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이교부, 이리 주현교회 - 김현봉 수제자
[이단/사이비종교] 주현교회/삭발교 예수님 알고싶어요
2005/01/06 11:48
http://blog.naver.com/sayjesus/80009130046
1979년 4월 2일, 각 신문과 주간지에서는 이리에서 발생한 신흥종교의 해괴한 내막을 보도하
여 큰 화제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내용인즉 교주가 여신도와 함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알몸으로 서로 부둥켜 안고 빙글빙글 돌면서 “이것이 왈 천국 댄스라고 했다”는 흥미
진진한 내용과 함께 추종 신도들을 폭행하여 구속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의 보도였다.
일명 ‘삭발교’라는 그 해괴 망칙한 신흥종교였던 삭발교의 실체를 알아보자. 이곳의 교주 이
교부(李敎夫)는 1940년 7월 전북 김제군 공덕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전주고등성경학교 2학년
을 중퇴하고 전북 익산군 삼기면 기산리에 ‘기산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했다고 한다. 이교부
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회생활을 했는데 30리나 떨어져 있는 곳까지 가서 전도를 하여 “예수
에 미친 아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의 열성파 교인이었다.
68년 8월엔 서울의 김현봉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사경회를 가졌다. 김현봉 목사는 원래 고신측 목사였으나 떨어져 나와 독립교회로 있으면서 철저한 성경중심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교부 역시 김현봉 목사 계열의 교회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때 김현봉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김현봉 목사는 머리를 빡빡깍고 검정바지, 저고리를 입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금욕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이씨는 항상 삭발을 하고 승려복 같은 검은 옷이나 한복, 두루마리를 입고 검정고무신 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밖에서 보기에는 상당한 금욕주의자나 엄격한 율법주의자의 생
활을 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설교를 하고 있었으며 어디를 갈때에도 급행보다는 늘 완행열차를 타고 다녔고 부부와는 10년이 넘도록 성생활을 안하는 거룩한 사람으로 행세 하였다고 한다.(실제로는 사실과 다름) 그래서 그를 추종하는 신도들중에는 주현교회 근처로 이사하여 사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며 이씨를 차츰 신격화하는 신도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집회중에 기성교회의 부패와 잘못을 공격하고 비난하면서 물질에 얽매인 기성교회 목사들은 막 5장에 나오는 군대귀신이 들어간 돼지떼와 같다고 하면서 기성교회의 목사들을 인정치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현대식 교육을 거부하기도 했다. 선지자나 예수가 세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교육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1979년초에는 이씨 자신이 “심판주 만왕의 왕, 완전자 창조권이 있는 하나님이며 정죄권과 저주의 권세와 아울러 죄를 사해 주는 사죄권도 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
다”고 했다.
1979년 2월 탈퇴한 김 모 여인은 소위 ‘천국댄스’라는 나체춤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1978년 12월3일 주일부터 1979년 1월11일까지 이리 주현교회에서 일어난 일로서 나체사건
의 주인공은 김ㅇ순, 박ㅇ숙, 김ㅇ애 등이었다. 이씨는 정신이상자를 고친다고 입을 맞추고 힘
을 넣어 주는 것이 귀신을 내 쫓는 안수라고 했다. 또 소아마비 소년을 고친다고 안수기도를 했
으나 고쳐지지 않자 교인들은 이씨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파와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다는 파와 나누어 일대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그런중에도 남녀를 막론하고 이씨로부터
능력받기를 원하여 옷을 만지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봉천동 소재 ㅇㅇ소재 ㅇ교회 피아노 반주자인 신ㅇ양과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강단에 올라서서 여자가 먼저 옷을 하나씩 벗더니 완전 알몸이 되어 교주의 옷을 벗기려 하니 교주도 서슴치 않고 하나씩 벗어 완전 알몸이 되어 서로 끌어 안고 포옹을 하며 강단을 몇 바퀴 돌았다고 한다. 교주의 비행을 충고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간 8명의 목사를 이교주는 감금해 놓고 1시간동안 광신도 25
명이 집단폭행을 하여 8명 전원이 실신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교주 이교부
를 비롯하여 20여명이 구속된바 있다.
[출처] [이단/사이비종교] 주현교회/삭발교|작성자 예수뿐
단체명 주현교부 대표자 이교부(1940년·전북 김제 生)
설립자 전화번호 062-841-9625
사이트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주현동 174-4
조 직 교역자 및 신도 수: 150여 명
내 용 연혁과 변천
1) 창교자와 창교과정
창설자 이교부는 1940년 7월 18일 전북 김제군 공덕면 회룡리 695번지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후 15 ∼ 16세 때 전주고등성경학교 2년을 중퇴하고 전북 익산군 삼기면 기산리에서 임시 전도사로 시무했다.
편모 슬하에서 형과 누이와 생활하다 형은 6·25때 죽고 자신은 어렸을 때 넘어져서 입은 팔의 부상으로 군에 입대하지 못했다. 그의 신앙에 대한 열심은 정미소 헛간을 빌려 예배처를 만들었고 본 교회인 평화교회 목사가 예배를 맡아줄 정도였다. 그는 1968년 8월 20일 기산리로 이사하여 교회에 봉사하면서 1969년 8월 26일 이리시 주현동 174 - 4에 교파 소속없는 주현교회를 설립했다.
