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상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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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이상근 목사님


이상근 목사의 생애와 사상
저자명김세련 학술지 嶺神論壇 제2호 (2001. 12) pp.161-173 출처嶺南神學大學校附設嶺南神學硏究所 문서유형학술지논문 발행일 2001 발행국가한국 발행언어한글 청구정보230 ㅇ257 조회수46 국회도서관으로 이동하기 (국회도서관 페이지에서 원문 확인 불가)



칼 융의 개성화 과정으로 본 이상근 목사의 영성 연구
저자명김택년 학위수여기관영남신학대 신학대학원 학위수여일2003.02 전공분야목회상담학 문서유형석사학위논문 발행국가한국 발행언어한글 청구정보253.5 ㄱ942ㅋ 조회수11 국회도서관으로 이동하기 (국회도서관 페이지에서 원문 확인 불가)









문익환 목사님과 이상근 목사님(1) 풍성한 얘기들


2005/10/20 blog.naver.com/c561119/18548369


문 목사 방북으로 교계가 시끄럽던 1989년, 교계 보수 인사들은 한국기독교
총연합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 5월 2일에는 예년과 다름없이 여의도 63빌딩
에서 제21회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예장통합 총회장을 역임한 이상근
목사(당시 대구제일교회)는 이날 설교에서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지금
부터 한참의 세월이 흘러간 후 아무 이해에도 무관한 사가에 의해 오늘의
정세가 정당하게 판단될 것이다"


5년 만에 내려진 역사적 평가

이 목사의 설교처럼, 역사는 그다지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은 1994년, 문 목사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방북을 "정당하게 판단"했다. <조선일보>는 1994년 1월 19일자 신문에서 문 목사를 "재야운동권의 대부"라고 평가했다. <한국일보>는 "일제-분단-독재 온몸으로 맞선 시대의 양심"이라고 추켜세웠다. "인간의 가슴을 지닌 들풀"이니 "민족의 큰 별"이라는 수식어까지 등장했다. 불과 5년 전 핏대를 올리며 그를 비난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의 죽음 이후 10년. 당시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습을 찾기 어렵다. 복음주의 안에서는 여전히 껄끄러운 존재로 남아 있는 문익환 목사. 우리는 눈이 부셔 그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올해 10주기 추모행사 역시 보수적인 교회들의 무관심 아래 치러졌다.

***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문목사님과 이목사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서 따왔다. 이목사님은 내가 직접 모셨기에 당시 상황을 더 잘 이해하리라 여긴다. 또 당시 교회에서는 8.15를 맞아 수요설교를 내가 했다가 문제가 되어 이 목사님께 불려갔던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야사에 해당되겠으나 당시 있었던 애기도 다음에 해 보려고 한다.
역시 거물은 거물이었다. - 두분 다--

[출처] 문익환 목사님과 이상근 목사님(1)|작성자 신앙얘기





서울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편
2007.11.12 17:04 | 05).설교평론마당 |

kr.blog.yahoo.com/yk1399/345

이성희 목사는,1960년-1990대까지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로서 특히 설교가로써 명성을 떨치시던 이상근 목사님의 둘째 자제분이다. 평론자 개인적으로는 1962-1966년까지 이상근 목사님을 보좌하면서 대구제교회 교회전도사.강도사로서,교회를 위해 봉사할 때, 경대사대 부속고등학생이었다. 얼굴 색은 희고, 미남형으로 잘 생긴 청년이었다. 키는 그 당시에는 작다고 할 수 없는 보통키었다. 아주 암전한 모범학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인 사모님의 자식들의 대한 애돗한 사랑과 신앙 훈련에 특히 심혈을 기울이시는 그런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평론자는 작년부터 틈틈이 C3TV 동영상을 통해 그의 설교를 자주 들었으며, 본 연구소가 설교비평을 하기로 생각하고 난 후인 최근에는 여러가지 잣대를 가지고 주의 깊게 들어 보았다. 아래와 같이 장점을 "칭찬하고 싶습니다."로 바꾸고, 단점을 "참고해 보세요"로 바꾸어서 평하고저 한다:

가). 칭찬하고 싶습니다: 1). 父傳子傳- 그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이상근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흡사하게 닮았다. 우선 설교 제스추어가 손을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듯한 모습, 말하는 "스피드" 역시 아주 빠르게 달린다. 그리고 어휘 구사에서 "......요" 하는 것의 액센트까지 닮았다. "....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 하드라구요", 등등 이다. 그러나 음색(音色)에 있어서는 이상근목사님은 가늘고 예리한 면이 있는데, 그는 조금 톤이 평음(平音)이고 음색은 보통이다. 이상근 목사님은 본문설교를 많이 하는 편인데, 그는 제목설교를 많이 할 뿐이다.

