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한국 장로교 약사 - 이 기선을 중심으로
한국의 진리 수호청교도 목사 이기선 목사
순교자 이기선 목사의 삶을 재조명한다 이기선 목사의 생애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감당했던 잊혀진 순교자 이기선 목사의 삶이 재조명된다. 그는 1878년 평안북도 박천 출신으로 포목상을 경영하다가 신학교에 입학,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1950년 신의주에서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 당했다. 오직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해 일제하에서 7년 간의 고통을 치르고, 공산치하에서 몸 바쳐 진리를 파수하다가 순교당한 이기선 목사.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간 그의 삶을 재조명하고자 얼마전 임석윤 목사(일본 동경훗사장로교회 원로목사)가 이기선 목사와 동역자 김의홍 목사의 생애(도서출판 마루뫼)라는 제목의 신간 서적을 출간했다. 이에 크리스천투데이는 한국교회사에서 진리파수를 위해 옥고를 치르고 이후 무너진 한국장로교회의 복구를 위해 헌신한 고인의 업적을 되새기고 본받아야 할 필요를 느껴 기록을 남긴 임석윤 목사를 만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구자로 한국 교회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故 이기선 목사에 대해 물어봤다.
이기선 목사에 대해 말해달라.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의 관계
경남 김해읍교회 담임목사로 있을 당시 건강 문제로 연희전문을 휴학하고 고향에 온 주기철 목사를 중매하고, 주례를 한 인연을 갖고 있으며,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던 신학적 기초를 당시 이기선 목사로 본다. 당시 이기선 목사로부터 성경을 배웠던 이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 동참하게 되는데, 주기철, 주남선, 최상림, 방계성, 이약신, 손양원, 정양순(손양원 목사의 사모) 등이 있다. 주기철 목사의 장남 주영진 전도사 역시 이기선 목사의 신앙관을 따르는 혁신 복구파 소속으로 목회를 하다 순교의 길을 걸었다.
◈산정현교회
평양 소재 산정현교회는 주기철 목사의 지도 하에 신사참배 거부로 교회가 폐쇄되었던 한국 교회사에 기념비적인 교회이다. 해방 이후 공산치하에서 교회내 민족주의 진영과 주기철 목사의 사모를 중심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인사들 간의 대립에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기선 목사의 신앙관을 따르는 혁신복구파를 선택하여 예배당을 포기함으로써 교회 분란을 잠재웠던 모범적인 교회로 이후 혁신복구파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중요인사로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되었던 대부분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방계성 목사, 채정민 목사, 심을철 목사, 오윤선 장로, 양재연 장로, 장기려 장로 등이 있다.
◈재건교회와의 관계
신사참배 목사들 순교자를 이단시
故 이기선 목사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던 박신근, 김린희, 최덕지 등이 출옥 직후 신사참배를 했던 장로교회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며 재건교회를 세움으로 이기선 목사의 관련설을 주장하는 이가 있으나 조선기독교 복구의 필연적 사실이라는 선언서를 통해 이기선 목사는 장로교회의 복구는 잘 믿겠다는 교만함에서 비롯한 재건교회나 믿는다고 말만 하는 기성교회의 방식으로는 될 수 없다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리고, 교회의 회개는 분열이 아니라 교회법이 정하는 절차와 방법을 존중하며 성경을 중심으로 화합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혁신복구파
이기선 목사가 교단으로부터 장로교복구운동과 관련하여 제명에 가까운 금단령을 받자 장로교회를 교회법에 따라 다시 세운다는 취지에 동참한 교회들을 일컫는 말로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모였으며, 장기려 장로 등이 중심이 되어 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6.25전쟁 직전까지 주일성수 문제와 공산당 계열의 기독교도연맹 가입문제로 공산정권에 맞서 싸우다 대부분 순교의 길을 걸었다.
◈잊혀진 순교자 이기선 목사
일제시대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극소수만이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신사참배를 지지했던 대다수의 인사들이 해방 후에도 교회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도리어 이기선 목사를 배척했던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 결과 일제와 공산주의자에 협력했던 인사들이 오히려 순교자로 대우를 받는 결과가 되었다.
이기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가지는 한국교회사적 의의에 대해 말해 달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양적 팽창을 이룬 한국 기독교가 신사참배 가결을 통해 영적으로 무너진 와중에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극소수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임을 역설하면서 한국 기독교의 정통성을 유지했다. 또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독립운동이 아닌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행위였음을 밝히고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화합과 단결을 호소하는 모범을 보였다. 정치운동이 아닌 정통 신학교리로 무장하고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 탄압에 맞서 주일성수와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순교했다. 그러므로 이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역사이다.
이번에 집필한 책의 특징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달라.
