주일날 청년여전도회의 모임이 너무 짧다고 하여 월요일에 따로 모였는데 오전10시에 시작해서 오후45시 되어야 끝날 정도로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났다.

3)대구 서문로교회 설립에 앞장서다.
당시에 대구서문교회 내에서 청년여전도회가 시작되고 회집이 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은혜 받은 사람이 많아지고 교회가 부흥되어 갔다. 그런데 당시에 서문교회 당회는 고려신학교 노선을 지지하는 교인들을 설득하고 만약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제명하라는 노회의 지시에 따라 고신의 신앙을 버리라고 했지만 끝까지 버티게 되자 제명당한 박복달, 신정순, 김계초, 서옥련 등이 서문교회에서 나올 때40-50명 정도의 교인이 함께 나오게 되어 대구서문로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박복달 선생은 신정순, 김계초, 서옥련 등과 함께 교회설립위원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1951년 교회의 여장년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무슨 일에나 한번 시작하면 그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품이어서 女(여)장년부장으로1987년12월27일 은퇴할 때까지 봉직하였다.

4)부흥사로 활약
젊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심령으로 크게 은혜를 받은 박복달 권사는 교회의 청년부와 장년부의 지도자로서 큰 은혜를 끼쳤음은 물론이요, 우리 교단이 발전하여가는 시기의 전후를 기하여 부산, 서울, 광주 등 각처의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부흐집회를 인도하였다. 가는 곳마다 증거되는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말씀 증거가 끝나고 통성으로 기도하면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 하였다. 부흥회에 참석한 회중이 가슴을 치면서 듣기에도 민망한 죄들을 서슴지 않고 토해내었다. 그리하여 예수를 구주로 확신하고 영접하는 자들이 많았다. 부흥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은혜를 사모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온 집안이 꽉 차서 앉을 틈이 없었다. 찬송하고 말씀 증거하고 기도할 때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박복달 권사의 집은 우태숙 권사의 집과 함께 우는 집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박복달 권사는 교회의 일을 할 때 무엇보다도 성도를 사랑하며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한 사람을 붙들고 전도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놓지 않았다.

5)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기틀을 잡다.
1951년부터 1987년 은퇴 시까지 36년간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여전도회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부터 경북여전도회연합회장을 23년간 역임하였다. 그리고1972년에서1981년까지10년간 전국여전도회연합회장을 역임하였다. 경북여전도회를 이끌어 가실 때에는 순회전도사로 양소선 전도사를 세워서 일하도록 하였다. 여러 군데 교회를 세워서 이끌어 가야 하겠는데 너무 급하니까 3개월씩 보냈다. 교회를12군데를 개척하고 또 신축하고 세운 데는15군데나 된다. 이렇게 하여 경북 각처에서 고신 측 교회가 일어나게 되고 많은 일꾼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 이렇게 열성적인 인물을 제 2대 전국여전도회연합회 회장으로 세우셨다. 그 당시 박복달 회장은 경북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회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제2회 전국 여전도회 총회가 열린 해인 1972년 3월에 경북여전도회연합회는 제8회 총회가 열렸다. 그러니까 경북 여전도회 연합회는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에6년 앞서 창립되었고 박복달 회장이 전국 여전도회 회장이 되었을 때는 창립총회에서부터 이미 8년 간 경북 여전도회 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간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고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이제는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회장으로 일하게 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이후로 1972년 10월 18 일부터 1982년 10월 13일 제 12회 총회가 열릴 때까지 10년 동안 박복달 회장은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를 충실히 이끌어 왔다. 회장 재임기간 동안에 특히 일심으로 단결하여 일하는 풍토를 조성하였고 특히 제주 서광교회를 개척하여 지원하고 자립하게 하는 등 국내선교에 크게 기여하였다.

6)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표준삼아 일하다.
박복달 권사는 교단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교단총회도 꼭 참석하였다. 누가 초대를 하건 하지 않건 방청석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정되는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교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강하였다. 교회나 어떤 모임에서든지 어떤 일을 할 때는 그 일이 옳고 그른 것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먼저 판단하고 그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도자이기도 했다. 모든 일에 기도로써 준비를 철저히 한 뒤에 했으며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지는 않았다. 대구 서문로교회 여전도회가 조직된 후 회장으로 일할 때 다른 교단들의 연합회 활동이 활발하고 그 수가 많은 것을 보고“우리도 경북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하자”는 신정순, 서옥련, 서경애, 김계초 등 당시 여전도회 회원들의 권유를 받고 한 동안 이를 보류하자고 했다. 그 이유는 개 교회 여전도회가 활성화된 뒤에 연합회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회장으로 일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헌신적으로 이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당시에 연합회의 회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은 어린아이를 기르면서, 혹은 가사에 몰두하면서 일해야 하는 형편에서 누가 선뜻 나서서 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다. 경북 여전도회의 회장의 사명을 지고 갈 초대회장의 중직에 대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조심스럽게 미루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박복달 권사는 한번 기도를 하면 계속해서 몇 시간씩 하는데 기도하는 중에 눈물이 비오듯 하는 때가 많았다. 찬송을 부르면서도 눈물바다를 이루는 때가 많았다. 그 후 약10년 간 경북에서는 고신교단이 진리를 파수하는 교회라는 거싱 인식되어 교회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교회의 여전도회가 조직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교단은 한때 다른 교단과 합동함에 따라 여전도회도 합동하여 경북 여전도회 연합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6년 경북노회가 환원할 때, 여전도회도 자연히 함께 나오게 되었다. 1964년3월10일에 경동노회 여전도회가 창립총회를 가졌으며, 그 해 9월9일에는 경북여전도회 연합회가 창립되었다.

7)뜨겁게 살다간 77세의 생애
1993년 9월 29일 서문로교회 교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장에는“내본향가는길”의 찬송가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고 박복달 권사가 이 땅의 수고로운 생을 마치고 천국으로 가는 발인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분들은 모두들 아쉬움과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지만,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한 박복달 권사는 하나님의 상급이 클 것으로 생각하고 위로를 받았다. 박복달 권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에 표준을 두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일도 열심이었고 교회를 지키는 일도 중요시했으며 교단의 일이 곧 내 일이고 내 일이 곧 교단의 일로 생각하며 일했다. 그러기에 29세 때 크게 은혜를 받고 77세까지 평생 그렇게 뜨겁게 살았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10년 동안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기틀을 잡았다.





2.우태숙(1915-?)

우태숙 선생은 일제말기에 최일출 목사로부터 은혜를 받고 해방 후 6. 25동란을 거치는 그 시기에 여성신앙 부흥사로 활동하였다. 그의 가정은 젊은이들의 신앙 훈련 도장이었으며, 주로 경북지방을 중심으로 각처에서 부흥집회가 열릴 적마다 많은 심령들이 회개하고 벼노하를 받았으며, 또 신실한 주의 종들이 많이 일어났다.

1)최일출 목사를 통해 은혜를 받고 주를 위해 사역
해방 전 그 당시 우태숙 선생은 최일출 목사를 통해서 은혜를 받은 분으로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한번 은혜를 받고 평생 주의 복음 위하여 사역하고 그를 통하여 주의 손에 잡히어 하나님을 위하여 많은 사역을 하였다. 그 결과 많은 일꾼드링 경북지방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2)남편을 섬기면서 주의 일에 열심
남편이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눈이 어두워져 장님이 된 가운데 남편을 지성으로 섬기면서 부흥집회를 하였다. 우 선생이 부흥 집회에 나갈 때는 꼭“여보 내가당신에게잘못한게있나?” 하고 남편에게 묻고 철저하게 회개한 후 부흥 집회에 나갈 정도로 열녀였다. 부흥 집회에 나가지 않을 때는 그 가정에도 매일 잔치 집 같이 밤도 없고 새벽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이면 찬송이요, 기도요, 눈물이었다. 우 선생은 항상 남편을 방에 앉혀놓고 철저히 기도의 제물이 되게 했다. 그리하여 남편은 완전히 기도로써 아내를 후원하였다. 우 선생은 강단에서나 사생활에서 나 항상 떨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3)부흥사 우태숙 선생
우태숙 선생이 처음 부흥회를 인도하였을 때 처음에는“저렇게 얌전한 가정주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잘 전할 수 있을까?” 하고 모두들 걱정을 했다. 그러한 관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강단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우 선생이 강단에 나타나시더니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삽시간에 온 회중을 사로잡았다. 부흥회가 끝나자, 여기저기서“과연 하나님의 능력이 주의 종과 함께 하시는구나.”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그가 부흥회를 인도하는 곳마다 큰 회개운동을 일으키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 우 선생의 설교내용은 주로 요한 계시록이었다. 우 선생이 말씀을 전한 때는 일제 말기와 8. 15해방과 6. 25동란으로 인한 동란의 시기였으므로 말세의식이 강조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우태숙 선생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회개한 남녀의 종들이 성경학교에 가고 신학교에 가서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뜨겁게 섬기는 일이 많았다.