2). 설교시작의 첫마디가 회중들의 시선을 끈다. 웅변이나 설교나 연설이나 시작 첫마디가 아주 중요하다. 어떤 목사님은 첫 마디부터 예를 들면, "인생은 언제나 기회를 어떻게 잘 선용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삶이 성공으로 가는 인생이냐, 실패로 가는 인생이냐를 판갈음하는 것입니다."라는 첫 마디의 입을 열 때,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함으로서, 회중은 숨을 죽이고 경청하게 끔 한다.무게가 있어 보인다. 이 방면에 제일 잘하셨던 분은 박종렬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성희 목사는 거의 첫마디가 간단한 격언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어떤 위인의 이야기 등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상근 목사님과 같이 서론 전개가 아주 좋다.

3). 논리가 정연하다. 그의 설교 "약함을 강하게 하는 비결"(시138:1-3, 고후12:7-10, 2006. 3. 26.자 설교, " 열들감을 극복하는 자세"(민13:30-33, 빌4:11-13, 2006. 3. 26.자 설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시118:27-29, 마27:45-46, 2006. 4. 9.자 설교) 등은 전부 제목설교이다. 제목설교는 인간의 문제성에 대해서 <질문>하고, 그 해답을 성서에서 찾아 논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목사도 이 원리에 입각해서 논리정연하게 인간의 "아픔"(문제)과 그의 대한 "치유"(해답)로서, 성서에로 귀결하여 입증해서 답한다. 본문설교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시122:1-3, 마23:37-39, 2006. 4. 2.자 설교)라는 제목의 설교이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고 애달프게 우는 예수님의 정서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구약의 히스기아가 병으로 죽을 것을 알고 ,하나님께 눈물 흘리며 간청한 기도의 울음을, 베드로의 회개의 울음 등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울음은 하나님의 자녀를 안전하게 모으려는 울음이었고(하나님의 심정으로), 또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할 것을 아시고 운 울음이었다"고 해석하면서(Text), 우리들의 실존적 상황적으로 <서울>을 우리 기독자들이 부도덕한 것을 위해 우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Context) 서울이 깨끗한 대한민국의 수도가 될수 있도록 해야 할 사명이있다고 강조하면서 결론을 맺고 있다.

얼마나 논리정연하며, 제목설교와 본문설교의 선명한 구분을 하면서 설교의 목적의식이 분명해서 무슨 말인가를 잘 알도록 설교했다. 많은 목사들이 아직도 이런 원리하에 설교를 하지 못하고, 소위 <덤불>(Bush) 모양으로 숲 때문에 나무가 보이지 않는 것 처럼 설교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를 선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덤불설교를 하는 자가 많이 있는데, 이 목사는 아주 분명하게 잘하고 있다.

4). 어떤 예화를 들어서 회중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도 아주 좋다. 유머어는 딴 생각하던 사람이나, 집중력이 흐려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이 나게 하는 <청량제>(淸凉劑)와 같다. 설교자에게 주의 집중케하여 열심히 말씀을 듣게 하는 법이다. 이점에 대해서 아주 자랑하고 싶다.

5). 원고에 집착됨이 없이 회중을 바보고 하는 것도 좋다. 어떻게 내용을 다 머리 속에 넣을 수 있는지 정말 자랑하고 싶다. 물론 성령의 역사로 보지만, 아주 보기에 좋고 회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참고 하세요: 1). 말의 고저(高低)가 없고, 너무 말이 빠르다. 설득력이 있으려면 마치 물 흐르듯이 해야한다. 졸졸 흐르는 물이 있는가 하면, 물들이 모여 시내물이 되고, 그것이 모여 폭포가 되어 힘차게 내리 쏟는 듯한 웅장한 면도 있고, 큰 강물이 되어 유유히 구비구비 흘러 바다로 가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웅변도 그렇고 연설, 설교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설교는 "대화식"으로 해야 한다고 하지만, 강조점에 가서는 폭포처럼 내리 쏟는 듯한 절정(Climax)이 있어야 설득력과 감동을 줄수 있다. 이상근 목사님은 언제나 이 절정이 있어 우리들의 영혼과 가슴을 쥐어 짜는 듯한 호소와 감동(은혜)를 주었다. 그러나 이성희 목사의 설교는 마치 강의 하는 것 같다.(연동교회에서는 맞을지 모르나),그리고 말도 빠를 때가 있고, 느릴 때가 있으면 더욱 좋겠다.