2) 변천과정
서울의 김현봉 목사를 초청해 사경회를 가진 후 이교부는 김현봉 목사의 영향을 받아 김현봉 목사 처럼 머리를 삭발하여 검정바지 저고리를 입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금욕, 극기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교부는 자신이 금지한 교회 모금을 위한 테이프 등의 판매행위를 한 목사를 대중앞에서 몽둥이로 폭행하였고 이 폭행사건으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룬 후 1981년 4월 8일 출소하였다. 출소 후 그는 그동안 기독교 성경과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는 나라를 이룩하려고 했으나 다시 또 기독교 이름으로 한다면 과거보다 더한 배척이 올 것이라며 주현교회를 해산했다. 그 후 이교부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 몇몇과 함께 부랑아, 걸인, 무연고자 등을 돌보며 구제사업에 힘쓰고 있다.
주요교리와 활동상황
1) 주요교리와 주장
1979년 까지 이교부는 자신이 심판주, 만왕의 왕, 완전자, 창조권이 있는 하나님이며 정죄권과 저주의 권세와 아울러 죄를 사해주는 사죄권도 갖고 있다고 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출소 후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달라졌다.
① 창조주와 조상들의 영령, 숭고한 사상과 이념의 얼을 이어간다.
② 인류를 보이는 하나님으로 받든다.
③ 자연만물, 먹고 마시는 곡식 한 알과 물 한 방울도 신성시한다.
④ 박애정신을 받들어 이웃과 더불어 산다.
⑤ 천상 천하 인류는 평등하고 공동체이다.
⑥ 창조주의 얼을 받들어, 사람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섬기며 자연 만물, 먹고 마시는 곡식 한알과 물 한 방울까지도 신성시하며 절약하고 박애정신을 받들어 인류를 가족삼아 더불어 살고 자기 맡은 일에 소신을 다하며 충성한다.
2) 활동상황
출소 후 주현교회라는 간판을 내리고 주현교부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건물내에 걸인, 부랑자, 연고자가 없는 불구자 및 노약자를 데려다 돌보는 등 구제활동을 하는 한편 이의 비용을 위해 노동일을 하기도 하였다. 1986년에는 공직자와 종교계의 참회와 혁신을 주장하는 ‘세계속의 한국의 운명’이라는 카세트테잎을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1997년 신나라 아가동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제까지 간판없이 활동하던 이교부는 건물에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주현교부(朱絃敎父)의 간판을 내걸었다.
이교부는 1997년 자신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로 주축이 되었던 아가동산 사건의 해결을 위해 외부에 얼굴을 잠시 내밀었으나 이내 자신의 거처에서 부랑아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살펴주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최근에는 종교적인 의식은 거의 치르지 않으나 일요일 전국에서 모여든 추종자들과 함께 간단한 예배는 드리고 있다.
기타사항
1979년 이교부는 피아노 반주자인 신 모양과 강단에 올라서서 완전 알몸이 되어 전체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포옹을 한 상태에서 강단 위에서 한바퀴 도는 이른 바 ‘나체댄스사건’이 벌어졌다. 다음 주일날 밤에는 심판을 한다는 미명하에 교인들을 무차별 구타하였고 이를 추궁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간 목사 김문철(가명)등 8명을 감금해 놓고 1시간동안 광신도 25명으로 하여금 교대로 집단 폭행을 가해 이 일로 구속돼 추종자 20여 명이 구속되고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98년부터 이교부는 추종자들과 함께 전북 부안에 2만여 평의 농토를 매입하여 농사를 짓는 등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 "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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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현봉 목사님 자신은 고도의 신앙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남 달리 장점으로 가졌던 경건과 그 경건을 위해 노력한 방법은 금욕 주의였고 그 금욕 주의가 조금 지나치게 진행하자 염세 주의나 고행 주의 비슷한 면이 있었습니다. 인간이었으므로 비록 그런 약점들이 내재 되어 있다 해도 그 분 자체 신앙은 워낙 높고 강했으며 그 신앙의 깊이가 특별하여 그 약점이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노선은 그 분을 이 노선과 통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한국 교회적으로는 차원이 달랐던 특별한 분으로 기억하고 그 분의 많은 장점을 늘 참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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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영희 목사님은 남들이 김 목사님에게서 은혜를 받고 따를 때에 그들처럼 김 목사님과 교류는 했으나 김 목사님께 있는 염세 주의나 고행 주의가 향후 위험하게 자랄 수 있는 면을 지적했고 그 지적 때문에 김 목사님과 내면적으로 해어지게 됩니다. 그 분을 이용하려는 분들도 많았고 그 분을 통해 교계에서 일확천금을 얻듯 하려는 분들이 있었으며 실제 그 분의 역량은 그럴 정도였으나 백 영희는 차원과 향방부터 이미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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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김 목사님이 돌아 가시자 아현 교회 계통은 급격하게 분열 되고 그 분의 직계 중에 한 사람인 이 교부 조사라는 분이 가장 강한 지도력으로 세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들 내부 문제가 얽히면서 동시에 세상 언론에 자극적으로 보도 될 해괴한 행동이 있었고 1979년 이 교부의 투옥과 함께 순식간에 그 조직은 무너집니다. 김 현봉 목사님 계열을 아는 사람들로서는 내부의 교권 투쟁과 신앙 성향의 분리 그리고 원래 김 목사님 계열에 잠재 된 단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므로 그렇게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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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곳에 이 교부 관련 자료를 몇 가지 올리는 것은
: 김 기순의 아가 동산이 이단으로 정죄 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소속인 이리의 이 교부의 이단 정죄도 그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하지만, 김 기순과 이 교부 때문에 김 현봉의 이름이 알게 모르게 이단 교주들의 출처로 뻗치고 심지어 김 현봉과는 서로 건전할 때에 가졌던 교류를 두고 이 노선까지 함께 묶고 비판하는 흐름이 있을 수 있어 그럴 경우를 생각해서 관련 자료를 모아 두었습니다. 공회 교회 중에 여수 신풍 교회의 경우는 그들의 배후와 내막을 아는 많은 사연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