4)근검절약으로 가정에서 주의 일꾼을 키움
우 선생 집에는 늘 5-6명의 훈련생도가 있었다. 그들은 20대 조금 넘은 젊은이들이며 주로 믿음 중심의 훈련을 장기간 받았다. 이들 훈련생들이 한창 많이 먹을 나이인데도 충분히 먹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다. 여럿이 큰 양은그릇에 밥을 놓고 먹었기 때문에 여럿이 몇 번식 퍼 먹으면 어느새 밥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우 선생은 부흥 집회 나가서 사례를 받아오면 신앙훈련 받는5-6명 키우는 것만 해도 벅찬데, 더 약한 사람을 도우며 개척교회를 후원하는 일에 다 썼다. 그러면서 우리도 자립 자족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새벽기도 갔다 오면서 채소도 주워오고 닭도 키우며 제재소에 가서 나무껍질도 주워오고 했다. 이렇게 우 선생은 가정보다 가정 밖의 일에 힘썼다. 항상 남을 돌봐 주고 베푸는 일에 힘썼다. 이 집을 통하여 많은 여교역자가 배출되고 개척교회들이 일어나게 되어 직접 연합회의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여전도회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3.명 향 식(1910-?)

사업실패로 삼간산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로써 은혜를 받고 신앙부흥사가 되어 전국을 일주하던 중 고신의 신앙인이 되었다. 무척산 기도원 원장이 되어 기도로써 많은 육신의 질병과 심령들을 고쳤으며, 은혜받은 자들이 신학교에 가 신실한 주의 종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1)신동이라고 소문났던 어린 시절
명향식 선생은 1910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때 이웃에서는 신동이 났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렸을 때 집안 어른이 멀리서 돈 주고 써온 축문을 잃어버렸는데, 다시쓰러 가자니 시간이 없어서 집안이 시끄러웠다. 그런데 어린 명향식이 그 축문 읽는 연습을 하던 것을 옆방에서 신기하게 여겨서 듣고 외웠기 때문에 다시 불러주면서 쓰라고 하니 문제가 해결되었던 일이 있다.

2)예수 믿고 새로운 인생 출발
고종황제가 승하하기 전에 만주 하얼빈으로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가서 거기서 결혼했고 해방이 되자, 김일성 환영대회를 한다고 소를 잡고 야단이었는데, 명향식이 이때 환영사를 했다. 어찌나 목소리가 카랑카랑한지 그 일로 단번에 고관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투쟁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고 있던 차 옆집 할머니의 전도를 받고 만주 목단강 제일성결교회에 갔다가 이성봉 목사님의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그 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3)멀고도 험했던 월남의 길
남편은 해방 전에 만주에서 작고하고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 고국으로 돌아와 월남하였다. 첫째로 돈이 있어도 조선으로 오는 기차를 타기가 어려웠고, 둘째로 조선에 와서도 이북이라 월남할 때까지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려웠으며, 셋째로 감시의 눈을 피하여 3. 8선을 넘어 남한에 온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어린 남매를 데리고 내려오는 여인의 몸으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여행이었다. 그런데 만주에서 기차 타기 힘들어 어려움이 있을 때 김일성 환영대회 때 환영사를 했던 일로 알려졌던 일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당시의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명향식 선생이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4)부흥사가 되기까지
명향식 선생은 서울에 와서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했는데, 돈을 가장 많이 벌어 장사한지 얼마 안 되어 첫 여자감독이 되었다. 그리하여 깡통 들고 얻어먹으러 오는 젊은이들이 있으면 무조건 신학 공부시켜서 배출시킨 목사가 20-30명 정도가 되었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만주에서 나온 인테리 친구가 보증을 서 달라고 했다. 내와가 큰 사업을 한다기에 믿고 보증으르 선 것이 잘못 되어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된 명향식 선생은 창신동 거리에서 가마니 거적을 치고 앓아 누웠다. 어느 날 아침에 가마니 거적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서 하나님의 못자국난 손을 본 것 같은 느낌이 있어“주여 못 자국을 보여주소서!”하고 기도하다가 삼각산에 들어가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중 지난 일을 회개하는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신유의 은사와 말씀 증거의 능력을 주시어 부흥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였다. 부산삼일교회 한상동 목사의 초청을 받고 집회를 인도한 후 고신의 신앙인이 되었다.

5)무척산 기도원이 생기기까지
진해 남부교회 여전도사로 시무할 때부터 다시 금식기도를 하게 된 명향식 선생은 기도원을 세우고자 하는 뜻을 갖게 되었다. 부산의 어느 여집사로부터 1940년 일제를 피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벌이던 분들이 무척산에 들어가 기도할 때 자신이 함께 가서 밥을 해 준 기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명향식, 표지현, 이정희 등 몇 분이 부산에서 트럭을 타고 그 흔적을 찾아갔는데, 허물어져 가는 빈 절이 있어서 거기 들어가서 기도했다. 큰 은혜가 임했다. 그 뒤에 그곳을 찾곤 했다. 그러다가 윤창수 선생이 기도원을 창립하다가 작고했고, 1954년에 명향식 전도사가 초대원장으로 부임했다. 그 뒤로 이 기도원을 운영하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내고 건물을 개축하였다. 이 기도원에서 기도하여 회개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질병과 심령의 병을 고쳤으며, 회개하고 신학교에 가 신실하나 목회자으 길을 걷게 된 분들이 많다. 특히 고신의 많은 여성들이 이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 명향식 선생은 특별히 금식기도를 많이 했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에 은혜와 신유의 은사가 있었다.





4.표 지 현(1927-2001)

25세에 재건교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전도사로 일하다가 삼일교회로 왔다. 고려신학교와 일본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국내외에서 부흥사로 활약하였다. 철원 수양관원장이 되어 짓고 운영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장기간의 금식기도로써 어려움들을 해결했으며 영력이 풍부하여 전국여전도회 회원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쳤다.

1)출생과 신앙 배경
표지현 전도사는 1927년 12월 14일에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아버지와 6. 25때 피난을 나왔다. 재건교회에 들어가 25세 때 큰 은혜를 받고 1954년4월까지 전도사로 일하다가 그 후로 부산 삼일교회로 왔다. 삼일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고려 신학교를 마쳤고1962년까지 계속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2)서울성원교회 건립
‘62년 가을에 서울 흥천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서울 흥천교회는 마포에 있는 서울 성원교회의 전신으로서 당시에는 서울의 가장 중심지인 북창동 지금의 시청 앞에 세웠기에 많은 고신 교인들이 서울로 오면서 의례히 흥천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교회당을 신축하면서 시험이 닥쳐오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교회당 대지가 YMCA땅인 것으로 알려져 매입하려 했으나 교회가 감당할 수 없어 교회당을 내어주고 남창동으로 옮겨야 하는 과정에서 표 전도사는 무척산에 가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함으로써 어려운 한 때를 이겨냈다. 그러던 중 명돈의 목사가 소천하고 최익우 목사가 부임했다. 그 때 표 전도사가 앞장서서 지금의 성원교회를 건립하였다. 표 전도사는 신앙의 그릇이 큰 분이어서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 발전을 위하여 말없이 헌신하였다. 그리고 전도사로서 교인들을 잘 보살피고 심방과 전도에 힘썼다.

3)일본 여자신학교 수학
표 전도사는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금식기도를 했다. 신학공부를 좀더 하고 싶어서 금식기도를 하는 중 9일 째 되는 날 표 전도사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던 일본의 목사로부터 일본 여자신학교에서 여자 신학생 두 명을 장학생으로 공부시켜 주겠으니 일본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기도의 응답이었다. 표전도사는 권 전도사라는 분과 같이 일본에 가서 공부를 마치고 일본 동경에 있는 가쯔시까라는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사로 시무했다. 마침 같이 간 권 전도사가 어떤 남자 전도사와 결혼하게 되었으므로 그 교회를 그들 부부에게 맡기고 자신은 서울 중앙교회 전도사로 초청을 받아 한국에 다시 왔다.

4)무척산 명향식 선생의 후계자
무척산 기도원장 명향식 선생은 늘 표전도사에게“당신은 내 후계자다.”고 말하면서 점찍어 놓았다. 명향식 선생이 소천하자, 표전도사는 얼마동안 무척산에 가서 원장으로 시무했다. 1982년에 부산 영도에 있는 임마누엘 모자원 겸 기도원에서 초청하여 88년까지 그 곳에서 원장으로 시무하였다.

5)철원수양관 완공과 운영
서울, 경기 지방의 교인들, 그 중에서도 여전도회 회원들은 항상 표전도사를 잊을 수가 없었다. 몸이 불편하여 무척산으로 갔다가 부산의 모자원에서 모셔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항상 표전도사가 서울로 언제 돌아오는 일에 대하여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 서울, 경기 연합회에서 철원에 수양관을 짓는 중에 표전도사를 관장으로 모셔왔다. 수양관 짓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표전도사는 온 힘을 기울여 큰 강당, 식당, 숙소 등 크고 아름다움 수양관을 세웠다. 경기, 서울 연합회 임원들을 비롯하여 전 회원들이 누구나 표전도사를 존경하였기 때문에 단결이 잘 되어 그 어려운 공사가 이루어졌다. 수양관을 운영하는 데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그 어려운 일들을 다 처리해 냈다.

6)세속을 멀리한 강직한 신앙의 실천인
1997년 IMF한파가 몰려오면서 각 교회의 여름, 겨울 방학 수양회가 거의 중단되고 많은 수양관들이 문을 닫는 시절, 관장으로서 운영난에 부딪혀 편할 날이 거의 없었다. 일이 없어 좀 쉬려고 하면 꼭 병마가 찾아왔다.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았다. 자신이 철원 수양관에 있으면 지장이 있으므로 은퇴여교역자 생활관으로 가겠다고 늘 그랬다. 그러나 회복의 가망이 없게 되어서야 은퇴여교역자 생활관으로 내려왔다. 2001. 3. 27일에 향년 73세로 하나님이 불러가셨다. 표전도사는 중심에 하나님만을 모시고 살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 금식기도를 함으로써 극복하였다. 기도를 특별히 많이 하는 분으로 영력이 풍성했고 수 많은 여전도회 집회에서 설교를 통하여 여성들의 신앙향상에 기여한 바 크다.









