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김일성과 기독교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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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김일성의 은인들과 기독교, by 시대정신 알아볼까?
2006/03/01 19:11
http://blog.naver.com/nomadian4/1000218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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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오동진, 그리고 김형직의 흔치 않은 우정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전대의 작전 능력을 크게 높여 줄 214급 AIP 탑재 잠수함 1번함이 곧 진수되고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인 손원일 제독의 이름을 따라 손원일 함으로 명명될 예정이라 한다. 초대 총장으로 부끄럽게도 서울 주재 일본 헌병대 중좌 출신이며 자랑스런(?) 일본육사 26기 출신인 김석원을 둔 대한민국 육군에 비해, 대한민국 해군은 떳떳한 독립군이자 광복군 출신의 아버지를 가졌는데, 더구나 이 분의 부친이신 손정도 목사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내시고, 감리교 목사로 안수까지 받았지만 그의 투쟁방식은 무장 독립운동을 주창하였다. 그런데 내가 오늘 이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이 분과 북한 김일성의 부친인 김형직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김형직의 약력을 대충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1894 평남 대동~1926. 북한의 주석인 김일성의 아버지.
평양숭실학교를 마쳤고, 1917년 3월 23일 강동군에서 항일운동 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했으며, 활동과정에서 일제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1919년 3.1운동에 관련하여 옥고를 치른 이후에는 만주로 망명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외에도 김형직의 무수한 독립운동 경력을 쓰고 있으나 전부 신빙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위에 적힌 것은 사실로 판명되었으며,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숭실학교 동창인 손정도 목사, 같은 마을 출신이며 평양 대성학교 졸업생인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독립투사이자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동진과 같이 조선 국민회를 결성하여 항일 운동을 할 때, 손정도, 오동진, 김형직이 보기 드문 동지애와 우정으로 맺어진 형제 이상의 관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세 사람은 기독교 신앙과 독립운동을 매개로 맺어진 형제요 동지였다.
김형직이 마지막으로 옥고를 치른 후, 길림시에서 의원으로 생계를 이어 가던 중 14세의 소년 김일성을 두고 급사하자, 손정도 목사는 상해에 있었고, 오동진은 지체 없이 동지의 아들 김일성의 후견인으로 김일성 (본명은 김성주, 후에 김일성으로 개명)을 길림시의 명문 사립 육문학원에 입학시켜 학업을 계속하도록 후원한다. 그러나 불과 수년 후 오동진은 조직에 침투한 일제 밀정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공주 교도소에서 1944년까지 복역하다 옥사하고 만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은인 오동진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구구절절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오동진이 유고가 된 이후, 이승만의 똥고집과 아집으로 인해 상해 임정이 내분에 빠지고, 노병회 결성이 지지부진하자 실망한 손정도 목사가 길림으로 이주해 와, 옛 동지의 아들 16세 소년 김성주를 아들처럼 돌보아 주며, 특히 그가 일제의 만주 철도 공사장에서 중국인 노무자들의 저항운동 때문에 옥고를 치르게 되자, 헌신적으로 구명운동을 펴고 딸 손은실을 시켜 옥바라지를 하도록 한다.
김일성은 역시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에 대한 감사와 손목사님께 대한 존경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기도하실 조선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절절히 갈망하시고 신앙생활 속에서 조선 민중에 대한 사랑과 조선독립을 생활로서 실천하신 분이라" 고 표현 하며 최고의 찬사를 바치고 있다.
죽기 직전 김일성
이제 세 분 모두 하늘나라에 계신다. 손정도, 오동진, 그리고 김형직, 이 세 분은 김일성이 성장해나갈 때 일정 기간씩 그 양육을 책임지셨던 분들이다. 이 분들의 공통점은 기독교인들이라는 점과 함께 이승만, 안창호와 달리 무장 항일 운동을 주장하셨던 분들이라는 점이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김일성은 이 세분들의 정신에서 가장 큰 정신적 자양분을 받았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과연 이 분들은 자신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한민족에게 끼친 그 막대한 결과에 대해 무어라 말씀하실까?
1994 년 필자가 중국 체재 시 청도의 왕차오(王朝)호텔에서, 중국의 중앙 티브이(中央 電視坮)가 김일성이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예정해 놓고, 평양을 방문한 중국과 홍콩의 기자들과 가진 특별 인터뷰를 시청하였다. 중국어로 더빙하였지만 김일성의 육성을 동시에 내보내 당연히 한어보다 한국어가 익숙한 필자는 그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중국 정세에 예민한 부분은 살짝 피해 한어 더빙이 이루어 졌으나, 필자는 고스란히 김일성의 이야기를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정상회담에 앞서 자신의 생애를 솔직히 회고하며 많은 후회를 피력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 특히 김구 선생에 대해 죄송한 생각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나름대로 벅찬 감격을 느낄 수 있었다.
