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일제의 독립군 고문 실상
채명신장군 회고록
1945년 8·15 광복 직후 우리 나이로 20세 때 나는 평안남도 진남포 교외 덕해국민학교(후에 인민학교로 개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평남 용강군 오신면 덕해국민학교인데 진남포 시내에서는 8㎞쯤 떨어진 곳이어서 흔히 진남포 교외로 알려져 있다. 평양에서는 40㎞ 정도 떨어진 곳이다.
내가 국민학교 교사가 된 것은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인 교사들이 모조리 본국으로 철수해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들이 학교마다 적게는 한두 명, 많게는 네댓 명씩 결원이 생기면서부터다. 부랴부랴 평남교육청이 교사를 채용했는데 나는 좋은 성적으로 합격해 첫 발령지를 덕해국민학교로 받았다. 덕해리는 고향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그 고을 덕해교회에서 권사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던 곳이다.
합격자에게는 사범학교 졸업자와 동등한 2급 교원자격증을 줬다. 성경공부하는 틈틈이 독학으로 실력을 쌓은 결과 무난히 합격한 것인데 그간의 독서량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항일 민족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아버지는 그동안 집에 동서양의 교양·철학·사상 서적들을 많이 비치해 두고 있었으며 지적 갈증이 많았던 나는 이 책들을 하나씩 독파해 나갔었다.
내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은 독립투사 자식에 대한 일제의 검속과 가장 노릇을 하면서 서대문 감옥에 수감 중인 아버지 옥바라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평양경찰서의 야마키 고등계 형사가 집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가족을 감시하는 사이 몰래 빠져 나와 아버지를 면회하러 가는 일은 발 빠른 내가 수행해야 할 몫이었다. 자식이라곤 외아들인 나뿐이어서 당연히 그 일을 해야 했다.
광복이 되자마자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공산정권을 세우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물정을 모른 채 우왕좌왕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찾았으니 들뜬 가운데 모든 것이 잘 될 것으로만 생각했다. 준비는 없어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부친은 광복의 감격과 함께 석방됐지만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석방 석달여 만인 12월 초 끝내 눈을 감으셨다. 그토록 갈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고 가시기는 했으나 흘린 피에 비해 아쉽게도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감옥 살던 아버지의 육신을 보고 나는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바싹 마른 몸을 살피다가 족쇄에 묶였던 한 쪽 발목이 온통 시커멓게 멍든 채 썩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대나무 침으로 손톱과 살 사이를 찌르는 고문을 당할 때 대개는 두세 번째 손가락에서 기절을 하고 마는데 아버지는 네 번째 손가락까지 찔러야 기절했다고 한다. 이런 고문 뒤끝이라 석방됐어도 몸이 온전할 리 없었다.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했다. 먹은 대로 토하거나 설사를 했다.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 일제는 수감 중인 독립투사들에게 밥에 유리 가루를 넣어 배식했다. 내놓고 죽일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실험 삼아 서서히 죽이는 것이다. 유리 가루를 먹으면 그것들이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위벽에 달라붙거나 위장 밑에 깔린다고 한다. 그래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먹어도 토하거나 설사를 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집안을 어둡게 내리 눌렀으나 그나마 교사로 발령받은 나로 인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이때 마을에 이상한 풍문이 돌았다. 마을로부터 멀지 않은 진남포 교외에 ‘소화전공주식회사’라는 큰 공장이 있었는데 소련군이 접수해 군 간부·당 간부를 양성하는 평양학원을 세운다는 것이다. 일본이 무기 등 군수품을 생산하기 위해 지은 공장으로 거의 완공단계에 있었는데 패망과 함께 그대로 두고 철수한 시설이었다. 평양학원 원장은 그 유명한 김책이었다.