III.진리운동 계승 인물 열전

초창기부터 신앙선배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면서
그 유산을 물려받고 후배들에게 이를 이어준 분들이 있었다.
고신의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연합회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말기부터 순교정신을 실천하고 해방 후 진리전파의 부흥사로 활동한 신앙선배들이 앞장서서 회를 이끌어간 것도 중요하지만 그 뒤를 받쳐주면서 이를 계승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준 인물들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경순, 신정순, 김계초, 이점숙, 차은희 등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1.주경순(1923-)

산 순교자였던 부친 주남선 목사의 교훈을 받고 자라난 주경순 권사는 부친의 옥중생활 동안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는 중에 일본에 건너가 산파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마산에 조산소를 설치하여 사회에 봉사, 헌신하는 한편 거기서 불우한 아동들을 보고 수입된 금액으로 애리원을 설립하여 평생을 그리스도(기독)의 사랑으로써 불우한 아동들을 보살피는 일을 해 왔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초창기부터 임원으로 계속 활동하면서 1985년부터 2년간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1)부친 주남선 목사의 교훈
주경순 권사는 1923년에 거창 하동에서 부 주남선 목사, 모 남술남의 4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11살 때 거창에서 서오성 여선교사가 경영하던 명덕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4년제 초등학교로서 극빈한 아이들이 다녔고 일반 보통학교보다 성경 한 과목이 더 있었다. 부친 주남선 목사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늘 기도하였다. 주 목사는 자녀들이 잘못 했을 때 엄하게 벌을 내렸다. 자녀들이 많았던 주 목사 가정은 청빈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경순은 가족들과 함께 끼니를 넘기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주 목사는 아이들에게 늘“배고픈 사람이 우리들뿐이냐?”하시면서 참아야 한다고 했다. 주남선 목사는 딸에게“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해야지.”하셨다. 주경순은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대로 먼저 기도를 하고 공부를 했다. 기도를 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공부하는 요령이 생기는 것이었다. 성적이 놀랍게도 향상되었다. 진주 시원여학교를 마치고 동래 일신여학교에 입학하는 일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고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아버님이 옥중에 계실 때 집안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할 형편에서 동래 일신여중에 다니다가 오빠 경도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들어갔다. 1945년 해방 전에 일본에서 경도산파 학교를 졸업했다.

2)부친 면히의 날
1942년 더위가 한창인 8월 초순 어느 날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나와 평양에 올라왔다. 그리던 아버지의 모습은 형편 없이 변하여 알아볼 수 조차 없을 정도였다. 면회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경순은 계속 울기만 했다. 평양에 남아서 아버지를 도우려 했지만 그것조차 어려운 형편이어서 다시 거창으로 내려왔다. 거창에 내려와서 본 가족의 참상은 매우 딱하였다.

3)다시 만난 부친과 딸
해방이 되어 일본에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주경순은 옥중에서 석방되어 돌아오신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아버지가 거창으로 다시 오신 이날 많은 사람들의 인사가 있은 후 밤에 가족끼리 남았을 때 부친과 오랜만에 정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4)사회사업 활동
주경순은 해방 후 결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기 위하여 애썼고 고아사업에 뛰어들었다. 마산 인애원 창설과 동시에 부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해방 이듬해인1946년에는 조산원과 간호원 자격을 취득했다. 인애원 부원장 재직 시에 12년간 산파로서 혹으느 간호원으로서 왕진치료하며 조산소를 운영하여 수입되는 금액을 고아들의 양육비로 희사하면서 아동들을 사명감을 가지고 돌보았다.1958년에는 마산 애리원을 창설하고 이사장 겸 원장으로 취임하여 고아와 결손가정 아동들을 친자녀같이 보살펴 왔다. 항상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하며 그리스도(기독)의 사랑으로 몸소 희생 봉사해 왔다. 이 일로 인하여 경남 도지사로부터 1960-1970년대에 4회의 표창을 받았고 1983. 11월에 국무총리표창, 2000 10월에 대통령 표창을 받은 바 있다.

5)교회 설립
주경순 권사가 함께 참여하여 설립한 교회는 신마산교회(신마산제일교회),마산제이문창교회, 마산중부교회 등이 있다. 이 중 마산 제이문창교회는 조수옥, 주경순, 손봉호, 김상원 등 네 분이 협력하여 세웠으며, 마산중부교회 설립은1976. 2. 22일 마산시 중앙동 2가 3번지 당시 주경순 집사가 경영하는 마산 애리원 강당에서 이근삼 목사 인도로 조수옥, 주경순, 최병희, 이종은, 김학순, 이무희, 주남천, 신필원 등과 70여 명의 가족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루어졌다.

6)전국여전도회연합회 활동
전국여전도회 활동은 창립총회 때 재정부장으로 선출되어3회까지 역임하였고 4회 총회 때 부회계,6회,8회,10회 총회 때 총무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12회 총회 때 부회장,14회 총회 때 회장으로 피선되어2년간 회장으로 많은 일을 추진하였다. 총무 때 김복조 전도사가 은퇴 후 생활에 대한 보장이 없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총회에 건의를 하여 제11회 총회에서 은퇴여교역자를 위해1년 1차 헌금하자는 결의를 했는데, 이것이 후에 은퇴여교 역자를 돕는 일의 시발점이 되었다. 회장으로 일할 때,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이헌철 목사사로부터 현지에 신학교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고 주남선 목사 자녀 손들이 모금한 건축비로 이를 지원하여 살렘신학교를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본 연합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7)주남선 선교회 설립
주경순 권사는 산 순교자이신 부친 주남선 목사의 좌우명이자 가훈인“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신 말씀에 따라 오늘도 기도하며, 감사하며, 찬송하며 희생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최근에는 주남선 목사 직계 가족 중 목사가 배출되지 않은 점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세계 선교에 기여하기 위하여 미국 LA에 주남선 선교회 재단 법인 설립인가를 받아 이사장으로서 선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재단의 첫 사업으로서 ‘창녕안나의집’증축을 위한 헌금을 보내왔다.






2.신정순(1924-)

창녕에서 일제시대 유어교회를 세워 영수로 섬겼던 부친의 신앙을 이어받아 주일학교에서나 학교에서나 항상 모범생으로 자라났다. 학생 때 학교에서 신사참배 것을 괴로워했고 경북여고 졸업 후 교원생활을 했으나, 성경공부를 위해 이를 그만 두고, 박복달 선배의 인도와 최일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고 회개하여 성경학교 졸업하고 신학교 입학한뒤 전도사가 되었다. 박복달 권사와 함께 서문로교회 부흥에 힘을 기울였고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는 박복달 권사가 회장을 역임할 때 서기로서 뒷받침하여 회의 기틀을 세우는 데 오랫동안 힘을 기울였다. 16회 총회 때 회장으로 피선되어2년간 회장을 역임했고 고문으로 추대되어 연합회가 법도 있게 운영되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일을 해 왔다.

1)부친의 신앙과 자녀교육의 열의
신정순 전도사는1924. 3. 13일 대구에서 부 신현경, 모 이홍달의 9남매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부친께서 배재학당 다닐 때 선교사 통해서 복음을 받고 고향인 창녕에 유어교회를 설립하고 영수로 계시다가 장로 피택까지 받았는데 자녀교육 때문에 대구로 이사하셨다. 신 전도사는 아버지의 교훈에 따라 대구서문교회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는데 개근을 했고 항상1등을 하는 모범생이었다.

2)교문에서 빳빳이 서 있던 학생
한번은 주일날 학교에서 등교하라고 했는데 학교나 교회에서 빠져본 일이 없는 신 전도사로서는 여간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고통이 심했는데 그것은 등교 때마다 교문 앞에 있는 일본천황의 사진에 최경례를 하는 일이었다. 최경례란 허리를45도 굽혀서 하는 절로서 그렇게한 다음 고개를 다 들지 않고 숙인 채“오늘의 공부를 잘 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 후 또 최경례를 하고 일어서서 교실로 가서 책을 풀어놓고 도서실로 갔다. 도서실에는“가미다나”라고 하는 조그마한 집 모양을 벽에 붙이거나 구석에 놓았는데 그것을 보고 손뼉을 두 번 치고 절을 하고 또 손뼉을 두 번 치고 교실로 오도록 했다.
방학이 되면 날마다 신사에 가서 절을 하고“일참표”를 개학할 때 제출하도록 했다. 그런 중에 한번은 내 친구인 봉현이(박복달 권사 동생)집에 갔는데 그의 어머니가“신사에 절하는 것은 죄다.”“지옥간다.”고 하셨기 때문에 절을 할 때마다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일본 사람인 모리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신사에 몸을 굽혀도 마음으로 절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고 서문교회 장로 한분은“권세 있는 자에게 순종하라.”는 성경 말씀을 들어 설명을 해 주었기 때문에“하나님,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해 보았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마음이 꺼림칙함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복달 선배의 동생 봉현이가“나는 남들이 절할 때 빳빳하게 서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더라.”고 했다. 그래서 신정순 자신도 교문에서 그렇게 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키가 커서 그랬던지 교장선생님에게 발각되어 왜 절을 안 했는지 그 이유를 말하라고 했을 때 “박봉현의 어머니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했다.”고 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다음날 박봉현의 모친은 학교에 호출되어 교장실에서 문책을 받은 일이 있다.