*1960 년대부터 있어 온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위협으로 인해 그때부터 핵개발에 전력을 기울여 왔다고 한다.
* 북한 정권이 공식적으로 미국을 극렬 비난해왔지만, 이면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 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그리고 그 이후의 민주화 조치들을 지켜보며, 남쪽에 대한 병합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북한과 같은 방식으로 남한의 민주화된 시민들을 통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이 인터뷰에서 그가 말하는 것을 지켜 본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적어도 머리에 뿔난 악귀는 아니었다. 그도 인간적인 회고를 하는 인간이구나!
나는 그가 노인이 되어 뒤늦게 철들었다고 생각하였다. 김성주로 불리던 시절의 그는 누가 보나 아름다운 조선 청년이었으리라....
그러나, 북한의 일인자로서의 김일성은 민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세분들의 가슴에도 대못을 박았으리라....
아마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부친을 비롯한 세 어른들에게 변명거리라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로부터 며칠 뒤 유난히 무더웠던 어느 날, 장기투숙 중이던 왕차오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있던 나는 김일성이 죽었음을 알리는 방송을 들었다. 갑갑한 생각이 들어 해변으로 향한 호텔 방 창문을 열었다. 무더운 바람이 해변으로부터 불어 왔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내 가슴이 답답해 질 줄은 예상하지 못하였었다. 그리고 그 이후 여전히 갑갑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김일성이 죽기 전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그 것이 내가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궁금증이다.
김정일은 자신의 부친에 대해 변명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유훈의 자세한 내용은 무엇일까?
후기
김일성의 이력에 대한 솔직한 사실 언급 자체가 우리의 인식체계를 뒤흔드는 것은 세뇌에 가까운 독재정권하의 정치 선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50% 이상의 책임은 그의 경력을 신화화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 북한 당국에 있고, 나머지 50%의 책임은 역사적 정통성 확보에 자신이 없는 역대 대한민국 독재 정권들에게도 있다.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기독교 가계에서 태어났으며, 그 그늘에서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그 외에 그에 대해 솔직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다. 그리고 솔직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해방 전 한국 기독교의 메카였다는 평양인근에서 그가 출생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그다지 특이 할 것도 없는 것이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 오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일제에 희생당한 자랑스런 순교자들을 교단에서 부당하게 축출해내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한 더러운 배교자들이 주축으로 되어 있는 현 기독교 단체들 때문이기도 하다.
적어도 김일성이 기독교에 대해 무조건 배타적인 인물은 아니었고, 그 교리와 성경의 가르침을 상당 부분 체득하고 이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는 그간 남한의 대다수의 목사들이 설교하던 내용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마도 김일성에게는 해방직후, 배교자들이 뻔뻔스럽게 오히려 큰소리 치고, 일제의 핍박을 받으며 신앙을 지키거나, 자랑스럽게 순교하신 분들을 배제하고 있던 기독교 교단 자체가 한 없이 역겹게 느껴졌고, 그것이 그가 남한의 목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 교단에 대한 핍박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가진 자들의 사교모임으로 기득권의 총본산이 되어 버린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한기총과 소위 뉴라이트들은 이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지금이라도 밝혀 보기 바란다.
수십년 전 배교자들이 순교자들을 교단에서 제명한 채, 해방을 맞은 것처럼, 오늘 날 십일조와 헌금 강요도 모자라 사립학교마저 자신들의 밥그릇으로 치부하는 당신들은 이미 예수님을 교회 밖으로 쫓아 낸 것이다.
당신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과거는 전부 청산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대한민국은 새로이 태어나야 한다. 그 것은 뼈를 깎는 자기부정을 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며, 그 것이 없다면 당신들이 비난해 마지 않는 북한 정권과 차별성을 확보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화된 대한민국만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주장하며 민족 화해와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당신들 스스로가 "흑묘백묘" 하며 색깔론의 허구성을 스스로 밝히고 있지 않은가? 경제적 상황은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것이니, 그것만 가지고는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며, 1970년대 말까지 북한의 경제 사정이 우리보다 나을 때도 있었다는 점을 보면 이는 자명한 일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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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펌) 김일성의 은인들과 기독교, by 시대정신|작성자 파리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