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의역과 직역 - 성경 보존 역사
[성경으로 돌아가자―한국의 성경⑨] 번역이론 논쟁
[2008.09.03 22:10]
자유주의적 성경 해석 막으려 직역 선택
"성경은 왜 그리 딱딱할까. 요즘 말로 쓰인 쉬운 성경 어디 없나." 성도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졌을 법한 질문이자 바람이다. 성경이 딱딱한 문어체 표현과 한자어를 쓰게 된 이유는 선교사들이 채택한 번역 원칙과 관련이 깊다.
1893년부터 1911년까지 있었던 용어논쟁에 이어 1920년대 불거진 번역이론 논쟁은 우리말 성경의 번역 원칙을 규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만약 이때 게일(1863∼1937)이 우리말 성경 번역의 주도권을 잡았다면 어쩌면 한국 성도들은 "현대어성경"이나 "쉬운성경" "우리말성경"과 같은 쉬운 성경의 필요성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번역이론 논쟁의 시작=게일은 초기 우리말 성경 번역에 있어서 민중이 받아들이기 쉬운 조선어풍에 맞는 풀어쓰기 번역이론을 사용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즉 창조적 번역(자유역, paraphrase)을 주장한 것이다.
반면 언더우드나 어드맨, 베어드, 솔타우 등 보수신학을 추구하며 한국어 성경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선교사들은 원문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본래의 뜻에 충실하게 번역하는 축자적 번역(직역, literal)을 고수했다.
언더우드가 1916년 사망하자 성경개역자회는 게일이 주도하게 됐고 이때부터 논쟁이 시작됐다. "개역자회의 목적은 성경을 참된 한국어로 만드는 것으로 원문의 사상을 가감 없이 전달하되 그것을 한국인 독자들이 쑥쑥 읽어가면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말하고자 합니다."(게일의 영국성서공회 보고서, 1916)
그러나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총무 밀러와 다수의 선교사들은 게일의 문학적인 자유의역을 용납할 수 없었고 따라서 창조적 번역이냐 축자적 번역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게 됐다. 게일의 창조적 번역을 가장 앞장서 반대한 사람은 밀러였다. 밀러는 히브리어 성경의 병행구문을 생략한 번역이 전체 의미를 가감 없이 번역한다는 원칙에 어긋나며 그것을 생략하는 것이 번역이 아닌 본문비평 작업에 속한다고 봤다.
논쟁은 성서위원회 위원들이 참여하면서 확대됐다. 당시 다수를 차지하던 보수적 신학노선 선교사들은 세계 신학계에 등장한 문서설(Documentary Hypothesis)과 고등비평(Higher Criticism) 등 자유주의적 성경 해석에 대해 강한 반발을 보였기 때문에 축자영감설(Verbal Inspiration)에 바탕한 축자적 번역을 고집했다.
"유려한 한국어 번역을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현대 고등비평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매우 중요한 문제는 공동으로 사용할 성경은 비록 한국어가 때로 부드럽지 못할 위험이 있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히브리 본문의 축자역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솔타우의 편지, 1921)
◇자유주의 반대 명분 축자역 채택=창조적 번역을 지지한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계였고 축자적 번역을 주장한 사람들은 서북계가 많았다. 게일은 자신의 번역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자 1922년 성서위원회 정기회의에서 사표를 제출한다. 개역자회는 게일의 실력과 성서 번역의 열정을 고려해 사표를 곧바로 수리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두려 했다.
"만일 게일 박사가 해놓은 번역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거절한다면 분명 우리는 개역자회에서 그를 잃고 말 것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접근이 가능한 자입니다. 나는 그가 성서공회 노선대로 일한다면 개역 작업에 게일을 붙잡아두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밀러의 편지, 1922)
1922년 9월 열린 성서위원회는 게일에게 축자역 노선으로 돌아와 개역을 계속해 줄 것을 희망했으나 게일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개역자회를 사임했으며, 현재는 독립적으로 나와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현 개역위원들은 그들이 개역하는 본문보다 더 보수적이고 따라서 훨씬 정확한 번역을 밀고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번역을 완성하기 전 그 방침을 재고하고 수정할 것이 틀림없습니다."(게일의 보고서, 1922∼1923)
게일은 "독일인이 듣도록 하려면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말하라"는 루터의 말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는 이원모 이교승 이창직과 함께 1925년 "신역신구약전서"를 독자적으로 번역하는 기염을 토해낸다. 그의 번역성서가 나온 지 13년이 지나서야 개역자회가 겨우 신구약을 개역한 "셩경개역"(1938)을 내놓은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성서번역사에서 게일의 성경은 공인된 성서공회를 통해 출간된 것이 아니어서 결국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만약 게일이 자신의 뜻을 굽히고 개역자회에 동참했다면, 개역자회가 축자 번역의 원칙을 조금만 더 양보했다면 우리는 지금 좀 더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성경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