3)회개의 신앙
신 전도사는 당시 경북여고를 졸업한 후 보통학교 교사 자격검정을 거쳐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 때 자신은 신사에 절하지 않았지만, 신사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절을 시키는 일이 더욱 괴로웠다. 어느덧 방학이 되어 집에 오게 되어 맨 먼저 박봉현의 집에 갔다. 그 때 박봉현의 언니인 박복달 선배가 막 은혜를 받고 성경공부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었다. 박 선배는“정순아, 우리 이때까지 예수 잘못 믿었다. 이제부터라도 예수 잘 믿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였다. 거기서 신전도사는“회개”의 체험이 없어 어리둥절했다. 그날까지 예수 믿었는데 지은 죄를 다 회개해야 한다고 하니 그걸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깨달아서 적어보든지 해야겠는데, 아무리 해 보아도 앞이 캄캄할 뿐 죄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도하다 말고 일어나고 하기를 2개월이 넘었다. 그런데 그렇게 애를 쓰고 있던 어느 날 성경을 읽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전에는 교회갈 때 성경을 그냥 치장으로 가지고만 갔지 실제로 읽지도 않았고 읽으려 해도 읽어지지가 않았는데 그 때부터 눈이 띄어져서“이런 말씀도 있구나!”하고 깨닫게 되고 자꾸 읽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없는데서“아버지여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기도하면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기도하다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하기를 계속하던 중 하루는 박복달 선배로부터“최일출 목사님이 성경 가르치러 오신다.”고 하면서 오라는 전갈이 와서 가 보았다. 그때의 신앙 체험을 신 전도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일출 목사는 딱 꿇어앉아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감히 그 얼굴을 쳐다보지를 못하고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아이고 눈물이 마구 나오는 거라. 말씀을 듣고 나오는데 박 권사님이“이제 정순이 자가(저애가)되겠다. (바른 신앙인이 되겠다.)”고 했어요. 그 후 그럭저럭 지내는데, 박 권사님이 우태숙 선생 댁에서 성경 공부한다고 함께 가자고 해서 같이 갔지요. 그날 성경공부는 빌립보서1장이었고 공부에 참여한 사람이 몇 사람 되지도 않는데도 불이 떨어지듯 마음이 뜨거워지고 은혜가 넘쳤지요. 그런데도 통성 기도를 할 때 다시 입이 열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옆에서 박복달 선배가 엉엉 소리를 내면서 가슴이 찢어져라 하고 통곡을 했어요. 내 마음에“저분은 이미 회개를 해서 죄가 없는데 나를 위해서 저렇게 울고 기도하는구나! 나는 외 이래 죄가 안 깨달아지는가?” 하는데 갑자기 내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지요. 남의 집인데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터지는 회개가 신사참배요, 그 다음에는 주님의 피 묻으신 십자가의 모습이 다가오는 것이었어요. 바로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다가오고 내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하고 그것이 콧물과 섞여 흐르면서 마음속에는 영화필름이 돌아가듯이 내 죄악들이 좍 지나가는데 나는 계속해서 통곡하고 또 통곡했어요. 얼마 있다가 주님이 부활하신 모습으로 다가오시는데 그 모습은 나를 용서하시는 인자한 모습이어서 그 때 내 마음의 평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어요. 그 전에는 전도를 해도 하늘과 나 사이에 뭐가 딱 막혀 있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탁 트이는 것 같았어요. 이 때까지 주일 안 범하고 열심으르 가지고 잘 믿어보려고 하는 중심은 있으면서도 주를 온전히 섬기지 못했었는데, 우태숙 선생 댁에서 은혜를 받고 천지가 뒤집혀버리고 막혔던 것이 다 터져버려 하나님과의 사이가 마치 살아계신 부모님을 대하는 것 같았어요.

4)성경학교 졸업과 신학공부의 길
오종덕 목사가 이북에서 와서 신사참배 문제로 피해 다녔는데 해방이 되어 성경학교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당시 신정순 선생은 박복달 선생과 함께 성경학교에 가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래서 신정순 선생은 학교 선생님을 그만 두고 집에서 성경공부만 하면서 기다리던 중 해방 이듬해인1956년1월에 대구 동산성경학교가 개교되어 그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말씀에 대하여 더 공부해야 겠다는 일념으로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어서 예과를 하고 본과에 들어가 1학년에 다니고 있는데 젊었을 때 너무 허약한 몸이라 좀 쉬었다가 공부하려고 집에 왔는데 그 후 1주일 만에 6. 25가 터지고 학교는 휴교가 되었다.

5)대구 서문로교회 설립 위원
1951. 8.17일은 大邱(대구)서문로교회가 세워진 날이었다. 대구서문교회서는 그 당시 박 복달 선생의 가르침을 통해 모두 은혜 받고 한상동 목사의 부흥회 인도로 교회가 부흥 되고 있었으나, 한편에서는 이런 현상을 눈에 거슬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횡서 결정하기를 고려신학교의 정신과 사상을 따르는 자들은 1951. 8. 25일까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노회원은 노회에서 치리하고 교인은 당회에서 치리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다르지 않는 사람들은 당회에 불려가서 고려신학을 추종하는 그 사상으르 버리라고 심문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때 심문 받은 몇 사람들은“고신측이 잘못한 게 뭐 있고 고려신학교가 잘못 가르친 게 뭐 있는가를 지적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답변해 주지 않고 다만 말 안 듣는다고 해서 김주오, 박복달, 신정순, 김계초, 서옥련, 서경애 씨 등6명을 제명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쫓겨 나와서 세운 교회가 大邱(대구)서문로 교회가 되었다.

6)전도사의 길
이 때는 피난민들이 많이 내려올 때였다. 그래서 교인들도 많이 불어나는 시기여서 전도에 불이 붙었던 때였다. 그 때 신정순 선생은 전도사가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고 미션스쿨 성경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피난민들을 보고“저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박복달 선배와 전도에 대하여 의논하려고 댁으로 찾아갔다. 박 선배가 갑자기 하는 말이“니(너)전도사로 두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사실 이때 신정순 선생으로서는 전도사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전도사는 그저 전도부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입이 딱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2세에 은혜 받고 성경학교 3년, 예과2년, 본과1학년 때였으니까 그 때 신전도사 나이27세였다. 거기다가 박복달 선배가 거창하게 청년전도회 전도사 환영회를 하라고 하니까 일부에서는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

7)교회를 돌보느라 늦게야 신학교 복학
대구 서문로교회가 설립되고 그 뒤에 휴교되었던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그러나 신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대구서문교회에서 제명 받아가지고 나올 때 나온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신학교 공부하다 휴학한 일이 마음에 있어서 해마다 박 복달 선배에게“나 신학교 갈렵니다.”하면“너 교회 형편보고 가겠거든 가거라.”하니까 교회 형편이 어려운 때라 차마 복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세월이 지나고 머리에 흰 게 나오고 돋보기를 끼게 되어서야 교회에서 신학교 가는 일을 허락하였다. 그 때 김용도 목사님이 “전도사님 참말로 학교에 가시렵니까?”하고 물었다. 그 때는 권임규 전도사님이 오신지 2-3년 되어 교인들의 집도 좀 알고 계신 때인지라 목사님의 물음에“아이고 그래 내 갈란다.”하고 대답했다.“그러면 당회에 말해주겠습니다.”하더니 결정됐다고 해서 학교에 갔다. 그 때가 48세 되던 해이다. 말하기 좋게 만학이라고 하지만, 교회일을 맡고 있으면서 신학교 다닌다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 독후감 쓰랴, 뭐 요약하랴 하는 등 숙제가 있고 거기다가 또 히브리어 헬라어도 해야 되니 이 시절에 대구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왕래하면서도 창밖을 한번도 내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교회에 오면 또 일이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일도 다 처리하고 또 매주 연습으로 설교를 한편 씩 작성해 냈다. 본과3학년 때에 기차에서 창 밖을 좀 내다 보면서 다니게 되었고 51세에 신학교를 졸업했다. 신 전ㄷ사는 이와 같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배움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살면서 새로운 시대에 변화하는 새로운 삶을 추구하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했다.

8)감사의 삶
大邱(대구)서문로교회 시작부터 평생 섬기다가 43년 만에 은퇴했다. 젊었을 때 오빠들이 결혼시키려고 방에서 의논하고 있는데 신전도사는 결혼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어서 방에 들어가서“나는 결혼 안 할거라.”고 하니까 오빠들이 놀라서“아버지께서 일찍 은혜 받으셔 가지고 새벽마다 찬 물에 목욕하시고 산에 가서 기도하시는 어른이셨으니까 정순이도 지금 한창 열심이니까 저러느니라.”하였다. 이에 대하여 신전도사는“22살에 은혜를 받아 놓으니까 그런 일에 마음을 기울여 볼 수도 없고 완전히 하나님이 사로잡아 주셔서 불편한 것도 없고 힘든 것도 없고 어려운 것도 없고 오로지 이 길에만 달음질하게 해 주셔서 감사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9)전국여전도회와 신정순 전도사
전국여전도회라고 하면 신정순 전도사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신 전도사는 항상 중심에서 있었지만 신 전도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기에 표준을 두고 일해 왔다. 신 전도사가 걸어온 길에는 앞에 항상 박복달 권사가 있었고 전국여전도회에서 일하게 된 데에도 역시 박복달 권사의 영향이 컸다. 이 두 분이 짝이 되고 조화를 이루어 초창기부터 전국여전도회의 발전에 헌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신전도사와 박복달 권사와의 관계는 앞으로의 전국여전도회를 이끌어나갈 후배들에게 많은 귀감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다.5살 때부터 하나 동네의 바로 이웃 집에서 자라왔고 딴 사람에게는 형님이라는 말을 안 하는데 은혜를 받고 나서 신전도사는 박 권사를 형님으로 모시며 살아온 신전도사는“박 권사님은 모든 일을 파워 있게 해 나가시는 분으로 나는 늘 뒤에서 박 권사님을 보살피는 일을 해 왔다. 박 권사님이 회장 하는 동안 서기로서 열심히 일했다. 그때 참 일이 많았다. 모든 일을 준비해야 했고 처음 몇 년은 회의록도 기록하다가 나중에 회록서기를 세웠다.”고 사실적인 고백을 한다. 회장 맡았을 때는 우리 전국 여전도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일심으로 일하였다. 지금도 변함 없이 고문으로 수고하는 그는“앞으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이 회르르 확장시키며 본이 되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사업을 더욱 힘 있게 아름답게 이루어 나가는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되어지기를 소원한다.”고 말한다.