故 이기선 목사의 일대기만이 아니라 당시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된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되도록 충실한 사료를 바탕으로 설명하고자 힘썼다. 또한 해방 후 공산치하 이북에서 이뤄진 기독교 탄압과정에서 정치적 선택을 하는 교회 지도자들과 이에 반해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로 무너진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성경중심으로 복구하기 위해 싸우다 순교한 성도들의 이야기에 대해 본인이 직접 체험한 사실을 비롯해 충실한 사료를 바탕으로 재조명하고자 노력했다.
지금 남한 교회는 반 좌파 주체 주의 시험에서 대부분 맹종 중
▣ 저자 임석윤 목사 프로필
- 평북정주 출신(1933년생)으로 경희대 법대와 동 대학원 졸업(법학 석사), 고려신학대학원 졸업, 일본 고베개혁파신학교 졸업
- 서울 여의도 장로교회(고신)에서 17년간 담임목사로 시무후 1994년 일본 선교사로 파송되어 동경소재 훗사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13년간 시무(현 공로목사)
- 주요경력으로는 학교법인 고려학원 감사, 재일고신 선교부장, 한일개혁주의 교회문제연구회 총무, 재일한국기독교선교사연합회 회장 역임, 현 재일한국기독교선교사연합회 고문 크리스찬투데이(일본)
서진화 기자
◎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구자 이기선 목사와 동역자 김의홍 목사의 생애
일제시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해방직후 혼란기에 이북에서 공산주의에 맞서 장로교회의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싸우다 순교하신 이기선 목사님과 김의홍 목사님에 대한 신간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기선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스승으로서 주 목사님을 목회자의 길로 이끄셨을 뿐 아니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도록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실제로 김해읍교회에서 목회를 하실 때 청년 주기철을 만나 그를 중매하고, 결혼식 주례를 섰던 인연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기선 목사님은 한국교회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님들이 일제시대에서나 해방직후에서도 교회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던 이유가 있고, 38선으로 분단 된 이후 평안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신 이기선 목사님과 그 분의 신앙노선을 따른 많은 성도들이 대부분 공산치하에서 순교하였기에 이를 증언해 줄 절대다수가 부족했던 것 또한 이유가 됩니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이기선 목사님에 대해 잘못 알려졌던 내용, 즉 재건교회에 속했다던가 신사참배 반대운동 경력을 내세워 독선적인 신앙론을 가졌다는 등의 오해에 대해 충실한 사료를 바탕으로 진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48년 기성교회의 틀 안에서 장로교 복구운동을 하던 이기선 목사님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교권주의자들의 횡포로 금단령을 선고받고 독자적인 장로교 복구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소위 "혁신복구파"라 칭하는 장로교회 진리운동으로 재건교회와 기성교회의 잘못을 성경중심으로 극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성도들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이 노선을 따른 소위 "혁신복구파" 성도들이 6.25직전까지 기성교회의 질시와 공산주의자들의 탄압 속에서 주일성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야기는 한국기독교 역사에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100년, 한국 기독교 역사에는 두 번의 큰 시험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신사참배요, 두 번째는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 탄압이 그것입니다. 두 번의 시험이 올 때 이에 맞서 진리를 지키다 순교한 이기선 목사님과 성도들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귀한 선물이라 할 것입니다. 저자 임석윤목사
* 해설: 지금 남한의 대부분 목사들은 NCC, 한기총을 비롯하여 공산당을 도왔던 기장, CBS, 기독교방송, 신사참배했던 장신대 통합, 오순절 대형교회, 모두가 물질주의 대교회주의, 권력지향 주의, 신비주의, 기복주의, 세속주의, 신신학, 자유신학, 열린 예배, 혼합주의, 프리메이슨 예속(CCC, IVF, 네비게이토, 예수전도단, NGO, YMCA, YWCA) 등으로 타락한 상태이고 기독교인들이 유익을 위해 나쁜 권력과 결탁하고 있어 그들의 자식과 그들이 가르친 양무리들이 지금 사회적, 육신적, 영적으로 사망에 이르고 있다.
관련 말씀: 요한계시록 2장20-23
(계2:20-23)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 고신의 신학과 신앙 노선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52년에 설립된 고신교단은 1946년에 개교한 고려신학교가 모체가 되어 탄생하였다. 따라서 고신교단의 신학과 신앙 노선은 고려신학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고려신학교는 고신교단의 전폭적인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성도들의 기도와 관심 가운데 나아왔다.
1945년 일제의 탄압에서 해방된 한국의 교계는 신학과 신앙 모두 어지러운 판국에 있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하여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폐쇄된 후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추구한 교육이념은 칼빈주의 성경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이성(理性)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생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였다. 그래서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은 인간의 이성에 의거하여 성경을 비판하는 고등비평과 신(新)신학을 단호히 배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