2). 지성적 호소는 좋으나,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적은 느낌(feelings)의 연유는? 평론자가 아는대로 이상근 목사님은 평생을 병약하셔서 고초를 많이 격으셨다. 이성희 목사가 설교한대로 "약할 때가 곧 강함"이라고 했듯이, 이상근목사님은 병약한 그것이 인연되어 더 은혜스럽고, 더 감동적인 설교가 가능했다고 본다. 그렇다고 일부러 병약하고, 고통 속으로 들어가란 말은 아니다. 이성희 목사는 훌륭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과 기도 속에서 별스런 인생의 아픔을 모르고(어떤 면에서) 성장했고, 공부했고, 무난한 인생을 살아 왔다고 본다.

평론자는 이것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시인은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 많은 도시를 거닐어야 하고, 죽은 사람과 하루 밤을 지새우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평론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의 <우리들 슬프게 하는 것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안톤 슈낙의 글) 그래서 시는 아픔의, 고뇌의 결정체라고 한다.

시가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신적요소로는 성령의 역사가 먼저 있어야 하고, 인간적 요소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아픔을 체험적으로 터득한 사람만이 십자가의 진수를 알게 된다. 설교도 너무 쉽게 작성되는 것은 은혜가 될수 없다. 자기 삶 속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아픔이 지불 되고서 탄생되는 것이 설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이성희 목사>는 명심하고 참고했으면 한다.

3). 예화가 30분 설교에 평균 5개 정도나 된다.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요? 재미 위주 보다, 꼭 예화(세상이야기)가 필요할 때는 무방하나, 현대는 7: 3(성서말씀과 예화의 비율)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은혜스런 예화는 좋으나 그것도 많으면 본말이 전도되기 때문이다. 끝.

2007. 11. 12. 재등재




이상근 목사는 1920년 3월 5일 대구에서 출생, 대구 수창고등학교, 1944년 12월 평양신학교 졸업,1955년 5월 미국 뉴욕신학교 대학원(신학석사), 1959년 5월 미국 달라스 신학교 대학원에서 신학박사, 그 외 미국 프린스톤 대학교(1955년),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1966년), 영국 에딘바라대학(1967년)에서 수학. 1945년에 평양신학교 강사,1955~1957년 대구 고등성경학교장 역임. 1960~1964년 서울장로회 신학대학 강사, 영남신학대학교 교장, 이사장(1956, 1959~1976,1979~1990)을 역임했으며 1945년 4월11일 평양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45년~1946년 평양 능라도 교회를 시작으로 경북 칠곡 옥계교회 (1946~1948),대봉교회(1948~1967)에서 시무하다가 1957년 3월31일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하였다 1991년 2월 17일에 원로목사로 추대될때 까지 34년간 재임하였다. 1959년.1965년 경북노회장 역임.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59회때 총회장(1974년)역임.특히 1977년 미군철수반대 민간인 외교사절로 미국 교계를 통하여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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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5일 대구에서 출생

학력:1944년12월 평양신학교 졸업
1955년5월 미국 뉴욕신학교 대학원 졸업(신학석사 취득)
1959년5월 미국 달라스 신학교 대학원 졸업(신학박사 취득)
그외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1955년),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1966년),영국 에딘바라대학(1967년)에서 수학.

교력:평양신학교강사(1945년),대구고등성경학교장(1955~1957),
서울장로회 신학대학 강사(1960~1964).영남신학교 교장 및 이사장
(1956.1959~1976.1979~1990)

목회:1945년 4월 11일 평양에서 목사안수
평양능라도교회(1945~1946),경북칠곡옥계교회(1946~1948),
대봉교회(1948~1957),대구제일교회(1957년 3월31일~)