3.김계초(1925-)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의 응답으로 23세의 처녀 때 회개의 은혜를 받고 신앙선배들의 정통 순수 신앙을 계승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여 전국 SFC신앙수련회를 눈물바다를 이루게 하였다. 대구 서문로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광주지역의 부름을 받고 10년간 일하는 동안에 그 지역의 많은 교회들이 고신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를 일으켰고 전국 여러 곳에 개척교회를 설립하는 데 동참하여 고신교회의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초창기부터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1990년부터2년간 회장을 역임하였다. 회장으로서 소련 선교사의 초청을 받고 방문하여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그 곳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돕는 일을 했다.

1)어머니의 기도
김계초 전도사는 1925년 경주 안강읍에서 부 김현택, 모 김경기의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언니가 일찍 천국에 갔기 때문에 무남독녀 같이 자랐다. 부모님께서 모두 열심히 믿으셨기 때문에 어릴 때 어머니께서 새벽기도를 가시면 일찍 일어나 따라가곤 했다. 부모님이 애지 중지하면서도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니도록 신경을 많이 써 주셨다. 그 때는 교회 건물이 없어서 사립학교를 빌려 주일날만 교회로 사용하였다. 어머니는 늘 딸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다. 어머니의 기도 제목은 늘 딸이 예수 잘 믿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기도가 응답되어 김계초는 일찍부터 주일학교의 가르침에서 은혜를 받았다. 그때는 교회가 사회개혁의 앞장을 서서 교인들이 어깨에 금주의 띠를 띠고 금주가를 부르면서 시위를 했는데 어린 김계초는 어른들보다 더 잘 부른다고 그 행렬에 꼭 끼워주었다.“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 기력 손상하니 천치 될까 늘 두렵다. 아, 마시지 말라 그 술아, 보지도 말라. 그 술 조선 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소리소리 지르며 발이 붓도록 시위를 했다. 그 때 믿음이 있는 어린이들은 주일학교 선생님을 존경하였고,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하여 가르치시면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어머니의 눈무어린 기도로 김계초는 바로 그러한 주일학교 모범생으로 자라났다.

2)주님의 임재 체험
해방 직후 출옥 성도들이 나와 한국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참된 회개 밖에 없다는 것을 외쳤다. 이때 교회들은 이곳 저곳에서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의식이 있는 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문제를 통하여 괴로워하고 새로워져야 하겠다고 회개에 힘쓸 그런 시기가 온 것이다. 그 전부터 김계초는 신사참배가 잘못이라는 것을 항상 믿고 있었는데 해방이 되어 그런 것들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 한 직장 친구의 인도를 받고 대구서문교회 박복달 선생의 집을 찾게 되었다. 박복달 선생은 자신을 변화시킨 분이 최일출 목사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가서 뵙자고 했다. 당시에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갔다. 최일출 목사는 김계초를 보고“긴박산 죽음 앞에 서 있는 사람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의 죄에 대한 구절을 뽑아 주셨다. 그리고 뜨겁게 기도를 해 주셨다. 김계초는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뒤로 교회에 가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밤새워 모기를 뜯기며 낮에는 직장생활 밤에는 기도로3일 동안 미친 듯이 기도하였다. 밤에 잠을 못자고 먹지도 않고 직장에 간다고 어머니께서는 염려가 여간 아니셨다.4일째 새벽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눈보다 더 흰 손이 머리에 와 닿는 순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만물이 새롭게 보였다.

3)특별 집회 강단에 서게 된 김계초
교회에서 직장에서 변화된 김계초의 모습은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기도회 설교부탁이 왔다.24세의 어린 나이로 부들 부들 떨면서 서게 되었다. 고려신학교가 설립되고 박복달 선생이 입학하였다. 박복달 선생이 보고 싶어 주일날 친구와 함께 부산 초량교회에 갔다. 대예배시간에 한상동 목사가 광고를 하는 중에 오후2시에 특별집회가 있는데 강사는 김계초 선생이라고 했다. 시간이 되어 교인들이 몰려와 자리를 꽉 메웠다. 그때 한상동 목사는 일찍이 뒷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설교가 아니었으나 자신이 감동을 받았던 본문을 읽고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말씀을 증거하였다. 말씀을 전하는 자신의 마음이 먼저 뜨거워지고 모두가 뜨거워진 마음으로 은혜가 넘쳤다.

4)대구 동산성경학교
은혜 받고 성경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오종덕 목사님이 하시는 대구 동산성경학교에 다녔다. 옛말에 주경야독이라는 말이 있지만 반대로 직장은 밤에 근무하고 낮에는 공부했는데 성경말씀이 꿀보다 단 체험을 했다. 그런데 오종덕 목사가 부산으로 가시고 김용구 목사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새로 부임한 교장이 어느 날 김재준 목사를 경건회에 세운 일로 파문이 생겼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총회에까지 상정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김계초는 학생 대표가 되어 투쟁을 했고 졸업을 앞두고 자퇴를 하여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 남은 과정을 마치고 고려고등성경학교1회로 졸업했다.

5)지도한 학생들의 회개운동과 전도사의 길
1951년에 대구서문로교회 소년부 부장으로 임명을 받았다.20대 처녀 집사로서 학생들을 지도하였는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이 전국SFC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학생들에게 주일 성수에 대하여 철저히 가르쳤다. 그 일로 학생들의 대학 입학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지만 바른 신앙의 길을 가게 된 많은 학생들이 믿음으로 살게 된 은혜를 입어 많은 인물들이 되어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끼치게 되었다. 서문로교회의 전도사로 임명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 광주 지방에 파송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당회장의 허락을 받고 가서 10년 동안에 광산교회, 염광교회, 무안교회 등 많은 교회들을 고신진영의 교회로 돌이키는 일을 하고 다시 대구로 왔다. 대구 복현교회, 조야제일교회 등 많은 교회들을 개척하는데 참여하였고 신학교 졸업 후 청도 반생교회, 서울 등촌교회 등을 개척하는 데 참여하였고 김천 은천교회, 양목제일교회, 상주도남삼일교회, 다시 양목교회에서 은퇴를 하였다.

6)러시아 선교의 길목에서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는 초기부터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20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어 2년간 하나님의 법도에 맞는 회를 운영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회장이 된지 며칠이 안 되어 소련 선교사로 가 있는 황 선교사로부터 초청이 왔다. 소련의 사정은 물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승용차1대를 보내주기로 결정했고 많은 물자를 싣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연합회 임원들의 노고가 많았다. 회장으로서 매우 감사했다. 소련에서도 감사함을 전해 왔다.






4.이점숙(1927-)

이점숙 권사는 유교의 전통을 지키는 가정에서 자라나 모친의 교육열에 의하여 당시의 명문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믿는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신앙인으로 변화되어 교회생활을 하는 중 많은 봉사를 하게 되었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10여 년간 회록서기로서 활동하였고 계속하여 임원으로서 활동하였다.1991-1994년에 일본 각지의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일본 평신도 선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대구 서문로교회 권사 은퇴, 그리고 남편의 소천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서 일본선교의 길을 생각했다.

1)어머니의 교육열
이점숙 권사는 1927. 8. 4일 경북안동에서 부 이완기, 모 김갑병의 2남5녀 중 2녀로 출생하였다. 완고하고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자라났다. 조부는 일본을 싫어했고 손녀들이 일본 교육을 받는 것을 꺼리었다. 그래서 늘“왜놈의 교육은 받아서 무얼 하냐?”하셨다. 그러나 모친은 딸이 다섯이나 되지만 딸들에게 일본 공부지만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분이셨다.“일본말로 공부시키기 싫다고 까막눈 면치 못하면 밟혀 죽을 일 밖에 더 있나? 배워라 나는 너희들을 학교 보내겠다. 배운 것 필요 없으면 버리면 되지만 까막눈 가지고 이 세월을 어찌 살려고.”하셨다. 그러면 조부는“너희 어미 요조숙녀인데 너희들 학교 보내는 것만은 못 마땅하구나!”하셨다.

2)경성여자사범학교 졸업
이점숙 권사는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경성여자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4년간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의 조부는 손녀가 일제의 교육을 받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모친의 덕택에 재능을 살려 공부를 열심히 하여 초등학교 졸업하고 경성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서울로 가서4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방학 때 집에 오면, 조부는“너와 나는 이제 민족이 다른 것 같구나. 너는 남산의 소나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더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친의 정성은 지극하였고 이점숙에게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북돋워 주었다.

3)결혼 후 교회 생활 중 신앙 체험
이점숙 권사는 학교를 졸업한 그 해인 1944년11월에 18세의 어린 나이지만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일찍 결혼을 하였다. 믿지 않는 집안에서 믿는 집안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교회 생활이 시작되었고 직장은 사면하였다. 이점숙 권사는 신앙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였던 당시에 초신자로서 엄청난 신앙의 갈등을 겪었지만 주님의 은혜를 받고부터는“나는 西門(서문)동1번지에 주께서 심으신 한그루의 나무, 여기서 곧게 자라 주 앞에 서는 날까지”라는 신앙 고백을 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이점숙이 거듭나게 된 데에는 박복달 선생의 영향이 컸다. 박복달 선생은 그에게 있어서 신앙의 스승이었다. 그래서 이점숙 권사는 박복달 권사를 늘“우리 선생님”이라고 한다. 구역 예배나 여전도회 때 설교를 들으면 말씀의 도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항상 사랑으로 대해 주시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중생(거듭남)의 체험을 했던 것이다.

4)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이점숙 권사는 제6회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총회에서 회록 서기로 선출되어 15회 총회까지 회록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리고20회 총회 때 선교부장,22회,24회 총회 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에 고문으로 추대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필체가 좋아서 약10년 동안 회록을 정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제주도 개척교회에도 다녀왔다. 임원으로서 회장을 보필하면서 어디든지 함께 다녀야 했고 회록서기로서 각종 회의에는 빠질 수 없었다. 참으로 꾸준히 일해 왔다.

5)일본 선교의 꿈과 그 실현
어렸을 때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열의로써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을 때는 한 때 일본을 미워한 적도 있었으나 그 교육이 오늘날에는 일본을 이해하고 일본에 복음을 전하는 꿈을 실현하는 데 유용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녀는 일본 선교를 염두에 두고 일본으로 건너 가 옛날 경성여자사범동창들을 만나보았다. 그 때 일본인여학생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경성여자사범 동창회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고 기념비도 세워져 있었다.1991년, 1994년,1995년에 걸쳐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둘러보면서 평신도 일본선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를 좀 더 완벽하게 걷기 위하여 1995. 5월에 북구주 신도성경학교에 입학하여1997년3월에 졸업하였다. 초교파적으로 운영되는 신학교였다. 남편 이완일 장로와의 사이에서 4남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50여 성상 주안에서 사는 동안 권사로 임명되고 또 세월이 흘러서 권사직도 은퇴를 하였다.2001년 남편이 소천한 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리해 보다가 문득 일본선교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6.차은희(1930-)

차은희 권사는 순교적 신앙을 지녔던 부모의 신앙 유산을 받고 자라나 신앙 선배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삶을 충실히 살아왔다. 일찍이 남편 김경래 장로와 함께 개혁신앙을 지닌 교역자를 모시고 교회를 개척하여 고신의 신앙을 지키는 교회 운동에 힘썼다. 경기여전도회, 남서울 여전도회연합회에서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초창기부터 임원으로 꾸준히 활동하여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현재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1)부모의 신앙유산
차은희 권사는1930년 부산에서 부 차재선, 모 백영옥의 남매 중 막내딸로 출생하였다. 부친 차재선 전도사는1902년에 동래에서 태어나1925년에 백영옥과 결혼하고 울산군 웅촌면에서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 전도사로 헌신하다가 1933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신 분이다. 출옥 성도의 한 사람이었던 이인재 목사님은 차재선 전도사의 유고집 서문에서“그가 전도자로서 헌신한 세월은10년에 미치지 못하는 짧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가 100년을 살아도 미칠 수 없는 사랑과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살고 갔다. 그가 밀양 마산리 교회에서 시무할 때 강단에 설 때마다 하늘의 생수가 강같이 흘러 듣는 이의 영혼을 성령으로 하나 되게 인도하셨다.”고 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되신 그 교회의 박 장로님께서 늘“그때 차 전도사처럼 성령과 함께한 귀한 설교는 내 평생에 못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차 전도사가 소천할 당시 어린 딸 차은희는 나이 겨우 4살 이었으니 부친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도 못할 때였다. 그러나 그렇게 어렸던 차은희는 원래 순결하고 철저한 영의 사람이었던 부친 차 전도사의 성품을 닮아서인지 영민하고 철저한 신앙인으로 자라났다. 모친 백영옥 권사는 남편이 소천한 후 남매를 길렀는데, 아들인 차병곤 씨 마저17세의 어린 나이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지 1년 1개월만에8. 15해방을 맞아 석방되었으나 1달 만에 쇠약해진 몸으로 순국하였다. 백영옥 권사는 한상동, 이인재, 조수옥 등 그 밖의 많은 주의 종들이 옥중에 있을 때, 옥중 성도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는 성금을 모아가지고 평양까지 가서 전달하는 일도 하고 주의 여종들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숨겨주기도 했다.

2)한상동 목사의 영향
차 권사가 무남독녀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던 어린 시절에 한상동 목사가 출옥하여 시무하는 초량교회 그리고 뒤에 삼일교회에 다니면서 한상동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학교를 마치고 청년이 되어 한상동 목사님 주례로 결혼도 했고 환도 후 서울에 올 때까지 계속 그 교회에 다녔다. 그리고 손봉호 박사를 만나 서울 영동교회와 한영교회를 함께 개척하여 섬기면서 아름다운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다. 항상 나이가 차 권사보다 한 살 위인 최성순 전도사를 앞세우고 전도하고 심방하는 일에 힘썼다.

4)연합회 활동
차은희 권사는 젊었을 때부터 경기여전도회연합회에서, 남서울 여전도회 시절에 걸쳐 열심히 참가하고 봉사했으며, 전국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될 때부터 오늘날까지 빠짐 없이 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초대 봉사부장으로 임명되어9회 총회까지 계속 활동하고 10회-15회 총회 때 회계,18-19회 총회 때에 재저웁장,20-21회 총회 때 부회계,24-25회 총회 때 서기, 26-29회 총회 때 부회장으르 역임하였다.30회 총회 때 변함 없이 계속 충성해온 공로가 인정되어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회관 운영이사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맡은 직책에 대하여 철저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늘 지혜롭게 활동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서는“젊고 유능한 사람이 회장을 맡아서 일해야 된다.”고 말했고, 그리고 자신은 남을 돕는 사람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지니고 연합회가 잘 되어 가기만을 바라고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면서 참가하였다. 항사아 유능한 인물을 아끼고 앞세우는 일을 많이 했다. 참으로 지혜롭고 아름다운 생각과 그 생각을 실천하는 삶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활동해 왔고 고희가 지나고 고문이 된 차은희 권사는 전국 여전도회연합회 후배들에게“우리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너무 너무 겸손하고 사양하면서도 일해 온 귀한 인재들이 많다. 우리는 선배들이 귀한 걸음 걸어온 것을 눈으로 봐 왔기 때문에 그 뒤로만 따라가면 귀한 일 많이 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한다.

5)남편을 내조하며 가정에도 충실
남편 김경래 장로님으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 하신 일과 신앙에 놀라지만 차은희 권사가 얼마나 충실한 내조를 했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사업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삶 속에서 이 부부의 삶에 대한 방향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슬하의 자녀들이 모두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김 트리오, 화가, 목사님 등으로 자라나 활동하고 있으며 자손들이 번창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차 권사가 평소에 교회를 잘 섬기면서도 평범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지니고 감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 무남독녀 외딸이라서 친정어미니가 계시면서 집안 살림을 다 보살펴 주신다. 자신이 효녀로서, 그리고 자녀들이 효자 효녀로서 또한 주 안에서 자녀들이 예수를 잘 믿어 효자 효녀가 되는 복을 받고 있다.



















제4부 회고와 전망


I.지나간 시대에 대한 회고


II.다가올 시대에 대한 전망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여호수아1:7)
이 장은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한다. 제1장은 전국 여전도회연합회의 창립에 대한 역사적 배경으로 사실상 논문으로 보면 서론에 해당한다. 그리고 제 2장 -제4장은 본론에 해당하며 제5장인 회고와 전망은 결론에 해당한다. 이 책의 내용을 생각하다보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에서 불러 내었던 일을 왜 자꾸만 확인시켰는지를 알 것 같다. 사람은 기억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망각의 존재이다. 400년간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을 때 큰 시련이 왔고 바벨론에게 짓밟히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다. 오늘날 우리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게도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그대로 살아 있음을 믿는다.30년간의 역사를 이루는 데 힘을 쓴 선배들이 모세와 같은 종이라면 앞으로의 후배 지도자들은 여호수아에 비유될 수 있다. 회고하건대 하나님께서30년 동안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막중하다. 이를 이어받아야 할 후배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또한 막중하다. 여기서 먼저 30년의 특성을 찾아 간략하게 이를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일에 대하여 전망해 본다.