저서:신구약주해서 외 25권

Rev.Sang Kun Lee was born in Taegu in 1920.He graduated from the Pyongyang Theological seminary in 1944. He began his first pastoral service at Neung Ra Do church in Pyongyang in 1945. He came to 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Taegu in 1957. In 1959, Rev. Lee received a Th. D at Dallas Theological College. He was reappointed as the pastor of the church in 1961 and served until he was honored as a senior pastor in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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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9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총회장 재임시 1977년 미군철수 반대 민간인 외교 사절로 활약함.
신.구약 주해서(총27권)을 완간하였다.
장한동문상(장로회신학대학)과 파종자상(미국 뉴욕신학교)
대구시 자문위원(40년간)
국가 조찬기도회 설교(박정희,노태우전대통령)
케직대회 주강사(미국,대만,일본,호주,싱가폴,중국,보르네오,태국등)
영남신학교 교장(17년)영남신학대학 이사장(근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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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제일교회 부임후 사택에서 ,4남매와 이상근 목사 내외.
(좌로부터 경희, 성희, 문희, 신희)
Rev. Lee and his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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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7세에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하여 34년간 은혜롭고 심오한 말씀으로 수많은 양떼를 돌보다가 1991년 2월17일 정년으로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된 후 정들었던 강단앞에 선 이상근 원로목사와 설귀연 사모.
Rev. Sang Kun Lee with his wife on the day of his retirement after 34 years of his devotion for th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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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이상근 목사의 청년시절 (동산 성경학교 사택,현 우리교회자리)
Rev.Lee and his wife in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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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신학대학 하워드 총장으로부터 파종자 상을 받고
기뻐하는 이상근목사.
Rev.Lee receiving the award at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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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해서 집필중인 이상근 목사 (1960~1996)
Lev. Lee writing his commentaries of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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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4월24일 오후2시 새성전 입당예배에서
설교하는 이상근 원로목사.
Rev.Lee preaching for the first service at the new sanctuary
(April 4,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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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구약주석15권(1988~1996)
The commentarie of the Old Testament (1988~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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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신약주석 12권(1960~1975)
The commentaries of the New Testament (1960~1975)












116돌 대구 제일교회 "조용한 변화"
故이상근목사 추모행사·유지 받들기·아동센터 등 "옛 명성 되찾기"






올해 창립 116주년을 맞은 대구 제일교회(담임 고용수 목사)는 최근 뜻 깊은 행사를 가졌다. 대구 제일교회에서 34년간 담임목사로 봉직, 은퇴한 고(故) 정류(靜流) 이상근 목사의 10주기 추모식을 연 것. 수년간 내부 갈등에서 회복 중인 제일교회는 이상근 목사의 유지를 받들어 조용히 변화하고 있다.
▶대구 교계의 ‘큰 어른’, 故 이상근 목사

“이상근 목사님은 우리나라 개신교계의 ‘큰 어른’이셨어요.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후세에 많은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대구제일교회 고용수(67) 담임목사는 “소탈한 인품의 소유자였다”며 이 목사를 회상했다.

1999년 80세로 타계한 이상근 목사는 대구 출생으로 대구 교계의 정신적 지주였다.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대구대봉교회 담임목사, 영남신학교 교장, 대구제일교회 담임·원로목사를 지냈다. 194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미국 뉴욕 신학교, 프린스턴 신학교 등 유학을 통해 정통 신학자의 길을 걸었다.

특히 그가 1960년부터 27년에 걸쳐 펴낸 12권의 신약성서 주해와 15권의 구약성서 주해는 한국 신학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서 주해서가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대구제일교회에서 33년을 지낸 김일주 행정실장은 “목사님 집 치고 이 책이 없는 집이 없었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행렬에도 아랑곳없이 홀로 교회 벽돌을 쌓고 있었다는 이상근 목사의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이 목사는 1991년 제일교회 담임목사를 은퇴하면서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 은퇴 교역자들을 위한 대구 기독교 원로원(경산)을 설립하기도 했다. 생의 마지막에서도 자신의 안구를 시각 장애인을 위해 기증하는 사랑의 삶을 실천했다.

▶대구 제일교회, 이렇게 바뀌고 있다

영남 지역 모교회로 일컬어지던 대구제일교회는 최근 수년간 담임목사와 성도간 갈등으로 신도가 대거 빠져나가는 아픔을 겪었다. 장신대 총장을 지낸 고 목사는 "총회에서 소방수로 나를 보냈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2007년 고 목사 부임후 제일교회는 빠르게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교회 학교 학생을 포함한 신도 수도 2천500여명에 달해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

대구제일교회는 올해부터 교회학교 초등부 연합예배를 도입했다. 연합반에는 저학년, 고학년이 함께 모인다. 폭넓은 교제와 활동성이 연합반의 장점. 교회 학교 여름 수련회도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를 통합해 실시한다. 교회내 영어학교와 문화교실 프로그램도 운용하고 있다.

대구제일교회의 널찍한 교회 주차장에는 차가 없다. 대신 농구대, 어린이 점프대, 실내 탁구장 등 놀이기구가 곳곳에 설치돼 있다. 부모들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함께 온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다. 교회 담장을 허물어 평일에는 인근 동산병원과 신명고가 교회 주차장을 활용하고, 주말엔 교회가 병원, 학교 주차장을 이용하는 융통성도 발휘하고 있다. 고용수 담임목사는 "제일교회 100주년 기념관내 지역아동센터를 설치, 23명의 어린이를 돌보고 있다"며 "대구제일교회가 옛 명성을 되찾도록 힘쏟겠다"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