I.지나간 시대에 대한 회고


1.말씀 중심

고신 교회의 여성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께서 내려주셨던 제일 큰 복은 말씀에 대한 역사다. 해방 전에 일어났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해방 후 고신교단에 소속된 교회의 진리운동으로 이어져 특히 6. 25이후에 많은 여성들이 말씀에 충만한 은혜를 받고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것은 주로 성경학교와 신학교의 가르침을 받은 여성지도자들이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①말씀을 통한 회개운동과 신앙 부흥의 역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하여 일어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많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공부의 열망을 갖게 했다. 그 모범적인 예로서 해방 전부터 대구의 우태숙 선생의 댁에서 일어났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운동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가인 최일출 목사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어 나중에는 우태숙, 박복달 선생이 신앙부흥 강사가 되어 많은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②성경학교의 영향
평신도들의 성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던 시기인 해방 후 오종덕 목사는 대구에서 동산 성경학교를 세워1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부산에서 고려 고등성경학교를 세워 많은 여성들이 성경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가르쳤다. 이 영향으로 많은 고신교단에 소속된 교회의 여성들이 말씀을 제대로 배워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가르치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③고려신학교의 영향
성경학교를 졸업한 많은 여성들이 해방 후에 세워진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말씀을 중심으로 한 진리 운동의 여성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닦아왔다. 특히 개혁주의 신앙의 실천운동을 통하여 말씀을 중시하는 신학교의 풍토에서 공부한 많은 목회자들이 배출되므로써 성경말씀을 중시하는 진리운동이 널리 퍼져갔다.

④부흥집회의 여성 지도자들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되기 전부터 박인순, 박복달 선생은 교회를 통하여 성경을 가르치며 부흥강사로 활동하였고, 우태숙 선생은 가정집에서 출발하여 경북 지방에서 부흥사로, 명향식 선생은 부흥사로 전국으르 순회하다가 무척산 기도원에서 많은 여성들에게 부흥 집회를 통하여 말씀의 은혜를 끼쳤고, 표지현 전도사는 부흥강사로서 많은 국내외의 집회를 인도하였다.

⑤전국 여전도회연합회의 신앙집회
정기총회와 각종 집회 시에 가졌던 각종 부흥집회를 통하여 교단 목사님들이 전적으로 말씀으로 지원해 주셨기 때문에 연합회의 활동이 말씀으로 시작하여 말씀으로 끝난 활동이라고 할 정도로 말씀에 대한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10월 총회의 개회예배와 신앙 집회만 있어 왔는데,80년대 중반 이후에 지도자 세미나의 부흥 집회가 열려15회 째 계속되고 있으며,90년도 말에는 신년신앙 부흥회가 시작되어 현재 3회까지 이어졌다.



2.선교 중심

①국내선교
창립이후 출발기인 약10년 동안에는 국내선교에 힘썼다. 미자립 개척교회들을 보조하면서 조명서 전도사를 파견하여 제주도에 고려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건축하고 목사로 세우며 제주 서광교회로 개명하여 자립하게 했던 일들은 국내선교의 역사를 이루어간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②선교사 파송과 후원
발전기인1980년대 중반 이후 해외선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집중 노력하게 되었다. 교단 총회선교부와 협력관계를 맺어 선교지와 선교사 선정의 도움을 받았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사 가족의 생활비, 자녀교육비, 활동비를 부담하였다.80년대에 들어와 인도네시아에 이헌철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가나에 이신철 선교사, 태국에 손승호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의 많은 열매를 거두는 가운데90년대에는 이미 파송한 이헌철, 이신철, 손승호, 박팔하 등의 선교사들을 전적으로 후원하면서 김자선, 강정인, 노정희, 박경숙, 김현숙, 김정아, 김선수, 황혜경 등의 여선교사들을 후원하고 세계 각지에 나기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하여도 지원을 계속해 왔다. 그 결과 선교지마다 놀라운 선교의 역사가 일어났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3.봉사 중심

①국가, 사회에 대한 봉사
30년의 역사는 한 마디로 봉사의 역사다. 돌이켜 보면 국가, 사회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놓였던 이웃들도 시대별로 많았다. 해마다 닥쳐왔던 수해로 인한 수재민을 도우는 일 등을 지속해 왔다. 직접 현장에 나가 각 연합회별로 봉사한 일도 많이 있지만 모금을 하여 신문사나방송국에 기탁한 일도 있다.1980년대의 한 때 외채 갚기 운동을벌여 모금한 적도 있었다.

②회원들의 사회복지 사업
사회적인 봉사는 연합회의 활동을 통해서 보다는 개인 사업을 통해서 더 많이 이루어졌다. 박복달 권사의 사랑의 원, 조수옥 권사의 인애원, 주경순 권사의 애리원 등은 그 대표적인 사업이라고 볼 수 있다. 박복달 권사는1967년에 육영학사‘사랑의 원’을 설립하여 불쌍한 고아들을 양육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들을 믿음으로 양육하여 자립하기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1993년 소천하실 때까지 전심전력하였다. 조수옥 권사는 해방과 더불어1945. 8월. 17일에 출옥하여 같은 해 12월에 인애원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불행한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어 원장으로 봉사하여 왔다. 일제시대의 순교적 신앙과 해방 후의 헌신적인 사회봉사가 널리 알려져 한국여성단체협의회로부터 용신봉사상, 일가재단으로부터 일가상, 유관순상위원회로부터 제1회유관순상 등을 수상하였다. 주경순 권사는 일본에서 경도산파학교를 졸업하여 산파와 간호에 대한 기술을 익힌 터에 해방 후 부친인 주남선 목사가 출옥한 후 고아사업에 뛰어들어 고아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일에 힘써 왔다. 경남 도지사로부터 4회의 표창과 국무총리 표창, 그리고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최근 미국 LA에 주남선 선교회 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③각종 보조를 위한 모금 운동
전국여전도회의 교회와 사회에 대한 봉사의 특기할 만한 사업으로는 은퇴여교역자 생활비 보조, 고신대 도서비 모금, 도서관 신축 모금, 교단 총회 회관 건축을 위한 모금, 고신대, 여자신학교, 간호전문학교, 미주 복음 신학교 등을 위시하여 해외에서 한국에 와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지급, 심장병 어린이 돕기. 북한 선교기금 모금, 북한 어린이 돕기, 노무자 급식비 보조 등을 포함하나 기타의 많은 봉사를 해 왔다. 최근에는 소련, 중국 등의 이웃나라와 북한 선교를 위해 물품을 모아 수시로 보내는 활동을 하고 있다.

④은퇴여교역자 생활관과 회관 건립
1990년대에 들어와 은퇴여교역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부터 위로금을 지급하고 위로관광을 해 왔고 의지할 곳 없는 분들을 위해 속소마련을 생각하고 있던 차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생활관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모금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이를 위해 전국의 회원들이 푼푼이 모금을 하여 약20억의 공사를 마무리하여 회관과 생활관을 마련했다. 회관운영을 통해서 청소년 수련을 중심으로 각종 수련회에 봉사하고 있으며, 생활관인‘안나의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은퇴 여교역자들을 보살피는 봉사에 힘쓰고 있다.






II.다가올 시대에 대한 전망

고신 교단의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앞날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배들이 지켜온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새로운 시대에 대처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보다 밝은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다.

1.순수 신앙 전통 계승
‘전통’은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것이 현재와 미래의 삶 속에서 가치를 발휘함으로써 유효한 것이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이러한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려면 비상한 노력을 통하여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삶속에서 계속 거듭나야 할 것이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단순히 옛날의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가 심한 현대의 삶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신앙의 표준을 지켜 나가야 한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창립 초창기부터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예배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경건의 삶을 실천해 오는 데 힘썼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회칙을 준수하는 태도로 회무가 처리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신아의 아름다운 전통을 세워 가기 위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 회칙 제4조를 참조해 본다.“본회의 목적은 여신도로 하여금 개혁주의 그리스도(기독)의 복음을 내·외지에 전파하며 각 연합회와 상호 협조하여 그리스도(기독)에 복음 사업에 헌신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2.전국적 교세의 균형 발전
초창기의 고신 교회의 교세가 경남, 부산, 대구, 경북, 전남,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던 것이 전국적으로 확산의 일로에 있다. 그러나 아직도 고신 교회의 교세가 약한 강원, 인천, 충북, 충남, 대전, 전북 지역의 전도와 교회설립을 통하여 전국의 회원 분포가 균형 잡힌 여전도회연합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단에서 신학대학원을 천안으로 옮긴 것도 전국에 균형 잡힌 교세의 확장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의30년은 전국적인 교세의 발전을 위하여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헌신적이고도 큰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3.통일시대의 북한 선교
북한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시대가 왔을 때 구체적인 정책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그 때는 이미 늦다. 모든 교회들이 북한 선교를 위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선교정책이 없다면 조직적이고 총체적인 선교를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앞장설 수가 없다. 이를 위하여 준비할 기본적인 일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책임분야를 설정하고 각 분야에서 활동할 인물들을 배치해 놓아야 한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부서조직에 북한 宣敎(선교)부를 두고 이 일을 통괄하는 부장을 임명하고 이미 기금을 모으기 시작한 자금을 관리하는 회계를 두어야 한다.
둘째, 재정적 준비를 해 놓아야 한다. 이미 모으고 있는 헌금을 모으며 선교에 필요한 물품과 자료 등을 공급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 말씀을 선포할 선교사를 양성하여야 한다. 북한에 선교의 문이 열렸을 때 그 사회에 알맞은 말씀을 전파할 선교사의 교육에 힘써야 한다.

4.기독교 문화 창달
문화란 삶의 양식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는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가 지녀야 할 문화는 성경적이어야 하며 그것은 경건하고도 신실하여야 한다.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건전한 문화화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라고 할 때 주 안에서 공경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중 중요한 하나가 언어의 사용이다. 예를 들면 상호간의 호칭상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 확립되어야 할 문화 양식은 성경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면이 들어나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창의와 실천을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주도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새 시대의 새로운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1.전국여전도회연합회 자료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여성과 선교(1-8호),1988~2000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총회록 및 보고서철
전국여전되연합회 총회 촬요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임원 회록
여성지도자 세미나(1회~15회)자료

2.기독교 단행본
고신 선교40년 편찬 위원회(이만열 외),고신선교40년, 총회 출판국,1998
교회문제연구소, 개혁주의 전통과 교회 성장, 총회출판국,1996
김수진,70년의 백합화, 쿰란 출판사,1994
김승태 엮음, 한국기독교와 신사 참배 문제, 한국기독교연구소,1991
김정순, 한국기독교여성운동사, 한국로고스연구원,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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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군식,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생애, 도서출판 영문,1994
심군식, 해와 같이 빛나리, 도서출판 영문,1984
역사편찬위원회(고신),한국장로교사, 고신출판사,1988
윤경로 집필, 새문안교회100년사, 새문안교회 역사편찬위원회,1995
이상규, 한국교회의 역사적 흐름, 총회출판국,1995
전호진 편집, 한국교회와 선교II,도서출판 엠마오,1985
조수옥 증언(와따나베 청취, 김산덕 옮김),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기독)인, 엘멘출판사,2002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본문과 현장 사이,2000
한명숙 외 편집, 경북여전도회연합회30년사,1994

3,일반 서적
진단학회, 한국사, 을지 문화사,1978









역대 총회 일정 장소 및 임원명단
회수 년월일 장소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부서기 회록서기 회계 부회계 감사 강사 총대수
1 71.8.4 서울중앙 박인순 조수옥 김봉수 표지현 신정순 조영진 심재연 김상철 68
2 72.10.8 부산삼일 박복달 박인순 김계초 신정순 김형옥 김봉수 조영진 홍만식 213
3 73.10.17 대구서문로 박복달 조수옥
박인순 김계초 신정순 김형옥 김봉수 조영진 조수옥 표지현 243
4 74.10.23 제2문창 박복달 박인순
표지현 조수옥 신정순 김형옥 조영진 주경순 조명서 207
5 75.10.15 서울중앙 박복달 박인순
표지현 조수옥 신정순 김형옥 조영진 주경순 조명서 247
6 76.10.13 신학대학 박복달 조수옥
표지현 조수옥 신정순 김형옥 이점숙 조영진 최성순 김옥실
최정옥 조명서 340
7 77.10.13 대구서문로 박복달 조수옥
표지현 조수옥 신정순 김형옥 이점숙 조영진 최성순 김옥실
최정옥 조명서 304
8 78.10.11 서울중앙 박복달 조수옥
표지현 주경순 신정순 김형옥 이점숙 장귀남 최성순 김옥실
최정옥
조명서 307
9 79.10.13 부산대연중앙 박복달 표지현
조수옥 주경순 신정순 김형옥 이점숙 장귀남 최성순 김옥실
최정옥 김주도 467
10 80.10.15 대구서문로 박복달 표지현
조수옥 주경순 신정순 김형옥 이점숙 장귀남 최성순 김옥실 최정옥 김주도 467
11 81.10.14 서울중앙 박복달 표지현
조수옥 주경순 신정순 김형옥 이점숙 장귀남 최성순 김옥실
최정옥 김주도 467
12 82.10.13 마산성막 조수옥 표지현
주경순 신정순 최성순 황미자 이점숙 차은희 박용주 김옥실
최정옥 홍반식 417
13 83.10.12 부산제일영도 조수옥 표지현
주경순 신정순 최성순 황미자 이점숙 차은희 박용주 김옥실
최정옥 홍반식 417
14 84.10.17 광주은광 주경순 신정순
표지현 조금주 최성순 황미자 이점숙 차은희 박용주 조청숙
박유만 심군식 390
15 85.10.16남서울교회주경순신정순표지현조금주최성순황미자이점숙차은희박용주조청숙박유만이근삼3941686.10.15대구동일교회표지현신정순주경순박용주김계초조영희최성순허옥경장귀남박유만주경희김병원6011787.10.14부산삼일교회표지현신정순주경순박용주김계초조영희최성순허옥경장귀남박유만주경희 오병욱5811888.10.12마산삼일교회신정순주경순김계초박용주강순자조영희장귀남박유만신영애주경희임종만5601989.10.11서문로교회신정순주경순김계초박용주강순자조영희장귀남박유만신영애주경희이헌철6082090.10.17부산사직동교회김계초박용주표지현최성순강순자오혜순장귀남박유만신영애주경희김정식6282191.10.16대구성산교회김계초박용주표지현최성순강순자오혜순장귀남박유만신영애주경희장희종7422292.10.14울산교회박용주최성순이점숙강순자오혜순박유만문초자장귀남차은희주경희옥필기박두욱6032393.10.13김해중앙교회박용주최성순이점숙강순자오혜순박유만문초자장귀남차은희주경희옥필기박삼우5922494.10.11전국여전도회관최성순이점숙강순자 오혜순차은희옥필귀문초자장귀남박유만정우점이명희이근삼7252595.10.15전국여전도회관최성순이점숙강순자오혜순차은희옥필귀문초자장귀남박유만정우점이명희정주채6572696.10.15전국여전도회관강순자오혜순차은희장귀남문초자심명자심경애박금순이금숙정우겸이명희심군식6532797.10.14전국여전도회관강순자오혜순차은희장귀남문초자심명자심경애박금순이금숙정우겸이명희 심군식653 2898.10.13전국여전도회관오혜순차은희조금주문초자박유만심경애이명희박금순안계선박경자김애숙조돈재6492999.10.12전국여전도회관오혜순차은희조금주문초자박유만심경애이명희박금순안계선박경자김애숙조돈재649302000.10.10전국여전도회관조금주문초자박유만박금순심경애이영욱이명희하영미주경희김애숙정우점서명자이종관634




경남 여전도회 연합회
<창립 총회>
75년도까지 기록이 없음, 고신 총회 후 이듬해로 추정이 됨
<회장 명단>
1대:김난출(1회~ ) 2대:조수옥(52회까지) 3대:최정옥(53회)
4대:손분남(54회~59회)5대:최위선(60회~63회) 6대:이영자(64회~67회)
7대:박명숙(68회~71회)8대:홍정숙(72회~75회) 9대:박천은(76회~79회)
10대:이숙자(80회~83회)11대:안성덕(84회~87회) 12대:최경자(88회~91회)
<2002년도 임원 명단>
회장:최경자
부회장:김은휘, 윤신애
총무:김정자
서기:유수남
부서기:우순자
회록서기:손의선
회계:박계선
부회계:장진희
감사:진상섭, 황원조
<주요 사업>
1.지회수:69교회
2.년2회 모임(4월,9월)
3.177개교회 보조했음(1976년 10월부터 현재)
4.현재 보조하는 교회:우암교회, 동성교회, 시호교회, 산남교회 이동한 선교사,SFC,중국선교,월산고신 후원
5.용원 장애인, 군선교, 거성군인교회 피아노 기증



경북 여전도회 연합회
<역대 회장 명단>
1대:박복달(1회~23회) 2대:신정순(24회~25회) 3대:옥필귀(26회~27회)
4대:성은주(28회) 5대:옥필귀(29회~30회) 6대:이영애(31회~32회)
7대:황순옥(33회~34회) 8대:석정자(35회~36회) 9대:박정강(37회 현재)
<2002년도 임원 명단>
고문:양소선, 신정순, 옥필귀, 석정자
회장:박정강
부회장:이송자
총무:박혜자
서기:임명애 부서기:박정숙 회의록 서기:안선자
회계:박영숙 부회계:김연이, 이문자
<주요 사업>
1.3개 시찰,36개 교회,28개 지회
2.11개 교회 각200,000원씩 보조(상인, 대구성삼, 백운, 가좌, 대구방촌, 달서대동, 목양, 가태, 신화, 가야, 청송장전교회)
3.강정인 선교사 매월100,000원씩 보조
4.박현수 선교사 매월80,000원씩 보조
5.SFC매월50,000원씩 보조
6.양소선 전도사100,000원씩14개월 보조
7.경북 여전도회 연합회 샬롬합창단 매월150,000원씩 보조
8.방촌, 성삼교회, 미주 고신 새각500,000원씩 보조
9.강정인 선교사 위로금400,000원 보조
10.전국여전도회 회관 비품비1,000,000원 지원
11.전국여전도회 연합회 여교역자 생활 보조비300,000원, 회관 운영비6,843,000원, 선교비5,600,000원, 상회비 1,465,000원 지원


p.273
<역대 회장 명단>
1회~22회 기록 불명 박인순(23회~25회) 김두연(26회) 정학분(27회)
김수자(28회) 김봉수(29회) 김형옥(30회) 박용주(31회~32회) 박경연(33회~34회) 박용주(35회~36회) 박희숙(37회~38회) 이금숙(39회~40회)

이점숙(41회~42회) 박경자(43회~44회) 김광자(45회~46회) 정미경(47회~48회) <2002년도 임원 명단>
회장:김도연
부회장:김영애, 박유만
총무:황정옥
서기:정용순
부서기:김영란
회록서기:김은도
회계:하소순
부회계:박선현, 문기화, 김경수, 박정숙
<주요 사업>
1.44개 교회245개 지회
2.매월 둘째주 목요일 월례회로 모임
3.선교부:선교사 지원(13명)
4.전도부:미자립 교회 및 기관 보조(34곳),기도회 개최(3월),부흥회(5월),농어촌 미자립교회 순방 보조
5.교육부:성경퀴즈대회(7월),암송대회(9월),성경다독자, 성경쓰기 시상
6.음악부:연합찬양대 운영, 성가경연대회(8월)
7.봉사부:부산역장병 휴게실 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